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윤시모음 20편

《1》
8월에는

최홍윤

봄날에
서늘하게 타던 농심農心이 이제
팔 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된더위 만나 허우적거리지만
기찻길 옆엔 선홍빛 옥수수
간이역에 넉넉히 핀 백일홍
모두가 꿈을 이루는 8월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또 한해의 지난날들
앳되게 보이던
저어새의 부리도

검어지는데
홀로 안간힘으로

세월이 멈추겠는가

목 백일홍 꽃이 지고
풀벌레 소리 맑아지면은

여름은 금세 빛 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고 마는 것

우리가 허겁지겁 사는 동안
오곡백과는 저마다 숨은 자리에서
이슬과 볕, 바람으로 살을 붙이고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단지, 그 은공을 모르고
비를 나무라며 바람을 탓했던 우리
그리 먼 곳보다는

살아 있음에 고마울 뿐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슴 벅찬 일인데
어디로 가고
무엇이 되고 무슨 일보다,

8월에는 심장의 차분한 박동
감사하는 마음 하나로 살아야겠다

《2》
9월의 느낌

최홍윤

철 지난 바닷가
파도의 음률 차갑고,
이별을 준비하던 마음도 쓸쓸하다.
고요한 호수에
반짝이는 물 비늘 물 비늘에 잠수하고 마는
황혼녘에 물고기들,
단지 빈틈없는 나무 숲이
느슨하게 볕을 들이고, 파닥이는 작은 새들에게
따가운 가을을 내준다.

고향언덕에
핏줄의 영혼이 깨어나면
5월에 흐드러지던 밤꽃이 붉은 알밤이 되고
토실한 대추 알 수줍게 익을 거다.
9월은 모두가 제자리를 찾는다
살가운 물소리로 기억을 더듬고
사랑방 옛주인 곤히 주무시는 산자락에는
천지사방에 흩어진 손들이 모여 들고
길 떠나간 외기러기의 안부도 전해 오리라!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파도의 운률로 가슴이 따끈,
따끈한 詩를 써봐야겠다.

《3》
9월의 詩

최홍윤

9월은
모두가 제자리를 찾는 달이다

철 지난 바닷가
이별을 노래하는 파도의 음률 쓸쓸하고
물 비늘 반짝이는 황혼녘의 호수
호수에 잠수하고 마는
물고기의 행적도 고즈넉하다

단지,
빈틈없던 나무들 숲에
따가운 볕 느슨하게 들이고
파닥이는 작은 새들의 노래 한결 맑다

교정에 돌아온
그을린 얼굴들도 해맑게
시루 속에 콩나물처럼 성큼 컸다.

돌아 오는 길에
고향 언덕에 잠든 핏줄의 영혼이 깨어나면
산자락에는 시퍼런 밤송이 붉게 웃을 데고
마당가 대추알도 토실하게 수줍어 할 거다

흐르는 살가운 물소리에
가물거리는 내 기억을 더듬고
사랑방 주인들 곤히 잠든 산맥 자락에 가서
공손이 절을 올리고,

그제야,
떠나려는 기러기 떼처럼
안부를 내려놓고
사람 떠나 외로운 파도의 운율 벗을 삼아

어느 한 사람이라도 가슴이
따끈해 지는 시를 써야겠다.

《4》
가슴으로 살아야지

최홍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삶의 방식은 여러 가지다

입으로 사는 사람
머리로 사는 사람
손으로 사는 사람
발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입과 머리로 살자니
인생이 가벼운 것 같고
손발로만 살자니
미련한 삶과 같아 시원찮다

이 모든 방식에
눈과 귀를 보태
사람들은 무엇이 되고자 한다

자식이 되고
선배가 되고
부모가 되고
종국에는 어른이 되고자 한다

무엇이 되고자 할 때는
머리와 가슴이 충돌하고
손발이 맞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이럴 때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받아 적으면 시가 되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길을 가면 어른이 된다

《5》
가을걷이

최홍윤

훠이 훠이여
숨 찬 팔 순 노인 할머니의 새 몰이도 이제 끝났다.
미련 남아 들녘엔 허수아비 하나 남겨놓고
묵정 밭에 감 따는 아버진
까치 밥 몇 남겨 두고
흐뭇해하시던 저 그을린 얼굴
그리워 그리워해도
예 같이 비바람 몰아친다.

뿌리고 가꾸던 몇 번의
고달픈 시련이 끝이 나려는데
또 태풍이 오려나
60년대의 사라호에 울던 그 눈물이
또 내 눈언저리에 핑 돈다.

가혹하다
산 노을에 가는 가을날이
야속하다
호미로 나락 이삭 케던 그 시절이
눈물겨워 잠 못 이룬다.
마을 들녁 신장로에 누른 나뭇잎 뒹굴고
저무는 날 꿀뚝에 저녁 연기 퍼지는
밥 익는 마을에 또 걱정이 태산이다.
태풍이란 것이
차바인지 타파인지
소리 소리 없이,
스르르
소멸된다면 좋겠다.

《6》
가을밤

최홍윤

가을밤,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홑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면
가을의 전령사, 풀벌레들이
어느새 내 갈빗대에 와 자장가를 부르네!

새록새록 잠들었다
달빛에 순백의 박꽃이 수줍어할 즈음에
상큼한 공기로 눈을 뜨면
조금은 춥다 싶어, 나는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꿈속의 고향으로 달려갑니다.

내 유년기에 벗이요, 형제여
그대들도 가을밤에는
홑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아련한 추억의 한 자락 젖먹이 이를 드러내고
울고 웃던 지난 시절 그리워

이 가을밤에는
상큼한 삼베 홑이불이면
더더욱 좋으시겠네

《7》
가을에 도지는 몸살

최홍윤

벌써 며칠째인가
이 쓰린 가슴 쓸어내린 날이?

눈이 시려
못 배길 것 같으면
낮술이라도 취해 잠이 들고

남 보기에
부끄럽다면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폭 가리면 되지만

내,
무슨 재주로
가을 하늘과 성근 별빛을 가리고
저 바람을 잠재운단 말인가?

내가,
별 도리 없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뼛속 깊이 파고들고
가슴팍이 저며오는 갈 날에는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한다.

이 불치병은
나,
혼자만의 병이기 때문이다
하,
붉은 저 산하보다
그리운 사람아!

《8》
거리의 풍경

최홍윤

모름지기
사람 사는 세상의 거리는 아름다워야 하리

사람도 풍경이라고, 충무로나 인사동처럼
볼거리에는 낯익은 얼굴이 눈에 차면 더 좋으리라
이에 비해
동대문이나 재래 시장의 거리,
먹거리나 저작거리에는 낯선 사람이 구름같이 모이고
불황의 늪을 속히 벗는 것이 으뜸이리라

또한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의 어느 여 가수의 노랫말처럼
외로울 때면 생각나는 거리는 어느 누구의 거리로
첫눈 내리는 명동, 추억의 거리일 수도 있고 펑펑 내리는
첫눈에 반해서 어쩔 줄 모르는 부산의 광복동 거리쯤이면
그 누군들 외면하리

그러나
그 무슨 못 마땅한 일이 그리도 많은지

《9》
꽃길

최홍윤

벗꽃 터널을 걷노라면
내 가슴에 꽃이 되었던 사람 그리워
오늘같은 날에는
꽃비에 젖습니다.

오랜 세월
더러는 나에게
소낙비를 뿌리고 간 사람도 있어
꽃비에 젖는 날 그리움 더 깊습니다

그대 얼굴 이름 잊었으나
찔레꽃 피고
바람에 흔들리는 앵두나무 그 우물가
어제는 물의 숨소리 들었습니다

그대 마냥 그리워
오늘, 웬지 모르게 꽃이 핀 터널 길
발목이 쉬도록 걷습니다
비가 잦을 때까지....... 걷습니다.

《10》
동짓날 밤에

최홍윤

왠지 모르게
잠 못 이루는 긴긴 밤이다
해 질 녘에 하얀 눈발이 날렸는데,
지금쯤,
고향집 처마 밑에는
눈송이만 바쁘겠다
싸늘하고 적막한 뒤뜰에,
마당가 감가지에,
내려앉는 눈송이만 외롭겠다
빨갛게 타는 장작불
할머님이 가슴을 태워 쑤던 가마솥에 팥죽,
난데없는 겨울 밤이슬이 벼개 닢을 적신다
이 그리움을 어이할 거나,
저 외로움을 어이할 거나,
날이 밝으면
눈길을 헤치고 저작거리에 나가
팥죽 파는 낯선 할머니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아볼 거나
창가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데
동짓날 나의 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11》
세월의 강

최홍윤

가을밤
물새 우는 강가에서
쓸쓸히 깊은, 세월의 강을 보았는지요

그대 스산한 바람결에
두 무릎을 감싸고 홀로 앉아
한세월을 뒤돌아보았는지요

흐르는 강물에
저물어 간다는 것은 낡아지고
늙어 가는 것이므로 서글픈 일입니다

속으로 흐르는 강물이 흐느끼고
희끈희끈한 갈대숲에 노을 진
인생 고비의 세월도 강물에 흐릅니다

고요한 가을밤에
먼 산 넘어 어느 골짜기에서인지
방정맞은 개 짖는 소리는
누가 죽어 가는지 숨이 넘어갈 듯하고
별빛만 가물거리는데
등골 서늘한 강바람
그대에게 발가벗은 내 아픔은
물고기 비늘처럼 비릿합니다

슬픔은 깊어지고
쓸쓸함이 병인 양 고독에 겨워서
이 세상 올 때도 그랬지만
갈 때도 혼자임을 비로소 알게 되고
말없이 흐르는 저무는 강에
물길을 못 따라가는 것처럼
물줄기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이제 하늘가는 흰 구름에
눈물의 성찰을 보내야 합니다

좋은 인연은 두고두고 노래가 되지만
악연은 상처가 되어 돌아오고
누구나 나이 초입에는
저 강물보다 빠르게 강둑을 달리지만
나이가 들면 별수 없이
세월의 강에 젖습니다

인생은 피고 지는 것
한 줄기의 바람입니다

《12》
아버지의 수첩

최홍윤

장롱 속에 묻어둔
고즈넉한 세월 하나 건져
회한의 이슬에 젖눈다.

꼬옥 꼭 누른 글자
갈피에 묻어나는 애증
파르르 떨리는
전화번호 하나로
고모님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다.

머나먼 길
무거웠던 짐,
깨알같은 핏줄의 여정을
고모님은 낱낱이
풀어놓았다.

《13》
안갯 속의 진실

최홍윤

삼백예순날 중에
약, 칠 할은 안갯속인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에
겨울 안개가 자욱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안갯 속을 헤맬 때가 많은 우리,
안개꽃이 핀 나뭇가지에
몸 풀듯 통통 하고 뾰족한 꽃망울이
진실하게 봄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가
한 치 앞을 못보고 안갯 속을 헤맬 때
구름 위에 태양은
반짝 얼굴 내밀고
안개를 걷어내 주기도 하고

우리가
밤 안개의 미로를 헤맬 때는
달님과 별들이 길을 안내하다가
때로는 바람을 몰고 와
짙은 안개를 걷어내기도 한다

희망과
용기를 잊지 말자
하늘에는 눈이 있다
하늘의 눈으로 안개를 걷어 낼 때
안갯 속의 진실은 보인다.

《14》
예배당 종소리

최홍윤

한세상 걸어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고향 마을 어귀에 작은 마실
예배당 종소리로 꿈을 키우고
꿈은, 예배당 풍금 소리에
낮에 나온 반달처럼 선(善)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 누구는 자연산(自然産)
자연산 하지만 내 생애에는
냉이와 달래, 돌미나리 돌미역이
예배당 종소리와 함께
맑은 피, 뽀얀 살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
늘 혈관을 말끔히 가셔주었다

한 시절이 가기 전에
맑은 피가 도는 제철 음식을 먹기 위해
예배당 종소리 노을에 퍼지는 고향에 가서
거룩한 고요한 밤에
동치미를 한 사발 마시고 싶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15》
오늘

최홍윤

날이 밝아오니 오늘이다

눈 비가 오나
먹구름 드리워도 오늘,
하루는 오늘일 뿐이다

내 머리에
가슴에 저축해 둔 오늘이
며칠이나 될까?

아마,
그리 많지 않은듯 싶다

오늘이란 하루
이 하루가
내겐 최선의 날이 되리라

분명한 것은
어제의 망자가(돌아가신 분)
그토록 갈망 하던 날이 바로
오늘이다.

이 오늘이란 하루
이 하루가 그대와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나날
내일 이였을 것이다

살다가
도움을 못 줄 망정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결코 하지 말지어다.

《16》
입동 날에

최홍윤

첫새벽에
차를 기다리며
길섶 서릿발에다 오줌을 갈기는 사람도,
따끈한 자판기 커피 호호불던 사람도,

한 패는 봉고차에 오르고
다른 한 패는 시외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사라진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어린 시절 따개비처럼 붙어 살던
소꿉 친구의 전화를 받고

메주콩 쑤는 날 추억 간절하고
간장 달이는 냄새 풋풋한 묵정 밭에
까치밥만 남기고 감 따자고 했다

이제 가을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묵은 그리움만 싹 트는 입동날에

이제 우리는
다닥다닥 붙어 살기에 너무 늦은 나이
가지 많은 나무가 되어서도

정, 그토록 그립다면
얼음장 밑에 흐르는 물소리로
모닥불 피워놓고

동해안에 지천인 양미리라도 구워놓고
떠나는 가을을 잔에 담아
서러운 술잔으로
時 한 수라도 건져 볼까?

《17》
코스모스 길

최홍윤

내 일상에 마주치는
저 가볍고 순수한 아름다움이여
긴 목대로 하늘거리는
너의 모습은 순박한 여인의 모습 그대로구나


가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지천으로 핀 함박웃음이 어지러운 세상을 맑게 하고
내 마음 환하게 꽃을 피웠네


조금은 가냘프긴 해도
겉과 속이 한결같은 너의 속내는
정직을 잃고 이젠 더 잃을 것도 없는 세상사
인간들보다 숭고하리


무서리 찬바람에
그리움 더 깊어질까 봐
너의 자태에 반해버린 나는, 종일토록
발목이 쉬도록 네 곁을 걷고 있다.

《18》
폭설의 뒤안길

최홍윤

북동기류 탓에
눈이 내린다기에 짐작은 했지만
연 사흘의
폭설일 줄은 미처 몰랐네

눈송이가 꽃잎같이
빈 나뭇가지에 내려앉을 때는
그리운 사람 그리워
다정한 밤을
눈송이처럼 속삭이려 했는데

깊은 산중에 바람이 일고
눈보라 몰아칠 때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다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네

허리춤을 재는 폭설의 뒤안길에는
백두대간 동녘 땅 골 골에는
세밑 그리움은 돌아눕고
기다림은 몸져누웠네

《19》
향기 나는 사람을 찾습니다

최홍윤

세상물정 다 알면서도
소박하고 순박한 사람,
그 어디 없나요

배려와
부끄러움을 아는
양심이 늘 숨쉬고 있는
가슴들과 한 울타리에 살고 싶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피는 꽃이
그 바람보다 향기롭듯이
마구 흔들어도 사람 냄새 폭 배인 사람

푸른 솔의
솔 괴이처럼 뭉쳐진 팍팍한 사람말고,
솔가지 잘린 상처를 어루만지는
송진 같은 향이 목마른 지금,

인생 여정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향을 사르지 않아도 향기로운 사람
넉넉한 인품과 사람 냄새 풋풋한 이
그 어디 없나요

무술년 새해는 더 더욱
그런 사람이 그립습니다
아, 어디 없나요.

《20》
중년의 겨울

최홍윤

한세상 살아오면서
가슴 아픈 일, 눈물나는 일이
어디 한 두 번 이든가
목숨을 깊은 흙 속에 묻어두고
바람의 입맛에 나부끼다
발가벗은 나목처럼
흔들리며 말없이 사는 거다

소리 없이 뜨거운 불길로
내 가슴을 태우던 빛고운 단풍잎도
까칠하게 바삭 이는데,
얼어붙은 겨울이라고
나무들처럼 올곧게 왜 못살겠는가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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