爲君子之九思九容(위군자지구사구용)

君子(군자)가 되려는 아홉가지의 마음가짐

과 몸가짐

★九思(구사)★아홉가지의 마음가짐

 

君子(군자=人子.眞人.聖人)가 되고자 하면

行動(행동)에 앞서 먼저 再三(재삼) 생각을

한후에 행할 것이고 행한 후에는 過然(과연

) 그 행함이 道(도)에 맞은 것인지를 반드시

돌이켜 살펴보는 修行(수행)의 생각 살핌을

거듭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자기의 理性(이성)으로 自身(자

신)을 制御(제어=다스림)하고 이끌어감이

곧 道(도)에 가까워지고 附合(부합)하려는

率性之道(솔성지도)인 것이다.

1.視思明(시사명)은

눈으로 사물을 볼때는 明若觀火(명약관화)

하게 明確(명확)하고 正確(정확)하게 볼 것

을 생각하여 보아야할 것과 보지 말아야할 것을 分別(분별)할 것이고

남의 좋은 점을 보면 나도 그 좋은 점을 닮

을 것을 생각하고 남의 흠이나 허물을 보면

헐뜯을게 아니고 나를 돌이켜 나는 저러지

말아야겠다는 공부꺼리로 삼을 것이고

2.聽思聰(청사총)은

귀로 소리를 들을 때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여 들어야할 것과 듣지 말아야할 것

을 가려서 들을 것이고

3.色思溫(색사온)은

顔色(안색=얼굴 빛)은 늘 溫和(온화)하고

多情(다정)하며 柔然(유연)하게 하여 사람

과 뭇 有情生命(유정생명)을 對(대)할 것이

4.貌思恭(모사공)은

몸가짐은 늘 남을 配慮(배려)하되 恭遜(공

손)한 모습으로 謙讓之德(겸양지덕)으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誠心(성심)을 至

極(지극)히 하는 몸가짐을 갖출 것이고

5.言思忠(언사충)은

言辭(언사=말)을 할때는 眞心(진심)이 담긴 말을 明瞭(명료)하게 하되 衷心(충심)

으로할 것이고

6.事思敬(사사경)은

일에 임할때는敬虔(경건)한 마음 가짐으로

精誠(정성)을 다 하되 責任感(책임감)있는

마음 姿勢(자세)로 임할 것이고

7.疑思問(의사문)은

疑訝(의아)한 것이 있어서 마음이 썩 내키 질 않고 찜찜할 때는 반드시 물어볼 것을

생각할 것이고

8.忿思難(분사난)은

忿(분)하여서 성질이 벌컥 치밀어 오를 때는 욱하고 성질이 나는데로 화를 냈을때

그 후에 닥쳐올 어려움이 있음을 생각할것

이고

9.見得思義(견득사의)는

意圖(의도)하지않은 利得(이득)이 생겨서

그것을 取(취)할때엔 그것이 내가 가져도

義理(의리)에 果然(과연) 마땅한 것인지를

取(취)하기 앞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九容(구용)★ 아홉가지의 몸가짐

 

1.足容重(족용중)은

발길은 걸음하여 갈 곳과 가지 말아야할 곳

을 深思熟考(심사숙고)하여 가려서 愼重(

신중)하게 움직이란 것이고

2.手容恭(수용공)은

손을 움직일땐 손맵시를 謙遜(겸손)하고

恭遜(공손)한 매무새로 握手(악수)를 할때

나 남에게서 무엇을 받거나 줄때에도 辭讓

(사양)하듯이 하라는 것이고

3.目容端(목용단)은

눈맵시는 무엇을 보던지 端雅(단아)한 눈빛

으로 情感(정감)이 서린 溫柔(온유)함으로

따뜻한 視線(시선)으로 보라는 것이고

4.口容止(구용지)는

입 매무새는 말을 할 때건 안할 때건 웃을 때건 하품할 때건 음식을 먹을 때건 고운

매무새로 采薪(채신)없이 게걸스럽지 않게

하라는 것이고

5.聲容靜(성용정)은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하고 나직한 소리로

또박또박 맑고 淸雅(청아)하게하라는것이

6.頭容直(두용직)은

머리는 늘 곧이곧게 바른 모습으로 하여

左右(좌우)나 아래위로 함부로 散慢(산만)

하게 움직여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7.氣容肅(기용숙)은

풍기는 氣勢(기세)는 毅然(의연)하게 떳떳

하고 莊嚴(장엄)하고 嚴肅(엄숙)함이 있어

야 한다는 것이고

8.立容德(립용덕)은

서 있을 때는 厚德(후덕)하게 모든 것을 包

容(포용)하고 配慮(배려)하고 감싸는 毅然

(의연)한 姿態(자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

이고

9.色容莊(색용장)은

몸가짐은 비록 남에게 무슨 도움을 받고자 請託(청탁)을 할때라도 卑屈(비굴)하게 阿

諂(아첨)떨며 마냥 굽신거리지만 말고 떳떳

하고 당당한 姿態(자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收斂身心莫切於九容(수렴신심막절어구용)

    몸과 마음을 가다듬음에는 九容(구용)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進學益智莫切於九思(진학익지막절어구사)

  학문에 나아가고 지혜를 더 하는 데는 九思(구사)보다 긴요한 것이 없다.


所謂九容者(소위구용자)

  이른바 九容(구용=아홉가지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足容重(족용중).  발모양은 무게있게 하고 

手容恭(수용공).  손모양은 공손히 하며

目容端(목용단).  눈모양은 단정히 하고

口容愼(구용신).  입놀림은 신중히 하고

聲容靜(성용정).  소리모양은 조용히 하며

頭容直(두용직).  머리모양은 곧게 하고

氣容肅(기용숙).  숨쉬기는 엄숙히 하며

立容德(입용덕).  서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고

色容莊(색용장)  얼굴 모양은 장엄하게 해야 한다


所謂九思者(소위구사자)  이른바 九思(구사=아홉가지 마음가짐)라는 것은


視思明(시사명).  볼 때엔 밝고 확실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

聽思聰(청사총).  들을 때엔 귀 기울여 들을 것을 생각하고

色思溫(색사온).  얼굴 빛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고

貌思恭(모사공).  용모는 공손히 할 것을 생각하고

言思忠(언사충).  말은 진정으로 할 것을 생각하고

事思敬(사사경).  일은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고

疑思問(의사문).  의심나는 것은 물어볼 것을 생각하고

忿思難(분사난).  분할 때는 뒤에 닥칠 어려움을 생각하고

見得思義(견득사의)  얻게 되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常以九容九思存於心而檢其身(상이구용구사존어심이검기신)

    항상 九容(구용)과 九思(구사)는 마음 속에 간직하고 그 몸을 단속하여
不可頃刻放捨(불가경각방사)

    잠깐이라도 놓아서는 안되고
且書諸座隅時時寓目(차서제좌우시시우목)

  또한 앉는 자리의 한 귀퉁이에 써서 붙여놓고 틈틈이 거기에 눈을 붙여 보아야 한다

먼저 九容(구용)에서

1.발모양을 무게있게 하란 말은
거드름을  떨며 거만하게 폼을 잡으란 말이 아니
고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릴 줄을 알아  꼭 가야 할 곳이라면 죽더라도 그 길을  가
야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라면 기필코 가질 말라는 말이라 할 것이다.

2.손모양을 공손히 하란 말은
겁먹고 주눅든듯이 비굴하게 하란 말이 아니고
겸손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상대를
아끼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하라는 말이니
이리 한다면 어찌 삿대질을 할 것이며 함부로 하는 손찌검이 나올 것이며 내것이 아닌 것을
슬쩍 몰래 챙기는 손버릇이 나오랴

3.눈모양을 단정히 하란 말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산만하게 하거나
뚫어지게 아래위를 훑어내리며 상대를 살피듯이
째려보거나 하질 말고
누가 보더라도 편안하고 친근감이 가는 온화한
눈으로 보라는 말이다.

4.입놀림은 신중히 하란 말은
감정이 동하는데로 입에서 나오는데로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말하질 말고
할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서 하되
적어도 세번정도를 생각하고 심사숙고 해서 하
라는 말이다.

5.소리모양을 조용히 하란 말은
남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조용 침착하
고 차분하고 논리정연하게 평상심으로 말할 것
이지 남의 환심을 사고자 억지로 꾸미거나 과장
된 어투로 巧言令色(교언영색)의 假飾的(가식적
)이고 僞善的(위선적)으로 陰凶(음흉)하게 속내
를 숨긴 과장된 소리로 하질 말라는 것이다.

6.머리모양은 곧게하란 말은
비록 아무도 보는 이가 없다 하더라도 늘 대중 속에 있는 것처럼 늘 경건하고 신중한 마음가짐
으로 목을 곧게 하여 머리를 반듯하게 하란 것이
다.

7.숨쉬기를 엄숙히 하란 말은
내쉬고 들이쉬는 날숨과 들숨으로
내쉼에 죽고 들이쉼에 사는 한번 죽고 한번 사는
생사가 날고 드는 소중한 것이니 귀하고도 귀한
숨쉼으로 알아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스레 하란
말이다

8.서있는 모양을 德(덕)스럽게 하란 말은
서있으면서도 다리를 후들거리거나 공연히 몸을
가만히 두질않고 불안정하게 비비적거리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머리를 긁적이거나 귀를 후비
거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산만한 눈짓을 하
거나 하는 모양새를 하질말고
안정되고 반듯하면서도 품위와 교양이 자연스레
묻어나는 인격이 풍겨지는 그런 평상심의 모양
새로 서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9.얼굴 모양을 莊嚴(장엄)하게 하란 말은
천박하고 해이해진 나태하고 輕薄(경박)한 顔色
(안색)의 얼굴빛을 하질말고
和樂(화락)하고 편안하면서도 위엄과 근엄과
품위와 기개가 있는 얼굴빛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다.

다음으로 九思(구사)에서
1.볼때엔 밝게 볼 것을 생각하란 말은
눈으로도 물론 명확하게 밝게 보아야 겠지만
我執(아집)과 利己的(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
인 主觀的見解(주관적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간사함과 삿됨이 없이 맑고 밝고 이치에
꼭 들어맞게 객관적으로 보라는 말인 것이다.

2.들을땐 귀 기울여 총명하게 들을 것이란
마음에 새겨 들으란 말로 버릴 것은 버리고
받아들일 것은 귀 기울여 경청을 하란 말이다.

3.얼굴 빛을 온화히 가지란 말은
평상심으로 편안하고 욕심이 가신 빈맘으로
아무기대나 바람이 없이 들을 것을 마음으로
먼저 생각을 하라는 말이다.

4.용모는 공손스럽게 하란 말은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열린 마음으로 몸가짐
을 조심스럽게 가다듬을 생각을 마음에 각인하
라는 말아다.

5.말은 충심으로 하라는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誠心(성심)이 담긴 진정성
있는 말을 간곡한 마음으로 하라는 말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신의 인격이 판단되는 것
이니 늘 정중하고 필요한 말만 절실한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말이다.

6.일은 공경스럽게 하란 말은
일할땐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정성을 다
기울여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여 집중해서 일
하라는 말이다.

7.의문이 생기는 것은 물을 것을 생각하란 말은
미심쩍고 모르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물어보아
서 알 것을 생각하란 말이다.
모르면서도 아는척 하는 것이 병중에도 큰 병이
요 모든 일에 禍根(화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
란 것이다.

8.화가날땐 어려움이 닥칠 것을 샹각하란 말은
분하고 화가치민다고 마구잡이로 감정에 휘둘려
발칵하고 화풀이를 하면 곧 그것을 수습하는 일
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하
고 생각을 하란 말이다.

9.얻게됨이 있을땐 옳음을 생각하란 말은
무언가를 얻음이 있을 경우엔 반드시 이 얻음이
도리와 이치에 맞고 합당한 것인가를 곰곰히 생
각하고 양심에 떳떳한 얻음만을 취하라는 말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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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례편람(四禮便覽)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의 4례에 관해 경서 및 선유(先儒)의 설을 참작하여 이동(異同)을 바로잡은 책. 8권 4책. 조선 숙종(肅宗) 때 사람 이재(李縡)가 편찬, 1844년(헌종 10)에 증손 이광정(李光正)이 간행.

   1900년 황필수(黃泌秀)ㆍ지송욱(池松旭)이 증보 중간하여 <증보 사례편람>이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이 책에 따라 예를 행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후기의 학자ㆍ정치가 이재(李縡)가 편술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에 관한 종합적인 참고서. 8권 4책. 목판본. 이재는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김창협(金昌協)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맥을 이어오면서도 그 나름의 학통을 수립한 대학자로서, 성리학과 예학에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당(玉堂:弘文館의 다른 이름)의 영수격으로 지체 또한 높았다. 당색은 노론(老論)이었으나 학풍에서는 당색을 초월하기도 하였다.

   이 <사례편람>은 그의 예학에 관한 깊은 조예를 토대로 편술된 것인데, 당시 거의 맹목적으로 시행하던 주자의 ≪가례≫의 허점을 보완하면서 이를 현실적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요령 있게 엮은 것이다. 사실 <가례(家禮)>는 원칙만의 편술이기 때문에 그 행용에 있어서 많은 함정이 있었다.

   여기에서 이재는 사례 중 상례(喪禮)에서는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주로 참고하되 현실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관행을 많이 그대로 인정해서 참작하였다. 제례(祭禮) 역시 시속(時俗)의 예제(禮制)를 도외시하지 않았지만, 관례(冠禮)와 혼례(婚禮)의 경우는 마땅한 준칙이 별로 없어서 <가례>의 고례(古禮)와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대폭 보충하여 서로의 차이점을 찾고 그 옳고 잘못됨을 그 나름으로 고석(考釋)하여 판별하였다.

   <사례편람>은 이재가 죽은 뒤 그 자손들에 의해서 다시 수정되고 정사되어 비로소 완벽한 체제가 이루어졌지만 간행이 용이하지 못하였다가, 이재의 증손인 광정(光正)이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을 때인 1844년(헌종 10)에 간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도록을 부록으로 붙이기도 하였다. 그 뒤 황필수(黃泌秀)ㆍ지송욱(池松旭) 등이 <사례편람>에 보정을 더해서 <증보사례편람>이라 하여 1900년에 다시 간행하기도 하였다.

   <증보사례편람>도 <사례편람>과 함께 기호지방은 물론 다른 지역에도 많이 보급되었다. <사례편람>은 편술자인 이재의 명성도 있었겠지만 이 책이 지니고 있는 특색 있는 편술방법, 그리고 요령 있게 꾸며진 여러 학자의 주장의 이동(異同)과 그 고정(考正)이 사례를 행용하는 데 있어 많은 편익을 주었다.

   <가례>의 원칙을 지키되 시속과의 묘미 있는 절충과 예의 보편성의 추구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기 마련인 예속의 당위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이 간행되고 세상에 보급된 후에 편술된 많은 사례관계의 예서는 거의가 이 책에 기준하여 편술되었고, 사회에서 시용되는 예속 역시 여기에 기준하여 행용되었다.


▣사례편람 진설도<도암 이재:조선후기>


() : ()

() :

盞盤(잔반) : 술잔과 받침

醋楪(초접) : 식초

(시저) : 숟가락과 젓가락

() : 육고기

() : 불에 구운 육고기. 초헌 때 간적(炙肝구운 간)을 올렸다 내리고→아헌 때 육적(肉)을 올렸다 내리고→종헌 때 육적(肉)을 올려 그대로 둔다.

() : 생선

() : 국수(건더기 없는)

() :

() : 말린 육포나말린 생선

() : 나물

() : 간장

沈菜(침채):물김치

() : 젓갈

食醢(식해):토막생선에 소금, 쌀/조 등을 넣고 발효시킨 음식

() : 과일


 ▣사례편람 기제사절차

 *사례편람(四禮便覽)<권卷8 제례祭禮>

절 차

내 용

(1)진설(陳設)

찬음식(과일열과 나물열, 잔반과 시저 등)을 먼저 진설한다

(2)출주(出主)

신주를 사당에서 정침(제사방)으로 모시고, 교의(交椅) 위에 놓는다

※신주가 없으면 지방을 써서 붙인다

⑶참신(參神)

조상께 인사하기

참석자 전원 재배한다

⑷분향강신

(焚香降神)

분향焚香

제주가 분향한다

제주 재배한다

강신降神

집사가 강신잔에 술을 따라 주면 제주는 왼손으로 술받침을 잡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모사기에 3번에 나누어 전부 따라 붓는다

제주 재배한다

⑸진찬(進饌)

더운 음식(육과 어, 떡과 국수, 메와갱)을 올린다. []자리는 비워둔다.

⑹헌작

(獻爵)

초헌初獻

 

 

 

 

 

<독축讀祝>

①제주가 첫잔을 올린다.

-집사가 술을 따라주면 제주가 직접 고위잔을 상 위에 올린다. 이어서 비위잔도 마찬가지로 한다.

-집사가 고위잔을 내려주면 제주는 3번에 나누어 모사기에 조금 따르고 잔을 집사에게 건네면 원위치에 올려놓는다. 비위잔도 마찬가지이다.

②간을 화로에 구워서 간적(炙肝)을 올린다.

③메뚜껑을 연다(啓盤蓋). 메뚜껑은 메의 남쪽에 둔다.

④축문을 읽는다

제주 재배한다

⑤고위잔과 비위잔의 술은 퇴주기에 붓고(徹酒), 간적은 내린다(徹炙).

아헌亞獻

①주부가 두 번째 잔을 올린다

②육적(炙肉)을 올린다

주부는 4배한다

③철주徹酒, 철적徹炙한다.

종헌終獻

①형제 중의 맏이나 친척 중에 연장자가 세번째 잔을 올린다

②육적(炙肉)을 올린다

종헌자 재배한다

③철주,철적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⑺유식

(侑食)

첨작添酌

제주가 직접 주전자를 들고 상위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운다

삽시정저

揷匙正箸

숟가락을 메에 꽂고 젓가락은 자루가 서쪽으로 향하게 접시 가운데 놓는다

제주 재배, 주부 4배한다

합문闔門

문을 닫고 뜰에 나가 서서 기다린다

계문啓門

3번 기침소리를 하면 문을 열고 들어간다

헌다獻茶

갱을 내리고 그 자리에 차()를 올린다

⑻사신

(辭神)

사신辭神

조상께 작별인사하기

참석자 전원 재배한다

분축焚祝

축문을 불태운다

⑼납주(納主)

신주를 사당으로 다시 모신다

⑽철찬(撤饌)

제사상의 음식을 내리고, 음복한다


※현대처럼 신주를 사당에 모시지 않는 가정의 경우에는, 분향강신->참신 순서로 진행한다.

​※진찬 때 가운데 [적] 한자리는 비워두었다가, 초헌 때 간적올렸다 내리고→아헌 때 육적올렸다 내리고→종헌 때 육적을 올리고 그대로 둔다.

​※초헌 때 술을 모사기에 조금 따르는 것은 고수레의 의미가 있다.(신위가 술을 드시기 전에 자연신에게 먼저 술을 조금 드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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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鹿洞規(백록동규)

백록동은 중국 강남성 여산에 있으며 백록동규는 南宋때

朱子가 강학을 하면서 만든 규약이다

 

 

*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長幼有序*朋友有信

                右 五敎之目(위의 다섯 가지는 교육의 요점이다)

 

*博學之(박학지)~넓게 배울 것이며

*審問之(심문지)~자세하게 물을 것이며

*愼思之(신사지)~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며

*明辨之(명판지)~명확하게 분별할 것이며

*篤行之(독행지)~행동은 성실하게 해야 한다

               右 爲學之序(위는 학문을 하는 순서이다)

 

*言忠信(언충신)~말은 충직하고 믿음이 있어야 되고

*行篤敬(행독경)~행동은 돈독하고 공경스럽게 하며

*懲忿窒慾(징분질욕)~성내는 것은 경계하고 욕심은 막고

*遷善改過(천선개과)~허물을 고쳐서 좋은 쪽으로 옮긴다

               右 修身之要(위는 몸을 수양하는 요결이다)

 

*正其義不謨其利(정기의불모기리)   뜻은 바르고 옳은데 두고 이익만을 꾀하지 않는다

*明其道不計其功(명기도불계기공)    도를 밝게 하고 공로를 헤아리지 않는다

               右 處事之要(위는 처신하는 요체이다)

 

*己所不欲勿施於人(기소불욕물시어인)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

*行有不得反求諸己(행유부득반구제기)   행하여 얻지 못하였으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구하라

               右 接物之要(위는 사물을 접하는 요령이다)

 

 

 

 

鄕約約文(향약약문)

*父母不順者(부모불순자)~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자

*兄弟相鬩者(형제상혁자)~형제끼리 서로 다투는 자

*家道悖亂者(가도패란자)~집안에 도리를 어지럽히는는 자

*事涉官府有關鄕風者(사섭관부유관향풍자)~관청의 일을 간섭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헤치는 자

*妄作威勢擾官行私者(망작위세요관행사자)~거짓으로 세력을 만들어 사사로이 관리를 흔드는 자

*鄕長凌辱者(향장능욕자)~마을 어른을 업신여기고 욕하는 자

*守身孀婦誘脅汚奸者(수신상부유협오간자)~수절하는 과부를 협박하고 욕을 보이는 자

                        已上 極罰(이상 극벌)

 

*親戚不睦者(친척불목자)~친척 간에 화목하지 않는 자

*正妻疎薄者(정처소박자)~정식 결혼한 아내를 박대하는 자

*隣里不和者(린이불화자)~이웃간에 화합하지 못하는 자

*儕輩相毆罵者(제배상구매자)~친구간에 서로 때리고 욕하는 자

*不顧廉恥汚壞士風者(불고염치오괴사풍자)~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선비의 품위를 파괴하는 자

*恃强凌弱侵奪起爭者(시강능약침탈기쟁자)~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분쟁을 일으키는 자

*無賴結黨多行狂悖者(무뢰결당다행광패자)~교활하게 작당하여 인륜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하는 자

*公私聚會是非官政者(공사취회시비관정자)~공사의 회의 때 관리와 시비를 거는 자

*造言構虛陷人罪累者(조언구허함인죄루자)~함부로 거짓말을 만들어 남에게 죄를 씌우는 자

*患難力及坐視不求者(환난역급좌시불구자)~남이 어려움에 처 해 있는 것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자

*受官差任憑公作弊者(수관차임빙공작폐자)~관직을 맡아서 공직을 빙자하여 민폐를 끼치는 자

*婚姻喪祭無故過時者(혼인상제무고과시자)~혼인과 초상,제사 때 일이 없으면서도 돌보지 않는 자

*不有執綱不從鄕令者(불유집강부종향령자)~기강을 잡지않고 향령에 따르지 않는 자

*不服鄕論反懷仇怨者(불복향론반회구원자)~향론에 불복하고 원망하며 반감을 품는 자

*執綱徇私冒入鄕參者(집강순사모입향참자)~기강을 잡아야 할 사람이 사사롭게 향론에 참견하는 자

*舊官餞亭無故不參者(구관전정무고불참자)~옛 관리를 전송하 는 자리에 연고 없이 불참하는 자

                 已上 中罰(이상 중벌)

 

*公會晩到者(공회만도자)~공식회의에 늦게 도착하는 자

*紊座失儀者(문좌실의자)~좌중을 어지럽게 하며 예의를 잃은 자

*座中喧爭者(좌중훤쟁자)~모인 자리에서 떠들거나 다투는 자

*公座退便者(공좌퇴편자)~공식적인 자리에서 편리한 대로 치 우치는 자

*無故先出者(무고선출자)~이유도 없이 먼저 나가는 자

                 已上 下罰(이상 하벌)

 

元惡鄕吏人吏民間作弊者(원악향리인리민간작폐자)~관리가 사람을 써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자

貢物使濫徵價物者(공물사람증가물자)~나라의 물건에 가격을 올려서 받는자

庶人凌蔑士族者(서인능멸사족자)~양반들이 서민을 업신여기 는 자

                 右 退溪先生 鄕約(우 퇴계선생 향약)

 

*德業相勸(덕업상권)~덕을 쌓는 일은 서로 권장하고

*過失相規(과실상규)~허물은 서로 바로잡아 주고

*禮俗相交(예속상교)~예의와 미풍양속은 서로 교류하고

*患難相救(환난상구)~근심과 어려움은 서로 구원해 준다

                右 藍田呂氏 鄕約(우 남전여씨 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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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B.C 551-479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 사상가이며 교육자로 유교의 개조(開祖)시며 성인으로 일컬어진다.

공(孔)은 성이고 자(子)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선생' 의 뜻이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창평향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남쪽 추현)출신.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551년(주왕실 영왕21년, 노양공22년)이라는 설(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과 552년이라는 설(『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이 있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숙량흘은 60세가 넘어 젊은 안징재와의 사이에서 공자를 낳은 것이라고 한다. 안징재는 공자를 낳기 위해서 니구산(尼丘山)에 기도를 들였다 하는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가 중니(仲尼)인 것도 니구산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혹은 나면서부터 머리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언덕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구라고 했다고도 한다(『사기』)

공자의 조상은 은(殷)왕실과 줄이 닿아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는 제 6대 양공희에 와서 조카인 여공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는데, 양공희에게는 이때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다.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 뒤로 송나라의 10대 대공(戴公)에서 무공(武公) , 선공(宣公)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재상 정고보(正考父)가 있으나, 그 아들 공보가 (孔父嘉)가 송나라의 정쟁에 휘말렸고(B.C 710)다시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는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리고 공보가의 '공'자를 따서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목금보의 현손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며, 숙량흘은 '키가 10척이고 무예와 힘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공자가어』)

『춘추좌씨전』에는 숙량흘이 전쟁에 나가 무공을 세웠다는 기사가 두 군데(양공10, 17년) 기록되어있다. 공자도 용모나 몸집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사기』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공자가 정(鄭)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떨어져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의 모습을 정나라 사람의 입을 빌어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은 고요같고 어깨는 자산과 같으나, 허리 아래편은 우임금보다 3촌이 모자라며 초상난 집의 개처럼 축 늘어져 있더라."라고 표현하였다. 『공자가어』 [곤서(困書)]에서는 '키는 9척 6촌이며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긴 눈에 툭 불거진 이마를 지녔다.' 는 형용을 보탰으며, 한 대 공부(孔 )의 『공총자』가언에서는 장홍( 弘)이 공자의 인상을 표현하여,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꼬리가 긴 눈과 불거진 이마는 황제(黃帝)의 모습이요, 긴 팔에 거북 같은 등을 하고 9척 6촌의 키를 지니고 있는 것은 탕(湯)임금의 용모이다." 라고 하였다. 이같이 공자는 용모가 비범하였고 체력도 강했다 한다.
 

[ 청소년기 ]

공자의 가계는 훌륭했으나 공자가 태어났을 당시 공자의 집안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었다. 더욱이 공자가 세 살 되던 해(B. C 549)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그 뒤로는 더욱 어렵게 살았다. 『논어』 [자한]에는 공자 스스로 "나는 어려서 빈천했기 때문에 천한 일도 많이 할 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 기사가 있다. 또한 공자가 24세 때(B. C 528)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서야 사람들에게 물어 아버지 무덤을 찾아 합장했다고 하였으니(『사기』)공자는 극히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는 아이 때 언제나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갖추는 소꿉놀이로 장난을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이지만 비교적 바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스스로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며,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배운 사람이다."(『논어』 [술이])라고 말하였으나 실제로 공자가 어떻게 공부를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논어』 [자장]에서 자공이 공자의 학문방법에 대하여, 어디에서도 배웠으며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팔일]에는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셔서는 매사에 대하여 물으셨다." 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보면, 공자는 옛 글뿐만이 아니라 눈에 띄는 모든 일에 대하여 스스로 연구하고 공부해서 견식을 넓혀갔던 듯하다. 

『논어』[태백]에서는 증자가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묻고 많이 알면서도 적게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고 말하였듯이, 공자는 실제로 자기만 못한 사람도 찾아가 묻고 공부하였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7년 (B. C 525, 공자 27세)의 기록에는 담자( 子)가 노나라를 방문했을 때 공자는 그가 중국 고대의 관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관제에 대하여 묻고 배웠다. 담자는 노나라보다도 문화정도가 훨씬 낮은 조그만 담나라의 제후였는데도 불구하고 옛 관제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것이다. 이 밖에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사양자(師襄子)에게 가서 금(琴)을 배웠으며, 또 [노장신한열전]에는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에 대하여 물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공총자』에는 주나라로 가서 장홍에게서 음악을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공자 자신이 만년에 자기 일생의 학문 과정을 회고하면서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라고 하고 또 "서른 살에는 자립하였다."(『논어』 [위정])라고 하였으니, 그는 열다섯 살에는 이미 유학을 이룩하기 위한 학문의 길을 분명히 자각하고 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학문이 서른 살에는 어느 정도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학문은 개인적으로는 인의예지에 바탕하여 개인윤리를 확충해서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에 이르는 길을 깨우쳐 주었고, 정치적으로는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도를 이어받아 도덕을 기초로 해서 꽃피운 문물제도를 되살려 잘 조화되고 질서 있는 세상을 재현시키는 것이었다. 그 조화와 질서는 예악(禮樂)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라 가르쳤다.

공자는 19세 때(B. C 533)노나라의 위리(委吏)벼슬을 하였고 그 해에 계관씨 집안 딸에게 장가들어 다음 해에 아들 이(鯉)를 낳았다.(『공자가어』) 위리는 나라 창고의 물건을 관장하는 낮은 관직으로서, 생활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라는 해설이 있다. 다시 21세에는 승전리(乘田吏:『궐리지연보』에 의거, 『사기』에는 사직리라 하였다)가 되었는데, 역시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낮은 관직이었다. 24세에 어머니 안징재가 돌아가셨다.(『궐리지연보』)
 

[ 장년기 ]

공자는 스스로 자립하였다고 말한 30대로 접어들면서 학문과 경륜이 더욱 원숙해졌다. 따라서 그때부터는 개인문제나 가정생활의 문제를 벗어나 어지러운 민심을 바로잡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로 관심이 옮겨갔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그의 명성도 커져서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공자의 제자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확실하고 빠른 것은 『춘추좌씨전』 소공 20년에 보이는 금장(琴張)이다. 이미 공자가 20대에도 제자를 거느렸을 가능성은 있으나, 본격적인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교육은 30대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노나라의 정치는 이 무렵 더욱 혼란해져 노나라의 정권은 완전히 삼환씨(三桓氏)의 손에서 놀아났다. 그 중에서도 계씨(季氏)의 세력은 더욱 커서 노나라 임금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방자했었다. 노나라 군대를 모두 자신들의 사병화 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자신들의 채읍을 넓히고 많은 가신을 두고 나라의 재물을 멋대로 좌우하였다. 이러던 중 공자가 35세 되던 해(소공 25년) 공자로서는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곧 계평자의 방자함을 참지 못한 소공이 후씨와 합세하여 무력으로 계씨를 제거하려다가 삼환씨가 합세하여 반격하는 바람에 목숨만 살려 제나라로 도망한 것이다. 

제나라에서는 소공을 도와 다시 노나라로 돌아가게 해 주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소공은 7년 동안 타국에서 산 뒤 객사하고 말았다. 공자는 이런 극도의 비리를 보고 노나라에서는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할 길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같은 해 소공이 망명한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로 가서의 행적은 확실하지 않으나 『사기』[공자세가]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대부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고소자의 힘을 빌어 경공(景公)을 만났다. 이 때 경공은 공자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공자에게 니계(尼谿)의 땅을 떼어주고 중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경공은 등용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37세 되던 해(B. C 515) 겨울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공자는 제나라를 여행하면서 제나라의 음악 책임자인 태사를 만나 음악을 논하기도 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를 듣고 크게 감동하기도 하는 등 음악 공부에 대하여 이해를 넓히는데 성과를 얻었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뒤 노나라의 정치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공자가 42세 되던 해에는 노나라 소공이 제나라에서 객사하여 정공이 그 뒤를 이었으나, 정공은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또한 노나라 권세가인 계씨 집안도 질서가 어지러워져 실제로는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논어』에서는 양화(陽貨)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특히 계평자가 죽은 뒤로 모든 권력은 완전히 양호에게로 돌아갔다. 『논어』[양화]를 보면, 양호는 권력을 잡은 뒤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정공 8년에 계씨의 또 다른 가신인 공산불뉴(公山不 )가 양호를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계평자의 뒤를 이은 계환자가 계략을 써서 이들을 쳐부수었다. 공자는 이러한 혼탁 속에서도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더욱 분발하여 자신의 학문을 닦는 한편 제자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이 무렵에는 공자의 명성도 더욱 커졌고 먼 곳으로부터도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계환자가 양호를 몰아낸 다음해(공자 51세) 공자는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라는 벼슬에 올랐다. 중도재란 중도를 다스리는 장관으로, 공자가 그 벼슬을 맡은 지 일년만에 중도는 다른 고을이 모두 본받을 정도로 질서가 잡히고(『사기』) 예의와 윤리의 기틀이 잡혔다(『공자가어』)

다음해인 노나라 정공 10년(공자 52세)에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화평을 위해 협곡에서 회합을 하였는데, 이때 공자가 예를 돌보는 관리로 정공을 수행하였다. 여기서 공자는 정공과 경공의 사이에서 외교상의 공로를 세움으로써, 제나라는 노나라의 영지였던 세 고을을 다시 노나라에게 돌려주고 화해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는 다음해 곧 육경의 하나로 국토를 관장하는 벼슬인 사공에 임명되고, 다시 다음 해에는 나라의 법을 다스리는 벼슬인 사구에 임명되었다. 공자는 사구에 임명되자 곧 삼환씨의 세력을 누르고 노나라 공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삼환씨의 세 고을을 허물기로 하였다. 세 고을이란 계손씨의 비(費), 숙손씨의 후( ), 맹손씨의 성( )으로서 이 세 고을을 헐어 없앤다는 것은 노나라 임금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군사적 통일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숙손씨와 계손씨에게서는 이루어졌으나 맹손씨에게서는 그 가신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밖에도 공자는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공자는 굳은 신념과 올바른 판단을 바탕으로 사구의 직책을 수행하여 명성이 국내외에 높아졌다. 그 때문에 다시 다음 해에는 사구에 재상의 일까지 겸임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혁신정치가 효력을 나타내자 이웃한 제나라에서는 크게 경계하고 공자를 제거할 계책을 꾸민 끝에 결국 벼슬자리에서 떠나도록 만들었다. 곧, 제나라에서는 정공과 계환자에게 악무에 능한 미녀 80명과 좋은 말 120필을 선물로 보냄으로써, 정공 등이 즐김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행하도록 하였다. 공자는 이를 말리다가 결국 벼슬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 주유 열국 ]

모든 벼슬을 버린 다음해인 B. C 497년(노 정공 13년 공자 55세)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서 국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 뒤 B. C 481년(노 애공 11년, 공자 68세)노나라로 되돌아오기까지 13년 동안 공자는 여러 나라의 임금들과 만나 도덕정치의 이념으로 설득을 하였다.(『사기』의 [십이제후연표]에는 공자가 70여 나라를 돌아다녔다고 했으나 공자가 방문했던 나라 수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다.) 그런데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이 긴 여정에서 공자는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곧, 위(衛)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가다가 광(匡)땅에서 양호로 오인 받아 그곳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았으며, 두 번째로는 위(衛)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를 거쳐 다시 진나라에 가려고 송나라를 지나다 송나라의 대장군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한 일을 겪었다.
세 번째로는 진나라에서 삼년 가량 머물다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려고 광땅 근처의 포 지역을 지나다가 포땅 사람들의 방해를 받았다. 또한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초나라 소왕이 공자를 초빙하였을 때, 진나라와 채나라에서는 공자가 강한 초나라로 가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공자의 가는 길을 막았다. 그 때문에 공자 일행은 꼼짝도 못하게 된 채 양식도 떨어지고 병든 제자가 생기는 등 고생을 겪었다. 

이렇게 공자의 13년간의 주유는 수많은 고난이 뒤따랐으나 한편으로는 이미 이론과 실천을 겸한 정치가로서 명성이 높았고, 뛰어난 학문과 심오한 사상으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는 처지였으므로 찾아간 곳마다 상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난세의 사람들은 공자의 사상에 한결같이 공감하고 찬동은하면서도 도덕을 바탕으로 한 이상사회 건설에 발벗고 나서는 군왕은 없었다. 공자의 이상 실현을 위한 노력은 결국 당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진나라를 방문한 뒤에는 스스로 탄식하면서 노나라로 돌아갈 뜻을 비추었다. 결국 B. C 484년(노 애공11년, 공자68세), 계강자의 초청을 계기로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 만 년 ]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국로(國老)의 대우를 받으면서 국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힘을 기울인 것은 전적(典籍)의 편찬과 제자 교육이었다. 당시의 제자들은 염유를 비롯하여 자공, 자로, 자유, 자하, 재여, 등이 각기 정치에 참여하여 중요한 벼슬을 하고있었다. 이로 보아 공자의 학문은 노나라뿐만 아니라 가까운 외국에까지도 상당한 세력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된다는 것은 요원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고 그 이상을 후세에 전해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자는 먼저 후세에 전할 전적으로서 육경을 편정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이상을 후세 사람들에게 교육하려하였다. 

육경이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경』 『춘추』의 여섯 가지 유가의 기본 경전을 말한다. 이들 육경은 앞서간 사람들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 생활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획득하는 한편 올바른 성정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는데 큰 무게를 두었던 유가의 기본 경전이다. 공자의 교육은 비교적 성공적이어서, '제자가 삼천명'(『사기』[공자세가])이라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때 제자들 중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아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했으므로 스승인 공자도 높은 명성과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행이 거듭되었다. 69세 되던 해 외아들 리(鯉, 자는 백어(伯魚))가 50세의 나이로 먼저 죽었으며, 다음 해에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고 기대를 걸었던 제자 안연이 죽었다. 

공자는 이때,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噫 天喪予 天喪予:『논어』[선진])!" 라고 통곡하였다. 공자에게 안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으며 절망에 가까운 슬픔을 안겨주었다. 다시 그 다음 해인 B. C 481년(노 애공 14년, 공자 71세 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잡혔다 기린은 예로부터 어진 짐승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의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난세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는 자신의 운명과 비춰서 슬퍼하였으며, 『춘추』의 저술도 이 '서수획린(西狩獲麟)에서 끝맺고 있다. 

그 다음 해(공자 72세)에는 오랜 제자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던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하다가 그곳 내란에 휩쓸려 비명으로 갔다. 이러한 겹친 불행을 겪고서 B. C 479년(노 애공16년 공자 73세) 4월 기축일 공자는 일생을 마쳤다. 공자가 서거하자 노나라 애공도 공자의 그 높은 덕을 추모하는 뇌문( 文)을 지어보냈다.(『사기』) 『예기』 [단궁]을 보면, 공자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칠일 전에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곧 공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을 거닐면서 "태산이 무너지려는 도다, 들보가 부러지려는 도다, 철인이 시드려는 도다!"라고 읊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칠일 후에 돌아가셨다고 쓰여있다.
노나라 성 북쪽의 사상(泗上)에 장사지냈는데, 오늘날 이곳을 공림이라 부른다.

공자는 만년에 일생의 학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열 다섯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게 되었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순조롭게 이해하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논어』 [위정])." 칠십 세에 이르러 도달한 경지는 바로 성인의 경지이다. 공자는 칠십 평생 끊임없는 학구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 공자의 제자들 ]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제자 수가 3천명이었는데, 그 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의 [중니제자열전]에는 공자로부터 학문을 전수 받아 이에 통달한 제자가 77명이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맹자』 [공손추], 『대대례』 [위장군문자], 『회남자』 [요략], 『한서』 [예문지] 등에 모두 공자의 제자 수를 70명이라 하고 있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이나 『공자가어』 [제자해] 등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이들은 모두 80명 정도이다. 『논어』 에는 27명의 이름이 보이는데, [선진]에는 이른바 공문사과(孔門四科)의 십철(十哲)로서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여, 자공, 염유, 자로, 자유, 자하를 들었다. 공자는 하은주 삼대의 문물제도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해서 유교사상을 확립시켰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지런히 배우고 낱낱이 익혀 드디어는 인사백반(人事百般)에서 우주진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내 몸을 닦아 남을 편안히 한다(수기안인:修己安人)는 신념으로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결국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으며, 만년에 조국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에는 『시경』 『서경』 『역경』등 전적 편찬과 제자 교육에 열중하였다. 그를 만세의 스승이라고 일컫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위대성을 기리는 동시에 그가 남긴 가르침이 실천 도덕에 바탕을 둔 인류의 영원한 생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의 실천에 바탕을 둔 개인적 인격의 완성과 예로 표현되는 사회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만년에 공들여 육경을 편정한 것은 후세에 그의 이상을 전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노력이었으며 3천여의 제자를 가르친 것 또한 지칠 줄 모르는 인간애의 발로라고 할 수 잇다. 경험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단정하기를 꺼린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그의 사상 또한 실천을 전제로 한 도덕이 핵심을 이루고 있고 교육 방법도 현실적인 가치체계를 중요시하였다. 그의 교과목은 예악사어서수등 육예로서, 이 육예에 통달해야 군자라 할 수 있고 완인(完人) 전인(全人)이라 할 수 있었으며, 제자 중에는 72명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공자의 이상과 사상은 『논어』에 그대로 표현되어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생시에는 실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 제자들이 각지에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가 일어남에 따라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이는 맹자였으며, 또 전국시대 말기에 순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후 한 나라의 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함으로써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고 이후 2천여 년 간 동양의 사상계를 이끌어왔다. 후세의 제왕들도 공자의 봉작을 계속 높여, 왕(王)과 성(聖)의 칭호로 올림으로써 지극히 존숭받게 되었으며, 각지에 '공묘(孔廟:文廟)'가 세워져 춘추로 석전을 받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서 석전을 올리고 있다. 한편 공자의 후예는 중국에서 연성공(衍聖公)에 봉해져 세전(世傳)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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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역사

1. 상고시대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대학(大學)'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음사(淫祀)'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은 '신시(神市)'에서 '홍익인간'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고 있었던 예술적, 윤리적, 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신시적(神市的)'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신시'와 연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소도(蘇塗)'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사한 '소도'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상고시대에는 이러한 '고신도적(古神道的)'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2. 삼국시대

1) 고구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 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 불, 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대학'의 교수내용은 경(經), 사(史), 제자백가(諸子百家), 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2) 백제

삼국 이전에도 한사군에 근접한 지역은 중국의 유교 윤리와 흡사한 예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삼한시대에는 외부의 영향이 적었으며, 읍락(邑落)이 잡거(雜居)하였다. 비록 국읍에 통치자가 있었을지라도 통치 기구의 지배적 기능이나 예의 규범이 보편화되지 못해 각기 독립된 토속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백제시대에 이르면 통치력이 널리 미쳤을 뿐 아니라, 유교적 체제가 갖추어졌다. 국가의 금령(禁令)과 법제가 뚜렷하게 되고, 중국과 비슷한 혼상례(婚喪禮)가 있었다. 재래의 소도, 천신신앙, 귀신숭배 등의 법속은 유교에서 말하는 교사지례(郊祀之禮)와 종묘제도의 방식으로 형태화하는 등 국가적 규모에서 유교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부 조직, 행정 관서 및 행정 구역 등을 제정함에 있어도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고이왕시대(234~286)에 중앙 관제를 육좌평(六佐平) 16관계(十六官階)로 제정한 것은 ≪주례周禮≫의 6관제(六官制)에 상응하는 것이다. 고이왕이 '남당(南堂)'에서 정사를 보았다고 하는데, 남당제도는 임금이 신하들과 의논하고 정사를 펴는 장소로서 ≪예기≫명당편(明堂篇)에 나오는 명당과 관계 있는 듯하다.

근초고왕(346~375)이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편찬하게 한 ≪서기 書記≫나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해오기도 했다는 등 사서 편찬과 학술 사상에서도 유교사상과의 관련성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송의 가원력(嘉元曆)을 써서 인월(寅月)로 세수(歲首)를 한 것, 의약, 복서(卜筮), 점상(占相)의 술을 해독한 것, 놀이로서 투호(投壺), 저포(樗蒲), 악삭(握鷺), 농주(弄珠) 등을 쓴 것,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경의를 표한 것 등은 중국 문화와 유교 문화를 일상 생활에 활용했던 사례들이다.

백제의 해상 진출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학술사에서 후세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왕자 아직기(阿直岐)와 박사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 유교 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전달함으로써 왕실의 스승이 되고 일본의 학문적 시조가 되었다.

3) 신라

신라의 건국은 삼국 가운데 가장 이른 서기전 57년으로 되어 있으나, 율령의 반포, 백관(百官) 공복의 제정, 국사 편찬, 대학 설립 등 문물 제도의 정비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대체로 200~300년의 후진성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중국 대륙과의 문화 교류도 가장 늦었고, 고구려나 백제와의 관계도 일찍부터 개방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는 꾸준히 발전해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150년간은 뚜렷이 흥륭지세(興隆之勢)의 진취적 기상을 보였다. 외래 문물에 쉽사리 동화되지 않고 고래의 기질과 풍습을 오래 보존해 고유한 정신을 저력으로 유교와 불교 등 외래 문화를 섭취, 융화시켰다.

신라는 발전해가면서 국가적 체통을 확립시키기 위해 유교 문화를 이용하였다. ≪춘추전≫과 삼례(三禮) 등의 경전에 있는 사상을 국가 제도에 적용했던 것이다. 또한 재래의 고신도적 요소와 함께 수기치인이라는 유교의 정교이념(政敎理念)이 드러나는 진흥왕 순수비, ≪주역≫이 국가적 차원에서 응용된 경주 태종무열왕의 능비 등도 유교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대표하는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에서도 유교적 색채를 볼 수 있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보다 직접적으로 확대시켜 갔고, 신문왕 대에 설치한 '국학'에서의 경전 교육과 유교적 학술 문화 진흥은 설총(薛聰) 등의 유학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신라 후기로 갈수록 경술과 문장을 익히기 위해 입당 유학하는 일이 잦아지고 수많은 문인학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유교의 학술적 연마는 상층 계급과 지식층의 일이었지만 유교의 윤리적 규범은 민간에까지 널리 영향을 주어 계층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깊이 침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러 사상과 융합되어 있었던 유교는 개인의 교양, 가정 도덕과 사회 윤리, 정치 제도, 교육, 문화, 국가의 방위 등 실질적인 측면에서 기여하였다.
한국사상의 유교화인가? 아니면 유교의 한국화인가? 또 중국 유교와 한국 유교는 사상사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는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랜 기간을 거쳐 유교는 이미 한국에 토착화되고 체질화되었다는 사실이다.

3. 고려시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송의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어지는 <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 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의 ‘말학(末學)’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근본’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을 형성하였다.

4. 조선시대

1) 전기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법전편찬왕조’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다.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2) 중기

조선 초이래 훈구파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와 훈구 대 사림의 시대를 지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유교는 의례를 매우 중시한다. ≪국조오례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복제도(五服制度)는 상당히 복잡해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 논의해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 정쟁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현종 대에는 효종에 대한 조대비(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간의 예송(禮訟)이 일어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였다. 숙종 조 50년 간 당쟁은 더욱더 치열해졌다.

조선조 중기에는 유학의 도를 밝혀 선현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이 세워진 한편 지역 사회의 미풍양속을 이루고자 향약이 권장되었다.조선조 성리학은 이황*이이를 배출한 16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황은 단순히 주자학을 답습하지 않고 이존설을 주장해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내적 성찰의 방법을 통해 천명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인간적 고귀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성리학적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외침에 저항하는 의리학파의 충렬 정신이 두드러졌다. 조선과 명나라가 비록 대국과 소방(小邦)의 구별(分)은 있었지만 인도를 높이고 불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춘추의리의 이념에 있어서는 같았다. 화이론이나 존주론(尊周論)의 근본 정신도 여기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과 저항 정신에서, 그리고 효종대의 북벌론과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에서도 의리학을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예학의 시대’라 할만큼 예학이 발달하고 많은 논저가 나왔다. 임진*병자 양난을 전후해 무너진 기강과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순후한 민풍을 일으키는데 예학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조선조 후기까지 예학은 계속 탐구되어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 그리고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실학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유교는 일상 행위를 통해서 떳떳한 이치를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는 중요한 위치를차지하였다. 유교의 의례에는 관혼상제의 사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상례는 동양의 뿌리깊은 종법 사회를 유지시키는 원리였다. 의례의 생활화는 곧 유교가 완전히 뿌리내림을 뜻한다.

이 시기에 실학사상도 대두하였다. 유교는 일상적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학의 성격을 띤다. 주자학에서도 노불(老佛)을 공허하다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유학이 수기치인과 경세제민을 근본으로 하는 점은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조선조 학풍의 기조를 이루었던 주자학은 순수철학과 사회철학의 양면이 있었다. 전기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철학이 크게 발달했고, 후기에는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이용후생을 위주로 한 실학이 발달하였다.

중국 명대 유학인 양명학은 수입 초기부터 영남*기호를 막론하고 주관주의철학으로 인식되어 거부당했다. 하지만 양명학에 대한 비평이 계속되면서도, 한편으로 국내외의 자극과 관심으로 인해 양명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생사와 영욕을 돌보지 않고 국가적 환란을 돌파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 주체적인 판단과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사상마련(事上磨練)을 주지로 하는 양명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던 한국 양명학은 중국의 양명학과 달리 선학의 풍을 띠지도 않았고 반주자(反朱子)를 표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실사(實事)와 실공(實功)을 중시했던 점에 그 특징이 있다.

3) 후기

조선 후기는 밖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정치*문화적으로 변화와 충격을 받으면서 근대로 접어드는 복잡한 시대였다.영*정조시대는 침체했던 국운을 쇄신해 융성을 도모했던 문예 부흥기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완화시켰고,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당색과 계층에 관계없이 학자들을 모아 국정과 학술문화에 기여하였다. 일반 학계에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조 조에는 이익의 성호학파가 나왔고, 정조 조에는 중국의 연경을 오가며 청조문화(淸朝文化)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北學派)가 형성되었다.

영*정조시대에는 실학과 함께 천주교가 들어와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서 비판하거나, 유교와 천주교를 절충해 이해하거나, 천주교를 신봉해 유교 의례를 거부하는 등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서학이 들어와 논쟁이 벌어지고 사회 문제화되었던 것은 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순조로부터 철종 대까지는 왕실의 인척에 의해 세도 정치가 행해져서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국정은 극도로 황폐화되었다. 크고 작은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도둑떼가 들끓는 가운데 천주교의 신봉자들은 날로 늘어났다. 대규모의 교옥(敎獄)들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계속 번졌다.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정약용과 김정희 같은 대실학자가 탄생했고, 위정척사와 척양척왜를 주장하는 이항로 및 그를 계승한 화서학파(華西學派)가 형성되었다.

고종*순종 조는 조선 말기의 풍운이 겹치는 시대였다. 1910년 급기야 국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난국에 대해 당시의 지성들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보수적 의리학파는 주권 수호를 위해 이념적*정치적으로 외세를 배격했고, 개화파는 국제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근세의 한국은 서양이 침투하면서 대혼란의 시대를 겪었다. 이러한 격변기를 맞이해 조선 후기의 실학과 의리학, 그리고 근대 의식이 단합된 역량으로 포용*승화되었더라면 새로운 철학을 창출하고 나라 발전을 이룩해 민족의 앞날을 개척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성취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렀다. 이제 후세들은 선조들의 저력과 가능성을 거울삼아 남아 있는 과제들을 풀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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