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시모음 65편

《1》
가객

정현종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입장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걸신걸신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2》
갈데 없이

정현종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3》
감격하세요

정현종

나무들을 열어놓는 새소리
풀잎들을 물들이는
새 소리의 푸른 그림자
내 머리 속 유리창을 닦는
심장의 창문을 열어놓는
새소리의 저 푸른 통로

풀이여 푸른빛이여
감격해본지 얼마나 됐는지

《4》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5》
경청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6》
광채 나는 목소리로 풀잎은

정현종

흔들리는 풀잎이 내게
시 한 구절을 준다

하늘이 안 무너지는 건
우리들 때문이에요, 하고 풀잎들은
그 푸른빛을 다해
흔들림을 다해
광채나는 목소리를 뿜어올린다
내 눈을 두 방울 큰 이슬로 만든다

그 이슬에 비친 세상
큰 건 작고
강한 건 약하다
(유머러스한 세파
참 많은 공포의 소산)

이 동네 백척간두마다
광채나는 목소리로 풀잎은

《7》
그 굽은 곡선

정현종

내 그지없이 사랑하느니
풀 뜯고 있는 소들
풀 뜯고 있는 말들의
그 굽은 곡선!

생명의 모습
그 곡선
평화의 노다지
그 곡선

왜 그렇게 못 견디게
좋을까
그 굽은 곡선!

《8》
그 사이에

정현종

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협곡이 있고
산맥이 있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림자들,
무거워, 한숨과도 같고
가벼워,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그림자들

《9》
그냥

정현종

느닷없이, 미안합니다
뜻이 있는데 길이 있어서 그럽니다
맘대로 하라시지만
어렵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시지만
길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까 갑니까
가는 게 아닙니까
좋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나는 사랑합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그 대답이 접니다
그래도 우리가 고개 숙이는 만큼의
이 땅의 인력(引力)을
운명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10》
그림자의 향기

정현종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를
따온다
영원히
푸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따온다
마르지 않는
향기

《11》
깊은 흙

정현종

흙길이었을 때 언덕길은
깊고 깊었다
포장을 하고 난 뒤 그 길에서는
깊음이 사라졌다

숲의 정령들도 사라졌다

깊은 흙
얄팍한 아스팔트

짐승스런 편리
사람다운 불편

깊은 자연
얇은 운명

《12》
꿈 노래

정현종

신부는 이미 죽었거나
아직 오지 않았으니
꿈일랑 그냥 비워두어라 그대여,
고향 없는 인생일장들이
눈송이처럼 빗방울처럼
아득히 휘날려 내리는구나.

거리의 장미 속에 불을 묻고
술잔 수 없이 넘쳐흘러도
영원한 <아직>인 꿈에 홀려
육체와 영혼의 메아리 사이를
그대 아직도 도둑으로 떠도는가.

보제수 그늘 같은 눈동자는
언제 그대 눈의 깊은 데서 솟아나리오.

《13》
나는 별아저씨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생(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天下)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14》
나는 슬픔이에요

정현종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 저쪽 어두운 구석에서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시간이
귀신과도 같이 시간이
검은 바람결로 움직이며 말한다
'나는 슬픔이에요'

오가는 발소리들
무슨 웅얼거림들
그 시간에 물들어
비치고 되비치며 움직이느니

우리는 때때로
제 목소리를 낮추어야 하리.
조용해야 하리.

《15》
나무에 깃들여

정현종

나무들은
난 그대로 그냥 집 한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16》
나무의 사계

정현종

싹이 나올 때는
보는 것마다 신기한 어린애의
눈빛으로도 모자라는
기쁨의 광채, 경이의 폭죽이다가,
연초록 잎사귀의 청춘이
물 불 안 가리듯 이 바람 저 바람에
나부껴
가지에 앉은 새들의
다리들도 간지르다가,
여름 해 아래 짙게 발라 보는
40대 후반의 여자이다가,
벌써 가을인가, 잎 지자
넘치던 여름잠에서 깨어
가을 바람과 함께 깨어
말없는 시간과 함께 깨어
제 속에서 눈뜨는 나무들

눈 덮인 산의 겨울 겨울 나무여
환히 보이는 가난한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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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의 명함

정현종

이 저녁 시간에
거두절미하고
槐江(괴강)에 비친 산그림자도 내
명함이 아닌 건 아니지만,
저 석양-이렇게 가까운 석양!-은
나의 명함이니
나는 그러한 것들을 내밀리.
허나 이 어스럼 때여
얼굴들 지워지고
모습들 저녁 하늘에 수묵 번지고
이것들 저것 속에 솔기 없이 녹아
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럼 때야말로 항상
나의 명함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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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낙엽

정현종

사람들 발길이 낸
길을 덮는 낙엽이여
의도한 듯이
길들을 지운 낙엽이여
길을 잘 보여주는구나
마침내 네가 길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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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날아라 버스야

정현종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여자
하나는 국화-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을 든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 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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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낮술

정현종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 차 덜그덕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의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이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뺑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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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느낌표

정현종

나무 옆에다 느낌표 하나 심어 놓고
꽃 옆에다 느낌표 하나 피워 놓고
새소리 갈피에 느낌표 하나 구르게 하고
여자 옆에 느낌표 하나 벗겨 놓고

슬픔 옆에는 느낌표 하나 울려 놓고
기쁨 옆에는 느낌표 하나 웃겨 놓고
나는 거꾸로 된 느낌표 꼴로
휘적휘적 또 걸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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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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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정현종

주고받음이 한줄기
바람 같아라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차지 않는 이 마음.
내 마음의 공터에 오셔셔
경주를 하시든지
잘 노시든지
잠을 자시든지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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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말없이 걸어가듯이

정현종

시간은 흘러
흐르는 시간
쓸쓸하여
마음 안팎을 물들여
가을 바람이 나무를 흔들 듯이
내가 말없이 걸어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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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명백한 놀이를

정현종

어른들은 이상해요
우리 아이들은 가령 병정놀이나 전쟁놀이를 할 때
정말 죽이거나 정말 죽는 게 아니라
죽은 걸로 하고, 이기고 지는 것도 그냥
이긴 걸로, 진 걸로 하는데, 어른들은 정말 죽이고
승패를 막론 다만 지옥을 만들거든요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에요. 어떤 시인이 어떤 사관학교에 가서
막무가내로 붙잡혀 사열을 받았는데
도무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고 도무지 온몸이 근질근질...
아, 이 명백한 놀이를 이다지도 무게잡고, 이다지도 엄숙하게
하는구나, 참 한심하기도 하구나 하는,
그냥 바라볼 땐 못 느끼던 걸 실감했는데요...
하느님, 이 세상은 그냥 이렇게 굴러가겠지요만, 정치, 군사
할 것 없이 다만 어른들의 놀이에 불과한 짓을 놀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서 이 세상에는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는,
그저 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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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모든 말은요

정현종

모든 말은요
마치 그 말이 전부인 듯이
마치 그 말이 실상인 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게 본질적인 약점입니다.
말은 어떻든
끊어져야 하니까 그렇기도 하겠지요만
(그 말 바깥의 빛과 그리고
그림자는
무간지옥과
배꼽―수미산을 중심으로
대천세계에 두루 미쳐 있는데 말이지요)
하하,
모든 말의 그러한 치명적인
한계 때문에 우리와
우리 삶의 허상이
차곡차곡 꾸준히
불어나 온 것이겠지요만
(표현과 그 즐거움은
또 다른 이야기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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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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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무너진 하늘

정현종

새들아
하늘의 化肉
바람의 정령들아,

새들아
보이는 신들
영원한 전설들아

너와 함께 실로
나도 날아오르고
날아오르고 하였으니

오늘 산보하다가 숲길에서
죽어 떨어진 까치를 보았을 때
그게 왜 청천벽력이 아니겠느냐

하늘 무너지고
길은 죽고
나는 수심에 잠겼느니
새들아
세상의 기적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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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물방울의 말

정현종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가 대답하여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 물방울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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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밑도 끝도 없는 시간은

정현종

시간의 모습이다
얻는 건 없고
잃는 것뿐이다
흉악하다거나 야속하달 것도 없이
시간은 슬픔이다
그 심연은 밑도 끝도 없어
밑도 끝도 없이 왜 그러시는지
정말 밑도 끝도 없어
석탄을 캐내고 금을 캐내고
지축(地軸)을 캐내도
무량(無量) 슬픔은
욕망과 더불어
욕망은 밑도 끝도 없이
운명을 온 세상에
꽃도 허공의 눈짓도
실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온 세상에

시간이여, 욕망의 피륙이여
무슨 거짓말도 변신술도
필경 고통의 누더기이니
살아서
다 놓아버린 뒤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여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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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바람 속으로

정현종

아 이 바람
숲에 부는 바람
저녁 무렵
물소리
너는 어디 있니
너는 어디로 가니
바람 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어두울 때까지 앉아 있겠어
소나무 아래
머나먼
땅 위에.
저 날 소용돌이
☆★☆★☆★☆★☆★☆★☆★☆★☆★☆★☆★☆★
《32》
바람의 그림자

정현종

창밖을 본다.
바람이 불고 있다.

한참 있다가 또 내다본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흔들리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이파리들.

어른거리는 시간의 얼굴
바람의 움직임을 깊게 한다.
그림자들
어른거려
바람의 움직임은 깊다.
슬픔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움직인다.
바람의 그림자.
☆★☆★☆★☆★☆★☆★☆★☆★☆★☆★☆★☆★
《33》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시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34》
부질없는 시

정현종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
《35》
불쌍하도다

정현종

시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다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
《36》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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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38》
사랑의 꿈

정현종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
《39》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
《40》
사물의 꿈

나무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41》
사물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42》
사물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43》
상상 할 수 있다

정현종

상상 할 수 있다
추억하듯이
선잠에서 깨어나 문밖에 서서
희뿌연 새벽 공기 뚫고
어제의 쓰레기만 뒹구는
그 공간 위에
시간이 양각되어 간다
전설이다
시간이기도 하고
이젠 상상 할 수 있다
추억하듯이
☆★☆★☆★☆★☆★☆★☆★☆★☆★☆★☆★☆★
《44》
상처

정현종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
《45》
새로운 시간의 시작

정현종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나는 바라건대 마음먹은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
《46》
생명의 아지랭이

정현종

내 평생 노래를 한들
저 산에서 생각난 듯이 들리는,
생명바다 깊은 심연을 문득 열어제끼는
꿩 소리 근처에나 갈까.
벌레와 흙과 그늘이
목에 찬 듯한 허스키,
무슨 창법唱法 따위 커녕은
그냥 제 생명에 겨운,
도무지 말 같지도 않은
꿩 소리 근처에나 갈까.

만물 속에서 타오르는
저 생명의 아지랭이를
내 노래는 숨 쉬는니
말이여, 바라건대
생명의 아지랭이여.
☆★☆★☆★☆★☆★☆★☆★☆★☆★☆★☆★☆★
《47》
설렁설렁

정현종

바람은 저렇게
나뭇잎을
설렁설렁 살려낸다
(누구의 숨결이긴 누구의 숨결,
느끼는 사람의 숨결이지)

바람의 속알은
제가 살려내는
바로 그것이거니와

나 바람 나
길 떠나
바람이요 나뭇잎이요 일렁이는 것들 속을
가네, 설렁설렁
설렁설렁.
☆★☆★☆★☆★☆★☆★☆★☆★☆★☆★☆★☆★
《48》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웅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쪽이 비어있다.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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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세상의 나무들

정현종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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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소리 소리들

정현종

숲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한 소리
알아차리지 못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아예 듣지 않거나
들어도 알아차리지 못한 소리들,
그 소리들……
그래도 그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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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슬픔

정현종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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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시간의 게으름

정현종

나, 시간은,
돈과 권력과 기계들이 맞물려
미친 듯이 가속을 해온 한은
실은 게으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면
그건 오히려 게으름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은 잠들고 돈만 깨어 있습니다.
권력욕 로봇들은 만사를 그르칩니다.
자동차를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을 닦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으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 버리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시간은 원래 자연입니다.
내 생리를 너무 왜곡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천천히 꽃 피우고 천천히
나무 자라고 오래 오래 보석 됩니다.
나를 '소비'하지만 마시고
내 느린 솜씨에 찬탄도 좀 보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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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아침

정현종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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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어떤 적막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 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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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얼굴에게

정현종

내 얼굴이 억제하고 있는 동안
궁둥이는 모름지기 폭발하고 있다
하하
나는 내 얼굴이 때때로
궁둥이여서
불안할 때가 있다
☆★☆★☆★☆★☆★☆★☆★☆★☆★☆★☆★☆★
《56》
요격시

정현종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발사합니다 모든 포탄에
비둘기를 발사합니다 모든 무기상들한테
따오기를 발사합니다 정치 꾼들 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 오이 때까치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사신들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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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정현종

안은 바깥을 그리워하고
바깥은 안을 그리워한다
안팎 곱사등이
안팎 그리움

나를 떠나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남에게 돌아가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이 노릇을 어찌하리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부느니
어찌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느니
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
《58》
익어 떨어질 때까지

정현종

기다린다, 익어 떨어질 때까지,
만사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될성부른가)
노래든 사귐이든,
무슨 작은 발성(發聲)이라도
때가 올 때까지,
(게으름 아닌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
《59》
인사

정현종

모든 인사는 시이다
그것이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라면,

실은
시가
세상일들과
사물과
마음들에
인사를 건네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인사이다.

인사 없이는
마음이 없고
뜻도 정다움도 없듯이
시 없이는
뜻하는 바
아무런 눈짓도 없고
맑은 진행도 없다.
세상일들
꽃피지 않는다.
☆★☆★☆★☆★☆★☆★☆★☆★☆★☆★☆★☆★
《60》
잎 하나로

정현종

세상일들은
솟아나는 싹과 같고
세상일들은
지는 나뭇잎과 같으니
그 사이사이 나는
흐르는 물에 피를 섞기도 하고
구름에 발을 얹기도 하며
눈에는 번개 귀에는 바람
몸에는 여자의 몸을 비롯
왼통 다른 몸을 열반처럼 입고

왔다갔다 하는구나
이리저리 멀리멀리
가을 나무에
잎 하나로 매달릴 때 까지.
☆★☆★☆★☆★☆★☆★☆★☆★☆★☆★☆★☆★
《61》
좋은 풍경

정형종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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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난 발자국

정현종

지난 하루를 되짚어
내 발자국을 따라가노라면
사고의 힘줄이 길을 열고
느낌은 깊어져 강을 이룬다-
깊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다
되돌아보는 일의 귀중함이여
마음은 싹튼다 조용한 시간이여
☆★☆★☆★☆★☆★☆★☆★☆★☆★☆★☆★☆★
《63》


정현종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자기는 거의 不在에 가깝다.
부재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넒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들과,
공중에 뿌리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
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워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성자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
《64》
흰 종이의 숨결

정현종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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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별 밝은 밤에

정현종

해 질녘 이면 해지는 대로
어두움 모아 선 자리에

별들이 떨어진날
지세운 창가 너머로

나부낀 하늘 녘
바라보고 한참을

유난히 밝은 별빛
그대 닮아서 눈시울 남몰래

별들 부스럼인날
목놓은 하늘 보았지

밤 타는 가슴안고
그대 닮은 강가에서 남몰래

아스란한 하늬결

가지 사이로 서리
녹음진 밤별 철 마다로

무지개 처럼 핀 별 잔치

나부낀 그대 맘
바라보고 한참을

유난히 맑은 그대
포개진 가슴안고서 남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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