+ 간단하다

 

검은 리본 속 사진

입 언저리 파르르 떨며

무언가 말을 할 듯 말듯 하다

 

땅을 파고

하관하고

마지막을 햇살이 덮어버린다

 

누군가 나직이 말한다

착한 일 많이 했으니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간단하다

일생이

너무나 간단하다

(임강빈·시인, 1931-)

 

 

+ 발자국

 

바닷가 모래밭에서

외줄기 발자국을 본다.

 

문득

무언가 하나

남기고 싶어진다.

 

바람이 지나고

물결이 스쳐

모든 흔적이 사라져도

 

자그만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박두순·시인, 1950-)

 

 

+ 인생

 

너무 크고 많은 것을

혼자 가지려고 하면

인생은 불행과 무자비한

칠십 년 전쟁입니다

이 세계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신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낮에는 해 뜨고

밤에는 별이 총총한

더없이 큰

이 우주를 그냥 보라고 내주었습니다

(김광섭·시인, 1905-1977)

 

 

+ 삶

 

등 뒤의 무한한 어둠의 시간

눈앞의 무한한 어둠의 시간

그 중간의 한 토막

이것이 나의 삶이다

불을 붙이자

무한한 어둠 속에

나의 삶으로 빛을 밝히자

(김달진·시인, 1907-1989)

 

 

+ 삶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은·시인, 1933-)

 

 

+ 명편

 

채석장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복효근·시인, 1962-)

 

 

+ 거짓말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가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친구를 얻으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거시기를 한 번 더 해보려고 정력식품을 찾는다

 

대나무를 느티나무를 시골집을 사랑한다는 내가

늘 생각하거나 하는 짓이 이렇다

사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내가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다

나를 얼른 패 죽여야 한다.

(공광규·시인, 1960-)

 

 

+ 가르침

 

무섭다 나뭇잎들이

저리 소리 없이 지고 있으니

나는 너무나

많은 말들을 주절거리는데

바다 속 같은

연꽃 같은

저 깊은 무언의 가르침

무욕의 눈빛

그게 온통 나를 찔러

파르르

작둣날 위 선 것 같다.

(김광렬·시인, 1954-)

 

 

+ 단추 하나

 

세 번째 단추가 결석을 했습니다.

마음먹고 산 옷이건만

단추가 떨어진 옷은

입을 수가 없습니다.

 

바느질을 합니다.

 

제자리를 찾은 작은 단추 하나가

그렇게 소중한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얼마나 좋은 옷감인지,

얼마나 멋진 디자인인가도 중요하지만

제자리를 지키는

작은 단추 하나가

옷을 옷답게 하고

옷의 값어치와 품위를 지켜주는 것임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나를 나답게 하고

나를 빛나게 하는

내 삶의 작은 단추 하나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조금엽·방송인 시인, 1960-)

 

 

+ 인생은

 

인생은 생명으로 시작하여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리움은 뜨거운 사랑이며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인 것을

 

하늘은 영원한 것이며

영원은 항상 고독한 것을

 

아, 그와도 같이

인생은 사랑으로 이어지는

 

황홀한 희열이며

아름다운 적막인 것을....

(조병화·시인, 1921-2003)

 

 

+ 쉽게 사는 법

 

모두 잊어버려

그까짓 거 다 버려

옷에 묻은 먼지까지 훌훌 다 털어버려

그리고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

별일이 있으면 또 어때

세월은 참 빠르거든

진리란 저 혼자서 어둠 속에서

무거운 침묵으로 숨어 있을 뿐이야

굵은 밧줄로 너무 비참하게 옥죄이지 마.

 

그래 다 버려

누구 하나 관심도 없어

어느 때 누가 살았느냐

누가 무슨 시를 쓰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느냐

네가 또 어떻게 살고 있느냐

아무도 관심이 없어

스치고 지나가면 세월은

늘 새로운 것들로 다시 치장을 한다.

 

정말 살기가 어렵거든

그까짓 거 다 버려

모든 것을 다 털어버려

(엄원용·시인, 충남 서산 출생)

 

 

 

 

 

+ 인생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 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이기철·시인, 1943-)

 

 

+ 파도를 보며

 

파도를 본다

도도한 목숨이 추는

어지러운 춤이여

 

울고 사랑하고 불타오르고 한탄하는

아아 인생은 위대한 예술

 

그 중에도 장엄한

敍事詩의 한 대목

 

바라건대 나는

그 어느 絶頂에서

까물치듯 죽어져라 죽어지기를

(유안진·시인, 1941-)

 

 

+ 사는 게 꼭 정기적금 같다

 

사는 게 꼭

정기적금 같다

원금 갚고 이자 물고

제 날짜 넘기면 연체료 물고

 

정기적금은 벅차면

해약도 하지만

우리 삶은 지치면

중도해지 할 수 있을까

 

살아온 시간 정산하고

살아갈 시간 반납하면

해약할 수 있을까

해약 환불금 같은 것도

받아낼 수 있을까

 

사는 건 꼭

평생 상환사채 대출 같은 것.

(김시탁·시인, 1963-)

 

 

+ 한세상 산다는 것

 

한세상 산다는 것도

물에 비친 뜬구름 같도다

 

가슴이 있는 자

부디 그 가슴에

빗장을 채우지 말라

 

살아있을 때는 모름지기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못 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

(이외수·소설가, 1946-)

 

 

+ 세상살이

 

어느 때 가장 가까운 것이

어느 때 가장 먼 것이 되고

어느 때 충만했던 것이

어느 때 빈 그릇이었다.

 

어느 때 가장 슬펐던 순간이

어느 때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오고

어느 때 미워하는 사람이

어느 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은

어느 때 무엇으로 내게 올까.

(김춘성·시인)

 

 

+ 인생은 그런 거더라

 

이 세상 살다 보면

어려운 일 참 많더라

하지만 알고 보면

어려운 것 아니더라

울고 왔던 두 주먹을

빈손으로 펴고 가는

가위 바위 보 게임이더라

 

인생은 어느 누가

대신할 수 없는 거더라

내가 홀로 가야할 길

인연의 강 흘러가는

알 수 없는 시간이더라

쉽지만 알 수 없는

인생은 그런 거더라

(김종구·시인, 1957-)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고등학교 시절 어떤 사진사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며

명함 사진 여덟 장을 나뭇잎 모양으로 빼주는데

절반 가격에 모시겠다고 했었지.

웬 잡상인이 아침부터

교실에서 시끄럽게 한다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는데

그때 사진사 말 듣고,

한 장 찍어둘 걸 그랬어.

병원 마당에 가을비 흩뿌리고,

은행잎 한 장 내 어깨에 떨어지니

나뭇잎 모양으로 박혀 있는

열일곱 살 내 얼굴도 그리워지나니…

(서홍관·의사 시인, 1958-)

 

 

+ 잡초(雜草)같이 살다 간다

 

한세상을 굴렀다 간다.

잘살았다 못살았다 말들을 마라!

내 인생 태어난 집 자리가 운명이더라!

개천은 좁아서 용이 못나고

메뚜기가 한철이라도 뛰어야 한자

되는 데로 살았다 말들을 마라!

이래봬도 성실하게 잘만 살았다.

아! 인생은 잡초처럼 연명하는 것

세월을 원망마라! 바보 같은 짓

 

한 인생을 걸쭉하게 잘살다 간다.

잘났었다. 못 났었다 떠들지 마라!

사자 밥에 집신 몇 짝 모두 같은데

죽어져서 호화 분묘 무슨 소용 있나!

내 마누라 내 자식들 호강 못시켜도

밥 한 숟갈 입성하나 거른 적 없다.

물려줄 재산 없어 형제우애 좋고

따질 조상 없어 체면 꾸길 일없다.

아! 인생은 구름 같이 흘러가는 것

세상을 질타마라! 허망한 짓

(우보 임인규·시인)

 

 

+ 7년 단위로 본 인생

 

어린애는 젖니를 기르다

7살이 되면 모든 치아를 가네.

14살이 되면 신은 성장의 표시를

그의 몸에 드러내게 하네.

셋째 7년 동안은 팔다리가 굵어지고 턱수염이 나고

피부에선 성년의 티가 나네.

넷째 7년 동안 사람은 힘이 절정에 달하고

자신의 탁월성을 한껏 드러낼 일을 찾네.

시간이 지나 다섯째 7년이 되면

사람은 결혼과 장차 대를 이을 자식을 생각하네.

여섯째가 되면 사람의 정신은 충분히 원숙하여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지 않네.

일곱 째 여덟 째 14년 동안 사람은

지혜와 말솜씨가 최고조에 이르네.

아홉째 동안도 아직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말과 생각은 훨씬 무디어지네.

죽음이 올 때 지나간 70년을 모두 헤아려보면

죽음은 그리 빨리 오는 것은 아니네.

(솔론·그리스 시인이며 정치가, 기원전 640-?)

 

 

+ 인생

 

인생은, 정말, 현자들 말처럼

어두운 꿈은 아니랍니다

때로 아침에 조금 내린 비가

화창한 날을 예고하거든요

어떤 때는 어두운 구름이 끼지만

다 금방 지나간답니다

 

소나기가 와서 장미가 핀다면

소나기 내리는 걸 왜 슬퍼하죠?

재빠르게, 그리고 즐겁게

인생의 밝은 시간은 가버리죠

고마운 맘으로 명랑하게

달아나는 그 시간을 즐기세요

 

가끔 죽음이 끼어들어

제일 좋은 이를 데려간다 한들 어때요?

슬픔이 승리하여

희망을 짓누르는 것 같으면 또 어때요?

 

그래도 희망은 쓰러져도 꺾이지 않고

다시 탄력 있게 일어서거든요

그 금빛 날개는 여전히 활기차

힘있게 우리를 잘 버텨주죠

 

씩씩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시련의 날을 견뎌내 줘요

영광스럽게, 그리고 늠름하게

용기는 절망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샬롯 브론테·영국 시인이며 소설가, 1816-1855)

 

 

+ 인생

 

한세월 굽이돌다 보면

눈물 흘릴 때도 있겠지

 

눈물이 너무 깊어

이 가슴 무너질 때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잊지 않으리

 

꽃잎에 맺힌 이슬에

햇빛 한 자락 내려앉으면

 

그 꽃잎의 눈물이

어느새 영롱한 보석이 되듯

 

나의 슬픈 눈물도

마냥 길지는 아니하여

 

행복한 웃음의

자양분이 되리라는 것을

(정연복·시인, 1957-)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시 모음  (0) 2018.05.11
장미시 모음  (0) 2018.05.05
모란꽃 시모음  (0) 2018.04.24
좋은 시 모음  (3) 2018.04.12
봄바람 시 모음  (0) 2018.04.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