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시 모음 23편

《1》
가을

피천득

호수가 파랄 때는
아주 파랗다

어이 저리도
저리도 파랄 수가

하늘이, 저 하늘이
가을이어라.

《2》
고백

피천득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3》
기억만이

피천득

아침 이슬 같은
무지개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비바람 같은
파도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구름 비치는
호수 같은
그런 순간도 있었느니

기억만이
아련한 기억만이
내리는 눈 같은
안개 같은


《4》


피천득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5》
너는 아니다

피천득

너같이 영민하고
너같이 순수하고

너보다 가여운
너보다 좀 가여운

그런 여인이 있어
어덴가에 있어

네가 나를 만나게 되듯이
그를 내가 만난다 해도

그 여인은
너는 아니다

《6》
너는 이제

피천득

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

너는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안정을 얻기 위하여 견디어 온 모든 타협을.

고요히 누워서 네가 지금 가는 곳에는
너같이 순한 사람들과 이제는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

《7》
노 젓는 소리

피천득

달밤에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

만나러 가는 배인가
만나고 오는 배인가

느린 노 젓는 소리
만나고 오는 배겠지

《8》
눈물

피천득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9》
단풍

피천득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핏빛 저 산을 보고 살으렸더니
석양에 불붙는 나뭇잎같이 살으렸더니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바람에 불려서 떨어지오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지오

《10》
부활절에 드리는 기도

피천득

이 성스러운 부활절에
저희들의 믿음이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그 마음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력과 부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그 힘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11》
새해

피천득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12》
시월

피천득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13》
어떤 유화

피천득

오래 된 유화가 갈라져
깔렸던 색채가 솟아오른다

지워 버린
지워 버린 그 그림의

《14》
연가

피천득

훗날 잊혀지면
생각하지 아니 하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잊으리도 아니하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잘 사노라 하리라

훗날 잊혀지면
잊은 대로 살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살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웃으면 지나치리라

《15》
연정

피천득

따스한 차 한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16》
오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17》
우정

피천득

등덩굴 트레이스 밑에 있는 세사발
손을 세사 속에 넣으면 물기가 있어 차가웠다.
왼손이 들어있는 세사위를 바른 손바닥으로
두들기다가 왼손을 가만히 빼내면
두꺼비집이 모래 속에 작은 토굴같이 파진다.
손에 묻은 모래가 내 눈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제 입을 내 눈에 갖다대고
불어주느라고 애를 썼다.

한참 그러다가 제 손가락에 묻었던 모래가
내 눈으로 더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영이도 울었다. 둘이서 울었다.
어느 날 나는 영이 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 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18》
이 순간

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19》
저녁때

피천득

긴 치맛자락을 끌고
해가 산을 넘어갈 때

바람은 쉬고
호수는 잠들고

나무들 나란히 서서
가는 해를 전송할 때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20》
축복

피천득

나무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나무가 되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새들이 하늘을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새들이 되어 나란히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21》
후회

피천득

산길이 호젓다고 바래다 준 달
세워 놓고 문 닫기 어렵다 거늘
나비같이 비에 젖어 찾아온 그를
잘 가라 한 마디로 보내었느니

《22》
기다림

피천득

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뒷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23》
잊으시구려

피천득

잊으시구려
꽃이 잊혀지는 것 같이
한때 금빛으로 노래하던
불길이 잊혀지듯이
영원히 영원히 잊으시구려
시간은 친절한 친구
그는 우리를 늙게 합니다.

누가 묻거든 잊었다고
예전에 예전에 잊었다고.
꽃과 같이 불과 같이
오래 전에 잊혀진
눈 위의 고요한 발자국 같이

'시인들의 시모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영자 시 모음  (0) 2022.05.22
함석헌 시 모음  (0) 2022.05.22
이형기 시 모음  (0) 2022.05.22
이육사 시 모음  (0) 2022.05.22
김수영 시 모음  (0) 2022.05.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