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書藝)

 

   요약 
 
   
 
  문자를 쓰는 일, 또는 씌어진 문자를 주로 조형면에서 심미적 대상으로서 의식했을 때 성립하는 하나의 예술. 서예는 중국·한국·일본에서 발달한 독특한 예술로서 한자가 가지는 조형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의 하나로 여겨 관리와 지식인의 필수 교양과목이었다.
 

 

   설명   
 
   
 
  문자를 쓰는 일, 또는 씌어진 문자를 주로 조형면에서 심미적 대상으로서 의식했을 때 성립하는 하나의 예술. 서예는 중국·한국·일본에서 발달한 독특한 예술로서 한자가 가지는 조형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의 하나로 여겨 관리와 지식인의 필수 교양과목이었다. 운필(運筆)·구성(構成)·묵색(墨色)·배치(配置) 등의 미와 작품에 나타난 필자의 품격이 존중되었으며,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의 필력은 먹이 나무에 깊숙이 스며들 정도였다고 하는 고사와 관련하여 입목도(入木道)라고 했고 필도(筆道)라고도 했다. 서예는 문자를 표기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필자의 예술적 창작물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인쇄문자나 일상 실용문자는 서예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실용서사인 서장(書狀)과 사경(寫經) 등에서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은 서예로서 감상한다. 서체(書體)·서풍(書風)·서법(書法) 등 시대와 유파에 따라 여러 가지이지만, 최근에는 고전을 해명하려는 반면, 종래의 형식을 떠난 새로운 분야의 개척이 시도되고 있다.

중국서예사


문자의 발명과 서예의 시작
중국문자, 즉 한자는 BC 2800년 무렵 황제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이 새의 발자취를 보고 발명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새끼의 매듭으로 수(數)와 사항을 전했다고 하는데 문자의 시초는 지극히 단순한 선(線)의 조합이었다. 그 후 하(夏)나라·은(殷)나라 때에 거북의 등딱지나 소·사슴 등의 짐승 뼈에 선으로 그린 그림같은 문자를 새긴 갑골문자(甲骨文字)가 나왔다. 이것들은 나라의 큰일과 전쟁·사냥·농사를 점친 기록이고 청(淸)나라 말기에 은나라 도읍지의 흔적이라고 하는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둔[小屯]에서 수많은 갑골 조각과 오래된 도장이 발굴되어 고대문자의 존재가 분명해졌다. 같은 유적에서 도편(陶片)에 먹으로 초(草)를 잡은 것도 발견되어 고대에 이미 오늘날의 붓에 가까운 것과 먹이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은나라 때에는 동기(銅器)에 그림문자와 같은 명문(銘文)을 새겼다. 이것을 금문(金文)이라고 한다. 근래에 이러한 고대문자의 예술성이 주목받게 되었다. 은나라에 이은 주(周)나라 때에는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로 나뉘고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가 되어 봉건제후의 세력이 확대되고, 주나라 왕실은 쇠퇴했다. 문서와 기록의 종류가 많아지고 문자의 수도 증가했으나 정치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부터 자형(字形)의 혼란이 일어났고 정식서체(正式書體)·약식서체(略式書體)와 함께 장식문자(裝飾文字)가 생겼다. 이것은 동기인 종(鐘)의 명문이나 구리 화폐, 병기(兵器)인 칼과 창 등에 금상감(金象嵌)을 하였다. 후세에 <조서(鳥書)>라고 하는 변형된 문자도 그 하나이다. 또 석고(石鼓)라고 하는 북과 같은 모양의 돌에 문자를 새 긴 것 10개가 당(唐)나라 때에 발견되었는데 성립연대는 동주 또는 전국시대 초기로 추정되고 돌에 새긴 문자로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며 이 석고문(石鼓文)의 서체를 대전(大篆) 또는 주문(주나라 왕실의 사관이 쓴 문자)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는 아직 종이가 없었고 비단이나 대나무에 문서를 기록하였다. 1930년대 후반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고분에서 비단에 쓴 그림과 문자로 된 문서가 발견되었고, 또 50년대 초 같은 창사유적에서 대나무에 먹으로 쓴 죽간(竹簡)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껴묻거리[副葬品]의 목록으로 보이며 전국 말기 초(楚)나라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서체의 분화와 발전
주나라가 멸망하고 전국시대를 거쳐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시황제(始皇帝)는 자국의 문자를 중심으로 혼란에 빠진 서체의 통일을 시도했다. 통일 이전의 문자를 대전(주문)이라 하는 데 대해, 통일 후의 문자를 진전(奏篆) 또는 소전(小篆)이라고 했다. 시황제는 각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우게 했는데 대신(大臣) 이사(李斯)는 시황제를 위해서 각석(刻石)에 많은 글을 썼다. 현존하는 것으로 BC219년의 《태산각석(泰山刻石)》 《낭사대각석(瑯邪臺刻石)》이 있다. 모든 제도·문물을 통일시키려고 했던 시황제는 도량형도 표준화하여 관제(官製)의 원기(原器)를 만들고 저울에 조서(詔書)를 새겨서 민간에 배포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에 한(漢)나라의 고조는 도읍을 장안(長安)으로 정했다. 한나라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진나라 때의 전서(篆書)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장식적이고 복잡하여 문서 작성에 불편하게 되자 전서 대신에 간소한 예서(隸書)가 하급관리들 사이에서 발명되어 후에 일반인들도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의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후한 때에 자형이 정리된 좌·우 균형잡힌 화려한 자체를 팔분(八分)이라고 했다. 전서·예서는 가로·세로의 획이 균정(均整)하고 마지막의 붓을 오른쪽으로 삐치듯이 하여 멈춘다. 이것을 파세(波勢)라고 한다. 한나라 때는 일반적으로 예서를 사용했으나 도장과 종명(鐘銘) 등 장중한 서체를 필요로 하는 곳에는 여전히 전서를 사용했고, 당시에 유행했던 비(碑)에는 두부(頭部)의 제자(題字)만 전서를 썼다. 이것을 전액(篆額)이라고 하며 지금도 비문에 이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한나라 말기에는 예서 가운데에서 사용 빈도가 높은 문자가 서서히 단순해져서 초서(草書)가 나타났다. 이것을 고초(古草)라고 했는데 고초에서 장초(章草)가 생겼다. 한나라의 장제(章帝)가 발명해서 장초라 했다고도 하며 황제에게 장주(章奏)하는 문서에 사용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의 초서는 전서·예서의 영향으로 주요 자획과 끝획은 아래로 계속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삐치는 것이 특징이다. 후에 초서는 다음의 자획으로 계속 흐르게 되어 연면체(連綿體)가 생겼다. 또 예서의 속필에서 행서(行書)가 생겼다. 행서는 한나라 유덕승(劉德昇)이 발명했다고 한다. 이와 전후해서 오늘날의 해서(楷書)도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한나라 말기에는 전·예·초·행·해 등 오체(五體)가 갖추어졌고 이때부터 자체의 변화는 없이 서풍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중국의 서역지(西域地)인 누란(樓蘭)·둔황[敦煌]·쥐옌[居延] 등의 유적에서 1만 2000점에 이르는 한나라·진나라 때의 목간(木簡)이 발굴되었다. 목간은 나무를 깎아서 한쪽에 1행 10자 안팎의 문자를 먹으로 쓴 것으로 이 목편을 발처럼 엮은 것이 책(冊)이다. 또 1972년 전한시대의 2기의 묘(馬王堆 1호분과 2호분)에서는 많은 죽간이 발굴되었다. 이 목간과 죽간은 일상의 기사와 공용서를 기록한 실용서로서 운필(運筆)도 매우 간략하고 기록연대가 적혀 있는 것이 많아서 한나라에서 진나라에 이르는 글자체의 성립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목간과 함께 서역에서 출토된 육필사료(肉筆史料)로서 사경이 있다. 이것들은 종이에 붓·먹을 사용하여 행서·초서보다 약간 근엄한 해서풍의 필법으로 씌어져 있다. 그런데 종이는 후한 초에 채륜(蔡倫)이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전에는 목판 외에 비단천이 있었지만 값이 비쌌다. 종이의 보급은 서예의 발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손에 들고 기록했던 목간에서 책상과 같은 평면 위에 종이를 펴놓고 기록하게 되었고 글씨를 쓰는 재료의 변화는 당연히 운필의 자세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종이에 글씨를 씀으로써 서예는 더욱 예술적으로 표현되었다. 후한시대의 예서비(隸書碑)는 대부분 먼저 종이에 쓴 다음, 석공이 새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대의 서예가로는 전서·예서의 조희(曹喜), 장초에 채옹(蔡邕)·두도(杜度)·장지(張芝) 등이 있고, 또 후한의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저술하여 한자의 조자법(造字法)과 전용법(轉用法)을 설명했다.

왕희지의 출현과 중국서예의 확립
한나라의 멸망 후 위(魏)·촉(蜀)·오(吳)나라의 대립시대가 되고 이것을 진(晉)나라가 통일하는데 북방민족에게 밀린 한민족(漢民族)은 남쪽으로 이동해서 동진을 세웠으며 양쯔강[揚子江] 유역에는 6조(六朝) 문화가 번영했다. 한나라 때에 일어난 서예는 위나라의 종요(鐘繇), 동진의 왕희지·왕헌지(王默之)의 출현으로 중국서예의 절정을 이루었다. 왕희지는 옛날부터 내려온 서예의 표현방법을 집대성하고 귀족적인 밝은 서풍으로 해서·행서·초서 3체의 서예술을 완성하여 서성(書聖)으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서체는 중국·한국·일본을 통해 오랜 기간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왕희지가 쓴 것으로서 전해지는 것에 행서인 《난정서(蘭亭序)》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초서에 《십칠첩(十七帖)》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해서에 《동방삭화찬(東方朔畵讚)》 《악의론(樂毅論)》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진필은 전하지 않는다. 임모(臨模;본을 보고 쓴다)가 아니면 쌍구전묵(雙鉤塡墨;진필 위에 얇은 종이를 놓고 가는 붓으로 윤곽을 그리고 먹으로 채운다) 또는 돌에 새겨서 탁본을 뜬 것이다. 왕헌지는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이며 작품에는 해서에 《낙신부(洛神賦)》, 초서에 《중추첩(中秋帖)》 등이 있는데, 이것도 진필은 전하지 않는다. 희지를 대왕(大王), 헌지를 소왕(小王)이라 하였으며 이 두 사람에 의하여 중국서예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진나라에 이어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사경이 유행했고 해서로 쓴 사경체가 생겼다. 또 잡체(雜體)가 유행하였고 이것이 당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잡체란 전서·예서를 디자인화한 장식문자인데, 화려한 색채를 가한 공예품의 ??양으로 실내장식에 쓰였다. 화베이[華北]에 세운 몽골계의 북위(北魏)에는 비(碑)·마애(磨厓)·묘지 등 많은 석각이 있고, 모가 난 긴밀한 구성과 강건한 서풍이 주목된다. 특히 묘지류는 해서로 새겼으며 땅 속에 묻었기 때문에 풍화를 받지 않아 근세에 발굴되어 재인식되고 있다.

서풍의 발달
수(隋)나라에서 이룩한 새로운 문화는 당나라에 계승되어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웠으며 서예의 황금기를 가져왔다. 수나라·당나라 때에는 특히 왕희지의 서풍이 존중되었던 시대로서 수나라의 석지영(釋智永)은 왕희지의 7세손이 되며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을 썼다. 당나라 초에는 품격이 있는 서풍의 우세남(虞世南), 방정하고 준엄한 구양순(歐陽詢), 초당 해서의 최고봉 저수량 등 3대가가 나왔다. 또 과거의 응시 과목 가운데에 서예가 들어 있었고 정치가와 관리가 되기 위한 필수 교양이었다. 당나라 태종은 서예에 대한 대단한 정열가로서 자신도 《온천명(溫泉銘)》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왕희지의 필체를 좋아하여 조서를 내려 왕희지의 진필을 모았고 필사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왕희지의 서풍은 널리 세상에 전해졌고 당나라의 서예를 융성하게 했다. 당나라 중기에는 이러한 풍조에 식상하여 새로운 서풍이 생겨났다. 손과정(孫過庭)은 《서보(書譜)》를 저술하여 종래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나라의 중흥을 이룬 현종 때에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등의 시가 전성기를 맞자 강직하고 중후한 서풍의 안진경(顔眞卿)을 비롯하여 이북해(李北海)·하지장(賀知章)·서호(徐浩) 등 많은 서예가가 배출되었다. 또 한·진(秦)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서 전서·예서를 연구하려는 복고주의적 경향과 장욱(張旭)·회소(懷素) 등과 같이 새로운 초서에 의한 혁신적 서예의 추구는 이어지는 송(宋)·원(元)·명(明)나라 때 광초체(狂草體;감흥에 맡겨서 빠른 속도로 쓰는 초서)의 선구가 되었다.

송나라 이후의 서예
당나라 말기의 혼란에서 천하를 통일한 송나라는 북송에서 남송으로 약 320년 동안 계속되는데 이때에는 왕희지의 필법을 배우기 위하여 복제(複製)에 또 복제를 하게 되어 진필과는 전혀 다른 독특하고 낭만적인 서풍이 생겼다. 또 고대의 전서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된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미불(元章)은 글과 그림에 모두 능했고 글은 행서에 능했다(《蜀素帖》 등). 소식(蘇軾)은 문학과 글에서 당대 제일이라고 했으며 호방한 서풍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黃州寒食詩券》 등). 또 채양(蔡襄)은 정치가·문인으로서 유명하며 해서·행서에 능했고 황정견(黃庭堅)은 초서에 능했다. 송나라 때의 이들 4대가 외에 북송의 휘종도 독특한 서체를 남겼다. 휘종은 글과 그림에 능했고, 이 시대에 문방구(文房具) 등의 취미가 유행한 것도 휘종의 힘이 크다. 휘종의 아들 고종도 우수한 해서를 남겼다. 또 장즉지(張卽之)는 선사상(禪思想)을 통한 독특한 글씨를 썼다. 송나라 때에는 여러 가지 산업이 일어났고 서예문화에 관계가 깊은 종이·먹·붓 등 특산품이 곳곳에서 생산되었다. 또 인쇄술이 발달하여 인쇄된 서적이 보급된 것도 이 시대의 큰 특징이다. 원(元)나라에서는 조자앙(趙子昴)이 나타나서 다시 왕희지의 고필법이 부활했다. 또 송·원나라 때에 유행한 선종승(禪宗僧)의 필적은 서법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스러운 필법으로 인격의 발로라고 보았다. 명나라 말기에는 그때까지 없었던 길고 큰 족자가 유행했고 그런 형식에 맞도록 연면체(連綿體)의 초서가 유행했다. 만주에서 일어난 청나라의 여러 왕들도 서예를 좋아했고 한비(漢碑)와 당비(唐碑)의 조사와 금석문의 연구도 열심히 했다. 또 고동기(古銅器)의 발견과 정리에서 원·명나라 때에 태어난 문인들의 전각(篆刻)이 이 시대에 더욱 발달했다. 청나라 때는 이른바 중국 서예의 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향은 근대에 이르면서 점점 저하되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서예사
한자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대체로 고조선시대이므로 한국의 서예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또한 고려시대까지의 진적(眞蹟)도 10여 점에 불과하고 조선시대의 것 역시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 중 진필(眞筆)은 아니더라도 전하고 있는 상당수의 비갈(碑碣)·금문(金文)·묘지 등을 통해 서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삼국시대
⑴ 고구려:고구려의 유물로는 전문(塼文)·석각(石刻)·묘지명(墓誌銘) 등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점제현신사비·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등이 있는데, 여기에는 예서·행서·해서 등 여러 가지의 서체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 형태가 각기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어 이 시기의 서예를 다양하게 고찰할 수 있다. 77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점제현신사비>는 한대를 대표하는 예서의 걸작이며, 7m에 달하는 거대한 <광개토왕비>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해서가 아닌 예서이다. 파세(波勢)가 없는 고예로서 특이하며 호탕 웅대하여 동양서예사상 보기드문 명품이다.

⑵ 백제:현재 글씨로서 유물은 거의 남은 것이 없고 석각과 불상명(佛像銘) 등 매우 단편적인 것이 전할 뿐인데, 1972년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券)은 당시의 서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서,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는 중국 남조풍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백제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글씨가 비교적 크며 서체가 방정하고 힘이 있어서 남조보다는 북조풍이 짙다. 이것은 백제 말기에 와서는 남·북조 모두와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다.

⑶ 신라:삼국통일 이전의 금석유물로는 진흥왕이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을 비롯한 3개소의 순수비(巡狩碑) 및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단양(丹陽)의 적성비(赤城碑) 등이 있다. 그런데 순수비를 제외하고는 글씨·문장·각법이 모두 치졸하여 보잘것없다. 다만 진흥왕순수비는 문장이 유려하고, 장엄할 뿐 아니라 북조풍에 따라 서법에 우아한 품격이 넘쳐 흐른다. 다른 작품들의 서풍 역시 모두 북조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
이 시기는 왕희지체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당(唐)나라 중엽 이후 해서의 전형적인 규범이 정립됨으로써 그 영향이 통일신라에도 크게 미쳐 말기부터 해서가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행서는 주로 왕희지법, 해서는 구양순법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까지 양조(兩朝)의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초기에는 왕희지의 서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영업(靈業)의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감산사석조불상조상기(甘山寺石造佛像造像記)·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와 김생(金生)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捿雲塔碑)의 서체가 모두 왕희지의 서풍을 따르고 있다. 영업의 글씨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와 구별해 낼 수 없을 정도의 명품이며, 김생은 왕희지의 법을 따르면서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서풍과 당(初)나라 초기 시대 저수량의 필의를 참작하여 개성이 뚜렷한 서풍을 창안함으로써, 후일 이규보(李奎報)로부터 <신품제일(神品第一)>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편 이 시대의 서예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 사경(寫經)을 들 수 있는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한국에서 사경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며, <화엄석경(華嚴石經)>은 대체로 구양순의 서풍이 짙은 당나라 때의 사경체이다. 말기의 대가로는 최치원(崔致遠)·김언경(金彦卿)·최인연이 있는데, 최치원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쌍계사진감선사비(雙磎寺眞鑑禪師碑)>이다. 이것은 구양순의 아들 구양통(歐陽通)과 매우 비슷한 풍골(風骨)을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못지않게 서예문화가 융성하였다. 그러나 진적으로는 몇 점의 고문서와 말기에 작성된 수십 점의 사경이 남아 있고 그 밖에 진가가 확실하지 않은 명인의 글씨 몇 점이 남아 있을 뿐, 서예자료로 다루어야 할 것은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비석과 묘지 등 금석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각종 목판서적의 글씨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초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나라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모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양순의 서체가 지배적이었으며, 행서는 역시 왕희지풍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중기에 이르러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은 고승 탄연(坦然)이 구양순체 일색이었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안법(顔法)의 해서를 썼고 왕법(王法)의 행서를 겸했으며, <문수원비(文殊院碑)> <승가사중수비 (僧伽寺重修碑)>를 썼다. 그러나 12세기에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 문학·예술 전반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체로 13세기 말엽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후기에는 특히 충렬왕 이후에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 조선 전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충선왕은 1314년 아들인 충숙왕에게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나라 명사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조맹부는 원나라를 대표하는 글씨의 명가로서 충선왕을 따라갔?? 문신들 중에는 조맹부의 서법을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 명가가 이암·이제현(李齊賢)이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많은 문적과 서화를 들여왔으므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유행된 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고려 말기의 대가로는 이암·한수(韓脩)·권주(權鑄)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암은 특히 송설체를 깊이 터득하여 행서·초서에 뛰어난 대가로서, 문수사장경각비(文殊寺藏經閣碑)의 글씨를 남겼다. 한편 고려시대 서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비갈과 함께 주목받는 것이 묘지이다. 비갈은 지상에 세우는 것이므로 대부분 심력을 쏟아서 쓴 작품인 데 반하여, 묘지는 땅속에 묻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운필하여 자연스러운 자세로 쓰는 것이 보통이므로 비갈과는 다른 친근감을 준다. 또한 서체가 다양하고 교졸(巧拙)의 차가 많고, 필자를 밝힌 것은 몇 점에 불과하지만, 모두 정확한 연대가 새겨져 있어 각 시대 서법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글씨는 고려 말기에 받아들인 조맹부의 서체가 약 2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고려 충선왕 때 직접 조맹부를 배운 서가(書家)가 많았고, 또 조맹부의 글씨와 그의 법첩이 다량으로 흘러들어와서 그것을 교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435년(세종 17)에는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의 자법(字法)이 해정(楷整)하지 못하다 하여 왕희지체를 본보기로 삼게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양체가 병행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송설체였다. 송설체에 가장 능한 서가는 고려의 이암과 함께 조선 초기의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이다. 이용의 글씨는 송설체를 모방하는 한편, 자기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된 독자성을 나타냈다. 당시의 최고 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에는 호탕하고 늠름하며 품위 또한 높아 당시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선조 이전에 서명(書名)이 높은 사람으로는 강희안(妾希顔)·성임(成任)·정난종(鄭蘭宗)·소세양(蘇世讓)·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 등이 있다. 대체로 조선 전기는 조맹부·왕희지 이외에도 명나라의 문징명·축윤명(祝允明)의 서풍도 들어와 함께 행하여졌다. 그러나 대체로 신라나 고려에 비하면 품격과 기운에서는 다소 쇠퇴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볼 수 있는 시대적 추이였다. 한편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조선시대의 서풍이 크게 변모하였다. 그것은 송설체가 외형적인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나머지 박력이 없이 나약한 데로 흐르는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어떠한 변혁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마침내 유학계에서 일기 시작한 복고사상(復古思想)의 경향에 힘입어 왕희지의 서법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서가가 한호이다. 그는 한국 서예사상 뛰어난 사람으로 진체(晉體;왕희지풍의 체)를 연마하여 해서·행서·초서에 능하였다. 그의 글씨는 중국인들에게까지 극찬을 받았으며, 후대에 전승되어 <석봉체(石峰體)>라 불리었다. 그러나 품격이 낮고 운치와 기백이 부족하여 외형미만을 추구하는 데 그쳤으므로 누기(陋氣)와 속기(俗氣)가 많았다. 이로부터 약 1세기 동안 글씨는 기백과 품격이 떨어지고 속기가 배제되지 않았다. 윤순(尹淳)은 각 체에 능하였는데 특히 행서에서 여러 서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제자 이광사(李匡師)는 새로운 발상으로 서법의 혁신을 시험하여 《원교서결(圓嶠書訣)》을 지어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법의 바른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역량에도 한계가 있어서 필력과 품격이 그의 스승인 윤순을 따르지 못하였다. 이밖에도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는 강세황(姜世晃)이 있는데, 윤순·이광사와 함께 <3대가>라고 불렸으며, 미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편 18세기 말 청나라 고증학풍의 영향으로 금석학이 발달하면서부터 문자의 근원인 고문·전서·예서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글씨를 쓰는 서가들도 현행하는 해서와 행서 이전의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추구하여, 옛 서체의 운필을 배워 해서와 행서에 임하였다. 청나라 고증학자·금석학자의 영향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신위(申緯) 등이 있고, 이들보다 약간 후진으로는 김정희(金正喜)·권돈인(權敦仁)·이상적(李尙迪)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서예에서 가장 큰 혁신을 일으킨 사람이 김정희이다. 그는 처음 안진경과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모방하여 한동안 구양순체를 썼으나, 차츰 독창적 서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서법의 근원을 전한예(前漢隸)에 두고 이 법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전통적인 서법을 깨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서법을 시도하였다. 그의 독창적인 서법은 파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근대적 미의식의 표현을 충분히 발휘하고 중국 서법에 대한 숭상과 추종으로부터 한국 서예의 자주적인 가능성과 의지를 확연히 나타냈던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평가가 더욱 높아졌다. 그러므로 <추사체(秋史體)>라고 불리는 그의 특출한 서체의 출현은 한국 근대서예의 뚜렷한 기점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권돈인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가 모두 우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의 제자에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 등이 있었으나 그의 정신을 체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한글서예
서예는 한자를 대상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한국에는 한글이라는 고유문자가 15세기에 만들어졌으며, 당시로는 그것이 심미(審美)의 대상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예라고 하면 먼저 한자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 오면서 한글 서예가 발달하고, 또 조선말엽에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이루어지면서 한자와 함께 서예의 한 영역이 되었다. 궁체는 맑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다만 여러 체로 다양하게 발달하여 폭넓은 예술성을 지닌 한자와는 성격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한자 필법이 원용(援用)되기는 하나, 문자 구조상의 단순성으로 인해 발달에 한계가 있다. 최근 이러한 제약성을 탈피하기 위해 몇몇 서예가들이 한글 서예의 새로운 형태화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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