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역사

1. 상고시대

흔히 한국사상에 대해 논할 때 고대의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언명하지만, 실제로 유교가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르다.유교의 전래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 '대학(大學)'을 세운 시기를 하한으로 잡는다. 그러나 최고 학부로서의 국립대학을 세울 수 있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들어 온 중국문화는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이나 풍속과 접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한편 고대 한국에서는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주술신앙과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를 비롯해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귀신숭배 등 각종 '음사(淫祀)'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유교 문화가 수입되면서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바뀌거나 세련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서술되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천왕(桓雄天王)과 땅에서 올라와 음엽(飮葉)해 인신(人身)이 된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다.이 신화의 내면적 의미에서 본다면, 단군은 하늘의 신성함과 땅의 질실(質實)함이 묘합해 이룩된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단군은 '신시(神市)'에서 '홍익인간'의 이상을 펴고자 조선이라는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사서(史書)에서는 단군조선에 이어 후조선, 곧 기자조선을 일컫고 있다.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에서 기자의 교화를 일컬으면서도 그 말미에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의 외족과 다르다(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之外)."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중국에서 난세를 한탄하며 바다를 건너 동이로 가고자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이야기이다.≪제왕운기≫에서처럼 기자에 의한 발달된 중국 문화의 도입도 단군조선시대로부터 조선인민이 갖추고 있었던 예술적, 윤리적, 종교적 자질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인문주의적 중국문화가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신시적(神市的)'인 신비주의의 틀은 유지되고 있었다. 고조선의 '신시'와 연관되는 것으로 마한의 '소도(蘇塗)'를 지적할 수 있다. 국읍마다 1인을 세워 천군이라 하고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종의 종교적 교의를 구비하고 음도(淫屠:佛敎)와 흡사한 '소도'를 둔 것은 단군조선 이래의 제천사상 및 신시의 풍속과 상통한다.

후세까지 영향을 미친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同盟), 마한과 백제의 소도, 신라의 한가배, 고려말까지 지속된 팔관(八關) 등이 있었다.이것들은 한국인의 숭천경조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민족사의 내면에 흐르는 저력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도적이면서 신비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종교적이었다.상고시대에는 이러한 '고신도적(古神道的)' 요소를 지닌 신인상화(神人相和)의 풍토 위에서 외래의 사상이 수입되었을 것이다.

2. 삼국시대

1) 고구려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추정되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고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삼국 가운데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먼저 중국 문화와 접촉해 수용,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다음으로 백제가 해상으로 중국과 통행함으로써 유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방에 돌아앉아 중국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유교 문화 역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던 까닭에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다.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많이 존속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한 고국(故國)이었다. 이미 고조선시대 즉 위만시대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시기부터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고 있었고, 노장(老莊)의 자연사상도 혼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어 유, 불이 병행했으며, 후기에는 종교화한 도교를 들여다가 장려하는 등 유, 불, 도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의 유교를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유교가 국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기본 교양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거듭된 사서(史書)의 편찬이다. 고구려의 사서 편찬은 한문 문장을 수준 높게 구사하는 방대한 저작과 유교 경전을 비롯한 중국 문화를 능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교육제도의 정립이다. 고구려는 유교 경전의 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체제를 널리 갖추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실정과 정신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대학'의 교수내용은 경(經), 사(史), 제자백가(諸子百家), 문장(文章) 등이었는데 유교 경전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유교 경전의 이해와 활용이다. 경학을 기본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습득은 개인 생활의 문화적 요소가 되었고, 국가 이념과 체계를 정립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었다.

2) 백제

삼국 이전에도 한사군에 근접한 지역은 중국의 유교 윤리와 흡사한 예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삼한시대에는 외부의 영향이 적었으며, 읍락(邑落)이 잡거(雜居)하였다. 비록 국읍에 통치자가 있었을지라도 통치 기구의 지배적 기능이나 예의 규범이 보편화되지 못해 각기 독립된 토속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백제시대에 이르면 통치력이 널리 미쳤을 뿐 아니라, 유교적 체제가 갖추어졌다. 국가의 금령(禁令)과 법제가 뚜렷하게 되고, 중국과 비슷한 혼상례(婚喪禮)가 있었다. 재래의 소도, 천신신앙, 귀신숭배 등의 법속은 유교에서 말하는 교사지례(郊祀之禮)와 종묘제도의 방식으로 형태화하는 등 국가적 규모에서 유교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부 조직, 행정 관서 및 행정 구역 등을 제정함에 있어도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고이왕시대(234~286)에 중앙 관제를 육좌평(六佐平) 16관계(十六官階)로 제정한 것은 ≪주례周禮≫의 6관제(六官制)에 상응하는 것이다. 고이왕이 '남당(南堂)'에서 정사를 보았다고 하는데, 남당제도는 임금이 신하들과 의논하고 정사를 펴는 장소로서 ≪예기≫명당편(明堂篇)에 나오는 명당과 관계 있는 듯하다.

근초고왕(346~375)이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편찬하게 한 ≪서기 書記≫나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해오기도 했다는 등 사서 편찬과 학술 사상에서도 유교사상과의 관련성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송의 가원력(嘉元曆)을 써서 인월(寅月)로 세수(歲首)를 한 것, 의약, 복서(卜筮), 점상(占相)의 술을 해독한 것, 놀이로서 투호(投壺), 저포(樗蒲), 악삭(握鷺), 농주(弄珠) 등을 쓴 것,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경의를 표한 것 등은 중국 문화와 유교 문화를 일상 생활에 활용했던 사례들이다.

백제의 해상 진출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학술사에서 후세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왕자 아직기(阿直岐)와 박사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 유교 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전달함으로써 왕실의 스승이 되고 일본의 학문적 시조가 되었다.

3) 신라

신라의 건국은 삼국 가운데 가장 이른 서기전 57년으로 되어 있으나, 율령의 반포, 백관(百官) 공복의 제정, 국사 편찬, 대학 설립 등 문물 제도의 정비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대체로 200~300년의 후진성을 보이고 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중국 대륙과의 문화 교류도 가장 늦었고, 고구려나 백제와의 관계도 일찍부터 개방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는 꾸준히 발전해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150년간은 뚜렷이 흥륭지세(興隆之勢)의 진취적 기상을 보였다. 외래 문물에 쉽사리 동화되지 않고 고래의 기질과 풍습을 오래 보존해 고유한 정신을 저력으로 유교와 불교 등 외래 문화를 섭취, 융화시켰다.

신라는 발전해가면서 국가적 체통을 확립시키기 위해 유교 문화를 이용하였다. ≪춘추전≫과 삼례(三禮) 등의 경전에 있는 사상을 국가 제도에 적용했던 것이다. 또한 재래의 고신도적 요소와 함께 수기치인이라는 유교의 정교이념(政敎理念)이 드러나는 진흥왕 순수비, ≪주역≫이 국가적 차원에서 응용된 경주 태종무열왕의 능비 등도 유교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대표하는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에서도 유교적 색채를 볼 수 있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보다 직접적으로 확대시켜 갔고, 신문왕 대에 설치한 '국학'에서의 경전 교육과 유교적 학술 문화 진흥은 설총(薛聰) 등의 유학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신라 후기로 갈수록 경술과 문장을 익히기 위해 입당 유학하는 일이 잦아지고 수많은 문인학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유교의 학술적 연마는 상층 계급과 지식층의 일이었지만 유교의 윤리적 규범은 민간에까지 널리 영향을 주어 계층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깊이 침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러 사상과 융합되어 있었던 유교는 개인의 교양, 가정 도덕과 사회 윤리, 정치 제도, 교육, 문화, 국가의 방위 등 실질적인 측면에서 기여하였다.
한국사상의 유교화인가? 아니면 유교의 한국화인가? 또 중국 유교와 한국 유교는 사상사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는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랜 기간을 거쳐 유교는 이미 한국에 토착화되고 체질화되었다는 사실이다.

3. 고려시대

수많은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송의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헌장이라 일컬어지는 <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성종 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수 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고 체제가 잡혀갔다.
사학의 발달과 국가적 차원의 관학 진흥책에 힘입어 수많은 학자와 저술들이 배출되는 속에서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무인정권 시대를 맞아 이전에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즉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후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배척적 위치에 있었고, 사장(詞章) 위주의 ‘말학(末學)’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근본’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또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재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로 변경하였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 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즉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을 형성하였다.

4. 조선시대

1) 전기

태조 대의 ≪조선경국전≫으로부터 고종 대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법전편찬왕조’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다.
조선 전기에 유교사상과 주자학은 학술 문화의 원리로 작용하였다. 성왕이자 학자였던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세종 조에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으로,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학에 기본하고 있다. 즉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의 창업에 참여했던 사공파는 정도전, 권근에 이어 권우*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김종리 등이었고,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다.

한편 세조 즉위 이후 양분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훈구파에는 정인지*최항*어효첨*신숙주*이석형*양성지*권람*정창손*서거정*이극감*한계희*노사신 등이 있었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절의파에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등이 있다. 절의파의 불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2) 중기

조선 초이래 훈구파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와 훈구 대 사림의 시대를 지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유교는 의례를 매우 중시한다. ≪국조오례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복제도(五服制度)는 상당히 복잡해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 논의해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 정쟁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현종 대에는 효종에 대한 조대비(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간의 예송(禮訟)이 일어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였다. 숙종 조 50년 간 당쟁은 더욱더 치열해졌다.

조선조 중기에는 유학의 도를 밝혀 선현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이 세워진 한편 지역 사회의 미풍양속을 이루고자 향약이 권장되었다.조선조 성리학은 이황*이이를 배출한 16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황은 단순히 주자학을 답습하지 않고 이존설을 주장해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내적 성찰의 방법을 통해 천명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인간적 고귀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성리학적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외침에 저항하는 의리학파의 충렬 정신이 두드러졌다. 조선과 명나라가 비록 대국과 소방(小邦)의 구별(分)은 있었지만 인도를 높이고 불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춘추의리의 이념에 있어서는 같았다. 화이론이나 존주론(尊周論)의 근본 정신도 여기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과 저항 정신에서, 그리고 효종대의 북벌론과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에서도 의리학을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예학의 시대’라 할만큼 예학이 발달하고 많은 논저가 나왔다. 임진*병자 양난을 전후해 무너진 기강과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순후한 민풍을 일으키는데 예학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조선조 후기까지 예학은 계속 탐구되어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 그리고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실학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유교는 일상 행위를 통해서 떳떳한 이치를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는 중요한 위치를차지하였다. 유교의 의례에는 관혼상제의 사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상례는 동양의 뿌리깊은 종법 사회를 유지시키는 원리였다. 의례의 생활화는 곧 유교가 완전히 뿌리내림을 뜻한다.

이 시기에 실학사상도 대두하였다. 유교는 일상적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학의 성격을 띤다. 주자학에서도 노불(老佛)을 공허하다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유학이 수기치인과 경세제민을 근본으로 하는 점은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조선조 학풍의 기조를 이루었던 주자학은 순수철학과 사회철학의 양면이 있었다. 전기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철학이 크게 발달했고, 후기에는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이용후생을 위주로 한 실학이 발달하였다.

중국 명대 유학인 양명학은 수입 초기부터 영남*기호를 막론하고 주관주의철학으로 인식되어 거부당했다. 하지만 양명학에 대한 비평이 계속되면서도, 한편으로 국내외의 자극과 관심으로 인해 양명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생사와 영욕을 돌보지 않고 국가적 환란을 돌파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 주체적인 판단과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사상마련(事上磨練)을 주지로 하는 양명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던 한국 양명학은 중국의 양명학과 달리 선학의 풍을 띠지도 않았고 반주자(反朱子)를 표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실사(實事)와 실공(實功)을 중시했던 점에 그 특징이 있다.

3) 후기

조선 후기는 밖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정치*문화적으로 변화와 충격을 받으면서 근대로 접어드는 복잡한 시대였다.영*정조시대는 침체했던 국운을 쇄신해 융성을 도모했던 문예 부흥기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완화시켰고,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당색과 계층에 관계없이 학자들을 모아 국정과 학술문화에 기여하였다. 일반 학계에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조 조에는 이익의 성호학파가 나왔고, 정조 조에는 중국의 연경을 오가며 청조문화(淸朝文化)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北學派)가 형성되었다.

영*정조시대에는 실학과 함께 천주교가 들어와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서 비판하거나, 유교와 천주교를 절충해 이해하거나, 천주교를 신봉해 유교 의례를 거부하는 등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서학이 들어와 논쟁이 벌어지고 사회 문제화되었던 것은 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순조로부터 철종 대까지는 왕실의 인척에 의해 세도 정치가 행해져서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국정은 극도로 황폐화되었다. 크고 작은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도둑떼가 들끓는 가운데 천주교의 신봉자들은 날로 늘어났다. 대규모의 교옥(敎獄)들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계속 번졌다.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정약용과 김정희 같은 대실학자가 탄생했고, 위정척사와 척양척왜를 주장하는 이항로 및 그를 계승한 화서학파(華西學派)가 형성되었다.

고종*순종 조는 조선 말기의 풍운이 겹치는 시대였다. 1910년 급기야 국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난국에 대해 당시의 지성들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보수적 의리학파는 주권 수호를 위해 이념적*정치적으로 외세를 배격했고, 개화파는 국제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근세의 한국은 서양이 침투하면서 대혼란의 시대를 겪었다. 이러한 격변기를 맞이해 조선 후기의 실학과 의리학, 그리고 근대 의식이 단합된 역량으로 포용*승화되었더라면 새로운 철학을 창출하고 나라 발전을 이룩해 민족의 앞날을 개척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성취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렀다. 이제 후세들은 선조들의 저력과 가능성을 거울삼아 남아 있는 과제들을 풀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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