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 모음

1.천생연분

박노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이뻐서가 아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와서가 아니다.
이쁜걸로야 TV탈렌트 따를 수 없고
세련미로야 종로거리 여자들 견줄수 없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지성미로야 여대생년들
쳐다볼 수도 없겠지
잠자리에서 끝내주는 것은 588 여성동지
발뒤꿈치도 안차고
서비스로야 식모보단 못하지
음식솜씨 꽃꽃이야 강사 따르겠나
그래도 나는 당신이 오지게 좋다.
살아 볼수록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이고
겁나게 겁나게 좋드라.

내가 동료들과 술망태가 되어 와도
몇일씩 자정 넘어 동료집을 전전해도
건강걱정 일격려에 다시 기운이 솟고
결혼 후 3년 넘게 그 흔한 세일 샤스하나 못사도
짜장면 외식 한번 못하고
로션하나로 1년 넘게 써도
항상 새순처럼 웃는 당신이 좋소.

토요일이면 당신이 무더기로 동료들을 몰고와
피곤해 지친 나는 주방장이 되어도
요즘 들어 빨래, 연탄 갈이, 김치까지
내 몫이 되어도
나는 당신만 있으면 째지게 좋소.

조금만 나태하거나 불성실하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진짜 겁나는 당신
좌절하고 지치면 따스한 포옹으로
생명력을 일깨 세우는 당신
나는 쬐그만 당신 몸 어디에서
그 큰사랑이 , 끝없는 생명력이 나오는가
곤히 잠든 당신
가슴을 열어 보다 멍청하게 웃는다.

못 배우고 멍든 공순이와 공돌이로
슬픔과 절망의 밑바닥을 일어서 만난
당신과 나는 천생연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억압 속에 시들은
빛나는 대한민국 노동자의 숙명을
당신과 나는 사랑으로 까부스고
밤하늘별처럼
흐르는 시내처럼
들의 꽃처럼
소곤소곤 평화롭게 살아갈 날을 위하여
우린 결말도 못보고 눈감을지 몰라
저 거친 발굽 아래
무섭게 소용돌이쳐 오는 탁류 속에
비명조차 못 지르고 휩쓸려갈지도 몰라.
그래도 우린 기쁨으로 산다 이 길을
그래도 나는 당신이 눈물나게 좋다 여보야

도중에 깨진다 해도
우리 속에 살아나
죽음의 역사를 넘어서서
이름 봄마다 당신은 개나리 나는 진달래로
삼천리 방방곡곡 흐트러지게 피어나
봄바람에 입맞추며 옛 얘기 나누며
일찌기 일 끝내고 쌍쌍이 산에 와서
진달래 개나리 꺾어 물고 푸성귀 같은
웃음 터뜨리는
젊은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그윽한 눈물을 짖자 여보야
나는 당신이 좋다.
듬직한 동지며 연인인 당신을
이 세상에서 젤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미치게 미치게 좋다.

2.그대 나 죽거든

박노해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마
하늘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다
눈 내리면 언 땅에다
까마귀 산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 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보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나 언 땅 속에 길게 뿌리누워
못다 한 푸른 꿈과 노래로 흐를 테요
겨울 가고 해가 가고 나 흙으로 사라지고
호올로 야위어가는그대.. 어느 봄 새벽,
수련한 함박꽃으로 피어 날 부르시면은
나 목메인 푸르른 깃발 펄럭이면서
잠든 땅 흔들어 깨우며 살아날 테요

아영아영 나 죽거든
손톱 발톱 깎아주고 수염도 다듬어서
그대가 빨아 말린 흰옷 이쁘게 입혀주오
싸늘한 살과 뼈 험한 내 상처도
그대 다순 숨결로다 호야호야 어루만져
하아- 평온한 그대 품안에 꼬옥 보듬어 묻어주오
자지러진 통곡도 피 섞인 눈물도 모질게 거두시고
우리 맹세한 붉은 별 사랑으로, 눈부신 그 봄철로
슬픔 이겨야해. 아영 강인해야 해

어느 날인가 그대 날 찾아 땅속으로 오시는 날
나 보드란 흙가슴에 영원히 그댈 껴안으리니

3.그리움

박노해

공장 뜨락에
따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간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4.통박

박노해

어느 놈이 커피 한잔 산다 할 때는
뭔가 바라는게 있다는 걸 안다.

고상하신 양반이
부드러운 미소로 내 등을 두드릴 땐
내게 무얼 원하는지 안다.

별스런 대우와 칭찬에
허릴 굽신이며 감격해도
저들이 내게 무얼 노리는지 안다.

우리들이 일어설 때
노사협조를 되뇌이며 물러서는
저 인자한 웃음 뒤의 음모와 칼날을 우리는 안다.

유식하고 높은 양반들만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세상마다 뒹굴며
눈치밥을 익히며 헤아릴 수 없는 배신과 패배 속에
세상 살아가는 통박이 생기드만

세상엔 빡빡 기는 놈들 위해서
신선처럼 너울너울 나는 놈 따로 있어
날개 없이 기름바닥 기는 우리야
움츠리며 통박을 굴리며 살아가지만
통박이 구르다 보면
통박끼리 구르고 합쳐지다 보면
거대한 통박이 된다고

좆도 배운 것 없어도
돈 날개 칼 날개 달고 설치는 놈들이 무엇인지
이놈의 세상이 어찌된 세상인지
누구를 위한 세상인지
우리들 거대한 통박으로 안다.

쓰라린 눈물과 억압과 패배 속에서
거대한 통박으로 구르고 부딪치고 합치면서
우리들의 통박은
점점 날카롭고 명확하게
가다듬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통박이 거대한 통박으로
하나의 통박으로 뭉쳐지면서
노동하는 우리들이 새날을 향하여
이놈의 세상을 굴려갈 것이다.

5.준비 없는 희망

박노해

준비 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 닦아
저 거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넘을
진정한 자기 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 없는 준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해 가는데
세상과 자기를 머릿속에 고정시켜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6.그 해 겨울나무


박노해

1

그 해 겨울은 창백했다
사람들은 위기의 어깨를 졸이고 혹은
죽음을 앓기도 하고
온몸 흔들며 아니라고 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는
그 푸른 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팔락이던 이파리도 새들도 노래 소리도
순식간에 떠나 보냈다.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떼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
지친 육신에 가차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
그 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

2

후회는 없었다 가면 갈수록 부끄러움뿐
다 떨궈주고 모두 발가벗은 채
빛남도 수치도 아닌 몰골 그대로
칼바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언 땅에 눈이 내렸다.
숨막히게 쌓이는 눈송이마저 남은 가지를
따닥따닥 분지르고
악다문 비명이 하얗게 골짜기를 울렸다.
아무 말도 아무말도 필요 없었다.
절대적이던 남의 것은 무너져 내렸고
그것은 정해진 추락이었다.
몸뚱이만 깃대로 서서
처절한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며
낡은 건 떨치고 산 것을 보듬어 살리고 있었다.
땅은 그대로 모순 투성이 땅
뿌리는 강인한 목숨으로 변함 없는 뿌리일 뿐
여전한 것은 춥고 서러운 사람들아
산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이었다.

3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죽음 같은 자기 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아무데도 아무데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디를 긁히며 나이테를 늘리며 부리는
빨갛게 언 손을 세워 들고
오직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만이
그 겨울의 신념이었다.
한 점 욕망의 벌레가 내려와 허리 묶은
동아줄을 기어들고
마침내 겨울나무는 애착의 띠를 뜯어
쿨럭이며 불태웠다.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7.민들레처럼

박노해

일주일의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엽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요."
어느 도적놈인지 조직폴력배인지
노란 민들레 한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이 주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 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서 ?줘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한 민들레꽃
한 송이로 환하게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년 아름다은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민들레꽃을 바로 봅니다.
어디선가 묶인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내 손에까지 쥐어준
그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 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 꽃으로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
흔하고 너른 꽃 속에서 자연스레 빛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둥이
쇠창살 너무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말하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중에 수천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아- 동지들,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8.진짜 노동자

박노해

한세상 살면서
뼈빠지게 노동하면서
아득바득 조출철야 매달려도
돌아오는 건 쥐씨 알만한지

죽어라 생산하는 놈
인간답게 좀 살라고 몸부림쳐도
죽어라 쇳가루만 날아들고 콱콱 막히고
골프채 비껴찬 신선놀음 허는 놈들
불도자 처럼 정력 좋은 이윤추구에는
비까번쩍 애국갈채
제기랄 세상사가 왜이리 불평등한지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서
생각도 못하고 사는 놈은 죽은 송장이여
말도 못하는 놈은 썩은 괴기여
켈레비만 좋아라 믿는 놈은 얼빠진 놈
이빨만 까는 놈은 좆도 헛물
실천하는 사람
동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노동자만이
진실로 인간 이제
진짜 노동자 이제

비암이라고 다 비암이 아니여
독이 있어야 비암이지
센방이라고 다 센방이 아녀
바이트가 달려야 센방이지
노동자라고 다 노동자가 아니제
동료와 어깨를 꼭 끼고 성큼성큼 나아가
불도자 밀어제께 우리 것 찾아 담은
포크레인 삽날 정도는 되어야
진짜 노동자지

9.마지막 시

박노해

거대한 안기부의 지하밀실을
이 시대의 막장이라 부른다.

소리쳐도 절규해도 흡혈귀처럼
남김없이 빨아먹는 저 방음벽의 절망
24시간 눈 부릅뜬 저 새하얀 백열등
불어 불엇! 끝없이 이어지는 폭행과
온 신경이 끊어 터질 듯한 고문의 행진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무너질 수는 없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아 그것은
우리들 희망의 파괴
우리 민중의 해방 출구이 붕괴
차라리 목숨을 주자
앙상한 이 육신을 내던져
불패의 기둥으로 세워두자

서러운 운명
서러운 기름 밥의 세월
뼛골시게 노동하고도 짓밟혀 살아온 시간들
면도날처럼 곤두선 긴장의 나날 속에
매순간 결단이 필요했던 암흑한 비밀활동
그 거칠은 혁명투쟁의 고비마다
가슴 치며 피눈물로 다져온 맹세
천만 노동자와 역사 앞에 깊이 깊이 아로새긴
목숨 건 우리들의 약속 우리들의 결의
지금이 그때라면 여기서 죽자
내 생명을 기꺼이 바쳐주자

사랑하는 동지들
내 모든 것인 살붙이 노동자 동지들
내가 못다 한 엄중한 과제
체포로 이어진 크나큰 나의 오류도
그대들 믿기에 승리를 믿으며
나는 간다 죽음을 향해 허청허청
나는 떠나간다.

이제 그 순간
결행의 순간이다.
서른 다섯의 상처투성이 내 인생
떨림으로 피어나는 한줄기 미소
한 노동자의 최후의 사랑과 적개심으로 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
마지막 생의 외침
아 끝끝내 이 땅 위에 들꽃으로 피어나고야 말
내 온 목숨 바친 사랑의 슬로건

"가자 자본가세상, 챙취하자 노동해방"

10.강철 새잎

박노해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흑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11.아직과 이미 사이

박노해

아직과 이미 사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 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12.줄 끊어진 연

박노해

한겨울 바람이 맵찬 어느 날이었어요
창살 너머 어둑한 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줄 끊어진 가오리 연 하나가 뒤척이며
고행중이더군요

스스로를 산채로 파묻고 인연 줄도 다 놓아 버려
깊어 가는 감옥이 조금은 적막하지만
한사코 붙잡지 않습니다
탓하지도, 의지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습니다.

난 지금 줄 끊어진 연처럼
홀로 빈 하늘 떠도는 듯해도
하하, 나는 나대로 고독한 긴장 속에
생명줄 내건 치열한 날들입니다.

보이는 줄만 줄일까요
세 손으로 거두어야만 삶일까요
이헐게 날면 되는 것을
줄 없는 줄을 타고
허공 찬바람 속에 몸 던져주며

나는 홀로 날았습니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내 목숨 같은 외줄을 끊고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다시 이어지는 고투의 세월을
참흑한 투쟁과 묵상의 나날이었습니다

아- 눈 맑게 열리고 마침내 내 인연의 때가 오는 날

줄 없는 줄을 통해
아직도 첫 마음 밝혀든 그대에게
나 뜨거운 떨림으로 차전할 것입니다.

그래요 희망의 줄은 이미
저마다의 몸 속에 내장되어 있고
좋은 세상은 이미 현실 속에 와 자라고 있고
외줄의 때가 있고 거미줄의 때가 있고

밤새 거미 한 마리가
제 몸 속에서 투명한 줄을 뽑아
쇠창살에 잘 짜인 집을 짓더니
아침 햇살에 이른 영롱한 팽팽한
거미 줄망이 그대로 한 우주,
내 삶의 안과 밖이 이어지는 관계
그물 망으로 확 비추어 오더군요.

13.겨울이 온다

박노해

와수수
가랑잎 쓰는 바람에
삭발한 머리 쳐드니
하늘은 저만큼 높아져 있다.
나는 이만큼 낮아져 있는데

시린 하늘 흰 구름은
옥담 질러 사라지고
나는 컴컴한 독방으로 사라지고

맑은 가을볕도 잠깐
여위어가는 가을 설움도 잠깐
벌써 독방 마루 바닥이 찹다
의시시 몸 웅크리며
겨울 보따리 풀어 해진 옥 궤맨다

아 어느덧 저만큼
겨울이 온다 겨울이 온다

벽 속에 시퍼렇게 정좌한 채
겨울 정진 깊어가는 날 온다
대낮에도 침침한 독거방 불빛 아래
갑자기 바느질 손 바빠진다.

14.신혼일기

박노해

길고 긴 일주일의 노동 끝에
언 가슴 웅크리며
찬 새벽길 더듬어
방안을 들어서면
아내는 벌써 공장 나가고 없다.

지난 일주일의 노동
긴 이별에 한숨 지며
쓴 담배연기 어지러이 내어 뿜으며
혼자서 밤들을 지낸 외로운 아내 내음에
눈물이 난다.

깊은 잠 속에 떨어져 주체못할 피로에
아프게 눈을 뜨면
야간일 끝내고 온 파랗게 언 아내는
가슴위로 엎으러져 하염없이 쓰다듬고
사랑의 입맞춤에
내 몸은 서서히 생기를 띤다.

밥상을 마주하고
지난 일주일의 밀린 얘기에
소곤소곤 정겨운
우리의 하룻밤이 너무도 짧다.

15.거룩한 사랑

박노해

성은 피과 능이다.
어린 시절 방학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뭍혀 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깍 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 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끊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을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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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 모음
.
1.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2.사랑이란

류시화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명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 장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3.지금 알고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잇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4.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5.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류시화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 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6.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 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 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 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이 겨울 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7.누구든 떠나갈 때는

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고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8.겨울의 구름들

류시화

겨울이 왔다
내 집 앞의 거리는 눈에 덮이고
헌 옷을 입은 자들이 지나간다
그들 중의 두세 명을 나는 알고
더 많은 다른 얼굴들은 알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소리쳐 그들을 부른다 내 목소리는
그곳까지 들리지 않는다
겨울은 저 아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2

겨울이 왔다
나의 삶은 하찮은 것이었다
밤에는 다만 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온갖
부질없이 깊은 생각들에 사로잡힐 때
늘어뜨려진 가지, 때아닌 붉은 열매들이
머리 위에서 창을 두드리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희고 창백한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면
겨울의 구름들이
붉은 잎들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내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홀로 있었다 등불의 심지만을 들여다보며
변함 없는 어떤 흐름이 갑자기 멈춘 일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3

아니다,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책장에 얼굴을 묻고
참이 들곤 했다, 겨울이 왔다
나의 삶은 하찮은 것이었고
나는 오갈 데가 없었다
내 집 지붕 위로
겨울의 구름들이 흘러가는 곳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오래 불고 조용히 속삭이면서
더 큰 물결을 내 집 뒤로 데리고 온다

9.안개 속에 숨다

류시화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10.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류시화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편에 서 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11.나무

류시화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12.두 사람만의 아침

류시화

나무들 위에 아직 안개와
떠나지 않은 날개들이 있었다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었다 오솔길 위로
염소와 구름들이 걸어왔지만
어떤 시간이 되었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여기 이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한때 한없이 투명하던 것들
기억 저편에 모여 지금
어떤 둥근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한때 우리가 빛의 기둥들 사이에서 두 팔로
껴안던 것들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때 우리가 물가에서
귀 기울여 주고받던 말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새와 안개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옛날의 불꽃을
본다 그 둘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숲의 끝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본다

13.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류시화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껍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새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 솔의 물풀처럼 졸라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14.들풀

류시화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15.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16.뮤직 박스

류시화

나 어렸을 때
뮤직박스 하나를 갖고 있었다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집착했던 것
유리상자 안의 인형이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 머리맡에 늘 놓여 있던
뮤직박스
나 잠이 들면
세상 전체가 뮤직박스가 되어
별자리들의 음악에 맞춰
끝없이 돌아가곤 했다
그것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슬픔을 잊었다
나는 나이를 먹고
뮤직박스는 어느새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이 생에서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집착했다
당신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잊었다
당신이 내 태엽을 감으면
나는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뮤직박스 속의 인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은
그 뮤직박스를 버렸다
아무도 태엽을 감아 주는 이 없이
춤을 추던 그 동작 그대로
나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17.그건 바람이 아니야

류시화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불붙은 옥수수 밭처럼
내 마음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입 속에 혀처럼 가두고
끝내 하지 않은 말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혼
가볍긴 해도 그건 바람이 아니야

18.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19.세월

류시화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강물이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그대를 만나 내 몸을 바치면서
나는 강물보다 더 크게 울었네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 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배들도 눈물 어린 등불을 켜고
차마 갈대 숲을 빠르게 떠나지 못했네

 

20.빵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21.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것은
인간뿐
삶이 그만큼 피곤하기 때문이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보라, 삶을
굴뚝새가 사라진 삶을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오직 인간만이 남으리라
대지 위에
입을 벌리고 잠든 인간만이

 

 22. 첫사랑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23.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 한다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곁에 머무를 수는 없는것
시간이 지나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24.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편에 서 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25.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26.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넌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내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어린 바닷게들의 눈속임을
순간의 삶을 버린 빈 조개가 모래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그러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만 너를 위한 것

 

 27.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겁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새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 속의 물풀처럼 졸라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 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28.저편언덕

 

슬픔이 그대를 부를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것에도 의지할수 없을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의미에도 기댈수 없을때
저편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말라.

 

 29.비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비나무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30.소금별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31.별에 못을 박다

 

어렸을 때 나는
별들이 누군가 못을 박았던
흔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별들이 못구멍이라면
그건 누군가
아픔을 걸었던
자리겠지

 

 32.잊었는가 우리가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33.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34.여섯줄의 시

 

너의 눈에 나의 눈을 묻고
너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묻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말하렴,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말을
말하렴, 네 숨 속에 숨은 진실을
말하렴, 침묵의 언어로 말하렴

 

 지상에서 잠시 류시화라고 불리웠던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별들이 가득 내린 강을 건너다가
그만 별에 발을 찔렸습니다
지금은 집에 돌아와
그 옛날 내가 떠나온 별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어떤 영혼은
별에서 왔다는
별에서 와서 고독하다는
그 말을 내 집 지붕에 얹어둡니다
이 짧은 지상의 삶과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내가 띄운 편지가 그 별에 가 닿았는지
내 집 지붕 위에서 별 하나가 흔들립니다

 

 35.생활(生活)

 

-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당시는 '안재찬'이라는 본명으로 응모하여 입상하였다)

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어둠의 을 열고
맨 처음 세상으로 나온 아이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아침은 소리없이 움직임만으로 와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
四方에서 입술을 부비며 스며든다.
손바닥 위에 놓인 의 조각들을 쪼아먹는
소망의 뜰에 내린 새 몇마리
앉아있다 날아간 자리
버리고 남은,
버릴 수 없이 슬픈 이야기들은 모두
지난 밤의 꿈으로 문질러두고
지금 을 닦고 있는 내 손길 아래
세상의 어느 한 곳이 닦여지고 있다.

톱밥처럼 흩어지는 日常의 책장들
良識은 굳은어깨뼈처럼 튼튼하지 못하고
길모퉁이에 잠복해 있는
먼지의 덫, 보이지 않는 손들의 굴레
一部分씩 닦여져 나간다.
빈 접시에 채우는 하루분의 양심과
빵 하나의 自由로 시작되는
이 아침, 햇빛은 하늘의 층계를 걸어내려와
無垢한 눈망울을 가진
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어디로 어디로 데려가는가.

아침의 을 열고
맨 처음 밖으로 나온 아이의 두 눈
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어느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36.비밀

 

신비의 서를 나는 읽었네
글자 없이 종이 없이 씌어진
그 책을 나는 읽었다.

저 티벳 성자들의 낯선 세계 속으로
나는 가 보았다.

흰구름의 길을 헤치고
밀라레빠와 대머리 독수리들의 대화 속으로
그리고 절대의 음악을 나는 들었다.

연주하는 이도 없이 악기도 없이 울려 퍼지는
신비 시인 파비르의 시에 나는 취했다.
나는 술을 마실 줄 모르지만
그가 주는 술은 마실 수 있다.

술잔도 없이 건네주는 그 술을
입 대지도 않고 나는 마신다.

이 술취한 자의 말을 들으라

삶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다만 덧없는 시간의 화살 속에서
그 화살 쏘는 자를 나는 본다..

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여행 도중에 만나는 기차와 별과 모래 사막이 좋았다.
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이 보기 좋았다.
내 정신은 여행길위에서 망고열매처럼 익어갔다.

 

 37.문맹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젊은 사두에게

더 늦기 전에 글을 배울 것을 강조하자,

그는 내게 들으라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글을 모르는 것보다 더심각한 것은

영적인 문맹이 되는 일이다.
세상에는 많은 학식을 자랑하지만

영적으로 문맹인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38.신의안내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푸쉬카프의 노천 찻집에 앉아 여행가이드북을
뒤적이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두가 말했다.

"힌두스탄을 여행하면서 그까짓 안내 책자에 의지하지 말라.
신으로 하여금 그대의 여행을 인도하게 하라."

 

 39.어디서 왔는가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묻자, 남인도 케랄라에서 만난 사두가 말했다.

"난 아무 데서도 안 왔소. 난 언제나 여기서 있었소.

그리고 난 아무 데로도 가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이 듣기 좋았다.

언제나 여기에 있었따는.....

 늘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

그것은 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40.인생 수업

 

"내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북인도 심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가 묻자,

히말라야 산중의 강고트리로 가는 중인 고행승 사두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인생 수업을 받으러 온 학생들이라는 사실이지.
그것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네.“

 

41. 바람 부는 날의 꿈

류시화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 가를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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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님 시 모음 40편

1.아홉 가지 기도

도종환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깊은 허무에 빠져 기도합니다
그러나 허무 옆에 바로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우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죄와 허물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죄와 허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내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도
늘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모든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용서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굳셈과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욱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2.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도종환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 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3.만들 수만 있다면

도종환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남길 수만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며 삽시다.

가슴이 성에 낀 듯 시리고 외로웠던 뒤에도
당신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무참히 짓밟히고 으깨어진 뒤에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사나운 바람 속에서 풀잎처럼 쓰러졌다가도
우두둑 우두둑 다시 일어섰습니다.

꽃 피던 시절의 짧은 기쁨보다
꽃 지고 서리 내린 뒤의 오랜 황량함 속에서
당신과 나는 가만히 손을 잡고 마주서서
적막한 한세상을 살았습니다.
돌아서 뉘우치지 맙시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온 뒤에도 후회하지 맙시다.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4.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도종환

피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비에 소리 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 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5.맑은 물

도종환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 준다
만상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오히려 더욱 맑게 고이는 그대 모습 만나지 않았는가

6.깊은 물

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기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던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7.꽃잎

도종환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 할 수 없는
시작도 아직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8.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 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을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9.어떤 편지

도종환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10.당신과 가는 길

도종환

별빛이 쓸고 가는 먼 길을 걸어 당신께 갑니다.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간 벌판이 되어
길의 끝에서 몇 번이고 빈 몸으로 넘어질 때
풀뿌리 하나로 내 안을 뚫고 오는
당신께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동짓달 개울물 소리가 또랑또랑
살얼음 녹이며 들려오고
구름 사이로 당신은 보입니다.
바람도 없이 구름은 흐르고
떠나간 것들 다시 오지 않아도
내 가는 길 앞에 이렇게 당신은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11.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였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12.길

도종환

아무리 몸부림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정을 넘긴 길바닥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너는 울었지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는 길밖에 없을 거라는
그따위 상투적인 희망은
가짜라고 절망의 바닥 밑엔 더 깊은
바닥으로 가는 통로밖에
없다고 너는 고개를 가로 저었지
무거워 더 이상 무거워 지탱할 수 없는 한 시대의
깃발과 그 깃발 아래 던졌던 청춘 때문에
너는 독하디 독한 말들로 내 등을 찌르고 있었지
내놓으라고 길을 내놓으라고
앞으로 나아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지금 나는 쫓기고 있다고 악을 썼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나의 간절한 언표들을 갈기갈기 찢어 거리에 팽개쳤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던지는 모든 발자국이
사실은 길 찾기 그것인데
네가 나에게 던지는 모든 반어들도
실은 네가 아직 희망을 다 꺾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도 너와 우리 모두의 길 찾기인데
돌아오는 길 네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던
안타까운 나의 나머지
희망을 주섬주섬 챙겨 돌아오며
나도 내 그림자가 끌고 오는
풀죽은 깃발 때문에 마음 아팠다.
네 말대로 한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고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도대체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너는 내 턱밑까지 다가와 나를 다그쳤지만
그래 정말 몇 면이 시 따위로
혁명도 사냥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한올의 실이 피륙이 되고
한 톨의 메마른 씨앗이 들판을 덮던 날의
확실성마저 다 던져버릴 수 없어 나도 울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네 말대로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러나 난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렇게 잠겨갈 수만은 없다.
나는 가겠다 단 한 발짝이라고 반 발짝이라도

13.홀로 있는 밤에

도종환

이것이 진정 외로움일까
다만 이렇게 고요하다는 것이
다만 이렇게 고요하게 혼자 있다는 것이
흙 위에 다시 돋는 풀을 안고 엎드려
당신을 생각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홀로 깊이 어두워져가고 있는 다만
이 짧은 순간을
외로움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눈물조차 조용히 던지고 떠난 당신을 생각하면
진정으로 사랑을 잃고 비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나도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비어 있다고
내가 외롭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새로 돋는 풀 한 포기보다도 떳떳치 못하고
돌아오는 새들보다 옳게 견디지 못한 채
이것을 고독이라 말해도 되는 걸까
저 길고 긴 허공을 말없이 떨어져
어둔 땅 너머로 빗발들은 소리 없이
잠겨 가는데
빗방울만큼도 참아내지 못하면서

겨우 몇 날 몇 해 홀로 길 걷는다고
쓸쓸하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흔들리기만 하면서 흔들리기만 하면서
고독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14.여린 가지

도종환

가장 여린 가지가 가장 푸르다.
둥치가 굵어지면 나무껍질은 딱딱해 진다.
몸집이 커질수록 움직임은 둔해지고
줄기는 나날이 경직되어 가는데
허공을 향해 제 스스로 뻗을 곳을 찾아야 하는
줄기 맨 끝 가지들은 한 겨울에도 푸르다
모든 나무들이 자정에서 새벽까지 견디느라
눈비 품은 잿빛 하늘처럼
점점 어두운 얼굴로 변해가도
북풍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가지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엄동에도 초록이다.
해마다 꽃망울은 그 가지에 잡힌다.
 
15.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벚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16.사랑의 길

도종환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 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 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17.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도종환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 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18.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19.가을사랑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20.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도종환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또 그렇게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으로 애타게 물 한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절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나고
절반은 깨어서 당신을 그리며
나뭇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긴 겨울동안
밤마다 내 마음도 썩어서 그리움을 키웁니다.
당신 향한 내 마음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당신은 언제쯤 온몸 가득 물이 되어 오십니까
서로 다 가져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언제쯤 물에 녹듯 녹아서 하나되어 만납니까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쓸쓸히 자리를 펴고 누우면
살에 닿는 손길처럼 당신은 제게 오십니다.
삼 백 예순 밤이 지나고 또 지나도
꿈 아니고는 만날 수 없어
차라리 당신 곁을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바람처럼 제게로 불어오십니다.

21.겨울 골짜기에서

도종환

낮은 가지 끝에 내려도 아름답고
험한 산에 내려도 아름다운 새벽 눈처럼
내 사랑도 당신 위에 그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밤을 새워 당신의 문을 두드리며 내린 뒤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간 내 마음의
발자국 그 위에 찍어
당신 창 앞에 놓아두겠습니다.
당신을 향해 이렇게
가득가득 쌓이는 마음을 모르시면
당신의 추녀 끝에서 줄줄이 녹아
고드름이 되어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바위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그래도 당신이 저녁 산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바람을 등에 지고 벌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을 사랑 했었노라는 몇 줄기
눈발 같은 소리가 되어
하늘과 벌판 사이로 떠돌며 돌아가겠습니다.

22.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도종환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 눈 녹지 않는 그늘 한쪽을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가 아직도 아픔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가는 길 피 흘리며 가야 하는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밤도 가고 있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어서 고개를 들자
머리를 흔들고 우리 서로 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 가자
그대여 아직도 절망이라고만 말하지 말자.

23.사연

도종환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24.인차리 5

도종환

인차리를 돌아서 나올 때면
못다 이룬 사랑으로 당신이 내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갔듯
나 또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때가 있음을 생각한다.
사랑으로 인해 꽝꽝 얼어붙은 강물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풀리지 않으리라
오직 한번 사랑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확실히 살아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엔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은 꼭 다시 만나야 하는 그날
우리 서로 무릎을 꿇고 낯익은 눈물 닦아주며
기쁨과 서러움으로 조용히 손잡아야 할
그때까지의 우리의 사랑을 생각하는 때문이다.

25.홍매화

도종환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자락 덮어도
매화 한송이 그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같은 그대 그리움

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
폭설을 퍼붓는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

26.돌아가는 꽃

도종환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27.오월편지

도종환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있는 자리마다
깊디깊은 침묵이 있습니다.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봄이 오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없이 흔들리는 붓꽃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가득 밀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 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와 머물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28.겨울나기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 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잃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29.그대 잘 가라

도종환

그대여 흘러 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짓는 것이
아름다와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 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30.꽃씨를 거두며

도종환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31.다시 떠나는 날

도종환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
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개 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 하지만은 않기로
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두기로
산맥 앞에서도 바람 앞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기로

32.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도종환

초저녁달이 떴습니다.
당신과 헤어지던 팔월입니다.
당신과 함께 죽음에 맞서 싸우던
그 뜨겁던 여름 석달 처럼
올해도 뜨거운 여름입니다
당신에게서 얻은 겨자씨 만한 사랑을
이 세상에 심고 가꾸는 일이
어찌 이리 어렵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는 죽음으로 가는 길까지도
하나 되어가지만
미워하는 사람 어두운 사람들의 밭에
씨앗 하나 가꾸고 풀 한 포기 뽑아내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어쩌면 이리 어렵습니까
크고 하나인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작은 여럿인 것을 사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는 길은
초저녁달이 구름을 헤치고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가는 길이 아닙니다.
풀벌레 울음이
깊은 밤의 가운데를 뚫고 가는 것처럼
그렇게 은은히 가지 않습니다.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애끓는 목청처럼 갑니다.
모래밭에 쓰러진 이에게 마지막 남은
내 몫의 물을 내어주고
내가 타는 목으로 가듯 가는 길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던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일보다
이 세상을
두루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더 어려운지
알게 하시려는 뜻으로 새기며
조용히 견디고 있습니다.
지금은 나를 여기 가두고 창 밖으로
흐르는 세월을 봅니다.
비가 내리다 그치고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면서
아침이 오고 저녁바람이 부는 것을 봅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 곁을 울면서 떠나고
손에 끌려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 그들의 돌아서던 뒷모습까지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우리를 미워하던 이들까지도 사랑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여기 이 자리에 끝까지 남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결코 삿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 감옥에 홀로라도 남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기로 함께 손을 잡고 다짐하던
처음 그 마음 한가운데 남아
먼 길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많아서
함께 나눈 사랑보다 함께 해야 할
사랑의 날들이 더 많아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그저 살아가는 일이 될 때까지
여기 이 자리에 남기로 합니다.

33.이별

도종환

당신이 처음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이것이 이별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고
나 또한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는 길을 향해 있으므로
나는 헤어지는 것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것이 이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별은 떠날 때의 시간이 아니라
떠난 뒤의 길어지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인가 합니다.
당신과 함께 일구다 만 텃밭을
오늘도 홀로 갈다 돌아옵니다
저물어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돌아오면서
나는 아직도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비록 내 곁을 떠나 있어도
떠나가던 때의 뒷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가다가 가끔은 들풀 사이에서 뒤돌아보던 모습으로
오랫동안 내 뒤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가도
이 세상이 다 저물기 전의 어느 저녁
그 길던 시간은 당신으로 인해
한 순간에 메꾸어 질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34.종이배 사랑

도종환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 보내는 저녁 강물 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 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 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월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그물을 들고 먼바다로 나가는 시간과
뱃전에 진흙을 묻힌 채 낯선 섬의
감탕밭에 묶여 있는 시간 더 많아도

내 네게 준 사랑의 말보다 풀잎 사이를 떠다니는 말
벌레들이 시새워 우는 소리 더 많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지금 내가 한 이 말이
네게 준 내 마음의 전부였음을

바람결에 종이배에
실려 보냈다 되돌아오기를 수 십번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이 한마디 네 몸 깊은 곳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내 이 세상 떠난 뒤에 너 남거든
기억해다오 내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35.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도종환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별빛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사랑은 고통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것들을
우리 손으로 허물기를 몇 번,
육신을 지탱하는 일 때문에 어둠 속에서
울부짖으며 뉘우쳤던 허물들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연약한 인간이기를 몇 번,
바위 위에서 흔들리는 대추나무 그림자 같은
우리의 심사와 불어오는
바람 같은 깨끗한 별빛 사이에서
가난한 봄들을 끌고 가기 위해 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건널 수 없는 강을
서로의 사이에 흐르게 하거나 가라지풀 가득한
돌 자갈 밭을 그 앞에 놓아두고 끊임없이
피 흘리게 합니다.
풀잎하나가 스쳐도 살을 베히고
돌 하나를 밟아도 맨살이 갈라지는
거친 벌판을 우리 손으로 마르지 않게
적시며 적시며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깨끗이
괴로워해본 사람은 압니다.
수없이 제 눈물로 제 살을 씻으며
맑은 아픔을 가져보았던 사람은 압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고통까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피하지 않고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살며 사랑하는 일도 그렇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몸으로 선택한 고통입니다.

36.비 내리는 밤

도종환

빗방울은 장에 와 흐득이고
마음은 찬 허공에 흐득인다
바위 벼랑에 숨어서 젖은 몸으로 홀로 앓는
물새 마냥 이레가 멀다하고
잔병으로 눕는 날이 잦아진다.

별마다 모조리 씻겨 내려가고 없는 밤
천리 만길 먼 길에 있다가
한 뼘 가까이
내려오기도 하는 저승을 빗발이 가득 메운다. 

37.늦깎이

도종환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 때문에
고통은 깊어갑니다.
이별이 온 뒤에야 사랑을 알고
사랑하면서 외로움은 깊어갑니다.
죽음을 겪은 뒤 삶의 뜻 알 것 같아
고개 드니 죽음이 성큼 다가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짧은 동안
잃지 않고 얻는 것은 없으며 최후엔
또 그것마저 버리게 됩니다.

38.어떤 날

도종환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소쩍새 소리를 천천히 가지고 되오는 동
안 밤도 오고
별 하나 손에 닿는 대로 따다가 옷섶으로
닦고 도 닦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뭇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겹의 강물 위를
소리 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 무상 흘러갔으면

39.어릴 때 내 꿈은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 머루 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 가는 봄 흙이 되고 싶어요.


40. 그대 잘 가라


도종환

    

그대여 흘러 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짓는 것이

아름다와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 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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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 모음

1.폭포 앞에서

정호승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2.미안하다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3.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 길을 걸어갈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4.슬픔으로 가는 길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감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5.강변 역에서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 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 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6.새벽 편지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7.끝끝내

정호승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8.그는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움녕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 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9.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10.리기다 소나무

정호승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11.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정호승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12.소록도에서 온 편지

정호승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개동백나무에 개동백이 피고
바다 위로 보르말이 떠오르는 밤
손 없는 손으로 동백꽃잎마다 주워
한 잎 두 잎 바다에 띄우나니 받으시라
팔 없는 팔로 허리를 두르고
발 없는 발로 함께 걷던 바닷가를
동백꽃잎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시라 

13.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 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14.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15.등신불

정호승

강물도 없이 강이 흐르네
하늘도 없이 눈이 내리네
사랑도 없이 나는 살았네

모래를 삶아 밥을 해먹고
모래를 짜서 물을 마셨네

잘 가게
뒤돌아보지 말게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네

눈이 오는 날
가끔 들르게

바람도 무덤이 없고
꽃들도 무덤이 없네

16.사랑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17.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정호승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18.정동진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19.희망은 아름답다

정호승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희망을 낳지 않는데
나그네여, 그 날 밤 총소리에 쫓기기며 길을 잃고
죽음의 산길 타던 나그네여
바다가 있어야만 산은 아름답고
별이 빛나야만 창은 아름답다
희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창은 들의 꽃
바람 부는 대로 피었다 사라지는 한 순례자

20.겨울 강에서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 강 강 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21.바닷가에 대하여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22.눈부처

정호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저무는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인생의 눈부처 되리
내 죽을 때 망초 꽃 되어
그대 맑은 눈동자 눈부처 되리..

23.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 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얼씨구나 부등켜 안고 웃어 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24.가난한 사람에게

정호승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밖에 걸어 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5.가을 꽃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 꽃이여

26.사랑

정호승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 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27.이별노래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28.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29.너에게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30.까닭

정호승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31.봄눈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32.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니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가

33.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정호승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 내린다.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 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 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34.가을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35.안개꽃

정호승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 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 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36.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37.내 마음속의 마음이

정호승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내 목을 베어 가십시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베어낸 내 목을
평생토록 베개로 삼아주십시오
그래도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시 칼로 베개를 내려쳐주십시오.
눈 내리는 그믐날 밤
기차역 부근에서
내 마음속의 마음이 말했습니다.

38.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호승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 

39.반지의 의미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어는 별에서’/ 정호성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이별노래 /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가을 꽃 / 정호성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이제는 지는 꽃도 아름답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것이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말자 꽃이여 

‘★구두 닦는 소년’ / 정호성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짖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닦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닦는다

이 세상 별볓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묵숨 위에 내려앉은 먼지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매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발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맹인 부부 가수’/ 정호성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 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강변 역에서 /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 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 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새벽 편지 /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끝끝내 / 정호승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니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가


 ★가을 /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그는 /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움녕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 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결혼에 대하여 /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 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폭포 앞에서 / 정호승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감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리기다 소나무 / 정호승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 정호승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소록도에서 온 편지 / 정호승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개동백나무에 개동백이 피고
바다 위로 보르말이 떠오르는 밤
손 없는 손으로 동백꽃잎마다 주워
한 잎 두 잎 바다에 띄우나니 받으시라
팔 없는 팔로 허리를 두르고
발 없는 발로 함께 걷던 바닷가를
동백꽃잎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시라

★꽃 지는 저녁 /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등신불 / 정호승

강물도 없이 강이 흐르네
하늘도 없이 눈이 내리네
사랑도 없이 나는 살았네
모래를 삶아 밥을 해먹고
모래를 짜서 물을 마셨네
잘 가게
뒤돌아보지 말게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네
눈이 오는 날
가끔 들르게
바람도 무덤이 없고
꽃들도 무덤이 없네

★사랑 /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정동진 /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희망은 아름답다 / 정호승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희망을 낳지 않는데
나그네여, 그 날 밤 총소리에 쫓기기며 길을 잃고
죽음의 산길 타던 나그네여
바다가 있어야만 산은 아름답고
별이 빛나야만 창은 아름답다
희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창은 들의 꽃
바람 부는 대로 피었다 사라지는 한 순례자


★겨울 강에서 /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 강 강 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바닷가에 대하여 /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눈부처 / 정호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저무는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인생의 눈부처 되리
내 죽을 때 망초 꽃 되어
그대 맑은 눈동자 눈부처 되리..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 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얼씨구나 부등켜 안고 웃어 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가난한 사람에게 / 정호승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밖에 걸어 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을 꽃 /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 꽃이여

 

★사랑 / 정호승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 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너에게 /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까닭 / 정호승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봄눈 /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정호승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 내린다.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 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 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안개꽃 / 정호승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 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 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내 마음속의 마음이 / 정호승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내 목을 베어 가십시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베어낸 내 목을
평생토록 베개로 삼아주십시오
그래도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시 칼로 베개를 내려쳐주십시오.
눈 내리는 그믐날 밤
기차역 부근에서
내 마음속의 마음이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 정호승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

 

★반지의 의미  /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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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마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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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늘 병든 즘생처럼
치운 십이월의 벌판으로 호올로 나온 뜻은
스스로 비노(悲怒)하야 갈 곳 없고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로다

삭풍에 늠렬(凜烈)한 하늘 아래
가마귀떼 날러 앉은 벌은 내버린 나누어
대지는 얼고
초목은 죽고
온 것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올 법도 않도다

그들은 모다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내 또한 그 거리에서 살어
오욕(汚辱)을 팔어 인색(吝嗇)의 돈을 버리려 하거늘
아아 내 어디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戮屍)하료

증오하야 해도 나오지 않고
날새마자 질타하듯 치웁고 흐리건만
그 거리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노니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가마귀 모양
이대로 황망한 벌 끝에 남루히 얼어붙으려 하노라

2.고목

유치환

내 고궁(古宮) 뒤에 가서 보니
뉘 알려지도 않은 높다란 고목 있어
적막히 진일(盡日)을 바람에 불리우고 있었도다
그는 소경인 양 싹도 틀려지 않고
겨우살이 말라 얽힌 앙상한 가지는

갈리바의 머리깔처럼 오작(烏鵲)이 범하는대로
오오랜 고독에 무쇠같이 녹쓸어
종시 돌아옴이 없는 저 머나먼 자를 향하여
소소(嘯嘯)히 탄식하듯 바람에 울고 있었도다

4.광야에 와서

유치환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5.귀고

유치환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처럼 다정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트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신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6.그리우면

유치환

 뉘 오는 이 없는 곬에는
하늘이 항시 호수처럼 푸르러
적은 새 가지 옮으는 곁에
송화가루 지고
외떨기 찔레
바위돌 하나
기나긴 하로해 직하기 제우노니
참으로 마음속 호올로 숨겼기에 즐거워
고은 송화가루 송화가루
손에만 묻다

7.그리움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8.깃발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9.꽃

유치환

가을이 접어드니 어디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와 모우기를 하였다
봉숭아 금전화 맨드라미 나팔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10.나무의 노래

유치환

외로움, 그것이 외로운 것 아니란다
그것을 끝내 견뎌남이 진실로 외로운 것
세월이여, 얼마나 부질없이 너는
내게 청춘을 두고 가고 또 앗아가고
그리하여 이렇게 여기에 무료히 세워 두었는가

무심히 내게 와 깃들이는 바람결이여, 새들이여
너희 마음껏 내게서 즐검을 누리고 가라
그러나 마침내 너희는 나의 깊은 안에는 닿지 않는것

별이여, 오직 나의 별이여
밤이며는 너를 우러러 드리는 간곡한 애도에
나의 어둔 키는 일곱 곱이나 자라 크나니
허구한 낮을 허전히
이렇게 오만 바람에 불리우고 섰으매
이 애절한 나의 별을 지니지 않은 줄로 아느냐

아아 이대로 나는 외로우리라, 끝내 정정하리라

11.너에게

유치환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을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12.노송

유치환

아득한 기억의 연령을 넘어서 여기
짐승같이 땅을 뚫고 융융히 자랐나니
이미 몸둥이는 용의 비늘을 입고
소소히 허공을 향하여 여울을 부르며
세기의 계절 위에 오히려 정정히 푸르러
전전 반축하는 고독한 지표의 일변에
치어든 이 불사의 원념을 알라.

13.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14.매화나무

유치환

겨우 소한(小寒)을 넘어선 뜰에 내려
매화나무 가지 아래 서서 보니
치운 공중에 가만히 뻗고 있는
그 가녀린 가지마다에
어느새 어린 꽃봉들이 수없이 생겨 있다

밤이며는 내가 새벽마다 일어 앉아
싸늘한 책장을 손끝으로 넘기며 느끼는
엊저녁 그 모색(暮色) 속 한천(寒天) 아래 까무러치듯
외로이도 얼어붙던 먼 山山들!
그러면서도 무엔지
아련하고도 따뜻이 마음 뜸 돌던 느낌을
이 가지들도 느껴 왔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표연히 집을 나서
어디고 먼 바닷가에나 가서
그 바다의 양양(洋洋)함을 바라보고
홀로의 생각에 젖었다 오?음!
이런 수럿한 심정도 어쩌면
저 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적에
내가 느껴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매운 바람결이 몰려 닿을 적마다
어린 꽃봉들을 머금은 가녀린 가지는
외로움에 스스로 다쳐서는 안 된다! 고
살래살래 타일르듯 흔들거린다

15.목숨

유치환

하나 모래알에
삼천 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수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한 이 즐거움이여

16.바람에게

유치환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17.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회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18.별

유치환

어느 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 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별 하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나누어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 밖에
없는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19.병처(病妻)

유치환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 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에 엉기인 유정(有情)의 거미줄을 관념(觀念)하며
요요(遙遙)한 태허(太虛) 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성망(星芒)을 지키며
소조(蕭條)히 지저(地底)를 구우는 무색 음풍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윈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 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愛憎)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소조(蕭條)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만약 그대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즘생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20.사향(思鄕)

유치환

향수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어 와
내 대신 내 자리에 살째기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 양 밀어 놓고
가만히 일어 창에 가 서면
푸른 모색(暮色)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 같은 등불 두엇!

21.산사(山寺)

유치환

염(念)하여도 염하여도 무연(無緣)하여
솔바람 유현(幽玄)한 탄식에
산그늘 사이 기왓골 외로이 늙고

어두운 법당 안엔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일월이 낙엽처럼 쌓이는 속에
적막히 앉아 기다리시고

대웅전 돌아가면
이름도 까마득한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별 바른 앞뜰의 황국(黃菊)도
쓸쓸히 인간의 애환을 여민 채

먼 마을의 인정스런 낮닭 소리도 안 들리고
정적도 그양 법열(法悅)이어서
아끼듯 들려오는 조왕당 부엌소리

22.산처럼

유치환

오직 한 장 사모의 푸르름만을 우러러
눈은 보지도 않노라
귀는 듣지도 않노라

저 먼 땅끝 닥아 솟은 산,
너메 산, 또 그너머
가장 아슬히 지켜 선 산 하나--
아아 그는 나의 영원한 사모에의 자세

무수히 침부하는 인간의 애환의 능선 넘어
마지막 간구의 그 목마른 발돋움으로
계절도 이미 絶한 苛熱에 항시 섰으매

이 아침날에도
그 아린 孤高를 호궤받듯
정결히도 백설 신령스리 외로 입혀 있고

내 또한 한 밤을
전전(轉輾)없이 안식함을 얻었음은
그 매운 외롬 그같이 설은 축복 입더메서랴

아아 너는 나의 영원--
짐짓 소망없는 저자에
더불어 내 차라리 어리숙게 살되

오직 너에게의 이 푸르름만을 우럴어
귀는 듣지 않노라
눈은 보지 않노라

23.생명의 서(書)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을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회한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24.생명의 서 일장(一章)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알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을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는 회한에 회한(悔恨)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25.석경(夕景)

유치환

달 희고
잔양(殘陽) 가지 끝에 남아 걸려
참새떼 마을에 돌아와
아이들처럼 법석대는 저녁은
땅거미같이 은밀히
내 오랜 가향(家鄕) 생각에 늙었음이여

26.세월

유치환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여기 외따로이 열려 있는 하늘이 있어

하냥 외로운 세월이기에
나무그늘 아롱대는 뜨락에
내려앉는 참새 조찰히 그림자 빛나고

자고 일고
이렇게 아쉬이 삶을 이어감은
목숨의 보람 여기 있지 아니함이거니

먼 산에 雨氣 짙은 양이면
자욱 기어드는 안개 되창을 넘어
나의 글줄 행결 고독에 근심 배이고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외따로이 열고 사는 세월이 있어

27.수(首)

유치환

십이월의 北滿(북만)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가성) 네거리에
匪賊(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한천)에 模糊(모호)히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除(제)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法度(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烈(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暝目(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28.수선화

유치환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29.슬픔은 불행이 아니다

유치환

모색(暮色)이 초연한 거리 끝에 서서
내가 이렇게 눈물짓는 것은
불행(不幸)하여서가 아니다.

시방 기척 없이 저무는 먼 산이며
거리 위에 아련히 비낀 초생달이며
자취 없이 사라지는 놀구름이며-
이들의 스스로운 있음과 그 행지(行止)의 뜻을
나의 목숨이 새기어 느낄 수 있음의
그 행복(幸福)에 흐느껴 눈물짓는 것이다.

- 진실로 진실로
의지없고 덧없음으로 하여
보배롭고 거룩한 이 꽃받침자리여.

30.시인에게

유치환

영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정수리 위에 도사려
내가 목숨을 목숨함에는
솔개에게 모자보다 무연(無緣)한 것.

이 날 짐짓
나를 붙들어 놓지 않는 것은
살아 있으므로 살아야 되는 무가내한 설정에
비바람에 보듬긴 나무.
햇빛에 잎새같은 열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의 사무치는 뜨거움에
차라리 나는 가두 경세가(經世家).

마침내 부유의 목숨대로
보라빛 한 모금 다비되어
영원의 희멀건 상판을 기어 사라질 날이
얼마나 시원한 소진이랴.

그러기에 시인이여
오늘 아픈 인생과는 아예 무관한 너는
예술과 더불어 곰곰히 영원하라.

31.울릉도

유치환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32.日月

유치환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33.입추

유치환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너머 하늘이 한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34.저녁놀

유치환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 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35.죽(竹)

유치환

흙을 밀고 생겨난 죽순ㅅ적 뜻을 그대로
무엇에도 개의챦고 호올로 푸르러
구름송이 스쳐가는 창궁(蒼穹)을 향하야
오로지 마음을 다하는 이 청렴의 대는
노란 주둥이 새새끼 굴러들 듯 날러 앉으면
당장에 한그루 수묵(水墨)이 향그론 그림이 되고
푸른 달빛과 소슬한 바람이 여기 잠기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유현(幽玄)한 죽림의 일원이 되다

36.죽음 앞에서

유치환

그 날 절벽같은 너의 죽음 앞에서
다시도 안 열릴 석문을 붙들고
아무리 불러 호곡한들
내 소리 네가 들으랴?
네 소리내게 들리랴?

37.차창에서

유치환

달아 나오듯 하여
모처럼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새에 자리 잡고 앉으면
이게 마음 편안함이여
의리니 애정이니
그 습(濕)하고 거미줄 같은 속에 묻히어
나는 이렇게 살아 나왔던가
기름대 저린 ‘유 치환’이
이름마저 헌 벙거지처럼 벗어 팽가치고
나는 어느 항구의 뒷골목으로 가서
고향도 없는 한 인족(人足)이 되자
하여 명절날이나 되거든
인조 조끼나 하나 사 입고
제법 먼 고향을 생각하자
모처럼 만에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틈에 자리 잡고
홀로 차창에 붙어 앉으면
내만의 생각의 즐거운 외로움에
이 길이 마지막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라도
나는 하나도 슬퍼하지 않으리

38.철로(鐵路)

유치환

사나운 정염(情炎)이 불을 품은
강철의 기관차 앞에
차가이 빛나는 두 줄의 철로는
이미 숙인(宿因) 받은 운명의 궤도가 아니라
이 거혼(巨魂)의
- 스스로 취하는 길
- 취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길
의지를 의지하는 심각한 고행의 길이로다
비끼면 나락(奈落)!
또한 빠르지 않으면 안 되나니
오오 한자락 자학에도 가까운 의욕과 열의의 길이로다

보라
처참한 폭풍우의 암야(暗夜)에 묻히어
말없이 가리치는 두 줄의 철로를
그리고 한결같이 굴러가는
신념의 피의 불꽃의 화차(火車)를

39.춘신(春信)

유치환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 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40.출생기(出生記)

유치환

검정 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남쪽 먼 포구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세대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융희(隆熙) 2년!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多彩)하여
지붕에 박넌출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엔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
나를 잉태(孕胎)한 어머니는
짐즛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못댁 제삿날밤 열 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삿밥을 먹고 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번문욕례(繁文縟禮) 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신월(新月)같이 슬픈 제 족속의 태반(胎盤)을 보고
내 스스로 고고(呱呱)의 곡성(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명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돌메라 이름 지었다오

41.치자꽃

유치환

저녁 어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가는 고향의 슬프디슬픈 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天幕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42.항가새꽃

유치환

어느 그린 이 있어 이같이 호젓이 살 수 있느니 항가새꽃
여기도 좋으이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내 여기도 좋으이
하세월 가도 하늘 건너는 먼 솔바람 소리도 내려오지 않는 빈
골짜기
어느 적 생긴 오솔길 있어도 옛같이 인기척 멀어
멧새 와서 인사 없이 빠알간 지뤼씨 쪼다 가고
옆엣 덤불에 숨어 풀벌레 두고두고 시름없이 울다 말 뿐
스며오듯 산그늘 기어내리면 아득히 외론 대로 밤이 눈감고 오고
그 외롬 벗겨지면 다시 무한 겨운 하루가 있는 곳
그대 그린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여기도 즐거웁거니
아아 날에 날마다 다소곳이 늘어만 가는
항가새꽃 항가새꽃

43.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유치환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 해바라기들 새에 서서
나도 해바라기가 되려오.

황금사자(黃金獅子) 나룻
오만(傲慢)한 왕후(王候)의 몸매로
진종일 찍소리 없이
삼복(三伏)의 염천(炎天)을 노리고 서서
눈부시어 요요히 호접(蝴蝶)도 못오는 백주(白書)!
한 점 회의(懷疑)도 감상(感傷)도 용납치 않는
그 불령(不逞)스런 의지(意志)의 바다의 한 분신(分身)이 되려오.

44.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한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45.향수

유치환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여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여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져 있나니

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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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님 시 모음
1.만족 

한용운

세상에 만족이 있느냐? 인생에게 만족이 있느냐?
있다면 나에게도 있으리라

세상에 만족이 있기는 있지마는 사람의
앞에만 있다
거리는 사람의 팔 길이와 같고 속력은
사람의 걸음과 비례가 된다
만족은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
만족은 愚者(우자)나 聖者(성자)의 주관적
소유가 아니며 약자의 기대뿐이다
만족은 언제든지 인생과 竪的平行(수적 평행)이다
나는 차라리 발꿈치를 돌려서 만족의 묵은
자취를 밟을까 하노라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아지랑이 같은 꿈과 금실 같은 환상이
님계신 꽃동산에
들릴 때에 아아 !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2.인 연 설
한 용 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함께 영원히 할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함께 있을 수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 해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애처롭기까지만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 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않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3.길이 막혀 
한용운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건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바칩니다.

나의 손길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를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 못 오시는 당신을 기루어요.

4.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리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의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한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시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5.나는 잊고자 
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으까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하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6.나의 길 
한용운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옮은 일을 위하여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였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7.나의 꿈 
한용운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8.나의 노래 
한용운

나의 노래가락의 고저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달파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
망상(妄想)으로 토막쳐 놓는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님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흠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점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신(神)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쥡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는
천국(天國)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
들어가서는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래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르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광영(光榮)에 넘치는
나의 작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음보(音譜)를 그립니다

9.당신은 
한용운

당신은 나를 보면 왜 늘 웃기만 하셔요
당신의 찡그리는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
나는 당신을 보고 찡그리기는 싫어요
당신은 찡그리는 얼굴을
보기 싫어하실 줄을 압니다
그러나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을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
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10.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者)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11.당신이 아니더면 
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굴에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기룹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테여요.
맨 처음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테여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만 하셔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12.비 

한용운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비는 해를 가리고 하늘을 가리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비는 번개와 무지개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번개가 되어 무지개를 타고,
당신에게 가서 사랑의 팔에 감기고자 합니다.
비오는 날 가만히 가서 당신의 침묵을
가져온대도,
당신의 주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비 오는 날에 오신다면,
나는 연잎으로 웃옷을 지어서 보내겠습니다.
당신이 비 오는 날에 연잎 옷을 입고 오시면,
이 세상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비 가운데로 가만히 오셔서
나의 눈물을 가져 가신대도
영원한 비밀이 될 것입니다.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13.사랑의 불 
한용운

산천초목(山川草木)에 붙는 불은
수인씨(燧人氏)가 내셨습니다
청춘의 음악에 무도(舞蹈)하는 나의 가슴을
태우는 불은 가는 님이 내셨습니다

촉석루를 안고 돌며 푸른 물결의 그윽한 품에
논개(論介)의 청춘을 자매우는 남강(南江)의
흐르는 물아 모란봉의 키스를 받고
계월향(桂月香)의 무정(無情)을 저주하면서
능라도(綾羅島)를 감돌아 흐르는 실연자(失戀者)인
대동강아 그대들의 권위로도 애태우는 불은
끄지 못할 줄을 번연히 알지마는 입버릇으로
불러 보았다
만일 그대 네가 쓰리고 아픈 슬픔으로 졸이다가
폭발되는 가슴 가운데의 불을 끌 수가 있다면
그대들의 님 기루운 사랑을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에 이따금 이따금 목이 메어
소리를 이루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그대네의 가슴속에서
애태우는 불꽃이 거꾸로 타들어 가는 것을 나는 본다

오오 님의 정열의 눈물과 나의 감격의 눈물이
마주 닿아서 합류(合流)가 되는 때에
그 눈물의 첫방울로 나의 가슴의 불을 끄고
그 다음 방울을 그대네의 가슴에 뿌려 주리라

14.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 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15.여름밤이 길어요 
한용운

당신이 계실 때에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
책력의 내용이 그릇되었나 하였더니
개똥 불이 흐르고 벌레가 웁니다
긴 밤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긴 밤은 근심바다의 첫 물결에서 나와서
슬픈 음악이 되고 아득한 사막이 되더니
필경 절망의 성(城) 너머로 가서 악마의
웃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시면 나는 사랑의 칼을 가지고
긴 밤을 깨어서 일천(一千) 토막을 내겠습니다
당신이 계실 때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는 여름밤이 길어요

16.잠 없는 꿈 
한용운

나는 어느 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의 님은 어디 있어요.
나는 님을 보러 가겠습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셔요,
님이여.
너의 가려는 길은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이다.
그 길을 가져다 너에게 주면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을 너에게 갖다 주면
너의 님은 다른 길로 오게 된다.
네가 간대도 너의 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길을 가져다가 나의 님에게 주셔요.
너의 님에게 주는 것이 너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저의 길이 각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이별한 님을 만나 보겠습니까.
네가 너를 가져다가 너의 가려는 길에 주어라.
그리 하고 쉬지 말고 가거라.
그리 할 마음은 있지마는 그 길에는
고개도 많고 물도 많습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꿈은 그러면 너의 님을 너의 가슴에
안겨주마 하고 나의 님을 나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님을 힘껏 껴안았습니다.
나의 팔이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다칠 때에
나의 두 팔에 베어진 허공은 나의 팔을 뒤에
두고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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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 모음

1.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   / 안도현

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 확인란에
내 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 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 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 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 가지 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 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 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 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 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 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 받는다
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 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 받지 않는다
열 받아도 열 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 받게 하는 것이다

2.고래를 기다리며  /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3.그대에게  / 안도현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 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4.개망초꽃   /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5.제비꽃에 대하여  / 안도현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6.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7.냉 이 꽃  / 안도현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 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 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 하지 않고 냉이 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 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 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 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 빼기에 냉이 꽃이 피었다
문득문득 울고 싶어서 냉이 꽃이 피었다
눈물을 참으려다가 냉이 꽃이 피었다
너도 없는데 냉이 꽃이 피었다

8.기관차를 위하여  / 안도현

기관차야, 스스로
너는 힘을 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찮은 일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큰일까지
혼자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고
기관사가 타고 서울역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그래서 떠나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구나
가령 객차에 한사람의 손님도 타지 않았다면
화물칸에 라면상자 하나 싣지 않았다면
비록 떠난다해도 너는 우스운 쇳덩어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거야

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얼마나 많은
철길들이 서로 어깨 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산이나 목포까지 갔다 왔다고 기적을 울리며
플랫포옴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야,
자만심을 버려야해
국경을 건너고 거친 대륙을 횡단하기 전에는
한반도는 슬픈 작은 섬일 뿐이야

내 어린 시절, 기차를 몇 번 타 봤는지
얼마만큼 먼 곳까지 타고 갔다 돌아왔는지
내기할 때마다
시골뜨기인 나는 미리 주눅이 들곤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
세상을 많이 아는 것도 어렵지만
세상하고 더불어 사는 건 더욱 벅차다는 것을

이제 슬쩍 너에게만 말해줄게 있는데
기관차야, 요즈음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삶은 계란을 잘 사먹지 않는
까닭은 말이야 그것은 삶으로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의 이름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이 너를 녹슬게 하겠지만
기관차야, 철길 위에 버티고 서있지 말고
새 길을 만들어 달릴 때 너는 기관차인 것이다.
끝이다. 더는 못 간다 싶을 때 힘을 내
달릴 수 있어야 모두들 너를
힘센 기관차로 부를 것이다.

9.사랑한다는 것  /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10.우물  / 안도현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11.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 안도현

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꺾어 들고는
내 딸년 입술 같은 꽃잎마다
쪽,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웬걸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간밤에 저질러버린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 놓은 것을
그만 보고 말았지요

개나리야
개나리야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12.정든 세월에게  / 안도현

홍매화 꽃망울 달기 시작하는데 싸락눈이 내렸다
나는 이제 너의 상처를 감싸주지 않을 거야
너 아픈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너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백지 위에다 쓰지 않을 거야
매화나무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나뭇가지 속이 뜨거워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를 위하여 내가 흘릴 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싸락눈이 봄날을 건너가고 있었다

13.숭어회 한 접시  / 안도현

눈이 오면, 애인 없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 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쾌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14.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15.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 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16.구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 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17.나그네  / 안도현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 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18.양철 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저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 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 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는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19.연애편지  / 안도현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 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20.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 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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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혜원 시 모음

1.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1 /용혜원

그대를 만나던 날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도
따뜻한 배려가 있어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오래 사귄 친구처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들을
웃는 얼굴로 잘 들어주고
어떤 격식이나 체면 차림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솔직하고 담백함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대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것만 같아
둥지를 잃은 새가
새 둥지를 찾은 것만 같았습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오랫만에 마음을 함께
맞추고 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좋은 사람입니다.

2.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2 /용혜원

그대의 눈빛 익히며
만남이 익숙해져
이제는 서로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쓸쓸하고, 외롭고, 차가운
이 거리에서
나, 그대만 있으면
언제나 외롭지 않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내 마음에 젖어드는
그대의 향기가 향기로와
내 마음이 따뜻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만
안겨줄 것을 믿고
나도 그대 가슴에만
머물고 싶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우리 한가롭게 만나
평화롭게 있으면
모든 기름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우리 사랑의 배를 탔으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입니다.


3.그대를 사랑한 뒤로는 /  용혜원

그대를 사랑한 뒤로는
내 마음이 그리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보이는 것마다
만나는 것마다
어찌 그리도 좋을까요
사랑이 병이라면
오래도록 앓아도 좋겠습니다.

그대를 사랑한 뒤로는
내 영혼이 그리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온 세상 모두 아름다워
보이는 것마다
만나는 것마다
어찌 그리도 좋을까요
사랑이 불꽃이라면
온 영혼을 사두어도 좋겠습니다.

4.어느 날 하루는 여행을 /  용혜원

어느 날 하루는 여행을 떠나
발길 닿는 대로 가야겠습니다.
그 날은 누구를 꼭 만나거나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서 좋을 것입니다.
하늘도 땅도 달라 보이고
날아갈 듯한 마음에 가슴 벅찬 노래를 부르며
살아 있는 표정을 만나고 싶습니다.
시골 아낙네의 모습에서
농부의 모습에서
어부의 모습에서
개구쟁이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정류장에서 만난 삶들에게 목례를 하고
산길에서 웃음으로 길을 묻고
옆자리의 시선도 만나
오며 가며 잃었던 나를 만나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숲길에서 나무들의 이야기를 묻고
구름 떠나는 이유를 알고
파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저녁이 오면 인생의 모든 이야기를
하룻밤에 만들고 싶습니다
돌아올 때는 비밀스런 이야기로
행복한 웃음을 띄우겠습니다.

5.우리의 만남은 /  용혜원

우리의 처음 만남은
오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곳에서인가
서로를 모른 채
스쳐 지나가듯 만났을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는 서로가 낯 모르는 사람으로
눈길이 마주쳤어도
전혀 낯선 사람으로 여겨
서로 무관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만남 속에
마음이 열리고
영혼 가득히 사랑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만남이
우리의 사랑이
이 지상에서
곡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기쁨입니다 축복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숨김 없이
쏟아놓을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눈동자 속에
그대의 모습이 있고
그대의 눈동자 속에
나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보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주님의 손길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우리의 삶은 하나의 약속이다 /  용혜원

우리들의 삶은 하나의 약속이다.
장난기 어린 꼬마아이들의
새끼손가락을 거는 놀음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다리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설혹 아픔일지라도
멀리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지라도
작은 풀에도 꽃은 피고 강물은 흘러야만 하듯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잊혀진 약속들을 떠올리면서
이름 없는 들꽃으로 남아도
나무들이 제자리를 스스로 떠나지 못함이
하나의 약속이듯이

만남 속에 이루어지는 마음의 고리들을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지켜야 한다.
서로를 배신해야 할 절망이 올지라도
지켜주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하늘 아래 행복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어야 한다.

삶은 수많은 고리로 이어지고
때론 슬픔이 전율로 다가올지라도
몹쓸 자식도 안아야 하는 어미의 운명처럼
지켜줄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봄이면 푸른 하늘 아래
음악처럼 피어나는 꽃과 같이
우리들이 진실한 삶은 하나의 약속이 아닌가

7.셋방살이 /  용혜원

잡초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이
머무를 곳은 단칸방인 셋방살이
넓디넓은 세상바닥에
발붙일 땅도 없어서
움츠리고 살아감도
죄도 없이 죄 지은 목숨처럼
어깨는 늘 처지고
뱃속은 늘 허전하기만 하였다.

도시의 곳곳엔 공룡의 전시장을 만들듯이
많고 많은 아파트를 짓고 있는데
헛물켜듯 바라만 보다가
연중 행사로 찾아오는 봄 그리고 가을
콧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탐스런 열매를 맛보기도 전에
보증금 월세를 올리려는
집주인 마나님의 싸늘해 보이기만 한 눈빛은
이웃나라 처절한 전쟁소식보다
코 앞에 닥친 급보 중의 급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
행복의 둥지는 쉽게 마련될 것만 같은
나이 어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애숭이가
오직 사랑하는 마음과 꿈에 부푼 마음으로
신혼 살림을 시작해 수년 동안
이리저리 걷어채이듯 셋방살이를 하다 보면
통곡도 못하고 눈물을 삭이며
애증이 쌓여서 어처구니 없는
사내 꼴이 되는 일들이 많고 많았다.

온 세상을 향하여 못난
욕지거리를 수도 없이 해대며
어금니에 힘을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가 머무를 방 한 칸 얻기가
어렵고 어려운 인생문제 물기였다.

왜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버려진 삶처럼 아무도 관심 없이 외로움이 되어
머무를 곳을 찾아 철새가 되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 값싼 곳으로
찾고 찾아 대문을 두드리면
애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우리 집은 잠만 잘 사람에게
세를 준다는 이유로 말도 못 붙이고
새로 짓고 새로 도배를 했기 때문에
신혼부부에게만 방을 준다기에
마른 눈물을 흘리며 돌아설 때가
많고 많았던 슬픈 이야기 같은 삶을 살았다.

인생이란 누구든 한번 왔다 가는
머물다 가는 길인데
어차피 모든 인생은 세상살이인 것을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셋방살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우리네 삶은 늘 슬펐다.

어린 자식들 굴비 엮듯 줄줄이 데리고
산동네 달동네 머무를 곳을 찾아
두리번 두리번거리다
어렵사리 얻은 셋방에
한 식구 덩그렇게 앉으면
감사가 있고 웃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애비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며
마음에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것이다.

신혼의 단꿈을 꾸었던 혼수이불을 넣은
장농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는데
언젠가 푸른 대문에 이름 석 자 써놓을 날을
고대하며 바라며
오늘도 이 땅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삿짐이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8.사랑이 그리움뿐이라면 /  용혜원

사랑이 그리움뿐이라면
시작도 아니하겠습니다.

오랜 기다림은 차라리 통곡입니다.
일생토록 보고 싶다는 말보다는
지금이라도 달려와
웃음으로서 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얀 백지의 글보다는
당신이 보고 있으면
햇살처럼 가슴에 비춰옵니다.

사랑도 싹이 나 자라고
꽃 피어 열매 맺는 사과나무처럼
계절 따라 느끼며 사는 행복뿐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에 이별이 있었다면
시작도 아니했습니다.

9.내 작은 소망으로 /  용혜원

내 작은 가슴에
소박한 꿈이라도 이루어지면
그 작은 기쁨에 취하여
내 마음의 길로만 갑니다.

언제나 당신 앞에 설 때면
짖궂은 개구쟁이처럼
더렵혀진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아픔도
사랑의 빛으로 주셨으니
그 빛 하나 하나가
우리 가슴에 사랑으로 비추입니다.

오늘은 내 작은 소망이나마
그 빛 하나 하나가
우리 가슴에 사랑으로 비추입니다

오늘은 내 작은 소망이나마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마음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주여!
기도의 다리를 놓아주십시오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10.나도 파도칠 수 있을까 /  용혜원

바람이 바다에
목청껏 소리쳐 놓으면
파도가 거세게 친다.

나는 살아오며 제대로 소리지르지
못한 것만 같은데
바람을 힘입어 소리지르는 바다

해변가에 거침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돌변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폭풍우 몰아치듯
살고 싶다는 것은
내 마음에 욕망이
불붙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내 마음에도
거친 바람이 불어와
목청을 행구고 지나가면
세상을 향해 나도 파도칠 수 있을까

늘 파도에 시달려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이 바다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소리치고 싶은
열정이 남아있는 탓일까

갯바람을 쐬면
도시에서 온 나는
갯적은 소리를 내고 싶어진다
세상을 향해 나도 파도치고 싶어진다.

11.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  /  용혜원

수줍게 돋아나는
봄날의 잎새들 마냥
내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풋풋하고 청순한 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
하늘이 내려준 사랑이라 믿었습니다.
삶의 길에서 모두들
그토록 애타게 찾는 사랑의 길에서
우리는 서로 마주쳤습니다.

그대를 본 순간부터
그대의 얼굴이 내 가슴에
자꾸만 자꾸만 들이닥쳤습니다.

그대는 내 마음을
와락 끌어당겨
오직 그대에게만 고정 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살아가며 모든 아픔들이 삭혀지고 나면
우리 사랑은 아름다워지고
더 가까워지고만 싶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낙엽지는 날까지
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처럼
사랑하고만 싶습니다.

12.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  용혜원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잠시라도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와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기쁠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날마다 언제나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은 지상에서 영원까지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나의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지상에 없을 것만 같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연인이여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13.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  용혜원

삶이란 바다에
잔잔한 파도가 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
낭만이 흐르고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서로의 눈빛을 통하며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고

흐르는 계절을 따라
사랑의 거리를 함께 정답게 걸으며
하고픈 이야기를 정답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에 살아
신발을 나란히 함께 놓을 수 있으며
마주 바라보며 식사를 함께 할 수 있고
잠자리를 함께 하며
편안히 눕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를 소유할 수 있으며
서로가 원하는 것을 나눌 수 있으며
함께 꿈을 이루어 가며
기쁨과 웃음과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삶의 울타리 안에
평안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삶이란 들판에
거세지 않게 가슴을 잔잔히 흔들어 놓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14.우리 함께 가는 길에  /  용혜원

그대를 만남이
그대를 찾음이
나에게는 축복입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음이
나에게는 행복이기에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 하나 하나가
한 떨기 꽃이 될 수만 있다면
그대 가슴에 안겨 주고만 싶습니다.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대에게만은
별이 되어 빛나고 싶습니다.
꽃이 되어 피어나고 싶습니다.

15.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  용혜원

 그대를
늘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이란 무대도
언제 어느 때에
막이 내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내 눈앞에 있을 때
나의 삶은 희망입니다.

어느 날 혹여나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그대가 곁에 있다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힘으로
나는 날마다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심장이
그대로 인해 숨쉬고 있기에
나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16.계절이 지날 때마다  /  용혜원

계절이 지날 때마다
그리움을 마구 풀어놓으면

봄에는
꽃으로 피어나고
여름에는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가을에는
오색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겨울에는
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 내리며
내게로 오는 그대

그대 다시 만나면
개구쟁이 같이
속없는 짓 하지 않고
좋은 일들만 우리에게 있을 것만 같다.

그대의 청순한 얼굴
초롱초롱한 눈이 보고 싶다
그 무엇으로 씻고 닦아내고
우리의 사랑을 지울 수는 없다.

사사로운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남은 삶을 멋지게 살기 위하여
뜨거운 포옹부터 하고 싶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그대 내 앞에 걸어올 것만 같다.

17.그대 내 가슴에 손을 얹으라 /  용혜원

뼈마디 마디마디
핏줄 핏줄마다
그리움으로 채워 놓고
그리움으로 흐르게 하더니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생각나게 하는 그대

왜 내 마을을 헤집어 놓으려 하는가

거부하는 몸짓으로
거부하는 손짓으로
아무런 말하지도 않는 침묵이
내 가슴에 못을 박는다.

구름이 흘러가도 흔적이 없듯
그대 그리움만 만들어 놓고
어디로 그리도 빨리 치닫는가

핏발 선 눈동자로 바라보며
낚시에 물린 목숨처럼
나를 조롱하지 말라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언제나 텅 비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그대여

사랑으로 인해 열 오른 몸
애처롭게 우는 울음으로
다시 그리움으로 금이 가지 않도록
그대 내 가슴에 다소곳이 웃으며 손을 얹으라

그대를 언제나 사랑하는 내 마음은
재처럼 사그라들지 못하고
날마다 열기를 더하고 있다.
그대 내 가슴에 손을 얹으라

18.내 목숨 꽃 지는 날까지 1 /  용혜원

내 목숨 꽃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
아무런 후회 없이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겨우내 찬바람에 할퀴었던
상처투성이에서도
봄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이

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
내 마음도 마음껏
풀어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
한동안 모아두었던
그리움도 꽃으로 피워내고 싶습니다.

행복이 가득한 꽃향기로
웃음이 가득한 꽃향기로

내가 어디를 가나
그대가 뒤쫓아오고
내가 어디를 가나
그대가 앞서갑니다.

내 목숨 꽃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
아무런 후회 없이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19.내 목숨 꽃 지는 날까지 2 /  용혜원

내 목숨 꽃 피었다가
그 어느 날 소리 없이 지더라도
흐르는 세월을 탓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모두들 떠나는
사람들 속에
나도 또 한 사람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떠나야만할
이 삶을 기뻐하며 살고 싶다.

삶의 시간들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만나는 사람, 사람들이
얼마나 따뜻한가

내 고독에 너무 깊숙이 파묻혀
괴로워하지 않고
작은 기쁨도 잔잔한 사랑도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다.

내 목숨 꽃 피었다가
바람이 볼 때마다 떨어지더라도
모든 것을 감사하며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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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 모음 67편

1.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2.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3.보통 사람

김남조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4.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5.겨울 꽃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6.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7.그대 있음에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8.물망초

김남조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9.사랑

김남조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10.사랑의 말

김남조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11.사랑한 이야기

김남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12.상사(想思)

김남조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 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骨髓에 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13.아가(雅歌) 2

김남조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네게로 가리

14.연하장

김남조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15.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16.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17.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검은 벽의 검은 꽂그림자 같은
어두운 香料(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에 특별하기로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 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론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란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 울면서 눈감고 입술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18.가을 햇볕에

김남조

보고싶은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찟고 나오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되고
바람속에 몸을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19.겨울나무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20.나의 시에게

김남조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船窓(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呪言(주언)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21.너에게

김남조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22.다시 봄에게

김남조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23.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지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24.산에 와서

김남조

우중 설악이
이마엔 구름의 띠를
가슴 아래론 안개를 둘렀네
할말을 마친 이들이
아렴풋 꿈속처럼
살결 맞대었구나

일찍이
이름을 버린
무명용사나
무명성인들 같은
나무들,
바위들,

청산에 살아
이름도 잊은 이들이
빗속에 벗은 몸 그대로
편안하여라
따뜻하여라

사람이 죽으면
산에 와 안기는 까닭을
오늘에 알겠네

25.산에 이르러

김남조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雲霧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地下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康寧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26.산에게 나무에게

김남조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왔네
그들은 주인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27.상심수첩

김남조

1
먼 바다로
떠나는 마음 알겠다
깊은 산 깊은 고을
홀로 찾아드는 이의 마음 알겠다
사람세상 소식 들으려
그 먼길 되짚어
다시 오는 그 마음도 알겠다

2
울며 난타하며
종을 치는 사람아
종소리 맑디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천 몇만 번을
사람이 울고
종도 소리 질러야 하는가

3
층계를 올라간다
한없이 올라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층계를 내겨간다
한없이 내려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이로써 깨닫노니
층계의 위 아래는
같은 것이구나

4
병이 손님인양 왔다
오랜만이라며 들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커다란 책을 펴들고 그 안에 쓰인 글시,
세상의 물정들을 보여준다
한 모금씩 마시는 얼음냉수처럼
천천히 추위를 되뇌이며 구경한다
눈물 흐르는 일이 묘하게 감미롭다

5
굶주린 자 밥의 참뜻을 알듯이
잃은 자 잃은 것의 존귀함을 안다
신산에서 뽑아내는
꿀의 음미를.
이별이여
남은 진실 그 모두를
바다 깊이 가라앉히는 일이여

6
기도란
사람의 진실 하늘에 바침이요
저희의 진실 오늘은 어둠이니
이 어둠 바치나이다

은총은
하늘의 것을 사람에게 주심이니
하늘나라 넘치는 것
오늘 혹시 어둠이시면
어둠 더욱 내려주소서

7
전신이 감전대인 여자
바람에서도 공기에서도
전류 흘러 못견디는 여자
겨울벌판에서도 허공에서도
와아와아 몸서리치며 다가오는
포옹의 팔들. 팔들

8
그를 잃게 된다
누구도 못바꿀 순서란다
다른 일은 붙박이로 서 있고
이 일만 바람갈기 날리며 온다
저만치에,
바로 눈 앞에.
지금,
아아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9
제 기도를 진흙에 버리신 일
용서해 드립니다
그간에 주신 모든 용서를 감사드리며
황송하오나 오늘은 제가
신이신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아아 잘못하실 수가 없는 분의 잘못
죄의 반란 같은 것이여

전심전령이 기도 헛되어
하늘은 닫히고
사람은 이런 때 울지 않는다

10
아슴한 옛날부터
줄곧 걸어와
마침내 오늘 여기 닿았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더는 아무 일도 생기잖을
마지막 땅에
즉 온전한 목마름에

28.새 달력 첫 날

김남조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29.새

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30.새로운 공부

김남조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후
온세상 노을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31.새벽 외출

김남조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32.새벽에

김남조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 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33.새벽전등

김남조

간밤에 잠자지 못한 이와
아주 조금 잠을 잔 이들이
새소리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며
새벽전등을 켠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
불면의 도랑은 비릿하게
더 깊은 골로 패이고
이제 집집마다
눈물겨운 광명이 비추일 것이나
미소짓는 자, 많지 못하리라

여명黎明에 피어나는 태극기들,
독립 반세기라 한 달 간
태극기를 내걸지자는 약속에

백오십 만 실직 가정도
이리했으려니와
희망과의 악수인 건 아니다

참으로 누구의 생명이
이 많은 이를 살게 할 것이며
누구의 영혼이
이들을 의연毅然하게 할 것이며
그 누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심각한 시절이여
잠을 설친 이들이 새벽전등을 켠다

34.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35.소녀를 위하여

김남조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36.송(頌)

김남조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걸

그저
온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37.슬픔에게

김남조

정적에도
자물쇠가 있는가
문 닫고 장막 드리우니
잘은 모르는
관 속의 고요로구나

밤에서 밤으로
어둠에 어둠 겹치는
유별난 시공을
너에게 요람으로 주노니
느릿느릿 흔들리면서
모쪼록
소리내진 말아라

오히려 백옥의 살결
따스해서 눈물나는
아기나 하나 낳으려무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 빛 사리라도 맺으려무나

나의 슬픔이여

38.시인(詩人)

김남조

1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39.시인에게

김남조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사람은 저마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 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평생의 시업이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 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여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 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그리고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쓸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40.심장이 아프다

김남조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41.아버지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42.아침 기도

김남조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 드립니다.

43.아침 은총

김남조

아침 샘터에 간다
잠의 두 팔에 혼곤히 안겨 있는
단 샘에
공중의 이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날의
첫 두레박으로
순수의 우물, 한 꺼풀의 물빛 보옥들을
길어올린다

샘터를 떠나
그분께 간다
그분 머리맡께에 정갈한 물을 둔다
단지,
아침 광경에 눈뜨실 쯤엔
나는 언제나 없다

은총이여
生金보다 귀한
아침 햇살에
그분의 온몸이 성하고 빛나심을
날이 날마다
고맙게 지켜본다

44.안식

김남조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45.안식을 위하여

김남조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46.어떤 소년

김남조

꽃 배달처럼
나의 병실을 찾아온
소년에게
내 처지 지금 감방 같다 했더니
그 아이 말이
저는 어디 있으나
황무지며 사막이예요. 란다
넌 좀 낙관주위가 돼야겠어
놀라는 내 대꾸에
그건 비관주의보단 더 나쁜 거예요
헤프고 바보그럽고
맥빠져 있으니까요, 란다

아이야
천길 벼랑에서
밑바닥 굽어본 일
벌써 있었더냐
온몸의
뇌관이 저려들면서
허공에 두 손드는
시퍼런 투항도 해보았더냐

더하기로는
심장 한가운데를 쑤시던
사람 하나가
날개 달아
네 몸 두고 날아갔느냐
.... 아이야

47.어머님의 성서(聖書)

김남조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에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유품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48.연

김남조

연 하나
날리세요
순지 한 장으로 당신이 내거는
낮달이 보고파요

가멸가멸 올라가는
연실은 어떨까요
말하는 마음보다 더욱 먼 마음일까요
하늘 너머 하늘가는
그 마음일까요

겨울하늘에
연 하나 날리세요
옛날 저승의 우리집 문패
당신의 이름 석자가
하늘 안의 서러운
진짜 하늘이네요

연하나
날리세요
세월은 그렁저렁 너그러운 유수
울리셔도 더는 울지 않고
창공의 새하얀 연을
나는 볼래요

49.영원 그 안에선

김남조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자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잎들이
잠시
최후의 기도를 올리듯이

아무것도 허전해하지 말자
가을나무의 쏟아지는 잎들을 뜯어 넣고
바람이 또 무엇인가를
빚는다고 알면
그만인걸

눈물 다해
한 둘레 눈물 기둥
불망인들 닦고 닦아
혼령 있는 심연 있는
거울이 되도록만 하자

이별의 문턱에 와서
마지막 가장 어여쁘게 내가 있고
영원 그 안에선
그대 날마다
새로이 남아 계심을
정녕 믿으마

말로는 나타 못낼
위안의 저 청람빛,
하늘 아래 생겨난 모든 일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거두어 주시리라

50.오늘

김남조

1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2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51.올해의 성탄

김남조

정직해야지
지치고 어둑한 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밀한 광기
또 오욕
모든 나쁜 순환을 토혈인 양 뱉고
차라리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워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등을 들고 성당에도 가지만
자욱한 안개를 헤쳐
서먹해진 제 영혼을 살피는 날이다

유서를 쓰는,
유서에 서명을 하는,
다시 그 나머지 한 줄의 시를 마지막인 양 끄적이는
어리석고 뜨거운 나여

만약에 만월 같은 연모라도 품는다며는
배덕의 정사쯤 쉽사리 저지를
그리도 외롭고 맹목인 열에
까맣게 내 두뇌를 태워 가고 있다

슬픔조차 신선하지가 못해
한결 슬픔을 돋우고
어째도 크리스마스는 마음놓고 크게 우는 날이다
석양의 하늘에 커다랗게 성호를 긋고
구원에서 가장 먼 사람이
주여, 부르며 뿌리째 말라 버린 겨울 갈대밭을
달려가는 날이다

52.은혜

김남조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53.음악

김남조

음악 그 위험한 바다에 빠졌었네
고단한 도취에 울어버렸네

살아 보아도
내 하늘에 무궁한 구름은
哀傷,
많은 詩를 썼으나 어느 한 귀절도
나를 건져 주지 못했다

사람 하나
그 복잡한 迷惑에 반생을 살고
나머지 쉽사리 입는
상처의 버릇

눈 오는 숲
나무들의 화목처럼
어진 일몰 후
편안한 밤처럼 ……
있고 싶어라

참말은 무섭고
거짓말은 부끄럽워

54.의자

김남조

세상에 수많은 사람 살고
사람 하나에 한 운명 있듯이
바람도 여러 바람
그 하나마다
생애의 파란만장
운명의 진술서가 다를 테지
하여 태초에서 오늘까지 불어 와

문득 내 앞에서
나래 접는 바람도 있으리라
그를 벗하여
나도 더 가지 않으련다

삶이란 길가는 일 아니던가
모든 날에 길을 걷고
한 평생 걸어 예 왔으되
이제 나에게
삶이란

도착하여 의자에 앉고 싶은 것
겨우겨우 할 일 끝내고
내명 얻으려 좌선에 든
바람도사 옆에서
예순 해 걸어온 나는
예순 해 앉아 있고 싶노니

55.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김남조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테니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56.인인(隣人)

김남조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난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둥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잇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57.잠

김남조

그의 잠은 깊어
오늘도 깨지 않는다

잠의 집
돌벽 실하여
장중한 궁궐이라 하리니
두짝 문 맞물려 닫고
나는 그
충직한 문지기라

숙면의 눈시울이어
평안은 끝없고
만상의 주인이신 분이
잠의 恩賜를
그에게 옷 입히시니
자장가 없이도
잠은 더욱 깊어라

그의 잠은 깊고
잠의 평안
한바다 같아라
잠의 은사를 배례하리니
세월이 흘러
내가 잠들 때까지
잠을 섬기는
나는 그 불침번이리

58.장엄한 숲

김남조

삼천 년 된 거목들의 숲은
겨우내 끝이 안 보이는 설원雪原
나무들은
그 눈 벌에 서 있습니다

어느 겨울
그 중의 한 나무가
눈사태에 떠밀려 쓰러질 때
하느님이
품 속에 안으셨습니다
나직이 이르시되
아기야 쉬어라 쉬어라 ……

하느님께선
이 나무가 작은 씨앗이던 때를
기억하시며
거대한 뿌리에서 퍼져나간
젊은 분신들도 알으십니다.

쉬어라 쉬어라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날
자애로운 안도安堵이셨습니다
가령에
삼천 년을 노래해온 새가 있다면
쉬어라 쉬어라고 하실 겝니다
이 나무 기나긴 삼천 년을
장하게 맥박쳐 왔으니까요

레드우드 품종의
그 이름 와워나로 불리우는
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수면이요 안식이며
이후 삼천 년 동안
그는 잠자는 성자일 겝니다

장엄한 숲에서
이 겨울도
끝이 안 보이는 아득한 설원에서

59.저무는 날에

김남조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지던 그 마음도
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이 품안에
눈감는 것

60.정념情念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61.참회

김남조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62.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63.평안스런 그대

김남조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64.평행선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테어 났기에
어쩔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 질까 두려워 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 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65.하느님의 동화

김남조


절망이 이리도 아름다운가
홍해에까지 쫓긴 모세는
황홀한 어질머리로 바다를 본다

하느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이르시되
너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면
너희가 건널 큰 길이 열릴 것이니라.
하느님께선
동화를 쓰고 계셨다
지팡이 끝이 가위질처럼
바다를 두 피륙으로 갈라
둥글게 말아 올리며
길을 내는 대목,
동화는
이쯤 쓰여지고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물을 쳤으되
실바람 한 주름이 일 뿐이더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믿음으로 길이 열려
그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홍해 기슭 태고의 고요에
홀로 남으신 하느님,
오늘의 동화는
괜찮게 쓰인 편이라고
저으기 즐거워 하신다

66.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67.후 조
             

김남조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 볼 정다운 이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선다

갓 추수를 해간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인생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었음을
눈 멀 듯 보고 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 개의 그리움
별이여 이 타는 듯한 가책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 같이 늙어진 정복한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에 그 옛날에
이러 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뜯는 한 마음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없는 얘기 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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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시 모음 30편

《1》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水菊色)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2》4월의 노래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3》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4》갑사댕기

박목월

안개는 피어서
江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5》개안(開眼)

박목월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至福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神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神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6》구름 밭에서

박목월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다래 머루 넌출은
바위마다 휘감기고
풀섶 둥지에
산새는 알을 까네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7》그것은 연륜이다

박목월

어릴적 하찮은 사랑이나
가슴에 백여서 자랐다.

질 곱은 나무에는 자주 빛 연륜이
몇 차례나 몇 차례나 감기었다.

새벽 꿈이나 달 그림자처럼
젊음과 보람이 멀리 간 뒤
나는 자라서 늙었다.

마치 세월도 사랑도
그것은 애달픈 연륜이다.


《8》기계(杞溪 ) 장날

박목월

아우 보래이
사람 한 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쿵둥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렁저렁
그저 살믄
오늘같이 기계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베
안 그런가 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
지게목발 받혀 놓고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한 잔 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그게 다
기막히는 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9》길처럼

박목월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같다

《10》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11》나무

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12난

박목월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13》내가 만일

박목월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도마뱀을 따라 꽃밭으로 가 보고,
잠자리처럼 연못에서 까불대고,
물 위에 뱅글뱅글
글씨를 쓰고,
그렇지, 진짜 시(詩)를 쓰지.

아침나절에는
이슬처럼 눈을 뜨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매미가 되어
숲으로 가지.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상 앞에 붙어 있을 줄 알아.

책에 씌인 것은
벽돌 같은 것.
차돌 같은 것.
그렇지, 살아서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그런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지.

내가 만일 너라면
조잘대는 냇물과 얘기를 하고,
풀잎배를 타고,
항구로 나가고,
무지개가 뿌리 박은
골짜기로 찾아가 보련만.

이제 나는
도리가 없다.
너무 자라버린 사람이기에.
어른은 어른은

참 따분하다.
그렇지, 내가 만일 어린 소년이라면
나는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14》내리막길의 기도

박목월

오르막 길이 숨 차듯
내리막 길도 힘에 겹다.
오르막길의 기도를 들어주시듯
내리막길의 기도도 들어 주옵소서.

열매를 따낸 비탈진 사과밭을
내려오며 되돌아 보는
하늘의 푸르름을
뉘우치지 말게 하옵소서.

마음의 심지에 물린 불빛이
아무리 침침하여도
그것으로 초밤길을 밝히게 하옵시고

오늘은 오늘로써
충만한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어질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수록
안으로 환하게 눈 뜨게 하옵소서.

성신이 제 마음 속에
역사하게 하옵소서.
하순의 겨울도 기우는 날씨가
아무리 설레이어도
항상 평온하게 하옵소서.

내리막 길이 힘에 겨울수록
한 자욱마다 전력을 다하는
그것이 되게 하옵소서.
빌수록
차게 하옵소서.

《15》달

박목월

桃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挑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16》메리 크리스마스

박목월


크리스마스 카드에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참말로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누굴 기다릴까.
네 개의 까만 눈동자.
네 개의 까만 눈동자.

그런 날에
외딴집 굴뚝에는
감실감실 금빛 연기,
감실감실 보랏빛 연기,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17》박꽃

박목월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답
썩은 초가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가난한 살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며
박꽃 아가씨야
박꽃 아가씨야
짧은 저녁답을
말없이 울자

《18》빈 컵

박목월

빈 것은
빈 것으로 정결한 컵.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를 마른 가지로
타오르는 겨울 아침에.
하지만 세상에서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 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피느 불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의
중심에.

《19》산도화

박목월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20》산이 날 에워싸고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21》아침마다 눈을 뜨면

박목월

사는것이 온통 어려움 인데
세상에 괴로움이 좀 많으랴
사는 것이 온통 괴로움인데

그럴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면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 서로가 돕고 산다면
보살피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산다면
오늘 하루가 왜 괴로우랴

웃는 얼굴이 웃는 얼굴과
정다운 눈이 정다운 눈과
건너보고 마주보고 바로보고 산다면
아침마다 동트는 새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어려운 일 돕고 살자 마음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22》어머니의 언더라인

박목월

유품으로는
그것 뿐이다.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
가난과
인내와
기도로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는
파주의 잔디를 덮고
잠드셨다.
오늘은 가배절
흐르는 달빛에 산천이 젖었는데.
이 세상에 남기신
어머님의 유품은
그것 뿐이다.
가죽으로 장정된
모서리가 헐어 버린
말씀의 책
어머니가 그으신
붉은 언더라인은
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
오늘은 이순의 아들을 깨우치고
당신을 통하여
지고 하신 분을 뵙게 한다.
동양의 깊은 달밤에
더듬거리며 읽는
어머니의 붉은 언더라인
당신의 신앙이
지팡이가 되어 더듬거리며
따라가는 길에
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

《23》우회로

박목월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凝結)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昏睡)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螺旋通路)를
내가 내려간다.

《24》윤사월(閏四月)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25》이 후끈한 세상에

박목월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그 너르고도 후끈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간'이 빚어지고
남과 더불어 짜는
그 오묘한 생활의
그물코에
오늘의 보람찬 삶
세상에는
완전타인이란 있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든든한 밧줄로 서로 맺어져
우리는 서로 돕게 된다.
다만 에고의 색맹자만이
나와 남사이에 얽혀진
그 든든하고 따뜻하고
신비스러운 밧줄을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이 후끈한 세상에
오늘의 찬란한 아침이 열린다.

《26》이런 詩

박목월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아,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슬며시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27》이별가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28》청노루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29》평온한 날의 기도

박목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양지 바른 창가에 앉아
인간도 한 포기의
화초로 화하는
이 구김살 없이 행복한 시간.

주여, 이런 시간 속에서도
당신은 함께 계시고
그 자애로우심과 미소지으심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주시는
그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강물같이 충만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순탄하게 시간을 노젓는
오늘의 평온 속에서
주여, 고르게 흐르는 물길을 따라
당신의 나라로 향하게 하십시오.

3월의 그 화창한 날씨 같은 마음속에도
맑고 푸른 신앙의 수심(水深)이 내리게 하시고
온 천지의 가지란 가지마다
온 들의 푸성귀마다
움이 트고 싹이 돋아나듯
믿음의 새 움이 돋아나게 하여 주십시오.

《30》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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