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모음

 

1. 똥파리와 인간

 

똥파리에게는 더 많은 똥을

인간에게는 더 많은 돈을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떼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보라고 똥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릉 깊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내 고장이란 옛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똥파리에게나 인간에게나

똥파리에게라면 그런 곳을 잠시 쉬었다가

물찌똥이나 한번 찌익 깔기고 돌아서는 곳이고

인간에게라면 그런 곳은 주말이나 행락철에

먹다 남은 찌꺼기나 여기저기 버리고 돌아서는 곳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게 별 것 아닌 것이다

똥파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다

 

2.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3. 지는 잎새 쌓이거든

 

당신은 나의 기다림

강 건너 나룻배 지그시 밀어 타고

오세요

한줄기 소낙비 몰고 오세요

 

당신은 나의 그리움

솔밭 사이 사이로 지는 잎새 쌓이거든

열두 곁 포근히 즈려밟고 오세요

 

오세요 당신은 나의 화로

눈 내려 첫눈 녹기 전에 서둘러

가슴에 당신 가슴에 불씨 담고 오세요

 

오세요 어서 오떼요

가로질러 들판 그 흙에 새순 나거든

한아름 소식 안고 달려 오세요

당신은 나의 환희이니까요

 

4. 저 창살에 햇살이(햇살 그리운 감옥의 창살)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 고운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 다순 햇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꼬리만큼은 자라나

내 목에 와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 닿으면

어머니가 씹어주고는 했던

사각사각 베어먹고 싶은

빨간 홍당무가 된다.

 

5. 물따라 나도 가면서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건듯건듯 동풍이 불어 새봄을 맞이했으니

졸졸졸 시내로 흘러 조약돌을 적시고

겨우내 낀 개구장이의 발때를 벗기러 가지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오뉴월 뙤약볕에 가뭄의 농부를 만났으니

돌돌돌 도랑으로 흘러 농부의 애간장을 녹이고

타는 들녘 벼포기를 적시러 가지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동산에 반달이 떴으니 낼 모레가 추석이라

넘실넘실 개여울로 흘러 달빛을 머금고

물레방아를 돌려 떡방아를 찧으러 가지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 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본다

봄 따라 여름가고 가을도 깊었으니

나도 이제 깊은 강 잔잔하게 흘러

어디 따뜻한 포구로 겨울잠을 자러 가지

 

6. 돌멩이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많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7.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즘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대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8.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낮게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 맨 허리에도 있고

제 노동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휘여진 등에도 있다

높게는

그 허리 위에 거재(巨財)를 쌓아올려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부자들이 담벼락에도 있고

그들과 한패가 되어 심심찮게

시기적절하게 벌이는 쇼쇼쇼

고관대작들이 평화통일 제의의 축제에도 있다

뿐이랴 삼팔선은

나라 밖에도 있다 바다 건너

원격조종의 나라 아메리카에도 있고

그들이 보낸 구호물자 속이 사탕에도 밀가루에도

달라의 이면에도 있고 자유를

혼란으로

 

바꿔치기 하고 동포여 동포여

소리치며 질서의 이름으로

한강을 도강(渡江)하는 미국산 탱그에도 있다

나라가 온통

피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

 

9. 산국화

 

서리가 내리고

산에 들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찬서리 내려 산에는

갈잎이 지고

무서리 내려 들에는

풀잎이 지고

당신은 당신을 이름하여 붉은 입술로

꽃이라 했지요

꺽일 듯 꺽이지 않는

산에 피면 산국화

들에 피면 들국화

노오란 꽃이라 했지요.

 

10. 희망이 있다(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11. 아이고! I Go!(날마다 날마다)

 

차에 깔려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흉기에 찔려 죽고

총기에 맞아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임이다

공부 못해 죽고 대학 못가 죽고

취직 못해 죽고 장가 못가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아이는 단칸 셋방에 갇혀 죽고

에미는 하늘까지 치솟는 전세값에 떨어져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농부는 농가부채에 눌려 죽고

노동자는 가스에 납에 중독되어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여름이면 흙사태에 묻혀 죽고

겨울이면 눈사태에 얼어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낮에 죽고 밤에 죽고

아침에 죽고 저녁에 죽고

시도때도 없이 세상을 온통 죽음의 공동묘지

이 묘지에서 고개 들고 죽음이 세계에 항거한 자는

쇠파이프에 머리가 깨져 죽고

최루탄에 가슴이 터져 죽는다

 

12. 노래(죽창가)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13.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일이면 일로 손잡고 가자

천이라면 천으로 운명을 같이 하자

둘이라면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물이라면 건너주고

물 건너 첩첩 산이라면 넘어주자

고개 넘어 마을 목마르면 쉬어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가시발길 하얀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14. 사랑은(사랑) - 대학노래패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15.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노동자 노래단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 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웃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자유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일어나거라 쓰러지지 않았다

오월의 무기 무등산의 봉기는

총칼의 숲에 뛰어든 맨주먹 벌거숭이의 육탄이었다

불에 달군 대장간의 시뻘건 망치였고 낫이었고

한 입의 아우성과 함께 치켜든 만인의 주먹이었다

피와 눈물 분노와 치떨림 이 모든 인간의 감정이

사랑으로 응어리져 증오로 터진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이었다

 

노래하지 말아아 오월을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바람'

학살의 야만과 야수의 발톱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노래하지 말아아 오월을

바람에 일어나는 풀잎으로 '풀잎'

피의 전투와 죽음의 저항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학살과 저항 사이에는

바리케이드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는

서정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자격도 없다

 

적어도 적어도 오월의 광주에는!

 

16. 벗에게 조국과 청춘

 

좋은 벗들은 이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네

살아 남은 이들도 잡혀 잔인한 벽 속에 갇혀 있거나

지하의 물이 되어 숨죽여 흐르고

더러는 국경의 밤을 넘어 유령으로 떠돌기도 하고

 

그러나 동지, 잃지 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지금은 시련을 참고 견디어야 할 때,

심신을 단련하게나 미래는 아름답고

그것은 우리의 것이네

 

이별의 때가 왔네

자네가 보여준 용기를 가지고

자네가 두고 간 무기를 들고 나는 떠나네

자네가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준 말

 

"참된 삶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 향한 끊임없는 모험 속에 있다는

투쟁 속에서만이 인간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혁명은 실천 속에서만이 제 갈 길을 바로 간다는"

 

그 말을 되새기며

 

17.그대에게(지는 잎새 쌓이거든) - 개똥이

 

당신은 나의 기다림

강 건너 나룻배 지그시 밀어 타고

오세요

한줄기 소낙비 몰고 오세요

 

당신은 나의 그리움

솔밭 사이 사이로 지는 잎새 쌓이거든

열두 곁 포근히 즈려밟고 오세요

 

오세요 당신은 나의 화로

눈 내려 첫눈 녹기 전에 서둘러

가슴에 당신 가슴에 불씨 담고 오세요

 

오세요 어서 오떼요

가로질러 들판 그 흙에 새순 나거든

한아름 소식 안고 달려 오세요

당신은 나의 환희이니까요

 

18.고목 조국과 청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 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19.전사 2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아니 수백만 명이 죽어갈지도 모른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세계도처에서 나라 곳곳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산악에서 감옥에서

압제와 착취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어떤 사람은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 죽어갔다

경험의 부족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어떤 사람은

승리의 막바지에서 죽어갔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죽어갔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지하의 고문실에서

쥐도 모르게 새도 모르게 죽어갔다

감옥의 문턱에서

잡을 손도 없이 부를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피의 양분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보아다오 이 나무를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민족해방투쟁의 나무를 보아다오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 낸 것은

그들이 흘리고 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해방투쟁의 과정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끄럽게 쑥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20.학살 2

 

오월 어느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리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12시 나는 보앗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둔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낮이었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12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12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1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12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12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 낮이었다

 

12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12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잡이 없었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12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

 

21.진혼가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꽁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군(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어 주고 비벼 주고 핥아 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의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는

 

22.마지막 인사

 

오늘밤 아니면 내일

내일밤 아니면 모레

넘어갈 것 같네 감옥으로

증오했기 때문이라네

재산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네

노동의 대지와 피곤한 농부의 잠자리를

한마디 남기고 싶네 떠나는 마당에서

어쩌면 이 밤이 이승에서 하는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니

유언이라 해도 무방하겠네

역사의 변혁에서 최고의 덕목은 열정이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된 것은 아니네 지혜가 있어야 하네

지혜와 열정의 통일 이것이 승리의 별자리를 점지해준다네

한마디 더 하고 싶네 적을 공격하기에 앞서

반격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않으면

공격을 삼가게 패배에서 맛본 피의 교훈이네

잘 있게 친구

그대 손에 그대 가슴에

나의 칼 나의 피를 남겨두고 가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만세!

 

23.이 세상에

 

사슬로 이렇게 나를 묶어놓고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압제자 말고는

 

벽으로 이렇게 나를 가둬놓고

주먹밥으로 이렇게 나를 목메이게 해 놓고

배부를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부자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개처럼 묶어 놓고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짐승처럼 가둬 놓고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주먹밥으로 목메이게 해 놓고

잠자리에서 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압제자 말고

부자들 말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에 하나라도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그럴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 봐라

 

나와서 이 사람을 보아라

사슬 묶인 손으로

주먹밥을 쥐고 있는 이 사람을 보아라

이 사람 앞에서

묶인 팔다리 앞에서

나는 자유다라고 어디 한 번 활보해 봐라

이 사람 앞에서 굶주린 얼굴 앞에서

나는 배부르다라고 어디 한 번 외쳐 봐라

 

이 사람 앞에서 등을 돌리고

이 사람 앞에서 얼굴을 돌리고

마음 편할 사람 있으면

어디 한 번 있어 봐라

 

남의 자유 억누르고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남의 밥 앗아먹고

배부를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압제자 말고

부자들 말고는

 

24.어머니

 

어머니

 

그 옛날 제가 외지로 나설 때마다

동구 밖 신작로에 나오셔서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어머니

가가 먼 길 구풋하면 먹어두라고

수수떡 계란이며 건네주시고

옷고름 콧잔등에 찍어 우시던 어머니

 

이제는 예순 넘은 나이로

끌려간 자식놈이 그리워

철이 바뀔 때마다 옷가지 챙겨 들고

흰 고개 검은 고개 넘나드시는 어머니

 

서러워하거나 노여워 마세요

날 두고 언 놈이 뭔 말을 하더라도

내 또래 친구들 발길 뜸해지더라도

 

어머니 저를 결정할 사람은 저들이 아니니까요

사형이다 무기다 10년이다

사형 구형 놓기를 남의 집 개이름 부르듯 하는

저 당당한 검사 나으리가 아닌니까요

높은 공부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

사슬 묶인 나를 굽어보는

저 준엄한 판사 나으리가 아니니까요

 

나를 결정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고

날 낳으신 당신이고 당신 같으신 어머니들이고

날 키워 준 이 산하 이 하늘이니까요

해방된 민중이고

통일된 조국의 별이니까요.

 

25.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다른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구옥일까

아니면 대전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 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나도 여기서 차에서 내려

아이들이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저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사슬 풀고 오라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을 걷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집으로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 차는 멈춰 주지를 않는다

강을 건너 내를 끼고 땅거미가 내린 산기슭을 달린다

강 건너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26.편지

 

산길로 접어드는

양복쟁이만 보아도

혹시나 산감이 아닐까

혹시나 면직원이 아닐까

가슴 조이시던 어머니

헛간이며 부엌엔들

청솔가지 한 가지 보이는 게 없을까

허둥대시던 어머니

빈 항아리엔들 혹시나

술이 차지 않았을까

허리 굽혀 코 박고

없는 냄새 술 냄새 맡으시던 어머니

 

늦가을 어느 해

추곡 수매 퇴짜 맞고

빈 속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밥상을 놓으시며 우시던 어머니

순사 한나 나고

산감 한나 나고

면서기 한나 나고

한 지안에 세 사람만 나면

웬만한 바람엔들 문풍지가 울까부냐

아버지 푸념 앞에 고개 떨구시고

잡혀간 아들 생각에

다시 우셨다던 어머니

 

동구 밖 어귀에서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혹시나 또 누구 잡아가지나 않을까

머리끝 곤두세워 먼 산

마른 하늘밖에 쳐다볼 줄 모르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다시는 동구 밖을 나서지 마세요

수수떡 옷가지 보자기에 싸들고

다시는 신작로 가에는 나서지 마세요

끌려간 아들의 서울 꿈에라도 못 보시면 한시라도 못 살세라

먼 길 팍팍한 길

다시는 나서지 마세요

허기진 들판 숨가쁜 골짜기 어머니

시름의 바다 건너 선창가 정거장에는

다시는 나오지 마세요 어머니

 

27.철장에 기대어

 

잡아보라고

손목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그 손으로 편지를 써 보냈다오

옥바라지를 해주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이리 꼬시고 저리 꼬시고

별의별 수작을 다해도

입술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그 입으로 속삭였다오 면회장에 와서

기다리겠어요 건강을 소홀히 하지 마세요

15년 징역살이를 다하고 나면

내 나이 마흔아홉 살

이런 사람 기다려 무엇에 쓰겠다는 것일까

5년 살고 벌써

반백이 다된 머리를 철창에 기대고

사내는 후회하고 있다오

어쩌자고 여자 부탁 선뜻 받아들였던고

 

28.권력의 담

 

나는 나가야 한다 살아서

살아서 더욱 튼튼한 몸으로

나는 보여줘야 한다 나가서

나가서 더욱 의연한 모습을

나는 또한 보여줘야 한다

놈들에게

감옥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전사의 휴식처 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무기를 바로잡기 위해

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을

보라 창살에 타오르는 이 증오의 눈을

보라 주먹으로 모아지는 이 온몸의 피를

장군들 이민족의 앞잡이들

압제와 폭정의 화신 자유의 사형집행자들

기다려라 기다려라 기다려라

나는 싸울 것이다 살아서 나가서 피투성이로

빼앗긴 내 조국의 깃발과 자유와 위대함을 되찾을 때까지

토지가 농민의 것이 되고

공장이 노동자의 것이 되고

권력이 민주의 것이 될 때까지.

 

29.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함께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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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 모음 34편

1. 10월

김용택

부드럽고 달콤했던 입맞춤의 감촉은 잊었지만
그 설렘이 때로 저의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10월이었지요.
행복했습니다.

2.섬진강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 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마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

김용호 붙임

섬진강

섬진강 발원지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데미샘
노령산맥의 동쪽 경사면과 소백산맥의
경사면인 전북 진안 장수를 경계한
팔공산 상추막이골의 데미샘에서
발원한다.

섬진강은 유로연장 21.3km
유역면적 4,896평방 km로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3개도
11개시군을 거쳐 흐른다.

그 중에 유역면적 분포는 전라남도가 47%
전라북도 44% 경상남도 9%를 차지한
550리 물 즐기를 형성하고 있다.

진안군 백운면출발로 마령면을 거쳐 성수면을 지나
전북 임실군 순창군을 거쳐 전남 곡성읍에서
요천과 만나고 곡성군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하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 부터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경계를 따라 남해안의
광양만으로 흘러간다.

선진강 특징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순으로
5대 강에 속하고 자연상태가 제일 잘 보전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3.그때

김용택

허전하고 우울할 때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
어딘가 달려가 닿고 싶을 때
파란 하늘을 볼 때
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둥 떠가면 더욱더
저녁노을이 아름다울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둥근 달을 바라볼 때
무심히 앞산을 바라볼 때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
빗방울이 떨어질 때
외로울 때
친구가 필요할 때
떠나온 고향이 그리울 때
이렇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내 그리움의
그 끝에
당신이 서 있었습니다.

4.그랬다지요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5.그리운 꽃 편지

김용택

봄이어요.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 데 없이 나를 가둡니다.
숨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지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에서 제 생각에 머무셔요.
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6.그이가 당신이예요

김용택

 나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도 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당신입니다
나의 가장 부끄럽고도 죄스러운 모습을 통째로 알고 계시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일 터이지요
그분이 당신입니다
나의 아흔아홉 잘못을 전부 알고도 한점 나의 가능성을
그 잘못 위에 놓으시는 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일 테지요
그이가 당신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사랑이고 싶어요
당신의 한점 가능성이 모든 걸 능가하리라는 것을
나는 세상 끝까지 믿을래요
나는,
나는 당신의 하늘에 첫눈 같은 사랑입니다.

7.나는 당신의 꽃

김용택

내 안에
이렇게 분이 부시게
고운 꽃이 있었다는 것을
나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 이예요
당신에게 나는
이 세상 처음으로
한 송이 꽃입니다

8.나를 잊지 말아요

김용택

지금은 괴로워도 날 잊지 말아요.
서리 내린 가을날
물 넘친 징검다리를 건너던
내 빨간 맨발을
잊지 말아요.

지금은 괴로워도 날 잊지 말아요.
달 뜬 밤, 산들바람 부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보던 그 밤을
잊지 말이요.

내 귀를 잡던 따스한 손길,
그대 온기 식지 않았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

9.내가 불입니다

김용택

언젠가 부터
당신을 향해 타오르는 사랑의 불을
나는 물로 끌수 있을지 알았습니다

불길이 목울대를 넘나들 땐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천지를 헤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길은 갈증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어느덧
물로 끌 수 없는
큰 불길에 싸여 있는 내 가여운 영혼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천지를 헤매고도 남을
이 영혼을 당신은 아시기나 한지요

아,
그냥 두지요
재가 되도록 타게 그냥 두지요

불은 타올라야 합니다
타오르는 불에
몇 방울의 물은 물이 아닙니다
그도 따라 뜨거운 불입니다

아,
당신을 향해 타오르는
이 불길로 내가 다 타겠습니다

내가 불이 되겠습니다

10.누이야 날이 저문다

김용택

누이야 날이 저문다
저 물을 따라가며
소리 없이 저물어 가는 강물을 바라보아라
풀꽃 한 송이가 쓸쓸히 웃으며
배고픈 마음을 기대오리라
그러면 다정히 내려다보며, 오 너는 눈이 젖어 있구나

배가 고파
바람 때문이야
바람이 없는데?
아냐, 우린 바람을 생각했어

해는 지는데 건너지 못할 강물은 넓어져
오빠는 또 거기서 머리 흔들며 잦아지는구나
아마 선명한 무명 꽃으로
피를 토하며, 토한 피 물에 어린다

누이야 저 물의 끝은 언제나 물가였다
배고픈 허기로 저문 물을 바라보면 안다
밥으로 배 채워지지 않은 우리들의 멀고 먼 허기를

누이야
가문 가슴 같은 강물에 풀꽃 몇 송이를 띄우고
나는 어둑어둑 돌아간다
밤이 저렇게 넉넉하게 오는데
부릴 수 없는 잠을 지고
누이야, 잠 없는 밤이 그렇게 날마다 왔다

11.늘 보고 싶어요

김용택

오늘
가을 산과 들녘에 물을 보고 왔습니다
산골 깊은 곳
작은 마을 지나고
작은 개울들 건널 때
당신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산의 품에 들고 싶었어요, 깊숙히
물의 끝을 따라 가고 싶었어요
물소리랑 당신이랑 한없이

늘 보고 싶어요
늘 이야기하고 싶어요
당신에겐 모든 것이 말이 되어요
십일월 초하루 단풍 물든 산자락 끝이나
물굽이마다에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당신이 보고싶어서 가슴이 저렸어요

오늘
가을 산과 들녘과 물을 보고
하루 왼종일
당신을 보았습니다

12.단 한번의 사랑

김용택

이 세상에
나만 아는 숲이 있습니다
꽃이 피고
눈 내리고 바람이 불어
차곡차곡 솔잎 쌓인
고요한 그 숲길에서
오래 이룬
단 하나
단 한번의 사랑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랑입니다

13.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이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14.당신 없는 하루

김용택


해 뜨니
앞 강물은 저리 흐르요
당신 떠난 이 나라
쳐다볼 곳 없는 내 눈길이
먼 허공을 헤매이고 헛헛한 마음도
이리 기댈 곳 없으니
이 맘이 시방 맘이 아니요
차라리
이 몸 이 맘
이 강물이 다 가져가불고
저 강물에 얼른얼른
오늘 해도 져불면 좋것소.

15.들 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무슨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16.별 하나

김용택

당신이 어두우시면
저도 어두워요
당신이 밝으시면
저도 밝아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있는 내게
당신은 닿아 있으니까요
힘내시어요
나는 힘없지만
내 사랑은 힘있으리라 믿어요
내 귀한 당신께
햇살 가득하시길
당신 발걸음 힘차고 날래시길 빌어드려요
그러면서
그러시면서
언제나 당신 따르는 별 하나 있는 줄 생각해 내시어
가끔가끔
하늘 쳐다보시어요
거기 나는 까만 하늘에
그냥 깜박거릴게요

17.별일

김용택

양말도 벗었나요.
고운 흙을 양손에 쥐었네요.
등은 따순가요.
햇살 좀 보세요.
거 참, 별일도 다 있죠.
세상에, 산수유 꽃가지가
길에까지 내려왔습니다.
노란 저 꽃 나 줄 건가요.
그래요.

줄게요.
다요, 다.

18.보고싶어요

김용택


당신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은 마음을 돌리려고
아무리 뒤돌아서고 뒤돌아서도
당신은 나보다 빨리 도시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계십니다
당신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은 이 마음을
어디에다 다 감추고
보고 싶다는 이 말을
어디다 다 하겠어요
보고 싶어요
당신.

19.봄 옷 입은 산 그림자

김용택

그저께 엊그저께 걷던 길
어제도 걷고 오늘도 걸었습니다

그저께 엊그저께 그 길에서
어제 듣던 물소리
오늘은 어데로 가고
새로 찾아든 물소리 하나 듣습니다

문득 새로워 걷던 발길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귀기울여봅니다

아, 그 물소리 새 물소리
봄옷 입은 산그늘 강 건너는 소리입니다

20.봄이 그냥 지나요

김용택

올 봄에도
당신 마음 여기 와 있어요
여기 이렇게 내 다니는 길가에 꽃들 피어나니
내 마음도 지금쯤
당신 발길 닿고 눈길 가는 데 꽃 피어날 거예요
생각해 보면 마음이 서로 곁에 가 있으니
서로 외롭지 않을 것 같아도
우린 서로
꽃보면 쓸쓸하고
달보면 외롭고
저 산 저 새 울면
밤새워 뒤척여져요
마음이 가게 되면 몸이 가게 되고
마음이 안 가더래도
몸이 가게 되면 마음도 따라가는데
마음만 서로에게 가서
꽃 피어나 그대인 듯 꽃 본다지만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어요
당신도 꽃산 하나 갖고 있고
나도 꽃산 하나 갖고 있지만
그 꽃산 철조망 두른 채
꽃 피었다가
꽃잎만 떨어져 짓밟히며
새 봄이 그냥 가고 있어요.

21.빗장

김용택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 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 달아도 내달아도
속 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을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22.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 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23.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 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24.세상의 비밀들을 알았어요

김용택

닫힌 내마음의 돌문을열며
꽃바람 해바람으로 오신 당신
당신으로 하여
별이 왜 반짝이는지
꽃이 왜 꽃으로 피어나는지
세상에 가득한 그런 가만가만한
비밀들을 알게 되었어요

아, 내 가는 길목마다
훤하게 깔린 당신
돌부리 끝에 걸려 넘어져도
거기 언뜻 발끝이 아프게 부서지는 당신
이 초겨울 빗줄기 속에서도
들국 같은 당신의 얼굴이
하얗게, 하얗게 줄지어 달려옵니다

이 길에 천둥 번개 칠까 두려워요

25.슬픔

김용택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26.약이 없는 병

김용택

그리움이, 사랑이 찬란하다면
나는 지금 그 빛나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파서 못 견디는 그 병은
약이 없는 병이어서
병중에 제일 몹쓸 병이더이다

그 병으로 내 길에
해가 떴다가 지고
달과 별이 떴다가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수없이 돌아흐르며
내 병은 깊어졌습니다

아무리 그 병이 깊어져도
그대에게 이르지 못할 병이라면
이제 나는 차라리 그 병으로
내가 죽어져서

아, 물처럼 바람처럼
그대 곁에 흐르고 싶어요

27.집

김용택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며 가는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28.참 좋은 당신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29.푸른 나무

김용택


나도 너 같은 봄을 갖고 싶다
어둔 땅으로 뿌리를 뻗어내리며
어둔 하늘로는 하늘 깊이 별을 부른다 너는
나도 너의 새 이파리 같은 시를 쓰고 싶다
큰 몸과 수많은 가지와 이파리들이
세상의 어느 곳으로도 다 뻗어가
너를 이루며 완성되는 찬란하고 눈부신 봄
나도 너같이 푸르른 시인이 되어
가난한 우리나라 봄길을 나서고 싶다.


30.푸른 나무 1

김용택

막 잎 피어나는
푸른 나무 아래 지나면
왜 이렇게 그대가 보고 싶고
그리운지
작은 실가지에 바람이라도 불면
왜 이렇게 나는
그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지
생각에서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고
암만 그대 떠올려도
목이 마르는
이 푸르러지는 나무 아래.

31.푸른 나무 2

김용택

너를 부르러
캄캄한 저 산들을 넘어
다 버리고 내가 왔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리운 너의 이름을 부르러
어둔 들판 바람을 건너
이렇게 내가 왔다
이제는 목놓아 불러도
없는 사람아
하얀 찔레꽃 꽃잎만
봄바람에 날리며
그리운 네 모습으로 어른거리는
미칠 것같이 푸르러지는
이 푸른 나뭇잎 속에
밤새워 피를 토하며
내가 운다.

32.푸른 나무 3

김용택

나무야 푸른 나무야
나는 날마다
너의 그늘 아래를 두 번씩 지난다
해가 뜰 때 한 번
그 해가 질 때 한 번

걷다가 더울 때 나는 너의 뿌리에 앉아
너의 서늘한 피로 땀이 식고
눈보라칠 때 네 몸에
내 몸을 다 숨기고
네 더운 피로 내 몸을 덥히며
눈보라를 피했다
나무야
잎 하나 없는 잔가지 그림자만
맨땅에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내겐 푸르른 나무야
내가 서러울 때
나도 너처럼 찬바람 가득한
빈 들판으로 다리를 뻗고
달이 구름 속에 들 때 울었다
목놓아 운 적도 있었단다 나무야
푸른 나무야
우리 마을이 네게서 시작되고
네게서 끝나듯이
내 삶의 기쁨도
네게서 시작되고
네게서 이루어졌다

오늘은 나와 함께 맘껏 푸르른 나무야


33.푸른 나무 4

김용택

우산 없이 학교 갔다 오다
소낙비 만난 여름날
네 그늘로 뛰어들어
네 몸에 내 몸을 기대고 서서
비 피할 때
저 꼭대기 푸른 잎사귀에서
제일 아래 잎까지
후둑후둑 떨어지는 큰 물방울들을 맞으며
나는 왠지 서러웠다
뿌연 빗줄기
적막한 들판
오도 가도 못하고 서서 바라보는 먼 산
느닷없는 저 소낙비

나는 혼자
외로움에
나는 혼자 슬픔에
나는 혼자
까닭없는 서러움에 복받쳤다
외로웠다

네 푸른 몸 아래 혼자 서서
그 수많은 가지와
수많은 잎사귀로
나를 달래주어도
나는 달래지지 않는
그 무엇을, 서러움을 그때 얻었다
그랬었다 나무야
오늘은 나도 없이
너 홀로 들판 가득 비 맞는
푸르른 나무야

 

34.당신의 꽃

김용택

내 안에 이렇게 눈이 부시게
고운 꽃이 있었다는 것을
나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이에요 당신에게 나는
이 세상 처음으로
한 송이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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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찬 시 모음 34편

1.나의 소망   /  황금찬

정결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리라
그렇게 맞이한 이 해에는
남을 미워하지 않고
하늘같이 신뢰하며
욕심 없이 사랑하리라

소망은
갖는 사람에겐 복이 되고
버리는 사람에겐
화가 오느니
우리 모두 소망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후회로운 삶을 살지 않고
언제나 광명 안에서
남을 섬기는 이치를
배우며 살아간다.

선한 도덕과
착한 윤리를 위하여
이 해에는 최선을 다하리라.

밝음과 맑음을
항상 생활 속에 두라
이것을 새해의 지표로 하리라

2.낙엽시초   /  황금찬

꽃잎으로 쌓아 올린 절정에서
지금 함부로 부서져 가는 너
낙엽이여 창백한 창 앞으로

허물어진 보람의 행렬이 가는
소리가 없는 공허로 발자국을 메우며
최후의 기수들의 기폭이 간다

이기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저 찢어진 깃발들
다시 언약을 말자
기울어지는 황혼에
내일 만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고궁에 국화가 피는데
뜰 위에 서 있는 나
이별을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문을 닫으라
낙엽
다시는 내 가는 곳을 묻지 말라

3.오월이 오면   /  황금찬

언제부터 창 앞에 새가 와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심산(深山) 숲 내를 풍기며
오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산의 꽃이 바람에 지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날고 있는 제비가
작년의 그 놈일까?
저 언덕에 작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일까?

오월은 사월보다
정다운 달
병풍에 그린 난초가
꽃 피는 달
미류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
오월이다.

4.촛불   /   황금찬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대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국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5.  6월   /  황금찬

6월은
녹색 분말을 뿌리며
하늘 날개를 타고 왔느니.

맑은 아침
뜰 앞에 날아와 앉은
산새 한 마리
낭랑한 목청이
신록에 젖었다.

허공으로
날개 치듯 뿜어 올리는 분수
풀잎에 맺힌 물방울에서도
6월의 하늘을 본다.

신록은
꽃보다 아름다워라.
마음에 하늘을 담고
푸름의 파도를 걷는다.

창을 열면
6월은 액자 속의 그림이 되어
벽 저만한 위치에
바람 없이 걸려 있다.

지금 이 하늘에
6월에 가져온
한 폭의 풍경화를
나는 이만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다.

6.꽃의 말   /  황금찬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아라.
그래야 말도
꽃같이 하리라.
사람아.

7. 행복과 불행 사이    /  황금찬

길은
모든 길은
행복과 불행 사이로 나 있었다
나는 그 길로 가고 있다

바람이 파도를 일으킨다
내 배는
그 물결 위로 가고 있다

그네를 타고
앞으로 치솟다간
다시 뒤로 물러선다

정지되면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삶이란
흔들의자에 앉는 것이다

8. 梅花에 부치는 편지   /  황금찬

咸鏡南道 元山, 明石洞 一五번지
雨水節이었는데
濃霧 속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새벽 두시半이나, 세시였을 것이다
뜰악 梅花 나무 옆에서
맏딸 년을 안은 아내와 이별을 했다.
『당신이 가면 어떻게 살지요?』
『남편의 구실을 못해 미안하오』
『비가 오는데 그만 들어 가요, 몸이나 조심해야지』
『큰 소리로 해선 안돼요, 그리고 제 근심은 마세요』
『딸 년이나 잘 기르오』
아내는 통 말이 없다.
나는 몇 걸음 걷다 돌아 섰다.
세살난 딸년은 梅花 가지를 잡고 놓지 않았다.

어제 같은데 十三年이다.
이제는 보고 싶지도 않다.
만나면 무섭기만 하리라.

梅花 나무는 그 뜰에 지금도 서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컸을까
열 다섯 살 났을 내 딸년의
두 길은 컸겠지
그리고 이봄에도 꽃이 피는가

당신은 그 집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왜 이리 무서워질까요
故鄕이면서 天涯의 땅
梅花.

오양깐에서 잠자던 송아지는
어디로 끌려갔을까

9. 가을    /  황금찬

감나무
가지에
매미가 벗어 걸어놓은
여름옷
한 벌
밤이슬에
젖고 있다

10.가을바다    /  황금찬

지금 이 바다엔
아무도 없고
물새 한 마리와
나뿐이다.

우리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

너와 나는
항해사

파도는
우리들의 길이다.

가야 한다.
저 하늘과
산맥을 넘어서

바다는
인류의 눈물이다.
물새가 울고 있다.
나도 울고

바닷가에선
장미꽃 한 송이도
울고 있었다.

11. 겨울 기도   /  황금찬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장미나무
그 마른 잎새 위에
기도의 사연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눈나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흰 장미꽃처럼 순결한
그런 사랑으로 당신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눈나라의 성문이 열리듯
그렇게 문이 열리고
마음밭에 피는 사랑의 꽃.

소녀의 아침 기도는 끝났는데
그래도 눈은 내리고
겨울 장미밭에
순결한 장미는 피고,

걸어오려나
조용히 길을 내며
기다리는 눈언덕에
당신은 찾아오려나.

12.겨울 나무   /  황금찬

말하려나
참고 견디어온
긴 세월
보석으로 닦은
그 한마디의 말.

한줌
자랑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오늘 이 남루한 지대에서
주저할 것이 없으리.

노을이 걷히듯
끝나기 전
한가락 머리카락에 새겨둘
슬픈 피리소리.

시대의 겨울 나무여.
말하려나
이젠 말하려나.

13.그리움   /  황금찬

바람이 불어도
눈뜨지 않는
나무여.

파도로 출렁이는
그리움으로
네 앞에 서 있다.

14.길   /  황금찬

언덕에는 미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나는 언덕길을
전설처럼 걸어내리고 있었다.

누구나
한번은 오고
가는 길이라는데

왜 오늘 이 길엔
나 혼자뿐일까?

가는 길은 모두
이렇게 적막했을까?

이젠 외롭지 않다.
구름과 같이 가고 있다.

15.꽃 한 송이 드리리다   /  황금찬

꽃 한 송이 드리리다.
복된 당신의 가정
평화의 축복이 내리는
밝은 마음 그 자리 위에
눈이 내려 쌓이듯 그렇게 -.

꽃 한 송이 드리리다.
지금까지 누구도
피워본 일이 없고
또한 가져본 일도 없고
맑은 향기 색깔 고운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밀고
계절이 놓고 가는 선물처럼

잎이 살고
줄기가 살아나며
죽어가는 뿌리,
그리고 기후도 살게 하는

신기한 꽃
그 한 송이르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여.

어린 행복 위에
성장한 정신 위에
가난한 금고 안에
땅 흘리는 운영 위에
꽃이여, 피어나라.

임술년
새날 아침부터
이 해가 다하는 끝날까지
피기만 하고
언제나 지는 날이 없는 꽃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 또한 높아
하늘의 천사등도 부러워하는
그 꽃 한 송이를
축원의 선물로
드리렵니다.

16.나비의 소녀

황금찬

그 나비의 소녀도
지금쯤 늙었으리

구름의 언덕에서
장미의 노래를 부르던
나비의 소녀

내가 염소를 몰고
언덕을 오를라치면
소녀는 단발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한떨기 장미꽃을 부르곤 했었지

6월은
우리들을 슬프게 했었네

소란스러운 강물
6월은

나비의 소녀는
지금 어느 언덕에서
날고 있을까

구름은
피어 있는데
장미의 노래는
들려오지 않네.

17.나의 층계

황금찬

나의 처음 층계는
꽃이었다.

갈수록 그것은
돌층계였다.

그 위의 층계는
형극이었다.

앞서간 사람들도
이 층계를 밟고 갔을까

한 층계 사이가
천 린가, 만 리

그들도 이 층계에서
방황했을까

산다는 것은 피, 그리고 땀
다시 눈물이다.

이쯤에서 머무를 수 없을까
나의 형벌을.

18.너와 나의 거리

황금찬

우리들이 만나는 날엔
언제나 태양이 없었다.

네가 비운 술잔에
달이 뜨고

나는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를
네 귀에 담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멀고 가까움의 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19.달밤

황금찬

달을 보고 있었다
달이 익었다

그 익은 달을
9월의 사과처럼 따
먹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들어올린 것은 바다였다
사랑의 손톱 자국도 없는
칡넝쿨 같은
바다였다

우리가 달을 토해내자
바다도
수없이 많은 달을
토해내고 있었다.

20.바다 환상곡

황금찬

여름 바다에 오면
海員이 되고 싶다.
비단 돛을 올리고
검은 해리 전설의 인어가
사랑을 찾아 헤엄치는
그 찬란한 아침에

편지 속에
어느 독자가 보내준
해바라기씨 몇 개
지금 저 수평선
그 너머 꽃밭에서 피고

물결에 쓸리어
천 년의 연륜 빛나는
조개껍질로
목걸이를 만들어
집시의 살결
검은 여인
그 긴 목에 걸어주고
돌아서리라.

사랑의 비늘이
아직도 잠들지 않은
모래언덕에 앉아
피리를 불면
물새처럼 날아오는
바다 바다 여름 바다

불꽃 같은 열기가 식고
바다에 등불이 꺼지면
이베리아 반도
어느 고독한 섬 물새처럼
파도소리가 그리워
빈 고동들이 울고 있어라.

바다는
여름 바다는
사랑과
미움
그 사이에
살결 깊은 가슴으로
열리어 있었다.

21. 보석의 노래

황금찬

황홀한 모습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네 윤곽 부근에서
해가 솟고
우리는 목마르게 목마르게
너를 지켜보고 있다.

아름다움은 영원일레라
누가 네 앞에서
추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너는 이슬 보자기 속에서
눈을 뜨고 있다.

신화 속의 이카로스도
너를 찾아 떠났고
눈속에서 피는 매화도
너를 부러워했느니라.

거기가 어디쯤이었을까?
꿈 속에서 너를 잃어버린
그 회색의 바다

나는 오늘도 찾고 있다.
영혼의 보석 한 개
하늘 문을 열고

22.봄밤

황금찬

봄밤엔
잠이 오지 않았네
이 밤에 내가 네게
할 이야기는
행복하고도 슬펐던
긴 이야기.

목련꽃 가지에
창호지 초롱에
불을 켜 달아놓고
새벽이 올 때까지
편지를 쓴다.

내 마음 언덕에
봄 풀이 솟아나고
4월 바람은 꽃구름을
벽에 걸린 거울 앞까지
곱게 밀어 올렸다.

봄을 기다리던
겨울나무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밤바다의 물결은
아직도 멎지 않고
나의 길고도 짧은 사연은
끝이 없었다.

23.사랑과 지혜

황금찬

강물이 흐르다가
여울을 만나면
노래를 부른다.

나무는
바람 앞에서
고독한 독백으로
구름을 이야기하고.

나는 삶의
여울에선
언제나 울고 있다.

꽃은 사랑으로
피고
잎은 지혜로
자라는데.

이 밤에
외롭게 흘러가는
저 별 하나는
어느 곳에서 쉬게 될까.

삶의 사랑과
죽음의 지혜를 모르는 나는
이 바람 앞에서
망각의 피리를 불고 있다.

24.사랑의 눈

황금찬

집들의 눈은
창이고

내 영혼의 창은
눈이다

사랑은 수레바퀴와 같은
태양의 눈을
항상 뜨고 있었다.

25.사랑이 자라는 뜰

황금찬

아직도
내 체온이 식지 않은
풀 씨를 한 움큼
창 앞에 뿌려 놓고
새를 기다린다.

늙은 참새 한 쌍이
날아와
마음놓고
내 체온을 다 주워 먹었다.

따사한 정에
허기를 면하고
몸이 풀려 서늘한 표정으로
목례를 하고

얼마간 졸다가
구름 밭을 지나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지금 창 앞에는
새가 두고 간 사랑이
풀잎으로
자라가고 있다.

26.산골 사람

황금찬

그는 물소리만 듣고
자랐다
그래 귀가 맑다

그는 구름만 보고
자랐다
그래 눈이 선하다

그는 잎새와 꽃을 이웃으로 하고
자랐다
그래 손이 곱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평범한 가르침
선하고 착하게 살아라
네가 그렇게 살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나는
충성과 효도를 모른다
다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못하고
살아 갈 뿐이다

오늘
내가 남길 교훈은
무엇일까
나도 평범한 애비여서
선하고
착하게 살아라

사랑하는
아들아, 딸들아
이 말 밖에
할 말이 따로 없다.

27.숲 속 작은 집

황금찬

새가 되고 싶어
산으로 가네
노래부르는 새가
그리하여
너 닫힌 창 앞에서
문이 열릴 때까지
사랑의 노래를 부르리

꽃이 되고 싶어
들로 가네
겨울에도 피는 꽃이

사랑이 그리워
뿌리로 옮아다니며
너의 뜰에
하늘 향기로 피어나리

꽃이 되고자
새가 되고 싶어
숲 속 작은 집
주인 되어
돌아가리

28.아침

황금찬

아침을 기다리며 산다.
지금은 밤이래서가 아니고
아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을 맞으면
또 그 다음의 아침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아침을
이에 맞았고 또 맞으리
하나 아침은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맞은 아침은
아침이 아니었고
이제 맞을 아침이 아침일 것 같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그 아침에 날아올
새 한 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29.어머니

황금찬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게 일러 주는 말을
잊지 말고 자라나거라.

네 음성은
언제나 물소리를 닮아라.
허공을 나는 새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라.

칼이나 창을 가까이 하지 말고
욕심도 멀리 하라.

꽃이나 풀은
서로 미워하지 않고
한 자리에 열리는
예지의 포도나무

강물은 멎지 않고 흐르면서
따라 오라
따라 오라고 한다.

하늘을 바라보며
강물같이 흘러
바다처럼 살아라.

포도송이에
별이 숨듯…
바닷속에 떠 있는
섬같이 살아라 하셨다.
어머님이∼ 

30.우수절 부근

황금찬

모두 울고 있다.
이 계절엔.

오고 있는가
비도 내리고 있는가
겨울이 풀린 계곡에
메아리도
울리고 있는가

마음의 얼음도
풀리려는가
너와 나는
본래 적이 아니다
사랑이 오려는가

이 반목의 계절은
이제 가고
이해의 바다가
열리려는가.

우수절
강물도 풀리는데
나는 너를 미워할 수가 없구나
사랑하려고
죽기까지 사랑하려고
사랑 앞에는
원수도 없다고

들려오는가
해빙의 나팔소리가
이 계절에
메아리처럼 울려오고 있는가
이 우수절에.

31.진실의 나무에게

황금찬

언제나 하늘의 입을 열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너 나무여

바다 같은 귀를 열고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
의로운 과실이여

지금은 20세기말
진리를 위하여
저 언덕을 넘어야 하고
산악 같은 세파도
잠재워야 하느니
너 진실의 나무여

이성의 칼날은 선한 꽃인데
불의를 일삼는
오늘의 녹슨 파편들이
이 시대에 홍수처럼
흘러가고 있다

나무여
이 시대의 선한 나무여
사랑과 이해의 열매를
열리게 하라

간혹 구름이나
새들이 날아와 길을 묻거든
나무여
사랑과 이해의 길이
여기 있다고 말하라

나무여
말하려나
진실의 길은 언제나
등불 앞에 있다고
말하려나.

32.출발을 위한 날개

황금찬

선구자의 길은 험하고
또한 가난하다
하지만 언제나 광명을 찾고
길을 열어 현재를 미래로
날아오르게 한다

어둠 안에서 빛은 하늘이 되고
불의와 비정 안에서 선은
향기로운 장미의 꽃이 된다
이성의 칼날은
집 속에 숨어 있지 않고
바른 판단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내일의 소망은
더 크고 더 넓다
어제도 정의롭고
오늘도 의가 아닌 길은 가지 않지만
내일은 사랑으로 이루는 바다
그 바다 위에 구원의 배를 띄우라
이 일을 우리는 바라고 있느니

열매없는 잎만 무성한
나무뿌리에 도끼를 놓았다고
예언하라
저 나단의 입을 빌어
하늘은 언제나 푸르라고
그렇게 일러야 하고

이 땅의 올바른 지혜들을 위하여
다윗의 가락을 빌어
노래하여야 한다
선구자의 길은 좁고 험하지만
그 길에 하늘의 광명이 있느니
그것을 선택하는 이 시대의
빛나는 양심이 되자.

33.하늘

황금찬

대답하라고
천 년을
흔들어 깨웠느니라

들리는 것은
언제나 하늘에
파도소리

따라가고 있었다
해가 뜨고
태양이 기우는
그 허공
외롭지 않았다

반복되는 것은
아침이 열리는 것과
저녁이 오는 것일레

갈릴리
호숫가에
발소리

이제야 알겠노라
혼자 가는 것이라고
이제서야 알겠노라.

34.행복

황금찬

밤이 깊도록
벗 할 책이 있고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으면 됐지
그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친구여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연인은 있어야 하겠네

마음이 꽃으로 피는
맑은 물소리

승부에 집착하지 말게나
3욕이 지나치면
벗을 울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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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은 시 모음 71편

《1》가슴에 머무는 사랑

박고은

머물지 못하는 세월에
오랫동안 깊은 사랑으로 와서
내 안에 여울져 머무는 사람,
골짝 깊은 쓸쓸한 외로움 속
메아리 보내 힘이 되는 사람
무한대 하늘로 커가는 사랑이
이리도 흐뭇할 줄이야!

노상 섧은 나를 위하여
진실로 뜨겁게 울어주는
날로 불심지로 돋아나는 사랑,
오롯이 애틋한 그에게
잔 가득 부은 정 건네주고
가진 것 다 주고라도
마음꽃 한 송이 준비하여,
영원을 더듬어 가는 그를 쫓아
내 영혼도 순순히 닮고 싶다.

《2》가슴이 아리거든

박고은

서러운 이여
하늘이 무너지는 눈물방울
시린 손 마디마디 떨어지는
무슨 사연이 있거들랑
청산에 올라 잠시만 쉬어 오자

버릴수록 맑아지는 마음 길 따라
돌탑을 쌓아 올리며
'아직도 살아 있구나' 감사하자

붉은 낙조에 가슴 문질러
푸른 멍울 지우며
많이 아프고 지치어도
희망을 지피는 심정으로
다시금 웃으시라 환하게!

그래도 그대여 가슴이 아리거든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에
종이배 하나 띄워
끝없는 해원으로 노 저어가자

《3》가을 들녘

박고은

뮤즈가 깔렸다
갈바람 한 점
싸하니ㅡ 지나가는 들판

익은 가을을 짊어진
농부의 뒷모습에
숨 가쁜 노을이 따라가고
노을 자락 끝에 매달려 있는
애수 어린 小曲 하나

가을이 불을 지른다
들판이 온통 불이 탄다
금빛으로 타는 가을 들판
타다 남은 잔재 위로
어디서 날아왔는지

빨간 고추잠자리 두 마리
가냘픈 날개 위에
졸음 겨운 눈을 스르르 감고
꿈꾸기에 여념이 없다
지천으로 무성히 피어
갈대 숲을 이룬 가을 들판에서


《4》가을 앓이

박고은

해마다 이맘때면
자질자질 몸이 아프다

후끈한 열기와
짜릿한 바람기가 남긴
여름날의 상흔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만추의 늪에 빠진
카랑한 기러기 울음은
센치멘탈, 나를 또 울리고

스산한 바람 기류에
뒹구는 풍엽들
발걸음 자국마다
심장 앓는 가을
그저 저리기만 하다

《5》가을 정사

박고은

한 송이 꽃은 햇살 한 줌 입고
그리움을 쓰고 있을 게다
밤을 헤아리던 갈증으로
그대 이름을 부르며
아침을 맞이할 때
또……
나는
산을 그린다

우뚝 선 암릉들
감히 그 길을 들어서기에는 벅찬 가슴
뜨거운 열기처럼 부푼 욕심은 다시 손길이 간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암릉 가슴팍이 뜨겁다.
한 편으로는 잔잔한 호수 마음 같고
때로는 거친 파도처럼 밀쳐 낸다.

섬세한 손길
발끝의 감각이 비밀 문을 연다.
오르다
오르다
결국은 정상을 정복하고서야 긴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나를 허락하고 안아 준 거대한 암릉 가슴이 포근하다.

《6》가을이 깊어지면

박고은

온통 추상에 젖은 산천
가을이 갈빛으로 깊어지면
바람은 또 얼마나 꿈꾸며 가는가
무수히 계절을 밟고 왔을 바람은

텅 비워서 가득찬 풍요
올 맑은 사유의 눈을 떠서
온 누리 더불어 여물고 싶음이여
시떫은 젊음은 결 삭고
비린 욕망은 단물이 들어
한 알 홍시로 무르익고 싶다

여기저기서 우수수 지는 것들
나이만큼 가슴속에 지는 소리
섧게 지는 낙과를 주워
그 의미를 만져 보고
천심 묻은 영원의 뜰에 두고 싶다

끝내 모든 것이 떠나고 잃는대도
카랑한 정신과 내 안에 사랑만은 남겨
연륜의 강기슭 갈대를 흔들고 싶다 

《7》가을처럼 우리 사랑하자

박고은

가을은 그대 그리움으로
물들어
내 마음에 흐르고

코발트 빛 청명한 하늘같이
내 안에 자리한 그대
넓디넓은 들녘같이, 바다같이
깊고 풍량한 마음을 지니고
가을처럼 우리 사랑하자.

아름답게 펼쳐진 감빛처럼
곱게 번져오는 따스한 손길같이
서로 마음을, 가슴을, 사랑을 잡아주자.
그댄 내가 되고,
나는 그대가 되어, 가을에는
더 아름답고 예쁘게 사랑하자 우리..

첫 만남의 설레임처럼
풋풋하고 싱그러움 닮은 느낌으로
달콤한 첫 입맞춤처럼
눈 뜰 수 없는 수줍음 같은 사랑으로
가을처럼 우리 사랑하자.

모든 것이 풍성하고
알알이 꽉 찬 농익은 과실처럼
단맛과 포만감이 주는 느낌처럼
그대와 내가 서로 마음이며 눈빛 하나에도
늘 부자인 것같이 사랑하자 우리

이름만 부르고 읊조리기만 하여도 좋은 사람,
사랑한다 말만 입가에 흘러도 눈물이 나는 사람,
그대가 계셔서 좋은 이 계절
가을처럼 우리 사랑하자
사랑하는 나의 사랑아

《8》강가에 서서

박고은

깊은 속살 드러내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그대 사랑아
살며시 눈감고
귀담아 들어 보아라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에
증오와 회한 실어 보내고
옹이진 마음도 풀어 버리고
하얀 음률로
심연 두드리는 물소리
가만 들어 보아라

온갖 시름 잊어버리고
그대도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 가보아라
푸른 대양에 닿아보아라

《9》계절의 우수

박고은

그래 삶이란 구름무늬
한갖 덧없는 일장춘몽,
부귀영화란 것도
한 줄기 바람일지 몰라

지금은 가을, 인생의 가을
바람에 낙엽은 뒹굴고
빛 바랜 추억이 맴도는…….

머잖아 추운 계절이 온대도
마음 시리지 않기로,
다행히 여윈 손 잡아주고
빈 가슴 쓸어줄 이 있으니
올겨울 쓸쓸하지는 않으리

인업의 껍질을 벗고
뭇 사연은 사루어
찬 이슬에 묻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길,
가을이 진다 그만 돌아서자

《10》그 사랑

박고은

그대 눈동자에 내가 있어서
그 입가에 예쁜 미소 번질 때
수줍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대 눈동자 어둠이 깃들어
내 마음에 슬픔이 잠겨올 때
차라리 그대, 잊으려 했습니다

별이 지는 가슴에 그대 그림자
숨죽여 흐느끼며 어려올 때
그 사랑 다시 힘껏 품었습니다

《11》그대 사랑입니다

박고은

꽃이 지나간다
꽃이 지나갈 때마다
그림자로 남는 발자국이 향기롭다.
그대 그리움이 지나갈 때처럼……

시간이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더 깊이 더 많이 쌓이는 사랑이 곱다.
그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마음 빛으로 ……

바람 불고
해의 비늘이 내리는 언덕 넘어
그 어느 집 아궁이에서 불씨로 남아
꺼질 줄 모르는 열정은 늘 그대 편으로 서 있다.
어둡고 추운 날 길 잃어 방황할 때도
따뜻한 불씨 한 점 품은
가슴으로 사는 불새처럼 뜨겁다.
그대 사랑은……

때로는 허기진 그리움이어도
담벼락에 기대선 절룩이는 기다림이어도
눈멀고 귀 먹어도 보고 듣는 희망이요.
밝은 미래요 달디 단 미래의 선물
그대 사랑입니다!

《12》그대 하나의 사랑으로

박고은

그대 하나의 사랑으로
그대
마음속에 담긴
사랑에 기록을 읽으면서

그대 사랑에서 자라는
한 송이 꽃을 봅니다

붉게 물든
잎새 닮은 바람 소리가 발자국 그림자를 잃고
휘어진 길목으로 접어들면
낮별 하나 낯설다 한다.
잠시 허공을 베어내고서야
하얀 이름을 써 내려갈 때 빛을 기억하고
숲에서 빠져 나온다.

두 손을 움켜잡으면
따뜻한 체온
포근한 가슴이 미소로 번지고
막 피어난 꽃 눈빛처럼 향기롭고 예쁘다.
진즉, 놓을 수 없는 기억이다.
움켜쥔 사랑이다.

어둠이 겹겹으로 쌓여도
깜깜한 밤이어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랑이다.
그대가 피어 놓은 사랑 꽃
돌에서도 향기가 난다
그대 하나의 사랑으로……

나의 사랑아!

《13》그대 향한 소망은

박고은

내 청순한 소망은
마음 색색이 뽑은 비단실로
그대 고운 눈빛 짜는 것

쓸쓸한 그대 영혼에
이슬 송송, 꽃 한 송이
피워 올리는 일

그대와 나 두 가슴에
쌍무지개 걸어
아름다이 이어가는 정

그대 향한 내 소망은
진정 이것이라네

《14》그대에게 가는 길은

박고은

그대에게 가는 길은

아리도록 눈부셔 온다

긴 밤을 껴안고도 밤을 잃어버리는 날

한 줌 빛은 별이 되고
뚝뚝 떨어지는 시간의 기억들이
물비늘처럼 꿈틀거리면서 일어서서는
당신께로 갈 때
나는 이미 그리움을 입고 있다

창가 달빛은 기웃기웃 얼굴을 붉혀가며
눈만 깜박이고 진작 창을 열면 저만치
수줍은 듯 고개 떨구는 것이
꼭 나를 닮았다 내가 그랬으니,
그대 들어 오라 마음을 열면 노을 빛처럼
붉어진 가슴은 봉숭아물들이고 말지

하루하루 깊이 뿌리내린 지금은
그대 부름 없이도 길을 잃지 않는다
이렇듯 지금
그대에게 가는 길은

아리도록 눈부셔 온다

《15》그리운 추억

박고은

흙 냄새 너른 들녘
씨 뿌리고 땀 흘려
푸지게 가꿔 살던 곳

치맛자락 적시며
돌방구 뒤져 다슬기 줍던 강
올 여름도 멱 감는 애들이 있을까

저녁밥 짓는 연기가 자욱하면
꼴망태 등에 지고
소 몰고 돌아오던 아이들

매캐한 모깃불 피워놓고
대자로 평상에 누워
밤하늘 은하수 마시며
푸른 꿈 키우던 시절

그리운 고 모습
다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채워지지 않는 이 허기는
또 무엇으로 채워야할지

《16》그리움이 밀려오는 바다

박고은

그리움이 잔잔히 밀물져 오면
가뭇이 열리는 바다
갈매기로 날고픈 바램이여

잠재워도 설레는 물결
끝 모를 그리움의 출렁임에
가슴은 깃을 펼쳐 날으고
쪽빛으로 물이 드는 마음

진종일 몸부림치는 파도에
아린 상흔을 씻고
안타까움마저 훌훌 떨치면
숨 가삐 달려오는 포말 끝
절규하는 절정의 정념이여

짙푸른 물 다 삭히고도
몸서리치게 살아나는 물결따라
후드륵 나래치는 그리움
밤 찧는 등댓불과 지새운다

《17》기다림

박고은

기약 없이 길 떠난 사람아
강남 제비 돌아오듯
잊지 못해 다시 오거들랑
기껏 머리칼 날리는
꽃바람으로 오지 말고

봄빛 귓불에 닿아서
영혼의 깊은 골짝을
꽃물로 찰박찰박 적시는
감미론 향기로 오라

꽃샘바람 잘라먹고
화알짝 웃는 한 떨기 꽃송이
더없이 섧도록 살고 지고픈
진정 고운 사랑으로 오라

《18》꽃 같은 사랑아 그대보고 있으면

박고은

그대 보고 있으면
나는 그대 눈속에 있고,
그대는
내 가슴속에 꽃으로 피어 향기로 번져오고
최초의 울림처럼 느껴지는 꽃 태동에
나는 그만 눈 멀고 귀 멀고 맙니다.

허공을 베어내면 빛으로 터져 부서지듯
그대 그리움 베어내면 빠알간 꽃잎 같은
사랑이 이슬 머금어 빛나고
내 가슴은 이미 꽃물 들어
그대 손길을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너무도 눈부신 그대 사랑은
나에게 보석이요, 보물이기에
소중하고 고귀하여
마음속이고 가슴속 깊이깊이 숨기고 싶어
낮이고 밤이고
두 눈을 닫지 못합니다.

하늘을 보면
눈처럼 비처럼 음악처럼 내리는
그대 음성 한 마디라도 흘리지 않으려
두 손 모두 벌려 껴안습니다.
꽃 같은 사랑아

《19》꽃 빛 그리움

박고은

날 선 어둠 밤
별들이 주인공이듯
하나인 마음 밭
내 사랑
그대가 주인이 됩니다.

긴긴 기다림의 날
먼먼 그리움의 날
겹겹으로 쌓이고 쌓인 밤이어도
그대 사랑 하나이면
휘어진 길도 낯설지 않는
꽃길이요, 봄날

꽃잎에 창을 내어
하늘을 담고
호수를 담을 때,
물풀처럼 떠오르고 피어나는 것은
늘 그랬듯
그대 꽃 빛 그리움!

사랑이라고 부르고
사랑 앞에 그대 이름 넣으면
어느새 다가와 피는 꽃
매화 향기입니다.

《20》꽃잎 피는 꿈자리

박고은

그대 그립고 그리워
詩 한 줄잡아도
풀리지 않는 그리움

먹빛 드리운 창가에
견우직녀의 애틋한 전설
빛 한 자락 걸어놓고
그대 그려 깁는 고운 꿈

뚜벅뚜벅

그대 오는 꿈길마다
사랑 꽃불 환히 켜지고
일제히 일렁이는 꽃물결 소리
손끝에 묻어나는 꽃향기

둘이서 속살 태워 피워내는
붉디붉은 열꽃으로
더운 가슴 휘감도는 향취에
영혼 갈피갈피 고이는 미소,
그대와 꽃 피우는 꿈자리
밤새 사랑 꽃빛이 뜨겁다

《21》꿈을 사랑하는 사람아

박고은

사랑하는 사람아
네 꿈은 한밤에 돋는
별처럼 곱구나

고와서 노래되고
바람이 되어
티 없이 맑은 하늘
걷힐 것도 없어라

가만히 눈을 맞추면
반짝 웃는 별빛
은근한 네 속삭임에
나는 넋이 젖어
그립다는 생각뿐

너를 두고서 달리 뉘라서
속울음 울어 껴안겠나
가슴에 초록별 지면
삶마저 어두운데

《22》나 그대와 하나이고 싶습니다

박고은

멀리서 한밤
별이 되게하시는 나의 사랑이시여!
그대 뜰에 뜨고 질 때 그리움 꽃이 됩니다.

뚝뚝 떨어지는 이슬방울 소리
그대 마음속으로 투신하고 하나 되어
정갈히 담기는 사랑
나 그대와 하나이고 싶습니다.

멀리서 그림자로 번져와 꽃 자리를 펴
불 밝혀 놓고 오시는 길,
담벼락에 기대인 한 줌 바람은 옷깃을 나부껴
하얀 손 내밀고 허리 굽혀 정중히
그대 사랑을 안을 때
꿈을 꾸는 듯 두 눈을 감고 맙니다.

보고 싶다는 말, 그립다는 말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한 가슴속에 묻어둔 날은
더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단단한 호두 껍질처럼 마음속에 품고 안고 산
그대 사랑,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꽉 찬 열매로 단 맛이 깃들고 성숙한 나이를 먹고
더욱이 든든한 큰 나무로 서 계십니다.

때로는 하늘로
넓고 깊은 바다의 가슴으로 품고
넓은 대지처럼 안은 마음이기에 행복합니다.
아름다운 나의 사랑아!

《23》나는 갈대랍니다

박고은

갈대로 섭니다

술에 취한 듯
이리저리
춤을 추는
은발을 뒤 쓴 갈대
갈대로 섭니다

떠도는
백광부 넋인 양
꺼이 꺼이
울부짖는 갈대
나는 가을 갈대입니다

《24》내 사랑에게

박고은

참 좋은 내 사랑 당신
내 생명의 의미여
그대를 진정 사랑합니다

깊은 속 울음마저
맡겨 놓은 나에게
사랑은 풀꽃처럼
시드는 계절은 없습니다
이제는 아픔도 없을 겁니다

행여 요동치기를 멈추지 않는
태풍 속 바다의 멀미에
하얗게 엎질러 쓰러져도
사랑의 계절은 갯바위 운명처럼
오늘도 내일도 다함이 없습니다

끝내 잊지 못할 그대
영영 사랑할 겁니다
설령 그대 가고 없어도
내게 없어도

《25》내 안의 그대라는 한 사람

박고은

날마다 벗어 놓은 자리
벌겋게 달구어진 발자국마다
그리움으로 데이고, 꽃잎 지는 아픔보다
내 안의 그대 기다림은
천 년같이 멀어도 단맛이 있다

허기를 삼키는 벼랑 끝에는
한 사람 사랑이 고요히
두레박줄을 내려놓은 손길,
햇살 짜듯 섬세하고 포근한 눈빛은
그대 내 사랑

눈먼 비둘기처럼
낮과 밤을 그리듯 꿈꾸는 세상
그대 붓질 하나로 펼쳐진 세상이 아름답다

내 안의 그대라는 한 사람
이슬로 오는 갓 태어난 아침 햇살

《26》

박고은

순한 눈빛으로 맞이하는
감동의 파노라마
숨이 멎는 무한경

사락 사르락 활강하는
흰 나비, 나비 떼
온 우주를 채워서
비로소 텅 비는 고요

소복소복 내리는
저 눈발 속으로
나를 묻으며 숨지고 싶다
백일환몽을 꿈꾸며
마냥 잠들고 싶다

《27》눈이 내리면

박고은

펑펑 눈이 내려
산천은 온통 적막의 韻운
그 누구의 연서인가

쓸쓸한 겨울 풍경에
소복이 눈이 쌓이면
이 몸은 날뛰는 꽃사슴
치렁치렁 그리움 매달고
소식 뜸한 벗에게 달려가
보고픈 마음 전하리

'잘 가라' 작별의 잔 데운
님의 입술이라도
시린 영혼에 담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리

한 세상 고적하기만 했던
깡마른 씨앗 한 알
가슴에 떨구어
향기로운 꽃 피워 보리

《28》다시 사랑한다면

박고은

또다시 사랑한다면
그늘진 영혼에게 희망 주는
제야에 울리는 종처럼
첫 마음으로 돌아갈 거야

때로 풀썩 주저앉고 싶도록
걷는 길이 외롭고 지칠 때
선뜻 손잡아 주는 사랑

짙푸른 향나무 향같이
누군가의 가슴속에
오래 머무는 사랑을 할거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마음 접히지 않도록
늘 웃음으로 다림질해
포근한 안식처가 되는
사랑을 할거야

물살에 닳은 조약돌처럼
등 뒤 그림자로 묵묵히 따르는
그런 사랑을 할거야

《29》단풍잎

박고은

그대 느끼시나요
허공을 팽그르르 돌다
시린 어깨 위에
똑! 떨어져 앉는 단풍잎 하나,
그것은 숨 가쁜 내 떨림임을요.

행여 그대 아시나요
해 질 녘 그대 발밑에
허리 잘린 채 신음하는 단풍잎
붉디붉은 선혈의 내 생채기임을요.

하마 짐작이나 하실까요
두 눈 짓무르도록
그리움에 젖고 젖어
온 가슴 단풍으로 불타고 있음을
어쩜 생각이나 하실까요.

정녕
내가 사랑하는 그대는

《30》당신 바라기

박고은

나 당신 바라기,
큐피드 화살에 꽂힌 나
당신이 무지 좋아

그저 바라만 봐도 좋고
바보야 바보야 부르면
수줍게 볼 붉어지는 당신이
진짜 얼마나 좋으냐고?

내 팔을 뻗어도 내뻗어도
닿을 수 없는 하늘 키만큼이나
좋아 죽겠다!
내 마음 다 주고도
더 있음 주고 싶을 만치
좋아 죽겠다!

온 세상 다 가진 듯,
사랑스런 당신이 있어
정말이지 좋아 죽겠다!

《31》당신은 누구십니까

박고은

한 철 불새로 날아와
내 가슴에 둥지를 튼
당신은 누구십니까

화가의 붓놀림에
높아지는 그 하늘처럼
내 손짓에 따라
즐거이 움직이는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매일 세상 가시넝쿨에
온몸이 찔려 피 흘려도
내 앞에 서기만 하면
너털웃음 함박 짓는,
피에로 같은 사람
해바라기 같은 사람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32》동반자

박고은

불의 담금질 속에도
변치 않는 천동 같은 마음
수천 번 휘저은 칼로도
감히 쪼갤 수 없는
부부로 맺은 사랑
세상 어디에도
당신 만한 사람은 없어
천정배필 운명의 사랑
만천하 사랑 본이 될
청홍 빛 원앙 한 쌍 

《33》동백꽃 사랑

박고은

눈보라 칠수록 솟구치는
설원의 붉은 순정
절정의 순간 목숨 다한대도
희열로 벙그는 향취의 입술
독장 같이 찬바람 먹고
쌍코피 쏟으며
뚝뚝 질 운명일지언정
고운 동백꽃아!
너 홀로 사랑이구나
시린 겨울을 지우며
보조개 수놓을 봄이구나

《34》동행

박고은

달 보며 지새는 밤은
아름다운 동행

님 따라 내가 가나
뒤따라 님이 오나
서로 짝이 꼭 맞아
어디를 향해도
동심으로 타는 가슴

함께하는 길이기에
사랑이 잠시 눈 돌려도
그 서운함
눈빛 속에 감춘 채
미덥게 가리라

빈 손 안에
물기만 남을 인생
두 손잡고 가노라면
슬픈 것만은 아닌 삶

《35》등대

박고은

어둠을 사루는 자비
등대 불은 사랑의 눈짓이다
거친 풍랑 속 나침판은 제멋대로
엔진마저 고장 나 방향을 잃을 때
등대는 길잡이 손짓이다

지금 그대는 길 잃은 배
나 한줄기 등대 불로
믿음의 키 잃고
심해를 헤매는 그대 이끄네

한 치 앞 뵈지 않는 이 밤도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지 않기를
너울이 덮쳐도 표류치 않고
나래 쳐 나가기를

거칠고 험한 삶의 길
고비마다 풍파를 넘으며
안식의 돛을 내려 함께함이
참 행복이나니

오늘 밤 그대 가슴은
길 잃은 배
등대불로 밝혀 주마
사랑의 눈짓을 쏘아 주마

《36》만남

박고은

그 날 웃음이 참 좋았습니다
그건
봄을 알리는 시작이었습니다
지그시 응시하던
당신의 까만 눈망울은
밤하늘 샛별을 담고 있었고
말없이 다독이던 손동작은
편안함이 있어 좋았습니다.

그 날 이후 가슴에 품은 이름은
차마 토하지 못한 채
단단한 꽃씨로 박혀 버렸기에
이제 나는 당신으로 인해 피는 꽃이요
당신은 내 어깨에 머무는 햇살
불러주길 기다리는 노래
내 혼에 빛으로 내린 아침입니다

《37》매화

박고은

매운 눈서리 맞으며
인고로 홀로 견딘
매화의 고귀한 멋

연연한 정 맺혀
속속 깊이 붉어진 혼
暗香이 발아하여
송, 송이 터지는 순간

우주는 귀가 열리고
차마 숨죽인 가슴은
화음으로 가득 차

절조의 기품 맵시
화사한 그 미소에
결빙의 언 가슴은
사르르 녹아 집니다

《38》못 견디게 외로운 날

박고은

못 견디게
외로운 날은
와인 한 잔으로
짙 붉은 헛 꿈을 켜보네

외로움은
바람빛깔

고립된 가슴속에
청승 풀어 바람에
한 움큼 띄우고

못 견디게
정녕 외로운 날은
하늘 보며
머리 세워 갈망하는
살무사 눈빛 닮아 가네

《39》무지개로 뜨는 사랑

박고은

그대가 하늘이면
그대 품에 무지개로 뜨리라
화심 띠로 빚어낸
빨주노초파남보

빨간색 띠에 뜨거운 열정
주황색 띠에 눈부신 환희
노란색 띠에 고요한 평화
초록색 띠에 싱그런 순수
파란색 띠에 밝은 희망
남색 띠에 굳센 믿음
보라색 띠에 고운 사랑

겹 지른 아름다운 조화
신비의 비경
내게서 솟아난 무지개
그대 품에 걸리거든
영혼의 피리를 불어라

온 세상 다 퍼지도록
행복의 메아리 울려라

《40》바램

박고은

애틋이 사랑을 품었기에
줄 것 하나 없어
섭섭한 마음인데,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때로 돌아서서
되거퍼 슬퍼지는 일이 없도록

율 고운 현이 울리듯이,
상호 감응하는 가슴에
마음의 줄을 튕기면
오롯이 진심 우러나는
청징한 소리만 한결로
가슴에 울리기를……

티 없이 진정 사랑하기에
고운 눈빛만 주고받는
순한 바램을 가져요.

《41》바위처럼

박고은

차라리 세상만사 입 다문
바위처럼 살고파

가슴 깊숙이 품은 뜻
말로는 다 할 수 없어
묵묵히 침묵으로 견디는

비오면 빗물 머금고
눈이 오면 눈에 덮여
풍화작용에 무늬 지는 바위

세월이 준 상흔
빛살에 헹궈 잠재우고
때론 밤중에 깨어나
달을 안는 바위

애당초 잃음도 얻음도 없는
무명의 바위처럼 살고파

《42》봄바람아 불어라

박고은

살랑 봄바람이 불어
마른 가지마다 잎눈 뜨게 하고
잔설 덮인 산자락 매화도 피웠네

시냇가 버들가지 타며, 술래 도는
봄바람 웃음 속에 꽃구름 일고
살가운 사랑을 배어
연인 얼굴에 분홍빛 꽃 피우는데
떠난 벗도 돌아오는 아홉 굽이 사랑길

불어라 봄바람아 신나게 불어라
뜨겁게 불어서 정열의 꽃피우고
모질고 무딘 마음 흔들어
푸른 꿈을 빚어야지

봄바람 난 詩人의 가슴도
훗훗한 감성 뜨락 쓸어내고
누리 곳곳 훈김이 돌아
고운 노래 여울져 흘러야지

《43》봄이 오는 길목에 서서

박고은

겨우내 탕약처럼 달인 가슴
불러 보아, 봄이 어디만큼 왔나
강바람 타고 산 넘어오고 있는지
응달비알 선 나무 타고 오는지
우리들이 바라고 좋아하는 계절
해묵은 마음을 풀고
응어리진 가슴 해토할
봄이여 하느적 오렴
고적한 넋이 뛰놀고 하늘을 날
싱그러운 봄아 어서 오렴
증오도 애정처럼 쏟아 볼
자연도 사람도 길할
봄 그 속에 즐겨 살고파

《44》봄이 오지 않는 가슴

박고은

등걸같이 메마른 가슴
생 봄빛 채우면
활짝 꽃이 필까

먼 산하 타고 와
들녘을 밟는 봄내음
치마폭에 살풋 담으면
열아홉 순정마냥 설렐까

오라오라 봄이여
어디서 무얼 하는가
읊조리는 이 가슴은
지금은 한겨울 속

새움 트는 가지마다
봄바람 속삭이는데
어이해 내 마음의 담은
못 넘어오는 건가

야속타 봄이여
진정 봄은 어디로
누구를 위해 오는 건가

《45》사랑 속에 사는 이여

박고은

마음이 간절하면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는가

추위에도 개의치 않고
겨울 강변에 핀
코스모스의 고운 미소
붉게 타는 단풍나무의 열정

사랑이여, 우리도 저와 같이
매섭고 차가운 세상
고달픔이 밀물쳐도
한파가 몰아쳐도 마다치 않고
강인한 생명력을 불 밝혀요

가난한 마음 뜰에
한 그루 나무 뿌리 깊이 박고
평화의 하늘 우러러
묵묵한 사랑 올올이 새겨 보아요

참사랑의 소중함을 곱씹으며
가 없는 무량심으로
알찬 소망의 열매 맺어 보아요

《46》사랑이 그랬습니다

박고은

비 내리는 날
담벼락에 기대인 풀잎이 흔들릴 때
비에 젖은 그리움이 다가와
울컥!
그대 생각으로 눈물이 납니다.

유리창으로 제 몸 던져 전하는 빗방울은
투명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속울음까지 뜨겁게 흘리면서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은 내 마음도 뜨거워집니다.
비 오는 날 사랑이 그랬습니다.

이제 막 깊이 익어 가는 어둠 속까지
흠뻑 적시는 빗물에서 맨발로 뚜벅뚜벅 걸어
그대가 오고 가는 길목에 서성이며
행여 그대를 그리는 그리움이 젖을까
빨간 꽃을 펼쳐 놓습니다.

비 내리는 날은
커피 한잔을 타 놓고
커피 잔에 그리운 사람에 얼굴을 띄워
살포시 입 맞춥니다.
그대 향기를 마시고 싶어서입니다.

커피 잔에서 시간이 자라고 어둠이 일렁이고
잠들지 못한 생각들이 몸을 뒤척이고,
홑이불처럼 서걱이는 소리 따라 길을 나설 때
혹시나 그리운 사람을 만날까 두 눈을 감습니다 .

아름다운 사람이여,
이때
오십시오.
나의 사랑아!

《47》사랑해 말 한마디

박고은

"사랑해"
다정히 주고받는
말 한마디
시린 속을 뎁혀주고
화알짝 꽃피우는 마음

동공 속 채색되는 화색
가슴은 꽃물이 들어
번지는 삶의 향,
더 깊어진 존재의미

진심 우리들 소망은
지극정성 맺은 마음,
붉디붉은 사랑의 열매로
연연히 영글기를

《48》서로 사랑하고 싶다는 것은

박고은

그대는
나의 계절이다.
꽃이 피고 비 내리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릴 때, 가슴이 시리잖아

키 작은 하늘에서
울먹울먹 어깨를 들썩일 때
먹물 번지는 구름의 반란……
수억의 비 화살이 쏟아지고
날개 접은 그리움이 젖어 흔들릴 때,
기다림은 허공에 기대고 두 눈을 감지
풍경에 갇힌 모습을 보면서……

그래서 때로는
서로 좋아한다는 것은
꽃 마음 닮고 싶다는 것이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전설 속의 비익조가 되는 것이다.

그대가 그렇고
내가 그렇듯이……

좋아한다는 것은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과 시린 가슴일 수 있기에
그 모든 것을 견디어야하기에 소중한지 몰라.
진주조개처럼 불같은 칼날 앞에 맨살을 내어 주고
아픔과 고통을 견디어 낼 때,
비로소 하나의 진주를 잉태하듯
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래.

나의 아름다운 사랑아!

《49》서시

박고은

내 꿈은 감성이 흐르는 강

첫새벽 물안개 피는 그리움의 강
손수건 한 장 띄워 보내는
속 깊은 여심이고 싶다.

길손이 오가는 언덕, 수줍음 숨긴 채
안으로 여민 인종으로 맑은 향 피우는
들국화 연정을 품고 싶다.

순간, 바람에 내몰려 일제히 날아 오르는
철새 떼 움직임의 피날레
그 준열한 미학,
눈시울 뜨거운 감동을 갖고 싶다.

일깨우는 갈바람 속
흰머리 풀어 춤추는 갈대꽃의 포에지
떨리는 목소리로 읊는
한 편의 서정시를 쓰고 싶다.

《50》선홍빛 그리움

박고은

눈보라 속, 칼바람 속
붉디붉은 산수유
함께 붉고 싶은 마음
오로지 인고이어라

가지마다 조롱조롱
선홍빛 영근 그리움
목숨 뜨겁게 타는 사랑
하얀 고독으로 익는
내 사랑도 산수유 같아라

《51》세월이 힘겨워도

박고은

힘겹게 보낸 세월, 한 뼘 봄만 얻어도
사는 낙이 즐거울 텐데
어둡고 흉흉한 계절에
목매는 열원, 얼마를 더 불러야
영혼마저 해갈될 봄은 올까.

암울하고 답답한 가슴
가만히 앉아서 푸념만 할 수 없는
분명한 진실 하나,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위하여
고뇌하는 시대를 지고 매고
갈라진 맨발로 걷다가 쓰러질지언정
맨땅이라도 쳐보는 패기를 갖고
한겨울 몹쓸 추위와 대결을 해야 하리.

저 하늘이 지친다 해도 잠들 수 없는 몸
철통 같은 기막힌 성을 허물고,
무성한 잡초를 불태우고
창공을 누비며 우리는 날아야 하리.
아픈 쓴 가슴 헤집고 새살 찾아줄
진정 따스한 봄을 위하여
어둠 사뤄 마시고 미명 속을 나는 새같이
입술을 꽉 깨물고 우리는 날아야 하리.

《52》아름다운 계절

박고은

글썽이는 눈으로 가을들을 보라
수정구슬 부딪치듯 쏟아지는
저 햇살을 받으라
잎잎이 물들어 비단같이 빛나는
단풍 타는 소리를 들어보라

가을은 호두처럼 여물어가고
가을은 홍옥처럼 익어가고
가을은 달빛같이 가득 차오르고
가을은 아기잠처럼 깊어가고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
한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수채화 같은 세상
젖어드는 가을을 가슴에 안고
여기 나도 섰노라

《53》아름다운 포옹

박고은

그대와 나,
힘껏 껴안은 가슴은 바다
콩닥콩닥 하얀 숨결 소리
파도치는 황홀한 사랑

부드럽게 눈빛 마주 하고
감미롭게 혀끝을 핥으며
장미보다 더 붉은 입맞춤 하네

분홍빛 젖가슴 짜내듯
와랑 와랑 전신을 떨면서
아득히 동공 속으로 빨려들고
아득히 영혼 속으로 빨려가고

후끈 불끈 달아오른
두 몸은 한 몸이 되어
불 타들어 가는 불나방 한 쌍
살포시 가슴이 녹아버리고
살포시 마음이 녹아버리고

《54》애인

박고은

단 한 번의 키스로
앙다문 입술
열어버린 그대여

떨리는 전율로
귓불 비비며
情바다를 핥는
달디단 육체

고혹스런 날갯짓에
까무러쳐 죽고 싶은
사랑의 절정이여

춤추는 촛불처럼
사르르 녹아 피는 그대는
깊은 내 안에 뜬
황홀한 무지개

《55》얄밉도록 보고픈 사랑아

박고은

얄밉도록 보고픈 사랑아
우리가 줄곧 가진 건
지칠 줄 모르는 눈빛 하나
오늘 밤음 우리 둘이
미치도록 행복하자

혼이 화닥화닥 불 달아
꽃술 하얀 숨결
거칠게 토해내는 사랑
바위가 피 돌아 솟구치듯
몸서리칠 사랑

온 삭신의 결마다
열정의 전율이 요동쳐
가슴 짜릿한 고통 빨아올릴
몸 젖는 사랑 해보자
기찬 사랑 한 번 하자    

《56》연가

박고은

봄 깊어 한창인 저 장미꽃도
님이 있어 아름다운 것을
더 향기로운 것을

한 송이 고이 꺾어
님에게 보내면
나를 보듯 반가워 웃으실까
어쩌면 우실까

송이송이 꽃망울 터지는 소리
눈물 핑 도는 그리움
왈칵 솟는 보고품!

《57》온 가슴으로 당신 사랑을 안겠습니다

박고은

그리움은 하늘에 두고
기다림은 땅에 두어도
끝끝내는
하나로 만나는 그 날을 위해
꽃가지에 등불을 밝혀두자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
나를 버리고
그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한 곳에 영혼을 내려놓는 것이다.
외롭고 고독스러워도
그 사람을 위해 한 송이 꽃이 되는 것!

때로는 저녁노을이 황홀할 때
가슴 적셔 그 사람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자
사랑이고 사랑이라고……
그리운 사람이 사랑의 편지를 읽고 말없이
별로 떠 창가에 비출 때 눈물 흘리지 않게...
그리움은 하늘에 두고
기다림은 땅에 두어도
끝끝내는 하나 된 사랑일테니……

그 사람이 주는 그리움, 기다림
사랑의 비단실로 한 올 한 올 수놓아
사랑 꽃 피워 하나 될 사랑,
온 가슴으로 당신 사랑 꼭 안을 것입니다.
내 생애 단 한 번이 될
오직 단 하나의 사랑아!

《58》우리 사랑해요

박고은

계절은 쉼 없이 바람 불고
현실은 노상 고달파도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는
당신이 있어 행복해요

세상살이 굽이굽이
죽을 만치 괴롭고 아플 때
용기와 위안을 주는 당신
오로지 순금 빛 마음으로
세상 저편까지, 그대
그림자 되어 함께 갈래요

나의 천사, 내 마음의 보배
진정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 언제나 한결같이
서로 함께 사랑해요

《59》우리 차 한 잔 해요

박고은

함께 마주 앉아 주고받는
그윽한 향이 모락모락 피는
따끈한 한 잔의 차를 들면

채우지 못한 여백의 삶,
고된 세상살이, 이슬 녹듯 감치고
마음 따뜻이 피어나는 꽃,
일상의 여유란 차 한 잔의 깊이뿐

다정히 마주 앉은 자리
두 손으로 오롯이 건네는 찻 잔에
메마름 축여가며 고이는 사랑,
눈으로 오가는 정
잔 속에 우러나는 훈훈한 이야기는
진정으로 피우는 사랑의 맛,멋

서로의 가슴 뎁히며 나누는 마음
맞잡은 손에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
가난해도 풍성하고 미소 밝은 얼굴빛,
가실 줄 모르는 심향은
은근히 깊고도 넉넉하나니

우리 차 한 잔 꼭 함께해요.

《60》이런 당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고은

내게도
훤히 밖이 보이는 찻집에서
마주 보며 커피 한 잔
미소 한 모금, 나누고 싶은
당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람불어 시린 날
입술 델까 봐 호호 불어
버섯 찌게 떠먹여 주는 배려 깊은
당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빗방울 방울 가슴을 적실 때
혹시라도 내가 울까 봐
장미 한 송이로 마음 보담아 주는

홀로 주말을 보내는 날
조수석에 날 태우고,
둘이 노래 흥얼거리며
무작정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당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내게도
사랑의 손 잡아주고
행복을 느끼게해 주는 연인같은
당신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61》인연

박고은

아무리 안아도 한 아름이 못될 삶
혼자서 다독여도 다 못 이루는 정
나는 여기서, 너는 거기서
질긴 인연의 끈을
서로 맞당기고 끌려가는 우리

온 세상 비추고도 남은 빛으로
사람 맘속에 스미는 달같이
얼어붙은 별빛이 비수 날로 잘리고
마른 강물이 여울져 넘치는
깊고 도타운 정

굽이굽이 흐르는 강 언덕에
인연의 모둠 줄이 찬바람 사이 떨며
애젓이 낙엽을 떨굴지라도
차마 등 돌리고 선 긋는 일 없게
나의 친구여, 연인이여
우리가 쌓은 연연한 정은
대낮에도 속 눈 뜨는 별에게 전하고
이끼 핀 바위에도 꼭꼭 새겨 두련다

《62》잡을 수도 보낼 수도 없는 사랑

박고은

어쩌자고 사랑을 했을까

사랑할수록
온몸의 세포는 그리움에 물들고
허수아비처럼 외로움은 쌓여만 가는데
이토록 아픈 게 사랑일 줄이야

대체 어쩌자고, 어쩌자고 했을까
차라리 물빛 감은 인어처럼
물거품으로 점점이 흩어질 것을
얼음에 응고된 촉수처럼
박제된 채 영원히 잠들 것을

《63》저녁 놀 물 드는 창가에 서서

박고은

저무는 창가에 서면
조용히 눈 감지 않아도
선뜻 곁에 머무는 듯
떠오르는 슬픈 영상

아슴이 타는 저녁 놀
애잔한 눈빛이 닿아
이슬 맺히는 하늘가
외롭고 쓸쓸한 그 심정

한 자욱 또 한 자욱
오늘에 선 지금도, 어제처럼
먼 옛일을 헤아리는 눈,
낮에는 꽃으로 달래고
밤에는 뭇별로 말벗 삼고

고르지 못한 숨결을
행여라도 들킬까 봐
가만가만 창가에 다가와
바람인 양 흐르는 얼굴,
그 누가 아니래도
믿음이 아파옴은 왜일까....

《64》존재의 의미

박고은

때가 되면 모과 열매가
여태껏 키워 준 나무에게
감사하며 떨어지듯
이듬해 결실을 위해
미련 없이 떨어지는 비장미

자연 본성은 거스를 수 없는 것
누구나 적멸로 가야 하는 길
무변한 허허로움과
설움이 골을 이루어도
묵묵히 자신을 비우며
불안마저 초극하고 나면
평화의 안식이 기다릴 것을

시시로 버는 고독감
허울 죄다 털어버리고
무명시인에의 족한 영위,
하늘에 귀의하는 그 날 향해
어정 세월을 눕히며
절정의 잎 하나 떨군다

《65》중년의 고독

박고은

허심한 발걸음 옮기는 오늘은
세상이 어찌 이다지도 쓸쓸한지
홀로 허허 벌판에 내버려진 듯
파편진 가슴으로 토하는 읊조림은
차가운 바람벽에 흔들릴 뿐

심연한 고독으로 하여
첩으로 쌓여가는 이 적막함
세상은 날이 갈수록 낯설기만 하고
저물어 가는 육신과 묻혀 가는 존재감

비탈진 시린 가슴속에
이제는 무슨 불을 지펴야 할지
무슨 연유의 꿈을 엮어야 할지
여태 버티어 온 삶이 서럽고
무변한 쓸쓸함 달랠 길이 없다

《66》지는 가을

박고은

눈동자에 지는 빛
가을이 진다
우수수 낙엽이 진다

한 잎 두 잎 나래치는
노오란 은행잎의 贇舞윤무
그 애처러운 몸짓에
볼 비벼 울고 싶나니
긴 회랑 속 회한 때리는
추억의 가락이여

계절의 흐름에
무심함을 어쩌리
미워한들 무엇하리
괴로워한들 무엇하리

허물일랑 벗고서
지는 잎 겹겹이 덥고 가자
서럽게 지는 가을일랑
발부리에 묻고 가자

《67》창에 머무는 그리움

박고은

지척이 아니기에 더욱 보고파
창을 열면 미소 머금은 네 모습
꽃 이울던 하늘 종일 꼬나보던 날은
치솟는 그리움으로 얼마나 기다렸나

늘 반기던 창에서 서로 보지 못해
만남이 어긋나버린, 동혈보다
깊고 추운 겨울날 닫힌 창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덜컹덜컹 창을 휘감는 바람 소리뿐

그 언제쯤 마주할거나
다정히 속삭이던 네 눈빛
꿈결처럼 감미론 자장가 소리를

《68》촛불 한 자루 켜는 마음

박고은

1
하늘 우러러
두 손 모우는 마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촛불 하나 켭니다

떨리는 숨결로
타오르는 눈물 속의 향연
귀하게 소중하게 쌓은
선업마저 남김없이 사루는
목숨의 혼불이여

홀로 새긴 묵약이듯
지조 지켜 불타는 가슴에
뜨거운 사랑마저
성스러운 기도이게 하소서
영원의 불을 지피는
경외로운 신앙이게 하소서

2
숱한 세월 피맺힌 생채기
넘칠 대로 애끓는 회한은
은빛 고인 눈물 속에
말갛게 녹여주시고

무심코 가지 흔드는 바람결에
힘겨워 오열하는 심장도
잠재워 주시고

잘라내도 또다시 돋아나는
욕망의 잔뿌릴랑은
소지 사루 듯 불태워
학무리로 승천하게 하소서

《69》코스모스

박고은

내 그리움도 이맘때면
가을들녘
코스모스 넋쯤 필까

울먹인 눈동자
이슬 젖은 소녀 같이
웬지 눈물겨우면서도 해맑은
사랑 닮은 꽃

가만한 바람에도
꽃잎을 곧잘 흔드는
자조의 몸짓 코스모스야

가을 이맘때면
내 그리움도
속앓이로 피고 지는
코스모스의 넋쯤 필까

《70》허공에 이름 하나 수놓는 날

박고은

허공에 이름하나 수놓는 날
한 줌 바람은
그대
그리움으로 내리고
그리움은 별이 됩니다.

속을 비워낸
빈 소라처럼 바람, 파도
가을 빗소리를 담으면서
귀에 익은 발자국소리를 기억하듯
그대 오늘도 그러하셨지요.
홀로 그림자마저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눈뚝을 넘은 빗줄기는 뜨거웠으리라……

뚝뚝 꺾기는 관절처럼 굴절된 하루,
벌겋게 녹슨 시간을 닦는 수고와 발품 팔아
풍경을 사고 군중 속에서 나를 버리는 발걸음이
밝은 내일을 기억했으면 했습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한 송이 꽃이 필 때 그 순간처럼
작은 진통과 같은 지도 모릅니다.
향기를 품고 까맣게 익은 씨앗 한 톨을 잉태하는
산고의 아픔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대를 보고 있으면 향기가 나고
꽃의 언어로 말씀하실 때 그랬으니까요.

하여, 꿈속에서도
그 향기 그립고 그리운
나의 아름다운 사랑아!

《71》호수

박고은

맑은 물결이
흐르는 듯,머무는 듯
둥근 거울 속

무심히 던진 돌팔매에
산산조각 깨진 얼굴
침잠해버린 한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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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화시모음 75편

《1》10월에는   


 정연화

코발트빛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이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눈부신 가을 햇살처럼
따뜻한 가슴이고 싶습니다

10월에는

길섶에 핀 들국화처럼
은은한 향기를 지니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련한 그리움 하나 품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단 한사람 누군가 있어
잠 못 이루는 밤이어도

가을
가을 때문이겠거니 생각하겠습니다

《2》가슴속에 담긴 소설

정연화

어디에다 써야 할까

페이지가 너무 많아
어디에도
쓸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냥 돌아서서
그리움이라고 쓴다

떨리는 마음 한켠에……

《3》가을

정연화

어제 밤에는
선선한 바람 불었어요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별들도
가을을 품은듯
유난히 밝게 반짝였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 또한
가을밤의 정취였구요

한줄의 시를 쓰고자
밤하늘을 보고있다가
풀벌레 소리에
눈감고 귀 기울이다가

나도 몰래 스르르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발아래 놓인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고서……

《4》가을 속을 걸어요

정연화

가을하늘이 너무나
맑고 높고 청명합니다
이런 날 목적지 없이
그냥 가을길을 걸어요

걷다보면 계절에 마음이
물들어 가겠지요
누구라도 어디든
무작정 떠나고 싶은 계절

꼭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가을은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그림같은 풍경이 될것입니다

가을은
가을 그 자체만으로도
영혼이 자유로워 질 테니까요

가을속을 걸어요
가을속에 머무는 동안은
사람도 들꽃도
가슴에 품은 생각도
다 아름다워 지리라 여겨집니다

《5》가을 이야기

정연화

가을에는 온 가슴을 연다

코발트빛 하늘을 담고
뭉게구름도 담고
옷깃 스치는 바람도 담고

들꽃위에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담고
가만히 가을꽃도 담고

그리고
가을이기에 차오르는
지독한 그리움을 담으려고

《6》가을 향기

정연화

낮동안 내리쬐는 햇볕이
아직은 뜨거워서
손가리개를 하지만

극성이던 더위는
어느 새 한 풀 꺾였고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속에는
가을 향기가 묻어납니다

나뭇잎의 살랑거림도
철이 든 듯 온화해졌으며
하늘의 뭉게구름도
왠지 가을스러움을 주는군요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가을 향기 그대를
맞이할 꿈에
여심은 벌써
설레이는 마음이 되어
그렇게 가을속에 서 있습니다

《7》가을빛 닮은 사랑

정연화

향기 너무 짙은
색 진한 사랑말고
잔잔하고 은은한
가을빛 닮은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눈이 너무 부셔
눈을 감아야 하는 사랑말고
나뭇잎이
갈 빛으로 채색되듯
마음을 물들이는
가을빛 닮은 사랑이면 좋겠습니다

이 가을에

사랑이……
그대가……

나란히 손잡고
내 품에 안겨왔으면 좋겠습니다

《8》겨울 여자

정연화

차갑게 식은 커피를
조용히 내려다 보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여자

눈 내리는 날에
오히려
손과 마음이 더 따뜻한 여자

겨울에 태어난 여자
겨울에 이별한 여자
겨울을 사랑하는 여자

겨울에
외로움을 가장 많이 타는 여자

그 여자 겨울 여자

《9》고운님의 하루에

정연화

나의 하루를
곱게 물들이고 싶다

뻐꾸기 울음소리
산골의 아침을 열고
노오란 꽃 피워
봄을 알렸던 산수유

이젠 어여쁜 열매
주렁주렁 매달았네

계곡의 물소리에
앵두 산딸기
빨갛게 익어가고

잎새에 스치는
초록향기
가슴에
꼭 보듬고 살아가는

고운님의
싱그러운 하루에
나의 하루를
곱게 물들이고 싶다.

《10》그 마음

정연화

소중하게 받을게요
향기 담아
고이접어 놓겠어요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에 넣어놓고

밤하늘의 은하수
눈부시게 내리는 날

떨리는 가슴으로
살포시 펼쳐보겠어요

하늘엔 별들이
반짝반짝 빛날테지요

《11》그 사람 당신이예요

정연화

그사람
당신이예요
보고싶고
그리워서
늘 가슴이 아려오는 사람
그사람 당신이예요

모습 떠오르지 않는
신기루 같은 그대지만
아는건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지만
내 마음속의 그사람
당신이예요

볼 수 없는 곳
눈빛 닿을수 없는
아득히 먼곳에 있는 사람
그사람 당신이예요

그래서 이토록
아픈 그리움만
안겨주는 사람
그사람 당신이예요

밤하늘의 별빛에게
내 마음 띄워 전하고픈
오직 한사람 그대
그사람 당신이예요

《12》그냥 잊어라 합니다

정연화

사랑이라는 말을
이별이라는 말을
언제 우리가 했었던가요

하늘의 뭉게구름과
풀섶의 들꽃을 보며
아쉬운 마음에
그들에게 물어봅니다

가던길 유유히 흐를 뿐
바람에게 몸짓만 내줄 뿐
그냥 잊어라 합니다

잊을수 있겠는지요
지울 수 있겠는지요
진정 그럴수 있겠는지요

하지만……잊어라 합니다

그냥 잊어라 합니다

《13》그대 꿈속에서 만나요

정연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
둘이 하나 될수 없는 사랑

어떻게 하면 만날수 있을까
기도하는 날들이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가을이 오고
또 그렇게 가을이 가고

진정 그대를
못 보고 살아야 하는건가요?

오늘밤엔 꿈을 꾸겠습니다
꿈속에서나마 꼭 다녀가십시오
그대 꿈속에서 만나요

《14》그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연화

어제는 멍하니 창가에 앉아
가을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눈물이 주루룩 흐르더군요

비에 젖은 초목들의 모습도
내 마음을 보는 듯
어쩐지 애처롭게 느껴졌습니다

가끔씩 밀려오는 그리움과
뜻 모를 공허함의 실체와
울컥하는 가슴의 요동이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센티함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습니다
가을 때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대 때문에 이 가을이
한 여자를 눈물 글썽이게 합니다

《15》그대 미안합니다

정연화

그대 미안합니다
그냥 많이 미안합니다

그대 힘들게 해서
미안합니다

나를 아느냐 물어 오지만
벙어리가 된듯
말을 못합니다

가슴은 말 하라 하지만
머리가 아직은 아니라고

먼훗날 그대 심장의
불꽃같은 사랑이 식거든
말 하라 합니다

보라빛 그리움이
연분홍 설레임이
한줄기
바람되어 소풍 가는 날

나를 아느냐
또다시 물어온다면
그때는 말 하리다

그대를 진정으로
그리워하고 사랑했노라고

그대 가슴에
새겨진 멍울 벌 받을게요

그대 지금은 미안합니다

《16》그대가 선물입니다

정연화

가을타고 오신 당신
바라만 보아도 좋은당신
그대가 선물입니다

눈부신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꽃단풍

그 단풍보다 붉게 물든
가슴속 사랑
곱게 전하고픈 사람이
그대입니다

생각할수록
가슴 설레이게 하는
그리운 당신은
선물처럼 오신 그대입니다

《17》그대는 알고 계신가요

정연화

아침에 일어나면
내 첫 마음
오롯이 그대인줄
그대는 알고 계신가요

모닝커피 한 잔의
시간에도
그대 모습
떠올리고 있는 나
그대는 알고 계신가요

창밖에 서성이는
아련한 영상이
그대일것만 같아
내 마음 떨려옴을
그대는 알고 계신가요

이런 내 마음
그대는 알고 계신가요

《18》그대를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정연화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 그대지만
글 한 줄의 인연만으로도
느낌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정다감한 분이라는 거
소탈한 분이라는 거
계절의 변화를
마음에 담을 줄 아시는 분이라는 거

아무리 마음 아파도
상대방이 불편해 할까봐
속마음 드러내지 않는 분이라는 거

때로는 가끔 외로움에
풀섶의 들꽃에게라도
말 건네고 싶어하는 분이라는 거

그런 그대를 이젠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19》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

정연화

마음이 구름 위를 걷습니다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 위에
마음을 실은채
스치는 바람의 향기를 맡습니다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
길섶 한켠에 하얀 들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습니다
진주를 흩뿌려 놓은 듯
눈이 부시게 빛이 납니다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
앞서거니 뒷 서거니
노랑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길을 함께 합니다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
가슴에 그리움을 안고
소녀 같은 설레임을 안고
사뿐사뿐 걸음을 떼어놓습니다

《20》그대에게 보냅니다

정연화

소리 없이 내리는
가을비의 서정을
그대에게 보냅니다

잔잔한 가슴 안에
파문 일며 안겨오는
가을밤의 운치를
그대에게 보냅니다

흐르는 음악의 선율과
그윽한 커피 향기를
그대에게 보냅니다

은은하게 물든 사랑을
가을빛 그리움에 담아
이 밤 그대에게 보냅니다

《21》그렇게 살고 싶다

정연화

바람이 쉬어 가는 곳

새벽 산책 길
산새들의 지저귐에
아침이 상쾌한 곳

이슬 머금은
풀섶의 들꽃이 미소 주는 곳

한적한 시골에
자그마한
예쁜집 하나 지어 살고 싶다

텃밭에 상추 가꾸고
시냇물에 발 담그며

그렇게 살고 싶다

오고가는 계절의 변화와
가슴으로 내리는 밤비에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지만

진달래의 여린 미소
설레이는 봄도 찾아 올테니

그렇게 살고 싶다

《22》그리움만 쌓이겠지요

정연화

잊는다 말하고
지금껏
잊지못하고 있음은

아직도 내 가슴에
그대가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안녕이라 말하며
슬픈 이별을 했어도

그대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앉았습니다

잊는다
잊어야지
헤아릴 수 없이 말했지만

정말로 훌쩍 가겠다 말해오면
못 잊어
또다시 그리움만 쌓이겠지요

《23》그립고 그립던 사람

정연화

가을비 추적추적
흐느끼듯 내리는 날
그립고 그립던 사람

한때 사랑했던 사람
한때 못 잊어
가슴앓이 했던 사람

가을비에 나뭇잎이 젖고
아픈 가슴이 젖어 들고
가을 들꽃에 빗물이 어리고

뜨겁게 고인 눈물은……

가을비가 데리고 온
슬픈 연가

또다시
그 날의 그립고 그립던 사람

《24》그립기만 한 당신입니다

정연화

안을 수 없는 당신
바람인줄 알았는데
그리움이었습니다

잠시 머물다 갈
바람인 줄 알았는데
지독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이제는
안을 수 도
보낼 수도 없는 사람

못잊어
가슴 한켠에 묻어야 할
그립기만 한 당신입니다

《25》기다림

정연화

이렇게 애타는 마음
그대는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알고도 모른척 딴곳을 보시나요

어제밤 창밖에
달빛이 하얗게 내렸지요

그 달빛을 보는순간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별빛은 또 왜 그렇게
아름답게 반짝이던지

오늘밤 달빛 맑게 비추거든
은하수 별빛 동화처럼 흐르거든

그대 내 창가에 다녀가 주실래요

《26》꽃단풍 그대

정연화

내 마음
철없이 설레일 때

꽃단풍 그대는
서늘한 찬바람에
몸 아파
가슴앓이 했군요

노랗게 아리다
붉게 토해낸 가슴

눈 속에 담을게요
마음으로 보듬을게요
깊이 더 오래
가슴속에 간직하겠어요

《27》나와 같은 그대

정연화

잡히지도 않으면서
보고 있는 모든 풍경이
마음만 쓸쓸하게 하는
눈물나도록 이상한 계절

산과 들과
그리고 허허로운 가슴에
홍단풍 붉게 타 오르면

나와 같은 그대
살포시 다가와 내 손 잡아줘요

《28》내 안에 있는 당신

정연화

멀리 그 어디에 있든
항상 내 안에 있는 당신

가슴 깊이 그리움
쌓이는 날은
흔들리는 잎새가 되었다가

안개비 내리는 날엔
길섶 한 모퉁이
이름모를 들꽃으로

가끔은……

뜻 모를 의미로 다가와서
바람처럼 머물다
내 맘 흔들고 가는 당신

떠나 보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길고 긴 그리움의 시간들

오늘도 그대는
내 마음 안에 들어있는
그리운 당신입니다

《29》너무 궁금하니까요

정연화

어디에 살고 있는지
나이는 몇살인지
키는 또 얼마인지……

전체적인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궁금하니까요

《30》능소화 연정

정연화

얼마나 긴 세월을
흐느끼다 기다리다
꽃이 되었을까?

아니 오시는 님
못잊어 줄기마다
붉은 꽃잎 피웠네

그리움에 시린
아련한 몸짓
애처로이
담장타고 흘러라

혹여 님 오시려나
눈물로 지새운
가슴앓이 나날들

님이시여
지나시는 길
능소화 만나거든

고운 눈길 담은
따뜻한 마음으로
한번 안아주고 가옵소서

《31》당신의 여자예요

정연화

내리는 가을비에
쓸쓸함을 느끼는 여자

흐르는 슬픈 음악에
마음 우울해 하는 여자

커피를 사랑하는 여자
들꽃과 친구가 된 여자

그 여자를 안아주세요
그 여자를 지켜주세요

당신의 여자예요

《32》당신이 떠난 빈자리

정연화

잠시 비운 자리이지만
아주 떠난것 마냥 허전합니다

기다려지고
애가 타는 마음에
하루에도 몇번을
할일없이 서성거립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생각하니 이상합니다

있을때는 잘 몰랐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무덤덤했었지요

이 도시가 쓸쓸하고
마음 안 전체가 텅 빈 것처럼
허허롭기 그지없습니다

당신 떠난 빈자리에
가을바람 하나 옷깃을 스쳐갑니다

《33》마음의 문

정연화

아직도 마음의 문을 닫고 사시나요
감추고 숨길것이 왜 그렇게 많아요
속시원히 털어놓으면 될것을
가두어 놓으면 너무 무겁지 않나요

숨이 막힐것처럼 보여서
내 마음이 다 답답해요
이젠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람을 믿고 속마음 드러내봐요

사람들께 기대어 봐요
다 좋은 사람들이예요
털어놓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 질겁니다

응원할게요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거예요
사람들 속에 서 있는
그대를 비추는 햇살이
오늘따라 얼마나 화사하고 예쁜가 좀 봐요

《34》마음이 먼저인 사랑

정연화

서로 마주 본다고
다 사랑일까요
진정한 사랑일까요

활활 타 오르는
불꽃같은 사랑말고
음악처럼 흐르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가슴깊이 스며드는
잔잔한 사랑이면 좋겠어요

먼곳에 있더라도
마음향기가 천리를 날아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온유하여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마음이 먼저인
진실한 그대와 나이고 싶어요

《35》바람으로 오신다면

정연화

어디선가 바람 불어와
내 찻잔 앞에 머물면

그 바람 님인줄 알고
가서 덥석 안길 것입니다

그러다 바람이라면
흩어져 날리는
한갓되이 바람이라면

나 또한 스치는
바람되어
그리운이의 가슴을
두드리고 갈것입니다

가을은 또 그렇게
그리움을
데리고 오려나 봅니다

《36》봄처럼 오실 그대를 위해

정연화

바람 한줄기와
구름 한점과
포근하게 스미는 공기에
마음의 앞가슴 풀어헤칩니다

앞다투어 피어낼 꽃들과
초목들의 기척에
마음의 귀 활짝 열어봅니다

봄처럼 오실 그대를 위해

그대처럼 오실 새 봄을 위해

《37》부부

정연화

당신과 나 우리 서로
남남으로 만나서
하나되어 부부가 되었고

두 눈에 눈물 흘리지 않게
해 주겠다며
손가락 걸고 약속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뜻대로 잘 안 돼
약속 못 지키고 고생시켰다며

뒷모습 보이고
쓸쓸한 모습으로
돈벌러 나가던 당신

그 모습 차마 못보고
마음 짠해져 울먹였습니다

가슴에 멍 같은 눈물 맺히던 그 날……

《38》비밀

정연화

살포시 곁에 왔어요
그래서
가슴에만 담으려구요

아무도 눈치 못채게
꼭 안고 있을거예요

바람도 꽃망울도
눈부신 햇살도
못본척
눈감아 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그대는 알아야지요

밤하늘의 맑은 은하수
쏟아질듯
그대에게 내리거든

내 비밀이라 생각해줘요

《39》사랑 때문인가 봅니다

정연화

못견디게 더운 날에도
가끔씩 불어오는 솔바람에
가슴 가득 시원함을 느끼고

답답한 느낌의 불편함도
여름이니까라는 이해심이
나도 모르게 생기는건
아마도 누군가를 향한
설레이는 마음이지 싶습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유연함
느긋해지는 마음의 여유
생각을 해보니
아마도 누군가를 향한
가슴속 사랑 때문인가 봅니다

《40》사랑 참 어렵다

정연화

한사람을
가슴안에 둔다는 것
사람이 사람에게
좋은감정을 가진다는 것

눈빛을 느껴야 하고
마음이 통해야 하고

그러다 용기내어
고백의 시간을 가져야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기까지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를
얼마나 반복해야 하는지

그러나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가슴만 앓다가 돌아서는……

사랑 참 어렵다

《41》사랑을 고백해요

정연화

언제부턴가
차츰 좋아진 그대
그대만 떠올리면
가슴이 뛰어요

안그런척 애써
다른곳을 보고있어도
그대만 생각하면
가슴이 마구 뛰어요

이 마음
그대에게 말할게요
사랑을 고백해요

《42》사랑인가 봅니다

정연화

창가를 비추는 아침 햇살처럼
투명한 화사함을 주는 사람

마음을 먼저 보여주는 사람
그 순수함에
가슴이 봄처럼 따뜻할것 같은 사람

일상속의 기쁜 이야기와
드러낼수 없는 속마음을
문자로 빼곡히 전하고 싶은 사람

그랬을때
마주보고 이야기 한것처럼
장문의 글을 정성껏 보내오는 사람

내가 아프면
자신이 아픈듯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아파하는 사람

봄에는 향기실은 봄바람으로
여름에는 신록의 싱그러움으로
가을에는 조금은 센치한 모습으로
겨울에는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으로

그렇게 일년 열두달을
설레임을 품고
계절이 되어 다가오는 한 사람

사랑인가 봅니다
생각해 보니 사랑인가 봅니다

《43》사랑해요

정연화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는데
사랑해도 되냐고
물어보셨지요

사랑하는 이 마음
어쩌면 좋으냐고
물어보셨지요

사랑하면 안되냐고
다시 한번 더
물어보셨지요

바보처럼
망설이고 있는 사이

바보처럼 떠나셨어요

사랑해요

《44》새해에는

정연화

좋은 일은 가슴에 담고
슬픈일은 기억에서 지워요

너무 돈에 얽매이지 말고
내가 조금 더 있으면
나누면서 살아가도록 해요
국수 한그릇 값이라도
내가 낼수 있으니
베푸는 마음에 행복하답니다

화와 스트레스는 건강의 적이니
마음 비우고 웃으며 살아요
한걸음 물러서서
상대방 마음이 되어보니
이해 못할일도 없더라구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한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자신을 무대로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고
설레임이 있는 아름다운 인생

지난해를 잘 살았듯이
올 한해도 우리 잘 살아요

건강하고
행복하고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하루로……

《45》소중한 인연

정연화

너와 나의 인연은
우연으로 시작되어
서로에게 필연이 되었다

누가 먼저 손짓 했는지
누가 먼저 눈빛 보냈는지
한 순간 마음을 보았던것 같아
우리의 인연에 감사해

인연이란 가꾸어 가는것
필연이라고 해도
소홀히 하다보면
한갓 스치는 인연이 되리라

소중하게 다가와
우리 곁을 지키는 인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도
항상 함께 하는 인연이기를……

《46》수선화

정연화

노오란 그 꽃잎에
사연 있나봐
내맘이 이리도 아린걸 보면

바람도 비켜가네

꽃잎 떨려와 시릴까봐
꽃잎 흔들려 아플까봐

가만히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선다

꽃을 내 안에 넣어본다
수선화에 이슬이 맺힌다

《47》스치는 인연과 필연

정연화

삶의 여정에서
중년은 지금껏
얼마만큼의
인연을 만났을까요?

그리고 그들 인연중
스치는 인연은
무엇이었으며
놓지 못할
필연은 또 얼마만큼 일까요?

문득 이 시각
마음속 깊은곳에 박혀
서성거리고 있는
멍울같은 인연 하나

그 인연은
스쳐갈 인연일까
필연일까를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48》시월의 마지막 날

정연화

오늘은 늘 그래왔듯이
그냥 보내고 싶지 않은
어떤 의미라도 두고 싶은 날

사랑은 물론이고
이별마저도 낭만일것 같은 날

시월의 마지막날에

동성이든
이성이든
이런 카톡 편지를
받고 싶고 보내고 싶다

''오늘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네?
저녁에 차 한 잔 하자''

《49》어떤 그리움

정연화

조용히
작은 몸짓으로

살며시 가슴속에
스며든
따뜻한 마음 하나

설레임으로
기다림으로

하루
이틀
사흘……

온 가슴 채우고도
눈빛인사 너무 멀어

또다시
가슴 언저리
어떤 그리움만 쌓입니다

《50》언제부터 였을까

정연화

언제였을까?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날이……

언제부터 였을까?

너를 내 가슴안에
넣어놓고 사모한 날이……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마음만 한없이 설레었을 뿐

그동안 놓쳤던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들꽃 그리고 너

오늘 또렷이 바라보았다
다른 세상을 보는 듯 하다

너를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나

《51》연민

정연화

애틋해요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무어라 딱히
말할순 없지만
스며드는 생각들이 그래요

커피 한잔의 시간도
일상속의 바쁜 시간도

창 밖의 나뭇잎 떨리는
그 사소한 모습 하나까지도……

《52》연인이 아니어도

정연화

이 가을에
연인처럼 걸어봐요
코스모스 꽃길을……

한적한 시골길
하늘하늘 코스모스가
그대를 보고
또 나를 보고
가만히 웃어 줄것만 같아요

둘이 손 꼭 잡고 걷는 꽃길
가끔씩 마주보고
수줍은 미소 짓는다면

어느듯 연인이 된듯
가슴이 떨려 올것만 같습니다

우리 연인처럼 걸어 봐요
연인이 아니어도 이 가을에……

《53》외로운 여자

정연화

빗소리에 흐느끼는 바다

겨울바다는
외로움에
서러움에
부서지는 파도에 아프다

그 바다만큼
고독에
몸부림치는 외로운 영혼

겨울 찬비 내리는 밤이
두렵고 무서워
분재처럼 앉았다고 한다

얼마나 아팠으면
분재처럼 앉았다고 할까

찡 해 오는 콧등 시려와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녀의 깊은 마음속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지

외로운 사람아

우도의 여인아

밤새도록 내리는
빗소리에
그대 생각으로
나 또한 하얀밤을 새웠다

《54》용기 내 볼게요

정연화

화사한 느낌이 오는데
용기가 없어 고백 못해요

세월은 가는데
가만있을 수만은 없는데
마음 퇴색될까 두려운데
용기가 없어서 고백 못해요

그러나 용기 내 볼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상쾌한 바람이
기분까지 상쾌하게 해 주는 날

바람 편에 마음 띄워 보낼게요

《55》우리는 아름다운 중년

정연화

계절이 얼마만큼 스쳐가고
강산은 또 몇번이나 바뀌었을까요?

세월은 그렇게도 바삐 흘러
수많은 사연을 등에 업고
우리들을 불혹을 지나 지천명
중년의 자리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이곳까지
참으로 정신없이
달려온것 같군요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연인을 만나 사랑했었고
결혼했었고
첫아이를 얻었을때의 기쁨등

기뻤던일
슬펐던일
가슴안에 빼곡히 들어있는
이 모두를 정녕 지울수가 없기에
눈감는 그날까지 간직할테지요

불같던 성질 죽었다고
자존심마저 죽은건 아닙니다
적당히 다스릴줄도 알고
포용할줄도 아는
잔잔한 가슴을 가진게지요

안하던 칭찬도
멋쩍은듯 가끔씩 하고
중년의 아줌마
중년의 아저씨
어느정도 나이살도 보기좋은걸요
적당히 여유있고 품위도 있습니다

아둥바둥 그렇게도 살았어요
아이와 남편이 내 전부인줄 알고
그들만을 위해 헌신한 세월이었지요

우리들 중년
친구와 이런저런 지난얘기
도란도란 나누며
오랜시간 함께해도 좋은
커피한잔의 여유로움도 있습니다

차 한잔 하자고
밥한끼 같이 먹자고
내가 먼저 카톡문자 보낼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습니다

오는 계절을
가는 계절을
눈으로 가슴으로
포근히 감싸 안을줄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중년입니다

《56》이제 그만 날 잊어요

정연화

꿈을 꾸었었나 봐요
이제 그만 날 지워요
이제 그만 날 떠나요
스쳐간 바람이었어요

한참을 걸어와서
왔던길 뒤돌아보니

환희로 물들었던 그 길은
안개 속 꿈길이었어요

들꽃이 피어 있고
새들이 노래하고
그대의 환영이 어렸고

하지만 꿈길이었어요
그대는 강건너
먼곳에 있는 신기루였어요

이제 그만 날 잊어요

《57》잊혀지지 않는 그대

정연화

보내고 그리워할 거면서
그리움에 힘겨워 할거면서
왜 이별을 해야만 했는지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한사람으로 이어집니다
한사람으로 엇갈립니다

잊지도 못할 거면서
서성거리는 마음이면서
왜 쉽게 이별의 말을 했을까

이별의 그림자가
아직 떠나지 않아
언제나 그립고 보고싶은
잊혀지지 않는 그대입니다

《58》잊혀진 여인

정연화

오늘 이렇듯 마음이
허허로운 걸 보니
아마도 그대가 나를
까맣게 잊은 것 같습니다

뜸하게 오던 문자마저
뚝 끊긴걸 보니
아무래도
그대가 날 가슴에서
영영 지운 것 같습니다

안색은 창백해지고
커피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흐르는 시간 속에 쓸쓸히
잊혀진 여인이 되어
창 밖만 멍하니 바라봅니다

《59》중년 여인 가을을 앓다

정연화

코발트빛 하늘을 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고
떨어지는 단풍잎을 보면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바람에 옷자락만 날려도
영혼에 구멍이 난듯
오스스 한기를 느끼게 되고

누군가 이름만 불러줘도
여인은 떨리는 가슴이 됩니다

깊게 드리워진 그리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가슴앓이

가을이면 앓는 병에
두눈가득
알수없는 슬픈 눈물 고이고

중년 여인의 가을은
또 그렇게
가슴속 회오리 되어 깊어만 갑니다

《60》중년의 가슴

정연화

만추의 계절에 서서
산과들의 나뭇잎이
붉게 타듯
중년의 가슴도 타 오릅니다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혹여 어떻게 들릴까
가슴에 상처는 아닐까
괜스레 걱정부터 앞서고

내 생각보다는 상대의
입장부터 챙기며 살아가는 중년

마음속에 있는 말 숨기고
다 말하지 못해
중년에 앓는병도 찾아왔지만
바쁘게 산것이 약이었지요

중년의 세월을 살지만
사랑앞에서는
아직도 가슴이 뜨겁고

중년에 찾아온 사랑
한사람을 마음속에 품고서도
사랑앞에 무모하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삭일줄 아는 의지도 있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과 잎새를 보며
뜻모를 눈물로
흔들리는 가슴이 되기도 하고

사랑해도 될까요? 라는 빈말에도
소년 소녀처럼 가슴이 뜁니다

평온한 가정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살아가는 중년

연로하신 부모님의 자식으로
남편과 아내의 배우자로
자녀의 부모로

나이 들어 가면서
애정을 보내야만 하는
형제간의 정도

이 모두를 아우르며
살아야 하는 중년이기에
어깨는 늘 무겁고

그 무게만큼 중년의 가슴에
고독하나 스며드는 늦가을입니다

그런 중년을 응원하며
우리들 중년의 탁자위에
마음으로
따뜻한 커피 한 잔 놓고 갑니다

《61》중년의 가슴에 부는 바람

정연화

강바람도 아니고 산바람도 아닌
무어라 어떻게 말하지 못하는
바람 하나가 스치듯 지나갑니다

그 바람은 형체가 없으니
눈으로 볼 수도
인사를 할 수도
손으로 잡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스치는 순간
얼마나 큰 울림이었을까를
조용히 생각해 보게됩니다

이리도 가슴이 떨리는걸 보면
아마도 그 바람
여운이 너무나도 컸나봅니다

중년의 가슴에 불어온 바람이
진정 몹쓸 그리움이 아니기를

가슴 시리도록 아픈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멍에가 아니기를

스치듯 훌쩍 떠나갔지만
중년의 가슴은
그 바람 아련히 기억하고 있음을……

《62》중년의 로맨스

정연화

중년이라는 팍팍한 삶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오는 동안에
지금껏 가슴속 허허로움
하나 없이 살아온 사람 있을까?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첫사랑 같은 설레임
아니, 그 옛날 첫사랑보다
더 떨려오는 가슴속 울림
중년의 로맨스

봄 햇살 같은 따뜻함을……
그 애틋한 눈빛을……
마음으로 곱게 받아놓고서도
가슴속의 연정으로
쉽게 화답할 수 없음은

평생을 함께 하자 맹세한
인연과의 숙명이기에
의리이기에
깨트림을 두려워해
마음 닫고
절제하며 살아가나 봅니다

중년에 찾아온 고운 인연
모른 척 놓치고 싶지 않지만
인연의 한계는
여기까지라 생각하고
내려놓기 힘든 마음자락
바람에 실어 날려보냅니다

갈등했던 수많은 시간들로
뒤척이며 잠 못 이루었어도
그동안의 시간을 행복이라 여기며
그리움이라는 꼬리표만
하나 더 추가하려 합니다
그리워하는 것이 죄만 아니라면...

찬바람 불어도 봄은 오겠지요
사랑 없어도 봄은 오겠지요
진달래가 피고
개나리가 피고
벚꽃또한 흐드러지게 피겠지요

아……바람이여!

제발 이젠
두 번 다시 날 흔들지 마라
입술 꼭 깨물고 맹세하나니
조용히 살며시 지나가다오

봄바람 살랑이며 불어오는 날

스치는 그 봄바람이 또다시
잔잔한 가슴에 이는 폭풍이 아니기를……

《63》중년의 신비한 멋스러움

정연화

꽃이 예쁘게 피었는데
그 꽃을 보면서
그냥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 건넬줄 알며

스치는 바람 한줄기에도
계절의 향기를
맡을줄 아는 사람

깊어가는 가을날
보도 블럭 위의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며

설레임으로 센티해져
무작정 그 길을
걸어보고 싶어하는 사람

가정을 아낄줄 알고 사랑하며
그 울타리 안에서
편안해 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연인같은 친구의 만남에
미세한 가슴의
떨림도 보일줄 아는 사람

이 모두를 아우르는
신비로운 중년의 멋스러움

그 신비한 멋스러움에
살며시 동행하고픈
또 한 사람의 중년입니다

《64》중년이 되고 보니

정연화

사람이 그립다
따뜻함이 그립다
외로움이 깊어진다
왠지 가을이 더 가을스럽다

지나는 길
길섶의 이슬 머금은
파르르 꽃잎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아침 인사를 한다
들꽃은 중년과 참 많이 닮았다

어디론가 혼자 훌쩍
떠나고는 싶지만
청춘 같은 용기가 이젠 없다
걸핏하면 눈물이 난다

방황하는 길 고양이를
손짓하여 불러 앉히니
금새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중년이 되고보니
이해 못할 일도 없다
용서 못할 일도 없다
그 옛날의 상처도
밤을 새며 앓았던 가슴앓이도……

세월은 흐른다
너무나 빠르게 흐른다

중년이 되고 보니
한 잔의 커피에서도
은은한 가을꽃 향기가 난다
중년의 연륜만큼 향기롭다

조용히 창밖을 응시한다
가을이
잔잔한 가슴안에 들어와
한줄기 회오리 파문을 일으킨다

살며시 눈을 감는다

《65》중년이라는 이름의 선물

정연화

애써 담으려 하지 않아요
애써 꾸미려고도 않지요
하지만 저만치 하늘가에
눈길 주고 있으면
일곱빛깔의 무지개가 뜹니다

중년은
마시는 커피한잔에도
영혼의 향기가 스며들고
입술을 타고 흐르는 언어에도
듣기편한 잔잔함이 묻어납니다

붉게 핀 목백일홍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풍경에 심신이 물드는것 같아요

사람이 곁에 있습니다
자연 또한 숨을 쉬지요

조경수에 대롱대롱 매달린
앙증맞은 수박을 보고
예쁘다고 귀엽다고
소녀처럼 호들갑스럽게
사람들을 불러 모을줄도 압니다

''이리 와서 수박 좀 보세요''
자연의 신기함에
한참을 허리굽혀
수박을 보고 있는 중년

중년이라는 이름이 주는
세월의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66》지워지지 않는 이름

정연화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 또렷해 지는 이름
그 이름 석자에
지독한 가슴앓이 그리움만……

추억속을 맴도는 그 이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잊자 잊어버리자
모질게 마음 먹어도
잊혀지지 않는 그 이름

가을비 내리는 밤
창가에 서서
그 이름 빗방울에 새겨 봅니다

가을이 데리고 온
바람같은 또 하나의 그리움

《67》참 서글픈 일

정연화

누군가로부터
잊혀진다는 것

누군가를
하얗게 잊어 간다는 것

참 서글픈 일

삶이라는 여정에서

만남과 헤어짐이
한갓되이 스치는 바람같네

《68》커피 한 잔의 여유

정연화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는
가을날 오후
커피 한 잔을 마주 합니다

창밖의 익어 가는 풍경
가을빛을 바라보며
은은한 커피 향에 취해
잔잔한 그리움을 마십니다

혼자서 마시는 커피

계절의 상념도
시간 속의 시련도
내 안의 아픔도
모두 내려놓는 시간

오직 나만의 시간

커피 한 잔의 여유로운 시간

《69》하얀 달빛

정연화

너를 보는데
왜 내 마음이 쿵 내려앉지?
모를 일이다

볼도 시리고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린데

너를 이렇게 보고 있는 이유

모를 일이다
알 수가 없다

그냥 이라면 믿어주겠니?

《70》한 눈 팔고 다녔다

정연화

그 누가
그 무엇이
빨리 오라 재촉하든 말든

길을 가다가 들꽃을 만나면
물오른 나뭇가지에
여리디 여린 잎눈이 피면

눈맞추고 가느라
느릿 느릿 한 눈 팔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일년이 훌쩍 가버렸네

그래도 올 한 해 잘 살았다

《71》한사람 그대

정연화

어느 햇살 따사로운 봄날
풀섶의 들꽃이
살며시 미소지을 때
그대가 내 곁에 왔습니다

산자락의 진달래가
온 마음을
연분홍으로 물들여 갈 즈음
그대가 나를 보고 웃었습니다

봄비가 꽃잎을 적시며
보슬보슬
운치 있게 내리던 어느 날
그대의 심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연두 빛으로 물든
잎새의 몸짓이
너무도 눈부셔
두눈 꼭 감고 앉아 있을 때
그대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살포시 온 한 사람 그대
그대가 지금은
가을빛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72》한해를 보내며

정연화

모두들 열심히 사셨습니다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두루두루 대인관계에 있어서

후회되는 일도 있겠지요
서운한 일도 있겠지요

좀더 잘 하고 살걸
조금만 참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겠지요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에
웃고 울고
화내고 상처받고
또 위로하고 위로받고
그러면서 사는게 인생입니다

올 한해 수고하셨습니다
이루지 못한 소망 있으시다면
새해에는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새해에는
우리 더욱 예쁘게 잘 살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73》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정연화

꽃물결 이루던 봄은
봄바람 불어와
소녀처럼 설레었고

무더웠던 여름은
청춘같은
녹색의 싱그러움이 좋았다

단풍산 붉으니
그리움에
가슴까지 타 올랐고

이제 차가운 겨울은
하얗게 여백을 남기며
마음 비우라 재촉한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지난 일년을 뒤돌아보니
기쁜 일 슬픈 일
참 사연 많은 날들이었다

《74》할말이 남았는데

정연화

들어나 주지
듣고나 가지
홀연히 가셨나요

이런게 아닌데
이건 아닌데
이럴 순 없습니다

그렇게 바삐
꼭 떠나야 했나요
남은 사람 힘들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75》홍매화

정연화

사무치는 그리움
지울길이 없는데

홍매화는
저 혼자
어여삐도 피었어라

가슴속 그리움은
끝이 없는데

저 홀로 봄인듯

붉은 꽃잎
파르르
봄바람을 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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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 모음 30편

《1》가을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니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2》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최승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불기가 남아 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3》근황

최승자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4》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 뒤척였다.

《5》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최승자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달디단 내 혀의 입맞춤에 녹아
무너져라고 무너져라고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그러나 결코 사랑은 아니라고
깨달아지는 이 나이는 무슨 나이인가?
결코 사랑만이 아니다.
결코 사랑만으로는 태부족이다.
이런, 나는 호 혹시
테러리스트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오 꼬집어다오, 형제여, 내가 호 혹시
깡패의 순정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6》내 청춘의 영원한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7》너에게

최승자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8》돌아와 이제

최승자

새들은 항상 낮게 낮게 가라앉고
산발한 그리움은 밖에서,
밖에서만 날 부르고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이젠 너를 떠나야 하리.

어화 어화 우리 슬픔
여기까지 노저어 왔었나.

내 너를 큰물 가운데 두고
이제 차마 떠나야 하리.

오래 전에 내 눈 속 깊이 가라앉았던 별,
다시 떠오르는 별.
오래 갈구해온 나의 땅에
다시 피가 돌고
돌아와 이제 내 울타리를 고치느니,

허술함이여 허술함이여
버려진 잡초들이
이미 내 키를 넘었구나

《9》마흔

최승자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10》바람의 편지

최승자

내 너 두고 온지
벌써 한 달
바람의 편지도
이제 그쳤구나

아 내 기억 속에서
푸르른 푸르른

또 다시 하루 가고 이틀 가도
내 기억 속에서
푸르고 푸르를

언제나 새로이 쓰여 질
아 지리산, 바람의 편지

《11》밤 부엉이

최승자

밤부엉이 한 마리가 창가에서
나를 꼬나보기 시작했어.
나는 허둥거리며 내 몸의
모든 기관들을 닫아 버렸지만
부엉이의 눈빛이 오토머신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열고
노란 방사선을 쏘아 부었어.
나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차갑게 융해되어 갔어.

이윽고 잠, 닫혀진 회색 강철 바다,
속으로 한 사내의 그림자가 숨어들어
내 꿈의 뒷전을 어지러이 배회하고
환각처럼 들리는 창가에서, 누구시죠?
내게 희미한 두통과 고통을 흘러 붓는, 누구시죠?
내 死産의 침상에 낮게 가라앉아,
누구시죠? 누구 누구 누구……?

밤부엉이가 밤새 내 지붕을 파먹었어.
아침엔 날이 흐렸고
벌어진 큰골 속으로 빗물이 흘러들었어.
이미 죽은 내 몸뚱이 위에
누군가 줄기차게 오줌을 깔기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떠나갔어.

《12》비극

최승자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13》빈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리고도 어언 수천 년

빈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14》살았능가 살았능가

최승자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살았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15》생각은

최승자

생각은 마음에 머물지 않고
마음은 몸에 깃들이지 않고
몸은 집에 거하지 않고
집은 항상 길 떠나니,

생각이 마음을 짊어지고
마음이 몸을 짊어지고
몸이 집을 짊어지고
그러나 집 짊어진 몸으로
무릉도원 찾아 길 떠나니,

그 마음이 어떻게 천국을 찾을까.

무게 있는 것들만 데불고,
보이는 것들만 보면서,
시야에 빽빽한 그 형상들과
그것들의 빽빽한 중력 사이에서

어떻게 길 잃지 않고
허방에 빠지지 않고
귀향할 수 있을까.

제가 몸인 줄로만 아는 생각이
어떻게 제 출처였던
마음으로 귀향할 수 있을까.

《16》술독에 빠진 그리움

최승자

무수한 꿈이 그녀를 짓밟았다
독한 희망에 그녀는 썩어갔다
그리고 오늘밤 또다시 바람은
하늘 밖에서 그녀를 부르고
오오 벼락치는 그리움에
절망이 번개 광선처럼
그녀의 뇌 속에 침투한다
그녀의 머리통이 깨어지고
꿈이 좌르르 쏟아진다
뇌수와 함께.

《17》시간이 사각사각

최승자

한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사각사각 아름다운 설탕의 시간들
사각사각 아름다운 눈(雪)의 시간들
한 불안한 결정체로서의
시간들도 있습니다
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무너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의 마술사는 깃발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아하 사실은
(통시성의 하늘 아래서
공시성인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입니다)
시간이 사각사각
시간이 아삭아삭
시간이 바삭바삭
아하 기실은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18》시인

최승자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가시뼈를 잘못 삼켰다.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뼈를
그러나 시인은 삼켰고
그리고 잘못 삼켰다.

이 피곤한 컹컹거림을 멈추게 해다오.
이 대열에서 벗어나게 해다오.

내 심장에서 고요히,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을
나는 누워
비디오로 보고 싶다.

그리고 폐광처럼 깊은 잠을
꾸고 싶다.

《19》악순환

최승자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20》어떤 아침에는

최승자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

시간의 사막 한 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21》어떤 풍경

최승자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시집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시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시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2》언젠가 다시 한번

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내가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23》여성에 관하여

최승자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24》외롭지 않기 위하여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25》이제 가야만 한다

최승자

때론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 한다

한때는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였지만
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구멍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 몸 온 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26》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27》중구난방이다

최승자

중구난방이다.
한없이 외롭다.
입이 틀어 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삐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중구난방이다.
자기 함몰이다.
온 팔 휘저으며 물 속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없이 외롭다.
신앙촌 지나 해방촌 지나
희망촌 가는 길목에서.

《28》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듯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29》파괴의 집

최승자

사방팔방으로 바람, 바람 소리.
바람 파도에 포위된 집,
누울 곳 없는 삼십칠 세.

없는 꿈과 있는 현실,
그 사이에서 바람……
바람 소리가 날 흔들어댄다.

영원히 뿌리 없는
허공의 방, 허방의 집.

허망하고 허망하여
이 집을 파괴합니다.
이 집을 복원하지 마십시오.
행여, 이 위에 기념 건물을 세우지 마십시오.
명실공히, 이 집은 파괴의 집입니다.

《30》해마다 유월이면

최승자

해마다 유월이면 당신 그늘 아래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내일 열겠다고, 내일 열릴 것이라고 하면서
닫고, 또 닫고 또 닫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이 진행성 퇴화의 삶,

그 짬과 짬 사이에
해마다 유월에는 당신 그늘 아래
한번 푸근히 누웠다 가겠습니다.

언제나 리허설 없는 개막이엇던
당신의 삶은 눈치 챘었겟지요?

내 삶이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오만과 교만의 리허설뿐이라는 것을

오늘도 극장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저 혼자 숨어서 하는 리허설뿐이로군요.

그래도 다시 한번 지켜봐 주시겠어요?
(l go, l go 나는 간다.
(Ego, Ego,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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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 모음 45편

《1》6월의 童謠

고재종

6월은 모내는 달, 모를 다 내면
개구리 떼가 대지를 장악해버려
함부로는 들 건너지 못한다네

정글도록 땀방울 떨구어서는
청천하늘에 별톨밭 일군 사람만
그 빛살로 길 밝혀 건넌다네

심어논 어린 모들의 박수 받으며
치자꽃의 향그런 갈채 받으며
사람 귀한 마을로 돌아간다네

《2》개기월식

고재종

이웃들과 아랫마을에 문화예술단 공연 보러 갔다가
공짜 공연 본 죄로 강권하는 만병통치약을 한 박스 이고 왔다
수십만 원 되는 외상값 미처 못 갚아서 독촉장 수없이 받았다
붉은 도장 팡팡 찍은 재산 압류 계고장 계속 받고
오밤중이건 새벽녘이건 협박 전화질 받다가
자식 직장 상사까지 알아내 전화질 한 ‘그놈 목소리’ 때문에
자식 앞길 막았다고 순창할매 홀로 제초제를 마셨다

전직 경찰관이라는 그 해결사의 쇠갈고리에 찍힌 삶을
캄캄하게 조문하고 있는 오늘, 개기월식의 지구라니!

《3》고요를 시청하다

고재종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송이로 부푼다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

아무것도 새어 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 놓은 오월의
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연주를 듣는다

《4》광채

고재종

석모도 방죽, 그 아득한 억새 밭에 섰더니
일몰에 젖은 네 눈동자는
되레 무슨 깊고 푸른 수만 리로 일렁거렸다
억새 때문만도 아니게 길 하나 보이지 않고
내 눈은 내 눈동자를 보지 못할 때
네 눈동자에서 터져 나오는 광채는
저 수평선까지를 황홍(黃紅)으로 물들여놓곤
되레 넌 깊고 푸른 네 심연으로 잦아들었다
억새꽃 금발들이 하염없이 반짝거렸다


《5》그 희고 둥근 세계

고재종

나 힐끗 보았네
냇갈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
구름 낀 달밤이었지
구름 터진 사이로
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
물푸레나무 잎새가
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
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
그 희고 풍성한
모든 목숨과 神出의 고향을
내 마음의 천둥 번개 쳐서는
세상 일체를 감전시키는 순간
때마침 어디 딴 세상에서인 듯한
풍덩거리는 여자들의
참을 수 없는 키들거림이여
때마침 어디 마을에선
훅, 끼치는 밤꽃 향기가
밀려왔던가 말았던가

《6》그리운 죄

고재종

산아래 사는 내가
산 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이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은
눈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7》기도하는 사람

고재종

길가의 오락기에서 아무리 두들겨대도
한사코 튀어나오는 두더지 대가리처럼
한사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퇴행성 고독의 습관 같은 게 그를 홀로 세운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우느냐고 하지 말아라
울 수라도 있다면 왜 기도하겠느냐고
반문하는 데에도 지쳐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게 없는 생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던 랭보여
중대장의 명령 하나에 인분을 먹은 병사들의
굴욕 같은 생도 이미 참았으니

다만 오그라지고 우그러지고
말라비틀어진 과일 도사리 같은 것으로
그를 아무도 눈여기지 않는 곳에 홀로 세우는
저주받은 고독의 습관이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저 풍찬노숙의 나날을 누구에게 물을까

《8》꽃의 권력

고재종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 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 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 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9》날랜 사랑

고재종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10》너의 얼굴

고재종

예기치 않은 어느 날 내 앞에서
눈물로 중독된 눈을 하고서는
무언가를 애써 말하려고 더듬, 더듬거리는
그러나 끝내 온몸이 뒤틀려버려 말을 못하는
너의 얼굴은 내게 계시(啓示)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네 얼굴로 나는 상처 받고
무력한 네 얼굴에 저항할 수 없다

버려진 고아처럼 나는 나를 얼마나 울어야 하나
홀로된 과부처럼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한밤중 나그네처럼 별의 지도도 없이

예기치 않게 나타난 내 앞의 너는
네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으로 나의 하늘이다
나는 너로 인해 죄책 하지도 않고
나는 너를 연민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나는 다만 너를 모실 뿐이다

기막히게는 말할 수 없는 네 뒤로
기막히게는 번지는 밀감 빛 노을을
네가 잃어버린 날에 대한 서러움이라기보단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차마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중독된 눈물을 잃어버리고
말해질 수 없는 말을 잃어버리고
내 마음을 잃어버리기까지는, 너의 계시
너의 사랑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11》누님

고재종

저것 좀 보아 저 아가씨
봉선화 따서 손톱 묶네
저 아가씨 얼굴 좀 보아
홍색 자색 연분홍 드네
가슴 봉긋한 저 아가씨
꽃물 든 손 가슴에 얹네
저 먼 데로 까치발 딛네
말만한 엉덩이 저 아가씨
어쩌자고 저 아가씨
바알갛게 달아오르네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네
아아, 저 아가씨 눈이슬짓네
내사 차마는 못 보겠네
진저리치다 깨어나니
울 밑의 봉선화 비에 젖네

《12》눈물을 위하여

고재종

저 오월 맑은 햇살 속
강변의 미루나무로 서고 싶다
미풍 한자락에도 연초록 이파리들
반짝반짝, 한량없는 물살로 파닥이며
저렇듯 굽이굽이, 제 세월의 피로 흐르는
강물에 기인 그림자 드리우고 싶다
그러다 그대 이윽고 강둑에 우뚝 나서
윤기 흐르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며
저 강물 끝으로 고개 드는 그대의
두 눈 가득 살아 글썽이는
그 무슨 슬픔 그 무슨 아름다움을 위해서면
그대의 묵묵한 배경이 되어도 좋다
그대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나 또한 강끝 저 멀리로 눈 드는
멀쑥한 뼈의 미루나무나 되고 싶다

《13》달밤에 숨어

고재종

외로운 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저 미끈한 능선 위의
쟁명한 달이 불러 강변에 서니,
강물 속의 잉어 한 마리도
쑤욱 치솟아 오르며
갈대 숲 위로 은방울들 튀기는가.
난 나도 몰래 한숨 터지고,
그 갈대 숲에 자던 개개비 떼는
화다닥 놀라 또 저리 튀면
풀섶의 풀 끝마다에
이슬농사를 한 태산씩이나 짓던
풀여치들이 뚝, 그치고
난 나도 차마 숨죽이다간
풀여치들도 내 외진 서러움도
다시금 자지러진다.
그 소리에 또또 저 물싸린가 여뀌꽃인가
수천 수만 눈뜨는 것이니
보라, 외로운 것들 서로를 이끌면
강물도 더는 못 참고 서걱서걱
온갖 보석을 체질해대곤
난 나도 무엇도 마냥 젖어선
이렇게는 못 견디는 밤,
외로운 것들 외로움을 일 삼아
저마다 보름달 하나씩 껴안고
생생생생 발광하며
아, 씨알을 익히고 익히며
저마다 제 능선을 넘고 넘는가.
외로운 자는 제 무명의 빛으로
혹간은 우주의 쓸쓸함을 빛내리.

《14》대설

고재종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꺽는 것이다
또 한잔 꺽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15》면면함에 대하여

고재종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16》무늬

고재종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오솔길을 쓸고
오솔길에 무늬를 짠다

나뭇잎 그늘 없는
나뭇잎이 어디에 있는가

나뭇잎 그늘에
누워 마음의 상처를
쓸지만 상처 없이는
생의 무늬를 짜지못한다

아. 사랑의 그늘은
나를 이윽하게 하지
이윽함 없는 봄날은
찬란히 갔지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내 생의 이정(里程)을 쓸고
그 이정의 무늬를 밟으며

나는 이제 막 중생의
하루를 통과하는데

시방 눈앞에 일렁이는 게
나뭇잎인가 그 그늘인가

《17》묵정지 이 쓸쓸함의 저편

고재종

한때의 푸르른 피를 잘 씻어낸

억새꽃 은발들이 잔광에 반짝인다.
한때의 무성한 살을 잘 비워낸
억새꽃 은발들이 바람에 쓸린다.
이때쯤 개울물 소리는 청천에 닿고
나는 묵정지 서 마지기, 할말이 없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서러움을 잘 부린
머슴새가 시방도 쭉쭉쭉쭉 소를 몬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그리움을 잘 빛낸
머슴새가 시방도 그 누굴 호명한다.
이곳저곳 구절초가 속속 듣고
너는 못 뒤엎는 자리, 들을 귀가 없다.
바람은 또 우수수히 풀밭에서 인다.
풀들은 또 소슬하게 그만큼 시든다.
하여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먼가.
꽃도 새도 어둠으로 눕는 자리엔
두루총총 별이 참 많이는 돋는다.
두루총총 서리 쓴 들국빛으로 돋아선
너나 나나의 눈물의 사리를 닦는다.
그러면 타는 밭과 빠지는 수렁을 넘던
우리의 외진 사랑과 노래여, 안녕.
이 저녁 아득아득 저무는 길에서도
찔레 열매들 형형, 사상을 묻고
실베짱이 씨르래기 풀무치 한 떼는
시간 너머의 더 높은 꿈을 연주한다.
너와 난들 이 무명을 무얼로 점등하랴.

《18》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에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19》봄 마당에서 한나절

고재종

하늘은 쪽빛이고 마당은 환하다.
햇병아리 몇 마리가 무언가를 콕콕 찍고
토방의 늙은 개가 그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세상 살며
바람에 꾸벅이는 제비꽃이나
처마 밑에 떨어진 참새 주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다. 담 너머 대숲의
고요 모르는 수런거림과
사립 옆 윤기 나는 감나무 잎의
반짝거림에, 한때는 목숨이라도 걸 듯
그리움과 노여움을 옹호하기도 했던 것이다.
먹이 모자라던 까치 지난 겨울엔
개밥 그덩에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더니
그 까치 시방은 마당을 차고 오르며
흰 무늬 날개 활짝 펴서 대숲 위를 다닌다.
그 부신 꿈의 비상엔 언제나
차고 오를 마당과 몇 알의 밥알이 필요했던
것인데, 나는 시방 생의 어디쯤
어슬렁거리며 날개 짓 해보는 것인가.
마당은 환하고 불혹은 눈앞이다.
헛간의 녹슨 경운기와 담장 밑의 풀덤불이
세월을 가르치고, 장독대의 곰삭은 옹기들은
미륵불처럼 처연하다. 서러운 것들의
모든 가슴이 미륵불 되면 좋으련만
아직도 외양간의 부사리는 영각을 쓰며
마당을 한바탕 뒤흔드는 것이다.
아직도 세상에 사랑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마당 귀퉁이의 참배 꽃은 펄펄
져내리고, 나는 목이 메이는 것도 지쳐
물끄러미 생의 안마당을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우편배달부는 늘 늦는 것이다.

《20》북극성을 일별하다

고재종

별 볼일 없는 일들 때문에
별 한번 보지 못하고 살다가
추석날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 사이
북극성, 당신을 일별합니다.
늘 저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언제든지 맞아들일 채비를 마친 채
저를 내려다 보시는 당신의
恒心 아래서 저는 떠돌이였습니다.
아주 어릴 적, 제가 사랑하는 소녀와
늦도록 강둑에 앉아 애너벨 리를 읽고
아예 씨르래기 울음을 연주 삼아
당신을 애너벨 리로 명명했지요.
그 호명 이후 늘 당신은
제가 부자될만하면 가난케 하고
제가 날 것 같으면 어깨를 치시고
제가 연애할 양이면 눈멀게 하셔서
쌀싸라기 같은 그때 그 순결을
호젓이 돌아보게 했지요.
제가 헌 상자며 넝마 등을 가득 싣고
좌우로 낑낑대며 비탈길을 오르는
굽은 등허리의 리어카꾼 노인처럼
생을 낑낑대며 끌어대다 돌아와
이제 이렇게 당신께 고백합니다.
애초에 당신을 함께 호명했던 소녀마저
이젠 남의 여자가 된 지 오래라고.

《21》死因

고재종

세상에 아름다운 시신은 없다고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박혜진 씨는 다만
사회가 외면하는 시신의 침묵을
묵묵히 대변할 뿐이라며 웃는다
부검 날엔 몸에 배는 부패 냄새 때문에
밖에 나가 점심도 먹을 수 없는 그녀가
토막 난 사체의 위장을 가르고
썩어 문드러진 사체에서 피를 뽑고
유괴 후 숨진 아이 부검 때는 펑펑 울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녀가 고독과 죽음을 관통하며
그토록 밝히고자 하는 사인은
저마다에게 어떻게든 있긴 있는 것일까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는 하인이 없고
공포를 휘두를 제국이 없어서 자신을 증오하는
우리들의 너무도 의당한 천국에서
우리들의 죽음은 스스로 저당 잡힌 게 아니던가
인간에 대한 예의
그 관대한 거짓말 때문에
오월 강변의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보석처럼 짤랑거린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22》성숙

고재종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듯
온통 보석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치나 더 불린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줄도 알거니

《23》세월의 여자

고재종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의 상족암에
때아닌 겨울비 치는 바다,
파도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 말한
그녀는 거기 홀로 견디는 거다.
그녀와 거기서 좀 지체해도 좋았던 그곳엔
백악기 때의 공룡 발자국과
만권서 쌓은 듯한 퇴적암에 층층 새겨진 세월,
그것과 함께 그곳에선
그녀 가슴에 패인 삶의 사랑의 상처도
빗물 고이는 공룡 발자국처럼 오래
가리라는 것을 짐짓 모른 체해야 한다.
몇 번이고 숨이 턱턱 막혀
그 가슴의 울혈, 퇴적암처럼 더께 얹고 나니
고독은 삶에 대한 경건한 수절이더라며
그녀는 오연한 눈빛이던 거다.
어쩌면 그녀는 일억 년 전까지는 추억되는
무상의 시간들을 보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또 만권서보다 더한 것들을
세월 밖에까지 쌓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바다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고 말한 것도 그녀다.
난 비 아니라도 온통 젖어 그만이던 거다.

《24》수선화 그 환한 자리

고재종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25》수숫대 높이만큼

고재종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 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26》수평선

고재종

저렇게는 저렇게는
물낯에 꽂히는 빛의 작살 떼와

그 작살 뗄 맞고 번쩍번쩍
물낯 위로 튀는 숭어 떼와

그 또 숭어뗄 채고 채는
하도나 무정한 갈매기 떼여

이런 날엔 이런 날엔
네게 차마 못 닿고 부서지던
서러움, 서러움의 떼까지

이내 까치놀 이는 먼 곳까지

《27》숲의 묵언

고재종

숲은 아무 말 않고 잎사귀를 보여준다.
저 부신 햇살에 속창까지 길러 낸 푸르른 투명함
바람 한 자락에도 온 세상 환하게 반짝이며
일렁이는 잎새 앞에서
내 생 맑게 씻어내고 걸러낼 것은 무엇인가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저것이 어치인지 찌르레기인지
소리 떨리는 둥그런 파문 속에서 무명의 귀청을 열고 들어가
그 무슨 득음을 이루었으면 한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어제는 산나리꽃 오늘은 달맞이꽃
깊은 골 백도라지조차 흔들어 주니
내 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맑은 꽃 한 송이 우주 속 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때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여는 소리여

그러면 숲의 침묵이 이룬 외로운 봉우리 하나
이젠 말쑥하게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내 석삼년 벙어리 외로움일지라도
이 숲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숲은 다만 시원의 솔바람 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28》시간에 기대어

고재종

강의 면목이라면 면면한 유수와 범람,
강물 따라 걷는 마음은 넘치고 또 흐르네.
보리숭어며 비오리 떼가 튀고
창졸간의 갸륵한 것들이 좋이 울어도
순간의 꽃보다는 이야기로 더 유장할 터,
금결은결 반짝이는가 했더니 금세
그리움의 파란으로 일렁이는 시간 아닌가.
한때는 한도 없이 파닥거렸던
강변 은백양 잎새와 첫사랑의 흑단머리는
바람의 갈래 갈래로 흩어지고
오늘은 강가에 퍼지는 라일락 향기,
강섶을 일구는 고라니며 노인장과 함께
또 무엇, 그 누구로 흘러드는 구름 떼라니!
구름이 깊어지면 강물도 높아져서는
서러움 밖의 그 무엇이라도 소환할 듯한 모색,
서녘 놀이 비쳐 든 갈대밭 속의 연애 너머
썩지 않고 들끓는 고독의 항성으로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그런 유정의
경계 같은 것들을 오늘도 추문 하는 것이랴.
흐르는 강에 차마 가닿지 못하고
사소한 마음 하나에도 수만 물비늘을 뒤채는,
지금은 결락한 꿈의 시간에 기대어
제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강의 명색이여.

《29》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고재종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 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 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 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날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30》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고재종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를 찾아
십일월의 억새 밭에 든다.
이 쓸쓸한 봉두 난발의 바람에서
내 어쩌려고 고향을 느끼는 건
내 안에 든 행려나 남루 때문일 터.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내 안으로 속삭여오는 바람은
시퍼런 초록으로 뻗치던 억새 밭에
마른 울음이나 치고, 그 울음에
나도 뭔가 한없이 떨리는 게 있지만
내 몸의 새것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나날의 새것들을 흙먼지로 만들고
비로소 눈이 보이는 나는
억새 속에 고개 떨군 귀신이 보인다.
어깨를 들썩이는 망나니를 쓸어댄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에 누우면
훗날 거기 바람도 없이 억새도 없이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31》에로스의 혀

고재종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 입는 육체는
타는 듯이 취하는 향기와
터진 석류의 신음이 퉁기는 탄금

한 세계를 발사하는 치명의 눈빛과
붉은 입술의 이승저승
출렁이는 파도의 무한을
하루 더 춤추게 할 시간의 깊숙한 창날

차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음부에서
새어나온 고유의 방언들이
처절하게 미끄러지는
모든 색택과 조형의 전위인 달항아리

막 따낸 수밀도를 베어 물며
달고 탄탄한 모든 것의 목록을 해독하는
미뢰, 에로스의 극히 사적인 혀는

뜨거운 왕국의 첫 글자
추문의 고요라면 더 뜨거울 왕국의 화두

승인하라, 시와 나비의 리듬
질정 없는 연주의 알레그로비바체
아편 먹은 듯 번지는 총천연색의 꽃구름

《32》외로움에 대하여

고재종

들어봐, 저 처서철의 나뭇잎이
저렇게 서걱이는 소리,
풀잎들이 스치는 소리,
시방 달빛은 휘영청하고
앞들의 수숫대는 마냥 일렁이는 소리

들어봐, 저 풀섶의 씨르래기며
귀뚜라미 울어 끓는 소리에
동구밖 느티나무의 잎새들
\바르르 떠는 소리,
그 옆 대숲 위에 부시럭부시럭
참새떼 뒤척이는 소리

외로운 이는 소리에 민감하나니
들어봐, 저기 저렇게
기차 오는 소리,
기적 소리를 들으며 달려와
기차는 또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버리는 소리
그러면 그러면, 그때마다
그 기차 불빛 한 줄기에도 반짝반짝
온 목숨 꽃사래치다간
이제 무척 야위어버린, 저 간이역
코스모스들이 목 늘어나는 소리,
역사 위로는 툭, 툭,
오동잎 아득히 지는 소리

《33》웅숭 깊어지는 사랑

고재종

수수 꽃 다리 꽃이
바람에 우수수 거릴 때마다
그 청량한 향기가
보이지 않는 사방의
별을 생생히 닦아 내느데요

수수 꽃 다리 꽃을
정 혼자에게 보내선
파혼을 통고했다는 한 여인은
저 꽃을 일러
젊은 날의 추억이라 했다지요

그런 서럽고 서느러운
그늘이 드리워져
수수 꽃 다리 꽃도 우리네 사랑도
아, 연자줏빛으로
웅숭깇어지는 건 아닐런지요

《34》유서

고재종

된서리에 배추 속 차듯이 살면
땅 밑의 알토란 무더기 캐듯 할 거라더니,

개평술 몇 잔에 이 집 저 집
상갓집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간 죽었다.

평생을 리자만 갑다 말었따!
모진 생만큼이나 쓰라린 유서 한 줄 남기고,

서로 외면하는 그의 집에 삭풍만 들락거리며
문에 붙은 조합의 차압 딱지를 추문해댔다.

《35》이승 꽃의 향기에 저승 새가 취하면

고재종

고산의 석남화라 했지요.
네가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으면
나도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는소리에
너와나와가 함께 깨어난다고 했지요.
백두산 골짝 암벽에 피는 꽃,
노랑만병초라고도 하는데요.
그 향기가 하도나 좋아선, 네 오랜 체증도
내 밭은 정기도 새삼새삼 씻는다는데요.
그것이 광대고원을 달리는 바람 향이거나
그것이 감사나운 강풍이 잠깐 비낀 날,
아청빛 하늘의 흰구름 향이거나
그것이 구름 저편에 아스라히 묻힌
시간 밖의 시간을 일깨우는 은하 향이어서
그래요, 석남화 향기 맡으면
妙音鳥라던가 그런 새가 울 것 같아요.
극락정토 설산에 살아서
너무도 춤 잘 추고 너무도 미음을 내어선
네가 병들고 내가 죽을지라도
왜 아니 싱싱하고 왜 아니 생생하도록
그렇게 그렇게 새가 울고 말겠지요.
그러면 석남화주, 내 마시고 너도 마시고
한 오십년 더 우는 거예요, 그 눈물로
꽃향기와 새 노래 듣는 꿈길을
너와나와는 조금은 닦을 수가 있어서
두발부리 두억시니와 같은 세상의
서러운 사랑들 먼저 걷게 할 테지요.

《36》정자나무 그늘 아래

고재종

느티나무 수만 이파리들이 손사래 치는
느티나무 그늘 소쇄한 정자에
애진 마음이 다 되어 앉아본 적이 있느냐.
물색 푸른 앞들은 가멸지고,
나는 오늘도 정자에 나와선
멍석몰이쯤 당한 삭신이라도
바람의 아홉새베에 씻고 씻어보는 것이다.
느티나무 그늘 암암할수록
그늘 밖의 세상은 아연 환해지는
느티나무 그늘에 너와라도 함께인 듯 앉아,
저 느티나무의 어처구니 둥치와
둥치에 새겨진 세월의 鱗片을 생각하면
오목가슴이 꽉 메여오기도 하는데,
나는 내 사소한 날의
우련 우련 치미는 서러움만
매미 떼의 곡지통에 실어보는 것이다.
이제는 찾는 이도 몇 안 되는 정자에
시방 몇몇의 고랑진 허드레 얼굴들,
그 흙빛 들수록 앞들은 점점 푸르러지는
느티나무 그늘 생생한 정자에서
어제는 하염없던 쑥국새 울음을 듣고
시방은 치자향 아득한 것도 맡아보는데,
딴엔 꽃과 새의 視聽 너머에
더 간절한 바도 있는 것이다.
가령 이 느티나무 둥치 부여안고
흰 달밤, 어느 여인이 목놓아 울고
이 느티나무 둥치 찍어대며
웬 봉두난발이 발분했던가 하는 것들인데,
너는 언젠가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친김에 실낱 줄기 못 끊는 저 냇물과
그 냇가의 새까만 벌때추니 떼며
겨울이면 마을의 그만그만한 집들과
나뭇가지 끝마다 열리는 별 떼랑
하냥 난장을 트던 것도 되새김하다간,
그 은성했던 육두문자와 파안대소와도
참 서느럽게는 등을 돌린 정자에 앉아
오늘은 다만 성성한 노동과
오늘은 다만 뜨거운 사랑과 휴식의
오늘의 생생한 나라를 묻고 묻는 것이다.
오늘도 간간 쑥국새 울음은 깃들어선
이렇게 두 눈 그렁그렁하게는
흰 구름 저편까지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러면 저기, 저 生은 또 어쩌려고
뭉실뭉실 이는 수국화처럼
환한 그늘로 차오르고,
이쯤이면 나도 그만 애진 마음이 다 되어
부쩌지 못하는 걸 너도 알겠느냐.
그러다가도 상처투성이의 느티나무와
그 상처마다에서 끈덕지게는 뽑아내는
푸른 잎새를 헤다보면
그 잎새 하나로 默默靑靑 남은 일도
너무 서러워지지는 않겠다 싶은 날,

《37》즐거운 경배

고재종

나는 가난해서 면서기의 권세도 없이
냉이, 패랭이, 감국, 바람꽃
그 여린 숨탄것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유는 꽃들에게 가서 물으라
다만 그 애젖함에 목이 메리라

《38》천지간의 네 속삭임

고재종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무어라 무어라, 종일 속삭이는
저 봄비 아득한 숨결은 돌아와
이제 마악 옴짓거리는 살구나무의
어린 꽃망울엔 무슨 구슬이 엉기는지
와르르 무너지는 해동의 담 너머
앞들 메말라터진 보리밭엔
무슨 꿈들이 파릇파릇해지는지
고요하여라, 다만 천지가 속삭이며
서로를 한없이 달래는 소리뿐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그 오랜 지글거림도, 그 지글거림의
내 영혼 속 쓸쓸한 적막산천도
이제는 깨어나 봄비 머금는 시간,
동구밖 당산나무 둥치는
왜 그렇게 부르르 떨어대는지
거기 때까치는 젖어드는 날개를 접고
왠 생각에 골똘히 잠겼는지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내가 그저 살아낸 모든 상처들이
저 봄비 융융한 숨결로 넘쳐나
十方이 촉촉히 젖어든다면
세상 모든 죽은 것들의 흙은
산 것들의 새싹들을 속속 틔우는지
아니 이 고요의 밀림 속, 무엇 하나
속삭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봄비는
내 생의 작은 뜰을 꽤는 적셔볼 참인지

《39》첫사람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40》청춘

고재종

동백꽃 송이송이가
저렇게는
빨갛게 탐나는
피어나는 시간을
사무치는
사무치는 시간이라 할까.
저 동박새 한 마리
동백가지에 앉아
동백꽃 송이송이를
차마 쪼다간
한 번 울고는
먼바다를 바라보는데
목이 메이는
목이 메이는
무엇이라도 있어서일까.
동백꽃 송이송이가
빨갛게 무참하게
지는 날에는
저 파랗게 질린 바다도
야심하도록
야심하도록 문창가에
해조음을 밝혀놓고,
너와 나는
홍역을 앓듯
홍역을 앓듯
목놓아 울지도 못하던
자청의 밤이 있었다.

《41》출렁거림에 대하여

고재종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 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이 물살 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 올에 내 가슴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 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42》침묵에 대하여

고재종

용구산 아래 있는 나의 오래된 우거는
용과 거북이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사방이
단단한 침묵으로 둘러쳐 있다

침묵은 녹슨 함석대문에 붙어 있고
마당가에 비쭉비쭉 솟은 망촛대로 자라고
침묵은, 재선충병에 걸린 뜰의 반송으로 붉어지고
토방에 벗어 둔 검정고무신으로 암암하다

어느덧 내 몸조차 침묵으로 하나 됐다가
그중 몇 개쯤 파계하여 들고양이로 울다가
때론 용과 거북이가 재림하길 염불하게도 하는
무자비하고 포악한 침묵이란 짐승은

송송 구멍이 뚫리는 외로움의 골다공증과
사괘가 마구 뒤틀리는 고독의 퇴행성관절염과
바람에 욱신거리는 그리움의 신경통을 앓는
앞집 폐가에 달라붙어 와지끈,
그 근골이 주저앉을 때까지
시간의 공적(空寂)에 대하여 더는 묻지도 않는다

침묵의 폐허를 차마 감추지 못하는 달빛은
이것이 무장무장 은산철벽을 치는 것이어서
용과 거북이의 뿔 자라는 소리 듣다 보면
나는 나일 것도 없다고 할 때가 오리라, 생각한다

《43》할매 말에 싹이 돋고 잎이 피고

고재종

고들빼기는 씨가 잔게 흙에다 섞어 뿌리고
도라지는 잔설 있을 때 심거야 썩지 않는다네
진안장 귀퉁이 주재순 할매의 씨앗가게
콩씨 상추시 아주까리씨며 참깨씨랑
요모조모 다 있는 씨오쟁이마다 쌔근거리는 씨들
요렇게 햇볕 좋고 날 따수어야 싹이 튼다네
흙이 보슬보슬해져야 쑥쑥 자란다네
세상에 저 혼자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다 씨가 있어야 나온다는 할매 말에
금새 수숫잎이 일렁이고 해바라기가 돌고
배추가 깍짓동만 해지고 참깨가 은종을 울리는
장터, 이제 스스로는 무얼 더 생산할 수도 없이
유복자가 해준 틀니에 등은 온통 굽었는데
나는 작은 게 좋아, 요 씨앗들이 다 작잖아,
요것 한 줌이면 식구들 배불리 먹인다는 할매는
길 걸을 때면 발길 닿는 데마다 씨오쟁이를 열어
갓씨 고추씨 오이씨 죄다 뿌린다네
할매에겐 땅 한 뼘 없어도 걸어댕겨 보면
천지에 온통 오목조목 씨뿌릴 땅이어서
어느 누가 거두어 가든 상관 않고 뿌린다네
누가 됐든 흡족하게 묵으면 월매나 좋겄냐고.

《44》화음

고재종

나의 사랑은 가령
네 솔숲에 부는 바람이라 할까
그 바람 끌어안고 또 흘려보내며
온몸으로 울음소리 내는 것이
너의 사랑이라 할까

나의 바람 그러나
네 솔숲에서만 그예 싱싱하고
너의 그지없는 울음 또한
내 바람맞아서만 푸르게 빗질하는
그런 비밀이라 할까 우리의 사랑

《45》목 백일홍 꽃 그늘에서 보낸 한철

고재종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노래한 시인은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고 적었네.
오늘 나는 목 백일홍 꽃 그늘에서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고 적어도
나의 큰 죄과는 어쩔 수 없네, 늘 삶의 바깥에
숨은 음모가 있는 거라고 핑계댔으니
불행은 내가 창조한 신이어서,
저 황홀한 아편 송이송이 같은 색들
아편 맛 같은 색정에 저항하지 못하는
삼복염천의 호사를 어찌하랴.
회의하다니 몽상하다니, 고통은 여기 있고
우울이라니 동경이라니, 죽음은 내가 원했다.
새 애인을 만나 전 남자의 아이를 지우러 가는
여자가 걷는 길처럼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나의 형벌이었으니
삼복염천 개는 제발 목 달지 말고, 피비린내는
참수의 무리가 닥치기 전에
온통 색뿐이어서 색정뿐이어서
천지가 따로 없는 저 황홀로 터지며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 해도, 복날
개처럼 늘어진 환멸 때문에
마냥 긁어대는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나는
내 비명의, 송이송이의, 목백일홍만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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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오규원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 일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 일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 일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함성

《2》9월과 뜰

오규원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3》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오규원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全景)보다 더 많다.
더러는 건물이 마빡이나 심장
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 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 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
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
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4》강 건너

오규원

벚 고개에는
산 오리나무
갈림길에는
표지판 위의 문호와
서후
그리고 대지에는
애기 똥 풀과
조팝나무

《5》개봉동과 장미

오규원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6》거리의 시간

오규원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사내가 간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뒷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의 모가지 하나가
여러 사내 어깨 사이에 끼인다
급히 여자가 자기의 모가지를 남의 몸에
붙인다 두 발짝 가더니 다시
사람들을 비키며 제자리에 붙인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여자의
핸드백과 한 여자의 아랫도리 사이
하얀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주전자가 올라붙는다 마리아의 한쪽 가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놀란 여자 하나
그 자리에 멈춘다 아스팔트가 꿈틀한다
꾹꾹 아스팔트를 제압하며 승용차가
간다 또 한 대 두 대의 트럭이
이런 사내와 저런 여자들을 썩썩 뭉개며
간다 사내와 여자들이 뭉개지며 감동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는 시간을 따로 잘라내어 만든다

《7》겨울 나그네

오규원

지난 겨울도 나의 발은
발가락 사이 그 차가운 겨울을
딛고 있었다.
아무데서나
심장을 놓고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있었다.

그 곁에서
계절은 귀로를 덮고 있었다.
모음을 분분히 싸고도는
인식의 나무들이
그냥
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지난 겨울도 이번 겨울과
동일했다.
겨울을 밟고 선 애 곁에서
동일했다.

마음할 수 없는 사랑이여, 사랑……
내외들의 사랑을 울고 있는 비둘기
따스한 날을 쪼고 있는 곁에서
동일했다.
모든 나는 왜 이유를 모를까.
어디서나 기우뚱, 기우뚱하며
나는 획득을 딛고
발은 소멸을 딛고 있었다.

끝없는 축복.
떨어진 것은 根대로 다 떨어지고
그 밑에서 무게를 받는 日月이여
모두 떨어져 덤숙히 쌓인 위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발자국이 하나씩 남는다.

손은 필요를 저으며 떨어져나가고.
손은 필요를 저으며 떨어져나가고.

서서 작별을 지지하는 발
발가락 사이 이 차가운 겨울을
부수며
무엇인가 아낌없이 주어버리며
오늘도 딛고 있다.

바람을 흔들며 선 고목 밑
죽은 언어들이 히죽히죽 하얗게 웃고있는
겨울을.
첨탑에서 안식일을 우는 종이
얼어서 얼어서 들려오는
겨울을.

이번 겨울에도 나의 발은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日月이 부서지는 소리
그 밑 누군가가 무게를 받들고……

《8》겨울 숲을 바라보며

오규원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9》고요

오규원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10》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오규원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에 놓아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몇송이 코스모스를
길가에 계속 피게 해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
마중가는 일이다

《11》꽃과 그림자

오규원

붓꽃이 무리지어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왼쪽과 오른쪽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핀 둘은
서로 붙들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무더기로 핀 아홉은
서로 엉켜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핀 하나와 다른 하나는
서로 거리를 두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붓꽃들이 그림자를
바위에 붙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바위에 붙지 않고
바람에 붙습니다

《12》나비

오규원

작약꽃이 한창인 아파트 단지의
화단을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어린 호박나무를 지나 향나무를 지나 목단을 넘고
화단 가장자리의 쥐똥나무를 넘어 밖으로 가더니
다시 속으로 들어와
한창인 작약꽃을 빙글빙글 돌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혼자 훌쩍 날아올라 넘더니
비칠대는 온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날아넘은 허공을 뒤돌아본다.
뒤돌아보며 몸을 부풀린다.


《13》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14》버스정거장에서

오규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15》비가와도 이제는

오규원

비가 온다, 어제도 왔다.
비가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슬픈 것은 슬픔도 주지 못하고
제 혼자 내리는 비.

비속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속에서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받쳐들고
오, 그들은 정말 갈 수 있을까.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우산 밖의 비에 젖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젖은 몸으로
비 오는 세계에 참가한다.

비가 온다.
슬프지도 않은 비.
제 혼자 슬픈 비.

《16》비가와도 젖은 자는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17》빈자리가 필요하다

오규원

빈 자리도 빈 자리가 드나들
빈 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 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 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 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 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18》사랑의 감옥

오규원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 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 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19》사랑의 대낮

오규원

솟구치는 질경이는 잎 뒤의 햇볕을
어디에다 두었나 잎 뒤가 텅 비었다
송장풀과 개비름은 잎 뒤의 그림자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그림자가 없는
육체라니! 숨긴 그림자 속에 무엇을
숨겨두었나 허물어진 아파트 단지
외곽의 땅이 개쑥갓과 쑥부쟁이처럼
부풀고 있다 드러누워 기고 있는
외풀은 다리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그곳에 나는 오늘 가보고 싶다)
野古草와 바랭이는 허리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어디에다

《20》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21》삼월

오규원

삼월에 신은 남쪽
물결을 타고 온다.
봄에 일할 가복들은
양 허리에 끼고,
해변의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의 서류를 갖춘다.
결재가 날 동안
나무들은 예산을 끝내고
들은 목책을 헐고
부드러운 바람은 방목한다.
아, 배태의 순간은
뜰 위에 방학이 내려와 노닥거리는
학동의 마을이다.
신이 웃고 있는 곳에
심상이 간지러운 보슬비는
내리고.

《22》새와 나무

오규원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23》새와 날개

오규원

강에는 강물이 흐르고 한 여자가
흐르지 않고 강가에 서 있다
안고 있는 아이에게 한쪽 젖을 맡기고
강이 만든 길을 보고 있다

길은 강에만 있고 강둑에는
흐린 하늘이 바짝 붙어 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젖을 움켜쥐고
넓은 들에서 하늘로 무너지는
강을 보고 있다

강에는 강물이 흐르고
물 속에는 날개가 젖지 않는
새 한 마리가
강을 건너가고 있다

《24》순례의 서

오규원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을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
그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속으로 한 사람씩
낯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

먼 길의 귀속으로 한 사람씩
낯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홀로 나부끼는 옷자락은
나를 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 두는 것은
그리고 무엇인가 단 한마디의 말로
나를 영원히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멈추면서 그리고 나아가면서
나는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25》안개

오규원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 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 툭 소리를 냈다  

《26》여름에는 저녁을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잠들고
마을에서는
지붕이 잠들고

들에는 잔잔한 달빛
들에는
봄의 발자국처럼
잔잔한
풀잎들

마음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27》우리는 어디서나

오규원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옆에도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청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28》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오규원

비상하는 새의 꿈은
날개 속에만 있지 않다 새의 꿈은
그 작디작은 두 다리 사이에도 있다
날기 전에 부드럽게 굽혔다 펴는
두 다리의 운동 속에도 그렇고
하늘을 응시하는 두 눈 속에도 있다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우리의 몸속에 숨어서 비상을
욕망하는 날개와 다리와 눈을 보라
언제나 미래를 향해 그것들을 반짝인다
모든 나무의 꿈이 푸른 것은
잎이나 꽃의 힘에만 있지 않다
나무의 꿈이 푸른 것은
막막한 허공에 길을 열고
그곳에서 꽃을 키우고 잎을 견디는
빛나지 않는 줄기와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꿈이 그러하다
깜깜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숨어서 일하는 혈관과 뼈를 보라
우리의 새로움은 거기에서 나온다
길이 아름다운 것은
미지를 향해 뻗고 있기 때문이듯
달리는 말이 아름다운 것은
힘찬 네 다리로
길의 꿈을 경쾌하게 찍어내기 때문이듯
새해가 아름다운 것은 그리고
우리들의 꿈이 아름다운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비상하는 날개와 다리와 눈과
하늘로 뻗는 줄기와 가지가
그곳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29》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오규원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30》잎과 가지

오규원

가지가 뻗으면 허공은
가지 안에 들어가 자리잡는다
잎이 생기면 허공은
앞 안에 들어가 몸을 편다
새가 날고 잠자리가 날고
꿀벌이 날면 허공은
새와 잠자리와 꿀벌이 되어
함께 난다 부리와 날개와
침이 되어 반짝인다

잎 속의 허공은 잎이고
잎 밖의 허공은 빛이다

《31》절과 나무

오규원

나무 몇 그루가 묵묵히 가지 속에
자기 몸을 밀어넣고 있다

그 나무들 위에 절(寺)이 한 채 얹혀 있다

나무의 가지 끝까지 올라간 물이
나무에서 절 안으로 길을 내고 있는지
가지가 닿은 벽의 곳곳에 이끼가 끼어 있다

양광은 하늘에 가득하고
부처는 절 안에 있고
사람은 절 밖에서 나무에 잡혀 있다

바람이 불어도 절은 뒤에 있는
하늘에 붙어
흔들리지 않는다

《32》하늘과 두께

오규원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 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 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

《33》하늘과 침묵

오규원

온몸을 뜰의 허공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한 사내가 하늘의 침묵을 이마에 얹고 서 있다
침묵은 아무 곳에나 잘 얹힌다
침묵은 돌에도 잘 스민다
사나의 이마 위에서 그리고 이마 밑에서
침묵과 허공은 서로 잘 스며서 투명하다
그 위로 잠자리 몇 마리가 좌우로 물살을 나누며
사내 앞까지 와서는 급하게 우회전해 나아간다
그래도 침묵은 좌우로 갈라지지 않고
잎에 닿으면 잎이 되고
가지에 닿으면 가지가 된다
사내는 몸 속에 있던 그림자를 밖으로 꺼내
뜰 위에 놓고 말이 없다
그림자에 덮인 침묵은 어둑하게 누워 있고
허공은 사내의 등에서 가파르다

《34》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끄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35》호수와 나무

오규원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와
귀는 접고 눈은 뜨고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개 한 마리
물가에 앉아 있다

사내는 턱을 허공에 박고
개는 사내의 그림자에 코를 박고

건너편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는
물 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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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수

당신 가슴에
빨간 장미가 만발한 5월을 드립니다

5월엔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생길 겁니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자꾸 듭니다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많이 생겨나서
예쁘고 고른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얼굴 가득히 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당신 모습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5월엔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기분이 자꾸 듭니다

당신 가슴에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5월을 가득 드립니다

《2》8월의 소망

오광수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반가운 8월엔
소나기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나면 그렇게
반가운 얼굴이 되고
만나면 시원한 대화에

흠뻑 젖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으랴?

푸름이 하늘까지 차고 넘치는 8월에
호젓이 붉은 나무 백일홍 밑에 누우면
바람이 와서 나를 간지럽게 하는가

아님 꽃잎으로 다가온
여인의 향기인가
붉은 입술의 키스는

얼마나 달콤하랴?
8월엔 꿈이어도 좋다.
아리온의 하프소리를 듣고

찾아온 돌고래같이
그리워 부르는 노래를 듣고

보고픈 그 님이 백조를 타고
먼먼 밤하늘을 가로질러
찾아왔으면,

《3》8월의 연가(戀歌)

오광수

8월에
그대는 빨간 장미가 되세요
나는 그대의 꽃잎에 머무르는 햇살이 되렵니다

그대는 초록세상에 아름다움이 되고
힘겨운 대지에는 꿈이 되리니
나는 그대를 위해 정열을 아끼지 않으렵니다

푸른 파도의 손짓도 외면하렵니다
오로지 그대를 향해
뜨거운 사랑의 눈길을 쉬임없이 보내며
빨갛게 빨갛게 그대의 색깔을 품으렵니다

매미들의 향연이 막을 내리고
저 들판 너머로 꽃가마가 나타나면은
나는 믿음직한 그대의 신랑이 되고
그대는 노란 머플러로 한껏 멋을 낸 신부가 되리니

아!
두근거리는 땅의 울림에
한줄기 소나기까지 단비가 되어
지금 그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8월에
그대는 빨간 장미가 되세요
나는 하늘의 푸른 물 한 줌씩 집어다가
두 손으로 돌돌 말아 이슬 진주 만들어
그대의 가슴에 달아드리는
아침 햇살이 되렵니다.

《4》9월의 약속

오광수

산이 그냥 산이지 않고 바람이
그냥 바람이 아니라 너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에서,
약속이 되고 소망이 되면
떡갈나무 잎으로 커다란 얼굴을 만들어
우리는 서로서로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손 내밀면 잡을만한 거리까지도 좋고
팔을 쭉 내밀어 서로 어깨에 손을 얹어도 좋을 거야
가슴을 환히 드러내면
알지 못했던 진실함들이 너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에서, 산울림이 되고
아름다운 정열이 되어
우리는 곱고 아름다운 사랑들을 맘껏 눈에 담겠지

손잡자 아름다운 사랑을 원하는 우리는
9월이 만들어놓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약속이 소망으로 열매가 되고
산울림이 가슴에서 잔잔한 울림이 되어
하늘 가득히 피어오를 변치 않는 하나를 위해! 우리

《5》가을에는

오광수

가을에는 나이 듬이 곱고도 서러워
초저녁 햇살을 등뒤에 숨기고
갈대 사이로 돌아보는지 나온 먼 길
놓아야 하는 아쉬운 가슴
그 빈자리 마다 추하지 않게 점을 찍으며
나만 아는 단풍으로 꽃을 피운다

《6》가을의 러브레터

오광수

연분홍 편지지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고운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여름의 꽃밭에서
까만 분꽃 씨를 받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타는 가슴이지만
연분홍 꽃을 피운 분꽃이랍니다

《7》가을햇살

오광수

등뒤에서 살짝 안는 이 누구 신가요?
설레는 마음에 뒤돌아보니
산모퉁이 돌아온 가을 햇살이
아슴아슴 남아있는 그 사람 되어
단풍 조막손 내밀며 걷자 합니다

《8》같이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

오광수

은은한 화장에 밝은 미소를 가진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싶습니다.
내면의 모습은 더 아름다워서
조용한 미소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하얀 프림같은 그런 사람의 미소가 좋습니다

마음도 넉넉한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싶습니다.
따스한 마음은 더 정스러워서
푸근한 말 한 마디로도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커피 향기 같은 그런 사람의 모습이 좋습니다.

창조적 생각에 멋진 감각을 가진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싶습니다.
몰랐던 세상은 더 흥미로워서
신기한 발상만으로도 모두를 즐겁게 하는
노란 설탕 같은 그런 사람의 세계가 좋습니다.

《9》겨울로 가는 바닷가에서

오광수

꿈같은 사랑의 미련 때문에
하얗게 진이
다하도록
파도가 발버둥을 치며
소리소리 지르고 있다.

까맣게 흔적이 없는 늪에 앉아
푸념조차 퇴색해버린
몽돌을 붙잡고
묻고 또 물으며
지난 계절의 흔적을 뒤져봐도

당신이 내게 한 황홀한 고백이,
내가 당신에게 속삭이던
밀어가
까만 젖꼭지 같은 잔돌이 되어
이제는 좌르르 다른 소리를 내는데

아침에 보이던 환한 얼굴은 어디 가고

머리칼로 물기 가득 뿌리면서
잔뜩 몰려온 바다 안개들이
날름 날름 그 소리마저도 삼켜버린다.

《10》겨울에 그리는 수채화

오광수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면
당신의 곱고 하얀 마음을
눈 속에서 찾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
온 세상이 더 하얗게 되면
당신의 그 고운 마음씨들이
하얀 꽃가루처럼 날아가서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숨어 버릴 테지요.

개울물이 꽁꽁 얼어 버리면
당신의 맑은 노래 소리를
겨울 내내 듣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

세상이 더 반짝거리면
당신의 그 맑은 노랫소리는
퐁당 깊은 물 속에 들어가서
물고기들의 자장가로 변해 버릴 테지요.

찬바람이 씽씽 불어버리면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늘에서 볼 수 없을까봐 걱정됩니다.
온 세상이 너무
추우면
당신이 베푸는 따스함들이
살금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어린이들의 말동무가 되어 있을 테지요.

《11》겨울에 읽는 하얀 편지

오광수

당신을 향해 기도하고 잠이 든 시간
밤새도록 당신이 써 보낸
하얀 편지가 하늘에서 왔습니다.

잠 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걸음 소리도 내지않고
조용히 조용히 그렇게 왔습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큰지 온 세상을 덮으며
˝사랑해!˝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신도 내가 그립답니다.
당신도 내가 보고 싶답니다.
당신도 내가 너무 너무 기다려 진답니다.

새 날을 맞이하며 창을 여는 순간부터
한참을 일하는 분주한 낮시간에도
당신은 언제나 나를 생각한답니다.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 눈물 방울져 떨어지면
닿는 곳 점 점이 쉼표가 되어
쉬어가면서 읽고 또 읽습니다.

넘어져 하얀 편지속에 폭 안기면
당신은 나를 더욱 꼬옥 안고
˝많이 사랑해!˝ 하는 느낌이 옵니다.

하얀 편지를 읽는 이 행복한 시간.
내 마음속에서 피어난 하얀 입김으로
˝나도 당신을 많이 사랑합니다.˝

《12》그냥 좋기만 한 사람

오광수

가만히 생각만 해도
당신이 그냥 좋은 건
하늘 아래 누구보다도
당신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내 좁은 가슴이 눈을 떠서
나로 인한 당신의 아픔을 알았고
나로 인한 당신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나의 정다운 말 한마디가
당신에겐 보석보다 값지며
내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당신에겐 하늘이 됨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아프게 안할께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마세요
하늘이 당신과 함께하라 심은
당신을 많이 사랑하라 하심입니다

이제는 가만히 생각만 해도
당신이 그냥 좋은 건
하늘아래 무엇보다도
당신이 소중한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13》그대는 누구 신가요

오광수

그대는 파란 하늘바다에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들을 띄워놓고
흰 구름섬 가운데를
지나가는 동화의
나라 주인인가요

그대는 모르는 곳에서
불어와,코스오스 같은 내
가슴을 부플려 놓고
해바라기 같이 바라만
보게하는 바람의 나라
요정인가요?

그대는 이세상의
눈물들을 은하수에다
수천 번을 씻고 또 씻어서
영롱한 이슬진주로
만들어 놓은 달님의 나라
마술사 인가요?

눈부신 해님이 깨우는
아침에 희망의 나팔을
불며 창을 열고 들어오는
금빛 찬란한 생명들에게
보석같은 오늘 하루를
선물하는 그대는 정녕
천사인가요?

그대가 뿌려놓은
고움들이 가득 내려앉은
삶을 시작하는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한 만큼
서로 용서하는 마음들로
가득한 이 계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나와 함께 하는 그대는
누구 신가요?

《14》그대라는 이름

오광수

그대 이름을
언제 불러봤을까요?
이젠 서먹하기까지 합니다
눈뜨면 꼭 만나는 얼굴이었고
만나면 즐거웠던 그대였는데.

하얀 목련을 유난히 좋아해서
배경 삼아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그대와의 유일한 해후(邂逅)
이젠 불러보려 해도
소리가 나오질 않습니다

잘 계시지요?
잘 사셔야할 텐데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러나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간직하렵니다

밖에선 겨울바람이 나를 부르는데
내가 불렸던 그대 이름은
지금 누가 부를까요?
사진첩을 덮는 것처럼
가슴 한가운데 가만히 접어두렵니다.

《15》그립고 그리우면

오광수

그리워 눈물이 나면
뒤돌아 서서 울렵니다.
지나가는 바람이 내 얼굴을 보곤
혹시 님께서 내 모습 물으신다면
흉한 모습만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보고파 눈물이 나면
고개 숙이고 울렵니다.
떨어지는 낙엽이 내 얼굴을 보곤
혹시 님께서 내 형편 물으신다면
딱한 모습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눈물이 나면
하늘을 보고 울렵니다.
흘러가는 구름이 내 얼굴을 보고
혹시 님께서 내 소식 물으신다면
이렇게 서서 기다린다고 말할 겁니다.

소리쳐 울고 싶으면
강가에 앉아 울렵니다.
흘러가는 강물이 눈물 동무되고
혹시 님에게 서운함 있었어도
흐르는 물에 세월과 같이 띄울 겁니다.

《16》글에도 마음씨가 있습니다

오광수

글에도 마음씨가 있습니다.
고운 글은 고운 마음씨에서 나옵니다
고운 마음으로 글을 쓰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고운 마음이 그대로 옮겨가서 읽는 사람도 고운 마음이되고
하나 둘 고운 마음들이 모이면
우리 주위가 고운 마음의 사람들로 가득 찰 겁니다

글에도 얼굴이 있습니다
예쁜 글은 웃는 얼굴에서 나옵니다
즐거운 얼굴로 글을 쓰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정겨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서 읽는 사람도 웃는 얼굴이 되고
하나 둘 미소 짓는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 주위가 활짝 웃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겁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더라도
직접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비록 한 줄의 짧은 답글이라도
고운 글로 마음을 전하며
읽는 사람에겐 미소를 짓게 하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17》기다림도 사랑입니다

오광수

철교를 건가는 기차가
창마다 불빛을 쏟아내며
새벽 찬바람에
출렁 출렁 흔들리며 갑니다.

기다림에 내려다보는
개울 물 속엔
달빛 사라진 까만 하늘의
별들만이 조용히 찰랑거립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마음이 없다면
새벽 찬바람의 모진 시련도
까만 하늘의 방황도
모두 견디지 못할 겁니다

기다림에 이렇게 얼어붙어도
기다림에 이렇게 혼이 나기도
당신이 내게 베푼 그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첫 시간 드린다는 서원대로
당신의 눈길을 기다리고
당신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당신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오늘도 하늘 문이 열리며
빛나고 찬란한 햇빛이 내리면
약속의 확신에 더 목말라가도
그 기다림마저도 나의 사랑입니다.

《18》낙엽 한 장

오광수

나릿물 떠내려온 잎 하나 눈에 띄어
살가운 마음으로 살며시 건졌더니
멀리 본 늦가을 산이 손안에서 고와라.

《19》내가 당신에게 행복이길

오광수

내가 당신에게
웃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손짓과 우스운 표정보다
내 마음속에 흐르는 당신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당신의 생활 속에 즐거움이 되어
당신의 삶의 미소가 되길 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믿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백 마디 맹세와 말뿐인 다짐보다
내 가슴속에 흐르는
당신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당신의 생각 속에 미더운 이 되어
당신의 삶의 동반자가 되길 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소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구름 같은 신기루보다
내 생활 속에 흐르는
당신을 향한 진솔한 사랑이

당신의 신앙 속에 닮아감이 되어
당신의 삶의 이정표가 되길 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행복이길 원합니다.

나와 함께 웃을 수 있고
나와 함께 믿음을 키우며 나와 함께 소망을 가꾸어

우리 서로 마주보며 살아가는 세상
당신의 삶이 행복이길 원합니다.

《20》눈 오는 밤의 이별

오광수

우리!
이 밤 슬픈 이별의 길을 걷자.
초가지붕 가득히 겨울을 싣고
너의 옷자락을 매만지며
눈물을
가득 익혀 떨구어보자.

눈송이 하나에 추억 하나 쌓여지고
가로등의 불빛도 지쳐가는데
날이 밝으면 모두가 지난 일이
되고
너의 일기장엔
내 이름마저도 지워질 텐데......

우리!
이 밤, 너와의 걷는 이 밤이
하늘에서 가득히
흰 눈이 내려
깨끗한 추억으로
내 가슴에 묻히기를 원하는구나.

벌써 뿌옇게 새벽이 일어나고
쌓이는 눈따라 아쉬움만
더 하는데
너를 싣고갈 기차는 하얀 숨을 고르고
밤새 걸었던 길에는
우리가 걸어왔던 흔적마저 지워 버린다.

이제는

서로의 미래를 위해 헤어질 시간
눈속에서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는
너의 눈에서, 내 가슴에서
이렇게 눈이 되어
녹아내린다.

《21》당신은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오광수

우리에게
당신의 미소는 소중합니다.
입가에 환하게 피어오른 미소는
짜증난 생각을 멀리 쫓아버립니다.
그 미소가 시원한 산소가 되어
보고 있는 우리의 마음 마음들을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손길은 소중합니다.
따뜻한 사랑이 담겨있는 손길은
어려운 시련들을 멀리 쫓아버립니다.
그 손길이 일어나는 새 힘이 되어
지쳐있는 우리의 마음 마음들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목소리는 소중합니다.
따뜻하게 위로하는 말 한마디는
불평과 원망을 멀리 쫓아버립니다.
그 한마디가 상대방을 이해하며
미워하는 우리의 마음 마음들을
용서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발걸음은 소중합니다.
올바로 내디딘 그 믿음의 걸음은
실패와 좌절을 멀리 쫓아버립니다.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신뢰를 주어
믿고 사는 우리의 마음들을 모아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22》만남에 어찌 우연이 있겠습니까

오광수

길가에 피어있는 들꽃도
그냥 피었다 지는 것이 아닐진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어찌 우연이 있겠습니까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그저 아무런 의미 없이 대하기보다는
따뜻한 미소에 정겹게 말 한마디라도 나누는 일은
소중한 인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는 게 아무리 제 잘난 멋에 산다고는 하지만
그 잘난 멋도 보아주는 이가 있어야 하질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인연과 인연으로 서로 더불어 사는 것이기에
소홀히 대한 인연으로 후일 아쉬운 때가 온다면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의미 없는 만남과 소홀히 대할 인연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만남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것은 어떠한 삶이든 첫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23》보고픈 사람이 있거든

오광수

보고픈
사람이 있거든
눈감고 노래를 불러보세요.

그리워 못 잊어
부르는 노래마다

한절 한절 길게
다리가 놓여져

내 노래 듣고
찾아오시는 보고픈 이가
살며시 밟고 오려니

보고픈
사람이 있거든
밤하늘 별들을 세어보세요.

그리워 눈물이 고이며
볼 때마다 한별 한별
환한 빛들이 모아져

내 모습보고
찾아오시는 보고픈 이가
어둔 길 쉽게 오려니

보고픈
사람이 있거든
바람에 가슴을 열어보세요.

그리워 애타게
기다린 마음 알고

살랑살랑 고운
바람을 타고서

내 가슴 꼬옥 안아주시는
보고픈 이가
눈뜨면 와 있으려니

《24》봄볕

오광수

꽃가루 날림에 방문을 닫았더니
환한데도 더 환하게 한 줄 빛이 들어오네
앉거라 권하지도 않았지만은
동그마니 자리 잡음이 너무 익숙해
손가락으로 살짝 밀쳐내 보니
눈웃음 따뜻하게 손등을 쓰다듬네!

《25》비 오는 밤

오광수

기다린 님의 발걸음 소리런가
멀리도 아닌 곳에서 이리 오시는데
밖은 더 캄캄하여 모습 모이지 않고
불나간 방에 켜둔 촛불 하나만
살랑살랑 고개를 내젓고 있다

《26》사람이 만난다는 것이

오광수

사람이 산다는 것이
안개를 타고
바다를 항해는 것과
같아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은

집채같은 파도가 앞을
막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고비만 넘기면 되겠지 하는
작은 소망이 있어 삽니다.

우리네 사는 일들이
이렇게 비 오듯 슬픈날이 있고,
바람불 듯 불안한 날들이 있으며
파도 치듯 어려운 날도 있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견디지 못할 일도 없고
참지 못할 일도 없습니다.

다른 집은 다들 괜찮아 보이는데
나만 사는게 이렇게 어려운가 생각하지만
조금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집집이 가슴 아픈 사연 없는 집이 없고

가정마다
아픈 눈물 없는 집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웃으며 사는 것은
서로서로 힘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27》사람이 사는 일에

오광수

사람이 사는 일에
어떻게 늘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크든 작든 가슴 쓰라린 일도 있고
견디기 어려운 실패도 있지만
세월은 내가 다시 살아가도록
한장 한장 사는 방법을 그려줍니다.

사람이 사는 일에
어떻게 늘 웃는 일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지도 않게 눈물 흘릴 일도 있고
속마음 깊숙이 한숨쉴 일도 있지만
세월은 내가 다시 시작하도록
하루하루 소중한 가치로 보태줍니다

사람이 사는 일에
늘 어려움만 있고 한숨쉴 일만 있다면
희망과 소망이라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디노라면
쓰라림을 통하여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눈물을 흘림으로 사는 가치를 알게 됩니다.

《28》사람이 산다는 것이

오광수

사람이 산다는 것이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아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은
집채같은 파도가 앞을 막기도 하여
금방이라도 배를 삼킬듯하지만
그래도 이 고비만 넘기면 되겠지 하는
작은 소망이 있어 삽니다.

우리네 사는 모습이
이렇게 비 오듯 슬픈 날이 있고
바람불듯 불안한 날도 있으며
파도 치듯 어려운 날도 있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견디지 못할 일도 없고
참지 못할 일도 없습니다.

다른 집은 다들 괜찮아 보이는데
나만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가 생각하지만
조금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집집이 가슴 아픈 사연 없는 집이 없고
가정마다 아픈 눈물 없는 집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웃으며 사는 것은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29》사랑이 남겨준 그리움

오광수

그대가 따스한 눈길로
내 마음에 싹을 틔우던 날
그대의 사랑은
언제나 함께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대의 봄이 되어 내 가슴에서
사랑의 꽃을 피울 때에
그대의 그 꽃은
언제나 피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대는 푸른 나무가 되고
나는 그대의 품에 안긴 새가 되어
노래를 부를 때
언제나 부르는 노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낙엽이 떨어질 때
그대의 사랑도 떨어지고
그대는 그렇게 빈 가슴만 남겼지만

앙상한 가지를 쓰다듬는 바람 따라
이렇게 매달려 흔들리는 남은 잎같이
말라 있는 내 가슴 속에서는
그대는 언제나 그리움입니다.

《30》사랑할 땐

오광수

사랑할 땐 높은 하늘도 낮게만 보입니다.
별이든 달이든 원하면 따 줄 수 있으니까요.

사랑할 땐 시간도 요술을 부립니다.
기다릴 땐 지루하고 만나면 너무 짧으니까요.

사랑할 땐 모두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내 가슴이 아름다운 생각으로만 가득하니까요.

사랑할 땐 상대방의 흠도 매력으로 느껴집니다.
내 눈높이를 상대방에게 맞췄으니까요.

사랑할 땐 모든 것이 좋게만 보입니다.
사랑할 땐 모든 것이 소중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랑할 땐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31》산에서 본 꽃

오광수

산에 오르다
꽃 한 송이를 보았네
나를 보고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산에서 내려오다
다시 그 꽃을 보았네
하늘을 보고 피어있는 누님 닮은 꽃

《32》산처럼 물처럼

오광수

산은
산이어서 좋다
이곳저곳 기웃거려 옮겨다니지 않고
세상의 지킴이 되고
살아가는 기본이 되어
보듬고 다독이며 함께 더불어 사는 가운데
철 따라 가꾸는 어울림이 있어 더 좋다

물은
물이어서 좋다
순리대로 길을 가니 볼썽사납지 않고
이 세상 이치가 되고
생명에겐 가치가 되어
싹 틔고 꽃피우며 함께 가꾸어 가는 가운데
물빛이 하늘의 얼굴을 닮으니 더 좋다

우리네 사는 게 어디 별난 모습이 있으랴
그 산에 내가 있고
그 물에 내가 있으니
그래서 더 좋다.
사랑은 이별보다 훨씬 더 크다
사랑했었다는 것에 대해 너무 아파하지 마라 

《33》삶에 가장 소중한 때

오광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힘들 때가 있으면 편안할 때도 있고
울고 싶은 날이 있으면 웃을 날도 있고
궁핍할 때가 있으면 넉넉할 때도 있어 그렇게 삽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식을 키우느라 많이 힘이 들었어도
자식들이 다 커서 각자 제 몫을 하는 지금에는
힘들었던 그때가 왠지 좋은 때같고

한창 일할 때에는 몇 달 푹 쉬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부르는 이 없고 찾는 이 없는 날이 오면
그때가 제일 좋은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답니다.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 중에서
힘들 때와 궁핍할 때가 어려운 시절 같지만
그래도 참고 삶을 더 사노라면
그때의 힘듦과 눈물이 오늘의 편안함이고
그때의 열심과 아낌이 오늘의 넉넉함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다 버리고 살 수 없고
편안하고 넉넉하다고 다 혼자 가질 수 없는 것은
우리네 사는 것이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
서로 소중한 시절을 가꾸며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34》소중한 오늘 하루

오광수

고운 햇살을 가득히 창에 담아
아침을 여는 당신의 오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천사들의 도움으로 시작합니다

당신의 영혼 가득히
하늘의 축복으로 눈을 뜨고
새 날,
오늘을 보며 선물로 받음은
당신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제의 고단함은 오늘에 맡겨보세요.
당신이 맞이한 오늘은
당신의 용기만큼 힘이 있어
넘지 못할 슬픔도 없으며
이기지못할 어려움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가 길다고 생각하면
벌써 해가 중천이라고 생각하세요
오늘 하루가 짧다고 생각하면
아직 서쪽까진 멀다고 생각하세요
오늘을 내게 맞추는 지혜입니다

오늘을 사랑해 보세요
사랑한 만큼
오늘을 믿고 일어설 용기가 생깁니다
오늘에 대해 자신이 있는 만큼
내일에는 더욱 희망이 보입니다

나 자신은 소중합니다
나와 함께하는 가족은 더 소중합니다
나의 이웃도 많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소중함 들은
내가 맞이한 오늘을 소중히 여길 때 가능합니다

고운 햇살 가득히 가슴에 안으면서
천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오늘을 맞이한 당신은
복되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 당신의 오늘은 정말 소중합니다.

《35》아름다운 중년

오광수

중년은 많은 색깔을 갖고 있는 나이이다.
하얀 눈이 내리는 가운데서도 분홍 추억이 생각나고
초록이 싱그러운 계절에도 회색의 고독을 그릴 수 있다.
그래서 중년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본다.

중년은 많은 눈물을 가지고 있는 나이이다.
어느 가슴 아픈 사연이라도 모두 내 사연이 되어버리고
훈훈한 정이 오가는 감동 어린 현장엔 함께하는 착각을 한다
그래서 중년은 눈으로만 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운다.

중년은 새로운 꿈들을 꾸고 사는 나이이다
나 자신의 소중했던 꿈들은 뿌연 안개처럼 사라져가고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꿈들로 가득해진다.
그래서 중년은 눈으로 꿈을 꾸고 가슴으로 잊어가며 산다

중년은 여자는 남자가 되고 남자는 여자가 되는 나이이다
마주보며 살아온 사이 상대방의 성격은 내 성격이 되었고
서로 자리를 비우면 불편하고 불안한 또 다른 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중년은 눈으로 흘기면서도 가슴으로 이해하며 산다

중년은 진정한 사랑을 가꾸어갈 줄 안다.
중년은 아름답게 포기를 할 줄도 안다.
중년은 자기주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안다.
그래서 중년은 앞섬보다 한발 뒤에서 챙겨가는 나이이다.

《36》어제보다 아름다운 오늘

오광수

어제는 망울만 맺혀 안쓰럽던 저 꽃이
아침햇살 사랑으로 저리도 활짝 웃고 있음은
오늘이 어제보다는 더 아름다운 날인가 보다

수많은 아픈 가슴들이 모두 어제가 되고
맺혔던 눈물 방울일랑 이슬동네에다 맡기고는
하늘보고 무릎치며 오늘은 활짝 웃는 날이길

아이야!
어제의 미움이 아직 남았니?
시린 마음 꺼내어 따스한 빛깔을 묻혀서
노란 개나리 숨소리같이 후- 후- 불어보자

하늘은 우리를 사랑한단다
어제보다 견디지 못할 오늘은 없고
어제는 못 피웠던 꽃송이지만
오늘은 아름답게 피어나니까

《37》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오광수

오늘은 왠지
좋은 일들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오늘 열리는 아침이
더욱 깨끗하여 새롭고

오늘 찾아온 햇빛이
더욱 찬란하게 빛남은

오늘이 참으로
좋은 날인가 봅니다.

오늘은
슬기롭게 어려움을 풀고

오늘은
지혜롭게 닫힌 것을 열어서

마음 마음들이 더 푸근한
날이었음 좋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누는 인사에 정을 더하고

서운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참된 용기를 가져서
오늘을 더 소중하게 만드렵니다.

오늘은 왠지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서

두고두고 기억해도 좋은
그런 날일 것 같습니다.

《38》우리 5월에는 웃자

오광수

우리 5월에는 웃자
그것도 아주 환하게 웃자

봄 햇살이 우리들 두 볼에서
우리들 두 손 등에서

사랑하는 이의 입맞춤이 되어
함께 하자는데 어찌 그 마음들을 외면하겠는가

지난 날 이런저런 사연으로 쓰리고
아픈 가슴이 생기고 어둡고 무거운 짐을 지고
혼자 가야 할 먼 길이 앞에 있을 지라도
5월에는 힘내자.

두 볼에 앉은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고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함께함을 생각하며
힘내고 사랑하고 따습게 살자.

우리 5월에는 웃자
그것도 아주 큰 소리 내며 웃자.

《39》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오광수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빨간색 머플러로 따스함을 두르고
노란색 털장갑엔 두근거림을 쥐고서
아직도 가을 색이 남아있는
작은 공원이면 좋겠다.

내가 먼저 갈께
네가 오면 앉을 벤치에
하나하나
쌓이는 눈들은
파란 우산 위에다 불러모으고
발자국 두길 쭉 내면서
쉽게 찾아오게 할거야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온 세상이 우리 둘만의 세계가 되어
나의 소중한 고백이
하얀 입김에 예쁘게 싸여
분홍빛 너의 가슴에선
감동의
물결이 되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맑은 두 눈 속에
소망하던 그 날의 모습으로
내 모습이 자리하면
우리들의
약속은
소복소복 쌓이는 사랑일 거야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40》좋은 말을 하고 살면

오광수

말 한 마디가 당신입니다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말을 하면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말 한 마디가 당신의 생활입니다
험한 말을 하는 생활은 험할 수밖에 없고
고운 말을 하는 생활은 고와집니다

말 한 마디가 당신의 이웃입니다
친절한 말을 하면 모두 친절한 이웃이 되고
거친 말을 하면 거북한 관계가 됩니다

말 한 마디가 당신의 미래입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아름다운 소망을 이루지만
부정적인 말을 하면 실패만 되풀이됩니다

말 한 마디에 이제 당신이 달라집니다
예의바르며 겸손한 말은 존경을 받습니다
진실하며 자신 있는 말은 신뢰를 받습니다

좋은 말을 하고 살면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41》지금 하늘을 보세요

오광수

당신이 힘들고 어려우면 하늘을 보세요.
이제까지 당신은 몰랐어도
파란 하늘에서 뿌려주는
파란 희망들이
당신의 가슴속에
한 겹 또 한 겹 쌓여서
넉넉히 이길 힘을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슬프고 괴로우면 하늘을 보세요.
이제까지 당신은 몰랐어도
수많은 별들이 힘을 모아
은하수 물가지고
당신의 슬픔들을
한 장 또 한 장 씻어서
즐겁게 웃을 날을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외롭고 허전하면 하늘을 보세요.
이제까지 당신은 몰랐어도
둥실 흘러가는 구름들이
어깨동무하며
당신의 친구 되어
힘껏 또 힘껏 손잡고
도우며 사는 날을 만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용기가 필요하면 하늘을 보세요.
이제까지 당신은 몰랐어도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새날의 태양이
당신의 길이 되어
환히 더 환히 비추며
소망을 이룰 날을 만들고 있습니다.

《42》첫눈

오광수

누가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순백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저리도 조용히
기도하는가

당신이
가져다준 설레임으로
뽀얀 미소의 창을 열고
우리는 소망의 가닥 가닥들을
여미고 펼치기를 얼마나 했으며

만나고픔에
무작정 달리고
보고픔에 거저 소리치고
사랑하고픔에
두 팔을 한껏 벌렸는데

오!
내 품에 달려와
안기운이는
하늘 마음 가득담고온
사랑이어라

《43》친구야 술 한잔하자

오광수

친구야!
술 한잔하자

우리들의 주머니 형편대로
포장마차면 어떻고
시장 좌판이면 어떠냐?
마주보며 높이든 술잔만으로도
우린 족한걸,

목청 돋우며 얼굴 벌겋게 쏟아내는
동서고금의 진리부터
솔깃하며 은근하게 내려놓는
음담패설까지도
한잔술에겐 좋은 안주인걸,

자네가 어려울 때 큰 도움이 되지못해
마음아프고 부끄러워도
오히려 웃는 자네 모습에 마음 놓이고
내 손을 꼭 잡으며
고맙다고 말할 땐 뭉클한 가슴.

우리 열심히 살아보자.
찾으면 곁에 있는
변치 않는 너의 우정이 있어
이렇게 부딪치는 술잔은
맑은소리를 내며 반기는데,

친구야!
고맙다. 술 한잔하자

《44》코스모스

오광수

저 길로 오실게야
분명 저 길로 오실게야
길섶에 함초롬한 기다림입니다

보고픔으로 달빛을 하얗게 태우고
그리움은 하늘 가득 물빛이 되어도
바램을 이룰 수 만 있다면,

가냘픔엔 이슬 한 방울도 짐이 되는데,
밤새워 기다림도 부족하신지
찾아온 아침 햇살에 등 기대어 서 있습니다

《45》하늘 소리

오광수

뽀얗게 눈오는 길에 서서
사락 사락 하늘 소리를
담는다

시린 손끝이 색깔을 내고
부딪치는 연약함은
한 방울의 물도 못되는데
호 호 내뿜는 따스함엔
그마져 그냥
돌아눕는다

묻히기 싫어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든
노란 단풍 하나는
발끝까지 와서는
지치고
포기했나보다

손을 귀에 대고 듣는 하늘 소리는
그냥 보기만 했던 저 세계의
신비한 소리보다
내 어머니가 날 부르는
소리
차가 기어가는 소리

하늘에는
우리들의 소리들로 가득차있다.

《46》하늘빛 고운 날

오광수

하늘빛이 파랗게 고운 날
가슴에서 보고픈 이를 불러내어
눈이 아프도록 보고 또 봅니다.

아직 하늘에 매달려 있는 감 하나
하얀 구름으로 빨갛게 꽃을 만들고

부르다
부르다
손이 야위어진 갈대의 사랑도
품에 꼬옥 안겨 드립니다.

내 마음을 아시지요?
하늘빛으로 곱게 물이 들어서
언제나 그 모습 변치 않았으면

잊지 않으려고
잊지 않으려고
내 마음에서 이는 작은 바람에도
두 손을 꼭 쥡니다.

하늘빛이 파랗게 고운 날
설레임으로 문을 두드려서
그렇게 보고픈 이를 불러내렵니다.

《47》하늘을 보고 산다면

오광수

우리네 사는 모습 속에
아껴주는 마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시기하기보다 인정하고
배우려는 마음과 더불어
삶을 이루려는 마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운 마음 때문에
거북한 모습보다는
이해와 사랑이 가득한
마음들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네 있는 모습 속에
다독이는 가슴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차가운 똑똑함보다는
눈물을 아는 따뜻함과
정겹게 손잡을 수 있는
고움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시샘과 욕심으로
서로 흠을 찾기보다는
보듬고 위하여 베풀고
나누면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네 사는 모습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할 때는
내 손을 펴야 하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내 마음도 아픈 게 이치인데
좋은 것은 내가 하고

험한 것은 남의 몫이길 원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어찌 하늘을 보고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48》하얀 겨울의 노래

오광수

겨울에는 하얀 눈이 있어 좋습니다.
하얀 눈꽃이
조용히 내리면
매섭게 설치던 찬바람도
아침에 보이던 산새들도
덩달아 가만히 숲으로 와서
사락 사락 노래를 들으며 쉬다
갑니다.

겨울에는 하얀 노래가 더 좋습니다.
두 손을 입에다 호호 모으고
가만히 혼자서 부르면은
하얀 입김으로
피어올라
처마끝 고드름 녹는 소리와
살랑 살랑 박자를 맞추며 날아갑니다.

겨울에는 봄을 기다려서 좋습니다.
하얀
목련이 마당에 필 때면
조용히 잠자던 봄바람도
숨었던 화사한 꽃 노래도
은근히 우리네 곁으로 와서
두근 두근
사랑의 가슴을 두드립니다.

겨울에는 내 님 마중가기 좋습니다.
강물이 추워서 서로 안으면
님이 부르시는
노래라도
멀리서 희미한 모습이라도
들리든 보이든 그날이라면
걸음 걸음 날으듯 저 강을
건너렵니다.

《49》한번은 보고 싶습니다

오광수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습니다.

사는 모습이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내 가슴속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아는척해서 무얼 합니까?
이제 와서
안부를 물어봐야 무얼 합니까?


어떤 말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때의 일들도
오묘한 세월의 설득 앞에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저 웃는 모습
한번 보고플 뿐입니다.
한번은 보고 싶습니다.

내 가슴속에 그려져 있는 얼굴 하나가
여느 아낙네보다 더 곱게 나이 들어가도

환하게 웃고 있는 미소는
그때 그대로
그렇게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이 혹시나 고단하시면
당신의 모습에서
그 미소가 사라졌다면
나는 가슴이 아파서 어찌합니까?

그래도
한번은 보고 싶습니다.

《50》하얀 계절의 기다림

오광수

하얀 눈으로 쓰신 편지에
아직은 아니라
시니
강가 돌 틈 사이로
아쉬움 걸어놓고 기다리렵니다.

하얀 목련이 활짝 웃을 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물소리가 신나게 노래할 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릴까요.

기다림으로 쌓인 하얀 밭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손대면 따스함이 느껴지는 건
당신의 숨결이 가까이 있음입니다.

오늘은 창문을 활짝 열고
서운한 맘
모두 쓸어내고
방안 가득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로만 채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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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시 모음 34편

1.  12월

이외수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라하 회개하라
폭석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2.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이외수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3.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이외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리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침묵으로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4.  겨울비

이외수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가는 터널이
어디 있는지
흐린 기억의 벌판 어디쯤
아직도 매장되지 않는 추억의 살점
한 조각 유기 되어 있는지
저물녘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거리
늑골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모르겠어 돌아보면
폐쇄된 시간의 건널목
왜 그대 이름 아직도
날카로운 비수로 박히는지

5.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이외수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 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6.  더 깊은 눈물 속으로

이외수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비로소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모난 돌들이 보인다.
결국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날개 적시며
갈매기 한 마리
지워진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파도는 목놓아 울부짖는데
시간이 거대한 시체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
부끄럽다
나는 왜 하찮은 일에도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져 울고 있었던가.

그만 잊어야겠다.
지나간 날들은 비록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에는 분명
내가 흘린 눈물도 몇방울
그때의 순순한 아픔 그대로
간직되어 있나니.
이런 날은 견딜 수 없는 몸살로
출렁거리나니.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우리들의 인연은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죽은 시간이 해체되고 있다.
더 깊은 눈물 속으로
더 깊은 눈물 속으로
그대의 모습도 해체되고 있다.

7.  봄날은 간다

이외수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사
또 한 해
어느 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8.  봄밤의 회상

이외수

밤 새도록 산문시 같은 빗소리를
한 페이지씩 넘기다가 새벽녘에
문득 봄이 떠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네
내 생애 언제 한번
꿀벌들 날개짓소리 어지러운 햇빛 아래서
함박웃음 가득 베어물고
기념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풍경들은 언제나 흐림
젊은날 만개한 벚꽃같이 눈부시던 사랑도 끝내는
종식되고 말았네
모든 기다림 끝에 푸르른 산들이 허물어지고
온 세상을 절망으로 범람하는 황사바람
그래도 나는 언제나 펄럭거리고 있었네
이제는 이마 위로 탄식처럼 깊어지는 주름살
한 사발 막걸리에도 휘청거리는 내리막
어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별로 기대할 추억조차 없는 나날 속에서
올해도 속절없이 봄은 떠나가는데
무슨 이유로 아직도 나는
밤새도록 혼자 펄럭거리고 있는지를

9.  설야

이외수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며
눈이 내린다는 말 한마디

어디선가
나귀등에 몽상의 봇짐을 싣고
나그네 하나 떠나가는지
방울소리
들리는데
창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함박눈만 쌓여라
숨죽인 새벽 두 시

생각나느니 그리운 이여
나는 무슨 이유로
전생의 어느 호젓한 길섶에
그대를 두고 떠나왔던가

오늘밤엔 기다리며 기다리며
간직해 둔 그대 말씀
자욱한 눈송이로 내리는데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면
울고 싶다는 말 한마디
이미 세상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온 한 생애가 부질없구나

하지만 이 시간 누구든 홀로
깨어있음으로 소중한 이여
보라 그대 외롭고 그립다던 나날 속에
저리도 자욱히 내리는 눈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길 하나
그대 전생까지 닿아 있음을

10.  외로운 세상

이외수

힘들고 눈물겨운 세상
나는 오늘도 방황 하나로 저물녘에 닿았다
거짓말처럼 나는 혼자였다
만날사람이 없었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사람만 그리워졌다
사람들속에서 걷고 이야기하고 작별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섞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왜 자꾸만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결국
내가 더 사랑한다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

11.  함께 있는 때

이외수

세상에 神의 사랑 가득한 줄은
풀을 보고 알 것인가
꽃을 보고 알 것인가

눈을 감아라 보이리니
척박한 땅에 자라난
그대 스스로 한 그루 나무
실낱같은 뿌리에
또 뿌리의 끝

하나님의 눈은 보이지 않고
다만 존재할 뿐
사람이여
정답다 우리
함께 있는 때 

12.  6월

이외수

바람 부는 날은 백양나무 숲으로 가면 청명한 날에도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귀를 막아도 들립니다
저무는 서쪽 하늘 걸음마다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 내 인생은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보행에 불편을 드리지는 않았는지요
오래 전부터 그대에게 엽서를 씁니다
서랍을 열어도 온 천지에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한평생 그리움은 불치병입니다

13.  가을빛

이외수

밥이 보다 요긴했던 시대
밥 때문에 상처받던 시대
사랑도 밥 앞에서는
맥 못 쓰던
그런 날에도.
흰쌀밥으로만 보이던
원고지 빈 칸
뜯어먹으며 쓴 말

밤마다 푸른 잉크로
살아온 날만큼
사랑이라 적으면
눈시울 젖은 채로 죽고 싶어라

14.  걸인의 노래

이외수

삶은 계란
반으로 잘랐더니
그 속에
보름달이
두 개나 숨어 있었네
세상이 이토록 눈부신 뜻
내장만 비우고도 알 수 있는 일

15.  기다림

이외수

어느 날은 속삭이듯
배꽃나무 그늘로
스미고 싶다던 그대여.
스며 그에게로
가닿을 수 있다면.
터진 꽃망울의 속살로
피어날 수 있다면.
한 꽃나무에서 다른 꽃나무로
흐를 수만 있다면

16.  꽃

이외수

안개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가 말했다.
수은등 밑에 서성이는
안개는
더욱 슬프다고
미농지처럼 구겨져
울고 있었다.
젖은 기적 소리가
멀리서 왔다.

17.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이외수

인간은 누구나 소유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완전무결한
자기 소유로 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요

아예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내 꺼는 없어, 라는
말을 대부분이 진리처럼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 제가 어떤 대상이든지
영원한 내 꺼로 만드는
비결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 대상이 그대가 존재하는 현실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세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 그 대상은
영원한 내 꺼로 등재됩니다

비록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그대의
영혼 속에 함유되어 있습니다

다시 새로운 한 날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소유하는 삶보다
많은 것들에 함유되는
삶이 되시기를 빌겠습니다

18.  노을

이외수

허공에 새 한 마리
그려 넣으면
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어라
너무 쓸쓸하여
점하나를 찍노니
세상사는 이치가
한 점안에 있구나.

안개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가 말했다.
수은등 밑에 서성이는
안개는
더욱 슬프다고
미농지처럼 구겨져
울고 있었다.

19.  놀

이외수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누군가가 그림자 지는 풍경 속에
배 한 척을 띄우고
복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뼈 가루를 뿌리고 있다
살아 있는 날들은
무엇을 증오하고 무엇을 사랑하랴
나도 언젠가는 서산머리 불타는 놀 속에
영혼을 눕히리니
가슴에 못다한 말들이 남아 있어
더러는 저녁 강에 잘디잔 물 비늘로
되살아나서
안타까이 그대 이름 불러도
알지 못하리
걸음마다 이별이 기다리고
이별 끝에 저 하늘도 놀이 지나니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20.  만추

이외수

영혼이 없는 육체를 보았습니까.
그는 영혼을 호주머니 속에 넣어둡니다.
마른 풀씨 처럼
불을 붙이면
연기도 없이 지워질 몸은,
차곡차곡 접어서
서랍 속 흰 빨래 옆에 가지런히 놓아둡니다.
가끔은 주머니를 털고
술잔 속에
담배연기 속에
우리들 손등 위에 가만히
그의 영혼을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서랍 속으로 들어가
이 세상과 분리됩니다.
우리가 그를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21.  별

이외수

내 영혼이 죽은 채로 술병 속에
썩고 있을 때
잠들어 이대로 죽고 싶다
울고 있을 때
그대 무심히 초겨울 바람 속을 걸어와
별이 되었다

오늘은 서울에 찾아와 하늘을 보니
하늘에는 자욱한 문명의 먼지
내 별이 교신하는 소리 들리지 않고
나는 다만 마음에 점 하나만 찍어 두노니
어느 날 하늘 맑은 땅이 있어
문득 하늘을 보면
그 점도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22.  봄눈

이외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뜨고요
영혼들만
새벽 안개등으로 빛나는 날
샘밭에 가면
강물처럼 흐르는 축축한
혼들의 행렬이 보이지요
안개는 슬픈 사람들의 넋이야
배추밭 뚝에서 젖은 채
흐느끼는 그대를
만나는 날이 많았습니다.

23.  수변

이외수

벽 속에도
벽 밖에도
담장에도 굴뚝에도
달마만 보였다.
구들장에도 서까래에도
하늘에도 땅에도
그리운 별은 또 어떻고.
버혀도 버혀도
달마는
비처럼 내렸다.

話頭를 놓았다.
달마도 벽도
간 곳이 없다.

24.  여름

이외수

샘밭에 가면
남루한 옷차림의
노을이,
남루한 사랑이
펼쳐진다. 공복인 그대가
어루만지던 원고지의
빈칸처럼.
그리움도 사랑도 시든 지
오래.
옛사랑은 노래가 되지 않는다.

25.  연꽃

이외수

흐린 세상을 욕하지 마라

진흙탕에 온 가슴을
적시면서
대낮에도 밝아 있는
저 등불 하나

26.  초저녁 강가에서

이외수

헤어진 사랑
땅에서는 바위틈에 피어나는
한 무더기 꽃
하늘에서는 달이 되고 별이 되고
또 더러는 내 소중한 이의 귀밑머리
거기에 무심히 닿는 바람소리

27.  풀꽃

이외수

세상길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도 법문 같은 개소리
몇 마디쯤 던질 줄은 알지만
낯선 시골길
한가로이 걷다 만나는 풀꽃 한 송이
너만 보면 절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렇다면 내 공부는 아직도 멀었다는 뜻

28.  한세상 산다는 것

이외수

한세상 산다는 것도
물에 비친 뜬구름 같도다

가슴이 있는 자
부디 그 가슴에
빗장을 채우지 말라

살아있을 때는 모름지기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못 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

29.  강이 흐르리

이외수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되고
오스스 떨며 나서는 거미의 여린 실낱
맺힌 이슬이 되고
그 이슬에 비치는 민들레가 되리라

살아있어 소생하는 모든 것에도
죽어서 멎어 있는 모든 것에도
우리가 불어 넣은 말 한 마디

사랑한다고
비로소 얼음이 풀리면서
건너가는 나룻배
저승에서 이승으로 강이 흐르리

30.  길

이외수

버리고 일어서라.
시간의 감옥
눈 먼 등대 아래서
살해당한 바다곁에서
누군가
진눈깨비에 뼈를 적시며
울고 있지만
아무리 깊은 어둠
부러진 날개
참혹하여도
버리고 일어서라.

버리고 일어서라.

이 세상 모든 길들은
내게서 떠나가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로 돌아오는 자를 위해서
영원토록
잠들지 않나니...

31.  섬

이외수

삽작 어귀도 쓸고
댓돌도 쓸고
방 안도 거울처럼
쓸고 닦았다.
벽 속의 달마가 말하기를
웬 쓰레기가
이리 큰 것이 앉았는고.

32.  여름 엽서

이외수

오늘 같은 날은
문득 사는 일이 별스럽지 않구나
우리는 까닭도 없이
싸우고만 살아왔네
그 동안 하늘 가득 별들이 깔리고
물소리 저만 혼자 자욱한 밤
깊이 생가지 앓아도 나는
외롭거니 그믐밤에는 더욱 외롭거니
우리가 비록 물 마른 개울가에
달맞이꽃으로 혼자 피어도
사실은 혼자이지 않았음을
오늘 같은 날은 알겠구나

낮잠에서 깨어나
그대 엽서 한 장을 나는 읽노라
사랑이란
저울로도 자로도 잴 수 없는
손바닥만한 엽서 한 장
그 속에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
말 한 마디만으로도
내 뼛속 가득
떠오르는 해

33.  조각잠

이외수

겨울 강바람이
산발치로
산길 몇 개를 틀어 올리면.
사람이 그리워
내려오는
산길로 들자.
무엇을 더 끊어야 하리.
세상 밖에 나와서
세상을 보는
저 깊은
적멸.

34.  흐린 세상 건너기

이외수

비는 예감을 동반한다.

오늘쯤은 그대를
거리에서라도 우연히
만날는지 모른다는 예감.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엽서 한 장쯤은
받을지 모른다는 예감.

그리운 사람은 그리워하기 때문에
더욱 그리워진다는
사실을 비는 알게 한다.

이것은 낭만이 아니라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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