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의 관직들. 중국관직에대해서 조금 알아보자

간의대부(諫議大夫)

황제에게 간하고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하던 관원. 진(秦)나라 때 간대부 (諫大夫)라 부르던 것을 후한 시대에 간의대부로 개칭하여 황제의 고문과 응대 등을 맡았다.

거기장군(車騎將軍)

기병을 통솔하는 무관직. 원래 한무제(漢武帝)때 비롯된 공신(功臣)의 명호 (名號)였으나 후한시대에 표기장군(驃騎將軍) 다음가는 무관직이 되었다.

공부시랑(工部侍郞)

공부는 산택(山澤),영조(營造),공장(工匠)등을 맡아 보는 관청. 시랑은 이관청의 두번째 벼슬이다. 원래 임시직이었으나 수나라 때 상설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광록대부(光祿大夫)

조정의 고문직. 진나라 때 9경(卿)의 하나인 낭중령(郎中令)의 속관으로 설치된 것이 한무제 때 광록훈(光祿勳)의 속관으로 마련되었다. 종2품의 관직 으로 실권은 별로 없었다.

교위(校尉)

둔병(屯兵)을 맡아 보는 관직. 한무제 때 성문교위(城門校尉)와 사례교위(司隷校尉)의 두 교위가 처음 생겨 녹봉 2천석을 받았는데, 그 후 차차 무관직으로 변하여 한직(閑職)이 되었다.

기도위(騎都尉)

광록훈(光祿勳)에 속하여 황제를 호위하는 기병의 관직. 한무제 때 비롯되었는데 훈공에 따른 일종의 세습직이었다.

낭관(郎官)

각 관청에서 문서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때에는 시랑(侍郞)과 낭중 (郎中)을 낭관이라 했으나, 당나라 이후 낭중과 원외랑(員外郞)을 낭관이라 칭했다. 한나라 때에는 상서(尙書;장관)의 보좌를 겸했고 후에 각 사(司)의 직무를 주관했다.

녹상서사(錄尙書事)

궁정의 문서를 맡던 관직. 후한 장제(章帝) 때 태부(太傅)와 태위(太尉)에게 이 직무를 겸하게 하는데서 시작되어 화제(和帝) 때 이후 상설 기관이 되고,그 관위(官位)는 삼공(三公) 위에 있었다. 즉 어린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그를 대신하여 집정하고 재상직을 겸했다.

대사농(大司農)

중앙 관직인 9경(卿) 중의 하나. 현재의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서 녹봉은 쌀 2천 석이었다.

대사마(大司馬)

원래 대장군(大將軍)과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주어지던 칭호. 한무제 때 그 지위는 승상(丞相) 위에 있었다. 그 후 애제(哀帝) 때 승상의 이름을 없애고 대사도(大司徒)라 칭했으나 여전히 대사마의 지위는 대사로 상위에 있고 대 사공(大司公)과 함께 삼공(三公)이라 칭하여 최고의 정무장관(政務長官) 위 치에 있었다. 그 후로 후한 시대에 이르러서 대사마를 태위(太尉)로 개칭하 고 다른 두 관원, 즉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삼공이라 칭했다.

대장군(大將軍)

최고의 무관직. 후한 때 이 직위가 처음으로 설치되어 삼공(三公)보다 상위 에 놓았으나 수나라 때에 이르러 한직이 되었다.

대홍로(大鴻로)

외국의 빈객(賓客)과 귀순한 외이(外夷)를 맡아보던 관직. 원래 전객(典客)이라 하던 것을 한무제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

도독(都督)

위문제(魏文帝) 때 각 주(州)의 군사와 자사(刺史)의 관원을 통활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한 관명이 아니라 산관(散官)의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독우(督郵)

한나라 때 태수(太守),군수(郡守) 등의 보좌관으로 설치된 관직. 각 현(縣)

의 행정 감독을 주 임무로 했으나 당나라 때 폐지되었다.

무위장군(武衛將軍)

궁정의 경비를 주임무로 하는 무관직. 즉 무위영(武衛營)의 대장으로서 한나라 시대에 비롯 되었다.

미인(美人)

한나라 시대의 여관(女官) 계급. 녹봉은 2천 석으로서 명나라 때까지 존속하다가 폐지되었다.

별가(別駕)

각 주(州) 자사(刺史)의 보좌관. 한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언제나 자사를 따라다니며 주내를 순찰했기 때문에 이 명칭이 생겼다. 정식 명칭은 별가종사사(別駕從事使)로 한때 장사(長史)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다.

복야(僕야)

관청의 주인, 또는 장(長)의 직위. 진나라 때 시작되어 한나라로 계승되어 군인, 궁인(宮人)상서(尙書), 박사(博士) 등에 모두 복야가 있었으나, 그 후상서복야 외에는 모두 폐지되고 이것만이 전문직이 되었다.

봉거도위(奉車都尉)

천자 측근에서 수레에 배승(陪乘)하는 무관직. 한무제 때 시작되었는데 녹봉은 2천 석이었다.

비서랑(秘書郞)

궁중의 도서 및 문서를 담당하던 관직. 비서감(秘書監), 비서령(秘書令), 비서승(秘書丞) 등의 명칭으로 개칭되기도 했는데 명문 자제 중에서 등용했다.

영군(領軍)

호군(護軍)과 함께 근위병을 지휘하던 무관직. 위나라 조조(曹操)가 처음으 로 이 관직을 설치했다.

의랑(議郞)

낭중(郎中)에 소속되어 평의(評議)에 참가한 고문직. 진나라 때 폐지되었다.

자사(刺史)

칙령으로 각 주군(州郡)의 장(長)을 감찰하던 관직. 한나라 초에 설치되었으며, 후한 시대에 이르러 지방 행정의 변천에 따라 그 호칭이 여러 번 변했다 . 위진(魏晋) 시대에 자사는 주목(州牧)과 동격이 되어 지방의 최고 행정관이 되었다.

장사(長史)

진한(秦漢) 때 승상(丞相) 및 태위(太尉)의 속관으로둔 관직. 또 이와는 별도로 진나라 때의 지방관으로서 군수의 속관으로 이 관직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나라 때에는 변경에 있는 군의 군승(軍丞;부군수격)으로 이 직위를 두었다.

전농(典農)

후한 말기에 중원(中原)에 두었던 관직. 식량의 징수와 감독을 담당했는데 대사농(大司農) 휘하에 있었다.

전장군(前將軍)

대장군에 속한 일곱 장군의 하나. 선봉을 맡은 장군으로 녹봉은 2천 석이다.

절충교위(折衝校尉)

징발된 군사를 맡아보던 무관직. 적벽대전(赤壁大戰) 때 조조의 장수 악진(樂進)이 절충장군이 된 데서 비롯된 관직이다.

종사(從事)

보좌관에 대한 총칭. 한나라 때 자사(자사)의 속관이던 별가(別駕)ㄳ치중(治中)공조(功曹) 등이 모두 종사였고, 또 각 부(部)군(郡)국(國)에도 종사가 있었다.

주부(主簿)

정부 각 부처의 문서와 부적(簿籍)을 맡아보던 관직.

중랑(中郞
중랑장의 별칭.

중랑장(中郞將)

진한(秦漢) 때 궁중의 경비를 맡던 낭중령(郎中令)에 속한 오관서(五官署)좌서(左署)우서(右署)의 대장. 지위는 장군 다음가는 것으로서 중랑이라고도 불렀다. 후한말에 이르러 동서남북의 중랑장이 증설된 때에 호분(虎賁)과 사흉노(使匈奴)의 중랑장이 있었다.

중서(中書)

한나라 무제 때 궁중의 의전(儀典)과 문서를 맡아보기 위해 설치한 관직. 처음에는 환관 중에서 임명했으나 후에 중서령(中書令)이라 개칭하여 궁중의사무에 관한 일을 통괄하게 하고 환관의 임명을 중지하고 일반인으로 이 직책을 맡게 했다. 위(魏)나라 문제(文帝) 때 중서성(中書省)을 두어 중서감(中書監)과 중서령(中書令)의 직제를 마련하여 궁중의 기밀 문서를 맡아 보게했다.

집금오(執金吾)

궁성 주위를 순시하며 경비를 맡던 무관직. 녹봉은 2천 석이었다.

태복(太僕)

왕명의 전달과 시종직을 주무로 하던 관직. 진한(秦漢) 시대부터는 9경(卿)의 하나로서 천자의 어가(御駕)와 어마(御馬)의 관리를 맡는 직책으로 바뀌었다.

태부(太傅)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 주(周) 시대에 태사(太師)ㄳ태부ㄳ태보(太保)의 삼공(三公) 중 두변째 고위직이었으나 진(晋) 시대 이후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태사(太師)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최고의 관직. 주(周) 시대의 삼공(三公)의 하나로 설치되어 주로 지육(智育)을 담당했다. 진(晋) 시대 이후 삼공은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전환 했으나, 어느 왕조에서나 최고의 현직으로 예 우 했다.

 

태상(太常)

 

9경(卿) 중의 하나로서 의전(儀典)을 맡아 보던 관직.

 

태수(太守)

 

지방의 군(郡)을 다스리던 관직. 원래 군수(郡守)라 칭하던 것을 한나라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 그 후 역대 왕조가 이 직책을 두었으나 송나라 이후에 는 군을 부(府)로 개칭했기 때문에 지부(知府)로 명칭을 바꾸었다.

 

태위(太尉)

 

삼공의 하나로 삼공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으며, 전국 최고의 군사장관으로, 모든 군사를 장악하였따. 동한의 태위는 실질적인 승상이었따. 항 때 대사마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동한 영제 말년에 다시 태위를 대사마와 함께 두었다. 제 1품이었으며, 녹봉은 1만석이었다

 

태자태사(太子太師)

 

태자를 보도(輔導)하는 직책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서, 태자태부(太子太傅),태자태보(太子太保)와 함께 동궁 삼사(東宮三師)로 불리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단순한 예우용 직함으로 변해 태자와는 아무 관도 없게 되었다.

 

태중대부(太中大夫)

 

궁중의 의론(議論)을 맡아보던 관직. 진(晋)나라 때 비롯되었으나 수나라 이후부터 단순한 산관(散官)이 되고 말았다.

 

표기장군(驃騎將軍)

 

대장군 다음가는 무관직. 일곱 장군 가운데 우두머리로서 녹봉은 4천 2백 석이었다. 수나라 때는 응양랑장(膺揚郞將)으로 명칭이 바뀌어 차차 권한이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무산계(武散階)의 명칭으로 화했다.

 

하남윤(河南尹)

 

수도를 다스리는 행정관. 하남은 수도 낙양(洛陽)을 말하고 윤은 행정 책임 자를 가리킨다.

 

행군사마(行軍司馬)

 

장군의 보좌관. 한나라 때 설치되어 부내(府內)의 사무를 총괄하는 한편 출정 때는 참모가 되어 장군의 부직(副職)이 되었다. 별명을 군사마(軍司馬)또는 군사(軍司)라 칭했으며, 당나라 시대 이후에는 출정할 때 장수(將帥)및 절도사(節度使) 밑에 반드시 행군사마가 있어 군대의 요직을 차지했다.

 

현승(縣丞)

 

현령(縣令)의 보좌관. 현은 군(郡) 다음가는 행정 구역으로 한 군에 10정도 의 현이 있었다. 그 장관을 현령, 그 다음을 현승이라 했다.

 

현위(縣尉)

 

현(縣)의 치안을 맡아 보던 관직. 후에 전사(典史)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주(周)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近衛官)으로 출발한 관직. 한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을 호분중랑장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 이후 이 칭호가 남용되어 무게를 잃어 가다가 당나라 때는 중급 장교정도의 지위로 떨어졌다.

 

황문상시(黃門常侍)

 

환관을 가리키는 말. 원래 황문이란 궁문(宮門) 또는 궁서(宮署)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한 시대에 이르러 환관을 가리키게 되었다.

 

효기교위(驍騎校尉)

 무관직의 명칭. 한나라 초에 설치했던 직책으로서 기병을 지휘하는 교위직이었다. 수나라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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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당 시대의 사상

 

한·당 시대의 사상(漢唐時代의 思想)은, 한나라(漢: 기원전 206~기원후 220) 시대로부터 위진남북조 시대(魏晉南北朝時代: 220~589)를 지나 수나라(隋: 581~618) · 당나라(唐: 618~907) · 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 907~960)에 이르기까지 약 1천년 동안의 중국의 중세(中世) 시대에서 전개된 사상을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한나라 시대에는 경학(經學)과 황로술(黃老術),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노장(老莊)의 현학(玄學), 그리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로 분류한다.

 

경학과 황로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유교, 훈고학, 경학, 도가, 신선술, 방술, 도교입니다.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

 

양웅(揚雄: 

기원전 53~ 기원후 18)

 

배경편집

 

전한(前漢: 기원전 206~기원후 8)과 후한(後漢: 25~220)의 양한(兩漢) 4백년 간의 통일기에는 선진 시대(先秦時代)와 같은 자유사상이나 제자백가와 같은 독창적인 사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시황의 분서(焚書)로부터 살아남은 문헌들을 수집 ·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따라서 훈고학(訓誥學), 즉 훈고학적 경학(經學)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오랜 전쟁의 영향과 정치적 속박을 싫어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노자(老子)의 무위자연 사상이 환영을 받았다. 훈고학은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 시대부터 당나라(618~907) 시대까지 송나라(960~1279) 시대에 성리학이 발생할 때까지 유행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유가 계열로는 훈고학적 경학이 있었다면, 도가 계열로는 노장사상의 청정무위(淸淨無爲)를 위주로 하여 도를 닦아 목숨(壽 ·수: 생명 에너지)을 기르며 신선술(神仙術)과 방술(方術)을 구하는 황로술(黃老術)이 있었으며, 또한 형명법술(刑名法術: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과 기술)을 숭상하는 법가 계열의 학문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 사상가편집

 

한나라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로서는 《회남자(淮南子)》를 저술하고 노장사상의 청정무욕(淸淨無欲)을 말한 유안(劉安: 기원전 179~122), 금문학(今文學)의 입장에서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 · 음양설(陰陽說) ·유자지학(儒者之學) · 재이지변(災異之變)을 말한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 유가 · 도가의 두 학문을 혼합하여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저술한 양웅(揚雄: 기원전 53~ 기원후 18), 훈고학의 대표자인 정현(鄭玄: 127~200)을 들 수 있다.

 

한편, 신비사상으로 차 있던 한나라시대에서 왕충(王充: 27~99?)은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허망한 이론을 싫어하여 《논형(論衡)》을 저술하여 당시의 학문 경향을 비판하고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을 펼쳤다.

 

금문학과 고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서경 (책), 오경박사입니다.

 

한나라 초기에는, 고조(기원전 206~195) 때의 육가(陸賈: 기원전 ?~?)와 문제(재위 기원전 180~157) 때의 가의(賈誼: 기원전 200~168)가 유학자로서의 식견을 보였다.무제(재위 기원전 141~87)는 오경박사를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고,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는 〈현량대책(賢良對策)〉 등을 지어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건의하여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확립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 참위설(讖緯說) · 재이설(災異說)이 유행하였는데, 자연계의 현상을 포함한 하늘의 운행인 천도(天道)와 인간의 행위인 인사(人事)가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전한의 동중서를 비롯한 금문경학자(今文經學者)들은 자연주의와 신비주의 사상으로 하늘(天)과 인간(人)의 관계와 사회와 역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신나라(新: 8~23) 왕망(王莽) 때는 유흠(劉歆: ?~23)이 《서경(書經)》의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들고 나옴에 따라, 기존의 판본인 《금문상서(今文尙書)》를 지지하는 금문가(今文家)와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지지하는 고문가(古文家) 사이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금문가는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의 입장에서 《금문상서》는 공자가 예부터 전해져 오는 도(道)에 의거하여 새로이 편찬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공자를 왕자(王子)의 덕과 자격을 갖춘 사람인 "소왕"(素王)으로 높이고,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위서(僞書)라 주장하면서 《고문상서》는 공자의 편찬을 통해 전수된 정통적인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고문가는 공자는 예부터 전해져 오는 도(道)를 좋아하여 이 도에 대해 해설했을 뿐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도를 먼저 이룬 큰 스승인 "선도대사"(先道大師)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문상서》는 진시황의 분서(焚書)로부터 살아남은 문헌으로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고(誣告)일 뿐이라고 하면서 금문가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 금고문 논쟁은 후한(後漢: 25~220) 말기에 정현(鄭玄: 127~200)이 금문가와 고문가의 여러 철학 이론을 모두 채용하여 경전의 뜻을 통일시킴으로써 완화되었다. 정현은 고문가의 철학을 위주로 하여 금문가의 참위설 등을 종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훈고를 통해 모든 유교 경전들에 대한 통일적인 해석을 완성하여 한나라 · 당나라 시대 훈고학의 지표가 됨으로써 경학의 권위를 높였다.

 

현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현학, 주역, 도덕경, 장자 (책), 하안, 왕필, 곽상, 죽림칠현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220~589) 왕조들의 계통도: 위진 시대는 220~420, 남북조 시대는 439~589

 

배경편집

 

위진남북조 시대(魏晉南北朝時代: 220~589)에는 노장(老莊)의 현학(玄學)이 풍미하였다. 현학에서 3현(三玄)이라 함은 《주역(周易)》·《노자(老子)》·《장자(莊子)》를 지칭한다. 전쟁과 난리가 끊이지 않은 어지러운 때에 성명(性命: 본성과 천명, 인간의 본성과 하늘의 명령)을 보존하고 세상에 명성을 드날리는 것을 구하지 않으며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의사(意思)를 가지고 《노자》와 《장자》의 드넓은 세계를 좋아하였다.

 

대표적 사상가편집

 

현학의 대표적 사상가는 삼국 시대위나라(魏)의 하안(何晏: 193?~249) · 왕필(王弼: 226~249) 그리고 서진(西晉)의 곽상(郭象: 252?~312)이다. 하안(何晏)은 유무(有無)를 논하고, 왕필(何晏)은 체용(體用)을 해설하고, 곽상(郭象)은 《장자》를 풀이하였는데, 이들 삼인과 더불어 현학의 학풍이 크게 일어났다. 그 밖에 완적(阮籍: 210~263) ·혜강(嵆康: 223~262) 등의 죽림7현(竹林七賢)이 나타나서 현언(玄言)을 숭상하고 예법(禮法)에 구애되지 않으며 세속을 떠나 자유롭게 처신코자 하는 청담(淸談)이 성행하였다.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와 왕필(王弼)의 《주역주(周易註)》의 주석들은 모두 도가의 입장에서 유가의 경서를 풀이한 것이다. 특히 왕필은 《노자주(老子註)》도 또한 저술하였다. 왕필의 《주역주》와 하안의 《논어집해》는 모두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한나라시대 유학의 부서재이(符瑞災異: 상서로운 징조와 괴이한 징조)의 설을 교정한 것이었다.

 

불교와 도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중국의 불교, 격의불교, 천태종, 화엄종, 선종, 도교입니다.

 

격의불교편집

 

불교는 전한 말기과 후한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래되어 중국 불교사상의 시원(始原)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 시대의 불교는 중국 불교의 초창기로서 일반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 후 3국시대를 지나 진(晋)에 이르는 동안 불교 승려와 신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사찰의 건립과 불경의 번역 등이 점점 활발해졌다.

 

당시의 불교 수용 과정에 있어서 노장사상은, 유교와는 대립했던 것과는 달리 불교 이해의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도안(道安) · 혜원(慧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노장사상의 형이상학적 철학과 사상을 원용하여 불교의 가르침과 사상을 해석했는데 이것을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한다.

 

도가사상과 도교편집

 

위진시대로 오면서, 도가사상을 지녔거나 이해하고 있던 당시의 사대부 가문들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청담학파들의 사상은 순수 도가사상이라기보다는 도가사상을 바탕으로 거기에 불교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도가사상에다 불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종교적 성격을 띤 도교의 성립을 보게 되었으나, 그 후 도교는 불교와 더불어 대립하여 논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와 도교는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아, 비록 교단과 조직 면에서는 대립을 보였지만, 도교는 불교의 교리와 의식을 모방하여 자체의 형태를 정비하게 되었다.

 

삼교합일 사상편집

 

또한 불교 사상과 도가 사상의 동일성 또는 합일을 주장한 사상도 출현하였다. 남제(南齊)의 장융(張融)은 "道也與佛 逗極無二(도야여불 두극무이)"라 하여 도교와 불교가 그 사상적 극치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는 "內外兩敎 本位一體(내외양교 본위일체)"라 하여 도교와 불교가 융회(融會)함을 강조하여 사회적 공존성을 말하였다. 이들의 사상은 후대의 유교 · 불교 · 도교의 3교 합일 사상의 단서를 제공하였는데, 수나라(隋)의 유학자 왕통(王通: 584년~617년)은 "三敎於是呼可一矣(삼교어시호가일의)"라 주장하였다.

 

중국 불교의 전성기편집

 

수나라 · 당나라 시대의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성장해 온 불교 사상이며 중국에서 불교의 연구는 이 시대에서 때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불교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의 불경(佛經) 한역(漢譯)이나, 도안 · 혜원 · 승조(僧肇) · 도생(道生) 등의 불교사상을 소승적(小乘的) 불교라 한다면, 수나라 · 당나라시대의 불교는 점차 대승적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불교 교의의 연구와 실천이 전문화하고 심화함에 따라서 소의경전 또는 소의논서를 중심으로 종파를 형성하여 10여 종으로 분립하였으며, 종파불교의 전성시대를 이루게 되었으며 또한 중국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중에 가장 심오한 철학을 형성한 종파로는 천태종 · 화엄종 ·선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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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

 

공자의 제자 또는 공자의 문인은 그 수가 많아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만도 70명을 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중니 제자 열전〉에 그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孔子)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70인을 칠십자(七十子)라고 하는데, 기록에 따라서는 육십일자(六十一子) 또는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고도 한다.[1] 이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제자로는 자로(子路) · 염유(冉有) · 유약(有若) · 안회(顔回) · 중궁(仲弓) · 자공(子貢) · 자하(子夏) ·자유(子遊) · 증자(曾子) 등이 손꼽힌다. 《논어》〈선진〉편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는 '선진(先進; 먼저 나온 사람. 선배)'과 '후진(後進; 뒤에 나온 사람, 후배)' 그룹으로 나뉜다. 선배 그룹은 공자와 나이 차이가 20여세 정도인 사람들로, 자로 자공 유약 등이다. 후배 그룹은 공자와 40세 정도 차이가 나는 사람들로 안회 증자 자하 자유 자장 등이다. 이들 선배 그룹과 후배 그룹을 '弟子'라고 하는데, '아우뻘(弟)인 사람, 아들 뻘(子)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들뻘인 후배 그룹들이 공자의 사상을 후세에 전했다. 증자를 이은 맹자, 자하 자유 등을 이은 순자가 그들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인 공자가 사망한 후에 여러 파로 분파된 것으로 보이는데, 크게 2분하면 증자(曾子) ·자사(子思)의 계통에 속하는 내성파(內省派; 안으로 반성을 함. 마음 수양을 중시함. 仁 중심)와 자하(子夏) · 자유(子遊)의 계통에 이어지는 숭례파(崇禮派; 예를 높임. 예를 닦음. 禮 중심)의 2파로 나뉘었다.[2] 이 두 파를 공문의 2유파(孔門의 二流派)라 한다. 이들 선진시대(先秦時代) 유가의 두 줄기의 흐름은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공문의 2 혹은 8 개의 유파편집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가 죽은 뒤에 여러 파로 나뉘었다. 《한비자(韓非子)》의 〈현학편〉에 의하면, 유가에는 자장(子張) · 자사(子思) · 안씨(顔氏) · 맹씨(孟氏) · 칠조(漆雕) ·중량씨(仲良氏) · 손씨(孫氏) · 악정씨(樂正氏) 등의 8파(八派)가 있었다.

 

또 《맹자》[공손추] 편에 의하면 공자의 사후에 자하(子夏) · 자장(子張) · 자유(子遊)의 3인이 유약(有若)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유약은 공자 제자 가운데 연장자(선배) 그룹에 속하는 사람으로, 《논어》에 그가 예를 중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마음에 인격(仁)을 닦는 것을 강조하는 증자가 반대한 것이다.

 

이 8파는 다시 2파, 즉 증자(曾子)를 중심으로 한 내성파(內省派)와 자유(子遊) · 자하(子夏) 자유(子游) 자장(子張)을 중심으로 한 숭례파(崇禮派)로 나뉘었다.[2] 증자를 이은 것이 맹자이고, 자하 자유 계열을 계승한 사람이 순자이다. 8파 가운데 맹씨(孟氏)는 맹자, 손씨(孫氏)는 순자를 가리킨다. 순자는 손경(孫卿)이라고도 불렸다.

 

안씨(顔氏)는 공자의 제자 안회를 가리키며, 《장자》에 공자와 안회의 대화가 매우 자주 나오는 것으로 봐서, 장자(莊子) 계열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한유, 곽말약) 칠조(漆雕)는 《논어》에 '칠조개'로 나오는 사람으로, 유협(遊俠; 무사)의 무리였다. 악정씨(樂正氏)는 《맹자》에 '악정자(樂正子)'로 나오는 맹자 제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중량씨(仲良氏)는 그 유래나 계열이 명확하지 않다.

 

《맹자》〈등문공〉편을 보면, 초나라에 허행(許行)을 중심으로 진상(陳相) 등의 무리가 공자의 학설을 따랐다. 이들은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형성된 유가 그룹인 것 같다. 이들 초나라 그룹의 유자 계열 가운데 후대에 유명한 사람이 《초사》를 쓴 굴원이다. 그는 간신들과 싸우다 쫓겨나서 방황하다 죽었다.

 

또한 연나라 임금 쾌(噲)가 재상 자지(子之)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주는 선양(禪讓)을 했다. 이는 요->순->우가 왕위를 물려주던 방식으로, 가장 현명한 신하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것이다. 맹자나 순자가 이상적인 통치로 강조했던 것을 연나라에서는 실행을 했다. 그 선양의 결과 반란이 일어나고 쾌와 자지 등은 모두 비극적으로 살해되었다. 이들 역시 유가 학설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초나라와 연나라의 이 두 계열은 《한비자》〈현학〉편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진시황의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편찬했다. 이 책은 제자백가의 사상을 종합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유가적인 통치를 주장한 것이다. 진시황은 법가의 부국강병책에 따라 7국을 통일하려 했다. 반면 《여씨춘추》는 1년을 12달로 나누어 각 달마다 해야 할 일을 기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진시황이 확장을 주장했다면, 《여씨춘추》는 안정과 조화를 주장했다. 진시황의 법가 노선과 여불위의 유가 노선이 충돌했고, 결국 진시황은 여불위를 죽였다. 이 대립에서 진나라에 미친 유가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내성파편집

 

맹자

 

증자(曾子: 기원전 505~435, 이름은 삼參)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사후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공자의 '인(仁; 사랑 인격)' 사상에 근거한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켜, 대가족 중심의 씨족제(氏族制)하에서의 도덕규범으로서의 효를 중시하였다.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이다.

 

자사는 "천(天)"이라는 종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와 도덕을 규제하였다. 그것을 "성(誠)"이라고 이름 지어 철학의 중심에 두고 만물의 근본인 "도(道)"와 일치한다고 했다.

 

자사의 학통을 계승한 사상가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이다. 맹자는 인(仁) · 의(義)라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이 주장한 성선설(性善說)이었다. 맹자의 성선설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견해는 자사의 종교적 관념으로서의 천(天)과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었다. 한편, 맹자의 정치론의 목적은 당시 붕괴되어 가던 봉건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후에 송나라(960~1279) 시대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 기원전 221년 이전) 유가(儒家)의 도통(道通: 유학 전도의 계통)이 강조됨으로써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의 계보가 중시되어 공자의 《논어(論語)》, 증자의 《대학(大學)》, 자사의 《중용(中庸)》, 맹자의 《맹자(孟子)》의 4서가 성립되었다.

 

숭례파편집

 

순자

 

자유(子遊) · 자하(子夏)의 파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예(禮)라고 하는 외적 규범을 중시하였으며, 그리고 이들 양자 간에도 차이가 있었음을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도 지적하고 있다.

 

유가의 내성파에 속한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를 통렬히 비판한 사람이 순자인데, 그는 자궁(子弓: 자유(子遊)라고 하는 설도 있다)의 학통을 이은 것 같고, 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종교적 천(天)의 사상에서 탈각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제출하였으며 예(禮)를 강조하였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성인에 의해 정해진 예(禮)에 따라서 교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성악설에 의거하여, 예(禮)를 법(法)에 접근시켜 국가 통치의 원리로 했다.[3] 그는 예(禮)와 법(法)을 동일시함으로써 법(法)을 사회질서의 이념(理念)으로 끌어올려 사상의 한 유파로서의 법가(法家)가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4] 법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는 순자의 문하생이었다.[3]

 

순자의 사상은 송나라(960~1279)의 성리학의 학풍 이래로 이단적인 학이라 취급되어 왔으나 근년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공자의 제자들편집

 

아래 명단은 《사기》(史記) [중니 제자 열전]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공자가어(孔子家語)》 및 기타 《논어》의 주석 등에서 주장하는 제자들과 상이한 부분이 있다.

 

안회민손염경염옹염구중유재여단목사언언복상전손사증삼담대멸명복부제원헌공야장남궁괄공석애증점안무요상구고시칠조개공백요사마경번수유약공서적무마시양전안행염유조휼백건공손룡염계공조구자진조칠조차안고칠조도보양사적상택석작촉임부제공량유후처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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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학자 10인의 공부 노하우

[정암 조광조] 마음 속의 도둑과 싸운 극기 공부

조선의 정치철학 방향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라는 인물에 의해 확고히 설정되었다. 조광조는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대사헌에 올라 이상정치의 실현을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그렇지만 중종반정으로 권력과 부를 누리던 공신들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결국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죽음을 맞는다. 벼슬살이란 시퍼런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주위의 염려스러운 조언에도 불구하고 보신(保身)을 택하지 않고 자신의 이념과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펼치다 죽은 것이다. 조광조는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을 두 손 들게 할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했다. 개성 근처에 있는 천마산과 성거산 등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며 불철주야 학문에 정진했다. 밥을 먹거나 변소에 가는 것 외에는 절대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불도에 정진하는 승려조차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공부에 정진했다. 이 때 산사에서 어렵다는 맹자호연지기장1개월을 읽고 통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광조는 극기 공부를 강조하면서 집에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모두 훔쳐 가도 모를 정도로 마음 속의 도둑과 싸우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마음 속의 도둑이란 바로 사욕을 가리킨다.

 

[화담 서경덕] 사색과 관찰 통한 自得의 공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하는 송도삼절로 불릴 정도로 풍취 있는 선비다. 서경덕 공부법의 특징은 끝없는 사고를 통해 자득(自得)하는 것이었다. 서경덕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관찰력을 보였다. 어린 새가 차츰차츰 날개짓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새가 날 수 있지하고 그 이치를 사색했다고 한다. 성장한 후 서경덕은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 모조리 써 놓고 널빤지 위에 앉아 글자들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졌다. 그렇게 해서 한 사물의 이치를 깨우면 다시 다른 사물의 이치를 사색하였다. 만일 깨우치지 못하면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르고, 길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더러는 며칠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화장실에 가서도 계속 사색에 빠졌다. 어떤 때는 꿈 속에서 깨닫기도 했다고 한다. 병이 될 정도로 심각하게 사색에 빠진 것이다. 책에 있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색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서경덕의 공부 자세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터득하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퇴계 이 황] 정밀한 독서법 중시

 

퇴계(退溪) 이 황(李滉)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유학하던 이 황은 주자전서라는 책을 처음 구해 읽게 되었다. 이 황은 방문을 걸어 닫고 들어앉아 밥 먹는 시간 이외에는 일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수없이 되풀이해 읽고 또 읽었다. 그 해 여름이 특히 무더워 어떤 친구가 건강을 걱정하자, 퇴계는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듯 깨달음이 느껴져 더위를 모르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을 읽어 보면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고, 그 방법을 알고 나면 더욱 흥이 일어난다네. ” 공부를 통해 참 즐거움을 찾았던 이 황의 모습이 느껴지는 말이다. 이 황은 책을 읽을 때 정밀한 독서법을 중요시했다. 어느 제자가 글을 올바르게 읽는 법을 물었을 때도 퇴계는 정독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독할 때에만 그 뜻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황은 아무리 피곤해도 책을 누워서 읽거나 흐트러진 자세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황과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두 학자 간의 편지를 통한 학문 토론 문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일명 사단칠정(四端七情) 토론 당시 퇴계의 나이는 58세였다. 반면 고봉 기대승은 32세의 신진 학자였다. 기대승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두 사람의 편지 내왕은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집에 사로잡혀 남의 견해를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남명 조 식] 지식의 실천, 를 강조한 수행

 

자전(문정왕후)은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불과합니다. 전하의 국사는 잘못되었고, 인심은 이미 떠나갔습니다라며 죽음을 무릅쓰고 단성 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남명(南冥) 조 식(曺植)의 상소는 유명하다. 이러한 과감한 언행은 공부하는 방법과 자세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 식은 자신이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귀를 새겼다. 뒷날 산천재(山川齋)라는 건물을 짓고는 왼쪽 창문에 경()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창문에 의()자를 써 붙였다. 또한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쇠방울을 늘 몸에 차고 다녔다. 이는 정신이 혼미하지 않고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방도인 상성성법(常惺惺法)이다. 조 식은 공부의 범위를 유교 경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제자백가·천문·지리·의학·수학·병법 등을 두루 공부해 안목을 넓혔다. 조 식은 나아가 배움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실천 속에 옮겨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명재 윤 증] 사슴 구경 놓친 학동의 공부욕

 

명재(明齋) 윤 증(尹拯)은 아마도 조선 역사상 사직 상소를 가장 많이 올린 인물 중 한 명일 것이다. 임금에게 얼굴을 제대로 한번 보여주지도 않고 우의정 같은 최고위 관직을 제수받았다. 끝까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학자로 일생을 마친 윤 증은 어린 시절부터 심지가 굳었다. 윤 증이 어릴 적 어느날 사슴이 나타났다며 동네 아이들이 구경하느라 마구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렇지만 윤 증은 혼자 방 안에서 글을 읽으면서 나오지 않았다. 정해진 횟수를 다 읽고 나서 할머니에게 사슴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할머니가 사슴이 네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니하였다. 단편적 일화이지만 한번 뜻을 세우면 그 일에 열중하는 성품을 잘 알 수 있다. 윤 증의 교수법은 반드시 스스로 의심이 생겨 질문할 때를 기다린 뒤 가르쳐 주고, 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굳이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다. 제자들 각자의 수준에 맞게 가르친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명색은 책을 읽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몸소 행하지 못하면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게 하고 입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도구일 뿐이니 진정한 학문이 아니다라고 충고했다.

 

[율곡 이 이] “냇가를 거닐 때도 이치를 탐구하라

 

율곡(栗谷) 이 이(李珥)는 퇴계 이 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큰 봉우리다. 율곡은 아홉 번 연속 과거 시험에서 장원해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지닌 학자였다. 이 이가 젊었을 때 지은 자경문(自警文)은 스스로 참된 학자의 길을 가기 위해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귀다.

이 자경문에는 공부하는 자세와 과정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그 중 책을 읽는 이유는 옳고 그름을 분간해 일을 행할 때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아 글만 읽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것이기에 공부에 대한 노력은 늦춰서도 안 되지만, 조급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율곡 선생은 43세 때 황해도 해주에 은병정사를 세우고 이곳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은병정사의 학규(學規)는 오늘날 학교 교훈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일상 생활 측면에서 습관의 중요성, 절제의 가치를 강조했다.

[청장관 이덕무] 병이 된 공부 향한 열정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는 뛰어난 자질로 정조의 특별 대우를 받아 국립 학술 기관인 규장각에 들어가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 허약한 몸 등 불우한 환경이 늘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이덕무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일종의 병이 될 정도로 심했다. 공부에서 인생의 참맛을 느끼며 살아간 것이다. 그 스스로 병적으로 책을 보는 자신을 주인공 삼아 희화화해 쓴 자화상에서 이를 잘 보여 준다. 원제는 간서치전’(看書痴傳, 책만 보는 바보)이다. 그는 남들의 비난이나 칭찬 따위는 들은 체 하지 않고, 춥거나 덥거나 배고프거나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책에만 온 힘을 쏟았다.

 

[다산 정약용] “핵심 파악이 중요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먼 유배지에서도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 공부를 염려했다. 그 내용 중에는 방대한 책을 볼 때는 요약해 핵심을 파악하라는 가르침도 있다. 그 책의 핵심을 끝까지 연구해야 하며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했다. 또한 정약용은 아동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당시 아동 교육의 대표적 교재였던 천자문’ ‘십팔사략’ ‘통감절요를 모두 근본적으로 반성했다. 예를 들면 천자문의 경우 비슷한 부류로 구성되지 않아 처음 배우는 아동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했다. 사실 천자문은 해설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대목이 많다. 정약용은 아동이 처음 한자를 배울 때는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와 운용에 대해 깨우쳐야 한다면서 직접 아동 교재를 만들기도 했다.

 

[혜강 최한기] “고담준론보다 이용후생의 학문이 절실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이른바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다산 정약용은 500여 권을 남겼다. 그렇지만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라는 인물은 무려 1,000여 권을 저술했다고 한다.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은 80여 권 정도다. 그렇지만 그의 저술은 자연과학, 철학 및 사회 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성을 보여 준다. 최남선은 최한기의 원본이 산실되어 사라지는 것을 탄식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그의 많은 발언 중 사무가 참된 학문이라는 명제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구절이다. ‘사무야말로 모두 참되고 절실한 학문이고, 사무를 버리고 학문을 구하는 것은 허공에 매달아 놓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사무란 무엇인가. 농사·공업·상업 같은 것이 모두 학문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이다. 고담준론의 겉치레를 배격한 것이다. 사무를 무시하는 이런 형태의 공부 자세는 필시 명색은 학문을 한다고 하나 다른 사람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고, 사무를 처리하는 것 역시 어두워 세상에 아무런 보탬이 없다고 주장했다. 최한기의 이러한 신선한 발언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충분히 있다.

 

[식우 김수온] 책장 찢어 외우고 다녔던 奇行의 소유자

 

마지막으로 식우(拭渡) 김수온(金守溫)독서기행’(讀書奇行)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러한 기이한 행위는 본받을 만한 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신선한 자극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세조 때의 문신인 김수온은 늘 책을 가까이했다. 그런데 그는 책을 빌려 오면 한 장씩 뜯어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외우다 막히는 곳이 있으면 꺼내 보고, 다 외웠다고 생각하면 아무데나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신숙주는 매우 아끼는 진기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김수온이 어느날 찾아가 그 책을 빌려 달라고 떼를 썼다. 신숙주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책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몇 달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신숙주가 김수온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방에 들어가 보니 빌려준 책을 모두 뜯어 벽에 바른 것 아닌가. 신숙주가 깜짝 놀라 어찌 된 일인지 묻자 앉아서 읽느니 이게 더 편할 것 같아 그랬소이다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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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연대기

원시시대:
170만년전 운남성 원모(元謀)분지 원모원인
100만년전 섬서성 남전(藍田) 남전원인
40만년전 북경 북경원인
5~6천년전  () - 이족(夷族)
                (西) - 강족(羌族) :
                () - 묘족(苗族) :
                () - 적족(狄族)
신화시대: (삼황오제시대)
삼황 (5가지 설 및 7가지 설이 있음) 가장 많이 운용하는 설

     수인씨 : 최초의 불을 사용
     태호 복희 수렵 그물 팔괘 만듬 (고조선 신시 6대 태우의한웅 3)      염제 신농 염제신농(농업 의학)의 딸(비단)
                      마지막 염제 유망 : 황제헌원과의 결전 : 파천의 들

     (여와 태호복희의 누이)                                                                                       
오제
      황제헌원 : 고조선 신시한웅 14대 자오지(치우천황)한웅: 탁록대전
      전욱고양 :                              

      제곡고신 :                                           

      제요        : 고조선 초대단군왕검과 동시 등극
      제순        : 고조선   2대단군부루
역사시대: (용산문화)
()왕조(472년 존속 1713) : 공현(하남성)
                 시조-()- 고대 치수의 공

                 말왕-()- 말희(妺喜) : 주지육림
()왕조(496년 존속 1730) : 안양(은허) 정주(상성)
                 시조-()
                 말왕-()- 달기(妲己)

봉건시대:
()왕조              
         서주: 시조-()    호경(鎬京)         
                  12대 유()    포사(褒似)
         동주: 13대 평()     낙양(洛陽)
                  30대 난왕           (514년 존속)
춘추(春秋)시대: (BC.770 - BC.368)
::::춘추오패(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부차 월왕구천) 송양공을 넣기도 함
     제(): 주무왕이 공신인 태공망(太公望) 여상 (呂尙)을 제후(濟侯)
           ()15대 환공(桓 公)이르러 춘추의 패자(覇者)가 됨  
           관중과 포숙아(관포지교)
     진(): 24대 문공(文公)
     초(): 22대 장왕(莊王)
     오(): 7대 부차(夫差) -서시(西施) : 소주  : 오자서
           와신상담 서시봉추 오월동주
     월(): 2대 구천(句踐) : 회계
그 외 주 봉건 제후국
    연() - 주무왕의 동생 소공(召公)()
    노() - 주무왕의 동생 주공 단()
    관() - 주무왕의 동생 숙선(淑鮮)
    채() - 주무왕의 동생 숙도(淑度)
    조() - ()의 주왕의 아들인 녹부(祿父)
    송() - 주무왕의 아들 미자개(微子開) : 기자
    위() - 주무왕의 동생 강숙봉(康淑封)

BC 403년

 진()3대부(위사 조적 한건)을무너뜨리고 3나라를 세움 (魏 趙 韓)

   이때부터 전국시대 시작됨

전국(戰國)시대:(BC.368~BC.221)
::::전국칠웅
     제(): 임치(任置 제남)
     초(): (성도)
     연(): (북경)
     진(): 함양
     한(): ()에서 분리 평양(平陽)
     위(): 상동 안읍-대량(大樑.대동)
     조(): 상동 진양-한단(邯鄲)
 

()의 전국통일:(BC.222~BC.209)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秦始皇) : 박랑사 여송  / 장량
          여불위의 상술 (장사꾼에서 재상으로 )

          문자 통일 도량형 통일 중앙집권의 시작 군현제

초한 전쟁 : 초패왕 항우와 유방의 싸움


전한(前漢): (BC.206~AD.5)
장안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항우(項羽/우미인)와의 싸움에서 승리
흉노족과 왕소군
사면초가 토사구팽(한신 고사)


 () : (AD.6~AD.25)
왕망(王莽)의 찬탈(簒奪)

 
후한(後漢): (AD.25~AD220)
낙양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삼국시대: (AD.221~AD.265)
동탁과 여포(초선)
(): (AD220~265) 조조(曹操) 허창 낙양(洛陽)
(): (AD222~258) 손권(孫權) 건업(建業 남경)
(): (AD221~263) 유비(劉備) 성도(成道)
도원결의 삼고초려 읍참마속 

위가 통일


위나라 조조의 휘하 사마중달의 손자가 위를 멸하고 진을 세움


서진(西晉): (AD265~316)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낙양(洛陽)
동진(東晉): (AD317~420)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 건강(健康,남경


 오호십륙국시대: (AD307~534) 


() : AD304-329: 흉노족 : 유연 : 좌국성-평양-장안
() : AD407-431: 흉노족 : 혁련발발 : 통만성
북량 : AD397-439: 흉노족 : 저거몽손 : 장액-고장
후조(後趙): AD319-351: ( ): 석록 : 양국-
전연(前燕): AD307-370: 선비족 : 모용황 : 극성-용성--
후연(後燕): AD384-409: 선비족 : 모용수 : 중산-용성
서연(西燕): AD384-394: 선비족 : 모용충 : 장자
남연(南燕): AD398-410: 선비족 : 모용덕 : 광고(산동성)
() : AD315-534: 선비족 : 척발의로 : 성락-평성-낙양
서진(西秦): AD385-431: 선비족 : 걸복국인 : 원천-금성-원천
남량( ): AD397-414: 선비족 : 독발오고 : 염천-낙도-서평
전진(前秦): AD351-394: ( ): 부견 : 장안
() : AD304-347: ( ): 이특 : 성도
후량(後凉): AD386-403: ( ): 여광 : 고장
후진(後秦): AD384-427: (): 요장 : 장안
전량( ): AD317-376: (): 장궤 : 고장
( ) : AD350-352: (): 염민 :
서량(西 ): AD400-421: (): 이고 : 돈황-주천
북연(北燕): AD409-436: (): 풍발 : 용성

남북조(南北朝)시대:(AD420-589)
::::남조(南朝)
(): AD420-479: 유유 : 건강(健康 남경)
(): AD479-502: 소도성(蕭道成): 건강
(): AD502-557: 소연(蕭衍) : 건강          달마(520) : 소림사
(): AD557-589: 진패선(陳覇先): 건강

::::북조(北朝)
북위(北緯):AD386-534:탁발규(拓跋珪): 평성(平城)-낙양
동위(東魏):AD534-550 : 낙양
서위(西魏):AD535-556 : 낙양
북제(北齊):AD550-577:고양(高洋) : 낙양
북주(北周):AD556-581: 우문각(宇文覺): 장안 

()의 재통일: AD581-618
북주의 대장군 양견(楊堅): 장안 :
수양제 : 고구려 강이식과 을지문덕


 

(): AD618-907 :
태원(太源)유수 이연(李淵): 장안
당태종 : 고구려 연개소문과 양만춘
당현종과 양귀비
당고종과 무랑(측천무후) : 중국 최초의 여황제 : 백제 고구려 병탄
당덕종 : 이정기장군과 장보고 
 

오대십국: AD907-1125:
오대(五代)
후량:AD907-923: 주전충 : 대량
후당:AD932-936: 이존욱 : 돌궐 : 낙양
후진:AD936-946: 석경당 : 돌궐 : 대량
후한:AD947-950: 유지원 : 돌궐 : 대량
후주:AD951-960: 곽 위 : 성도 십국(十國)

전촉:AD907-925: 왕건 : 성도
후촉:AD934-965: 맹지상 : 성도
:AD902-937: 양행밀 : 양주
남당:AD937-975: 이변 : 금릉
형남:AD907-963: 고계홍 : 강릉
오월:AD907-978: 전유 : 항주
:AD909-945: 왕이지 : 복주
:AD907-951: 마은 : 담주
남한:AD909-971: 유은 : 아랍 : 광주
북한:AD951-979: 유숭 : 진양
:AD916-1125:야율아보기: 거란 : 상경

()의 통일: AD960-1279
북송(北宋):AD960-1127 : 후주(後周)친위군 조광윤(趙匡胤) : 개봉
남송(南宋):AD1127-1279: : 임안(臨按 항주) 악비장군


 ()의 통일: AD1271-1368 : 징기스칸 (몽골) : 대도(大都 북경


 (): AD1368-1644 : 주원장 : 남경-북경


(): AD1616-1911 : 누루하치 : 북경 (후금)


중화민국: AD1912-1949 : 손문 : 남경

중화인민공화국: AD1949 - : 모택동 :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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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개(八凱) :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고양씨(高陽氏)의 재자(才子)인 창서(蒼舒)ㆍ퇴애(隤敱)ㆍ도연(擣戭)ㆍ대림(大臨)ㆍ방강(尨降)ㆍ정견(庭堅)ㆍ중용(仲容)ㆍ숙달(叔達) 등을 말한다.

팔원(八元) :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인 백분(伯奮)ㆍ중감(中堪)ㆍ숙헌(叔獻)ㆍ계중(季中)ㆍ백호(伯虎)ㆍ중웅(仲熊)ㆍ숙표(叔豹)ㆍ계리(季貍)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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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春]

 

중국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보통 합쳐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도 합니다.

주(周)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동쪽의 낙읍(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기원전 770년 부터 시황제의 진(秦)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기원전 221년 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전반기를 춘추 시대, 후반기를 전국 시대라고 합니다.

당시 종주국이었던 주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수도를 옮기면서 주나라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각지의 제후들은 종주국인 주나라를 명목상으로만 받들 뿐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전반기인 춘추 시대의 춘추(春秋)라는 말은 공자의 저서인 춘추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의 세나라로 나뉘게 된 기원전 403년 까지를 말하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종주국 주나라의 권위를 어느 정도 떠받들어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후반기인 전국 시대의 전국(戰國)이라는 말은 전한 시대의 유향이 쓴 전국책에서 유래한 것으로 싸울 전(戰)에 나라 국(國)을 써서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를 나타내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종주국 주나라의 권위는 완전히 무시되었으며 강한 제후들은 스스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기원전 221년에 진(秦)나라의 왕 영정이 6국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뒤 시황제라 칭하면서 춘추전국시대는 끝나게 됩니다.

 

요약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는

춘추 시대

전국 시대

를 아울러 부르는 말로,

기원전 770년

(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진 시황제

(秦始皇帝)의 통일까지를 말한다.

상업

이 많이 발달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본문

 

BC 770년, 주()왕조가 뤄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시대, 이후를 동주시대라고 한다. 동주시대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나누어 진다. 춘추시대는 주왕조가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진()나라의 대부()인 한()· 위()· 조()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BC 403년).

춘추시대

 

 

 

 

 

 

 

전국시대는 그 이후부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이다. 춘추()는 공자가 엮은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에서 유래되었고, 전국()은 한()나라 유향()이 쓴 《전국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국시대

 

 

 

 

 

  1. 밑을 클릭하시면 춘추전국시대 인물들이 밑에 쭉나왓습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 중 기원전 260년전국 칠웅: (燕) · (魏) · (齊) · (趙) · (秦) · 초(楚) · (韓)
장강 유역도

 

 

진 (춘추 전국)

(秦, 기원전 900년경 ~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는 중국의 왕조이다. 주나라,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기원전 206년에 멸망 했다. 왕실의 성은 영(嬴), 통일 시의 수도는 함양이었다.

주나라 시대

기원전 900년즈음에 효왕(孝王)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非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공적을 올렸으므로의 영(嬴)이라는 성을 받아, 대부가 되어, 진 땅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진이 최초로 흥한 장소는 현재의 간쑤 성 리 현 부근이며, 현재 이 땅에서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양공은 주의 평왕을 호위 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후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편집] 춘추, 전국시대

진은 춘추시대에 들어가는 동시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국(諸國)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라고 업신여겨지고 있었다. 대대의 진후는 주로 서융과 항쟁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기원전 677년에는 수도를 옹성(雍城, 현재의 산시 성 바오지 시 펑샹 현)에 두었다.

9대 목공(穆公)은 백리해 등 타국 출신자를 적극적으로 등용, 서융을 크게 토벌해 서융의 패자가 되었고, 주변의 소국을 합병하고 영토를 넓혀 이웃 (晋)에 필적할 정도가 되었다. 때마침 진(晋)이 여희의 난을 겪으면서 혜공을 옹립하지만, 혜공은 배신을 일삼았다. 목공은 혜공의 군대를 한원에서 격파했다. 또한 혜공 사후에는 혜공의 형 중이를 진공(晋公)으로 즉위시켰다. 중이가 진의 명군 문공(文公)이 되었고, 그의 치세에는 진(晋)은 다시 강국의 풍모를 되찾는다. 그러나 문공 사후, 진(秦)은 다시 진(晋)을 격파하고, 영토를 강탈했다. 이러한 실적에 근거, 목공은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목공이 죽었을 때, 177명의 가신들은 순장의 풍습을 따라 함께 죽었고, 명군과 인재를 한 번에 잃은 진나라은 기세를 잃어 영토는 축소되었다. 나라를 유지할만한 힘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지만, 춘추시대 중기 이후 주역은 북쪽의 진(晋)과 남쪽의 (楚)였고, 진은 이에 비하여 한 발 밀려나 있던 상황이었다.

전국시대에 진은 전국칠웅의 하나로 불린다. 이웃나라 진(晋)은 내부에서의 권력 싸움의 끝에 (韓)·(魏)·(趙)의 삼국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갈라진 삼국을 삼진(三晋)이라 부른다. 삼진 중 위나라가 전국 초기, 명군 문후에 의해 강하게 성장하였고, 진은 위에게 압박을 받고 영토를 빼앗긴다.

이 상황에 분개한 25대 군주 효공(孝公)은 넓게 인재를 구해 대세를 만회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이에 응한 자가 그 유명한 상앙(商鞅)이다. 상앙은 행정 제도의 개혁·십오제(什伍制)의 채용 등을 실시해, 진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이러한 상앙의 변법 운동에 의해 진은 철저한 법치주의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내의 생산력, 군사력을 높여 서서히 다른 육국을 압도하며 갔다. 효공은 기원전 350년, 도성을 함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천하 경영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후 효공의 아들이 강해진 국력을 기반으로 기원전 324년에 왕을 칭하니, 이가 혜문왕(惠文王)이다. 기원전 316년에 혜문왕은 촉을 점령해, 이 땅의 개발을 실시하여 한층 더 생산력을 올려 장강의 상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장강의 흐름을 따라 진격할 수 있게 되어 초를 압박할 수 있었고, 초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혜문왕은 모략가인 장의(張儀)를 등용하고, 초를 질질 끌어 돌려 전쟁으로 격파해, 초의 회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혜문왕은 위와 한의 왕들을 각각 마부와 배승으로 삼을 정도로 굴복시켰다. 하지만, 혜문왕의 아들 무왕의 시기에 그가 장의를 내쳐버리자 장의는 위에 망명, 이로 인한 한과의 격전 끝에 많은 군사를 잃었고, 혜문왕 자신은 갑자기 사고사하여,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전력이 후퇴해 버린다.

이 시기 동쪽에서는 제나라가 신장하고 있어, 은나라의 후예인 송을 병합하는 등 주변 제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원전 288년당시에는 제를 동제, 진을 서제라고 칭했다. 제나라가 곧바로 제호를 취소했으므로, 진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시기는 서쪽의 진나라, 동쪽의 제나라의 2강국 시대를 만들고 있었다.그러나 제나라는 연나라의 악의가 지휘하는 5개국 연합군에 의해 수도 임치(臨淄)가 함락. 망국 직전까지 몰리는 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진나라는 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혜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이복동생인 소양왕(昭襄王)의 시대에 재상 위염(魏冄)과 백기 장군의 활약으로 진은 몇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소양왕을 즉위시킨 재상 위염의 권력이 너무 커진 것을 우려한 소양왕은 재상 위염을 숙청하고, 대신 범저(范雎)를 등용한다. 범저가 진언한 것은 유명한 원교근공책이다. "가까이에 있는 한·위를 거느리고, 먼 제나라와의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승리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먼 토지가 되어, 지키는 것이 어려워져 버린다. 이것에 대해서 먼 제나라나 연나라와 동맹해 가까이의 한·위·조를 공격하면 가까이의 토지가 손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진의 영토로 집어 넣는 것이 용이해진다." 이것이 원교근공책이다. 이 진언에 감동한 소양왕은 이 진언을 채택하고,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260년에는 백기가 조나라로 진격, 장평 전투를 통하여 조군을 격파, 조의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린다. 기원전 255년에 주나라를 멸해 그 영지를 접수하여 진의 위세는 한층 더 높아졌다.

[편집] 진나라 통일 이후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제31대 왕인 영정이 모든 나라를 멸망하고 통일하여 황제(皇帝)의 위에 오르면서 중국 최초로 제국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영진(嬴秦)의 역대 군주

 

 

대수 시호 재위 기간 관계 사료 출처
  장공(莊公) 기(其) (추존) 영진중의 장자. 사기 진본기.
12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
1 양공(襄公) 개(開) 기원전 777년 ~ 기원전 766년 장공의 차남 사기 진본기
2 문공(文公)   기원전 765년 ~ 기원전 716년 양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정공(靜公)   (추존) 문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3 헌공(憲公))   기원전 716년 ~ 기원전 704년 정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4 출자(出子) 만(曼) 기원전 703년 ~ 기원전 698년 헌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한서 고금인표(漢書 古今人表).
5 무공(武公)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78년 헌공의 장자. 사기 진본기.
6 덕공(德公)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76년 헌공의 아들, 무공의 동생. 사기 진본기.
7 선공(宣公)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64년 덕공의 장남. 사기 진본기.
8 성공(成公)   기원전 663년 ~ 기원전 660년 덕공의 아들. 선공의 동생 사기 진본기.
9 목공(穆公) 임호(任好)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1년 덕공의 막내아들. 성공의 동생. 사기 진본기.
10 강공(康公) 앵(罃) 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9년 목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1 공공(共公) 도(稻), 가(貑) 기원전 608년 ~ 기원전 604년 강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좌전 선공 4년(左傳 宣公四年)
12 환공(桓公) 영(榮) 기원전 603년 ~ 기원전 577년 공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춘추분기(春秋分紀)
좌전(左傳)
13 경공(景公) 후백거(後伯車), 석(石)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37년 환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춘추분기
14 애공(哀公)   기원전 536년 ~ 기원전 501년 경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시황본기(始皇本紀)
  이공(夷公)   (추존) 애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5 혜공(惠公)   기원전 500년 ~ 기원전 491년 이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6 도공(悼公)   기원전 490년 ~ 기원전 477년 혜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7 여공(厲公)   기원전 477년 ~ 기원전 443년 도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시황본기
18 조공(躁公, 趮公)   기원전 443년 ~ 기원전 429년 여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9 회공(懷公)   기원전 428년 ~ 기원전 425년 여공의 아들, 조공의 동생 사기 진본기.
20 영공(靈公)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15년 회공의 손자,세자 소의 아들. 사기 진본기.
21 간공(簡公) 도자(悼子) 기원전 414년 ~ 기원전 400년 회공의 차남,세자 소의 동생이자 영공의 숙부. 사기 진본기
진사(秦史)
전국사과편년집증(戰國史料編年輯証)
22 혜공(惠公)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간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23 출공(出公) 출자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5년 혜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24 헌공(獻公) 사습(師隰), 연(名連) 기원전 385년 ~ 기원전 362년 영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월절서(越絕書)
여씨춘추(呂氏春秋)
25 효공(孝公) 거량(渠梁)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 헌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월절서.
26 혜문왕(惠文王) 사(駟) 기원전 337년 ~ 기원전 311년 효공의 아들,기원전 324년에 개원하고 칭왕함. 사기 진본기
27 무왕(武王) 탕(蕩) 기원전 311년 ~ 기원전 307년 혜문왕의 아들. 사기 진본기
28 소양왕(昭襄王) 칙(則), 직(稷)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혜문왕의 차남, 무왕의 동생. 사기 진본기
29 효문왕(孝文王) 주(柱) 기원전 250년 ~ 기원전 250년 소양왕의 아들. 사기 진본기
30 장양왕(莊襄王) 이인(異人), 자초(子楚) 기원전 249년 ~ 기원전 247년 효문왕의 아들.  
31 시제(始帝) 정(政)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10년 장양왕의 아들. 사기 진본기
시황본기
32 이세제(二世帝) 호해(胡亥) 기원전 210년 ~ 기원전 207년 시제의 아들.  
33 상제(殤帝) 자영(子嬰) 기원전 207년 ~ 기원전 206년 시제의 손자, 이세제의 조카, 황태자 부소의 아들.  

 

 

 

연 (춘추 전국)

(燕)은 중국 춘추 시대의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건국

주 무왕 희발(姬發)이 은나라을 멸망 시키고 그의 동생 소공(召公) (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했다. 그러나 주나라 초기 연나라의 초기 역사에 모르는 것이 많다. 하남성(河南省)지역에 연나라가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서 하남성 지역의 연나라를 남연(南燕)이라 칭하고, 소공석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이라고 호칭하였다. 당시에는 연(燕)이 아닌 언(匽)이라는 한자를 표기하였다. 소공석의 후손들은 산동성(山東省)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옮겼다. 이 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고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 주민들은 대부분 한씨(韓氏)를 사용하였다. 한국의 사학자 이병도는 이 한후 세력을 한씨 조선(韓氏朝鮮)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멸망했다. 춘추시대 이후, 연나라의 사대부층에 한씨와 기씨를 성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다.

[편집] 춘추 시대

춘추시대에 연나라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기원전 664년에 북방의 산융에게 공격받았을 때, 당시 군주였던 장공(莊公)은 이웃나라인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원군을 청하였고, 산융군을 격퇴했던 적이 있었다. 산융과 전쟁한 후, 장공은 환공에게 감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나라 환공의 군대를 움직이게 하게 하였다. 그 때에 군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국경을 넘어 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국에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천자(天子)인 주나라왕(周王)이 가질수 있었고,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환공에게 일부 영토를 할양하여 연나라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제 환공은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더욱 더 명성을 얻었다.

[편집] 전국 시대

전국 시대로 들어서고, 기원전 334년경에 사기 소진열전(史記 蘇秦列傳)에 의하면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반도,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 서쪽으로 운중과 구원, 남쪽으로 호저와 역수(易水)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연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조선에 이르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영토가 이천여 리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乘), 기병 6천기(騎)를 낼 수 있었다.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었다.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여 랴오닝성 만번한지역까지 영토을 확장하였다.

기원전 315년, 연왕 쾌(燕王 噲)는 재상인 자지(子之)를 총애하여,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양을 하였던 일을 예로 삼아 재상인 자지에게 선양을 하였고, 이 일로 의해 연나라 내부는 혼란이 일어났다. 다음 해 여기에 제나라가 이 틈을 타고,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여, 전 국토를 병합하였고, 연나라는 일시적으로 멸망이 되었다. 기원전 313년, 태자 평(太子平)이 자지를 죽이고, 제나라 군대도 철수를 하였고, 태자는 즉위하여 연 소왕(昭王)이 되었다.

기원전 222년, 연왕 희(燕王喜)의 아들 태자 단(太子丹)은 위나라 장수 형가(荊軻)와 진개(秦開)의 손자 진무양(秦舞陽)을 진(秦)나라에 보내어 진 시황제(秦始皇帝)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연왕 희는 요서,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었다. 연왕 희는 아들 태자 단을 죽이고 그 목을 진 시황제에게 바치면서 선처을 구하지만 진 시황제는 연왕 희와 잔존 세력을 공격하여 연나라을 완전히 멸망 시킨다.

[편집] 멸망 이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으나, 내분으로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건국 된다. 한나라도 주나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공신 혹은 황족들을 연나라의 제후로 삼아 성립하였다.

한고조 유방(漢高祖劉邦)은 같은 마을에서 자란 향우였던 노관(盧綰)을 장안후(長安侯), 다시 연왕(燕王)에 봉했다. 노관(盧綰)은 한나라을 배반하고 동호족에 투항하여,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살다가 죽었다.

이 무렵, 연나라 장수 위만도 1000여명을 이끌고 요동, 랴오닝성으로 도망치고 위만조선을 세운다. 위만 조선이 멸망 할 때 우거왕의 아들 한무제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어 연나라 지역을 다스렸다.

[편집] 역대 군주

 

대수 시호 재위기간 비고
1 소공(召公) 석(奭) 기원전 1122년 ~ 기원전 1053년  
2   (克) 기원전 1052년 ~ ?  
3   (旨)    
4   (舞)    
5   (憲)    
6   (和)    
7대 ~ 10대 군주 불명.  
11 혜후(惠侯)   기원전 864년 ~ 기원전 827년 소공(召公) 석(奭)의 후손.
12 이후(釐侯) 장(莊) 기원전 826년 ~ 기원전 791년  
13 경후(頃侯)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7년  
14 애후(哀侯)   기원전 766년 - 기원전 765년  
15 정후(定侯)   기원전 764년 - 기원전 729년  
16 목후(穆侯)   기원전 728년 - 기원전 711년  
17 선후(宣侯)   기원전 710년 - 기원전 698년  
18 환후(桓侯)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91년  
19 장공(莊公)   기원전 690년 - 기원전 658년  
20 양공(襄公)   기원전 657년 - 기원전 616년  
21 환공(桓公)   기원전 617년 - 기원전 602년 전환공(前桓公)이라고도 한다.[1]
22 선공(宣公)   기원전 601년 - 기원전 587년  
23 소공(昭公)   기원전 586년 - 기원전 574년  
24 무공(武公)   기원전 573년 - 기원전 555년  
25 문공(文公)   기원전 554년 - 기원전 549년 전문공(前文公)이라고도 한다.[2]
26 의공(懿公)   기원전 548년 - 기원전 545년  
27 혜공(惠公) 관(款)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36년  
28 도공(悼公)   기원전 535년 - 기원전 529년  
29 공공(共公)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24년  
30 평공(平公)   기원전 523년 - 기원전 505년  
31 간공(簡公)   기원전 504년 - 기원전 493년 전간공(前簡公)이라고도 한다.[3]
32 효공(孝公)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55년  
33 성공(成公)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39년  
34 민공(閔公)   기원전 438년 - 기원전 415년  
35 간공(簡公)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후간공이라고도 한다.[3]
36 환공(桓公)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후환공이라고도 한다.[1]
37 문공(文公)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후문공,문왕(文王)이라고도 한다..[2]
38 역왕(易王) 퇴(腿)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1년  
39   (噲) 기원전 320년 - 기원전 317년 정승 자지(子之)에게 양위로 시호가 없음.[4]
40   자지(子之) 기원전 317년 - 기원전 314년  
41 소왕(昭王) 직(職)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79년  
42 혜왕(惠王)   기원전 278년 - 기원전 271년  
43 무성왕(武成王)   기원전 271년 - 기원전 258년  
44 효왕(孝王)   기원전 257년 - 기원전 255년  
45   (喜)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22년

 

 

 

초 (춘추 전국)

(

중국어

: ,

병음:

Chu

, 기원전 1030년 이전 ~ 기원전 202년)는 현재의 후베이성(

중국어

: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인 장강(

중국어

: 長江,

병음:

Cháng Jiāng

)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 전국칠웅의 하나이다. 갑병 수십만, 전차 천승(乘) 기병 1만기를 낼 수 있었다. 미(羋)성 웅(熊)씨의 제후국이다.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대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된다.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린다. 중국 남방계 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제후국이다.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 연구에 따르면 전국 시대 초, 오, 월이 있었던 저장성, 안휘성, 강소성의 중국 남부 사람들은 중국 북부 사람들과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주나라 초기의 작위(爵位)는 자작(子爵) 이었으나, 기원전 704년 무왕(武王)때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하였고, 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223년 (秦)에 의해 멸망 했다. 그 뒤 기원전 208년 회왕의 후손인 의제에 의해 다시 부활하였으나 기원전 202년 초한전쟁에서 항우전한 고조 유방에게 패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한다.

역사

사마천사기 초세가(楚世家)에 따르면,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顓頊 高陽)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顓頊)은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후손 육종(陸終)은 축융(祝融)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帝喾 高辛)때 화정(火正,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吳回)의 아들이다. 주문왕(周文王) 때 계련(季連)의 후손 중에 육웅(鬻熊)이 있었는데 초나라 웅씨(熊氏)들의 시조이다.

육웅(鬻熊)의 증손자 웅역(熊繹)에 이르러 주 성왕(周成王)은 주나라 건국시 문왕(文王)과 무왕(懋王)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熊繹)의 증조부(曾祖父)인 육웅(鬻熊)이 세운 공로로 웅역(熊繹)을 형만(荊蠻)의 땅에 자작(子爵)의 작위에 봉했으나 그 봉지는 남작(男爵)에 준해서 하사하고 미(羋)라는 성을 내렸다. 웅역은 봉지의 도읍을 단양(丹陽)[1]에 두었다.

주 이왕(周 夷王)때에 이르러 주왕실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웅거(熊渠)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2]과 양오(楊奧[3])에서 악(鄂)[4]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웅거는 이후 잠시 왕이라 참칭(僭稱)하다가 포악한 여왕(厲王)이 즉위하자 정벌당하는 것이 두려워 왕이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741년에 웅통(熊通)이 초 자작위에 올랐는데 그가 초 무왕(楚 武王)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濮)[5]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楚 文王)은 도성을 단양(丹陽)에서 영도(郢都)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 송 양공(宋 襄公)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6]에 소집을하자 초 성왕(楚 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 양공을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7]가 조상인 축융(祝融)과 육웅(鬻熊)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다. 그해 여름 성복(城濮)에서 당진(唐晉)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8] 기원전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초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 목왕(楚 穆王)이다.

기원전 614년 려(旅)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초 장왕(楚 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 때에 이르러 기원전 223년 진나라(秦)에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項燕)과 왕 부추가 사로잡히고 남은 세력들도 모두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초한 챙패기에 초 의제(楚義帝)를 군주로 세우고 서초(西楚)가 재건되었으나, 항우(項羽)가 한나라(漢) 유방(劉邦)에게 패망하고 잔존 세력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다.

[편집] 역대 군주

 

대수 시호 재위 기간 재위 년수 비고
1   (繹)     주 왕실로부터 자작(子爵) 벼슬을 받음.
2   (艾)      
3   (黵)      
4   (勝)      
5   (楊)      
6   (渠)      
7   무강(毋康)      
8   지홍(摯紅)      
9   (延)      
10   (勇)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10년  
11   (嚴)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10년  
12   (霜)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6년  
13   (徇)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22년  
14   (咢)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9년  
15 약오(若敖) 의(儀)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27년 약오와 소오 이래로 초나라는 남방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되어 수(隨)나라와 어깨를 겨루게 됨.
16 소오(霄敖) 감(坎)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6년  
17 분모(蚡冒) 순(眴)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17년  
18 무왕(武王) 통(通)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51년 분모의 동생.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임금이 됨,주 환왕(周 桓王)때 칭왕함.
19 문왕(文王) 자(貲)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15년  
20 도오(堵敖) 간(囏)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3년  
21 성왕(成王) 운(惲)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46년  
22 목왕(穆王) 상신(商臣)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12년  
23 장왕(莊王) 려(侶)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23년  
24 공왕(共王) 심(審)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31년  
25 강왕(康王) 초(招)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15년  
26 겹오(郟敖) 원(員)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4년  
27 영왕(靈王) 비위(比圍)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12년  
28 평왕(平王) 기질(弃疾)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13년  
29 소왕(昭王) 진(珍)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27년  
30 혜왕(惠王) 장(章)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57년  
31 간왕(簡王) 중(中)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24년  
32 성왕(聲王) 당(當)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6년  
33 도왕(悼王) 의(疑)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21년  
34 숙왕(肅王) 장(臧)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11년  
35 선왕(宣王) 양부(良夫)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30년  
36 위왕(威王) 상(商)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11년  
37 회왕(懷王) 괴(槐)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30년  
38 경양왕(頃襄王) 횡(橫)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36년  
39 고열왕(考烈王) 원(元)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25년  
40 유왕(幽王) 한(悍)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10년  
41 애왕(哀王) 유(猶)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8년 1년  
42   부추(負芻)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5년  

 

[편집] 주석

  1. 초 나라의 첫 번째 도읍지로써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자귀현(秭歸縣) 동남쪽의 고을로써 장강의 강안(江岸) 도시로 쓰촨성(중국어: 四川省, 병음: Sìchuān Shěng)과 경계(境界)에 있음.
  2.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죽산현(竹山縣)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3. 양우(楊雩)혹은 양월(陽越)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강릉현(江陵縣) 일대
  4.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악성현(鄂城縣) 부근
  5.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을 가로 지르는 한수(漢水)의 하류 지방을 말한다.
  6. 송나라 영지로써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서북
  7. 초 나라와 동성인 제후국으로 호북성 자귀현(秭歸縣) 동남에 있었던 군소 제후국
  8. 성복대전(城濮大戰)/기원전 636년 중원제후국을 대표하는 당진과 남쪽의 새로이 일어난 세력을 대표하는 초 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남 임복향(臨濮鄕)에 있었던 성복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 이 싸움의 결과 진 문공(晉 文公)의 당진군이 초군을 대파하여 초 나라의 중원진출에 쐐기를 박고 향후 중원의 패권은 당진이 차지하게 되었다.

 

 

위 (전국)

(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는 전국 시대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토지가 사방 일천 리에 달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나라이다. 갑병 30만과, 말 오천 필, 전차 육백 승을 낼 수 있었다.

정치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은 유명하다.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이기도 했다.

원래 주나라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집권국가가 되자, 덕의 이념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즉,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서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의 이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 관개사업 추진에 의해 다른 6국에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 결국 진나라가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성이 침수당하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편집] 역대 군주

[편집] 삼진 분립 전(진나라 신하)

 

대수 칭호 재위 년수 재위 기간 비고
1 무자(魏武子) 위주(魏犨)     필만(畢萬)의 손자이자 망계(芒季)의 아들.
2 도자(魏悼子) 위과(魏顆)     위 무자의 아들.
3 소장자(魏莊子) 위강(魏絳)     위 무자의 아들.
4 헌자(魏獻子) 위서(魏舒)     위 소자의 아들.
5 간자(魏簡子) 위취(魏取)     위 헌자의 아들.
6 양자(魏襄子) 위만다(魏曼多)     위 간자의 아들.
7 환자(魏桓子) 위구(魏駒)   ? ~ 기원전 446년 위 양자의 아들.

 

[편집] 삼진 분립 후(위나라 군주)

 

대수 시호 재위 년수 재위 기간 비고
1 문후(文侯) 위사(魏斯) 50년 기원전 446년 ~ 기원전 397년  
2 무후(武侯) 위격(魏擊) 26년 기원전 396년 ~ 기원전 371년  
3 혜왕(惠王) 위앵(魏罃),위영(魏瑩) 52년 기원전 370년 ~ 기원전 319년  
4 양왕(襄王) 위사(魏嗣) 23년 기원전 318년 ~ 기원전 296년  
5 소왕(昭王) 위속(魏遬) 19년 기원전 295년 ~ 기원전 277년  
6 안리왕(安釐王) 위어(魏圉) 34년 기원전 276년 ~ 기원전 243년  
7 경민왕(景閔王) 위증(魏增) 15년 기원전 242년 ~ 기원전 228년  
8 왕가(王假) 위가(魏假) 3년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5년  

 

 

 

제 (춘추 전국)

(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시대춘추오패이자, 전국시대전국칠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현재의 산둥 지방이다

역사

[편집] 초기 역사

(周)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강태공(姜太公)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다. 당시에 주나라의 세력으로만 동중국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동이라는 불리는 이민족이 이 지역에 있었다. 영지를 하사한 것과 다르게, 태공망 강상에게 동중국 지역 세력들을 토벌할 것을 명한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강태공은 제나라의 제후과 되었고, 현지 풍속에 맞춰 정치를 집행하였고, 제나라를 안정시켰다. 관숙과 채숙의 반란 후에, 성왕은 "동쪽은 바다에 이르러, 서쪽은 하수에 이르러, 남쪽은 목릉에 이르러, 북쪽에 이르러서 5후 9백이 죄를 범했을 경우, 그들을 토벌해도 괜찮다."라고 명했다. 그 후도 영토를 확대하였고, 춘추 시대 초기에는 동쪽의 강국이 되었다. 제나라는 바다를 접하여 있어, 소금의 생산을 하였고, 철이 나오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원이 풍족하게 되었다. 이후 제15대 군주 제 환공(齊桓公)시대에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주나라를 대신하여 제후들을 통제하였고, 남쪽의 초나라의 위협에 대항했다. 기원전 667년, 환공은 주나라왕에게 패자(覇者)로 인정되어 그 자리에 올랐고, 춘추 오패의 한 명으로 꼽힌다.

[편집] 전씨의 찬탈

그러나 환공의 사후에 후계 싸움이 계속 되어, 패자는 진나라(晉)의 문공(文公)이 되었다. 진 문공이 패자가 되었지만, 제나라도 그대로 대국으로 유지하였지만, 중원의 주도권이 북쪽의 진나라(晉)과 남쪽의 초나라(楚)의 패자 쟁탈전으로 옮겨졌고, 그 상황에 제나라와 진나라(秦)가 관련되는 것이 춘추 시대 중기의 흐름이 되었다. 그 때부터 서서히 대부들의 힘이 강해지고, 군주 권력은 약해지고 있었다. 제나라의 강력한 대부들이 있었는데 국씨, 고씨, 포씨, 최씨, 경씨, 진씨(陳氏)등 6개의 가문이 있었다.

제 24대 제 장공의 시대에는 재상이였던 최저(崔杼)는, 장공이 아내와 불륜 관계인것을 알고 화를 내었고, 장공을 죽였다. 최저는 다른 군주를 세웠지만, 후에 살해당한다.

기원전 532년제 경공안영을 등용하였다. 안영이 재상이 되어, 군사 분야에는 사마양저를 등용하였고, 국정을 안정시켰다. 안영은 양설힐(羊舌肸)과 대화를 나누었고, "제나라는 멀지 않아 전씨에게 찬탈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전씨는 앞에서 이야기를 한 진씨가 전씨(田氏)로 성을 개칭한 일이다. 진씨=전씨는 기원전 672년에 진나라(陳)에서 망명한 진나라 공자 전완의 후손이다.

유력한 대부들은 내부 권력 투쟁으로 몰락하고, 마지막에는 전씨가 제나라의 권력을 장악한다. 안영의 예언 대로, 기원전 386년전화제 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어, 강성 여씨에서 규성 전씨로 국성이 갈렸다. 제 위왕(齊 威王)이 행정 개혁을 행하여 국력을 증대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진(秦)과 중국을 양분하는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의 침공으로 제왕 건(齊王 建)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편집] 역대 군주

[편집] 강제 (강성 왕조)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강태공(姜太公) 상(尙) 기원전 1000년경 이전  
2 정공(丁公) 급(伋, 級)    
3 을공(乙公) 득(得)    
4 계공(癸公) 자모(慈母)    
5 애공(哀公) 불신(不辰) ? ~ 기원전 863년  
6 호공(胡公) 정(靜) 기원전 862년 ~ 기원전 860년  
7 헌공(獻公) 산(山) 기원전 859년 ~ 기원전 851년  
8 무공(武公) 수(壽) 기원전 850년 ~ 기원전 825년  
9 여공(厲公) 무기(無忌) 기원전 824년 ~ 기원전 816년  
10 문공(文公) 적(赤) 기원전 815년 ~ 기원전 804년  
11 성공(成公) 탈(脫) 기원전 803년 ~ 기원전 795년  
12 장공(莊公) 속(贖) 기원전 794년 ~ 기원전 731년  
13 희공(僖公) 녹(祿) 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  
14 양공(襄公) 제아(諸兒)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86년  
15   무지(無知) 기원전 686년  
16 환공(桓公) 소백(小白)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  
17   무궤(無詭)
무휴(無虧)
기원전 643년 ~ 기원전 642년  
18 효공(孝公) 소(昭) 기원전 642년 ~ 기원전 633년  
19 소공(昭公) 반(潘) 기원전 632년 ~ 기원전 613년  
20   (舍) 기원전 612년  
21 의공(懿公) 상인(商人) 기원전 612년 ~ 기원전 609년  
22 혜공(惠公) 원(元) 기원전 608년 ~ 기원전 599년  
23 경공(頃公) 무야(無野) 기원전 598년 ~ 기원전 582년  
24 영공(靈公) 환(環) 기원전 581년 ~ 기원전 554년  
25 장공(莊公) 광(光) 기원전 553년 ~ 기원전 548년  
26 경공(景公) 저구(杵臼) 기원전 547년 ~ 기원전 490년  
27 도공(悼公) 양생(陽生) 기원전 489년 ~ 기원전 485년  
28 간공(簡公) 임(壬) 기원전 484년 ~ 기원전 481년  
29 평공(平公) 오(驁)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56년  
30 선공(宣公) 적(積)
취잡(就匝)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05년  
31 강공(康公) 대(貸) 기원전 404년 ~ 기원전 379년  

 

[편집] 전제 (전씨 왕조)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태공(太公) 화(和)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4년  
2   (剡) 기원전 383년 ~ 기원전 375년  
3 환공(桓公) 오(午)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7년  
4 위왕(威王) 인(因)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0년  
5 선왕(宣王) 벽강(辟彊) 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  
6 민왕(湣王) 지(地) 기원전 300년 ~ 기원전 284년  
7 양왕(襄王) 법장(法章) 기원전 283년 ~ 기원전 265년  
8   (建)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21년

 

 

 

 

한 (전국)

(韓,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 또는 한나라(韓나라)는 전국시대칠웅(七雄) 가운데 하나이다. 수도는 초기에는 양책, 후기에는 신정(新鄭)이었다.

춘추오패의 하나인 (晉)에서 분리된 나라이며, 위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영토는 북쪽으로는 지금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서쪽으로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이르렀고, 영토의 길이가 구백 리에 달했다고 했다. 또한 갑병 30만을 낼 수 있고, 무기가 뛰어났다.

그러나 기원전 239년 진나라(秦)의 장군 몽오의 공격으로 성 13곳을 빼앗겼고 곧이어 기원전 230년 다시 진나라의 대공세로 한왕 안(韓王安)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한나라는 멸망했다.

역대 군주

[편집] 삼진 분립 전(진나라 신하)

 

대수 칭호 이름 재위 기간 재위 연수 관계
1 한 무자(韓武子) 한만(韓萬) ? ? 곡옥 환숙(曲沃桓叔)의 아들
2 한 구백(韓賕伯) ? ? ? 한 무자의 아들.
3 한 정백(韓定伯) 한간(韓簡)   ? 한 구백의 아들.
4   한천(韓穿) ? ? 한 정백의 아들.자(字)는 한자여(韓子輿).
5 한 헌자(韓獻子) 한궐(韓厥)   ?  
6 한 선자(韓宣子) 한기(韓起)   ? 한 헌자의 아들.
7 한 정자(韓貞子) 한수(韓須)   ? 한 선자의 아들.
8 한 간자(韓簡子) 한불신(韓不信)
한불녕(韓不佞,(조세가(趙世家))
? ~ 기원전 479년 이후 ? 한 정자의 아들.
9 한 장자(韓莊子) 한경(韓庚) ? ? 한 간자의 아들.
10 한 강자(韓康子) 한호(韓虎) ? ~ 기원전 425년 ? 한 장자의 아들.
11 한 무자(韓武子) 한계장(韓啓章)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09년 15년 한 강자의 아들.

 

[편집] 삼진 분립 후(한나라 군주)

 

대수 시호 이름 재위 기간 관계 사료 출처
1 한 경후(韓景侯) 한건(韓虔)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한계장의 아들. 사기 한세가(史記 韓世家)
2 한 열후(韓烈侯) 한취(韓取)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한 경후의 아들. 사기 한세가
3 한 문후(韓文侯) 한유(韓猷)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77년 한 열후의 아들. 사기 한세가
4 한 애후(韓哀侯) 한둔몽(韓屯蒙) 기원전 376년 ~ 기원전 374년   정승 한산견에게 시해당함.
5 한 의후(韓懿侯) 한약산(韓若山)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63년    
6 한 소후(韓昭侯) 한무(韓武) 기원전 362년 ~ 기원전 333년   정나라를 멸국함.
7 한 선혜왕(韓宣惠王) 한강(韓康)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12년   한 선혜공(韓 宣惠公)은 재위 10년때 개원하고 칭왕함.
8 한 양왕(韓襄王) 한창(韓倉)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96년    
9 한 이왕(韓釐王) 한구(韓咎) 기원전 295년 ~ 기원전 273년   위의 소왕과 힘을 합해 진을 치나 패함.
10 한 환혜왕(韓桓惠王) 한연(韓然) 기원전 272년 ~ 기원전 239년   진에 아부할 정도로 어리석고 나약한 왕.
11 한왕 안(韓王 安) 한안(韓安) 기원전 238년 ~ 기원전 230년   진에 멸국되어 시호가 없음.

 

 

 

 

조 (전국)

조나라(趙-,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는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서 전국시대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위나라, 한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북쪽엔 연나라와 붙어있고 남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있다.

호복(胡腹, 통소매와 바지)을 채용하였고, 중국에 처음 기마전술을 도입한 나라이기도 한다. 갑병 수십만과, 전차 천승, 말(馬) 만필을 낼 수 있었으나 기원전 228년 진나라의 침공을 받아 유목왕이 사로잡혀 멸망한다.

이때 태자 대왕은 멀리 대나라로 쫓겨가 대나라의 왕 자리에 올랐으며 도읍인 한단(邯鄲)은 상공업의 대중심지였다

역대 군주

[편집] 삼진 분립 전(진나라 경)

 

대수 칭호 재위 년수 재위 기간 비고
1 조 성자(趙成子) 조쇠(趙衰) 15년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2년  
2 조 선자(趙宣子) 조돈 (趙盾) 21년 기원전 621년 ~ 기원전 601년  
3 조 장자(趙莊子) 조삭(趙朔) 4년 기원전 600년 ~ 기원전 597년  
4 조 문자(趙文子) 조무(趙武) 43년 기원전 583년 ~ 기원전 541년  
5 조 경숙(趙景叔) 조성(趙成) 23년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18년  
6 조 간자(趙簡子) 조앙(趙鞅) 42년 기원전 517년 ~ 기원전 476년  
7 조 양자(趙襄子) 조무휼(趙無恤) 51년 기원전 475년 ~ 기원전 425년  
8 조 환자(趙桓子) 조가(趙嘉) 1년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24년  
9 조 헌자(趙獻子) 조완(趙浣) 15년 기원전 423년 ~ 기원전 409년  

 

[편집] 삼진 분립 후(조나라 군주)

 

대수 시호 재위 년수 재위 기간 비고
1 조 열후(趙列侯) 조적(趙籍) 9년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2 조 무후(趙武侯)   13년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휘(諱) 미상.
3 조 경후(趙敬侯) 조장(趙章) 12년 기원전 368년 ~ 기원전 375년  
4 조 성후(趙成侯) 조종(趙種) 25년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0년  
5 조 숙후(趙肅侯) 조어(趙語) 24년 기원전 349년 ~ 기원전 326년 숙왕(肅王)이라고도 함.
6 조 무령왕(趙武靈王) 조옹(趙雍) 27년 기원전 325년 ~ 기원전 299년  
7 조 혜문왕(趙惠文王) 조하(趙何) 33년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6년  
8 조 효성왕(趙孝成王) 조단(趙丹) 21년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  
9 조 도양왕(趙悼襄王) 조언(趙偃) 9년 기원전 244년 ~ 기원전 236년  
10 조왕 천,조 유류왕(趙王遷,趙幽謬王) 조천(趙遷) 8년 기원전 235년 ~ 기원전 228년  
11 대왕 가(代王嘉) 조가(趙嘉) 6년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2년

 

 

 

 

 전국시대의 진

[네이버 지식백과] 전국시대의 진 (두산백과)

  

진나라 헌공(獻公) 때에는 순사(殉死)의 습속을 금지하고 BC 383년에는 동녘에 역양성(櫟陽城:陝西省 臨潼縣 북동)을 구축하여 동방으로의 진출 의지를 보여주었다.

BC 362년 효공(孝公)이 왕위에 오르자 위(衛)나라 사람 상앙(商鞅)을 등용해 내정을 개혁하였다. 즉 종래의 혈연 존중의 인사를 고쳐서 공적에 따른 신분제도를 설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이때부터 종래의 읍(邑)과는 그 성격이 다른 새로운 현(縣)이 생겼고, 군주권이 현내의 서민과 직결되었다. 이같이 하여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河南省 開封縣)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셴양[咸陽]으로 옮겨 셴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안출하였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공손 연(公孫衍)으로 하여금 ‘합종책’을 분쇄하도록 명하고, 장의(張儀)로 하여금 각국이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이른바 ‘연횡(連衡)’을 성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책동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진은 파(巴) ·촉(蜀), 즉 쓰촨성[四川省]을 장악하고, 초(楚)나라로부터는 한수이강[漢水]의 상류를 빼앗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어느 때든지 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혜문왕은 BC 325년부터 공(公) 대신 왕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부터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왕호를 쓰게 되었다.

 소양왕(昭襄王) 때에 이르러 청두[成都] 부근에 운하를 열고 쓰촨의 옥야(沃野)를 개발하는 한편,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BC 27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왕 역대의 능역(陵域)이던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렸다. 초나라는 허난[河南]의 진(陳:河南省 淮陽縣)으로 옮겨야 하였고, 뒤에 다시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다. 진나라 군대는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다시 구이저우성[貴州省]의 동부와 후난성[湖南省]의 서부도 공격하였다.

백기 장군은 북방의 조(趙)나라도 공격하여,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수도 한단(邯鄲)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이즈음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齊)나라는 동제(東帝)라고 높여서 ‘황제’ 칭호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왕호를 썼다. 소양왕이 위나라 사람 범수(范睢)를 등용한 뒤부터는 그의 건의에 따라‘연횡책’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마지막 마무리 작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형세를 살핀 주왕(周王) 난(赧)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부터 공격을 시작하자 난왕은 영읍(領邑) 30과 인구 3만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주나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君)도 멸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국시대의 진 (두산백과)

 

 
범수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창안자 [ 范睢 ]
[네이버 지식백과] 범수 [范睢] -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창안자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10.20, 들녘)

 

 

범수는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초나라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제후에 유세하여 관직을 얻으려 했지만 가진 돈이 없어 먼저 중대부 수고(須賈)의 가신이 되었다(당시 대부는 상·중·하의 구분이 있었다).

죽은 척하여 목숨을 간신히 건지다

 진 소왕 37년인 기원전 270년 범수는 중대부 수고를 수행하여 제나라에 갔다. 제 양왕이 말 잘하고 재능 있는 범수를 보고는 황금 10근과 술을 상으로 내렸다. 범수가 요구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 일을 알게 된 수고는 범수가 제와 내통하여 위의 기밀을 팔아 넘겼다고 생각했다. 수고는 범수에게 술은 받되 황금은 돌려주게 했고, 범수는 그에 따랐다. 귀국한 뒤 수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이 일을 위나라의 재상인 위공자 위제(魏齊)에게 보고했다

.화가 몹시 난 위제는 가신에게 명령하여 범수에게 고문을 가하게 했다. 뼈가 부러지고 이가 빠지는 등 범수는 피투성이가 되어 사경을 헤맬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범수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죽음을 가장했다. 위제는 범수의 시신(?)을 멍석에 말아 변소간에 던져버리도록 했다. 술에 취한 위제의 빈객들은 일부로 범수의 시신에다 오줌을 갈겨 모욕을 주었다. 물론 타인에 대한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외국과 내통한 자의 최후를 똑똑히 보라는 섬뜩한 경고였다.

멍석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범수는 틈을 봐서 많은 돈을 주겠다며 간수를 매수했다. 간수는 위제에게 가서 시체를 내다버리게 해달라고 청했다. 술에 취한 위제는 범수의 시신을 교외에 내다버려 짐승들이 뜯어먹게 하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범수는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얼마 뒤 위제는 문득 범수가 진짜 죽었는지 의심이 들어 사람을 보내 사방을 뒤지게 했다. 범수는 여기까지 예견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거적에 덮힌 자신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라고 일러두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범수의 죽음 앞에 통곡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위제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범수는 친구 정안평(鄭安平)의 보살핌을 받아 도망쳤다. 이름까지 장록(張祿)으로 바꾼 채 몸을 숨겼다.

공교롭게도 이때 진 소양왕 영직이 사신 왕계(王稽)를 위나라로 보냈다. 범수의 친구인 정안평은 근무병으로 분장하여 공관에서 왕계를 보살피게 되었다. 왕계는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근위병 정안평에게 "나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유세할 유능한 인재가 위나라에는 없는가?"라고 물었다. 정안평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고향에 장록이란 선생이 계시는데 대인을 뵙고 천하 대사를 논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위나라와 원수지간이라 대낮에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왕계는 밤에 함께 오도록 했다. 그날 밤 정안평은 범수를 데리고 왕계를 만났다. 이야기를 끝내기도 전에 왕계는 범수가 인재임을 알아채고 "내 공무가 다 끝나 돌아가는 길에 삼정(三亭, 지금의 하남성 위씨현 서남) 남쪽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공무를 마친 왕계는 위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수레를 몰아 삼정에 이르렀다. 약속한 장소에서 범수와 정안평이 왕계의 수레에 올랐고, 일행은 함께 진나라로 들어갔다. 왕계 일행이 호지(湖地, 함곡관 서쪽,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 경내)에 이르렀을 때 서쪽에서 마차가 잔뜩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범수, 아니 장록이 "저쪽에서 오는 사람은 누굽니까?"라고 물었다. 왕계는 "진나라 재상 양후가 동부 현읍을 순시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범수는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듣기에 양후는 진나라 조정의 대권을 혼자 주무르며 유능한 인재를 질투하고 제후의 빈객을 혐오한다던데 나를 보면 모욕을 줄지 모르니 수레 상자 안에 잠시 숨어 있겠습니다.

"잠시 뒤 양후가 다가왔다. 왕계와 인사를 나눈 다음 양후는 마차 앞에서 왕계를 위로하고 "관동(함곡관 동쪽)에 무슨 소식 없습디까?"라고 물었다. "별다른 것 없습니다." 왕계는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혹 제후의 유세객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아니겠죠? 그런 자들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요. 그저 남의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만 하지." 양후는 근엄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왕계를 타일렀다. 왕계는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능청을 떨었고, 양후는 안심한 듯 그 자리를 떴다. 이윽고 상자에서 나온 범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후가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은 느리군요. 방금 전 수레에 외부인이 있지 않느냐며 의심까지 해놓고 그저 한번 흘깃 보기만 하고 조사는 하지 않는군요

."이렇게 말한 다음 범수는 수레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면서 "조금 있으면 양후가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십 리쯤 갔을까. 놀랍게도 범수의 예상대로 양후가 기병을 보내 수레를 뒤졌고, 외부인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돌아갔다. 범수는 이렇게 해서 왕계·정안평과 함께 진의 도성 함양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원교근공을 설파하는 범수

왕계는 진왕에게 위나라에 다녀온 상황을 보고한 다음 틈을 봐서 슬그머니 이렇게 말했다.

"위나라에 장록 선생이란 분이 있는데 천하가 알아주는 인재랍니다. 그가 말하길 '진나라의 형세가 달걀을 올려놓은 것처럼 위험합니다. 저의 대책을 채택해야만 안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책을 글로 써서 대왕께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수레로 모셨습니다

."하지만 소양왕은 평소 유세객들을 혐오하던 터라 왕계가 전한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범수의 정착을 허락하긴 했지만 일 년이 넘도록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앞서 진은 소양왕 36년인 기원전 271년에 남쪽 초나라의 수도 언영(지금의 호북성 의성현 남쪽)을 점령하고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제나라까지 물리친 바 있다. 또 삼진(한·조·위)을 여러 차례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후 양후는 자신의 봉지를 확대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한·위를 지나 제나라 강읍(지금의 산동성 영향현 북쪽)과 수읍(지금의 산동성 동평현 서남)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바로 이때 범수가 글을 올려 소양왕에게 간곡하게 면담을 요청했다. 편지 마지막에 "저를 만나신 다음 한 마디라도 쓸모가 없다면 죽음으로 보상하겠습니다"라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장록이란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소양왕은 뜻밖의 편지를 읽고는 무척 흥분하여 왕계를 불러 범수를 데려오게 했다. 기원전 270년, 마침내 범수(장록)는 진나라 궁전에 발을 들여놓았다. 소양왕은 아직 오지 않았다. 범수는 궁중의 길을 모르는 것처럼 하면서 일부러 후궁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로 이때 소양왕이 도착했고, 환관이 기세등등하게 범수를 내쫓으며 "대왕 납시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범수는 못 들은 척 일부러 헛소리를 지껄였다. "진나라에는 태후와 양후밖에 없거늘 무슨 군왕이란 말인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범수는 계속 후궁 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범수는 일부러 소양왕의 화를 돋우려는 심산이었다. 범수와 환관이 말다툼하는 소리를 들은 소양왕은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다가가 범수를 맞이했다.

소양왕은 좌우를 물리쳤다. 궁중에는 이제 두 사람만 남았고, 소양왕은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몸을 세운 채 정중하게 범수를 맞이했다. 그러고는 "선생께서 과인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고요?"라고 물었다. 범수는 '그렇습니다'를 두 번이나 내뱉었다. 이윽고 소양왕은 다시 두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선생께서 과인에게 무엇을 지도하려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범수는 또 '그렇습니다'를 두 번 반복했다. 이렇게 하길 세 차례, 소양왕은 다시 똑같은 자세로 "선생은 과인을 가르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라고 물었다. 범수는 그제서야 표정을 풀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그 옛날 여상(강태공)이 문왕을 만날 당시 그는 위수에서 낚시나 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아주 멀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자리에서 대화를 나눈 다음 문왕은 그를 바로 태사(군대 최고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문왕은 여상의 모략을 채용하여 마침내 상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치하기에 이릅니다.지금 저는 타국에 머무르는 나그네로 대왕과의 관계라면 관계랄 것도 없을 정도로 까마득합니다.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모두 국군을 돕거나 군왕의 인척과 관련된 큰 일들입니다. 원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려 했으나 대왕의 속내를 알 수 없는지라, 대왕께서 세 차례나 추궁하시듯 물으셨음에도 바로 대답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에 소양왕은 몸을 범수 쪽으로 더욱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은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이 사람 또한 어리석고 무능합니다. 선생께서 체면 불구하고 이렇게 오신 것은 하늘이 진을 도우신 것입니다. 일이 크든 작든 위로는 태후에 아래로는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생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니 과인의 뜻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소양왕의 진심을 확인한 범수는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절을 올렸고, 소양왕도 같은 예로 화답했다. 범수는 드디어 원교근공의 원대한 책략을 소양왕에게 펼치기 시작했다.

"용감한 병사를 거느린 강력한 진나라가 제후를 정복하기란 마치 뛰어난 사냥꾼이 토끼 발자국을 뒤쫓듯 쉽습니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 진나라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양후가 대왕께 불충하는데다, 대외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옳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대왕께 좋은 책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양왕은 범수에게 다시 한번 정중하게 가르침을 요청했고, 범수는 본격적으로 원교근공의 책략을 풀어놓았다.

"한·위는 진의 이웃입니다. 진이 영토를 넓히려면 먼저 이 두 나라를 병합해야 합니다. 그런데 양후는 이 두 나라를 건너뛰고 제나라를 공격하자고 합니다. 이는 매우 모자란 생각입니다.

"범수는 소양왕을 설득하기 위해 제 민왕이 멀리 초나라를 치다가 실패한 사례를 끄집어냈다.

제 민왕은 이웃 나라를 넘어 멀리 초를 공격하여 적장의 목을 베는 등 단 숨에 천 리 땅을 공략했다. 하지만 결국 단 한 자의 땅도 얻지 못했다. 원인은 전략을 잘못 구사한 데 있었다. 먼길을 와서 전투를 하다보니 군대가 지치고 소모가 너무 컸다. 게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 애써 땅을 얻고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이때 다른 나라가 제나라의 허술한 수비와 피로를 틈타 후방을 공격하니 제는 크게 패하고 말았다. 힘들게 빼앗은 초나라 땅은 한·위 두 나라 차지가 되었다. 이는 군대를 도적에게 빌려주고 양식을 훔친 도적에게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나라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다음 범수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대왕께서는 제 민왕의 교훈을 거울삼아 '원교근공'의 책략을 취하셔야 합니다. 먼 나라와는 우호관계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원교근공' 말입니다. 이렇게 영토를 조금씩 넓혀가면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이웃나라는 버리고 먼 나라를 공격하려 하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한·위 두 나라는 중원지대에 위치한 나라로 천하로 통하는 중추와 같습니다. 패업을 이룰 생각이시라면 먼저 한·위를 제압하여 멀리 있는 초와 조를 위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초·조와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합니다. 이 두 나라가 진에 붙으면 제는 두려워할 것이고, 이때 제와 다시 우호관계를 맺으면 됩니다. 이웃 한·위 두 나라는 이쯤 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혀!

"소양왕은 범수의 책략을 칭찬했고, 그를 객경에 임명하여 대외 군사행동을 전문적으로 기획하고 논의하도록 했다. 범수의 모략에 따라 진은 위를 공격하여 회성(지금의 하남성 무척현 서남)을 차지했다. 2년 뒤에는 형구(지금의 하남성 온현 동쪽 부평 옛성)를 공략했다. 기원전 266년, 소양왕은 응(지금의 하남성 노산현 동쪽) 땅을 범수에게 봉지로 내리고 응후라는 작위를 내림으로써 양후의 재상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265년, 진은 다시 동쪽 한나라를 공격했다.

'원교근공'이라는 고전적이고 불멸의 외교이론을 창안하여 진의 통일을 촉진했던 범수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소양왕 시대에 활약했다.사진은 소양왕에서 진시황에 이르기까지의 국가 대사를 기록한 죽간의 모습이다.

노장 염파에게 반간계를 구사하고, 조나라 병사 40만을 생매장하다

소양왕 47년인 기원전 260년, 진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를 공격했다. 진은 장평(지금의 산서성 고평 서북)을 포위했고, 조는 노장 염파를 보내 저항하게 했다. 염파는 명성답게 굳건한 수비로 적의 예봉을 피하는 정확한 전략을 선택했다.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자는 전략이었다. 조왕은 염파가 적에게 지레 겁을 먹고 있다며 몇 차례 나무라고 출전을 독촉했지만 염파는 꿈쩍하지 않았다.

범수는 기회를 엿보다 첩자를 이용하여 조나라 진영을 이간시키는 이른바 '반간계(反間計)'를 활용했다. 범수는 황금 천 금(1금은 황금 20냥)과 함께 첩자들을 보내 조나라 사람들을 매수하여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염파가 쉽게 이길 수 있는데 너무 일찍 포기하려 한다. 진나라는 조사의 아들 조괄이 조나라 군대를 지휘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조 효성왕은 본래 염파가 공격은 않고 수비만 하는 것에 대해 위신을 잃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유언비어까지 듣고 보니 여간 부아가 치미는 것이 아니었다. 범수의 반간계가 효과를 내는 순간이었다. 과연 효성왕은 조괄을 보내 염파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염파가 물러난 이상 상황은 급변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병법을 공부한 조괄은 종이 위에서 군대를 논하는 것에는 적수가 없었지만 실전 경험은 전무했다. 하지만 자부심 하나는 대단하여 안하무인이었다. 일찍이 아버지 조사는 "초나라가 내 아들을 장군으로 기용하는 날이 곧 조나라가 장례를 치르는 날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염파의 자리를 대신한 조괄은 실제 상황은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다짜고짜 전법을 바꾸어 강적과 정면 대결에 나섰다. 한편 진은 은밀히 경험이 가장 풍부한 백기를 최고사령관으로 기용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 조의 처절한 패배로 끝이 났다. 조나라 군대 40만이 전부 조괄 손에서 장례를 치르고 말았다.

사마천은 범수를 평가하면서 한비자의 말을 빌려 "소매가 길어야 춤이 아름다워 보이고, 밑천이 든든해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정곡을 찌른 말이다. 범수가 당대 최고의 변사로 진나라의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강력한 진나라에 의지하여 자신의 지혜와 모략을 한껏 발휘했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오두』라는 글에서 정치가 안정되고 강성한 나라가 수준 높은 일을 실행하기 쉽고, 정치가 어지럽고 약한 나라는 제아무리 좋은 계책이 있어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했다.

범수는 평생 진 소양왕을 섬겼고, 그의 모략은 대부분 성공했다. 이는 진이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는 데 크게 공헌했다. 범수는 또 굴욕을 참고 일어선 대장부였다. 힘들다고 뜻을 꺾지 않았으며, 불굴의 의지로 분발하여 성공했다. 그는 성공했다고 자만하지 않았으며, 그와는 반대로 격류 속에서 용퇴할 줄 알았다. 그는 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걸출한 책사이자 진정한 모략가였다.

 인물소개

 범수 '원교근공'이란 고전적이고 불멸의 외교이론을 창안하여 진의 통일을 촉진했던 범수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진 소양왕 시대에 활약했다.

그는 사지에서 간신히 살아나와 사방을 떠돌다 진나라에 정착하여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헤치고 입신양명한 범수는 원교근공이라는 고차원의 외교모략으로 합종책을 철저히 분쇄하고 마침내 천하통일의 마지막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장평전투를 통해 처절하면서 장엄하게 분열시대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범수는 명예로운 퇴장을 선택하여 전국시대 유세가로는 보기 드물게 생의 막바지를 편하게 마무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수 [范睢] -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창안자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10.20, 들녘)

 

진진 좋은 모략을 가슴속에 품고도 자신의 견해를 갖지 못하다 [ 陳軫 ]
[네이버 지식백과] 진진 [陳軫] - 좋은 모략을 가슴속에 품고도 자신의 견해를 갖지 못하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10.20, 들녘)

 

진진은 전국시대의 이름난 종횡가(縱橫家)이자 천하가 알아주는 웅변가로 외교모략 방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뚜렷한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못했고 한 국군에게 충성하지도 못했다. 오늘은 저 국군을 위해 꾀를 내고, 내일은 이 국군을 위해 계책을 세우는 등 그는 평생 동안 정치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초 진진은 장의와 함께 진나라 혜문왕에 의해 중용되었다. 두 사람 모두 외교모략과 웅변의 고수였다. 이는 달리 말해 두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산에 함께 살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혜문왕의 총애를 얻으려 했다. 장의는 혜문왕 앞에서 대놓고 진진을 헐뜯었고, 진진은 자신의 충정을 거듭 밝혔다. 그러나 혜문왕은 결국 장의를 상국에 임명했고, 진진은 초나라로 도망쳐 몸을 맡겼다.

초나라는 진진을 반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자신이 도망쳐 나온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사신이 되어 위나라를 지나게 된 진진은 위나라의 실력자 서수(犀首)를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서수는 진진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서수는 다름 아닌 공손연(公孫衍)으로 위나라 진양 사람이다. 그는 평소 장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마침 진나라가 장의를 상국으로 기용하자 기분이 몹시 상해 있던 터였다.

면담을 거부당한 진진은 "긴히 할 말이 있어 당신을 찾았는데 만남 자체를 거부하니 내일을 넘기지 않고 떠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제서야 서수는 진진과 면담을 받아들였다.

"당신은 왜 술을 좋아하십니까?" 서수를 만난 진진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렇소." 뜻밖의 질문에 서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해 할 일을 만들어주고자 하는데 괜찮겠소?" 진진이 제안했다. "어떻게 말이오?" 서수가 진진 쪽으로 몸을 당기며 관심을 보였다. 자신의 제안에 서수가 관심을 보이자 진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의 위나라 상국 전수(田需)는 제후들을 모아 동맹을 맺고자 하는데 초나라 회왕이 그를 신임하기는커녕 되레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먼저 위왕을 만나 연·조 두 나라의 국왕이 당신과 친분이 있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할 일도 없는데 자기들 나라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나 나누자고 요청하니 당신을 이 두 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십시오.

"잠시 뜸을 들인 진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위왕께서 승낙하시면 많이도 말고 대략 30대의 수레만 차출하여 당신 뜰에 모아놓은 다음 공개적으로 연·조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간다고 공포하십시오.

"서수는 진진의 말을 따랐고, 위왕은 예상대로 서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연·조 두 나라의 외교관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즉시 귀국하여 자기 국왕에게 사실을 보고했고, 두 나라는 바로 사람을 보내 서수를 맞이하도록 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초나라 회왕은 크게 화를 내며 "전수가 우리나라와 동맹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어째서 서수가 연·조에 사신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나를 속인 게 아닌가"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애당초 전수를 믿지 않았던 초왕은 이 일로 전수를 더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다른 한편, 제나라는 서수가 북방으로 가서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정보에 역시 사람을 보내 서수를 초빙하여 중책을 맡겼다. 사신의 임무를 띠고 위나라를 떠나기도 전에 서수는 벌써 제·연·조 세 나라의 공동 국상을 상징하는 도장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진진은 그제서야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

진진의 모략을 보면, 그 자신은 정치적으로 주관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늘 상대에게 맞추어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을 뿐이다. 진나라에서 장의와 총애를 다투었을 때도 진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며, 초나라에서는 사신으로 파견되었지만 역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의 모략은 뛰어난 점이 적지 않았지만 일종의 생존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 번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다

 진진이 진나라에 도착해보니 마침 혜문왕에게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한·위 두 나라가 1년 넘게 싸우고 있었는데, 혜문왕은 조정 신하들에게 진나라가 나서 두 나라의 싸움을 말려야 할지를 놓고 의견수렴을 했다. 하지만 의견은 거의 반반으로 갈라졌다. 혜문왕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진진이 나타난 것이다.

혜문왕은 장의를 상국으로 기용하는 바람에 진진이 초나라로 떠났기 때문에 진진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좋은 의견을 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둘러 "그대는 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어도 내 생각이 나든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진진은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대왕께서는 월나라 사람 장신(莊潟)의 고사를 들어보셨습니까?"라며 되물었다. 금시초문이라는 혜문왕의 표정을 한 번 살핀 진진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월나라 사람 장신은 초나라에서 집규(執圭,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의 작위로 조회 때 옥으로 만든 규를 들게 했기 때문에 집규라 했다)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났습니다. 초왕이 '장신은 원래 월나라 시골 마을에서 아주 말단 관리를 지냈는데, 지금 우리 초나라에서 집규가 되어 출세를 하고 부귀를 누리게 되니 고향 월나라를 그리워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사람들은 아프면 흔히 고향 생각을 합니다. 장신은 고향 생각이 날 때면 말도 고향 말로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초나라 말로 대화를 나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초왕이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니 정말 그랬습니다. 지금 제가 초나라로 쫓겨나긴 했습니다만 대왕께서는 제가 사용하는 말이 진나라 말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하셨습니까?

"진진의 이 말에 혜문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자신을 위해 대책을 강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진진은 혜문왕에게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했다.

"변장자가 호랑이를 활로 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사냥꾼 변장자가 어느 날 소 한 마리를 놓고 싸우고 있는 호랑이 두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변장자가 지체없이 그 중 한 마리를 향해 활을 쏘려 하자 함께 따라 나선 어린 조수가 변장자를 말리며 "지금 저 두 놈이 소를 놓고 싸우기 시작하면 죽기살기로 싸울 것입니다. 그러면 두 마리 모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센 놈이라도 상처를 입고, 약한 놈은 죽기 십상입니다. 두 놈이 다 싸우고 난 다음 상처 입은 센 놈을 죽이면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가 1년이 넘도록 화해하지 않고 싸우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변장자가 호랑이를 쏜 고사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진진의 이야기에 혜문왕은 크게 기뻐하며 "정말 기막히군"이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반복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나라는 망하고 큰 나라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이 틈에 진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뛰어난 외교가 진진. 그러나 확고한 자기 철학이 부족했던 그는 유세가들의 난립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지도는 기원전 3세기 초 열국들의 형세도다.

소양에게 사족(蛇足)을 경계하게 하고, 이해관계로 제나라의 난관을 돌파하다

주나라 현왕 46년인 기원전 323년 초나라 장수 소양(昭陽)이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는 장수가 전사하는 등 대패했다. 순식간에 여덟 개 성이 초나라의 수중에 들어갔다. 소양은 여세를 몰아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러 나섰다. 이때 진진은 제나라 위왕의 지시를 받고 소양을 만났다. 진진은 소양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예의를 올린 다음 몸을 일으켜 이렇게 물었다.

"초나라 법에 따르면 적의 장수를 죽이거나 적을 대파하면 관작이 어디까지 올라갑니까?"

"관직은 최고 무관직인 상주국(上柱國)에까지 오르고, 작위 역시 최고 작위인 집규까지 오를 수 있소이다."

"그 관작보다 더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윤(令尹) 한 자리뿐이오."

"보아 하니 영윤이 가장 귀한 자리군요. 하지만 조정에는 영윤 한 사람이 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어 초왕이 두 명의 영윤을 둘 가능성은 없겠군요.

"이어 진진은 '사족'에 관한 고사를 들려주었다. 초나라 사람 하나가 제사를 다 드리고 난 다음 일을 도운 사인들에게 술을 한 잔 내렸다. 사인들이 술을 보니 한 사람이 마시기에는 남고 전부 마시기에는 모자라는지라 땅바닥에다 뱀을 그리는 시합을 해서 먼저 그리는 쪽이 술을 마시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시합은 시작되었고, 그들 중 그림을 잘 그리는 한 사람이 뱀을 멋지게 다 그렸다. 그러고는 왼손으로는 술잔을 가져다 마실 채비를 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뱀을 그리면서 "나는 뱀에다 다리까지 붙일 수 있어"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뱀 다리를 다 그리기 전에 다른 한 사람이 뱀을 다 그리고는 술잔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뱀은 본래 다리가 없거늘 어째서 뱀에다 다리를 그리는가"라고 비꼰 다음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먼저 뱀을 그린 사람은 뱀에다 다리를 그리다가 술 먹을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고사를 다 들려준 다음 진진은 소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당신은 초 회왕을 도와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군을 소멸시키고 적장까지 죽였습니다. 성도 여덟 개나 빼앗았습니다. 그러고도 군대의 사기는 왕성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마치 뱀의 다리를 그린 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세운 전공만으로도 상주국에 집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제나라까지 공격하려 합니다. 제나라는 당신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고, 당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명성을 떨쳤습니다. 새로이 공을 세운다 해도 영윤이 될 수 없거늘 어째서 뱀의 다리까지 그리려 하십니까? 전쟁에서 계속 승리한 다음 적절한 시점에서 멈출 줄 모르는 장수는 자칫 목숨을 잃기 십상이며 그렇게 되면 여태까지 쌓은 관작마저 남에게 넘어갑니다. 이런 장수야말로 뱀에다 발을 그린 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요.

"진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소양은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군대를 되돌렸다.

다음으로 주나라 난왕 17년인 기원전 298년 진진은 제나라 민왕에게 삼진(三晋)과 연합할 것을 권유했다. 그때 진진은 위나라에 있었는데,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앞서 진진은 한·조·위 3국을 연합시켜 공동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때는 소진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성사시킨 합종책이 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벌써 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강국 진이 바로 코앞까지 군대를 몰고 오자 각국은 일치단결하기가 힘들었다. 이에 따라 진진은 동쪽 제나라로 가서 민왕을 설득하기로 했던 것이다. 진진은 다음과 같이 상황을 분석했다.

현재 제·초·연·한·조·위 6개국은 서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나라의 힘만 키워준 꼴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힘은 약해졌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동방의 제후국들에게 좋은 전략이 아니다. 산동 6국을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나라는 막강한 진나라뿐이다. 그런데 6국은 진의 위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힘을 빼고 있으니 그 결과는 모두 진나라에게 병합되는 길밖에 없다.

제후국들이 진나라를 위해 서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진나라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앉아서 이익을 누릴 것이 뻔하다. 진은 이렇게 총명하거늘 어째서 산동 6국은 이렇게 어리석은가. 나라가 망하면 군주는 치욕을 당한 채 죽을 것이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거나 구덩이에 묻혀 죽을 것이다. 한·위 두 나라가 이미 생생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제나라는 아직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진나라가 제나라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제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아 하니 제나라의 재앙이 멀지 않았다.

진나라가 벌써 위나라의 강현과 안읍으로 쳐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진이 이 두 지방을 공략한다면 동쪽으로 황하를 따라 내려와 안팎으로 제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쪽으로는 초와 위가 고립되고, 북쪽으로는 연과 조가 고립되어 제나라는 어디로부터도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한·조·위가 연합하여 형제의 의리를 맹서하고 함께 강현과 안읍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다. 여기에 제나라가 참여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환이 닥칠 것이다. 삼국이 연합하면 진이 쉽게 위를 공격하지 못하고 남쪽 초를 공격할 것이고, 삼진은 제나라가 합류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제나라를 공격하고 나서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니 제나라로서는 서둘러 군대를 보내 삼진과 연합하는 것이 최선이다.

진진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이렇게 당시 상황을 분석했고, 제나라 민왕은 진진의 분석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는 흔쾌히 군대를 보내 삼진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진에 대항했다.

 인물소개

 진진 전국시대 후기는 유세가들이 난립한 시대였다. 통일이라는 거대한 기세 속에서 이들은 각자의 논리와 언변을 통해 통일을 위해 또는 통일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저 유명한 사족(蛇足)과 관련한 고사를 남긴 진진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확고한 자기 철학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뛰어난 유세가 대열에 들 수 있을 정도의 자질을 갖춘 외교모략가였다. 그는 박학다식과 기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진 [陳軫] - 좋은 모략을 가슴속에 품고도 자신의 견해를 갖지 못하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10.20,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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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주요인물들..
 
殷 은나라

성탕 : 은나라의 12대 임금으로 무도한 하걸왕을 내치고 하나라를 멸망시켜 은나라의 천하를 공포한 인물

 

이윤 : 성탕이 어진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성탕을 찾아간다. 성탕이 하를 멸하는데 일조하였고 바른 정치를 공포하여 민심을 안정시킨다. 이후 성탕의 손자인 태갑이 폭군의 자질을 보이자 그를 가두고 정신을 차릴때까지 자신의 국정을 담당하였고  마침내 태갑이 성군의 인물이되자 그를 임금으로 세운뒤 백세를 향유하며 세상을 떠났다.

 

달기 : 은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주지육림의 고사를 만들어낸 미녀이다. 유소씨가 바친 여인이라 한다.

 

周 주나라

서백 창 : 주문왕으로 인재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다 낚시를 하던 태공망을 구하였다는 유명한 인물이다. 은주왕의 견제를 받아 유리라는 곳에 갇히지만 뇌물로서 은주왕의 인심을사 제후국의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고  여러나라들을 정벌하여 주의 기틀을 다진다. 유리에 갖혀있을때 주역을 정리한 공적도 있다.

 

태자 발 : 주무왕으로 제후를에게 천하의 뜻이 자국에 있음을 공표하고 2년뒤 전국에 포고문을 보내어 태공망을 원수로  하여 10만의 군사로 은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천하는 모두 주를 따르게 되었다.

 

포사 : 주유왕을 사로잡은 미인으로 용이 뱉었다 궁궐에 도마뱀이 뛰 다녔다는 등 안 좋은 징조속에서 태어난 여인으로 그녀를 웃게 하기위해 시도때도 없이 봉화를 올리다 정작 위급한 상황에 제후국들이 오지않게 되어 결국 서융에게 패하게 되고 주왕실의 권위는 쇠퇴되고 춘추시대가 출범한다.

 

濟 제나라

태공망 여상 : 천하를 낚기위해 강가에 나선 노인으로 70세의 나이에 임관하여 주왕실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그 업적으로는 10만의 군사로 70만의 은을 무너뜨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공이 무척 커서 가장 좋은 자리인 제땅을 하사 받았다.여상은 뛰어난 정치수완으로 5개월만에 제나라의 인심을 얻어 제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제환공 소백 : 제양공은 여동생과 관계를 맺을 정도로 폭군이었다. 이 양공을 피해 도망친 두 왕자중 한명으로 포숙아의 도움으로 먼저 제나라에 입성 제환공이 된다. 이후 관중을 등용하여 초를 징벌하여 각나라 군주들과 회맹을 하여 춘추시대 첫 패자에 오른다. 말년의 죽음은 남색으로 인해 비참하였다.

 

관이오 중 : 춘추시대 첫패자를 만든 인물로 관포지교의 우정으로 무척이나 유명하다. 그의 경제철학은 무척이나 뛰어났는데 그의 저서 관자에는 재물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라는 말이있다.

포숙아 : 관중에게 지나치다 할 정도로 베푸는 인물. 관중 사후 제의 패자자리를 자신이 살아있을 때까지 지켜냈다.

 

전문 맹상군 : 전국사공자 각지의 재상을 역임하며 제의 위명을 뽐냈다. 이 시대에 제나라는 전씨의 나라가 된다.

 

魯 노나라

주공단 : 성왕을 보필한 인물로 보위를 찬탈할 수도 있었으나 찬탈하지 않았다. 공자가 그리워한 인물

 

공구 : 공자로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정치적 역량을 펼치기 위해 여러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나라가 없었다. 이후 노나라의 재상으로 노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은퇴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며 춘추를 집필하였다.

 

자공 : 공자의 제자 뛰어난 변설가로 당시 정치가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제자들중 가장 부유하였다.

 

자하 : 공자의 제자 문헌의 전승과 해석에 공이 큰 선비, 공자사후 위문후의 스승이 되어 국사를 자문했다.

 

자로 : 공자의 제자 정사에 밝고 무용에도 뛰어났으며 호방한 인물이었다. 공자에게 솔직한 의견을 개진하였고 공자는 그의 거친성격과 만용을 타이르곤 하였다. 공자와 서로 마음이 합한 인물이었다 한다.

 

燕 연나라

소진 : 가난할때 자신을 모른채 하는 가족들에게 실망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공부하여 강태공의 음부경을 독파하였다. 변설에 능하여 합종책을 제시한 인물로 대표적인 종횡가였으며 그는 6국의 재상이 되어 자신의 능력을 전국에 알렸다.

 

악의 : 연 소왕대에 아경에 오른 인물로 제나라를 공격해 70여성을 함락시켜 빼앗았으며 그 공로로 창국군의 호칭을 받은 인물이나 제나라 전단의 간계에 의해 해임되자 조나라로 도망갔다.

 

형가 : 바람은 스산하고 역수는 차구나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이 시를 읊조리며 시황을 저격하려한 자객으로 지도속에 칼을 감추고 암살을 하려했으나 결국엔 실패한다.

 

吳 오나라

공자 광 : 치밀하고 냉철한 인물로 오자서에게 소개받은 전저의 도움으로 왕을 죽이고 오왕에 오르니 이가 오왕합려이다.그는 오자서와 손무를 군사대원수로 삼아 초를 격파하고 진과 제를 제압하였으며 월을 정복하기에 이르니 힘으로서 천하의 패자의 자리에 오른다.

 

오자서 : 초나라 사람으로 비무기의 모함으로 인해 가족이 멸절을 당하자 굴욕을 이겨내고 오나라로 망명 초나라를 무찌르는데 성공하고 부모님의 복수를 한다.

 

백비 : 오자서와 같은 처지로 오나라에 오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간신의 재능이 있었고 결국 월나라의 계책에 이용당해 오나라가 망하는데 일조한다.

 

손무 :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손자병법을 저술한다. 오자서의 추천으로 쓰임받게 되어 궁녀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군율을 보였고 초나라와 제와 진 월까지 억압하는 성과를 보인다. 나중에는 선견지명까지 발휘하여 합려에게서 떠난다.

 

오왕 부차 : 합려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와신의 자세로서 임하였고 결국 월을 멸하나 인정에 약하여 결국 월나라를 그대로 놓아두었고 나중에는 오의 마지막왕이라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越 월나라

월왕 구천 : 윤상의 아들로 윤상사후 합려가 쳐들어오자 회계산에서 합려를 물리쳐 사망케한다.이후 부차가 복수를 하러 쳐들어 오자 전투에 임하면 패할 것이라는 범려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전쟁을 치르다가 대패하였고. 이후 범려의 계책대로 부차의 종이되어 그의 변의 맛을 보는 치욕을 감수하며 상담의 자세로 임해 결국 월에 복귀를 명받아 오를 멸하는데 성공하였다.

 

범려 : 전략가이자 경제전문가로서 월에 있을때에는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이후 제와 도에서는 경제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거부가된다. 그의 처세술은 가후보다 더욱 빛나보이는데 춘추시대 최고의 모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하겠다.

 

대부 종 : 월왕구천을 섬기며 구천의 어려움에 도움을 준 인물이다. 하지만 구천은 어려울때 같이 할 수 있고 평화로울 때는 같이 할수 없는 인물이라며 떠날 것을 종용할 때 떠나지 않다가 나중에는 구천에게 자결을 명받게 되는 인물이다.

 

宋 송나라

 

송양공 : 자보가 본명으로 송양공의 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제환공 사후 중대국으로서 패자의 자리에 욕심을 가져 각 제후를 불러 회맹을 하려는등의 행동을 하다 초나라에게 망신을 당하고 초나라를 맹주로 세워주게 된다. 이제 양공이 치욕을 씻기위해 전쟁을 치르는데 자신을 인의 군대라하여 기습을 하지않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다 대패한다. 이 전투에서 맞은 자리가 덧나 사망한다.

 

목이 : 양공의 전략가로서 그에게 욕심을 내지 말것과 초와의 전투에서 실리를 얻을 것을 권했으나 끝내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싸움이란 승리하는게 목적이다 무슨예의가 필요하단 말인가? 라는 말을 하였다.

 

晉 진나라

공자 중이 : 진헌공이 중이를 두려워하여 암살하려하자 각지를 돌면서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중이는 다섯명의 뛰어난 심복인 호언, 가타, 선진, 조쇠, 위무자들로 이들은 재상의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이후 중이는 秦진목공과 초성왕의 도움을 받아 62시에 진문공으로 올라 초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각지의 군주들과 회맹함으로서 춘추시대 제 2의 패자가 된다.

 

개자추 : 한식날을 만든 인물. 중이가 논공행상 도중 개자추를 잊게 된다. 개자추는 벼슬에 미련이 없어 산에 숨어버리고 뒤늣게 안 진문공은 개자추에게 벼슬을 내리려하지만 개자추는 부모님과 함께 산에 은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불을 지르면 나올것이라 생각한 문공은 산에 불을 지르지만 개자추는 불속에서 죽게 되고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려 그날만은 차가운 음식을 먹게하니 이것이 바로 한식이다.

 

지백 : 진이 한 위 조로 불리되자 한과 위를 연합하여 조양자를 친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한위의 연합군은 패배하고 지백은 양자에게 참살당한다.

 

예양 : 자객열전에 나오는 인물들중 하나로 여러번 양자를 암살하려하지만 실패한다. 천운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 예양은 양자에게 옷을 빌려달라하고는 그의 옷을 찟고는 곧 죽음을 맞이한다.

 

楚 초나라

초성왕 : 춘추시대 초기 중이를 도와 중이가 진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게 도와준 인물이다. 이후 중이에게 자신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이유로 중원땅을 침범하려하지만 중이에 의해 실패하여 돌아간다.

 

초장왕 : 춘추시대의 세번째 패자로 오른 인물로 삼년간 옥석가려내기를 통해 간신을 몰아내고 중원을 압박하며 한족중 이민족으로 분리되는 초나라로서는 처음으로 패자의 지위에 오르는 인물이다.

 

오거 : 초장왕이 3년간 방탕해 있을 때 그에게 삼년간 울지않는 새의 이야기를 하며 장왕에게 충언을 한 인물이다.

 

대부 소종 : 오거 이후 장왕의 음란한 생활이 심해지자 충언을 하였다. 이에 장왕이 소종을 위협하자 소종은 이 한몸 죽어 대왕의 현명하심이 되돌아올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바랄게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다. 이에 장왕은 간신들을 숙청하고 오거와 소종에게 국정을 맡겼다한다.

 

신포서 : 공손포서라고 하며 초나라의 대부이다 신지방에 봉읍을 받았으며 진에 구원을 요청하여 오를 물리치고 초를 구하였다. 오자서와의 우정으로 유명하다.

 

굴원 : 초의 충신이자 시인으로 초회왕의 곁에서 뛰어난 내정과 외교수완을 발휘하였으나 이 때문에 다른 신하의 질투를  받아 추방되었다. 이후 나라를 걱정하다 멸라수에 몸을 던저 자결하였다.

 

근상 : 진과 화친하여 공생을 도모하자고 주장하던 인물. 장의와 뜻을 같이하였다. 굴원과 반대되는 대표적 인물

 

황헐 (춘신군) : 전국사공자중 하나로 진나라에 글을 올려 초나라가 망하지 않기를 간절히 설복시켰다. 이후 춘신군이 초의 승상으로 오르자 진은 함부로 초를 넘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춘신군이 이원에게 암살당한 이후에는 초의 세력이 급격히 무녀졌고 초는 결국 멸망당한다.

 

秦 진나라

백리해 : 검은 양 다섯마리를 주는 대가로 데려왔다하여 오고대부라 불린다. 우나라를 섬기다 우나라가 망하게 되자 진晉에서 진으로 와서는 그의 정치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진목공이 패자만큼의 지위에 이르는데 일조한다.

 

건숙 : 백리해의 추천으로 진목공을 섬긴다 벼슬이 상대부에 이르렀다. 백리해와 마찬가지로 중용되어 진목공을 도왔다.

 

진목공 : 공자중이가 망명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의리가 없는 진성공 이오를 벌하기도 한다. 이후 중이가 패자에 오르고 나서는 진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배하였는데 그가 인정을 받은 것은 융나라를 정벌하여 서융의 영토를 중국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상앙 : 위앙이라고도 한다. 진효공대에 신임을 얻어 귀족층의 반대를 무릎쓰고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권력을 중앙집권에 족속시키고 효율적인 세관리로 진나라 내정의 기초를 만들었고 이것을 계기로 진은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다. 법가사상의 대표인물이다.

 

진효공 : 상앙과 대화를 통하여 상앙의 부국강병책을 획득하였다.

 

감룡 : 상앙의 부국강병책과 개혁에 반대한 인물이다.

 

장의 : 연횡책을 제시한 인물. 소진과 함께 귀곡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진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횡책을 주장하였고 그 공로로 무신군에 임명받는다. 이후 혜문왕이 죽자 자신의 위치를 두려워한 장의는 기지를 발휘 위나라의 재상을 역임하다 세상을 떠났다.

 

무왕 : 저리자와 감무를 등용하여 의양을 함락시킨 인물로 힘이 장사였다한다. 주의 의양을 함락 시킨후 맹열과 함께 정을 들어올리는 힘겨루기를 하다가 잘못하여 정을 떨어뜨려 종지뼈를 부러뜨려 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저리자 : 지혜주머니라 불리웠으며 혜문왕의 이복동생이다.

 

감무 : 의양 정벌의 대장군으로서 나서게 되는 인물로 6만에 이르는 적의 머리를 효시한다.

 

백기 : 뛰어난 용병술로 진나라 소양왕을 섬긴 인물이다. 한나라를 쳐서 건하 지방까지 진출했으며 다음해에 위나라의  61개의 성을 빼았았다 그후 5년뒤에는 조나라의 광랑성을 함락시키고 7년 후에는 초를 공격하여 수도 영을 점령한다. 그의 공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범수와의 알력다툼간에 의해 자살하게된다. 그는 자살할 당시 장평싸움에서 항복한 수십만 명을 생매장 시킨 죄는 죽어 마땅한 죄였다. 라고 했다 한다.

 

범수 : 위나라에서 개죽음 당할 뻔 한뒤 진나라로 망명해 장록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숨어살다가 소양왕에게 진나라의  형세는 누란지위에 놓여있다하여 외척을 몰아낼 것을 권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이후 내정개혁을 진언하였고 위나라에 자신의 복수를 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나중에는 채택의 말을 듣고 벼슬에서 물러난다.

 

채택 : 오기,대부 종,상군의 예를 들어 범수에게 유세하여 범수에게 재상의 지휘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한다. 이후 채택은 재상이 되지만 몇달만에 누군가가 그를 모함하자 그는 벼슬을 내려놓는다. 이후 강성군에 봉해져 소양왕대에서 진시황대까지 왕을 섬긴다.

 

여불위 : 거상으로서 재물이 아닌 인간장사를 시작해 자초를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자신스스로 재상이 되는 인물이다. 후에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진왕정의 화를 두려워하여 자살한다.

 

이사 : 진왕정의 참모로서 재상의 직위에 까지 오른다. 사람이 처하는 것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깨달음을 얻어  법가사상으로 나라를 정비하였다. 진시황 사후 조고의 간계에 휘둘려 참살당한다.

 

진왕정 : 하루에 1석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열정적인 왕이었다. 길고 긴 춘추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스스로는 시황이라 칭하여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고 만리장성을 축조하는등의 업적을 이룬다. 하지만 그의 진나라를 오래가지 못하니 3대에 이르러 멸망하고 만다.

 

조고 : 지록위마의 고사로 유명한 인물로 호해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나라의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환관이다. 이후 호해를 죽이고 유방과 결탁하여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하다 호해의 아들 자영의 손에 죽는다.

 

몽염 : 진의 명장으로 제나라를 멸망시킨 1등공신이다. 통일 후 흉노를 공격하여 하내지방을 수복하였고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이후 조고의 간계에 의해 대장군의 직책을 빼앗기고 자살을 명 받는다.

 

왕전 : 초를 멸망시킨 명장으로 초에 출전할때에 자신을 시황제가 의심하지 못하도록 계속하여 지위에 욕심을 내는 모습을 보이는 척한다. 하지만 장군은 삼대를 못간다하여 3대에 이르러서는 망하였다.

 

한비자 : 법가사상에 통달한 인물이나 말을 잘 못하였다고 한다. 영정이 그의 저서를 읽고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하였지만 이사의 모함으로 인해 옥중에서 죽임을 당한다.

 

趙 조나라

염파 : 싸움에 능한 장군으로 조나라에 있을때에는 전투에서 공적을 세우지만 후에 다른 나라로 갔을 때에는 큰 공적을 세우지 못한다. 스스로도 자신은 조나라의 대장군이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한다.

 

인상여 : 슬기와 재지로 진의 압박을 이긴 인물로 화씨지벽에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조의 재상이되어 염파와 함께 조를 잘 이끌어 나갔다.

 

우경 : 조나라의 재상으로 조의 효성왕에게 우산과 짚신을 신고 처음 유세했었다 한다.

 

평원군 : 전국사공자중 한사람이었으나 춘신군이나 맹상군같은 인물에 비하면 능력은 다소 평범한 인물이었다.  낭중지추의 고사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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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명재상

            ´안영´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 안영은 군주의 비위를 맞추기만 하는‘예스
맨’이 아니었다. 시시비비를 엄격히 가려 올바로 간언하는 재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우회적인 방법으로 임금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슬기를
발휘했다..

춘추시대,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극도로 타락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행했던 사회를 꼽을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역사의 한 무대다.
이때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주(周)나라의 권위가 쇠퇴하고 유력 제후국이
패권을 추구하던 시기(BC 722~403)로 중국 사회는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도 도덕적 양심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제(齊)나라의 재상인 안영(晏영)이다. 그의 덕에 대해서는
공자도 ‘논어’에서 찬양한 바 있다.

안영은 제나라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등 3대의 군주에 걸쳐
명재상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특히 범용(凡庸)한 군주였던 경공이 58년이나
제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안영의 공을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의 행적은 ‘안자춘추(晏子春秋)’와 ‘춘추 좌씨전(春秋左氏傳)’에 잘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저서 ‘사기’에다 안영을
위한 열전을 마련하여 그의 덕을 찬양했다.


“내가 그 당시에 살아 있었다면 그의 마부가 되기를 사양하지 않았겠다.”
한마디로 안영은 임금의 부족함과 그릇됨을 충성된 마음으로 간(諫)해 절대
권력자인 왕을 올바로 인도해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이었다.


이야기 1, 부도덕한 임금 깨우치기

어느 때 혜성이 나타나서 불길한 징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경공은 재화(災禍)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신관(神官)으로 하여금 빌도록 했다.
이때 안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혜성이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의 부도덕한 자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만약 임금에게 부도덕함이 없을 것 같으면 임금이 기도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임금에게 부도덕함이 있을 것 같으면 기도드려 봤자 혜성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기변(奇變)이 인간사의 불의·불합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믿는 것이 이른바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인데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이다. 안영 역시 자연의
기변은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경고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속에서 합리주의적인 사상을
견지했다.


즉 임금이 부도덕한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 나타난 조짐이
자연의 기변이라면, 신에게 기도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부도덕한 처사를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은연중에 임금의 도덕성을
경고한 것이다.


이야기 2 : 신벌과 중생의 저주


경공이 학질에 걸려서 1년이 넘도록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웃나라에서 문병객도
많이 찾아왔다. 신하들이 말했다.
“전하께서는 선대보다도 훨씬 많은 제물을 신에게 바쳤습니다만 그래도 병이 낫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관들이 기도드리는 방식이 나쁘기 때문이니 신관(神官)을 처벌해
주십시오. 문병객에 대한 체면 문제도 있습니다.”


경공이 이 말을 듣고 안영에게 의논했다. 그러자 안영이 이렇게 말했다.
“진(晋)나라의 사신한테 들었는데, 진나라의 중신 범회(范會)는 명재상이었으므로
신관은 양심을 저버린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일은 꼭 그와
같습니다. 현명한 군주를 섬기고 있는 신관은 기도할 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신(神)도 나라에 복을 내려주고 신관도 상응한 복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반해서 폭군을 섬기고 있는 신관은 불쌍합니다. 군주가 하는 짓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하면 군주의 노여움을 살 것이고 거짓말을 하면 신을 속이게 됩니다.
진퇴양난으로 적당히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니 신도 불행을 내리고 신관도
응분의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경공은 구체적으로 어찌하면 좋은가를 물었다. 안영은 말했다.
“정치를 잘하십시오. 산림, 소택(沼澤), 바다의 소금, 기타 모든 자원이 있는
곳은 국유지로 돼 있어 전하가 파견한 감독관이 백성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의 여러 관소(關所)에서는 직장에 가는 백성의 소지품에도
과세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또 귀족은 귀족들끼리 무리한 장사를 하며 세금을 마구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큰 저택이 매일같이 세워지고 있고 향락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궁중의 귀부인들은 가게에서 물건을 강탈하고 있고 측근들은 시골에 가서 이권을
챙기기에 바쁩니다. 백성들은 남자건 여자건 모두 전하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만약 기도가 효력이 있는 것이라면 저주도 같은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의 영토 내에 있는 사람의 수효를 생각해 보십시오. 몇 사람의 신관이 행하는
기도가 몇 만인, 몇 억인이 내뱉는 저주를 이겨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관을
처벌하기보다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은 몇 가지 세금을 줄여서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해 주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사찰과 교회가 수풀처럼 솟아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죄를
짓고 있다는 징표일까?


신은 과연 피해자의 원한을 돌보는 대신에 피해를 끼친 자의 기도와 헌금만 받아
먹으면서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할 수 있을 것인가? 죄지은 사람의 기도나 헌금은
신에게 별로 효력이 없지 않을까 느껴진다. 요는 선행을 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야기 3, 지혜로운 간언이란 ?

어느 때 경공의 애마가 별안간 죽어버렸다. 경공은 크게 화를 내 마구간지기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안영은 이를 못하게 말리고서는 경공에게 물었다.
“요순(堯舜) 임금이 사람을 죽인다면 누구부터 시작할 거라고 보십니까?”
“그거야… 과인(寡人)부터 하지.”

요순이 사람을 죽일 리가 없으므로 경공은 아찔한 마음에 이렇게 얼버무린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마구간지기를 사형 대신 하옥을 하라고
고쳐 명령했다. 이에 안영이 다시 말했다.


“이대로 하옥시키면 죄인은 자신의 죄를 모를 터이니 신이 그 죄목을 알게 해주겠
습니다.”경공의 허락을 얻은 안영은 이렇게 말했다.


“들어라, 너는 죽을죄를 세 가지나 범했다. 첫째는 말을 잘 돌볼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둘째로 임금님이 사랑하는 말을 죽게 했고, 셋째로 하찮은 말 한 마리
때문에 임금으로 하여금 사람을 하나 죽이려 들게 했다.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임금님을 비난할 것이고, 또 제후들이 알게 되면 우리나라를 멸시할 것이다.
이와 같은 죄 때문에 너는 하옥되는 것이다.”


경공은 이 말이 자기에게 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용서하라! 나의 덕을 해치지 말라.”
결국 마구간지기의 하옥은 보류되었다.

안영은 임금의 비위를 맞추기만 하는‘예스 맨’이 아니라 시시비비를 엄격히 가려
올바로 간언하는 강직한 재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 우회적인 방법으로 말하며 임금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뛰어난 간언 술(諫言 術)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4, 공을 군주에게 돌린다.

안영이 외국에 사신으로 가 있는 동안 안영의 제지를 받지 않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 경공은 새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때는 마침 추운 겨울철이었으므로 얼어
죽는 사람이 많고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임금은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했다.

안영이 돌아오자 환영 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안영은 궁궐 공사를 문제 삼았다.
그는 임금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한 후에 서민 사이에 요즘 유행하고 있는 노래 하나를
소개했다.

‘심한 추위에 몸이 언다./ 아! 어찌할거나!/ 임금 때문에 집안사람들은 헤어졌네!/
아! 어찌할거나!’그리고는 안영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 풍간(諷諫)을 못 알아
차릴 만큼 둔한 경공은 아니었다.


“저 궁궐 때문이지? 잘 알았어. 즉각 중지시켜라!”
안영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서는, 그 자리를 물러나자마자 수레를 몰아 공사
장으로 달려갔다.

“여러분, 잘 들으시오. 당신들에게도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이 있지 않소?
우리 임금님께 궁궐 하나 지어드리는데 너무 늦지 않소? 서두르시오, 서둘러!”
일꾼들은 모두 불평하며 중얼거렸다.


“너무하기도 해라! 임금의 꽁무니 말을 타고 앉아서 재촉 질을 하네, 흥.”
안영이 백성들로부터 크게 미움을 사고 있는 그때, 임금의 공사 중지 명령이 전달
되었다. 일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안영은 백성의 원망은 자기가 차지하고 공덕은 임금에게 돌렸던 것이다.

윗사람의 발목잡기만 능사로 하고 자기 잘못은 남에게 떠맡기되 공적은 모두 제가
차지하는 요즘의 정치판이나 관료 사회의 풍속과는 딴판이다. 공자는 이러한 안영을
칭찬하여 이렇게 말했다.
“명성은 임금에게 돌리고 재화(災禍)는 자기에게 돌렸다.”


이야기 5, 안영의 외교술

어느 때 안영은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도 잘생기지 못했다.
초나라 임금이 그를 만나보자마자 느닷없이 말했다.
“제나라에는 사람이 없는가? 그대를 사신으로 보냈단 말인가?”


이것은 안영에 대한 모멸이거니와 제나라를 멸시하는 행위였다.
이것은 나라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없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서울 임치(臨淄)에는 사람이 넘쳐흐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대 같은 사람을 보냈단 말이냐?”
“그건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 현명한 자는 현명한
나라에,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나라에 보냅니다.
저는 가장 어리석은 자이기에 귀국에 오게 된 겁니다.”


이 말에 임금은 꿈쩍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주체성과 자존심을 팽개치고 자기
나라 이익을 몽땅 큰 나라에 양보하여 큰 나라의 비위 맞추기에만 급급한 오늘날의
외교관들을 살펴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야기 6, 검소한 재상

안영은 검소한 생활에 자족했다.
그의 집은 천한 백성이 살고 있는 누추한 곳에
있었다. 어느 때 이를 딱하게 여긴 경공이 말했다.


“시장판 가까이에 사니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좋은 지역에 새 집을 한 채 마련해 주겠소.”
“조상 대대로 사는 집일 뿐 아니라 제 형편으로는 오히려 과분합니다.
게다가 가게와 가까워 물건 사기가 편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물가에 밝겠군?”
“그렇습니다.”
“지금 값이 비싼 것은 무엇인가?”
“끌신(踊)은 비싸고 보통 신은 값이 쌉니다.”

여기서 끌신이란 형벌을 받아 발에 상처가 난 죄수에게 신기는 신을 의미한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 곧 형벌을 줄이게 했다.

검소하고 결백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고, 성실한 사람이라야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딱한 처지를 헤아릴 수 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남을 용서할 수도 있고 남을 불행에서 구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라야만 참되게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훌륭한 정치가도 될 수 있다.


이야기 7, 아첨하는 자는 경계하라

어느 날 경공이 사냥터에서 돌아와 누각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그때 그가 좋아하는
신하 한 사람이 말을 달려 그리로 오고 있었다. 경공은 기쁜 얼굴로 안영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지. 나하고 장단이 잘 맞는단 말이야!”

“아닙니다. 저 사람은 전하와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하의 단순한 동조
자입니다.”
“장단을 맞추는 것과 동조는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다릅니다. 장단을 맞춤은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그것은 서로 다른 요소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비유컨대 그것은 국물과 같은 것입니다.
물, 불, 초, 고기, 소금 등으로 생선을 끓여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맛이 나게 한
것이 국물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전하가 긍정하는 것 속에 부정되어야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검토해서 전하의 긍정을
완전한 것으로 하며, 거꾸로 전하가 부정하는 것 속에 긍정해야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강조해 부당한 부정에서 전하를 구하는 것이 조화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고 단순히 동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가 긍정하
는 것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조지 조화가 아닙니다.
물 위에 술을 부어도 아무도 마시지 않으며 거문고나 비파를 들고도 같은 줄을 뜯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윗사람에게 아첨하여 ‘지당한 말씀입니다’라는 말을 연발하면서 부화뇌동만 능사로
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윗사람을 망치고 자기도 망할 수밖에 없다. 윗사람은 자기
말에 동조하는 자만 좋아하고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자를 원수로 여겨 배격하니,
그것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을 불성실하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공자 역시 조화를 강조했다.
“군자는 조화롭게 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조화롭게 하지
않는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조화는 바로 다양한 악기로 다양한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것이다. 원활한 인간관계, 평화로운 사회, 번영하는 국가는
이 조화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임금과 안영의 이러한 대화가 끝나고 술판이 벌어졌다. 그때 왕은 느닷없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죽음이란 게 없으면 인간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러자 안영은 말했다.


“죽음이 없을 것 같으면 행복한 것은 옛날 사람이지 지금의 전하는 아닐 것입니다.
지금 전하가 다스리고 있는 이 땅은 옛날에 상구(爽鳩) 씨의 땅이었습니다. 그 후
계칙(季則)의 땅이 되고, 봉백릉(逢伯陵)의 땅이 되고, 포고(蒲姑)의 땅이 되었다가,
그 훨씬 뒤에 와서 전하의 조상 땅이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상구 씨의 행복이지 전하의 행복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이곳은 상구 씨의 땅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일회적인 것이고 만인에게 공정한 것임을 참으로 깨닫게 될 때, 인간은 겸손·
선량하고 무욕· 무사(無私)하게 될 것이다. 생명을 가진 인간을 측은히 여기고 남을
사랑하는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안영은 이러한 이치를 말해준 것이다.


이야기 8, 권력이 바뀔 때의 처신

제나라의 장공(莊公)과 동족으로 중신의 지위에 있던 최저(崔?)는 임금을 제쳐놓고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해서 마침내는 장공을 살해했다.
임금을 죽인 최저가 역적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최저의 아내와 놀아난 장공의
과실도 컸다.

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가운데, 권력의 급격한 변동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안영은
과연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안영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체 없이 사건 현장인 최저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앞으로 그가 취할
태도에 대해서 물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체로 임금이나 관리가 모두 나라를 위해서 죽거나 나라를 위해서 망명한다면 나
역시 나라를 위해 죽거나 망명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죽거나 망명하는 임금에
따라야 할 사람은 그 수족들이다. 나는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

오늘날 세상에는 임금을 받들고 있는 자가 임금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나는 죽지도
망명도 못 하겠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갈 수는 더욱 없다.”
대문이 열리자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 장공의 시체를 무릎에 얹어놓고 통곡했다.

그는 항상 엄정한 자세로 재상의 역할과 임무를 다할 따름이었으므로 변동이 있을
때도 태연할 수가 있었다.
경공 16년, 신흥 세력임을 자랑하는 진씨(陳氏) 일당이 근친 귀족인 난씨(鸞氏)
고씨(高氏)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 곧 관복을 입고 궁궐로 달려가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두 진영에서 안영을 서로 자기편으로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진씨 편에 가담하겠습니까?”
“그 악당에게 무슨 매력이 있는가?”
“그러면 난씨, 고씨에게 붙을 것입니까?”

“이것들도 같은 무리다.”
“그렇다면 그만두고 떠나겠습니까?”
“임금의 위급함을 모른 체하고 떠나갈 수야 없지!”

권력의 중심이 이미 진씨에게 옮아가고 있는 시점인데도 그는 냉정히 처신했다.
그는 새로운 세력에 부화뇌동하여 빌붙지도 않았으며, 집권 세력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는 장공이 죽었을 때와 똑같이 자기가 섬기고 있는 경공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는 어느 쪽에 붙어야 뒷날 일신이 안전할까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 장(場) 서면 이 장에 가고, 저 장 서면 저 장에 가는 장사꾼’ 같은
정상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정객이나 관료들의 영원한
귀감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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