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春]

 

중국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보통 합쳐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도 합니다.

주(周)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동쪽의 낙읍(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기원전 770년 부터 시황제의 진(秦)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을 이룬 기원전 221년 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전반기를 춘추 시대, 후반기를 전국 시대라고 합니다.

당시 종주국이었던 주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수도를 옮기면서 주나라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각지의 제후들은 종주국인 주나라를 명목상으로만 받들 뿐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전반기인 춘추 시대의 춘추(春秋)라는 말은 공자의 저서인 춘추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의 세나라로 나뉘게 된 기원전 403년 까지를 말하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종주국 주나라의 권위를 어느 정도 떠받들어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후반기인 전국 시대의 전국(戰國)이라는 말은 전한 시대의 유향이 쓴 전국책에서 유래한 것으로 싸울 전(戰)에 나라 국(國)을 써서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를 나타내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종주국 주나라의 권위는 완전히 무시되었으며 강한 제후들은 스스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기원전 221년에 진(秦)나라의 왕 영정이 6국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뒤 시황제라 칭하면서 춘추전국시대는 끝나게 됩니다.

 

요약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는

춘추 시대

전국 시대

를 아울러 부르는 말로,

기원전 770년

(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진 시황제

(秦始皇帝)의 통일까지를 말한다.

상업

이 많이 발달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본문

 

BC 770년, 주()왕조가 뤄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시대, 이후를 동주시대라고 한다. 동주시대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나누어 진다. 춘추시대는 주왕조가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진()나라의 대부()인 한()· 위()· 조()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BC 403년).

춘추시대

 

 

 

 

 

 

 

전국시대는 그 이후부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이다. 춘추()는 공자가 엮은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에서 유래되었고, 전국()은 한()나라 유향()이 쓴 《전국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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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 중 기원전 260년전국 칠웅: (燕) · (魏) · (齊) · (趙) · (秦) · 초(楚) · (韓)
장강 유역도

 

 

진 (춘추 전국)

(秦, 기원전 900년경 ~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는 중국의 왕조이다. 주나라,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기원전 206년에 멸망 했다. 왕실의 성은 영(嬴), 통일 시의 수도는 함양이었다.

주나라 시대

기원전 900년즈음에 효왕(孝王)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非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공적을 올렸으므로의 영(嬴)이라는 성을 받아, 대부가 되어, 진 땅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진이 최초로 흥한 장소는 현재의 간쑤 성 리 현 부근이며, 현재 이 땅에서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양공은 주의 평왕을 호위 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후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편집] 춘추, 전국시대

진은 춘추시대에 들어가는 동시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국(諸國)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라고 업신여겨지고 있었다. 대대의 진후는 주로 서융과 항쟁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기원전 677년에는 수도를 옹성(雍城, 현재의 산시 성 바오지 시 펑샹 현)에 두었다.

9대 목공(穆公)은 백리해 등 타국 출신자를 적극적으로 등용, 서융을 크게 토벌해 서융의 패자가 되었고, 주변의 소국을 합병하고 영토를 넓혀 이웃 (晋)에 필적할 정도가 되었다. 때마침 진(晋)이 여희의 난을 겪으면서 혜공을 옹립하지만, 혜공은 배신을 일삼았다. 목공은 혜공의 군대를 한원에서 격파했다. 또한 혜공 사후에는 혜공의 형 중이를 진공(晋公)으로 즉위시켰다. 중이가 진의 명군 문공(文公)이 되었고, 그의 치세에는 진(晋)은 다시 강국의 풍모를 되찾는다. 그러나 문공 사후, 진(秦)은 다시 진(晋)을 격파하고, 영토를 강탈했다. 이러한 실적에 근거, 목공은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목공이 죽었을 때, 177명의 가신들은 순장의 풍습을 따라 함께 죽었고, 명군과 인재를 한 번에 잃은 진나라은 기세를 잃어 영토는 축소되었다. 나라를 유지할만한 힘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지만, 춘추시대 중기 이후 주역은 북쪽의 진(晋)과 남쪽의 (楚)였고, 진은 이에 비하여 한 발 밀려나 있던 상황이었다.

전국시대에 진은 전국칠웅의 하나로 불린다. 이웃나라 진(晋)은 내부에서의 권력 싸움의 끝에 (韓)·(魏)·(趙)의 삼국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갈라진 삼국을 삼진(三晋)이라 부른다. 삼진 중 위나라가 전국 초기, 명군 문후에 의해 강하게 성장하였고, 진은 위에게 압박을 받고 영토를 빼앗긴다.

이 상황에 분개한 25대 군주 효공(孝公)은 넓게 인재를 구해 대세를 만회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이에 응한 자가 그 유명한 상앙(商鞅)이다. 상앙은 행정 제도의 개혁·십오제(什伍制)의 채용 등을 실시해, 진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이러한 상앙의 변법 운동에 의해 진은 철저한 법치주의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내의 생산력, 군사력을 높여 서서히 다른 육국을 압도하며 갔다. 효공은 기원전 350년, 도성을 함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천하 경영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후 효공의 아들이 강해진 국력을 기반으로 기원전 324년에 왕을 칭하니, 이가 혜문왕(惠文王)이다. 기원전 316년에 혜문왕은 촉을 점령해, 이 땅의 개발을 실시하여 한층 더 생산력을 올려 장강의 상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장강의 흐름을 따라 진격할 수 있게 되어 초를 압박할 수 있었고, 초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혜문왕은 모략가인 장의(張儀)를 등용하고, 초를 질질 끌어 돌려 전쟁으로 격파해, 초의 회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혜문왕은 위와 한의 왕들을 각각 마부와 배승으로 삼을 정도로 굴복시켰다. 하지만, 혜문왕의 아들 무왕의 시기에 그가 장의를 내쳐버리자 장의는 위에 망명, 이로 인한 한과의 격전 끝에 많은 군사를 잃었고, 혜문왕 자신은 갑자기 사고사하여,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전력이 후퇴해 버린다.

이 시기 동쪽에서는 제나라가 신장하고 있어, 은나라의 후예인 송을 병합하는 등 주변 제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원전 288년당시에는 제를 동제, 진을 서제라고 칭했다. 제나라가 곧바로 제호를 취소했으므로, 진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시기는 서쪽의 진나라, 동쪽의 제나라의 2강국 시대를 만들고 있었다.그러나 제나라는 연나라의 악의가 지휘하는 5개국 연합군에 의해 수도 임치(臨淄)가 함락. 망국 직전까지 몰리는 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진나라는 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혜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이복동생인 소양왕(昭襄王)의 시대에 재상 위염(魏冄)과 백기 장군의 활약으로 진은 몇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소양왕을 즉위시킨 재상 위염의 권력이 너무 커진 것을 우려한 소양왕은 재상 위염을 숙청하고, 대신 범저(范雎)를 등용한다. 범저가 진언한 것은 유명한 원교근공책이다. "가까이에 있는 한·위를 거느리고, 먼 제나라와의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승리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먼 토지가 되어, 지키는 것이 어려워져 버린다. 이것에 대해서 먼 제나라나 연나라와 동맹해 가까이의 한·위·조를 공격하면 가까이의 토지가 손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진의 영토로 집어 넣는 것이 용이해진다." 이것이 원교근공책이다. 이 진언에 감동한 소양왕은 이 진언을 채택하고,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260년에는 백기가 조나라로 진격, 장평 전투를 통하여 조군을 격파, 조의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린다. 기원전 255년에 주나라를 멸해 그 영지를 접수하여 진의 위세는 한층 더 높아졌다.

[편집] 진나라 통일 이후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제31대 왕인 영정이 모든 나라를 멸망하고 통일하여 황제(皇帝)의 위에 오르면서 중국 최초로 제국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영진(嬴秦)의 역대 군주

 

 

대수 시호 재위 기간 관계 사료 출처
  장공(莊公) 기(其) (추존) 영진중의 장자. 사기 진본기.
12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
1 양공(襄公) 개(開) 기원전 777년 ~ 기원전 766년 장공의 차남 사기 진본기
2 문공(文公)   기원전 765년 ~ 기원전 716년 양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정공(靜公)   (추존) 문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3 헌공(憲公))   기원전 716년 ~ 기원전 704년 정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4 출자(出子) 만(曼) 기원전 703년 ~ 기원전 698년 헌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한서 고금인표(漢書 古今人表).
5 무공(武公)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78년 헌공의 장자. 사기 진본기.
6 덕공(德公)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76년 헌공의 아들, 무공의 동생. 사기 진본기.
7 선공(宣公)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64년 덕공의 장남. 사기 진본기.
8 성공(成公)   기원전 663년 ~ 기원전 660년 덕공의 아들. 선공의 동생 사기 진본기.
9 목공(穆公) 임호(任好)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1년 덕공의 막내아들. 성공의 동생. 사기 진본기.
10 강공(康公) 앵(罃) 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9년 목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1 공공(共公) 도(稻), 가(貑) 기원전 608년 ~ 기원전 604년 강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좌전 선공 4년(左傳 宣公四年)
12 환공(桓公) 영(榮) 기원전 603년 ~ 기원전 577년 공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춘추분기(春秋分紀)
좌전(左傳)
13 경공(景公) 후백거(後伯車), 석(石)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37년 환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춘추분기
14 애공(哀公)   기원전 536년 ~ 기원전 501년 경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시황본기(始皇本紀)
  이공(夷公)   (추존) 애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5 혜공(惠公)   기원전 500년 ~ 기원전 491년 이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6 도공(悼公)   기원전 490년 ~ 기원전 477년 혜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7 여공(厲公)   기원전 477년 ~ 기원전 443년 도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시황본기
18 조공(躁公, 趮公)   기원전 443년 ~ 기원전 429년 여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19 회공(懷公)   기원전 428년 ~ 기원전 425년 여공의 아들, 조공의 동생 사기 진본기.
20 영공(靈公)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15년 회공의 손자,세자 소의 아들. 사기 진본기.
21 간공(簡公) 도자(悼子) 기원전 414년 ~ 기원전 400년 회공의 차남,세자 소의 동생이자 영공의 숙부. 사기 진본기
진사(秦史)
전국사과편년집증(戰國史料編年輯証)
22 혜공(惠公)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간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23 출공(出公) 출자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5년 혜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24 헌공(獻公) 사습(師隰), 연(名連) 기원전 385년 ~ 기원전 362년 영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월절서(越絕書)
여씨춘추(呂氏春秋)
25 효공(孝公) 거량(渠梁)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 헌공의 아들. 사기 진본기
월절서.
26 혜문왕(惠文王) 사(駟) 기원전 337년 ~ 기원전 311년 효공의 아들,기원전 324년에 개원하고 칭왕함. 사기 진본기
27 무왕(武王) 탕(蕩) 기원전 311년 ~ 기원전 307년 혜문왕의 아들. 사기 진본기
28 소양왕(昭襄王) 칙(則), 직(稷)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혜문왕의 차남, 무왕의 동생. 사기 진본기
29 효문왕(孝文王) 주(柱) 기원전 250년 ~ 기원전 250년 소양왕의 아들. 사기 진본기
30 장양왕(莊襄王) 이인(異人), 자초(子楚) 기원전 249년 ~ 기원전 247년 효문왕의 아들.  
31 시제(始帝) 정(政)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10년 장양왕의 아들. 사기 진본기
시황본기
32 이세제(二世帝) 호해(胡亥) 기원전 210년 ~ 기원전 207년 시제의 아들.  
33 상제(殤帝) 자영(子嬰) 기원전 207년 ~ 기원전 206년 시제의 손자, 이세제의 조카, 황태자 부소의 아들.  

 

 

 

연 (춘추 전국)

(燕)은 중국 춘추 시대의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건국

주 무왕 희발(姬發)이 은나라을 멸망 시키고 그의 동생 소공(召公) (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했다. 그러나 주나라 초기 연나라의 초기 역사에 모르는 것이 많다. 하남성(河南省)지역에 연나라가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서 하남성 지역의 연나라를 남연(南燕)이라 칭하고, 소공석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이라고 호칭하였다. 당시에는 연(燕)이 아닌 언(匽)이라는 한자를 표기하였다. 소공석의 후손들은 산동성(山東省)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옮겼다. 이 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고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 주민들은 대부분 한씨(韓氏)를 사용하였다. 한국의 사학자 이병도는 이 한후 세력을 한씨 조선(韓氏朝鮮)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멸망했다. 춘추시대 이후, 연나라의 사대부층에 한씨와 기씨를 성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다.

[편집] 춘추 시대

춘추시대에 연나라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기원전 664년에 북방의 산융에게 공격받았을 때, 당시 군주였던 장공(莊公)은 이웃나라인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원군을 청하였고, 산융군을 격퇴했던 적이 있었다. 산융과 전쟁한 후, 장공은 환공에게 감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나라 환공의 군대를 움직이게 하게 하였다. 그 때에 군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국경을 넘어 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국에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천자(天子)인 주나라왕(周王)이 가질수 있었고,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환공에게 일부 영토를 할양하여 연나라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제 환공은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더욱 더 명성을 얻었다.

[편집] 전국 시대

전국 시대로 들어서고, 기원전 334년경에 사기 소진열전(史記 蘇秦列傳)에 의하면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반도,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 서쪽으로 운중과 구원, 남쪽으로 호저와 역수(易水)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연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조선에 이르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영토가 이천여 리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乘), 기병 6천기(騎)를 낼 수 있었다.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었다.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여 랴오닝성 만번한지역까지 영토을 확장하였다.

기원전 315년, 연왕 쾌(燕王 噲)는 재상인 자지(子之)를 총애하여,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양을 하였던 일을 예로 삼아 재상인 자지에게 선양을 하였고, 이 일로 의해 연나라 내부는 혼란이 일어났다. 다음 해 여기에 제나라가 이 틈을 타고,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여, 전 국토를 병합하였고, 연나라는 일시적으로 멸망이 되었다. 기원전 313년, 태자 평(太子平)이 자지를 죽이고, 제나라 군대도 철수를 하였고, 태자는 즉위하여 연 소왕(昭王)이 되었다.

기원전 222년, 연왕 희(燕王喜)의 아들 태자 단(太子丹)은 위나라 장수 형가(荊軻)와 진개(秦開)의 손자 진무양(秦舞陽)을 진(秦)나라에 보내어 진 시황제(秦始皇帝)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연왕 희는 요서,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었다. 연왕 희는 아들 태자 단을 죽이고 그 목을 진 시황제에게 바치면서 선처을 구하지만 진 시황제는 연왕 희와 잔존 세력을 공격하여 연나라을 완전히 멸망 시킨다.

[편집] 멸망 이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으나, 내분으로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건국 된다. 한나라도 주나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공신 혹은 황족들을 연나라의 제후로 삼아 성립하였다.

한고조 유방(漢高祖劉邦)은 같은 마을에서 자란 향우였던 노관(盧綰)을 장안후(長安侯), 다시 연왕(燕王)에 봉했다. 노관(盧綰)은 한나라을 배반하고 동호족에 투항하여,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살다가 죽었다.

이 무렵, 연나라 장수 위만도 1000여명을 이끌고 요동, 랴오닝성으로 도망치고 위만조선을 세운다. 위만 조선이 멸망 할 때 우거왕의 아들 한무제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어 연나라 지역을 다스렸다.

[편집] 역대 군주

 

대수 시호 재위기간 비고
1 소공(召公) 석(奭) 기원전 1122년 ~ 기원전 1053년  
2   (克) 기원전 1052년 ~ ?  
3   (旨)    
4   (舞)    
5   (憲)    
6   (和)    
7대 ~ 10대 군주 불명.  
11 혜후(惠侯)   기원전 864년 ~ 기원전 827년 소공(召公) 석(奭)의 후손.
12 이후(釐侯) 장(莊) 기원전 826년 ~ 기원전 791년  
13 경후(頃侯)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7년  
14 애후(哀侯)   기원전 766년 - 기원전 765년  
15 정후(定侯)   기원전 764년 - 기원전 729년  
16 목후(穆侯)   기원전 728년 - 기원전 711년  
17 선후(宣侯)   기원전 710년 - 기원전 698년  
18 환후(桓侯)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91년  
19 장공(莊公)   기원전 690년 - 기원전 658년  
20 양공(襄公)   기원전 657년 - 기원전 616년  
21 환공(桓公)   기원전 617년 - 기원전 602년 전환공(前桓公)이라고도 한다.[1]
22 선공(宣公)   기원전 601년 - 기원전 587년  
23 소공(昭公)   기원전 586년 - 기원전 574년  
24 무공(武公)   기원전 573년 - 기원전 555년  
25 문공(文公)   기원전 554년 - 기원전 549년 전문공(前文公)이라고도 한다.[2]
26 의공(懿公)   기원전 548년 - 기원전 545년  
27 혜공(惠公) 관(款)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36년  
28 도공(悼公)   기원전 535년 - 기원전 529년  
29 공공(共公)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24년  
30 평공(平公)   기원전 523년 - 기원전 505년  
31 간공(簡公)   기원전 504년 - 기원전 493년 전간공(前簡公)이라고도 한다.[3]
32 효공(孝公)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55년  
33 성공(成公)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39년  
34 민공(閔公)   기원전 438년 - 기원전 415년  
35 간공(簡公)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후간공이라고도 한다.[3]
36 환공(桓公)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후환공이라고도 한다.[1]
37 문공(文公)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후문공,문왕(文王)이라고도 한다..[2]
38 역왕(易王) 퇴(腿)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1년  
39   (噲) 기원전 320년 - 기원전 317년 정승 자지(子之)에게 양위로 시호가 없음.[4]
40   자지(子之) 기원전 317년 - 기원전 314년  
41 소왕(昭王) 직(職)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79년  
42 혜왕(惠王)   기원전 278년 - 기원전 271년  
43 무성왕(武成王)   기원전 271년 - 기원전 258년  
44 효왕(孝王)   기원전 257년 - 기원전 255년  
45   (喜)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22년

 

 

 

초 (춘추 전국)

(

중국어

: ,

병음:

Chu

, 기원전 1030년 이전 ~ 기원전 202년)는 현재의 후베이성(

중국어

: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인 장강(

중국어

: 長江,

병음:

Cháng Jiāng

)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 전국칠웅의 하나이다. 갑병 수십만, 전차 천승(乘) 기병 1만기를 낼 수 있었다. 미(羋)성 웅(熊)씨의 제후국이다.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대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된다. 형(荆) 또는 형초(荆楚)로도 불린다. 중국 남방계 민족의 정체성을 가진 제후국이다.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 연구에 따르면 전국 시대 초, 오, 월이 있었던 저장성, 안휘성, 강소성의 중국 남부 사람들은 중국 북부 사람들과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주나라 초기의 작위(爵位)는 자작(子爵) 이었으나, 기원전 704년 무왕(武王)때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하였고, 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223년 (秦)에 의해 멸망 했다. 그 뒤 기원전 208년 회왕의 후손인 의제에 의해 다시 부활하였으나 기원전 202년 초한전쟁에서 항우전한 고조 유방에게 패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한다.

역사

사마천사기 초세가(楚世家)에 따르면,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顓頊 高陽)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顓頊)은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후손 육종(陸終)은 축융(祝融)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帝喾 高辛)때 화정(火正,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吳回)의 아들이다. 주문왕(周文王) 때 계련(季連)의 후손 중에 육웅(鬻熊)이 있었는데 초나라 웅씨(熊氏)들의 시조이다.

육웅(鬻熊)의 증손자 웅역(熊繹)에 이르러 주 성왕(周成王)은 주나라 건국시 문왕(文王)과 무왕(懋王)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熊繹)의 증조부(曾祖父)인 육웅(鬻熊)이 세운 공로로 웅역(熊繹)을 형만(荊蠻)의 땅에 자작(子爵)의 작위에 봉했으나 그 봉지는 남작(男爵)에 준해서 하사하고 미(羋)라는 성을 내렸다. 웅역은 봉지의 도읍을 단양(丹陽)[1]에 두었다.

주 이왕(周 夷王)때에 이르러 주왕실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웅거(熊渠)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2]과 양오(楊奧[3])에서 악(鄂)[4]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웅거는 이후 잠시 왕이라 참칭(僭稱)하다가 포악한 여왕(厲王)이 즉위하자 정벌당하는 것이 두려워 왕이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741년에 웅통(熊通)이 초 자작위에 올랐는데 그가 초 무왕(楚 武王)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濮)[5] 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楚 文王)은 도성을 단양(丹陽)에서 영도(郢都)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 송 양공(宋 襄公)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6]에 소집을하자 초 성왕(楚 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 양공을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7]가 조상인 축융(祝融)과 육웅(鬻熊)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다. 그해 여름 성복(城濮)에서 당진(唐晉)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8] 기원전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초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 목왕(楚 穆王)이다.

기원전 614년 려(旅)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초 장왕(楚 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 때에 이르러 기원전 223년 진나라(秦)에 장군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項燕)과 왕 부추가 사로잡히고 남은 세력들도 모두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초한 챙패기에 초 의제(楚義帝)를 군주로 세우고 서초(西楚)가 재건되었으나, 항우(項羽)가 한나라(漢) 유방(劉邦)에게 패망하고 잔존 세력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다.

[편집] 역대 군주

 

대수 시호 재위 기간 재위 년수 비고
1   (繹)     주 왕실로부터 자작(子爵) 벼슬을 받음.
2   (艾)      
3   (黵)      
4   (勝)      
5   (楊)      
6   (渠)      
7   무강(毋康)      
8   지홍(摯紅)      
9   (延)      
10   (勇)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10년  
11   (嚴)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10년  
12   (霜)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6년  
13   (徇)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22년  
14   (咢)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9년  
15 약오(若敖) 의(儀)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27년 약오와 소오 이래로 초나라는 남방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되어 수(隨)나라와 어깨를 겨루게 됨.
16 소오(霄敖) 감(坎)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6년  
17 분모(蚡冒) 순(眴)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17년  
18 무왕(武王) 통(通)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51년 분모의 동생.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임금이 됨,주 환왕(周 桓王)때 칭왕함.
19 문왕(文王) 자(貲)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15년  
20 도오(堵敖) 간(囏)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3년  
21 성왕(成王) 운(惲)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46년  
22 목왕(穆王) 상신(商臣)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12년  
23 장왕(莊王) 려(侶)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23년  
24 공왕(共王) 심(審)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31년  
25 강왕(康王) 초(招)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15년  
26 겹오(郟敖) 원(員)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4년  
27 영왕(靈王) 비위(比圍)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12년  
28 평왕(平王) 기질(弃疾)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13년  
29 소왕(昭王) 진(珍)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27년  
30 혜왕(惠王) 장(章)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57년  
31 간왕(簡王) 중(中)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24년  
32 성왕(聲王) 당(當)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6년  
33 도왕(悼王) 의(疑)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21년  
34 숙왕(肅王) 장(臧)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11년  
35 선왕(宣王) 양부(良夫)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30년  
36 위왕(威王) 상(商)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11년  
37 회왕(懷王) 괴(槐)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30년  
38 경양왕(頃襄王) 횡(橫)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36년  
39 고열왕(考烈王) 원(元)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25년  
40 유왕(幽王) 한(悍)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10년  
41 애왕(哀王) 유(猶)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8년 1년  
42   부추(負芻)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5년  

 

[편집] 주석

  1. 초 나라의 첫 번째 도읍지로써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자귀현(秭歸縣) 동남쪽의 고을로써 장강의 강안(江岸) 도시로 쓰촨성(중국어: 四川省, 병음: Sìchuān Shěng)과 경계(境界)에 있음.
  2.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죽산현(竹山縣)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3. 양우(楊雩)혹은 양월(陽越)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강릉현(江陵縣) 일대
  4.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 악성현(鄂城縣) 부근
  5. 지금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省, 병음: Húběi Shěng)을 가로 지르는 한수(漢水)의 하류 지방을 말한다.
  6. 송나라 영지로써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서북
  7. 초 나라와 동성인 제후국으로 호북성 자귀현(秭歸縣) 동남에 있었던 군소 제후국
  8. 성복대전(城濮大戰)/기원전 636년 중원제후국을 대표하는 당진과 남쪽의 새로이 일어난 세력을 대표하는 초 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남 임복향(臨濮鄕)에 있었던 성복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 이 싸움의 결과 진 문공(晉 文公)의 당진군이 초군을 대파하여 초 나라의 중원진출에 쐐기를 박고 향후 중원의 패권은 당진이 차지하게 되었다.

 

 

위 (전국)

(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는 전국 시대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토지가 사방 일천 리에 달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나라이다. 갑병 30만과, 말 오천 필, 전차 육백 승을 낼 수 있었다.

정치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은 유명하다.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이기도 했다.

원래 주나라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집권국가가 되자, 덕의 이념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즉,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서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의 이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 관개사업 추진에 의해 다른 6국에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 결국 진나라가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성이 침수당하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편집] 역대 군주

[편집] 삼진 분립 전(진나라 신하)

 

대수 칭호 재위 년수 재위 기간 비고
1 무자(魏武子) 위주(魏犨)     필만(畢萬)의 손자이자 망계(芒季)의 아들.
2 도자(魏悼子) 위과(魏顆)     위 무자의 아들.
3 소장자(魏莊子) 위강(魏絳)     위 무자의 아들.
4 헌자(魏獻子) 위서(魏舒)     위 소자의 아들.
5 간자(魏簡子) 위취(魏取)     위 헌자의 아들.
6 양자(魏襄子) 위만다(魏曼多)     위 간자의 아들.
7 환자(魏桓子) 위구(魏駒)   ? ~ 기원전 446년 위 양자의 아들.

 

[편집] 삼진 분립 후(위나라 군주)

 

대수 시호 재위 년수 재위 기간 비고
1 문후(文侯) 위사(魏斯) 50년 기원전 446년 ~ 기원전 397년  
2 무후(武侯) 위격(魏擊) 26년 기원전 396년 ~ 기원전 371년  
3 혜왕(惠王) 위앵(魏罃),위영(魏瑩) 52년 기원전 370년 ~ 기원전 319년  
4 양왕(襄王) 위사(魏嗣) 23년 기원전 318년 ~ 기원전 296년  
5 소왕(昭王) 위속(魏遬) 19년 기원전 295년 ~ 기원전 277년  
6 안리왕(安釐王) 위어(魏圉) 34년 기원전 276년 ~ 기원전 243년  
7 경민왕(景閔王) 위증(魏增) 15년 기원전 242년 ~ 기원전 228년  
8 왕가(王假) 위가(魏假) 3년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5년  

 

 

 

제 (춘추 전국)

(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시대춘추오패이자, 전국시대전국칠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현재의 산둥 지방이다

역사

[편집] 초기 역사

(周)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강태공(姜太公)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다. 당시에 주나라의 세력으로만 동중국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동이라는 불리는 이민족이 이 지역에 있었다. 영지를 하사한 것과 다르게, 태공망 강상에게 동중국 지역 세력들을 토벌할 것을 명한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강태공은 제나라의 제후과 되었고, 현지 풍속에 맞춰 정치를 집행하였고, 제나라를 안정시켰다. 관숙과 채숙의 반란 후에, 성왕은 "동쪽은 바다에 이르러, 서쪽은 하수에 이르러, 남쪽은 목릉에 이르러, 북쪽에 이르러서 5후 9백이 죄를 범했을 경우, 그들을 토벌해도 괜찮다."라고 명했다. 그 후도 영토를 확대하였고, 춘추 시대 초기에는 동쪽의 강국이 되었다. 제나라는 바다를 접하여 있어, 소금의 생산을 하였고, 철이 나오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원이 풍족하게 되었다. 이후 제15대 군주 제 환공(齊桓公)시대에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주나라를 대신하여 제후들을 통제하였고, 남쪽의 초나라의 위협에 대항했다. 기원전 667년, 환공은 주나라왕에게 패자(覇者)로 인정되어 그 자리에 올랐고, 춘추 오패의 한 명으로 꼽힌다.

[편집] 전씨의 찬탈

그러나 환공의 사후에 후계 싸움이 계속 되어, 패자는 진나라(晉)의 문공(文公)이 되었다. 진 문공이 패자가 되었지만, 제나라도 그대로 대국으로 유지하였지만, 중원의 주도권이 북쪽의 진나라(晉)과 남쪽의 초나라(楚)의 패자 쟁탈전으로 옮겨졌고, 그 상황에 제나라와 진나라(秦)가 관련되는 것이 춘추 시대 중기의 흐름이 되었다. 그 때부터 서서히 대부들의 힘이 강해지고, 군주 권력은 약해지고 있었다. 제나라의 강력한 대부들이 있었는데 국씨, 고씨, 포씨, 최씨, 경씨, 진씨(陳氏)등 6개의 가문이 있었다.

제 24대 제 장공의 시대에는 재상이였던 최저(崔杼)는, 장공이 아내와 불륜 관계인것을 알고 화를 내었고, 장공을 죽였다. 최저는 다른 군주를 세웠지만, 후에 살해당한다.

기원전 532년제 경공안영을 등용하였다. 안영이 재상이 되어, 군사 분야에는 사마양저를 등용하였고, 국정을 안정시켰다. 안영은 양설힐(羊舌肸)과 대화를 나누었고, "제나라는 멀지 않아 전씨에게 찬탈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전씨는 앞에서 이야기를 한 진씨가 전씨(田氏)로 성을 개칭한 일이다. 진씨=전씨는 기원전 672년에 진나라(陳)에서 망명한 진나라 공자 전완의 후손이다.

유력한 대부들은 내부 권력 투쟁으로 몰락하고, 마지막에는 전씨가 제나라의 권력을 장악한다. 안영의 예언 대로, 기원전 386년전화제 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어, 강성 여씨에서 규성 전씨로 국성이 갈렸다. 제 위왕(齊 威王)이 행정 개혁을 행하여 국력을 증대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진(秦)과 중국을 양분하는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의 침공으로 제왕 건(齊王 建)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편집] 역대 군주

[편집] 강제 (강성 왕조)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강태공(姜太公) 상(尙) 기원전 1000년경 이전  
2 정공(丁公) 급(伋, 級)    
3 을공(乙公) 득(得)    
4 계공(癸公) 자모(慈母)    
5 애공(哀公) 불신(不辰) ? ~ 기원전 863년  
6 호공(胡公) 정(靜) 기원전 862년 ~ 기원전 860년  
7 헌공(獻公) 산(山) 기원전 859년 ~ 기원전 851년  
8 무공(武公) 수(壽) 기원전 850년 ~ 기원전 825년  
9 여공(厲公) 무기(無忌) 기원전 824년 ~ 기원전 816년  
10 문공(文公) 적(赤) 기원전 815년 ~ 기원전 804년  
11 성공(成公) 탈(脫) 기원전 803년 ~ 기원전 795년  
12 장공(莊公) 속(贖) 기원전 794년 ~ 기원전 731년  
13 희공(僖公) 녹(祿) 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  
14 양공(襄公) 제아(諸兒)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86년  
15   무지(無知) 기원전 686년  
16 환공(桓公) 소백(小白)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  
17   무궤(無詭)
무휴(無虧)
기원전 643년 ~ 기원전 642년  
18 효공(孝公) 소(昭) 기원전 642년 ~ 기원전 633년  
19 소공(昭公) 반(潘) 기원전 632년 ~ 기원전 613년  
20   (舍) 기원전 612년  
21 의공(懿公) 상인(商人) 기원전 612년 ~ 기원전 609년  
22 혜공(惠公) 원(元) 기원전 608년 ~ 기원전 599년  
23 경공(頃公) 무야(無野) 기원전 598년 ~ 기원전 582년  
24 영공(靈公) 환(環) 기원전 581년 ~ 기원전 554년  
25 장공(莊公) 광(光) 기원전 553년 ~ 기원전 548년  
26 경공(景公) 저구(杵臼) 기원전 547년 ~ 기원전 490년  
27 도공(悼公) 양생(陽生) 기원전 489년 ~ 기원전 485년  
28 간공(簡公) 임(壬) 기원전 484년 ~ 기원전 481년  
29 평공(平公) 오(驁)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56년  
30 선공(宣公) 적(積)
취잡(就匝)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05년  
31 강공(康公) 대(貸) 기원전 404년 ~ 기원전 379년  

 

[편집] 전제 (전씨 왕조)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태공(太公) 화(和)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4년  
2   (剡) 기원전 383년 ~ 기원전 375년  
3 환공(桓公) 오(午)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7년  
4 위왕(威王) 인(因)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0년  
5 선왕(宣王) 벽강(辟彊) 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  
6 민왕(湣王) 지(地) 기원전 300년 ~ 기원전 284년  
7 양왕(襄王) 법장(法章) 기원전 283년 ~ 기원전 265년  
8   (建)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21년

 

 

 

 

한 (전국)

(韓,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 또는 한나라(韓나라)는 전국시대칠웅(七雄) 가운데 하나이다. 수도는 초기에는 양책, 후기에는 신정(新鄭)이었다.

춘추오패의 하나인 (晉)에서 분리된 나라이며, 위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영토는 북쪽으로는 지금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서쪽으로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이르렀고, 영토의 길이가 구백 리에 달했다고 했다. 또한 갑병 30만을 낼 수 있고, 무기가 뛰어났다.

그러나 기원전 239년 진나라(秦)의 장군 몽오의 공격으로 성 13곳을 빼앗겼고 곧이어 기원전 230년 다시 진나라의 대공세로 한왕 안(韓王安)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한나라는 멸망했다.

역대 군주

[편집] 삼진 분립 전(진나라 신하)

 

대수 칭호 이름 재위 기간 재위 연수 관계
1 한 무자(韓武子) 한만(韓萬) ? ? 곡옥 환숙(曲沃桓叔)의 아들
2 한 구백(韓賕伯) ? ? ? 한 무자의 아들.
3 한 정백(韓定伯) 한간(韓簡)   ? 한 구백의 아들.
4   한천(韓穿) ? ? 한 정백의 아들.자(字)는 한자여(韓子輿).
5 한 헌자(韓獻子) 한궐(韓厥)   ?  
6 한 선자(韓宣子) 한기(韓起)   ? 한 헌자의 아들.
7 한 정자(韓貞子) 한수(韓須)   ? 한 선자의 아들.
8 한 간자(韓簡子) 한불신(韓不信)
한불녕(韓不佞,(조세가(趙世家))
? ~ 기원전 479년 이후 ? 한 정자의 아들.
9 한 장자(韓莊子) 한경(韓庚) ? ? 한 간자의 아들.
10 한 강자(韓康子) 한호(韓虎) ? ~ 기원전 425년 ? 한 장자의 아들.
11 한 무자(韓武子) 한계장(韓啓章)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09년 15년 한 강자의 아들.

 

[편집] 삼진 분립 후(한나라 군주)

 

대수 시호 이름 재위 기간 관계 사료 출처
1 한 경후(韓景侯) 한건(韓虔)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한계장의 아들. 사기 한세가(史記 韓世家)
2 한 열후(韓烈侯) 한취(韓取)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한 경후의 아들. 사기 한세가
3 한 문후(韓文侯) 한유(韓猷)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77년 한 열후의 아들. 사기 한세가
4 한 애후(韓哀侯) 한둔몽(韓屯蒙) 기원전 376년 ~ 기원전 374년   정승 한산견에게 시해당함.
5 한 의후(韓懿侯) 한약산(韓若山)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63년    
6 한 소후(韓昭侯) 한무(韓武) 기원전 362년 ~ 기원전 333년   정나라를 멸국함.
7 한 선혜왕(韓宣惠王) 한강(韓康)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12년   한 선혜공(韓 宣惠公)은 재위 10년때 개원하고 칭왕함.
8 한 양왕(韓襄王) 한창(韓倉)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96년    
9 한 이왕(韓釐王) 한구(韓咎) 기원전 295년 ~ 기원전 273년   위의 소왕과 힘을 합해 진을 치나 패함.
10 한 환혜왕(韓桓惠王) 한연(韓然) 기원전 272년 ~ 기원전 239년   진에 아부할 정도로 어리석고 나약한 왕.
11 한왕 안(韓王 安) 한안(韓安) 기원전 238년 ~ 기원전 230년   진에 멸국되어 시호가 없음.

 

 

 

 

조 (전국)

조나라(趙-,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는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서 전국시대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위나라, 한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북쪽엔 연나라와 붙어있고 남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있다.

호복(胡腹, 통소매와 바지)을 채용하였고, 중국에 처음 기마전술을 도입한 나라이기도 한다. 갑병 수십만과, 전차 천승, 말(馬) 만필을 낼 수 있었으나 기원전 228년 진나라의 침공을 받아 유목왕이 사로잡혀 멸망한다.

이때 태자 대왕은 멀리 대나라로 쫓겨가 대나라의 왕 자리에 올랐으며 도읍인 한단(邯鄲)은 상공업의 대중심지였다

역대 군주

[편집] 삼진 분립 전(진나라 경)

 

대수 칭호 재위 년수 재위 기간 비고
1 조 성자(趙成子) 조쇠(趙衰) 15년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2년  
2 조 선자(趙宣子) 조돈 (趙盾) 21년 기원전 621년 ~ 기원전 601년  
3 조 장자(趙莊子) 조삭(趙朔) 4년 기원전 600년 ~ 기원전 597년  
4 조 문자(趙文子) 조무(趙武) 43년 기원전 583년 ~ 기원전 541년  
5 조 경숙(趙景叔) 조성(趙成) 23년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18년  
6 조 간자(趙簡子) 조앙(趙鞅) 42년 기원전 517년 ~ 기원전 476년  
7 조 양자(趙襄子) 조무휼(趙無恤) 51년 기원전 475년 ~ 기원전 425년  
8 조 환자(趙桓子) 조가(趙嘉) 1년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24년  
9 조 헌자(趙獻子) 조완(趙浣) 15년 기원전 423년 ~ 기원전 409년  

 

[편집] 삼진 분립 후(조나라 군주)

 

대수 시호 재위 년수 재위 기간 비고
1 조 열후(趙列侯) 조적(趙籍) 9년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2 조 무후(趙武侯)   13년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휘(諱) 미상.
3 조 경후(趙敬侯) 조장(趙章) 12년 기원전 368년 ~ 기원전 375년  
4 조 성후(趙成侯) 조종(趙種) 25년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0년  
5 조 숙후(趙肅侯) 조어(趙語) 24년 기원전 349년 ~ 기원전 326년 숙왕(肅王)이라고도 함.
6 조 무령왕(趙武靈王) 조옹(趙雍) 27년 기원전 325년 ~ 기원전 299년  
7 조 혜문왕(趙惠文王) 조하(趙何) 33년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6년  
8 조 효성왕(趙孝成王) 조단(趙丹) 21년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  
9 조 도양왕(趙悼襄王) 조언(趙偃) 9년 기원전 244년 ~ 기원전 236년  
10 조왕 천,조 유류왕(趙王遷,趙幽謬王) 조천(趙遷) 8년 기원전 235년 ~ 기원전 228년  
11 대왕 가(代王嘉) 조가(趙嘉) 6년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2년

 

 

 

 

 전국시대의 진

[네이버 지식백과] 전국시대의 진 (두산백과)

  

진나라 헌공(獻公) 때에는 순사(殉死)의 습속을 금지하고 BC 383년에는 동녘에 역양성(櫟陽城:陝西省 臨潼縣 북동)을 구축하여 동방으로의 진출 의지를 보여주었다.

BC 362년 효공(孝公)이 왕위에 오르자 위(衛)나라 사람 상앙(商鞅)을 등용해 내정을 개혁하였다. 즉 종래의 혈연 존중의 인사를 고쳐서 공적에 따른 신분제도를 설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이때부터 종래의 읍(邑)과는 그 성격이 다른 새로운 현(縣)이 생겼고, 군주권이 현내의 서민과 직결되었다. 이같이 하여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河南省 開封縣)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셴양[咸陽]으로 옮겨 셴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안출하였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공손 연(公孫衍)으로 하여금 ‘합종책’을 분쇄하도록 명하고, 장의(張儀)로 하여금 각국이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이른바 ‘연횡(連衡)’을 성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책동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진은 파(巴) ·촉(蜀), 즉 쓰촨성[四川省]을 장악하고, 초(楚)나라로부터는 한수이강[漢水]의 상류를 빼앗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어느 때든지 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혜문왕은 BC 325년부터 공(公) 대신 왕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부터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왕호를 쓰게 되었다.

 소양왕(昭襄王) 때에 이르러 청두[成都] 부근에 운하를 열고 쓰촨의 옥야(沃野)를 개발하는 한편,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BC 27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왕 역대의 능역(陵域)이던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렸다. 초나라는 허난[河南]의 진(陳:河南省 淮陽縣)으로 옮겨야 하였고, 뒤에 다시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다. 진나라 군대는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다시 구이저우성[貴州省]의 동부와 후난성[湖南省]의 서부도 공격하였다.

백기 장군은 북방의 조(趙)나라도 공격하여,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수도 한단(邯鄲)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이즈음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齊)나라는 동제(東帝)라고 높여서 ‘황제’ 칭호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왕호를 썼다. 소양왕이 위나라 사람 범수(范睢)를 등용한 뒤부터는 그의 건의에 따라‘연횡책’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마지막 마무리 작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형세를 살핀 주왕(周王) 난(赧)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부터 공격을 시작하자 난왕은 영읍(領邑) 30과 인구 3만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주나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君)도 멸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국시대의 진 (두산백과)

 

 
범수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창안자 [ 范睢 ]
[네이버 지식백과] 범수 [范睢] -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창안자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10.20, 들녘)

 

 

범수는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초나라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제후에 유세하여 관직을 얻으려 했지만 가진 돈이 없어 먼저 중대부 수고(須賈)의 가신이 되었다(당시 대부는 상·중·하의 구분이 있었다).

죽은 척하여 목숨을 간신히 건지다

 진 소왕 37년인 기원전 270년 범수는 중대부 수고를 수행하여 제나라에 갔다. 제 양왕이 말 잘하고 재능 있는 범수를 보고는 황금 10근과 술을 상으로 내렸다. 범수가 요구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 일을 알게 된 수고는 범수가 제와 내통하여 위의 기밀을 팔아 넘겼다고 생각했다. 수고는 범수에게 술은 받되 황금은 돌려주게 했고, 범수는 그에 따랐다. 귀국한 뒤 수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이 일을 위나라의 재상인 위공자 위제(魏齊)에게 보고했다

.화가 몹시 난 위제는 가신에게 명령하여 범수에게 고문을 가하게 했다. 뼈가 부러지고 이가 빠지는 등 범수는 피투성이가 되어 사경을 헤맬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범수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죽음을 가장했다. 위제는 범수의 시신(?)을 멍석에 말아 변소간에 던져버리도록 했다. 술에 취한 위제의 빈객들은 일부로 범수의 시신에다 오줌을 갈겨 모욕을 주었다. 물론 타인에 대한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외국과 내통한 자의 최후를 똑똑히 보라는 섬뜩한 경고였다.

멍석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범수는 틈을 봐서 많은 돈을 주겠다며 간수를 매수했다. 간수는 위제에게 가서 시체를 내다버리게 해달라고 청했다. 술에 취한 위제는 범수의 시신을 교외에 내다버려 짐승들이 뜯어먹게 하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범수는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얼마 뒤 위제는 문득 범수가 진짜 죽었는지 의심이 들어 사람을 보내 사방을 뒤지게 했다. 범수는 여기까지 예견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거적에 덮힌 자신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라고 일러두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범수의 죽음 앞에 통곡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위제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범수는 친구 정안평(鄭安平)의 보살핌을 받아 도망쳤다. 이름까지 장록(張祿)으로 바꾼 채 몸을 숨겼다.

공교롭게도 이때 진 소양왕 영직이 사신 왕계(王稽)를 위나라로 보냈다. 범수의 친구인 정안평은 근무병으로 분장하여 공관에서 왕계를 보살피게 되었다. 왕계는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근위병 정안평에게 "나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유세할 유능한 인재가 위나라에는 없는가?"라고 물었다. 정안평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고향에 장록이란 선생이 계시는데 대인을 뵙고 천하 대사를 논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위나라와 원수지간이라 대낮에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왕계는 밤에 함께 오도록 했다. 그날 밤 정안평은 범수를 데리고 왕계를 만났다. 이야기를 끝내기도 전에 왕계는 범수가 인재임을 알아채고 "내 공무가 다 끝나 돌아가는 길에 삼정(三亭, 지금의 하남성 위씨현 서남) 남쪽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공무를 마친 왕계는 위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수레를 몰아 삼정에 이르렀다. 약속한 장소에서 범수와 정안평이 왕계의 수레에 올랐고, 일행은 함께 진나라로 들어갔다. 왕계 일행이 호지(湖地, 함곡관 서쪽,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 경내)에 이르렀을 때 서쪽에서 마차가 잔뜩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범수, 아니 장록이 "저쪽에서 오는 사람은 누굽니까?"라고 물었다. 왕계는 "진나라 재상 양후가 동부 현읍을 순시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범수는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듣기에 양후는 진나라 조정의 대권을 혼자 주무르며 유능한 인재를 질투하고 제후의 빈객을 혐오한다던데 나를 보면 모욕을 줄지 모르니 수레 상자 안에 잠시 숨어 있겠습니다.

"잠시 뒤 양후가 다가왔다. 왕계와 인사를 나눈 다음 양후는 마차 앞에서 왕계를 위로하고 "관동(함곡관 동쪽)에 무슨 소식 없습디까?"라고 물었다. "별다른 것 없습니다." 왕계는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혹 제후의 유세객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아니겠죠? 그런 자들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요. 그저 남의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만 하지." 양후는 근엄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왕계를 타일렀다. 왕계는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능청을 떨었고, 양후는 안심한 듯 그 자리를 떴다. 이윽고 상자에서 나온 범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후가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은 느리군요. 방금 전 수레에 외부인이 있지 않느냐며 의심까지 해놓고 그저 한번 흘깃 보기만 하고 조사는 하지 않는군요

."이렇게 말한 다음 범수는 수레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면서 "조금 있으면 양후가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십 리쯤 갔을까. 놀랍게도 범수의 예상대로 양후가 기병을 보내 수레를 뒤졌고, 외부인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돌아갔다. 범수는 이렇게 해서 왕계·정안평과 함께 진의 도성 함양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원교근공을 설파하는 범수

왕계는 진왕에게 위나라에 다녀온 상황을 보고한 다음 틈을 봐서 슬그머니 이렇게 말했다.

"위나라에 장록 선생이란 분이 있는데 천하가 알아주는 인재랍니다. 그가 말하길 '진나라의 형세가 달걀을 올려놓은 것처럼 위험합니다. 저의 대책을 채택해야만 안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책을 글로 써서 대왕께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수레로 모셨습니다

."하지만 소양왕은 평소 유세객들을 혐오하던 터라 왕계가 전한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범수의 정착을 허락하긴 했지만 일 년이 넘도록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앞서 진은 소양왕 36년인 기원전 271년에 남쪽 초나라의 수도 언영(지금의 호북성 의성현 남쪽)을 점령하고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제나라까지 물리친 바 있다. 또 삼진(한·조·위)을 여러 차례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후 양후는 자신의 봉지를 확대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한·위를 지나 제나라 강읍(지금의 산동성 영향현 북쪽)과 수읍(지금의 산동성 동평현 서남)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바로 이때 범수가 글을 올려 소양왕에게 간곡하게 면담을 요청했다. 편지 마지막에 "저를 만나신 다음 한 마디라도 쓸모가 없다면 죽음으로 보상하겠습니다"라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장록이란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소양왕은 뜻밖의 편지를 읽고는 무척 흥분하여 왕계를 불러 범수를 데려오게 했다. 기원전 270년, 마침내 범수(장록)는 진나라 궁전에 발을 들여놓았다. 소양왕은 아직 오지 않았다. 범수는 궁중의 길을 모르는 것처럼 하면서 일부러 후궁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로 이때 소양왕이 도착했고, 환관이 기세등등하게 범수를 내쫓으며 "대왕 납시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범수는 못 들은 척 일부러 헛소리를 지껄였다. "진나라에는 태후와 양후밖에 없거늘 무슨 군왕이란 말인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범수는 계속 후궁 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범수는 일부러 소양왕의 화를 돋우려는 심산이었다. 범수와 환관이 말다툼하는 소리를 들은 소양왕은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다가가 범수를 맞이했다.

소양왕은 좌우를 물리쳤다. 궁중에는 이제 두 사람만 남았고, 소양왕은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몸을 세운 채 정중하게 범수를 맞이했다. 그러고는 "선생께서 과인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고요?"라고 물었다. 범수는 '그렇습니다'를 두 번이나 내뱉었다. 이윽고 소양왕은 다시 두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선생께서 과인에게 무엇을 지도하려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범수는 또 '그렇습니다'를 두 번 반복했다. 이렇게 하길 세 차례, 소양왕은 다시 똑같은 자세로 "선생은 과인을 가르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라고 물었다. 범수는 그제서야 표정을 풀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그 옛날 여상(강태공)이 문왕을 만날 당시 그는 위수에서 낚시나 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아주 멀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자리에서 대화를 나눈 다음 문왕은 그를 바로 태사(군대 최고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문왕은 여상의 모략을 채용하여 마침내 상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치하기에 이릅니다.지금 저는 타국에 머무르는 나그네로 대왕과의 관계라면 관계랄 것도 없을 정도로 까마득합니다.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모두 국군을 돕거나 군왕의 인척과 관련된 큰 일들입니다. 원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려 했으나 대왕의 속내를 알 수 없는지라, 대왕께서 세 차례나 추궁하시듯 물으셨음에도 바로 대답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에 소양왕은 몸을 범수 쪽으로 더욱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은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이 사람 또한 어리석고 무능합니다. 선생께서 체면 불구하고 이렇게 오신 것은 하늘이 진을 도우신 것입니다. 일이 크든 작든 위로는 태후에 아래로는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생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니 과인의 뜻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소양왕의 진심을 확인한 범수는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절을 올렸고, 소양왕도 같은 예로 화답했다. 범수는 드디어 원교근공의 원대한 책략을 소양왕에게 펼치기 시작했다.

"용감한 병사를 거느린 강력한 진나라가 제후를 정복하기란 마치 뛰어난 사냥꾼이 토끼 발자국을 뒤쫓듯 쉽습니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 진나라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양후가 대왕께 불충하는데다, 대외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옳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대왕께 좋은 책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양왕은 범수에게 다시 한번 정중하게 가르침을 요청했고, 범수는 본격적으로 원교근공의 책략을 풀어놓았다.

"한·위는 진의 이웃입니다. 진이 영토를 넓히려면 먼저 이 두 나라를 병합해야 합니다. 그런데 양후는 이 두 나라를 건너뛰고 제나라를 공격하자고 합니다. 이는 매우 모자란 생각입니다.

"범수는 소양왕을 설득하기 위해 제 민왕이 멀리 초나라를 치다가 실패한 사례를 끄집어냈다.

제 민왕은 이웃 나라를 넘어 멀리 초를 공격하여 적장의 목을 베는 등 단 숨에 천 리 땅을 공략했다. 하지만 결국 단 한 자의 땅도 얻지 못했다. 원인은 전략을 잘못 구사한 데 있었다. 먼길을 와서 전투를 하다보니 군대가 지치고 소모가 너무 컸다. 게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 애써 땅을 얻고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이때 다른 나라가 제나라의 허술한 수비와 피로를 틈타 후방을 공격하니 제는 크게 패하고 말았다. 힘들게 빼앗은 초나라 땅은 한·위 두 나라 차지가 되었다. 이는 군대를 도적에게 빌려주고 양식을 훔친 도적에게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나라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다음 범수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대왕께서는 제 민왕의 교훈을 거울삼아 '원교근공'의 책략을 취하셔야 합니다. 먼 나라와는 우호관계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원교근공' 말입니다. 이렇게 영토를 조금씩 넓혀가면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이웃나라는 버리고 먼 나라를 공격하려 하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한·위 두 나라는 중원지대에 위치한 나라로 천하로 통하는 중추와 같습니다. 패업을 이룰 생각이시라면 먼저 한·위를 제압하여 멀리 있는 초와 조를 위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초·조와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합니다. 이 두 나라가 진에 붙으면 제는 두려워할 것이고, 이때 제와 다시 우호관계를 맺으면 됩니다. 이웃 한·위 두 나라는 이쯤 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혀!

"소양왕은 범수의 책략을 칭찬했고, 그를 객경에 임명하여 대외 군사행동을 전문적으로 기획하고 논의하도록 했다. 범수의 모략에 따라 진은 위를 공격하여 회성(지금의 하남성 무척현 서남)을 차지했다. 2년 뒤에는 형구(지금의 하남성 온현 동쪽 부평 옛성)를 공략했다. 기원전 266년, 소양왕은 응(지금의 하남성 노산현 동쪽) 땅을 범수에게 봉지로 내리고 응후라는 작위를 내림으로써 양후의 재상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265년, 진은 다시 동쪽 한나라를 공격했다.

'원교근공'이라는 고전적이고 불멸의 외교이론을 창안하여 진의 통일을 촉진했던 범수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소양왕 시대에 활약했다.사진은 소양왕에서 진시황에 이르기까지의 국가 대사를 기록한 죽간의 모습이다.

노장 염파에게 반간계를 구사하고, 조나라 병사 40만을 생매장하다

소양왕 47년인 기원전 260년, 진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를 공격했다. 진은 장평(지금의 산서성 고평 서북)을 포위했고, 조는 노장 염파를 보내 저항하게 했다. 염파는 명성답게 굳건한 수비로 적의 예봉을 피하는 정확한 전략을 선택했다.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자는 전략이었다. 조왕은 염파가 적에게 지레 겁을 먹고 있다며 몇 차례 나무라고 출전을 독촉했지만 염파는 꿈쩍하지 않았다.

범수는 기회를 엿보다 첩자를 이용하여 조나라 진영을 이간시키는 이른바 '반간계(反間計)'를 활용했다. 범수는 황금 천 금(1금은 황금 20냥)과 함께 첩자들을 보내 조나라 사람들을 매수하여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염파가 쉽게 이길 수 있는데 너무 일찍 포기하려 한다. 진나라는 조사의 아들 조괄이 조나라 군대를 지휘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조 효성왕은 본래 염파가 공격은 않고 수비만 하는 것에 대해 위신을 잃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유언비어까지 듣고 보니 여간 부아가 치미는 것이 아니었다. 범수의 반간계가 효과를 내는 순간이었다. 과연 효성왕은 조괄을 보내 염파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염파가 물러난 이상 상황은 급변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병법을 공부한 조괄은 종이 위에서 군대를 논하는 것에는 적수가 없었지만 실전 경험은 전무했다. 하지만 자부심 하나는 대단하여 안하무인이었다. 일찍이 아버지 조사는 "초나라가 내 아들을 장군으로 기용하는 날이 곧 조나라가 장례를 치르는 날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염파의 자리를 대신한 조괄은 실제 상황은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다짜고짜 전법을 바꾸어 강적과 정면 대결에 나섰다. 한편 진은 은밀히 경험이 가장 풍부한 백기를 최고사령관으로 기용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 조의 처절한 패배로 끝이 났다. 조나라 군대 40만이 전부 조괄 손에서 장례를 치르고 말았다.

사마천은 범수를 평가하면서 한비자의 말을 빌려 "소매가 길어야 춤이 아름다워 보이고, 밑천이 든든해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정곡을 찌른 말이다. 범수가 당대 최고의 변사로 진나라의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강력한 진나라에 의지하여 자신의 지혜와 모략을 한껏 발휘했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오두』라는 글에서 정치가 안정되고 강성한 나라가 수준 높은 일을 실행하기 쉽고, 정치가 어지럽고 약한 나라는 제아무리 좋은 계책이 있어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했다.

범수는 평생 진 소양왕을 섬겼고, 그의 모략은 대부분 성공했다. 이는 진이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는 데 크게 공헌했다. 범수는 또 굴욕을 참고 일어선 대장부였다. 힘들다고 뜻을 꺾지 않았으며, 불굴의 의지로 분발하여 성공했다. 그는 성공했다고 자만하지 않았으며, 그와는 반대로 격류 속에서 용퇴할 줄 알았다. 그는 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걸출한 책사이자 진정한 모략가였다.

 인물소개

 범수 '원교근공'이란 고전적이고 불멸의 외교이론을 창안하여 진의 통일을 촉진했던 범수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진 소양왕 시대에 활약했다.

그는 사지에서 간신히 살아나와 사방을 떠돌다 진나라에 정착하여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헤치고 입신양명한 범수는 원교근공이라는 고차원의 외교모략으로 합종책을 철저히 분쇄하고 마침내 천하통일의 마지막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장평전투를 통해 처절하면서 장엄하게 분열시대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범수는 명예로운 퇴장을 선택하여 전국시대 유세가로는 보기 드물게 생의 막바지를 편하게 마무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수 [范睢] -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창안자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10.20, 들녘)

 

진진 좋은 모략을 가슴속에 품고도 자신의 견해를 갖지 못하다 [ 陳軫 ]
[네이버 지식백과] 진진 [陳軫] - 좋은 모략을 가슴속에 품고도 자신의 견해를 갖지 못하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10.20, 들녘)

 

진진은 전국시대의 이름난 종횡가(縱橫家)이자 천하가 알아주는 웅변가로 외교모략 방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뚜렷한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못했고 한 국군에게 충성하지도 못했다. 오늘은 저 국군을 위해 꾀를 내고, 내일은 이 국군을 위해 계책을 세우는 등 그는 평생 동안 정치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초 진진은 장의와 함께 진나라 혜문왕에 의해 중용되었다. 두 사람 모두 외교모략과 웅변의 고수였다. 이는 달리 말해 두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산에 함께 살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혜문왕의 총애를 얻으려 했다. 장의는 혜문왕 앞에서 대놓고 진진을 헐뜯었고, 진진은 자신의 충정을 거듭 밝혔다. 그러나 혜문왕은 결국 장의를 상국에 임명했고, 진진은 초나라로 도망쳐 몸을 맡겼다.

초나라는 진진을 반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자신이 도망쳐 나온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사신이 되어 위나라를 지나게 된 진진은 위나라의 실력자 서수(犀首)를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서수는 진진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서수는 다름 아닌 공손연(公孫衍)으로 위나라 진양 사람이다. 그는 평소 장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마침 진나라가 장의를 상국으로 기용하자 기분이 몹시 상해 있던 터였다.

면담을 거부당한 진진은 "긴히 할 말이 있어 당신을 찾았는데 만남 자체를 거부하니 내일을 넘기지 않고 떠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제서야 서수는 진진과 면담을 받아들였다.

"당신은 왜 술을 좋아하십니까?" 서수를 만난 진진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렇소." 뜻밖의 질문에 서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해 할 일을 만들어주고자 하는데 괜찮겠소?" 진진이 제안했다. "어떻게 말이오?" 서수가 진진 쪽으로 몸을 당기며 관심을 보였다. 자신의 제안에 서수가 관심을 보이자 진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의 위나라 상국 전수(田需)는 제후들을 모아 동맹을 맺고자 하는데 초나라 회왕이 그를 신임하기는커녕 되레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먼저 위왕을 만나 연·조 두 나라의 국왕이 당신과 친분이 있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할 일도 없는데 자기들 나라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나 나누자고 요청하니 당신을 이 두 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십시오.

"잠시 뜸을 들인 진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위왕께서 승낙하시면 많이도 말고 대략 30대의 수레만 차출하여 당신 뜰에 모아놓은 다음 공개적으로 연·조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간다고 공포하십시오.

"서수는 진진의 말을 따랐고, 위왕은 예상대로 서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연·조 두 나라의 외교관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즉시 귀국하여 자기 국왕에게 사실을 보고했고, 두 나라는 바로 사람을 보내 서수를 맞이하도록 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초나라 회왕은 크게 화를 내며 "전수가 우리나라와 동맹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어째서 서수가 연·조에 사신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나를 속인 게 아닌가"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애당초 전수를 믿지 않았던 초왕은 이 일로 전수를 더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다른 한편, 제나라는 서수가 북방으로 가서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정보에 역시 사람을 보내 서수를 초빙하여 중책을 맡겼다. 사신의 임무를 띠고 위나라를 떠나기도 전에 서수는 벌써 제·연·조 세 나라의 공동 국상을 상징하는 도장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진진은 그제서야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

진진의 모략을 보면, 그 자신은 정치적으로 주관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늘 상대에게 맞추어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을 뿐이다. 진나라에서 장의와 총애를 다투었을 때도 진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며, 초나라에서는 사신으로 파견되었지만 역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의 모략은 뛰어난 점이 적지 않았지만 일종의 생존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 번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다

 진진이 진나라에 도착해보니 마침 혜문왕에게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한·위 두 나라가 1년 넘게 싸우고 있었는데, 혜문왕은 조정 신하들에게 진나라가 나서 두 나라의 싸움을 말려야 할지를 놓고 의견수렴을 했다. 하지만 의견은 거의 반반으로 갈라졌다. 혜문왕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진진이 나타난 것이다.

혜문왕은 장의를 상국으로 기용하는 바람에 진진이 초나라로 떠났기 때문에 진진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좋은 의견을 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둘러 "그대는 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어도 내 생각이 나든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진진은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대왕께서는 월나라 사람 장신(莊潟)의 고사를 들어보셨습니까?"라며 되물었다. 금시초문이라는 혜문왕의 표정을 한 번 살핀 진진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월나라 사람 장신은 초나라에서 집규(執圭,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의 작위로 조회 때 옥으로 만든 규를 들게 했기 때문에 집규라 했다)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났습니다. 초왕이 '장신은 원래 월나라 시골 마을에서 아주 말단 관리를 지냈는데, 지금 우리 초나라에서 집규가 되어 출세를 하고 부귀를 누리게 되니 고향 월나라를 그리워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사람들은 아프면 흔히 고향 생각을 합니다. 장신은 고향 생각이 날 때면 말도 고향 말로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초나라 말로 대화를 나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초왕이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니 정말 그랬습니다. 지금 제가 초나라로 쫓겨나긴 했습니다만 대왕께서는 제가 사용하는 말이 진나라 말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하셨습니까?

"진진의 이 말에 혜문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자신을 위해 대책을 강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진진은 혜문왕에게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했다.

"변장자가 호랑이를 활로 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사냥꾼 변장자가 어느 날 소 한 마리를 놓고 싸우고 있는 호랑이 두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변장자가 지체없이 그 중 한 마리를 향해 활을 쏘려 하자 함께 따라 나선 어린 조수가 변장자를 말리며 "지금 저 두 놈이 소를 놓고 싸우기 시작하면 죽기살기로 싸울 것입니다. 그러면 두 마리 모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센 놈이라도 상처를 입고, 약한 놈은 죽기 십상입니다. 두 놈이 다 싸우고 난 다음 상처 입은 센 놈을 죽이면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가 1년이 넘도록 화해하지 않고 싸우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변장자가 호랑이를 쏜 고사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진진의 이야기에 혜문왕은 크게 기뻐하며 "정말 기막히군"이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반복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나라는 망하고 큰 나라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이 틈에 진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뛰어난 외교가 진진. 그러나 확고한 자기 철학이 부족했던 그는 유세가들의 난립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지도는 기원전 3세기 초 열국들의 형세도다.

소양에게 사족(蛇足)을 경계하게 하고, 이해관계로 제나라의 난관을 돌파하다

주나라 현왕 46년인 기원전 323년 초나라 장수 소양(昭陽)이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는 장수가 전사하는 등 대패했다. 순식간에 여덟 개 성이 초나라의 수중에 들어갔다. 소양은 여세를 몰아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러 나섰다. 이때 진진은 제나라 위왕의 지시를 받고 소양을 만났다. 진진은 소양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예의를 올린 다음 몸을 일으켜 이렇게 물었다.

"초나라 법에 따르면 적의 장수를 죽이거나 적을 대파하면 관작이 어디까지 올라갑니까?"

"관직은 최고 무관직인 상주국(上柱國)에까지 오르고, 작위 역시 최고 작위인 집규까지 오를 수 있소이다."

"그 관작보다 더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윤(令尹) 한 자리뿐이오."

"보아 하니 영윤이 가장 귀한 자리군요. 하지만 조정에는 영윤 한 사람이 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어 초왕이 두 명의 영윤을 둘 가능성은 없겠군요.

"이어 진진은 '사족'에 관한 고사를 들려주었다. 초나라 사람 하나가 제사를 다 드리고 난 다음 일을 도운 사인들에게 술을 한 잔 내렸다. 사인들이 술을 보니 한 사람이 마시기에는 남고 전부 마시기에는 모자라는지라 땅바닥에다 뱀을 그리는 시합을 해서 먼저 그리는 쪽이 술을 마시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시합은 시작되었고, 그들 중 그림을 잘 그리는 한 사람이 뱀을 멋지게 다 그렸다. 그러고는 왼손으로는 술잔을 가져다 마실 채비를 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뱀을 그리면서 "나는 뱀에다 다리까지 붙일 수 있어"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뱀 다리를 다 그리기 전에 다른 한 사람이 뱀을 다 그리고는 술잔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뱀은 본래 다리가 없거늘 어째서 뱀에다 다리를 그리는가"라고 비꼰 다음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먼저 뱀을 그린 사람은 뱀에다 다리를 그리다가 술 먹을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고사를 다 들려준 다음 진진은 소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당신은 초 회왕을 도와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군을 소멸시키고 적장까지 죽였습니다. 성도 여덟 개나 빼앗았습니다. 그러고도 군대의 사기는 왕성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마치 뱀의 다리를 그린 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세운 전공만으로도 상주국에 집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제나라까지 공격하려 합니다. 제나라는 당신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고, 당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명성을 떨쳤습니다. 새로이 공을 세운다 해도 영윤이 될 수 없거늘 어째서 뱀의 다리까지 그리려 하십니까? 전쟁에서 계속 승리한 다음 적절한 시점에서 멈출 줄 모르는 장수는 자칫 목숨을 잃기 십상이며 그렇게 되면 여태까지 쌓은 관작마저 남에게 넘어갑니다. 이런 장수야말로 뱀에다 발을 그린 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요.

"진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소양은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군대를 되돌렸다.

다음으로 주나라 난왕 17년인 기원전 298년 진진은 제나라 민왕에게 삼진(三晋)과 연합할 것을 권유했다. 그때 진진은 위나라에 있었는데,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앞서 진진은 한·조·위 3국을 연합시켜 공동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때는 소진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성사시킨 합종책이 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벌써 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강국 진이 바로 코앞까지 군대를 몰고 오자 각국은 일치단결하기가 힘들었다. 이에 따라 진진은 동쪽 제나라로 가서 민왕을 설득하기로 했던 것이다. 진진은 다음과 같이 상황을 분석했다.

현재 제·초·연·한·조·위 6개국은 서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나라의 힘만 키워준 꼴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힘은 약해졌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동방의 제후국들에게 좋은 전략이 아니다. 산동 6국을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나라는 막강한 진나라뿐이다. 그런데 6국은 진의 위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힘을 빼고 있으니 그 결과는 모두 진나라에게 병합되는 길밖에 없다.

제후국들이 진나라를 위해 서로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진나라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앉아서 이익을 누릴 것이 뻔하다. 진은 이렇게 총명하거늘 어째서 산동 6국은 이렇게 어리석은가. 나라가 망하면 군주는 치욕을 당한 채 죽을 것이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거나 구덩이에 묻혀 죽을 것이다. 한·위 두 나라가 이미 생생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제나라는 아직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진나라가 제나라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제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아 하니 제나라의 재앙이 멀지 않았다.

진나라가 벌써 위나라의 강현과 안읍으로 쳐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진이 이 두 지방을 공략한다면 동쪽으로 황하를 따라 내려와 안팎으로 제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쪽으로는 초와 위가 고립되고, 북쪽으로는 연과 조가 고립되어 제나라는 어디로부터도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한·조·위가 연합하여 형제의 의리를 맹서하고 함께 강현과 안읍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다. 여기에 제나라가 참여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환이 닥칠 것이다. 삼국이 연합하면 진이 쉽게 위를 공격하지 못하고 남쪽 초를 공격할 것이고, 삼진은 제나라가 합류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제나라를 공격하고 나서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니 제나라로서는 서둘러 군대를 보내 삼진과 연합하는 것이 최선이다.

진진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이렇게 당시 상황을 분석했고, 제나라 민왕은 진진의 분석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는 흔쾌히 군대를 보내 삼진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진에 대항했다.

 인물소개

 진진 전국시대 후기는 유세가들이 난립한 시대였다. 통일이라는 거대한 기세 속에서 이들은 각자의 논리와 언변을 통해 통일을 위해 또는 통일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저 유명한 사족(蛇足)과 관련한 고사를 남긴 진진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확고한 자기 철학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뛰어난 유세가 대열에 들 수 있을 정도의 자질을 갖춘 외교모략가였다. 그는 박학다식과 기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진 [陳軫] - 좋은 모략을 가슴속에 품고도 자신의 견해를 갖지 못하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10.20,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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