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시 모음 15편
《1》
강가에서
이형기
물을 따라
자꾸 흐를라 치면
네가 사는 바다 밑에
이르리라고
풀잎 따서
작은 그리움 하나
편지하듯 이렇게
띄워 보낸다.
《2》
귀로(歸路)
이형기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오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우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워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고 간
내 마음 숲 속 길에
가을이 온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숭엄(崇嚴)한 가을이
아무데서나 나를 향하여 밀려든다.
《3》
그 해 겨울의 눈
이형기
그 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 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 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4》
그대
이형기
1.
머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 채
그냥 더워 오는 우리들의 체온......
내 손바닥에
점 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 넓은 슬픔으로 오히려
다사로운 그대.
2.
이만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와질 수도 없는
이 엄연한 사랑의 거리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3.
제야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 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5》
길
이형기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6》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형기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세기 전의 해적선이 바다를 누빈다.
나뭇잎만큼 많은 돛을 달고
그 어떤 격랑도 지울 수 없는
벌레 먹은 항적(抗跡)
나뭇잎을 다시 들여다보면
나무가 뿌리채
그 밑바닥에 침몰해 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단말마의
손짓
잎사귀들이
《7》
낙 화
이형기
가야 할 때를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 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8》
들길
이형기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9》
비
이형기
寂寞江山(적막 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 자리
타지 않는 日暮(일모).....
텅 빈 내 꿈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正座(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 강산
그저 이렇게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淸明(청명)과 不安(불안)
期待(기대)와 虛無(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린다
아 이 적막 강산에 살고 싶어라
《10》
비 오는 날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11》
산
이형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12》
초상정사草上精思
이형기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아무래도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연못에 구름이 스쳐가듯이
언젠가 내 작은 가슴을 고이 스쳐간
서러운 그림자가 있었나 보다.
마치 스스로의 더운 입김에
모란이 뚝뚝 져버린 듯이
한없이 나를 울리나 보다.
누구였기에
누구였기에
아아 진정 누구였기에......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13》
코스모스
이형기
자꾸만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 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 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하고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 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둠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호올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나의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14》
폭포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15》
호수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했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는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가는 바람에도
불고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 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이형기 시 모음
2022. 5. 22. 1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