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大학자 10인의 공부 노하우
[정암 조광조] 마음 속의 도둑과 싸운 극기 공부
조선의 정치철학 방향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라는 인물에 의해 확고히 설정되었다. 조광조는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대사헌에 올라 이상정치의 실현을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그렇지만 중종반정으로 권력과 부를 누리던 공신들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결국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죽음을 맞는다. 벼슬살이란 시퍼런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주위의 염려스러운 조언에도 불구하고 보신(保身)을 택하지 않고 자신의 이념과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펼치다 죽은 것이다. 조광조는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을 두 손 들게 할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했다. 개성 근처에 있는 천마산과 성거산 등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며 불철주야 학문에 정진했다. 밥을 먹거나 변소에 가는 것 외에는 절대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불도에 정진하는 승려조차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공부에 정진했다. 이 때 산사에서 어렵다는 ‘맹자’의 ‘호연지기장’을 1개월을 읽고 통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광조는 극기 공부를 강조하면서 집에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모두 훔쳐 가도 모를 정도로 마음 속의 도둑과 싸우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마음 속의 도둑이란 바로 사욕을 가리킨다.
[화담 서경덕] 사색과 관찰 통한 自得의 공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하는 ‘송도삼절’로 불릴 정도로 풍취 있는 선비다. 서경덕 공부법의 특징은 끝없는 사고를 통해 자득(自得)하는 것이었다. 서경덕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관찰력을 보였다. 어린 새가 차츰차츰 날개짓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새가 날 수 있지’ 하고 그 이치를 사색했다고 한다. 성장한 후 서경덕은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 모조리 써 놓고 널빤지 위에 앉아 글자들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졌다. 그렇게 해서 한 사물의 이치를 깨우면 다시 다른 사물의 이치를 사색하였다. 만일 깨우치지 못하면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르고, 길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더러는 며칠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화장실에 가서도 계속 사색에 빠졌다. 어떤 때는 꿈 속에서 깨닫기도 했다고 한다. 병이 될 정도로 심각하게 사색에 빠진 것이다. 책에 있는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색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서경덕의 공부 자세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터득하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퇴계 이 황] 정밀한 독서법 중시
퇴계(退溪) 이 황(李滉)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유학하던 이 황은 ‘주자전서’라는 책을 처음 구해 읽게 되었다. 이 황은 방문을 걸어 닫고 들어앉아 밥 먹는 시간 이외에는 일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수없이 되풀이해 읽고 또 읽었다. 그 해 여름이 특히 무더워 어떤 친구가 건강을 걱정하자, 퇴계는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듯 깨달음이 느껴져 더위를 모르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을 읽어 보면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고, 그 방법을 알고 나면 더욱 흥이 일어난다네. ” 공부를 통해 참 즐거움을 찾았던 이 황의 모습이 느껴지는 말이다. 이 황은 책을 읽을 때 정밀한 독서법을 중요시했다. 어느 제자가 글을 올바르게 읽는 법을 물었을 때도 퇴계는 정독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독할 때에만 그 뜻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황은 아무리 피곤해도 책을 누워서 읽거나 흐트러진 자세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황과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두 학자 간의 편지를 통한 학문 토론 문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일명 사단칠정(四端七情) 토론 당시 퇴계의 나이는 58세였다. 반면 고봉 기대승은 32세의 신진 학자였다. 기대승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두 사람의 편지 내왕은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집에 사로잡혀 남의 견해를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남명 조 식] 지식의 실천, 敬과 義를 강조한 수행
“자전(문정왕후)은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불과합니다. 전하의 국사는 잘못되었고, 인심은 이미 떠나갔습니다”라며 죽음을 무릅쓰고 단성 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남명(南冥) 조 식(曺植)의 상소는 유명하다. 이러한 과감한 언행은 공부하는 방법과 자세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 식은 자신이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귀를 새겼다. 뒷날 산천재(山川齋)라는 건물을 짓고는 왼쪽 창문에 경(敬)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창문에 의(義)자를 써 붙였다. 또한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쇠방울을 늘 몸에 차고 다녔다. 이는 정신이 혼미하지 않고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방도인 상성성법(常惺惺法)이다. 조 식은 공부의 범위를 유교 경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제자백가·천문·지리·의학·수학·병법 등을 두루 공부해 안목을 넓혔다. 조 식은 나아가 배움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실천 속에 옮겨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명재 윤 증] 사슴 구경 놓친 학동의 공부욕
명재(明齋) 윤 증(尹拯)은 아마도 조선 역사상 사직 상소를 가장 많이 올린 인물 중 한 명일 것이다. 임금에게 얼굴을 제대로 한번 보여주지도 않고 우의정 같은 최고위 관직을 제수받았다. 끝까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학자로 일생을 마친 윤 증은 어린 시절부터 심지가 굳었다. 윤 증이 어릴 적 어느날 사슴이 나타났다며 동네 아이들이 구경하느라 마구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렇지만 윤 증은 혼자 방 안에서 글을 읽으면서 나오지 않았다. 정해진 횟수를 다 읽고 나서 할머니에게 사슴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할머니가 “사슴이 네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니” 하였다. 단편적 일화이지만 한번 뜻을 세우면 그 일에 열중하는 성품을 잘 알 수 있다. 윤 증의 교수법은 반드시 스스로 의심이 생겨 질문할 때를 기다린 뒤 가르쳐 주고, 학생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굳이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다. 제자들 각자의 수준에 맞게 가르친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명색은 책을 읽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몸소 행하지 못하면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게 하고 입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도구일 뿐이니 진정한 학문이 아니다” 라고 충고했다.
[율곡 이 이] “냇가를 거닐 때도 이치를 탐구하라”
율곡(栗谷) 이 이(李珥)는 퇴계 이 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큰 봉우리다. 율곡은 아홉 번 연속 과거 시험에서 장원해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지닌 학자였다. 이 이가 젊었을 때 지은 자경문(自警文)은 스스로 참된 학자의 길을 가기 위해 좌우명으로 삼았던 글귀다.
이 자경문에는 공부하는 자세와 과정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그 중 책을 읽는 이유는 옳고 그름을 분간해 일을 행할 때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아 글만 읽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것이기에 공부에 대한 노력은 늦춰서도 안 되지만, 조급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율곡 선생은 43세 때 황해도 해주에 은병정사를 세우고 이곳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은병정사의 학규(學規)는 오늘날 학교 교훈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일상 생활 측면에서 습관의 중요성, 절제의 가치를 강조했다.
[청장관 이덕무] 병이 된 공부 향한 열정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는 뛰어난 자질로 정조의 특별 대우를 받아 국립 학술 기관인 규장각에 들어가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 허약한 몸 등 불우한 환경이 늘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이덕무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일종의 병이 될 정도로 심했다. 공부에서 인생의 참맛을 느끼며 살아간 것이다. 그 스스로 병적으로 책을 보는 자신을 주인공 삼아 희화화해 쓴 자화상에서 이를 잘 보여 준다. 원제는 ‘간서치전’(看書痴傳, 책만 보는 바보)이다. 그는 남들의 비난이나 칭찬 따위는 들은 체 하지 않고, 춥거나 덥거나 배고프거나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책에만 온 힘을 쏟았다.
[다산 정약용] “핵심 파악이 중요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먼 유배지에서도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 공부를 염려했다. 그 내용 중에는 ‘방대한 책을 볼 때는 요약해 핵심을 파악하라’는 가르침도 있다. 그 책의 핵심을 끝까지 연구해야 하며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했다. 또한 정약용은 아동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당시 아동 교육의 대표적 교재였던 ‘천자문’ ‘십팔사략’ ‘통감절요’를 모두 근본적으로 반성했다. 예를 들면 ‘천자문’의 경우 비슷한 부류로 구성되지 않아 처음 배우는 아동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했다. 사실 ‘천자문’은 해설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대목이 많다. 정약용은 아동이 처음 한자를 배울 때는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와 운용에 대해 깨우쳐야 한다면서 직접 아동 교재를 만들기도 했다.
[혜강 최한기] “고담준론보다 이용후생의 학문이 절실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이른바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다산 정약용은 500여 권을 남겼다. 그렇지만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라는 인물은 무려 1,000여 권을 저술했다고 한다.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은 80여 권 정도다. 그렇지만 그의 저술은 자연과학, 철학 및 사회 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성을 보여 준다. 최남선은 최한기의 원본이 산실되어 사라지는 것을 탄식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그의 많은 발언 중 ‘사무가 참된 학문’이라는 명제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구절이다. ‘사무야말로 모두 참되고 절실한 학문이고, 사무를 버리고 학문을 구하는 것은 허공에 매달아 놓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사무란 무엇인가. 농사·공업·상업 같은 것이 모두 학문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이다. 고담준론의 겉치레를 배격한 것이다. 사무를 무시하는 이런 형태의 공부 자세는 필시 명색은 학문을 한다고 하나 다른 사람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고, 사무를 처리하는 것 역시 어두워 세상에 아무런 보탬이 없다고 주장했다. 최한기의 이러한 신선한 발언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충분히 있다.
[식우 김수온] 책장 찢어 외우고 다녔던 奇行의 소유자
마지막으로 식우(拭渡) 김수온(金守溫)의 ‘독서기행’(讀書奇行)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러한 기이한 행위는 본받을 만한 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신선한 자극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세조 때의 문신인 김수온은 늘 책을 가까이했다. 그런데 그는 책을 빌려 오면 한 장씩 뜯어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외우다 막히는 곳이 있으면 꺼내 보고, 다 외웠다고 생각하면 아무데나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신숙주는 매우 아끼는 진기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김수온이 어느날 찾아가 그 책을 빌려 달라고 떼를 썼다. 신숙주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책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몇 달이 되어도 돌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신숙주가 김수온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방에 들어가 보니 빌려준 책을 모두 뜯어 벽에 바른 것 아닌가. 신숙주가 깜짝 놀라 어찌 된 일인지 묻자 “앉아서 읽느니 이게 더 편할 것 같아 그랬소이다” 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