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시모음 15편
《1》
3월
김광섭
3월은 바람쟁이
가끔 겨울과 어울려
대폿집에 들어가 거나해서는
아가씨들 창을 두드리고
할아버지랑 문풍지를 뜯고
나들이 털옷을 벗긴다
애들을 깨워서는
막힌 골목을 뚫고
봄을 마당에서 키운다
수양버들
허우적이며
실가지가 하늘거린다
대지는 회상
씨앗을 안고 부풀며
겨울에 꾸부러진 나무 허리를 펴 주고
새들의 방울소리 고목에서 흩어지니
여우도 굴 속에서 나온다
《2》
가을 술잔
김광섭
지독한 가을을 앉혀놓고
술잔을 기울인다
나뭇잎은 떨어지려 몸부림치는데
굵은 힘줄로 붙잡은 손은 놓으려 않고
삶은 술 취해
밤을 맞는다
허전함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스산히 불어오는 바람
누런 낙엽 되어가는 눈물
비웠다 채워지는 술잔
눈에는 취기만 오르고
작은 술잔 가을 삶은
방황하는 달빛이 된다
찌그러진 술잔을 비춰주는 가을
어쩌면 술보다도
가을에 취했는지도 모른다
헛헛한 세월 잔에
달빛을 너무 많이 마신것같다
《3》
가을이 서럽지 않게
김광섭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 시간이 아니어도 한 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라 영원히 주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을 거울삼으리니
패물 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에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4》
가을이 서럽지 않게
김광섭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 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 시간이 아니어도 한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리라 영원히 주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을 거울삼으리니
패물 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에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5》
겨울날
김광섭
마당에서 봄과 여름에 정든 얼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그렇게 명성이 높던 오동잎도 다 떨어지고
저무는 가을 하늘에 인가의 정서를 품던
굴뚝 보얀 연기도
찬바람에 그만 무색해졌다
그런 늦가을에 김장 걱정을 하면서 집을 팔게 되어
다가오는 겨울이 더 외롭고 무서웠다
이삿짐을 따라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두만강 건너는 이삿군처럼 회색 하늘 속으로
들어가 식솔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으니
어머님 한 분만 오시잖아서 별안간 앞니가
무너진 듯 허전해서 눈 둘 곳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축대에 검정 포장을 치고
초롱을 달고 가던 이튿날 목 없는 아침이
달겨 들어 영원한 이별인데
말 한 마디 못하고 갈라진 어머니시다
가신 뒤에 보니 세월 속에 묻혀 있는 형제들 공동의 부엌까지
무너져 낙엽들이 모일 데가 없어졌다
사람이 사는 것이 남의 피부를 안고 지내는 것이니
찬바람이 항상 인간과 더불어 있어서
사람이 과일 하나만큼 익기도 어려워
겨울 바람에 휘몰리는 낙엽들이 더 많아진다
고난의 잔에 얼음을 녹이며 찾는 것은
그 슬픔이 아니요 겨울 하늘에 푸른빛을 띤 봄이다
그 봄을 바라고 겨울 안에서뱅뱅 돌며
자리를 끌고 한 치 한 치 태양의 둘레를
지구와 같이 굴러가면서
눈과 얼음에 덮인 대지의 하루를 넘어서는 해질 무렵
천장에서 왕거미가 내리고
구석에서 귀또리가 어정어정 기어 나온다
어느 날 목 없는 아침이 또 왈칵 달려들면
이런 친구들에게 눈짓 한 번 못하고
친구들의 손 한 번 바로 잡지도 못하고 가리라
《6》
나를 찾아가는 길
김광섭
보따리 착착 접어
옆구리 매달고
나를 찾아 나선다
걷다 걷다
눈 오는 동산(冬山)에 이르러
그리움 둘둘 말아 소로록 빨아보니
낮도 타고
밤도 타고
자국마저 태워 달란다
벗하자고
바람이 퉁탱 다가와
막걸리 한 사발 주며 하는 말
"엄부르 덤브르 사는 거야"
옮기는 걸음 얼근한데
그냥 가기 미안하여
안 들릴 듯 인사한다
"임을 찾아야 나를 찾는데"
등 뒤로 삶이 가득히 따라온다.
《7》
나의 사랑하는 나라
김광섭
지상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세계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딪혀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나는 어디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에서 영광을 찾아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의 문이 열리는 날
고민을 상징하는 한 떨기 꽃은 찬연히 피리라
이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꿈이어니
《8》
마음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9》
사랑을 꿈꾸는 그대에게
김광섭
사랑을 꿈꾸는 그대
마음 먼저 열어 주세요
지난날 아팠던 추억일랑 미련없이 지워버리고
갇혀 답답하던 갈증
산산에 실려 보내고
깊은 구석의 창문까지 열어주세요
사랑이 먼저
별빛 되어 다가갈 때
밝고 고운 희망 보태주시고
따뜻한 마음 향기 되어 주세요
맞잡은 두 손에는
가을 국화 미소 한 줌
터질 듯 행복 한 줌
꼬옥 쥐여 주세요
멀리 있어 안 들려도
풋풋한 알밤 터지는 소리로
다정한 별빛 속삭임으로
사랑한다 해주세요
《10》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11》
소중한 사랑
김광섭
맺다가
맺다가 말라진 꽃봉오리가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너 그토록 사랑해서 어쩌니
그 귀한 사랑 깨질까, 품다 품다 죽으면 어쩌니
나처럼..."
푸석한 봉오리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드디어 아름다운 꽃이 피었습니다
《12》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은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너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르는 꽃 한 송이 나는
꽃잎에 숨어서 기다리리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나비와 꽃송이 되어 다시 만나자
《13》
우정
김광섭
구름은 봉우리에 둥둥 떠서
나무와 새와 벌레와 짐승들에게
비바람을 일러주고는
딴 봉우리에 갔다가도 다시 온다
샘은 돌 밑에서 솟아서
돌을 씻으며
졸졸 흐르다가도
돌 밑으로 도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서 졸졸 흐른다
이 이상의 말도 없고
이 이상의 사이도 없다
만물은 모두 이런 정에서 산다
《14》
잡초들
김광섭
아 밝은 태양 맑은 물
바람 센 여의도 강뚝
말라서 흙이 갈라질세라
덮은 풀들이여
이름도 없는 잡초 처음엔 꽃인데
다시 한번 꽃이 되고파라
가물에 논밭처럼
바닥이 드러난 강
얕은 줄 모르고
더듬더듬 건너는
무거운 철 교각
현재에서 미래로
아파트에 눌려
산도 가고 물도 갔다
화신 등진 저 아낙네들
지나간 고운 날을 삼키며
쑥을 캐는 눈시울이 따가워선가
가난이 얼굴 바닥에 탄다
《15》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시모음
2022. 5. 22.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