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서行書란

행서는 여러 방면으로 탁월하여 형의 마무름법도 비교적 자유로우며 運筆여하에 따라서는 변화가 풍부한 妙味가 깊은 線修(선수)를 만들기 쉬우므로 예술서도 분야에서도 매우 중시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행서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매우 발전성 있는 서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行書라 하면 楷書(해서)를 얼마간 흐트려 놓은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행서의 성립은 隸書의 비능률성과 草書의 난해성을 해결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행서의 효시는 後漢 桓靈(환령)때의 劉德昇(유덕승)의 것이 정설이다. 그밖에 행서의 명칭이나 유래는 왕희지(王羲之)와 함께 書의 명인으로 추대되고 있는 魏(위)의 鐘繇(종요)(151-230)라는 書家가 行神書(행신서)를 잘썼다고 하는데, 행서란 명칭은 바로 이 '행신서'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행서(行書)는 가장 실용적인 글씨체로 유창하면서도 순리적이지만 해서처럼 정제된 맛이나 초서처럼 자유분방한 맛은 없다.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행서라는 것은 후한(後漢) 영주(潁州) 사람인 유덕승(劉德昇)이 창조한 글씨체로 해서를 조금 변형시켜 간편하고 쓰기 쉽게 하였으므로 세간에 유행되었으니 이를 행서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행서는 해서의 기초 위에서 빠르고 쓰기에 간편하게 만들어 초서의 방종함과 해서의 근엄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니 해법(諧法)과 초법(草法)을 융합시킨 글씨체라고 할 수 있다.

● 行書의 정의
규격체로 인해 비능률적인 해서(楷書)의 단점과 지나친 간략화로 난해한 초서(草書)의 단점을 함께 보완하고자 생겨난 서체가 행서(行書)입니다..
발생시기에 대해서 흔히 행서(行書)가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중간형태를 띠고 있고, 일반적으로 초서(草書)가 서체의 종류 가운데 가장 흘려 쓴 형태이기 때문에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곧 규격체에서 흘림체로 변천하는 과정으로 볼 때 초서가 가장 마지막 단계의 서체(書體)로 보여, 발생시기도 초서가 가장 후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후대의 서체는 행서(行書)입니다.

● 行書의 특징
후한(後漢) 말기부터 시작되어 진(晋)의 왕희지(王羲之)가 등장하면서 확고한 틀이 완성된 행서(行書)는 해서(楷書)의 필기체(筆記體) 형태를 띠고 있어 초서(草書)처럼 획을 연결해 쓰면서도 지나친 간략화를 하지 않아 쓰기 쉽고 보기 좋은 두 가지 양상을 모두 해결했습니다. 특히 서예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는 왕희지의《난정서(蘭亭序)》는 행서의 특징인 표현의 다양성과 형태의 변화감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행서의 기본적인 특징은 해서와의 차이점에서 쉽게 알 수 있는데, 해서(楷書)가 쓰는 방식이 획을 정성들여 헛된 부분이 나타나지 않게 쓰는 감추는 방식인 '장봉(藏鋒)의 필체'인 반면에 행서(行書)는 자연스럽게 필기하는 방식이어서 획의 연결선 등을 드러내는 방식인 '노봉(露鋒)의 필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행서는 다른 글씨체와 같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쓰는 법칙이 해서에 가까우면 행해(行諧)라고 하고, 방종함이 많아 초서에 접근하고 있으면 행초(行草)라고 부른다. 당나라 서예가인 손과정(孫過庭)은 "달리고 변하는 것을 때에 맞게 하는 것이 행서의 요령이다."라고 하였으니 행서는 해서보다 배교적 간편한 글씨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행서는 해서와초서의 중간에 위치하며서 신축성이 크고 변화가 많은 것은 해서와 초서의 운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붓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해서의 법을 따르고 붓을 움직일 때에는 초서의 법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점과 획은 서로 호응을 이루고, 붓은 멈췄으나 기운은 연결되어 있고, 필·획은 침착한 것을 주로 하고, 연결부분은 가볍고도 가늘게 하여 눕고, 우러러보고, 기대고, 바른 획을 이용하여 생동감을 나타낸다. 왕민(王珉)은 <행서장(行書狀)>에서 행서의 형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숭산(崇山) 같이 아득하고 태산 같이 험준하며, 찬란하기는 아름다운 하늘이 머무른 것과 같도다. 큰 글씨는 뻣셈이 특징이고, 기이한 글씨는 특출나게 빼어나고, 파도를 일으키고 재주를 뽐내는 듯하고, 고운 나머지 표일함을 느끼게 하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솔개가 걸터앉은 것 같으며, 용이 기지개를 켜고 자벌레가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종요(鍾繇)의 정밀함과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장점을 골고루 하여 문채와 바탕의 아름다움을 다하였도다. 자세히 형체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붓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찬란하고 위대함이 옥과 같이 빛나는도다. 완연함은 이무기가 우러러 보는 형세며, 봉황새가 편안히 날개를 펼치는 것과 같도다. 혹 붓을 휘두르면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고, 현란함과 고운 맛이 어울려 종횡으로 날고 기는 도다."
이상 상술한 것을 다시 정리하여 행서의 특징을 말하면 행서는 해서도 아니고 초서도 아니다. 방종하지 않고 구속받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빠르거나 천천히 쓰는 것도 아니다. 행서는 초서의운필법에 해서의 짜임새를 개량하여 용필은 비교적 마음에 따르고 짜임새는 해서보다 유동적이어서 해서의 필·획을 약간 생략하고 영활한 맛을 첨고하여 생동감을 나타나게 하였다.
행서는 진(晉)나라 때에 가장 흥성되었으며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행서는 신품(神品)으로 모두 25사람을 들었는데 그중에서 왕희지(王羲之), 종요(鍾繇), 왕헌지(王獻之), 장지(張芝)등이 유명하며 왕희지(王羲之)는 서성(書聖)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그후 당(唐)에 이르러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 遂良), 안진경(顔眞卿), 이옹(李邕) 등이 고수로 등장하였고, 송(宋)대에 이르러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미원장(米元章), 채군모(蔡君謨) 등의 행서가 후세에 추종을 받고 있다. 행서의 실용적 가치와 예술적 효과는 다른 글씨체에 비교하여 상당히 우위에 있으며 지금까지도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여 줄곧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 行書의 가치

서체(書體)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서체의 변화 방향은 자형(字形)의 복잡함에서 간단함으로, 또 필기(筆記)와 이해의 난해함에서 편리함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형의 간단함과 필기 이해의 편리함을 모두 어느 정도 소화해 낸 서체가 바로 행서(行書)입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서체들 가운데 예서(隸書)나 초서(草書)는 주로 예술적 가치로 사용되고, 해서(楷書)는 활자체의 대표 격으로 쓰이는데 비해서 행서(行書)는 보통 사람들의 친근한 필기체로 보다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현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서체는 해서와 행서이다. 그중 행서는 간편히 빨리 쓰기도 쓰거니와 읽기도 편해널리 쓰여지고 있는 서체이다. 행서는 여러 방면으로 탁월하여 형의 마무름법도 비교적 자유로우며 運筆여하에 따라서는 변화가 풍부한 妙味가 깊은 線修(선수)를 만들기 쉬우므로 예술서도 분야에서도 매우 중시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행서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매우 발전성 있는 서체라 하겠다.

● 행서의 역사

◆1) 漢代
한 대는 아직 행서다운 행서는 아니었다. 이 시대는 이른 바 波勢(파세)의 시대로 당시 유행한 예서는 한점 한확을 일일이 떼지 않고 이어 써가는 행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행서다운 면은 보이지 않는다.

◆2) 삼국시대 이후의 東晉(동진)
위에서 언급한 행신서가 이 시대에 출현하여 행서의 탄생을 알리며 발전하여 書星 왕희지의 시대를 맞이한다. 그는 喪亂帖(상난첩)을 그의 너무나도 유명한 서첩을 남겨 행서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 시대의 행서를 보면 右回折(우회절)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그 위에 점과 획의 자율성이 강화되고 필획의 技巧가 발달하여 예리하고 섬세한 것을 보여주어 한글자 마다의 마무리가 특별한 것을 보여준다. 또한 波勢와도 완전히 인연을 끊고 三折의 骨法을 기본으로 삼게 된다.

◆3) 初唐
초당은 古典主義, 즉 왕희지 형태의 서체의 절정기로 毆陽詢(구양순), 諸遂良(제수량), 오세남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서도가이다. 작품으로는 구양순의 史事帖(사사첩)과 오세남의汝南公主墓誌名(여남공주묘지명), 제수량의 枯樹賦(고수부) 등이 대표적이다.

◆4) 中唐
제수량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古典主義가 안진경의 반고전주의에 의해 격동되는 시대이다.
안진경은 그의 해서의 골법 그대로 행서의 필세도 필획의 겉과 속을 그대로 드러내는 고전주의와는 다르게 비튼 듯하는 기법으로 말하자면 中鋒적인 기법으로 붓을 잡아돌려 의지적인 통일력이 전체에 나타나게 하는 완전히 새로운 행서의 표현을 만들어 내고 있다.

◆5) 末唐
안진경 이후 이렇다할 만한 대가의 탄생을 보지 못한 시대이다. 柳公權의 聖慈帖(성자첩), 정번즉의 最燈張來目錄跋(최등장래목록발), 杜牧(두목)의 張好詩幷序(장호시병서) 등이 유명하다.

◆6) 宋代
송대에는 蘇軾(소식), 黃庭堅(황정견), 미비라는 걸출한 대가들이 출현한다. 소식(1036~1101)은 詩,詞, 故, 書畵에 모두 능한 천재로 東波道人이라 불리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黃州寒食詩 등이 있다. 또한 송대 최고의 서가로 불리우는 그의 글씨를 보고 筆意를 느껴 폭넓은 공부를 하여 自成一家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시대는 이러한 대가들을 배출한 것과 더불어 강한 의지, 강한 주관을 표출하는 表出主義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7) 元~淸
이 표출주의의 탄생이후 南宋으로부터 元으로 또 明으로 反古典의 바람은 확산되어 간다. 원의 趙子昻(조자앙)이나 明의 文徵明(문징명) 같은 훌륭한 고전주의 작가가 나타나서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만, 반고전의 운동은 끊임없이 생겨나 명말에는 浪漫主義의 흥성과 더불어 草書의 기법인 蓮綿勢(연면세)의 도입과 金石學의 행서 필법에의 도입등이 나타난다. 명말의 낭만주의는 해서 필세인 연면세를 행서에까지 도입하여 행서의 신경지, 즉 楷書적 구성을 초월하여 유동감을 가미하게 된다. 이 신경향은 명말부터 청초에 걸쳐 널리 유행하게 된다. 청대에서는 老古學古文書學의 한부분이라 할 수 있는 금석학의 필세에의 도입이 시도된다. 이러한 시도를 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趙之謙(조지겸)으로 古法을 사랑하는 자의 눈에는 '파괴의 무법자'로 보여 많은 배척을 받았다. 원래 북위의 石刻이라면 해서로 극한되는데 그는 여기서 찾아낸 유형을 다시 행서의 형까지 끌어들여 북위의 석각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지성으로 새로운 행서를 등장시킨다. 조자앙의 출현은 중국적 현대의 출발을 의미한다.

◆8) 現代
지금 중국은 커다란 회전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館閣體(관각체)를 해방하라는 소리가 널리 외쳐지고 있다. 관각체란 관공서의 체, 즉 관료체로서 이것은 곧 전래의 고법을 의미한다. 옛날 魯邊(노변)이란 사람은 중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中華의 사상을 박멸해야 한다고 말한적이 있다.
관각체의 추방운동과 이 사상을 비교해서 본다면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 행서의 필법
행서는 楷書를 本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그 書法도 해서의 그것과 크게 틀리지 않는다. 書藝의 모든 書體가 외따로 튀어나온 것이 없으므로 서법이란 것이 전체를 꿰어 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선, 해서와 행서의 다른점을 살펴보면, 해서는 주로 藏鋒(장봉)으로 쓰지만 행서는 露鋒(노봉)으로 쓴다. 藏鋒(장봉)을 감추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써 붓끝의 흔적일 날카롭게 나타나지 않게 된다. 반대로 露鋒(노봉)은 붓끝을 드러내어 쓰기 때문에 끝이 드러나게 된다. 다음으로, 해서는 붓을 대고, 밀고, 들고해서 한획 한획을 쓰지만 행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필(起筆), 행필(行筆), 수필(收筆)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데 행서는 해서와는 달리 외연적 연결성이 뚜렷하므로 筆順을 잘 알아서 한꺼번에 써 내리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행서에는 미약한 虛劃이 있다. 해서에서도 갈고리를 할 때 허획이 생기지만 행서보다는 덜하다. 행서에서 연결성은 허획으로 강조되는 경우가 많응데 이 허획을 實劃과 구분하여 쓰지 않으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되어 좋은 글씨가 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행서를 쓸 때 문제점은 中鋒과 側鋒(편봉이라고도 함)인데 해서는 거의 중봉으로 쓰지만 행서나 초서는 중봉으로만 쓰기에는 묘미가 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표현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된다. 초심자는 당연히 중봉을 따라야 하며 스스로 연륜이 쌓였다고 느낄 때 조심스레 편봉에 눈을 돌려야 하리라 본다.
행서를 꿰뚫는 대원칙의 하나가 행서를 쓰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막히는 곳이 있으면, 해서를 찾아보면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행서의 대표적 작품

◆) 蘭亭敍(난정서) :
난정서는 천하 제일의 행서로 여겨진다. 진(晉)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는 사안등 41명과 함께 회계의 산음(山陰)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성대한 계사를 거행하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서 시를 지었는데 당시 나이 51세인 왕희지는 거나게 술을 마신 뒤 잠견지(蠶繭紙)에다 서수필(鼠鬚筆)을 사용하여 단숨에 천고의 명작이라고 알려진 [난정서]를 썼다. 전문은 모두 28행으로 전체의 글자수는 324자이다. 작품 전체가 굳세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충만되고, 종회의 형세의 변화가 무궁하며 행서에서 볼수 있는 기복과 변화, 강한 리듬감, 형태의 다양한 변화, 점획의 서로 상응하는 것들이 충분히 표현된 작품이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희지의 난정서는 그의 7대손인 지영에게 전해졌으며, 지영이 다시 제자인 변재에게 이를 물려 주었다. 당 태종은 어사인 소익을 변재가 있는 곳으로 파견하여 그를 속여서 [난정서]를 취한 다음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에게 임모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진본은 당태종의 부장물이 되었으며 지금 전해지는 것은 당나라때 임모본이 전해진다.

◆2)集字聖敎序(집자성교서)
집자성교서는 당의 僧(승)인 현장법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친히 태종이 서문을 짓고 고종이 그 記(기)를 적어 현장이 번역한 心經과 같이 새긴 것으로 글씨는 흥복사의 승려인 懷仁(회인)이 왕희지의 진적 행서중에서 한자씩 모아 비에 새긴 것이다. 글자수는 무려 1792자나 되며 회인 반생에 걸친 노력의 결정이라고 한다. 청아한 선과 기품이 높은 이 글씨는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쌍벽을 일컬어 온다. 다만 한자한자 집자한 것이기에 글자사이의 필의가 이어지지 않으나, 왕희지의 행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枯樹賦(고수부) : 고수부는 저수량이 35세때 쓴 것이라고 하는데, 운필에 미묘한 변화가 있고, 탄력이 있으며,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그리고 글자가 약간 기울어진 것 같아 보이고, 글줄기가 굽어 있으나필의가 잘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으며, 전체의 균형이 잡혀 있다.

◆4)爭坐位帖
안진경의 행초 작품이다. 초고(初稿)이기 때문에 더욱 꾸밈이 없으며, 그의 기상과 충절을 절로 느끼게 하는 걸작이다.쟁좌위첩은 草稿(초고)로 쓰여진 것으로 고래 안진경의 삼고중의 하나로서 유명하나, 왕희지의 난정서와 더불어 행서의 쌍벽으로 알려져 있다. 용필에 꾸밈새가 적고, 장봉, 원필로서 선이 비교적 굵고 둥근 맛이 난다. 그리고 운필의 속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보통의 속도라 할 수 있고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서첩에는 행초중에 많은 해법이 섞여 있다. 넓고 소박한 마음으로 대범하게 써 나가면 이 서첩과 서로 호흡이 맞을 것이다.

[쟁좌위]는 안진경이 당시 복야로 있던 곽영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곽영의는 당시 환관이었던 어조은에게 아첨을 하느라고 두차례나 열린 융숭한 잔치에서 백관을 지휘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어조은의 자리를 높게 빛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곽영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엄중하게 비난하였으며,심지어는 그를 "어찌 낮에 돈을 챙기는 선비와 다르랴!"라고까지 질책하였다.

◆5) 松風閣詩券(송풍각시권) : 황산곡이 58세때(1103) 流謫(유적)의 몸으로써 湖比鄂城縣(호비악성현)의 樊山(번산)에서 쉴 때 이 지역의 토지의 풍경을 사랑하고 산중의 노송사이에 있는 한 누각에 松風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쓴 것이다. 이 시구에'東波道人(동파도인)이 이미 샘물에 잠기고 張候(장후) 언제라도 눈앞에 떠오르네'라고 있는데 이 때에 소동파는 이미 죽고 장후가 오게 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는다. 하룻밤 비에 젖어 추워진 계곡을 바라보고 오로지 거듭되는 궁핍한 역경을 벗해 여러 친구와 酒遊(주유)할 수 있을 거라고 비탄한다. 황산곡이 만년, 憂悶(우민)의 생각을 품과 四川地方에 있었던 때의 작품은 기상이 매우 높은 우수성을 지니고 있다.

◆6) 范滂傳(범방전) : 崇年(숭년) 4년(105) 산곡이 의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정치상의
신구양당의 싸움이 있어, 정권을 취하고 있는 신법당의 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구법당의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황산곡도 그 중 한사람으로 만년에는 이와같은 가장 궁벽한 시골로 추방되었다. 거기에서 한 대에 있어서 청절이 높은 일로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范滂(범방)의 전기를 휘호하는 일을 그 지방관리를 지낸 여씨가 청탁했다. 그때 산곡은 범방전을 암송하여 대서했다. 끝마칠 때는 겨우 2-3자의 오자만 있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
추사체라는 글씨체로 우리에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김정희는 조선 말기, 부패한 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거의 10여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힘들고 기구한 일생을 마쳤지요. 하지만 김정희는 그가 그렸던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학문의 본질과 선비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는 김정희가 태어난 집안은 왕족의 후예로서, 본디부터 강직한 성품의 가문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그가 3세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으며, 6세 때는 입춘첩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나 봅니다. 24세 때는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참판까지 지내셨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여행을 하고, 조선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감동을 받은 그는 수많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 곳의 선진사상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그의 학문세계에 반영됩니다. 또한 실학사상의 선구자였던 박제가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조선의 문화와 학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김정희는 선진학문을 탐구하면서 추사파라는 학풍을 형성할 만큼 조선의 선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의 정신은 근거없는 지식과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지 말고, 사실적인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실험과 연구를 거쳐서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모든 사리사욕과 허영을 버리고, 정직하면서도 대상의 본질만을 압축시켜 표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추사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청나라 문인에게서 “해동제일의 문장” 이란 칭찬을 받았던 추사는 <서화불분론>이란 미술 이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시,서,화를 일치시키는 청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글씨는 그림처럼, 그림은 글씨처럼”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들었다면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우울해 했을 얘기지요.
김정희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암행어사와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가성을 거쳐 병초판서, 형조판서등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헌종6년, 1840년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제주도 유배길을 오르게 됩니다. 한참 그 세력이 하늘로 치솟던 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뼈 속으로 느끼며 추사는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바닷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히에 있는 모든 욕망을 바람에 날려보낸 것 같아요. 그 고독한 유배생활 중에 추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하였으며, 많은 제자도 길렀습니다.
특별히 그는 벗들과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참선과 차를 끓이는 일로 또 한 해를 보냈다”라는 글도 남겼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추사와 차를 마시던 친구들은 그에 대해 “폭우나 번개처럼 당당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온화했으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구요.
추사는 제주도에서 풀려난 뒤에도 몇 번의 유배생활을 더 겪은 후에 관악산 기숡에서 은거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영정처럼 하얀 수염과 고매한 문인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 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추사 죽림석실 칠언시 대련

珠林書妙三唐字 삼당의 글자는 글씨가오묘하여 구슬 숲을 이루고
石室文高兩漢風 석실의 문양은 품격이 높아 양한 (전.후한)의 풍이 있도다.

阮堂歲寒圖

주림석실의 시고 대련은 글자의 구성과 획의 운용에 있어 추사 행서의 표준이 될 만한 빼어난 작품이다. 당시 최고급 종이에 좋은 먹으로 정성들여 쓴 이 대련은 해서에 행서법이 곁들여진 단정한 서체로 조화가 잘 이루어져있다. 획은 굵기에 변화를 준 필획의 구사가 힘이 있으면서도 고졸하다.

국보 제180호.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23cm, 가로 61.2cm. 손창근 소장.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그림 끝에 작화(作畵)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跋文)과 청대(淸代) 16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제목과 '우선시상'(藕船是賞 : 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완당'이라는 관서(款書)를 쓰고, '정희'와 '완당'이라는 도인을 찍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마른 붓질의 필획만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재와 구도도 지극히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와는 반대되는 문인화의 특징으로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의 문기(文氣)와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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