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윤시모음 20편

《1》
8월에는

최홍윤

봄날에
서늘하게 타던 농심農心이 이제
팔 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된더위 만나 허우적거리지만
기찻길 옆엔 선홍빛 옥수수
간이역에 넉넉히 핀 백일홍
모두가 꿈을 이루는 8월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또 한해의 지난날들
앳되게 보이던
저어새의 부리도

검어지는데
홀로 안간힘으로

세월이 멈추겠는가

목 백일홍 꽃이 지고
풀벌레 소리 맑아지면은

여름은 금세 빛 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고 마는 것

우리가 허겁지겁 사는 동안
오곡백과는 저마다 숨은 자리에서
이슬과 볕, 바람으로 살을 붙이고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단지, 그 은공을 모르고
비를 나무라며 바람을 탓했던 우리
그리 먼 곳보다는

살아 있음에 고마울 뿐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슴 벅찬 일인데
어디로 가고
무엇이 되고 무슨 일보다,

8월에는 심장의 차분한 박동
감사하는 마음 하나로 살아야겠다

《2》
9월의 느낌

최홍윤

철 지난 바닷가
파도의 음률 차갑고,
이별을 준비하던 마음도 쓸쓸하다.
고요한 호수에
반짝이는 물 비늘 물 비늘에 잠수하고 마는
황혼녘에 물고기들,
단지 빈틈없는 나무 숲이
느슨하게 볕을 들이고, 파닥이는 작은 새들에게
따가운 가을을 내준다.

고향언덕에
핏줄의 영혼이 깨어나면
5월에 흐드러지던 밤꽃이 붉은 알밤이 되고
토실한 대추 알 수줍게 익을 거다.
9월은 모두가 제자리를 찾는다
살가운 물소리로 기억을 더듬고
사랑방 옛주인 곤히 주무시는 산자락에는
천지사방에 흩어진 손들이 모여 들고
길 떠나간 외기러기의 안부도 전해 오리라!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파도의 운률로 가슴이 따끈,
따끈한 詩를 써봐야겠다.

《3》
9월의 詩

최홍윤

9월은
모두가 제자리를 찾는 달이다

철 지난 바닷가
이별을 노래하는 파도의 음률 쓸쓸하고
물 비늘 반짝이는 황혼녘의 호수
호수에 잠수하고 마는
물고기의 행적도 고즈넉하다

단지,
빈틈없던 나무들 숲에
따가운 볕 느슨하게 들이고
파닥이는 작은 새들의 노래 한결 맑다

교정에 돌아온
그을린 얼굴들도 해맑게
시루 속에 콩나물처럼 성큼 컸다.

돌아 오는 길에
고향 언덕에 잠든 핏줄의 영혼이 깨어나면
산자락에는 시퍼런 밤송이 붉게 웃을 데고
마당가 대추알도 토실하게 수줍어 할 거다

흐르는 살가운 물소리에
가물거리는 내 기억을 더듬고
사랑방 주인들 곤히 잠든 산맥 자락에 가서
공손이 절을 올리고,

그제야,
떠나려는 기러기 떼처럼
안부를 내려놓고
사람 떠나 외로운 파도의 운율 벗을 삼아

어느 한 사람이라도 가슴이
따끈해 지는 시를 써야겠다.

《4》
가슴으로 살아야지

최홍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삶의 방식은 여러 가지다

입으로 사는 사람
머리로 사는 사람
손으로 사는 사람
발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입과 머리로 살자니
인생이 가벼운 것 같고
손발로만 살자니
미련한 삶과 같아 시원찮다

이 모든 방식에
눈과 귀를 보태
사람들은 무엇이 되고자 한다

자식이 되고
선배가 되고
부모가 되고
종국에는 어른이 되고자 한다

무엇이 되고자 할 때는
머리와 가슴이 충돌하고
손발이 맞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이럴 때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받아 적으면 시가 되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길을 가면 어른이 된다

《5》
가을걷이

최홍윤

훠이 훠이여
숨 찬 팔 순 노인 할머니의 새 몰이도 이제 끝났다.
미련 남아 들녘엔 허수아비 하나 남겨놓고
묵정 밭에 감 따는 아버진
까치 밥 몇 남겨 두고
흐뭇해하시던 저 그을린 얼굴
그리워 그리워해도
예 같이 비바람 몰아친다.

뿌리고 가꾸던 몇 번의
고달픈 시련이 끝이 나려는데
또 태풍이 오려나
60년대의 사라호에 울던 그 눈물이
또 내 눈언저리에 핑 돈다.

가혹하다
산 노을에 가는 가을날이
야속하다
호미로 나락 이삭 케던 그 시절이
눈물겨워 잠 못 이룬다.
마을 들녁 신장로에 누른 나뭇잎 뒹굴고
저무는 날 꿀뚝에 저녁 연기 퍼지는
밥 익는 마을에 또 걱정이 태산이다.
태풍이란 것이
차바인지 타파인지
소리 소리 없이,
스르르
소멸된다면 좋겠다.

《6》
가을밤

최홍윤

가을밤,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홑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면
가을의 전령사, 풀벌레들이
어느새 내 갈빗대에 와 자장가를 부르네!

새록새록 잠들었다
달빛에 순백의 박꽃이 수줍어할 즈음에
상큼한 공기로 눈을 뜨면
조금은 춥다 싶어, 나는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꿈속의 고향으로 달려갑니다.

내 유년기에 벗이요, 형제여
그대들도 가을밤에는
홑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아련한 추억의 한 자락 젖먹이 이를 드러내고
울고 웃던 지난 시절 그리워

이 가을밤에는
상큼한 삼베 홑이불이면
더더욱 좋으시겠네

《7》
가을에 도지는 몸살

최홍윤

벌써 며칠째인가
이 쓰린 가슴 쓸어내린 날이?

눈이 시려
못 배길 것 같으면
낮술이라도 취해 잠이 들고

남 보기에
부끄럽다면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폭 가리면 되지만

내,
무슨 재주로
가을 하늘과 성근 별빛을 가리고
저 바람을 잠재운단 말인가?

내가,
별 도리 없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뼛속 깊이 파고들고
가슴팍이 저며오는 갈 날에는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한다.

이 불치병은
나,
혼자만의 병이기 때문이다
하,
붉은 저 산하보다
그리운 사람아!

《8》
거리의 풍경

최홍윤

모름지기
사람 사는 세상의 거리는 아름다워야 하리

사람도 풍경이라고, 충무로나 인사동처럼
볼거리에는 낯익은 얼굴이 눈에 차면 더 좋으리라
이에 비해
동대문이나 재래 시장의 거리,
먹거리나 저작거리에는 낯선 사람이 구름같이 모이고
불황의 늪을 속히 벗는 것이 으뜸이리라

또한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의 어느 여 가수의 노랫말처럼
외로울 때면 생각나는 거리는 어느 누구의 거리로
첫눈 내리는 명동, 추억의 거리일 수도 있고 펑펑 내리는
첫눈에 반해서 어쩔 줄 모르는 부산의 광복동 거리쯤이면
그 누군들 외면하리

그러나
그 무슨 못 마땅한 일이 그리도 많은지

《9》
꽃길

최홍윤

벗꽃 터널을 걷노라면
내 가슴에 꽃이 되었던 사람 그리워
오늘같은 날에는
꽃비에 젖습니다.

오랜 세월
더러는 나에게
소낙비를 뿌리고 간 사람도 있어
꽃비에 젖는 날 그리움 더 깊습니다

그대 얼굴 이름 잊었으나
찔레꽃 피고
바람에 흔들리는 앵두나무 그 우물가
어제는 물의 숨소리 들었습니다

그대 마냥 그리워
오늘, 웬지 모르게 꽃이 핀 터널 길
발목이 쉬도록 걷습니다
비가 잦을 때까지....... 걷습니다.

《10》
동짓날 밤에

최홍윤

왠지 모르게
잠 못 이루는 긴긴 밤이다
해 질 녘에 하얀 눈발이 날렸는데,
지금쯤,
고향집 처마 밑에는
눈송이만 바쁘겠다
싸늘하고 적막한 뒤뜰에,
마당가 감가지에,
내려앉는 눈송이만 외롭겠다
빨갛게 타는 장작불
할머님이 가슴을 태워 쑤던 가마솥에 팥죽,
난데없는 겨울 밤이슬이 벼개 닢을 적신다
이 그리움을 어이할 거나,
저 외로움을 어이할 거나,
날이 밝으면
눈길을 헤치고 저작거리에 나가
팥죽 파는 낯선 할머니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아볼 거나
창가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데
동짓날 나의 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11》
세월의 강

최홍윤

가을밤
물새 우는 강가에서
쓸쓸히 깊은, 세월의 강을 보았는지요

그대 스산한 바람결에
두 무릎을 감싸고 홀로 앉아
한세월을 뒤돌아보았는지요

흐르는 강물에
저물어 간다는 것은 낡아지고
늙어 가는 것이므로 서글픈 일입니다

속으로 흐르는 강물이 흐느끼고
희끈희끈한 갈대숲에 노을 진
인생 고비의 세월도 강물에 흐릅니다

고요한 가을밤에
먼 산 넘어 어느 골짜기에서인지
방정맞은 개 짖는 소리는
누가 죽어 가는지 숨이 넘어갈 듯하고
별빛만 가물거리는데
등골 서늘한 강바람
그대에게 발가벗은 내 아픔은
물고기 비늘처럼 비릿합니다

슬픔은 깊어지고
쓸쓸함이 병인 양 고독에 겨워서
이 세상 올 때도 그랬지만
갈 때도 혼자임을 비로소 알게 되고
말없이 흐르는 저무는 강에
물길을 못 따라가는 것처럼
물줄기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이제 하늘가는 흰 구름에
눈물의 성찰을 보내야 합니다

좋은 인연은 두고두고 노래가 되지만
악연은 상처가 되어 돌아오고
누구나 나이 초입에는
저 강물보다 빠르게 강둑을 달리지만
나이가 들면 별수 없이
세월의 강에 젖습니다

인생은 피고 지는 것
한 줄기의 바람입니다

《12》
아버지의 수첩

최홍윤

장롱 속에 묻어둔
고즈넉한 세월 하나 건져
회한의 이슬에 젖눈다.

꼬옥 꼭 누른 글자
갈피에 묻어나는 애증
파르르 떨리는
전화번호 하나로
고모님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다.

머나먼 길
무거웠던 짐,
깨알같은 핏줄의 여정을
고모님은 낱낱이
풀어놓았다.

《13》
안갯 속의 진실

최홍윤

삼백예순날 중에
약, 칠 할은 안갯속인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에
겨울 안개가 자욱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안갯 속을 헤맬 때가 많은 우리,
안개꽃이 핀 나뭇가지에
몸 풀듯 통통 하고 뾰족한 꽃망울이
진실하게 봄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가
한 치 앞을 못보고 안갯 속을 헤맬 때
구름 위에 태양은
반짝 얼굴 내밀고
안개를 걷어내 주기도 하고

우리가
밤 안개의 미로를 헤맬 때는
달님과 별들이 길을 안내하다가
때로는 바람을 몰고 와
짙은 안개를 걷어내기도 한다

희망과
용기를 잊지 말자
하늘에는 눈이 있다
하늘의 눈으로 안개를 걷어 낼 때
안갯 속의 진실은 보인다.

《14》
예배당 종소리

최홍윤

한세상 걸어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고향 마을 어귀에 작은 마실
예배당 종소리로 꿈을 키우고
꿈은, 예배당 풍금 소리에
낮에 나온 반달처럼 선(善)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 누구는 자연산(自然産)
자연산 하지만 내 생애에는
냉이와 달래, 돌미나리 돌미역이
예배당 종소리와 함께
맑은 피, 뽀얀 살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
늘 혈관을 말끔히 가셔주었다

한 시절이 가기 전에
맑은 피가 도는 제철 음식을 먹기 위해
예배당 종소리 노을에 퍼지는 고향에 가서
거룩한 고요한 밤에
동치미를 한 사발 마시고 싶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15》
오늘

최홍윤

날이 밝아오니 오늘이다

눈 비가 오나
먹구름 드리워도 오늘,
하루는 오늘일 뿐이다

내 머리에
가슴에 저축해 둔 오늘이
며칠이나 될까?

아마,
그리 많지 않은듯 싶다

오늘이란 하루
이 하루가
내겐 최선의 날이 되리라

분명한 것은
어제의 망자가(돌아가신 분)
그토록 갈망 하던 날이 바로
오늘이다.

이 오늘이란 하루
이 하루가 그대와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나날
내일 이였을 것이다

살다가
도움을 못 줄 망정
서로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결코 하지 말지어다.

《16》
입동 날에

최홍윤

첫새벽에
차를 기다리며
길섶 서릿발에다 오줌을 갈기는 사람도,
따끈한 자판기 커피 호호불던 사람도,

한 패는 봉고차에 오르고
다른 한 패는 시외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사라진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어린 시절 따개비처럼 붙어 살던
소꿉 친구의 전화를 받고

메주콩 쑤는 날 추억 간절하고
간장 달이는 냄새 풋풋한 묵정 밭에
까치밥만 남기고 감 따자고 했다

이제 가을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묵은 그리움만 싹 트는 입동날에

이제 우리는
다닥다닥 붙어 살기에 너무 늦은 나이
가지 많은 나무가 되어서도

정, 그토록 그립다면
얼음장 밑에 흐르는 물소리로
모닥불 피워놓고

동해안에 지천인 양미리라도 구워놓고
떠나는 가을을 잔에 담아
서러운 술잔으로
時 한 수라도 건져 볼까?

《17》
코스모스 길

최홍윤

내 일상에 마주치는
저 가볍고 순수한 아름다움이여
긴 목대로 하늘거리는
너의 모습은 순박한 여인의 모습 그대로구나


가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지천으로 핀 함박웃음이 어지러운 세상을 맑게 하고
내 마음 환하게 꽃을 피웠네


조금은 가냘프긴 해도
겉과 속이 한결같은 너의 속내는
정직을 잃고 이젠 더 잃을 것도 없는 세상사
인간들보다 숭고하리


무서리 찬바람에
그리움 더 깊어질까 봐
너의 자태에 반해버린 나는, 종일토록
발목이 쉬도록 네 곁을 걷고 있다.

《18》
폭설의 뒤안길

최홍윤

북동기류 탓에
눈이 내린다기에 짐작은 했지만
연 사흘의
폭설일 줄은 미처 몰랐네

눈송이가 꽃잎같이
빈 나뭇가지에 내려앉을 때는
그리운 사람 그리워
다정한 밤을
눈송이처럼 속삭이려 했는데

깊은 산중에 바람이 일고
눈보라 몰아칠 때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다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네

허리춤을 재는 폭설의 뒤안길에는
백두대간 동녘 땅 골 골에는
세밑 그리움은 돌아눕고
기다림은 몸져누웠네

《19》
향기 나는 사람을 찾습니다

최홍윤

세상물정 다 알면서도
소박하고 순박한 사람,
그 어디 없나요

배려와
부끄러움을 아는
양심이 늘 숨쉬고 있는
가슴들과 한 울타리에 살고 싶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피는 꽃이
그 바람보다 향기롭듯이
마구 흔들어도 사람 냄새 폭 배인 사람

푸른 솔의
솔 괴이처럼 뭉쳐진 팍팍한 사람말고,
솔가지 잘린 상처를 어루만지는
송진 같은 향이 목마른 지금,

인생 여정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향을 사르지 않아도 향기로운 사람
넉넉한 인품과 사람 냄새 풋풋한 이
그 어디 없나요

무술년 새해는 더 더욱
그런 사람이 그립습니다
아, 어디 없나요.

《20》
중년의 겨울

최홍윤

한세상 살아오면서
가슴 아픈 일, 눈물나는 일이
어디 한 두 번 이든가
목숨을 깊은 흙 속에 묻어두고
바람의 입맛에 나부끼다
발가벗은 나목처럼
흔들리며 말없이 사는 거다

소리 없이 뜨거운 불길로
내 가슴을 태우던 빛고운 단풍잎도
까칠하게 바삭 이는데,
얼어붙은 겨울이라고
나무들처럼 올곧게 왜 못살겠는가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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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머문 그대 향기  

최영애

하늘 덮은 마음 자락
전할 길 없는데
바람도
먼 길을 떠나려는지

낙엽 떨어진 자리엔
상처 난 옹이 하나 남기고
잘 있거라 또 보자며
미소짓고 뒹군다

나뭇잎 더듬는
바람의 소리도 들었지만
가난한 연인들의 속삭임 같아
모른 척 하려니
내 가슴에도 그리움 머문다


가슴에 핀 꽃송이

최영애

황무지 같던 마음 밭에
여우비가 내렸습니다
꿀맛 같던 그리움도
곧 빗물에 젖었으니

당신 때문에 지치고
당신 때문에 아프고
당신 때문에 외로워도
당신으로 인해 늘 행복합니다

낯선 그리움이 찾아들어도
햇살 사이로 사랑별이 되어
당신을 향해
반짝일 것입니다

사랑 받기 충분한 날
당신 가슴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가을 수채화

최영애

넓은 종이 위에 점하나를 찍어 구름 만들고
색깔 옷 곱게 입혀 하늘 그리네
장대 끝 고추 잠자리가 맴을 돌면
우리집 강아지는 동네 한바퀴

가녀린 나뭇가지 감이 빨간 얼굴 살찌우고
기러기떼 한가로이 날아오르면
노을빛 물결 따라 설레는 마음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달빛에
하얗게 익는 박이 도화지에 앉는다

가을 하늘에 수놓는 마음

최영애

길을 걷다 주운 것은
벌레 먹은 낙엽뿐인데

내 가슴은
당신을 불러 세워요

당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아
새싹처럼 올라오는 마음

당신에게 전하는 마음 한 잔으로
청량한 가을 하늘을 수놓아요

갈대와 늙음

최영애

딱딱한 빵을 오래 씹으면
단 맛이 느껴지듯
그 날
갈대를 오래 바라보면
이 생에서 느낄 수 없었던
맛이 있을 것 같아
맞은 편 벤취에 앉았습니다
심장에 흐르는 물기조차 말린 채
함께 서걱거리며 바라보다가
갈대와 푸른 하늘이 닿는 즈음에서
황홀한 늙음을 보았습니다
물기 빠져 눈 끝 처져도
저리 늙어가고 싶었습니다
하얀 머리 바람에 날리며
저런 몸짓으로
느릿느릿 늙어가고 싶었습니다

중심 잃지 않고
흔들리는 저 하얀 소요를
습자지 위에 올려
그대로 옮겼다가
훗날 떨리는 손으로
우체통에서 꺼내어
내 늙음 위에 베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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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미숙 시 모음 70편

《1》 가을 선물  /  선미숙

아픔 끝자락에
가을바람이 실어 온 소식
다시 꿈을 꿔도 될까?
사랑하는 이와
마주보고 웃는 시간
말없이 바라만 봐도 알 듯한
서로 조금씩 닮은 상체기
눈물은, 시간은
바보 같은 나를 또 한 뼘 철들게 하고
세상에 눈뜨려면 아직도 먼 나는
당신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저 마음이 녹습니다. 

《2》 가을 앞에서   / 선미숙

바쁘다는 핑계로 뒤돌아 볼 시간 없이
어느 새 오십을 훌쩍 넘기고 보니
그동안 흘린 눈물과
스쳐간 아픔들이 조금씩 쌓여
얼굴을 만들고 마음을 만들어
지금에 모습으로 남아,
찬바람이 스미는 인생의 가을 앞에 서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야
한 사람이라도 곱게 간직해주는
빛깔로 남을까 생각해봅니다.
지나온 자리마다 새겨진 어설픔은
어떤 열매를 맺을지 가늠이 되니
원망보다는 부끄러움이 큽니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욕심보다는
한 잎이라도 임의 가슴에 고운 추억으로 남는
가을이고 싶습니다. 

《3》 가을 비  / 선미숙

숙여진 정열을
바람이 차고 지나가면
낙엽은 어제의 빛깔을 간직 할 수 없음에
그 위에 가을비는 내려와 함께 눕잔다

늘 같은 빗소리이건만
하늘빛이 다른 까닭에
바람결이 다른 까닭에
이 밤 홀아비의 가슴은
얼마나 또 시릴련지
가을비는
야속히도 따스한 님의 품을
눈물 토록 생각게 한다

갈비야
외로운 이 내 마음마저도
가져가려마 

 

《4》  첫사랑  / 선미숙

어제도 그랬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내일도 같을 겁니다.
끝없이 내달리는 마음
나도 모릅니다.
그 모습에 취해서
점점 더 취해서
나를 잊었습니다.
나를 묻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엔, 내 맘엔
오직
나만에 세상을 가꾸며
고운 빛깔로 채워갑니다.
그 속에 빠져 삽니다.
헤벌쭉 바보처럼


《5》 간 큰 남자  / 선미숙

사랑을 달랬더니
눈물을 줍니다.

믿음을 달랬더니
배신을 줍니다.

웃음을 달랬더니
욕설만 줍니다.

그러면서
사랑 달랍니다.

자기는 사내랍니다.
갑이랍니다.

《6》 겁없는 세상   /  선미숙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적에
호박에다 줄그어도
호박이라 더니

삼 년에 한번씩 강산이
변한다는 요즘엔
호박에 줄그으면
수박이 된단다.

너무 겁없이 변해 가는
좋은 세상 탓이리라. 

《7》 고백  / 선미숙

우리가 살면 앞으로 얼마나 살겠어요.
이 나이만큼 살면서 깨달은 건
세상은 맘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니
흘러가는 대로 사는 수밖에

남은 시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오롯이 나를 위해
고운 추억 쌓는 것
그 시간 속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8》 고통  / 선미숙

장미를 손질하다가
가시에 찔렸다.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자꾸만 따끔거린다.

한참을 더듬어 빼내고 나니
후련하다, 말짱하다.

살면서 찾아오는 고통도
이렇게 빼낼 수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렇게 말끔해질 수 있다면!

밤새 뒤척이다가 맞이하는 아침은
입 속까지 온통 가시 투성이다.

《9》 그 해 겨울 / 선미숙

멀쩡하다가도 눈보라가 친다.
아주 매섭게 몰아친다.
니 아부지 생일 땐 언제나 그려
엄니는 당신의 평탄지 않은 삶을
늘 그렇게 날씨에 빗대어 푸념하셨다.

함께 산 세월 쉰 일곱 해를 채우고
무척 추울 거라는 겨울이 힘을 잃어버린 그 해
아버지는 눈보라 같은 삶을 놓으셨다.
그래도 착하게 사셨으니 가시는 날까지 도와주는 거라고
포근히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건넨다.

쉬는 날이면 저절로 발길이 가는 희망공원
아버지는 영혼의 동무들과 거기 계신다.
그곳은 좋으냐고, 나도 데려가라고,
사진 속 아버지를 보며 한참을 넋두리하고 나오는데
분홍빛 진달래 몇 송이 슬픔 달래듯 눈앞에 어린다.
3월초, 환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말없이 웃는 아버지 얼굴이다.

아직 때가 아닌데 하루가 다르게 잎이 열리는 꽃들!
성급하게 핀 목련은 찬 서리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까맣게 얼어버렸다.
빛깔 잃은 목련을 보고 벚 꽃은 속 모르게 웃고
사람들은 이른 꽃 잔치에 그저 즐겁다.
아버지를 가슴에 묻은 그 해 겨울은 봄처럼 따스했다. 

《10》 길  / 선미숙

수 없이 많은 조각들을
이어 놓고
그만큼 많은 꿈들이 일어나
어제도 오늘도
좇고 있는,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아
허공 속에 떠다니는. 

《11》 들꽃  / 선미숙

들판에 이름 없는 꽃이라고
함부로 꺾지 마오.

그도
누구한테는
아름다운 사랑이고
하나뿐인 목숨이니

길가에 이름 모를 꽃이라고
생각 없이 밟지 마오.

그도
꽃을 피우기까지
모진 비바람 견뎌내며
눈물 흘린 세월 있으니 

《12》 또 오늘  / 선미숙

몸도 마음도 지쳐
누가 툭 건드리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너덜너덜해진 내 삶에
다시 찾은 새벽빛은 꺼져 가는 심장을 뛰게 하고
고운 햇살은 포근하게 감싸며
다시 힘을 내라 합니다.
이런 세상도 겪고
저런 세상도 겪으며
그게 사는 거라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없으니
그 잣대에 흔들리지 말자고,
어제는 갔으니 잊어버리자고
내일은 어떤 빛깔의 해가 떠오를지 기다리며
하루를 만나고 그렇게 보냅니다. 

《13》 또 다른 풍경  / 선미숙

보릿고개 설움
그 설움
포만감으로 채우고

시골 촌놈 그 촌놈
도심 속의 주인이라

쌓이고 쌓인 육신의 기름 덩이
억지 육수로 뽑아 내며
도심 속의 낙원 위를 허무가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졸고 있는 저 별은
빈 수레의 욕망을
얼마나 헤아릴는지 

《14》 만날 수 있을까  / 선미숙

또 연습이다.
내일은 어떤 인연을 만나고
어떻게 헤어질지
오늘도 그 아픔을 견디는 연습을 한다.

이제는 그만 하고 싶은 가슴앓이
그래서 닫아버린 마음
상처받는 게 무서워
움츠러드는 내 안의 세상

너무나 쉬어진 사랑
짧은 사랑
몸뚱이가 원하는 사랑
그 속에 내가 찾는 사랑은 없다.
사랑을 위한 사랑
참사랑은 어디에? 

《15》 바보  / 선미숙

복을 복인 줄 모르면
평생
복 없이 사는 게지

내 흠은 돌아볼 줄 모르고
남 탓만 하니
꿈을 꾼들
어찌? 

《16》 밤새 내리는 눈  /  선미숙

아무도 모르게 별이 떨어진 양
그렇게 당신 곁에 가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문밖에 앉아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길
아침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꿈꾸는 동안 나는 임의
기쁨을 위해 더 맑은 백색의 살을
찌웁니다.

당신이 꿈꾸는 동안 기도합니다.
내가 짐이 되지 않기를

내 소망은 오로지 하얄 줄밖에 모르는
나를 그저 하얗기 때문에
좋아 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작은 소망을 안고
밤새도록 소리 없이 나립니다. 

《17》 별 나무

선미숙

하늘 밭 어느 자리에
내가 심어 둔 별씨 하나가

내가 꾸고 있는 꿈을 먹고
내가 주고 있는 눈빛 먹어

고뇌의 다리 건너
삶이 성숙 할 즈음

그대별이여

하늘 밭 한 이랑에
우뚝 선 나무 되어

행복한 그늘 되어 주길
나 꿈꾸나니

오늘도
고운 빛 꿈 하나 심어 주는 밤
별이여 안녕!

《18》 빈자리   /  선미숙

상체기만 남은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까요

눈물도 메마르고
아픔도 무뎌졌습니다.

가슴을 짓누르는 원망, 미움
이제 비우고 나면

그 자리에
웃음이 피어날까요?

그 곳이
빛으로 채워질까요?

고운 꽃 피울 작은 씨앗하나
조심스럽게 심어봅니다. 

《19》 사랑 끝  / 선미숙

너도 나만큼 아프니
나도 너만큼 아프다.

뜨겁던 심장이 식어가고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어제까지만
기억에서 지워지기를

오늘
나는 지금 막 태어난 아기이   사부곡  / 선미숙

어도,오늘도 해는 떠오릅니다.
이런 아침이 얼마나 보태져야 무뎌 질까요.

할 만큼 했으니
나는 울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 쳤는데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발길 가는 곳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아버지는 거기에 있습니다.

차라리, 추억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덜 힘들까요.

함께 한 시간보다 그러지 못한 날이
더욱 많아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 해드리지 못해
아프고 또 아픕니다.

이제 와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일까요.
그저 못난 딸입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또 다시 아버지와 딸로 만나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는 멋진 부녀로 살아요.
아버지!

《26》



선미숙

내가 배부를 때는
네가 얼마나 배가 고픈지 알 수 없고

내가 건강할 때는
네가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없고

내가 행복할 때는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없어

누구나
네가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맛

그 속에서
네가, 내가 되어도 좋을 하루

우리는 그 하루를 기다리며
비바람을 견디고 서 있다.
☆★☆★☆★☆★☆★☆★☆★☆★☆★☆★☆★☆★
《28》

책방에서

선미숙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가슴을 안고
책방에 문을 당긴다.
먼지가 쌓일 만한 작은 틈새도 없이
빽빽이 자리를 차지한 제목들 모두가
나의 허기진 마음을 유혹한다.
소설, 수필, 시집 등 아니 철학을 논한
책도 좋으리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 가난한 마음을
잘도 헤아려 이렇게 넘치는 희생을
감당했으리
오늘도 한 권의 책으로 마음을 달래며
한마디의 양식을 줍기 위해
책을 펼친다.
☆★☆★☆★☆★☆★☆★☆★☆★☆★☆★☆★☆★
《29》

세 월 1

선미숙

가다가다 힘에 겨워 쉬어 가도
되련마는 야속한 당신은
그것을 못합니다.

가다가다 목이 말라 물 한 모금 간절
하련마는 독한 당신은 그것을 참습니다.

가다가다 길을 잃어 망설임도 잊으련마는
영리한 당신은 그것을 안 합니다.

가다가다 동무 만나 곡주 한 잔 하련마는
매정한 당신은 그것을 외면합니다.

가다가다 그리움이 있어 되돌아 볼 수도
있으련마는 차가운 당신은
그것을 잊었습니다.

가다가다 둘 뿌리에 치어 넘어지기도
하련마는 완벽한 당신은 그것을 봅니다.

가다가다 세월은

☆★☆★☆★☆★☆★☆★☆★☆★☆★☆★☆★☆★
《30》

세월 2

선미숙


빨리 가라 철없을 땐
그리도 더디 가더니

천천히 가라 철들어선
왜 그리 잘도 가는지

이제

인심반 미련반 쏟고 나니
남은 건 속절없는 한숨뿐!
☆★☆★☆★☆★☆★☆★☆★☆★☆★☆★☆★☆★
《31》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선미숙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

하루하루 삶이
순간 순간 몸짓이
아름다운 단어고
깊은 문장이다.

그에 눈빛이
그에 입술이
꽃이고 노래다.

시인은 오늘도 그렇게
또 한편의 시를
간절한 마음으로
써내려 간다.
☆★☆★☆★☆★☆★☆★☆★☆★☆★☆★☆★☆★
《35》

아!

선미숙

어디에도 풀지 못한 마음을
쌓인 마음을
구름 되게 하여 눈으로 나리면
너른 땅 품에 안겨
모두 사라질 텐데
모두 비워질 텐데

누구한테 주지 못한 마음을
아낀 마음을
구름 되게 하여 봄비로 내리면
마른 숨결마다 촉촉하게 스며
모두 파란빛일 텐데
모두 열매 될 텐데.
☆★☆★☆★☆★☆★☆★☆★☆★☆★☆★☆★☆★
《37》

악몽

선미숙

그 곳에 가면 꽃길인 줄 알았다.
그와 함께라면 웃음이겠지 믿었다.
고운 길은 보이지 않고
가면 갈수록 어두운 터널이다.

상체기가 나고
피눈물을 쏟고
가슴에 시커먼 멍이 들고

너무나 멀리 돌아왔다.
길이 아닌 걸 알았을 때
빨리 돌아서야 했다.
너와 나
이제 꿈에서 깨어나자.
☆★☆★☆★☆★☆★☆★☆★☆★☆★☆★☆★☆★
《38》

안개 낀 날

선미숙

태풍이 지나고, 간밤에 밤하늘은
별이 초롱초롱 빛났다.
동이 트려면 한 시간 반쯤 남았는데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가야산으로 가려는데 안개가 앞을 가린다.
운전대를 잡고 잠깐 망설이다가
부춘 산으로 차를 돌렸다.
이른 시간인데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사진기 가방을 등에 메고
삼각대를 들고 한 칸 한 칸 층계를 오른다.
안개가 숲을 밝힌다.
전망대에 오르는 길은 벌써 안개비에 젖어
물방울이 떨어진다.
올라갈수록 바람이 세다.
꼭대기에 오르니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의자도 축축해 앉을 수가 없다.
천천히 내려오면서 가로등과 안개가 만들어 준
빛줄기를 두 컷 찍고 아쉬움을 달래본다.
지금 내 삶도 이렇게 안개 속이다.
날이 밝으면 안개도 거치겠지.
내 삶은 언제쯤 환하게 밝으려나?
☆★☆★☆★☆★☆★☆★☆★☆★☆★☆★☆★☆★
《39》

암자

선미숙

꿈에 보인
이름 석자
망설임 끝에
찾아 나서니
작은 마을을 지나
굽이굽이 산골
맑은 공기가
나를 이끌고
외길 끝 저 만치에
귀에 익은 풍랑 소리
나를 부르네
무거운 마음 씻어 볼까
향사르고
어설픈 삼배하니
꿈에 본 탁발승은
어디 가고 속세의
여인이 산사의
안주인이라 하네
☆★☆★☆★☆★☆★☆★☆★☆★☆★☆★☆★☆★
《41》

어머니

선미숙

열 여덟 고운 빛
고운 내음 어디 가고
세월을 징검다리 해
어느 새 반백
오매불망 기나긴 밤
여섯 손가락 채워 가며
한으로 쌓인 미움은
노을 빛 등진 굽은 허리 위에
연민으로 젖어 든다
☆★☆★☆★☆★☆★☆★☆★☆★☆★☆★☆★☆★
《46》

이별 뒤에

선미숙

그래 아파라
많이 아파라
아픈 만큼 단단해진다니
좀 더 아파라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고통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어리석음
돌이킬 수 없는 선택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죽음일지
눈물일지
웃음일지
알 수 없는 이 끝

밤이, 밤이 아니고
낮이, 낮이 아니다.
하루하루 심장은 죽어가고
영혼은 메말라간다.
☆★☆★☆★☆★☆★☆★☆★☆★☆★☆★☆★☆★
《47》

이별 후에 1

선미숙

그대
어느 날 갑자기 날 두고
말없이 떠나서
다시는 내 곁에
올 수 없을 지라도
나 그대 때문에
가슴 저려야 하는
그런 아픈 마음 가지지 않게
그대 날 위해 말 해주오
잠시 머무는 바람이라고

그대
지난 시절이 잊히지 않거든
짧은 기억 더듬어 추억의 노래
한편 지어 가로수 가지 끝에
실어 보내 주오
나 그대 때문에 슬픈 마음
노래 불러 위로 삼으리
그대는 바람이라고
☆★☆★☆★☆★☆★☆★☆★☆★☆★☆★☆★☆★
《48》

이별 후에 2

선미숙

나 아무런 말없이
그대 곁을 떠나
다시 올 수 없을지라도
그대여
나로 인해 슬퍼지거나
눈물 흘리지 말아 다오.
우리 서로 만났던 짧은 인연
잠시 너무도 선명한 꿈을
꾸었던 것이라 생각해 주오.

나 그대와의 순간이
그리워 눈물나거든 아름다운 순간
그림으로 그려 그대와 노닐던
바닷가에 띄우나니 꿈속일지라도
그대여 한때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음을 가슴속에 간직해 주오.
☆★☆★☆★☆★☆★☆★☆★☆★☆★☆★☆★☆★
《49》

인연

선미숙

흐르다 흐르다가 머문 곳도 아니오
떠돌다 떠돌다가 지쳐서도 아니라오
우리 서로 만난 곳 하나뿐인 오작교
우리 서로 만난 것 전생의 업이라오
더 쏟아야 할 눈물이 남아 있어
씨뿌려 곱게 키워 반이라도 갚으라고
모자라는 반쪽 만나 하나 되게 채우라고
다음 생에 업 되어 다시 살지 말자고
그렇게 우리는 만났답니다.
☆★☆★☆★☆★☆★☆★☆★☆★☆★☆★☆★☆★
《51》

잠아!

선미숙

어디로 갔을까.
가까워지지 못하는 까닭은?
가라한 적도 없는데
오지 말라 막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야속하게
잠은 또 먼 곳에서 헤맨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갈 수 없는
깊은 그 꿈나라는 오늘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벌을 주려거든
차라리 다른 벌을 주지
전생에 아무래도 잠 때문에 진 빚이 많은 게다.
책을 펼쳐들어도 약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건 더욱 독이다.
밤이 낮인 양 개구리소리만 어둠 속에 신이 났다.
나는 언제쯤 잠과 한 몸이 될 수 있을지?
이젠 지쳐서 내가 잠을 버리고 싶다.
☆★☆★☆★☆★☆★☆★☆★☆★☆★☆★☆★☆★
《53》

죗값

선미숙

전생의 업을 다 씻지 못해
돈 번 사람 돈으로 갚고
힘센 사람 힘으로 갚아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니
눈물로나 갚아야지

☆★☆★☆★☆★☆★☆★☆★☆★☆★☆★☆★☆★
《54》

책을 읽다가

선미숙

마음 밖에 마음이 있으니
어찌할까나
내 맘을 마음대로 못하니
마음이 짐이어라.
☆★☆★☆★☆★☆★☆★☆★☆★☆★☆★☆★☆★
《55》

그도 그럴 것이

선미숙

네가 나를 알면 얼마나 알 것이며
내가 나를 알면 또 얼마나 알 것인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너도 너를 잘 모르는데

눈에 들어오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이 더 많고
귀에 들리는 게 참이 아닌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는

한발 짝 뒤로 물러서 너를 보고
한 걸음 멈춰서 내 마음을 본다.

세상 눈으로 나를 봐도 바보요
내가나를 생각해도 참말 바보라

방황하는 나그네의 떠도는 마음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그 때부터이니

사랑해서 미안하고
마음 쏟아 부어 미안한

맑은 물 고일 때까지 마음 모두 비우고
처음 내 모습 찾아 떠나가리.
☆★☆★☆★☆★☆★☆★☆★☆★☆★☆★☆★☆★
새벽연서

선미숙

설픈 새벽에 눈이 떠지면
가장 먼저 스치는 얼굴 있습니다.

만질 수는 없지만
가질 수는 없지만
그냥 뭔가 설레는 느낌!

가랑비에 옷 젖 듯
알게 모르게 젖어든 마음
사랑은 그렇게 쌓이나 봅니다.

어느 날 당신이 내 곁을 떠나면
사랑할 때 앓는 가슴보다
아주 많이 더 아프겠지요.

언젠가 그날이 온데도
오늘은 지금 내 맘만 볼래요.
온 세상에 당신과 나 둘만 있는 듯!
☆★☆★☆★☆★☆★☆★☆★☆★☆★☆★☆★☆★
《59》
언제까지나

선미숙

하늘이 흐려 빛이 없으면
나를 바라보는
임의 마음을 빛 삼아 살면 되지요.

짙은 안개 속에 길이 보이지 않으면
나를 부르는
임의 목소리 따라 가면 되지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만나면
나를 붙잡고 있는
임의 손끝 놓지 않으면 되지요.

거친 물보라가 앞을 막으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임의 믿음 생각하면 되지요.
☆★☆★☆★☆★☆★☆★☆★☆★☆★☆★☆★☆★
《61》
작은 행복

선미숙


다정한 목소리 자주 들으니
이렇게 좋네요.

눈빛 바라보며 얘기하니
참 좋네요.

함께 숨 쉴 수 있어
더 없이 좋네요.

나를 지켜주는 사랑이 어딘가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순 없네요.

고맙습니다.
사랑아!
☆★☆★☆★☆★☆★☆★☆★☆★☆★☆★☆★☆★
《62》

천수만 새벽편지

선미숙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달려갑니다.
오늘은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4,000일이 넘도록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곳!
같은 시간, 같은 자리.

같지 않은 게 있다면
떠오르는 해를 어제와 다른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조금은 차 오른 내 맘과
깃털 색이 어미와 닮아 가는 큰고니 새끼들!
머지않아 남쪽에서 순한 바람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그 바람에 밀려 고향으로 돌아갈 겨울 철새들.

오고 가는 게 어디 철새뿐이리
이 마음에 잠시 머물던 그 맘도
그 마음에 잠시 머물던 이맘도
또 다른 아픔과 기쁨 되어 오고 가는 것을!
내일을 알 수 없으니 약속은 못해요.
나는 날마다 오늘이 끝입니다.
☆★☆★☆★☆★☆★☆★☆★☆★☆★☆★☆★☆★
《63》

천수만에서

선미숙

너른 들판은
따스하게 나를 안아준 임의 가슴이고

조용하게 자리한 도비산은
말없이 지켜봐 주는 임의 눈빛이고

간월호수는
아픔을 품어준 임의 마음이고

해미천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해준 임의 사랑이여라.
☆★☆★☆★☆★☆★☆★☆★☆★☆★☆★☆★☆★
《64》

고백

선미숙

어떤 이는 말하지요
나이 오십이 넘으면 닳고 닳아
만만치 않다고!

부대끼며 살아온 세월이 반백을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한데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게 많은 건
좀 더 겪어야할 아픔이 남았다는 뜻일까요?

가슴에 품은 게
세상을 보는 원망보다는
모자라는 나를 탓할 수 있는 건
나이가 주는 가르침인가 봅니다.

죽을 만큼 아플 때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모두 부질없다 싶다가도
문득
이대로 죽으면 많이 억울해서
한 번쯤 목숨과 바꿔도 좋을 사랑을 꿈꾸는
그런 바보랍니다.
☆★☆★☆★☆★☆★☆★☆★☆★☆★☆★☆★☆★
《65》


첫눈 나리는 날

선미숙

듣고 있는 듯
보고 있는 듯
나려옵니다.
쓸쓸한 내 품으로
하얀 웃음 되어 나립니다.

듣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오늘도 하늘을 봅니다.

오매불망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이송이 그리움으로
하얗게 나립니다.

☆★☆★☆★☆★☆★☆★☆★☆★☆★☆★☆★☆★
《66》

청소를 하며

선미숙

속으로 앓던
인연 한 자락
툴툴
털어 버리니
이렇게 편한 것을
이렇게 가벼운 것을

켜켜이 쌓였던
미움 한 자락
싹싹
닦아내고 나니
이렇게 환한 것을
이렇게 개운한 것을
☆★☆★☆★☆★☆★☆★☆★☆★☆★☆★☆★☆★
《67》

갱년기

선미숙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들쭉날쭉 한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나는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아 왔나
이 나이 먹도록 이뤄놓은 건 뭔가
허망하다.
사랑도 명예도 다 부질없다.
그냥 팍 죽어버릴까

하다가도

그래, 난 할 수 있어
내가 누군데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
나보다 못한 사람도 많은데 뭐!
괜찮아 누구나 겪는 일이야

공평한 선물을 받았는데
마음이 울다가 웃다가 하루가 간다.
☆★☆★☆★☆★☆★☆★☆★☆★☆★☆★☆★☆★
《68》
하얀 어둠

선미숙

짙은 안개 속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기다려도 하늘은 보이지 않고 세상이 온통 하얗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하나?
이 하얀 어둠은 언제쯤 걷히려나?
더듬고 더듬어 걸어 온 길
이 길이 맞길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
마음의 눈을 뜨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보이겠지
멀지 않은 날에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기를……

☆★☆★☆★☆★☆★☆★☆★☆★☆★☆★☆★☆★
《69》

바램

선미숙

스치는 인연이든
숙명의 필연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우리가 만났다는 거
그 하나면 되지요.
몇 번을 만났는지 손가락을 꼽지 않아도
그곳과 이곳에
해가 지고 달이 뜬 게 몇 번인가요.
눈을 자주 마주쳐야 정이 드는 사람도 있고
목소리로 애틋함이 쌓이는 이들도 있어,
몇 줄 마음 적어 보내면
이 마음이 그 마음인 듯
알게 모르게 쌓이는 사랑도 있지요.
떨어져 있는 거리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마음이 서로 닿으면 되는 것을!
두 눈 감을 때 가장 고맙게 생각나는 사람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
《70》
우리 모두

선미숙

사랑 한 다발
웃음 두 다발
믿음 세 다발

용서 한 사발
이해 두 사발
칭찬 세 사발

존경 한 수레
배려 두 수레
격려 세 수레
☆★☆★☆★☆★☆★☆★☆★☆★☆★☆★☆★☆★


선미숙시인

프로필(profile)

1965년 서울 출생
1997년 동인시선 자화상 발행
한국 사진작가협회 정회원
선미숙 갤러리 Daum 블로그
http://blog.daum.net/pege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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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시 모음 37편

《1》가을 당신에게

박두진

내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속도와 거리는,
당신이 내게로 오시는 거리와 속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이 시대의 붉은 피를 씻을 수 있는 푸른 강물,
그 강물까지 가는 길목 낙엽 위에 앉아 계신,
홀로이신 당신 앞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별에까지 들리고, 달에까지 들리고, 가슴속이 핑핑 도는 혼자만의 울음,
침묵보다 더 깊은 눈물 듣고 계시는,
홀로 만의 당신 앞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2》갈대

박두진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하고
언어는 이슬 방울,
사상은 계절풍,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 흘림,
영원 -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 갈긴 칼에
선혈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하면
갈대는
고독

《3》겨울 나무 너

박두진


카랑카랑 강추위

빈 들에 혼자 서서
혼자서 너는 떨고 있다.

몸뚱어리 가지 온통, 오들오들 떨고 있다.

파아랗게 얼은 하늘
서리 엉긴 이마,

마지막 한 잎까지 훌훌 떨린 채
알몸으로 발돋움해
손을 젓고 있다.

영에 얼사 부둥켰던
우리들의 영원,
활활 달턴 뜨거움,

해의 나라 달의 나라별의 나라 모두
불러보는 이름들의
듣고 싶은 음성,

벌에 혼자 너만 서서
울음 울고 있다.

《4》꽃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5》꽃과 항구(港口)

박두진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닷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구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구나.

《6》꽃사슴

박두진

꽃이김에 모가지가
난만해져 있었다.

피 뻗혀
서른 울음.

간만에 極光(극광) 하나
피고 있었다.

넋이는 고운
칠색.

金剛(금강)에,
金剛에,

푸른 물이 눈동자를
씻고 있었다.

입 한번 다물으면
영원한 침묵.

두 뿔은 먼
星座(성좌)에 걸어 놓고,

네 굽,
네 굽,

까만 굽이 山줄기를
뛰고 있었다.

白樺(백화) 하얀
山崍(산내).

방울방울 땅에 젖어
꽃피 淋?(임리) 떨구며,

골골을 못 잊어워
울어예는 사슴.

한밤에,
한밤에,

모가지가 꽃에 척척
이겨지고 있었다.

《7》너는

박두진

눈물이 글성대면,
너는 물에 씻긴 흰 달.
달처럼 화안하게
내 앞에 떠서 오고,

마주 오며 웃음지면,
너는 아침 뜰 모란꽃,
모란처럼 활짝 펴
내게로 다가오고,

바닷가에 나가면,
너는 싸포오
푸를 듯이 맑은 눈 퍼져 내린 머리털
알 빛같이 흰 몸이 나를 부르고,
달아나며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푸른 숲을 걸으면,
너는 하얀 깃 비둘기.
구구구 내 가슴에 파고들어 안긴다.
아가처럼 볼을 묻고 구구 안긴다.

《8》당신 사랑 앞에

박두진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 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라까 라보니여

《9》도 봉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10》魔法(마법)의 새

박두진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속 갈피갈피를
포릉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하며 끼들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 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 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흐르는 창녀이다가
한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11》묘지송

박두진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수가 빛나리
향그런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12》默示錄(묵시록)

박두진

나의 사랑하는 이의 꿈이어 거기에 있거라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하늘언덕의 노을자락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하늘꽃의 꽃언덕
그 무지개로도 햇볕살로도 바람결로도
이슬방울로도 하늘 푸르름으로도
짜낼 수 없는 깁,
그 맞닿아야 할 가슴과 가슴의 따스함
입술과 입술의 보드라움
눈과 눈의 깊음
살과 살의 향기로움이 내려 엉긴
아, 어디까지 가도 그 멀음 끝이 없고
언제까지 언제까지 가도 그 오램 끝이 없는
너와 나 닿고자 하는 언덕의 사랑이어
이루어지고 싶은 그 꿈의 꼭대기

자리잡고자 하는 사랑의 알칡이어 거기 있거라.

《13》바다가 바라 뵈는 언덕의 풀밭

박두진

벗꽃이 조금씩 제절로 흩날리는
바다가 바라 뵈는 언덕
풀 밭에 잠자는 꽃에 물든 바람이어.
아직은 땅 속에 잠자는 폭풍이어.
그, 비둘기는 깃쭉지, 작은 羊은 목 줄기에서
지금은 죽음,
소년과 아낙네와 젊은이의 피 뿌림의
꽃잎보다 더 고운 따스한 피의 소리.
그 위에 무성하는
풀뿌리 밑의 울음소리. 가늘은 넋의 소리.
간간한 사투리소리.
그 풀 언덕 바다가 바라 뵈는
조금씩 흩날리는 꽃이 흩는 풀밭 속에
지금은 죽음,
손으로 눈을 가린
봄. 햇살.
날아 올라보고 싶은 비둘기여.
뛰엄뛰고 싶은 羊들이어.
살고 싶은 소년이어.
울어보고 싶은 아낙네여.
말 해 보고 싶은 젊은이여.

《14》별

박두진

아아 아득히 내 첩첩한 산길 왔더니라. 인기척 끊이
고 새도 짐승도 있지 않은 한낮 그 화안한 골길을 다
만 아득히 나는 머언 생각에 잠기여 왔더이라

백엽 앙상한 사이를 바람에 백엽 같이 불리우며 물
소리에 흰 돌 되어 씻기 우며 나는 총총히 외롬도
잊고 왔더니라


살다가 오래여 삭은 장목들 흰 팔 벌이고 서 있고 풍
운에 깍이어 날선 봉우리 훌훌훌 창천에 흰 구름 날
리며 섰더니라

쏴아 - 한종일내 - 쉬지 않고 부는 물소리 안은 바람
소리 ... 구월 고운 낙엽은 날리여 푸른 담 위에
흐르르르 낙화 같이 지더니라.


어젯밤 잠자던 동해안 어촌 그 검푸른 밤하늘에 나
는 장엄히 뿌리어진 허다한 바다의별드르이 보았느니.

이제 나의 이 오늘밤 산장에도 얼어붙는 바람 속
우러르는 나의 하늘에 별들은 쓸리며 다시 꽃과 같이
난만하여라.

《15》별 밭에 누워

박두진

바람에 쓸려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일지 서러움일지 분간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16》사랑이 나무로 자라

박두진


바다로 돌담을 넘어
장미가 절망한다
이대로 밤이 열리면
떠내려가야 할 끝
그 먼 마지막 언덕에 닿으면
꽃 등을 하나 켜마.

밤별이 총총히 내려
쉬다 날아간
풀 향기 짙게 서린
바닷가 언덕
금빛 그 아침의 노래에
하늘로 귀 쭝기는
자유의 전설이 주렁져 열린 나무 아래
앉아 쉬거라.

사랑이 죽음을
죽음이 사랑을 잠재우는
얼굴은 꿈, 심장은 노래
영혼은 기도록 가득 찬
또 하나 바벨탑을 우리는 쌓자.

파도가 절벽을 향해
깃발로 손짓하고
사랑이 나무로 자라
별마다 은빛 노래를 달 때
그 커다란 나무에 올라
비로소 장미로 지붕 덮는
다시는 우리 무너지지 않을
눈부신 집을 짓자.

《17》山脈(산맥)을 간다

박두진

얼룽진 산맥들은 짐승들의 등빠디
피를 품듯 치달리어 산등성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 빛 잇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咆哮(포효)는 절규. 포효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

가슴을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독을 바른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가슴에는 자라나는 애기해가하나
나긋나긋 새로 크는 애기해가 한 덩이.

미친듯 밀려 오는 먼 바다의
울부짖는 파도들에 귀를 씻으며,

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18》새벽바람에

박두진

칼날 선 서릿발 짙 푸른 새벽,
상기도 휘감긴 어둠은 있어,

하늘을 보며, 별들을 보며,
내여젓는 내여젓는 백화(白樺)의 손길.

저 마다 몸에 지닌 아픈 상처에,
헐덕이는 헐덕이는 산길은 멀어

봉우리엘 올라서면 바다가 보히리라.
찬란히 트이는 아침이사 오리라.

가시밭 돌사닥 찔리는 길에,
골마다 울어예는 굶주린 짐승

서로 잡은 따사한 손이 갈려도,
벗이여! 우린 서로 불르며 가자.

서로 갈려올라 가도 봉우린 하나.
피 흘린 자욱마단 꽃이 피리라.

《19》서한체

박두진

노래해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다오.
저 밤하늘 높디높은 별들보다 더 아득하게
햇덩어리 펄펄 끓는 햇덩어리보다 더 뜨겁게,
일어서고 주저앉고 뒤집히고 기어오르고
밀고 가고 밀고 오는 바다
파도보다도 더 설레게 노래해다오.
노래해다오. 꽃잎보다 바람결보다 빛살보다 더 가볍게,
이슬방울 눈물방울 수정알보다 더 맑디맑게 노래해다오.
너와 나의 넋과 넋, 살과 살의 하나됨보다 더 울렁거리게,
그렇게보다 더 황홀하게 노래해다오
환희 절정 오싹하게 노래해다오.
영원 영원의 모두, 끝과 시작의 모두, 절정 거기 절정의 절정을 노래해다오.
바닥의 바닥 심연의 심연을 노래해다오.

《20》소

박두진

푸른 하늘인들 한 줄기 선혈을 안 흘리랴?
의지의 두 뿔이 분노로 치받을 때

태산인들 딩굴으며 무너지지 않으랴?
전신이 노도처럼 맞받아 부딪칠 때

오늘 한 가락 고삐에 나를 맡겨
어린 소녀의 이끌음에도 순순히 따라 감은

불거진 멍에에 山 같은 짐을 끌고
수렁에 철벅거려 종일을 논 갈음은

네굽 놓아 내달리는 벌판의 자유
찌르는 뿔의 승리를 모르는 바 아니라

오늘은 오오래인 오늘은 다만 참음
언젠가는 다시 벅찰 크낙한 날을 위하여

눈 스르르 감고 새김질하는 꿈 한나절
먼 조상 포효하던 산악을 명상하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절렁대는 요령에
대지 먼 외줄기길 千里를 잰다.


《21》시인 공화국

박두진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한
어쩌면
아무래도 이 세상엔 잘못 온 것 같은
외따로운 학처럼 외따로운 사슴처럼
시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실로
사자처럼 방만하고 양처럼 겸허한
커다란 걸 마음하며 적은 것에 주저하고
이글이글
분화처럼 끓으면서 호수처럼 잠잠한
서슬이 시퍼렇게 서리어린 비수,
비수처럼 차면서도 꽃잎처럼 보드라운
우뢰를 간직하며 풀잎처럼 때로 떠는,
시인은 그러면서
오롯하고 당당한
미를 잡은 사제처럼 미의 구도자,
사랑과 아름다움 자유와 평화와의
영원한 성취에의 타오르는 갈모자,
그것들을 위해서 눈물로 흐느끼는
그것들을 위해서 피와 땀을 짜내는
또 그것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패배하고 추방되어 가는
아 현실 일체의 구속에서
날아나며 날아나며 자유하고자 하는
시인은
영원한 한 부족의 아나키스트들이다.


가난하나 다정하고
외로우나 자랑에 찬
시인들이 모인 나란 시의 공화국
아 달처럼 동그란
공화국의 시인들은 녹색 모잘 쓰자.
초록빛에 빨간 꼭지
시인들이 모여 쓰는 시인들의 모자에는
새털처럼 아름다운 빨간 꼭질 달자.
그리고 , 또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얼마든지 휘날리면 하늘이 와 펄럭이는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그렇다 비둘기,.......
너도 나도 가슴에선 하얀 비둘기
푸륵 푸륵 가슴에선 비둘기를 날리자.
꾸륵 , 구 , 구 , 구 , 꾸륵!
너도 나도 어깨 위엔 비둘기를 앉히자.
힘있게 따뜻하게,
어깨들을 겯고 가면 풍겨오는 꽃바람결,

우리들이 부른 노랜 스러지지 않는다.
시인들의 공화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눈물과 외로움과 사랑으로 얽혀진
희생과 기도와 동경으로 갈리어진
시인들의 나라는 따뜻하고 밝다.

시인이자 농부가 농사를 한다.
시인이자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
시인이자 직조공이 직조를 한다.
시인이자 공업가가 공업을 맡고,
시인이자 원정, 시인이자 목축가, 시인이자 어부들이,
고기 잡고 마소 치고, 꽃도 심고, 길도 닦고,
시인이자 음악가, 시인이자 화가들이,
조각가들이,
시인들이 모여 사는 시의 나라 살림을,
무엇이고 서로 맡고 서로 도와 한다.

시인들과 같이 사는,
시인들의 아가씨는 눈이 맑은 아가씨,
시인들의 아가씨도 시인이 된다.
시인들의 손자들도 시인이 된다.
아, 아름답고 부지런한
대대로의 자손들은
공화국의 시민,
시인들의 공화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눈물과 고독, 쓰라림과 아픔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아는,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억누름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착취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도둑질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횡령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증수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미워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시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위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배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아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모가 없다.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피흘림과 살인,
시인들의 나라에는 학살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강제수용소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공포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집없는 아이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굶주림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헐벗음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거짓말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란이 없다.
그리하여 아, 절대의 평화, 절대의 평등,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사랑.
사랑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이웃들을 받드는,
시인들의 나라는 시인들의 비원
오랜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어쩌면,
이 세상엘 시인들은 잘 못내려 온 것일까?
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
아무데도 이 땅위엔 시인들의 나라일 곳이 없다.
눈물과 고독과 쓰라림과 아픔,
사랑과 번민과 기다림과 기도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아는,
시인들의 이룩하는 시인 공화국,
이 땅위는 어디나 시인들의 나라이어야 한다

《22》아버지

박두진

철죽 꽃이 필 때면,
철죽 꽃이 화안하게 피어 날 때면,
더욱 못견디게
아버지가 생각난다.

칠순이 넘으셔도 老松처럼 정정하여,
철죽꽃이 피는 철에 철죽 꽃을 보시려,
아들을 앞세우고
冠岳山,
서슬진 돌 바위를 올라 가셔서,
철죽 나물 캐어다가
뜰 앞에 심으시고
철죽 꽃이 피는 것을 즐기셨기에,
철죽 나물 캐어 드신
흰 수염 아버지가
어제같이 산탈길을 걸어 내려오시기에,

철죽 꽃이 피는 때면,
철죽 꽃과 아버지가
한꺼번에 어린다.

물에 젖은 둥근 달
달이 솟아오르면,
흰옷을 입으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달 있는 川邊길을
늦게 돌아오노라면
두진이냐 ?
저만치서 커다랗게 불러 주시던
하얗게 입으셨던 어릴 때의 아버지

四月은 가신 달,
아아, 철죽 꽃도 흰 달도
솟아 있는데,
손수 캐다 심어 놓신
철죽 꽃은 피는데,

어디 가셨나
큰기침을 하시며,
흰옷을 입으시고
어디 가셨나.

《23》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례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설운 가락도 너는 못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여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나던,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어서, 철이야, 너는 늴 늴 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 보자.


《24》오도(午禱)

박두진

백(百) 천만(千萬) 만만(萬萬) 억(億)겹
찬란한 빛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압도(壓倒)하여 주십시요.

이리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 쨍, 영겁(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광야(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全) 영(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차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요.
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요.
핏방울이 더욱도 곱게 하여 주십시요.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상처(傷處)마다 만져 주시고,
기진한 숨을 다시
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주(主).
당신은 나의 생명(生命)
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
벌레 같은 이,
나 하나 끓은 것을 아셨습니까.
뙤약볕에 기진(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25》저 고독

박두진

당신을 언제나 우러러 뵈옵지만
당신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음성에 접하지만
당신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에 계셨다가
너무너무 어떤 때는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고 할 때
나는 나를 더욱 알 수 없고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실 때
비로소 조금은 나를 압니다.
이 세상 모두가 참으로 당신의 것
당신이 계실 때만 비로소 뜻이 있고
내가 나일 때는 뜻이 없음은
당신이 당신이신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만 나를 찾고
나에게서 당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당신 때문에 사실은 울고
나 때문에 당신이 우시는 것을 압니다.
천지에 나만 남아 나 혼자임을 알 때
그때 나는 나의 나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도 나는 나를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26》절벽가(絶壁歌)

박두진

절벽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별들이네.
별들이 아니라 서서 우는 절벽들이네.

별들이 별들 위에
절벽이 절벽 위에 있네.

절벽이 절벽 아래에도 있네.
절벽이 절벽 앞에, 절벽 뒤에,
절벽이 절벽 안에도 있네

절벽은 절벽끼리 손을 서로 닿지 않네.
절벽은 절벽끼리 말을 서로 할 수 없네.

절벽이 절벽끼리 눈을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귀를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입을 서로 막네.

절벽들의 햇불을 절벽들이 못 보네.
절벽들의 절규를 절벽들이 못 듣네.

절벽은 스스로
사랑의 뜨거움을 말하지 않네.
절벽은 그 외로움
절벽은 그 분노
절벽은 그 내일에의 절망을 말하지 않네.

절벽의 가슴속엔 쏟아지는 별의 사태,
절벽들의 가슴속엔 피와 꿈의 비바람,
절벽들의 가슴속엔 펄펄 꽃이 지네.

어디에나 홀로 서서 절벽들이 우네.

《27》精(정)

박두진

그때 처음 열리던 하늘의 응결된
푸른 정기 처음 숲의 초록 바람
처음 바다 처음 강의 파도 소리 여울 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태양의 금빛 촉감
처음 타오르던 지열
처음 만발한 꽃들의 향기,
처음 울음 울던 맹수들의 포효
처음 지저귀던 새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헤엄치던 물고기의 비늘무늬
처음 걸리던 하늘의 무지개
처음 밤의 별빛 달빛, 그때
처음 사람들의 입맞춤의 첫대임
첫번째 황홀의 울음 울던 부끄러움
처음 타오르던 노을빛 네게서 어린다.

그때 처음 사람들의 첫 낱말
처음의 오해 처음의 노여움
처음 사람의 첫 증오 피흘림
처음 만나는 죽음의 두려움과 서러움
네게서 보인다.

너는 지금 나의 창가 오월
바람이 뜰의 그 신록의 잎새 사이 먼
천산 산맥의 청청한 햇살에 젖어
불어와 서성대는 책상에
그러나 의젓이 그러나 잠잠하게 볕살 속에 앉아있다.

《28》天台山 上臺(천태산 상대)

박두진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하도 홀로 어느 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29》청산도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30》칠월의 편지

박두진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사자(獅子) 새끼 냄새가 난다.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장미(薔薇)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草原)을 달리며
심장(心臟)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 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칠월(七月)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海岸線)의
조국(祖國)의 포옹(抱擁).

칠월(七月)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祝祭)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 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31》토루소

박두진

지금은 멀디멀은
볕살의 나라에서 온 아가씨여
나의 앞에서 너는
자꾸만 날개돋쳐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그만큼의 공간에서 나는
나혼자 할 수 없이
땅으로 땅으로 가라앉네

너의 예쁘디예쁜
영혼의 날개의
화사한 무지개에 매달리는
내 영혼의 둘레 가의
알 수 없는 이 슬픔

그 볕살의 나라
볕살의 궁전에서 내려온
곱디고운 영혼의 너의 뜨거움
꿈의 뜨거움
숨결의 그 뜨거움의
순수 인력은

견디다 못해서 전율하는
나의 열기
영혼의 날갯짓의 절망 속의 황홀로
마지막 부딪치는
돌격 앞에서도

너는 그 너의 영혼
몸뚱어리 예쁜 가슴 옹송그리며
멀디먼 볕살 속의
볕살의 나라
무지개 속 훨훨 숨어
달아나버리네

지금은 나의 앞에
말도 없이 있는
그러면 언제일까 언제쯤일까
아가씨여

그 별이 되어 꽃이 되어
이슬이 되어 폭발하는
폭발하는 너와 나의
영원한 순수
하나로의 영원은 언제 쯤을까
아가씨여.

《32》푸른 하늘 아래

박두진

내게로 오너라.
어서 너는 내게로 오너라.
불이 났다.
그리운 집들이 타고,
푸른 동산, 난만한 꽃밭이 타고,
이웃들은, 이웃들은, 다 쫓기어 울며 울며 흩어졌다.
아무도 없다.
이리들이 으르댄다.
양떼가 무찔린다.
이리들이 으르대며, 이리가 이리로 더뷸어 싸운다.
살점들을 물어 뗀다.
피가 흐른다.
서로 죽이며 자꾸 서로 죽는다.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싸우다가,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멸하리라.
처참한 밤이다.
그러나 하늘엔 별
별들이 남아 있다.
날마다 아직은 해도 돋는다.
어서 오너라.……
황폐한 땅을 새로 파 이루고,
너는 나와 씨앗을 뿌리자.
다시 푸른 산을 이루자.
붉은 꽃밭을 이루자.
정정한 푸른 장생목도 심그고,
한철 났다 스러지는 일년초도 심그자.
잣나무, 오얏, 복숭아도 심그고, 들장미, 석죽, 산국화도 심그자,
싹이 나서 자라면, 이어, 붉은 꽃들이 피리니……
새로 푸른 동산에 금빛 새가 날아오고,
붉은 꽃밭에 나비 꿀벌떼가 날아 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섧게 흩어졌던 이웃들이 돌아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푸른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난만한 꽃밭에서,
꽃밭에서, 너는, 나와, 마주, 춤을 추며 즐기자.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자.
울며 즐기자.……
어서 오너라.……

《33》피닉스

박두진

햇볕에 반짝이는 먼지
바닷가 자잘한 모래알속에서도,
아직은 숨어있는 흙 속의
풀뿌리
골짜기에 딩구는 희디하얀 백골 속에서도
일어날 것이라 한다.

언제나 불안한 저들의 눈동자
피묻은 옷자락
저절로 떨리는
머리카락 속에서도,

더럽게 엉기는 저들의 피톨
썩은 양심

죄의 손
거짓과 횡포와 살인을 기만하는
혓바닥 속에서도,

따습고 맑디맑고 혁혁한 눈의 영원
불멸의 의의 부리
관용의 앞가슴
사랑의 뜨건 심장
죽일수록 살아나는 푸른 자유로
날개여,

어디나의 바람
어디나의 암흑
어디나의 죽음에서 푸득푸득 날개쳐
영원 다시 불멸의 넋
일어날 것이라 한다.

《34》하늘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35》항아리

박두진

길어 내리는, 길어 내리는,
하늘 가득 먼 푸름 항아리배여.
입술 갓을 빨고 가는
따스한 햇볕,
알맞은 보픈 배의
자랑스러움이어.
오랜 날 타 내려온 그리움에 익은
가슴 닿는 꽃익임의 향그러운 젖 흐름
아, 아기 낳자. 아기 낳자.
하늘 배임이어.
길어 안은 하늘 속의
햇덩어리여.

《36》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빛이 싫여 달빛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빛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휠훨휠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위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37》향현(香峴)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어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깔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사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리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
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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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 모음 17편

1.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을
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2. 교목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셔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어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내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속 깊이 거꾸러저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3. 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約束)이며!

한 바다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4.남한산성

이육사

넌 제왕(帝王)에 길들인 교룡(蛟龍)
화석(化石) 되는 마음에 이끼가 끼어

승천하는 꿈을 길러 준 열수(洌水)
목이 째지라 울어예 가도

저녁 놀빛을 걷어 올리고
어디 비바람 있음직도 않아라.

5.노정기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여진 배쪼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것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프러 올랐다.

항상 흐렸한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쌋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즌 소라 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드려다보며

6.말

이육사

흐트러진 갈기
후줄근한 눈
밤송이 같은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찍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목통
축 처―진 꼬리
서리에 번쩍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헤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흰말이여!

7.바다의 마음

이육사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
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
여기 바다의 은총(恩寵)이 잠자고잇다.

흰 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
바다는 하늘을 간질여 본다.
여기 바다의 아량(雅量)이 간직여 있다.

낡은 그물은 바다를 얽고
바다는 대륙(大陸)을 푸른 보로 싼다.
여기 바다의 음모(陰謀)가 서리어 있다

8.반묘(班猫)

이육사

어느 사막의 나라 유폐된 후궁(后宮)의 넋이기에
몸과 마음도 아롱져 근심스러워라

칠색(七色) 바다를 건너서 와도 그냥 눈동자에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않뇨.

사람의 품에 깃들면 등을 굽히는 짓새
산맥을 느낄사록 끝없이 게을러라.

그 적은 포효는 어느 조선(祖先) 때 유전이길래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로우리라.

그보다 뜰 아래 흰나비 나즉이 날아올 땐
한낮의 태양과 튤립 한 송이 지킴직하고

9.산

이육사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드려 오고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10.소년에게

이육사

차디찬 아침이슬
진주가 빛나는 못가
연(蓮)꽃 하나 다복히 피고

소년(少年)아 네가 낳다니
맑은 넋에 깃드려
박꽃처럼 자랐세라

큰강(江) 목놓아 흘러
여을은 흰 돌쪽마다
소리 석양(夕陽)을 새기고

너는 준마(駿馬) 달리며
죽도(竹刀) 져 곧은 기운을
목숨같이 사랑했거늘

거리를 쫓아 단여도
분수(噴水)있는 풍경(風景)속에
동상답게 서봐도 좋다

서풍(西風) 뺨을 스치고
하늘 한가 구름 뜨는곳
희고 푸른 지음을 노래하며

그래 가락은 흔들리고
별들 춥다 얼어붙고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

11.잃어진 고향

이육사

제비야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 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12.자야곡

이육사

수만호 빛이래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나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최소리

숨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듸찬 강맘에 드리느라

수만호 빛이랴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13.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그러매 눈감고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4.청포도

이육사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음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닷가 가슴을 열고
靑袍(청포)를 입고 찾아온다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며
두 손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5.파초

이육사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추겨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즈막 날엔
기약(期約)없이 흩어진 두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女人)들의 잡아 못논 소매끝엔
고은 손금조차 아즉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때마다
잊었던 계절(季節)을 몇번 눈우에 그렷느뇨

차라리 천년(千年)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비ㅅ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여지세

16.편복

이육사

광명을 배반한 아득한 동굴에서
다 썩은 들보라 무너진 성채 위 너 홀로 돌아다니는
가엾은 박쥐여! 어둠의 왕자여!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자집 곳간으로 도망했고
대붕도 북해로 날아간 지 이미 오래거늘
검은 세기의 상장이 갈가리 찢어질 긴 동안
비둘기 같은 사랑을 한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가엾은 박쥐여! 고독한 유령이여!

앵무와 함께 종알대여 보지도 못하고
딱따구리처럼 고목을 쪼아 울리지도 못하거니
마노보다 노란 눈깔은 유전을 원망한들 무엇하랴

서러운 주문일사 못 외일 고민의 이빨을 갈며
종족과 홰를 잃어도 갈곳조차 없는
가엾은 박쥐여! 영원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제 정열에 못 이겨 타서 죽은 불사조는 아닐 망정
공산 잠긴 달에 울어 새는 두견새 흘리는 피는
그래도 사람의 심금을 흔들어 눈물을 짜내지 않는가!

날카로운 발톱이 암사슴의 연한 간을 노려도 봤을
너의 먼-선조의 영화롭든 한시절 역사도
이제는 아이누의 가계와도 같이 서러워라
가엾은 박쥐여! 멸망하는 겨레여!

운명의 제단에 가늘게 타는 향불마자 꺼졌거든
그 많은 새즘생에 빌붙일 애교라도 가졌단 말가?
상금조처럼 고운 뺨을 채롱에 팔지도 못하는 너는
한토막 꿈조차 못 꾸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거니
가엾은 박쥐여! 검은 화석의 요정이여!

17.황혼

이육사

내 골ㅅ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黃昏)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것이냐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鍾)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쎄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ㅅ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黃昏)아 내일(來日)도 또 저-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정정(情情)히 사라지긴 시내ㅅ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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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모음

 

★밀물  /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은는이가  /  정끝별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소금 인간   / 정끝별

​돌도 쌓이면 길이 되듯 모래도 다져지면 집이 되었다

발을 떼면 허공도 날개였다

사람도 찾아들면 소금이 되었고 돌이 되었다
울지 않으려는 이빨은 단단하다

태양에 무두질된 낙타 등에 얼굴을 묻고

까무룩 잠에 들면 밤하늘이 하얗게 길을 냈다

소금길이 은하수처럼 흘렀다 품었다

내보낸 길마다 칠할의 물이 빠져 나갔다

눈썹 뼈 밑이 비었다
모래 반 별 반, 저걸 매몰당한 슬픔이라 해야할까?

낙타도 사람도 한때 머물렀으나

바람의 부력을 견디지 못한것들의 백발이 생생하다
한철의 눈물도 고이면 썩기 마련,

한 번 깨진 과욕은 바닥이 마를 때까지 흘러나오기 마련,

내가 머문 이 한철을 누군가는 더 오래 머물 것이다

머문만큼 늙을 것이다
알몸으로 태어나 맨몸으로 소금산에 든 자여,

마지막 시야를 잃은 고요여, 머리를 깨뜨려라.

모래로 흩어지리니,
세상 절반을 품었던 두 팔, 없다.

가죽 신발 속 절여진 발, 흔적도 없다

★사랑의 병법   / 정끝별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하나로 꿰는 이치를 일관(一貫)이라 한다
한 점 두려움 없이 열매처럼 나를 주고 너를 받는 기미가 일격이고

흙 없이 뿌리 없듯 뿌리 없이 가지 잎새 없고

너 없이 나 없는 그 수미가 일관이라면
너를 관(觀)하여 나를 통(通)하는 한가락이 일격이고
나를 관(觀)하여 너를 통(通)하는 한마음이 일관이다
일격이 일관을 꽃피울 때
단숨이 솟고 바람이 부푼다
무인이 그렇고 애인이 그렇다
일생을 건 일순의 급소
너를 통과하는 외마디를 들은 것도 같다
단숨에 내리친 단 한 번의 사랑
나를 읽어버린 첫 포옹이 지나간 것도 같다
바람을 베낀 긴 침묵을 읽은 것도 같다
굳이 시의 병법이라 말하지 않겠다

★기나긴 그믐   / 정끝별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돌아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첫닭이 울 때까지 아침빛에 스러질 때까지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다시 차오를 때까지

★둥지새   / 정끝별

발 없는 새를 본 적 있니?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에 쉰다지 
낳자마자 날아서 딱 한번 떨어지는데 
바로 죽을 때라지 
먹이를 찾아 뻘밭을 쑤셔대본 적 없는 
주둥이 없는 새도 있다더군 
죽기 직전 배고픔을 보았다지 

하지만 몰라, 그게 아니었을지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날기만 했을지도 
뻘밭을 헤치기 너무 힘들어 굶기만 했을지도 

낳자마자 뻘밭을 쑤셔대는 둥지새 
날개가 있다는 걸 죽을 때야 안다지 
세상의, 발과 주둥이만 있는 새들 
날개 썩는 곳이 아마 多情의 둥지일지도 
못 본 것 많은데 나, 죽기 전 뭐가 보일까 

★사 랑   /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이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 정끝별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 

★현 위의 인생   / 정끝별

세 끼 밥벌이 고단할 때면 이봐 
수시로 늘어나는 현 조율이나 하자구 
우린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차피 한 악기에 정박한 두 현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줘 
세상과 화음할 수 없을 때 우리 
마주앉아 내공에 힘쓰자구 
내공이 깊을수록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지 
모든 현들은 
어미집 같은 한없는 구멍 속에서 
제 소리를 일군다지 
그 구멍 속에서 마음놓고 운다지 

★강진 편지   / 정끝별

버석이던 갈대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에 춘백(春栢)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꽃 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 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내 영혼에 일렁이던 햇살도 한통속들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 비껴 서있던 당신 겨드랑이와 내 겨드랑이가

이제야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그토록 망설임이었거늘 가슴에 서로를 묻는일이야

만장(輓章)처럼 당신쪽으로 누운 풀자국에

내내 가난할 것입니다

모란 냄새 선명한 하마 흔하디흔한 세상

봄밤으로 나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얼굴을 파묻다  / 정끝별

흐르는 것들에서는 묵은 쌀겨 냄새가 난다 
갓 담근 술항아리에서 포도알을 훔쳐 먹고 
얼굴을 파묻던 한마당의 쌀더미는 따뜻했다 
누렇게 좀먹던 스무 살 페루의 하늘도 
쏟아질 듯 무겁기만 하던 원산도 별밭도 
비어 있던 대성리 철둑길도 그늘 무성해 
소나기 퍼붓고 세상은 선뜻 변했다 
쌀벌레들은 다시 쌀더미에 향기로운 집을 짓고 
푸른 들판에 누워 한 백년쯤 자고 싶어, 
지친 男子는 잎도 지기 전 창백한 女子를 떠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서늘한 질투도 
이만큼 지나쳐서야 눈치채는 것인데 
이 늦은 저녁 쌀을 씻으며 
치댈수록 부예지는 쌀뜨물에 얼굴을 묻고 
다행이다, 쌀벌레 껍질처럼 
어제가 낙낙히 뜰 수 있다는 것은 
부박했던 노래가 떠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은 
촤르르 촤르르 말갛게 씻겨진 마음이 
잘 익은 밥 냄새를 피워올릴 수 있다는 것은 

★춘수(春瘦)  / 정끝별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입동  / 정끝별 

이리 홧홧한 감잎들 
이리 분분히 소심한 은행잎들 
이리 낮게 탄식하는 늙은 후박잎들 

불꽃처럼 바스라지는 
요 잎들 모아 
서리 든 마음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몸속부터 꼬숩겠지요 

★상강  / 정끝별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갈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엄으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추억의 다림질   / 정끝별

장롱 맨 아랫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콜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날개를 적시는 빗물과 같아, 

안주머니까지 뒤집어 솔질을 하면 
여기저기 실밥처럼 풀어지는 
여름, 그대는 앞주름 건너에 
겨울, 그대는 뒷주름 너머에 

기억할수록 날세워 빛나는 것들 
기억할수록 몸서리쳐 접히는 것들 
오랜 서랍을 뒤져 
얼룩진 미련마저 다리자면 

추억이여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리면 다릴수록 익숙히 접혀지는 
은폐된 사랑이여 

★블루 블루스  / 정끝별

땅 속 저 깊은 흙구덩이에서도 
검게 그을린 씨앗으로 남아 
여덟 개의 꽃잎을 만들어냈다는 
이천 년 만에 핀 젖빛 목련 

여래나 금륜왕이 올 때까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히말라야 산록의 우담화 
삼천 년 만에 피는 꽃 

얼음 토탄이 되어서도 
살아남았다는 기적의 씨앗 
푸른 등꽃을 닮은 알래스카 루핀 
일만 년 만에 핀 꽃 

그러나 
흙 속에서 얼음 속에서 
싹도 피워보지 못한 채 죽어간 
세상 모든 씨들 
마음 속에서 죽어간 
하 많은 기다림의 씨들 

★천생연분  / 정끝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오래된 장마  / 정끝별

새파란 마음에 
구멍이 뚫린다는 것 
잠기고 뒤집힌다는 것 
눈물 바다가 된다는 것 
둥둥 
뿌리 뽑힌다는 것 
사태지고 두절된다는 것 
물벼락 고기들이 창궐한다는 것 
어린 낙과들이 
바닥을 친다는 것 
때로 사랑에 가까워진다는 것 
울면, 쏟아질까? 

★물을 뜨는 손  / 정끝별

물만 보면 
담가 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다 새어나가는 것이라고 
무심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 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 정끝별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 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정끝별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 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 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 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가지에 걸린 공  / 정끝별

창공의 공터에 
동그랗게 입을 다물고 있는 
가출한 동안童顔 

누가 데려다 놓았을까 
백년 묵은 은행나무 가지 꼭대기에 
수은등과 나란히 걸려 있었어 

대낮의 아이들이 뻥이야 맘껏 차버린 
놀라워라 고 뻥 한번 따라 올라봤으면! 
차고 던지고 굴리고 튕기고 날리던 
공터의 찬 발들이 쏜살처럼 쏘아 올렸을 
오래된 뱃속의 허공 

그러나 너무 세게 차지는 마라 
공마다 가늠할 수 있는 속도와 높이는 다른 법 
가지 사이사이가 모두 삼천포다 

가지를 벗어날 수 없는 둥근 허기가 
안에서부터 제 거죽 몸을 먹어치우는 사이 
초겨울 까지 날아와 날카로운 부리로 
가지에 걸린 공을 가늠하고 간다 
제 집으로 들앉을 셈인가 

★어떤 자리  / 정끝별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 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 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났다 
신음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속 좋은 떡갈나무  / 정끝별

속 빈 떨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미라보는 어디 있는가  / 정끝별

미라보 
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 
옥탑방 벽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 
당신이었다가 
퐁네프의 연인들이 달리는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 
파리젠느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였다가 
벗은 다리를 감춰주던 침대시트였다가 
영등포동에 있는 웨딩타운이었다가 
당신 사는 상계동이나 대전의 아파트였다가 
엔티크한 삼인용 소파였다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보낸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미라보 
하면 세면대에서 놓쳐버린 은반지였다가 
간곡히 비어 있는 꽃병 속 그늘이었다 
꼭꼭 숨어사는 누군가의 ID였다가 
마른하늘에 살풋 걸리는 무지개였다가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미라보, 미라보는 얼마나 격렬한가 
이 얼마나 멸렬한가 

★공전(空轉)  / 정끝별

별들로 하여금 지구를 돌게 하는 
지구로 하여금 태양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문득, 별을 떨어지게 하는 
저 중력의 포만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나로 하여금 당신 곁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기어코, 나를 밀어내게 하는 
저 사랑의 포만 
허기가 궤도를 돌게 한다 

★그만 파라, 뱀 나온다  / 정끝별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 속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속을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 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 때나 속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미끼들에 속아 파고 또 파면 
속의 피를 보기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사납고 
제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모질다 

★바람을 기다리는 일  / 정끝별

찔레와 포플러와 길과 물과 함께 있던 
늘어진 버드나무 밑에 함께 기대앉던 
자운영과 골풀을 쓰러뜨리며 함께 눕던 
우포 물 언저리 빗방울로 맺히던 

물위에 초록 기둥을 세우고 
좀개구리밥꽃처럼 작은 방을 들이고 
소금쟁이 지나는 길목에 덜컥 꽃을 피우고 
개구리마저 튀어 오르는 물밑으로 열매를 맺고 

큰물이 흔쾌히 거두어갈 때까지 
빗방울이 화석이 될 때까지 
늪이 물이 될 때까지 
발목을 쥐고 있는 
물에 뜬 사랑 

눈이 머는 일 
마음이 먼저 먹히는 일 
먹먹한 물이 되는 일 
저 갯버들 가지에 치마를 걸어놓고 
오지 않는 바람을 기다리는 일 
고여 있으되 오래 썩지 않는 일 
여기 중독된 불멸 

★늦도록 꽃  / 정끝별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희 망  / 정끝별

구멍에 빠져 본 사람은 
구멍을 제 몸 속에 넣고 다닌다 
두 눈을 움푹 파헤치고 

구멍을 등에 지고 가는 
은빛 눈썹의 낙타야 
지친 너에게 구멍은 오아시스였니? 
배 한가운데 구멍을 안고 가는 
베두인의 여자야 
허기진 너에게 구멍은 집이었니? 

구멍에 빠질 때마다 
한 삽씩 네 눈에서 퍼냈던 
꽃 핀 모래가 
신기루 
그 허방이었니? 

★두 문 두 집  / 정끝별

네게 닿고 싶어 
서로를 보듬고 설 수 있는 짚단이 되고 싶어 
까칠한 배꼽 감출 수 있는 울타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선 문이 있어야, 
나그네처럼 
사막을 헤매던 모래집이 말했어 
그만 자고 싶어 
탯자리를 향해 행렬 짓는 
늙은 코끼리처럼 남아프리카 케냐 어디쯤 
페루의 새처럼 남아메리카 어디쯤 
하지만 우선 이 문을 버려야, 
진흙뻘처럼 
기다림에 지친 붙박이집이 말했어 

★날아라! 원더우먼  / 정끝별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외칠 때마다 
군살 없는 근육질 허리에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아 정글 속의 로맨스 
베트맨―, 슈퍼맨 맨― 외치면 
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무쇠 팔 무쇠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세일러문 요술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뒷심  / 정끝별

모든 그림자는 빛의 뒤편으로 무너진다는데 
모든 풀은 바람 뒤로 밀리고 바람 뒤로 눕는다는데 
모든 줄다리기는 뒤편을 향해 당겨진다는데 
모든 말은 침묵 뒤편으로 고인다는데 
모든 사람들은 뒤가 실해야 당당히 설 수 있다는데 
모든 사랑은 기다림 뒤편에서 완성된다는데 
모든 그림자에게 뒤는 내려앉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풀에게 뒤는 맞서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줄다리기에서 뒤는 버티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말에게 뒤는 숨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뒤는 돌아보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랑에게 뒤는 젖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앞에 대항하는 바로 그 심心 

★한 집 눈물  / 정끝별

집에 빠진 나 한 집 
생에 그늘이 될 만한 집 한 채는 있어야 해요 
집은 나 한 집 하기 나름인걸요 
도장에 미장 새시하고 조명 갈고 
버디칼 걸고 유리창까지 닦는다 
환해진 집에 황홀한 나 한 집 

집이 기침을 하면 나 한 집 약 먹는다 
집이 오줌누고 싶어하니 나 한 집 똥눈다 
집이 술잔을 들면 나 한 집 담배를 피워 문다 
집이 바지를 벗자 나 한 집 단추를 푼다 
집이 심심해하니 나 한 집 아이 낳아 준다 

집은 날로 의기양양 나 한 집 업신여기고 
나 한 집 더럽히고 나 한 집 깔아뭉개더니 
너 나가 너 나가 다 나가 나 한 집 내차네 
집을 ?i아다니느라 빚더미로 오른 나 한 집 
나 한 집 옹골차게 등쳐먹은 잔인한 집 
집에 내?i긴 가엾은 나 한 집씨 

★봄마늘  / 정끝별

욕설같이 불쑥 주먹같이 
흰마늘쪽이 꿈틀, 
매운 눈 비비며 
폭음처럼 질주하는 
숨가쁜 휘발성 
시퍼렇게 물오른 
상추 고추 사이 봄마늘 마늘고추장 
마늘 향기 하얀 남도 마늘꽃 
오 싱싱한 봄밤 
꽃이 아니어도 풀이 아니어도 
하르르 피워내는 
저 화냥기 좀 봐 
쉿! 쉿! 
당차게 뿜어대는 저 독기 좀 봐 
봄바다를 게릴라처럼 
상추 고추 사이 봄마늘 마늘고추장 
마늘향기 하얀 남도 마늘씨 

★졸참나무 숲에 살았네  / 정끝별

비가 내리었네 
온종일 오리처럼 앉아 숲 보네 
그렇게 허름했던 사랑의 이파리 
허물어진 졸참 가지에 
넘어지며 나는 가고 있네 
내 나이를 모르고 둥근 하늘 아래 
잎이 피네 짐처럼 피네 
잎이 지네 나도 흙먼지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무도 
꽃이 피리라 기약치 않으리 
숲 기슭에 오리처럼 앉아 있네 
비가 많이 내리네 

★한 주먹  / 정끝별

발레니나가 되겠다던 
화가가 되겠다던 
일곱 살배기 딸이 한 판 붙고 온 날 
한 주먹이 되겠다네 
세 놈을 한 방에 쓰러뜨린 수 있는 한 주먹 
여자애라고 얕잡아보지 않을 한 주먹 
한 주먹 키우겠다며 밤마다 

나도 한 주먹 있었으면 좋겠네 
한갓 시인이 되겠다는 
한낱 풍경 감식가나 되겠다는 
나를 갈고리에 걸고 내 마음을 파먹는 
떠들썩한 빈말들 한 방에 날려버릴 한 주먹 
한 주먹 키우겠다며 밤마다 

한, 주먹, 쥐었다 
한, 주먹, 폈다 

★밥 심  / 정끝별

돌고 돌다 
설설 
기고 기다 
급기야 
바닥에 박히는 
부동심법 

저 찰진 
호구의 
힘 

좆, 팽이 

★봄의 화단에서  / 정끝별

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바람에 휘청, 
넘어진 피와 멍이 너의 꽃이고 잎이었구나 
저 계단에서 
잠시 붙잡고 선 난간이 너의 뿌리였구나 

★주름을 엿보다  / 정끝별

뼈와 뼈 사이에 살이 있다 
벌어지고 구부러진 틈으로 
검은 송사리 떼가 일구어놓은 물결이 
살과 살을 잇는다 
배를 묶어두는 밧줄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허공을 이어놓고 
풀어내고 가두는 인연을 당길 때마다 
흔들림을 정지시키며 
배들을 튕겨주는 힘줄 
송사리 떼가 들락이며 제 길을 넓힐 때마다 
살과 살은 부드럽게 접혀지고 
뼛속까지 출렁이는 
이 오래된 계단을 따라 
연하디연한 무릎 주름이 걸어들어간다 

가만 보면 
겹겹이 뜬 노곤한 봄날,누군가의 
눈물 맺힌 밧줄이 풀리고 있다 

★사과 껍질을 보며  / 정끝별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싸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살갗의 땀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돌처럼 견고했던 식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탁 모퉁이에서 
사과 껍질이 몸을 뒤틀고 있다 
살을 놓아버린 곳에서 생은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붉은 사과 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쥔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 

껍질 한끝을 집어 든다 
더듬을수록 독한 단내를 풍기는 
철렁, 누가 끊었을까 저 긴 기억의 주름 
까맣게 시간이 슬고 있다 

★춘장대 동백숲  / 정끝별 

오백 년 동안 축축 늘어진 동백나무 가지가 
바닥에 철렁 내려놓으며 들여놓은 동백나무 방들 

미처 널어 말리지 못한 채 몇 철이나 쌓인 
낙엽에 진 꽃에 어룽 햇살을 금침으로 깔아놓고 

시간 없어 나 한 번 밖에 못했다며 
젊은 아줌마를 앞세워 동백그늘을 나오는 아저씨라든가 
그 나이에 한 번 허면 됐다며 
추임새 좋게 동백 그늘에 드는 늙은 아줌마라든가 

동백의 몸통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 
동백의 팔다리는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 

봄이 길다는 춘장대 옆 마량리 화력발전소 뒤 
그렇게 한 오백 년 동안 
춘정의 봄군불을 때다 그만 벌겋게 데기도 하는 

오백 년 된 동백숲의 온 몸 동력 
내연(內燃)의 한 천년은 들고나겠네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 정끝별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박깜박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통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봉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옹관甕棺.1  / 정끝별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에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근 길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 찬 항아리다 

★또 하나의 나무  / 정끝별

오십년째 이름없이 살던 참나무 한 그루 
오늘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 되셨다 
임학계 거목 김장수 씨 화장 유골이 
살아 아끼시던 이 참나무 아래 묻혔으니 
나무와 함께 살다 나무 곁으로 가셨으니 
첫 겨울 개똥지빠귀 한 마리 놀러와 
옹이에 앉아 휘파람 불어주고 있으니 
참,나무 되어 장수하시겠다 

손가락이 흰 자작의 딸이 아니었기에 
어깨 처진 고배에 고배를 자작하였으니 
언어를 호미 삼아 죽정밭 한 평쯤 자작하였으니 
별똥을 쏟아내는 개똥벌레처럼 
뼛속까지 하얗게 질린 채 자작거렸으니 
나도 죽어 자작 나무 되어 
별을 먹은 나무 되고 싶다 

불힘 좋은 몸들, 
나무들의 향기가 낯익다 

★소금호수  / 정끝별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이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아 
맨발이었다 
벗어놓는 신발이 웃는다 

★요요  / 정끝별

당신이 나를 지루해할까 봐 
내가 먼저 멀리 당신을 던져봅니다 
달아날 수 있도록 풀어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포기합니다 
포기의 복수 
포기의 쾌락 
그리고 포기의 보상 
당신은 늘 첫 떨림으로 달려옵니다 
던졌다 당기고 
풀렸다 되감기고 
사라졌다 되돌아오는 
천 갈래 던져진 그물 길 
오요, 오요, 오 요요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는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명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세상의 등뼈  /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게임의 법칙  / 정끝별

그래? 내 입과 두 눈에 
네 손가락들을 깊숙이 박아봐! 
그래? 날 던져봐! 
잘 굴러갈 거야 
네 빗장뼈를 타고 코불쏘뿔처럼 달려가 
네 심장의 핀들을 모조리 
으스러뜨려 놓을 거야 
그래 너! 
지금은 날 요리조리 애무하고 있지만 
그래 나? 
아직은 아직은 터질 듯 도사리고 있지만 
그래 너? 
언젠가 날 내던지고 말걸, 그 순간 
그래 나! 
네 검은 허파속을 돌진해 
뚝 끊긴 지평선 너머까지 돌진할 거야 
온옴으로 끝장내줄 거야 
어때? 
의심에 질린 맞수들의 
스트-라이크 사랑 

★와락  / 정끝별

반 평도 채 못 되는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 번을 내리치던 이 생生의 벼락 
헐거워지는 네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 자락 

★허공의 나무  / 정끝별
-박수근 풍(風)으로 

그 나무에 꽃 없다 
피우지 못하고 꺾어버렸다 
가슴에 더 할 말 없다고 
사랑에게 뻗어가는 어깨 잘라버렸다 
마음 다 펼칠 수 없다고 
사랑에게 달려가는 발 묻어버렸다 
문자 밖에서야 쓰여지게 될 것이라고 
터져 나오는 꽃들 삼켜버렸다 
그 나무에 숨 없다 
뿌리처럼 비틀린 
빈 목숨만이 붙어 
옆얼굴이 울고 있다 
 
★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시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 앉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 앉아 한 번 더 마주 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 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 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 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 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 평생과 
단 한 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 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네와 설렁탕집에 

★까마득한 날에  / 정끝별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밥 하면 순간 숨이 뚝 끊기는 
밥들의 일촉즉발 
밥들의 묵묵부답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 

★삼매三昧  / 정끝별

직박구리가 목련꽃에 머리를 쑥 박고 
이 뭐꼬! 꽁지를 한껏 치켜세운 채 
검은 직박구리가 흰 목련꽃잎을 
용맹정진 긴 부리로 촉 촉 
장좌불와長座不臥! 가지에 힘껏 발톱을 박고 
금세 한 목련 다 지고 
목련 가지 끝 잎눈 하나가 
하늘 경經 한 장을 바짝 끌어당기자 
푸른 두 귀가 쫑긋, 
벌어진 봄의 잎이란 무릇 
세 그루 건너 
배꼽마당처럼 허벅진 배꽃더미는 
직박구리 봄의 무아無我다 

★산사춘  / 정끝별

갈 수 없는 것 맞지? 
봄바람에 사태 졌던 
흰 꽃잎 
발목 삔 잎들만 남았으니 
꽃 핀 길 
걸어 잠근 가시만 남았으니 
취할 수 없는 거 맞지? 
바람에 길이 막혔으니 
영혼의 뿌리까지 다 내주어 버렸으니 
다시 그 꽃, 
피울 수 없는 거 맞지? 
이른 노을에 물들어 
붉게 맺히는 인연의 
시린 열매

★강그라 가르추  /  정끝별

한 밤을 가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밤을 맨발로 달려가자 모든 죄를 싣고
검은 야크의 눈에 서른 개의 달을 싣고

강그라 가르추를 가자 가다 갇히면
덧창문 안으로 강된장을 끓이며 몇 날 며칠
오랜 슬픔에 씨앗만 해진 두 입술로
뭉쳐진 밥알을 나누며 숨죽이며 가자

얼음 냄새 밴 발꿈치를 어루만지며
몇 날 며칠을 가자 버리고 도망 온 것들이
가랑가랑 뜨물처럼 갈앉는 꿈에서야
눈보라에 튼 붉은 뺨을 씻으며

처마 밑 고드름 녹는 소리에
겨울 순무의 푸른 귀가 돋는 곳으로
가자 도망 온 것들이 그리워지는 곳으로
가까스로 도망 온 도망갈 곳으로 가자

강그라지듯 가자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너라는 천산산맥 나라는 만년설산을 넘어
가도 가도 강그라 가르추를 다시 넘어

★통속  /  정끝별

서두르다를 서투르다로 읽었다

잘못 읽는 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화두를 화투로, 가늠을 가름으로, 돌입을 몰입으로,

비박을 피박으로 읽어도 문맥이 통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네살배기 딸도 그랬다

번번이 두부와 부두의 사이에서,

시치미와 시금치 사이에서 망설이다

엄마 부두 부쳐준다더니 왜 시금치를 떼는 거야

그래도 통했다
중심이 없는 나는 마흔이 넘어서도 좌회전과 우회전을,

가로와 세로를, 성골과 진골을, 콩쥐외 팥쥐를, 덤과 더머를, 델마와 루이스를 헷갈려 한다

짝패들은 죄다 한통속이다
칠순을 넘긴 엄마는 디지털을 돼지털이라고 하고

코스닥이 뭐예요?라고 묻는 광고에 사람들이 왜 웃는지 모르신다

웃는 육남매를 향해 그래 봐야 니들이 이 통속에서 나왔다 어쩔래 하시며 늘어진 배를 두드리곤 한다
칠순에 돌아가셨던 외할머니는 이모를 엄니라 부르고

밥상을 물리자마자 밥을 안 준다고 서럽게 우셨다

한밤중에 밭을 매러 가시고 몸통에서 나온 똥을 이 통 저 통에 숨기곤 하셨다
오독이 문맥에 이르러 정독과 통한다 통독이리라

★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막고 품다  /  정끝별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오리엔트 금장손목시계  / 정끝별

11시 39분 28초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지 오래인 아버지가
큰오빠 부축에 기별 없이 들이닥치셨는데
자고 갈란다, 막내딸 출가 십오년에 처음 일이었는데
숟가락 하나 더 놓은 저녁상을 달게 물리시고는
사진 한 장 찍어둬라, 양품에 손녀딸 안으셨는데
백세주 한병에 겨우신 듯 잠자리에 드셨는데
해소 천식에 밤새 누우셨다 앉으셨다
보타진 뒷목줄기를 어둠에 꺾어 묻고 하셨는데
무량타 한 장 더 찍어둬라, 아침을 드시고는
손녀딸 인사에 자욱이 말씀 잇지 못하셨는데

아버지가 11시 39분 28초를 풀어놓고 가셨다
막내오빠가 첫월급 기념으로 사드렸던
이제는 아침이 되어도 해가 뜨지 않는
오래된 오리엔트의 시계(視界)
하루 두번 11시 39분 28초를 밥먹듯 돌았던
오매불망 오리엔트의 금도금
그냥 둬라, 방향 잃고 두루 두절된
아버지의 고장난 유산
한밤이면 들이닥치는 천식의 유전
사진 속 아버지는 11시 39분 28초중이시다

★걷는다  /  정끝별

이급 시각장애 아버지 이온엽(48) 씨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 이기독(20) 군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걷는다
넘어질 때면 무거운 머리부터 넘어지곤 하는 아들을
너펄너펄 걷게 하는 건
등뒤에서 아버지가 붙잡고 있는 끈이다
새벽 우유배달하는 아버지는 새벽이라서 어둡고
지하방에 누워 있는 아들을 씻기고 먹이는 아버지는
지하라서 어둡지만
담벼락 밑 낮은 패랭이는 알고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끈에 묶여 걷는 까닭
아들이 툭툭 패랭이꽃을 더욱 멍들게 하는 까닭
아버지 신발 뒤축이 담벼락 쪽으로 닳아가는 까닭
걷는 게 온통 업(業)이고
걷는 게 기독(基督)이라는 걸
뱃속을 나와서도 끊지 못하는
질긴 탯줄이라는 걸
업이 기독을 앞세우고 걷는다
넘어진 꽃이 눈먼 뿌리를 뒤세우고 걷는다

★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남자  /  정끝별

남자의 직업은 배우였어 한때 잘나갔던 연기파 배우였지 그러던 어느날 남자가 희박해지기 시작했어 처음에 카메라맨은 렌즈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했어 렌즈를 닦고 닦았지만 남자는 점점 흐릿해져갔어 그제서야 카메라맨은 그 남자가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 "자네는 요즘, 촛점을 잃어가고 있어" 감독도 자기 눈을 의심했어 하지만 금세 사태를 파악했어 "이보게, 자넨 휴식이 필요해, 자네가 선명해질 수 있는지 지켜보자구" 애인도 자꾸만 혼잣말을 시작했어 "어쩌나 당신, 텅텅 비었네" 더욱 희미해진 남자는 집으로 퇴각했어 집에서도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어 아내는 짜증스럽게 투정했어 "인기척 좀 하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이들도 놀라서 외쳤어 "아빠, 온통 바랬잖아!"
누구와도 대화해본 적 없던 남자
제 목소리를 내본 적 없던 남자
한번도 제 안을 들여다본 적 없던 남자
이 가엾은 영화 속 주인공이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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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 모음 25편

《1》四行詩

김영랑


1
임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2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3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4
저녁 때 저녁 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러 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5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만 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6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 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마음 기여 찾으려
삶은 오로지 바늘 끝까지

7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에
내 마음 하루살이 나래로다
보실보실 가을눈(眼) 이 그 나래를 치며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8
허리띠 매는 시악시 마음실 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

《2》5월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 이랑 만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3》5월 아침

김영랑

비 개인 5월(五月)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지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만은

이 아침 새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그 보금자리에 찌찌찌 소리내는 잘새의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 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蒼空)을 흔드오
자랑찬 새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 버렸대서야
불혹(不惑)이 자랑이 아니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魂)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익(靜謚)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少年)인가 보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中年)이고
내사 불혹(不惑)을 자랑튼 사람

《4》가늘한 내음

김영랑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머언 산 허리에 슬리는 보라빛

오! 그 수심뜬 보라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윈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위에 처얼썩 갯물이 놓이듯
얼컥 니이는 후끈한 마음

아니 후끈한 내음 내키다 마아는
서언한 가슴에 그늘이 도오나니
수심 띠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라빛

《5》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뻔질한
은 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론 도론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6》내 마음 아실 이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기인뜻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혼자 마음을......

아! 내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마음에 때때로 어리누는 띠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밤 고이맺는 이슬같은 보람을
보배인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7》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붙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8》뉘 눈결에 쏘이었소

김영랑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봉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일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구름 피여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어쩌면 이런 시구절이 나오는지
새삼 또 새삼스럽게도 그 감성의 풍부함에 놀랍습니다

《9》달

김영랑


사개를 인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우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 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10》독(毒)을 차고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뒤!>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뒤!>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 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11》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12》두견(杜鵑)

김영랑

울어 피를 토하고 뱉은 피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으로 지친 작은새
너는 넓은 세상에 설음을 피로 새기려 오고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 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쪽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젖한 이 새벽을,송구한 네 울음
천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고
하늘가 어린 별들 바르르 떨리겠구나...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릴것을...
아니 울고는 차마 죽어 없으리오
불행의 넋이여!
우지진 진달래 와지직 이 삼경의 네 울음.

《13》땅거미

김영랑

가을날 땅거미 아름풋한 흐름 위를
고요히 실리우다 휜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라빛의 낡은 내음이요
임의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오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다 못 돌아오는
머언 지난 날의 놓친 마음

《14》마당 앞 맑은 새암

김영랑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15》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원 설움이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6》무너진 성터

김영랑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17》북

김영랑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어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는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18》사랑은 하늘

김영랑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19》수풀 아래 작은 샘

김영랑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 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 보는
수풀 속의 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이 쏟아져 동이 갓을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얽혀져 잠긴 구슬손결이
웬 별나라 뒤 흔들어 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녘 그대 종종걸음 휜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와도
그 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새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 밤 내 혼자 내려가 볼꺼나 내려가 볼꺼나

《20》언덕에 바로 누워

김영랑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 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21》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22》淸明

김영랑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리속 가슴 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 새여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쓰고
그 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취해진 내마음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낱 풀잎이라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낱 버러지로다

《23》淸明

김영랑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리속 가슴 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 새여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쓰고
그 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취해진 내마음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낱 풀잎이라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낱 버러지로다

《24》풀 위에 맺혀지는

김영랑

풀 위에 맺혀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25》하날갓 다은데

김영랑

내옛날 온꿈이 모조리 실리어간
하날갓 닷는데 깃븜이 사신가

고요히 사라지는 구름을 바래자
헛되나 마음가는 그곳 뿐이라

눈물을 삼키며 깃븜을 찻노란다
허공을 저리도 한업시 푸르름을

업듸여 눈물로 따우에 색이자
하날갓 닷는데 깃븜이 사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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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시 모음 60편

1. 5월의 느티나무

복효근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은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2. 각씨 붓꽃을 위한 연가

복효근

각씨가 따라나설까봐
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둘러대고는
서둘러 김밥 사들고 봄 산길 나섰습니다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와 이 산길 걸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 오르는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저기 저기 각씨붓꽃 피어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허리가 어디 붙었나 가늠도 되지 않고
화장술도 서툴러서 촌스러운 때깔이며
장벽수정을 한대나 어쩐대나 암술 수술이 꽁꽁 감추어져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어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세상에나, 우리 각씨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산길까지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볏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어있습니다
각씨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마저 괜스레 조신합니다
두렵게도 이쁜 꽃입니다
새삼 스무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

3.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 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 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습다
저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 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웅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 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번씩 잡아주는 일,
그래서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그러니 어디에 상량문을 쓰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저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떼 왔다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4. 고목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 하나 가꾸고 싶다

5. 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

복효근

겉보기엔 멀쩡한데
발이 빠져나간
구두의 뒤축이 한쪽으로 심하게 닳았다

보이지 않은 경사가 있다
보이는 몸이 그럴진대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마음의 경사여

구두 뒤축도 없는 마음의 기울기는
무엇이 보정(補正)해주나 또
뒷모습만 들켜주는 그 경사를 누가 보아주나

마지막 구두를 벗었을 때
생애의 기울기를 볼 수는 있을 것인가
수평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어버릴 생이여, 비애여

닳은 구두 뒤축 덕분에 나는 지금 멀쩡하게 보일 뿐이다

6. 길 혹은 질

복효근

길은 전라도 사투리로 질이다
길은 질이다
질이어야 한다
신생의 자세로
다시 탯줄에 매달리기 위하여
자궁에 이르는
이 길은
질이어야 한다

7. 꽃 등심

복효근

정육점 진열장 한 켠에
꽃처럼 예쁜 이름표가 붙어있어

소의 시체의 한 부분일 뿐인
한 덩어리 고기가
꽃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니

채식으로 오직
채식으로 맑아진 피와 영혼이
제 갈비뼈 사이에 피운 꽃

기껏해야 짐승의 시체나 먹고사는
육식의 이 야만의
족속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등심초 꽃 이름으로
숯불 위에 몸을 누이는
살꽃의 소신공양

8. 꽃 아닌 것 없다

복효근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픔이 아닌 꽃은 없다

그러니
꽃이 아닌 슬픔은 없다

눈물 닦고 보라
꽃 아닌 것은 없다

9. 꽃잎

복효근

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다시 옆걸음으로 기어서 나올 것 같은
새끼손톱만한 어린 게가 묻혀있다

제 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 소꿈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 밤 바다의 사연을 다 읽어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잎 같이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10. 낙엽

복효근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찬란한

신.

11. 내가 정말 장미를 사랑한다면

복효근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오르는
그 집에 사는 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지고 덩굴 속에 쇠창살이 드러나자
그가 사랑한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였구나
그 집 주인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려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12.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복효근

깊게깊게 뿌리내려서 겨울난 냉이
그 푸릇한 새싹, 하얗고 긴 뿌리까지를
된장 받쳐 뜨물에 끓여놓으면
객지 나간 겨울 입맛이 돌아오곤 하였지

위로 일곱 먹고 난 빈 젖만 빨고 커서
쟈가 저리 부실하다고 그게 늘 걸린다고
먼 산에 눈도 덜 녹았는데
막내 좋아한다고 댓바람에 끓여온 냉잇국

그 푸른 이파리 사이
가늘고 기다란 흰머리 한 올 눈에 띄어
눈치채실라 얼른 건져 감춰놓는데
그러신다 냉이는 잔뿌리까지 먹는 거여
......

대충 먹는 냉잇국 하얀 김이 어룽대는데
세상 입맛 살맛 다 달아난 어느 겨울 끝
두고두고 나를 푸르고 아프게 깨울 것이다
차마 먹지 못한 당신의 그 실뿌리 하나

13. 네 속눈썹 밑 몇 천리

복효근

그 빛에 부딪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내 마음이
대책 없이 설명할 수도 없이
그 속에 머물러
한 천년만 살고 싶은
혹은
빠져 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꺼이
죽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네 속눈썹 밑
그 깊은 빛 몇 천리

14.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15. 다친 새를 위하여

복효근

늦은 저녁 숲에
날개를 다쳐 돌아오는 새 있다
무리에서 저만치 처져서
어느 이역의 하늘을 떠돌다 오는지
꺼져가는 석양이 아쉬워
별 가까운 먼 하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지
절름거리는 날갯짓으로
별빛 한 가닥 물고 오는 새 있다
밤새 새는
부서진 깃을 다듬어
새로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숲은
쓰린 달빛으로 수런거리던 것을…
숲에 가보라 새벽
새는 그새
해뜨는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높이 나는 새의 날개깃엔
언제나 핏빛이 돌아
아침해 저리 고운 것을
보라 새가 떠난 자리엔
상처받은 자만이 부를 줄 아는
곱디고운 노래가
숲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16.당신

복효근

가시기 며칠 전
풀어 헤쳐진 환자복 사이로 어머니 빈 젖 보았습니다

그 빈 젖 가만히 만져보았습니다
지그시 내려다보시던 그 눈빛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처연하고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으니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도 내가 다시 매달려 젖 물고 싶은 당신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

17.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복효근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18. 대숲에서 뉘우치다

복효근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보라

둘째딸 인혜는 그 소리를 대나무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라 했다
언젠가 청진기를 대고 들었더니 정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우긴다

나는 저 위 댓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가
대나무 텅 빈 속을 울려 물소리처럼 들리는 거라고 설명했다
그 뒤로 아이는 대나무에 귀를 대지 않는다

내가 대숲에 흐르는 수천 개의 작은 강물들을
아이에게서 빼앗아버렸다
저 지하 깊은 곳에서 하늘 푸른 곳으로 다시
아이의 작은 실핏줄에까지 이어져 흐르는
세상에 다시없는 가장 길고 맑은 실개천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고 들어 보라

그 푸른 물소리에 귀를 씻고 입을 헹구고
푸른 댓가지가 후려치는 회초리도 몇 대 아프게 맞으며

19. 대신 매를 맞고

복효근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은 목에 너무 힘을 준다는 것 알아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마음이 한 움큼 뜯겨나가고
뉘우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뉘우치며 하루가 지나고
또 e-메일이 왔다
- 어젯밤 술에 취해 방배동에서 모 시인과 다퉜는데
돌아와 그 시인에게 e-메일을 보낸다는 게
잘 못 배달된 것 같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평소 내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나도 답 메일을 이미 보낸 뒤였다
딸아이 피부약을 내 감기약인 줄 알고 먹고서
감기가 나은 적도 있다
대신 매맞고 뉘우친 마음의 자리 푸른 매 자국이 싱싱하다

20. 덮어준다는 것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였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로 말해질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겠다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다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21. 동행

복효근

한 점 얻어먹어 보겠다고
뒷집 새댁 부탁으로 닭 모가지를 비틀어본 적도 있는데
아내 잘못 만나
파리 한 마리 잡는데도
관세음보살한테 허락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다 잘하면 나도 극락 가겠다

22. 마늘촛불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23. 막막한 날엔

복효근

왜 모르랴
그대에게 가는 길
왜 없겠는가
그대의 높이에로 깊이에로 이르는 길
오늘 아침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꽃은 기어올라
기어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밀한 소리들을
그러나 분명 꽃의 빛깔과 꽃의 고요로 쏟아놓았는데
너와 내가 이윽고 서로에게 이르고자 하는 곳이
꽃 핀 그 환한 자리 아니겠나 싶으면
왜 길이 없으랴
왜 모르랴
잘 못 디딘 덩굴손이 휘청 허공에서 한번 흔들리는 순간
한눈팔고 있던 감나무 우듬지도
움칫 나팔덩굴을 받아낸다
길이 없다고 해도
길을 모른다 해도 자 봐라
그대가 있으니 됐다
길은 무슨 소용
알고 모르고가 무슨 소용
꽃피고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허공에 길을 내는
저기 저 나팔덩굴이나 오래 지켜볼 일이다

24. 명편

복효근

채석장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25. 목련 후기

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26. 목련꽃 브라자

복효근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27. 목련에게 미안하다

복효근

황사먼지 뒤집어쓰고
목련이 핀다

안질이 두렵지 않은지
기관지염이 두렵지도 않은지
목련이 피어서 봄이 왔다

어디엔가 늘 대신 매 맞아 아픈 이가 있다
목련에게 미안하다

28. 물 꽃

복효근

물수제비 뜨는 돌이
물을 스치며 피우는 꽃
무색무취
순간의 꽃
이윽고 어느 지점에서
그대 중심에 깊숙히 가라앉을 수 있다면
다가가는 모든 발걸음에
그대를 꽃 피우는…

29. 물음표(?)에 대하여

복효근

오늘 아침 찌갯감
일본산 생명태 아가리 속에는
낚시바늘 하나 박혀있다

살기 위해 삼켰으나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었으리라
그래서 낚시바늘은 물음표를 닮았다

옷장 밖에선
먹이를 찾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있는 몸을 상징하듯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몸이 빠져나간 옷들은
물음표 하나씩 달고 있다

살게 한 것도 물음표였으나
죽게 한 것도 물음표라는 듯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다

30. 버마재비 사랑

복효근

교미가 끝나자
방금까지 사랑을 나누던
수컷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암버마재비를 본 적이 있다
개개비 둥지에 알을 낳고 사라져버리는
뻐꾸기의 나라에선 모르리라
섹스를 사랑이라 번역하는 나라에선 모르리라
한 해에도 몇 백 명의 아이를
해외에 입양시키는 나라에선 모르리라
자손만대 이어갈 뱃속의
수많은 새끼들을 위하여
남편의 송장까지를 씹어먹어야 하는
아내의 별난 입덧을 위하여
기꺼이 먹혀주는 버마재비의 사랑
그 유물론적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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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저 등 하나 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한 생애가
알탕갈탕 눈물겹다

무엇보다, 그리웁고 아름다운 그 무엇보다
사람의 집에 뜨는 그 별이 가장 고와서
어스름녘 산 아래 돋는 별 보아라

말하자면 하늘의 별은
사람들이 켜든 지상의 별에 대한
한 응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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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를 찾아서

복효근

남해금산의 보리암은
바다새의 둥지처럼
절벽에 매달려 있었네

그 바위 절벽이 아름답다고
바라다뵈는 바다가 그림 같다고 말하지 말라
바랑에 쌀을 짊어지고 아둥바둥 오르는
쭈그렁 보살님네들이 더 아름다운 곳

길 아닌 길만 더듬어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는 벼랑 끝
혹은, 뛰어들 수 있는 바다
언제나 끝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나그네에게

끝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보리암은 절벽에 있었네
바닷새는 벼랑에 살고 있었네

남해금산은
가만히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 하나를 풀어주고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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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에 대한 비유

복효근


온전히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가령, 비누를
한사코 미끄러져 달아나는 비누를
붙잡아 처바르고 안고 애무해보지만
사랑한 것은 비누가 아니라 비누의 거품일 뿐
비누의 심장에 다가가 본 적 있는가
비누에게 무슨 심장이냐고?
그렇다면 비누가 그런 것처럼
제 살 한 점 선선히 내어준 일 있었는가
누구의 더러운 냄새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한번이라도 뜨거운 심장을 증명해 본 일 있었던가
고작해야
때 얼룩 허물을 벗어 안겨주면서도
눈앞에 있을 때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비누에게 있는 비누의 이름을 불러준 적 있는가
닳아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불러보는 없는 이름
여보, 비누
없어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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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복효근

산정에서 보면
더 너른 세상이 보일 거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산이 보여주는 것은 산
산너머엔 또 산이 있다는 것이다
절정을 넘어서면
다시 넘어야 할 저 연봉들......

함부로 희망을 들먹이지 마라
허덕이며 넘어야 할
산이 있어
살아야 할 까닭이 우리에겐 있다
☆★☆★☆★☆★☆★☆★☆★☆★☆★☆★☆★☆★
산삼

복효근

야생화 모임에서 산엘 갔다네
오늘 주제는 앵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갑자기 내가 질문을 했네
만약 이러다가 산삼이라도 큰 놈 하나 캐게 되면
자네들은 누구 입에 넣어 줄 건가
잠시 고민들 하더니
친구 한 놈은 아내를 준단다
또 한 친구는 큰자식에게 준단다
그럼 너는 누구 줄 건데 하길래
나도 비실비실 큰딸에게 줄 거야 했지
그러고 보니
에끼 이 후레아들놈들아
너도 나도 어느 놈 하나
늙으신 부모님께 드린다는 놈 없네
우리 어머니 들으시면 우실까 웃으실까
다행히 제 입에 넣겠다는 놈은 없네
더 다행인 것은 산삼이 없네
눈앞에 앵초 무더기 환하게 웃고 있네
☆★☆★☆★☆★☆★☆★☆★☆★☆★☆★☆★☆★
상처에 대하여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
새의 울음소리에는

복효근

내 새벽잠을 가만 흔들어 깨우는
저 새의 울음소리는
새 울음만이 아니다
그 어떤 것의 비유로 말해야 옳다
비를 머금은 구름의 노래이거나
지하를 떠돌다 돌 틈을 빠져나와
계곡을 뛰어내리는 물줄기의 소리이거나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자장노래 소리이거나
그렇다 저 소리를
새의 울음소리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눈감은 채 들어보면
그 옛날 그 여자가 부르던 노래
하마 은하의 강물 곁에 살림을 차리고
쌀 씻으며 부르는 노래
새 울음소리에는 지나온 천 개의 하늘이 있고
살아보지 않은 천 개의 강물 소리가 있다
그리운 노래가 있다
꿈꾸는 별들의 뒤척임 소리가 있다
새는 인드라의 그물코에 앉아
그 가운데 몇 개의 소리를 가져와
지금 내 귓가에 내려놓는 것이다
☆★☆★☆★☆★☆★☆★☆★☆★☆★☆★☆★☆★
생(生)

복효근

건전지는 극과 극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물려있다 애(愛)와 증(憎), 삶과 죽
음의 자웅동체이다 어느 것 하나로는 심장은 뛰지 않는다 내 사랑도 죽이
고 싶을 만큼의 똑같은 전압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와의 온몸에 저릿저릿 피
를 흐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몸에 꼭 맞는 관 속에 누워 죽어가면서 건전지가 극과 극에서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불꽃
☆★☆★☆★☆★☆★☆★☆★☆★☆★☆★☆★☆★


복효근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
'섬'의 동사형

복효근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공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
숫돌

복효근

숫돌을 생각한다
돌에게도 수컷이 있을까
그래, 수컷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자면
숫돌에 무딘 칼을 문질러보라
무딘 쇠붙이를 벼리는 데는 숫돌만한 것이 없으리
닳아서 누워버린 날을 세우려면
숫돌은 먼저 쇠에 제 몸을 맡기고
제 몸도 함께 닳아야 하는 것인데
명필이
먹에 닳아서 뚫린 벼루의 숫자로 제 생애를 헤아리듯이
숫돌은
제가 벼린 칼날이 몇인가, 혹은 그 날이 무엇을 베었는가
근심하며 고뇌하며
닳아서 야윈 뼈에 제 생애를 새기느니
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가
허접한 가계에 주눅 든 내 남성이 한없이 짜부러지는 때
생각한다
수컷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
슬픔에 대하여

복효근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
아기 돌탑

복효근

산길을 가다보면 굽이굽이
작고 못생긴 돌 조각으로 쌓은 탑 있네
누가 쌓았을까
산처럼 커야 한다고
백장암 삼층탑처럼 높아야 한다고 믿었던 나에게
들패랭이 같은
용담꽃 같은
온 천지 들꽃 같은
애기 돌탑


위에

아래

그것은
돌이
아니라네 탑이라네
산길 가다보니 돌멩이 하나 하나가
두고 온 그대
떠나간 내 모든 그대 얼굴이네

어느덧 지리산도
소슬한 한 채 탑으로 서 있네
☆★☆★☆★☆★☆★☆★☆★☆★☆★☆★☆★☆★
아름다운 번뇌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아침

복효근

새벽비가 늙은 감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를
다 씻어놓으니
감나무는 잎사귀, 잎사귀 제 귀마다에
햇살에 말갛게 헹군 첫 꾀꼬리소리를
가득 -
한가득 쟁여 넣는지
잎사귀 그 둥근 귓바퀴에
무슨 보석 귀걸이인 듯 이슬방울이 찰랑찰랑하다
이제 늙은 감나무는 열예닐곱 청춘처럼
어디 뵈지도 않는 꾀꼬리소리와 머언 먼 태양에게도
푸른 손을 흔들어 뵈는데
저들의 수작에 어쩌자고 나는 끌어들여서
늙은 감나무 잎사귀를 다 채우고도 그대로 남은
저 햇빛 범벅 푸른 우주의 음률을 내 두 귀 가득 채우는가
내 뇌혈관 맑은 실핏줄까지가 아릿하고 또 말갛게 틔어오는데
그 바람에
여보, 뭐해 찌개가 졸아서 다 타잖아
어쩌고저쩌고
이른 아침 듣는 아내의 지청구도 꾀꼬리 소리만 같았다
☆★☆★☆★☆★☆★☆★☆★☆★☆★☆★☆★☆★
어머니에 대한 고백

복효근

때 절은 몸뻬 바지가 부끄러워
아줌마라고 부를 뻔했던 그 어머니가
뼈 속 절절히 아름다웠다고 느낀 것은
내가 내 딸에게
아저씨라고 불리워지지는 않을까 두려워질 무렵이었다
☆★☆★☆★☆★☆★☆★☆★☆★☆★☆★☆★☆★
엉겅퀴의 노래

복효근

들꽃이거든 엉겅퀴이리라
꽃 핀 내 가슴 들여다보라
수없이 밟히고 베인 자리마다
돋은 가시를 보리라
하나의 꽃이 사랑이기까지
하나의 사랑이 꽃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잃고 또
떠나야 하는지
이제는
들꽃이거든 가시 돋힌 엉겅퀴이리라
사랑이거든 가시 돋힌 들꽃이리라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함부로 꺾으려드는 손길에
선연한 핏멍울을 보여주리라
그렇지 않고 어찌 사랑한다 할 수 있으리
그리고
보랏빛 꽃을 보여주리라
사랑을 보여주리라 마침내는
꽃도 잎도 져버린 겨울날
누군가 또 잃고 떠나
앓는 가슴 있거든
그의 끓는 약탕관에 스몄다가
그 가슴 속 보랏빛 꽃으로 맺히리라
☆★☆★☆★☆★☆★☆★☆★☆★☆★☆★☆★☆★
연잎의 마음

복효근

비가 쏟아지자 덕진연못의 수문엔 콸콸 붉덩물이 들고 있었다
모든 연잎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 몸을 큰 잔으로 만들어 빗물을 받았다
투명한 빗물을 정한수처럼 받들고 빗줄기의 매를 맞는 연잎에선
지장보살지장보살 곡진한 비나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지금까지 나는
연꽃의 아름다움과 연향의 꽃다움만을 노래해왔다
내 이념의 사치와 과소비를 뉘우치며 오래 서있는 동안에
연잎들은 받아든 맑은 빗물을 붉덩물 연못에 합장배례하듯 연신 부어주었다
연못이 흙탕물로 넘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흙탕물은 어두운 세상 쪽으로 연꽃 대궁 몇 개를 빚어 올리고 있었다
오늘 처음 연꽃이기보다는 연잎이기를 꿈꾸었다
이 역시 사치가 아니기를 나도 마주 합장하였다
☆★☆★☆★☆★☆★☆★☆★☆★☆★☆★☆★☆★
외줄 위에서

복효근

허공이다
밤에서 밤으로 이어진 외줄 위에 내가 있다
두 겹 세 겹 탈바가지를 둘러쓰고
새처럼 두 팔을 벌려보지만
함부로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이 외줄 위에선
비상은 추락과 다르지 않다
휘청이며 짚어가는 세상
늘 균형이 문제였다
사랑하기보다 돌아서기가 더 어려웠다
돌아선다는 것,
내가 네게서, 내가 내게서 돌아설 때
아니다, 돌아선 다음이 더 어려웠다
돌아선 다음은 뒤돌아보지 말기 그리움이 늘 나를 실족케 했거늘
그렇다고 너무 멀리 보아서도 안되리라
줄 밖은 허공이니 의지할 것도 줄밖엔 없다
외줄 위에선 희망도 때론 독이 된다
오늘도 나는
아슬한 대목마다 노랫가락을 뽑으며
부채를 펼쳐들지만 그것은 위장을 위한 소품이다
추락할 듯한 몸짓도 보이기에는 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외길에서는
무엇보다 해찰이 가장 무서워서
나는 나의 객관 혹은 관객이어야 한다
☆★☆★☆★☆★☆★☆★☆★☆★☆★☆★☆★☆★
일생(一生)은

복효근

상형문자다

장대비가 일궈놓고 간 땡볕
한 마지기의 고요
속에 달팽이 한 마리가
그어놓은 필생의 일 획

달팽이가 사라진 그 자리에
그것의 발음기호, 짧은 새소리

내일도 해는 뜰 것이다
☆★☆★☆★☆★☆★☆★☆★☆★☆★☆★☆★☆★
자비

복효근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받쳐 주네
☆★☆★☆★☆★☆★☆★☆★☆★☆★☆★☆★☆★
쟁반 탑

복효근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
저녁 강에서

복효근

사는 일 부질없어
살고 싶지 않을 때 하릴없이
저무는 강가에 와 웅크리고 앉으면
내 떠나온 곳도
내 가야 할 그 곳도 아슴히 보일 것만 같으다

강은 어머니 탯줄인 듯
어느 시원(始原)에서 흘러와 그 실핏줄마다에
하 많은 꽃
하 많은 불빛들
안간힘으로 매달려 핀다

이 강에 애면글면 매달린 저 유정무정들이
탯줄에 달린 태아들만 같아서
강심(江心)에서 울리는 소리
어머니 태반에서 듣던 그 모음만 같아서
지금은 살아있음 하나로 눈물겹다

저문 강둑에 질경이는 더욱 질겨
보일둥말둥 그 끝에 좁쌀 같은 꽃도 부질없이 핀다
그렇듯
세상엔 부질없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
오늘 밤 질경이 꽃 한 톨로
또한 부질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직 하류는 멀다
언젠가 이 탯줄의 하류로 하류로 가서
더 큰 자궁에 들어 다시 태어날 때까지는
내일도 나는 한 가닥 질경이로
살아야겠는 것이다

저 하류 어디쯤에 매달려
새로이 돋는 것이 어디 개밥바라기별뿐이겠느냐
나는 다시 살고만 싶다
☆★☆★☆★☆★☆★☆★☆★☆★☆★☆★☆★☆★
접목接木

복효근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도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도 몰라
더듬더듬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녁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
주택복권의 추억

복효근

아는 사람은 안다
돼지꿈을 꾸고
복권 몇 장을 사가지고 있는 동안의
턱없는 설레임을 ……
군 입대할 적 어머니가
병역수첩 맨 뒷장에
꼭꼭 접어 넣어주던 부적처럼
한 주 동안이 든든했다
더러는 남의 돼지꿈까지 사다가
복권을 샀다 당첨되지 않아도
좋았다 퇴근길
찬송가를 부르며 바구니를 내밀던
맹인에겐 한 푼도 주지 못했지만
복권을 갖고 있는 동안
복지국가 건설에 한몫했다는 자부심 ……
아는 사람은 안다
거, 왜 표어도 있잖은가
"내가 산 복권 한 장
국민주택 벽돌 한 장"
버스표 파는 가판대
주택복권 진열칸 앞에서
두근대며 번호 맞춰보던 추억을,
술취한 퇴근길 가끔은
내가 쌓는 남의 집들에 막혀
내 전셋집 돌아가는 길이 막막해도
돼지꿈 속에서 한 주 동안
턱없이 행복했던 추억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복효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 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
폐차와 나팔꽃

복효근

폐차는
부활 같은 건 꿈꾸지 않나 보다
쓸 만한 부품은 성한 놈들에게 내어주고
폐차장엔 끝끝내
끌고 온 길들을 놓아주어 버린
분해되는 낡은 차가
그래서 평화스럽다
영생을 믿지 않아 윤회가
시작된 것일까 벌써
나팔꽃 한 가닥이 기어올라
안테나에 꽃을 피웠다
비켜라 경적을 울려대며
회생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달릴 줄만 알았던
한참 광 나던 시절엔 어찌 알았으리
필요로 하는 것들에게
하나하나 내어주고
마지막 끝자리마저 나팔꽃에게 내어주고
제 몸이 비어갈수록 채워지는 햇살의 따스함
페차는 성자처럼
나팔꽃이 시들 때까지만
지상에 남아 있기를 기도할지도 모른다

폐차가 아름다운 어느 아침
☆★☆★☆★☆★☆★☆★☆★☆★☆★☆★☆★☆★
한 수 위

복효근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
-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편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하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할매 펴보이는 돈이
천원짜리 구지폐 넉 장이다
- 애개개 어쩐다요
됐소 고거라도 주고 가씨오 마수걸이라 밑지고 준 줄이나 아이씨요잉
못 이긴 척 배시시 웃는 할배와
또 수줍게 웃고 돌아서는 할매
둘 다 어금니가 하나도 없다
☆★☆★☆★☆★☆★☆★☆★☆★☆★☆★☆★☆★
함박꽃 그늘 아래서

복효근

어느 아득한 눈나라 북녘에서 왔을까
백두대간 지리산 능선에는
하 눈부셔서
눈감아야 오롯하게 보이는 꽃 있어
함박꽃,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는 그 꽃
지그시 눈감고 들여다보면
불타는 꽃 심장 속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는 마음의 빛깔이랑
그 꽃 가슴 둘러싼 시원(始原)의 하늘빛도 비쳐와

여염집 키 큰 목련만 보아도 가슴 뛰는데
가시덩굴 바위틈
함박꽃, 그 꽃덩이 보면
나는 그만 숫총각이 되고 만다네

열아홉 숫총각이 되어
봉화산 영취산 속리산 태백산 금강산 넘어 넘어서 가면
이제껏 지도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어느 눈부신 나라
이 세상 맨 처음의 처녀 같은 함박꽃
그 꽃 그늘 아래
한 천 년쯤 쉬어가고 싶네
☆★☆★☆★☆★☆★☆★☆★☆★☆★☆★☆★☆★
허물

복효근

나무 둥치를 붙잡고 있는 매미의 허물 속
없는 매미가 나무 위에 우는 매미를 증명하듯
저 매미는 또 매미 다음에 올 그 무엇의 거푸집인 것이냐
매미의 저 울울(鬱鬱)한 노래가 또 무엇의 어머니라면

세상의 모든 죽음을 어머니라 불러야 옳다
허공에 젖을 물리는 저 푸른 무덤들
☆★☆★☆★☆★☆★☆★☆★☆★☆★☆★☆★☆★
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
홍시

복효근

누구의 시냐
그 문장 붉다

봄 햇살이 씌워준 왕관
다 팽개치고

천둥과 칠흑 어둠에 맞서
들이대던 종주먹
그 떫은 피

제가 삼킨 눈물로 발효시켜
속살까지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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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모음

 


박재삼 시 모음 27편

1. 12월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2. 천년의 바람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3.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박재삼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4. 나는 아직도

박재삼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 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5. 나무 그늘

박재삼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 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6. 나뭇잎만도 못한 짝사랑

박재삼

네 집은 십리 너머
그렇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건만
혼자만 끙끙
그리울 때가 더 많았다네.

말 못하는 저 무성한
잎새들을 보면
항시 햇빛에 살랑살랑
몸채 빛나며 흔들리고 있건만.
말을 할 줄 아는 心中에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으니
大明天地에
이 캄캄한 구석을
내보이기가 민망하던
아, 서러운 그때여.

7. 낙과소리를 들으며

박재삼

짧은 가을 석양에는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다른 때에 비하여
어찌 그리 쓸쓸한가

아침이나 한낮에는
다 익으면
햇빛과 바람과 수분을
아름답게 겉으로 내뿜으며
하늘 속에 있는 전수명을 다하고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마지막을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때는 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게 적막강산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주위가 해지기 얼마 전에는
그럴 수 없이 몸에 스미는
아, 짜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울고 싶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 멸망의 몸짓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아직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벌써 오십 고개를 몇 해 넘겼네.

8. 라일락꽃을 보면서

박재삼

우리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을 같이한 것이
이 이상 고마울 것이 없고
미구(未久)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로 잠시
한자리 머무는 것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세상 일은 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은 것이네.

9. 無言으로 오는 봄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10. 무제(無題)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千)날 만(萬)날 가야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11. 바람의 내력

박재삼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12. 밤바다에서

박재삼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天下에 많은 할말이, 天下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13. 사람이 사는 길 밑에

박재삼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 다 그런 일이라!


14. 사랑의 노래

박재삼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15. 사랑하는 사람

박재삼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16. 슬픔을 탈바꿈하는

박재삼

아무리 서러워도
불타는 저녁놀에만 미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밤의 적막 속에
그것은 깨끗이 묻어버리고
다음날에는
비록 새 슬픔일지라도
우선은 아름다운
해돋이를 맞이하는 심사로
요컨대 슬픔을 탈바꿈하는
너그러운 지혜가 없이는
강물이 오래 흐르고
산이 한자리 버티고 섰는
그 까닭 근처에는
한치도 못 가리로다.

17. 신록(新綠)

박재삼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18. 新綠을 보며

박재삼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
생선을 낚아 회를 쳐 먹었던 것,
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의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
이런 것이 一時에 수런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대들어 오누나.

또한 이를 달래 창자 밑에서 일어나는 微風
가볍고 연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누나.

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19. 아름다운 사람

박재삼

바람이 부는 날은
별들이 갈대로 쓸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머리카락을 날리는
아름다운 사람아.

달이 높이 뜬 날은
별들은 손을 호호 불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을 보며 고개 숙인
아름다운 사람아.

20.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21. 일월 속에서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 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마가 한결 빛나고

강물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편일률로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22. 천년의 바람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23. 첫사랑 그 사람은

박재삼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24. 추억(追憶)에서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漁物)전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25. 햇빛의 선물

박재삼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26. 혹서일기

박재삼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27. 흥부 부부상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닿는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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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모음


1.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2.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9>

 

3.소년(少年)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1939>

 

4.눈오는 지도(地圖)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1941.3.12>

 

5.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 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6>

 

6.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 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 곳에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12>

 

7.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5.10>

 

8.간판(看板)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흰 와사등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9.태초(太初)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10.또 태초(太初)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11.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올 게외다.

<1941.5>

 

12.무서운 시간(時間)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2.7>

 

13.십자가(十字架)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31>

 

14.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1941.6.2>

 

15.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16.눈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1941.5.31>

 

17.또 다른 고향(故鄕)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1941.9>

 

18.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깊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9.31>

 

19.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11.5>

 

20.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12.24>

 

21.내일은 없다


------ 어린 마음이 물은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22.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偉人)들!

<1934.12.24>

 

23.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
전등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 몸에 둘 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1935.1.18>

 

24.창공(蒼空)


그 여름날
열정의 포플라는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

천막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던 구름은 이끌고
남방(南方)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은 한 폭으로
가지 위에 퍼지고
둥근달과 기러기를 불러 왔다.

푸드른 어린 마음이 이상(理想)에 타고,그의 동경의 날 가을에
조락(凋落)의 눈물을 비웃다.

<1935.10.20>

 

25.조개 껍질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1935.12>

 

26.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자 밖에는 더 못쓰는 걸.

<1936.12>

 

27.고향집


--- 만주에서 부른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듯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28.비둘기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 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모이를 주우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1936.2.10>

 

29.황혼(黃昏)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쭉한 일자(一字)를 쓰고…… 지우고……까마귀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1936.3.25>

 

30.이별(離別)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크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
조그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
더운 손의 맛과 구슬눈물이 마르기 전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31.모단봉(牡丹峰)에서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끌어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女兒)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1936.3.24>

 

32.가슴1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두다려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1936.3.25>

 

33.가슴2


불 꺼진 화(火)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1936.7.24>

 

34.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길로
고기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1936.3>

 

35.닭


한 간(間) 계사(鷄舍) 그 너머 창공이 깃들어자유의 향토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생활을 주잘대고
생산의 고로(苦勞)를 부르짖었다.

음산한 계사에서 쏠려나온
외래종 레구홍,
학원에서 새 무리가 밀려나오는
삼월의 맑은 오후도 있다.

닭들은 녹아드는 두엄을 파기에
아담한 두 다리가 분주하고
굶주렸든 주두리가 바지런하다.
두 눈이 붉게 여물도록------

<1936.봄>

 

36.산상(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버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는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1936.5>

 

37.오후(午後)의 구장(球場)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 연기를 자욱히 품기고
지나가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 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
두 철각(鐵脚)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랑이 저쪽으로
가라앉는다.

 

38.산림(山林)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따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천년 오래인 연륜에 짜들은 유암(幽暗)한 산림이,고달픈 한 몸을 포옹(抱擁)할 인연을 가졌나보다.

산림의 검은 파동 우으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솨--- 공포에 떨게 한다.

멀리 첫여름의 개고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는 아질타.

나무 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1936.6.26>

 

39.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1936.12. 또는 37.1.추정>

 

40.양지(陽地)쪽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섧은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恨)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6.26>

 

41.꿈은 깨어지고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노래하는 종다리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던
금잔디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탑이 ---
하루 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오 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42.곡간(谷間)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고
여울이 소리쳐 목이 잦았다.
한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짜기를 빠르게도 건너려 한다.

산등허리에 송아지뿔처럼
울뚝불뚝히 어린 바위가 솟고,
얼룩소의 보드라운 털이
산등성이에 퍼-렇게 자랐다.

3년만에 고향에 찾아드는
산골 나그네의 발걸음이
타박타박 땅을 고눈다.
벌거숭이 두루미 다리같이……


헌신짝이 지팡이 끝에
모가지를 매달아 늘어지고,
까치가 새끼의 날발을 태우며 날 뿐,골짝은 나그네의 마음처럼 고요하다.

<1936.여름>

 

43.햇비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롱알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햇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1936.9.9>

 

44.빗자루


요오리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 총 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 하나 나 하나
엉덩이를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

아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 속에 감췄더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1936.9.9>

 

45.비행기


머리에 푸로펠러가
연잣간 풍차보다
더-빨리 돈다.

땅에서 오를 때보다
하늘에 높이 떠서는 빠르지 못하다숨결이 찬 모양이야.

비행기는 ------
새처럼 나래를
펄럭거리지 못한다
그리고 늘 ------
소리를 지른다.
숨이 찬가봐.

 

46.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47.굴뚝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1936.가을>

 

48.눈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1936.12>

 

49.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 걸.

어머니
내가 쓰다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라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 걸.

<1936.12.초>

 

50.오줌싸개 지도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1936.초>

 

51.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12.추정>

 

52.기왓장 내외


비오는날 저녁에 기왓장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웁니다.

대궐지붕 위에서 기왓장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1936. 초 추정>

 

53.황혼(黃昏)이 바다가 되어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감기고……

저- 웬 검은 고기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西窓)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설움.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딩구오…… 딩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오.

<1937.1>

 

54.밤


외양간 당나귀
아-ㅇ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 키 담아 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1937.3>

 

55.달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거(伴倨)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정적(靜寂)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이 폭 젖었다.

<1937.4.15>

 

56.풍경(風景)


봄바람을 등진 초록빛 바다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위태롭다.

잔주름 치마폭의 두둥실거리는 물결은,오스라질듯 한껏 경쾌롭다.

마스트 끝에 붉은 깃발이
여인의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

이 생생한 풍경을 앞세우며 뒤세우며외 하루 거닐고 싶다.

------ 우중충한 오월 하늘 아래로,------ 바닷빛 포기포기에 수놓은 언덕으로.

<1937.5.29>

 

57.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버려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제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1937.봄>

 

58.그 여자(女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59.한난계(寒暖計)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 맨 한난계,
문득 들여다 볼 수 있는  운명한 오척육촌(五尺六寸)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與論動物),가끔 분수(噴水)같은 냉(冷)침을 억지로 삼키기에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零下)로 손가락질 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한 팔월(八月)  교정이 이상(理想)곺소이다.
피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세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이렇게 가만 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1937.7.1>

 

60.소낙비


번개, 뇌성, 왁자지근 두다려
머언 도회지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

벼룻짱 엎어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이
마음같이 흐린 호수 되기 일쑤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내 경건(敬虔)한 마음을 모셔드려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시다.

<1937.8.9>

 

61.비애(悲哀)


호젓한 세기의 달을 따라
알듯 모들 듯한 데로 거닐고자!

아닌 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는 외로우려니

아 --- 이 젊은이는
피라밋처럼 슬프구나.

 

62.명상(瞑想)


가츨가츨한 머리칼은 오막살이 처마끝,쉬파람에 콧마루가 서운한 양 간질키오.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1937.8.20>

 

63.바다


실어다 뿌리는
바람처럼 시원타.

솔나무 가지마다 새침히
고개를 돌리어 삐들어지고,

밀치고
밀치운다.

이랑을 넘는 물결은
폭포처럼 피어오른다.

해변에 아이들이 모인다.
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

바다는 자꾸 설워진다.
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 보고 돌아다 보고
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1937.9>

 

64.산협(山峽)의 오후(午後)


내 노래는 오히려
설운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暝想)은
아- 졸려.

<1937.9>

 

65.비로봉(毘盧峰)


만상(萬象)을
굽어 보기란------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白樺)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정말 구름이
비가 된다.

옷자락이
춥다.

<1937.9>

 

66.창(窓)


쉬는 시간마다
나는 창녘으로 갑니다.

------창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 주소.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旋風)이 인 게외다.

그래도 싸늘한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上學鐘)이 울어만 싶습니다.

<1937.10>

 

67.유언(遺言)


후어-ㄴ 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이밤에사 돌아오나 내다 봐라------
평생 외롭던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 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1937.10.24>

 

68.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69.거짓부리


똑, 똑, 똑,
문 좀 열어 주세요
하룻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 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 한걸.

꼬기요, 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 한걸.

<1937.>

 

70.산울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71.비오는 밤


솨- 철석!  파도소리 문살에 부서져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떼처럼 살래어,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레 여미는삼경(三更).
염원.

동경의 땅 강남(江南)에 또 홍수질 것만 싶어,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1938.6.11>

 

72.이적(異蹟)


밭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 바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 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 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 따라
연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餘念)없이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1938.6.19>

 

73.사랑의 전당(殿堂)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古風)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내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었다.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 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1938.6.19>

 

74.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1938.9.15>

 

75.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76.고추밭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놓고,
고추는 방년(芳年)된 아가씬 양
땡볕에 자꾸 익어간다.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밭머리에서 어정거리고
손가락 너어는 아이는
할머니 뒤만 따른다.

 

77.햇빛·바람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1938.추정>

 

78.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1938.추정>

 

79.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1938.추정>

 

80.귀뚜라미와 나와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알으켜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1938.추정>

 

81.달같이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 나간다.

<1939.9>

 

82.장미(薔薇)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놓은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幌 馬車) 태워 산에 보낼거나
뚜-구슬피
화륜선 태워 대양에 보낼거나

프로펠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에 보낼거나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이 내 가슴에 묻어다오.

 

83.산골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부를 수 없도다.
그신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1939.9.추정>

 

84.위로(慰勞)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 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1940.12.3>

 

85.팔복(八福)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1940.12.추정>

 

86.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1941.11.29>

 

87.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942.1.24>

 

88.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드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羊)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4.14>

 

89.사랑스런 추억(追憶)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비둘기 한 때가 부끄러운 것도 없이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1942.5.13>

 

90.쉽게 씌어진 시(詩)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6.3>

 

91.트루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92.흐르는 거리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 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보세'
몇 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휘장에 금단추를 삐었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임(來臨),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1942.5.12>

 

93.  달을 쏘다 (산문)

 

 달을 쏘다


번거롭던 사위(四圍)가 잠잠해지고 시계 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저윽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녘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휘양찬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었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얀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지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 소리와 숨소리와 귀또리 울음뿐 벅쩍 고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한층 고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깊은 사념에 잠기우기 한창이다. 딴은 사랑스런 아가씨를 사유(私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화(想華)도 좋고, 어린적 미련을 두고 온 고향에의 향수도 좋거니와 그보다 손 쉽게 표현 못할 심각한 그 무엇이 있다.
바다를 건너온 H군의 편지 사연을 곰곰 생각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다. 감상적인 그에게도 필연코 가을은 왔나보다.
편지는 너무나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 중 한 토막,「군아, 나는 지금 울며울며 이 글을 쓴다. 이 밤도 달이 뜨고, 바람이 불고,  인간인 까닭에 가을이란 흙냄새도 안다. 정의 눈물, 따뜻한 예술학도였던 정의 눈물도 이 밤이 마지막이다.」
또 마지막 켠으로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쫓아버리는 것이 정직할 것이오.」나는 이 글의 뉘앙스를 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에게 아픈 소리 한마디 한 일이 없고 서러운 글 한 쪽 보낸 일이 없지 아니한가. 생각컨대  이 죄는 다만 가을에게 지워보낼 수밖에 없다.
홍안서생으로 이런 단안을 내리는 것은 외람한 일이나 동무란 한낱 괴로운 존재요 우정이란 진정코 위태로운 잔에 떠놓은 물이다. 이 말을 반대할 자 누구랴. 그러나 지기 하나 얻기 힘든다 하거늘 알뜰한 동무 하나 잃어버린다는 것이 살을 베어내는 아픔이다.
나는 나를 정원에서 발견하고 창을 넘어 나왔다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든가 왜 나왔느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두뇌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그윽히 서서 닥터 빌링즈의 동상 그림자처럼 슬퍼지면 그만이다.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나 전가시킬 심보는 없다. 옷깃은  민감이어서 달빛에도 싸늘히 추워지고 가을 이슬이란 선득선득하여서 설운 사나이의 눈물인 것이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곳곳한 나뭇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매어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94.별똥 떨어진 데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렷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방듯이 받들어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박이 내려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이 점의 대칭위치에 또 다른 밝음(明)의 초점이 도사리고 있는 듯 생각킨다. 

 덥석 움키었으면 잡힐 듯도 하다.
마는 그것을 휘잡기에는 나 자신이 둔질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내 마음에 아무런 준비도 배포치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고  보니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에도 

또 다른 한 가닥 구실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까보다.
이 밤에 나에게 있어 어런 적처럼 한낱 공포의 장막인 것은 벌써 흘러간 전설이오.  따라서 이 밤이 향락의 도가니라는 이야기도 나의 염원에선  아직 소화시키지 못할 돌덩이다.
오로지 밤은 나의 도전의 호적이면 그만이다.
이것이 생생한 관념세계에만 머무른다면 애석한  일이다.  어둠 속에 깜박깜박  조을며 다닥다닥 나란히 한 초가들이 아름다운 시의 화사(華詞)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벌써 지나간 제너레이션의 이야기요. 오늘에 있어서는 다만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이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훠언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장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나무가 있다.
그는 나의 오랜 이웃이요 벗이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성격이나 환경이나 생활이 공통한 데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극단과 극단 사이에도 애정이  관통할 수 있다는 기적적인 교분의 표본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처음 그럴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다.  그의 앞에 설 때 슬퍼지고 측은한 마음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마는 돌이켜 생각컨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 없을 듯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박지 못하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할 수 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든 탄생시켜준 자리를  지켜 무진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
이 밤도 과제를 풀지 못하여 안타까운 나의 마음에 나무의 마음이 점점 옮아오는 듯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뼈저리듯하나 나의  젊은 선배의 웅년에 왈 선배도 믿지 못할 것이라니 그러면 영리한 나무에게 나의 방향을 물어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95.화원에 꽃이 핀다


개나리, 진달래, 앉은뱅이, 라일락, 민들레, 찔레, 복사, 들장미, 해당화, 모란, 릴리, 창포, 튜울립, 카네이션, 봉선화, 백일홍, 채송화,  다알리아, 해바라기, 코스모스 ------ 코스모스가 홀홀이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여기에 푸른  하늘이 높아지고 빨간 노란 단풍이 꽃에 못지않게 가지마다 물들었다가 귀또리 울음이 끝어짐과 함께 단품의 세계가 무너지고 그 위에 하룻밤 사이에 소복히 흰 눈이 내려,  내려 쌓이고 화로에는 빨간 숯불이 피어오르고 많은 이야기와 많은 일이 이 화롯가에서 이루어집니다.
독자제현!  여러분은 이 글이  씌어지는 때를 독특한 계절로  짐작해서는 아니 됩니다.
아니,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철로나 상정하셔도 무방합니다.  사실 1년 내내 봄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 이 화원에는 사철내  봄이 청춘들과 함께 싱싱하게 등대하여  있다고 하면 과분한 자기선전일까요.  하나의 꽃밭이 이루어지도록 손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생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딴은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을 지적거리는 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석한 것은 못 됩니다.  한 해 동안을 내다 간직해두어서야  겨우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봄바람의 고민에 짜들고 녹음의 권태에 시들고, 가을 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爐邊)의 사색에 졸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나의 1년은 이루어집니다.
시간을 먹는다는 (이 말의 의의와 이 말의 묘미는 칠판 앞에 서보신 분과 칠판 밑에 앉아보신 분은 누구나 아실 것입니다) 것은 확실히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루를 휴강한다는 것보다 (하긴 슬그머니 까먹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다 못한 시간, 숙제를 못해왔다든가 따분하고 졸리고 한 때, 한 시간의 휴강은 진실로 살로 가는 것이어서, 만일 교수가 불편하여서 못 나오셨다고 하더라도 미처 우리들의 예의를 맞출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들의 망발과 시간의 낭비라고 속단하셔선 아니 됩니다.  여기에 화원이 있습니다.  한 포기 푸른 풀과 한 떨기의 붉은 꽃과 함께 웃음이 있습니다.  노우트 장을 적시는 것보다 한우충동(汗牛充棟)에 묻혀 글줄과 씨름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는지, 보다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보다 더 효과적인 성과가 있을지를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나는 이 귀한 시간을 슬그머니 동무들을 떠나서 단 혼자 화원을 거닐 수 있습니다.  단 혼자 꽃들과 풀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참말 나는 온정으로 이들을 대할 수 있고, 그들은 나를 웃음으로 맞아줍니다.  그 웃음을 눈물로 대한다는 것은 나의 감상일까요.  고독, 정숙도 확실히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여기에 또 서로 마음을 주는 동무가 있는 것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화원 속에 모인 동무들 중에, 집에 학비를 청구하는  편지를 쓰는 날 저녁이면 생각하고  생각하던 끝 겨우 몇 줄 써보낸다는 A군, 기뻐해야 할 서유(書留:통칭 월급봉투)를 받아든 손이 떨린다는 B군, 사랑을 위하여서는 밥맛을 잃고 잠을 잊어버린다는 C군, 사상적 당착에  자살을 기약한다는 D군……  나는 이 여러 동무들이 갸륵한 심정을 내 것인 것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 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 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말이  나의 역설이나 나 자신을 흐리우는데 지날 뿐인가요.  일반은 현대 학생  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을 모른다고들 합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버려야 하나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주는 스승, 우리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놓아 울겠습니다.
세상은 해를 거듭 포성에 떠들썩하건만 극히 조용한 가운데 우리들 동산에서 서로 융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종전의 X가 있는 것은 시세의 역효과일까요.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이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 이상이견빙지(履霜而堅氷至) ------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노변(爐邊)에서 많은 일이 이뤄질 것입니다.

 

96.종시(終始)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
아침 저녁으로 이 자국을 밟게 되는데 이 자국을 밟게 된 연유가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시 살림집은 외따로 한 체뿐이었으나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기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  이곳에 법령은 없었으나 여인 금납구(禁納區)였다.  만일 강심장의 여인이 있어 불의의 침입이 있다면 우리들의 호기심을 저윽이 자아냈었고 방마다 새로운 화제가 생기곤 하였다.  이렇듯 수도생활에 나는 소라 속처럼 안도하였던 것이다.
사건이란 언제나 큰 데서 동기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작은 데서 더 많이 발작하는 것이다.
눈 온 날이었다.  동숙하는 친구의 친구가 한 시간 남짓한 문안 들어가는 차시간까지를 낭비하기 위하여 나의 친구를 찾아 들어와서 하는 대화였다.
「자네 여보게 이 집 귀신이 되려나?」
「조용한 게 공부하기 작히나 좋잖은가」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면 공분 줄 아나?  전차간에서 볼  수 있는 광경, 정거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광경, 다시 기차 속에서 대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생활 아닌 것이 없거든 생활 때문에 싸우는 이  분위기에 감겨서,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이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니겠는가.  여보게!  자네 책장만 뒤지고  인생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하는 것은 16세기에서나 찾아볼 일일세, 단연 문안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돌리게.」    나한테 하는 권고는 아니었으나 이  말에 귀틈이 뚫려 상푸둥  그러리라고 생각하였다.
비단 여기만이 아니라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이요, 오락이매 생활이 될 수 없고 생활이 없으매 이 또한 죽은 공부가 아니랴.  하여 공부도 생활화하여야 되리라 생각하고 불일내에 문안으로 들어가기를 내심으로 단정해버렸다.  그 뒤  매일같이 이 자국을 밟게 된 것이다.
나만 일찍이 아침 거리의 새로운 감촉을 맛볼 줄만 알았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에 포도는 어수선할대로 어수선했고 정류장에 머물 때마다 이 많은 무리를 죄다 꾸역꾸역 자꾸 박아 싣는데 늙은이, 젋은이, 아이 할 것 없이 손에 꾸러미를 안 든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그들 생활의 꾸러미요, 동시에 권태의 꾸러민지도 모르겠다.
이 꾸러미들을 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뜯어보기로 한다.   늙은이 얼굴이란 너무 오래 세파에 짜들어서 문제도 안 되겠거니와 그 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우수 그것이요, 백이면 백이 다 비참 그것이다.  이들에게 웃음이란 가물에 콩싹이다.  필경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의 얼굴이란 너무나 창백하다.  혹시 숙제를 못해서 선생한테 꾸지람 들을  것이 걱정인지 풀이 죽어 쭈그러뜨린 것이 활기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 텐데 내 눈으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만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듯  그렇게 자주 내 얼굴을 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벌써 요사(夭死)하였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가로 하고 단념하자!
차라리 성벅 위에 펼친 하늘을 쳐다보는 편이 더 통쾌하다.   눈은 하늘과 성벽 경계선을 따라 자꾸 달리는 것인데 이 성벽이란 현대로서 캄플라지한 옛 금성(禁城)이다.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으며 어떤 일이 행하여지고 있는지 성밖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알 바가 없다.  이제 다만 한 가닥 희망은 성벽이 끊어지는 곳이다.
기대는 언제나 크게 가질 것이 못 되어서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 총독부, 도청, 무슨  참고국, 체신국, 신문사, 소방서, 무슨 주식회사, 부청,  양복점, 고물상 등 나란히 하고 연달아오다가 아이스케이크 간판에 눈이 잠깐  머무는데, 이놈을 눈 내린 겨울에  빈 집을 지키는 꼴이라든가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꼴을 살짝 필림에 올리어본달 것 같으면 한 폭의 고등 풍자만화가 될 터인데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로 한다.  사실 요즘 아이스케이크 간판 신세를 면치 아니치 못할 자 얼마나 되랴.   아이스케이크 간판은 정열에 불타는 염서(炎署)가 진정코 아수롭다.
논을 감고 한참 생각하노라면 한 가지 거리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률이란 거추장스러운 의무감이다.  젊은 녀석이 눈을 딱 감고 버티고 앉아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서 번쩍 눈을 떠본다.  하나 가까이 자선할 대상이 없음에  자리를 잃지 않겠다는 심정보다 오히려 아니꼽게 본 사람이 없으리란 데 안심이 된다.
이것은 과단성 있는 동무의  주장이지만 전차에서 만난 사람은  원수요, 기차에서 만난 사람은 지기라는 것이다.  따은 그러리라고 얼마큼 수긍하였었다.  한자리에서 몸을 비비적거리면서도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어디서 내리시나요」쯤의 인사는 주고받을 법한데 일언반구 없이 뚱 -- 한 꼴들이 작히나 큰 원수를 맺고 지내는 사이들 갇다.  만일 상냥한 사람이 있어 요만쯤의 예의를 밟는다고 할 것 같으면 전차 속의 사람들은 이를 정신이상자로 대접할 게다.  그러나 기차에서는그렇지 않다.  몀함을 서로 바꾸고 고향 이야기, 행방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주고 받고 심지의 남의  여로(旅勞)를 자기의 여로(旅勞)인 것처럼 걱정하고, 이 얼마나 다정한 인생행로냐?
이러는 사이에 남대문을 지나쳤다.  누가 있어 「자네 매일같이 남대문을 두 번씩 지날 터인데 그래 늘 보곤 하는가」라는 어리석은  듯한 멘탈 테스트를 낸다면 나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기억을 더음어 본달것 같으면 늘이 아니라 이  자국을 밟은 이래 그 모습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 적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하기는 나의  생활에 긴한 일이 아니매 당연한 일일 게다.  하나 여기에 하나의 교훈이 있다.  횟수가 너무 잦으면 모든 것이 피상적인 것이 되어비리니라.
이것과는 연관이 먼 이야기 같으나 무료(無聊)한 시간을  까기 위하여 한마디하면서 지나가자.
시골는 제노라고 하는 양반이었던 모양인데 처음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가서 며칠 동안 배운 서울 말씨를 섣불리 써가며 서울  거리를 손으로 형용하고 말로써 떠벌려  옮겨놓더란데, 정거장에 턱, 내리니 앞에 고색이 창연한 남대문이 반기는 듯 가로막혀 있고, 총독부 집이 크고, 창경원에 백 가지 금수가 봄직했고, 덕수궁의  옛궁전이 회포를 자아냈고, 화신 승강기는 머리가 횡-했고, 본정엔 전등이 낮처럼 밝은데 사람이 물밀리듯 밀리고 전차란 놈이 윙윙 소리를 지르며 지르며 연달아 달리고 ------ 서울이 자기 하나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우쭐했는데 이것쯤은 있을 듯한 일이다.  한대 게도 방정꾸러기가 있어    「남대문이란 현판이 참 명필이지요」
하고 물으니 대답이 걸작이다.
「암 명필이구말구, 南자 大자 門자 하나하나 살아서 막 꿈틀거리는 것 같데」어느 모로나 서울 자랑하려는 이 양반으로서는 가당한 대답일  게다.  이분에게 아현동 고개 막바지에, ---- 아니 치벽한  데 말고, ---- 가까이  종로 뒷골목에 무엇이 있던가를 물었더면 얼마나 당황해했으랴.
나는 종점을 시점으로 바꾼다.
내가 내린 곳이 나의 종점이요, 내가 타는  곳이 나의 시점이 되는 까닭이다.  이 짧은 순간 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묻은 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피상적이 된다.  나의 휴머니티를 이네들에게 발휘해낸다는 재주가 없다.  이네들의 기쁨과 슬픔과  아픈 데를 나로서는 측량한다는 수가 없는 까닭이다.  너무 막연하다.  사람이란 횟수가 잦은 데와 양이 많은 데는 너무나 쉽게 피상적이 되나보다.  그럴수록 자기 하나 간수하기에 분주하나보다.
시그날을 밟고 가는 기차는 왱 - 떠난다.  고향으로 향한 차도 아니건만 공연히 가슴은설렌다.  우리 기차는 느릿느릿 가다 숨차면 가(假)정거장에서도 선다.  매일같이 웬 여자들인지 주룽주룽 서 있다.  제마다 꾸러미를 안았는데 예의 그 꾸러민 듯싶다.  다들  방년(芳年)된 아가씨들인데 몸매로 보아하니 공장으로 가는 직공들은 아닌 모양이다.  얌전히들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판단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나 경망스럽게 유리창을 통하여 미인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피상적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될지 모른다.  투명한 듯하여 믿지 못할 것이 유리다.  얼굴을 찌깨논 듯이 한다든가  이마를 좁다랗게 한다든가 코를 말코로 만든다든가 턱을 조개턱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악희(惡戱)를 유리창이 때때로 감행하는 까닭이다.  판단을 받는 당자에게 오려던 행운이 도망갈는지를 누가 보장할소냐.  여하간 아무리 투명한 꺼풀일지라도 깨끗이 베껴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윽고 터널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데 거리 한가운데 지하철도도 아닌 터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이  터널이란 인류 역사의 암흑시대요,  인생행로의 고민상이다.
공연히 바퀴 소리만 요란하다.  구역날 악질의 연기가 스며든다.  하나 미구에 우리에게 광명의 천지가 있다.
터널을 벗어났을 때 요즈음 복선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아침 첫차에 나갔을 때에도 일하고, 저녁 늦차에 들어올 때에도 그네들은  그대로 일하는데 언제 시작하여 언제 그치는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이네들이야말로 건설의 사도들이다.  땀과 피를 아끼지 않는다.
그 육중한 트럭을 밀면서도 마음만은 요원한 데 있어 트럭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신경행(新京行)이니 북경행(北京行)이니 남경행(南京行)이니라고 써서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다닌다.  그네들의 마음을 불 수 있다.  그것이 고력(苦力)에 위안이  안 된다고 누가 주장하랴.
이제 나는 곧 종시(終始)를 바꿔야 한다.  하나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형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도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출처 : '윤동주 서시의 하늘과바람과별과시에 관한것' - 네이버 지식iN)


윤동주

1917 :12월 30일 북간도 명촌동 출생

1925: 명동소학교 입학

1929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1 :대남자(大拉子)의 중국인학교 다님

1932: 용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 :평양 숭실중학교로 옮김

1936 :숭실중학 폐교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 리쿄오대학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오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

1945 :2월 16일 큐우슈우 후꾸오까형무소에서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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