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王羲之)307-365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자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句)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智鑒)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孫綽)·이충(李充)·허순(許詢)·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 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주요작품)
난정서(蘭亭敍)
난정서는 천하 제일의 행서로 여겨진다. 진(晉)나라 목제 영화9년(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는 사안등 41명과 함께 회계의 산음(山陰)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성대한 계사를 거행하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서 시를 지었는데 당시 나이 51세인 왕희지는 거나게 술을 마신 뒤 잠견지(蠶繭紙)에다 서수필(鼠鬚筆) 을 사용하여 단숨에 천고의 명작이라고 알려진 [난정서]를 썼다. 전문은 모두 28행으로 전체의 글자수는 324자이다. 작품 전체가 굳세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충만되고, 종회의 형세의 변화가 무궁하며 행서에서 볼수 있는 기복과 변화, 강한 리듬감, 형태의 다양한 변화, 점획의 서로 상응하는 것들이 충분히 표현된 작품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희지의 난정서는 그의 7대손인 지영에게 전해졌으며, 지영이 다시 제자인 변재에게 이를 물려 주었다. 당 태종은 어사인 소익을 변재가 있는 곳으로 파견하여 그를 속여서 [난정서]를 취한 다음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에게 임모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진본은 당태종의 부장물이 되었으며 지금 전해지는 것은 당나라때 임모본이 전해진다.
십칠첩(十七帖)
이 법첩 첫머리에 십칠일선서(十七日先書)가 나오므로 법첩 전체를 십칠첩으로 일컬었다. 옛날부터 초서(草書)의 전형으로 존중되었으며, 왕희지 초서 연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자료이다.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은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그 수집에 전력을 다하였고, 그는 왕희지의 글씨 3,000여 장을 모아 이를 분류 정리하여 80첩을 만들었다. 십칠첩은 그 중의 하나로, 일민첩(逸民帖)을 비롯, 29점이 수록되어 있다.
서예사적 가치
왕희지는 중국 서예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예가라면 누구나 할것없이 왕희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수 있다.
천하제일의 "난정서"를 비롯하여 왕희지의 작품 또한 어느 누구도 따라 갈수 없는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서예가 왕희지는 앞으로도 서예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참고서적
난정서(석곡실상해법서선5):이화출판사
난정서(1974년) 서울:왕서각
서예기법시리즈(1973) 서울:시청각교육사
행서 난정서 서울:우람문화사
왕희지난정서(1975) 송원문화서
신룡본난정서
왕희지가 썼다는 불후의 명작 <<난정서>>는 지금 임모본(진본을 보고 배껴서 쓴 글)은 남아 있지만, 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 왕희지가 <<난정서>>를 가전의 보물로 대대로 전해주고, 왕희지의 7대손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지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후손을 남기지 않았으며, 왕희지의 <<난정서>>를 제자인 판재화상(辦才和尙)에게 전했다고 한다.
2. 당나라 초기에 들어, 당태종 이세민은 왕희지의 글을 매우 좋아하여 전국의 왕희지의 글씨를 수집하고, 왕희지의 글을 가지고 서예를 연습하였다. 특히 <<난정서>>의 진본은 매우 귀하게 여겨 여러차례에 걸쳐 높은 대가를 내걸고 진본을 구하였으나, 얻지를 못하였다. 나중에 <<난정서>>의 진본이 회계의 변재라는 화상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당태종은 그에게서 <<난정서>>진본을 빼앗아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난정서>>가 당태종의 사망시 그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때에 이러한 내용을 기재한 글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유송(柳悚)의 <<수당가화(隋唐嘉話)>>라는 글인데, 거기에 의하면 "왕우군의 <<난정서>>는 .... 제자인 중 변재가 얻었다. 태종이 진왕이 된 후에 탁본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여 고가를 걸고 구했으나 결국 얻지 못하였다. 나중에 변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소익을 월주로 보내서 얻도록 하였고, 무덕4년에 진왕 이세민의 손에 들어왔다. 정관 10년 탁본 10개를 만들어 가까운 신하들에게 선물하였다. 황제가 죽자, 중서령 저수량은 난정은 선제께서 아끼시던 물건이니 세상에 남겨둘 수 없다고 하고 비밀리에 소릉(당태종의 능)에 묻었다."
또 하나는 <<태평광기(太平廣記)>>인데 내용은 수당가화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정관시대에 태종은 이왕의 서법을 뱅고자 하였고, 진본, 모사본이 많이 있었으나, 오직 난정서만 구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변재에게 있는 것을 알고 3번이나 보여달라고 하였으나, 변재는 전란중에 잃어버려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을 고하였다. 방현령이 감찰어사 소익을 보내어서 지혜로 이를 얻게 하였다. 소익은 신분을 감추고 낙척서생인 것처럼 하여, 변재에게 접근하여 바둑을 두고 시를 읊었고, 글과 그림을 같이 하며 망년지교가 되었다. 나중에 변재가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물건들을 자랑하며 서까래에서 난정서 진본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소익이 후에 몰래 난정서 진본을 꺼내서 장안으로 가지고 왔다. 태종은 몇개의 탁본은 태자, 여러 왕, 가까운 신하에게 주었다. 임종때 이치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한테 한가지 물건만 부탁하자. 너는 효자이니, 내 말을 어기지는 않겠지. 어떠냐"라고 하며 난정서를 원했고, 난정서 진본은 소릉에 부장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변재의 제자인 원소(元素)가 영흥자 지영선사의 친척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두 책의 내용은 비록 구체적인 점에서는 약간 다르지만, 대체로 같으며, 특히 당태종의 소릉에 부장되었다는 점은 완전히 일치한다.
3. <<신오대사. 온도전>>에 따르면, 후량의 요주절도사인 온도는 소릉을 도굴했다고 한다. "온도는 ... 종왕의 필적을 보니 종이와 글씨가 새 것과 같았고, 온도는 이를 취하여서 후세에 전하였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왕희지의 난정서는 온도에 의하여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4. 송나라 때의 채정의 발문을 보면 난정서를 부장할 때, 이세민의 누이와 여동생은 가짜로 바꿔치기를 하여, 진본은 세상에 남겨두었다고 한다. 이후에 진본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하여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수수께끼중의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5. 현재 전해지는 <<난정서>>는 모두 진본이 아니고, 석각본, 모본(摹本) 또는 임본(臨本)이다. 유명한 것으로는 "정무난정(亭武蘭亭)"으로 구양순이 진본을 보고 배껴서 ㄱ돌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북송시대에 하북 정무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정무난정이라고 한다. "신룡본난정(神龍本蘭亭)"은 당나라때 모본에 '신룡'이라는 작은 도장이 찍혀있어서 신룡본이라고 한다. 당태종이 풍승소에게 명해서 쓰게 한 것이다. 이 신룡본은 송나라때 고종의 손에 들어갔다가, 원나라초에 곽천석이 얻었고, 나중에 항원변에게 넘어갔다가, 청나라때 건륭의 손에 들어갔으며, 현재 북경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蘭亭序
永和九年, 歲在癸丑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 又有淸流激湍, 暎帶左右. 引以爲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叙幽情.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聘懷, 足以極視聽之娛信可樂也.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晤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 欣於所遇, 蹔得於己, 快然自足, 曾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旣倦, 情陏事遷, 感慨係之矣. 向之所欣, 俛仰之間, 以爲陳迹, 猶不能不以之興懷. 況脩短陏化, 終期於盡. 古人 云: "死生亦大矣." 豈不痛哉?
每攬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固知一死生, 爲虛誕, 齊彭觴爲妄作.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悲夫. 故列叙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동진 永和 연간 九年 癸丑 삼월 삼일에 會稽郡 山陰縣의 蘭亭에 祓禊를 하러 모였다. 뭇 어진 사람들과 젊은이와 어른들이 다 모였다. 이 곳은 산과 등성이가 높고 숲이 무성하고 대나무가 수려하며 또 맑게 흐르는 냇물과 급한 개울이 좌우로 흘러 아름다운 경치가 비치고 있다. 개울물을 끌어 술잔이 흐르는 물길을 만들고 거기에 차례로 둘러 않으니 비록 사현과 관현의 성대한 준비는 없어도 한 잔 술에 시 한수를 읊으니 이 역시 흉금을 털 놓고 그윽한 정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 날은 하늘이 맑고 기온이 청명하고 봄바람이 온화하고 산뜻하다. 머리를 들어 우주의 광대함을 살피고 고개를 숙여 만물의 무성함을 살핀다. 이에 눈으로 사방을 두루 바라보고 회포를 폄으로써 족히 보고 듣는 즐거움을 다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대저 사람들의 교류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데, 혹자는 마음속의 품은 정을 실내에서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혹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에 감정을 의지하여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아니 하고 방종하기도 한다. 비록 좋아하고 싫어함이 서로 많이 달라서 혹은 고요함을 혹은 움직임을 좋아함이 서로 달라서, 사람들이 사물로 인해 기쁨을 찾았을 때는 잠시 득의양양하여 즐거움에 만족하여 장차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던 사물에 대해 권태로움을 느끼게 되면 그 마음이 상황에 따라 변화하여 감개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되면 지난날 기뻐했던 일들이 머리를 드는 잠깐사이에 옛 자취가 되고, 그것 때문에 감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물며 길고 짧은 생명은 자연의 조화에 따라 정해지고 마침내는 다하고 마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죽고 사는 것은 큰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매번 옛 사람들의 감회가 일어나 연유를 살펴보게 되면 나의 경우와 모두 한결 같이 부합한다. 일찍이 고인의 문장을 읽으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감회의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으니, 진실로 살고 죽음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팽조와 같이 장수하는 것과 20세에 요절하는 것을 같이 본다는 것이 망령된 행동임을 알겠다.
뒷날의 사람들이 오늘을 보는 것은 또한 지금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일지니 정말 슬프도다. 그래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순서대로 적고 그들의 시문을 기록 하는 것이다. 비록 세대가 바뀌고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감회를 일으키는 이치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훗날 이 글을 읽게 되는 사람 또한 이 문장에 대한 감회가 있을 것이리라!
永和九年,即癸丑年,三月之初,(名士们)在会稽郡山阴县的兰亭聚会,为的是到水边进行消灾求福的活动。许多有声望有才气的人都来了,有年轻的,也有年长的。这里有高大的山和险峻的岭,有茂密的树林和高高的竹子,又有清水急流,(在亭的)左右辉映环绕。把水引到(亭中)的环形水渠里来,让酒杯飘流水上(供人们取饮)。人们在曲水旁边排列而坐,虽然没有管弦齐奏的盛况,(可是)一边饮酒一边赋诗,也足以痛快地表达各自幽雅的情怀。这一天,天气晴朗,和风轻轻吹来。向上看,天空广大无边,向下看,地上事物如此繁多,这样来纵展眼力,开阔胸怀,穷尽视和听的享受,实在快乐啊! 人们彼此相处,一生很快就度过。有的人喜欢讲自己的志趣抱负,在室内(跟朋友)面对面地交谈;有的人就着自己所爱好的事物寄托情怀,不受任何约束,放纵地生活。尽管人们的爱好千差万别,或好静,或好动,也不相同,(可是又都有这样的体验:)当他们对所接触的事物感到高兴时,一时间很自得,快乐而自足,竟不觉得衰老即将到来;待到对于自己所喜爱的事物感到厌倦,心情随着当前的境况而变化,感慨油然而生,以前感到欢快的事顷刻之间变为陈迹了,仍然不能不因此感慨不已,何况人寿的长短随着造化而定,最后一切都化为乌有。古人说:“死和生也是件大事啊!”怎能不悲痛呢? 每当我看到前人发生感慨的原由,(跟我所感慨的)如同符契那样相合,总是面对着(他们的)文章而嗟叹感伤,心里又不明白为什么会这样。(我)这才知道,把生和死同等看待是荒诞的,把长寿和短命同等看待是妄造的。后人看待今天,也像今人看待从前一样,真是可悲啊!因此我—一记下参加这次聚会的人,抄录了他们的诗作。尽管时代不同情况不同,但人们的情致却是一样的。后代的读者读也将有感于这本诗集吧。
*주*
1) 蘭亭序; 왕희지의 문장. 당시 난정에 모였던 사람들의 시문을 모든 [蘭亭集序]
2) 왕희지; 晉나라 사람, 서예에 능하여 서성이라 불림, 자는 逸少
3) 永和; 동진 穆帝의 연호, 영화9년은 서기 353년
4) 暮春之初; 음력 3월 3일
5) 會稽; 중국 會稽郡 지금의 浙江省 紹興縣
6) 山陰; 山陰縣 지금의 浙江省 紹興縣
7) 蘭亭; 浙江省 紹興縣의 서남방 삼 십리 지점의 蘭渚에 있는 정자
8) 禊; 중국 풍속에 삼월 上巳에 흐르는 물에 가서 목욕을 하고 묵은 때를 씻음으로써 상서롭지 못한것을 없애는 행사, 祓禊라고 한다.
9) 流觴曲水; 옛 사람들이 계곡이나 정자나무 밑에 작은 물길을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고 거기에 술잔을 띄워서 차례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우리나라 경주 포석정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임
10) 品類; 만물
11) 信; 참
12) 晤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하다.
13) 舍; 捨의 뜻.
14) 彭; 彭祖, 장수한 사람의 대표적 인물
20) 觴; 요절
동진 영화 9년(기원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산음(山陰)에 거주하는 일부 문사들과 함께 난정으로 가서 수계(修禊)를 거행했다. 참가한 사람들은 흥이 일어 많은 시편을 썼다. <<난정서>>는 바로 왕희지가 이 시집을 위하여 쓴 서문의 원고이다. 서문은 당시 남방사족계층이 신봉하던 노장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문학사상으로도 일정한 지위를 차지한다.
전문은 � 28행, 324자이다. 장법, 결구, 필법이 모두 완벽하다. 왕희지의 행서는 당시에 독보적이었으며, 후인들에 의하여도 "우군(왕희지)의 자체는 옛법을 한번 바꾸었다. 그의 웅혼하고 빼어난 기운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고금이래로 그의 글을 모범으로 삼는다" 역대의 서예가들은 <<난정서>>를 천하제일행서로 추앙했다.
<<난정서>>에 관하여는 세간에 형형색색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왕희지는 이 글을 쓰고 난 후에 자기의 이 작품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다시 몇 편을 써보았는데, 모두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천고의 걸작을 가보로 후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당태종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여기에는 당태종이 소익을 파견해서 난정서를 빼앗았다는 전설이 있다.
당태종은 왕희지의 서법을 추앙해서, 신하 조모, 풍승소등으로 하여금 임모본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는 이 임모본 또는 석각탁본을 일부 황족이나 총신에게 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에 이 "진본보다 한 단계 낮은" 임모본도 낙양의 지가를 높이게 하였다. 이외에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의 명가들의 임모본도 후세에 전한다.
그러나, 원적은 전설에 따르면 당태종이 죽을 때 순장품으로 넣어서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소위 <<난정서>>는 당나라때의 임모본을 제외하고, 석각탁본도 매우 진귀하다. 가장 전기적인 색채를 지닌 것은 <<송탁정무난정서>>이다. 임모본이건 탁본이건, 모두 왕희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하다. 동시에 역대서법을 연구하는데에도 진귀한 자료이다. 중국서법전적에는 <<난정서>>에 관한 자료가 아주 많다.
<<난정서>>를 왕희지가 쓴 것인지에 대하여는 역대이래로 논쟁이 많다. 청말과 60년대에는 상당히 격렬한 논쟁도 벌어졌었다. 위의 사진에 나온 것은 풍승소의 임모본으로 세칭 <<신룡본난정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