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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후기의 한글서예

 

조선시대의 한글의 변천사를 짚어보고 한글서예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되어 지금의 한글서예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한글서예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보다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중기의 한글 서예

 

진흘림체 / 한글의 필의를 살려씀 한글서체의 발달사에서 중기의 의미는 창제 때의 음운체계가 조형체계로 전환하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정형화된 궁체로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서 마무리된다고 볼 수 있다. 한글은 창제 이후 음운체계에 따라 공간배분을 일정하게 고정시켰고, 조형의 중심축을 공간 중심축으로 하여 한자와의 혼용을 가능케 하였으나, 중성의 위치편재와 크기의 변화로 조형상의 문제를 일으켰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점진적인 과정에서 조형체계가 결코 음운구조를 변질시키지 않는다는 문자로서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공간의 고정된 배분을 벗어나 글자의 크기에 따른 공간의 자유로운 배분, ,,종성뿐만 아니라 글자와 글자에서도 대립과 종속이 자유롭게 이루어져 폭넓고 다양한 형태로 빠르게 발전하였다. 즉 한글의 음운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 바로 전환의 동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환의 원인과 과정에 대하여 기존의 연구로 필사화에 따른 한문 행초서의 영향 또는 도입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는 유사성을 동질성으로 판단하는 오류에서 생긴 오해였다고 할 수 있다 .

양사헌의 서호별곡(西湖別曲) / 조화체한글의 음운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한 원인에 대하여, 서체발전의 분기와 정치발전의 분기가 거의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이 때 사림들이 향촌 질서의 재건을 위하여 여씨향약 등 많은 언해를 간행, 반포한 사실로부터 한글 사용의 보편화와 사림정치를 연계시키기 쉽다 .

한글은 창제 이후부터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인 친명정책과 성리학적 통치질서에 걸려 조정 및 관서에서는 한문만을 쓰고 한글은 일용 의 편리를 위한 문자로서만 쓰는 사용의 이중성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을 비롯한 왕실에서는 한글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사용함으로 해서 사림들이 집권하였을 때는 이미 전국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이를 통치에 이용하였을 뿐 한글의 사용을 조정 및 관서로 넓히지는 않았다. 사림의 붕당정치는 그 이상과는 달리 당쟁으로 변질되었고, 더욱이 임진·병자 두 오랜 전란으로 사회, 경제는 황폐화되었으며, 반상 지배계급의 착취와 토지겸병 등은 지배와 피지배계급의 대립현상을 낳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반상 지배계급의 조정 관서로의 지향적 관념이 급속히 팽배함으로써 한글은 천대시되어 조정관서로 진출할 수 없는 여자, 서출, 평민 등의 전유물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사림들이 정신적 기초로 삼았던 성리학 또는 예학 등에서 한글에 대한 인식전환의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한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한글을 직접 쓰는 친밀한 관계에서 그 정신적 근원을 찾아야 만 할 것이다.

중기 한글서예의 발전은 선조에서 효종에 이르는 조형체계에서 대립과 종속의 조형세계를 넓혀 가는 단계와, 효종에서 경종에 이르는 넓혀진 조형체계를 하나의 체계로 정형화시키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김성일 글씨 / 이부인에게 쓴 편지조선 중기 한글 서체의 경향

한글 창제에서 선조에 이르는 약 150 년이 지난 이후 일어난 가장 큰 서체상의 변화는 문자의 음운체계에 따른 공간배분에서 조형체계에 따른 공간배분으로의 전환이다. 이 음운체계에서 조형체계 로의 전환은 과도기를 거치며 한글의 음운체계가 갖는 문자로서의 고유성을 살려나가는 방향으로 자리잡혀 나간다고 할 수 있다

 

조형 중심축과 한글, 한자의 혼용

 

한글은 창제 때 한문과의 혼용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창제 이후의 첫 작품인 용비어천가에 이어 훈민정음해례』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상원사중창권선문등 창제 초기뿐만 아니라 약 150 년이 지난 선조 때까지 한문과 혼용되어 써 왔다.

과도기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변화는 첫째, 창제 이후 계속 쓰였던 한글, 한문의 혼용이 한글만으로 정착을 보았고 둘째, 모든 글자가 같은 크기의 공간에 쓰였던 것에서 낱개 글자가 스스로의 크기에 알맞은 공간으로 바뀌었고 셋째, 창제 때 음운체계에 따라 공간과 크기가 일정하게 주어졌던 초··종성이 음운체계의 제한을 벗어나 서로의 공간과 크기를 자유롭게 활용한 점이다.

훈민정음해례에서 비록 자방고전이라 하여 한글을 한자의 고대 서체인 전서(篆書)에서 그 형태를 모방하였다고 하였지만, 최만리 등의 상소에서 한자와는 거리가 먼 형태임을 지적하였듯 이 한글의 형태는 한자와는 완전히 다른 고유한 성격을 갖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자와의 혼용은 한글과 한자, 즉 두 이질적인 서체가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립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면 한글과 한문의 혼용은 이루어질 수 없다.

앞에서 본 혼용의 예들은 바로 한글과 한자가 대립을 극복하고 조화를 위한 시도였다고 하겠다. 이들의 조화는 바로 한글과 한자가 모두 동일한 크기의 공간에 배분되었고, 공간의 중심을 조형의 중심축으로 한다는 공통점에서 가능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글이 초··종성의 공간 배분이 갖는 스스로의 문제로 절대 형태를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때 한자와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공통점을 찾지 못한다면 한자와의 혼용은 불가능해지고 말 것이다.

송시열이 정보연의 부인 민씨에게 쓴 편지중기에 앞서 한글은 벌써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징후 들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한자와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공통점을 찾게 된다. 중기의 초기에 나타나는 새로운 공통점은 기존의 공통점이 붕괴되면서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양사언의 서호별곡과 정철의 시조가 대표적인 예가된다. 이 두 글씨의 공통점은 한글과 한자의 고유성을 서로 파괴하지 않는 가운데 쓰는 이의 의도에 따라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자유로운 크기로 대립을 조화시켰던 것이다. 창제 때 한글·한자가 모두 같은 크기의 공간에 배분되었고 한글은 한글대로, 한자는 한자대로 서로의 크기를 고정시킴으로써 대립을 뚜렷이 한 점과 비교한다면 새로운 공통점임에 틀림없다. 이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서로 다른 공간의 중심을 수직축으로 하여 조형의 중심축으로 한 점이다.

 

· · 종성의 공간배분

 

한글의 창제와 더불어 그 해례에서 제자의(制字義)는 상세히 밝혔지만, 어떻게 써야 한다는 형태에 대해서는 한자의 고대 서체인 전서(蔡書)를 모방하였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그쳤다. 그러나 용비어천가』『훈민정음해례』 『월인천강지곡등 창제 초기의 자료 및 이후 선조에 이르는 자료를 종합하면, 모든 글자를 같은 크기의 공간으로 하였고, 초성과 중성으로 이루어진 글자는 공간을 좌우·상하로 반분하여 왼쪽은 초성, 오른쪽은 중성에 배분하였고, ··종성으로 이루어진 글자는 공간을 상하로 반분하여 위쪽은초성과중성에, 아래쪽은 종성에 배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석보상절의 예에서 보듯이 중성 초출자보다 재출자·상합자·합용자의 가로폭을 조금 넓게 한 것으로 보아 음운체계 에 따른 공간배분의 불합리성을 스스로 인정하였다고 하겠다.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거나 이와 반대로 가로가 더 긴 공간에 있어서 이러한 불합리성은 더욱 두드러져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에서 보듯이 낱개 글자마다 크기가 커지거나 작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음운체계가 갖는 조형상의 문제는 선조 즉위 전후에 이르러 조형체계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정철의 어머니 죽산 안씨가 선조 4(1571) 정철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정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 , 는 조형체계를 따르고 있으나 종성이 오는 글자에서는 여전히 음운체계를 따르고 있다.

인현왕후가 숙휘공주에게 쓴 편지양사언의서호별곡에서도 湖海’, ‘蒼橋難 건너’, ‘세네벋등은 조형체계를, ‘聖人’, ‘세네벋등은 음운체계를 따르고 있다. 선조 2512월 김성일( 金誠一, 1538~94)이 부인에게 쓴 편지와 경북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진주 하씨 묘에서 출토된 곽주(1569~1617), 부인 박씨, 여러 아들 딸 및 사돈 주씨 등이 선조 35(1602)에서 인조 24(1646) 사이에 쓴 수많은 편지 등 자료에서 음운체계보다는 조형 체계가 주도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가사와 숙종 5년 우암 송시열이 69세에 쓴 펀지에 이르러서는 조형체계가 완전히 자리 잡혀 간다고 하겠다.

이상 선조 즉위년 전후에서 숙종 초에 이르는 약 100여년 동안 한 문서체의 영향 또는 도입으로 오해되었던 자료들에서 우리는 음운체계가 갖는 조형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형체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초성과 중성의 대립, ·중성과 종성의 대립이라는 음운체계를 지양하고, ··종성의 음운에 따른 위치·크기에 구애됨이 없이 서로 조형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조형체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러한 발전은 바로 인선왕후, 장렬왕후, 명성황후, 인현왕후 등 거의 함께 살았던 왕후들의 글씨와 송시열이 숙종 13년 며느리에게 대필케 한 편지의 글씨가 앞의 자료와 비교할 때 뿌리를 달리한 서체가 아니라 바로 조형체계의 적극적인 발전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왕후들의 글씨는 바로 오른쪽에 있는 종성 를 한 수직축으로 하고, 초성과 종성의 오른쪽 성분을 같은 수직축으로 하는 조형체계의 정형화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정형화를 '궁체'로 불러왔는데, 왕후들의 글씨를 궁체의 동태적 형태라고 한다면 숙종과 숙명공주의 글씨는 정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 · 종성의종속화

 

곽주가 장모에게 쓴 문안지음운체계에서 초성과 중성, ·중성과 종성의 결합은 공간의 반분(半分) 으로 대립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공간의 반분이 무너지면서 음운체계는 음운구조로서만 작용하고 그 시각적 표현형태는 조형체계로 새롭게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새로운 조형체계에서 초··종성이 서로 어울릴 때 대립의 관계뿐만 아니라 종속화의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종속화의 대표적인 예는 효종어찰과 곽주 일가의 글씨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효종어찰의 '후에'''는 음운체계에서는 +이지만 조형 체계에서는 +로 중성 를 초성에 끌어들여 의 대립관계로 바꾸었다. 여기서 우리는 초성 이 중성부분인 를 종속화 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어시니에서 어시는 초성 ,이 중성 ,를 종속시키고, ‘는 중성 가 초성 을 종속시켰다고 할 수 있다. 효종어찰의 짐녁에서는 중성 ,가 종성 ,을 종속시켜 초성 ,과 대립케 하였다. 효종의 글씨에서는 음운체계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롭게 종속시킴으로써 쓰는 이의 의도에 따라 문장의 흐름을 시각화하고 있다.

이러한 종속화는 붓의 흐름을 이음으로써 부드럽게 할 뿐만 아니라 곽주의 4남 형창이 어머니 하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문장의 흐름에서 쓰는 이의 감정까지도 읽게 한다. 이는 음운체계에 따라 썼던 선조 이전의 글씨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것으로 조형체계의 종속화에서 비로소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초··종성 또는 글자와 글자의 종속화는 한글의 형태를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변환을 추구케 하였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의 한글서예

 

조선 후기 180여 년간은 조선시대 제2의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 시기로부터 외척의 세도정치에 휘말렸던 순조·헌종·철종시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시기인 고종 전기, 새로운 개방시기인 갑오경장 이후 고종 후기, 그리고 조선시대가 끝을 맺는 혼란시기인 순종 4(1910)까지인데, 이 시기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면에 있어서 부흥에서 침체시기로 급락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한글문화·예술도 한글 보급·사용이나 서지학적 측면 또는 한글의 서예술화 등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거쳐 왔으나 한글이 언문으로 천대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큰 발전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 시기는 한문 서예 변천시기로 보아 원교 이광사(1705~77)가 왕희지체에 근원한 동국진체를 체계화한 시대이며, 이를 비판한 청나라의 비학파 서론을 받아들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서론을 체계화하거나 금석학을 연구하는 등 추사서예의 번영시대였다. 이어 서 청나라와의 교류가 왕성해지면서 한문서예는 변영시기를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개화기를 전후하여 이상적(1804~65) 같은 중인 계층 서예인들의 활동도 있었다.

한문 서예사를 고찰하는데 명필가들의 육필인 필사류 자료, 금석문의 글씨, 각종 판본류의 글씨 등이 연구대상이 되듯이 한글서예사도 필사류, 판본류의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여야 된다.

한글 판본류 자료로는 목판인쇄본, 목활자인쇄본, 금속활자인쇄본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필사류 자료보다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필사류 자료에는 궁중에서 쓰인 등서본과 편지글들이 있고, 또한 일반계 층에서 쓰인 필사본과 편지글들이 있으나 정식 작품으로 제작된 것은 현존하는 것이 없어서 한글 서예사를 고찰하는데 자료의 빈곤을 느끼게 된다. 다행히 판본류에 나타난 글씨는 역대 명필가나 사자관이 쓴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서예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영조 시기 (1725~76)

문예 부흥기와 한글문화

 

영조 원년 1725년부터 말년인 1776년까지의 재위 기간 52년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세종 시기와 더불어 제2의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다.

영조는 조선 역대 왕 중에 가장 오랜 기간을 재위하였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문예부흥에 힘썼는데 이중 인쇄술을 발전시켜 많은 전적(典籍)을 직접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고 전적간행에 필요한 활자를 개량하는데 당대의 명필가의 글씨를 활자체로 쓰도록 한 것은 서예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때에 만들어진 한글 활자로는 1734년에 나온 경서 정음자 병용(經書正音字竝用) 한글 나무활자와 1772년에 나온 임진자 병용(壬辰字竝用) 한글 나무활자 등이 있는데, 이 활자를 이용하여 한글관계의 많은 책을 찍어냈다.

문예전성기인 이때에는 청구영언』『춘향젊』『숙향전』『이륜행실도등 한문, 한글 문예지, 번역서, 교양서 등을 많이 출간하였다. 특히 한문책을 번역하기 위하여 사역원을 두기도 했다. 영조 시기의 번역활동, 즉 언해사업은 많은 종류의 책을 간행하였는데 책 이름머리에 어제(御製) 라는 이름을 붙였고 끝부분에는 언해(諺解)라는 서명을 쓰게 하였다. 그 예로 어제여사서언해』『어제소학언해등이 있다.

 

이렇게 언해사업을 펼쳐서 복잡한 자모음 쓰기를 간소화하여 한글 의 간편화시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글자의 받침으로 쓰던 이 없어지고 ,,,,,,7 종성만 쓰는등 새로운 맞춤법이 사용되었다. 이때의 한글은 서예글씨가 아니라 주로 실용을 목적으로한 일기나 편지, 소설 베끼기 등에 사용되었다.

판본류 전적 간행과 한글 서체의 개발

영조조에는 수많은 한글 언해본이 발간됨 에 따라 1734년에 경서 정음자 병용 한글자, 1772년에 임진자 병용 한글자 등 활자가 새로 개발되었다. 이 활지들은 조선 중기의 한글 인서체와는 그 자형이 달랐다. 조선 중기보다 점획이 부드러워지고 자모음 크기의 차이를 더 많이 나타내어 상하로 긴 자형이 이루어졌다. 조선 중기에 나 온 글자는 가로서선을 대체로 수평으로 나타낸 것에 비하여 이 시기부터는 오른쪽 부분을 약간 올려서 사향지게 나타내는 특징이 보이기 시작 하였다.

이같이 변화된 한글 관계 판본류 전적으로는 조선에서 낸 왕실판본, 사찰에서 낸 사찰판본, 서원에서 낸 서원판본, 지방에서 낸 방각본, 사가에서 낸 사가본 등 이 있는데 활자나 판본의 자체가 다양하다.

 

사대부가의 편지글씨와 조화체

 

정조 시기에는 많은 판 본류의 서적들이 남아 있어 한글 글씨체를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만 필사류의 자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김노경(西堂 金魯敬, 1766~1837)의 편지 글씨와 그의 부인, 즉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생모인 유씨(兪民)의 편지 글씨, 그리고 정약용의 글씨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노경이 25세때 자당 윤씨에게 쓴 편지김노경은 추사의 부친으로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西堂)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180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과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나온 유당의 편지 글씨는 과거급제 이전 정조 15(1791) 25세 때 말직에 근무할 당시 어머니 윤씨에게 모친을 잘 모시지 못함에 대한 내용을 쓴 서간문이다. 또 노년인 1823년에 쓴 편지 글씨는 한문의 필의를 살려 각 글자를 계속 연결하여 힘차게 쓴 글씨이다.

1791년에 쓴 편지 글씨의 사연은 전부 한글로, 쓴 날짜와 이름만을 한자로 썼고 글씨체는 일반적으로 연이어 흘려 쓴 펀지 글씨와 다르게 또박또박 정자 또는 반흘림으로 쓰는 등 보기드물게 띄어쓰기를 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렇게 쓴 글씨 중에는 두세 글자씩 연결된 흘림체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글씨는 그가 50대 후반에 쓴 편지 글씨와는 아주 다른 느낌을 풍긴다. 세로서선은 입필 부분을 굵고 뭉뚝하게, 송수필 부분을 갑자기 가늘어진 송곳모양의 직선형으로 힘차게 썼으며, 종모음자에서 왼쪽 자음을 오른쪽 모음의 세로서선 중간 또는 아래 위치에 결구시켜 쓴 것이 특정이다. 글자의 결구형식을 보면 횡모음으로 이루어진 글자는 ,,,,등의 가로서선을 극히 짧게 나타내어 세로 방향으로의 흐름을 더욱 빠르고 유연하게 나타냈다.

추사 김정희의 생모이며 김노경의 부인인 유씨(兪民)가 김노경 25세 때인 1791년에 남편에게 쓴 편지는 앞에서와 같이 김노경이 외지에서 살고 있을 때 남편의 의복조달 관계에 대한 내용을 주로 쓴 것 이다.

궁체의 서간체 흘림필법으로 유창하게 흘려 쓴 수준 높은 글씨이다. 오히려 같은 시기에 쓴 남편의 편지글씨보다도 글씨의 조형미가 뛰어나 보인다. 글자의 자모음 획간의 대소·조세의 표현, 자연스런 글자간의 연결서선, 자모음을 생략화한 획형 등 모두가 서간체로서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아낸다. 특히 앞의 글자와 연결되어 표현된 의 생략된 획형, 굽혔으나 힘차게 펴지는 듯하면서도 유연한 세로서선 등이 남필인 추사 김정희 서간문과 흡사한 느낌을 풍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購, 1762~1836)은 자하 신위, 유당 김노경과 비슷한 시기의 사람으로 수많은 책을 저술한 대실학자이며 한문글씨 명필가이다. 그가 70세인 순조 31(1831)에 쓴 한문 편지 중의 한글 문구는 한문의 필의를 살려 소박한 맛이 나게 조화롭게 쓴 것으로 평가된다.

 

십구사략언해순조 · 헌종시기 (1801~49)

사가 목판, 활자본 발간과 한글 서체의 다양화

 

순조 · 헌종 시기에는 관 주도의 판본류의 전적보다는 개인 또는 상업적인 책들이 많이 나왔다. 앞에서 밝혔듯이 1816년에 박종경 개인이 만든 전사자 병용(全史字竝用) 한글자가 나왔고, 1810년에몽유편을 찍은 장혼이 글씨를 써서 만든 장혼 한글자본이 나왔다. 또 지방에서는 대구지방의 달성방각본, 서울지방의 경판방각본, 전주지방의 완산방각본이 나와서 글씨체가 매우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주요 문헌은 다음과 같다

태교신기언해(胎敎新記諺解)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 천자문(千字文) 신간증보삼략직해 ( 新刊增補三略直解) 삼서삼경(三書三經) 몽유편(夢喩編) 대학언해(大學諺解) 중용언해(中庸諺解) 척아윤음조웅전(趙雄傳)

 

궁중 · 일반 언간 글씨의 성숙, 발전

 

서기이씨의 글씨순조 · 헌종 시기에는 숙종 때부터 펴기 시작한 궁체가 더욱 성숙한 발전을 하였다. 특히 궁중에서 언해본의 활용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각종 소설류의 책을 베끼는 일, 편지를 대필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이것을 전문적으로 언문글씨로 필사하는 서사상궁까지 두어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쓰는데 더욱 노력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궁중에서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와 딸 덕온공주가 궁체의 흘림을 잘 썼고, 익종(1809~30, 순조 아들)비 신정왕후의 언간을 대필한 천 상궁이나 서기 이씨가 궁체를 아름답게 잘 썼다. 그리고 헌종의 비 명헌왕후 홍씨의 편지글을 대필한 현상궁은, 조선 말기의 궁체를 잘 쓴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일반인들의 글씨 중에는 추사 김정희와 1824년에 언문지를 지은 류희(1773~1837)부인 권씨가 쓴 언간 등이 당시 사대부 집안의 언문체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1789~1857)가 직접 쓴 언간글씨는 글자 간에 부드럽고도 자연스러운 연결서선을 나타냈고, 남필다운 힘찬 맛이 나게 쓴 수준 높은 어필이다. 글자 크기의 대소 변화가 적고 대체로 키가 작은 자형의 글씨를 썼으며, 세로서선의 입필부분 획형을 강하게 각이 진 형태로 나타냈다. 이 편지 글씨에는 상궁이 대필한 것이 아닌 왕비의 친필임을 증명하는 덕온공주 아들 윤용구(石村 尹用求, 1853~1939)의 날인과 윤용구의 딸윤백영(1888~1986)의 글씨가 쓰여 있다.

순조의 딸 덕온공주 즉 서화가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윤용구의 어머니는 서사상궁들의 궁체 못지 않게 글씨를 잘 썼다. 그의 손녀 윤백영 역시 궁체를 현대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명필가문의 3대라고 할 수 있다. 남아있는 글씨로 춘년이란 친필이 있는데 이 글씨는 큰 글자, 작은 글자를 같이 배열하였고, 글자의 대소변화,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필력,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느낌이 나도록 조형미가 뛰어나게 쓴 궁체로 평가된다.

익종의 비 선정왕후 조씨(1808~90)의 큰방 천상궁은 조선 말기 궁중왕실 편지 글씨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정도로 봉서체(편지글씨체)를 잘 썼다. 그리고 신정왕후 큰방상궁 천씨의 글씨를 대필하던 서기 이씨는 국문(한글)글씨를 잘 쓴 조선왕조 오백 년 제일가는 명필 이라고 사후당 윤백영이 그의 글씨에 해제하였듯이 아름답고 짜임새 있는 궁체를 잘 썼다. 서기 이씨의 글씨는 여성다운 부드러운 맛이 있으면서도 힘찬 맛을 풍긴다. 즉 글자간의 힘찬 연결서선에 대한 표현, 글자간의 대소표현이 한글 흘림글씨의 멋진 맛을 그윽하게 나타낸다.

현종의 후궁 경민순화궁 큰방상궁인 현씨의 글씨헌종의 후궁 큰방의 상궁인 현상궁은 자모음의 획형을 극히 생략하여 키가 작은 느낌의 흘림글씨를 썼는데 대단히 힘찬 필력을 나타내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현상궁은 헌종의 계비 명헌왕후 홍씨의 편지글도 대필하는 등 궁인으로서 아름다운 글씨를 많이 썼다.

궁중에서 궁체를 많이 사용한 반면에 일반인들은 궁체와 다른 느낌의 자연스런 글씨를 많이 썼다. 남성들이 쓴 언간문은 대개 딸, 며느리, 부인, 모친 등 여성들에게 많이 쓴 것으로 나타났다.

추사 김정희는 한문 서예 못지않게 한글 편지 글씨의 서체미도 대단히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언간은 181833세 때 쓴 편지로 부터 59세인 1844년에 제주유배지에서 충남 예산에 사는 며느리에게 쓴 편지 등 40여 편이 현존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중 38편이 부인에게 쓴 것, 2편이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김정희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추사의 언간은 용지 크기가 세로폭이 2O~3Ocm이고, 가로폭은 짧은 것은 35cm, 긴 것은 102cm나 되며, 1 편의 글자 수는 200~650여 자가 되고, 대부분 글자 사이를 연결하여 쓴 완전한 흘럼체이다. 문장의 끝부분에 쓴 날짜, 그리고 수결, 이름, 자 등을 썼다. 이 글씨는 서선의 방향이 대부분 사향이고 글자의 크기를 조화롭게, 문자간의 연결서선을 비백으로 잘 나타냈다. 또 자모음 획형의 생략과 조세의 변화, 방향의 자유로운 운필 등의 표현을 한문 행서의 다양한 표현 못지않게 나타냈다.

조선시대언문지의 작가 류희(1773~1837)의 재취부인인 안동 권씨가 남긴 편지 글씨는 일반 언문지와 같은 형식으로 여백부분에까지 돌려가며 빽빽하게 썼다. 키가 작은 자형의 이 언간은 많이 흘려쓰지 않았고, 부드럽고 여성다운 맛이 풍긴다. 종모음자의 세로서선을 굽은 획형으로 운필하여 나타낸 것은 추사 김정희 서간문 한글편지의 획형과 유사하다. 1700~l800 년대의 모든 서간문은 배자 · 글씨체 ? 문장서술형식 등에서 공통점이 많이 나타난다. 김노경이 1791년에 쓴 편지 규격(283 × 242cm)과 류희 부인의 편지 용지 규격(283 × 242cm)이 유사한 것을 그 예로 볼 수 있다.

 

철종 · 고종 시기 (1850~93)

세도 · 수렴정치와 한글 침장기

 

이 시기는 조선조 25대 철종 재위(1850~63) 14년간과 고종 재위(1864~93, 갑오경장 직전) 30년 간이다. 고종 재위 30 년 중에는 대원군 섭정기간 10(1864~73)이 포함된다.

철종 재위기간은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1789 ~1857)가 수렴청정하는 등 안동 김씨가 섭정하였고, 민란이 잇따라 일어났던 혼란기였다. 이어서 영조의 현손이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재황(載晃, 1852~1918)이 어린 나이에 고종으로 즉위하였으나 부친이 10년간 섭정하면서 전국의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등 폭정을 하였고, 그 후 고종 19(1882)에 임오군란, 고종 21(1884)에 갑신정변 등 국내의 사정이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1894년 갑오경장 전까지는 쇄국정책에 의한 어두운 시기였다.

한글의 보급, 활용의 시기로 보아 한글의 침장기였고, 인쇄·출판문화 역시 쇠퇴기였다고 볼 수 있다. 철종 8(1857)에는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가 불타는 바람에 새로 재주 정리자와 삼주 한구자를 주조하였고, 고종 17(1880)에 최지혁의 글씨체로 신연활자(新鉛活字)를 만드는 정도였다.

 

구활자 말기와 새활자체의 등장

 

우리나라 책 출판의 근대 인쇄의 효시인 최지혁의 글씨체로 만든 한글 선연활자, 즉 납활자가 처음 나와 한불사전(1880), 한어문전(1881) 등을 출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3 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신연활자를 도입하여한성순보를 찍는 등 출판문화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선연활자는 서예 측면에서 볼때에는 그려서 만든 언서체이기 때문에 활용가치가 없는 편이다.

나무 목판으로 찍어낸 책으로는 태상감응편도설언해』 『태상감응편』『삼성훈경』『경신록언해』『중용언해등이 나왔고, 방각본으로는춘향전』『삼국지』『유충열전등이 나왔다.

 

궁체등서본과 서간체의 완숙기

 

1800년 후기는 궁중서체 발전의 절정기이며 결실기라고 할 수 있다. 숙종시기경부터 시작된 궁체는 영·정조시기를 거치며 더욱 발달되었고, 순조 ~ 고종시기에 이르러 등서본 글씨나 서간체 글씨가 완숙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등서본의 궁체는 연대와 필사자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서간류의 궁체는 시기나 필사자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l800년대 후기 익종·신정왕후에 소속된 천상궁과 서기 이씨, 헌종 시기의 현상궁, 고종 시기의 하상궁과 서희순상궁 등이 궁중서간문을 잘 쓴 서사상궁들이었다.

후수호전이같은 궁중글씨 중에서 등서본은 1981년부터 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 소장하기 전까지는 창경궁의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었다. 장서각은 순종 2(1908) 황실 직속 도서관으로 개관한 이래 1969년까지 낙선재의 한글 소설류와 칠궁 등 여러 서고의 것을 통합하여 4718책을 소장 하였었다. 이중 궁체 전적은 200여 종 2400여 책이 있었다.

이와 같은 등서류 궁체 중에서 한 면에 10행씩 배자하여 정연하게 쓴옥원중회원 권지육은 정자체 필사본 중 가장 아름답게 쓴 것으로 평가된다. 옥원중회연은 부드러운 듯하면서 강한 서선, 자모음자간의 짜임새 있는 배획, 서선 굵기의 조화로운 표현등 문자의 조형미와, 배자의 정연미등이 뛰어난 필사본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흘림체 필사본으로는옥원중회연권지십팔』 『후수호전등이 있다.

조선말기 궁중서체 중에서 왕족의 편지글을 상궁들이 대필하여 쓴 서간류의 글씨에는 순조, 익종, 헌종, 철종, 고종, 그리고 여러 왕후, 흥선대원군, 덕온공주(윤용구의 모친)등 왕족끼리 주고받았던 편지글씨가 있다. 윤용구 댁을 중심으로 생질부, 시고모, 내종사촌간에 오고 간 편지가 윤용구댁에 많이 보관되었던 것이 윤용구의 딸 사후 당 윤백영을 거쳐 오늘날 공개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글씨를 윤백영이 더욱 익혀 오늘날 궁체쓰기의 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고종조 시기에 명성왕후 민 씨의 서간문을 대필하여 아름다운 글씨를 썼던 상궁에는 하상궁, 서싱궁(서희순)등이 있다.

대원군의 편지글씨이 시기에 궁체의 등서체나 서간체가 아닌 서풍으로 쓴 사대부나 일반인들이 쓴 글씨는 한문을 썼던 필의를 살려 쓴 것이 대부분이다. 한문과 사군자분야의 대가로 손꼽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98)의 한글 필체의 특징은 임오군란(1872~76)때 청국으로 납치당하여 간 후 본가 의 부인과 아들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72720일에 중국 천진에서 아들 재연에게 쓴 편지, 18721012일에 부인에게 쓴 편지, 18721019일에 아들에게 쓴 한글편지에는 한글의 힘찬 필력이 나타나 있다. 서선의 굵고 가늚의 차이를 많이 나타낸 획형과 곧고 굽은 서선의 조화로운 표현, 문자간의 힘찬 운필, 문자의 대소표현 등 한글 흘림의 조형미를 한껏 표현한 글씨이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언문이 많이 쓰였는데 한자의 필의를 살려 필법에 구애됨이 없이 시원하게, 그리고 강하게 문자의 대소변화를 주어 소박하게 쓴 글씨들이 지방 선비들 사이에서 많이 쓰였다.

 

고종 · 순종시기 (1894~1910)

개화기와 국문시대의 열림

 

갑오경장 이후 한문 존중의 시기를 벗어나 언문이란 말이 사라지면서 소설, 예술, 종교 등 각종 저서에 한글만을 쓰게 되는 한글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한글 보급·활용의 시기로 볼 때 한글각성시기(1894~1944)이고, 한글 명칭의 시기로는 국문시기(1894 ~1910)이며, 활자의 시기로는 새활자의 도입교체기(1864~1909)에 속한다.

한글 부흥기에는 구당 유길준(矩堂 兪吉濬, 1856~1914)이 유학 후 귀국하여 국문으로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고, 고종 32(1895)에는 법률?공문을 국문으로 본을 삼게 하였으며, 각종 교과서와 신문 등도 한글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 고종 32(1895)에는 학부 편집국에서 학부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교과서를 찍었고, 고종 35(1898)에는 재주 정리자 병용 한글자본으로 심상소학을 찍기도 했다.

 

방각본의 일반 보급과 서체의 변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1910년까지는 새활자 도입교체기였기 때문에 목판본, 목활자본, 금속활자본, 석인판본 등 다양한 판본류가 있고 글씨체 역시 딱딱한 인서체, 부드러운 필서체나 필사체, 새로운 명조체 등 다양한 자체들이 공존하였다.

고종 32(1895)에 나온국민소학독본』『조선지지』『만국지지의 글자는 조선개국 504년에 학부 편집국이 만든 학부 인서체 병용 한글자(목활자)와 후기 교서관 인서체 금속활자와 혼용해서 찍어낸 것이다. 이것은 한자나 한글의 자체가 고르지 못하여 산만한 느낌이 나며, 한글의 글자 서선이 너무 가늘고 기울기도 일정하지 않아 자모음간의 결구가 바르게 되지 않았다.

고종 33~35(1896~98)에 나온신정심상소학 1 은 철종 9(1858)에 주조한 재주 정리자 병용 한글자본으로 쩍은 것이다. 한자는 한자 명조체와 비슷하고 한글은 붓으로 쓴 듯한 느낌의 부드러운 글씨체로 나타냈다. 글자의 자형은 초주 정리자로 찍은 오륜행실도(1797) 의 한글자보다 가로쪽을 크게 하여 키를 작게 나타냈다. 자모음간의 결구상태는 약간 불안한 듯하고 서선의 기울기도 일정하지 못한 편이다.

목판본 중 방각본보다 다른 서체, 배자 등으로 찍어낸 국문정리(1897) 는 자음은 아주 작게, 모음은 크게 나타내어 현대 문자 명조체의 느낌이 나면서도 붓으로 쓴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가로서선의 오른쪽은 수평보다 올라가게, 세로서선은 수직으로 나타내되 글자에 따라 운필방향을 서로 다르게 나타내었기 때문에 정연하지 못하다.

또 목판 중 계선 안에 큰 글자, 작은 글자를 병행 배자하여 찍어낸경신록언해(1902)의 글자는 1880년에 찍어낸 것과 비슷한데 자형이 정사각형에 가깝고 모든 자모음의 가로서선은 수평으로, 세로서선은 수직으로 나타내어 정지된듯한 느낌이 나고, · · 종성 합자 의 종성 크기를 대체로 크게 나타냈다.

목판본 중 방각본은 1800년대 후기부터 출판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소설을 목판에 새겨서 출간한 방각본에 나타나는 글자는 자형이 서로 비슷하며 소박한 멋이 풍긴다. 이 시기의 방각본으로는화용도(1907~8),유충열전(1904),초한전(1907) 등이 있다.

 

궁체의 현대화 가교 역할

 

1894년 갑오경장부터 1910년 한일합방시기까지는 사후당 윤백영과 한서 남궁억 등이 한글궁체쓰기의 맥을 이었다.

윤백영은 가정에서 할머니 덕온공주, 아버지 윤용구, 어머니 정경부인에게 온익종비의 서간문, 헌종비의 서간문, 철종비의 서간문, 고종비의 서간문 등 궁중으로부터 온 왕비의 친필, 상궁의 대필서간문을 많이 접하기도 한 궁체의 마지막 산증인이었다. 특히 그는 한글 서예로서는 처음으로 낙관형식을 갖춘 한글 서예작품을 쓴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1921년에 궁체반흘림으로 쓴 송인종황제 권학서가 있다.

1398년에황성신문사장을 지낸 남궁억은 1910년에 한글을 바르게 쓸 수 있는신편언문체법을 썼다고 한다.

이같은 사후당 윤백영, 한서 남궁억은 궁체 쓰기 발전에 공헌한 큰 공로자로 손꼽을 수 있는 한글서예가였다.

 

이 글의 조선 중기 부분은 김세호씨의 연구 논문을 , 후기 부분은 박병천씨의 논문을 정리 · 요약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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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王羲之)307-365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자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句)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智鑒)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孫綽)·이충(李充)·허순(許詢)·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 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주요작품)

난정서(蘭亭敍)

난정서는 천하 제일의 행서로 여겨진다. 진(晉)나라 목제 영화9년(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는 사안등 41명과 함께 회계의 산음(山陰)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성대한 계사를 거행하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서 시를 지었는데 당시 나이 51세인 왕희지는 거나게 술을 마신 뒤 잠견지(蠶繭紙)에다 서수필(鼠鬚筆) 을 사용하여 단숨에 천고의 명작이라고 알려진 [난정서]를 썼다. 전문은 모두 28행으로 전체의 글자수는 324자이다. 작품 전체가 굳세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충만되고, 종회의 형세의 변화가 무궁하며 행서에서 볼수 있는 기복과 변화, 강한 리듬감, 형태의 다양한 변화, 점획의 서로 상응하는 것들이 충분히 표현된 작품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희지의 난정서는 그의 7대손인 지영에게 전해졌으며, 지영이 다시 제자인 변재에게 이를 물려 주었다. 당 태종은 어사인 소익을 변재가 있는 곳으로 파견하여 그를 속여서 [난정서]를 취한 다음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에게 임모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진본은 당태종의 부장물이 되었으며 지금 전해지는 것은 당나라때 임모본이 전해진다.


십칠첩(十七帖)

이 법첩 첫머리에 십칠일선서(十七日先書)가 나오므로 법첩 전체를 십칠첩으로 일컬었다. 옛날부터 초서(草書)의 전형으로 존중되었으며, 왕희지 초서 연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자료이다.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은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그 수집에 전력을 다하였고, 그는 왕희지의 글씨 3,000여 장을 모아 이를 분류 정리하여 80첩을 만들었다. 십칠첩은 그 중의 하나로, 일민첩(逸民帖)을 비롯, 29점이 수록되어 있다.

 

 

 


서예사적 가치

왕희지는 중국 서예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예가라면 누구나 할것없이 왕희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수 있다.
천하제일의 "난정서"를 비롯하여 왕희지의 작품 또한 어느 누구도 따라 갈수 없는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서예가 왕희지는 앞으로도 서예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참고서적

난정서(석곡실상해법서선5):이화출판사
난정서(1974년) 서울:왕서각
서예기법시리즈(1973) 서울:시청각교육사
행서 난정서 서울:우람문화사
왕희지난정서(1975) 송원문화서 
 
 

 

 신룡본난정서
 

왕희지가 썼다는 불후의 명작 <<난정서>>는 지금 임모본(진본을 보고 배껴서 쓴 글)은 남아 있지만, 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 왕희지가 <<난정서>>를 가전의 보물로 대대로 전해주고, 왕희지의 7대손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지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후손을 남기지 않았으며, 왕희지의 <<난정서>>를 제자인 판재화상(辦才和尙)에게 전했다고 한다.

 

2. 당나라 초기에 들어, 당태종 이세민은 왕희지의 글을 매우 좋아하여 전국의 왕희지의 글씨를 수집하고, 왕희지의 글을 가지고 서예를 연습하였다. 특히 <<난정서>>의 진본은 매우 귀하게 여겨 여러차례에 걸쳐 높은 대가를 내걸고 진본을 구하였으나, 얻지를 못하였다. 나중에 <<난정서>>의 진본이 회계의 변재라는 화상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당태종은 그에게서 <<난정서>>진본을 빼앗아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난정서>>가 당태종의 사망시 그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때에 이러한 내용을 기재한 글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유송(柳悚)의 <<수당가화(隋唐嘉話)>>라는 글인데, 거기에 의하면 "왕우군의 <<난정서>>는 .... 제자인 중 변재가 얻었다. 태종이 진왕이 된 후에 탁본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여 고가를 걸고 구했으나 결국 얻지 못하였다. 나중에 변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소익을 월주로 보내서 얻도록 하였고, 무덕4년에 진왕 이세민의 손에 들어왔다. 정관 10년 탁본 10개를 만들어 가까운 신하들에게 선물하였다. 황제가 죽자, 중서령 저수량은 난정은 선제께서 아끼시던 물건이니 세상에 남겨둘 수 없다고 하고 비밀리에 소릉(당태종의 능)에 묻었다."

 

또 하나는 <<태평광기(太平廣記)>>인데 내용은 수당가화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정관시대에 태종은 이왕의 서법을 뱅고자 하였고, 진본, 모사본이 많이 있었으나, 오직 난정서만 구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변재에게 있는 것을 알고 3번이나 보여달라고 하였으나, 변재는 전란중에 잃어버려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을 고하였다. 방현령이 감찰어사 소익을 보내어서 지혜로 이를 얻게 하였다. 소익은 신분을 감추고 낙척서생인 것처럼 하여, 변재에게 접근하여 바둑을 두고 시를 읊었고, 글과 그림을 같이 하며 망년지교가 되었다. 나중에 변재가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물건들을 자랑하며 서까래에서 난정서 진본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소익이 후에 몰래 난정서 진본을 꺼내서 장안으로 가지고 왔다. 태종은 몇개의 탁본은 태자, 여러 왕, 가까운 신하에게 주었다. 임종때 이치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한테 한가지 물건만 부탁하자. 너는 효자이니, 내 말을 어기지는 않겠지. 어떠냐"라고 하며 난정서를 원했고, 난정서 진본은 소릉에 부장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변재의 제자인 원소(元素)가 영흥자 지영선사의 친척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두 책의 내용은 비록 구체적인 점에서는 약간 다르지만, 대체로 같으며, 특히 당태종의 소릉에 부장되었다는 점은 완전히 일치한다.

 

3. <<신오대사. 온도전>>에 따르면, 후량의 요주절도사인 온도는 소릉을 도굴했다고 한다. "온도는 ... 종왕의 필적을 보니 종이와 글씨가 새 것과 같았고, 온도는 이를 취하여서 후세에 전하였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왕희지의 난정서는 온도에 의하여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4. 송나라 때의 채정의 발문을 보면 난정서를 부장할 때, 이세민의 누이와 여동생은 가짜로 바꿔치기를 하여, 진본은 세상에 남겨두었다고 한다. 이후에 진본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하여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수수께끼중의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5. 현재 전해지는 <<난정서>>는 모두 진본이 아니고, 석각본, 모본(摹本) 또는 임본(臨本)이다. 유명한 것으로는 "정무난정(亭武蘭亭)"으로 구양순이 진본을 보고 배껴서 ㄱ돌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북송시대에 하북 정무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정무난정이라고 한다.  "신룡본난정(神龍本蘭亭)"은 당나라때 모본에 '신룡'이라는 작은 도장이 찍혀있어서 신룡본이라고 한다. 당태종이 풍승소에게 명해서 쓰게 한 것이다. 이 신룡본은 송나라때 고종의 손에 들어갔다가, 원나라초에 곽천석이 얻었고, 나중에 항원변에게 넘어갔다가, 청나라때 건륭의 손에 들어갔으며,  현재 북경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蘭亭序

永和九年, 歲在癸丑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 又有淸流激湍, 暎帶左右. 引以爲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叙幽情.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聘懷, 足以極視聽之娛信可樂也.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晤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 欣於所遇, 蹔得於己, 快然自足, 曾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陏事遷, 感慨係之矣. 向之所欣, 俛仰之間, 以爲陳迹, 猶不能不以之興懷. 況脩短陏化, 終期於盡. 古人 云: "死生亦大矣." 豈不痛哉?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 爲虛誕, 齊彭觴爲妄作.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悲夫. 故列叙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동진 永和 연간 九年 癸丑 삼월 삼일에 會稽郡 山陰縣의 蘭亭에 祓禊를 하러 모였다. 뭇 어진 사람들과 젊은이와 어른들이 다 모였다. 이 곳은 산과 등성이가 높고 숲이 무성하고 대나무가 수려하며 또 맑게 흐르는 냇물과 급한 개울이 좌우로 흘러 아름다운 경치가 비치고 있다. 개울물을 끌어 술잔이 흐르는 물길을 만들고 거기에 차례로 둘러 않으니 비록 사현과 관현의 성대한 준비는 없어도 한 잔 술에 시 한수를 읊으니 이 역시 흉금을 털 놓고 그윽한 정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 날은 하늘이 맑고 기온이 청명하고 봄바람이 온화하고 산뜻하다. 머리를 들어 우주의 광대함을 살피고 고개를 숙여 만물의 무성함을 살핀다. 이에 눈으로 사방을 두루 바라보고 회포를 폄으로써 족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다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대저 사람들의 교류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데, 혹자는 마음속의 품은 정을 실내에서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혹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에 감정을 의지하여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아니 하고 방종하기도 한다. 비록 좋아하고 싫어함이 서로 많이 달라서 혹은 고요함을 혹은 움직임을 좋아함이 서로 달라서, 사람들이 사물로 인해 기쁨을 찾았을 때는 잠시 득의양양하여 즐거움에 만족하여 장차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던 사물에 대해 권태로움을 느끼게 되면 그 마음이 상황에 따라 변화하여 감개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되면 지난날 기뻐했던 일들이 머리를 드는 잠깐사이에 옛 자취가 되고, 그것 때문에 감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물며 길고 짧은 생명은 자연의 조화에 따라 정해지고 마침내는 다하고 마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죽고 사는 것은 큰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매번 옛 사람들의 감회가 일어나 연유를 살펴보게 되면 나의 경우와 모두 한결 같이 부합한다. 일찍이 고인의 문장을 읽으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감회의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으니, 진실로 살고 죽음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팽조와 같이 장수하는 것과 20세에 요절하는 것을 같이 본다는 것이 망령된 행동임을 알겠다.

 

   뒷날의 사람들이 오늘을 보는 것은 또한 지금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일지니 정말 슬프도다. 그래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순서대로 적고 그들의 시문을 기록 하는 것이다. 비록 세대가 바뀌고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감회를 일으키는 이치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훗날 이 글을 읽게 되는 사람 또한 이 문장에 대한 감회가 있을 것이리라!

 

 

  永和九年,即癸丑年,三月之初,(名士们)在会稽郡山阴县的兰亭聚会,为的是到水边进行消灾求福的活动。许多有声望有才气的人都来了,有年轻的,也有年长的。这里有高大的山和险峻的岭,有茂密的树林和高高的竹子,又有清水急流,(在亭的)左右辉映环绕。把水引到(亭中)的环形水渠里来,让酒杯飘流水上(供人们取饮)。人们在曲水旁边排列而坐,虽然没有管弦齐奏的盛况,(可是)一边饮酒一边赋诗,也足以痛快地表达各自幽雅的情怀。这一天,天气晴朗,和风轻轻吹来。向上看,天空广大无边,向下看,地上事物如此繁多,这样来纵展眼力,开阔胸怀,穷尽视和听的享受,实在快乐啊! 人们彼此相处,一生很快就度过。有的人喜欢讲自己的志趣抱负,在室内(跟朋友)面对面地交谈;有的人就着自己所爱好的事物寄托情怀,不受任何约束,放纵地生活。尽管人们的爱好千差万别,或好静,或好动,也不相同,(可是又都有这样的体验:)当他们对所接触的事物感到高兴时,一时间很自得,快乐而自足,竟不觉得衰老即将到来;待到对于自己所喜爱的事物感到厌倦,心情随着当前的境况而变化,感慨油然而生,以前感到欢快的事顷刻之间变为陈迹了,仍然不能不因此感慨不已,何况人寿的长短随着造化而定,最后一切都化为乌有。古人说:“死和生也是件大事啊!”怎能不悲痛呢? 每当我看到前人发生感慨的原由,(跟我所感慨的)如同符契那样相合,总是面对着(他们的)文章而嗟叹感伤,心里又不明白为什么会这样。(我)这才知道,把生和死同等看待是荒诞的,把长寿和短命同等看待是妄造的。后人看待今天,也像今人看待从前一样,真是可悲啊!因此我—一记下参加这次聚会的人,抄录了他们的诗作。尽管时代不同情况不同,但人们的情致却是一样的。后代的读者读也将有感于这本诗集吧。


*주*

1) 蘭亭序; 왕희지의 문장. 당시 난정에 모였던 사람들의 시문을 모든 [蘭亭集序]

2) 왕희지; 晉나라 사람, 서예에 능하여 서성이라 불림, 자는 逸少

3) 永和; 동진 穆帝의 연호, 영화9년은 서기 353년

4) 暮春之初; 음력 3월 3일

5) 會稽; 중국 會稽郡 지금의 浙江省 紹興縣

6) 山陰; 山陰縣 지금의 浙江省 紹興縣

7) 蘭亭; 浙江省 紹興縣의 서남방 삼 십리 지점의 蘭渚에 있는 정자

8) 禊; 중국 풍속에 삼월 上巳에 흐르는 물에 가서 목욕을 하고 묵은 때를 씻음으로써 상서롭지 못한것을 없애는 행사, 祓禊라고 한다.

9) 流觴曲水; 옛 사람들이 계곡이나 정자나무 밑에 작은 물길을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고 거기에 술잔을 띄워서 차례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우리나라 경주 포석정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임

10) 品類; 만물

11) 信; 참

12) 晤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하다.

13) 舍; 捨의 뜻.

14) 彭; 彭祖, 장수한 사람의 대표적 인물

20) 觴; 요절

 

 

 

동진 영화 9년(기원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산음(山陰)에 거주하는 일부 문사들과 함께 난정으로 가서 수계(修禊)를 거행했다. 참가한 사람들은 흥이 일어 많은 시편을 썼다. <<난정서>>는 바로 왕희지가 이 시집을 위하여 쓴 서문의 원고이다. 서문은 당시 남방사족계층이 신봉하던 노장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문학사상으로도 일정한 지위를 차지한다.

 

전문은 � 28행, 324자이다. 장법, 결구, 필법이 모두 완벽하다. 왕희지의 행서는 당시에 독보적이었으며, 후인들에 의하여도 "우군(왕희지)의 자체는 옛법을 한번 바꾸었다. 그의 웅혼하고 빼어난 기운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고금이래로 그의 글을 모범으로 삼는다" 역대의 서예가들은 <<난정서>>를 천하제일행서로 추앙했다.

 

<<난정서>>에 관하여는 세간에 형형색색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왕희지는 이 글을 쓰고 난 후에 자기의 이 작품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다시 몇 편을 써보았는데, 모두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천고의 걸작을 가보로 후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당태종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여기에는 당태종이 소익을 파견해서 난정서를 빼앗았다는 전설이 있다.

 

당태종은 왕희지의 서법을 추앙해서, 신하 조모, 풍승소등으로 하여금 임모본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는 이 임모본 또는 석각탁본을 일부 황족이나 총신에게 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에 이 "진본보다 한 단계 낮은" 임모본도 낙양의 지가를 높이게 하였다. 이외에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의 명가들의 임모본도 후세에 전한다.

 

그러나, 원적은 전설에 따르면 당태종이 죽을 때 순장품으로 넣어서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소위 <<난정서>>는 당나라때의 임모본을 제외하고, 석각탁본도 매우 진귀하다. 가장 전기적인 색채를 지닌 것은 <<송탁정무난정서>>이다. 임모본이건 탁본이건, 모두 왕희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하다. 동시에 역대서법을 연구하는데에도 진귀한 자료이다. 중국서법전적에는 <<난정서>>에 관한 자료가 아주 많다.

 

<<난정서>>를 왕희지가 쓴 것인지에 대하여는 역대이래로 논쟁이 많다. 청말과 60년대에는 상당히 격렬한 논쟁도 벌어졌었다. 위의 사진에 나온 것은 풍승소의 임모본으로 세칭 <<신룡본난정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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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별자모(泣別慈母)-신사임당(申師任堂)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인자한 우리 엄마 흰 머리 되어 강릉(임영)에 계시고
이 몸 서울로 홀로 떠나는 심정이여
어머니 계신 북촌으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흰 구름은 날아 내리고 저문 산은 푸르기만 하네

 

魚糧水積三千里 물고기 먹이는 물 속 삼천리에 쌓여 있고,

雁路雲開萬里天 기러기의 길은 구름 속 만리 하늘에 열려 있네

鶴倚天高任意飛 학은 높은 하늘에 의지해 마음대로 나르고,

鯨知海闊無量飮 고래는 바다가 넓어 한없이 마실 줄 아네

 

 

梅經寒苦 發淸香(매경한고 발청향)
人涉艱難 顯其節(인섭간난 현기절)

 

 

門無客到維風月(문무객도유풍월)  
案有書存但老莊(안유서재단노장)
홀로 사는 외로운 집에 바람과 달빛만이 찾아오고
책상 위에 있는 서책은 단지 노자와 장자 뿐이라네.

 

 

樹慾靜而 風不止(수욕정이 풍부지)
子慾養而 親不止(자욕량이 친부지)

 

 

淸風明月用不竭(청풍명월용불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써도 다하지 않고
高山流水情相投(고산류수정상투)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은 마음이 서로 투합한다.
長生不老神仙府(장생불로신선부)  늙지 않고 오래 사니(불로장생) 신선의 저택이요,
如天同壽道人家(여천동수도인가)  수명이 하늘과 같으니 도인의 집이로다.
山中人惟知自樂(산중인유지자락)  산에 사는 사람 오로지 스스로 즐거움을 알고
天下事不在多言(천하사부재다언)  천하의 일이란 많은 말에 있지 아니하다.
壽似春山千載秀(수사춘산천재수)  수명은 봄산과 같이 천년을 빼어나고
福如滄海萬年淸(복여창해만년청)  복됨은 창해와 같이 만년을 맑구나.
山勢盤陀眞是畵(산세반타진시화)  산세는 구불구불 진실로 그림이요,
泉流宛委遂成書(천류완위수성서)  샘물 흘러감도 구불구불 마침내 글씨를 이룬다

 鯨知海大 無量飮(경지해대 무량음)  鶴信天高 任意飛(학신천고 임의비)
고래는 바다를 알기에 바다 넓이를 알기에 무한량 바다를 마셔 들이고  
학은 하늘 높음을 믿기에 마음껏 하늘을 날라 다닌다

 

청풍명월본무가(淸風明月本無價)
근수원산개유정(近水遠山皆有情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본디 가치가 한정이 없고,
가까운 강과 먼 산은 모두가 다정하다

 

月白雪白天地白(월백설백천지백)
달도 희고 눈도 희고 하늘과 땅도 희고
 - 공허스님 -
 
山深夜深客愁深(산심야심객수심)
산도 깊고 밤도 깊고 나그네의 시름도 깊구나.
  - 김삿갓 -

 

夕陽歸鳥投深麓석양귀조투심록
煙火行人望遠村연화행인망원촌

夕陽석양에 잠자리 찾아가는 새는 山麓산록의 깊은 숲속으로 사라지고

길가는 나그네는 저녁 연기 올라오는 먼 마을을  찾아가네.

 - 王守仁왕수인-

 

採藥忽迷路 千峰秋葉裏(채약홀미로 천봉추엽리)
山僧汲水歸 林末茶煙起(산승급수귀 임말다연기)

 

偶來松樹下 高枕石頭眠
우래송수하 고침석두면
山中無曆日 寒盡不知年
산중무력일 한진부지년

 

靑山如故人 江水似美酒
今日重相逢 把酒對良友.
청산여고인 강수사미주
금일중상봉 파주대양우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 勿使익塵埃
시시근불식 물사익진애

몸이 깨달은 나무라면마음은 밝은 거울의 틀이로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 앉고 때 끼지 않도록 하세.

 

(結廬在人境)(而無車馬喧)
오두막을 짓고 인경에 있으나, 수레, 말소리 시끄러움 없도다.

(問君何能爾)(心遠地自偏)
그대는 어찌 그럴 수 있나, 뜻이 머니 사는 곳도 절로 아득하다.

(採菊東籬下)(悠然見南山)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山氣日夕佳)(飛鳥相興還)
산 기운은 해가 지니 아름답고, 날던 새들 짝지어 깃을 찾아드네.

(此中有眞意)(欲辨已忘言)
이 가운데 참뜻이 있거늘, 하려 할 말을 잊도다.
 - 도연명 -

 

春去花猶在  天晴谷自陰  杜鵑啼白晝  始覺卜居深
춘거화유재  천청곡자음  두견제백주  시각복거심

봄은 가도 꽃은 있고 하늘은 개어도 그늘지는 골짜기.
한낮에 소쩍새 우니 사는 곳 깊기도 하여라.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 
소소낙목성 착인위소우 호승출문간 월괘계남수
 
우수수 낙엽지는 소리를 성긴 빗소리로 잘못 알아 
스님 불러 문밖에 나가보라 했더니 시냇가 남쪽 개울 나무에 달만 걸려 있다 하네
    - 정철(鄭澈) -

 

鄕路千里長 秋夜長於路 家山十往來 簷鷄猶未呼
향로천리장 추야장어로 가산십왕래 첨계유미호

 

 

 

花無十日紅人無百年壽 靑春夢中去白髮不時來
화무십일홍인무백년수 청춘몽중거백발불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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楷書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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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서의 기원
해서는 書體의 하나로써 올바르게는 楷書體라 해야 한다. 문자가 창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이라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것으로 殷代(은대)의 甲骨文字(갑골문자), 周代(주대)의 鍾鼎文字(종정문자)가 있다. 어느것이나 소박한 繪文字(회문자)이다. 秦代(진대)에 大篆(대전), 소전이 만들어지고 소전은 다시 略화 되어 예서가 되고 이것이 漢代(한대)에 들어서서는 速書에 적합하도록 近隸(근예)가 생겼다. 근예가 다시 간략화외어 소위 해서체가 되었다고 한다. 한대의 예서가 쇠퇴하여 삼국 시대로 들어서면서 찬보자비와 찬룡안비를 필두로 비로소 해서가 된다.

2. 해서의 특징
점획이나 형이 간결하고 분명한 소위 間架結構(간가결구)가 정돈된 서체이다. 따라서 가장 쓰기 쉽고, 읽기 쉬우며 실용서로서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해서는 이 서체 본래의 성격에서 스스로 정제, 엄정, 침착, 강건이라는 방향의 아름다움을 특질로 하고 있다. 해서의 점획은 하나하나가 명료하고 더구나 직선이므로 이것을 쓸때에 있어서도 현대 건축처럼 일획 일획을 차례차례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더구나 그 쌓아나가는 방식은 수평, 평형, 수직, 등분할 등의 원리에 의해 엄격히 해야 하는 것으로 그 결과도 엄정하고 더욱이 정제한 미가 표현되고, 침착 부동의 느낌이 강하게 나타난다. 또 한점 한획이 직선이므로 운필에 있어 한점 한획에 起筆(기필), 送筆(송필), 終筆(종필)의 삼요소를 뜻대로 가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하고, 따라서 沈靜(침정) 강건한, 힘에 찬 작품이 많다.

3. 해서의 書風(서풍)
해서는 정제의 아름다움을 각기 개성적으로 나타내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수종을 연대별로 들어보면 오랜 것일수록 소박하고 대범하며, 시대가 새로워짐에 따라 실용성이 강조되어 평행, 수직, 수평, 등분할의 원리가 엄정하게 구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서의 성립을 나타내는 유력한 자료는, 한대의 현존된 碑인 개통보사도석각, 石門誦(석문송), 禮器碑(예기비), 孔宙碑(공주비), 西狹頌(서협송), 曹全碑(조전비) 중에서, 공주비에 나타난 漢隸(한예)의 특징인 파책이, 삼국시대의 대표작인 谷朗碑(곡랑비-서기 272)에서는 한예 특유의 파세가 아주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서체적 구조는 아직도 남아 있어서, 한자의 형이 4각이며 점획은 수평, 등분할을 엄격히 지키고 점획의 굵기도 일정해 있다. 아리의 몇가지에 대해 알아보면서 해서의 서풍에 대해 좀더 알아보기로 하겠다.

4. 해서의 종류
1. 찬보자비와 찬룡안비
이 두비(이를 이찬이라 부른다.)를 놓고 과연 해서라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예서인가하는 문제는 아직도 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글자의 기필법(起筆法)이 해서와 같으므로 해서라고 말함이 옳을 것이다. 찬보자비는 중국의 운남서 변경에서 발견된 것으로 동진(왕희 원년 서기 405년)때 세워진 것이나 필자는 알 수 없다. 이와 풍격이 같은 것으로 458년에 세워진 찬룡안비가 있는데 이 두비는 해서의 시초가 되었다.

2. 九成宮醴泉名(구성궁예천명)
해서는 書法(서법)의 기본적인 結構(결구)와 用筆(용필)을 갖추고 있어서 각 서체의 서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중에서도 구성궁은 교본으로서 이상적이다. 字形(자형)이 크고 정규적이며 端嚴(단엄)하여 해서로서의 기본조건을 모두다 충족시키고 있다. 또 이것은 구양순의 대표작이며 背勢(배세)구성의 대표적 작품이기도 하다.
구성궁이란 唐帝室(당제실)의 離宮(이궁)의 이름으로서 挾西省(협서성)의 麟遊(린유), 즉 현재의 붕양부산중에 있었다. 이 離宮(이궁)은 隋(수)의 文帝(문제)가 조영한 것으로 隋(수)가 가꿔온 후에는 한동안 황폐되었던 것을 당태종이 개축을 하고 舊名(구명)인 仁壽宮(인수궁)을 구성궁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나 지세가 높은 탓인지 물이 결핍된 흠이 있었다. 언젠가 태종이 황후와 함께 궁내를 산책하는데, 우연히도 아지랭이 피는 곳이 있어 그곳을 파 보았더니 샘물이 솟아 나왔다. 그래서, 실로 당 제실의 덕에 따른 一大祥瑞(일대상서)라 하여 이 사실을 적어 碑에 刻(각)을 하게 된 것이다. 選文(선문)은 (위징)에게 명하고 구양순에게 명령하여 쓰게 한 것이 바로 九成宮醴泉名(구성궁예천명)이다. 구양순은 隋(수) 그리고 당나라 초엽에 걸친 서예가로 新舊(신구)에는 그의 사적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구양순(557-641)- 字는 信本(신본), 潭州(담주)의 臨湘(임상)사람. 구양순은 얼굴이 아주 흉측하게 못생겼으나 두뇌만은 비상하게 총명하여 책을 볼때면 언제나 네댓줄을 한눈에 내리 읽었다. 널리 학문을 닦아 수나라의 太常博士(태상박사)라는 벼슬을 살았다.
구양순은 처음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후에 서풍이 차츰차츰 변하여 필력이 힘차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구양순은 隋代에 자라난 사람이다. 書學을 깊이 연구하여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의 <黃庭經(황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더욱 貞觀初(정관초)에는 <蘭亭敍(난정서)>마저 배웠다. 따라서 結體(결체)가 晉法(진법)답게 건강하고 힘차고 또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南派(남파)의 특징이다. 그러나 구양순의 준엄하고 세찬 점, 즉 붓을 댈 때 면도날을 베고 도끼날로 찍듯하는 그 명쾌한 날카로운 맛은 분명히 北派(북파)의 영향이다. 그가 쓴 房彦謙(방언겸)의 碑(비)는 그가 북파의 書家(서가)임을 잘 보여준다. 그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범벅한 것 같은 서체, 칼을 꺾듯한 落筆法(낙필법)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점과 획의 符仰向背(부앙향배). 分合聚散(분합취산)이 힘의 균현에 맞고, 빽빽한 데, 빈 곳, 곧은 데, 흰 곳이 적절히 놓여져서 변화가 다채로워졌다. 그의 글씨는 복잡하든 혹은 단순하든지간에 견실하고 차분하다. 마치 몸을 굽히고 빨리 달리는 모습이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며 또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구양순書의 결체의 멋진 묘미가 바로 이런데 있다. 결국 그의 특징은 왕희지 父子의 기법에 北碑의 꿋꿋함, 그리고 漢隸, 章草(예서를 간략하게 쓴 초서의 別體) 등의 갖가지 요소를 섭취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낸 데 있다. 한가지 양식에 사로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자국이 둥글둥글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그는 이렇듯 南北 쌍방의 좋은 점을 겸해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書法藝術에 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九成宮醴泉名(76세의 書)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쓴 작품이다. 구양순이 특히 심혼을 기울여 휘호한 만큼 用筆 結構에 추호의 어김이 없다. 그 심경은 높고 품경은 아름답다. 구양순書의 碑중에서는 字體도 비교적 크고 字形도 가장 잘 정리 되어 있다. 물론 다른 碑들도 아름답게 짜여 있기는 마찬가지나, 字形이 背勢(배세)를 따르는 內逼法(내핍법)을 좇았기 때문에 점이나 획은 모두 가운데를 향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碑는 결체에 여유가 있고 용필도 자유자재 발휘되어 있다. 가장 빼어난 점은, 꺾거나 휘는 데서 붓이 나가다가 멈추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거둔다. 그러면 모가 선 것 같으면서도 모나지 않고 둥근 듯하면서도 둥글지 않은, 즉 黃庭(황정)이나 樂毅(락의)에서 보는 것같은 筆意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碑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수많은 拓本(탁본)을 떴기 때문에, 어지간히 좋은 탁본이 아니면 이런 미묘한 변화를 좀처럼 맛볼 수가 없게 됐다.

3. 顔勤禮碑(안근례비)
해서의 창안자인 顔眞卿(안진경)은 중국 산동성의 사람으로 호는 應方(응방)이고 字는 淸臣이다. 그리고 顔勤禮(안근례)는 안진경의 증조부로서 字는 敬이다. 안진경은 貞元 元年(정원 원년 785) 77세때 사망하였는데, 晩年에 이르러서는 그 서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心手가 다함께 丹熟(단숙)했을 것이니만큼 그러한 것을 보고자 하는 기대는 컸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半世紀(반세기) 前인 民國 11년(1922)에 長安의 舊藩(구번)해고, 즉 布政使(포정사) 소속의 창고 뒤 쪽 땅속에서 顔碑 一基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안근례비이다. 안진경은 왕희지 이래의 서예와는 달리 아주 다른 용필법을 가지고 그 독특한 서풍을 형성하였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正鋒(정봉)의 전면적 채용이다. 晉(진) 이래 唐(당)에 이르는 용필법을 指掌法(지장법)이라고 해서, 팔만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도 움직이고 붓끝을 사방 팔방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야말로 변화에 풍부한 필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안진경은 지장법에 의하지 않고 정봉, 즉 수직으로 붓을 세운 채로 쓴 부완법을 사용했다. 그의 글씨는 藏鋒(장봉: 鋒芒(봉망)을 획 안쪽으로 하여 밖으로 노출되지 않게 하는 형식) 이라고 한다. 장봉이라는 것은 보통 붓끝이 획의 중심을 지나간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으나 正鋒(정봉)으로 쓰면 자연히 안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지장법에서도 장봉을 원칙으로 한다. 장봉을 정봉으로 쓰려는 경우에는 直上으로부터 압력으로 힘을 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위부터 힘을 가감하는 것이나 운필의 減速(감속)등에서 안진경의 독특한 필법이 생겨나는 셈이다.

4. 안탑성교서
저수량 54세 때의 글씨이다. 구양순의 글이 정사각형이며 무표정한 배세미인데 반해 편평하며 銳利多變(예리다변)한 향세미의 대표이다. 마른선에 정묘한데다가 골격의 강렬함과 탄력이 있는 아름다움을 특질로 하고 있다. 정문공비, 구성궁예천명, 공자묘당 등의 온화한 정형에 대하여 동적인 구성법을 취해 해법에 일분야를 차지했다. 성교서란 정관 212년 (648) 8월, 태종이 현장, 삼장법사의 청에 응하여 그 新譯(신역)의 불전에 대하여 쓴 서문으로 불교원리의 심원한 것, 현장의 비범한 재능, 노력을 칭찬한 것이다.

5.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
당대의 서풍은 왕희지 글의 전통에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우세남의 공자묘당비나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이나 또 저수량의 안탑성교서나, 정제된 즉 잘 정돈된 귀족적 풍격이 강한 데가 있다. 이에 반하여 안진경의 글씨는 씩씩한 힘, 감동과 기백이 나타나 강쾌한 것으로 실로 서도사상에 있어 혁신적 존재이다. 마고선단기에는 大字, 中字와 小字의 세 종이 있으나 여기에 든 것은 대자로 안진경(62세) 大曆(대력) 6년작으로 女仙麻姑(여선마고)에 관한 기술이다. 마고선단기에서 비류가 없는 강직한 그의 성격과 풍부한 창조력을 느끼게 한다.

6. 장맹룡비(張猛龍碑)
북위 정광 3년(522년)에 건립된 것으로, 필자는 알 수 없고, 지금은 곡부(曲阜)에 있는 孔子의 묘소안에 모두 있다. 방필법(方筆法)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전문 26행에 매행 46자로 되어있다. 그 필획이 방준경리(方峻勁利)하여 운필이 엄근(嚴謹)하며 결구에 있어서는 평정(平正)속에 곡(曲)함이 있고 풍격은 웅강무밀(雄强茂密)하다라고 말 할 정도로 힘이 있고 엄정한 글씨이다.


7. 고정비(高貞碑)
북위 정광 4년(523)의 글씨로써 필자는 미상이며 청 건륭때에 산동에서 출토되었다. 송덕비(頌德碑)이며, 방필로써 점획이 날카롭고 모가 나며 힘 있는 것이 북비의 정방한 아름다움을 특구(特具)하고 있다.

8. 조상기(造像記)
조상기란 어떤 건축물의 건축과정을 샅샅이 기록한 것으로 용문석굴(龍門石窟)의 것이 가장 유명하며 용문 50품이란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수효와 형태가 매우 방대하다.
1) 우궐조상기(牛厥造像記) : 용문조상의 하나로써 북위태화 19년(495)때의 작품이다. 자형은 편평(扁平)하며 특히 어깨부분의 전철에서 이곡절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
2) 시평공조상기(始平公造像記) : 북위(서기498)때에 양각으로 새겨진 것으로 필획이 방준능려(方峻稜廬)하여 마치 칼로벤 듯한 풍격이 중후하다. 청의 조지겸이 애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9. 석문명(石門銘)
자연석에 새긴 것으로 북위 영평 4년(509) 왕원(王遠)의 글씨이다. 필획이 운원(運圓)하고 결체는 횡편(橫扁)하면서 기울어 있는데 자유분방한 면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돈되어 있어 엉성하지 않은 느낌은 높이 사야할 것이다. 그래서 康有爲(강유위)는 '飛逸渾禾宗之宗(비일혼화종지종)'으로써 神品으로 평하였으며 梁啓超(량계초)는 '可賞玩不可學(하상완불가학)'이라 평한 훌륭한 작품이다.

10. 정문공비(鄭文公碑)
이 비는 북위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던 정희의 셋째아들 정도소(鄭道昭)의 글씨이다. 도소는 정문공비 이외에도 '雲峯山論經書詩', ' 登雲峯山海童詩', '夫柱山東湛石室銘', '白駒谷題名' 등 많은 비가 있는데 그것의 대부분은 마애비(자연석을 갈아서 만든 비문)이다. 서법은 원필로써 전서나 장서(초기의 草書)의 서법과 마찬가지로 붓끝을 비교적 가운데에 두고 있어 둥그스름한 맛이 풍기는 용필법이다. 이 비는 오랫동안 그 존재가 잊혀졌다가 청의 원운(阮云)이 탁본을 소개하고 포세신(包世臣)이 추상(推賞)한 이후 유명해져서 북위書家의 대표적 이물로 인식되었다. 포세신이 '篆勢 分韻 草情이 모두 갖춰져 있다'라고 격찬한 바와 같이 원필이 있고 방필이 있으며 곡이 있고, 직이 있으며 느슨한데가 있고, 급한데가 있어 힘있고 율동이 풍부하여 대범하고 정취가 있어 강경하고 자미(姿媚)하다.

11. 묘지명(墓誌銘)
석판(石版)이 지상에 세워지면 묘비이고 장사지낼 때 묘중에 들어가면 묘지(墓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토되었을 때 완호(完好)한 것이 많다. 묘지의 서체는 蘊藉姸華(온자연화)한 것이 특징인데 비각이나 조상기와는 다른 특색이 있다. 묘지의 대표적인 것은 방준(方峻)한 원우(元羽)와 원유(圓柔)한 장흑녀(張黑女)가 있다.
1) 원우묘지명(元羽墓誌銘) : 서기 501년에 새겨졌으나, 1918년에 출토되었다. 왕릉의 것으로 각(刻)도 정교한 것이 걸작으로 평가된다.
2) 장흑녀 묘지명(張黑女墓誌銘) : 서기 351년의 작품으로 원석은 지금 없어지고 1825년 하소기가 산동에서 구탁본을 구하였는데 이미 전표(剪標 : 가위로 잘라 책을 만듦)되어 있었으며 행관(行款 : 행서로 낙관한 것)도 불분명하였다. 장현(張玄)묘지명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는 이 묘지는 운필에 방필과 장로(藏露)가 어우러져 있고, 결체는 납작한 편이다.

 

<書藝技法>

 - 대만 서예가 杜忠誥(두충고) 저, 대만사범대학 출신 정철재 역

 

서예의 精髓는 ‘붓놀림(用筆, 運筆)’에 있다.

 

 * 비유

1. 맹자 권7 離婁篇(이루편) 공수자라는 재주 있는 사람 - 規矩(규구, 規는 원을 그리는 제구, 矩는 방형을 그리는 자)가 있어야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

2. 왕 - 王道가 있어야 王道政治를 할 수 있다.

3. 서예가 - 훌륭한 붓이 있어야 명작을 낼 수 있다.

 

옛날에는 글씨를 연습할 종이가 비쌌으므로 무명에 글씨를 썼다가, 이를 빨아서 다시 글씨를 연습하였다. 그리하여 글씨를 많이 쓰는 것을 비유하여 ‘무명이 얇아지도록 썼다.’ 라고 한다.

 

예술 = 기교 + 형이상학적인 心靈과 미적인 감각

 

 * 楷書 쓰는 법

기본이 되는 점과 획의 붓 움직이는 요령

(1) 橫(가로긋기)의 붓 움직이는 요령

  ① 藏鋒(붓 끝을 숨기는 것)

  ② 頓筆(돈필, 붓을 멈춤)

  ③ 逆鋒(붓을 거꾸로 미는 것)

  ④ 勒筆(늑필, 묶을 늑, 정돈된 붓)

  ⑤ 折筆(절필)

(2) 竪(더벅머리 수, 세로획; ⽴-총13획; shù, 豎의 속자) - 懸針과 垂露

(3) 撇(닦을 별; ⼿-총15획; piē,pie, 왼쪽으로 삐침)

(4) 捺(누를 날; ⼿-총11획; na, 오른쪽으로 삐침, 찍다, 파임)

(5) 挑(휠 도; ⼿-총9획; tiāo,tiǎo, 위로 끌어올리기, 돋우다. 의욕을 돋우다)

    * 撇의 반대

(6) 右彎鉤(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갈고리, 儿 乙)

(7) 豎鉤(수구, 세로로 긋는 획의 갈로리, 刂)

(8) 斜鉤(사구, 비스듬한 갈고리, 戈 弋 代)

(9) 點을 찍을 때 움직이는 요령(直點, 左點, 右點)

 

結構(결구, 글자를 짜 모으는 요령)

(1) 均間(균간, 고른 간격) - 具, 勿, 安, 求

(2) 避就(피취, 피하는 양보하기, 서로 의지하여 붙기) - 鳩, 旭

(3) 覆載(복재, 덮는 것과 싣는 것) - 官, 雷, 圭, 昌, 要

(4) 向背(마주 봄과 등짐) - 妙, 幼

(5) 脈絡(점획의 움직이는 길) - 之, 淸

(6) 接筆(이어 쓰기) - 떨어져 있는 같기도 하고 이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① 左肩(허접과 실접이 있다) - 口

  ② 右肩(오른쪽 어깨) - ㄱ

  ③ 左下角(왼편 아래의 모서리) - ㄴ

  ④ 右下角(오른편 아래의 모서리) - 口

(7) 變化 - 三, 食(두 개의 파임 중 하나는 長點 처리), 群과 羣, 峯과 峰, 嘆 과 歎

(8) 增減 - 辟(임금 벽; bì), 京, 達, 身, 節, 使, 得(淂), 懷, 陰, 學

(9) 重心 - 主, 同, 그러나 乃, 母

출처 : 임계전한숙 서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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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글꼴의 변천과 시대 상황

원시 상형문 시대
앙소문화(B.C. 5000~3000)
대문구 문화(B.C. 4000~2000)
하나라(B.C. 2070~1600)
갑골문 시대
은나라(B.C. 1600~1046: B.C. 1300년 반경(盤庚)이 천도)
금문 시대
서주시대(B.C. 1046~771)
춘추시대(B.C. 770~476)
전국시대(B.C. 475~221)
전서 시대
진나라(B.C. 221~207)
예서 시대
한나라(B.C. 206~A.D. 220)
삼국시대(A.D. 221~265)
초서, 행서 시대
위진남북조(A.D. 265~581)
수나라(A.D. 581~618)
해서 시대
당나라(A.D. 618~907)
5대(A.D. 907~960)
해서와 활자체 시대
송나라(A.D. 960~1279)
요나라(A.D. 916~1125)
금나라(A.D. 1115~1234)
원나라(A.D. 1271~1368)
해서와 판각체 시대
명나라(A.D. 1368~1644)
마지막 해서 시대~
청나라(A.D. 1644~1911)
중화민국(타이완: 1912~)
간체자 시대~
중화인민공화국(1949~)

연도는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시기에 준해 표기했다.

 

 

書藝의 慨念 (서예의 개념) 

 

 書藝(서예)를 이미 형성된 글자를 쓰는 단순한 것으로 생각하기쉽다. 예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만당(晩唐) 시대에 유공권(柳公權) 은 心正筆正 (심정필정)이라했다.즉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 글씨가 바르게 써진다. 

마른 대나무 筆管(필관)을 통하여 수많은 터럭이 모인 筆鋒(필봉)에 나 自身(자신)의 精神(정신)을 넣어 生命(생명)이 있는 線 (선)을 긋는 것이다. 즉 人間心身(인간심신)의 氣力(기력)을 표현하는 空間藝術(공간예술)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겠다.

古今(고금)을 莫論(막론)하고 글씨는 人格(인격)의 表現(표현)이라 傳(전)해왔으며 書(서)를 배우고 또한 硏究(연구)함으로써 우리의 검소한 생활양식과 東洋固有(동양고유)의 文化藝術(문화예술)은 더욱 빛날 것이다.

 

 서의 예술성 (書의 藝術性)  

 

1. 서예의 본질 (書藝의 本質)

 

서예술(書藝術)이란 미술성(美術性)을 가지고 있다는 점(点)에서는 다른 일반예술(一般藝術)과 그목적(目的)이 같다고 할수있다.

그것은예술가 (藝術家)로서의 서가(書家)가 자기개성(自己個性)과 기교능력(技巧能力)에 따라 창조적 (創造的)으로 순간 (瞬間)에 포착한 미적이념(美的理念)을 지면(紙面)을 통(通)하여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자 (字) 자체는 완전히 독자적 (獨自的)인 형상(形狀)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글씨로서 창작활동(創作活動)과 제작효과 , 즉 정신(精神)과 육체(肉體)로 묶은 작품자체(作品自體)를 가리켜 우리는 서예술(書藝術)이라고 말할수 있다.

 

2.문자(文字)를 쓸 때에  형성(形成) 되는 예술(藝術)

 

서(書)는 문자를 쓸 경우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예술(藝術)이다.

문자자체(文字自體)는 언어(言語)의 기능(技能)을 나타내는것에 불과하다고 보겠지만 문자 (文字)속애는 인간생명(人間生命)의 움직임에 맞추어 골(骨)과 격(格)을 찾을수 있으며 혈(血)과 육(肉)을 (表現)하므로   선질(線質)의 표현(表現)을 생각(生覺)할 경우 이것이 바로 서예(書藝),또는 서법(書法)이라고 할수 있다. 원래 문자(文字)는  실용상 부호(實用上 符號)로 만들어져서  장기간 사용(長期間 使用)되어 오는 동안에 사람들의 미의식(美意識)에 따라  조화,균제,변화(調和,均齊, 變化,)와  통일등(統一等)의 형성미(形成美)를  연구(硏究)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성장(成長)해온 것으로서 문자(文字)와  서(書)는 끊을수 없는 인연(因緣)이다.

 

3.서(書)의 추상성(抽象性)과 상징성(象徵性) 

가.서의 추상성(書의 抽象性)

문자(文字)는 원래  상형적(象形的)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언어(言語)를 대신하는 부호(符號)라 할수 있으나 그 속성(屬性)은  추상적,선추화, 보편성(抽象的, 線抽化, 普遍性)인 것이다. 문자(文字)가 추상형(抽象形)이라 할수있는 것은  추상적 형식(抽象的 形式)인 선(線)과  형(形)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기때문이다.또한 글씨는 자기자신(自己自身)의 내부생명(內部生命)을  점,획(点,劃)에 맏기고 표현되는 예술이기에 추상적예술(抽象的 藝術)이라고 할수 있다.  

서예(書線)의 형체에는 여러가지 즉 장,단,종,횡,대,소,(長,短,縱,橫, 大,小,) 등의 변화가 있어 이것을 잘 조화(造化) 시킴으로서 한자의 구성 내지는 작품(作品) 전체를 구성하는데 효과가 아주 달라지는 것이다.

특히 선질(線質)에 있어서는 지연,강유,류동,윤갈,농염,등다양성(遲速 剛柔,流動,潤渴,濃淡等 多樣性)이 있으며그다양성은 글씨 전체(全體)의 무한(無限)한 추상적(抽象的) 변화를 주게 되는것이다.

이것은 해서(楷書)일경우도 찾게되지만 행,초서(行, 草書)있어서는 더욱 큰 변화의 묘(妙), 즉 추상적(抽象的)인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나.서(書)의 상징성(象徵性)

글씨 (書)는 인간(人間), 바로 그의 인격(人格)의 상징(象懲)이 된다는 점(点)에서는 타예술(他藝術)이 도저히 따르지 못할것이다.

따라서 글씨는 쓰는 사람의 내적생명(內的生命)과 의 미적관계(美的關係)를 깊이하고 창작품(創作品)은 그대로 작가인간성(作家人間性)의 상징적 표현(象徵的 表現)이 되는 것이다.

왕희지(王羲之)가 난정서(蘭亭敍)를 쓸때 당시를 도리켜 생각해 볼때 오래만에 만난  군현(群賢)들이 화애(和愛)스러웠으며 만물(萬物)이 소생(蘇生)하여  번성(繁成)하는 계절(季節)로 희망(希望)찬 시기였으며  천랑기청

(天朗氣淸)하고 혜풍화창(惠風和揚)에 일상일영(一觴一詠) 까지 했으며 즐겁고 흥겨운 기분에서 쓴 난정서(蘭亭敍)의 글씨는 진(眞)과 선(善),그리고미(美)가 겹친 오묘한 신운(神韻)의 경지(境地)에서 나온것이라 할수있다.

이로서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문서소재(文書所材)가 다를때에 그뜻과 내용(內容)에  맞는 심경(心境)에잠겨 거기에서 스며나온  자기(自己)의 생명(生命)을 표현(表現)하고 있다고  서보[書譜]에 평(評)하고 있다.

또한 필법(筆法)이 묘(妙)하여 보다높은 경지(境地)에서 글씨를 썼기에 후대(後代)에 모든 서가(書家)들이 필법(筆法)을 배우고 연구(硏究)하여 작품(作品)을 썼다.

그러나 어떠한 묘필(妙筆)을 썼다하더라도 왕희지(王羲之)와 같은 다채(多彩)로운 표현(表現)은 할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왕우군(王右軍)의 글씨에서 서(書)의 상징성(象徵性)이 현저(顯著)하게 나타난 실예(實例)를 들수 있다.

 

다.서(書)의 일회성(一回性)과 율동성(律動性)

문자(文字)를  쓰는 움직임에는 일회(一回)로 한번에 그어야 한다.

움직임은 항상 시간(恒常 時間)과 공간(空間)의 개념(槪念)으로 해서 내부(內部)에서 외부(外部)로 뻗는 움직임이 살아있는 흐름이어야 한다. 생명(生命)의 움직임에는 되풀이가 절대없는 것이므로 정신(精神)이 일치된 글씨도 마찬가지인것이다.

이와같이  일회성문자(一回性 文字)를 쓰는 역할은 최초(最初)의 기필(起筆)에서 수필(收筆) 즉 붓의 시작에서 부터 마지막 거둘때 까지 방향,속도, 필압등(方向, 速度, 筆壓等)으로 운필(運筆) 하게되며 그 붓의흐름에 맞추어 자유롭게 형성(形成)되어가는 율동성(律動性)이야말로  서(書)의 새명(生命)이라할수 있다.

 

◀  문자(文字)와 서체(書體) ▶ 

문자는 결승(結繩)기사(記事)와 팔괘도상(八卦圖象)으로 인하여 문자(文字)가  발생(發生)하게된 상태이지만 처음 서계(書契)와 창힐(倉힐) 이가 조자 (造字)했다고 전한다.

 

◈회화문자(繪畵文字)

상형문자(象形文字) 즉 고시대(古時代)에 쓴 문자적 특성(文字的 特性)은 모두 그림에 불과했다.

이것을 통칭 회화(繪畵)문자 라고한다. 이러한고문(古文)을 써오다가 주(周 )나라 선왕(宣王)때에 사주(史주)가 종래에 써오던 고문(古文)을 고쳐 만든것이 대전(大篆)이라하였다.

그래서 이 대전(大篆)을 만든 사람이 사주 인고로 사주문(史주文)이라고도 한다.

 

◈전서 (篆書)

그후에 석고문(石鼓文)이 있었는데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기양으로 사냥을 하러가서 그때에 그의 업적을 석고(石鼓)에다 새긴것이며 이것이 석문(石文)으로는 가장오랜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진(晉)나라 이사(李斯)가만든 소전(小篆)이있다.  

 

 

石鼓文  (석고문)

 

 

 

 

篆書 王羲之 千字文(전서 왕희지 천자문)

 

 

 

秦 泰山刻石  (진 태산각석) 

 

 

秦 瑯邪臺刻石 (진 랑사대각석)

 

 

 

◈隸書(예서)

진시왕(秦始王) (기원전 246~210)이 통일(統一)시킨 이후 승상이사(丞相 李斯)가 문자(文字)를 통일(統一)시켰다. 이때 옥리(獄吏)인 정막(程邈)이 대소전(大小篆)의 결체(結體)를 간단하게 처리(處理)했으며 원전(圓轉)의 획을  방절(方折)의 획으로 해서 쓰기에 편리(便利)하게 만들었고 이자체(字體)는 공문서상(公文書上)에 쓰기시작했다.

그래서 이 정막(程邈)이 만든 자체(字體)를  예서(隸書)라 칭(稱)해 전(傳)해졌다.

 

 

隸書  後漢 乙瑛碑  (예서 후한 을영비) 

 

 

 

漢   史晨前後碑  (한 사신전후비)

 

 

 

漢 禮器碑  (한 례기비)

 

 

 

 

漢  曹全碑 (한 조전비)

 

 

 

王羲之 千字文 (왕희지 천자문) 

 

 

 

◈楷書  (해서)

해서(楷書)는 즉 진서(眞書)인데 옛날에는 해예(楷隸), 혹은 금예(今隸)라고 했다. 진위항(晉衛恒) 의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말하기를 [상곡왕차중(上谷 王次中)이 예서(隸書)를 즐겨쓰다가 해법(楷法)을 시작 하게되었다]는 설(說)과  당 이양빙(唐 李陽氷) 의 설(說)은 진 왕차중(秦 王次中)이 만든 팔분서(八分書)를 [종요위지장정서(鐘繇謂之章程書)] 라했다. 즉(卽) 해서(楷隸)는 종요(鐘繇)도 예서(隸書)를 즐겨쓰다 해법(楷法)이 시작 되었다 라고했다.

당,장회관(唐, 張懷瓘)의 서단[書斷]에 이르기를 진,익인 상곡 왕차중(秦 羽人 上谷 王次中)이 팔분서(八分書)를 만들었다는 위의 설법(說法)을 종종 말했을진데  해서(楷書)의 형체(形體)는 예서(隸書)를 쫓은 것이고 예초(隸草)가 연번(演變)해서 되었다고 할수있다.

한대(漢代)는 해서(楷書)의 유적(遺迹)은 없어지고 가장오랜 해서유적(楷書遺迹)은 위대(魏代)의 종요필(鍾繇筆)과 또 오지곡랑비(吳之谷郞碑)가 있었는데 자체(字體)의 필획(筆劃)이 이미 해서(楷書)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또한 서진(西晉)의 육기(陸機)의 평부첩[平復帖]이 가장 오래된 서가(書家)의 묵적(墨迹)인데 이것도 역시 장초(章草)의 필법(筆法)이었다.

 

 

王羲之 楷書 千字文 (왕희지 해서 천자문)

 

 

 

顔眞卿 楷書 建中帖 (안진경 해서 건중첩)

 

 

 

歐陽詢 眞書 (구양순 진서)

 

 

 

歐陽詢 九成宮醴泉銘 (구양순구성궁예천명)

 

 

 

顔眞卿 雙鶴銘 (안진경 쌍학명)

 

 

 

趙之謙 四九六字 (조지겸 496자)

 

 

◈行書   (행서)

행서(行書)는 후한말(後漢末)에  영천인 유덕승(潁川人 劉德昇)이 창제(創制)한 것이다.

해서(楷書)에 가까운 행서(行書)가 있는가 하면 초서(草書)에 가까운것도 있다. 서단[書斷]에 무종간역 상문류행[務從簡易 相問流行]이라 했으며  또한 서보[書譜] 손과정서(孫過庭書)에 추변적시 행서위요[趨變適時 行書爲要]라했다.

행서(行書)는 해서(楷書)보다  쓰기가 간편(簡便) 하고 초서(草書)보다는 이해(理解)하기 쉽고 행서(行書)는 해,초서간(楷,草書間)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체(體)의 묘(妙)한 변화(變化)를 도와 주었으며 운용필법(運用筆法)과 예술적(藝術的)효과를 발휘할수 있다고 할수있다.

 

 

歐陽詢 高近福 墓碑(구양순 고근복묘비)

 

 

 

王羲之 行書 千字文(왕희지 행서 천자문)

 

 

 

楮遂良 枯樹賦 (저수랑 고수부)

 

 

 

 

王羲之 蘭亭敍 (왕희지 난정서)

 

 

 

王羲之 集字聖敎序 (왕희지 집자성교서)

 

 

 

米불書 晝錦堂記 (미불서 주금당기)

 

 

 

◈草書   (초서)

초서(草書)에는 장초(章草) 와 금초(今草)가 있다.

가, 장초(章草)는 전래(傳來)해오기를  한 원제(漢 元帝)때 사유(史游)가 창조(創造) 하였다 하나 현재(現在)  전해내려오는 것은 급취장(急就章)이 있으니 장[章] 자(字)를 취(取)해서 이름을 지었다.

초(草)는 초창(草創)이라 해서 [草] 자(字)를 따온것으로 몇가지 설(說)이 있다.

후한 장제(後漢 章帝)때 두도(杜度)의 초(草)를 좋게여겨서 그가 어전(御殿)에 주달(奏達)할때 써 이룬 초서(草書)이니 소위(所謂) 그것이 장초(章草)이다.

 

◈今草 (금초)

금초(今草)를 전(傳)하기는  후한(後漢)때에  장지(張之)가  장초(章草)를 변화(變化)시켜 놓은것으로 당시 장지(當時 張之)를 심히 추중(推重)하여 초성(草聖)이라 일컬었다. 그래서 장초(章草)는 금초(今草)의 근원(根源)이라 할수 있으며 우리가 초서(草書)를 배울때 장초(章草)를 먼저 쓰고 초법(草法)을 익혀야 하겠다.

 

 

行草字帖  (행초자첩)   [章草](장초)

 

 

 

 

미불 행초첩

 

 

 

 

張之의 今草  (장지의 금초)

 

 

 

 

王羲之 罔極帖  (왕희지 망극첩)

 

 

 

 

王羲之 十七帖 (왕희지17첩)

 

 

 

 

 

孫過庭  書譜  (손과정 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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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서에 쓰는 달月 이름
이하 매월 날짜는 음력으로 따집니다.
1월(寅)
단월(端月) 맹양(孟陽 )맹추(孟추) 맹춘(孟春) 원월(元月) 월정(月正) 인월(寅月)
정양(正陽) 정월(正月) 조세(肇歲) 청양(靑陽) 초춘(初春 )
추월(陬月) 태월(泰月)
태주(太簇)

2월(卯)
감춘(감春) 대장월(大壯月) 도월(桃月 )묘월(卯月 )양중(陽中) 여월(如月)
여월(麗月 )영월(令月) 정춘(正春) 중양(仲陽 )중춘(仲春 )협종(夾鍾 )혜풍(惠風)
화조(華朝) 화조(花朝)

3월(辰)
가월(嘉月) 계춘(季春) 고선(姑洗) 곡우(穀雨) 만춘(晩春) 모춘(暮春) 병월(병月)
송춘(送春) 잠월(蠶月 )재양(載陽) 전춘(殿春) 중화(中和) 진월(辰月 )청명(淸明)
화월(花月) 희월(喜月)

4월(巳)
건월(乾月) 괴하(槐夏 )맥추(麥秋) 맹하(孟夏) 사월(巳月) 소만(小滿) 시하(始夏)
신하(新夏) 여월(余月) 유하(維夏 )입하(立夏) 정양(正陽) 중려(仲呂 )초하(初夏)

5월(午)
고월(皐月) 구월(姤月)류월(榴月 )매월(梅月 )매천(梅天) 매하(梅夏) 명조(鳴조)
서월(署月) 순월(순月) 오월(午月) 우월(雨月) 유빈(蕤賓 )장지(長至) 정하(正夏)
중하(仲夏)포월(蒲月)훈풍(薰風)

6월(未)
계월(季月) 구월(具月) 계하(季夏) 만하(晩夏) 미월(未月) 복월(伏月) 상하(常夏)
소서(小暑) 유월(流月) 임종(林鍾) 재양(災陽) 조월(朝月 )형월(螢月)

7월(申)
과월(瓜月) 냉월(冷月) 동월(桐月) 맹추(孟秋) 상월(相月) 상추(上秋) 선월(蟬月)
신월(申月) 신추(新秋 )양월(凉月) 유추(流秋) 유화(流火) 이칙(夷則) 조월(棗月)
처서(處暑 )초추(初秋)

8월(酉)
가월(佳月) 계월(桂月) 교월(巧月) 남여(南呂) 백로(白露) 소월(素月)
유월(酉月) 장월(壯月) 정추(正秋) 중추(仲秋) 한단(寒旦)

9월(戌)
계추(季秋) 고추(高秋) 국월(菊月) 만추(晩秋) 모추(暮秋) 무역(無射) 무월(戌月)
박월(剝月 )상진(霜辰) 수의(授衣) 영월(詠月) 잔추(殘秋) 현월(玄月)

10월(亥)
곤월(坤月) 맹동(孟冬) 소양춘(小陽春) 소춘(小春) 양월(良月) 양월(陽月) 응종(應鍾)
입동(立冬) 조동(早冬) 초동(初冬) 해월(亥月)

11월(子)
고월(辜月) 남지(南至) 복월(復月) 양복(陽復) 자월(子月) 정동(正冬)
중동(仲冬) 지월(至月 )창월(暢月) 황종(黃鍾)

12월(丑)
가평(嘉平) 계동(季冬) 궁동(窮冬) 궁음(窮陰) 납월(臘月) 대려(大呂) 도월(도月)
만동(晩冬) 모동(暮冬) 모세(暮歲) 모절(暮節) 빙월(氷月 )사월(斜月) 엄월(嚴月)
제월(除月) 축월(丑月)

날자별
1일 - 삭(朔), 기사백(旣死魄)
15일-망(望), 기생백(旣生魄)
16일-기망(旣望)
8일이전 - 상현(上弦)
23일 이후 - 하현(下弦), 기사패(旣死霸)
1-10일: 상순(上旬) 상한(上澣) 상완(上浣)
11-20일 : 중순(中旬) 중한(中澣) 중완(中浣)
21-말일 : 하순(下旬) 하한(下澣) 하완(下浣)

古甲子
고대 중국에서 쓰던 간지(干支)의 이름.
天干(천간)
甲(갑) 閼逢(알봉)
乙(을) 旃蒙(전몽)
丙(병) 柔兆(유조)
丁(정) 疆圉(강어)
戊(무) 著雍(저옹)
己(기) 屠維(도유)
庚(경) 上章(상장)
辛(신) 重光(중광)
壬(임) 玄黓(현익)
癸(계) 昭陽(소양)

地支(지지)
子(자) 因敦(인돈)
丑(축) 赤奮若(적분약)
寅(인) 攝提格(섭제격)
卯(묘) 單閼(단알)
辰(진) 執徐(집서)
巳(사) 大荒落(대황락)
午(오) 敦牂(돈장)
未(미) 協洽(협흡)
申(신) 涒灘(군탄)
酉(유) 作噩(작악)
戌(술) 閹茂(엄무)
亥(해) 大淵獻(대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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