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후기의 한글서예

 

조선시대의 한글의 변천사를 짚어보고 한글서예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되어 지금의 한글서예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한글서예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보다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중기의 한글 서예

 

진흘림체 / 한글의 필의를 살려씀 한글서체의 발달사에서 중기의 의미는 창제 때의 음운체계가 조형체계로 전환하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정형화된 궁체로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서 마무리된다고 볼 수 있다. 한글은 창제 이후 음운체계에 따라 공간배분을 일정하게 고정시켰고, 조형의 중심축을 공간 중심축으로 하여 한자와의 혼용을 가능케 하였으나, 중성의 위치편재와 크기의 변화로 조형상의 문제를 일으켰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점진적인 과정에서 조형체계가 결코 음운구조를 변질시키지 않는다는 문자로서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공간의 고정된 배분을 벗어나 글자의 크기에 따른 공간의 자유로운 배분, ,,종성뿐만 아니라 글자와 글자에서도 대립과 종속이 자유롭게 이루어져 폭넓고 다양한 형태로 빠르게 발전하였다. 즉 한글의 음운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 바로 전환의 동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환의 원인과 과정에 대하여 기존의 연구로 필사화에 따른 한문 행초서의 영향 또는 도입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는 유사성을 동질성으로 판단하는 오류에서 생긴 오해였다고 할 수 있다 .

양사헌의 서호별곡(西湖別曲) / 조화체한글의 음운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한 원인에 대하여, 서체발전의 분기와 정치발전의 분기가 거의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이 때 사림들이 향촌 질서의 재건을 위하여 여씨향약 등 많은 언해를 간행, 반포한 사실로부터 한글 사용의 보편화와 사림정치를 연계시키기 쉽다 .

한글은 창제 이후부터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인 친명정책과 성리학적 통치질서에 걸려 조정 및 관서에서는 한문만을 쓰고 한글은 일용 의 편리를 위한 문자로서만 쓰는 사용의 이중성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을 비롯한 왕실에서는 한글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사용함으로 해서 사림들이 집권하였을 때는 이미 전국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이를 통치에 이용하였을 뿐 한글의 사용을 조정 및 관서로 넓히지는 않았다. 사림의 붕당정치는 그 이상과는 달리 당쟁으로 변질되었고, 더욱이 임진·병자 두 오랜 전란으로 사회, 경제는 황폐화되었으며, 반상 지배계급의 착취와 토지겸병 등은 지배와 피지배계급의 대립현상을 낳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반상 지배계급의 조정 관서로의 지향적 관념이 급속히 팽배함으로써 한글은 천대시되어 조정관서로 진출할 수 없는 여자, 서출, 평민 등의 전유물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사림들이 정신적 기초로 삼았던 성리학 또는 예학 등에서 한글에 대한 인식전환의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한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한글을 직접 쓰는 친밀한 관계에서 그 정신적 근원을 찾아야 만 할 것이다.

중기 한글서예의 발전은 선조에서 효종에 이르는 조형체계에서 대립과 종속의 조형세계를 넓혀 가는 단계와, 효종에서 경종에 이르는 넓혀진 조형체계를 하나의 체계로 정형화시키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김성일 글씨 / 이부인에게 쓴 편지조선 중기 한글 서체의 경향

한글 창제에서 선조에 이르는 약 150 년이 지난 이후 일어난 가장 큰 서체상의 변화는 문자의 음운체계에 따른 공간배분에서 조형체계에 따른 공간배분으로의 전환이다. 이 음운체계에서 조형체계 로의 전환은 과도기를 거치며 한글의 음운체계가 갖는 문자로서의 고유성을 살려나가는 방향으로 자리잡혀 나간다고 할 수 있다

 

조형 중심축과 한글, 한자의 혼용

 

한글은 창제 때 한문과의 혼용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창제 이후의 첫 작품인 용비어천가에 이어 훈민정음해례』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상원사중창권선문등 창제 초기뿐만 아니라 약 150 년이 지난 선조 때까지 한문과 혼용되어 써 왔다.

과도기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변화는 첫째, 창제 이후 계속 쓰였던 한글, 한문의 혼용이 한글만으로 정착을 보았고 둘째, 모든 글자가 같은 크기의 공간에 쓰였던 것에서 낱개 글자가 스스로의 크기에 알맞은 공간으로 바뀌었고 셋째, 창제 때 음운체계에 따라 공간과 크기가 일정하게 주어졌던 초··종성이 음운체계의 제한을 벗어나 서로의 공간과 크기를 자유롭게 활용한 점이다.

훈민정음해례에서 비록 자방고전이라 하여 한글을 한자의 고대 서체인 전서(篆書)에서 그 형태를 모방하였다고 하였지만, 최만리 등의 상소에서 한자와는 거리가 먼 형태임을 지적하였듯 이 한글의 형태는 한자와는 완전히 다른 고유한 성격을 갖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자와의 혼용은 한글과 한자, 즉 두 이질적인 서체가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립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면 한글과 한문의 혼용은 이루어질 수 없다.

앞에서 본 혼용의 예들은 바로 한글과 한자가 대립을 극복하고 조화를 위한 시도였다고 하겠다. 이들의 조화는 바로 한글과 한자가 모두 동일한 크기의 공간에 배분되었고, 공간의 중심을 조형의 중심축으로 한다는 공통점에서 가능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글이 초··종성의 공간 배분이 갖는 스스로의 문제로 절대 형태를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때 한자와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공통점을 찾지 못한다면 한자와의 혼용은 불가능해지고 말 것이다.

송시열이 정보연의 부인 민씨에게 쓴 편지중기에 앞서 한글은 벌써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징후 들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한자와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공통점을 찾게 된다. 중기의 초기에 나타나는 새로운 공통점은 기존의 공통점이 붕괴되면서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양사언의 서호별곡과 정철의 시조가 대표적인 예가된다. 이 두 글씨의 공통점은 한글과 한자의 고유성을 서로 파괴하지 않는 가운데 쓰는 이의 의도에 따라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자유로운 크기로 대립을 조화시켰던 것이다. 창제 때 한글·한자가 모두 같은 크기의 공간에 배분되었고 한글은 한글대로, 한자는 한자대로 서로의 크기를 고정시킴으로써 대립을 뚜렷이 한 점과 비교한다면 새로운 공통점임에 틀림없다. 이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서로 다른 공간의 중심을 수직축으로 하여 조형의 중심축으로 한 점이다.

 

· · 종성의 공간배분

 

한글의 창제와 더불어 그 해례에서 제자의(制字義)는 상세히 밝혔지만, 어떻게 써야 한다는 형태에 대해서는 한자의 고대 서체인 전서(蔡書)를 모방하였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그쳤다. 그러나 용비어천가』『훈민정음해례』 『월인천강지곡등 창제 초기의 자료 및 이후 선조에 이르는 자료를 종합하면, 모든 글자를 같은 크기의 공간으로 하였고, 초성과 중성으로 이루어진 글자는 공간을 좌우·상하로 반분하여 왼쪽은 초성, 오른쪽은 중성에 배분하였고, ··종성으로 이루어진 글자는 공간을 상하로 반분하여 위쪽은초성과중성에, 아래쪽은 종성에 배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석보상절의 예에서 보듯이 중성 초출자보다 재출자·상합자·합용자의 가로폭을 조금 넓게 한 것으로 보아 음운체계 에 따른 공간배분의 불합리성을 스스로 인정하였다고 하겠다. 가로보다 세로가 더 길거나 이와 반대로 가로가 더 긴 공간에 있어서 이러한 불합리성은 더욱 두드러져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에서 보듯이 낱개 글자마다 크기가 커지거나 작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음운체계가 갖는 조형상의 문제는 선조 즉위 전후에 이르러 조형체계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정철의 어머니 죽산 안씨가 선조 4(1571) 정철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정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 , 는 조형체계를 따르고 있으나 종성이 오는 글자에서는 여전히 음운체계를 따르고 있다.

인현왕후가 숙휘공주에게 쓴 편지양사언의서호별곡에서도 湖海’, ‘蒼橋難 건너’, ‘세네벋등은 조형체계를, ‘聖人’, ‘세네벋등은 음운체계를 따르고 있다. 선조 2512월 김성일( 金誠一, 1538~94)이 부인에게 쓴 편지와 경북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진주 하씨 묘에서 출토된 곽주(1569~1617), 부인 박씨, 여러 아들 딸 및 사돈 주씨 등이 선조 35(1602)에서 인조 24(1646) 사이에 쓴 수많은 편지 등 자료에서 음운체계보다는 조형 체계가 주도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가사와 숙종 5년 우암 송시열이 69세에 쓴 펀지에 이르러서는 조형체계가 완전히 자리 잡혀 간다고 하겠다.

이상 선조 즉위년 전후에서 숙종 초에 이르는 약 100여년 동안 한 문서체의 영향 또는 도입으로 오해되었던 자료들에서 우리는 음운체계가 갖는 조형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형체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초성과 중성의 대립, ·중성과 종성의 대립이라는 음운체계를 지양하고, ··종성의 음운에 따른 위치·크기에 구애됨이 없이 서로 조형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조형체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러한 발전은 바로 인선왕후, 장렬왕후, 명성황후, 인현왕후 등 거의 함께 살았던 왕후들의 글씨와 송시열이 숙종 13년 며느리에게 대필케 한 편지의 글씨가 앞의 자료와 비교할 때 뿌리를 달리한 서체가 아니라 바로 조형체계의 적극적인 발전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왕후들의 글씨는 바로 오른쪽에 있는 종성 를 한 수직축으로 하고, 초성과 종성의 오른쪽 성분을 같은 수직축으로 하는 조형체계의 정형화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정형화를 '궁체'로 불러왔는데, 왕후들의 글씨를 궁체의 동태적 형태라고 한다면 숙종과 숙명공주의 글씨는 정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 · 종성의종속화

 

곽주가 장모에게 쓴 문안지음운체계에서 초성과 중성, ·중성과 종성의 결합은 공간의 반분(半分) 으로 대립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공간의 반분이 무너지면서 음운체계는 음운구조로서만 작용하고 그 시각적 표현형태는 조형체계로 새롭게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새로운 조형체계에서 초··종성이 서로 어울릴 때 대립의 관계뿐만 아니라 종속화의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종속화의 대표적인 예는 효종어찰과 곽주 일가의 글씨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효종어찰의 '후에'''는 음운체계에서는 +이지만 조형 체계에서는 +로 중성 를 초성에 끌어들여 의 대립관계로 바꾸었다. 여기서 우리는 초성 이 중성부분인 를 종속화 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어시니에서 어시는 초성 ,이 중성 ,를 종속시키고, ‘는 중성 가 초성 을 종속시켰다고 할 수 있다. 효종어찰의 짐녁에서는 중성 ,가 종성 ,을 종속시켜 초성 ,과 대립케 하였다. 효종의 글씨에서는 음운체계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롭게 종속시킴으로써 쓰는 이의 의도에 따라 문장의 흐름을 시각화하고 있다.

이러한 종속화는 붓의 흐름을 이음으로써 부드럽게 할 뿐만 아니라 곽주의 4남 형창이 어머니 하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문장의 흐름에서 쓰는 이의 감정까지도 읽게 한다. 이는 음운체계에 따라 썼던 선조 이전의 글씨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것으로 조형체계의 종속화에서 비로소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초··종성 또는 글자와 글자의 종속화는 한글의 형태를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변환을 추구케 하였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의 한글서예

 

조선 후기 180여 년간은 조선시대 제2의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 시기로부터 외척의 세도정치에 휘말렸던 순조·헌종·철종시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시기인 고종 전기, 새로운 개방시기인 갑오경장 이후 고종 후기, 그리고 조선시대가 끝을 맺는 혼란시기인 순종 4(1910)까지인데, 이 시기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면에 있어서 부흥에서 침체시기로 급락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한글문화·예술도 한글 보급·사용이나 서지학적 측면 또는 한글의 서예술화 등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거쳐 왔으나 한글이 언문으로 천대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큰 발전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 시기는 한문 서예 변천시기로 보아 원교 이광사(1705~77)가 왕희지체에 근원한 동국진체를 체계화한 시대이며, 이를 비판한 청나라의 비학파 서론을 받아들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서론을 체계화하거나 금석학을 연구하는 등 추사서예의 번영시대였다. 이어 서 청나라와의 교류가 왕성해지면서 한문서예는 변영시기를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개화기를 전후하여 이상적(1804~65) 같은 중인 계층 서예인들의 활동도 있었다.

한문 서예사를 고찰하는데 명필가들의 육필인 필사류 자료, 금석문의 글씨, 각종 판본류의 글씨 등이 연구대상이 되듯이 한글서예사도 필사류, 판본류의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여야 된다.

한글 판본류 자료로는 목판인쇄본, 목활자인쇄본, 금속활자인쇄본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필사류 자료보다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필사류 자료에는 궁중에서 쓰인 등서본과 편지글들이 있고, 또한 일반계 층에서 쓰인 필사본과 편지글들이 있으나 정식 작품으로 제작된 것은 현존하는 것이 없어서 한글 서예사를 고찰하는데 자료의 빈곤을 느끼게 된다. 다행히 판본류에 나타난 글씨는 역대 명필가나 사자관이 쓴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서예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영조 시기 (1725~76)

문예 부흥기와 한글문화

 

영조 원년 1725년부터 말년인 1776년까지의 재위 기간 52년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세종 시기와 더불어 제2의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다.

영조는 조선 역대 왕 중에 가장 오랜 기간을 재위하였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문예부흥에 힘썼는데 이중 인쇄술을 발전시켜 많은 전적(典籍)을 직접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고 전적간행에 필요한 활자를 개량하는데 당대의 명필가의 글씨를 활자체로 쓰도록 한 것은 서예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때에 만들어진 한글 활자로는 1734년에 나온 경서 정음자 병용(經書正音字竝用) 한글 나무활자와 1772년에 나온 임진자 병용(壬辰字竝用) 한글 나무활자 등이 있는데, 이 활자를 이용하여 한글관계의 많은 책을 찍어냈다.

문예전성기인 이때에는 청구영언』『춘향젊』『숙향전』『이륜행실도등 한문, 한글 문예지, 번역서, 교양서 등을 많이 출간하였다. 특히 한문책을 번역하기 위하여 사역원을 두기도 했다. 영조 시기의 번역활동, 즉 언해사업은 많은 종류의 책을 간행하였는데 책 이름머리에 어제(御製) 라는 이름을 붙였고 끝부분에는 언해(諺解)라는 서명을 쓰게 하였다. 그 예로 어제여사서언해』『어제소학언해등이 있다.

 

이렇게 언해사업을 펼쳐서 복잡한 자모음 쓰기를 간소화하여 한글 의 간편화시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글자의 받침으로 쓰던 이 없어지고 ,,,,,,7 종성만 쓰는등 새로운 맞춤법이 사용되었다. 이때의 한글은 서예글씨가 아니라 주로 실용을 목적으로한 일기나 편지, 소설 베끼기 등에 사용되었다.

판본류 전적 간행과 한글 서체의 개발

영조조에는 수많은 한글 언해본이 발간됨 에 따라 1734년에 경서 정음자 병용 한글자, 1772년에 임진자 병용 한글자 등 활자가 새로 개발되었다. 이 활지들은 조선 중기의 한글 인서체와는 그 자형이 달랐다. 조선 중기보다 점획이 부드러워지고 자모음 크기의 차이를 더 많이 나타내어 상하로 긴 자형이 이루어졌다. 조선 중기에 나 온 글자는 가로서선을 대체로 수평으로 나타낸 것에 비하여 이 시기부터는 오른쪽 부분을 약간 올려서 사향지게 나타내는 특징이 보이기 시작 하였다.

이같이 변화된 한글 관계 판본류 전적으로는 조선에서 낸 왕실판본, 사찰에서 낸 사찰판본, 서원에서 낸 서원판본, 지방에서 낸 방각본, 사가에서 낸 사가본 등 이 있는데 활자나 판본의 자체가 다양하다.

 

사대부가의 편지글씨와 조화체

 

정조 시기에는 많은 판 본류의 서적들이 남아 있어 한글 글씨체를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만 필사류의 자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김노경(西堂 金魯敬, 1766~1837)의 편지 글씨와 그의 부인, 즉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생모인 유씨(兪民)의 편지 글씨, 그리고 정약용의 글씨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노경이 25세때 자당 윤씨에게 쓴 편지김노경은 추사의 부친으로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西堂)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180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과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나온 유당의 편지 글씨는 과거급제 이전 정조 15(1791) 25세 때 말직에 근무할 당시 어머니 윤씨에게 모친을 잘 모시지 못함에 대한 내용을 쓴 서간문이다. 또 노년인 1823년에 쓴 편지 글씨는 한문의 필의를 살려 각 글자를 계속 연결하여 힘차게 쓴 글씨이다.

1791년에 쓴 편지 글씨의 사연은 전부 한글로, 쓴 날짜와 이름만을 한자로 썼고 글씨체는 일반적으로 연이어 흘려 쓴 펀지 글씨와 다르게 또박또박 정자 또는 반흘림으로 쓰는 등 보기드물게 띄어쓰기를 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렇게 쓴 글씨 중에는 두세 글자씩 연결된 흘림체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글씨는 그가 50대 후반에 쓴 편지 글씨와는 아주 다른 느낌을 풍긴다. 세로서선은 입필 부분을 굵고 뭉뚝하게, 송수필 부분을 갑자기 가늘어진 송곳모양의 직선형으로 힘차게 썼으며, 종모음자에서 왼쪽 자음을 오른쪽 모음의 세로서선 중간 또는 아래 위치에 결구시켜 쓴 것이 특정이다. 글자의 결구형식을 보면 횡모음으로 이루어진 글자는 ,,,,등의 가로서선을 극히 짧게 나타내어 세로 방향으로의 흐름을 더욱 빠르고 유연하게 나타냈다.

추사 김정희의 생모이며 김노경의 부인인 유씨(兪民)가 김노경 25세 때인 1791년에 남편에게 쓴 편지는 앞에서와 같이 김노경이 외지에서 살고 있을 때 남편의 의복조달 관계에 대한 내용을 주로 쓴 것 이다.

궁체의 서간체 흘림필법으로 유창하게 흘려 쓴 수준 높은 글씨이다. 오히려 같은 시기에 쓴 남편의 편지글씨보다도 글씨의 조형미가 뛰어나 보인다. 글자의 자모음 획간의 대소·조세의 표현, 자연스런 글자간의 연결서선, 자모음을 생략화한 획형 등 모두가 서간체로서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아낸다. 특히 앞의 글자와 연결되어 표현된 의 생략된 획형, 굽혔으나 힘차게 펴지는 듯하면서도 유연한 세로서선 등이 남필인 추사 김정희 서간문과 흡사한 느낌을 풍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購, 1762~1836)은 자하 신위, 유당 김노경과 비슷한 시기의 사람으로 수많은 책을 저술한 대실학자이며 한문글씨 명필가이다. 그가 70세인 순조 31(1831)에 쓴 한문 편지 중의 한글 문구는 한문의 필의를 살려 소박한 맛이 나게 조화롭게 쓴 것으로 평가된다.

 

십구사략언해순조 · 헌종시기 (1801~49)

사가 목판, 활자본 발간과 한글 서체의 다양화

 

순조 · 헌종 시기에는 관 주도의 판본류의 전적보다는 개인 또는 상업적인 책들이 많이 나왔다. 앞에서 밝혔듯이 1816년에 박종경 개인이 만든 전사자 병용(全史字竝用) 한글자가 나왔고, 1810년에몽유편을 찍은 장혼이 글씨를 써서 만든 장혼 한글자본이 나왔다. 또 지방에서는 대구지방의 달성방각본, 서울지방의 경판방각본, 전주지방의 완산방각본이 나와서 글씨체가 매우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주요 문헌은 다음과 같다

태교신기언해(胎敎新記諺解)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 천자문(千字文) 신간증보삼략직해 ( 新刊增補三略直解) 삼서삼경(三書三經) 몽유편(夢喩編) 대학언해(大學諺解) 중용언해(中庸諺解) 척아윤음조웅전(趙雄傳)

 

궁중 · 일반 언간 글씨의 성숙, 발전

 

서기이씨의 글씨순조 · 헌종 시기에는 숙종 때부터 펴기 시작한 궁체가 더욱 성숙한 발전을 하였다. 특히 궁중에서 언해본의 활용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각종 소설류의 책을 베끼는 일, 편지를 대필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이것을 전문적으로 언문글씨로 필사하는 서사상궁까지 두어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쓰는데 더욱 노력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궁중에서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와 딸 덕온공주가 궁체의 흘림을 잘 썼고, 익종(1809~30, 순조 아들)비 신정왕후의 언간을 대필한 천 상궁이나 서기 이씨가 궁체를 아름답게 잘 썼다. 그리고 헌종의 비 명헌왕후 홍씨의 편지글을 대필한 현상궁은, 조선 말기의 궁체를 잘 쓴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일반인들의 글씨 중에는 추사 김정희와 1824년에 언문지를 지은 류희(1773~1837)부인 권씨가 쓴 언간 등이 당시 사대부 집안의 언문체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1789~1857)가 직접 쓴 언간글씨는 글자 간에 부드럽고도 자연스러운 연결서선을 나타냈고, 남필다운 힘찬 맛이 나게 쓴 수준 높은 어필이다. 글자 크기의 대소 변화가 적고 대체로 키가 작은 자형의 글씨를 썼으며, 세로서선의 입필부분 획형을 강하게 각이 진 형태로 나타냈다. 이 편지 글씨에는 상궁이 대필한 것이 아닌 왕비의 친필임을 증명하는 덕온공주 아들 윤용구(石村 尹用求, 1853~1939)의 날인과 윤용구의 딸윤백영(1888~1986)의 글씨가 쓰여 있다.

순조의 딸 덕온공주 즉 서화가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윤용구의 어머니는 서사상궁들의 궁체 못지 않게 글씨를 잘 썼다. 그의 손녀 윤백영 역시 궁체를 현대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명필가문의 3대라고 할 수 있다. 남아있는 글씨로 춘년이란 친필이 있는데 이 글씨는 큰 글자, 작은 글자를 같이 배열하였고, 글자의 대소변화,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필력,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느낌이 나도록 조형미가 뛰어나게 쓴 궁체로 평가된다.

익종의 비 선정왕후 조씨(1808~90)의 큰방 천상궁은 조선 말기 궁중왕실 편지 글씨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정도로 봉서체(편지글씨체)를 잘 썼다. 그리고 신정왕후 큰방상궁 천씨의 글씨를 대필하던 서기 이씨는 국문(한글)글씨를 잘 쓴 조선왕조 오백 년 제일가는 명필 이라고 사후당 윤백영이 그의 글씨에 해제하였듯이 아름답고 짜임새 있는 궁체를 잘 썼다. 서기 이씨의 글씨는 여성다운 부드러운 맛이 있으면서도 힘찬 맛을 풍긴다. 즉 글자간의 힘찬 연결서선에 대한 표현, 글자간의 대소표현이 한글 흘림글씨의 멋진 맛을 그윽하게 나타낸다.

현종의 후궁 경민순화궁 큰방상궁인 현씨의 글씨헌종의 후궁 큰방의 상궁인 현상궁은 자모음의 획형을 극히 생략하여 키가 작은 느낌의 흘림글씨를 썼는데 대단히 힘찬 필력을 나타내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현상궁은 헌종의 계비 명헌왕후 홍씨의 편지글도 대필하는 등 궁인으로서 아름다운 글씨를 많이 썼다.

궁중에서 궁체를 많이 사용한 반면에 일반인들은 궁체와 다른 느낌의 자연스런 글씨를 많이 썼다. 남성들이 쓴 언간문은 대개 딸, 며느리, 부인, 모친 등 여성들에게 많이 쓴 것으로 나타났다.

추사 김정희는 한문 서예 못지않게 한글 편지 글씨의 서체미도 대단히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언간은 181833세 때 쓴 편지로 부터 59세인 1844년에 제주유배지에서 충남 예산에 사는 며느리에게 쓴 편지 등 40여 편이 현존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중 38편이 부인에게 쓴 것, 2편이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김정희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추사의 언간은 용지 크기가 세로폭이 2O~3Ocm이고, 가로폭은 짧은 것은 35cm, 긴 것은 102cm나 되며, 1 편의 글자 수는 200~650여 자가 되고, 대부분 글자 사이를 연결하여 쓴 완전한 흘럼체이다. 문장의 끝부분에 쓴 날짜, 그리고 수결, 이름, 자 등을 썼다. 이 글씨는 서선의 방향이 대부분 사향이고 글자의 크기를 조화롭게, 문자간의 연결서선을 비백으로 잘 나타냈다. 또 자모음 획형의 생략과 조세의 변화, 방향의 자유로운 운필 등의 표현을 한문 행서의 다양한 표현 못지않게 나타냈다.

조선시대언문지의 작가 류희(1773~1837)의 재취부인인 안동 권씨가 남긴 편지 글씨는 일반 언문지와 같은 형식으로 여백부분에까지 돌려가며 빽빽하게 썼다. 키가 작은 자형의 이 언간은 많이 흘려쓰지 않았고, 부드럽고 여성다운 맛이 풍긴다. 종모음자의 세로서선을 굽은 획형으로 운필하여 나타낸 것은 추사 김정희 서간문 한글편지의 획형과 유사하다. 1700~l800 년대의 모든 서간문은 배자 · 글씨체 ? 문장서술형식 등에서 공통점이 많이 나타난다. 김노경이 1791년에 쓴 편지 규격(283 × 242cm)과 류희 부인의 편지 용지 규격(283 × 242cm)이 유사한 것을 그 예로 볼 수 있다.

 

철종 · 고종 시기 (1850~93)

세도 · 수렴정치와 한글 침장기

 

이 시기는 조선조 25대 철종 재위(1850~63) 14년간과 고종 재위(1864~93, 갑오경장 직전) 30년 간이다. 고종 재위 30 년 중에는 대원군 섭정기간 10(1864~73)이 포함된다.

철종 재위기간은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1789 ~1857)가 수렴청정하는 등 안동 김씨가 섭정하였고, 민란이 잇따라 일어났던 혼란기였다. 이어서 영조의 현손이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재황(載晃, 1852~1918)이 어린 나이에 고종으로 즉위하였으나 부친이 10년간 섭정하면서 전국의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등 폭정을 하였고, 그 후 고종 19(1882)에 임오군란, 고종 21(1884)에 갑신정변 등 국내의 사정이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1894년 갑오경장 전까지는 쇄국정책에 의한 어두운 시기였다.

한글의 보급, 활용의 시기로 보아 한글의 침장기였고, 인쇄·출판문화 역시 쇠퇴기였다고 볼 수 있다. 철종 8(1857)에는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가 불타는 바람에 새로 재주 정리자와 삼주 한구자를 주조하였고, 고종 17(1880)에 최지혁의 글씨체로 신연활자(新鉛活字)를 만드는 정도였다.

 

구활자 말기와 새활자체의 등장

 

우리나라 책 출판의 근대 인쇄의 효시인 최지혁의 글씨체로 만든 한글 선연활자, 즉 납활자가 처음 나와 한불사전(1880), 한어문전(1881) 등을 출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3 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신연활자를 도입하여한성순보를 찍는 등 출판문화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선연활자는 서예 측면에서 볼때에는 그려서 만든 언서체이기 때문에 활용가치가 없는 편이다.

나무 목판으로 찍어낸 책으로는 태상감응편도설언해』 『태상감응편』『삼성훈경』『경신록언해』『중용언해등이 나왔고, 방각본으로는춘향전』『삼국지』『유충열전등이 나왔다.

 

궁체등서본과 서간체의 완숙기

 

1800년 후기는 궁중서체 발전의 절정기이며 결실기라고 할 수 있다. 숙종시기경부터 시작된 궁체는 영·정조시기를 거치며 더욱 발달되었고, 순조 ~ 고종시기에 이르러 등서본 글씨나 서간체 글씨가 완숙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등서본의 궁체는 연대와 필사자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서간류의 궁체는 시기나 필사자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l800년대 후기 익종·신정왕후에 소속된 천상궁과 서기 이씨, 헌종 시기의 현상궁, 고종 시기의 하상궁과 서희순상궁 등이 궁중서간문을 잘 쓴 서사상궁들이었다.

후수호전이같은 궁중글씨 중에서 등서본은 1981년부터 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 소장하기 전까지는 창경궁의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었다. 장서각은 순종 2(1908) 황실 직속 도서관으로 개관한 이래 1969년까지 낙선재의 한글 소설류와 칠궁 등 여러 서고의 것을 통합하여 4718책을 소장 하였었다. 이중 궁체 전적은 200여 종 2400여 책이 있었다.

이와 같은 등서류 궁체 중에서 한 면에 10행씩 배자하여 정연하게 쓴옥원중회원 권지육은 정자체 필사본 중 가장 아름답게 쓴 것으로 평가된다. 옥원중회연은 부드러운 듯하면서 강한 서선, 자모음자간의 짜임새 있는 배획, 서선 굵기의 조화로운 표현등 문자의 조형미와, 배자의 정연미등이 뛰어난 필사본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흘림체 필사본으로는옥원중회연권지십팔』 『후수호전등이 있다.

조선말기 궁중서체 중에서 왕족의 편지글을 상궁들이 대필하여 쓴 서간류의 글씨에는 순조, 익종, 헌종, 철종, 고종, 그리고 여러 왕후, 흥선대원군, 덕온공주(윤용구의 모친)등 왕족끼리 주고받았던 편지글씨가 있다. 윤용구 댁을 중심으로 생질부, 시고모, 내종사촌간에 오고 간 편지가 윤용구댁에 많이 보관되었던 것이 윤용구의 딸 사후 당 윤백영을 거쳐 오늘날 공개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글씨를 윤백영이 더욱 익혀 오늘날 궁체쓰기의 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고종조 시기에 명성왕후 민 씨의 서간문을 대필하여 아름다운 글씨를 썼던 상궁에는 하상궁, 서싱궁(서희순)등이 있다.

대원군의 편지글씨이 시기에 궁체의 등서체나 서간체가 아닌 서풍으로 쓴 사대부나 일반인들이 쓴 글씨는 한문을 썼던 필의를 살려 쓴 것이 대부분이다. 한문과 사군자분야의 대가로 손꼽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98)의 한글 필체의 특징은 임오군란(1872~76)때 청국으로 납치당하여 간 후 본가 의 부인과 아들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72720일에 중국 천진에서 아들 재연에게 쓴 편지, 18721012일에 부인에게 쓴 편지, 18721019일에 아들에게 쓴 한글편지에는 한글의 힘찬 필력이 나타나 있다. 서선의 굵고 가늚의 차이를 많이 나타낸 획형과 곧고 굽은 서선의 조화로운 표현, 문자간의 힘찬 운필, 문자의 대소표현 등 한글 흘림의 조형미를 한껏 표현한 글씨이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언문이 많이 쓰였는데 한자의 필의를 살려 필법에 구애됨이 없이 시원하게, 그리고 강하게 문자의 대소변화를 주어 소박하게 쓴 글씨들이 지방 선비들 사이에서 많이 쓰였다.

 

고종 · 순종시기 (1894~1910)

개화기와 국문시대의 열림

 

갑오경장 이후 한문 존중의 시기를 벗어나 언문이란 말이 사라지면서 소설, 예술, 종교 등 각종 저서에 한글만을 쓰게 되는 한글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한글 보급·활용의 시기로 볼 때 한글각성시기(1894~1944)이고, 한글 명칭의 시기로는 국문시기(1894 ~1910)이며, 활자의 시기로는 새활자의 도입교체기(1864~1909)에 속한다.

한글 부흥기에는 구당 유길준(矩堂 兪吉濬, 1856~1914)이 유학 후 귀국하여 국문으로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고, 고종 32(1895)에는 법률?공문을 국문으로 본을 삼게 하였으며, 각종 교과서와 신문 등도 한글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 고종 32(1895)에는 학부 편집국에서 학부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교과서를 찍었고, 고종 35(1898)에는 재주 정리자 병용 한글자본으로 심상소학을 찍기도 했다.

 

방각본의 일반 보급과 서체의 변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1910년까지는 새활자 도입교체기였기 때문에 목판본, 목활자본, 금속활자본, 석인판본 등 다양한 판본류가 있고 글씨체 역시 딱딱한 인서체, 부드러운 필서체나 필사체, 새로운 명조체 등 다양한 자체들이 공존하였다.

고종 32(1895)에 나온국민소학독본』『조선지지』『만국지지의 글자는 조선개국 504년에 학부 편집국이 만든 학부 인서체 병용 한글자(목활자)와 후기 교서관 인서체 금속활자와 혼용해서 찍어낸 것이다. 이것은 한자나 한글의 자체가 고르지 못하여 산만한 느낌이 나며, 한글의 글자 서선이 너무 가늘고 기울기도 일정하지 않아 자모음간의 결구가 바르게 되지 않았다.

고종 33~35(1896~98)에 나온신정심상소학 1 은 철종 9(1858)에 주조한 재주 정리자 병용 한글자본으로 쩍은 것이다. 한자는 한자 명조체와 비슷하고 한글은 붓으로 쓴 듯한 느낌의 부드러운 글씨체로 나타냈다. 글자의 자형은 초주 정리자로 찍은 오륜행실도(1797) 의 한글자보다 가로쪽을 크게 하여 키를 작게 나타냈다. 자모음간의 결구상태는 약간 불안한 듯하고 서선의 기울기도 일정하지 못한 편이다.

목판본 중 방각본보다 다른 서체, 배자 등으로 찍어낸 국문정리(1897) 는 자음은 아주 작게, 모음은 크게 나타내어 현대 문자 명조체의 느낌이 나면서도 붓으로 쓴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가로서선의 오른쪽은 수평보다 올라가게, 세로서선은 수직으로 나타내되 글자에 따라 운필방향을 서로 다르게 나타내었기 때문에 정연하지 못하다.

또 목판 중 계선 안에 큰 글자, 작은 글자를 병행 배자하여 찍어낸경신록언해(1902)의 글자는 1880년에 찍어낸 것과 비슷한데 자형이 정사각형에 가깝고 모든 자모음의 가로서선은 수평으로, 세로서선은 수직으로 나타내어 정지된듯한 느낌이 나고, · · 종성 합자 의 종성 크기를 대체로 크게 나타냈다.

목판본 중 방각본은 1800년대 후기부터 출판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소설을 목판에 새겨서 출간한 방각본에 나타나는 글자는 자형이 서로 비슷하며 소박한 멋이 풍긴다. 이 시기의 방각본으로는화용도(1907~8),유충열전(1904),초한전(1907) 등이 있다.

 

궁체의 현대화 가교 역할

 

1894년 갑오경장부터 1910년 한일합방시기까지는 사후당 윤백영과 한서 남궁억 등이 한글궁체쓰기의 맥을 이었다.

윤백영은 가정에서 할머니 덕온공주, 아버지 윤용구, 어머니 정경부인에게 온익종비의 서간문, 헌종비의 서간문, 철종비의 서간문, 고종비의 서간문 등 궁중으로부터 온 왕비의 친필, 상궁의 대필서간문을 많이 접하기도 한 궁체의 마지막 산증인이었다. 특히 그는 한글 서예로서는 처음으로 낙관형식을 갖춘 한글 서예작품을 쓴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1921년에 궁체반흘림으로 쓴 송인종황제 권학서가 있다.

1398년에황성신문사장을 지낸 남궁억은 1910년에 한글을 바르게 쓸 수 있는신편언문체법을 썼다고 한다.

이같은 사후당 윤백영, 한서 남궁억은 궁체 쓰기 발전에 공헌한 큰 공로자로 손꼽을 수 있는 한글서예가였다.

 

이 글의 조선 중기 부분은 김세호씨의 연구 논문을 , 후기 부분은 박병천씨의 논문을 정리 · 요약한 것이다 .

'서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黃子元 閒架結構摘要九十二法  (0) 2024.01.23
서예한글  (0) 2023.03.06
서예체본  (0) 2023.03.06
왕희지 난정서  (1) 2023.01.13
嘉言集2.  (0) 2023.01.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