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글꼴의 변천과 시대 상황

원시 상형문 시대
앙소문화(B.C. 5000~3000)
대문구 문화(B.C. 4000~2000)
하나라(B.C. 2070~1600)
갑골문 시대
은나라(B.C. 1600~1046: B.C. 1300년 반경(盤庚)이 천도)
금문 시대
서주시대(B.C. 1046~771)
춘추시대(B.C. 770~476)
전국시대(B.C. 475~221)
전서 시대
진나라(B.C. 221~207)
예서 시대
한나라(B.C. 206~A.D. 220)
삼국시대(A.D. 221~265)
초서, 행서 시대
위진남북조(A.D. 265~581)
수나라(A.D. 581~618)
해서 시대
당나라(A.D. 618~907)
5대(A.D. 907~960)
해서와 활자체 시대
송나라(A.D. 960~1279)
요나라(A.D. 916~1125)
금나라(A.D. 1115~1234)
원나라(A.D. 1271~1368)
해서와 판각체 시대
명나라(A.D. 1368~1644)
마지막 해서 시대~
청나라(A.D. 1644~1911)
중화민국(타이완: 1912~)
간체자 시대~
중화인민공화국(1949~)

연도는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시기에 준해 표기했다.

 

 

書藝의 慨念 (서예의 개념) 

 

 書藝(서예)를 이미 형성된 글자를 쓰는 단순한 것으로 생각하기쉽다. 예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만당(晩唐) 시대에 유공권(柳公權) 은 心正筆正 (심정필정)이라했다.즉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 글씨가 바르게 써진다. 

마른 대나무 筆管(필관)을 통하여 수많은 터럭이 모인 筆鋒(필봉)에 나 自身(자신)의 精神(정신)을 넣어 生命(생명)이 있는 線 (선)을 긋는 것이다. 즉 人間心身(인간심신)의 氣力(기력)을 표현하는 空間藝術(공간예술)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겠다.

古今(고금)을 莫論(막론)하고 글씨는 人格(인격)의 表現(표현)이라 傳(전)해왔으며 書(서)를 배우고 또한 硏究(연구)함으로써 우리의 검소한 생활양식과 東洋固有(동양고유)의 文化藝術(문화예술)은 더욱 빛날 것이다.

 

 서의 예술성 (書의 藝術性)  

 

1. 서예의 본질 (書藝의 本質)

 

서예술(書藝術)이란 미술성(美術性)을 가지고 있다는 점(点)에서는 다른 일반예술(一般藝術)과 그목적(目的)이 같다고 할수있다.

그것은예술가 (藝術家)로서의 서가(書家)가 자기개성(自己個性)과 기교능력(技巧能力)에 따라 창조적 (創造的)으로 순간 (瞬間)에 포착한 미적이념(美的理念)을 지면(紙面)을 통(通)하여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자 (字) 자체는 완전히 독자적 (獨自的)인 형상(形狀)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글씨로서 창작활동(創作活動)과 제작효과 , 즉 정신(精神)과 육체(肉體)로 묶은 작품자체(作品自體)를 가리켜 우리는 서예술(書藝術)이라고 말할수 있다.

 

2.문자(文字)를 쓸 때에  형성(形成) 되는 예술(藝術)

 

서(書)는 문자를 쓸 경우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예술(藝術)이다.

문자자체(文字自體)는 언어(言語)의 기능(技能)을 나타내는것에 불과하다고 보겠지만 문자 (文字)속애는 인간생명(人間生命)의 움직임에 맞추어 골(骨)과 격(格)을 찾을수 있으며 혈(血)과 육(肉)을 (表現)하므로   선질(線質)의 표현(表現)을 생각(生覺)할 경우 이것이 바로 서예(書藝),또는 서법(書法)이라고 할수 있다. 원래 문자(文字)는  실용상 부호(實用上 符號)로 만들어져서  장기간 사용(長期間 使用)되어 오는 동안에 사람들의 미의식(美意識)에 따라  조화,균제,변화(調和,均齊, 變化,)와  통일등(統一等)의 형성미(形成美)를  연구(硏究)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성장(成長)해온 것으로서 문자(文字)와  서(書)는 끊을수 없는 인연(因緣)이다.

 

3.서(書)의 추상성(抽象性)과 상징성(象徵性) 

가.서의 추상성(書의 抽象性)

문자(文字)는 원래  상형적(象形的)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언어(言語)를 대신하는 부호(符號)라 할수 있으나 그 속성(屬性)은  추상적,선추화, 보편성(抽象的, 線抽化, 普遍性)인 것이다. 문자(文字)가 추상형(抽象形)이라 할수있는 것은  추상적 형식(抽象的 形式)인 선(線)과  형(形)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기때문이다.또한 글씨는 자기자신(自己自身)의 내부생명(內部生命)을  점,획(点,劃)에 맏기고 표현되는 예술이기에 추상적예술(抽象的 藝術)이라고 할수 있다.  

서예(書線)의 형체에는 여러가지 즉 장,단,종,횡,대,소,(長,短,縱,橫, 大,小,) 등의 변화가 있어 이것을 잘 조화(造化) 시킴으로서 한자의 구성 내지는 작품(作品) 전체를 구성하는데 효과가 아주 달라지는 것이다.

특히 선질(線質)에 있어서는 지연,강유,류동,윤갈,농염,등다양성(遲速 剛柔,流動,潤渴,濃淡等 多樣性)이 있으며그다양성은 글씨 전체(全體)의 무한(無限)한 추상적(抽象的) 변화를 주게 되는것이다.

이것은 해서(楷書)일경우도 찾게되지만 행,초서(行, 草書)있어서는 더욱 큰 변화의 묘(妙), 즉 추상적(抽象的)인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나.서(書)의 상징성(象徵性)

글씨 (書)는 인간(人間), 바로 그의 인격(人格)의 상징(象懲)이 된다는 점(点)에서는 타예술(他藝術)이 도저히 따르지 못할것이다.

따라서 글씨는 쓰는 사람의 내적생명(內的生命)과 의 미적관계(美的關係)를 깊이하고 창작품(創作品)은 그대로 작가인간성(作家人間性)의 상징적 표현(象徵的 表現)이 되는 것이다.

왕희지(王羲之)가 난정서(蘭亭敍)를 쓸때 당시를 도리켜 생각해 볼때 오래만에 만난  군현(群賢)들이 화애(和愛)스러웠으며 만물(萬物)이 소생(蘇生)하여  번성(繁成)하는 계절(季節)로 희망(希望)찬 시기였으며  천랑기청

(天朗氣淸)하고 혜풍화창(惠風和揚)에 일상일영(一觴一詠) 까지 했으며 즐겁고 흥겨운 기분에서 쓴 난정서(蘭亭敍)의 글씨는 진(眞)과 선(善),그리고미(美)가 겹친 오묘한 신운(神韻)의 경지(境地)에서 나온것이라 할수있다.

이로서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문서소재(文書所材)가 다를때에 그뜻과 내용(內容)에  맞는 심경(心境)에잠겨 거기에서 스며나온  자기(自己)의 생명(生命)을 표현(表現)하고 있다고  서보[書譜]에 평(評)하고 있다.

또한 필법(筆法)이 묘(妙)하여 보다높은 경지(境地)에서 글씨를 썼기에 후대(後代)에 모든 서가(書家)들이 필법(筆法)을 배우고 연구(硏究)하여 작품(作品)을 썼다.

그러나 어떠한 묘필(妙筆)을 썼다하더라도 왕희지(王羲之)와 같은 다채(多彩)로운 표현(表現)은 할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왕우군(王右軍)의 글씨에서 서(書)의 상징성(象徵性)이 현저(顯著)하게 나타난 실예(實例)를 들수 있다.

 

다.서(書)의 일회성(一回性)과 율동성(律動性)

문자(文字)를  쓰는 움직임에는 일회(一回)로 한번에 그어야 한다.

움직임은 항상 시간(恒常 時間)과 공간(空間)의 개념(槪念)으로 해서 내부(內部)에서 외부(外部)로 뻗는 움직임이 살아있는 흐름이어야 한다. 생명(生命)의 움직임에는 되풀이가 절대없는 것이므로 정신(精神)이 일치된 글씨도 마찬가지인것이다.

이와같이  일회성문자(一回性 文字)를 쓰는 역할은 최초(最初)의 기필(起筆)에서 수필(收筆) 즉 붓의 시작에서 부터 마지막 거둘때 까지 방향,속도, 필압등(方向, 速度, 筆壓等)으로 운필(運筆) 하게되며 그 붓의흐름에 맞추어 자유롭게 형성(形成)되어가는 율동성(律動性)이야말로  서(書)의 새명(生命)이라할수 있다.

 

◀  문자(文字)와 서체(書體) ▶ 

문자는 결승(結繩)기사(記事)와 팔괘도상(八卦圖象)으로 인하여 문자(文字)가  발생(發生)하게된 상태이지만 처음 서계(書契)와 창힐(倉힐) 이가 조자 (造字)했다고 전한다.

 

◈회화문자(繪畵文字)

상형문자(象形文字) 즉 고시대(古時代)에 쓴 문자적 특성(文字的 特性)은 모두 그림에 불과했다.

이것을 통칭 회화(繪畵)문자 라고한다. 이러한고문(古文)을 써오다가 주(周 )나라 선왕(宣王)때에 사주(史주)가 종래에 써오던 고문(古文)을 고쳐 만든것이 대전(大篆)이라하였다.

그래서 이 대전(大篆)을 만든 사람이 사주 인고로 사주문(史주文)이라고도 한다.

 

◈전서 (篆書)

그후에 석고문(石鼓文)이 있었는데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기양으로 사냥을 하러가서 그때에 그의 업적을 석고(石鼓)에다 새긴것이며 이것이 석문(石文)으로는 가장오랜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진(晉)나라 이사(李斯)가만든 소전(小篆)이있다.  

 

 

石鼓文  (석고문)

 

 

 

 

篆書 王羲之 千字文(전서 왕희지 천자문)

 

 

 

秦 泰山刻石  (진 태산각석) 

 

 

秦 瑯邪臺刻石 (진 랑사대각석)

 

 

 

◈隸書(예서)

진시왕(秦始王) (기원전 246~210)이 통일(統一)시킨 이후 승상이사(丞相 李斯)가 문자(文字)를 통일(統一)시켰다. 이때 옥리(獄吏)인 정막(程邈)이 대소전(大小篆)의 결체(結體)를 간단하게 처리(處理)했으며 원전(圓轉)의 획을  방절(方折)의 획으로 해서 쓰기에 편리(便利)하게 만들었고 이자체(字體)는 공문서상(公文書上)에 쓰기시작했다.

그래서 이 정막(程邈)이 만든 자체(字體)를  예서(隸書)라 칭(稱)해 전(傳)해졌다.

 

 

隸書  後漢 乙瑛碑  (예서 후한 을영비) 

 

 

 

漢   史晨前後碑  (한 사신전후비)

 

 

 

漢 禮器碑  (한 례기비)

 

 

 

 

漢  曹全碑 (한 조전비)

 

 

 

王羲之 千字文 (왕희지 천자문) 

 

 

 

◈楷書  (해서)

해서(楷書)는 즉 진서(眞書)인데 옛날에는 해예(楷隸), 혹은 금예(今隸)라고 했다. 진위항(晉衛恒) 의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말하기를 [상곡왕차중(上谷 王次中)이 예서(隸書)를 즐겨쓰다가 해법(楷法)을 시작 하게되었다]는 설(說)과  당 이양빙(唐 李陽氷) 의 설(說)은 진 왕차중(秦 王次中)이 만든 팔분서(八分書)를 [종요위지장정서(鐘繇謂之章程書)] 라했다. 즉(卽) 해서(楷隸)는 종요(鐘繇)도 예서(隸書)를 즐겨쓰다 해법(楷法)이 시작 되었다 라고했다.

당,장회관(唐, 張懷瓘)의 서단[書斷]에 이르기를 진,익인 상곡 왕차중(秦 羽人 上谷 王次中)이 팔분서(八分書)를 만들었다는 위의 설법(說法)을 종종 말했을진데  해서(楷書)의 형체(形體)는 예서(隸書)를 쫓은 것이고 예초(隸草)가 연번(演變)해서 되었다고 할수있다.

한대(漢代)는 해서(楷書)의 유적(遺迹)은 없어지고 가장오랜 해서유적(楷書遺迹)은 위대(魏代)의 종요필(鍾繇筆)과 또 오지곡랑비(吳之谷郞碑)가 있었는데 자체(字體)의 필획(筆劃)이 이미 해서(楷書)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또한 서진(西晉)의 육기(陸機)의 평부첩[平復帖]이 가장 오래된 서가(書家)의 묵적(墨迹)인데 이것도 역시 장초(章草)의 필법(筆法)이었다.

 

 

王羲之 楷書 千字文 (왕희지 해서 천자문)

 

 

 

顔眞卿 楷書 建中帖 (안진경 해서 건중첩)

 

 

 

歐陽詢 眞書 (구양순 진서)

 

 

 

歐陽詢 九成宮醴泉銘 (구양순구성궁예천명)

 

 

 

顔眞卿 雙鶴銘 (안진경 쌍학명)

 

 

 

趙之謙 四九六字 (조지겸 496자)

 

 

◈行書   (행서)

행서(行書)는 후한말(後漢末)에  영천인 유덕승(潁川人 劉德昇)이 창제(創制)한 것이다.

해서(楷書)에 가까운 행서(行書)가 있는가 하면 초서(草書)에 가까운것도 있다. 서단[書斷]에 무종간역 상문류행[務從簡易 相問流行]이라 했으며  또한 서보[書譜] 손과정서(孫過庭書)에 추변적시 행서위요[趨變適時 行書爲要]라했다.

행서(行書)는 해서(楷書)보다  쓰기가 간편(簡便) 하고 초서(草書)보다는 이해(理解)하기 쉽고 행서(行書)는 해,초서간(楷,草書間)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체(體)의 묘(妙)한 변화(變化)를 도와 주었으며 운용필법(運用筆法)과 예술적(藝術的)효과를 발휘할수 있다고 할수있다.

 

 

歐陽詢 高近福 墓碑(구양순 고근복묘비)

 

 

 

王羲之 行書 千字文(왕희지 행서 천자문)

 

 

 

楮遂良 枯樹賦 (저수랑 고수부)

 

 

 

 

王羲之 蘭亭敍 (왕희지 난정서)

 

 

 

王羲之 集字聖敎序 (왕희지 집자성교서)

 

 

 

米불書 晝錦堂記 (미불서 주금당기)

 

 

 

◈草書   (초서)

초서(草書)에는 장초(章草) 와 금초(今草)가 있다.

가, 장초(章草)는 전래(傳來)해오기를  한 원제(漢 元帝)때 사유(史游)가 창조(創造) 하였다 하나 현재(現在)  전해내려오는 것은 급취장(急就章)이 있으니 장[章] 자(字)를 취(取)해서 이름을 지었다.

초(草)는 초창(草創)이라 해서 [草] 자(字)를 따온것으로 몇가지 설(說)이 있다.

후한 장제(後漢 章帝)때 두도(杜度)의 초(草)를 좋게여겨서 그가 어전(御殿)에 주달(奏達)할때 써 이룬 초서(草書)이니 소위(所謂) 그것이 장초(章草)이다.

 

◈今草 (금초)

금초(今草)를 전(傳)하기는  후한(後漢)때에  장지(張之)가  장초(章草)를 변화(變化)시켜 놓은것으로 당시 장지(當時 張之)를 심히 추중(推重)하여 초성(草聖)이라 일컬었다. 그래서 장초(章草)는 금초(今草)의 근원(根源)이라 할수 있으며 우리가 초서(草書)를 배울때 장초(章草)를 먼저 쓰고 초법(草法)을 익혀야 하겠다.

 

 

行草字帖  (행초자첩)   [章草](장초)

 

 

 

 

미불 행초첩

 

 

 

 

張之의 今草  (장지의 금초)

 

 

 

 

王羲之 罔極帖  (왕희지 망극첩)

 

 

 

 

王羲之 十七帖 (왕희지17첩)

 

 

 

 

 

孫過庭  書譜  (손과정 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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