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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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2.사랑이란
류시화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명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 장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3.지금 알고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잇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4.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5.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류시화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 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6.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 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 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 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이 겨울 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7.누구든 떠나갈 때는
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고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8.겨울의 구름들
류시화
겨울이 왔다
내 집 앞의 거리는 눈에 덮이고
헌 옷을 입은 자들이 지나간다
그들 중의 두세 명을 나는 알고
더 많은 다른 얼굴들은 알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소리쳐 그들을 부른다 내 목소리는
그곳까지 들리지 않는다
겨울은 저 아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2
겨울이 왔다
나의 삶은 하찮은 것이었다
밤에는 다만 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온갖
부질없이 깊은 생각들에 사로잡힐 때
늘어뜨려진 가지, 때아닌 붉은 열매들이
머리 위에서 창을 두드리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희고 창백한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면
겨울의 구름들이
붉은 잎들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내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홀로 있었다 등불의 심지만을 들여다보며
변함 없는 어떤 흐름이 갑자기 멈춘 일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3
아니다,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책장에 얼굴을 묻고
참이 들곤 했다, 겨울이 왔다
나의 삶은 하찮은 것이었고
나는 오갈 데가 없었다
내 집 지붕 위로
겨울의 구름들이 흘러가는 곳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오래 불고 조용히 속삭이면서
더 큰 물결을 내 집 뒤로 데리고 온다
9.안개 속에 숨다
류시화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10.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류시화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편에 서 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11.나무
류시화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12.두 사람만의 아침
류시화
나무들 위에 아직 안개와
떠나지 않은 날개들이 있었다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었다 오솔길 위로
염소와 구름들이 걸어왔지만
어떤 시간이 되었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여기 이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한때 한없이 투명하던 것들
기억 저편에 모여 지금
어떤 둥근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한때 우리가 빛의 기둥들 사이에서 두 팔로
껴안던 것들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때 우리가 물가에서
귀 기울여 주고받던 말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새와 안개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옛날의 불꽃을
본다 그 둘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숲의 끝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본다
13.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류시화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껍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새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 솔의 물풀처럼 졸라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14.들풀
류시화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15.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16.뮤직 박스
류시화
나 어렸을 때
뮤직박스 하나를 갖고 있었다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집착했던 것
유리상자 안의 인형이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 머리맡에 늘 놓여 있던
뮤직박스
나 잠이 들면
세상 전체가 뮤직박스가 되어
별자리들의 음악에 맞춰
끝없이 돌아가곤 했다
그것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슬픔을 잊었다
나는 나이를 먹고
뮤직박스는 어느새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이 생에서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집착했다
당신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잊었다
당신이 내 태엽을 감으면
나는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뮤직박스 속의 인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은
그 뮤직박스를 버렸다
아무도 태엽을 감아 주는 이 없이
춤을 추던 그 동작 그대로
나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17.그건 바람이 아니야
류시화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불붙은 옥수수 밭처럼
내 마음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입 속에 혀처럼 가두고
끝내 하지 않은 말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혼
가볍긴 해도 그건 바람이 아니야
18.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19.세월
류시화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강물이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그대를 만나 내 몸을 바치면서
나는 강물보다 더 크게 울었네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 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배들도 눈물 어린 등불을 켜고
차마 갈대 숲을 빠르게 떠나지 못했네
20.빵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21.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것은
인간뿐
삶이 그만큼 피곤하기 때문이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보라, 삶을
굴뚝새가 사라진 삶을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오직 인간만이 남으리라
대지 위에
입을 벌리고 잠든 인간만이
22. 첫사랑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23.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 한다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곁에 머무를 수는 없는것
시간이 지나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24.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편에 서 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25.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26.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넌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내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어린 바닷게들의 눈속임을
순간의 삶을 버린 빈 조개가 모래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그러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만 너를 위한 것
27.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겁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새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 속의 물풀처럼 졸라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 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28.저편언덕
슬픔이 그대를 부를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것에도 의지할수 없을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의미에도 기댈수 없을때
저편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말라.
29.비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비나무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30.소금별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31.별에 못을 박다
어렸을 때 나는
별들이 누군가 못을 박았던
흔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별들이 못구멍이라면
그건 누군가
아픔을 걸었던
자리겠지
32.잊었는가 우리가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33.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34.여섯줄의 시
너의 눈에 나의 눈을 묻고
너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묻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말하렴,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말을
말하렴, 네 숨 속에 숨은 진실을
말하렴, 침묵의 언어로 말하렴
지상에서 잠시 류시화라고 불리웠던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별들이 가득 내린 강을 건너다가
그만 별에 발을 찔렸습니다
지금은 집에 돌아와
그 옛날 내가 떠나온 별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어떤 영혼은
별에서 왔다는
별에서 와서 고독하다는
그 말을 내 집 지붕에 얹어둡니다
이 짧은 지상의 삶과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내가 띄운 편지가 그 별에 가 닿았는지
내 집 지붕 위에서 별 하나가 흔들립니다
35.생활(生活)
-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당시는 '안재찬'이라는 본명으로 응모하여 입상하였다)
窓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어둠의 門을 열고
맨 처음 세상으로 나온 아이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아침은 소리없이 움직임만으로 와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
四方에서 입술을 부비며 스며든다.
손바닥 위에 놓인 生의 조각들을 쪼아먹는
소망의 뜰에 내린 새 몇마리
앉아있다 날아간 자리
버리고 남은,
버릴 수 없이 슬픈 이야기들은 모두
지난 밤의 꿈으로 문질러두고
지금 窓을 닦고 있는 내 손길 아래
세상의 어느 한 곳이 닦여지고 있다.
톱밥처럼 흩어지는 日常의 책장들
良識은 굳은어깨뼈처럼 튼튼하지 못하고
길모퉁이에 잠복해 있는
먼지의 덫, 보이지 않는 손들의 굴레
一部分씩 닦여져 나간다.
빈 접시에 채우는 하루분의 양심과
빵 하나의 自由로 시작되는
이 아침, 햇빛은 하늘의 층계를 걸어내려와
無垢한 눈망울을 가진
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어디로 어디로 데려가는가.
아침의 門을 열고
맨 처음 밖으로 나온 아이의 두 눈
窓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어느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36.비밀
신비의 서를 나는 읽었네
글자 없이 종이 없이 씌어진
그 책을 나는 읽었다.
저 티벳 성자들의 낯선 세계 속으로
나는 가 보았다.
흰구름의 길을 헤치고
밀라레빠와 대머리 독수리들의 대화 속으로
그리고 절대의 음악을 나는 들었다.
연주하는 이도 없이 악기도 없이 울려 퍼지는
신비 시인 파비르의 시에 나는 취했다.
나는 술을 마실 줄 모르지만
그가 주는 술은 마실 수 있다.
술잔도 없이 건네주는 그 술을
입 대지도 않고 나는 마신다.
이 술취한 자의 말을 들으라
삶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다만 덧없는 시간의 화살 속에서
그 화살 쏘는 자를 나는 본다..
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여행 도중에 만나는 기차와 별과 모래 사막이 좋았다.
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이 보기 좋았다.
내 정신은 여행길위에서 망고열매처럼 익어갔다.
37.문맹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젊은 사두에게
더 늦기 전에 글을 배울 것을 강조하자,
그는 내게 들으라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글을 모르는 것보다 더심각한 것은
영적인 문맹이 되는 일이다.
세상에는 많은 학식을 자랑하지만
영적으로 문맹인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38.신의안내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푸쉬카프의 노천 찻집에 앉아 여행가이드북을
뒤적이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두가 말했다.
"힌두스탄을 여행하면서 그까짓 안내 책자에 의지하지 말라.
신으로 하여금 그대의 여행을 인도하게 하라."
39.어디서 왔는가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묻자, 남인도 케랄라에서 만난 사두가 말했다.
"난 아무 데서도 안 왔소. 난 언제나 여기서 있었소.
그리고 난 아무 데로도 가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이 듣기 좋았다.
언제나 여기에 있었따는.....
늘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
그것은 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40.인생 수업
"내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북인도 심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가 묻자,
히말라야 산중의 강고트리로 가는 중인 고행승 사두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인생 수업을 받으러 온 학생들이라는 사실이지.
그것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네.“
41. 바람 부는 날의 꿈
류시화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 가를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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