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향 시 모음 1 ∼ 60편


1.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김지향

강물이 눈썹까지 차오른
몸의 창문이 사방으로 밀리며
한 잎 한 잎 열렸다
물에 잠긴 몸의 부속품들이
송어새끼 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풀나풀 기어나온다
엊그제 잠입한 매연 찌꺼기도
살살 녹아 나온다
마구잡이로 먹어치운 공해물질이
소화도 안된 채 밀려나와 풀썩풀썩
강바닥으로 주저앉는다

사람의 눈이 해독할 거리쯤에선
손을 흔들며 나가는 물거품
눈썹까지 차오른 욕망을 말끔히 씻어내면
하얗게 피어서 떠오르는 빈 몸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꽃잎이다
나는.

2.가을 그리고 은빛의 잎

김지향

공터 옆구리 어린이 놀이터 옆구리
익은 땡감들이 수은등처럼 켜져 있다
가을 내 초록 잎 지는 소리 아래로
고개 내민 말라깽이 단풍나무가
그림엽서를 만들고 있다

모두 떠난 언덕 밑 경사로에는
줄지어 미끄러지던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 멈춘
커브길이 까뭇까뭇 딱지를 덮고 누워있다
추적추적 짚신소리 끌고 따라오던 장맛비도
멈추어 섰다
물 젖은 바람이 볼가 낸 언덕 너머 서쪽 하늘이
무거운 낮잠을 벗는다

널따란 발코니 창가에서 나는 서쪽 하늘에
펼쳐지는 우주의 단막극을 구경한다
우주에서 풀잎이 한 켤레씩 톡. 톡. 떨어질 때마다
내 머리엔 한 땀씩 은빛 잎이 심어진다
은빛 잎은 머리에서 초롱꽃이 되어
앉았다 누웠다 깊은 머리 속
호수로 내려간다

내가 타고 갈 은빛의 우주선 한 채
아직 마감공사 덜된 채
깊은 호수 버티칼을 열고 내다본다.

3.가을 눈물에 젖는

김지향

튕겨나간 하늘이
군데군데 얼룩이 졌다
파삭한 가을 얼굴이
골목골목 포개 앉아 있다
나뭇잎이 떨어뜨린 눈물에
가을이 젖는다

하늘에 잎을 달아주며
하늘과 도킹하던 나무들
이젠 드러낸 알몸이 부끄러운지
어깻죽지를 움츠리고 있다

사람들은 아직 살이 덜 찬 열매를 따서
길가 좌판 위에 널어놓고 있다
짐수레마다 얼굴 붉히고 있는 열매들이
빤질빤질 눈물에 씻긴다
다 내어주고 몸 비운 가을이
뜨거웠던 시간들을 접어놓으며
영혼의 집으로 떠날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중이다

나뭇잎을 신고 떠난 ‘시간’은
가서 돌아오지 않지만
눈물에 씻겨 살아난 가을은
내일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

4.가을 잎

김지향

가을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을잎은
온 몸으로 뒹굴기 내기를 한다
온 몸으로
나의 눈 속에 풍덩 빠져
박하분 냄새로 살아난다
박하분 냄새가
내 몸 속까지 흘러들어
나의 영혼 전체가
박하 내로 떠오른다
밤의 기슭의 헛간
어둔 헛간의 어둔 가슴
그 좁은 고랑을 가만 가만 비켜서
조금씩 뜨거워져 터지고 있는
가을 옆으로
옆으로 흘러간다
가을은 뜨거운 가슴뿐
손이 없으므로
가을잎을 붙들지 못한다.

5.가을 화약 냄새

김지향

시간은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

달려와서 낡은 잡기장 한 페이지 부욱, 찢어낸다
흘린 부스러기들은 열린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

여름 시체를 담은 서랍들이
화장터에 쌓인다

푸르렀던 시절을 가슴에 넣은
가을은 시체들을 화장한다

세상 납골당엔 빨간 불꽃들이 앉아 있다
화약 냄새를 안고

시간은 또 어디로 가고 있다.

6.가을바람.2

김지향

바람이 풍선을 타고 하늘을 건너간다
풍선은 달의 품에 안겨 느긋하게 날아간다
풍선이 달의 닮은꼴이냐고 바람에게 물어본다
그때 달은 구름 속에 숨어버린다
바람이 풍선을 놓친 줄 모르고
달을 끌고 까불까불 산을 넘어간다
이윽고 달이 산 속에 몸을 숨기며 바람을 내버린다
하늘에서 쫓겨난 바람이 사과송이를 풍선인줄 알고
사과의 뺨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논다
사과송이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다

가을바람은 눈이 멀어 분별력이 없다
자꾸자꾸 몸이 싸늘하게 식어갈 뿐

7.개울가 그 집

김지향

신발을 벗어들고 걸으면
발바닥이 간지러운 자갈밭
호롱불 가물거리는 외딴집 까지는
몇 마장이 더 남아 있었다

한쪽 발을 들고 걸어도 양쪽발이 아픈
개울가 공사장 한쪽 끝에 가물가물
꺼져가는 호롱불의 그 집은
아직도 있었다

지붕 서까래 밑에서
잘새알을 꺼내어
친구 시중드는 일이 재미 있었던
그 아이는 오늘
부뚜막에 턱을 괴어 꿈으로 가고
새들은 서까래 밑으로 들락거리며
지붕 꼭대기에 북더기집을 만들었다

호롱불이 혼자 붙다가 만
방안 고요 위엔
무서움이 한꺼풀 더 덮여
함께 자고 있었다

밤내 울다 성대를 다친 부엉이의
안개처럼 퍼지는 울음 사이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 집
잠을 깨우는 성.누가 성당의
새벽 미사 올리는 소리만
먼저 간 주인의 혼을 부르며
개울가를 맴돌고 있을뿐

성대 잃은 부엉이 소리 혼자 버려두고
꿈속으로 먼저 간 그 남자(아이)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개울 속엔 옛 주인의 옷자락 젖는 소리
추적추적 흘러간다

아직도 발가락이 시린 개울가 그 집.

8.거울 속 풍경

김지향

흙이 하늘로 날아간 뒤
하늘에서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뻗은 뒤

나무가 땅으로 가지를 낸 뒤
꽃잎이 땅으로 몸을 헐어낸 뒤

꽃잎이 땅으로 날아온 뒤
골목길에 떨어진 하늘 새 한 마리

하늘 새를 타고 그가 하늘로 떠난 뒤
집속 방속 벽 속 거울 속에 그가 살아있다

거울 속엔 발도 없이 걸어 들어간
어제의 사건들이 모두 살아있다

병정놀이가 땅뺏기놀이가 사냥놀이가
거울 속에 살아있다

살아있는 거울을 따먹고 하늘궁전으로 간
나는 하늘풍경을 마저 따먹는다

아, 거울 속은 내가 따먹은 내 눈 속이네

9.걸으면서 잠자는 버릇

김지향

나는 걸으면서 잠을 잔다
걸어도 오는 잠은 내쫓지 못한다
눈으론 실탄을 어깨에 멘 총잡이를 보면서
권총의 자동방아쇠가 미사일이 되어
햇빛이 끝나는 우주 기슭을
뚫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불길이 노을처럼 곱게 타오르는 현장을
입을 딱 벌리고 감상한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걸었다
등 뒤에서 호르라기 소리가
등솔기를 때렸다
축 쳐진 금줄을 번쩍이는 검은 옷의
늙은 사나이의 어깨가
내 옆구리를 떠밀었다
사나이의 터진 목소리가 공기를 찢어댐을
촉감으로 만지면서 나는 또 다시
아까 그 권총 사나이를 따라갔다
그는 불길 속에서 불쑥 튀어오른
한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 여자는 머리칼이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말탄 병정들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쯧.쯧.쯧!
강한 느낌표를 발하며 급히
말머리를 막았다 그때였다
찌~익!하고 금속성 폭발음이
귓속에 깊게 깔렸다
또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내 뒤통수를 찢었다
순경 나으리가 달려왔다

나는 그 때부터
걸으면서 잠 자는 버릇을 내버렸다
아름다운 의식의 뒤죽박죽 장난도
끝내버렸다

10.겨울밤이 눈에 묻히다

김지향

나는 밤내 눈에 젖는 겨울 한 컷 일기장에 그려 넣는다

이제 연거푸 토해낸다 포식한 하늘이 벨트를 풀고
너무 오랜 시간 받아먹은 사람의 아우성, 넋두리, 비명을
비비고 버무려 하얗게 바랜 속 깊은 응어리를 게워낸다
멍울멍울 맺힌 빛바랜 녹말 알갱이를 버티칼 밖으로 부어낸다
사람들의 가슴에서 오래오래 쏘아올린 토혈이 이제 되쏟아져 내려도
스스로의 가슴에서 쌓인 가슴앓이가 뜯겨져나간 세포 조각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입을 열고 창가에 앉아
의미 없는 함박웃음을 밤내 눈 속에 묻는다

하늘에 가르마를 탄다 디지털로 가는 바람 갈기 한 줄
손에 든 면도칼로 웅크린 떠돌이별 수염을 깎으려지만
미리 모두 깎여 하얗게 빛 꺼진 별은 뜬 눈 채 잠이 들었다
뼈만 남은 플라타너스가 하늘의 속앓이를 아는지 팔을 치켜든 채
하늘 심장에 바싹 귀를 대고 숨 죽여 얼어 있다
하늘과 땅, 땅과 땅 경계를 넘나들며 조금씩
살을 헐어내고 있는 공기의 폐장도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하늘 위의 하늘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퀘이사만이
끝나 가는 길고 긴 아날로그의 지상 삶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팽개치고 돌아설 시간의 속셈도 알고 있다
퀘이사가 알고 있는 시간이 한밤 우주를 붙들고 이제 잠을 씌우는지
이 간이역의 하얀 낙하산 속은 무거운 침묵만 깔려 있다

나는 밤내 일기장에서 나체로 있는 침묵 한 컷 집어먹는다.

11.계절이 초록 옷을 입을 때

김지향

초록 옷 입은 계절이
초록바람을 먹고
펄럭펄럭 옷깃을 펄럭일 때
우리는 참 싱그러운 초록이 된다

숲들이 옷깃을 펄럭일 때마다
사람은 온통 초록 물감 통에 빠져
초록 숲이 된다
초록 숲이 된 우리의 가슴에
휘파람새가 숨어들어
몸 전체를 연주한다

휘파람새가 우리 몸을 연주할 동안은
사람의 눈흘김도 게걸음도 거치른
거치른 말솜씨도 일시에 화해로운 노래가 된다
초록 노래로 흐른다

12.고층 아파트

김지향

담쟁이도 미끄러지고만 고층 아파트
터질 듯 볼록볼록한 품을 안고 기다란 키로 버티고 서서
아침이면 술술 풀리는 연줄처럼 구겨 넣은 내장 다 풀어내고
밤이면 빠짐없이 되감아 넣는 아파트
그 품속엔 어떤 생이 출렁이고 있는지 밖에선 깜박이는 창유리만 보일뿐
때때로 요란한 소리로 몸을 띄운 비행기가 머리 위를 짓뭉개지만
(내다보는 사람의 귓바퀴만 찢기고 말지만)
아파트 눈썹 하나 긁지 못한 비행기 하늘 저 쪽으로 튕겨 올라가면서
아파트의 불 눈에 넌지시 읽힌다

팽팽한 하늘이 여전히 황금엽서를 펼쳐놓고
화살 없는 활시위로 빛을 쏘아대고 있지만
하늘빛의 쇼올을 두르고 날마다 우주 속에 머리를 넣어
세계 별들의 집회에서 보내오는 초음속의 송신음을 듣고 있는
아파트가 깊은 잠에 빠질 땐 요술지팡이의 어린왕자가
머리를 톡톡 치며 깨운다 어린왕자의 요술지팡이를
어서 빨리 읽어 보라고

13.공간 밖 공간

김지향

휙 휙 시간이 달아난다 어디로 가는 거지
궁금한 나는 시간의 손을 끌어 잡는다
잽싸게 뿌리치고 달아나는 비밀 같은 시간
나는 온 힘을 모아 시간의 꽁지를 끌어당긴다
시간은 공간 밖 공간의 레일 위로 훌쩍 몸을 빼 돌린다
나도 잽싸게 마우스를 잡고 공간 밖 공간의 나라로
함께 동댕이쳐 진다
이미 이사 온 사람들로 배불뚝이 된 공간 밖 세상
초만원의 공간마다 금이 찍 찌익 나 있다
누가 만들어 공간 밖 공간의 개찰구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는지
한꺼번에 밧줄 같은 길들이 살아나 얽히고
한꺼번에 박음질이 잘 된 방들이 환하게 불을 켜
어린 복제인간들의 눈을 밝혀주고
한꺼번에 닮은꼴의 아이들이 지상엔 없는 속력을 만들어
까불까불 콩새 꼬리 같은 서버를 타고 둥둥 떠다니고
한꺼번에 구문이 안 맞는 낯선 말들을 만들어
사방천지 아무데나 낭자하게 팡 팡 쏟아놓는다

남은 지상 사람들아,
공간 밖 공간을 쳐다봐라
새로 돋은 새 풀처럼 톡 톡 머리들이 튀어나와 있지!
겉옷을 벗어둔 지상은 이미 눈동자 빠진 허공일 뿐
내일이면 없어질 구멍 뚫린 항아리일 뿐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수명 다한 낡은 잡기장 같은
지상을 사랑한다 죽도록 사랑하며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린다
또 다시 생기발랄한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14.공간 밖 공간에도 봄이 살아난다

김지향

어제는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를 마구잡이로 들락거린 세상소리를 마셨다
오늘은 모두가 한꺼번에 세상소리로 뒤엉켜 고속 메일이 되어 온 세상에
흩어진다 삶을 짜서 널어놓은 빨랫줄 밑에서 뚝 뚝 떨어지는 삶의 옹아리를
받아먹은 씨앗들을 마우스에 담아 나는 수평선 저 쪽 가물거리는 안개나라에
보낸다 안개는 없어지고 파란 풀밭이 태어난다 풀밭 속에서 살살 풀리는
햇살을 등에 업고 새파란 바람을 받아먹는 병아리 떼, 놋쇠 자물통 아이디를
훔쳐 열고 쫓아 나온 성급한 노란 병아리 몇 개비 꽃 대궁에 끼워져 서로
팔짱을 걸고 노란 꽃으로 피어난다

사이트와 사이트 사이 줄다리기하는 고속 안테나 위에서
누가 먼저 정보를 빼앗나 싸움판을 벌이는 마우스의 숨 가쁜 속력을 타고
금빛 날개를 파닥거리는 본적도 없는 낯선 메일들이 내게도 와락 달려든다
가장 먼저 받은 이름 없는 메일을 연다 날개를 편 봄이 내려 선
공간 밖 공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 뜰 잔디밭에 쫑 쫑 쫑 뛰어가는
방금 마악 배꼽 떨어진 봄을 한 입 가득 따 넣은 메일, 나는 숨차게
따라가며 봄 꼭지를 톡 따고 빠뜨린 꼭지도 톡 딴다.

세상은 온통 샛노란 물감 통에 빠져 진저리를 친다.

15.공중창고에서

김지향

공중창고에 갇히면 나가지 못함
활주로가 녹이슬어?
아니 시체로 귀환할까 봐?

삼십년 전에도 그랬었지
공중을 도려내 보이는 분화구마다
지상의 배기가스가 터져나오고
군데군데 열려있는 공기통은
뚱뚱 부어 손톱자국도 남지 않았지
우리는 소리쳤지
밟을 때 마다 딱딱 발이 맞힌다고
공중에 갇혀서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복막염 앓는 공기를 살려내라고
전능자에게 비명을 쏘아올렸지
우주공간을 빙빙 돌며
전능자가 있을 끝과 끝을
두 주먹으로 땅,땅, 두들겼지

그로부터 대심판날인줄 알고 사는 우리
오늘도 심판날인줄 아는 우리
복막염 공기는 때때로 배에서 산성비를 뽑아내고
비닐 주머니도 없는 우리는
거짓말장이, 사기꾼! 하고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치지만
공기가 살아난다고
전능자가 손을 내밀리라고
믿었던 우리는 오늘도 우리 자신의
희망에게 배반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시체로 귀환하지 않고
활주로가 떨어져나간
공중창고에서

아직도 시체가 되지 않고 있음

16.굴렁쇠와 아이

김지향

안녕!
바람도 한 옆으로 밀쳐 세워놓고
쨍쨍한 햇빛 속을 날마다 보는
아이 하나 손을 파랗게 흔들며 간다
처음엔
숨죽인 운동장 머리에
삐뚤삐뚤 서투른 팽이치기처럼
바퀴가 푸득거렸다
아이의 새파란 손가락에 걸린 새파란 시간이
밀쳐놓은 바람을 흔들어 운동장 전체를 띄웠다
와~와~와~ 운동장으로 뛰어든
사람의, 빌딩의, 공장의, 창문의, 손뼉소리가
귀먹은 시간의 귀속까지 요동쳤다
중간엔
팔딱이는 운동장 심장부를 뛰는
아이보다 큰 덩치의 굴렁쇠에 성미 급한
젊은 시간이 고무줄처럼 튕겨 올라붙었다
올라붙은 시간이 심술을 부렸다
검은 보자기를 공중에 펼쳐 햇빛을 걷어냈다
공중은 문득 뚜껑열린 물병이 되었다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이 소나기로 몸 바꾸는 순간
굴렁쇠에 무너지는 보드불럭 담장이 걸리고
굴렁쇠에 쓰러지는 공장 굴뚝이 걸리고
굴렁쇠에 달려가는 사물의 아우성이 걸리고
굴렁쇠에 흙탕물을 몰아오는 바람 갈퀴가 걸리고…
나중엔
손을 흔드는 아이의 손등이
주름 깊은 어둠덩이를 밀고
노을 감긴 운동장 하복부를 마악 돌아
얽힌 실타래를 온몸으로 풀어내듯
은빛의 시간을 나부끼며 느긋하게 간다

내가나를 밀고 나간다 운동장 밖으로
안녕!

17.궤도 이탈중

김지향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마디 문을 열어놓고
바람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렀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삶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 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구겨 넣으며
터널같은 세상 한 비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가는 중이다

18.그 해 여름 숲 속에서

김지향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아직 바람은 나무를 베고 잔다
동쪽 하늘에 붉은 망사 천을 깔던 해가 숲을 깨운다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잠 깬 산새 몇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네를 뛰는 사이 숲들이 바람뭉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북채가 된 가지로 산새의 노래를 바람 배에 쏟아 부으며
탬버린이 된 바람 배를 치느라 부산떤다

입 다물 줄 모르는 가지가 종일 바람바퀴를 굴린다
숲 속은 온종일 탬버린 소리로 탱탱 살이 찐다
세상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아래서 위로 숲을 안고 돌며 바람바퀴를 굴리는
숲의 재주를 배우느라 여름 한 철을 숲에서 산다

19.그대 향기

김지향

상수리 나뭇잎에
우레소리를 몰고 와 바람이 앉는다
상수리나무는 깊은 잠을 버리고
엷은 안개를 게우며 일어난다
그림자도 같이 어둠도 같이
바람 속으로 숨는
상수리 밭은 소용돌이치는 소리의 강이 된다
세력 있는 강의 소용돌이 틈에서
더욱 싱그럽게 더욱 뜨겁게
그대 향기 그대 노래
오늘은 분수로 솟아올라라
솟아올라 어둠을 지워버려라

20.그리다만 가을 한 장

김지향

까슬까슬 빛이 바스러지는 가을엔 바람도 빌딩 꼭지에 꽁지를 내려놓고
쉰다
몸이 싸늘한 바람을 기다리는 나무마다 지름길로 온 따끈거리는
햇볕의 불 주사에 따끔따끔 이마가 빨갛게
익는다
고루 박힌 이빨을 죄다 내놓고 노랗게 웃는
옥수수 머리칼도 붉게 볶여
곱슬거린다
도토리 키 재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꿈치를 쳐들고 있는 고추밭,
진다홍 손가락을 대롱거리는 탱탱한 고추송이에 탁, 탁, 날개를 치며
고추잠자리 떼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건너편 사과밭 사과나무엔 공들여 키운 아기의 발그레한 뺨을
쓰다듬는 거치른 손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이제 곧 가을 공간을 청소할 싸늘한 바람이 몸을 일으켜
그리다만 삽화 한 장 걷어내 화덕으로, 곳간으로 보낼
키를 들고 총총히 달려올 차례만
남았다
☆★☆★☆★☆★☆★☆☆★☆★☆★☆★☆★
그림자의 뒷모습

김지향

그 때
알 수 없는 한 그림자와
마주 서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나는 그에게 자꾸 끌려가고 있었다

그림자는 밤에만 다녔다
그림자가 자고 있을 때
아침이 오지만 그림자는 자지 않으므로
아침은 창 밖에 서 있었다


밤은 가고 또 와도
그림자는 죽지 않았다
무성하게 머리털까지 자라나
내 키를 덮었다
나는 그림자의 갈퀴에 쓸려 내려갔다
앗질앗질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려
마침내 밑바닥에 닿았다
그때였다
어디서 날카로운 한 줄의 빛이
새들어와

그림자를 쏘았다
머리털 갈퀴도 수염도 쏘았다

아, 나는 죽음을 이끌고 나가는
그림자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이겨 버렸다
비로소
나의 창안엔 아침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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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온다

김지향

그해 겨울 나는 정동진 새벽 바닷가 모래 위에 서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시간과 시간 사이 서너 꼭지의 남자와 여자가 안개를 신고 희미하게 서성거렸다
동쪽 산꼭대기에 박힌 한 여자의 눈이 비명을 질렀다 ‘모래시계가 얼어붙었다’
여자의 어깨 위로 한 뼘쯤 더 긴 남자의 고개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동쪽 산마루 밑에서 볼그레한 저고리만 벗어 올릴 뿐 해는 아직 머리칼 한 올
보여주지 않았다 성미 급한 남자가 둑 위에 얼어붙은 돌멩이를 차 던지다 그
자리에서 깨금발로 뛰었다 엄숙하고 신비한 우주의 송신음을 기다리듯 나는
오그라든 목으로 우주의 옆구리에 얼어붙었다 바로 그때 둑 위의 남자가 와~와~와~
소리 질렀다 멀리 발치께의 수평선이 빨갛게 끓어올랐다 점점 몸 부피를 넓혀갔다
문득 바다 배꼽에서 새빨간 모닥불이 물너울에 스르륵 말리고 있었다 나도 겁결에
돌멩이를 던졌다 모닥불은 얼룩도 지지 않고 활짝 웃고 있는 장미다발로 커다랗게
피어올랐다 바로 내 이마 위로 뜨끔거리는 빛이 흐르고 온몸이 얼음에서 풀려났다
얼음이 빠져나간 여자들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모두 주저앉았다 해는 점점
작아지면서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 달고 부지런히 공간 밖으로 가고 있었다
나도 해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아침공기를 부수고 햇살을 쪼개며
희뿌연 공간 한가운데로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잠자는 둑 목에
찢어지는 기침소리를 질러 넣으며 정신 나간 사람들
정신의 복판을 가로질러 기차가 와락 달려들고 있었다
☆★☆★☆★☆★☆★☆☆★☆★☆★☆★☆★
기차를 타고

김지향

내가 탄 급행열차는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열차에서 눈이
사물 1.2.3을 먹는다
햇빛은 덩그렇게 나를 켜고 따라온다
가로수가 눈 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열차는 가만히 서서 가로수를 파먹는다
개망초꽃이 밟히지 않으려고
뒷절음질쳐 궁둥이로 들어와 이마로 나간다
열차는 서서 창문으로 스르륵 뭉개버린다
무리 소나무가 누렇게 뜬 어깨쭉지를 디밀어본다
열차는 서서 발통으로 깔아뭉갠다
밭이랑이 줄을 그으며 달려들었다 짓뭉개진다
논바닥이 찰랑찰랑 물장구를 치며 들어왔다
열차 눈에 물먹이고 지워진다
지우개를 달고 서있는 열차를 타고 내 눈은
사물 1.2.3을 먹고도 눈물 한 방울 내놓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에 벗어두고 눈만 기차를 타고
다 뭉개진 금수강산을 보러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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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길을 버리다

김지향

현관을 나선다
길이 길의 몸속에 내 발을 꽂아준다
“빨리 내 몸을 밟고 건너가 봐, 시간이 없어‘
길이 선심을 쓰듯 내 발을 밀어 던진다
나는 길에 튕겨진다
발이 큰 나는 길에 담겨지지 않는다
되튕겨져 나와 나는 길을 구경한다
시간을 앞질러 달려가는 길머리가 없어진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한다
반복에 반복을 해도 길 머리는 살아 나오지 않는다
‘이런 , 길이 길을 버리다니!’

나도 길을 버린다
길이 나를 버리기 전에
길이 만들어놓은 난삽한 길을 먼저 버린 나는
튕겨져 나와 길 밖에서 길 밖을 꿰뚫어 본다
갈래 갈래로 땅이 쪼개지고 있다
땅은 쪼개지는 대로 길이 된다

길 밖의 길로 내가 가고 있다
오만개의 내가 오만개의 길로 가고 있다
잔뜩 몸을 부풀린 짐차는 짐차의 길로 정면돌파 하고
잔뜩 몸을 움cm린 승용차는 승용차의 길로 정면돌진 하고
나는 내가 만든 나의 길로 정면통과 한다
만일 내가 나의 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오욕칠정의 나의 분신들은 지금 어디로
빙글빙글 우회할지
아찔, 현기증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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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된 꽃잎

김지향

꽃샘바람이 얼굴을 가리고 도둑처럼 쳐들어온다
꽃은 제 몸을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꽁꽁 묶었지만
찢어진 비망록처럼 부욱, 찢겨진다

나무는 제 몸에서 걸어나간 꽃을 보며
뚝,뚝 눈물을 떨군다
무거운 고요가 눈물 위에 떨어진다

옷깃 속에 목을 접어넣은 사람들은
나무의 눈물로 돋아난 새 풀을 못 본 채
마구 짓밟고 간다

신명이 난 바람이 입에 면도칼을 달고
뾰족뾰족 밖으로 내민 꽃의 희망을
줄을 긋듯 주루룩 삭발시킨다

봄들어 속력을 내는 시간을 따라
나무는 꽃잎을 연거푸 토해내고
바람은 연거푸 면도칼로 꽃머리를 부러뜨린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후레지아
부러져 길이 된 꽃의 희망을
한 아름 품어 안고 나는 한바탕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열전을 벌인다
☆★☆★☆★☆★☆★☆☆★☆★☆★☆★☆★
깊은 밤

김지향

별이 꽃밭에 떨어졌다 나는
꽃밭을 한 삽 떠서 마당 가운데
던져 넣었다 마당 전체를 빛이 들고 있다
나는 빛을 손바닥에 퍼 담았다 새나가지 않도록
주먹을 꼭 쥐고 어둠을 넘어와 내 책상 꽃병에 꽂았다
빛은 꽂히지 않았다 꽃밭에도 빛은 한 개도 뜨지 않았다

시간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어둠 속으로 힘껏 떠나간다
사람도 떠나가고 아파트도 떠나가고 길도 가로수도
모두 어둠 속으로 떠나간다 꿈을 담는 그릇은
꿈들을 털어내고 낡아가는 헌것 채 한 개비씩
어둠에게 끌려간다 시간은 죽어가는 헌것들을
어둠에게 넘기느라 죽을 시간도 없다고
투덜댄다 투덜대며 죽어간다


(새로 피어날 내일의 스펙터클 꿈을 새로 만들며)
방문을 닫은 깊은 밤이 내 가슴속 우주에도 가득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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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의 귀

김지향

꽃밭이 있는 고층 아파트 발코니로 이사 온
매 발톱 꽃나무 몇 날은 기가 빠진 듯 졸다
오늘 문득 높은 공기를 맛본 듯
고개를 쳐들고 팔팔 일어나고 있다

쫑긋쫑긋 귀를 세우고 사람 쪽으로
목을 내밀어 흐드러진 세상 소리를 연거푸 퍼먹는다
너무 많은 세상 소리를 뼈째로 허겁지겁 집어삼킨다

말이 내뱉는 가시를 소금물로 알고 들이킨 꽃의 귓불엔
오늘 아침 유리조각들이 매 발톱처럼 뾰족뾰족 매달려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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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혹은 풀밭

김지향

해꼬리를 잡고
삼백 몇 날을 걸어도
보이지 않네

어딘가에 펼쳐져 있을
꿈에만 나타난 풀밭
빛살이 반질거리는 풀밭
장다리꽃이 안개밭으로 뜬
머리위 풍경처럼 걸려서
가늘가늘 숨 죽이고
날개만 떨던 바람이
내 목으로 알싸한 꽃물을
내려보내던 풀밭
숯 많은 풀잎의 귀밑머리 자르며
하늘하늘 살 비비며 마구 짓이기며
바람이 능멸을 해도
아픈 표정 하나 없이
포근한 가슴 열어주던 풀밭
꿈 깨고 나면
보이지 않네

육체를 벗은 꿈에만
가벼운 발이
담장위로 치뻗은 풀의 머리를
으깨고 가는 꿈에만
어머니처럼 껴안아 주던 풀밭,
나는 먼 훗날에도 피어날
삶의 꽃씨 한 톨 심어놓고
발병나게 찾아갔지만 어느 날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잠깨고 나니 갈 수 없네

꿈마저 잃어버린 나는
오늘 대문을 박차고 나가서
지상의 길을 종일토록 헤맨다
휘청휘청 내 키가 꼬부라져 접히도록
달려가는 시간의 뒤통수도 보이지 않도록
삼백몇날을 헤매고 다녀도
꿈에 본 풀밭은 나오지 않네
때때로 잡동사니 화물차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발에 먼지만 진흙처럼 쌓여가는
금지구역이 많은 널따란 철조망 속
내 발이 닿는 곳마다
철조망이 옭아매는 그런 땅만 있네
아, 지상의 삶은 철조망과 진흙
바로 그것이네

길 모퉁이 저 혼자
웃다 울다 하는
외톨이 꽃 한송이의 외로움도
나만 같은
이 삶 속에선
풀밭은 안 보이고
진흙밭에 깊이 박혀
빠지지 않는 내 발자국의 아픔만이
지나간 시간의 증인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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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에 매맞는 바람

김지향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고 어젯밤까지
바람을 따라가던 나는 말했다

바람은 곁에서 힘없이 부러져 있지만
나뭇가지가 바람을 멀리 내쫓고 있지만
나뭇가지엔 불끈불끈 불뚝힘이 출렁이고 있지만

바람이 나뭇가지를 낚아채어
홀랑,몸 벗겨 부끄럽게 한다고 어젯밤까지
나는 분명히 말했다

봄이 되면
바람이 달려와서 나뭇가지에
꽃으로 매달린다고
바람꽃이 봄을 피운다고
바람이 아무리 속삭여 주어도
나와도 같이
믿어주지 않는 나뭇가지가
오늘 보니
바람을 마구 때려 패대기치고 있네
패대기 한번에
봄꽃 한 주먹씩 피어나고 있네
바람은 오늘 종일 나뭇가지에 매맞고 있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
나는 오늘부터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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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 시를 쓴다

김지향

고장 난 시간이 가을 속에 멈춰 섰다

세상의 휴게소는 만원을 이루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나는 갓길로 내쫓겼다
길은 바퀴 없이도 잘 굴러 간다
내 앞에 스르륵 미끄러져 온 길이
가득 담은 나뭇잎의 붓끝으로 빨간 시를 쓴다
한 자국도 옮기지 못하는 창백한 내 발등에
마음 아린 나뭇잎이 쯧. 쯧. 쯧. 혀를 차며
나뭇잎 사이사이 초롱꽃처럼 달랑거리는
수은등을 끌어와 불빛 같은 시를 붓는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온 우주에 시를 쓴다
하늘에다 땅에다 사람의 몸에다
빨간 시를 쓴다)

블랙홀에서 불어온 먼지바람에도
돌담 위에도 터널 속에도 주렁주렁
시가 익어간다
사람들은 숨차게 뛰어온 삶의 굴레를 벗어
가을의 가지에 걸어놓고
가을 내 시를 읽다가 스스로 시가 되어버린다
(높이 올라간 인간들의 투정을 미리 알아챈
눈치 빠른 하늘도 마침내 가슴을 열고
비명 같은 삿대질의 시위로 찢기고 찢겨
뚝,뚝 핏방울의 시를 떨어뜨리며)

시간은 멀지 않아 바퀴를 돌린다고 송신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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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디지털 하늘

김지향

디지털 버턴을 쥐고 나는 손이 붙어 있는지
더듬어 본다
너무 가벼워 날아간 줄만 알고 나는
나에게 육체가 있느냐고
물어 본다
육체가 가벼울 때
나무의 날개 사이로 보인다
하늘이 살이 붓지도 않고 양 옆으로
열림이 환히 보인다

그때 하늘이 먹은
새들이 꽃씨를 물고 팔랑팔랑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나뭇잎이 열매를 매달고 동글동글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바람이 물결무늬 주름진 치마폭을 펄럭이며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햇살이 치마끈을 풀어 땅에 수정기둥을 세우며 나온다
날아 나온 몸 바뀐 존재들은 가벼운 육체로
땅의 안 바뀐 존재들과 하나의 허리띠에 묶여
하나가 된다

나의 디지털 하늘은 이제 배가 푹 꺼져
땅에 내려와 누웠다

우주가 일직선으로 길게 깔려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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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달을 보며

김지향

길을 가다 문득
하늘만 쳐다본 날

가물가물 점 같은 새가
까맣게 떠서
말간 낮달을 끌고 가더니
하얀 몸의 낮달이
진종일 불에 타는 고통으로
이지러지며 혈관이 터지더니
밤이면 진홍빛의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몸이 타는 고통의 낮달을 보며
그때서야 나는 후닥딱,
너에게 준 아픔을 깨달았다
나도 혈관이 터져 진흙이 될 때까지
지켜볼 하나님의 불눈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오늘 내 피곤을 털어낼
원두막 그 뽕나무 집을 찾아
길을 가다 문득
하늘 기슭으로 끌려간 반쪽뿐인
낮달을 보며 뜨끔거리는
바늘 꽂는 아픔
예삿일이 아니다

(영혼은 육체가 없이도 아픔을 알데
하나님의 분신임도 뚜렷이 알데)

길도 중간부위를 넘어선 때에야
빼마른 낮달이 태양의 덤불을
빠져나지 못하듯
나의 우주도 하나님의 손바닥임이
유리알처럼 보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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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수리 중

김지향

오늘도 나는 리모컨으로 세상을 연다

가장 먼저 기지개를 켜는 먼지
사이로 키를 일으킨 빌딩들이
마음 놓고 꺼낸 내장을 말리고 있다
내장 속에 숨어 있던 정적들이
한 소쿠리씩 쏟아진다

정적 밑에 가만히 엎드렸다 툭, 툭,
불거지는 것들이 투명유리 속처럼 보인다
부서진 욕정 부스러기, 배배꼬인 야망 찌꺼기
햇빛의 주사바늘 밑에서 와글와글 끓고 있다

나는 얼른 리모컨으로 빌딩을 꺼버린다
그림자까지 모두 삭제하고
재빨리 장면이 바뀐다

좁다란 블록담 옆으로 측백나무가
길을 끌고 파랗게 간다
돌아보지 않고 가는 길 옆으로
자잘한 곷 나무들을 안고 손을 흔드는
해바라기 긴 허리도 리모컨 눈의 조리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다시 또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빌딩 지붕 위로 길이 떠서 올라간다
피가 하얗게 씻긴 길을 끌고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득히 좁아진 길 끝 거기는 어느 세상일까

아, 쪽문이 보인다
사람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멈추어 있구나
지금 마악 도착한 진공포장지에 싼
한 사람의 손발에선
아직도 야생마 같은 피가
포장지 밖으로 지고 있구나
나는 다시 리모컨의 다른 단추를 누른다
장면이 바뀌지 않는다
리모컨도 들어가 보지 않은 길 끝 세상,
“내부 수리 중”이란 쪽지가
커다랗게 나부끼고 있을 뿐
사람들은 길 끝에서 하얗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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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에게 주는 안부

김지향

어디 사는지
아직도 남아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내일이란 이름에게
나는 안부를 보낸다
해마다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는
내일에게
내일이면 늦어 오늘 나는
일년치의 안부를 한꺼번에 날려보낸다
이번엔 머리꼭지라도 좀
드러내 보라고
내일 뒤 어디에 숨어있을 내일에게까지
두 손으로 안부를 불어 보내면서
안부가 가서 닿는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망원렌즈 먼지를 닦아내고
뒤꿈치의 돌베개를 곧추 돋우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내일에게
뜨거운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나의 노력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에다 들끝에다 바람귀에다
입을 대고
내일의 이름을 불러댄다
목청껏 목청껏 불러댄다
그러나 내일은 어딘가에 들앉아
내 목소리를 묘사하며 웃고만 있겠지
내가 잠잘 때 그도 잠을
내가 죄로 배 부를 때 그도 죄를
내가 거짓말로 속삭일 때 그도 거짓말을
흉내 내겠지
그런 내일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진실임이 알려질 때까지
내가 내일의 사랑을
무식하게 신앙하는 환자임이 밝혀질 때까지
나는 주소불명의 내일에게
오늘 일년치의 안녕 안녕을
한 무더기 띄워 보낸다
그래, 그렇고 말고
내일이여, 안녕!
☆★☆★☆★☆★☆★☆☆★☆★☆★☆★☆★


김지향

작은 제 몸 속에
몇 갑절의 큰 몸을 넣고 있다니!

작은 몸속에 앉아있는
우주의 볼에 돋은 사마귀 같은
내가 그려 넣은 종이비행기
지금 마악 산 너머 하늘 길을 넘고 있음을
말문 막힌 나는 보고만 있다

큰 몸이 보지 못하는 작은 몸
그게 바로 내 눈동자라니!
☆★☆★☆★☆★☆★☆☆★☆★☆★☆★☆★
눈 속의 여자

김지향

표정도 없이 하늘이 웃는다

좌 악 열린 하늘 입에서
소금 알갱이가 내린다
한 여자가 하늘 웃음 속으로 삭제된다
삭제되었다 나온 그 여자가 눈을 깜박일 때 마다
눈썹에서 해묵은 때가 지워진다
소금 가루가 덮어버린 그 여자의 머리가
낮게 내려온 하늘 살이 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손잡은 하얀 우주를
그 여자의 실티 같은 머리칼이 금을 긋는다
하얀 소금 알갱이에 묻힌 여자의
하얗게 씻긴 가슴 속 우주엔
하늘 살을 보내준 이의 눈동자도 담긴다

그 여자는 몸도 마음도 백지의 우주로 재생된다
☆★☆★☆★☆★☆★☆☆★☆★☆★☆★☆★
눈뜨는 잎사귀

김지향

모서리가 살아난 장독대 옆구리
황금날개 바람이 앉아있다
날개는 이내 열리고 바람은 날고 있다
귀를 세워 설치던 진눈깨비는
귀가 잘려 고개를 떨구고
하늘을 깁고 있던 먹구름도
팔짱을 끼고 제집으로 돌아서고
채소 빛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비어있는 마당 열 두 군데를
새로 와서 채우는 열 두 빛 햇살
지구 밖의 봄 돋는 소리도 몰고 와
초록빛 비늘을 뿌린다
황금 실을 뿜어낸다
동면 속에 접어든 오동나무는
꿈을 털고 일어서고
장독대 질항아리도
이마를 쳐들고 깨어난다
엎드렸던 내 의식은 눈썹을 내밀어
저 창 밖의 파도치는 초록물감 속을
눈뜨는 잎사귀가 되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
눈물처럼 떨어지는

김지향

하늘엔 시린 눈이 사라졌다
팔팔 살아서 끓는 정기 쏟아 붓던
그 눈,
이젠 어디로 가고 없다

하늘은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 가슴 뿐
멍청히 떠서 휘모는 폭우에도 귀우뚱거린다

하늘 가슴에 대고
마구잡이로 쏘아 올린 사람들의 돌팔매
녹도 슬지 않고 이제껏 쩌렁쩌렁 박혀 있으니
이제껏 분수처럼 치솟는 돌팔매
피투성이 가슴으로 맞고 있으니
어쩌나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에게
침묵의 깊은 물음 던지는 듯
돌팔매 박힐 때마다
빗물처럼 주루룩, 떨어지는 눈물을

사람들은 그게 사랑인줄
하늘의 가없는 사랑인줄 모른다
☆★☆★☆★☆★☆★☆☆★☆★☆★☆★☆★
눈사람

김지향

다리 긴 바람이 눈을 뜨고 뛰어간다
바람의 손이 머리를 빗기는 안마당이
귓불을 비비며 일어앉는다
땅 밑으로 쫓겨난 나무 뿌리도
뛰어가는 바람의 행방을 잡고 있다
쨍그렁, 깨지는 창밖의 샐로판지 위로
강아지 두엇이 꼬리를 떨면서 튕겨간다
바람만 나와 설치는 빈 뜰에
중절모를 눌러 쓰고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눈썹 흰 사람이 내려와
술렁술렁 아이들을 불러내고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마술 가위를 들고 나와
그 흰 사람의 흰 머리칼을 베어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지우고
그 흰 사람의 흰 손가락을 뽑아
내 이마에 순결의 무지개로 오려 붙이고
술렁이는 뜰 안에서 깊이 잠든
내 의식을 두드리며 마술 가위의 아이들은
오만 개의 눈 뜬 오만 개의
바람소리를 만들고 있다
☆★☆★☆★☆★☆★☆☆★☆★☆★☆★☆★
다리뿐인 햇빛

김지향

나는 발코니 쪽문에서
총알을 날렸다 갈퀴를 세우고 뛰어가던
강이 퐁, 퐁, 퐁, 장파열을 일으켰다
가닥가닥 실타래처럼 잘려나가는
물의 살결들
둑 너머 둑으로 물의 실타래는 마음 놓고
퍼져나갔다
둑을 마구 넘어갔다
바둑돌들이 빠진 둑
이마가 뜯겨나갔다

(둑 밖으로 쫓겨나온 물고기들이 눈을 뜨고 잔다
주사바늘을 손톱처럼 세운 햇빛이 물고기에게
불주사를 놨다 까맣게 타버린 물고기들에게
햇빛은 연속사격을 가했다)
나는 햇빛의 뷸꽃 사격이 나를 겨냥한 줄도 모르고
또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햇빛을 관통했다 1초 동안
내 눈에 튀어든 빛 가루가 까맣게 눈을 태웠다
까만 눈을 끌고 간 블랙홀, 1초의 어지러움 너머
빛 부신 은빛나라가 반짝였다 1초 동안
강물을 뚫고 햇빛을 뚫어야 보이는 하얀 나라!
햇빛은 수평도 수직도 아닌
땅도 나라도 없는 빼 마르고 기다란
다리만 촘촘하다
다리에 구멍을 내도 금방 아물어버리는 그
물렁살이 은빛의 하얀 나라를 감추고 있다니!
☆★☆★☆★☆★☆★☆☆★☆★☆★☆★☆★
다시 또 절망에게

김지향

오늘도 길은 낯선 곳으로 뚫고 간다

시간은 날마다
내 발에 노끈을 묶어 낯선 길로 끌고 가지만
(낯선 시간에 희망을 걸고)나는 따라 가지만
그 곳도 똑 같은 세상이구나
절망아,그 곳에도 황사바람 몰아부치고
산성비 쏟아지는 진펄이구나

우회선도 없는 일차선로 중앙부에 접어든
내 발은 위험과 손 잡고
점점 거세게 몰아부치는 황사바람에
키가 다 구겨져서
점점 거칠게 퍼부어대는 산성비에
살갗이 닳아 떨어져서
쓰러졌다 일어남을 반복하며
오늘도 길에게 코가 꿰인 내 발이
따라가며 이제 그만 불시착이라도 하고 싶다

시간의 노끈이 내 발을 놓아주기를,
삶과 죽음이 폭파되어 한 세계로
어우러지기를 꿈 꾸며
누군가에게 들키면 지상에선
영영 소각되어 버릴 위태로운 꿈을 몰래 꾸며
세상을 깨뜨렸다 일으키는 의식운동을 되풀이한다

절망아, 내가 너무 두려움없이
낯선 길을, 낯선 시간을 사랑했나 봐
깨끗한 그 곳인줄 알았던
내 믿음이 배반 당한 삶(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절망아,네게 길들여진 삶
나는 그 삶의 주인일까
삶이 나의 주인일까
아직도 석연치 않은 물음을 안고
오늘도 나와 삶은 낯선 시간 속으로 가고 있다.
☆★☆★☆★☆★☆★☆☆★☆★☆★☆★☆★
다시 열린 봄날에

김지향

활짝 열린 봄 속으로 들어선다
겨우내 외롭던 꽃밭이 식구들로 가득하다
빵긋거리는 노랑 빨강 하양 뺨들을 다독이며
*창준의 손을 잡은 나는
꽃으로 피던 시절을 생각하며 걷는다
아이의 손에는 빨간 꽃이 내 손에는 하얀 꽃이 복사된다
지난 겨울 떨군 꽃의 눈물이
다시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어린 세대와 낡은 세대가 서로 다른 생각 속에
꽃들을 복사한다
시간은 그 시간이 아닌데 꽃들은 왜
그 꽃이지? 하고 아이가 물어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이의 말은 왜? 왜? 로부터 시작하고
길어지는 나의 대답엔 귀를 닫아버린다
대답에 궁색한 나는 아이가 스스로 알아갈
길만 안내해준다

아이는 얼마 안가 혼자서 봄 속을 달려갈 것이다
☆★☆★☆★☆★☆★☆☆★☆★☆★☆★☆★
따먹은 잡동사니

김지향

오늘도 안 가본 길을 걷는다

(낯설게 달려오는 세상
따먹고 싶은 나는 방에 갇히지 못한다)
나는 날마다 휴대폰으로
세상을 따 먹는다
온갖 잡동사니를 물어오는
휴대폰 머리꼭지의 머리카락
그에겐 하늘 내장도 저장되어 있다
길을 가다 문득 하늘을 따먹고 싶어
산꼭대기 상상봉으로 발을 끌어 올렸다
가만히 누워서 하늘의 혈관을 찾고 있을
그 때 그 하늘을
내가 백발백중의 투창질로 구멍을 냈다
휴대폰이 하늘 풍선 한 자락을 움켜쥐고
풍선 배꼽을 탕 ,탕, 탕, 우그러뜨렸다
한쪽 귀퉁이가 먼저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휴대폰 머리칼이 먹어치운 하늘이
휴대폰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너무 많은 하늘의 영양소들이 엉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기를 패대기치고 있다
별은 별끼리의 도킹으로 부화가 되는지
휴대폰 입으로 별싸라기가 새나와
온몸에 아이섀도우를 칠해 놓고
삐리리~~ 삐리리~~ 부딪는 마찰음으로
내 청각신경을 괴롭힌다
한 요리사가 허드레 잡동사니 날것들을
냄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며 볶아대는 소리
냄비를 굴릴 때마다 휴대폰 온몸이
난잡하게 뒤틀린다 뒤틀리는 휴대폰
아, 알고 보니 내 속이네 내 속을 뒤집어 놓고 있네
나는 사람일까 물체일까
무엇이든 꿀꺽 삼키기만 하면 소화가 되어버리니!

따먹은 하늘의 잡동사니
내일은 또 무엇이 되어 태어날지?
☆★☆★☆★☆★☆★☆☆★☆★☆★☆★☆★
때로는 나도 증발되고 싶다

김지향

열손가락을 부채살처럼 펴고
컴퓨터 키보드를 한꺼번에 눌렀다
잠시 엷은 주름 사이
그림자뿐인 유리집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녀는 들어갈까 말까 망설임도 없이
습관적으로 머리꼭지를 드밀어넣었다
유리집에 잠입한 그녀는
간첩처럼 귀를 세우고 몰래 벽에 걸려 엿본다
정물 하나 없는 움직임들이 무리무리 지나간다
나뭇잎 널브러진 키 낮은 산들이 지나가고
이마 훤한 지붕들이 지나가고
강아지떼가 고양이떼가 돼지떼가 지나가고
먼지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해묵은 미해결 건수가 지나가고
지나가는 건수들은 모두 줄을 서듯 입에
앞의 꼬리를 물고 물고 물고
초고속으로 지나간다
형상을 가진 사물들은
모두 발도 없이 유리집 사이버 속으로 들어간다
인터넷 A가 인터넷 B와 인터넷 B가 인터넷 C와
불똥을 퉁기며 번개처럼 접속된다
온 우주가 인터넷 속에서 한 개
점이 되어 그녀 두뇌 속으로 도랑물처럼
기어들어간다
나는 삐걱거리는 두뇌로
가끔은 형이상 속으로 증발되고 싶다.
☆★☆★☆★☆★☆★☆☆★☆★☆★☆★☆★
로봇과 가을

김지향

여름이 시들시들 시들 때
나는 내가 키우는 로봇을 풀어놓았다

파닥파닥 팔을 부딪치며 보듬고 있던 모닥불을
옆의 옆 앞의 앞 나무 겨드랑이에 쏟아 부었다
부글부글 끓는 나무 가슴팍에서 불길이 척추 위로 치뻗었다
로봇에게 지고 만 여름이 꼬리를 스르륵 감추었다
나무 겨드랑이엔 불똥 같은 뾰루지가 입을 뽀르통, 내밀었다

찻길 너머 산속, 키 낮은 풀밭에서도
로봇이 화약통을 엎질렀다
온 산이 빨갛게 성이 났다
찔레꽃 덤불도 엉겅퀴도 단풍나무도
낯익은 얼굴들이 새빨갛게 불이 났다

당분간 시간은 가을에게 발목 잡혀 산속 깊이 주저앉았지만
불길 속을 혼자 달려가는 불덩이 로봇, 멈출 줄 모르는
나의 로봇,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온몸에 화약통을 달아준 나는
나의 서투른 고집 같은 시행착오를 후회하지만.
☆★☆★☆★☆★☆★☆☆★☆★☆★☆★☆★
리모컨과 풍경

김지향

휴일
심심한 저녁 때
나는 창가에서 잠자는 리모콘을 깨운다
리모컨의 뇌세포는 나보다 훨씬 개수가 많은지
나보다 먼저 내 생각을 알고 있다

리모컨이 창 밖의 창을 열어제낀다
깊숙이 집어넣은 내 눈에 들어온 사람들
가라앉은 몸속에 다 저문 삶을 꼬깃꼬깃
접어 넣고 앉아 있다

사람을 지나 창밖으로 몸을 누인
강변북로로 간다

멀리 다림질이 잘된 빌딩 머리에
홍시 같은 햇덩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몸이 뭉개지고 있다
빌딩 목으로 넘어가는 다리 짧은 시간이
원추형으로 으깨진 핏덩이 몸을 끌어간다

꼴깍, 나의 리모컨 조리개가
전기 고압선에 얽혀 뇌세포 한 둘쯤 죽어버렸는지
강변 한쪽 풍경이 지워졌다 한쪽 구석은 접혀졌다

접혀진 풍경 옆구리 버티고 선 다리 사이
또 한개 다리가 강을 건너뛰고 있다
눈에 안약을 넣은 수은등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강변북로의 삶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접혀진 풍경을 펴본다
뒤로 밀쳐진 사람들이 나온다 어둠이 되고 있는
사람의 의미 있는 아픔들이 내다본다
방금 빌딩 목울대로 넘어간 햇덩이의 각혈처럼

(바깥 풍경만 보는 이들은 아무도 접혀진 삶의 아픔을 모르지만)

눈치 빠른 나의 리모컨은 아직 자지도 않지만
남은 다른 쪽의 풍경을 다음 휴일로 넘겨버린다
깊은 밑바닥이 드러날 땐 얼른 조리개를 꺼버리는
리모컨, 나보다 지능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
망원렌즈와 시라세니아 잎

김지향

길과 강 사이가 붙어 있다
붙어 있는 틈새를 뒤로 빼내며
키를 쑤욱 뽑아 올린
하얀 머리의 아파트 발코니가
주춤 뒷짐 지고 서 있다

아파트 머리를 뒤로 밀며 강으로 눈을 내민 망원렌즈는
강물을 복사뼈에 걸치고 바삐 가는 시간을 붙잡느라 부산떤다

낮에는 하늘에 이마 내걸고 오지랖에 하늘 말을 받아 담는
밤에는 강변에 귀를 던져 허드레 폐지 같은 사람의 말들을
귀로 주워 먹는 아직 나이 어린 S아파트

몇 덩이 정적 같은 그의 내부가 궁금한 나의 망원렌즈는
아름다운 정적 내부로 몸 전체를 밀어 넣었다
종일 팔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던 시라세니아 잎사귀
그가 렌즈의 몸 전체를 움켜쥐었다 앗찔,
혼신의 눈을 모으고 뚫어보는 렌즈 사면이 꽉 막혔다

궁금증의 내부, 아래 위 사방에서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
소리와 소리가 뛰어가며 부딪는 운동장이 되었다
몇 포기 남지 않은 머리칼이 소름처럼 윗마을로 치켜서고
심장박동소리가 심지 닳은 호롱불로 가물거리지만
아직 맑은 영혼으로 암호 같은 출구를 찾으며
나의 망원렌즈는 강변 S아파트 내부의
정적을 깨뜨리는 그 시라세니아 잎 속에서
아직은 살아 있다.
☆★☆★☆★☆★☆★☆☆★☆★☆★☆★☆★
몸살 앓는 하늘

김지향

간밤 내
깔깔, 봉오리 웃는 소리만 났다

아침에
하늘이 한 뼘도 남지 않았다

봄 내
하늘은 가득 찬 꽃잎으로 몸살을 앓는다

해는 어디에 있는지
진종일 빨간 명주실만 내려보낸다
☆★☆★☆★☆★☆★☆☆★☆★☆★☆★☆★
바람과 바다

김지향

어젯밤 새도록 바람의 회초리에 매 맞은 바다
아침에 보니 눈꺼풀이 잔뜩 부어올랐다

바람은 바다에게 품고있는 잡동사니를 내놓으라며
아침에도 소리 높여 호통을 친다

바다는 무엇이든 잘도 삼켜버린다
배속에 넣고 있는
우럭 미역 명태 조개 물지렁이 고래 수달 바다쥐빠귀 불가사리
그들의 어린 것 까지 바다가 삼킨 잡동사니들은 헤일수도 없다
잡동사니도 바다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보물이 되어버린다

바람은 때때로 바다에게 보물을 토해내라며
크게 소리치며 바다 몸통을 돌려가며 패대기친다
살이 뜯긴 바다 가슴이 오늘 보니 움집처럼 패였다

바다 뼈가 다 들어나도 품고 있는 보물들은 나올 기미가
서푼어치도 안 보인다

(잡동사니들은 바다 깊은 가슴 안에서
찰삭찰삭 물장구를 치며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문득 바람 배를 가르며 전조등을 켠 유람선 한 채
발을 멈추고 바다 가슴이 보내주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 바람도 함께 서서 잠잠히 듣다가
신명이 났는지 어깨춤을 추며 크게크게 박수를 보낸다

바람은 바다 보물에 쏟은 끈질긴 욕심을 툭, 끊고
유람선을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없다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바다는 지금 오케스트라 연주로
한창 뜨겁게 끓고 있다
☆★☆★☆★☆★☆★☆☆★☆★☆★☆★☆★
바람을 타고

김지향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 마다 지퍼를 열어 놓고
바람의 멱살을 휘어잡고 바람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 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 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 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생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집어넣으며
터널 같은 세상 한 바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 간다.
☆★☆★☆★☆★☆★☆☆★☆★☆★☆★☆★
바람의 반란

김지향

바람이 일어선다
나뭇잎이 나부끼는 가지에서 뚝 끊어져
서쪽 하늘 뺨에 걸려 이빨을 갈고
햇살은 동쪽 산 이마에서 발을 옮기지 못한다

바람이 일어선다
해가 빛을 잃고 구름 뒤에서 물구나무로 벌을 서고
아까부터 바람이 하늘 밖에 세워둔
비가 슬슬 바람의 눈치를 보며 뛰쳐나와
수직으로 빗금을 그으며
땅에 부딪힌다 몸이 으깨진다

바람이 일어선다
땅이 키우는 풀머리가 부러지고
풀머리 밑으로 처박혀 죽은 비로
땅이 지워져 버린다 조금씩 비의 시체에
파먹혀 지워지는 땅을 보는 바람
아직 심장이 멎지 않은 땅에 크게 숨을 불어넣는다
(땅이 없이는 바람의 스펙타클도 허사임을 깨우치고 땅
전체에 엎질러 놓은 반란을 한 장 한 장 걷어내기
로 했음)

바람이 일어선다
풀잎과 땅을 움켜쥔 주먹을 풀고
땅의 가슴에 박힌 대못의 상처를 치료 하기로
바람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
☆★☆★☆★☆★☆★☆☆★☆★☆★☆★☆★
바람이 돌아온다

김지향

달빛이 허연 뼈를 뽑아들고
길 모퉁이에 비켜 서 있다
흰옷 입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밤을 썰어내는 톱질 소리를 내며
구멍 뚫린 공간을 빠져 나간다
시간을 쏠아먹는 좀 벌레가
발소리를 이고 땅 밖을 기어간다
귀가 게우는 개구리 소리를
둑 모가지에 걸어두고
품팔이 갔던 바람이 돌아온다
조용하다
달이 툭, 땅 가득 떨어질 뿐
흰옷 입은 나무들의 눈이 깨져
사방에 흰빛을 뿌릴 뿐
바람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발끝으로 간다

김지향

사람은 가고 없는 강변 의자에는 눈송이가 몇 앉아
옛날이야기 속으로 가고 있다 눈송이 몇이서 걸어가는
시간의 자국마다 소복소복 모여앉아 여럿이 되고 무리가 되어
입 열린 호주머니에서 옛날이야기를 풀풀 꺼내놓고 앉아있다

한참 후엔
의자 혼자 남겨두고 서로 손을 잡은 눈송이가 무리무리
사람의 머리를 올라타고 부지런히 가고 있다 눈이 오는 날은
잠자는 세상이 깰까 봐 시간도 까치발로 뛰어 간다

눈을 머리에 얹은 두 세 사람은
팔짱을 끼고 지나간 날의 가슴에서 자고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무겁게 껴입은 이 시대 사건들 위에 겹쳐놓고 구시렁거리며
발끝으로 가다가 무릎으로 가고 있다

(사건의 중간 부위에 빠지면 무릎까지 파묻힌 몸을
빼낼 줄도 모르고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
그것이 무덤인줄은 빠진 뒤에야 깨닫는다.)
☆★☆★☆★☆★☆★☆☆★☆★☆★☆★☆★
발이 달린 사랑

김지향

사랑은 가슴에서 산다
가슴에서 사는 사랑이
베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알맹이가 없음
하고 나는 손을 쳐든다
혼자서 이렇게,
나의 실험대에 올라온 사랑을
현미경으로 뚫어보았다
사랑, 그 자유분방주의자는
거침없이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떨어져 서로 반목하며
제 갈 길로 갈
궁리에 빠져있었다
서로 다른 머리 발 손이
한 덩치로 얽혔을 뿐
틈틈이 발은 손, 손은 발을 배어낸다
그렇지, 그날도
한 쪽 발이 베어져 나갔었지
베어낸 자리엔 재빨리 구멍이 들어앉았지
구멍은 자기의 부피를 키우려고
나머지 사랑지체도 내쫓으려 했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사랑발이 잘려나간 빈 칸을
나는 구멍이 차지하지 말게 하려고
떨며떨며 한 쪽이 기우뚱한 가슴으로
사랑 발을 붙잡아오려고 찾아 나섰지
세상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사건 사이
어둠 사이 시기 질투 분쟁 사이
어디에 내 사랑의 발은 걷고 있나
일곱 번씩 일흔 번도 용서해주며
사랑발이 제 맘대로 잘려나간
무례를 용서해 주며
아, 일곱 번 째 용서함
바로 그 때였다
나의 사랑 발은
세상 구석 어느 개골창에 빠져
어둠 그것이 되어 있었다
발톱 한 귀퉁이에도 제 모습이
남아있지 않게,
나는 이 사실을
사랑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이 엄청난 오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랑 발을 집어 들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소리 질렀다
돌아다 본 사람들은
그게 이전부터
어둠이라고 우겨댔다
내 가슴에서 배어져나간
사랑의 발임을 믿지 않는 동안
실은 그게 나도 모르게
어둠이 되어버린 나의 발임을
사람들이 어둠을 보지 않고
나를 보며 웃는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아채고 소스라쳤다
얇은 바람 이빨에도
삭둑삭둑 잘려지는 보드라운 잎사귀
사랑아,
집을 나가면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는
그러므로 되돌아 올 줄도 모르는
눈썰미 없는 사랑아~
하고 나는 골목어귀에서
지는 해를 붙잡고
찾아낸 사랑의 발을
그 어둠을 씼는다
☆★☆★☆★☆★☆★☆☆★☆★☆★☆★☆★
방안의 삶

김지향

잘 익은 봄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깨끗이 세탁된 볕이 만리로 뻗은 오늘
사람은 모두 볕이 차단된 방에서
컴퓨터 몸을 만지며 쏟아져 나오는 깨알 글자의
바둑알 부딪는 소리에 빠져들어 있다
컴퓨터 바둑알 소리로 팽팽한 방에서
헤엄치는 사람의 눈과 손은
바깥 세상의 산과 들이 게우는 생선
비늘 같은
생기와 햇볕을 모두 만진다 그리고 지워버린다

바깥 기억들이 점점 지워지는
컴퓨터가 사람 몸 속에 들앉은
방안의 삶
지난 세대에겐 낯익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잘 맞춰 입어야 할 컴퓨터 삶의
한가운데 와 있으니
이젠 컴퓨터 생리에 길들여져야 할밖에

시간과 손잡은 컴퓨터의 속력이 불편하다고
컴퓨터 생리가 너무 빡빡해
시간 밖 세계로 궤도 이탈하고 싶다고
그녀는 투덜대지만
자꾸 뒤로 밀리는 그녀 두뇌가
궤도 이탈을 연기해 낼지?
궤도 이탈을 위해 눈을 접고
활짝 날개를 펴 볼지?

창 밖 잘 익은 봄 거리가 그녀를 맞으려고
깨끗이 세탁된 볕을 깔아놓고 있지만.
☆★☆★☆★☆★☆★☆☆★☆★☆★☆★☆★
백지 공간

김지향

어제까지 거뭇하게 그을린 길이
새하얀 살에 금을 내고 간다

창밖엔 꽁꽁 얼어붙은 허드레 세상이
속살을 내놓고 앉아있다

빳빳한 허공을 붙들고
척추를 연거푸 눕히는 눈발을 베며
한 줄로 줄서기 하는 갈가마귀 떼
허공에 대롱대롱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다

쉬지 않고 오는 눈발에 매 맞는
가로수 하얀 바지가랑이 사이
자꾸 뒤로 미끄럼 타는 차량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는 구세기 세상
누더기 소리들을 깔아뭉개는 중이다

별똥별도 숨어버린 밤
백지로 채워진 공간에 남은
한물간 세상도 죽어 있다

내일 새 세기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햇빛은 날을 펴 놓지 않아도 된다.
☆★☆★☆★☆★☆★☆☆★☆★☆★☆★☆★
벽 허물기

김지향

바람도 빗겨간 가슴 넓은 산줄기를 안고
안개가 명주실 치마폭을 말아 올리는 중이다
햇살이 아득히 먼 발아래서 자꾸 바스라진다
새파란 가슴을 드러낸 산줄기들 바람에 쓸린
기러기 한 두름 안아드리고 있다
방금 마악 허공 위의 하늘을 찢으며
치솟은 우주선 한 채,
우주선을 타고도 세상을 내다보는 사람들 손엔
손가락만한 디카 폰 하나씩 들려있다
디카폰은 잽싸게 구름 살을 헤집고
옆으로 지나가는 세상 풍경에 드르륵
밑줄을 그으며 풍경눈알에다 새겨 넣은 의미를
몽땅 베껴 낸다
우주선이 우주정거장에 발을 내릴 땐
우주에서 발사하는
발통 없이도 시간을 잘 굴리는 비행접시 몇 채
세상 창공으로 떠난다
바람소리만 걸려있는 지상정거장에는
수많은 어린왕자들이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키를 휘청이며 별을 찾고 있다.

(세상에서 하늘 위의 하늘로 오가는 사람들 일찌감치
육체에서 육체 위의 육체로도 들락거리고 있었네)
☆★☆★☆★☆★☆★☆☆★☆★☆★☆★☆★
별은 내 눈에서 뜬다

김지향

내가 만지는 사물마다 머리 조아리며 굴리는
쟁·쟁한 은방울의 합창
별은 내 눈에서 뜬다는 발신음 한 소절을
또렷하게 열린 내 귀가 또박또박 주워먹는다

지난날 하늘의 셀로판지에 반점으로 돋던 별
그가 이제 보니 내 가슴에 새파란 피멍으로
푸욱, 박혀 알을 낳는지 삽시간에
나의 우주가 청보석 복사기가 되었네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가슴의 블랙홀 벽에 낳은 알을 주욱―
널어놓는지?)

오늘은 내가 별에게 신발을 신겨준다
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에게서
새로 그린 삽화 한 장 튕겨나가듯
단숨에 블랙홀 요새를 철거해버리고
고속 디지털 안테나를 타고 뛰쳐 나가네

(하늘도 하늘의 하늘도 아닌
내가 눈을 얹는 거기에 작은 우주같은
내 별은 수도 없이 내 눈에서 뜨지만)

별아, 이제는 해산의 아픔도 없는
별아,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자주 몸 바꾸는
별아, 내가 목청껏 불러도 빙글빙글 바뀌는
성대로 나를 어지럽게만 하는
별아, 이제는 그만 내 눈에서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
☆★☆★☆★☆★☆★☆☆★☆★☆★☆★☆★
봄 명주실 웃음

김지향

오늘 문득 실바람이 세상을 열어젖힌다

실바람 손에 든 초록 칩을 나뭇가지 겨드랑이마다
꼭꼭 묻는다 나무 겨드랑이엔 초록 손톱이 돋아나고
손톱 밑에선 뽀르통 내민 새 입술을 열어
진달래 개나리 초롱꽃 뻐꾹채 노루귀 제비꽃
줄줄이 명주실 웃음을 좌악 널어놓는다

실바람 요술지팡이에 올라탄 나비 몇 마리
몇 됫박씩 꽃가루를 흩뿌리며 세상의 몸에 봄을 입힌다
깔 깔 깔 세상은 종일 명주실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 웃음을 따라 날아온 제비도 명주실 웃음을 날개에 태워
우주 밖으로 날아가느라 부산떤다

나는 종일 봄 웃음을 퍼먹으며
한 발 더 진화한 세상 속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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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 詩 모음  




1.[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2.<나의 침실로>
"가장 아름답고 오__랜 것은 오직 꿈 속에만 있어라"
__'내말'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 가련도다
아,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도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두운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____뭇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____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 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 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____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___
내 몸에 파란 피____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리듯, 마음과 목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_____
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두운 밤 물결도
잦아 지려는 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3.-병적 계절(病的季節)-


기러기 제비가 서로 엇갈림이 보기에 이리도 설은가.
귀뚜리 떨어진 나뭇잎을 부여잡고 긴 밤을 새네.
가을은 애달픈 목숨이 나누어질까 울 시절인가 보다.


가없는 생각 짬 모를 꿈이 그만 하나 둘 잦아지려는가.
홀아비같이 헤매는 바람떼가 한 배 가득 구비치네.
가을은 구슬픈 마음이 앓다 못해 날뛸 시절인가 보다.


하늘을 보아라 야윈 구름이 떠돌아다니네.
땅 위를 보아라 젊은 조선이 떠돌아다니네.




4.-통곡(痛哭)-


하늘을 우러러
울기는 하여도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닯아
하늘을 흘기니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 마라
달도 뜨지 마라




#[작가소개]
이상화(李相和, 1900~1943) 호는 상화(尙火). 대구출생.
경성중학 3년 수료하고(1917),그해강원도 일대를 방랑했다.
이상화의 작품활동은 그가 동향 친구인 현진건의 소개로 가담한
<백조>창간호에 <말세의 회탄>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작품 활동은 대략 초기에는 <백조>그룹 등과 함께
하면서 <나의 침실로>롸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1924년 경을 고비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식민지하의 민족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 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혼으로 상승시킨 암흑기의 민족 시인이자 민중시인, 저항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여러차례 감옥 생활을 하였다.
백기만이 엮은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대표작에는 1926년 6월,<개벽>70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가상(街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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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 모음 30편

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 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2. 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주었다

3. 그때엔 흙에서 흙 냄새나겠지

나희덕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4. 그런 저녁이 있다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 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5. 기억의 자리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6. 길 위에서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7. 너무 많이

나희덕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8.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9.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나희덕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10. 땅끝

나희덕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넸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11.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12. 門이 열리고

나희덕

한 개의 門이 열려

며칠째 눈발이 천지를 메우더니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발들은 모두 묶이고 말았네

마른 풀대도

시린 발목을 눈에 묻고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네

소리들도 갇혔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가장자리는 얼어가지만

흐르는 물만이 門을 닫지 않아

나는 물소리 앞에 쪼그려 앉았네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당신에게로 흐르는 水門만이 남았네

눈송이를 낚으려 하나

물에 닿는 순간 사라져버리네

젖은 눈 속에 젖은 눈,

그 열린 門으로 나도 따라 들어가네

13.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14. 별

​           -나희덕-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어두운 무한천공을 한없이 떠돌다가

가슴에 한 점 내리박히는 일

그리하여 생명의 입김을 가지게 되는 일

가슴에 곰팡이로나 피어나는 일

그 눈부심을 어찌 볼까

눈물 없이 그 앞을 질러 어떻게 달아날까

밤하늘 아래 얼마나 숨죽여 지나왔는데

얻어온 별빛 하나 어디에 둘까

어느 집 나무 아래 묻어놓을까

15. 비 오는 날에

나희덕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16. 빈 의자

나희덕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위에 번져 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 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17. 산 속에서

나희덕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 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18. 산딸기 익을 무렵

나희덕

아기를 들쳐 업은 한 여자의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네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를

숨어서 도란거리는 지붕들을

입맞출 수도 없이 낮은 곳에 피어나

잎새 뒤에 숲 뒤에 숨은

작은 마을을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그 울음에 산딸기 좀더 익으면

땅거미가 내려와 붉은 열매를 감추는 저녁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들었네

산딸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무사하라 무사하라 부르는 그 노래를

녹슬어가는 함석 지붕 아래서

나는 들었네

19. 살아 있어야 할 이유

나희덕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나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20. 새떼

나희덕

철새들이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

길을 잃지 않으려 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한몸이어서입니다

티끌 속에 섞여 한계절 펄럭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는

저 두 사람

그 말없음의 거리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온기에 젖어

나는 두리번거리다 돌아갑니다

몸마다 새겨진 어떤 거리와 속도

새들은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혹시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절이 그들의 가슴 위로 날아갔다 해도

21. 序 時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22. 聖 느티나무

나희덕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고묵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찬가지 끝으로 잎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그루 용수처럼

제 아궁이에서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럻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 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살을 달여 내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가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체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23.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24. 심장 속의 두 방

나희덕

나를 좀 지워주렴.

거리를 향해 창을 열고

안개를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증발해버렸다

나를 좀 지워주렴.

짙은 안개를 들이키고도

사물들은 여전히 건조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으로

안개가 밀물처럼 스며들었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몸 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의자가 젖고 거울이 젖고

사물들은 어느새 안개의 일부가 되었다

심장 속에 나란히 붙은 두 방은

서로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두 방을 오가는 것은

소리 없이 출렁거리는 안개뿐

25. 이따금 봄이 찾아와

나희덕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 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26. 정신적인 귀

나희덕

어디에 두고 왔을까

두 귀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소리를 끌어모아 어루만지던 귀

소리의 혈맥을 더듬어

그 통점과 경락을 찾아내던 귀

허공의 거미줄을 따라

미세한 움직임에도 흔들리던 귀

어느 순간 먹먹해졌다

귓바퀴는 멈추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에 갇힌 건반처럼

정신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난청과 실어증의 나날,

바람이 헛되이 녹슨 현들 울리고 간다

27. 젖기 않는 마음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28. 한 포기의 집

나희덕

장마가 들이닥치기 전

배추를 거두려고 서두르는 손

잎을 들출 때마다

한 포기씩 뽑힐 때마다

수룩수룩 딸려나오는 목숨들,

잎부터 뿌리까지 한 틈바구니도 남기지 않고

푸른 지붕 아래 오글오글 정들어 살던

온갖 날것과 기어가는 것들이여.

한 목숨에 붙은 목숨들

이리도 많다니!

한 포기의 배추가

실은 한 채의 집이었다는 걸 안다 해도

장마 오기 전 서두르는 손들,

더 멀리 날아가는 날개들,

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작은 발들.

29. 흐린 날에는

나희덕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30. 흔들리는 것들

나희덕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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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시모음 15편

《1》
3월

김광섭

3월은 바람쟁이
가끔 겨울과 어울려
대폿집에 들어가 거나해서는
아가씨들 창을 두드리고
할아버지랑 문풍지를 뜯고
나들이 털옷을 벗긴다

애들을 깨워서는
막힌 골목을 뚫고
봄을 마당에서 키운다

수양버들
허우적이며
실가지가 하늘거린다

대지는 회상
씨앗을 안고 부풀며
겨울에 꾸부러진 나무 허리를 펴 주고
새들의 방울소리 고목에서 흩어지니
여우도 굴 속에서 나온다

《2》
가을 술잔

김광섭

지독한 가을을 앉혀놓고
술잔을 기울인다

나뭇잎은 떨어지려 몸부림치는데
굵은 힘줄로 붙잡은 손은 놓으려 않고
삶은 술 취해
밤을 맞는다

허전함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스산히 불어오는 바람
누런 낙엽 되어가는 눈물
비웠다 채워지는 술잔
눈에는 취기만 오르고
작은 술잔 가을 삶은
방황하는 달빛이 된다

찌그러진 술잔을 비춰주는 가을
어쩌면 술보다도
가을에 취했는지도 모른다

헛헛한 세월 잔에
달빛을 너무 많이 마신것같다

《3》
가을이 서럽지 않게

김광섭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 시간이 아니어도 한 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라 영원히 주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을 거울삼으리니
패물 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에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4》
가을이 서럽지 않게

김광섭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 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 시간이 아니어도 한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리라 영원히 주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을 거울삼으리니
패물 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에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5》
겨울날

김광섭

마당에서 봄과 여름에 정든 얼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그렇게 명성이 높던 오동잎도 다 떨어지고
저무는 가을 하늘에 인가의 정서를 품던
굴뚝 보얀 연기도
찬바람에 그만 무색해졌다

그런 늦가을에 김장 걱정을 하면서 집을 팔게 되어
다가오는 겨울이 더 외롭고 무서웠다
이삿짐을 따라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두만강 건너는 이삿군처럼 회색 하늘 속으로
들어가 식솔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으니
어머님 한 분만 오시잖아서 별안간 앞니가
무너진 듯 허전해서 눈 둘 곳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축대에 검정 포장을 치고
초롱을 달고 가던 이튿날 목 없는 아침이
달겨 들어 영원한 이별인데
말 한 마디 못하고 갈라진 어머니시다

가신 뒤에 보니 세월 속에 묻혀 있는 형제들 공동의 부엌까지
무너져 낙엽들이 모일 데가 없어졌다
사람이 사는 것이 남의 피부를 안고 지내는 것이니
찬바람이 항상 인간과 더불어 있어서
사람이 과일 하나만큼 익기도 어려워
겨울 바람에 휘몰리는 낙엽들이 더 많아진다

고난의 잔에 얼음을 녹이며 찾는 것은
그 슬픔이 아니요 겨울 하늘에 푸른빛을 띤 봄이다
그 봄을 바라고 겨울 안에서뱅뱅 돌며
자리를 끌고 한 치 한 치 태양의 둘레를
지구와 같이 굴러가면서
눈과 얼음에 덮인 대지의 하루를 넘어서는 해질 무렵
천장에서 왕거미가 내리고
구석에서 귀또리가 어정어정 기어 나온다
어느 날 목 없는 아침이 또 왈칵 달려들면
이런 친구들에게 눈짓 한 번 못하고
친구들의 손 한 번 바로 잡지도 못하고 가리라

《6》
나를 찾아가는 길

김광섭

보따리 착착 접어
옆구리 매달고
나를 찾아 나선다

걷다 걷다
눈 오는 동산(冬山)에 이르러
그리움 둘둘 말아 소로록 빨아보니
낮도 타고
밤도 타고
자국마저 태워 달란다

벗하자고
바람이 퉁탱 다가와
막걸리 한 사발 주며 하는 말
"엄부르 덤브르 사는 거야"

옮기는 걸음 얼근한데
그냥 가기 미안하여
안 들릴 듯 인사한다
"임을 찾아야 나를 찾는데"

등 뒤로 삶이 가득히 따라온다.

《7》
나의 사랑하는 나라

김광섭

지상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세계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딪혀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나는 어디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에서 영광을 찾아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의 문이 열리는 날
고민을 상징하는 한 떨기 꽃은 찬연히 피리라
이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꿈이어니

《8》
마음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9》
사랑을 꿈꾸는 그대에게

김광섭

사랑을 꿈꾸는 그대
마음 먼저 열어 주세요

지난날 아팠던 추억일랑 미련없이 지워버리고
갇혀 답답하던 갈증
산산에 실려 보내고
깊은 구석의 창문까지 열어주세요

사랑이 먼저
별빛 되어 다가갈 때
밝고 고운 희망 보태주시고
따뜻한 마음 향기 되어 주세요

맞잡은 두 손에는
가을 국화 미소 한 줌
터질 듯 행복 한 줌
꼬옥 쥐여 주세요

멀리 있어 안 들려도
풋풋한 알밤 터지는 소리로
다정한 별빛 속삭임으로
사랑한다 해주세요

《10》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11》
소중한 사랑

김광섭

맺다가
맺다가 말라진 꽃봉오리가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너 그토록 사랑해서 어쩌니
그 귀한 사랑 깨질까, 품다 품다 죽으면 어쩌니
나처럼..."

푸석한 봉오리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드디어 아름다운 꽃이 피었습니다

《12》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은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너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르는 꽃 한 송이 나는
꽃잎에 숨어서 기다리리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나비와 꽃송이 되어 다시 만나자

《13》
우정

김광섭

구름은 봉우리에 둥둥 떠서
나무와 새와 벌레와 짐승들에게
비바람을 일러주고는
딴 봉우리에 갔다가도 다시 온다

샘은 돌 밑에서 솟아서
돌을 씻으며
졸졸 흐르다가도
돌 밑으로 도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서 졸졸 흐른다

이 이상의 말도 없고
이 이상의 사이도 없다
만물은 모두 이런 정에서 산다

《14》
잡초들

김광섭

아 밝은 태양 맑은 물
바람 센 여의도 강뚝
말라서 흙이 갈라질세라
덮은 풀들이여
이름도 없는 잡초 처음엔 꽃인데
다시 한번 꽃이 되고파라

가물에 논밭처럼
바닥이 드러난 강
얕은 줄 모르고
더듬더듬 건너는
무거운 철 교각

현재에서 미래로
아파트에 눌려
산도 가고 물도 갔다

화신 등진 저 아낙네들
지나간 고운 날을 삼키며
쑥을 캐는 눈시울이 따가워선가
가난이 얼굴 바닥에 탄다

《15》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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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시모음 65편

《1》
가객

정현종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입장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걸신걸신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2》
갈데 없이

정현종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3》
감격하세요

정현종

나무들을 열어놓는 새소리
풀잎들을 물들이는
새 소리의 푸른 그림자
내 머리 속 유리창을 닦는
심장의 창문을 열어놓는
새소리의 저 푸른 통로

풀이여 푸른빛이여
감격해본지 얼마나 됐는지

《4》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5》
경청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6》
광채 나는 목소리로 풀잎은

정현종

흔들리는 풀잎이 내게
시 한 구절을 준다

하늘이 안 무너지는 건
우리들 때문이에요, 하고 풀잎들은
그 푸른빛을 다해
흔들림을 다해
광채나는 목소리를 뿜어올린다
내 눈을 두 방울 큰 이슬로 만든다

그 이슬에 비친 세상
큰 건 작고
강한 건 약하다
(유머러스한 세파
참 많은 공포의 소산)

이 동네 백척간두마다
광채나는 목소리로 풀잎은

《7》
그 굽은 곡선

정현종

내 그지없이 사랑하느니
풀 뜯고 있는 소들
풀 뜯고 있는 말들의
그 굽은 곡선!

생명의 모습
그 곡선
평화의 노다지
그 곡선

왜 그렇게 못 견디게
좋을까
그 굽은 곡선!

《8》
그 사이에

정현종

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협곡이 있고
산맥이 있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림자들,
무거워, 한숨과도 같고
가벼워,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그림자들

《9》
그냥

정현종

느닷없이, 미안합니다
뜻이 있는데 길이 있어서 그럽니다
맘대로 하라시지만
어렵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시지만
길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까 갑니까
가는 게 아닙니까
좋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나는 사랑합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그 대답이 접니다
그래도 우리가 고개 숙이는 만큼의
이 땅의 인력(引力)을
운명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10》
그림자의 향기

정현종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를
따온다
영원히
푸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따온다
마르지 않는
향기

《11》
깊은 흙

정현종

흙길이었을 때 언덕길은
깊고 깊었다
포장을 하고 난 뒤 그 길에서는
깊음이 사라졌다

숲의 정령들도 사라졌다

깊은 흙
얄팍한 아스팔트

짐승스런 편리
사람다운 불편

깊은 자연
얇은 운명

《12》
꿈 노래

정현종

신부는 이미 죽었거나
아직 오지 않았으니
꿈일랑 그냥 비워두어라 그대여,
고향 없는 인생일장들이
눈송이처럼 빗방울처럼
아득히 휘날려 내리는구나.

거리의 장미 속에 불을 묻고
술잔 수 없이 넘쳐흘러도
영원한 <아직>인 꿈에 홀려
육체와 영혼의 메아리 사이를
그대 아직도 도둑으로 떠도는가.

보제수 그늘 같은 눈동자는
언제 그대 눈의 깊은 데서 솟아나리오.

《13》
나는 별아저씨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생(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天下)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14》
나는 슬픔이에요

정현종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 저쪽 어두운 구석에서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시간이
귀신과도 같이 시간이
검은 바람결로 움직이며 말한다
'나는 슬픔이에요'

오가는 발소리들
무슨 웅얼거림들
그 시간에 물들어
비치고 되비치며 움직이느니

우리는 때때로
제 목소리를 낮추어야 하리.
조용해야 하리.

《15》
나무에 깃들여

정현종

나무들은
난 그대로 그냥 집 한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16》
나무의 사계

정현종

싹이 나올 때는
보는 것마다 신기한 어린애의
눈빛으로도 모자라는
기쁨의 광채, 경이의 폭죽이다가,
연초록 잎사귀의 청춘이
물 불 안 가리듯 이 바람 저 바람에
나부껴
가지에 앉은 새들의
다리들도 간지르다가,
여름 해 아래 짙게 발라 보는
40대 후반의 여자이다가,
벌써 가을인가, 잎 지자
넘치던 여름잠에서 깨어
가을 바람과 함께 깨어
말없는 시간과 함께 깨어
제 속에서 눈뜨는 나무들

눈 덮인 산의 겨울 겨울 나무여
환히 보이는 가난한 마음이여
☆★☆★☆★☆★☆★☆★☆★☆★☆★☆★☆★☆★
《17》
나의 명함

정현종

이 저녁 시간에
거두절미하고
槐江(괴강)에 비친 산그림자도 내
명함이 아닌 건 아니지만,
저 석양-이렇게 가까운 석양!-은
나의 명함이니
나는 그러한 것들을 내밀리.
허나 이 어스럼 때여
얼굴들 지워지고
모습들 저녁 하늘에 수묵 번지고
이것들 저것 속에 솔기 없이 녹아
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럼 때야말로 항상
나의 명함이리
☆★☆★☆★☆★☆★☆★☆★☆★☆★☆★☆★☆★
《18》
낙엽

정현종

사람들 발길이 낸
길을 덮는 낙엽이여
의도한 듯이
길들을 지운 낙엽이여
길을 잘 보여주는구나
마침내 네가 길이로구나
☆★☆★☆★☆★☆★☆★☆★☆★☆★☆★☆★☆★
《19》
날아라 버스야

정현종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여자
하나는 국화-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을 든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 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
《20》
낮술

정현종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 차 덜그덕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의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이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뺑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
《21》
느낌표

정현종

나무 옆에다 느낌표 하나 심어 놓고
꽃 옆에다 느낌표 하나 피워 놓고
새소리 갈피에 느낌표 하나 구르게 하고
여자 옆에 느낌표 하나 벗겨 놓고

슬픔 옆에는 느낌표 하나 울려 놓고
기쁨 옆에는 느낌표 하나 웃겨 놓고
나는 거꾸로 된 느낌표 꼴로
휘적휘적 또 걸어가야지
☆★☆★☆★☆★☆★☆★☆★☆★☆★☆★☆★☆★
《22》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
《23》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정현종

주고받음이 한줄기
바람 같아라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차지 않는 이 마음.
내 마음의 공터에 오셔셔
경주를 하시든지
잘 노시든지
잠을 자시든지
굿나잇.
☆★☆★☆★☆★☆★☆★☆★☆★☆★☆★☆★☆★
《24》
말없이 걸어가듯이

정현종

시간은 흘러
흐르는 시간
쓸쓸하여
마음 안팎을 물들여
가을 바람이 나무를 흔들 듯이
내가 말없이 걸어가듯이
☆★☆★☆★☆★☆★☆★☆★☆★☆★☆★☆★☆★
《25》
명백한 놀이를

정현종

어른들은 이상해요
우리 아이들은 가령 병정놀이나 전쟁놀이를 할 때
정말 죽이거나 정말 죽는 게 아니라
죽은 걸로 하고, 이기고 지는 것도 그냥
이긴 걸로, 진 걸로 하는데, 어른들은 정말 죽이고
승패를 막론 다만 지옥을 만들거든요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에요. 어떤 시인이 어떤 사관학교에 가서
막무가내로 붙잡혀 사열을 받았는데
도무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고 도무지 온몸이 근질근질...
아, 이 명백한 놀이를 이다지도 무게잡고, 이다지도 엄숙하게
하는구나, 참 한심하기도 하구나 하는,
그냥 바라볼 땐 못 느끼던 걸 실감했는데요...
하느님, 이 세상은 그냥 이렇게 굴러가겠지요만, 정치, 군사
할 것 없이 다만 어른들의 놀이에 불과한 짓을 놀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서 이 세상에는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는,
그저 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26》
모든 말은요

정현종

모든 말은요
마치 그 말이 전부인 듯이
마치 그 말이 실상인 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게 본질적인 약점입니다.
말은 어떻든
끊어져야 하니까 그렇기도 하겠지요만
(그 말 바깥의 빛과 그리고
그림자는
무간지옥과
배꼽―수미산을 중심으로
대천세계에 두루 미쳐 있는데 말이지요)
하하,
모든 말의 그러한 치명적인
한계 때문에 우리와
우리 삶의 허상이
차곡차곡 꾸준히
불어나 온 것이겠지요만
(표현과 그 즐거움은
또 다른 이야기이구요)
☆★☆★☆★☆★☆★☆★☆★☆★☆★☆★☆★☆★
《27》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28》
무너진 하늘

정현종

새들아
하늘의 化肉
바람의 정령들아,

새들아
보이는 신들
영원한 전설들아

너와 함께 실로
나도 날아오르고
날아오르고 하였으니

오늘 산보하다가 숲길에서
죽어 떨어진 까치를 보았을 때
그게 왜 청천벽력이 아니겠느냐

하늘 무너지고
길은 죽고
나는 수심에 잠겼느니
새들아
세상의 기적들아
☆★☆★☆★☆★☆★☆★☆★☆★☆★☆★☆★☆★
《29》
물방울의 말

정현종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가 대답하여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 물방울도 처음이다
☆★☆★☆★☆★☆★☆★☆★☆★☆★☆★☆★☆★
《30》
밑도 끝도 없는 시간은

정현종

시간의 모습이다
얻는 건 없고
잃는 것뿐이다
흉악하다거나 야속하달 것도 없이
시간은 슬픔이다
그 심연은 밑도 끝도 없어
밑도 끝도 없이 왜 그러시는지
정말 밑도 끝도 없어
석탄을 캐내고 금을 캐내고
지축(地軸)을 캐내도
무량(無量) 슬픔은
욕망과 더불어
욕망은 밑도 끝도 없이
운명을 온 세상에
꽃도 허공의 눈짓도
실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온 세상에

시간이여, 욕망의 피륙이여
무슨 거짓말도 변신술도
필경 고통의 누더기이니
살아서
다 놓아버린 뒤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여의기 전에는
☆★☆★☆★☆★☆★☆★☆★☆★☆★☆★☆★☆★
《31》
바람 속으로

정현종

아 이 바람
숲에 부는 바람
저녁 무렵
물소리
너는 어디 있니
너는 어디로 가니
바람 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어두울 때까지 앉아 있겠어
소나무 아래
머나먼
땅 위에.
저 날 소용돌이
☆★☆★☆★☆★☆★☆★☆★☆★☆★☆★☆★☆★
《32》
바람의 그림자

정현종

창밖을 본다.
바람이 불고 있다.

한참 있다가 또 내다본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흔들리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이파리들.

어른거리는 시간의 얼굴
바람의 움직임을 깊게 한다.
그림자들
어른거려
바람의 움직임은 깊다.
슬픔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움직인다.
바람의 그림자.
☆★☆★☆★☆★☆★☆★☆★☆★☆★☆★☆★☆★
《33》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시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34》
부질없는 시

정현종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
《35》
불쌍하도다

정현종

시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다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
《36》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37》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38》
사랑의 꿈

정현종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
《39》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
《40》
사물의 꿈

나무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41》
사물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42》
사물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43》
상상 할 수 있다

정현종

상상 할 수 있다
추억하듯이
선잠에서 깨어나 문밖에 서서
희뿌연 새벽 공기 뚫고
어제의 쓰레기만 뒹구는
그 공간 위에
시간이 양각되어 간다
전설이다
시간이기도 하고
이젠 상상 할 수 있다
추억하듯이
☆★☆★☆★☆★☆★☆★☆★☆★☆★☆★☆★☆★
《44》
상처

정현종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
《45》
새로운 시간의 시작

정현종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나는 바라건대 마음먹은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
《46》
생명의 아지랭이

정현종

내 평생 노래를 한들
저 산에서 생각난 듯이 들리는,
생명바다 깊은 심연을 문득 열어제끼는
꿩 소리 근처에나 갈까.
벌레와 흙과 그늘이
목에 찬 듯한 허스키,
무슨 창법唱法 따위 커녕은
그냥 제 생명에 겨운,
도무지 말 같지도 않은
꿩 소리 근처에나 갈까.

만물 속에서 타오르는
저 생명의 아지랭이를
내 노래는 숨 쉬는니
말이여, 바라건대
생명의 아지랭이여.
☆★☆★☆★☆★☆★☆★☆★☆★☆★☆★☆★☆★
《47》
설렁설렁

정현종

바람은 저렇게
나뭇잎을
설렁설렁 살려낸다
(누구의 숨결이긴 누구의 숨결,
느끼는 사람의 숨결이지)

바람의 속알은
제가 살려내는
바로 그것이거니와

나 바람 나
길 떠나
바람이요 나뭇잎이요 일렁이는 것들 속을
가네, 설렁설렁
설렁설렁.
☆★☆★☆★☆★☆★☆★☆★☆★☆★☆★☆★☆★
《48》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웅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쪽이 비어있다.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49》
세상의 나무들

정현종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
《50》
소리 소리들

정현종

숲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한 소리
알아차리지 못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아예 듣지 않거나
들어도 알아차리지 못한 소리들,
그 소리들……
그래도 그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
《51》
슬픔

정현종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
《52》
시간의 게으름

정현종

나, 시간은,
돈과 권력과 기계들이 맞물려
미친 듯이 가속을 해온 한은
실은 게으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면
그건 오히려 게으름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은 잠들고 돈만 깨어 있습니다.
권력욕 로봇들은 만사를 그르칩니다.
자동차를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을 닦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으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 버리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시간은 원래 자연입니다.
내 생리를 너무 왜곡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천천히 꽃 피우고 천천히
나무 자라고 오래 오래 보석 됩니다.
나를 '소비'하지만 마시고
내 느린 솜씨에 찬탄도 좀 보내 주세요.
☆★☆★☆★☆★☆★☆★☆★☆★☆★☆★☆★☆★
《53》
아침

정현종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
《54》
어떤 적막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 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
《55》
얼굴에게

정현종

내 얼굴이 억제하고 있는 동안
궁둥이는 모름지기 폭발하고 있다
하하
나는 내 얼굴이 때때로
궁둥이여서
불안할 때가 있다
☆★☆★☆★☆★☆★☆★☆★☆★☆★☆★☆★☆★
《56》
요격시

정현종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발사합니다 모든 포탄에
비둘기를 발사합니다 모든 무기상들한테
따오기를 발사합니다 정치 꾼들 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 오이 때까치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사신들한테
☆★☆★☆★☆★☆★☆★☆★☆★☆★☆★☆★☆★
《57》
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정현종

안은 바깥을 그리워하고
바깥은 안을 그리워한다
안팎 곱사등이
안팎 그리움

나를 떠나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남에게 돌아가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이 노릇을 어찌하리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부느니
어찌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느니
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
《58》
익어 떨어질 때까지

정현종

기다린다, 익어 떨어질 때까지,
만사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될성부른가)
노래든 사귐이든,
무슨 작은 발성(發聲)이라도
때가 올 때까지,
(게으름 아닌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
《59》
인사

정현종

모든 인사는 시이다
그것이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라면,

실은
시가
세상일들과
사물과
마음들에
인사를 건네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인사이다.

인사 없이는
마음이 없고
뜻도 정다움도 없듯이
시 없이는
뜻하는 바
아무런 눈짓도 없고
맑은 진행도 없다.
세상일들
꽃피지 않는다.
☆★☆★☆★☆★☆★☆★☆★☆★☆★☆★☆★☆★
《60》
잎 하나로

정현종

세상일들은
솟아나는 싹과 같고
세상일들은
지는 나뭇잎과 같으니
그 사이사이 나는
흐르는 물에 피를 섞기도 하고
구름에 발을 얹기도 하며
눈에는 번개 귀에는 바람
몸에는 여자의 몸을 비롯
왼통 다른 몸을 열반처럼 입고

왔다갔다 하는구나
이리저리 멀리멀리
가을 나무에
잎 하나로 매달릴 때 까지.
☆★☆★☆★☆★☆★☆★☆★☆★☆★☆★☆★☆★
《61》
좋은 풍경

정형종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습니다
☆★☆★☆★☆★☆★☆★☆★☆★☆★☆★☆★☆★
《62》
지난 발자국

정현종

지난 하루를 되짚어
내 발자국을 따라가노라면
사고의 힘줄이 길을 열고
느낌은 깊어져 강을 이룬다-
깊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다
되돌아보는 일의 귀중함이여
마음은 싹튼다 조용한 시간이여
☆★☆★☆★☆★☆★☆★☆★☆★☆★☆★☆★☆★
《63》


정현종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자기는 거의 不在에 가깝다.
부재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넒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들과,
공중에 뿌리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
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워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성자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
《64》
흰 종이의 숨결

정현종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
《65》
별 밝은 밤에

정현종

해 질녘 이면 해지는 대로
어두움 모아 선 자리에

별들이 떨어진날
지세운 창가 너머로

나부낀 하늘 녘
바라보고 한참을

유난히 밝은 별빛
그대 닮아서 눈시울 남몰래

별들 부스럼인날
목놓은 하늘 보았지

밤 타는 가슴안고
그대 닮은 강가에서 남몰래

아스란한 하늬결

가지 사이로 서리
녹음진 밤별 철 마다로

무지개 처럼 핀 별 잔치

나부낀 그대 맘
바라보고 한참을

유난히 맑은 그대
포개진 가슴안고서 남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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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시모음 20편

《1》
11월의 밤

서지월

어스럼 문밖에는 살얼음의 겨울
오려 하는데
빈 지갑이지만 따뜻한
방에 누워서 詩 생각하는 마음
복되지 않은가,
수입원 없어도 밥 아니 굶고
전화 걸어와 커피 마시자는 사람 있으니
그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무작정 깊어가는 11월의 밤
누워보면 방안이 썰렁하긴 하지만
누구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내 마음의 자유
그 또한 더더욱 편안하지 않은가,
저마다 울던 밤벌레 소리 피안 간지 오래
지금은 떨어지는 나뭇잎
길 떠나고 있는 중이지만
다 떠나고 못 떠나는 이 마음
서러웁긴 하지만
이 지상 지키는 마음 그래도 푸근하고
언젠가 올 사람은 오리라는 정한 이치 믿으며
밤 깊어 오오랜 날 심어놓은 별빛꽃밭
하늘에서 내려와

《2》
가난한 꽃

서지월

금빛 햇살 나려드는 산모롱이에
산모롱이 양지짝 애기 풀밭에
꽃구름 흘러서 개울물 흘러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나그네가 숨이 차서 보고 가다가
동네 처녀 산보 나와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꽃샘바람 불어오는 산 고갯길에
고개 들면 수줍은 각시풀밭에
산바람 불어서 솔바람 불어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행상 가는 낮 달이 보고 가다가
동네 총각 풀 짐 놓고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3》
각북 가는 길

서지월

어서 오라 오라고 손짓하는 건
산능선 깔고앉은 누렁소 울음

큰산이 낮은 산 앉혀 놓고 기침하면
한눈 팔던 물소리도 다시 흐르고

내가 왔노라 마당 개는 어디 있나
집 나갔던 바람이 돌아와
복사꽃 가지를 흔든다

어서 가자 가자고 손 흔드는 건
재 너머 흰배 때아리 드러낸 산 까치 울음

십 리를 더 가야 靑石山이 나온다고
쉬어 가는 발목 잡고 길을 연다

《4》
강물과 빨랫줄

서지월

오늘도 어머니는
강물을 훔쳐 와
한 자락씩 줄에 너신다.
누런 호박 오랭이 썰어 말리듯이

햇빛은 항시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것이지만
얼굴 없는 바람은
부뚜막 위에서 불고
장독대를 넘어와
어머니의 허이여신 머리칼 위에도
분다.

하늘과 땅 그 크낙한
화해를 위해
세상의 이쪽과 저쪽의 분별을 위해
두 귀 바지랑대는
생명의 줄을 튼튼히 받치고 있다.

천년풍우 그 어느 날에도
우리의 제기(祭器), 제기(祭器) 같은 것.

먼 산 그리메 숱한 메밀밭 위으로
낮달이 조을고
젖은 빨래의
그 휴식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은 아득히 멀고
나는 왠지 눈물이 핑 돈다.

《5》
꽃잎이여

서지월

한 세상 살아가는 법
그대는 아는가.
물빛, 참회가 이룩한
몇 소절의 바람
옷가지 두고 떠나는 법을
아는가.

눈물도 황혼도
홑이불처럼 걷어내고
갓난아기의 손톱 같은
아침이 오면
우린 또 만나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꽃이 피는 것과 소유하는 일이
서로 반반씩 즐거움으로 비치고 있는
그 뒤의 일을
우린 통 모르고 지내노니

흉장의 일기장 속
꼭꼭 숨은 줄로만 아는
풀빛, 그리울 때
산 그림자 슬며시 내려와 깔리는 법을
아는가.

눈썹 위에 눌린 천정을 보며
아들 낳고 딸 낳고
나머지는 옥돌같이 호젓이 앉았다가
눈감는 법을
그대는 아는가.

《6》
꽃피는 나의 애인을 위하여

서지월

능금꽃이 만발한
과수원을 돌아서 오는 시간까지
그대 손톱에 밀리는 파도소리에
뻐꾸기가 섬을 만드는 시간까지
모두 합해서
조그만 오두막집을 지으리.

바람이 길을 여는
골목 그 어디쯤
천년 묵은 돌거북 한 마리
댓돌처럼 앉혀놓고
능금꽃이 만발한 과수원을 돌아서
조약돌 세며 오는
그대를 맞아
올해에도 꽃이 많이 피게
나는 빌고 또 빌었다.

《7》
나뭇잎은 떨어져 어디로 가는가

서지월

나뭇잎은 떨어져 어디로 가는가,
내 배고픈 사랑이여
무시로 푸르던 잎들이
죄다 쓸리어가는 이 마른 길 위에
당신은 어디 있고
정작 흰눈 쓰고 가야 할 당신은
어디에 있고
시린 입술 위에 찬바람 몰아칠 때
정작 사랑은 빈 콩깍지 소리를 내고
다시 만나자는 기약없이
두 손 부여잡아도
한숨만 쌓이는
이 형편없는 인간의 마을
나뭇잎은 떨어져 어디로 가는가
내 골병든 사랑과 함께.

《8》
낙타풀의 노래

서지월

나는 너를 낙타풀이라 부른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
비 한 방울 입맞춤하지 않는
수천년 세월동안 거기
뼈를 묻은 사람들
걸어서 천축국까지 간
스님들 헤진 발바닥 소리까지
귀 없는 귀로 듣고 가시 돋힌
네 몸 뚱아리
사막의 낙타는 피 흘리면서까지
너를 뜯어먹으며
비단을 실어 날랐지
나는 네가 남아서 지키고 있는 그 길을
실크로드라 부른다
오늘의 내가 그 길따라
비단금침의 꿈 버리지 못하고
벋어 가는 것은 낙타풀
네가 있기 때문이다

《9》
내 사랑

서지월

길을 가다가도 문득
하늘을 보다가도 문득

지금은 안 보이지만
생각나는 사람

이 하늘 아래 꽃잎 접고
우두커니 서 있는 꽃나무처럼

내 생각의 나뭇가지는
서(西)으로 뻗어 해지는
산 능선쯤에 와 있지만

밥을 먹다가도 문득
다른 길로 가다가도 문득

안 보면 그뿐이지만
생각나는 사람

《10》
돌담

서지월

몇 백 년이 지나도 저들은
저들끼리 어깨 걸고 살아간다
아랑곳없다
빗물이 새어들어 입 맞추며
그 달디단 입맞춤으로 이끼 키우며
돌담은 시끄럽게 조잘대거나
불평을 거부한다
빈 깡통이 요란한 소리내며
행인의 발길에 채여 굴러도
그냥 멀뚱히 바라볼 뿐
탓하지 않는다
돌담 곁 감나무 한 그루
주렁주렁 감을 매달면서부터
서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며 눈높이를 맞춘다
거뭇거뭇 검버섯 피기 시작하면서
감나무도 잎을 흘리는데
돌담은 하늘의 기러기 날갯짓
올려다보며 살아간다
☆★☆★☆★☆★☆★☆★☆★☆★☆★☆★☆★☆★
《11》
딸 보러 가는 길

서지월

생후 1개월
딸 보러 가는 길
새벽잠에서 밀려나 앞산도 흰눈 쓰고
바다로 통한 길바닥도
얼음으로 덮인 차창 밖에는
겨울나무들이 아직
잎을 달 기척 없는데

포항 지나 화진포 지나 망양바닷가
울진 지나 삼척 죽서루 지나
망상해수욕장 하얀 파도살 지나
딸 보러 강릉 가는 길.

너는 생후 8일째
보자기에 싸여 세상에 태어난
기쁨의 울음 뿌리며
이 길 따라 먼저
강릉 외가에 가 있지
나, 오늘은 떡국 먹는 설날도 지나고
생후 1개월
널 보러 가네.

세상 사는 것 신기해서
구르는 바퀴는 자꾸 가자 가자고
이르는 것 같고
갈매기는 한 발 앞서서 빨리
오라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네.
☆★☆★☆★☆★☆★☆★☆★☆★☆★☆★☆★☆★
《12》
바람 불어 좋은 날

서지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색동저고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어느 땐들 우리가 한 식구 한 솥에
밥 아니 먹고
북채 장구채 골라잡지 않았으리요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꽃 떨어지기 전에 부는 바람 임 보는 바람
꽃 떨어지고 부는 바람 열매 맺는 바람
백두산의 진달래꽃 피어서 꽃구경 가는 날
으스러진 강물이 땅을 울리고
으깨어진 어깨가 춤을 춘다
이 강산 햇빛 나고 구름 좋은 날
구름 위의 새소리 맑게 뚫리는 날
쓰린 발 쓰리지 않고
저린 손 저리지 않고
목마름도 피맺힘도 한풀 꺾인 목숨이라
샘물 퍼내어서 버들잎 띄워 마시고
숨막히는 산 고개도 넘어보면 훤한 이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지 찍고 분바르고 귀밑머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 가지 위에.
☆★☆★☆★☆★☆★☆★☆★☆★☆★☆★☆★☆★
《13》
비슬산 참꽃

서지월

비슬산 참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 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백성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 난 듯 큰일 난 듯 발병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속에 초가집 한 채씩
이태백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산천초목
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참꽃물 들었었지요
☆★☆★☆★☆★☆★☆★☆★☆★☆★☆★☆★☆★
《14》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서지월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강으로 나와 흐르는
물살 바라 보든가, 아니면
모여있는 수많은 돌멩이들
제 각기의 모습처럼
놓인 대로 근심걱정 없이
물소리에 귀 씻고 살면 되는 것을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강 건너 언젠가는 만나도 될
사람 그리워하며 거닐다가
주저앉아 풀꽃으로 피어나면 되는 것을
말은 못해도 몸짓으로
흔들리면 되는 것을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혼자이면 어떤가
떠나는 물살 앞에 불어오는
바람이 있는 것을
모습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그 모두가 우리의 분신인 것을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하늘 아래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목숨인 것을
☆★☆★☆★☆★☆★☆★☆★☆★☆★☆★☆★☆★
《15》
슬픈 밤이 오거든

서지월


슬픈 밤이 오거든
그대여
창을 열고 별을 보라
나는 거기 지상의 괴로운 꽃으로
피었다가 하늘의 별 되어
울고 있으리니
그대가 만약 창을 닫고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명상에
잠기신다면
나는 나는 별 사닥다리 타고 내려와
그대 창가 부서지는 이슬 되리니
밤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슴과 같은 것
실로 우리가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지지 못할 때
그대는 지상에서
나는 하늘에서 하염없는
눈물 흘리리
☆★☆★☆★☆★☆★☆★☆★☆★☆★☆★☆★☆★
《16》
인생을 묻는 그대에게

서지월

부는 바람 탓하지 마라
예비 된 몸짓인 것을

지는 꽃 한탄하지 마라
작별의 시간인 것을

앞서 가는 자 부러워 마라
먼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높은 나무의 열매 부러워 마라
부귀영화가 매달려 있음이 아닌 것을
☆★☆★☆★☆★☆★☆★☆★☆★☆★☆★☆★☆★
《17》
잠 안 오는 밤

서지월

잠 안 오는 밤에는
잠 안 자는 별을 보며
잠 안 자고 눈망울 초롱초롱한
이슬과 함께
어둠의 등에 기대어
밤새껏 놀았습니다
☆★☆★☆★☆★☆★☆★☆★☆★☆★☆★☆★☆★
《18》
진달래 산천

서지월

진달래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百姓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난 듯 큰일난 듯 발病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 속에 草家집 한 채씩
이태백 달 밝은 밤 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山川草木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진달래 꽃물 들였었지요.
☆★☆★☆★☆★☆★☆★☆★☆★☆★☆★☆★☆★
《19》
찔레꽃 타령

서지월

임아,
백 고무신 벗어두고 간 임아
하얀 찔레꽃 수북이 피어서
오늘같이 서러운 날이면
온 몸에 찔레가시 바르고
나도야 남풍따라 가서는
돌아오지 않을까부다.

아아,
장독간에 숨겨둔 얼레빗 마저 꺼내
머리 빗고서
그 더운 머리털 날리는 구름 따라
나도야 정처 없이 떠날까부다.
☆★☆★☆★☆★☆★☆★☆★☆★☆★☆★☆★☆★
《20》
철쭉꽃 눈물

서지월

철쭉꽃 피었다는 철쭉꽃 보러온

사람 기별 듣고
컴컴한 바윗속 숨겨둔 시간을 모조리 꺼내어
햇빛하고 동무되어 철쭉꽃 보러 갔더니
산자락 베고 누운 물소리 건너 바람소리
아래, 질펀히 깔린 철쭉꽃
이승의 끝이라 싶을 즈음
철쭉꽃 보러온 사람 산 하나 넘어서 가고
채색한 구름 산 둘 넘어서 가고
흥건히 고이는 산그늘
두고 온 내 손때 묻은 문고리에
매어둔 슬픈 나귀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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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자 시 모음 18편

《1》
가을 기도

허영자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먼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2》
가을비 내리는 날

허영자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3》
그대의 별이 되어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4》
꽃피는 날

허영자


누구냐 누구냐
또 우리 맘속 설렁줄을
흔드는 이는

석 달 열흘 모진 추위
둘치같이 앉은 魂을
불러내는 손님은

팔난봉이 바람둥이
사낼지라도
門 닫을 수 없는
꽃의 맘이다.

《5》
나목에게

허영자


캄캄한 밤은
무섭지만

추운 겨울은
더 무섭지만

나무야 떨고 섰는
발가벗은 나무야

시련 끝에
기쁨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아침이 오고

겨울 끝자락에
봄이 기다린단다

이 단순한 순환이
가르치는 지혜로

눈물을 닦아라
떨고 섰는 나무야.

《6》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7》
너무 가볍다

허영자

나 아기 적에
등에 업어 길러주신 어머니

이제는
내 등에 업히신 어머니

너무 조그맣다
너무 가볍다

《8》
떡살

허영자

고운 네 살결 위에
영혼 위에
이 신비한
사랑의 문양 찍고 싶다

'이것은 내 것이다'

땅속에 묻혀서도
썩지를 않을
저승에 가서도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표적을 해두고 싶다

《9》
무지개를 사랑한 걸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10》
비 오는 날

허영자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비 맞고 서 있는 나무처럼
마음 젖어 서러이 흐느끼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아득히 비 내리는 신비한 바깥
머언 머언 내일을 내다보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박쥐우산 하나를 바람막이로
용감하게 세상을 밀고 가던 그때.

《11》
빈 들판을 걸어가면

허영자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오래오래 마음으로 사모하던
어여쁜 사람을 만날 상 싶다

꾸밈없는
진실과 순수
자유와 정의와 참 용기가
죽순처럼 돋아나는
의초로운 마을에 이를 상 싶다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아득히 신비로운
神의 땅에까지 다다를 상 싶다.

《12》
얼음과 불꽃

허영자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속에
얼음과 눈보라를 지니고 있다

못다 이룬 한의 서러움이
응어리져 얼어붙고
마침내 마서져 푸슬푸슬 흩내리는
얼음과 눈보라의 겨울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타오르는 불꽃을 꿈꾼다

목숨의 심지에 기름이 끓는
황홀한 도취와 투신
기나긴 불운의 밤을 밝힐
정답고 눈물겨운 주홍빛 불꽃을 꿈꾼다.

《13》
여름 소묘

허영자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14》
완행열차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15》


허영자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16》
刺繡(자수)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낼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17》
친전(親展)

허영자

그 이름에
살 속에 새긴다
暗靑(암청)의 文身

不可思議(불가사의)의 윤회를 거쳐
마침내
내 영혼이 고개 숙이는 밤이여
무거운 운명이여

절망의 눈비
회의의 미친 바람도
숨죽여 坐禪(좌선)하는 고요

'사랑합니다'

참으로 큰
슬픔일지라도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살 속에
그 이름 새기며
이 봄밤
눈떠 새운다.

《18》
행복(幸福)

허영자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윗 틈새 같은 데에
나뭇 구멍 같은 데에

幸福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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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시 모음 9편

1.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천리 길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면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세상이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뿐이야라고 믿어 주는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예" 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사람을!

2.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현

만리 길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3. 산

함석헌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4. 삶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

함석헌

맹꽁이의 음악 너 못 들었구나.
구더기의 춤 너 못 보았구나.
살무사와 악수 너 못해보았구나.

파리에게는 똥이 향기롭고
박테리아에게는 햇빛이 무서운 거다.

도둑놈의 도둑질처럼 참 행동이 어디 있느냐?
거짓말쟁이의 거짓말처럼 속임 없는 말이 어디 있느냐?
거지의 빌어먹음처럼 점잖은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정치가의 정의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고,
군인의 애국보다 한층 더 믿을 만한 것이고
종교가의 설교보다 비길 수 없이 거룩한 것이다.

5. 오늘

함석헌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자 말지어다

영원에서 이 날은 나왔고
영원으로 밤이면 돌아간다

이날을 미리 본 눈이 없고
보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6. 진리

함석헌

진리는 슬퍼,
파랗게 슬퍼.
분주한 일 다 마치고
떠들던 손님 다 보내고
사람이 다 자고
새도 자고 쥐도 죽은 밤
티끌이 다 가라앉고
구름 다 달아나고
높이 드러나는 파란하늘
깜박깜박하는 파란 별
아슬하게 올려다볼 때 같이,
진리의 얼굴 마주 대하면
파랗게 슬퍼.

진리는 슬퍼,
파랗게 슬퍼.
엉클어진 넝쿨 다 헤치고
우는 시냇물 그대로 남겨두고
험한 골짜기를 건너
위태로운 바위를 더듬어
무르익은 산과를 내버리고
어지러이 피는 꽃밭도 뒤에 두고
나무도 없고 풀도 없는 높은 봉에
하늘 쓰고 돌 위에 앉아
포구의 그림자도 없이
망망하게 열린 파아란 바다
끝없이 일고 꺼지는 파란 물결
아득하게 바라볼 때 같이,
진리의 눈동자 건너다보면
파랗게 슬퍼

7. 참외를 사는 계집

함석헌

꽃 쓰러진 배꼽 달고 줄기 달린 꼭지 쓴 줄을
배꼽 줄 떨어진 날부터 먹어 알아온 참외를
"이 참왼 꼭지에 갈수록 더 달다" 하는
"참외 참외" 하며 말 파는 사내 말 곧이 사
대가리 같은 박참외를
한 입 또 한 입 싱겁게 다 먹었구나

남의 말 믿고 맛을 따라
내 혀 도리어 의심하는 어리석은 계집
먹다 남은 쓰디쓴 꼭지 공중에 내던진 후
입 닦고 손 떨고 멋없이 구름 보고 서니
배는 풍랑 맞고 파선한 뱃잔등 같고
빈 주머니만 그 위에 맥없이 목을 매고 달려
지나가는 초가을 바람에 흔들 또 흔들.

8. 하나님

함석헌

몰랐네
뭐 모른지도 모른
내 가슴에 대드는 계심이었네

몰라서 겪었네
어림없이 겪어보니
찢어지게 벅찬 힘의 누름이었네

벅차서 떨었네
떨다 생각하니
야릇한 지혜의 뚫음이었네

하도 야릇해 가만히 만졌네
만지다 꼭 쥐어보니
따뜻한 사랑의 뛰놂이었네

따뜻한 그 사랑에 안겼네
푹 안겼던 꿈 깨어 우러르니
영광 그득한 빛의 타오름이었네

그득 찬 빛에 녹아버렸네
텅 비인 빈탕에 맘대로 노니니
거룩한 아버지와 하나됨이었네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나 모르는 내 얼 빠져든 계심이네

9. 할미꽃

함석헌

얼음도 아니 녹아 피는 향기 갸륵커늘
고개 숙고 털옷 입어 숨기잠 웬 뜻인고
깊은 속 붉은 맘 찾는 임만 볼까 함이네.

가뜩이 덧없는 봄 채 오지 못한 적에
잠시 영화 안 누리고 질러감 웬일인고
동풍에 백발이 날아 더욱 눈물겹고나

얼음과 싸우던 뜻 아는 이 하나 없고
덧없는 한때 영화 다투는 꼴 가엾어서
흰 머리 풀어 흔들고 허허 웃는 노장부

백화요란(百花요亂) 계집년들 봄꿈 깰 줄 모르건만
서리 치는 가을 심판 어이 멀다 할 것이냐
막대로 하늘 가리켜 부르짖는 예언자

동풍 비에 머리 푸는 즐풍목우(櫛風沐雨) 저 사내야
세상이 너 모른다 슬피 한숨 짓는 거냐
온 세상 다 모른대도 눈물질 난 아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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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시 모음 23편

《1》
가을

피천득

호수가 파랄 때는
아주 파랗다

어이 저리도
저리도 파랄 수가

하늘이, 저 하늘이
가을이어라.

《2》
고백

피천득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3》
기억만이

피천득

아침 이슬 같은
무지개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비바람 같은
파도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구름 비치는
호수 같은
그런 순간도 있었느니

기억만이
아련한 기억만이
내리는 눈 같은
안개 같은


《4》


피천득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5》
너는 아니다

피천득

너같이 영민하고
너같이 순수하고

너보다 가여운
너보다 좀 가여운

그런 여인이 있어
어덴가에 있어

네가 나를 만나게 되듯이
그를 내가 만난다 해도

그 여인은
너는 아니다

《6》
너는 이제

피천득

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

너는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안정을 얻기 위하여 견디어 온 모든 타협을.

고요히 누워서 네가 지금 가는 곳에는
너같이 순한 사람들과 이제는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

《7》
노 젓는 소리

피천득

달밤에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

만나러 가는 배인가
만나고 오는 배인가

느린 노 젓는 소리
만나고 오는 배겠지

《8》
눈물

피천득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9》
단풍

피천득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핏빛 저 산을 보고 살으렸더니
석양에 불붙는 나뭇잎같이 살으렸더니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바람에 불려서 떨어지오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지오

《10》
부활절에 드리는 기도

피천득

이 성스러운 부활절에
저희들의 믿음이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그 마음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력과 부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그 힘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11》
새해

피천득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12》
시월

피천득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13》
어떤 유화

피천득

오래 된 유화가 갈라져
깔렸던 색채가 솟아오른다

지워 버린
지워 버린 그 그림의

《14》
연가

피천득

훗날 잊혀지면
생각하지 아니 하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잊으리도 아니하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잘 사노라 하리라

훗날 잊혀지면
잊은 대로 살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살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웃으면 지나치리라

《15》
연정

피천득

따스한 차 한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16》
오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17》
우정

피천득

등덩굴 트레이스 밑에 있는 세사발
손을 세사 속에 넣으면 물기가 있어 차가웠다.
왼손이 들어있는 세사위를 바른 손바닥으로
두들기다가 왼손을 가만히 빼내면
두꺼비집이 모래 속에 작은 토굴같이 파진다.
손에 묻은 모래가 내 눈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제 입을 내 눈에 갖다대고
불어주느라고 애를 썼다.

한참 그러다가 제 손가락에 묻었던 모래가
내 눈으로 더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영이도 울었다. 둘이서 울었다.
어느 날 나는 영이 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 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18》
이 순간

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19》
저녁때

피천득

긴 치맛자락을 끌고
해가 산을 넘어갈 때

바람은 쉬고
호수는 잠들고

나무들 나란히 서서
가는 해를 전송할 때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20》
축복

피천득

나무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나무가 되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새들이 하늘을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새들이 되어 나란히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21》
후회

피천득

산길이 호젓다고 바래다 준 달
세워 놓고 문 닫기 어렵다 거늘
나비같이 비에 젖어 찾아온 그를
잘 가라 한 마디로 보내었느니

《22》
기다림

피천득

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뒷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23》
잊으시구려

피천득

잊으시구려
꽃이 잊혀지는 것 같이
한때 금빛으로 노래하던
불길이 잊혀지듯이
영원히 영원히 잊으시구려
시간은 친절한 친구
그는 우리를 늙게 합니다.

누가 묻거든 잊었다고
예전에 예전에 잊었다고.
꽃과 같이 불과 같이
오래 전에 잊혀진
눈 위의 고요한 발자국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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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시 모음 15편

《1》
강가에서

이형기

물을 따라
자꾸 흐를라 치면

네가 사는 바다 밑에
이르리라고

풀잎 따서
작은 그리움 하나

편지하듯 이렇게
띄워 보낸다.

《2》
귀로(歸路)

이형기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오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우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워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고 간
내 마음 숲 속 길에

가을이 온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숭엄(崇嚴)한 가을이
아무데서나 나를 향하여 밀려든다.

《3》
그 해 겨울의 눈

이형기

그 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 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 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4》
그대

이형기

1.
머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 채
그냥 더워 오는 우리들의 체온......

내 손바닥에
점 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 넓은 슬픔으로 오히려
다사로운 그대.

2.
이만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와질 수도 없는
이 엄연한 사랑의 거리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3.
제야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 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5》


이형기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6》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형기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세기 전의 해적선이 바다를 누빈다.
나뭇잎만큼 많은 돛을 달고
그 어떤 격랑도 지울 수 없는
벌레 먹은 항적(抗跡)

나뭇잎을 다시 들여다보면
나무가 뿌리채
그 밑바닥에 침몰해 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단말마의
손짓
잎사귀들이

《7》
낙 화

이형기

가야 할 때를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 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8》
들길

이형기

고향은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9》

이형기


寂寞江山(적막 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 자리
타지 않는 日暮(일모).....
텅 빈 내 꿈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正座(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 강산
그저 이렇게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淸明(청명)과 不安(불안)
期待(기대)와 虛無(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린다
아 이 적막 강산에 살고 싶어라

《10》
비 오는 날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11》


이형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12》
초상정사草上精思

이형기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아무래도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연못에 구름이 스쳐가듯이
언젠가 내 작은 가슴을 고이 스쳐간
서러운 그림자가 있었나 보다.

마치 스스로의 더운 입김에
모란이 뚝뚝 져버린 듯이
한없이 나를 울리나 보다.

누구였기에
누구였기에
아아 진정 누구였기에......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13》
코스모스

이형기

자꾸만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 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 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하고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 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둠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호올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나의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14》
폭포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15》
호수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했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는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가는 바람에도
불고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 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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