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봄의 유혹      /신진식



내 어릴적에는 겨울이 좋았다

눈 밭을 뒹굴고

소나무 다듬어 철사줄 얽어맨

스케이트를 타고 깔깔대며 놀았다

이젠 싫다

마음도 시린데 너까지 추우니



30대 초반에는 여름이 좋았다

이글대는 태양이 좋았고

달 그늘 아래

밤 새는줄 모르고 한없이 나누며

부딪치는 우정이 좋았다

이젠 싫다

끈적거려 싫고

쭉쭉 빠진 여인네의

관능미를 보노라면

시샘이 나서 싫다



50대초반에는 가을이 좋았다

현란한 다풍이 좋았고

몽실몽실한 열매 들이 좋았다

이젠 싫다

떨어지는 낙엽을 붙잡을수 없으니

늦가을 앙상한 가지들은 더욱 싫다



희끗희끗한 반백이 되니 봄이 좋다

비집고 용트림하는 새싹이 좋고

딱딱한 껍질을 박차고 나오는

숨 막히게 다가오는

잎새의 향기 때문에



뛰어가 나누고 싶은

봄의 유혹



그래서 봄이 좋다





봄의 소리        /(宵火)고은영



흰 눈이 듬성듬성 얼어 있던

유년의 산자락에

삶을 위해 사랑을 위해

환희와 행복을 위해

고고하게 피어있던 노오란 수선화

그 짙은 향기로 여울지던 기억도

추억의 한 장으로 남은

빛바랜 조각이다



이 어둠의 꼬치에서

빛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면

겨울은 세월의 바깥으로 소멸하고

냉기를 앓던 내 가슴에도

부어오른 심장에도 설렘의 밀물로

야금야금 물오르는 소리 소리





봄 따라온 님     /김종덕



말없이 가을 등에 업혀

기약 없이 가신님



노란 손수건 보면 올 새라

산수유 언덕에 올라 봅니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들이

토라진 님의 얼굴과 닮아 있었는데

산수유 꽃술 속에 님 모습 아련합니다



말없이 떠남은

돌아온다는 뜻이었겠지요



산동에는

모두 님 잃은 님들이

님 찾으러 온 것 같습니다



모두

꽃잎에 입 맞추는 눈물 빛이

너무도 고와 보입니다



눈에도 세월이 흘러

님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님께서

내 곁에 와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가 있어 행복합니다



* 산동 :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산수유 마을.





봄이 오면        /김기원



십이 열차 과함 소리 시끄러운 부산쇠마당

해 뜨기 전에 자갈치 아지매는

게기 사라고 달 잡는 목소리 깨깨 지르고

꼬부내이 골목집을 이리 저리 너무시 본다



그마 늦잠이 깬다 이 이 그 년 이년아

쇠이기 아퍼 아침 나잘에 잠 좀 자뻐잘라 했는데

미천 년아 네년은 잠도 자뻐저 아니자나

새벽 나잘부터 죽는 지상을 하고 개부알 앓는 소리

내 좀 근디리지 마라

입이 꼴려 모독티리 잡아 먹고 싶다



부산 영도 갯가 메려치 뱃고동만 불면

가시나 년은 얼굴 판때기에 분칠 좀하고

궁대만 짤랑거리고

머슴아 새끼는 기가 빠져 말라져 지리 죽겠다

오새 봄날에 머슴아 놈 간 다 녹히고 빼인다



자갈치 아재매야 게기 판때기 몽땅 내다 버리라

누구 먹이 살릴라고 날도 안샌는데 패악을 치노

야, 이년아 가레이 꼬장주 벌릉거리면 호양년 되에

별놈이 인나 쫓방아 잘 징우면 붙어 사는 거라





봄날은 간다      /김행숙



오른손에 있는 것을 왼손에 옮길 수 있지

우리는 그렇게 흔들흔들 바구니를 손에 들고 산책을 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들로만 채우고 싶어

오늘은 4월의 금빛 햇살이 넘실거리네

달걀 껍질 같은 것

막 구운 빵 냄새 같은 것

실오라기가 남아 있는 단추 같은 것, 눈동자 같은 것,

그것은 누구의 가슴을 여미다가 터졌을까

누구의 가슴이든 실금 같은 진동이 있지

오늘 저녁에는 네 가슴에 머리를 얹어봐야지

신기해, 왼손에 있는 것을 오른손에 옮길 수 있다는 것

내 손에 있는 것을 네 손에 옮길 수 있다는 것

바구니는 넘치는데 우리는 점점 더 가벼워지네

바구니가 우리를 들고 둥둥 떠가는 것 같네





봄의 연가        /박선옥



햇살 가득 품고

연초록빛으로 담쟁이 꽃

하늘 끝까지 간다아닙니꺼



꽃바람에 화르르

떨고 있는 가냘픈 새순

길 가는 나그네 발길 잡으며



수줍은 새악시 마냥

낭군을 애타게 기다리며

아픈 사연 고운 사연



그리움으로 물들어

여울처럼 번지는 봄볕

지나치는 가슴마다

각시처럼 고운 미소

아름드리 피어났다 아입니꺼





봄날의 그리움      /세영 박광호



지난밤엔 비바람 몰아치더니

눈부신 한낮,

밉던 먹구름도

창공에 목화송이를 피우고

연초록 살아나는 머~언 산엔

봄꽃들로 얼룩이 더욱 지네...



목련꽃 벚꽃이 펼쳐놓은

꽃잎의 카펫위로

따스한 봄볕이 내려앉는 정원,

긴 삼동의 풍상에도 굴하지 않고

희망을 피어낸 꽃들과 새싹들



그러기에

품겨나는 향기도 짙은 봄날이

아련한 그리움 보듬는가?



오늘은 그 임이 더욱 그립다.





더디게 오는 봄      /박인걸



당신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지 않고

여러 번 망설이다.

아주 더디게 다가왔지.



어떤 때는 토라지고

차갑게 냉소 짓다

어느 날은 환한 미소로

내 마음을 흔들었지.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일부러 차갑게 대할 때

한 없이 야속했지만



천천히 마음 문을 열고

애태우며 다가온 당신이

결코 얄밉지 않은 건

너무나 아름다워서입니다.





그리운 봄     /정태중



누가 그러더라 봄엔 물푸레 가지 흔들거리면

떠난 기억들 다시 온다고



꽃이 피는 이유를 묻거든

어떤 나절의 고통을 나누려는 것이라는데

그러게 말이야

광대나물꽃에 날아든 벌이며 나비며

저들의 날갯짓 조곤히 보면

한평생 광대로 산 내 모습 같아야



솔개 한 마리 높이 날고

종달새 쪼로롱 청보리밭 기웃기웃

그러게 말이야

그리운 봄은 그리움에 갇혀

다시 오지 않아야



누가 그러더라 봄엔 물푸레 가지 흔들거리면

떠난 기억들 봄비로 돌아온다고.





봄이 오는 길    /임숙현

따사로운 햇살에
시련을 견디며
피워내는 꽃망울

고통스러웠기에
느낌으로 만나는
사랑하는 마음에

이슬처럼 맑은
사랑의 속삭임
그리움 품고

기쁨이고저
세월의 다리를 건너
한마음 닿으려 하니

마음에서 오는 생각
기쁨으로 이어져
사랑으로 아름다울 수 있기에

초록빛 싹 틔우는 가슴
마음 적셔오는 따뜻함에
조용히 미소 집니다





봄의 위치           /박유동



개울가 언덕 밑으로 걸어가니

어제같이 눈이 두텁게 덮이었었는데

오늘은 가뭇없이 흔적도 없네

눈석임물 기름진 풀밭에

언제 풀잎이 파랗게 올라왔을까

더러는 한 뼘이나 쑥쑥 자랗네



봄은 훈훈한 남풍에 밀려오고

먼 산비탈에 아지랑이 아물아물

봄 아가시 진달래꽃 들고 온다는데

어찌 눈석임물 금방 녹은 얼었던 땅에

봄의 새싹이 저렇게 두둑이 돋았느냐

봄의 싱그러운 향기가 물씬 풍기네



누가 봄은 아직 남도 끝에 머문 다더냐

겨우내 대지를 덮었던 눈 이불 재끼고

바로 땅 속에서 봄이 떠들고 나왔잖으냐

원래 봄도 눈 덮인 땅 속에 품고 있었나보네

바라보면 비바람 설한풍 모진 세월 속에서도

사랑하는 님은 언제자 내 가슴 속에 있었듯.....





봄처녀        /장진순



해산의 진통이

숲으로 번져가고

어둠을 사르는

취기 오른 진달래

창가 아가씨의 가슴에 불 지른다

-

어느새 그녀는

화사한 차림으로

꽃비 맞으며 공원을 맴돌고

따라오는 이도 없는데

자꾸만 뒤 돌아본다

-

도심에 불 켜지고

제과점, 커피 잔 마주앉아

음악에 젖어드는 아가씨

-

허전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핸드백을 침대에 던져놓고

옆에 쓰러져 눕는다.

초점 없이 한곳을 바라보다가

누가 부른 것처럼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려다본다.

-

TV를 켰다가

셀 폰을 들었다가

베개를 끌어안고

이유 없이 흐느끼다가

어느새 꿈속을 거니는 ...





봄빛 창가에서     /김인숙



따스한 봄빛 내린

창가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싹틔우고 꽃피운

고운 자리마다

어제 내린 비로

그리움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겨울부터

설레는 봄빛을

품으신 그대

내 가슴속 봄 길로

걸어오시는지



숨 쉴 때마다

그대의 향기 나는 온기가

쓸쓸한 심장 속에

붉은 꽃망울을

톡 톡 터트립니다





봄감기     /이외수

겨울에 얼어 죽은 가래나무 빈 가지에
겨울에 얼어 죽은 가래나무 새 한 마리
날아와 울 때까지
봄밤에도 몇 번이나 눈이 내리고
더러는 언 빨래들 살을 부비며
새도록 잠을 설치는 소리

황사바람이 불고 흐린 산들이 떠내려가고
다음 날 이마 가득 금줄무늬로 햇빛 어리어
문득 그리운 이름 하나 떠올리면
살아 죄없을 사람들은 이미 죽어서 풀잎이 되고
봄감기 어지러운 머리맡
어느 빈 터에선가
사람들 집짓는 소리
집짓는 소리





봄을 듣는다      /윤무중

지난 밤 만났던 연인이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매서운 적막을 날리더니
마음 활짝 열어 미소를 던진다

대지는 촉촉한 기운을 품고
온기가 나무에 스며들며
서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 마주하며 눈빛 건넨다

오늘도 산새 한 마리 봄 찾아
둥지 속에 햇살을 가두고
여기저기 움트는 초록빛으로
내 곁에 다소곳한 봄을 듣는다





추운 봄      /나호열  

소리없이 진군한 소문은
곳곳에 봄을 퍼뜨려놓고
철없는 아이들처럼
개나리로 피어 있다
소문을 믿고
내의를 벗은 우민들은
무더기로 모여 떨고
정부는 서둘러 독감주의보를 발표했다
수상한 공기를 조심하시오
군중들이 모이는 장소를 피하시오
덧난 상처들이 부스럼꽃으로
피어 있는 동안
사람들은 몸 속에 머리를 처박고
거북이처럼
터널을 지나갔다
추운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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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나호열


알몸으로 오는 이여

맨발로 달려오는 이여

굳게 닫힌 문고리를 가만 만져보고 돌아가는 이여

돌아가기 아쉬워

영영 돌아가지 않는 이여

발자국 소리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면

문득

뒤돌아 초록 웃음을 보여주는 이여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 나호열


사랑해

이 짧은 시를 쓰기 위해

너무 많은 말을 배웠다


♡사랑의 온도 / 나호열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뜨거워도

물 한 그릇 데울 수 없는

저 노을 한 점

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는

한 자락 바람

그러나 사랑은

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으로 만들고

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 올려

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

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

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

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대여

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사랑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 달려오고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서 멀어지는 것

온혈동물의 신비한 체온일 뿐이다


♡달팽이의 꿈 / 나호열

오늘도 느릿느릿 걸었다

느릿느릿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성급하게 인생을 내걸었던 사랑은

온몸을 부벼댈 수밖에 없었던

세월 앞에 무릎을 꺾었고

나에게는 어차피

도달해야 할 집이 없다

나는 요가수행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잠을 구겨 넣는다

언제나 노숙인 채로

나는 꿈꾼다

내 집이 이인용 슬리핑백이었으면 좋겠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 나호열

출렁거리는

억 만 톤의 그리움

푸른 하늘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혼자 차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머리에 이고

물길을 찾아갈 때

먹장구름은 후두둑

길을 지워버린다

어디에서 오시는가

저 푸른 저수지

한 장의 편지지에

물총새 날아가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오늘은 조각달이 물위에 떠서

노 저어 가보는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주소가 없다


♡흘러가는 것들을 위하여 / 나호열

용서해다오
흘러가는 강물에 함부로 발 담근 일
흘러가는 마음에 뿌리내리려 한 일
이슬 한 방울 두 손에 받쳐드니
어디론가 스며들어가는
아득한 바퀴 소리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위하여
은밀히 보석상자를 마련한 일

용서해다오
연기처럼 몸 부딪쳐
힘들게 우주 하나를 밀어올리는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망초들
꽃이 아니라고
함부로 꺾어 짓밟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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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맞이하는 새해에 관한 시모음<2> [새해 시]

 

신년시(新年詩) / 조병화

 

흰 구름 뜨고

바람 부는

맑은 겨울 찬 하늘

그 無限을 우러러보며

서 있는

大地의 나무들처럼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꿈으로 가득하여라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영원한 日月의 영원한

이 回轉 속에서

 

너와 나, 우리는

約束된 旅路를 동행하는

有限한 生命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으로 더욱더

가까이 이어져라

 

 

새해 아침 / 송수권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

새해 아침은

날밤 시집온 신부가 아침나절에는

저 혼자서도 말문이 터져 콧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새해 소망 / 박소향

새해가 되면

가슴 가득 소망을 품게 하소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땀 흘려 정진하게 하소서

결과에 상관 없이

내가 노력한만큼 감사하게 하시고

받은것 보다는 베푼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을 갖게 하소서

높은 곳 보다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하시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다스릴줄 아는 지혜를 갖게 하소서

절망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올지라도

원망하며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겸손한 가슴을 갖게 하시고

먼저 화해를 청하는 용서의 손도 갖게 하소서

사람이 사랑으로, 세상이 사랑으로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과 허물이 덮혀지는

그 사랑을 내가 먼저 실천하고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축복은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먼저 당도한다는

믿음으로 늘 준비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닭이 울어 해는 뜬다 / 안도현

 

당신의 어깨 너머 해가 뜬다

우리 맨 처음 입맞출 때의

그 가슴 두근거림으로, 그 떨림으로

당신의 어깨 너머

 

첫닭이 운다

해가 떠서 닭이 우는 것이 아니다

닭이 울어서 해는 뜨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처음 눈 뜬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울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울었기 때문에

세계가 눈을 뜬 것이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하고 나하고는

이 아침에 맨 먼저 일어나

더도 덜도 말고 냉수 한 사발 마시자

저 먼 동해 수평선이 아니라 일출봉이 아니라

냉수 사발 속에 뜨는 해를 보자

첫닭이 우는 소리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세상의 끝으로

울음소리 한번 내질러보자

 

 

새해 / 피천득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신년송(新年頌) / 이해인

사랑아

언제나 제일 먼저 나는 네가 보고 싶다.

늘 함께 있으며 처음인 듯 새롭게 네가 보고 싶다.

너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싶고

너와 함께 가장 정직한 시를 쓰고 싶고

너와 함께 가장 뜨거운 기도를 바치고 싶다.

내가 어둠이어도 빛으로 오는 사랑아 말은 필요없어

내 손목을 잡고 가는 눈부신 사랑아 겨울에도 돋아나는

네 가슴속 푸른 잔디 위에 노란 민들레 한 송이로 네가 앉아 웃고 있다.

세상에 너 없이는 희망도 없다.

새해도 없다.

내 영혼 나비처럼 네 안에서 접힐 때 나의 새해는 비로소

색동의 설빔을 차려 입는다.

묵은 날도 새 연두 저고리에 자줏빛 옷고름을 단다.

 

 

새해에는 / 윤보영

새해에는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 행복을 나누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내 주위에서 기쁜 소식을 더 많이 듣고

그 소식에, 내 기쁨이

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미소 짓는 모습을 꺼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기억 하나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꽃이 주는 향기보다, 꽃이 가진

생각을 먼저 읽을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도, 내 밖에도

1년 내내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들게

내 삶에 향기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새날 새아침 / 최균희

 

새해 새날이

눈부신 빛으로 찾아와

겨레의 염원으로

고이 키워온

아이의 작은 몸에

파고 든다.

밝은 해는

솟는다.

마음 공부하는

이른 새벽

문열면 하늘이 있고

하늘 위에 붉은 해는

오직 하나.

참과 생과 희망 뿐으로

충만한 아침

팽이로 지구를 돌리고

연으로 창공을 나른다.

우리들은

새해 새 아침을

가슴에 안고

평생을 내다보는

기원의 옷깃을

여민다.

그래 무엇이 되자.

무엇이 되지 않을지라도

한 마음 한 뜻이

지닌 의미를

새날 새 아침이

꼭 아니어도 되겠지만

어디서 오는 힘인가

온 몸을 뿌듯하게

한아름 가득 채워주는 힘

정녕 길을 열어주는 듯

계시가 오는 듯

가슴을 열어주는 햇살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고속도로를 놓고

하늘차를 띄우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

우리의 꿈을

온누리에 펼치자.

 

 

새해 바람 / 김필규

새해에도 바람이 분다

그 많은 쓰레기 하나도 걷어가지 못한 바람

 

새해에도 바람이 분다

서울에도 불고

부산에도 불고

전국 곳곳에 분다

아승기 전세상부터 살아온 묵은해인데

사람들은 공연히 새해라 하고

아승기 전세상부터 불던 바람인데

사람들은 새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새해도 묵은해이고

새바람도 묵은 바람일 뿐이어서

세월과 바람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

다만 오고 가는 것은 인간뿐이어서

사람들이 공연히

새해 묵은해를 따진다

 

 

새해 소망 / 오애숙

 

새해엔 바른생활의

교과서 되기 보다는

융통성 있는 삶으로

밝게 웃으며 살아가

 

근시안적 사고에서

망원렌즈적 사관의

생각으로 여유롭게

가슴 넓히어 가고파

 

더 늙기 전 맘도 비워

내가 먼저 다가 서서

봄햇살의 포근함으로

말 한마디 건네 주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랑의 양념 버무려

만끽하는 행복으로

감사꽃 피우고파라

 

 

새해 소망 / 주응규

오라오라 희망이여 오라

가라가라 절망이여 가라

대망에 가슴 벅찬 새해야

말갛게 솟구쳐 올라

세상의 그늘진 곳곳에

고루고루 축복을 내리어라

감당키 어려운 시련일랑은

한마음으로 나눠서 짊어지어

슬기롭게 극복하고

즐거움일랑 여럿이 더하여

함께 누리어라

서로서로 배려하고 위하며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저마다의 가슴에 흘러라

두루두루 무사태평을

빌고 비나니

행복한 웃음꽃이

온 누리에 만발하여라.

 

 

새해 인사 / 김현승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굴러라.

건너 뛰듯

건너 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굴러라 발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무지개 빛깔의 새해 엽서 / 이해인

 

빨강 ― 그 눈부신 열정의 빛깔로

새해에는

나의 가족, 친지, 이웃들을

더욱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느님과 자연과 주변의 사물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습니다

결점이 많아 마음에 안 드는 나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렵니다

 

주황 ― 그 타오르는 환희의 빛깔로

새해에는

내게 오는 시간들을 성실하게 관리하고

내가 맡은 일들에는

인내와 정성과 책임을 다해

알찬 열매 맺도록 힘쓰겠습니다

 

노랑 ― 그 부드러운 평화의 빛깔로

새해에는

누구에게나 밝고 따스한 말씨

친절하고 온유한 말씨를 씀으로써

듣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지혜로운 매일을 가꾸어가겠습니다

 

초록 ― 그 싱그러운 생명의 빛깔로

새해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힘들게 하더라도

절망의 늪으로 빠지지 않고

초록빛 물감을 풀어 희망을 짜는

희망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파랑 ― 그 열려 있는 바다빛으로

새해에는

더욱 푸른 꿈과 소망을 키우고

이상을 넓혀가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삶의 바다를 힘차게 항해하는

부지런한 순례자가 되겠습니다

 

남색 ― 그 마르지 않는 잉크빛으로

새해에는

가슴 깊이 묻어둔 사랑의 말을 꺼내

편지를 쓰고, 일기를 쓰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색의 뜰을 풍요롭게 가꾸는

창조적인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보라 ― 그 은은한 신비의 빛깔로

새해에는

잃어버렸던 기도의 말을 다시 찾아

고운 설빔으로 차려입고

하루의 일과를 깊이 반성할 줄 알며

감사로 마무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거듭 강요하기보다는

조용한 실천으로 먼저 깨어 있는

침묵의 사람이 되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무지개 빛깔로

새로운 결심을 꽃피우며

또 한 해의 길을

우리 함께 떠나기로 해요

 

 

새해엔 산 같은 마음으로(신년 1) / 이해인

 

언제 보아도 새롭게 살아 오는

고향 산의 얼굴을 대하듯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또 한 번의 새해

 

새해엔 우리 모두

산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하리

산처럼 깊고 어질게

서로를 품어 주고 용서하며

집집마다 거리마다

사랑과 평화의 나무들을 무성하게 키우는

또 하나의 산이 되어야 하리

 

분단의 비극으로

정든 산천, 가족과도 헤어져 사는

우리의 상처받은 그리움마저

산처럼 묵묵히 참고 견디어 내며

희망이란 큰 바위를 치솟게 해야 하리

 

어제의 한과 슬픔을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내며

우리도 산처럼 의연하게

우뚝 서 있어야 하리

 

우리네 가슴에 쾅쾅 못질을 하는

폭력, 전쟁, 살인, 미움, 원망, 불신이여 물러가라

삶의 흰 빛을 더럽히는

분노, 질투, 탐욕, 교만, 허영, 이기심이여 사라져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디선가 흰 새 한 마리 날아와

새해 인사를 건넬 것만 같은 아침

찬란한 태양빛에 마음을 적시며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하리

 

남을 나무라기 전에

자신의 잘못부터 살펴보고

이것 저것 불평하기 전에

고마운 것부터 헤아려 보고

사랑에 대해 쉽게 말하기보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날마다 새롭게 깨어 있어야 하리

그리하여 잃었던 신뢰를 되찾은 우리

삼백 예순 다섯 날 매일을

축제의 기쁨으로 꽃피워야 하리

 

색동의 설빔을 차려 입은 어린이처럼

티없이 순한 눈빛으로

이웃의 복을 빌어 주는 새해 아침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대하듯

언제 보아도 새롭고 정다운

고향 산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또 한 번의 새해

 

새해엔 우리 모두

산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하리

언제나 서로를 마주 보며

변함없이 사랑하고 인내하는

또 하나의 산이 되어야 하리 

 

 

새해 기도 / 도종환

새해 첫 아침 햇살은

창문을 열고 기지개를 켜는 아이의

밝은 얼굴 위에

제일 먼저 비치게 하소서.

숲의 나뭇가지 하나하나에

햇빛이 골고루 내려앉듯

이 땅의 모든 아이들 빛나는 눈동자 위에

맑게 출렁이는 가슴 위에

빠짐없이 내리게 하소서.

골짜기 깊은 곳에도

손잡을 곳 하나 없는 바위 벼랑에도

늪가의 젖은 풀 위에도

아침 햇살이 환하게 번져 가듯

그늘지고 가파르고 습한 곳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도 새날의 햇볕이

따뜻한 걸음으로 찾아가게 하소서.

산과 개울과 숲 어디에나 내리는 햇빛이지만

산은 산대로

개울과 나무는 개울과 나무대로

저마다 저를 위해 햇빛이 와 있다고 믿듯

아이들도 늘 저를 위해 준비된

사랑이 따스하게 떠오르고 있다고

믿게 하소서.

그 사랑과 따뜻함으로

아이들 몸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고

때가 되면 열매가 자라고

꽃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렇게 자란 튼튼한 뿌리로

무너지는 언덕을 지키고

그렇게 크는 싱그러운 힘으로

막힌 물줄기를 열어가게 하소서

 

 

새해엔 새 마음의 눈으로 / 이정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새해 새 아침에

우리는 그 길을 새로이 가리라.

세상에 뜻 아닌 것이 없고,

새롭게 보면

새 소식이 아닌 게 없으리라.

세상에 새 것만이 있는 게 아니라

새 눈으로 보면

낡은 것도 새 것이 되리라.

새해엔 새 눈으로

천사처럼 착하고 아름답게

새 마음의 눈으로 다시 보리라.

새 마음 새 뜻으로

너와 내가 소통하리니,

우린 서로에게 새 소식이 되리라.

새해에 새 길을 나서며

새롭고 뜻 있는 사람이 되리니,

새해에는 더욱 서로 사랑하리라.

 

 

연하카드 / 황인숙

 

알지 못할 내가

내 마음이 아니라 행동거지를

수전증 환자처럼 제어할 수 없이

그대 앞에서 구겨뜨리네

그것은, 나의 한 시절이 커튼을 내린 증표

 

시절은 한꺼번에 가버리지 않네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물, 한 사물

어떤 부분은 조금 일찍

어떤 부분은 조금 늦게

 

우리 삶의 수많은 커튼

사람들마다의 커튼

내 얼굴의 커튼들

 

오, 언제고 만나지는 사물과 사람과

오, 언제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는 중얼거리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신부님이나 택시 운전수에게 하듯

그대에게

 

축, 1월!

 

 

새해에는 이런 사람이 / 이해인

평범하지만

가슴엔 별을 지닌 따뜻함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신뢰와 용기로써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해 주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월의 보름달만큼만 환하고

둥근마음 나날이 새로 지어 먹으며

밝고 맑게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너무 튀지 않는 빛깔로

 

누구에게나 친구로 다가서는 이웃

그러면서도 말보다는

행동이 뜨거운 진실로 앞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오랜 기다림과 아픔의 열매인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화해와 용서를 먼저 실천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이어지는 고마움이 기도가 되고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새해엔 / 최계락

무거운 얼음장 밑을

그래도

냇물은

맑게 흐른다.

그렇다

찬바람을

가슴으로 받고 서서

오히려

소나무는

정정한 것을.

새해엔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어둡고 답답한

땅 속

깊은 곳에서도

지금쯤

새 봄의 기쁨을 위해

제 손으로 목숨을 가꾸고 있을

꽃씨.

그렇다

언젠가

이른 아침을

뜨락에 쏟아지던

눈부신

햇살처럼

나도

새해엔

그렇게 살아야지.

 

 

희망하는 기쁨 / 홍수희

침묵하는

겨울 산에

새 해가 떠오르는 건

차디찬

바다 위에

새 해가 떠오르는 건

하필이면

더 이상은 꽃이 피지 않을 때

흰 눈 나풀거리는 동토凍土에

이글이글

새 해가 떠오르는 건

가장 어두운 좌절 깊숙이

희망을 심으라는 것

지금 선 그 자리에서

숨어있는 평화를 찾으라는 것

희망하는 기쁨,

새해 첫날이 주는 선물입니다  

 

 

작은 지붕 위에 / 전봉건

 

작은 지붕 위에 내리는 것은 눈이고

작은 창틀 속에 내리는 것은 눈이고

작은 장독대에 내리는 것도 눈이고

눈 눈 눈 하얀 눈

눈은 작은 나뭇가지에도 내리고

눈은 작은 오솔길에도 내리고

눈은 작은 징검다리에도 내리고

새해 새날의 눈은

하늘 가득히 내리고

세상 가득히 내리고

나는 뭔가 할 말이 있을 것만 같고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을 것만 같고

한 사람 만날 사람이 있을 것만 같고

장갑을 벗고 꼭 꼭 마주 잡아야 하는

그 손이 있을 것만 같고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 이해인

 

첫눈, 첫사랑, 첫걸음

첫 약속, 첫 여행, 첫무대

처음의 것은

늘 신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순결한 설 레임의 기쁨이

숨어있습니다.

 

새해 첫날

첫 기도가 아름답듯이

우리의 모든 아침은

초인종을 누르며

새로이 찾아오는 고운 첫 손님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의

나팔꽃 같은 얼굴에도

사랑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현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기침소리에도

가족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하는

어머니의 겸허한 이마에도

아침은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새 아침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밤새 괴로움의 눈물 흘렸던

기다림의 그 시간들도

축복해 주십시오. 주님,

 

듣는 것은 씨 뿌리는 것

실천하는 것은 열매 맺는 것' 이라는

성 아오스딩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서

걷돌기만 했던 좋은 말들

이제는 삶 속에 뿌리내리고 열매맺는

은총의 한해가 되게 하십시오

 

사랑과 용서와 기도의 일을

조금씩 미루는 동안

세월은 저만치 비켜가고

어느새 죽음이 성큼 다가옴을

항시 기억하게 하십시오

 

게으름과 타성의 늪에 빠질 때마다

한없이 뜨겁고 순수했던

우리의 첫 열정을 새롭히며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는 일

정을 나누는 일에도

정성이 부족하여

외로움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

 

가까운 가족끼리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우리

잘못해서 부끄러운 일 많더라도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밝은 태양 속에 바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길 위의 푸른 신호등처럼

희망이 우리를 손짓하고

성당의 종소리처럼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새해아침

 

아침의 사람으로 먼길을 가야할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새해 새 아침 / 이해인

 

새해의 시작도

새 하루부터 시작됩니다

 

시작을 잘 해야만

빛나게 될 삶을 위해

겸손히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아침이여

 

어서

희망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사철 내내 변치 않는

소나무빛 옷을 입고

기다리면서 기다리면서

우리를 키워온 희망

 

힘들어도 웃으라고

잊을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희망은 자꾸만 우리를 재촉하네요

 

어서

기쁨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오늘은 배추밭에 앉아

차곡차곡 시간을 포개는 기쁨

흙냄새 가득한

싱싱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네요

 

땅에 충실해야 기쁨이 온다고

기쁨으로 만들 숨은 싹을 찾아서

잘 키워야만 좋은 열매 맺는다고

조용조용 일러주네요

 

어서

사랑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언제나

하얀 소금밭에 엎드려

가끔은 울면서

불을 쪼이는 사랑

 

사랑에 대해

말만 무성했던 날들이 부끄러워

울고 싶은 우리에게

소금들이 통통 튀며 말하네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팽개쳐진 상처들을

하얀 붕대로 싸매주라고

 

새롭게 주어진 시간

만나는 사람들을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대하면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

눈부신 소금꽃이 말을 하네요

 

시작을 잘 해야만

빛나게 될 삶을 위해

설레이는 첫 감사로 문을 여는 아침

천년의 기다림이 비로소 시작되는

하늘빛 은총의 아침

서로가 복을 빌어주는 동안에도

이미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새해 새 아침이여

 

 

새해엔 / 최계락

무거운 얼음장 밑을
그래도
냇물은
맑게 흐른다.

그렇다
찬바람을
가슴으로 받고 서서
오히려
소나무는
정정한 것을.

새해엔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어둡고 답답한
땅 속
깊은 곳에서도
지금쯤
새 봄의 기쁨을 위해
제 손으로 목숨을 가꾸고 있을
꽃씨.

그렇다
언젠가
이른 아침을
뜨락에 쏟아지던

눈부신
햇살처럼

나도
새해엔
그렇게 살아야지.  

 

 

새해 아침에 / 이해인

 

창문을 열고

밤새 내린 흰 눈을 바라볼 때의

그 순결한 설레임으로

사랑아,

새해 아침에도

나는 제일 먼저

네가 보고 싶다

늘 함께 있으면서도

새로이 샘솟는 그리움으로

네가 보고 싶다

새해에도 너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고

가장 정직한 시를 쓰고

가장 뜨거운 기도를 바치겠다

 

내가 어둠이어도

빛으로 오는 사랑아,

말은 필요 없어

내 손목을 잡고 가는 눈부신 사랑아,

겨울에도 돋아나는

내 가슴 속 푸른 잔디 위에

노란 민들레 한 송이로

네가 앉아 웃고 있다

 

날마다 나의 깊은 잠을

꿈으로 깨우는 아름다운 사랑아

세상에 너 없이는

희망도 없다

새해도 없다

 

내 영혼 나비처럼

네 안에서 접힐 때

나의 새해는 비로소

색동의 설빔을 차려입는다

내 묵은 날들의 슬픔도

새 연두 저고리에

자주빛 끝동을 단다 

 

 

새해 새아침은 / 이하

새해 새아침은

깊고 푸른 소금의 나라에서 온다.

 

천년 그리고 한 천년

바다 너머 깊은 바다 속에서

절여둔 아침 해는

한 해 하나씩 새해 새날에만 내민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갈매기보다 수선한 그물에 담고

바닷가에 온 도회 사람은

바다보다 네모난 액자에 건다.

 

거긴 소금처럼 하얀

순수가 있고

거긴 내내, 새날 새아침 해에게 받은

맑고도 환한 꿈이 출렁인다.

때로 삶이 생활보다 지칠 때

푸른 소금의 나라에서 보내 준

싱싱한 꿈이 말갛게 파도에 씻긴 채 반긴다.

 

새해 새아침은

맑고 푸른 숲의 나라에서 온다.

 

산 너머 너머 구름보다 높은 산 숲 속에서

천년 쯤 그리고 또 한 천년 동안은

이슬만 먹고 자란 아침 해는

한 해 하나씩 새해 새날에만 나온다.

 

들녘에 사는 사람들은

산까치보다 수선한 지게에 담고

새벽 산정에 오른 도회 사람은

산마루보다 첩첩한 사진첩에 넣어둔다.

 

거긴 숲을 닮은 순결이 있고

그래도 거긴, 늘

새날 새아침 해에게 빌어둔

퍼덕이는 소망이 일렁인다.

 

때로 어둠이 힘겨운 가로등 아래

피곤한 등을 기댈 때

푸른 숲의 나라에서 보내 준

퍼덕이는 소망 하나

몇 무리의 솔숲을 지나온 바람을 타고

낮아만 가는 어깨를 다독인다.

 

새해 새날 아침, 붉은 해는

사람마다 하나씩 푸르게 뜬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산동네 바다동네에서도

이 날만은 꼭 푸르게 떠오른다.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 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未知修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신년시 / 김영환

새해에는 흐르는 강 흐르게 하고요

우리들 고개 들어 먼 산 바라 봐야죠

햇살 따사로운 들녁

침묵의 걸음걸이로 다가가

떼굴떼굴 이슬처럼 풀잎 위에

누우면 어때요

새해에는 날리는 바람 날리게 두고요

우리들 야윈 손 꼭 잡으면 어때요

우리들 힘찬 발걸음 모으면 어때요

 

 

어머니가 계시기에(신년 2) / 이해인

 

새해 첫날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면

한 마리의 학이

소나무 위에 내려앉듯

우리 마음의 나뭇가지에도

희망이란 흰 새가 내려와

날개를 접습니다

 

새로운 한 해에도

새로운 마음으로

당신과 함께

먼 길을 가야겠지요?

 

어머니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신 당신과 함께

순명의 길을

침묵 속에 숨어 사신 당신과 함께

겸손의 길을

우리도 끝까지 가게 해 주십시오

숨차고 고달픈 삶의 여정에도

어머니가 계시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우리는 아직도 넘어지지 않고

길을 갑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어머니

마음에 가득 낀

욕심의 먼지부터 닦아내야

주님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겠지요?

 

죄없이 맑은 눈빛으로

세상과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어린이처럼 되어야만

하늘이 잘 보임을

새로이 깨우치는 새해 아침

 

당신의 사랑 안에

우리 모두 새로이 태어나게 하십시오

 

사랑 안에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새로워질 수 없음을

조용히 일러주시는 어머니

 

어머니가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희망이란 새를 날리며

또 한 해의 길을 갑니다 

 

 

새해 아침에 / 위영남

삼백예순다섯 개의

해를 숨겨 놓고

그 속에

우리들의 꿈도 묻어 놓고,

'새해엔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 보셔요.'

조용히 속삭여 주는

삼백예순다섯 개의

까만 꽃씨들.

새해 달력 앞에 서면

파도처럼 일렁이는 가슴은

희망이 꿈틀거리는

아침 바다.

우리들 마음 속 꽃밭에도

삼백예순다섯 개의

꽃씨를 심고

둥근 해가 떠오를 때마다

곱게 곱게 피어날

우리들의 새해 꿈.

 

 

해님도 껍질을 벗는다 / 이국재

해님도

날마다 껍질을 벗는다.

아침마다

검푸른 동해바다에

두둥실 두리둥실

떠오르는 해님은

어제의 해님이 아니다.

너른 바다에

반짝반짝 수없이 부서지는

고깃비늘 같은

눈부신 해님의 껍질들을 보라.

초록빛 잎사귀마다

반짝반짝 수없이 부서지는

은빛가루 같은

찬란한 해님의 껍질들을 보라.

새해 아침엔

새 해님이 솟아오른다.

새 기쁨, 새 희망을 안고

수천 수만 개의 해님들이

일제히 치솟아 오른다.

 

 

새해맞이 해님 / 김진향

섣달 그믐밤

까만 어둠 속에서

달그락 달그락

햇살을 짠다.

지난해 반성하며

미운 마음

한 줌 걷어내고

베풀어

즐겁던 마음

황금빛으로 짜 넣고

다음 해로 미룬 일

오색실로 무늬 새겨

붉고 둥근 수레에

실어 두었다가

새해 아침

환하게

내다 걸려고

깜깜한 그믐밤에

햇살을 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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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보내는 송년 시모음<5> [송년 시] [년말 시]

 

한해의 끝자락에서 / 박외도

 

제법 쌀쌀해진 겨울밤

마음 아프고 쓰린

사람들의 쏟아놓는

고달픈 이야기들로

밤새워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겨울 긴긴밤을 하얗게 새운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지난 일들은 가슴 깊이 묻고

새로운 아침의 창을 열면

목련 나뭇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 날아와

새로운 희망을 노래한다.

 

남은 시간 어떻게 마무리할까

생각에 잠기는 나에게

짧은 인생 촌음을 아껴

그들에게 나의 어깨를 내주어

기대게 하고 가슴을 열어

토닥거려 주라고 일깨워준다.

 

작은 새의 짹짹거리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한해의 마지막을

가벼운 마음으로

마무리해 간다.

 

 

한 해의 끝에 / 서현숙

 

황혼은

곱게 물들어

노을 만들고

 

저무는 하루

어둠이 사방에

내려앉길 시작하는데

 

총총한 걸음

달려온 많은 날

한 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는 때

 

무엇이 그토록

삶을 지치고

힘들게 하며

숨 가쁘게 살게 했는가

 

때로는

여유로운 마음

느릿한 걸음으로

아름다운 삶을

노래해야지.

 

 

한해를 보내는 기도 / 공재룡

 

삼일 남겨진

낡은 달력 앞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새해의 길목을 서성입니다.

 

뒤돌아 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그림자도 낮설고

내 발자국조차 없더군요.

 

작은 친절은

오래 기억하면서

남에게 준 상처는

쉽게 잊으며 살았습니다.

 

기도드립니다.

밝아 오는 갑오년에

한 마리 비둘기도

상하지 않도록 하옵소서.

 

 

송구영신 (送舊迎新) / 홍사윤

살아 있기에 주어진
일 년의 열두 고개를 넘어
노을이 지고 있는
고개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새해 일출을 바라보며
기원하던 삶을 위해 살아왔나!
한 해를 회상해 보지만
후회가 밀려오는 삶

고개를 무탈하게 넘어온
일 년에 감사하며
삶의 힘든 고갯마루에서
손을 내어준 당신을 기억합니다

저물어 가는 일 년
수평선 너머로 기울며
눈시울 붉어지는 종착의 시간
아쉬움에 떠나보내고

안갯속에 가려진
새해 넘어야 할 열두 고개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작은 그릇에 꿈을 담아 가렵니다.

 

 

한 해를 보내며 / 김순태

 

한해 갈무리하니

잊을 수 없는 대기만성

고운 꽃길로 걸었던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갑니다

 

봄이 오지 않을 것 처럼

삭풍이 불어오던 긴 겨울도

포근한 봄볕에

눈 녹듯 사그라지고

무지갯빛 인생을 펼쳐 주었습니다

 

짙푸른 하늘을 잿빛같이

검게 물들이며 쏟아지던 소낙비로

때론 심한 풍랑으로

밀려오는 해일에 부딪히듯

휘청거리며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때론 기다리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어질 때

벅차오르는 감정에

뜨겁게 심장을 달군 적도 있었습니다

 

간혹 지칠때도 있었는데

해소제처럼 술술 풀어지는

선물 같은 나날의

채움으로 행복했습니다

 

다가오는 경자년도

고이고이 포개놓은

연두색 새싹 위에 노란 민들레처럼

고운 꽃길이길 소망해봅니다.

 

 

한 해의 끝자락 / 이정순

 

세차게 달려온

바람이 아늑한 품으로 스미고

어느새 한해의 마지막 달력

한 장이 왜 쓸쓸해 보이는지

 

살을 에는 세찬 바람에

봄의 싱그러움을 기다려

이곳까지 왔는데 어느새 또 한 해

 

지난 한 해 정말

많은 일이 모두의 마음의

멍울이 되어 있었고 아팠는데

 

아픔 뒤에

비워진 마음 이제는 새해의 희망

기다리며 더 이상의 아픔은 없길

서로를 보듬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연말정산 / 목필균

 

얼마나 벌었는지 고정값에
대략 낸 세금에 플러스, 마이너스
한 해를 정산한다
보험, 개인연금, 카드사용내역
병원비, 교육비, 부양가족
매달 조금씩 내던 기부금까지
알뜰하게 챙겨도
세금이 넘친다
우리는
한 해를 어떻게 보냈을까
고정값 없는 사랑의 부피에서
주고받은 마음이 플러스였는지
받고주는 생각이 마이너스였는지
넘치는 세금처럼
미처 주지 못한 사랑이나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닌지
한 번에 치루지 말고
두고두고 갚아야할 빚처럼
마음에 꽃 가꾸듯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정산해야겠다

 


찔레꽃의 송년 / 이원문
 
어느 해부터 찔레꽃이
가는 해에 묻어 갔나
여름도 있었고
가을도 있었다
 
그 여름 가을이 있다면
찔레꽃은 그림 아닌
기억 한 곳에 남아
첫 꽃으로 그렇게
연줄에 매달린다
 
기억의 찔레꽃
처음의 찔레꽃
그곳에 하얗게
아련히 피어난다



노을의 송년 / 이원문
 
끝이라는 한 글자에 주눅드는 마음
이것이 끝이고 마지막인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 같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남는 것 같다
 
나만이 남아 있는 이 자리의 나
무엇을 보내고 떠났다 하겠나
거울 다시 문질러 나에게 묻는 마음
이 나의 모습이 그 대답인 것을

 

 

한해를 보내면서 / 하영순

무자년 첫날 양 팔에 작대기 하나씩을 짚고

남해에서 동해로 동해에서

동해 정동진으로

그네를 찾아 갔으나 무정한 그녀는

구름을 핑계 삼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헛다리짚고 돌아오는 길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 춘삼월

진눈개비 속에

황사바람 뚫고 나타난

눈 봄바람에 정분난 가시네가 있었다.

이름 하여 설중매

철부지 백목련 

겨우내 찬바람에 추워 떨다 임 만나기도 전에 떠나간 그네

그녀는 떠나가고

외롭고 쓸쓸한 마음 출렁이는 동해 바다를 끼고

하자 세월 안강읍을 지나 불국사를 경유하는 동안

삼사월 다 지나고 오뉴월 염천

모내기는 해야 하는데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찌는 듯한 삼복더위

가로수 잎은 목이 말라 비를 기다리다 못해

땅으로 내려 안고 말았다     

거리에 때 아닌 갈잎으로 머리에 붉은 띠 두르고

못살겠다. 데모대로 변신 삼보 일 배

발바닥에 물집이 터져 절룩이며 가는 길

칠팔월도 미끄러지듯 가버리고

불타는 가을 산

그 찬란함도 잠시잠깐 

팔공산 정상엔 손 꽁꽁 얼어 입시철 나무관세음보살

염불소리 허공에 퍼지는 가운데

오매불망 가슴 죄이던 부모마음

당 낙이 끝나버린 쓸쓸한 거리엔 흰 눈이 쌓인다.

캐럴송 찬란한 불빛도

모닥불 피워 일거리기다리던 인력시장 고단함도

해가 저문다.

언제나 내일에 속고 오늘에 사는 인생

새해를 기다리는 설렘이 온 누리에

신의 은총 충만하길 양초에 불 밝혀 두 손 모아본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한 해의 마지막 날 / 김영길

 

부푼 새 희망과 새 소망의 꿈을 품고 2015년 을미년을

출발했던 한 해가 마지막 날을 맞아 해가 서산에 저물어 간다.

 

계획했던 남은 일들이 겹겹이 쌓여 있지만 세월은 일 분 일 초도

분과 초를 어기기 아니하고 냉정한 결론을 내리듯 개의치 않고

자기 갈 길을 향해 달려간다.

 

가는 세월 따라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순응 순종하는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는 한 길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같은 주어진 환경의 여건 속에서 어떤 이는 보람찬 무한한

영광의 광명에 축복이 넘치는 기쁨도 있지만,

 

반대로 슬픔과 시련과 고통의 멍에 속에서 허덕이며 헤어나지 못 하니

한숨짓는 환경에서 자기 잘못은 망각한 채 죄 없는 하늘을 향해

원망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은 내 탓이요, 뒤를 돌아보며 새로운 새 날을 기약하며

다시 재기하는 용기와 지혜가 이때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한 해를 갈무리하며 / 홍대복

 

서리 내린 황혼 들녘에서

바람처럼 머물렀던 지나온 삶을

가만히 눈 감고 아슴아슴 더듬어봅니다

 

하얀 계절 내려앉는 거리의 캐럴과

뽀얀 입김 서린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주위의 불우한 이웃을 생각하게 합니다

 

돌아다 보면 우리는

주린 배 움켜쥐고 힘든 보릿고개 넘던

무명옷에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인생의 가파른 여정도 잘 견디어왔습니다

 

비록

어려운 경제와 어수선한 시국이지만

우리에게는 내일이라는 밝은 희망이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더욱 용기 잃지 말고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배려하는 마음가짐은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한 해 곱게 갈무리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저 동해의 붉은 태양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소외된 계층의 우리 이웃과

사랑하는 부모 형제

 

그리고

멀리 헤어져 있어 가슴으로만 그리던 벗님도 만나며

서로 서로에게 따뜻한 차 한 잔 나눌 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한 해가 또 가네 / 백원기

 

북풍한설 몰아치나 했더니

서산마루에 걸린 하현달처럼

저물어가고 있네

 

花無十日紅이라 하더니

治粧하던 아름다운 한 해도

고작 365일 버티다 넘어가고

 

가는지도 갔는지도 모르게

기도자의 마음으로 365일 썼지만

견디지 못하고 내년으로 넘겨주네

 

어린아이가 첫 세상을 보듯

새해를 마지 했었는데

시든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구나

 

해 돋는데서 해 지는데 까지 걸었으니

이젠 캄캄한 밤길에 쉬었다가

오는 해를 마중 나가야 하겠다

 

그동안 밀린 숙제들을 모았다가

새얼굴 앞에 내놓으려니 쑥스러운데

 

묵은해가 넘어가고 잠이 든 간이역에

아련한 기적소리 울려오면

기다리던 새해가 밝아오는 기척

 

따뜻한 차 한 잔에

또 한 해가 가는구려

 

 

한 해가 가는 길목에서 / 김영주

 

한 해를 보내며

남아있는 아쉬움을 돌아보니

지난날 소중했던 많은 시간이

자꾸 생각이 떠오르며 스쳐 갑니다

 

무엇보다 코로나 19로

힘든 날로 이어진 한 해로 여겨집니다

거리 두기와 마스크를 쓰고

마음은 가까이 가도록 노력은 하였지만

 

세월의 무상함에 어쩔 수 없이

만남마저 자유롭지 않으니

다수의 모습 사무치는 그리움을 남기고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마음 한편에 남겨지지만

힘든 날에서도 고운 정 주시던 분들에게

마음에 새기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쉬움 남아있는 12월 마무리 잘하시며

서로 좋은 인연으로

새 해에도 함께 이어졌으면 합니다

건강과 함께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송구영신 / 하영순

 

오는 님 말없이 안으며

가는 님 말없이 보내리라

기쁨도 슬픔도 이름 짖지 않으리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

 

하늘은 사시사철 푸르른데

빨간색만 변할 뿐이다

떠도는 구름도 스치는 바람도

 

어찌 제자리를 고집하겠는가

오늘 저 하늘이 어제의 하늘이 아니듯

내일 저 하늘도 오늘의 하늘이 아닌 것을

 

순리는 순리대로

강물이 어제 것이 아닐지언정

흐르는 물위에

한 척의 배를 띄우리라

 

 

한해의 끝에서 / 김민지

 

간혹 빈 가지 사이로

가늘게 새어 나온 햇살마저

따스함으로 다가오던 봄

 

부푼 꿈을 안고 막연한

두려움과 설레는 마음으로

한 해를 설계했었고

 

무더운 여름 눈 안으로 스미던

쓰라린 땀방울을 씻어내며

한껏 달아오른 열기도 견뎌 내었죠

 

나뭇가지가 휘도록 빽빽이 들어찬

실과를 수확할 때는 비로소

농부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를 머금었고

 

때마침 온 세상은 오색병풍으로 수 놓였었죠

 

어느새 찬 서리 내려앉은

논바닥에서부터 냉기가 스며들어

겨울 한복판에 와 있습니다

 

새벽이 왔음에도 어둠을 걷어내지 못하고

살갗을 애는 듯한 찬바람과

달력 마지막 장에 남은 하루에서

 

새로 받은 달력의 첫날에

첫발을 내디뎌야 하는 설렘이

한해의 끝에 와있음을 실감 나게 합니다

 

 

송년의 시 / 김현희

 

바람 따라 구름처럼

살다 가는 먼지 같은 인생을

조금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욕망에 눈이 먼다

 

짧은 소풍이란 것을 망각하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피 흘리고 상처 주며

몸이 부서지는 것도 모르고

고장 난 브레이크가 된다

 

높은 곳을 향해 몸부림치는

고단한 삶들이 한없이 가엾고

동공이 풀린 충혈 된 눈동자는

허공을 가르고 있다

 

왜 이리 슬퍼 보이는 걸까

영혼을 판 들짐승처럼

앞만 보고 달려드는 과오는 돌이 킬 수 없는

피 페한 얼룩만을 그려 놓을 뿐 이란 걸

알면서도 또 달린다.

 

어둠을 행해……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 신경림

 

어지러운 눈보라 속을 비틀대며 달려온 것 같다

긴긴 진창길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 것 같다

얼마나 답답한 한 해였던가

속 터지는, 가슴에서 불이 나는 한 해였던가

일년 내내 그치지 않는 배신의 소식

높은 데서 벌어지는 몰염치하고 뻔뻔스러운 발길질에

드러나는 그들 무능과 부패에

더러운 탐욕과 위선에

분노하고 탄식하고 규탄하기에도 지쳐

이제 그만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싶었으나

우리가 탄 이 거대한 열차가

그들의 난동에 달리기를 멈추면 어쩌나

철교가 무너지고 철길이 끊겨

어느 산허리를 돌다가 산산조각나면 어쩌나

불안하고 초조해서 너무도 초조해서

그런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고

남북 사이에 낀 짙은 먹구름에

멀리 밖에서는 쉴 새 없는 전쟁과 폭력의 울부짖음

창 너머 먼 하늘의 별을 보며

잠 못 이룬 밤이 또 얼마였던가

이제 지는 해를 향해 서서 가슴을 쓸어내릴 때다

그래도 우리는 무사했으니

혼돈 속에서도 많은 것을 이룩하고

많은 것을 쌓았으니

지는 해를 향해 서서 다시 한 번 생각할 때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 끌고 가는 것은

큰 몸짓과 잘난 큰 소리가 아니라는 걸

추운 골목의 쓰레기를 치우는 늙은 미화원의

상처투성이 손을 보아라

허름한 공장에서 녹슨 기계를 돌리는

어린 노동자의 투박한 손을 보아라

새벽 장거리에서 생선을 파는

머리 허연 할머니의 언 손을 보아라

비닐하우스 속에서 채소를 손질하는

중년 부부의 부르튼 손을 보아라

열사의 천막 속에서

병사의 다리에 붕대를 감는 하얀 손을 보아라

해가 지고 있다

내일의 더 밝은 햇살을 위하여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한해를 보내며 / 나상국

 

한해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또 한해를 갈무리 해야 하네

시작이 반이라던데 또 한 살을 먹겠네

 

가는 게 세월인데

그 누가 막겠는가

 

한 해를 보내면서

생각에 잠겨보네

 

살아온 인생이야기

살아나갈 힘 되네

 

 

망년6회(忘年會)가자 / 최홍윤

 

늙은 아이들아
우리 망년회 가자
잘난 권세도, 덧칠한 학문도 버리고
철학이 닿지 않은 곳으로 망년회나 가자

움직이는
세월의 느낌처럼
철 지난 역사를 뒤편으로 밀어내고
심심산골로 우리 망년회나 가자

그 산골짝엔
망령들기 직전의 주모(酒母)가
누룩 냄새 퀴퀴한 아랫목에서
술 단지 끌어안고 우리를 그리워 하리라

늙은 아이들아
우리도 망령들기 전에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망년회나 하자.

 

 

가는 해 오는 해 / 권미영

 

가는 년 오는 년

욕지기 가득한 말투엔

끊어 낼 수 없는

미련 남아 싫다

 

나는 너를

가는 해 오는 해

해처럼 따뜻한 눈길로

보내고 맞이하련다

 

누군가를 위해

따뜻하게 모으던 손,

고난에 처해

어둠 내린 마음,

환하게 불 밝히던 손

 

오직

그 손길만을 기억하며

그 체온만을

주머니에 넣어두련다

 

가는 해 오는 해

더 건네주지 못한 아쉬움으로,

잘 가라 흔들어 주고

반갑다 맞아주는

아름다운 작별과 만남이네

 

 

일 년의 마지막 날 / 김연식

 

한 계단씩 오르고 올라

또 한 번의 연극이 종료된다

 

12월의 눈보라 꽃처럼 아름답다

흰 눈이 머리에 쌓여도 이제는 털지 않는다

눈송이 하나 하루인 양 털기 싫다

 

어깨에 쌓이는 눈도 새롭고

온 산야에 쌓이며 내리는 송이 송이가

새롭고 신기하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손바닥에 내린 눈송이

내생에 열두 달 마지막 계단에서

이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새롭게 시작하는 개막 연극에서

한 계단 두 계단 버거워도 또다시

오르고 올라 12월의 눈을 볼 수 있을까

 

내 손을 잡고 마지막까지 동행할 사람은

누구일까

비틀거릴 때마다 따듯하게 꼭 일으켜줄

그 사람은 누구일까 꿈일까 바램일까

 

 

송구영신 / 손병흥

 

늘 바쁘게만 달려 나왔던 한해의 끝자락

묵은해를 떠나보내고 새해 맞이하는 시기

 

신년의 운수대통 기원해보는 음력 섣달그믐밤

옛것을 물린 채 새로운 것을 받는다는 새해맞이

 

어려운 일들로 점철된 서민들의 주름살 펴고서

다시금 희망찬 새해 맞이하기를 축원해보는 마음

 

수많은 정보로 상식 넘쳐나 불통 먹통 되는 세상

자고 일어나면 바뀔 정도의 정보화에 밀려난 낭만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며 소통하고픈 변화의 물결로

힘들게 스쳐간 나날 되새겨 오뚝이같이 일어날 의미

 

 

경자년을 보내며 / 남원자

 

경자년과 이별을 해야겠다

넘 힘들게 한 경자년 미련없이

올 한해는 코로나 19로 힘든 한해였다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거리두기로

사랑하는 사람들 만남도 하지 못 한채

이별을 해야겠다

아쉬운 경자년과 이별을 하려니

회한의 여운이 남는다

 

신축년에도 희망의 꿈을

반가운 소식만 들리는 한해

초등달아 활짝 웃어보자

 

 

아쉬운 庚子年 / 류동열

 

아이고

겨울이 자꾸 깊어가네요

12월이 아직 쬄 남았다고

맘 푹 놓고 세월이 가든 말든

여유가 넘치고 포근했는데

오도 가지도 못하고 오동나무에 덩그렁 걸린

하얀 연이 되어 가슴만 칩니다

 

달력에

庚子年이 한 홉 큼 딱 몇일 남았습니다

어제의 11월 달력을 뗄까 말까 하다가 그냥

그냥 두었는데 옆 짝꿍이 인정사정없이 떼고는

아이고, 한숨을 쉼니다

마무리 잘해야겠습니다

 

아쉬움도

슬픔도

미련도

많은 것이 섭섭하지만

庚子年 12월에 모두실었습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 / 곽종철

 

조용히 한 해를 뒤돌아봅니다.

때로는 성난 파도처럼 분노하고

때로는 아픔을 함께하기도 하며

가끔은 쇠귀에 경 읽는 짓도 하는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냈답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이라지만

많은 흔적 남겨둔 채 흘러갑니다.

묵은 것은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는

이 순간이 바로,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새해랍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칼바람에 떨지 않게 따뜻한 정을 나누고

삶에 지쳐 처진 어깨에 날개를 주소서.

갈등으로 찢어진 상처도 아물게 하는

우리 소원 다 이룰 새해를 맞이하소서.

 

우리 소원 들어주소서.

우리에게 지혜를 베푸소서.

더 밝은 새해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할 일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새해가 되소서.

 

 

한 해를 보내며 / 김금자

 

반갑지 않은 떨떠름한 겨울비가

매운바람의 동장군을 업고와

털썩 내려놓은 기해년 마지막 날

 

바람을 이겨낼 외투를 꺼내어

목에 걸린 가시 같던 말 못 할 사연을

조곤조곤 털어낸다

 

칼바람에 시달리는 헐벗은 고목

털목도리 걸어주면 춥지는 않을까

아팠던 가슴이 시려온다

 

돼지 꼬리에 불행 매달아 도살장으로

하얀 쥐에 행복 태워 실랑이하는 한

설레는 희망을 여미련다

 

다사다난했던 기해년

제야의 종소리가 가슴속에 우렁하면

세월을 가르는 붉은 해를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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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에 관한 시모음



단풍 3 /김경철



알람 소리에

덜 깬

눈으로 일어나

창문 밖을 바라보니



따사로운 햇살에

자랑하듯

단아한 모습을

선보이던

푸른 얼굴들



불어오는 삭풍에

심하게 멍들었나

여기저기서

붉은 피멍들 보이고



그 모습에 놀라

일부는

심한

똥내 풍기며

노랗게 변해간다



싸늘해진 가을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던

붉은 얼굴

노란 얼굴

갈색 얼굴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하얀 나비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바싹 말라가는구나





단풍연가 /유한나

살아 온 날보다
남아 있는 시간을
더 사랑해요

지나 온 나날
눈물겨워도
비장한 사랑으로
불타올라요

무성한 근심 위로
가을이앉아
다독여 주는 군요
적막한 외로움 곁에
찬바람이 불어와
어깨를 껴안는 군요

사랑하자구요
가을엔 물들자구요
노랗게 빨갛게 새빨갛게
빛고운 색깔로 짓이겨져
한 잎의 단풍이 되어요

벚나무 잎새로
은행나무 잎새로
갈참나무 잎새로
알록달록 물들어 떨어져서
정신없이 굴러가며
세상의모든 가을이 다할 때까지
사랑해요.





단풍을 보다가 /임문혁

설악산 한계령을 넘다가
입을 벌리고 단풍을 본다
바람은,
어떤 기막힌 영혼을 품었기에
푸른 산허리에 닿아
저렇게 흐드러지게 꿈이 풀리고
줄에 닿으면 소리가 되고
물에서는 은빛 춤이 되는가
나는 도대체
얼만큼 맑고 고운 영혼을 품어야
그대의 가슴을 만나
단풍처럼 피어날까
언제쯤이나 나의 아픔은
그대의 마음 줄을 울리는 소리가 되고
은빛 춤이 될까
저렇게 기막힌 영혼이 될 수 있을까





단풍 /천선자



고독마저 뚝뚝 부러트리는 상수리나무 밑동

베레모를 눌러 쓴 가을이 캠퍼스를 펼치고 있다.

찬바람이 불쑥 찾아와 서성거리는 언덕 위

대문이 없는 집들이 햇발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다.

경계를 따라 쌓아 놓은 크고 작은 돌들이

층을 이루며 작은 돌이 큰 돌에 안겨 있고

큰 돌이 작은 돌을 품고 있는 돌담에

듬성듬성하게 박힌 흰 돌의 말간 웃음 길로

메아리를 부르고 산새들을 부르고 청솔모를 부르고

꽃을 피운 여름 산이 실수로 쏟아버린 붉은 물감,

푸른 능선을 징그럽게 물들인다.





단풍 /김승동



오 실수로 쏟아진 물감

계곡을 접어 내는

오색의 데칼코마니





단풍이 드는 것은 /장진순



단풍이 드는 것은

바람 탓이거니 했지

바람이 돌변하여 포악해진 것이라고

그런데 그 바람이 쫓겨 가는 것을 보았어,

수풀을 헤치고 들길을 지나

남쪽으로 다라나 는 것을

-

결실기를 맞은 숲이

홍등 걸어놓고

감사제를 드리는 행사일까

헌데, 서릿발 같은 바람을 보았어,

바람은 다 한 통속이거니 했지

형체도 없는 것이

무슨 경계가 있겠나싶었어,

-

그런 게 아니었어,

북에서 몰아닥친 매서운 바람은

칼을 품었나봐!





낙엽 된 단풍 /이재환



곱고 예쁘게 물든 나뭇잎

꽃보다 아름답게 피우더니



바람 부니 힘없이 땅에 떨어져

여기저기 뒹굴고 다니네



이쁘고 잘 나갈 때 잘하지

낙엽 된 처량한 모습 애처롭구나





무릉계곡 단풍 /심지향



내가 언제

그대 흉을 보았다고

그토록 빨갛게

얼굴을 붉히는가.

내가 잠시라도

다른 것을 사랑했다고

그렇게 샛노란

질투를 내는가.

내가 깜박

그대를 잊은 적 있다고

서러운 갈잎을

마구 뿌리더니

이제 마음 다 해

그대를 사랑하는 걸 알았다고

곱디고운 치장으로

날 반기고 있는가





가을바람의 붉은 시, 단풍 /정해란



새벽 여명부터 노을빛까지

몇 번을 꿈꾸어야

이 빛깔로 흔들릴까



유록빛 봄부터 향 짙은 녹음까지

몇 번을 모아야만

이 향으로 반짝일까



온몸으로 울음 삼킨

꼭두서니 눈물 빛에 먼저 기대어 우는 가을바람

이별 예감에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며 단풍잎에 쓰는 시



떠나가는 작은 생명 붙잡아주려

햇볕이 쓴 시 마지막 연을 마무리 짓고 있는

가을바람의 붉은 시, 단풍





불타는 단풍 /김소엽

당신이 원하시면 여름날 자랑스러웠던 오만의
푸르른 색깔과 무성했던 허욕의 이파리들도
이제는 버리게 하소서

혈육이 가지를 떠나빈 몸으로
당신 발 아래 엎드려 허망의 추억까지도
당신께 드리오리니 당신의 피로 물들여 주소서

바람이 건듯 불면 당신의 음향으로
내 젖은 영혼이 떨게 하시고 노을이 찾아들면
육신은 더욱 고운 당신빛으로
황홀한 색채를 띠게 하소서

푸르른 나는 가 버리고 내 안에 당신이
뜨겁게 살아서
죽어도 영원히 살아있게 하시고
머언 훗날 어느 순결한 신부의
일기장 속에 연서로 남아 당신의 사랑으로
물드는 한 장 불타는 단풍이게 하소서.





단풍 /곽병술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어

고운 잎새마다 초록빛

소망을 담은 잎새들
아롱지며 단풍드는
지순한 사랑.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수줍어 떠는 가슴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타오르는 불씨여!





석남사 단풍 /최갑수

단풍만 보다 왔습니다
당신은 없고요, 나는
석남사 뒤뜰
바람에 쓸리는 단풍잎만 바라보다
하아, 저것들이 꼭 내 마음만 같아야
어찌할 줄 모르는 내 마음만 같아야
저물 무렵까지 나는 석남사 뒤뜰에 고인 늦가을처럼
아무 말도 못 한 채 얼굴만 붉히다
단풍만 사랑하다
돌아왔을 따름입니다

당신은 없고요





단풍2 /김영환

마지막 한시절 세상을 덥히고는
이름 없는 계곡에 몸을 누인다
서늘한 바람이 그들을 덮는 것은 참 어울리는 일이다





마지막 단풍 /정심 김덕성



가을이 깊어 가는 날

그대는 내 가슴에

불꽃같은 붉은 사랑을 심어 주었고



내 가슴에는

멍이 든 것처럼

불타는 것처럼 불이 붓고 있었지



햇살인들 내 마음을 알까마는

그대 정열을 보며

청풍에 깨끗이 내 영혼을 씻고

홀로 남은 사랑의 불꽃에

내 마음을 포개었지



그대가 떠난 오솔길

지금은 붉은 카펫으로 깔려 있어

그 길을 나는 걷고 있어

내 사랑이여





단풍나무 4 /정연복



아파트 현관문 바로 앞

단풍나무 한 그루



모레가 추석인데도

아직까지도 눈부신 초록빛



봄과 여름의 빛깔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영원한 청춘인 양

푸름을 뽐내고 있지만



두어 달 지나면

이윽고 빨강 단풍물이 들고



또 얼마쯤 뒤에는

쓸쓸히 낙엽 되어 지겠지.





단풍 2 /정승렬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발걸음이야 오죽하랴

마을을 감돌아
고개위로 사라지는 길

그 고개 끝에 잠시 멈춰 서서
석양처럼
모질었던 마음을 붉게 토해내고 나면

팔랑 팔랑
육신일랑 바람처럼 좀 가벼워질까.

고개 마루 빈 가지에 걸리는 그믐달처럼
가지 끝에 매달리는 쓰린 기억을
명주 색실로 풀어서 날리고 나면

둥 둥
육신일랑 구름처럼 흘러갈 수 있을까





단풍 /공석진



피멍이 들어

욱신거리도록

모진 그리움

방치되었다



아프다

하지 않았니

제발 나를

흔들지 말아줘



남루한 사랑

고독한 바람에

진저리치다

이내 죽었다





단 풍 /윤주영



하늘 틈새로 밀려온 바람에

나뭇잎은 서로 부비며

온갖 아름다운 음률로

사랑을 이야기 하다가



긴 긴 여름동안

사랑은 석류 알처럼 영글어

어쩔 줄 몰라 하던

불붙은 가슴을



끝내는

가슴을 풀어 헤치고

가을 산에 대굴 대굴 굴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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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수선화

초록빛 스커트에
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의
언니 같은 꽃

해가 뜨면
가슴에 종(鐘)을 달고
두 손 모으네

향기도 웃음도
헤프지 않아
다가서기 어려워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부르는 꽃

헤어지고 돌아서도
어느새
샘물 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적시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2.수선화, 그 환한 자리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고재종·시인, 1959-)


3. 수선화·1

자존심이란 그런 건가
소슬바람에도
서릿발같은 사랑
노란 향기로 피우기 위해
제 몸 녹여 피는
얼음 꽃
(김길자·시인, 1948-)


4. 수선화 앞에서

골반이 튼실해 씨방도 여물겠네

칼날 날개가 긴 척추 감싸고
오직 염원 하나
꽃네 마을 가는 길 위해
엄동을 깎아내고 있네

바람이 매울수록
탱글한 피관을 수직으로 타고
옹달샘 정갈한 물
시퍼렇게 퍼 올리고 있네

꽃네의 울, 여린 베일 속에
점화된 샛노란 눈빛이
운대감댁 별당아씨
청순한 부끄럼 닮았네

설한에 정제된 꽃내음이
살며시
내 하얗게 빈 마음에
정을 칠해 주고 있네.
(유소례·시인, 전북 남원 출생)


5. 수선화

눈부시지 않은 모습으로
뜰 앞 정원의 모퉁이에서
봄을 안내하는 등을

아프로디테
가녀린 몸매로
긴 겨울 어이 참아내었는지
무명의 어둠 끌어안고
삭이고 삭인 고통의 흔적
그 얼굴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구시렁거리지도 않은
또 다른 별의 모습으로
꽃등을 켰다
항시 화려함이 아름다움은 아니듯
은은히 존재를 밝히는
가녀린 모습 앞에
마음도
한 자락의 옷을 벗고
노오란 향기와 모습 앞에
얼룩진 내 삶을 헹군다
(박정순·시인, 부산 출생)


6. 수선화

이역 수 만리에서 씨앗으로 왔다는
그 수선화 새 싹이 돋았습니다
담으로 바람 가려 주고
남서쪽 활짝 열어 주어
따뜻한 하늘 손길 내리게 한
고요한 뜰에
수선화 새 싹이 돋았습니다

수선화 노오란 꽃이
청초한 그 꽃이 피었습니다
담으로 바람 가려 주고
남서쪽 활짝 열어 주어
따뜻한 하늘 손길 내리게 한
고요한 뜰에
수선화가 곱게 피었습니다
(임종호·시인, 1935-)


7. 수선화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살아갈수록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세상 싸움의 한가운데에서
나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속의 별들을 헤아려보고 싶다

당신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나도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의 기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권태원·시인, 1950-)


8. 수선화·13

얘, 너도 주번이지?
꽃이 다 시들었어.
꽃병을 바라보던
소녀와 나
마주보며 웃음을 깨문다.

담도 없는
시골 초등학교 언저리
산야엔 야생화가 굽이치고
물소리가 드높은 개울을
소녀가 건너뛴다.

여기 좀 봐.
물결처럼 남실대는 수선화에
소녀의 눈빛이 흔들린다.
내민 꽃병에 들어차는
노란 꽃잎이 눈부시다.
(손정모·시인, 1955-)


9. 수선화

강가에 피어난
노오란 꽃 한 송이
수줍은 듯 고개 내밀고

까아만 세라복에 흰 칼라
갈분 풀 먹여 다림질하고
단발머리 찰랑이며
하얀 얼굴 하얀 미소
꿈속인가 천상인가

어스름 달밤에
비단개구리 짝 부르는데
그리운 님 찾아
고갯길을 오릅니다

사랑하는 님 생각에
어둠도 산길도 무섭지 않더이다.
(이문조·시인)


10.수선화

눈이 아리도록 고와도
사랑해 줄 이 없으면 고독해
목을 길게 빼들고
오늘도 누구를 기다리는가.

그리움이 차오르면
얼굴은 점점 야위어 가고
소슬바람에도
힘없이 스러질 것만 같다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만 같은
돌담 아래 외로이 서 있는
수선화 닮은 여인아
(박인걸·목사 시인)


11. 수선화

슬픈 기억을 간직한
수선화

싸늘한 애수 떠도는
적막한 침실

구원의 요람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창백한 무명지를 장식한
진주 더욱 푸르고

영겁의 고독은 찢어진 가슴에
낙엽처럼 쌓이다
(함윤수·시인, 1916-1984)


12. 수선화·2

서울 우이동에서 마음씨 곱기로 소문난
이 생 진 선생님
식산봉 아래 부끄러이 자고있는 통나무집 한켠에
물맛 좋은 제주생수병에 수선화 꽂아놓아
서울 우이동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수선화는 슬피 울고있다
수선화는 말을 잃은 것 같다
수선화는 생기가 없다
수선화는 졸고있다

아마도
수선화는 선생님 마음이 너무 그리워
하루 이틀 온몸을 바르르 떨다
끝내 자결한 모양이다
(이승익·시인, 1951-)


13. 그대 외로운 수선화야

그대는 늘 아름답지만
고독에 갇힌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슬픈 운명

조금 외로우면 어떠리
산다는 것은
외로움으로 피어난 꽃 한 송이
네 모습인걸

이젠 벗어버리면 어떠리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눈이 오면 눈에 젖고
몸과 마음은 늘 젖어있지 않은가

오늘이 있기에 내일도 있는 거야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일 거야

이젠 허전한 영혼을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고
더 따뜻한 내일을 기약해 보렴

과거는 언제나 추억으로 남는 것
그대 아름답지만
외로운 수선화야
(탁정순·시인, 1966-)


14. 수선화

수선화!
사랑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고
또 지금까지 믿고 사실로 인식했던 것들이
이따금 사실이 아닌 거짓임을 알게 될 때도 있단다

참된 사랑은 거짓된 삶의 그늘에선 필 수가 없어
그러니 수선화야
늘 따사한 물가를 찾아
꽃 피기를 염원하지 말어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하여 괴로워하지도 말어

사랑이란 스스로를 하염없이 태우는
순교자의 발걸음과 같은 것이란다
우리 인생에서
주어서 기쁜 것이 무엇 있겠니?
두루미 목빛 같은 의연함을 지니고
외로이 연못가에 홀로 핀 수선화야!

수선화야 수선화야
사랑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나를 보게 되고
죽음도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고
내 가진 모든 것 사라진다해도
행복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게 된단다

몸과 마음이 너의 꽃잎처럼 맑고
순결해지고
우주의 신비가 늘 봄비에 가득 젖어
빛나고
그리고 마침내 하늘과 바다와 산과 호수가
가슴에 다가와
수선화야!
가난한 우리는
그 속에 꽃핀 너의 눈망울을 보게 된단다.
(유국진·시인, 경북 영덕 출생)


15. 수선화의 기도

주께서는 금잔을 주시어
청정한 마음과
담을 만큼의 복을 주셨나이다
봄의 형상을 입게 하시고
빛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시나이다
내 속에 선한 것들을 담게 하시어
고여져 썩지 않게 하시려고
기울여 흘려내게 하시오니
향은 흘러 시내를 이룹니다
햇살 아래 뿌리 내려
아삽의 노래를 부르게 하시고
무명 같이 그렁이는 눈망울들
봄을 담아 그 얼굴에 어룽지게 하시오니
주의 앞에서 순백하달 수만은 없는
숙여진 목덜미로
주의 은혜 찬양하게 하시나이다
(강은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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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시조 대표작 모음 /

               이병기(1891.3.5 ~ 1968.11.29)


     고향으로 돌아가자

방과 곶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쪼각만 남았으니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봅시다


            대성암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서리 빨간 딸기 파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 끝에 부딪치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깊은 바위굴에 솟아나는 맑은 샘을
위로 뚫린 구멍 내려오던 공양미를
이제도 의상을 더불어 신라시절 말한다

별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끝에 구름은 서들대고
거뭇한 먼산 머리에 비가 몰아 들온다.


                 별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아오더라

달은 넘어 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난초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微塵도 가까이 않고 雨露 받아 사느니라



                  비2

짐을 매어놓고 떠나시려 하는 이 날
어두운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 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계곡

맑은 시내 따러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별을 받어
가는 닢 은바늘처럼 어지러이 반작인다.

청기와 두어장을 법당에 이어 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어 아니오고
홈으로 나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헝기고 또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옥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러 일가바 물이 씻어 흐른다.

폭포소리 듣다 귀를 막어도 도다
돌을 베개 삼어 모래에 누어도 보고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본다.

바위 바위 우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 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어 오른다.

얼마나 험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길
물소리 끊어지고 흰 구름 일어나고
우러러 보이든 봉우리 발 아래로 놓인다.



                냉이꽃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때 밥을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 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두 송이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한 하소연

지루한 고통보다는 차라리 자살이 쾌하다
그 전쟁 끝에 강도는 자주나고
해마다 풍년은 들어도 주려 죽게 되었다


                갈보리

쓰일 듯 쓰일 듯하여 붓은 던질 수 없고
문장만으로 배는 채워지지 않는다.
원컨대 오는 해마다 풍년이나 드소서


              풀벌레

가까이 멀리에서 제서 쌍져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둑 끈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파랑새

파랑새 날아오면 그이도 온다더니
파랑새 날아가도 그이는 아니 온다
오늘도 아니 오시니 내일이나 올는가

기다려지는 마음 하루가 백년 같다
새로 이가 나고 흰 머리 다시 검어라
그이가 오신 뒤에야 나는 죽어 가리라



                 볕

보릿잎 포롯포롯 종달새 종알종알
나물 캐던 큰아기도 바구니 던져두고
따뜻한 언덕머리에 콧노래만 잦었다
볕이 솔솔 스며들어 옷이 도리어 주체스럽다
바람은 한결 가볍고 구름은 동실동실



                낙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박연폭포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 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매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그 흐르는 물이 긋지 아니하도다



                나오라

일즉 임을 여희고 이리저리 헤매이다
버리고 던진 목숨 이루 헬 수도 없다
웃음을 하기보다도 눈물 먼저 흐른다

다행히 아니 죽고 이 날을 다시 본다
낡은 터를 닦고 새 집을 이룩하자
손마다 연장을 들고 어서 바삐 나오라



                  처

귀히 자란 몸에 정주도 모르다가
이 집 들어오며 물 긷고 방아 찧고
잔 시늉 안한 일 없이 가는 뼈도 굵었다

맑은 나의 살림 다만 믿는 그의 한 몸
몹시 섬약하고 병도 또한 잦건마는
그래도 성한 양으로 참고 그저 바꿔라

나이 더하더라도 마음이야 다르던가
백년 동안이 만나던 그날 같고
마주 푼 귀영머리는 나보다도 검어라

이미 맺은 인연 그대로 잇고 이어
다시 태어나되 서로 바꾸어되어
이 생의 못다한 정을 저 생에서 받으리



              수선화

風紙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앞에 놓아두고
그 뒤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水仙花

투술한 전복껍질 바로 달아 등에 대고
따뜻한 볕을 지고 누워있는 蟹形水仙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燈에 비친 모양 더욱이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숙인 숭이숭이
하이얀 장지문 위에 그리나니 水墨畵를



                구름

새벽 동쪽 하늘 저녁은 서쪽 하늘
피어나는 구름과 그 빛과 그 모양을
꽃이란 꽃이라 한들 그와 같이 고우리

그 구름 나도 되어 허공에 뜨고싶다
바람을 타고 동으로 가다 서으로 가다
아무런 자취가 없이 스러져도 좋으리



          저무는 가을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살이고
밭머리에 해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오동꽃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개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아차산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 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매화2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다시 생각나외다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하외다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오고
여윈 귀뚜라미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야외다



               농촌화첩1

웅덩마다 물 괴이고 밤에는 개구리소리
둥산에 숲이 짙어 낮이면 꾀꼬리소리
그 바쁜 마을 집들은 더욱 적적하여라

앞뒤 넓은 들이 어느덧 검어졌다
모기와 벼룩 거머리 뜯기다가
겉절인 글무 김치에 보리밥이 살지운다

일심은 오려논에 기심이 길어있다
헌 삿갓 베 잠방이 호미 메고 삽 들고
내 일은 내가 서둘러 새벽부터 나간다

올마다 호박넌출 그 밑에 가지 고추
비는 오려하는 무더운 저녁날에
똥오줌 걸찍한 냄새 온 마을을 적신다

몇만년 걸고 걸은 기름진 메와 들을
갈고 고르고 심고 거두고 하여
일찍이 우리 조상도 이 흙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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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 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가을 / 김현승(1913-1975) 茶兄 .광주.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시선집> 관동출판사.1974

 

가을 / 릴케(1875-1926)

 

나뭇잎이 떨어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듯

저기 아득한 곳에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마다 무거운 대지다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내는 어느 한 분이 있다

 

가을 /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가을 / 문인수

 

여러 번 붉게 큰물 지고 나서

어느 날은 차디차게 발목에 감기는

가을

하늘에다가는 달게 감홍시 하나 남겨 놓듯이

누군가는 또 한나절 땅에다가는

그러나 그랬달 것도 없이

어느 날은 넌지시 징검다리 놓이는

 

가을 / 백남석 작사. 현제명 작곡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같구나

추운 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가을 / 송찬호

 

!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긋이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별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부치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가을양주동(1903-1977) 호는 无涯 개성출생. 와세대 영문과졸.

 

가 없는 빈들에 사람을 보내고

말없이 돌아서 한숨 지우는

젊으나 젊은 아낙네와 같이

가을은 애처러이 돌아옵니다

애타는 가슴을 풀 곳이 없어

옛뜰의 나무들 더위잡고서

차디찬 달 아래 목놓아 울 때에

나뭇잎은 누런 옷 입고 조상합니다

드높은 하늘에 구름은 개어

간 님의 해맑은 눈자위 같으나

수확이 끝난 거칠은 들에는

옛님의 자취 아득도 합니다

머나먼 생각에 꿈 못 이루는

밤은 깊어서 밤은 깊어서

창 밑에 귀뚜라미 섧이 웁니다

가을의 아낙네여, 외로운 이여 ...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1932

 

 

가을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가을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거

가을은 구름 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가을 / 조병화(1921- ) 경기도 안성.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 뜻대로 가을은 이루어져갑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가을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실로 많은 것들이 끝을 지어갑니다

대지에선 동식물들이 그 번식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그 열매들이 남아갑니다

하늘에선 태양과 구름이 그 가뭄과 홍수를 거둬 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다시, 빈 천지가 마련되어 갑니다

사람에선 사랑과 미움이 그 스스로의 맺음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고독한 혼자들이 남아갑니다

그 열매들을 당신 뜻대로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가득찬 빈 천지에 새 봄을 마련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고독한 혼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맑게 닦아내 주십시오

흐린 점 하나 없이 맑게 닦아 내 주십시오

당신의 입김으로

티 하나 없이 맑게 닦아 내 주십시오

도시에선 되도록이면 담가로

돌아다니겠습니다

전원에선 물가로 둑으로 산록山麓으로

되도록이면 잡목림, 잡초 속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밤에는 별에서 쉬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새로운 별을 찾아

좀 떨어진 곳에서 쉬겠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든 거 다, 당신 뜻대로 살펴 제자리 가려두고

지닌 거 하나 없이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수고는

봄으로 해 주십시오

눈을 다시 돌려 드릴 때

수고의 말씀

봄에 받겠습니다

<내일 어느 자리에서> 춘조사. 1965

 

가을 / 토마스 흄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ㅡ

밖으로 나왔더니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은 건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가장자리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Thomas Hulme(1883-1917) 영국

 

가을걷이     /  문인수

 

달구지

타고 갈 때

나락단 거두러 갈 때

막바리 그득 싣고 돌아올 때

첨벙첨벙 물로 건너는

건너다가 슬며시 물 마시는

기다렸다가 또 한 칸

한 칸

징검다리 건너는

물잠자리

뒤에 뒤에

아버지

 

가을날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여기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때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누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여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가을날  /  릴케(1875-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날   / 서거정(1420-1488)

 

띳집은 대숲 길로 이어져 있고

가을 햇살 맑고 곱게 빛나네

열매가 익어서 가지는 늘어지고

마지막 남은 덩굴에는 오이도 드무네

여전히 벌은 날개짓 그치지 않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졸고 있네

참으로 몸과 마음 고요하구나

물러나 살자던 꿈 이루어졌네

 

가을날   /  손동연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ㅡ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주고 있었다

 

가을 넥타이     /  김현승

 

볕은

耳順하고

이삭들

바람이 익는다

아침 저녁

살갗에 묻는

요즈막의 향깃한 차거움 ...

四十은 아직도 溫血動物인데

오늘은

먼 하늘빛

넥타이 매어 볼까

 

 

가을 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가을 달 /   장옥관(1955 - ) 구미

 

납작 마당에 엎디어 불볕을 견딘 채송화

꽃따지 키 낮은 꽃들

떠밀리고 떠밀려 어스름 속 수제비국을

받아들면 거기,

국물 속에 떠오르는 또 하나 감자알

감자는 자주 목이 메이지. 단칸 셋방 옹기종기 모여앉은 식구들

누군가의 발길질에 끓던 국솥이 뒤집어지고, 생각의 어둠이

대문 안으로 밀려들고, 아이들은 소리치며 골목으로 내달아친다

국은 기름때의 세월은 진 냄비처럼 마당에 굴러 떨어져 이윽고 여름이 지나는 것이다

늙은 어머니는 화단의 봉숭아를 뜯어 달아나려는 열 손가락을

칭칭 붙들어매고, 식은 국물 속 죽은 귀뚜라미를 남몰래 건져 내고,

마루까지 몰려온 어둠을 천천히 쓸어 내린다

.....

아이들이 벗은 무르팍

딱딱한 피딱지를 떼어내면 묵은 상처 속

봉숭아 손톱같은 달은 다시 차오르고

 

가을 맑은 날  /   나태주

 

햇빛 맑고 바람 고와서

마음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벼 벤 그루터기 새로 돋아나는

움벼를 보며

들머리밭 김장배추 청무 이파리

길을 따라서

가다가 가다가

단풍의 골짜기

겨우겨우 찾아낸

감나무골

사람들 버리고 떠난 집

담장 너머 꽃을 피운 달리아

더러는 맨드라미

마음아, 너무 오래 떠돌지 말고

날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려문

 

가을밤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 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가을밤  /  이 기철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 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만지며

내가 까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 땐 머리 위에 일찍 뜬 별이 돋고 먼 산 오리나무 숲 속에선

비둘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실어 나르느라 발톱이 찢겨진 소, 거친 풀, 센 여물에도

좋아라 다가서던

어둠 속에서 툭툭 땅을 차고 일어서서 센 혓바닥으로

송아지를 핥을 때마다 혀의 힘에 못 이겨 비틀거리던

송아지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일하는 소를, 일하다가 발톱이 찢겨진 소를 사랑한다

이미 단풍나무 끝에 가볍고 파아란 집을 매달고 겨울잠에 들어간

가을 벌레를 나는 사랑한다

그 집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따뜻한가

수염을 곧추세우고 햇빛을 즐기며 풀숲을 누비던

여치와 버마제비들

섬돌의 이른 잠을 깨우며 서릿밤을 울던

귀뚜라미를 나는 사랑한다

생각하면 나는 화려한 것의 반대켠에서 고요하고 적막한 것에 길들여져 왔다

쑥갓꽃 패랭이꽃 손톱꽃 앉은뱅이꽃,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밤의 나뭇잎 지는 소리

밤나무 뿌리를 적시며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세상이 가장 조그마해지고 따뜻해지는 가을밤을

불켜지 않아도 마음이 화안한 가을밤을 나는 사랑한다

 

이 기철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을 사랑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을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 입니다

 

가을 새벽권태응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어서 밤이 새라고, 닭들 꼬기오

고요한 새벽 하늘

울 리는 소리 ...

먼 길 손님 타라고, 기차 삐익삑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부지런한 타작꾼 기계 타알탈

 

가을아침황동규

 

오래 살던 곳에서 떨어져내려

낮은 곳에 모여 추억 속에 머리 박고 살던 이파리들이

오늘 아침 옷들을 입고

저처럼 정신없이 빛나는구나

말라가는 신경의 참응ㄹ 수 없는 바스락거림 잠재우고

시간이 증발한 눈으로 시간석을 내다보자

방금 黃菊聲帶에서 굴러 나오는 목소리

저 황금 고리들, 태어나며 곧 사라지는

저 삶의 입술들!

 

가을 아침에  / 소월

 

아득한 퍼스레한 하늘 아래서

회색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섶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싸여 오는 모든 기억은

피 흘린 상처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 속이 가비얍던 날

그리운 그 한 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에기형도

 

잎 진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 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물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가을에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에 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ㅡ이마와 가스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ㅡ 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은 또 한번 뒷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가을에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을에는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픔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엽서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은 눈의 계절       /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로 순수한 언어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 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가을의 기도김현승(1913-197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 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1963

 

가을의 노래  /  Pierre Charles Baudelaire

1

이윽고 우리는 가라앉을 것이다. 차디찬 어두움 속으로

너무나도 짧은 우리의 여름날, 그 강렬한 밝음이여 안녕히!

불길스러운 충격을 전하며 안마당 돌 블록 위에

던져지고 있는 모닥불 타는 소리를 나는 벌써 듣는다

이윽고 겨울 그것이 내 존재에 돌아오리니, 분노와 증오와

전율과 공포와 강제된 쓰라린 노고

그리고 북극의 지축에 걸린 태양과 같이

나의 심장은 이제 언 붉은 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던져지며 떨어지는 장작더미 하나하나를 나는 떨면서 듣노니

세워진 단두대의 울음조차 이렇듯 둔탁하지 않다

나의 정신은 성문을 파괴하는 무거운 쇠망치를 얻어맞고

허물어지는 성탑과도 같아라

이 단조로운 충격에 내 몸은 흔들리어

어디선가 관에다 서둘러 못질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를 위하여? ㅡ 어제는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가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어디엔가 문밖에 나서기를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2

나는 사랑한다, 네 길다란 눈, 그 초록빛 띤 빛을

상냥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여, 이제 내게는 모든 것이 흥미없다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사랑도 침실도 또 난로도

해변에 빛나는 태양보다 낫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상냥스러운 사람이여! 역시 나를 사랑해 주오

비록 내가 은혜를 모르는 자요, 심술쟁이라도 내 어머니가 되어다오

연인이면서 누이동생이기도 한 사람이여, 비록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하더라도

석양의 상냥스러움, 빛나는 가을의 상냥스러움이 되어다오

얼마 남지 않은 노력! 무덤이 기다리고 있나니, 탐욕스러운 무덤이다!

아아! 당신의 무릎에 이마를 기댄 채 나로 하여금

한껏 잠기게 해다오 백열의 여름을 그리워하며

만추의 날 그 상냥스러운 황색 광선 속에서!

Pierre Charles Baudelaire(1821-1867) 프랑스 파리

 

가을의 시 - /   연화리 시편26  곽재구

 

오후 내내

나룻배를 타고

강기슭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당신이 너무 좋아하는 칡꽃 송이들이

푸른 강기슭을 따라 한없이 피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젖은 꿈처럼 수면 위에 잠기고

수면 위에 내려온 칡꽃들이

수심 한가운데서

부끄러운 옷을 벗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가고

지천으로 흩날리는 꽃향기 속에서

내 작은 나룻배는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 1999

 

 

가을의 시  /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汽笛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가을의 시장석주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잖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며

이루어지는 멸망과 죽음들이

왜 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시와 사상>2008년 가을호

 

가을의 유혹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르친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무른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이며

적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 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낙엽 모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로 나는 사람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 다시 오는 것이다

 

 

가을의 향기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

산 위에 마른 풀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가을이 가는구나김용택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빛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 산에 기댄

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가을이 아름다운 건 /   이해인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 여름 헤매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 익어갈 때

몇 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

뒹구는 낙엽이여

,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리의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다은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라

 

 

 

가을 저녁김현승

 

긴 돌담 밑에

땅거미 지는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로 그리는 무거운 가을 저녁

짙은 크레파스의 가을 저녁

기적은 서울의 가장자리에서

멀리 기러기같이 울고

겹친 공휴일을 반기며

먼 곳 고향들을 찾아 가는

오랜 풍속의 가을 저녁

사는 것은 곧 즐거움인 가을 저녁

눈들은 보름달을 보듯 맑아 가고

말들은 꽃잎보다 무거운 열매를 다는

호올로 포키트에 손을 넣고 걸어가도

외로움조차 속내의처럼 따뜻해 오는

가을 저녁

술에 절반

무등차에 절반

취하여 달을 안고

돌아가는 가을 저녁 ㅡ

흔들리는 뻐스 안에서

그러나 가을은 여름보다 무겁다!

시간의 잎새들이 떨어지는

내 어깨의 제목 위에선 ....

 

 

가을저녁에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다는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거가 버리는가보다

 

가을 지붕권태응

 

사다리를 타고서 한층 두층

언니 따라 지붕에 올라갑니다

박덩이 뒹굴대는 한옆에다

빨강 고추 흰 박고지 널어 놓아요

집집마다 지붕에도 울긋불긋

여기저기 그림같이 아름다워요

내려갈 줄 모르고 나는 자꾸만

멀리 멀리 사방 경치 바라봅니다

 

가을볕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 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내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가을편지 /  ???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 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워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가을하늘1 /  정완영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제비들이 날아갑니다

가을 하늘 푸른 건반을 두드리며 날아갑니다

하늘엔 음악이 흐르고, 흰 구름이 흘러갑니다

 

가을 하늘2 /  정완영

 

요즘 하늘빛은 하루 한 길씩 높아가요

저러다 넘칠 것 같아요 무너질 것 같아요

구름도 따라가다가 지쳐 눕고 말아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낙엽끼리 모여 산다조병화

 

낙엽이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남겨진 가을이재무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이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늦가을         /    김사인

 

그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앉아

그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시집<가만히 좋아하는> 창비.2006

 

늦가을 /   이덕무(1741-1793)

 

작은 서재에 찾아온 가을날이 너무도 맑아

손으로 갈포 두건 바로잡고 물소리를 듣네

책상에 시편 있고 울타리엔 국화 피었으니

사람들은 이 그윽한 멋을 도연명 같다 말하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 유득공.이서구와 함께 <건연집>이라는 시집을 냈다

서자로 태어나다

 

늦가을의 산책  /  헤세

 

가을비가 회색 숲에 흩뿌리고

아침바람에 골짜기는 추워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툭툭 떨어져

입을 벌리고 촉촉히 젖어 갈색을 띄고 웃는다

내 인생에도 가을이 찾아와

바람은 찢어져 나간 나뭇잎을 딩굴게 하고

가지마다 흔들어 댄다. 열매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사랑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미움이엇다

바람은 나의 앙상한 가지를 쥐어 뜯는다

나는 바람을 비웃고 폭풍을 견디어 본다

나에게 있어서 열매란 무엇인가?

목표란 무엇이란 말인가!

피어나려 했었고, 그것이 나의 목표다

그런데 나는 시들어 가고

시드는 것이 목표이며 그 외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는 목표는 순간적인 것이다

신은 내 안에 살고 내 안에서 죽고

내 가슴 속에서 괴로워 한다 이것이 내 목표로 충분하다

제대로 가는 길이든 헤매는 길이든 만발한 꽃이든 열매이든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이름에 불과하다

아침 바람에 골짜기가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

힘있게 환하게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들국화   /  노천명

 

들녘 비탈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틈에서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칠은 들녘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아름 고히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 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거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잎 두잎 병들어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도

들녘의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칠은 들녘 정든 흙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이 이제

시들고 마른 너를 다시 안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 주러 나왔다

들국화여!

저기 너의 푸른 천정이 있다

여기 너의 포근한 갈꽃 방석이 있다

 

들국화   /  천상병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순간이...

 

晩秋   /  이 용악

 

노오란 은행잎 하나

호리호리 돌아 호수에 떨어져

소리 없이 湖面을 미끄러진다

또 하나 ㅡ

조이삭을 줍던 시름은

요즈음 낙엽 모으기에 더욱더

해마알개졌고

하늘

하늘을 쳐다보는 늙은이 뇌리에는

얼어죽은 친지 그 그리운 모습이

또렷하게 피어오른다고

길다란 담뱃대의 뽕잎 연기를

하소에 돌린다

돌개바람이 멀지 않아

어린 것들이

털 고운 토끼 껍질을 벗겨

귀걸개를 준비할 때

기름진 밭고랑을 가져 못 본

부락민 사이엔

지난해처럼 또 또 그 전해처럼

소름 끼친 대화가 오도도오 떤다

이 용악

 

 

 

봉선화  /  김형준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김형준 시. 홍난파 작곡. 1920년 발표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   /  임태주

 

가을해가 풀썩 떨어집니다

꽃살 무늬 방문이 해 그림자에 갇힙니다

몇 줄 편지를 쓰다 지우고 여자는

돌아앉아 다시 뜨게질을 합니다

담장 기와 위에 핀 바위솔꽃이

설핏설핏 여자의 눈을 밟고 지나갑니다

뒤란의 머위잎 몇 장을 오래 앉아 뜯습니다

희미한 초생달이 돋습니다

봉숭아 꽃물이 남아있는 손톱끝에서

는 사랑하는 일보다 더 외로운 일이라는데...

억새를 흔들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여자는 잔별들 사이로 등을 꽂습니다

가지런히 빗질을 하고

일생의 거울 속에서 여자는

그림자로 남아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씁니다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지웁니다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억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조용한 일  /  김 사인

 

이도 저도 마땅히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추일서정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러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 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래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07월 인문평론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  채호기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넌다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숫대가 있고

누렁빛 들판에는 풍성한 예감이 있다

먼 데 산이 선명하다

형은 펌프 옆에서 양말을 빨고

, 참 이 가을엔

햇빛이 뼛속까지 보이는구나

 

향수  /  박세영(1902 - ) 白河. 함북 출생.

 

- 그립구나 내 고향,

익은 들이 물결치는 가을

누르런 들과 새파란 하늘을 볼 땐

생각키느니 내 고향

산골짜기엔 약수

마을 앞엔 푸른 강

강엔 배 띄우고 고기 잡던 옛시절

내 고향은 이리도 아름다워라

산 없는 이곳에서

물 흐린 이 땅에서

흘러 다니는 나그네 몸이 외롭구나

지금은 추석달, 끝없는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저 달

북만北滿의 들개 짖는 소리에 마음만 소란쿠나

고향의 하늘을 날으는 새, 땅에 기는 짐승들도

지금은 따스한 제 집에서 단꿈을 꾸련만

팔려 간 노예와 같이

풍겨난 새와 같이 이 몸은 서럽구나

고추를 널어 새빨간 지붕

파란 박은 實貨같이 넝쿨에 달리고

방아 소리 쿵쿵 울릴 때

이 가을, 이 추석을 맞는 이

- 고향에 몇이나 되노

가라는 이 없건만 아니 나오면 왜 못살며

들은 익어 누르른데 배를 곯리지 않으면 왜 못살더란 말인가?

사랑하는 연인과 결별하듯이

내 고향 떠난 지도 이미 십년

그야 이 내 몸뿐이랴

마을의 처녀들도 눈물지고 떠나들 갔으며

마을의 장정들도 고향을 원망하고 달아났다

그리운 고향은 야속도 하구나

수수이삭에 걸린 추석달

잠든 호숫가에 거니는 기러기

지금은 그 멀리 들릴거라 다듬이 소리

- 그립고나 이 내 고향!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홀로 남기   /  프로스트

 

예전에 어디에서 들은 적 있었던가?

바람이 이토록 사납게 바뀌는 것을

닫히지 않으려는 문 열린 채 쥐어잡고

저 언덕 너머 해안의 물거품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바람은 도대체 무어라 여길까?

여름이 지나고 오늘 하루도 지나 이제

어둔 구름이 서쪽 하늘에 모인다

저기 쳐진 현관 마루

회오리바람에 요란하게 올라온 나뭇잎들이

내 무릎을 부딪히려다가 스쳐갔다

그 소리 속의 불길한 무엇이

내게 비밀을 밝히라고 알려준다

내가 집에 혼자 있다는 소문이

밖에서 나돌았나 보다

내 일생 동안 외로웠다는 소문이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밖에 없다는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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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관한 시모음 



가을은        /眞如 홍은자


바다같이 넓게 열린 가슴
유리알처럼 투명해진
마음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마주친 낯선 사람에게도
따스한 미소 건네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스며든 한 점 바람에도
가슴이 휑하니 비어 가고
괜스레 눈물이 그렁거려
접어 두었던 옛사랑의 기억이
단풍처럼 타오르고 그 흔들림에
가슴이 부서져 내리면 가을이고,


하얗게 잠 못 드는 밤
쓸쓸한 귀뚜라미 울음이
그리움의 송가처럼 가슴에 와 닿고
이유 없는 한숨이 새어나와
절로 읊조린 싯귀 한 구절에
가슴이 시려오면 가을이다 .


가을이라는 두 글자에
그리움을 섞어 태우면
붉은 빛 낙엽 타는 냄새가 난다
떠나갈 가을도, 돌아올 가을도
그리 오래 머물지도 못하면서
가을은, 가을 속에서 만 가을을 탄다.




가을 길목      /박인걸


이글이글 타던 햇빛도
선들바람 앞에 한 풀 꺾이고
늦바람난 고추잠자리
신바람 난 듯 하늘을 난다.


한 여름 찜통더위
풋 사과 벌겋게 익고
늦둥이 대추 열매도
오동통 살이 올랐다.


비탈 밭 옥수수
푸른 제복 빛이 바랬고
막대타고 오른 줄 콩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풀 섶에 앉은 여름
서늘바람이 길을 재촉하니
가을은 나뭇가지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가을이 오면       /손병흥


추억이 무르익어가는 갈대와 단풍들이
바야흐로 소소한 일상 속 정취 풍기는
불어오는 가을바람 스쳐가는 길가에서
외로움 달래보는 활짝 피어난 코스모스
또 하나의 풍경 담아내고 싶은 이 가을

만산홍엽 굽이쳐 내린 산야 들판 풀 바람
아련한 배경화면이 되어버린 유년의 추억들
무르익은 채로 깊어만 가는 풍성한 가을풍경
아름다운 상념 되어 물들게 하는 가을나들이

유난히 맑아서 고운 높은 채 푸른 가을 하늘처럼
날이 갈수록 아련한 기억마저도 떠올릴 겨를 없이
마냥 삶에 부대껴 앞만 보고 살아나왔던 세월 따라
숨어 우는 바람 긴 겨울이 다가오기 전 사색 즐기며
알록달록 크고 작은 외로움 추억들 멀리 날려 보고픈
오래도록 마음 허전 쓸쓸 해지는 별빛 그리운 이 계절





깊어가는 가을에2     /박준희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음에
행복합니다


그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그대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
향기로운 모습 속
고운 마음에 포오옥 빠져봅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고
함께 걷는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대
참으로
예뻐요
아름다워요
사랑스러워요


저녁노을처럼
붉게 붉게 불타는
곱디고운 그대와 함께한 이 시간
감사한 맘 가득 행복해 봅니다.




가을이 익어간다     /김민지


금오산 끝자락에 가을이 익어간다
케이블카에 올라 아래로 내려다보니
드문드문 들리는 계곡의 물소리가
가을의 운율에 맞추어 즐거이 노래한다


아직 채 푸른색이 가시지도 않은
은행잎 사이로 먼저 여문 은행들이
가을비의 무게에 눌려 떨어져
아스팔트 위에 납작 엎드렸다


산등성이 푸른 신록들은 구름이 걷어내고
울긋불긋 가을옷을 입혀줄 요량인가 보다
가을은 우리가 눈치챌 사이도 없이
슬며시 익어가고 있다




가을 향기        /정연화

낮동안 내리쬐는 햇볕이
아직은 뜨거워서
손가리개를 하지만

극성이던 더위는
어느 새 한 풀 꺾였고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속에는
가을 향기가 묻어납니다

나뭇잎의 살랑거림도
철이 든 듯 온화해졌으며
하늘의 뭉게구름도
왠지 가을스러움을 주는군요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가을 향기 그대를
맞이할 꿈에
여심은 벌써
설레이는 마음이 되어
그렇게 가을속에 서 있습니다





가을길        /정윤목


여인, 가을 따라가네
반기려듯 노래하는
까치 소리조차 없어도

철새, 하늘길 떠나가네
잘 가라고 손 흔들어
서운해 하는 이 없어도





가을손님        /장수남


코스모스 들길 손님
오셨네.
희야 가을 소식
바람 타고 모래성 너머
아빠 얼굴 보고 싶어
푸른 하늘 은빛 낯 달
가을 손님 오셨네.


해바라기 먼 산 손님
오셨네.
희야 가을 편지
푸른 바다 수평선 너머
아빠 얼굴 보고 싶어
깊은 하늘 금빛 햇살
가을 손님 오셨네.


그리운 님 찾아 먼 길
오셨네.
아빠 가을바람
들국화 향 흩날리며
희야 얼굴 보고 싶어
홍해바다 먼 파도 타고
가을 손님 오셨네.




가을이 오려 한다     /정찬열


가을이 오려 한다
그토록 기를 쓰고 울어대든
매미 소리도 목이 졸려 울고
화답하는 귀뚜라미 우는소리
희미한 노랫소리 나를 깨운다.


그토록 무덥던 날에
절기가 입추를 넘어서니
한 점 바람도 살랑거리며
새벽바람 끌려와 창문을 노크한다.


짙푸른 나뭇잎도
무덥던 한여름이 좋았다며
봄을 알린 벚나무 노란 옷을 걸치며
나른한 기지개를 켜고 서 있다.


어디선가 바람 따라
하늘을 배회하는 고추잠자리
북쪽 창을 기웃대던 아침 햇살도
서슬 바람에 등 떠밀려 서성이는 계절




가을에 더 깊숙이       /김관호


시원한 바람
서둘러 지나치려다 불쑥
던져놓은 명제


늘 웃어보자
서로 몸을 부대끼는 풀잎
열띤 논쟁


힘찬 폭포수
바쁘게 흘러가려다 언뜻
내려놓은 주제


늘 함께하자
꼬리를 무는 파문


손에 잡힐 듯한
가을 걸음에
은연중 꿈꾸는 이웃사랑……




가을의 법칙       /박종영


하늬바람이 분별없이 서늘하다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가을바람이 옷섶을 후빈다
허리 긴 국화가 피어나고
수줍어 숨어 피는 들꽃들의 웃음이
간드러지게 들려오는,
청명한 구름 속으로 소리의 물결이 높게 걸려있다
가을에 접어들면,
외로운 낙엽이 스스로 소멸하는
슬픈 가락이 거리에 놔 뒹굴고
자연의 힘으로 역류하는
나약한 나무들의 방황이 하루를 저물게 한다
어느 하늘 높은 날은 잎지는 소리에 슬프고
어느 선선한 날은 납작 엎드린
풀꽃의 웃음으로 소중한 가을,
이토록 무한한 가을에 접어들어
활개 치는 산천 경계가 무모하게 한 눈을 팔게 하는 것은
살아 남은 자의 행운이려니,
그래서 밝은 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지금의 즐거움이 크다.




가을 끝자락        /기영석


바람이 심술을 부려
곱게 물든 나뭇잎은
한 잎 두 잎 뚝뚝 떨어지고


한 생을 잘 보냈다고
길 위를 뒹굴고 무참히 밟혀도
아파하지도 울지도 않는다


길 섶의 억새란 놈은
갈대와 함께 바람 장단에
이리저리 흥에 겨워 춤을 추고


강 건너 사림봉엔
색깔 흐린 단풍으로 채색되고
강물은 가을을 띠워 보낸다




가을 나들이     /현곡 곽종철


누가 가을을 슬픈 계절이라 했나.
아름다운 들꽃이 나를 반기는데
노랗게 익어가는 벼이삭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네.


하얗게 피어오른 갈대꽃,
춤사위도 예사롭지 않네.
벌 나비가 지나간들 잡지도 않네.
강물도 바람을 만나 너울로 다가 와
쓸쓸한 내 마음을 씻어 주는구나.


강물에 떠있는 청둥오리 한 쌍,
내 젊은 시절을 그립게 하는구나.
물들어가는 산도들도 뒷전이네.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너가
가을을 즐기는데 하루해가 짧구나.




추억의 가을 길을 걸으며    /김명숙


새 옷을 갈아입은 가을 길
여러 가지 색깔들로 아름답게
채색되어 가는 가을


가을빛에 익어 가는
오곡백과를 보며 여유로운
길 따라 행복한 웃음을 지어본다.


저 맑은 가을 하늘 아래
고추잠자리 춤추며 나르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


수줍은 미소로 반겨주는
코스모스 유혹에 빠지며


더욱더 깊어 가는
가을의 향기를
마음에 담아 노래하며


그 여름의 추억이 스치고
그리움이 서린 하얀
이슬방울 풀잎에 내려


영롱하게 빛나는 숲길에
선선한 바람 불어와
가을의 향기는 더욱더
깊어져만 간다.




갈바람 빛 가을      /初月 윤갑수

파란 하늘을 닮았나.
얼비친 에메랄드 빛 금강엔
잔물결들이 사르르 바람타고
굽이굽이 진 세상을 훑는다.

헐렁한 눈빛에 밟힌 계절
허기짐을 유혹하는 욕망의
불꽃은 가슴에서 펄럭이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가을빛이 슬금슬금 물든다.

눈부신 햇살이 지나간 자리
들녘엔 허수아비만이 갈바람
타고 살랑인다.





가을 들녘       /이원문


덥다 하는 그 여름의 약속인가
뜸북새의 고향 참새 떼 날아들고
수수밭 옆 멀리 황금 물결 이룬다
봄부터 저 들녘이 있기까지
보람의 황금 들녘 가을 하늘 더 높아라
여기 저기 새 쫓는 소리 허수아비의 잠 깨운다


가을 바람에 참새 떼의 즐거운 들
아이들 나뉘어 메뚜기 따라 뛰는 들
길목 한곳 코스모스 가냘피한들대나
벼베기 끝나 바닥 들어나면 어쩌나
메아리에 실리던 작년의 궁굴통 소리
그때 처럼 그렇게 가느란히 들리겠지

 

 

낙엽 / 정호승

내 가는 길을 묻지 마세요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지 마세요

가을이 가고 또 가을이 가면

언젠가는 그대 실뿌리 곁에

살며시 살며시 누워 있겠어요

- 정호승,『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열림원, 2002)

낙엽 / 정현종

사람들 발길이 낸

길을 덮은 낙엽이여

의도한 듯이

길들을 지운 낙엽이여

길을 잘 보여주는구나

마침내 네가 길이로구나

- 정현종,『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문학과지성사, 2018)

낙엽 / 도종환

헤어지자

상처 한 줄 네 가슴 긋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자

수없이 헤어지자

네 몸에 남았던 내 몸의 흔적

고요히 되가져가자

허공에 찍었던 발자국 가져가는 새처럼

강물에 담았던 그림자 가져가는 달빛처럼

흔적 없이 헤어지자

오늘 또다시 떠나는 수천의 낙엽

낙엽

- 도종환,『흔들리며 피는 꽃』(문학동네, 1994)

낙엽 한 장 / 오봉옥

배낭에 따라붙은 낙엽 한 장

그냥 떼어버릴 일 아니다

그 나무의 전생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죽어가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

손을 내밀어보는 이유가

필시 또 있었을 것이니

- 오봉옥,『섯!』(천년의시작, 2018)

놀라워라 / 박남준

낙엽 하나 땅에 떨어졌다

어떤 나비의 애벌레에게 몸을 내주었나

삭은 뼈처럼 드러난 잎맥들 방울방울

이슬을 매달아 햇빛을 굴린다

그 모습 열반한 선승의 사리 아닌가 생각하는데

몸의 어느 구석에 생기가 남아 있었던가

가을볕에 뒤척이다 발끝부터 토르르-륵

동그랗게 말았다 번데기 같다

가지에서 떨어져 허공을 부유하다

나비를 꿈꾸었는가

놀라워라 저 낙엽

- 박남준,『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2010)

노란 잎 / 도종환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 도종환, 『사월 바다』(창비, 2016)

낙엽 밟았다는 사건 / 복효근

밟히는 순간 아득히

부서지는 낙엽들의 소리

내가 걸음을 갑자기 멈춘 것은,

오후 약속을 잊은 것은 그 소리 탓이었다

그녀는 기다리다 떠나갔고

나는 언덕에서 네 시 기차가 떠나는 소리를 듣는다

- 한 생生이 낙엽 부서지는 소리로 바뀔 수 있다니

또 발밑에선 낙엽이 부서지고

먼 곳에선 새가 난다

누군가 또 약속을 잊고

누군가 또 기차를 바꿔 타나보다

낙엽 소리에

먼 하늘 별이 돋는다

- 복효근,『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달아실출판사, 2017)

11월의 낙엽 / 최영미

가을비에 젖은 아스팔트.

돌아보면,

떨어질 잎이 하나 남아 있었나.

천둥에 떨고 번개에 갈라진 잎사귀.

심심한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되어주고

종이보다 가벼운 몸으로

더러운 뒷골목을 지키던 너.

허술한 나뭇가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의 운명에 순종했던,

상처투성이의 몸에 햇살이 닿으면

촘촘한 세월의 무늬가 드러나지만,

이대로 세차게 흔들리다

누군가의 가슴바닥에

훅, 떨어졌으면……

첫눈이 내려 무거운 눈을 매달고

허공에서 부서지기 전에,

순한 흙에 덮여 잠들었으면……

낙엽의 비문(碑文)을 읽을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최영미,『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 2009)

낙엽 / 이재무

시를 지망하는 학생이 보내온

시 한 편이 나를 울린다

세 행 짜리 짧은 시가 오늘 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한 가지에 나서 자라는 동안

만나지 못하더니 낙엽 되어 비로소

바닥에 한몸으로 포개져 있다"

그렇구나 우리 지척에 살면서도

전화로만 안부 챙기고 만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부음이 오고 경황 중에 달려가서야

만나는구나 잠시잠깐 쓸쓸히 그렇게 만나는구나

죽음만이 떨어져 멀어진 얼굴들 불러모으는구나

- 이재무,『푸른 고집』(천년의시작, 2004)

밝은 낙엽 / 황동규

그래, 젊음 뒤로 늙음이 오지 않고

밝은 낙엽들이 왔다.

샤워하고 욕조를 나오다

몸의 동체(胴體)를 일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숨 한번 크게 쉬었다. 늙음을 제대로 맞으려면

착지법(着地法)을 제대로 익혔어야?

그래, 기(氣)부터 채우자!

가을바람 기차게 부는 날

용의 등뼈 능선 사자산을 찾아 나선 길

긴 굽이 하나 돌자 얇은 반달 하나 하늘에 박혀 있고

나무들이 빨강 노랑 갈색 깃들을 날리는 마른 개울가엔

누군가 돌부처로 새기려 드는 걸 온몸으로 막은 듯

목과 허리에 깊은 상처 받은 바위 하나 서서

품으로 날아드는 색깔들을 밝은 흐름으로 만들고 있다.

어떤 나무의 분신이면 어떤가,

착지, 착지, 땅이 재촉하는데?

밝음 하나를 공중에서 낚아챈다. 바람결에 놓친다.

착지, 착지, 땅이 재촉하는데

밝은 몸 한 장

땅 어느 구석에 슬며시 내려앉지 않고

뒤집혔다 바로잡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구나.

-『창작과 비평』142호(200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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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시 모음 35편

《1》
첫눈   /강은교

첫눈이 내린다
흙에 닿으면 흙으로
눈물로 닿으면 눈물로
내리는 족족 녹으며
자꾸 내린다

웬 슬픔들 여기엔 이리도 많은지
동구 밖 넓은 길 훠이훠이 떠돌다가
더는 몸 비빌 곳 없어
찾아오신 넋들

구름 위에서 구름이 부서진다
바람 앞에서 바람이 부서진다

《2》
첫눈 오는 날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3》
첫눈 온 날이면  / 권경업

첫눈이 오고
해맑은 순이의 눈처럼
아침이 밝아
뽀득뽀득 뽀드득
사박 뽀드득
수줍음으로 내딛는 백두대간의 첫 발자국
파르르 가슴 떨리는
열여덟 순이가
처음 밟아 보는
그리움의 소리

4. 첫눈  /  김경미

마침내 그대편지가 오고 천천히 밖으로 나선다
하늘이 낮고 흐리고 어둑하니 자꾸 뒤돌아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 대로 다했고 무엇을 못했을까
뱀의 머리 위를 지나듯 살라 했건만

낙엽 밟듯 살아왔을까
선한 눈빛이 가장 깊은 것인 줄 이제야 알겠거니
너무 많이 화를 내거나 울어왔던가
생각할수록 시간이여 미안하다 미안하다는데

창 밖으로 문득 첫눈 쏟아지네
희디흰 형광가루들 순간 점등되는 지상
낮고 흐린 하늘이 떨어지면서 저리 환한 눈송이
되는 이치를 아무래도 그대와 걸으며 생각하노라면

첫눈 밟듯 살다보면
삶은 거저 내준 게 처음부터
너무 많았다고 따뜻한 눈물 글썽여지리라

《5》
첫눈  / 김남주

첫눈이 내리는 날은
빈들에
첫눈이 내리는 날은
캄캄한 밤도 하얘지고
밤길을 걷는 내 어두운 마음도 하얘지고
눈처럼 하얘지고
소리 없이 내려 금세
고봉으로 쌓인 눈앞에서
눈의 순결 앞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시리도록 내 뼛속이
소름이 끼치도록 내 등골이

《6》
첫눈  / 김수목

깨어진 얼음덩이가
풍덩거리는 저수지 위를
얼음조각만 밟고

통통 뛰어 건너편 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고라니를 보았다

순간처럼,
빠르게 물수제비를 뜨듯,
가볍게 몸을 날려
저수지를 건넜던 것이다

저렇듯 가벼운 몸짓으로
내 마음속에 첫눈이 내린다

하늘의 공기방울을 밟으며
내 마음을 통통 가로질러 온다

《7》
첫눈  /김윤희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인 지 석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은 없지만
첫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만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8》
첫눈 생각  / 김재진

입김만으로도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기다리는 눈은 안 오고 손가락만 시린 밤
네 가슴속으로 내려가
너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나는
더 깊은 곳 어디라도 내려갈 수 있다.
종소리에 놀란 네가 잠에서 깨고
잠옷바람으로 언뜻 창 밖을 내다볼 때
첫눈 되어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색하며 기뻐하는 너를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쌓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
햇빛에 녹지 않는 응달이 되어
오래도록 네 눈길 끌었으면 좋겠다.

《9》
첫눈  / 문병란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사내들은 모두 예수가 되고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여자들은 모두 천사가 된다
여보게 우리도 이런 밤
소주 몇 잔 비우고 조금 취해
모닥불 가에 언 손 부비며
쓸쓸한 추억하나 만들어볼까
만원짜리 한 장에 꿈을 달래고
포실거리는 눈발에 맞춰
여보게 우리도 첫눈 밤 같은
사랑 하나 만들까
그립다
첫눈이 내리면 먼데 마을 하나 둘 등불 꺼지고
지금쯤 그리운 사람은
혼자서 외로이 잠이 드는데
창가에 기대어 먼데
여인의 발자국 소리 엿들어 볼까
이런 밤 우리도 고요히
손 모아 촛불 하나 지킬까

《10》
귀로 듣는 눈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 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11》
눈 내린 날의 첫 줄  / 문인수

비쩍 마른 검둥개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네 발바닥,
뜨고 닿는 동작이 순서대로 다닥다닥 바쁘다.

꽃 자국나는 바닥과 병 뚜껑 따는 것
같은 허공이 지금
일직선으로 길게 달라붙는 중이다.

브라더미싱.
어머니 재봉틀 소리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저 개, 방향을 꺾어 이번엔 또
가로로 자를 댄 듯
내 눈썹 위를 오래 긋는다.

지평선에도 박음질 자국이 만져질까,
나는 자꾸
멀쩡한 데를 공연히 스스로

봉하는 것 아니냐. 하긴,
상처 아닌 행로가 어디 있을까.

날지 못하는 흰 날개, 양쪽 경치는
그저 차디차다. 어딜 가나
벗어재낄 수 없는 틈바구니,

이것이 길이다. 나는 무심코
저 개를 한참 밀고 있구나.

이쪽저쪽 끌어다 붙여 마음이 모처럼
광활한 아침이다.
무수히 꿰맨 흉터,
여기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
개 한 마리가 첫 줄 타자처럼 새까맣게 지나간다.

《12》
첫눈 속의 그리운 님  /박윤자

첫눈의 반가움은
설레인 마음 달래주듯 소리 없이
다가와 앙상한 나뭇가지엔
첫눈으로 꽃 피우고
엄연히 높은 산 첫 눈으로
가득 안고 자연 열등의식을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네
님 계신 높은 산등선
높은 곳을 향해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첫눈 내린 이 순간
얼마나 고요하고 적막할까?
밤이 으슥한 이 시간
첫 눈 속에 님 향기가 여여하게
퍼져 온다.
소리 없이 님 모습 첫눈 속에
비춰질 때 밝은 미소로 님 모습
살며시 포용하네
무언의 침묵 속에 강하게
용솟음 치듯 첫눈은 마음의
심금을 울리고
첫눈은 소리 없이
소복소복 쌓여만 가네

《13》
첫눈  /박인걸

첫눈을 맞으며
마냥 좋아 날뛰던
그 시절 추억도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로
황혼이 내려앉아
찬바람에 뼈가 시린
수척한 나그네는
눈이 와도 감격이 없다.
가로등 언저리에
벌떼처럼 나는
순백의 눈발을 볼 때
그녀를 떠올리며
가슴 설레던
심장의 고동소리 대신
이제는 눈길을 걸으며
숨이 찰 뿐이다.

《14》
첫눈 내리는 날  /박재성

기다림이 있어서인가
바람 없는 골목에
눈부심으로 내리는 눈

손부끄러워
입 벌리고 맞았던 시절
한 송이 두 송이
긴 눈썹 위에 쌓이면
붉은 볼 위에서 망울지던 날

눈의 요정처럼
팔 벌려 하늘을 품고는
네게 열어둔 가슴 안으로
날아들던 열셋 순정

눈에 젖은 날개가 마르기 전에
가슴을 닫고 품었어야 할
첫사랑인데

순수함만큼이나 서툴렀던
풋사랑으로
날개 마르고 남은 물방울만
가슴에 남기고 날아갔지
또 눈 내리는 날에

눈을 들어서
내리는 눈 반기다
가슴에 남은 물방울이
눈으로 흐를 것 같은
하얀 날

《15》
첫눈  / 서정윤

보고싶은 마음보다 먼저
먼저 눈발이 날린다.

낙엽 모이던 금호강변 어디
지금쯤 그대는
내 속에 앉는다.

키 큰 미루나무 빈 가지에
올해 깬 까치가
자꾸만 설레이고
맨발로 달려오는 소식들
내 마음
먼저 반갑다.

그리운 마음 그 어디서
눈발 날려 부른다.

《16》
첫눈  /송선애

깻단 위에 눈이 내렸다
깨알같은 말이 쏟아졌다
첫눈 오는 날
약속이 유효하다고
새가 발자국을 남겼다
기억을 털어 낸 들판
전율의 틈으로
깨꽃 같은 소식이 다녀갔다

《17》
첫눈  / 송해월

고인 눈물까지도 모조리 퍼낼 듯한 바람
눈치 없이도 불어대더니 눈이 내리시네

문간 옆 꽃단풍 채 지지도 않아 저 홀로 붉은데
지상(地上)에 속속 당도하는 저 흰 버선발의
고요한 방문(訪問)

정결하고 아름다워라

오늘은 나도, 내 사는 일에만 바빠
아무런 기미(機微)도 눈치 챌 수 없었네.

《18》
첫눈 오는 날  /  양전형

초등학교 운동장
여자아이 여럿
발을 동동거리며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내고 있다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하얀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 다닌다

세상이 하얘지도록
아이들이 집에 갈 생각이 없으니
나비들도 멈추지 못한다

그만하면
나비가 없어질 만도 한데
쉬지 않고 나오는 아이들의 하얀 입김
너희들은 참,
나비가 많은 아이들이로구나

《19》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오광수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온 세상이 우리 둘만의 세계가 되어

나의 소중한 고백이
하얀 입김에 예쁘게 싸여

분홍빛 너의 가슴에선
감동의 물결이 되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맑은 두 손 속에
소망하던 그날의

모습으로 내 모습이 자리하면
우리들의 약속은 소복소복 쌓이는 사랑일 거야

《20》
첫눈 오던 날  / 용혜원

첫눈 오던 날 새벽에
가장 먼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것처럼
그대에게 처음 사랑이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날들이
그대와 살아가며
사랑을 나눌 날들이기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늘 간절한 마음으로
그대를 위하여
두 손을 모읍니다

그대를 축복하여 주시기를
늘 아쉬운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그대에게 은총이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21》
첫눈  /  이문구

오늘 온 눈은
첫눈
반가운 함박눈

마당에 두 줄
표주박 무늬
친구 부르러 나간
아기 발자국

우물가에 흐트러진
은행잎 무늬
뜨물 마시고 들어간
오리 발자국

《22》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  /  이문조

첫눈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
처음만큼 설레는 것도 없다

눈 내리는 고요한 이 밤
첫눈 올 때 우리 만나자는
희미한 옛날의 약속 떠올리고

첫사랑의 그녀를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보고

첫 키스의 달콤하고 황홀한 솜사탕을
다시 핥아 본다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는 그 약속
아직도 유효한지
달려가고만 싶은 소년의 마음
설레는 첫사랑의 추억.

《23》
첫눈 내리는 날  /  이재봉

낙원동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밥알 같은 흰 눈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흰 눈 같은 밥알이 허기 속으로 사라진다.
아가, 배고프자. 사르르 추억의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고봉밥 한 상 가득 내오신다.

《24》
첫눈  /  이점숙

동짓달 초겨울 하얀 눈이 내린다
파도가 부서지는 해운대 바닷가
우뚝 솟아오른 빌딩 사이로
노란 은행잎 융단을 깔고
하얀 바람 타고 눈이 내린다

강원도 산골에 눈이 내렸나!
군인 간 아들 첫 휴가 소식 올까
긴 밤 마음 졸여 기다렸더니
첫 눈이 내린다 천리 먼 길을
한 달음 달려서 가슴으로 내린다

어이 알았을까! 어이 알았을까!
자식 그리는 어미의 마음
한겨울 서리 보다 더 시린 걸

귀한 손님처럼 달콤한 연인처럼
설레임 한껏 안고 눈이 내린다
그리운 마음에 별빛이 부서지고
촉촉이 젖은 사랑 가슴 에인다.

《25》
첫눈  /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26》
첫눈   /  이해인

함박눈 내리는 오늘
눈길을 걸어
나의 첫사랑이신 당신께
첫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언 손 비비며
가끔은 미끄러지며
힘들어도
기쁘게 가겠습니다

하늘만 보아도
배고프지 않은
당신의 눈사람으로
눈을 맞으며 가겠습니다

《27》
첫눈 맞으며   /  임문석

시린 기온이 번진 하늘은 뿌옇다
흰나비 무리지어 날듯 하염없자
마음속엔 하트인 양 분홍빛으로 설렌다

유년시절의 맥박 고스란히 뛰놀고
향수의 세월 희미하게 살아나
여 짓 잊고 있었던 추억 재현해 주는구려!

나는 벙거지 帽(모)에 누빈 무명바지
넌 귀 가리개에 검정 치마저고리
신은 흑 고무신 코빼기만 서로 달랐었지,

우린 무릎 차는 눈길을 마냥 걸었다.
무심한 눈보라를 한껏 맞으며 도
추위조차 모른 채 다닌 동심의 등하굣길

《28》
첫눈  /  장석주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실패했거든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눈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맨발로
그대를 버린 애인의 집까지 가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끝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첫눈이 온다 그대
쓰던 편지마저 다 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들에 나가라

온몸 얼어 저 첫눈이 빈 들에서
그대가 버린 사랑의 이름으로
울어 보아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한
그대의 순결한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라

《29》
첫눈  /  정연정

첫눈이 오면
봉숭아물들인 사람
소원 빌고

수능시험 본
언니 오빠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첫눈이 오면
첫사랑 만나서
데이트하고
봉숭아물들인 사람
수능시험보고
기분이 상쾌해진 오빠 언니
첫사랑 만난 사람
모두 축하해요.

《30》
눈 내리는 날  /  정진규

눈 내리는 날, 거기가 어디였지?
밖에서 그에게 전화를 거네
이 한마디만으로도
우리들의 대화는 통하네

길이 열리네 나는 알면서도
다시 묻네 거기가 어디였지?

내 털실 목도리를 뜨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만 코가 빠졌다고 다시
풀어야겠다고 그는 말하고

나는 너무 아름답고 깊어서
다시 감탄사를 쓰고 싶었다고 그래서였다고
그걸로 털실 코를 다시 꿰어보라고 말하네

눈 내리는 날, 운악산 조공마을 외길,
시오리 숲길 거길 지금 가보자고
지금 떠나자고 나는 다시 말하네

들키고 싶지 않은 길,
누가 먼저 발자국을 내면
어쩌겠느냐고 나는 말하네
그는 또 코가 빠졌다고

다시 풀어야겠다고 말하고
나는 당신을 위해 사둔 속옷과 향수를
오늘 드리겠다고 그
걸로 코를 다시 꿰어보라고 말하네
눈 내리는 날, 거기가 어디였지?
밖에서 그에게 전화를

《31》

첫눈  /  정호승

첫눈이 내렸다
퇴근길에 도시락 가방을 들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렸다
눈송이들은 저마다 기차가 되어 남쪽으로 떠나가고
나는 아무데도 떠날 데가 없어 나의 기차에서 내려 길을 걸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커피 전문점에 들러 커피를 들고 담배를 피웠으나 배가 고팠다
삶 전문점에 들러 生生라면을 사먹고 전화를 걸었으나 배가 고팠다
삶의 형식에는 기어이 참여하지 않아야 옳았던 것일까
나는 아직 그 누구의 발 한번 씻어주지 못하고
세상을 기댈 어깨 한번 되어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워
삶 전문점 창가에 앉아 눈 내리는 거리를 바라본다
청포 장사하던 어머니가 치맛단을 끌고 황급히 지나간다
누가 죽은 춘란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선다
멀리 첫눈을 뒤집어쓰고 바다에 빠지는 나의 기차가 보인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미움이 끝난 뒤에도 다시 나를 미워한 것은 잘못이었다
눈은 그쳤다가 눈물 버섯처럼 또 내리고
나는 또다시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린다

《32》
첫눈 오는 날  /  정호승

남한테 비굴하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첫눈이 내릴 때
첫눈한테는 무릎을 꿇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첫눈 오는 날
길 잃어 쓰러진 강아지를 품에 안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33》
첫눈  /  주응규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아득한 곳에서 하얗게 새하얗게
소녀가 부르는 것 같아
추억 속을 걷고 있네요

언젠가 그 언젠가
나를 위해 철없이 흘리던
소녀의 애달픈 눈물이
눈송이로 흩날리네요

못 잊어 못 잊어서
가슴 깊이 담아 두어야 했던
사랑의 밀어가
눈꽃을 피우네요

옛날 그 옛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메마른 앙가슴에
꽃 물을 들이네요.

《34》
누군가에 첫눈  /  주일례

첫눈이 오면 창문을 엽니다.
그대가 어디선가 올 것 같습니다.
첫눈처럼 올 것 같고
첫눈처럼 갈 것 같은,
그대가 바라보고 서 있는 곳이 나라고 믿고 싶습니다.
아니, 나여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리움이 말을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기억에 남아 있는 애기들을 꺼내고
오랫동안 창가에 앉아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은 사람
따뜻한 풍경이 되고
첫눈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격하고 아름다운 일인가요.
그리고 보면 세상에는 헛된 인연은 없습니다.
결코 만나지 말아야될 인연도 없습니다.
단지 극복하지 못한 인연만 존재할 뿐이지요,
그래서 슬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통스런 사람들도 너무도 많습니다.
그 시간도 지나가지요.
마음이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합니다.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그냥 스쳐간 사람은 빨리 잊습니다.
허나 마음에 단단한 아픔 하나로 박혀 있는 사람은 다르지요.
시시때때로 생각이 나고 보고 싶어 미치지요.
그러다 또 잊어질 사람입니다.
까마득히 잊었다가 어느 날 문득
첫눈처럼 설레게 올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 겨울에 뜨겁게 산 흔적 하나 생각하지요.
첫눈이 그렇습니다.
지금 내 앞에 우는 당신이 그렇습니다.

《35》
첫눈  /  홍해리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부는지
그 소리가락 따라
앞 뒷산이 무너지고
푸른빛 하늘까지 흔들면서
처음으로 처녀를 처리하고 있느니
캄캄한 목소리에 눌린 자들아
민주주의 같은 처녀의 하얀 눈물
그 설레이는 꽃이파리들이 모여
뼛속까지 하얀 꽃이 피었다
울음소리도 다 잠든
제일 곱고 고운 꽃밭 한가운데
텅 비어 있는 자리의 사내들아
가슴속 헐고 병든 마음 다 버리고
눈뜨고 눈먼 자들아
눈썹 위에 풀풀풀 내리는 꽃비 속에
젖빛 하늘 한 자락을 차게 안아라
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
살아 생전의 모든 죄란 죄
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
머릿결 곱게 날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
사랑이여 사랑이여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
온 세상을 무너뜨려서
거대한 빛
그 無地한 손으로
언뜻
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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