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시모음 20편

《1》
11월의 밤

서지월

어스럼 문밖에는 살얼음의 겨울
오려 하는데
빈 지갑이지만 따뜻한
방에 누워서 詩 생각하는 마음
복되지 않은가,
수입원 없어도 밥 아니 굶고
전화 걸어와 커피 마시자는 사람 있으니
그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무작정 깊어가는 11월의 밤
누워보면 방안이 썰렁하긴 하지만
누구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내 마음의 자유
그 또한 더더욱 편안하지 않은가,
저마다 울던 밤벌레 소리 피안 간지 오래
지금은 떨어지는 나뭇잎
길 떠나고 있는 중이지만
다 떠나고 못 떠나는 이 마음
서러웁긴 하지만
이 지상 지키는 마음 그래도 푸근하고
언젠가 올 사람은 오리라는 정한 이치 믿으며
밤 깊어 오오랜 날 심어놓은 별빛꽃밭
하늘에서 내려와

《2》
가난한 꽃

서지월

금빛 햇살 나려드는 산모롱이에
산모롱이 양지짝 애기 풀밭에
꽃구름 흘러서 개울물 흘러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나그네가 숨이 차서 보고 가다가
동네 처녀 산보 나와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꽃샘바람 불어오는 산 고갯길에
고개 들면 수줍은 각시풀밭에
산바람 불어서 솔바람 불어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행상 가는 낮 달이 보고 가다가
동네 총각 풀 짐 놓고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3》
각북 가는 길

서지월

어서 오라 오라고 손짓하는 건
산능선 깔고앉은 누렁소 울음

큰산이 낮은 산 앉혀 놓고 기침하면
한눈 팔던 물소리도 다시 흐르고

내가 왔노라 마당 개는 어디 있나
집 나갔던 바람이 돌아와
복사꽃 가지를 흔든다

어서 가자 가자고 손 흔드는 건
재 너머 흰배 때아리 드러낸 산 까치 울음

십 리를 더 가야 靑石山이 나온다고
쉬어 가는 발목 잡고 길을 연다

《4》
강물과 빨랫줄

서지월

오늘도 어머니는
강물을 훔쳐 와
한 자락씩 줄에 너신다.
누런 호박 오랭이 썰어 말리듯이

햇빛은 항시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것이지만
얼굴 없는 바람은
부뚜막 위에서 불고
장독대를 넘어와
어머니의 허이여신 머리칼 위에도
분다.

하늘과 땅 그 크낙한
화해를 위해
세상의 이쪽과 저쪽의 분별을 위해
두 귀 바지랑대는
생명의 줄을 튼튼히 받치고 있다.

천년풍우 그 어느 날에도
우리의 제기(祭器), 제기(祭器) 같은 것.

먼 산 그리메 숱한 메밀밭 위으로
낮달이 조을고
젖은 빨래의
그 휴식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은 아득히 멀고
나는 왠지 눈물이 핑 돈다.

《5》
꽃잎이여

서지월

한 세상 살아가는 법
그대는 아는가.
물빛, 참회가 이룩한
몇 소절의 바람
옷가지 두고 떠나는 법을
아는가.

눈물도 황혼도
홑이불처럼 걷어내고
갓난아기의 손톱 같은
아침이 오면
우린 또 만나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꽃이 피는 것과 소유하는 일이
서로 반반씩 즐거움으로 비치고 있는
그 뒤의 일을
우린 통 모르고 지내노니

흉장의 일기장 속
꼭꼭 숨은 줄로만 아는
풀빛, 그리울 때
산 그림자 슬며시 내려와 깔리는 법을
아는가.

눈썹 위에 눌린 천정을 보며
아들 낳고 딸 낳고
나머지는 옥돌같이 호젓이 앉았다가
눈감는 법을
그대는 아는가.

《6》
꽃피는 나의 애인을 위하여

서지월

능금꽃이 만발한
과수원을 돌아서 오는 시간까지
그대 손톱에 밀리는 파도소리에
뻐꾸기가 섬을 만드는 시간까지
모두 합해서
조그만 오두막집을 지으리.

바람이 길을 여는
골목 그 어디쯤
천년 묵은 돌거북 한 마리
댓돌처럼 앉혀놓고
능금꽃이 만발한 과수원을 돌아서
조약돌 세며 오는
그대를 맞아
올해에도 꽃이 많이 피게
나는 빌고 또 빌었다.

《7》
나뭇잎은 떨어져 어디로 가는가

서지월

나뭇잎은 떨어져 어디로 가는가,
내 배고픈 사랑이여
무시로 푸르던 잎들이
죄다 쓸리어가는 이 마른 길 위에
당신은 어디 있고
정작 흰눈 쓰고 가야 할 당신은
어디에 있고
시린 입술 위에 찬바람 몰아칠 때
정작 사랑은 빈 콩깍지 소리를 내고
다시 만나자는 기약없이
두 손 부여잡아도
한숨만 쌓이는
이 형편없는 인간의 마을
나뭇잎은 떨어져 어디로 가는가
내 골병든 사랑과 함께.

《8》
낙타풀의 노래

서지월

나는 너를 낙타풀이라 부른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
비 한 방울 입맞춤하지 않는
수천년 세월동안 거기
뼈를 묻은 사람들
걸어서 천축국까지 간
스님들 헤진 발바닥 소리까지
귀 없는 귀로 듣고 가시 돋힌
네 몸 뚱아리
사막의 낙타는 피 흘리면서까지
너를 뜯어먹으며
비단을 실어 날랐지
나는 네가 남아서 지키고 있는 그 길을
실크로드라 부른다
오늘의 내가 그 길따라
비단금침의 꿈 버리지 못하고
벋어 가는 것은 낙타풀
네가 있기 때문이다

《9》
내 사랑

서지월

길을 가다가도 문득
하늘을 보다가도 문득

지금은 안 보이지만
생각나는 사람

이 하늘 아래 꽃잎 접고
우두커니 서 있는 꽃나무처럼

내 생각의 나뭇가지는
서(西)으로 뻗어 해지는
산 능선쯤에 와 있지만

밥을 먹다가도 문득
다른 길로 가다가도 문득

안 보면 그뿐이지만
생각나는 사람

《10》
돌담

서지월

몇 백 년이 지나도 저들은
저들끼리 어깨 걸고 살아간다
아랑곳없다
빗물이 새어들어 입 맞추며
그 달디단 입맞춤으로 이끼 키우며
돌담은 시끄럽게 조잘대거나
불평을 거부한다
빈 깡통이 요란한 소리내며
행인의 발길에 채여 굴러도
그냥 멀뚱히 바라볼 뿐
탓하지 않는다
돌담 곁 감나무 한 그루
주렁주렁 감을 매달면서부터
서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며 눈높이를 맞춘다
거뭇거뭇 검버섯 피기 시작하면서
감나무도 잎을 흘리는데
돌담은 하늘의 기러기 날갯짓
올려다보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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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딸 보러 가는 길

서지월

생후 1개월
딸 보러 가는 길
새벽잠에서 밀려나 앞산도 흰눈 쓰고
바다로 통한 길바닥도
얼음으로 덮인 차창 밖에는
겨울나무들이 아직
잎을 달 기척 없는데

포항 지나 화진포 지나 망양바닷가
울진 지나 삼척 죽서루 지나
망상해수욕장 하얀 파도살 지나
딸 보러 강릉 가는 길.

너는 생후 8일째
보자기에 싸여 세상에 태어난
기쁨의 울음 뿌리며
이 길 따라 먼저
강릉 외가에 가 있지
나, 오늘은 떡국 먹는 설날도 지나고
생후 1개월
널 보러 가네.

세상 사는 것 신기해서
구르는 바퀴는 자꾸 가자 가자고
이르는 것 같고
갈매기는 한 발 앞서서 빨리
오라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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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바람 불어 좋은 날

서지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색동저고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어느 땐들 우리가 한 식구 한 솥에
밥 아니 먹고
북채 장구채 골라잡지 않았으리요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꽃 떨어지기 전에 부는 바람 임 보는 바람
꽃 떨어지고 부는 바람 열매 맺는 바람
백두산의 진달래꽃 피어서 꽃구경 가는 날
으스러진 강물이 땅을 울리고
으깨어진 어깨가 춤을 춘다
이 강산 햇빛 나고 구름 좋은 날
구름 위의 새소리 맑게 뚫리는 날
쓰린 발 쓰리지 않고
저린 손 저리지 않고
목마름도 피맺힘도 한풀 꺾인 목숨이라
샘물 퍼내어서 버들잎 띄워 마시고
숨막히는 산 고개도 넘어보면 훤한 이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지 찍고 분바르고 귀밑머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 가지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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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비슬산 참꽃

서지월

비슬산 참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 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백성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 난 듯 큰일 난 듯 발병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속에 초가집 한 채씩
이태백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산천초목
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참꽃물 들었었지요
☆★☆★☆★☆★☆★☆★☆★☆★☆★☆★☆★☆★
《14》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서지월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강으로 나와 흐르는
물살 바라 보든가, 아니면
모여있는 수많은 돌멩이들
제 각기의 모습처럼
놓인 대로 근심걱정 없이
물소리에 귀 씻고 살면 되는 것을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강 건너 언젠가는 만나도 될
사람 그리워하며 거닐다가
주저앉아 풀꽃으로 피어나면 되는 것을
말은 못해도 몸짓으로
흔들리면 되는 것을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혼자이면 어떤가
떠나는 물살 앞에 불어오는
바람이 있는 것을
모습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그 모두가 우리의 분신인 것을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는가
하늘 아래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목숨인 것을
☆★☆★☆★☆★☆★☆★☆★☆★☆★☆★☆★☆★
《15》
슬픈 밤이 오거든

서지월


슬픈 밤이 오거든
그대여
창을 열고 별을 보라
나는 거기 지상의 괴로운 꽃으로
피었다가 하늘의 별 되어
울고 있으리니
그대가 만약 창을 닫고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명상에
잠기신다면
나는 나는 별 사닥다리 타고 내려와
그대 창가 부서지는 이슬 되리니
밤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슴과 같은 것
실로 우리가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지지 못할 때
그대는 지상에서
나는 하늘에서 하염없는
눈물 흘리리
☆★☆★☆★☆★☆★☆★☆★☆★☆★☆★☆★☆★
《16》
인생을 묻는 그대에게

서지월

부는 바람 탓하지 마라
예비 된 몸짓인 것을

지는 꽃 한탄하지 마라
작별의 시간인 것을

앞서 가는 자 부러워 마라
먼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높은 나무의 열매 부러워 마라
부귀영화가 매달려 있음이 아닌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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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잠 안 오는 밤

서지월

잠 안 오는 밤에는
잠 안 자는 별을 보며
잠 안 자고 눈망울 초롱초롱한
이슬과 함께
어둠의 등에 기대어
밤새껏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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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진달래 산천

서지월

진달래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百姓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난 듯 큰일난 듯 발病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 속에 草家집 한 채씩
이태백 달 밝은 밤 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山川草木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진달래 꽃물 들였었지요.
☆★☆★☆★☆★☆★☆★☆★☆★☆★☆★☆★☆★
《19》
찔레꽃 타령

서지월

임아,
백 고무신 벗어두고 간 임아
하얀 찔레꽃 수북이 피어서
오늘같이 서러운 날이면
온 몸에 찔레가시 바르고
나도야 남풍따라 가서는
돌아오지 않을까부다.

아아,
장독간에 숨겨둔 얼레빗 마저 꺼내
머리 빗고서
그 더운 머리털 날리는 구름 따라
나도야 정처 없이 떠날까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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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철쭉꽃 눈물

서지월

철쭉꽃 피었다는 철쭉꽃 보러온

사람 기별 듣고
컴컴한 바윗속 숨겨둔 시간을 모조리 꺼내어
햇빛하고 동무되어 철쭉꽃 보러 갔더니
산자락 베고 누운 물소리 건너 바람소리
아래, 질펀히 깔린 철쭉꽃
이승의 끝이라 싶을 즈음
철쭉꽃 보러온 사람 산 하나 넘어서 가고
채색한 구름 산 둘 넘어서 가고
흥건히 고이는 산그늘
두고 온 내 손때 묻은 문고리에
매어둔 슬픈 나귀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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