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104

이육사 시 모음

이육사 시 모음 17편 1.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을 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2. 교목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셔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어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내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속 깊이 거꾸러저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3. 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

김수영 시 모음

김수영 시 모음 15편 1.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 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2. 푸른 하늘을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윤동주님 시모음

윤동주님 시모음 스무편 1.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2.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마종기 시 모음

마종기 시 모음 38편 1. 가을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2. 갈대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안성란 시 모음

안성란 시 모음 40편 《1》 5월의 사랑과 행복 안성란 물빛 고운 하늘에 하얀 꽃 무리를 이루고 바람에 날리는 햇볕의 온화함을 손바닥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어느새 꽃은 지고 연둣빛 새순이 움트는 나뭇가지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하얀 양산으로 가린 얼굴에 5월의 사랑이 곱고 예쁜 행복으로 덧칠해 줍니다. 장미꽃잎을 하나 따서 기다림을 찻잔에 담으면 향기롭고 달콤한 향기가 퍼져가고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맑은 마음으로 청하한 하늘이 줄어들지 않는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2》 6월의 기도 안성란 어둠의 터널에 빛을 주시고 메마른 가지에 이슬을 주시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흐르는 맑은 물과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온종일 지친 어깨 삶의 흔적 후회의 그늘을 만들기보다 빛 가운데로 걷는 자신감 넘치는 발길을 ..

임숙현 시 모음

임숙현 시 모음 71편 《1》 가을 편지 임숙현 가을빛 고와 투명한 그리움 풀어헤친 가슴 햇살 받아 사랑 채우는 가을처럼 풍요로움 속에서도 비우는 마음으로 하루를 걷는 오늘에 익어 가는 세월 서늘한 바람을 안고 흐르는 그리움 말려 사랑 담으면 따뜻한 그대의 미소 마음 밝혀주니 마음 나눌 수 있는 사람 더욱 그립네 살랑이는 바람에 삶의 고단함 내려놓고 세월에 물들인 이야기 그리움인 것을 《2》 그 사람이 당신 임숙현 마음 사이 핀 삶의 이야기 찻잔 사이 마음 내려놓고 맑은 빛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마음과 교류하는 가슴 설레게 하는 만남 그 사람이 당신 풍성한 마음으로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가는 오늘 일그러진 내 모습을 일깨워 기쁨과 슬픔 동행하는 일상 깊이 생각하며 아픔이 있어 기쁨의 의미 소중히 간직하고 ..

최유주 시 모음

최유주 시 모음 30편 《1》 3월의 그리움 최유주 세찬 바람이 불어도 고운 자태 뽐내며 야리야리한 몸 속에 감춰둔 강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3월 어지러운 세상 속 홀로 남겨진 내가 걱정되어 하늘에 계시는 울 어머니가 나들이 오셨나 맘 한편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 울컥 차 오르는 먹먹한 목울대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아픔이다 《2》 5월 어느 날의 유혹 최유주 오월의 향기 가득 퍼지는데 비까지 내리는 풍경 금상첨화 작은 몸 웅크리고 숨어 볼 거라 뛰어든 작은 가게 앞 옹기종기 피어난 유리창에 서린 아름다운 방울꽃의 향연 내 모습도 네 모습도 빛 되어 흘러내리는 신비로움에 또다시 황홀한 빗 길은 그리 추억의 그림을 남기고 바람과 함께 휩쓸려 흘러갔다 《3》 가을 맞이 최유주 바람맞으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성큼..

문태준 시 모음

문태준 시 모음 35편 《1》 골짜기 문태준 오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외롭고 깊고 모진 골짜기를 떠나 저 푸른 골짜기로 그는 다시 골짜기에 맑은 샘처럼 생겨나겠지 백일홍을 심고 석등을 세우고 산새를 따라 골안개의 은둔 속으로 들어가겠지 작은 산이 되었다가 더 큰 산이 되겠지 언젠가 그의 산호(山戶)에 들르면 햇밤을 내놓듯 쏟아져 떨어진 별들을 하얀 쟁반 위에 내놓겠지 《2》 그믐이라 불리던 그녀 문태준 옻처럼 검고 얼음처럼 차디차지만 얼굴에는 개미굴이 여럿 나 있지만 다리는 사슴보다 야위었지만 그녀의 너른 속뜰로 들어가 마음이 쉬어 가는 날이 많았다 나는 그 이상한 평온을 슬픈 그믐이라 불렀다 조모를 열다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보았다 《3》 꽃 진자리에 문태준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윤보영 시 모음 70편

윤보영 시 모음 70편 《1》 1월의 기도 윤보영 사랑하게 하소서. 담장과 도로 사이에 핀 들꽃이 비를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새벽잠을 깬 꽃송이가 막 꽃잎을 터뜨리는 향기로 사랑하게 하소서. 갓 세상에 나온 나비가 꽃밭을 발견한 설렘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바람이 메밀꽃 위로 노래 부르며 지나가는 여유로 서두르지 않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그게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늘 처음처럼, 내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게 하소서. 《2》 2월의 다짐 윤보영 2월입니다 1년 중에 가장 짧은 2월입니다 짧아도 아름다운 시간으로 채우면 1년 중 가장 행복할 2월! 제가 행복한 2월을 만들겠습니다. 3월에 필 꽃이 우리 가슴에 피어 향기 나는 2월입니다 가슴을 열고 향기를 나..

천숙녀시모음

천숙녀시모음 15편 《1》 건강한 인연 / 천숙녀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인연은 건강합니다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인연은 아름답습니다 누군가에게 꿈을 갖게 하는 인연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누군가에게 성장이 되게 하는 인연은 행복합니다 당신은 내게 건강한 인연입니다 한 치 혹은 두 치씩 성장이 되게 하는 행복한 인연입니다 갈증을 목 축이는 한 방울 이슬 같은 인연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쏟아집니다. 《2》 길 / 천숙녀 살아서 꿈틀거리던 푸른 핏줄서는 손등 겨운 세상 갈아엎을 용기가 내게 있나 뿔뿔이 몸을 숨기며 엎드려 포복匍匐이다 내 몸은 엎드렸지만 뿌리를 다쳐선 안 돼 부딪혀 지친 세속 바랑에 걸머메고 장엄한 푸른 들판에 숨긴 씨앗 여물이고 혼절한 아픔들은 내일이면 지 나 간 다 삶의 질곡 휘청 이던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