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자 시 모음 18편

《1》
가을 기도

허영자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먼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2》
가을비 내리는 날

허영자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3》
그대의 별이 되어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4》
꽃피는 날

허영자


누구냐 누구냐
또 우리 맘속 설렁줄을
흔드는 이는

석 달 열흘 모진 추위
둘치같이 앉은 魂을
불러내는 손님은

팔난봉이 바람둥이
사낼지라도
門 닫을 수 없는
꽃의 맘이다.

《5》
나목에게

허영자


캄캄한 밤은
무섭지만

추운 겨울은
더 무섭지만

나무야 떨고 섰는
발가벗은 나무야

시련 끝에
기쁨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아침이 오고

겨울 끝자락에
봄이 기다린단다

이 단순한 순환이
가르치는 지혜로

눈물을 닦아라
떨고 섰는 나무야.

《6》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7》
너무 가볍다

허영자

나 아기 적에
등에 업어 길러주신 어머니

이제는
내 등에 업히신 어머니

너무 조그맣다
너무 가볍다

《8》
떡살

허영자

고운 네 살결 위에
영혼 위에
이 신비한
사랑의 문양 찍고 싶다

'이것은 내 것이다'

땅속에 묻혀서도
썩지를 않을
저승에 가서도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표적을 해두고 싶다

《9》
무지개를 사랑한 걸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10》
비 오는 날

허영자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비 맞고 서 있는 나무처럼
마음 젖어 서러이 흐느끼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아득히 비 내리는 신비한 바깥
머언 머언 내일을 내다보던 그때

비 오는 날이면
처녀시절 생각이 난다
박쥐우산 하나를 바람막이로
용감하게 세상을 밀고 가던 그때.

《11》
빈 들판을 걸어가면

허영자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오래오래 마음으로 사모하던
어여쁜 사람을 만날 상 싶다

꾸밈없는
진실과 순수
자유와 정의와 참 용기가
죽순처럼 돋아나는
의초로운 마을에 이를 상 싶다

저 빈 들판을
걸어가면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아득히 신비로운
神의 땅에까지 다다를 상 싶다.

《12》
얼음과 불꽃

허영자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속에
얼음과 눈보라를 지니고 있다

못다 이룬 한의 서러움이
응어리져 얼어붙고
마침내 마서져 푸슬푸슬 흩내리는
얼음과 눈보라의 겨울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타오르는 불꽃을 꿈꾼다

목숨의 심지에 기름이 끓는
황홀한 도취와 투신
기나긴 불운의 밤을 밝힐
정답고 눈물겨운 주홍빛 불꽃을 꿈꾼다.

《13》
여름 소묘

허영자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14》
완행열차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15》


허영자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16》
刺繡(자수)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낼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17》
친전(親展)

허영자

그 이름에
살 속에 새긴다
暗靑(암청)의 文身

不可思議(불가사의)의 윤회를 거쳐
마침내
내 영혼이 고개 숙이는 밤이여
무거운 운명이여

절망의 눈비
회의의 미친 바람도
숨죽여 坐禪(좌선)하는 고요

'사랑합니다'

참으로 큰
슬픔일지라도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살 속에
그 이름 새기며
이 봄밤
눈떠 새운다.

《18》
행복(幸福)

허영자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윗 틈새 같은 데에
나뭇 구멍 같은 데에

幸福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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