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 모음 65편

《1》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신석정

운모(雲母)처럼 투명한 바람에 이끌려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푸른 하늘의 대낮을 흰 달이 소리 없이 오고가며
밤이면 물결에 스쳐나려가는 바둑돌처럼
흰구름 엷은 사이사이로 푸른 별이 흘러갑데다

남국의 노란 은행잎새들이
푸른 하늘을 순례한다 먼 길을 떠나기 비롯하면
산새의 노래 짙은 숲엔 밤알이 쌓인 잎새들을 조심히 밟고
묵은 산장 붉은 감이 조용히 석양 하늘을 바라볼 때
가마귀 맑은 소리 산을 넘어 들려옵데다

어머니
오늘은 고양이 졸음 조는
저 후원의 따뜻한 볕 아래서
흰 토끼의 눈동자같이 붉은 석류알을 쪼개어먹으며
그리고 내일은 들장미 붉은 저 숲길을 거닐며
가을이 남기는 이 현란한 풍경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렵니까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2》고운 심장

신석정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 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暖流)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 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대로 서러울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3》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신석정

어머니
산새는 저 숲에서 살지요?
해 저문 하늘에 날아가는 새는
저 숲을 어떻게 찾아간답디까?
구름도 고요한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헤매이는데……
어머니 석양에 내 홀로 강가에서
모래성 쌓고 놀 때
은행나무 밑에서 어머니가 나를 부르듯이
안개 끼어 자욱한 강 건너 숲에서는
스며드는 달빛에 빈 보금자리가
늦게 오는 산새를 기다릴까요?

어머니
먼 하늘 붉은 놀에 비낀 숲길에는
돌아가는 사람들의
꿈 같은 그림자 어지럽고
흰 모래 언덕에 속삭이던 물결도
소몰이 피리에 귀기울여 고요한데
저녁바람은 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언덕의 풀잎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어머니 무릎에 잠이 들 때
저 바람이 숲을 찾아가서
작은 산새의 한없이 깊은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4》그 마음에는

신석정

그 사사스러운 일로
정히 닦아온 마음에
얼룩진 그림자를 보내지 말라.

그 마음에는
한 그루 나무를 심어
꽃을 피게 할 일이요

한 마리
학으로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할 일이다.

대숲에
자취 없이
바람이 쉬어 가고

구름도
흔적 없이
하늘을 지나가듯

어둡고
흐린 날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받들어

그 마음에는
한 마리 작은 나비도
너그러게 쉬어 가게 하라.

《5》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 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6》꽃 덤불

신석정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7》꿈의 일부(一部)

신석정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백마의 갈기도
바람에 몹시 날리고 있었다.

출발 직전
백마는 길게 목놓아 울었다.

잠시
지구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탄 백마는
무작정 달리고만 있었다.

동백꽃이 붉게 타는
어느 해안선을 돌고 있었다.

이윽고
로마궁전의 원주(圓柱)가 멀리 바라보였다.

그 뒤 나는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메콩강(江) 언덕을 달릴 때였다.
문득 총소리에 내가 깬 것은……

《8》나랑 함께

신석정

비낀 햇빛 아래
문득 바라보는 나무

나무 옆에 서보면
나무가 되고,

꽃 옆에 서보면
꽃이 되어도,

두루미 흘러가는
저 하늘을 이고 보면,

너희들의 가슴 언저리에
그 뜨거운 가슴 언저리에 있고 싶어라.

흐드러진 웃음,
그 웃음소리에도

꽃은 피고
마냥 꽃은 피어나고,

빛나는 너희 눈망울이야
그대로 한 개 별빛이거늘,

흘러간 지난날이사
돌아볼 겨를도 없다.

너희들 내다보는 앞날을
나랑 함께 걷게 하여라.

《9》나무 등걸에 앉아서

신석정

요요한
산이로다.

겹겹이 쌓인 풀 길 없는 우리 가슴같이
깊은 산이로다.

아아라한 오월 하늘 짙푸른 속에
종달새
종달새
종달새는 미치게 울고

산은
첩첩
청대숲보다 더 밋밋하고 무성한데

아기자기한 우리 두 가슴엔
오늘사 태양 따라 환히 트인 길이 있어

이 나무 등걸에 널 껴안은 채
이토록 즐거운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는 것은

진정 죽고 싶도록 살고 싶은
사랑보다도 뜨겁고 더 존엄한 꽃이
가슴 깊이 피어난 까닭이리라.

《10》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신석정

햇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쑥 안고 가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바람 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들이 구경시켜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초승달이 된다면……

내가 만일 산새가 되어 보금자리에 잠이 든다면
어머니는 별이 되어 달도 없는 고요한 밤에
그 푸른 눈동자로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까?

《11》나의 노래는

신석정

나의 노래는
라일락꽃과 그 꽃잎에 사운대는
바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너의 타는 눈망울과
그 뜨거운 가슴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저어 빨간 장미의 산호 빛 웃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항상 별같이 살고파 하는 네 마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흰 나리꽃이 가쁘도록 내쉬는 짙은 향기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꽃잎이 서로 부딪치며 이뤄지는 죄 없는 입맞춤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소쩍새 미치게 우는 어둔 밤엘랑 아예 찾지 말라.
나의 노래는
태양의 꽃가루 쏟아지는 칠월 바다의 푸르른 수평선에 있다.

《12》난초(蘭草)

신석정

난초는
얌전하게 뽑아올린 듯 갸륵한 입새가 어여쁘다

난초는
건드러지게 처진 청수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난초는
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냄새가 난다

난초는
산에서 살던 놈이라 아무래도 산냄새가 난다

난초는
예운림(倪雲林)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난초는
도연명(陶淵明)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

《13》날개가 돋쳤다면

신석정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산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멀리 날아가듯
찬란히 피는 밤하늘의 별밭을 찾아가서
나는 원정(園丁)이 되오리다 별밭을 지키는……

그리하여 적적한 밤하늘에 유성이 뵈이거든
동산에 피는 별을 따 던지는 나의 장난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석양에 능금같이 붉은 하늘을 날아서
똥그란 지구를 멀리 바라보며
옥토끼 기르는 목동이 되오리다 달나라에 가서……
그리하여 푸른 달밤 피리소리 들려오거든
석양에 토끼 몰고 돌아가며 달나라에서 부는 나의 옥퉁소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14》네 눈망울에서는

신석정

네 눈망울에서는
초록빛 오월
하이얀 찔레꽃 내음새가 난다

네 눈망울에서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이야기를 머금었다

네 눈망울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아득한 종소리가 들린다

네 눈망울에서는
머언 먼 뒷날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

네 눈망울에는
손잡고 이야기할
즐거운 나날이 오고 있다

《15》눈맞춤

신석정

바람은 연신 불고 있었다.

안개 같은 비 사이로
비 같은 안개 사이로
엷은 햇볕이 내다보는 동안

문득
떠난 지 오랜 ‘생활’을 찾던 나의 눈은
아내의 눈을 붙잡았다.
아내의 눈도 나의 눈을 붙잡고 있었다.

불현듯 마주친
아내와 나의 눈맞춤 속에
어쩜 그토록 긴 세월이 흘러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몰랐다.

치열(齒列) 한 모서리가 무너진 아내는
이내 원뢰(遠雷)처럼 조용히 웃고 있었다.
조용한 우리들의 눈맞춤 속에




원뢰(遠雷)가 아스라이 또 들려오고 있었다.

《16》단장소곡(斷腸小曲)

신석정

추워 지친 하늘
서럽도록 짙푸르다.

물소리 잦아 시린 속에
해 지고
너는 가고,

종소리
노을에 젖어
목메어 은은한데,

원수도 없는 날을
살고파 타는 가슴

빈 주먹 쥐고 펴다
하루 해를 또 보냈다.

《17》대 바람 소리

신석정

대 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 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 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소리.

《18》대숲에 서서

신석정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억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꺼나

《19》대춘부(待春賦)

신석정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20》대화(對話)

신석정

모란 순이
새끼손가락만치 자랐습데다.

너는 그렇게도
봄을 기두렸고나.

산수유(山茱萸)꽃이
벌써 시나브로 지던데요.

글쎄
봄은 오자 또 떠나는 게지……

그러기에 우린 아직도
경칩(驚蟄)이 먼 지역의 주민인가 봅니다.

산(山) 같은 침묵(沈?)이 흐른다.

《21》들길에 서서

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22》망향(望鄕)의 노래

신석정

한 이파리
또 한 이파리
시나브로 지는
지치도록 흰 복사꽃을

꽃잎마다
지는 꽃잎마다
곱다랗게 자꾸만
감기는 서러운 서러운 연륜(年輪)을

늙으신 아버지의
기침소리랑
곤때 가신 지 오랜 아내랑
어리디어린 손주랑 사는 곳

버리고 온 ‘생활(生活)’이며
나의 벅차던 청춘이
아직도 되살아 있는
고향인 성만 싶어 밤을 새운다.

《23》바다에게 주는 시

신석정

바다여
날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海岸線)의 바위는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

지구(地球)도 나같이 네가 성가시면
참다못해
너를 벌써 엎질렀을 게다.

저 언덕에서
동백꽃은 네가 하 우스워
파란 이파리 속에 숨어서
너를 웃고 있지 않니?

동백꽃이
자꾸만 웃어 대는
고 빨간 입술이
예뻐 죽겠다.

《24》발음(發音)

신석정

살아보니
지구(地球)는
몹시도 좁은 고장이더군요.

아무리
한 억만년(億萬年)쯤
태양을 따라다녔기로서니
이렇게도 호흡(呼吸)이 가쁠 수야 있습니까?

그래도 낡은 청춘을
숨가빠하는 지구(地球)에게 매달려 가면서
오늘은 가슴 속으로 리듬이 없는
눈물을 흘려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여보!
안심하십시요,
오는 봄엔
나도 저 나무랑 풀과 더불어
지줄대는 새같이
발음하겠습니다.

《25》밤의 노래

신석정

어둠이 범람하는 지역에
도도히 범람하는 처참한 지역에,
자꾸만 짐승들은 울고
목놓고 짐승들은 자꾸만 울고,
찌눌린 가슴이라 숨결도 영영 동결되어 가는가?

‘그렇지만 설마 그래서야 될리라구!’

시궁창 같은 세월을 꽃도 머물어,
그대로 멈출 수 없는 작은 핏줄에
핏줄 속에 수떨이는 가느다란 소리 있어,
아직은 뜨거운 가슴을 서로서로
꽃으로 문지르는가?

‘아예 그대로 잦아들 순 없는 것이여!’

몸서리나는 어둔 밤을 비바람 미치게 몰려드는데,
번갯불 사이사이 천둥소리 들려오고,
머언 먼 천둥소리 산을 넘어 들려오고,
새벽을 잉태하는 뼈저린 신음소리,
우리 가슴에 밀려드는 파도소리……

‘그대들의 귀에 젖은 노래소리 아닌가?’

《26》봄을 기다리는 마음

신석정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으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 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27》비가(悲歌)

신석정

‘루오’의 그림처럼
어둡게 살아가지만,
눈부신 햇볕을 원하는 건 아니다.

꾀꼬리
옥을 굴리듯 우는 소리보다는
차라리 가슴을 에어내는
귀,
촉,
도,
소리로 멍든 가슴을 채워 달라.

저 검은
까마귀떼가 지구 밖에서
하늘을 뒤덮는 건
차라리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안쓰러운 것들이
눈에 걸리는데
자꾸만 자꾸만
눈에 걸리는데,

그저
소라껍질을
스쳐가는 바람결처럼
차마 눈감을 수도 없거늘,

아아
하늘이여
피가 돌 양이면,

저어
야물딱진
민들레꽃을 피워내듯이
어서 숨을 돌리게 하라.

《28》비의 서정시(抒情詩)

신석정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악 좍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리에 영영 묻혀 버렸다.

그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29》비의 抒情詩

신석정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악 좍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리에 영영 묻혀버렸다.

그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30》빙하(氷河)

신석정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 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 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紗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 되어
남은 피 한 천 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31》산방일기(山房日記)

신석정

봉우리 넘어오는 구름
추녀를 스쳐가고

골엔
꾀꼬리 화답(和答)하는 소리
산이 울린다.

방을 둘러가는
산나비 지친 나랫소리―

그저
해만 설핏하면
소쩍새 울고,

산도 을씨년스러워
하늘만 바라보는데,

밤 들기 전
풀벌레 사운대는 속에
나긋나긋 잠이 온다.

《32》산산산

신석정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보나 하고
기린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33》산수도(山水圖)

신석정

숲길 짙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구름 한가히 하늘을 거닌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넘어 닥쳐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돌아서
시냇물 여음이 옥인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흘러 만 년만 가리

《34》산으로 가는 마음

신석정

내 마음
주름살 많은 늙은 산의 명상하는 얼굴을 사랑 하노니

오늘은
잊고 살든 산을 찾아 내 마음 머언길을 떠나네

산에는
고요한 품안에 고산 식물들이 자라나거니

마음이여
너는 해가 저물어 이윽고 밤이 올 때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좋다

산에서
그렇게 고요한 품안을 떠나와서야 쓰겠니

《35》산협인상(山峽印象)

신석정

밋밋한 오리나무 숲을
성낸 짐승처럼 함부로 헤쳐나오면
성근 소나무 소나무 사이로
아스므라한 바라 푸른 언덕에 솟아오르고
꾀꼬리 호반새 울어예는 산협에
홈초로니 푸른 오월이 지르르 흘러

시냇물 졸졸졸 사뭇 지즐대는 기슭에
전나무 상나무 대 수풀 우거지고
간지람 나무 바람풍나무 제자리 잡아 서고
언덕을 돌아드는 오월 바람이 간지러워 간지러워
나뭇잎새들은 푸른 손을 자꾸만 뒤흔들며 몸부림친다

나는
짐승도 아니란다
나무도 아니란다
얇은 모시두루마기에 덮인 채
백로처럼 날아볼 수도 없고나
태화처럼 흔들릴 수도 없고나

《36》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신석정

잔인한 촛불에게 추방을 당하면서도
나의 침실을 잊지 않는 충실한 어둠이여

오늘밤 나는 너를 위하여 촛불을 끄고
재 작은 침실의 전면적을 제공하노니

어둠이여 너는 오늘밤에도 나를 안고
새벽이 온다는 단조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지?

그러나 나는 밤마다 네가 속삭이는
그 새벽을 한 번도 맞아본 일은 없다

"대체 네가 새벽이 온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오래되건만……"

《37》생존(生存)

신석정

체온(體溫)도 스며들지 않는
서글픈 악수에 지친 주민(住民)이기에
나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숨이 가빠
그래도 숨이 가빠
어항도곤 좁은 지구를
뛰어나가고 싶었다.

《38》서가(書架)

신석정

개미새끼 흙탑을 쌓아올리듯
작은 서가에 틈 없이 책을 쌓아놓고

마음이 호수처럼 가라앉는 날
한 권 두 권 내들고 읽는 한가한 날

때로는 서가가 드높은 산같이 보이기도 하고
나는 그 산을 천천히 오르기도 하고

곤륜산보다 더 깊숙한 내 서가에
오늘은 난초 향기가 그윽이 흐르는 듯하이

《39》서정가(抒情歌)

신석정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 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휘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 버리는

《40》서정소곡

신석정

삼월보다 따스한
네 손을 달라

백목련보다 하이얀
네 가슴을 달라

불보다 불보다 뜨거운
네 심장을 달라

시방 거리에는
음악 같은 실비 내리고

실비 내리는 속에
동백꽃 뚜욱 뚝 지는 소리 들려오고,

돌멩이의 체온도 그리운
죽음보다 외로운 오후

음악같이 내리는 실비 속에
나는 산처럼 서서 널 생각한다

《41》선물

신석정

하늘가에 붉은 빛 말없이 퍼지고
물결이 자개처럼 반짝이는 날
저녁해 보내는 이도 없이
초라히 바다를 넘어갑니다

어슷어슷 하면서도
그림자조차 뵈이지 않는 어둠이
부르는 이 없이 찾아와선
아득한 섬을 싸고돕니다

주검같이 말없는 바다에는
지금도 물살이 웃음처럼 남실거리는 흔적이 뵈입니다
그 언제 해가 넘어갔는지 그도 모른 체하고―

무심히 살고 또 지내는
해∼ 바다∼ 섬∼ 하고 나는 부르짖으면서
내 몸도 거기에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42》소곡(小曲)

신석정

산이여
그 무슨 그리움이 복받쳐
지구와 더불어 탄생한 이후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느뇨

산이여
나 또한 진정 그리운 것 있어
발돋움하고 우러러보아도
나의 하늘은 너무 아득하고나

《43》소곡(小曲)

신석정

산이여
그 무슨 그리움이 복받쳐
지구와 더불어 탄생한 이후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느뇨

산이여
나 또한 진정 그리운 것 있어
발돋움하고 우러러보아도
나의 하늘은 너무 아득하고나

《44》수선화(水仙花)

신석정

수선화는
어린 연잎처럼 오므라진 흰 수반에 있다

수선화는
암탉 모양하고 흰 수반이 안고 있다

수선화는
솜병아리 주둥이같이 연약한 움이 자라난다

수선화는
아직 햇볕과 은하수를 구경한 적이 없다

수선화는
돌과 물에서 자라도 그렇게 냉정한 식물이 아니다

수선화는
그러기에 파아란 혀끝으로 봄을 핥으려고 애쓴다

《45》슬픈 구도

신석정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날 지구(地球)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 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 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47》슬픈 전설을 지니고

신석정

나무 사이로
가시 사이로
잎 사이로
옆 맥이 드러나게 햇볕이 흘러들고
젊은 산맥 멀리 푸른 하늘이 넘어갑니다

어머니
한때는 하늘을 잃어버리고
한때는 햇볕을 잃어버리고
슬픈 전설을 가슴에 지닌 채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죄 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하늘이 너무 푸르지 않습니까?
햇볕이 너무 빛나지 않습니까?
어머니
당신은 이제 아예 슬픈 전설을 빚어내지 마십시오

너그러운 햇볕을 안고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슬픈 전설은 심장에 지니고
정정한 나무처럼 살아가오리다

《48》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신석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우에는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히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던 물결소리도
차츰 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가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읍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50》어느 지류에 서서

신석정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 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51》연꽃이었다

신석정

 그 사람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 하나 있다

눈빛 맑아,
호수처럼 푸르고 고요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침나절 연잎 위,
이슬방울 굵게 맺혔다가
물 위로 굴러 떨어지듯, 나는
때때로 자맥질하거나
수시로 부서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삶의 궤도는, 억겁을 돌아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수없이. 수도 없이

그저 그런, 내가
그 깊고도 깊은 물 속을
얼만큼 더 바라볼 수 있을런지
그 생각만으로도 아리다
그 하나만으로도 아프다

《52》은방울꽃

신석정

나는
그때 외롭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를 옮아앉으며
‘동박새’가 울고 있었다.

어쩜
혼자 우는 ‘동박새’는
나도곤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숲길에선
은방울꽃 내음이 솔곳이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 맑은 눈망울을
은방울꽃 속에서 난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너희 가슴속에 핀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53》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신석정

젊고 늙은 산맥들을

푸른 바다의 거만한 가슴을 벗어나
우리들의 태양이
지금은 어느 나라 국경을 넘고 있겠습니까?

어머니
바로 그 뒤
우리는 우리들의 화려한 꿈과
금시 떠나간 태양의 빛나는 이야기를
한참 소근대고 있을 때
당신의 성스러운 유방같이 부드러운 황혼이
저 숲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어머니
황혼마저 어느 성좌로 떠나고
밤∼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또 왔습니다

태양이 가고
빛나는 모든 것이 가고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어머니
옛이야기나 하나 들려주세요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54》임께서 부르시면

신석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아로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은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55》입춘(立春)

신석정

가벼운
기침에도
허리가 울리더니

엊그제
마파람엔
능금도 바람이 들겠다.


노곤한 햇볕에
등이 근지러운 곤충처럼
나도
맨발로 토방 아랠
살그머니 내려가고 싶다.

‘남풍이 ×m의 속도로 불고
곳에 따라서는 한때 눈 또는 비가 내리겠습니다’

《56》작은 짐승

신석정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란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란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란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그늘에 말없이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순하디순한 짐승이었다

《57》촐촐한 밤

신석정

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날아가 버리듯
오늘밤 하늘에는 별도 숨었네.
풀려서 틈가는 요지음 땅에는
오늘밤 비도 스며들겠다.

어두운 하늘을 제쳐보고 싶듯
나는 오늘밤 먼 세계가 그리워

비 내리는 촐촐한 이 밤에는
밀감 껍질이라도 지근거리고 싶구나!

나는 이런 밤에 새끼궝 소리가 그립고
흰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를 꿈꾸고 싶다

《58》파도(波濤)

신석정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사람
구월도 깊었다.

철 그른
뻐꾸기 목멘 소리
애가 잦아 타는 노을

안쓰럽도록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 놓고

이대로
차마 이대로
눈감을 수도 없거늘

산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오는 날은

소나무 성근 숲너머
파도소리가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으로 달래 놓고
파도 밖에 트여올 한 줄기 빛을 본다.

《59》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신석정

따뜻한 햇볕 물 우에 미끄러지고
흰 물새 동당동당 물에 뜨듯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누런 잔디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 염소 그림자 물 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가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잦았다…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60》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신석정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뱀이 부시시 눈을 떠보았다.

― 그러나 아직 겨울이었다.

하도 땅속이 훈훈해서
개구리도 뒷발을 쭈욱 펴보았다.

― 그러나 봄은 아니었다.

어디서 살얼음 풀린 물소리가 나서
나무움들도 살포시
밖을 내다보았다.

― 그러나 머언 산엔 눈이 하얗다.

핸 멀찌막히 ‘경칩(驚蟄)’을 세워 놓고
이렇게 따뜻하게 비췰 건 뭐람?

― 그러나 봄 머금은 햇볕이어서 좋다.

미치고 싶도록 햇볕이 다냥해서
나도 발을 쭈욱 펴고 눈을 떠본다.

― 그러나 ‘입춘(立春)’은 칼렌다 속에

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61》한대식물(寒帶植物)

신석정

푸른 계절이 모조리 휩쓸려가고
건강한 산맥들이 아주 물러앉은 뒤
세월은 오로지 슬픈 이야기만 싣고
장미처럼 받들던 네 심장을 사뭇 지나갔다

한사코 태양을 따라다니던 대낮도 인젠 싫다
푸른 하늘까지도 단숨에 삼키는 거룩한 밤을 가졌노라
한때 곤곤히 흐르던 난류가 멈춘 이후
네 심장에는 나날이 자라가는 한대식물이 무성하고나

《62》항구(港口)에서

신석정

네가 떠난 항구(港口)에
오월 바람이 설렌다.

머리칼을 날리는 젊은 아낙네들은
베피떡이랑 뎀뿌라랑 소주병을 늘어놓고
뱃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꼬박꼬박 기두리고 있는 항구(港口).

가대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발 벗은 아이들은
구호양곡(救護糧穀)의 가마니에서 쑤시알갱이가 빠지면
병아리처럼 주워서는 차대기에 넣는 항구(港口).

Singoara같이 사랑하는 이의
성한 피가 몹시는 먹고프다는 그 백랍 같은 여인도곤
아낙네와 발 벗은 어린 것이 더 안쓰러운 항구(港口).

오월 바람 설레는 항구(港口)에
멀리 떠난 너를 생각하는 눈시울이 뜨겁다.

《63》화석이 되고 싶어

신석정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
멀리 흰 비둘기 그림자 찾고 싶다

느린 구름 무엇을 노려보듯 가지 않고
먼 강물은 소리 없이 혼자 가네

뽑아 올린 듯 밋밋한 산봉우리 곡선이 또렷하고
명항한 날이라 낮달이 더욱 희고나

석양에 빛나는 까마귀 날개같이 검은 바위에
이런 날엔 먼 강을 바라보고 앉은 대로 화석이 되고 싶어......

《64》황(篁)

신석정

댓이파리
댓이파리
댓이파리에
바람이 왔다.

바람은
댓이파리보다
더 짙푸르다.

난 밋밋한 대와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태양(太陽)의 파란 분수(噴水)를
어린 금붕어 새끼처럼 뻐끔뻐끔
마시는 것이
좋다.

나는
갑자기 대가 되어버린다.

파란 대가 섞인
나는 나를 잊어버린 채

대랑 산다.

《65》봄의 유혹

신석정

파란 하늘에 흰 구름 가벼이 떠가고
가뜬한 남풍이 무엇을 찾어내일 듯이
강 너머 푸른 언덕을 더듬어 갑니다

언뜻언뜻 숲새로 먼 못물이 희고
푸른 빛 연기처럼 떠도는 저 들에서는
종달새가 오늘도 푸른 하늘의 먼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시내물이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아지랑이 영창 건너 먼 산이 고요합니다
오늘은 왜 이 풍경들이 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애요

산새는 오늘 어데서 그들의 소박한 궁전을 생각하며
청아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겠읍니까?
나는 지금 산새를 생각하는 '빛나는 외로움'이 있읍니다.

임이여 무척 명랑한 봄날이외다
이런 날 당신은 따뜻한 햇볕이 되어
저 푸른 하늘에 고요히 잠들어 보고 싶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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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 모음 52편

1.  가벼움

김지하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을 이고
물의 진양조의 무게 아래 숨지는
나비 같은 가벼움
나비 같은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물살을 이고
퍼부어 내리는 비의 쌔하얀
파성을 이고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이마 위에
총창이 그어댄 주름살의 나비 같은
익살을 이고
불꽃이 타는 그 이마 위에
물살이 흐르고 옆으로
옆으로 흐르는 물살만이 자유롭고
불꽃이 타는 이마 위에
퍼부어 내리는 비의 쌔하얀
공포를 이고
숨져간 그 날의 너의
나비 같은 가벼움.

2.  가을

김지하

낙엽철
햇빛 속에서

머리를 긁어 올린다
흰 비듬이
우수수 쏟아진다

가슴에 꽂힌
모진 눈빛들 칼끝 같은 말들
다 쏟아진다

푸른 하늘

제주 어디쯤
검은 돌 틈 흰 갈꽃에 가 있는
내 마음 그물 새

가을.

3.  갈꽃

김지하

싸늘한 듯 살가운
가을 풀 냄새
이리
돌아오는 옛 마을 
코끝에
또 가슴속에
갈꽃 하나 흔들려 

지금
거리에서 버티고
모멸에도 미소짓고 
술 취한 밤
파김치 발길이
집 찾아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은 
갈꽃 하나
내 아내 
마음의 틈 
이 가을
숨쉬는 일 모두 다
아아 귀향!

4.  겨울에

김지하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받으면
굴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5.  길

김지하

걷기가 불편하다
가야하고 또 걸어야 하는 이곳
미루어 주고 싶다.
다하지 못한 그리움과
끝내지 못한 슬픈 노래를
허나
길은 걸어야 하고 생각은
가야 하나 보다.

눈물이 흐른다.
보내야 하고 잊어야 하는 이곳
눈 있어 보지 못한 너와
입 있어 말 못하는 내가

허나
길은 걸어야 하고
생각은 가야 하나 보다.

6.  꽃 그늘

김지하 


이제야 그늘 속에


핀다

꽃과 그늘 사이
언젯적부터인가
그 긴장은

이제야
짧은 행간에
웬 무늬무늬 드러나
흰 무늬들
속의 속
흐드러진다

내 삶의


여기
청도 각북골에 와
엎드린 한 새벽에 흘러
흘러 넘치며 아롱거리는
샘물 속 

7.  끝

김지하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끝없는 끝들이여
말없는 가없는 모습도 없는
수렁 깊이 두 발을 묻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외쳐 부르는 이 기나긴 소리의 끝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엔 디뎌보마
죽기 전엔

꿈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바람도 소리도 빛도 없는 세월이여 기다림밖엔
남김 없는 죽음이 죽음에서 일어서는
외침의 칼날을 기다림밖엔
끝없는 끝들이여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죽기 전엔 기어이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8.  나 한때

김지하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해 스치는 세포마다
말들 태어나
온 우주가 노래 노래부르고

잎새는 새들 속에
또 물방울 속에
가없는 시간의 무늬 그리며
나 태어난다고
끊임없이 노래부르고 노래부른다

지금도
신실하고 웅숭스런
무궁한 나의 삶

내 귓속에
내 핏줄 속에 울리는
우주의 시간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잊었는가
잎새가 나를 먹이고
물방울이 나를 키우고
새들이 나를 기르는 것

잊었는가

오늘도
잎새 속에서

뚫어져라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것.

9.  나그네

김지하

길 너머
저편에
아무것도 없다

가야 한다
나그네는 가는 것
길에서 죽는 것

길 너머
저편에
고향 없다

내 고향은

끝없는 하얀 길

길가에 한 송이
씀바귀
피었다.

10.  나이

김지하

바람은 풍덩풍덩 불고
햇볕은 사뭇 초봄인데
매지리 못가에 앉으니
괴로움도 기쁨도 자취 없고
파문 자취만 물 위에 남는다
이울어진 함석집 한 귀퉁이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나는 항상 구경꾼
나는 항상 여행자
내 속에서도 늦은 탈곡이 한창인데

11.  낮선 희망

김지하  

내리는 비를 타고
한없이 내려라

증발의 날을
기다림도 없이

내려라
내린 속에 떠오르는

첫 무지개

태양도 없이 떠오르는
비 오는 날의
낯선 낯선 희망

12.  노을 무렵

김지하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행길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보고 있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을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닭, 참새, 붉은 구름, 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 머언 거리의 노래 소리
노래 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 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13.  녹두 꽃

김지하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14.  녹두 꽃

김지하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불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15.  短詩

김지하

短詩 하나

끊으려면 잇는 법
아주 잊히기 위해
이리 우뚝 선다
이루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사람이라
오늘
진지하게
죽음을 한번 생각한다.

短詩 둘

내 가슴에 달이 들어
내 가난한 가슴에
보름달이 들어
고층 아파트 사이사이를
산책 가는 내 가슴에
가을달이 들어.

短詩 넷

진종일 바람 불고
바람 속에 꽃 피고
꽃 속에 내 그리움 피어
세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데
내 어쩌다 먼 산 바라
여기에 굳어 돌이 되었나.

16.  들녘

김지하

무엇이 여기서
무너지고 있느냐
무엇이 저렇게 소리치고 있느냐
아름다운 바람의 저 흰 물결은 밀려와
뜨거운 흙을 적시는 한탄리 들녘
무엇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느냐
참혹한 옛 싸움터의 꿈인 듯
햇살은 부르르 떨리고
하얗게 빛 바랜 돌무더기 위를
이윽고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려간 뒤
바람은 나직이 속살거린다
그것은 늙은 산맥이 찢어지는 소리
그것은 허물어진 옛 성터에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붉은 산딸기와
꽃들의 외침소리
그것은 그리고
시드는 힘과 새로 피어오르는 모든 힘의 기인 싸움을
알리는 쇠나팔소리
내 귓속에서
또 내 가슴속에서 울리는
피끓는 소리
잔잔하게
저녁 물살처럼 잔잔하게
붓꽃이 타오르는 빈 들녘에 서면
무엇인가 자꾸만 무너지는 소리
무엇인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소리.

17.  無

김지하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시장해서

너를 사랑했노라

땅 위의 풀과 벌레
거리의 이웃들
해와 달별과 구름 모두 다
모두 다 죽어 가는 이 한낮

내 속에
텅 빈속에
바람처럼 움트는
왠 첫사랑 우주 사랑

그 새붉음을
본다

공허하므로
공허함으로 움직인다.

18.  무화과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19.  바다

김지하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참으로 이제 가겠다
손짓해 부르는
저 큰 물결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망망한 바다
바다로

없는 것
아득한 바다로 가지 않고는
끝없는 무궁의 바다로 가는 꿈 없이는 없는 것
검은 산 하얀 방 저 울음소리 그칠 길
아예 여긴 없는 것

나 이제 바다로
창공만큼한
창공보다 더 큰 우주만큼한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만큼한
끝간 데 없는 것 꿈꿈 없이는
작은 벌레의
아주 작은 깨침도 있을 수 없듯
가겠다

나 이제 가겠다
숱한 저 옛 벗들이
빛 밝은 날 눈부신 물 속의 이어도
일곱 빛 영롱한 낙토의 꿈에 미쳐
가차없이 파멸해 갔듯
여지없이 파멸해 갔듯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백방포에서 가겠다
무릉계에서 가겠다
아오지 끝에서부터라도 가겠다
새빨간 동백꽃 한 잎
아직 봉오리일 때
입에 물고만 가겠다
조각배 한 척 없이도
반드시 반드시 이젠 한사코
당신과 함께 가겠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

바다가 소리 질러
나를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의 이슬
이슬 가득 찬 한 아침에
그 아침에
문득 일어서
우리 그 날 함께 가겠다
살아서 가겠다
아아
삶이 들끓는 바다, 바다 너머
저 가없이 넓고 깊은, 떠나온 생명의 고향
저 까마득한 화엄의 바다

가지 않겠다
가지 않겠다
혼자서라면
함께가 아니라면 헤어져서라면
나는 결코 가지 않겠다

바다보다 더 큰 하늘이라도
하늘보다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라도
화엄의 바다라도
극락이라도.

20.  바람에게

김지하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 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 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 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여뀌 잎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21.  백학봉(白鶴峰)

김지하


멀리서 보는
백학봉白鶴峰

슬프고
두렵구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흰 학,

봉우리 아래 치솟은
저 팔층 사리탑

고통과
고통의 결정체인
저 검은 돌탑이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투쟁으로 병들고
병으로 여윈 지선知詵스님 얼굴이
오늘
웬일로
이리 아담한가
이리 소담한가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 자락이 펄럭,

아 이제야 알겠구나
흰 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22.  벼랑

김지하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
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

삶은 명치끝에
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

온몸 저려오는 소리 있어
살아라
살아라
울부짖는다

한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
살자 살자고
누군가 부르짖는다

거리에 나서도
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 

23.  벽

김지하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님이 화안이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24.  별

김지하

내일 새벽
나의 죽음 뒤에
아마도
별이 뜰 것이다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 뜰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다
살아서는
내 몸 속에 빛나던,
아름답던,

나를 이제껏
살게 했던

그 별이 처음으로
우주에 뜰 것이다
숨어 있던 별,

아마도
내일 새벽
나의 죽음 위에
비밀을 열 것이다

다시 산다면
나는
불쌍한 우리 네 식구처럼
네 개의 푸른 별로

항상 떠
내내 비췰 것이다.

25.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김지하

아직은 따스한 토담에 기대
모두 토해버리고 울다 일어나
무너진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무것도 없는
댓잎 하나 쓰적일 바람도 없는
이렇게 비어 있고
이렇게 메말라 있고
미칠 것만 같은 미칠 것만 같은
서로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불 켠 방의 초라한 술자리 초라한 벗들

날이 새면
너는 진부령 넘어
강릉으로 오징어잡이, 나는
또 몸을 피해 광산으로 가야 할 마지막
저 술자리

서로 싸우지 않고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낯선 마을의 캄캄한 이 시대의 한 밤
토담에 기대 우러른 하늘
아아 별빛마저 보이지 않네

26.  不歸

김지하

못 돌아가리
한번 딛어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국소리 밤새워
천장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뽑혀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27.  비

김지하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춤추며 하소하나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내리는 빗속에
온갖 것 소리지른다

흙도 사금파리도
상추잎도 소리지른다

닫힌 몸 속에서
누군가 소리지른다

외침의 침묵
리듬은 떠나고
비만 내린다.

28.  빈 산

김지하

빈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 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29.  빗소리

김지하

눈감고
빗소리 듣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돌아 다시 하늘로
비 솟는 소리
듣네

귀 열리어
삼라만상
숨쉬는 소리 듣네

추위를 끌고 오는
초겨울의 저 비
산성비에 시드는
먼 숲속 나무들 저 한숨 소리

내 마음속 파초잎에
귀 열리어

모든 생명들
신음 소리 듣네
신음 소리들 모여
하늘로 비 솟는 소리
굿치는 소리 영산 소리 듣네

사람아
사람아
외쳐 부르는 소리
듣네

30.  사람 사이의 틈

김지하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 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 틈
새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31.  사랑

김지하

꽃 피어도
나비
오지 않는다

봄의 적막이
속에 든다

춥고
외로와
사랑하고저 하나
내밀어 볼

없다

온 마음
맨몸이 죽도록
거리를 걷는다
피투성이로 걷는다
사랑하고저.

32.  산책은 행동

김지하

겨울 나무를 사랑한다면
봄은 기적 같으리

고독한 사람이
물 밑을 보리

이리저리 흩날리는
가랑잎에 훨훨훨
노을 불이 붙는다

산책은
행동.

33.  새

김지하

저 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왜 나를 울리나
밤 새워 물어뜯어도 닫지 않을
마지막 살의 그리움
피만 흐르네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흐르네
함께 답세라 아 뜨거운
새하얀 사슬 소리여

날이 밝을 수록 어두워 가는
암흑 속의 별밭
청한 하늘 푸르른 저 산맥 넘어
멀리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뜨거운 햇살
새하얀 저 구름
죽어 너 되는 날의 아득함
아 묶인 이 가슴

34.  새봄3

김지하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35.  생명

김지하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36.  서편

김지하

내 마음에
불길 꺼지고

밤낮
흰 달 뜬다

차가운 자리
노을마저 스러져

무서운 꿈마다
꽃 피어난다

지난날 회한도
이제는 즐거움

아파트 사이
봉숭아 한 잎에도

하늘 든다

님아
이젠 오소서


검은 삶에
붉은 살 돋우시라

나 지금
서편으로 가는데.

37.  아파트 꿈

김지하

나는
아파트에다
토담집을 짓는다

아파트 사이사이로
돌아 나가는 강물이 있어
산책길에
내 발을 적신다

음악이 들리는 창문
장미가 피는 창문
라일락이 서 있는 창문은
모두 다 내 집이다

내 눈의 집

저녁달이 오르면
내 눈은 거대한 우주가 되어
아파트 위에 둥실 뜬다

내 눈은 이제


푸른 초원 비취는
구월 밤의
빛.

38.  애린

김지하

외롭다.
이말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가는 빗살
빗살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남 날들 스쳐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건넬이
이세상엔 이미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줄수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짐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자락
이리 외롭다.

39.  엽서

김지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40.  엽서

김지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 듣는 걸 봐
아니야
펜이 나빠서가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아니야
지금 쓰는 이 엽서는
네게 부칠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지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린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

41.  一山詩帖

김지하

외로울 땐
풀잎 하나도 정답다

하늘 가득 스모그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개지


참새 지저귀고
아직도 꽃이 피고

하늘엔
흰 구름도 흐른다
아파트에 쭈그려 앉아
허공 한 쪽 볼 수 있으니

내 삶
아직도 괜찮다

고마워
눈물난다

42.  저녁 산책

김지하

숙인 머리에
종소리 떨어지고

새들이 와 우짖는다

숙인 머리에
바람이 와 소스라치고

가슴 펴라
가슴 펴라 악쓰고

숙인 머리에
별 뜬다

오늘밤은 무슨 꿈을 꾸랴
먼 하늘엔 새빨간
노을 쏟아지고.

43.  죽음

김지하

빛 밝은 삼월 아침
상여 소리 지나는데

황매꽃 지고
꽃상여 지나는데

산란하던 마음
이리 차분해

황토 한줌
황산 어디쯤 산이면 어디쯤
눈부실 황토 한줌

종이꽃 하나
내 목숨.

44.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45.  지리산 근처

김지하

가긴 가지만
근처까지만 가는 길
 
구름 도는
봉우리 저 푸른 빛
 
영기(靈氣)도 원한(怨恨)도
함께 서린 지리산 저기
 
안 간다
우러러볼 뿐
간다만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
화개(花開)까지만
 
강 건너가고
작은 폐활량에
헐떡이며 쉼없이 가고
 
다 가면
못 오리
 
가긴 가지만
근처까지만 가는 그 길
 
돌아서는 뒤꿈치가
유난히도 둥글고 하얗던 그 날
 
고달픈 아름다운
 
가며
가지 않는
이순(耳順) 근처 어느 날.

46.  쳐라

김지하

노을이여
나를 쳐라
내 마음을 쳐라
불타는 노을이여

새벽에나 겨우겨우 길 찾아나서는
둔한 내 마음을
잠든 내 삶을 쳐라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더욱 더 산란하게 쳐라

산란하여
아으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게 쳐라

일어서 아무 때 아무 곳이든
뚜벅뚜벅 진흙길 나서게 쳐라

쳐라 쳐라
힘차게 쳐라
사그라드는 애잔한 끝만 남은
덧없는 노을이여
노을이여
쳐라 쳐라.

47.  초롱불 진달래

김지향

삭둑삭둑 키를 잘라낼 땐
피 한 방울 안 나던 진달래
오늘 아침 창문을 열고 보니
꽃분홍 선혈을 뒤집어쓰고 있네

조금씩 가지를 쳐낼 땐
신음소리 한 마디 안 내던 진달래
오늘 아침 물주다 보니

빨갛게 켜든 초롱불 속에
마디마디 아픔이 웅크린
눈물을 감추고 있네

초롱불 한 잎 한 잎 만지작거리다
돌아선 나의 등뒤에서
진달래 아픈 비명소리가
딸,딸,딸, 신발을 끄을며 따라오네

48.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이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흐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49.  틈

김지하

사랑은

내안에 벌어지는
꽃이파리 하나
해살 비쳐들고
바람 불어오고
벌이 오고 또 나비가 오고
흰 구름 흐르다 흐르다
밤이면
푸른 별자리들 기울어
이슬 내리고
사랑은

거리에서도 
아아
너로 하여
나 
우주에 살고

50.  푸른 옷

김지하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 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 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던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어지지만 않는다면.

51.  황톳길

김지하
(1)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2)
밤바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3)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4)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5)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면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52.  회귀

김지하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에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등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을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 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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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 모음 17편

1.가을의 유혹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물은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정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차처럼 또는
낙엽보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때
목메인 소리는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고 있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 양복과 목관 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눈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2.목마와 숙녀

박인희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밑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패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널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절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3.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4.거리

박인환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 갔다

아무 말도 하지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 갔다
베링 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 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의 수 목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5.검은 강

박인환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의 노정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부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이 가득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히로 이룬
자유의 성채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6.고향에 가서

박인환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에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의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 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7.낙하

박인환

미끄럼판에서
나는 고독한 아킬레스처럼
불안의 깃발 날리는
땅 위에 떨어졌다
머리 위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 후 20년
나는 운명의 공원 뒷담 밑으로
영속된 죄의 그림자를 따랐다
아 영원히 반복되는
미끄럼판의 승강
친근에의 증오와 또한
불행과 비참과 굴욕에의 반항도 잊고
연기 흐르는 쪽으로 달려가면
오욕의 지난날이 나를 더욱 괴롭힐 뿐
멀리선 회색사면과
불안한 밤의 전쟁
인류의 상흔과 고뇌만이 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할
망각의 이 지상에서
더욱 더욱 가라앉아 간다

처음 미끄럼판에서
내리달린 쾌감도
미지의 숲 속을
나의 청춘과 도주하던 시간도
나의 낙하하는
비극의 그늘에 있다

8.남풍

박인환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찌기 외복을 빼앗긴 토민
태양 없는 말레이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원에서
쟈스민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쿠멜신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 와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서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은 온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은 온다

아시아 모든 위도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9.불행한 신

박인환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과거는 무수한 내일에
잠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신
어디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
당신은 나와 단둘이서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고절된 의식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처럼 우리는 존재됩니다
쉴새없이 내 귀에 울려오는 것은 불행한 신
당신이 부르시는
폭풍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천지 사이를
내가 있고 엄연히 주검이 가로놓이고
불행한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최후의 안정을 즐깁니다

10.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박인환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과 초연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의 오늘을 살아나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11.세 사람의 가족

박인환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플랫폼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 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빙화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12.어린 딸에게

박인환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개월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와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벼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럼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13.얼굴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을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14.열차

박인환

폭풍이 머문 장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한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에 플로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난다

청운의 복받침을
나의 시야에 던진채
미래에의 외접선을 눈부시게 그으며
배경은 핑크빛 향기로은 대화
깨진 유리창 밖 황폐한 도시의 잡음을 차고
율동하는 풍경으로
활주하는 열차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다음 헐벗은 수목의 집단 바람의 호흡을 안고
툰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
혜성보다도
아름다운 새날보담도 밝게

15.태평양에서

박인환

갈매기와 하나의 물체
고독
연월도 없고 태양도 차갑다
나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겠다
더욱이 낭만과 정서는

저기 부서지는 거품 속에 있어라
죽어간 자의 표정처럼
무겁고 침울한 파도 그것이 노할 때
나는 살아 있는 자라고 외칠 수 없었다
그저 의지의 믿음만을 위하여
심유한 바다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태평양에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릴 때
검은 날개에 검은 입술을 가진
갈매기들이 나의 가까운 시야에서 나를 조롱한다
환상
나는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과의 비례를 모른다

옛날 불안을 이야기했었을 때
이 바다에선 포함이 가라앉고
수십만의 인간이 죽었다
어둠침침한 조용한 바다에서 모든 것은 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가?

바람이 분다
마음대로 불어라. 나는 데키에 매달려
기념이라고 담배를 피운다
무한한 고독 저 연기는 어디로 가나

밤이여 무한한 하늘과 물과 그 사이에
나를 잠들게 해라

16.한 줄기 눈물도 없이

박인환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붕 위에서 울었다

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
용사가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 소리를 듣는다
아 창문을 닫으시오

고지탈환전
제트기 박겨포 수류탄
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각했다
옛날은 화려한 그림책
한 장 한 장마다 그리운 이야기
만세소리도 없이 떠나
흰 붕대에 감겨
그는 남모르는 토지에서 죽는다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피와 청춘을
자유를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지금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17.행복

박인환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정사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노인은 꿈을 꾼다
여러 친구와 술을 나누고
그들이 죽음의 길을 바라보던 전 날을
노인은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
쓰디쓴 감정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는 지금의 어떠한 순간도
증오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죽음을 원하기 전에
옛날이 더욱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와 가까이 있는 것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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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시 모음 42편

1.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 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2.가 을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 보다도
마른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면
눈 감은 채 고즈넉이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써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할 때
앉아서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거라

3.갈대꽃

유안진

지난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그대의 흰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4.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유안진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터리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요로움일지라도 풍성한 가을열매일지라도
추억처럼 슬픈 것, 슬퍼서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못내 그립고 그리운 것
그렇게 고향은 비어가면서 속절없이 슬픈 이름이 되고 있다
허물어져 가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5.구절초

유안진

들꽃처럼 나는
욕심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 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어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볕은
성자의 미소

6.꽃 지는 날에

유안진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7.꿈

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8.낙엽 쌓인 길에서

유안진님

한 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 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도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9.눈사람

유안진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10.동백꽃

유안진

엄동 눈바람에
어쩌자고
피느냐

좋은 세월
다 놓치고
이제야 피느냐

목숨마저 켜 드는
등불임에도

별무리마저 가슴 죄어
차마
지켜 새우는

겨울 뜨락의
한 자루 촛불
나의 신혼이여.

11.들국화

유안진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라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띠고
마중 나오신 성녀
막달라 마리아

12.멀리 있기에

유안진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13.봄


유안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라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 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박꼭질 노니는 산골 자기에는
뻐꾹뻐꾹 사랑 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러움증 산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흥 빛 봄

14.서리 꽃

유안진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붙이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 꽃
내 이름을 어쩔래

15.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서리 덮힌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힌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시란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16.송년에 즈음하면

유안진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년이 한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덤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17.실패할 수 있는 용기

유안진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 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 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18.아름다운 고백

유진하

먼 어느 날 그대
지나온 세상 돌이켜 제일로 소중했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당신이라 말하겠습니다

먼 어느 날
꽃잎 마저 어둠에 물들어
별리의 문 닫힌 먼 어느 날
그대 두고 온 세상 기억 더듬어
제일로 그리웠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음성 들리면
나는 다시 주저 없이 그 사람
당신이라 대답하겠습니다

혼자 가는 길 끝에
어느 누구도 동행 못하는
혼자만의 길 끝에 행여 다음 세상 약속한 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겐 늘 안개 같은 이름
당신을 말하겠습니다

당신 사연 내들은 적 없고
내 사연 또한 당신께 말한 적 없는 그리운 이

세월 다 보내고 쓸쓸히 등 돌려 가야 하는
내 막다른 추억 속에서 제일로 가슴 아픈 사랑
있었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내 마지막 한 마디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고백하겠습니다.

19.아침 기도

유안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 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수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이 상책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그래서 더러 용서도 빌어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여 있어
늘 미안한 자격 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20.전설도 하 많은 고향 들녘 뜸

유안진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고향은 신비로운 동화의 세상
그래서 꿈도 희망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세상
산봉우리, 고갯마루, 산골짜기, 냇물과 바윗돌, 한 그루 나무에까지
전설을 품어 신비로운 힘과 꿈과 위로과 웃음의 비결이 되었지

집채만한 거북이가 마을로 기어드는 거북바위마을도
입향조가 이름하신 구입리 씨족마을
거북처럼 오해 살며 번성하는 장수마을 거북바위는
생남 등과 와 승진 합격 치병들
어던 소원도 다 이루어준다는 거북바위는 주민의 신령스런 종교가
되어,
거북들, 거북뜸, 거북봉, 거북재, 거북골, 거북내, 거북다리목...
조상들의 함자도 구봉이 구형이 구문이 구동이 구호 구식 구놈이
구순이...
그 어르신네 고손자들 아명도 거복, 거남, 거북, 거돌, 거식,
거남, 거봉...
새댁네 모두는 아이 아닌 거북새끼를 낳으니
거북처럼 크게 되어 돌아오는 정기 서린 길승지 명당마을
어떤 가뭄에도 풍년농사가 된다는 거북뜸을 들녁으로 농사지어
사는 농촌마을
태풍과 장마에도 거북뜸 올벼는 잘도 익은 풍년

도깨비와 불귀신과 서낭신도 거북을 닮아서
어른 아리 없이 한 두가지 이야기를 지어 보태는 이야기꾼 마을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 없어져도
고향은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더욱 고향다웁고
알수 없는 영험스런 힘으로 타관 땅 어디에서도 굳세게 살아
성공하여 돌아가는 주인공이 되게 하는 바로 그런 그곳.

21.착해지는 날

유안진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진다.

22.휘파람을 불어 다오

유안진

이 허황된 시대의 한 구석에
나를 용납해준 너그러움과
있는 나를 없는 듯이 여기는
괄시에 대한
보답과 분풀이로

가장 초라하여 아프고 아픈
한 소절의 노래로
오그라들고
꼬부라지고 다시 꺾어 들어서

노래 자체가 제목과 곡조인
한 소절의 모국어로
내 허망아
휘파람을 불어 다오



23.사리(舍利)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
사리(舍利)처럼 남을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24.가을 편지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25.겨울을 기다리며

 

겨울이 오면
나는
바람이 될 거야


더는 못 참는 침묵에서
더는 못 감출 이름을
마음껏 소리쳐 불러보는 목소리가


밤낮 주야 가리지 않고
천지사방 거침없이
목놓아 외쳐대는 북풍의 목청이


부르고 싶은 이름 하나에
미쳐버린 겨울바람
그 목소리 될 거야, 되고 말 거야.

 
26.꽃 지는 날에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27.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28.낙엽 쌓인 길에서


한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또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29.눈물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뼈가 녹아 물이 되고
살이 녹아 물이 되고
살아가는 길
긴 여과의 과정에서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울부짖는
날이 날마다


사랑도
시도
그리고 학문도
배신을 일삼는
수치와 약점일 뿐


녹아도 녹아도
녹지 않는 뼈와 살
오직 그 하나
나의 참뜻은


마지막 그날에
생애를 걸러서
우러나는 한 방울


신이 정녕 계실진대
무심한 하나님
그로 하여 나는

 

30.눈사람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이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하나 지어 눈맞춤 하리라

 

 31.들국화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랏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띄우고
마중나오신 성녀

 

 32.멀리 있기


멀리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리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33.서리꽃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34.실패할 수 있는 용기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35.아침 기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 수 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어 있어
늘 미안한 자격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36.약속의 별



몹시 외롭고 쓸쓸해지는 때는
걸어온 옛길로나 돌아가게 되나봅니다
못내 초라하고 서글퍼지는 때에도
보물찾기하듯
그 길섶을 뒤적이게 되나봅니다


긴긴 겨울밤 얼어붙은 깜깜 하늘에는
왠지 낯익은 듯
눈물 머금은 별 하나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다가
까맣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약속 하나, 언약 하나, 맹세 하나를



내 어려서 철없던 꼬맹이적에
심심해서 별이나 헤아리며
혼자 놀던 어느 밤에
문득 아름다운 별 하나에 넋이 빠져
단박에 나의 별로 점찍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별
이담에 나도 너처럼 빛날 거야
턱을 괸 두 손 풀고 발딱 일어서며
나 혼자 중얼거려 약속했습니다
그 별도 기뻐서
더 크게 더 밝게 빛났습니다


그 이름은 놀림말로 개밥바라기라고 하지만
초저녁엔 금성이고 장경성(長慶星)이고 태백성(太百星)이며
새벽녘엔 샛별이고 명성(名星)이고 계명성(啓明星)이라 부르는 줄은
한참 뒤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애들한테 따돌림받고
슬퍼지는 외토릴 때


손등으로 눈물 닦다가도
고개 들면 웃어주는 별


힘을 내!
하마 잊었니 우리의 약속을?
그때 이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밤중에 잠이 깨어도 문 열고 내다보며
눈맞춤도 눈흘김도 눈쌈도 하였고
신새벽 뒷간 가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짓궂게 놀려대어도 나는 행복했습니다



꿈이 너무 많고
너무도 화려하여
눈물도 웃음도 변덕스럽던 여학생때는
단짝 친구랑 나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영원한 우정을
기막힌 야망을


여름밤 하늘의 별 하나를 정해놓고
손가락을 걸어서 우린 언약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아득한 훗날 그 어디에서라도
우리의 우정은 언약의 별같이
밝고도 찬란할 것이라고
언약의 별 같은 인물이 되자고
새끼손가락을 세 번 잡아당겼습니다



애인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여
숫되고 서툴던 내 처녀적에
별 하나에 사랑을 맹세해 주던 이여
별 하나에 포부를 다짐해 뵈던 이여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몰라도
지금의 하늘에는


맹세의 그 별이
그날처럼 밝고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는 일이 피곤할 때
더러더러 생각날까요
뜨거운 그 호소 그 맹세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까요



덧없고 부질없어라
우정과 사랑이면 더욱 그러하여라
세월이 지나간 휑하니 빈 자리에는
그 약속, 그 언약, 그 맹세 모두
어처구니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달픈 퇴근길에 헛발을 디디다가
잠 안 오는 밤중에 안경알을 닦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약속의 별 하나
아이적 내 별이여, 우정의 우리 별이여


영원을 맹세하던 첫사랑의 별이여
어느 한 가지의 약속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온 오늘은
그저 할말이 없습니다
오직 미안할 뿐입니다
아이처럼 다리 뻗쳐 마구 울고 싶습니다.

 

37.작정


모르며 살기로 했다.
시린 눈빛 하나로
흘러만 가는 가을 강처럼


사랑은 무엇이며
삶은
왜 사는 건지


물어서 얻은 해답이
무슨 쓸모 있었던가


모를 줄도 알며 사는
어리석음이여
기막힌 평안함이여


가을하늘빛 같은
시린 눈빛 하나로
무작정 무작정 살기로 했다.

 

38.조각달


사랑이 떠난 후에
알게 모르게 허물어진 몸
허공에 떠도는 줄
혹시 알리 또 모르리만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겨
홀로 기웃대었다


그대 뉘 지아비 되고
나 또한 지어미 되니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맹물 같은 웃음뿐
가벼이 반공중에서
사라지고 말아라


무궁한 세월이 흘러
저승길 더듬을 제
그 누가 문책하면
품안에서 꺼내 뵈리
네 가슴 노리던 비수

 

39.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40.봄비 한 주머니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42.황홀한 거짓말


<사랑합니다>
너무도 때묻힌 이 한마디 밖에는
다른 말이 없는 가난에 웁니다.
처음보다 더 처음인 순정과 진실을
이 거짓말에 담을 수 밖에 없다니요.
겨울 한밤 귀뚜라미 거미줄 울음으로
여름밤 소쩍새 숨넘어가는 울음으로


<사랑합니다>
샘물은 퍼낼수록 새물이 되듯이
처음보다 더 앞선 서툴고 낯선 말


<사랑합니다>
목젖에 걸린 이 참말을
황홀한 거짓말로 불러내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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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시 모음 20편

1.가을편지

노향림

안녕하세요? 가을입니다.
발끝까지 풀려버려
허한
빛으로 흩날리고 있군요.

발 밑에
흔적처럼 남은
물이나 쓸쓸함.

기댈 곳 없는 나는 재채기를 쏟아냅니다.
그동안 기대던 가난한 식구와
낡은 가구와 해골 같은 한편의 시를 버리고
등언저리를 모두 비어놓았습니다.
아무 한 일 없이, 누구도 만난 일 없이
가을과 나는 한 몸이어서
다 해진 하늘, 마른 햇볕을 자꾸 쏟아냅니다.
스물스물 빠져나가던 가을은
다시 무엇이 되어 나와 함께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지
어디 들판에 흩어져 있는지
선천성 약질인 폐를 부풀리는 나무 곁에
함께 누워있는지
두리번댑니다.
두리번대도 온통 가을뿐이예요.
씌어질 때 씌어지더라도
씌어지지 않는 단 한 줄의
우리 고통, 안녕!

2.가족

노향림

나는 서투르다.
은행나무 분재를 들여놓아도
곧 낙엽 져 떨어진다.
허리 잘린 그 몸에 아기 손처럼 돋아
하늘을 받들던 잎들이 진다.
그 뒤에 하릴없이,
죄송하다는 듯이 물이나 잔뜩 끼얹어 줄뿐이다.
흙 속에 가늘게 뻗은 뿌리들이 제 몫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3.강변마을

노향림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3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짓보다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거야,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느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레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 중이다.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마음의
블랙홀에 켜놓았다.
나트륨등이 반짝 켜진다.

4.그리운 서귀포1

노향림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맑은 갯벌엔 눈감은 게 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 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 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5.깊은 우물

노향림

그대 가슴에는
두레박줄을 아무리 풀어내려도
닿을 수 없는 미세한 슬픔이
시커먼 이무기처럼 묵어서 사는
밑바닥이 있다.

그 슬픔의 바닥에 들어간 적이 있다.
안 보이는 하늘이 후두둑 빗방울로 떨어지며
덫에 걸린 듯 퍼덕였다.

출렁이는 물 위로
누군가 시간의 등짝으로 떠서 맴돌다
느닷없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소루쟁이 풀들이 대낮에도 괭이들을 들쳐메고
둘러선 내 마음엔
바닥 없는 푸른 우물이 오래 묵어서 숨어 있다

6.꿈

노향림

바다가 앞에 와 있었다
뻘 밭 사이에 처박고 있는
그의 얼굴이 늘 보고 싶었다
신음소리가 귀신이 되어 나오던
집 한 채.
철사토막 같은 손으로
바다소나무들은
양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냄새가 그리웠다
긴 복도 끝
육조 다다미房에 복막염으로
나는 누워 있었다
사금파리, 야생초, 생고무 냄새
바람 사이의 흐리한 호얏불,
오래 문 닫힌 대장간에 쌓여 있는
靜寂들이 보고 싶었다
아, 손과 발을 달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소리들이 보고 싶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
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
묻어났다
바다는 늘 앞에 와 있었다

7.들길

노향림

잡초 무성한 들판을 걷는다
기억을 잃은 시아버지의
한 달분의 약 처방전 받으러 가는 길
로도핀 아라셉트 치매약 성분의
알약을 삼킨 탓일까
서로 다른 몸짓으로 쑥부쟁이 개쑥
냉이 땅버들도
멍한 낯빛을 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입 속에
가득 넣고 굴린다
흩어지는 햇살이 멀리 양평 쪽 강물 위에
은화銀貨처럼 쏟아져 구른다
그 속을 거꾸로 처박힌 얕으막한 산들이
팔짱을 끼고 비껴서 있다
하반신에 풀이 돋는 바위도 보인다
치유할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면
산풀도 나즈막하게 얼굴이 뜨는 것일까
버드나무가 발바닥 적시며 몸 가렵다고
바람 속에서 박박 긁는 소리
발소리 죽이고 아치형 철제 대문이 슬몃 열린
병원 안마당에 들어선다. 아무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두 잊은
끝모를 시간만이 고여 있다

8.마루

노향림

마른 걸레로 거실을 닦으며
얇게 묻은 권태와 시간을
박박 문질러 닦으며
미국산 수입 자작나무를 깐
세 평의 근심 걱정을 닦으며
지구 저쪽의 한밤중 누워 잠든
조카딸의 잠도 소리 없이 닦아 준다.
다 해진 내 영혼의 뒤켠을
소리 없이 닦아 주는 이는
누구일까.
그런 걸레 하나쯤
갖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9.새들은 길을 트며 날아간다

노향림

기르던 한 쌍의 새가 날아간 빈 새장엔
피 배인 햇살이 툭툭 떨어져 나뒹글고
뾰족한 부리로 낟알만큼씩 쪼아댄 시간들이
모이통과 함께 한구석에 넘어져 있다
까마득히 날아간 새들이 숨쉬었던 흔적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허공을 뚫고
누구도 넘보지 않을 더 먼 곳
바람만 재빨리 누웠다 일어서는 곳
모든 새들은 온몸으로 길을 트며 날아간다
좁쌀만 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지상은
언제나 원근법의 깊은 아름다움이 파인
3D SF 화면처럼 반짝인다
어느 곳은 연둣빛
어느 곳은 바다 빛
어는 곳은 눈물 빛

10.어느 거장의 죽음

노향림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로 날아들고
연미복 입은 그의 죽지 속에 편안히 안긴다.
새의 부리는 길고 날카롭다.
건반 위에서 무시로 떨리는 손
쾅쾅 마하 광속으로 튀는 빛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땐
어느덧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없다.
불빛 모두 꺼진 뒤에도 音階에 감전된
수형자처럼 그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날이 새도록 앉아 있다

11.엉또폭포

노향림

엉또폭포를 보신 적 있나요?
제주 서귀포시 올레길 7-1코스
엉뚱한, 폭포라는데요.
제주 사투리 엉과 도의 합성어 엉또는
참으로 엉뚱하게도 숨고 싶으면
작은 바위틈이나 굴속에 숨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몸 야위며 있다가
내려가고 싶으면 불쑥 뛰쳐나가
언제든 뛰어 내린다는군요.
자신을 스스로 적막 속에 가둔 자유인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어요.
햇볕 쨍쨍한 날이 계속되면
제 속이 불 속의 명부전처럼 활활 타올라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간밤 몰래 폭우 몇 줄기 기운차게 내리면
폭포가 되어 내 여기 나와 있어요,
천지를 뒤흔드는 폭포소리를
사람들은 갑작스레 듣게 되지요.
콸콸콸콸 쏴아쏴아 콸콸콸콸

12.여름이 가다

노향림


만날 사람도 없이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불쾌하다.

닫힌 얼음집 앞에 빚더미처럼
여름이 엎질러져 있다.

문안에서 누가 톱질을 하는지
새벽에서 밤까지
슬픔들이 토막으로 잘려 나오는 소리.
질이 연한 내 마음이 아프다.

쭈쭈바를 입에 문 아이가
기웃거리다 지나가는 쪽
속이 편안한지, 덜컹거리며 가야 할 길 버리고
시동 걸린 화물트럭이 빈 채로 대기중이다.

큰길 옆 버즘나무 그늘 밑
사람들이 얼굴을 펴면 뜨내기 꽃들의 얼굴에도
햇볕이 환하게 빛났다.

몰래 내다 버린 화분 속에
관절을 앓는 남천이, 은침을 박고 있는
어깨와
겨드랑이에
여름이 환하게 지는 중이다.

13.위로

노향림

내릴 손님이 없어 폐쇄 된
시골 간이역에서
낭자하게 피 흘리는 선홍빛 셀비어 꽃
문득 철길을 따라 걷는 가을이
맨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며
선연한 피들을
닦아주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14.정동진역

노향림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
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
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
파도 소리로 펄럭이면
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

15.제라늄

노향림

어여쁜 이름 제라늄
제철이 지나 잎 다 떨군 마른 가지 끝에 매달려
붉은 혀를 빼물고 간신히 피어 있네요.
생이란 매달려 피어 있는 것이라고
천 길 낭떠러지에서도 피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철 지난 가지 끝의
생각들에게 말을 걸어요.
창틀 없는 창가로 주춤주춤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아 막막하게 뜬 하늘 오래 바라보아요.
저 광대무변한 이천 몇억 개의 별자리를
하나하나 세고 있나요?
환하게 피었다 지는 저 별빛에도
속삭이는 몸짓과 뜨건 피가 함께 흐른다고
마음에 불을 지피는 제라늄
그 주위를 맴돌면서 작디작은 얼룩이
그대의 흐린 눈빛에 어른거려요.
가지 끝에서 툭 꽃잎 떨어지는 소리 환해요.
등 돌려 누운 어둠들이 이 지상을 뒹굴며
가만가만 혀로 핥는 소리
제라늄 제라늄

16.종이학

노향림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엔 신혼 부부가 세들어 삽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결혼식 다음날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는 매일 종이학을 날립니다

한두 마리 날아 오르다가 수십 마리가 우리집 베란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중 몇 마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학을 무엇이 날려주는 지 모른채
나도 마주 손 흔들어 줍니다

어느덧 그녀의 하늘에서 나는 흔들립니다
종이학이 날아올 때마다 덜컹대는 창문,
새로 돋는 아이비 덩굴손도 흔들립니다

허물린 담장 위엔 이승의 보이지 않는
새파란 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매캐한 하늘 속 홀로 있어도
그리움 깊으면 흔들린다는 사실이
황홍해져 또 다시 흔들립니다

불현듯 그대에게 날려보낸 학 한 마리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17.차마고도

노향림

목이 말라야 닿을 수 있는 길
차마 갈 수 없어도
참아 갈 수 있는 길
그런 하늘 길
생각하며 연필화의
흐릿한 연필 끝을
따라가본 것뿐인데
등 뒤가 까마득한 茶馬古道,
茶 대신 소금 한 줌 얻으려고
연필화 끝의 희미한
멀고 먼 나라
비단길 너머
그 너머

18.추억이 마려운 얼굴

노향림

고속도로 휴계소 간이식당에서
찐 감자 몇봉지를 사들고
그는
추억이 마려운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하늘은 눈을 찌를 듯 높고
타고 온 트럭은 등 돌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잠시 벗어 걸어두고
마구잡이로
시간은 그렇게
사람들의 뒷덜미를 끌고
들어갔다
나옵니다

하릴없이 등 돌려 남겨두고 온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찌르레기새처럼 박혀 있고
깡마른 얼굴로
노을이 중얼거립니다.

여기서 늙음까지는 몇리?

19.편지

노향림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멍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20.황조롱이 생존법에 관한 관찰

노향림

강변아파트의 비좁은 환기구 앞에서 비는
황조롱이네 집을 가려주고 내린다.
생존을 향한 새들의 이동에 한여름에도
주인은 환풍기를 틀지 않는다.

몇 날이고 비는 내려서 먹이를 찾지 못한
어미 새는 장마 속에서 버티다가
허공에 한번 치솟았다가 수직강하 하는 것이
생존법이라고 어렵사리 나는 법을
새끼들에게 가르친다.

퍼붓는 빗속에 어미는 허공을 날개 끝에 매달아놓고
앞발을 모으고 고수부지에 사뿐히 내려앉아 보여준다.
배추흰나비와 호랑나비의 찢긴 날개를 찾는 법
이파리에 붙어 떨고 있는 애벌레를 보면
잽싸게 발톱으로 낚아서 솟구치는 법

몇 차례 새끼들은 물어다 준 먹이를 물었다.
황조롱이는 다시 날개를 펴 수직강하 한다.
비가 내리는 어둡고 습한 풀숲에는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와 잔영이 남아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절체절명의

생존법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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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희시모음 70편

《1》2월 편지

홍수희

어딘가 허술하고
어딘가 늘 모자랍니다

하루나 이틀
꽉 채워지지 않은
날수만 가지고도
2월은 초라합니다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1년 중에
가장 초라한 2월을
당신이 밟고 오신다니요

어쩌면 나를
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날들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더라도

사랑의 싹이 돋아날
여분의 땅을 내 가슴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2》2월에 쓴 시

홍수희

지금쯤 어딘가엔 눈이 내리고
지금쯤 어딘가엔 동백꽃 피고
지금쯤 어딘가엔 매화가 피어

지금쯤 어딘가에 슬픈 사람은
햇살이 적당히 데워질 때를 기다려
눈물 한 점 외로운 벤치 위에 남겨두고서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겠다
다시 어디론가 길을 뜨고 있겠다

《3》4월

홍수희

화선지 위에 어둠을 그린다
그만 문(門)은 닫히고 만다
아무리 많은 색깔을 늘어놓아도
그릴 수 없는 내 속의 캄캄한 어둠
어둠은 또다른 어둠을 부르고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느닷없는 돌개바람의 미친 자기 분신,
당신은 나에게는 지나친 백야(白夜)!
부활의 4월은 내게 부활을 주지 않고
내 영혼의 무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단단하고 거대한 바윗덩이는
끝끝내 움직여 흔들릴 줄 모른다
어찌하여 바위는 구르지 않는가
시지프가 굴리고 굴리던 바위, 어찌하여
4월의 부활은 내 영혼의 부활을
흔들어 깨울 줄을 모르는가
마침내는 나만이 홀로이 책임져야 할
나의 원죄(原罪)를 묵상하는 밤,
나의 어둠은 비로소 시작된다
피투성이 부활은 어렴풋 기지개 켠다.

《4》9월

홍수희

소국(小菊)을 안고 집으로 오네
꽃잎마다 숨어 있는 가을,
샛노란 그 입술에 얼굴 묻으면
담쟁이덩굴 옆에 서 계시던 하느님
그분의 옷자락도 보일 듯 하네

《5》11월의 시

홍수희

텅텅 비워
윙윙 우리라
다시는
빈 하늘만
가슴에
채워 넣으리

《6》가을 고해

홍수희

이 가을 나는 몹시 아프다
사랑도 되지 않고 미움도 되지 않는다

그대를 온전히 사랑한 적이 없고
그대를 제대로 미워한 적도 없다

늘 어정쩡한 거리에 서서
곁눈질만 하였다
나의 삶,

차라리 이 가을
그대를 절실히 미워하다가
차라리 이 가을
그대의 발을
내 눈물로 씻기고 싶다

저 지는 낙엽처럼
나도 나에게
이별하여 죽어지고 싶다

《7》가을로 가는 편지

홍수희

완행 열차처럼
가을은 천천히 지날 일이다

엄지와 검지사이의 여유도 없이
지나쳐버린 계절속에는

잃어버린 표정과 잃어버린
순수가 버려져 있다

슬프면 울기 기쁘면 웃기
사람이 그리우면 그리워하기

풀벌레가 앉았던 화단가
돌멩이에도

이 가을에는
멈추어 웃음짓는 간이역이길

틈새가 있어야 정이 흐르고
틈새가 있어야 사랑이 머물 수 있다

《8》겨울 숲 아시나요

홍수희

잎 지고 새 떠나간 겨울 숲에는
외로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남아 윙윙 부는
바람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인기척에 놀라 툭,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삭정이만 사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어 꽃씨가 산답니다
파릇파릇 새순이 산답니다

부끄럽게 웃고 있는
꽃 무리도 숨어살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도 숨어살지요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초조해 하지는 말아요

희망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겨울 숲에는 두근두근
설레는 봄날이 숨어살아요

《9》그네가 있는 풍경

홍수희


흔들거리지 않는 그네는
쓸쓸하다

외롭고 고단한
우리 가는 이 길에
누군가 등 좀 밀어줬다고
허공에서 그대
잠시 즐거웠단 들

너무 탓할 일도
아닌 것이다
너무 나무랄 일도
아닌 것이다

허공에서
뒤척여 보지 않고서야
어찌 낮은 데의 평화를
알 수 있으랴

바람 속에 퍼덕퍼덕
휘둘려 보지 않고서야
어찌 한 길을 가는
잔잔한 행복을
알 수 있으랴

움직이지 않는
그네를 보면 나는 오늘도
뜨거운 손으로 높이
높이 올려주고만 싶다

《10》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

홍수희

슬픔을 뒤집어 보니
거기 기쁨이 있더군요

기쁨을 뒤집어 보니
거기 아픔이 있더군요

다시 아픔을 뒤집어 보니
거기 감사가 있더군요

이렇듯,
삶이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생각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리 보이기도 하지요

희망마저
잔인해 보일 때,

그래도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11》그렇게 2월은 간다

홍수희

외로움을 아는 사람은
2월을 안다

떨쳐버려야 할 그리움을 끝내 붙잡고
미적미적 서성대던 사람은
2월을 안다

어느 날 정작 돌아다보니
자리 없이 떠돌던 기억의 응어리들,
시절을 놓친 미련이었네

필요한 것은 추억의 가지치기,
떠날 것은 스스로 떠나게 하고
오는 것은 조용한 기쁨으로 맞이하여라

계절은
가고 또 오는 것
사랑은 구속이 아니었네

2월은
흐르는 물살 위에 가로 놓여진
조촐한 징검다리였을 뿐

다만 소리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여,
그렇게 2월은 간다

《12》기도

홍수희

이를테면
이렇게 하여 주소서

당신의 꽃밭에 꽃이 피면
내 마음 그 찬란한 꽃잎이 아닌
꽃대궁을 받쳐든 말없는 그늘이게 하소서

당신의 뜨락에 새가 울면
내 마음 소리 높여 지저귀는 노래가 아닌
그 음계(音階)를 받쳐든 잔잔히 술렁이는 가지이게 하소서

어두움이 깊어갈수록 빛깔이 짙어지는 별빛처럼
실눈을 뜰수록 거울을 닮아가는 둥근 보름달처럼

고개를 숙이고야 숙인 만큼 더욱 붉어지는 노을처럼
내가 작아지는 만큼 점점 커져 오르는 그리움처럼

사랑은 비로소 가진 것을 한없이 내어줄수록
더욱더 차 오르는 요술 항아리

사랑은 마침내 고독의 겨울을 사르고서야
눈부시게 도착하는 하느님의 봄빛 연서(戀書)

그러하오니 주여,
이를테면 이렇게 하여 주소서

가장 초라한 손을 내가 먼저 따뜻이 잡게 하시고
가장 누추한 가슴을 내가 먼저 설레며 방문하게 하시어

이 세상 가장 슬픈 귓가에
먼저 가 닿는 나 은은한 종소리가 되게 하시고

이 세상 가장 음습한 골짜기에
먼저 가 닿는 나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13》기도하세요

홍수희

마음이 슬프고 괴로울 때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세요
나보다 더 슬픈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마음의 상처가 짓누를 때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세요
나보다 더 아픈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사는 것이
문득 외로워질 때에
꿈꾸는 일조차 힘겨울 때에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세요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눈물로 지새는 이를 위하여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는 너와 나를 연결해주는
신비로운 끈, 누군가의
온기가 느껴지네요

마음에 한없이 찬비 내릴 때
두 손을 모아 기도하세요
내 영혼 슬픔은 희미해지고
기쁨이 나를 채울 거예요

《14》꽃 편지

홍수희

꽃 피더니 꽃이 집니다
산에도 마을에도 꽃이 집니다
강가에도 철길에도 꽃이 집니다
그리운 내 맘에도 꽃이 집니다

사람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다고
보지 않으면 잊혀지다가
불현듯 또 그렇게 생각나다가
잊어지다가 쓸쓸히 지워지다가
다시 또 잠 못 드는 날 있겠거니
꽃 진 자리에 꽃 피겠거니
보고픈 정 어찌 다 지워지겠는지요

지는 꽃 내 마음에 거두지 않고
오셨던 그대로 놓아둡니다

《15》꽃비

홍수희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그대여
마음에 그 사랑을 들이기 위해
낡고 정든 것은
하나 둘 내치시기를

사랑은 잃어 가는 것이다

보라,
꽃잎도 버릴 때에
눈이 부시다

《16》꽃이 피기도 전에

홍수희

당신이 내 안에서 피고지기를
벌써 몇 번인지 몇만 번인지

나의 첫사랑,
그러나 나는 이제 당신을 위해
봄이 오기도 전에 꽃씨를 심고
꽃이 피기도 전에
그 향기에 취할 수도 있어요

당신이 내게 죽음이라면
또한 당신이 내게는 생명이란 걸
당신이 내게 아픔이라면
또한 당신이 내게는 기쁨이란 걸
당신이 내게 끝없는 미로迷路라면
또한 당신은 반듯한 목적지란 걸

이제 나는 알듯도 해요

당신이 내 안에 피고지기를
이후로도 거듭 반복되겠지만
이제 그것으로 당황하지 않아요

꽃이 피기도 전에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할 수도 있어요

《17》낙엽 한 잎

홍수희

나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가봅니다
낙엽 한 잎 떨어질 때마다
여윈 가지 부르르 전율합니다
때가 되면 버려야 할 무수한 것들
비단 나무에게만 있겠는지요
아직 내 안에 팔랑이며 소란스러운
마음가지 끝 빛 바랜 잎새들이 있습니다
저 오래된 집착과 애증과 연민을 두고
이제는 안녕, 이라고 말해볼까요
물론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18》낙엽이 나에게 건네 준 말

홍수희

어느 날
차창에 낙엽 한 잎
노란 몸짓으로 날아오더니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건네주는 말
생각해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뭐겠니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네
어느 익숙한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녕이라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아니면……
머뭇거리는 나에게
낙엽이 가만히 속삭이는 말
생각해봐,
내가 무엇을 해주고 싶어도
받아 줄 사람이 거기 없을 때
가슴 저미는 일이야
두 손에 가득 선물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는
그 일인 거야
바람만 불어왔다 불어가 버리는
혼자 남은 괴로움이야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주어진 기회를 붙잡으렴

《19》내 마음에 흰 눈이 내릴 때

홍수희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내 마음에 흰 눈이 내립니다

눈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등을 대고 서로의 가슴을 읽다
입술을 앙다물고 돌아서는 쓸쓸한 저녁
흰 눈이 내립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
어찌 늘 기쁨은 아닌 줄은 알면서도
보란 듯이
또 보란 듯이 흰 눈만
서늘한 내 가슴에 하득하득 흩어지며 내립니다

《20》내 마음을 주고싶은 사람

홍수희

부드러운 음성을 가진
당신에게는
애정 가득 담긴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여유로움 간직한
당신에게는
포근함 가득 담은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에게는
끝이라도 아깝지 않을
내 모든 것 다 담은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오직 한 사람
당신에게만
내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21》내 안에 있는 행복

홍수희

새처럼
수줍은 그것은
소매를 붙잡으면
이내 날아가고 맙니다

첫눈처럼
보드라운 그것은
움켜쥐면 사르르 녹고
맙니다

그러나
바위처럼
단단한 그것은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행복,
찾으면 찾아지지 않고
놓아줄 때 비로소
보여집니다

《22》내 잔이 넘치나이다

홍수희

때로는 당신의 사랑이
나를 힘들게 하시었네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당신이 불어주던 휘파람 소리

그 길이 아니면 아니 된다고
나를 인도하시었네

어찌 편한 길은 그대로 두고
비탈진 그 길로 인도하시었네

사랑의 언덕은 높고도 험해
십자가 없이는 오르지 못하리 당신이 두 팔 벌려 서 계신 그곳

그곳에 나 다다를 때까지 임이여, 휘파람을 불어 주소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내가 지금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홍수희

내가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당신의 부재가 서러워서가 아닙니다
만질 수 없는 당신이 야속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침묵이 너무 섬세한 까닭입니다

내가 지금 돌아서서 우는 까닭은
당신의 등이 서러워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말씀이 모질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냉정함이 모다 나를 위한 배려인 까닭입니다

세상이 나를 두고 저만치 멀어 보여도
고독이 함박눈처럼 창틀을 하얗게 뒤덮어도
내 마음이 이렇게 풍요로운 까닭은
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잎 떨어진 스산한 뜨락,
왼 종일 내 영혼 서성이며 설레이느니
내 마음이 이렇게 붉어지는 까닭은
님이여, 당신만이 나를 태울 불꽃인 까닭입니다

내가 지금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당신의 침묵이 너무 섬세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등이 너무 뜨거운 까닭입니다

《24》내일은 비

홍수희

슬픔도
적당할 때 눈물이 난다

태풍의 눈 속인가
너무나 고요한 내 마음이여

그대와 나 사이
이다지도 깊은 심연을 두고

하루는 너무 조용히
왔다가는 내게서 멀어져간다

그리고 내일은 비,

《25》눈꽃

홍수희

나 그렇게 되었으면,

네 마음이 외로울 때에
겨울 창문을 열면
잎 떨어진 가지 위에 피어난
하얀 눈꽃이 되었으면

나 그렇게 되었으면,

네 가는 길 고달프고 힘겨울 때에
내가 앞서 잠시 반짝이다가
구태여 그 자리 주저앉지 않고
햇빛에 사르르 녹아도 좋은

나 그렇게 되었으면,

그대 가다가 넘어질 때에
넘어진 바로 당신의 무릎 앞으로
우연인 듯 내려앉은 눈부신 미소

나 그렇게 되었으면,

당신이 눈물로 봄을 기다릴 적에
나 먼저 겨울 동산에 녹아
하롱하롱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로

......
아, 나 눈꽃이 되었으면

《26》눈빛

홍수희

당신의 눈빛이
내 마음에 꽂히자마자
퍽, 소리가 났습니다
내 안의 것들이 한꺼번에
풀썩 주저앉는
소리였어요
어떻게 알았지요?
당신은 이미
내 마음을
찬찬히 읽고 있었습니다
감추고 싶었는데
다 들켜버리고 말았어요

《27》능소화 꽃잎에 울다

홍수희


한 발짝만
단 한 발짝만 물러나면
내가 보일텐데요
내 슬픔이 보일텐데요
내 분노의 정체도 보일텐데요
내가 내게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이리도 어려워요
돌아가는 세상이야기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이리도 어려워요
한때는 그리도 쉬워 보이던 것
내 웃음소리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밤낮 이글거리는 머릿속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저 헝클어져 치열한 파도의 소용돌이
잠잠해질 것 같은 데도요
빗줄기 속 불면의 밤들은 아랑곳없이
아스팔트는 뜨겁게 침묵하는데
주홍빛 능소화만 흐드러지게 피었어요
그래서 그런데 눈물만 나요

《28》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홍수희

 사랑으로 아파 본
사람은 안다

사랑은
포기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바램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지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그 기대가
저 혼자 자라
내 마음의 순수를
갉아먹기 전에

결점이 많은
그대로의 당신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울고 웃는
그대로의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이 어느 날
기대도 없이 등뒤에
감춰둔 꽃다발처럼

놀라운 선물을
고백하도록 사랑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29》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홍수희 

그대의 한숨이 들릴 만큼의
거리에만 서 있을게요

그대의 눈빛이 보일 만큼의
거리에만 서 있을게요

다시는 아프지 않게
너무 가까이 서 있지 않을게요

다시는 아프지 않게
너무 멀리에 서 있지도 않을게요

언제나 이웃해 있는
비오는 날의 두 그루 은행처럼

온몸이 젖어도 외로웁지 않게요
어깨 한 번 으쓱하며 웃고 말게요

《30》마음의 간격

홍수희

전화 몇 번 하지 않았다고
내가 그대를 잊은 건 아니다
너의 이름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이 그대를
영영 떠난 것은 아닌 것처럼
그리운 그대여 부디,
세상의 수치로
우리들의 사랑을 논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그대와 내 마음의 간격
어느 비 오거나 눈 내리는 날에
홀로 뜨거운 찻잔을 마주 한 날에
그 누구도 아닌 네가 떠오른다면
이미 너는 내 곁에 있는 것
우리의 사랑도 거기 있는 것
이 세상 그 무엇도
너와 나 사이
다정한 마음은 어찌하지 못할 테니

《31》머나먼 동행

홍수희

오늘은 나뭇가지 끝에 바람이 매서워요
그 매서움 끝으로 시퍼렇게 날을 세운 슬픔이
가슴께를 콕콕 쑤시고 지나가요

별보다 멀리 사는 그대여,
그대가 거기서 아프면 내가 여기서 아프고
내가 여기서 흐뭇하면 그대가 거기서 흐뭇해요

카시오페이아자리보다도 페가수스자리보다도
머나먼 곳에 사는 그대여, 아프지 마오

《32》바위섬

홍수희

울고 싶다고
다 울겠는가
반쯤은 눈물을 감추어두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
사는 것이
바다 위의 바위섬처럼
종종 외롭고도
그렇게 지친 일이지만
가끔은
네 어깨와 내 어깨를
가만히 대어보자
둘이다가도 하나가 되는
슬픔은 또한 따스하다
울고 싶다고
혼자 울겠는가
반쯤은 눈물을 감추어두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

《33》벚꽃 지는 날

홍수희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니었구나
지천으로 피어 있던 너의 이름도
안아주고 싶었던 너의 슬픔도
눈꽃 같던 눈꽃 같던 너의 참회도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권태로 다가오느니

하늘은 저 하늘에 있는 게 아니었구나
내 마음에 또 다른 우주(宇宙)가 있어
그 곳에 비 내리고 바람이 불면
그 곳에 천둥 울고 벼락이 치면
그리움에 커 가던 나무 한 그루
산산이 부서지어 숯이 되느니

뜨락에 피던 꽃도 꽃이 아니었구나
눈물도 눈물이 아니었구나

《34》별 바라보기

홍수희

너를 보면 알 것 같다
왜 질퍽이는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가물가물 저기 희망이 보이는 건지
새벽은 왜 침침한 어둠의 끝자락을 붙들고서만
조심조심 피어나는지
희망은 절망의 오래된 친구
너를 잡으려하면 슬픔을 먼저 사귀어야 하네

《35》별이 지기 전에

홍수희


사람 속으로 들어갈수록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낯익은 얼굴들이 오히려
낯선 얼굴일 때가 있습니다

밖으로 나갔던 내 마음이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여

문밖에서 오랫동안
쓸쓸하게 서성거리는 날은

키만 멀쑥이 커버린 가로등도
골목에 부끄럽게 숨어버리고

내가 사는 마을에 어둠이 와도
불 밝혀줄 점등인이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일이
나를 잊는 일보다 더 어려워

풀잎처럼 파르르 흔들거리는 날에
별빛 하나 추억처럼 깜박이는데

벗이여, 저 별이 지기 전에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36》봄은 온다

홍수희


봄은 온다
서러워 마라
겨울은
봄을 위하여 있는 것

잿빛으로 젖어있던
야윈 나뭇가지 사이로
수줍게 피어나는
따순 햇살을 보아

봄은 우리들
마음 안에 있는 것
불러주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야

사랑은 저절로
자라지 않는 것
인내하며 가꾸어야
꽃이 되는 것이야

차디차게 얼어버린
가슴이라면
찾아보아 남몰래
움트며 설레는 봄을

키워보아 그
조그맣고 조그만 싹을

《37》봄을 기다리는 그대에게

홍수희

 그대 마음에
봄이 온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자주
벗어버리고 싶었던

사랑의 무게,

어깨를 짓누르던
네 삶의 무게

인내하는 마음에
봄이여, 오시리니

네 영혼에
눈부신 봄이 온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38》봄이 오신다기에

홍수희

창을 열고
먼발치에서
내려다봅니다

오늘도 당신은
잰걸음으로 바쁘게
오가시더니

문득 멈추어 서선
이쪽 창을 물끄러미
올려다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의 시선이
나에게 머무는
시간이라는 것은

당신이
어느 한적한 일요일,
화분에 꽃씨를 심던
시간보다도
훨씬 짧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은 왜 이리
가슴이 설레일까요

저만치
봄이 오신다기에
내 마음 한없이
너그러워져

밤을 새워 벼린
질투의 날이
부드럽게
익어버렸나 봐요

《39》부치지 못한 편지

홍수희

오늘도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나의 하루
지치고 고달펐거늘
그대 생각에 조금은 행복했노라
보지 않아도 내 마음 거기 있노라
꽃은 지고 다시 피나니
이제 기척 한 번 주시기를
나 여기 있다
한 말씀 하여주시기를
때로는 투정 섞어 적어보지만
끝내 부치지 못하는 편지
내 마음 이미 그 곳에 있어
계절의 오고 감이 그저 섧거늘
행여 연약하다 책망하실 까
쓰고서도 부치지 못하는 편지
행여 가벼웁다 눈 흘기실 까
목메여도 부치지 못하는 편지
내 마음 한 켠엔 수북히 쌓여만 가는
그대가 읽어야 할 편지가 있네

《40》사랑의 상처

홍수희

세상 모든 것이 지난다 해도
지나가지 못하고 남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상처는 헛되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너만은 영원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대 마음을 다한
사랑이었다면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상처는 다시
사랑을 남기고

비록 되돌아오지 않는
관심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다시 어디선가
생명을 틔워 내리니

사랑의 상처는 헛됨이 없어
아름다운 끝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41》산다는 것이

홍수희

맨발바닥에 닿는 싸늘한 감촉,
바닥인 줄 알았는데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의 바닥에
그 바닥의 바닥의 바닥에
맨발바닥 닿았는데도
거기도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의 심연,
그 심연의 바닥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를 찾을 수 없겠다.

바닥의 심연,
그 심연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가 아니겠다.

산다는 것이
내 영혼의 바닥을 향해
삼가며 삼가며 거듭 삼가며
순례하는 길이란 것을

바닥의 바닥에
바닥의 바닥의 바닥에 이르고서야
더듬어 만져지는 것이다.

《42》새해 아침

홍수희

처음은 그대로 눈이 부셔라
어린 한 해가 태어나는 아침에
찬물로 얼굴을 말갛게 씻고
머리는 단정히 빗어
새벽 미사를 드리러 가는 시간
비누 냄새만 천지 가득하구나
거울 앞에 서면 어차피 낡은 후회는 가고
새날 365일만 어리디 어린 눈빛으로
가슴속을 헤집으며 파고드나니
나를 위해 살던 날은 이제 보내주잔다
우리 서로 너를 위해 살 일만 남겨두잔다

《43》새해 아침에

홍수희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주고서 받을 셈은 잊게 하시고
더 주지 못한 아쉬움만
갖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받고 싶은 한 마디는 잊게 하시고
주어야 할 한 마디만 내내
기억하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창가에는 불빛 하나 걸어두게 하시고
문 두드리는 소리 행여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현란한 겉치레의 행적(行蹟)보다는
관심의 작은 몸짓 하나가
부디 기적의 시작임을 알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격식이나 체면에는 덤덤하게 하시고
진실로 서야 할 자리를 분별하는
견고한 지혜를 허락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일상(日常)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오늘이 곧 영원으로 이어진 길 위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소서.

새해에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사랑만이 삶의 이유가 되게 하시고
오직 사랑만이 내게는 하루의
목적이 되게 하소서.........

《44》섬진강 편지

홍수희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섬진강에 와서 울었다
땡볕 아래
꽃길도 지쳐 지쳐
흐느적 휘청일 때에
단숨에 달려와 바라보는
애잔한 섬진강의 잔물결이여
사랑이
어찌 저절로 되겠는가
상처마저 축복의 붕대로
감싸주어야 하리
다시는 추억도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오래 오래 너를 위해
기도하리라
섬진강에 와서
나는 울었다 

《45》송년의 노래

홍수희

 늘
먼저 떠나는 너는
알지 못하리

한 자리에
묵묵히 서서
보내야만 하는 이의
고독한 가슴을

바람에 잉잉대는
전신주처럼
흰 겨울을 온몸에
휘감고 서서

금방이라도
싸락눈이 내릴 것 같은
차가운 하늘일랑
온통 머리에 이고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고 섰는
송년의 밤이여,

시작은 언제나
비장(悲壯)하여라!

《46》슬픔이 지나가네

홍수희

꽃이 피면
지어야 할 때를
꽃이 알듯이

바람이 불면
잦아들 때를
바람이 스스로 알고 있듯이

우리들 사랑도
머무를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알고 있다면

희망이여,
무에 슬픔이고
좌절이고 있겠습니까

있으라 하면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물러나 있으라 하면
물러나 있을 그 자리에

제 자리를
흐뭇이 지키겠으니
조금의 여유인들
부리겠으니

당신은
언제나 내 것,
슬픔은
저만치 지나갑니다  

《47》십자가 아래서

홍수희

고독과 고통을 음미하라!
아주 천천히

그리하여 그곳에서
마침내 단맛이 나게 하라!

그때 비로소,
고독은 기도가 되고
고통은 은총이 되리라!

《48》십자가의 길

홍수희

내가 나를
업고 가는 길입니다
내가 나를
참아주며 걸어가는 길입니다
끊임없이
내가 나를 실망시킬 때에
나에게는 내가
가장 큰 절망이 될 때에
내가 나를 사랑함이
미워하는 것보다 어려울 때에
괜찮다
토닥이며 가는 길입니다
위로하며
화해하며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밖에 서 있지 않고
십자가는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휘청이며 넘어지며
깨닫는 그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내가 나를 만나는 길입니다 

《49》아름다운 선물

홍수희

내 삶에 그대가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자주 만나진 비록 못하여도
못 견디게 외로웁거나
때로 기쁨으로 가슴 벅찰 때
전화를 걸면
언제나 거기 있어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운 사람.

한숨을 지으면
한숨을 짓는 대로
웃음을 웃으면
웃음을 웃는 대로
물어보지 않고도
느끼는 사람
보지 않고서도
나눌 수 있는 사람.

삶이란 그렇게 울고 웃으며
함께 걷는 것이라고
나란히 말할 수 있는
그대는
나에게 소중한 선물...

그대가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50》아름다운 발자국

홍수희

세상
수많은 발자국 속에
흔들리는 발자국 보입니다

때로는 왼쪽으로
때로는 오른쪽으로
때로는 멈추어 서서
방향을 고뇌한 흔적

한참을 선 자리만
지켜보다가 다시 시작한
발자국도 보입니다
삶의 무게에 휘둘려
넘어졌다 일어선
발자국도 보입니다

세상
수많은 발자국 속에
유독 흔들리는
발자국 정겹습니다

세상
직선 위의 발자국 속에
가끔은 뒤돌아본
발자국 아름답습니다

흔들리며 뒤척이며
걸어가는 길, 사랑으로
가는 바로 그 길입니다

《51》아름다운 선택

홍수희

 숨 고르는 길목마다

오던 길도
갈래지어 펼쳐집니다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달콤한 것보다는
오히려 메마른 것을

넘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부족한 것을

평탄한 길보다는
굽고 후미진 길을

아름다운 이여,

이것이 당신께 닿는
외길입니까

《52》아무도 가지 않은 길

홍수희

생각해보니 벗이여,
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너는 지금 걷고 있구나
그대와 같은 생각으로 마음으로
그대와 같은 아픔으로 갈증으로
하물며 그대와 똑같은 형편으로
인생을 걷는 이 결코 없으니
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너는 걷고 있는 게 틀림없구나
그러니 조금은 자부심을 느껴도
괜찮지 않겠나 벗이여,
삶의 무게에 휘청대다가
잠시 주저앉아 먼 산을 바라본대도
눈물짓지 말자 벗이여,
자수刺繡의 어설픈 뒷면을 보고
미리 절망하지는 말자 벗이여,
지금 우리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아무도 대신 그려줄 수 없는
고유한 화폭을 수놓는 중이니

《53》야생화

홍수희

너에겐 그늘이 있었네
눈가 푸르스름한
이미 예고된 그늘이 네게 있었네

깊고 후미진 산 속,
가시 많은 덤불 비집고 나와
함초롬히 이슬 머금고 피어 있는 너

죽음이 없이는 부활 없느니,
온전히 다시 죽기 위하여
낮게 아주 낮게 엎드려 피어 있는 너

단 하루를 산다 하여도
온몸으로 다시 살기 꿈꾸는 너는
은총의 길이 만큼 그늘을 드리운 너는

이 세상 가장 어두운 산 속,
비바람 온통 가슴에 안아
고통을 관통한 화사한 부활이 되고픈 너는

너에겐 그늘이 있었네
눈가 푸르스름한
별빛 흩어지는 그늘이 네게 있었네

《54》오늘은 비

홍수희

하루종일 어두웠다
한낮에도 나는 내 안에 불을 켜지 못했다
어두운 내가 어두운 내 안에서 나와
어두운 하루종일 어둠을 만지작거렸을 뿐이다
역시 어두운 저녁 어두운 여덟 시
여전히 어두운 TV화면이 입을 열었다
마침내 하늘이 단비를 뿌렸습니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졌던 서울에서는
궂은 비가 이어진 가운데
초속 20m가 넘는 돌풍이 불기도 했습니다
특히 강풍특보가 내려진 해안지방에는
최고 초속 30미터가 넘는 돌풍도 불었습니다
비바람에 암흑현상까지 나타나
차량들은 한낮에도 전조등을 밝혀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하늘이 단비를 뿌렸습니다
그제야 환하니 내 안에 불이 들어온다
가뭄으로 쩌억쩍 갈라지던 내 마음의 풍경에도
단비 내리려 하루 종일 어두웠구나
오늘 뒤집힌 우산 아깝지 않구나
세상 버릴 게 아무 것도 없구나
그랬구나 참말 그랬구나

《55》외로움이 말을 건넬 때

홍수희

외로움은
외로움을 알아본다
저를 닮은
얼굴을 알아본다
너의 외로움이
내 안의 외로움에게
끈질기게 말을
건네는 이유가 그것
어깨 위에 바람을 싣고
쓸쓸히 돌아서던
뒷모습이여,
내 안의 외로움이
너의 외로움을 불러 세워
따뜻이 손 잡아주고 싶지만
세상에는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 할
만남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도
있는 것이다
내 안의 외로움이
저를 닮은 외로움에게
눈 시리게 손을 흔든다

《56》우리라는 말은

홍수희

얼마나 다정한가
´우리´라는 말
그보다 따뜻한 말
나는 알지 못하네

눈이 맑은 그대
얼굴 바라볼 때에
외로웁지 않겠네
우리 함께 한다면

너와 내가 혼자
서 있을 때엔
빙산처럼 차가웠던
잿빛 슬픔도

´우리´라는 말 앞에선
봄눈 속의 아지랑이
없던 용기 불쑥
솟아오르네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라는 말
그보다 사랑스런
몸짓 알지 못하네

아무렴 험한 세상
거센 비바람에도
두려울 것 없겠네
우리 함께 간다면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 그 말이
너와 내가 노래하며
다정히 손잡을 때에

눈부시게 웃으며
피어난다네
불꽃보다 뜨거워라
´우리´라는 말

《57》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홍수희 

잊어줄 것은 잊어주자
나무도 한 해를 고개 숙여 감사하며
품었던 아픔 품었던 오해
훌훌 벗어 가볍게 서지 않느냐

한 발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보이지 않느냐
상처 입기 쉬운 우리 마음도
저마다 제 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싸리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비워버린 가슴으로 다시 만나자
바람 씽씽 부는 겨울벌판에 서서
뜨거운 손을 붙잡고 울자

우리 다시 그리운 이름이 되자
한때는 나를 슬프게 했던 사람이여
사람이여,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58》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홍수희

 잊어줄 것은 잊어주자
나무도 한 해를 고개 숙여 감사하며
품었던 아픔 품었던 오해
훌훌 벗어 가볍게 서지 않느냐

한 발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보이지 않느냐
상처 입기 쉬운 우리 마음도
저마다 제 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싸리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비워버린 가슴으로 다시 만나자
바람 씽씽 부는 겨울벌판에 서서
뜨거운 손을 붙잡고 울자

우리 다시 그리운 이름이 되자
한때는 나를 슬프게 했던 사람이여
사람이여,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59》이월 편지

홍수희

어딘가 허술하고
어딘가 늘 모자랍니다

하루나 이틀
꽉 채워지지 않은
날수만 가지고도
이월은 초라합니다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일년 중에
가장 초라한 2월을
당신이 밟고 오신다니요

어쩌면 나를 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날들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더라도

사랑의 싹이 돋아날
여분의 땅을 내 가슴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60》인연

홍수희

아무렴
잘 있겠지 하면서도
자꾸 맘이 켕긴다
한마디
소식 없이 지내면서도
행여 외롭지는 않을까
시선은 자꾸
너의 마음 밭을 서성거린다
물론 네게는
나보다 가까운 사람
곁에 있지만
이래도 저래도
생각 키우는 건
네가 너무 여린 가슴을
지녔기 때문,
부디 행복하여라
언제나
봄날처럼 환히 웃기를
나는 이 쪽
반대편 별 끝에 서서
너를 위해
불 하나 태운다

《61》입추(立秋)

홍수희

너는 또 어드메 깊은 골짝에서
보이지 않는 손 그토록 숨기었다가
자꾸만 흔들며 다가오는가

온 여름을 거부 하여도
그저 느즈막한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가슴 속
차거운 눈물로 찾아오는 이

지나오면 회한은 그 어디에서나
비릿한 흰 앙금으로
슬프게만 맺혀져 오는 것인가

어찌하란 말이냐,
내 좁은 혼(魂) 속엔 다 담지 못할
이다지도 서글픈 그리움이여

움켜쥐기엔 너무 멀어진 기억
나 그대 이토록 아프게 놓아
보다 큰 자유를 불러 보거늘

거부할 길 없는 너는,
어이하여 또 다시 희디흰 두 손
나를 붙잡아 흔들고야
흔들고야 마는 것이냐

《62》장마

홍수희

내리는 저 비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고통 없이는 당신을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압니다
버틸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가슴에 궂은 비 내리는 날은
함께 그 궂은 비에 젖어주는 일,
내 마음에 흐르는 냇물 하나 두었더니
궂은 비 그리로 흘러 바다로 갑니다

《63》진달래

홍수희

그땐 참,
내 마음이 저리
붉었습니다

당신이 지나치며
투욱,
떨어뜨린 불씨 하나가

내 영혼 가파른
벼랑 위로
잘도 활활 타들어
올랐습니다

타들어
오신 길 마저 닿을 듯

아슬한 그리움
문득 철렁이는 아픔
되어도

다시는 그 후
지나치며

투욱,
불씨 하나 떨어뜨려 주지
않으셔도

그땐 참,
이별도 사랑이라 저리
붉었습니다

그땐 참,
눈물도 꽃잎이라 저리
붉었습니다

《64》친구

홍수희

오랜 침묵을 건너고도
항상 그 자리에 있네

친구라는 이름 앞엔
도무지 세월이 흐르지 않아
세월이 부끄러워
제 얼굴을 붉히고 숨어 버리지

나이를 먹고도
제 나이 먹은 줄을 모른다네

항상 조잘댈 준비가 되어 있지
체면도 위선도 필요가 없어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웃을 수 있지
애정이 있으되 묶어 놓을 이유가 없네
사랑하되 질투할 이유도 없네

다만 바라거니
어디에서건 너의 삶에 충실하기를
마음 허전할 때에
벗이 있음을 기억하기를
신은 우리에게 고귀한 선물을 주셨네
우정의 나뭇가지에 깃든
날갯짓 아름다운 새를 주셨네

《65》코스모스가 있는 풍경

홍수희

길이 너를 위하여 있는 것인지
네가 길을 위하여 있는 것인지

하릴없이 기다리다
후여후여 부질없는 허수아비 춤이나
배워 버린 너,

칠 벗겨진 붉은 자전거 하나
휘영청 휘어진 네 허리께에서
곤한 휴식을 취하는 시간

아무도 너의 눈짓을 기억하는 이 없고
버스 정류장 땅거미 쓸쓸히 밀려오는데

부드러운 달빛
마침내 네 창백한 꽃잎에
와서 묻으면,

금세 너는 눈물이 되어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 같은

《66》하고 싶은 말

홍수희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산다
너에게 짧은 안부 묻고 싶어
전화했더니
지금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짧은 안부 묻고 싶은
너에게서 전화 받은 날
나도 지금은 바쁘다고 했다
지나고 보면
왜 그리 바쁜 날이 많았는지
정작 나의 마음이 보이지 않도록
왼손에게는 늘
오른손이 바쁘다고 했다
오른손에게는 늘
왼손이 바쁘다고만 했다
정작 나의 마음이 보이지 않거나
너의 마음이 보이지 않기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산다
스스로 그렇게 바쁘다, 바쁘다,
되도록 이면
마음이 보이지 않기를

《67》행복한 결핍

홍수희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 하나 내게 있으니
때로는 가슴 아린
그리움이 따습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주고 싶은 마음 다 못 주었으니
아직도 내게는
촛불 켜는 밤들이 남아있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올해도 꽃을 피우지 못한
난초가 곁에 있으니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내 안에 찾지 못한 길이 있으니
인생은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기 때문
모자라면 모자란 만큼
내 안에 무엇이 또 자라난다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68》호수

홍수희

먼 길이었네
네게 가는 길
너를 찾아
길을 나설 때마다

늘 낯선 그 길이어서
가는 길
고달프고 외로웠지만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리움도 내게는
병인 까닭에

열 펄펄 끓는 이마로
너를 찾았네
찾으면
네가 거기 있었네

내 눈 속을
네가 들여다보네
네 눈 속을
내가 들여다보네

거기에서
죽지 않는 사랑을 보네
먼 길이었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69》희망과 절망사이

홍수희

살다보면 그런 날 있지 않겠나

다시는 희망이라는 달콤한 입발림에
속고 싶지 않은 날
제딴에는 철저히 속았다 싶어
절망이여 너와 벗하여
휘청이고 싶은 날
찌그러진 깡통처럼 온전히 으깨지고
망가지고 싶은 날
그런 때 뒤를 돌아보게나
희망조차 나에게는 절망이었다는
야릇한 그거,
희망이라 이름 붙인 그것이 바로 안으로는
절망이었다는 아! 아!
아릿한 그거,
이제 이름을 바꿔보게나
나에게는 절망이 이제 희망이라네
희망이 바로 다정한 절망이라네

《70》희망하는 기쁨

홍수희

침묵하는
겨울 산에
새 해가 떠오르는 건

차디찬
바다 위에
새 해가 떠오르는 건

하필이면
더 이상은 꽃이 피지 않을 때
흰 눈 나풀거리는 동토凍土에

이글이글
새 해가 떠오르는 건

가장 어두운 좌절 깊숙이
희망을 심으라는 것

지금 선 그 자리에서
숨어있는 평화를 찾으라는 것

희망하는 기쁨,
새해 첫날이 주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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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님 시모음 22편

1.너와 나는

조병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해야 한다

떼어버린 카렌다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 이였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아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2.후조

조병화

후조기에 애착일랑 금물이었고
그러기에 감상의 속성을 벌써 잊었에라
가장 태양을 사랑하고 원망함이 후조였거늘

후조는 유달리 어려서부터
날개와 눈알을 사랑하길 알았에라

높이 날음이 자랑이 아니에라
멀리 날음이 소망이 아니에라
날아야 할 날에 날아야 함이에라

달도 별도 온갖 꽃송이도
나를 위함이 아니에라

날이 오면 날아야 할 후조이기에
마음의 구속일랑 금물이었고
고독을 날려버린 기류에 살라 함이 에라

3.이렇게 될 줄 알면서

조병화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이 깔린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겉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했습니다

인생이 겉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이렇게 될 줄 알면서

4.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5.벗

조병화


벗은 존재의 숙소이다
그 등불이다
그 휴식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먼 내일에의 여행
그 저린 뜨거운 눈물이다
그 손짓이다
오늘 이 아타미 해변
태양의 화석처럼
우리들 모여
어제를 이야기하며 오늘을 나눈다
그리고, 또
내일 뜬다

6.사랑 혹은 그리움

조병화

너와 나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로 좁힌 거리에 있어도
그 수천억 배 되는 거리 밖에
떨어져 있는 생각

그리하여 그 떨어져 있는 거리 밖에서
사랑, 혹은 그리워하는 정을 타고난 죄로
나날을, 스스로의 우리 안에서, 허공에
생명을 한 잎, 한 잎 날리고 있는 거다

가까울수록 짙은
외로운 안개
무욕한 고독

아, 너와 나의 거리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의 거리이지만
그 수천억 배의 거리 밖에 떨어져 있구나.
 
7.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을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데 있고
흘러가는 한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 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 한다

8.사랑의 계절

조병화

해마다 꽃피는 계절이면
산에 들에 하늘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와 같이 집을 짓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어라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 아물아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매달려

한동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구름 끝에
그 누구와 같이 둥지를 치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둥, 둥, 떠가고 싶은 마음

아, 해마다 꽃돋는 나날이면
내 마음에 돋는 너의 봉오리.

9.황홀한 모순

조병화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훗날 슬픔을 주는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 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리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10.의자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디 메쯤에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디 메쯤에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11.고독하다는 것은

조병화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12.기다림은 아련히

조병화

이제,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인생의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다림은 먼 소식처럼 아련해지며

맑게 보다 맑게
가볍게 보다 가볍게
엷게 보다 엷게
부담 없이 보다 부담 없이
스쳐 가는 바람처럼 가물가물하여라

긴 생애가 기다리는 세월
기다리면서 기다리던 것을 보내며
기다리던 것을 보내면 다시 기다리며
다시 기다리던 것을 다시 보내면
다시 또다시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어라, 하면서
이 인생의 겨울 저녁 노을
노을이 차가워라

기다릴 것도 없이 기다려지는 거
기다려져도 아련한 이 기다림
노을진 겨울이거늘

아, 사랑아

인생이 이러한 것이어라.
기다림이 이러한 것이어라

13.나 돌아간 흔적

조병화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아시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 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나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아 세상 수 만리 나 찾아 왔습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 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러
나 찾아 왔습니다

14.내 마음에 사는 너

조병화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리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15.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른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그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덧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16.사랑

조병화

기다린다는 건
차라리 죽음보다 더 참혹한 거

매일 매시 매초, 내 마음은
너의 문턱까지 갔다간
항상 쓸쓸히 되돌아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이 기다리는 고통은
아직 네가 있기 때문이다

비굴을 넘어서

17.사랑의 노숙

조병화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쁜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생존의 기억이다

18.산책

조병화

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
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
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누워 있고 싶은 남국의 꽃밭
마냥 세워 푸르기만한 꽃밭
내 마음은 솔개미처럼 양명산 중턱
따스한 하늘에 걸려 날개질 치며
만나다 헤어질 그 사람들이 또 그리워들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영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 앉아 있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19.소라

조병화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20.자유

조병화

공중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공중을 날며 스스로의 모이를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그렇게 공중을 높이 날면서도
지상에 보일까 말까 숨어 있는 모이까지
찾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아, 그렇게
스스로의 모이를 찾아다니면서
먹어서 되는 모이와
먹어서는 안 되는 모이를 알아차리는
민감한 지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지상을 날아다니면서
내릴 자리와 내려서는 안 될 자리,
머물 곳과 머물러서는 안 될 곳,
있을 때와 있어서는 안 될 때를
가려서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가볍게 먹는 새만이
높이 멀리 자유를 날으리.

21.초상

조병화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22.하나의 꿈인 듯이

조병화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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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 모음 35편

1.기도

신달자

아마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잘 됐으면,
일이 잘 됐으면, 자녀들이 잘 됐으면,
내 앞으로의 일들이 잘 됐으면...
좋아 졌으면,
안 좋아졌던 모든 것이 다 좋아 졌으면,
내 신앙이 좋아졌으면, 우리 식구들의 믿음이 좋아졌으면,
우리 교회가 날마다 부흥함으로 좋아졌으면....
육신은 건강했으면,
아픈 몸이 건강했으면, 건강한 몸은 더 건강했으면,
심령에는 은혜가 넘쳤으면,
그리하여 감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는 것이 신나고 즐겁고 행복했으면..
한 마디로 `복 있는 자`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오늘 읽었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복 있는 자`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3절에 있는 말씀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헛되지 않고 하는 것에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열심히 일했더니 수고의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렸더니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했더니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또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은혜가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물질이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하는 일이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건강이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즉 우리의 영, 육간이 날마다 강건함을 입는 자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날마다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날마다 승리하며 이기는 자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주고 꾸어주고도 남는 물질의 복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용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멀리는 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하고 몰려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복 있는 자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공중전화를 보면 동전을 찾는다

신달자

공중전화를 보면
동전을 찾는다

그냥 무심히
그 앞을 지나갈 수가 없다.

해가 진다
어두워 오는 마음에
불을 켠 듯한 이름 하나 없을까

사각의 공중전화 박스 속에서
수첩을 뒤적이지만
가을 억새가 나부끼는
빈 들판에 나는 서 있고
이런 마음을 들켜도 좋을
편안한 이름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공중전화를 보면
그래도 동전을 찾는다.

3.꽃

신달자 

네 그림자를 밟는
거리쯤에서
오래 너를 바라보고 싶다!

팔을 들어
네 속닢께 손이 닿는
그 거리쯤에서
오래 오래 서 있으면

거리도 없이
너는 내 마음에 와 닿아
아직 터지지 않는 꽃망울하나
무량하게 피어올라

나는 네 앞에서
발이 붙었다.

4.너의 이름을 부르면

신달자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에
울음을 참아 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부르면
이름을 부를수록
너는 멀리 있고
내 울음은 깊어만 간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5.네가 눈뜨는 새벽에

신달자

네가 눈뜨는 새벽
숲은 밤새 품었던 새를 날려
내 이마에
빛을 물어다 놓는다
우리 꿈을 지키던
뜰에 나무들 바람과 속삭여
내 귀에 맑은 종소리 울리니
네가 눈뜨는 시각을 내가 안다
그리고 나에게 아침이 오지
어디서 우리가 잠들더라도
너는 내 꿈의 중심에
거리도 없이 다가와서
눈뜨는 새벽의 눈물겨움
다 어루만지니
모두 태양이 뜨기 전의 일이다

네가 잠들면
나의 천국은 꿈꾸는 풀로
드러눕고
푸른 초원에 내리는
어둠의 고른 숨결로
먼데 짐승도 고요히 발걸음 죽이니
네가 잠드는 시각을 내가 안다
그리고 나에게 밤이 오지
어디서 우리가 잠들더라도
너는 내 하루의 끝에 와
심지를 내리고
내 꿈의 빗장을 먼저 열고 들어서니
나의 잠은
또 하나의 시작
모두 자정이 넘는 그 시각의 일이다.

6.섬

신달자

어둠이 내리면서
나의 섬은 밝아 왔다

어둠이 내리면서 나의 꿈은
별빛으로 내리고
하루의 심지를 끈 자리에
깨어나는 섬
가장 진실된 나무 하나 자라고 있는
나의 섬에 나는 돌아와 있었다.

돌아와 있는 이 하나의 사실
눈이 찔리는 저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바라보는 신세계
나의 두 발은 초원 위를 걷고 있었다

꿈의 마른 잎을 따내면
안식의 꽃 한 송이 피어나고
순한 불빛이 영원처럼
섬을 둘러 왔다

돌아와 있는 이 하나의 현실
가슴 깊이 키운 새 한 마리
창공을 난다
몸 하나로
무한 공간을 받쳐 든
나의 섬

서서히 어둠이 가고
어둠 따라 섬은 떠나고
하늘로 이어진 수천의 층계도 내려앉는다
섬이 지워지고
어제와 같이 아침이 오고 있었다.

7.여자의 사막

신달자

주저앉지 마라 주저앉지 마라
저기 저 사막끝
푸른 목소리가 있으리니
왼손이 오른손에게
오른손이 왼손에게
타이르고 다시 타이르는
마지막 한순간의 절대의지

발가락이 타들어가는
죽음의 전선을 건너
오직 닿아야 할 곳은
그대 두손이 잡히는 곳

떠나지 마라 떠나지 마라
내 몸의 절판이 모랫벌에 묻힌들
그대 앞에 당도하는
이 생명은 꺼지지 않아.

8.미망의 노래

신달자

우리는 무엇을 나누었는가
시간을 붙들고 얼굴을 마주하던
몇 년의 세월에도
꼭 같은 거리쯤에 서 있는
우리들 사이로
눈보라가 날린다
시대의 찬비 뿌리고 간다.

내 마흔의 혁명은
먼 바다 고도에서 울고 있고
나의 절망은 암초에 걸려
다시 허리가 꺾이니
결코 좁혀질수 없는
먼먼 거리에
떫은 바람만 머뭇거리고
이름도 없는 별 두 개가
제각기 제 빛을 거두어 들인다

그대여
사람과 사람이
어디까지 가까울 수 있느냐
친할 수 있다고 하더냐
어제도 마지막 골목에서 돌아서고
오늘은 그 좁은 골목마저 간 곳이 없구나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길 우리의 장소는 어디에 있을까
노을이 지는 거리에 서서
불 켜지는 집들을 바라볼 때
어둠은 차라리 우리들 마음에
내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황무지
무명 찢어지는
비명만 외치던 곳에
온화한 미소로 들어앉은 그대여

오늘은 신사동 하늘에
낮게 먹구름이 덮히고
다락방에 숨어 들어가
젖은 마음을 구름에 부치니

그대여 두어 방울 떨어지는 어깨의 비
그것은 비가 아니다
그대 옷 속을 파고드는 비
그것은 비가 아니다

호올로 내가 키우는
눈물의 눈물
심장이 뛰는 살아 있는 핏덩이

진실로 그대에게 전해야 할
미망의 잠꼬대를 들어주어라.

9.나뭇잎 하나

신달자


막 떨어진 나뭇잎 하나
밟을 수 없다
그것에도 온기 남았다면
그 스러져 가는 미량의 따스함 앞에
이마 땅에 대고 이 목숨 굽히오니
내 아버지 호올로 가시는
낯설고 무서운 저승길
내 손닿지 않는 먼 길
비오니
그 따스함 한가닥 빛이라도
될 수 있을까 몰라
울 아버지
동행길의 미등이 될 수 있을까 몰라

막 떨어진 나뭇잎 하나

10.희망

신달자

초등학교 때 내 희망은
교회첨탑의 높이
새로 난 시멘트 다리의 폭이었다.

그렇게 높게 그렇게 넓게…

서울 바람을 먹고
대학 시절 방학에 내려가 본
내 희망은
주머니에 넣어도 모자랄
그 높이 그 넓이였다.

지금은
다시 그 교회첨탑은 높기만 하고
다리의 폭은 넓기만 한데
거품 같은 세월은 나쁘지만 않아
탐(貪)을 버리고 진(眞)을 찾는데
손가락쯤 닳아도 아프지 않은… 

11.1월

신달자

때는 새벽
1월의 시간이여 걸어 오라
문 밖에 놓인 냉수 한 그릇에
발 담그고 들어오면
포옥 삶아 깨끗한
새 수건으로
네 발 씻어 주련다
자세는 무릎을 꿇고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도
환히 미소 지어리니
나의 두 손은 잠시
가슴에 묻은 채 쉬리라. 

12.4월의 꽃

신달자

홀로 피는 꽃은 그저 꽃이지만
와르르 몰려
숨 넘어가듯
엉겨 피어 쌓는 저 사건 뭉치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꽃 철쭉들
저 집합의 무리는
그저 꽃이 아니다
우루루 몰려 몰려
뜻 맞추어 무슨 결의라도 하듯이
그래 좋다 한마음으로 왁자히
필 때까지 피어보는
서럽고 억울한 4월의 혼령들
잠시 이승에 불러 모아
한번은 화끈하게
환생의 잔치를 베풀게 하는
신이 벌이는 4월의 이벤트

13.개나리꽃 핀다

신달자


바람 부는 3월
진회색 개나리 가지들 속에서
노오란 머리 비집고 나오는
신생아들
순금의 애기부처들이
지난해 못다 준 말씀들
세상에 와르르 쏟아내고 계시다
온 몸으로 순금의 등을 켜고
거리에 순금의 자비를 내리신다
화가 잔뜩 난 사람들 여기를 봐라
하늘의 선물로 내린 빛의 아기들
세상을 순화 시키려고
거리마다 신생아실을 짓는다
절하라
거기가 어디든 모두 법당 안이다
아기부처들을 태운 황금마차가
세상의 거리를 달려간다
3월 설법으로
개나리꽃 핀다

14.그리움

신달자

찾아낼 수 없구나
문닫힌 방안에
정히 빗은 내 머리를
헝클어 놓는 이는

뼈속 깊이깊이 잠든 바람도
이밤 깨어나
마른 가지를 흔들어 댄다

우주를 돌다돌다
내 살갗 밑에서 이는 바람
오늘밤 저 폭풍은
누구의 미친 그리움인가

아 누구인가
꽁꽁 묶어 감추었던
열길 그 속마음까지 열게하는 이는.

15.너의 연인이 되기 위해

신달자

네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너의 연인이 되기 위해
오늘 나는 꽃 이름 하나를 더 왼다
달빛 잠기는 강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구를 욀때
내 눈은 더 깊어지고 그 만큼 세상을
더 안아들이면
너는 성큼 내 앞에 다가서게 될까

네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너의 연인이 되기 위해
오늘 나는 별 이름 하나를 더 왼다
바람부는 숲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내가 마음으로 노래 부르면
내 발 앞에 꿈꾸던 낙원이 열리고
그 만큼 평화로운 세상 안아들이면
너는 성큼 내 앞에 다가서게 될까

16.늙음에 대하여

신달자

그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열손가락 활활 타는 불꽃 때문에
임종에 가까운 그를 기다렸고
내 나이 농익은 삼십대에는
생살을 좍 찢는 고통 때문에
나는 마술처럼 하얗게 늙고 싶었다

욕망의 잔고는 모두 반납하라
하늘의 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지면
네 네 엎드리며
있는 피는 모조리 짜 주고 싶었다

피의 속성은 뜨거운 것인지
그 캄캄한 세월 속에도
실수로 흘린 내 피는 놀랍도록 붉었었다

나의 정열을 소각하라 전소하라
말끔히 잿가루도 씻어내려라
미루지 마라

나의 항의 나의 절규는
전달이 늦었다
20년 내내 전갈을 보냈으나
이제 겨우 떠났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이젠 마음을 바꾸려는
그 즈음에∼
 
17.늦은 밤에

신달자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
울음을 참아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풀이 죽어
마음으로
너의 웃음을 불러들여
길을 밝히지만
너는 너무 멀리 있구나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18.뒷산

신달자

외로울 적에
마음 답답할 적에
뒷산에 올라가 마음을 벗는다
나무마다 하나씩 마음을 걸어 두고
노을을 받으며 드러눕는 그림자
돌아갈 것이 없는 빈 몸이다.
뒷산은 뒷산은 내 몸이다.
무겁게 끌어 온 신발의 진흙덩이
서리 감겨 살을 에는 하루의 바람
모두 모두 부려놓는
울먹이는 내 몸이다.

19.등 푸른 여자

신달자

바다를 건너왔지

바다에서 바다로 청남빛 갈매속살에 짓이겨지면서
그 푸른 광야를 헤엄쳐 왔지
허연 이빨 앙다문 파도가 아주 내 등에서 살고 있었어
성깔 사나운 바다였다
내 이빨 손톱 발톱을 다 바다에 풀어 주었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단단한 것을 버리고
바다와 몸 섞지 않으면 안 된다
유순하게 물을 따르기만 했는데 팔뚝 굵어진 여자
망망대해의 질긴 심줄이 등으로 시퍼렇게 몰렸다
드디어
암벽화처럼 푸른 지도가 내 등 위에 그려지고 말았어
배 등에 세상의 바다가 다 올려져 있더군
몇 만 겹줄을 벗겨내도 꼼짝 않는 바다
바다를 건너와서도 내려지지 않았다
시퍼렇게 시퍼렇게 바다를 걷어내어
지상의 돛으로나 우뚝 세우고 싶은
내 몸에 파고 든 저 진초록 문신.

20.미로

신달자

언제나
시작에서
길을 잃는다.

일보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방황하며 더듬거리며
내 마음 같은 곳을 찾아서
걸어간다.
내 마음 같은
갈래갈래 엇갈린 길

길 머리에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으려 한다.

한올의 실도 쓰일모 없는
퇴색한 천연색 실오리를
나는 정결히 고르고 섰다.

동행도 없는
밤의 숲
머리카락 곤두서는
아득한 무섬증

가도가도
그 자리
엉거주춤 서성이고 있네.

21.미모사

신달자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도
후 하고 입김만 불어도
두려운 명령처럼 잎을 접는 미모사
열세 살 적 민감한 반응을 네게서 본다
햇살이 닿아도 어둠이 닿아도
주르르 피가 아래로 몰려
흔들리지 않으려는 자기 보호에
그는 잘 길들여져
상처받지 않으려는 운명적 순응이
열세 살 순수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늘
너의 순종은 굴종으로 보인다
작은 외압에도 몸 사리며
돌돌돌 몸을 접어 엎드리는
너의 연약함에 분통이 터진다
칼이 닿아도 당당히 잎을 펴는
뎅겅 목이 달아나도 좌악 가슴을 펴는
시대적 고집이 너는 아쉽다

쯧쯧 혀를 차다가 그렇지 그래
누군가를 닮아서 더 화가 저미는
멍청하게만 보이는
딱한 미모사

22.백치애인

신달자

나에게는 백치애인이 있다
그 바보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별볼일 없이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다방에서 다방 문이 열릴때마다
불길같은 애수의 눈물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또는 시장 속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수 있으리라는 착각 속에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는
아무것도 볼수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며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다
바보애인아.

23.봄

신달자

선물을 싼 줄은
절대로 가위로
싹둑 자르지 마라

고를 찾아
서서히 손끝을 떨며
풀어내야지

온몸이 끌려가는
집중력으로
그 가슴을 열어가면
따뜻한 줄 하나
언 땅 밑에서
조용조용 끌려 나오려니
우주의 하체가 손끝에
움찔 닿으리

곧 선물의 정체가
보이리라.

24.봄의 금기사항

신달자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서로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기는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25.빨래

신달자

가내(家內)
붙일 곳 없는
마음.

흔들리는 물속에
옷을 담그다.

비누를 풀면
안개 자욱한 역두(驛頭)에서
손이 시린 여자(女子)
옷을 주무르면
쓸쓸한 해로(偕老)에
잠겨있는 문(門)이 보인다.

방망이를 두드린다.
출렁이는 물속에
가셔지는 때

가셔지지 않는 때를
비벼 문지르면
조금씩 열리는 문(門)
물에 헹구면
다시 닫혀진다.

물을 짠다.
꼬우며 물을 빼는
불타는 인내(忍耐)

십자가를 지듯
태양(太陽) 아래 몸을 말리는
옷속으로
돌아오는 여자(女子)

빨래줄에 걸쳐진
그녀의 방황(彷徨)은
증발(蒸發)한다.

26.사람 찾기

신달자

둘러봐도 늘 없다
너무 가까이 내 안에 있음일까
이 우주안에 너 살고 있음
나 분명 알아
내가 알고있는 가장 높은 지식
너 찾다 눈감는 일
가장 아름다운 길

27.사람 찾기

신달자

둘러봐도 늘 없다
너무 가까이 내 안에 있음일까
이 우주안에 너 살고 있음
나 분명 알아
내가 알고있는 가장 높은 지식
너 찾다 눈감는 일
가장 아름다운 길

28.손톱

신달자

한번쯤은 할켜서 앙칼진 여자의
성껄머리 보여 주고 싶었다.

가라 가라 몸 안에서 떠 밀려
드디어 손 끝에 다달아
세상 앞에 드러난
세상을 향한 나의 저항

그러나 체질적으로
저항은 조금만 길어도 불편해
가위를 들여 대 잘라 버린다.
그것도 잘 다듬으면
날카로운 펜촉으로 도약
몸 안에 오래 고인 진한 울화 배어나
이 세상 어느 벽보판에 붉은 글씨 하나
남길 수 있거나

중심없이 흔들리는 세상을 겨냥한
화살촉으로 키워도 좋으련만
시원하게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묵묵히 고요히 목이 잘린다.

콕 찍어 피 한 번 내지 못하고
으윽하고 소리 한 번 치지 못한 채
유순한 침묵으로 굳어 잘리고 마는

그러나 미지의 세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여자의 숨은 반란.

29.슬픔

신달자


슬픔을 가지고 논다.
분칠을 벗긴 슬픔
마알갛게 씻은
슬픔은 예쁘다.

다정한 슬픔
소리없는 슬픔
빈 주머니 속에서도
만지작거리며 가지고 노는 슬픔

양식보다 더 풍성히 쌓여
슬픔은 부족하지 아니하다.

나는 슬픔에게 교태를 부린다.
슬픔은 나를 기르며 지배한다.
늙지도 않고
새로운 힘으로 태어나는 슬픔

눈물도 아닌
철망도 아닌
치욕도 아닌
오늘 슬픔은 예쁘다

슬픔을 갖고 놀며
슬픔을 잊는다.

30.여자의 사막

신달자

주저앉지 마라 주저앉지 마라
저기 저 사막끝
푸른 목소리가 있으리니
왼손이 오른손에게
오른손이 왼손에게
타이르고 다시 타이르는
마지막 한순간의 절대의지

발가락이 타들어가는
죽음의 전선을 건너
오직 닿아야 할 곳은
그대 두손이 잡히는 곳

떠나지 마라 떠나지 마라
내 몸의 절판이 모랫벌에 묻힌들
그대 앞에 당도하는
이 생명은 꺼지지 않아.

31.오래 말하는 사이

신달자

너와 나의 깊은 왕래를 말로 해왔다
오래 말 주고받았지만
아직 목이 마르고
오늘도 우리의 말은 지붕을 지나 바다를 지나
바람 속을 오가며 진행 중이다
종일 말 주고 준 만큼 더 말을 받는다
말과 말이 섞여 비가 되고 바람이 되고
때때로 계절 없이 눈 내리기도 한다
말로 살림을 차린 우리
말로 고층 집을 지은 우리
말로 예닐곱 아이를 낳은 우리
그럼에도 우리 사이 왠지 너무 가볍고 헐렁하다
가슴에선 가끔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말할수록 간절한 것들
뭉쳐 돌이 되어 서로 부딪친다
돌밭 넓다
살은 달아나고 뼈는 우두둑 일어서는
우리들의 고단한 대화
허방을 꽉 메우는 진정한 말의
비밀 번호를 우리는 서로 모른다
진정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은폐의 늪 그 위에
침묵의 연꽃 개화를 볼 수 있을까
단 한 마디만 피게 할 수 있을까
단 한마디의 독을 마시고
나란히 누울 수 있을까

32.커피를 마시며

신달자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커녕
몇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사약(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33.허수아비 1

신달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34.헌화가

신달자

사랑하느냐고
한마디 던져 놓고
천길 벼랑을 기어오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높아지는
아스라한 절벽 그 끝에
너의 응답이 숨어 핀다는
꽃, 그 황홀을 찾아
목숨을 주어야
손이 닿는다는
그 도도한 성역
나 오로지 번뜩이는
소멸의 집중으로
다가가려 하네
육신을 풀어 풀어
한 올 회오리로 솟아올라
하늘도 아찔하여 눈감아버리는
캄캄한 순간
나 시퍼렇게 살아나는
눈맞춤으로
그 꽃을 꺾는다

35.화장

신달자

속이 비었나봐
화장이 진해지는 오늘이다.

결국은 지워 버릴 속기(俗氣)이지만
마음이 비어서 흔들리는
가장 낮은 곳에 누운 바람이

붉은 연지로
꽃이 핀다
아이섀도의 파아란
물새로 날아 오른다

안으로 안으로 삭이고만 살던
여자의 분냄새
여자의 살냄새
대문 밖을 철철 흘러나가
삽시간 온 마을 소문의 홍수로
잠길지라도

진해버려
진해버려
쥐 잡아 먹은 듯
그 입술에 불을 놓아 버려

결국은
색과 향이 있는
대담한 사생활은
그저 이것 하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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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시 모음
 
1.소망의 시1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햇살같이 가벼운 몸으로
맑은 하늘을 거닐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 언제 어디서나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바람의 뒷모습이고 싶다.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그리고 살고 싶다
길 위에 떠 있는 하늘, 어디엔가
그리운 얼굴이 숨어있다.
깃털처럼 가볍게 만나는
신의 모습이
인간의 소리들로 지쳐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앞세우고
알타이산맥을 넘어
약속의 땅에 동굴을 파던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사랑의 땅
눈물의 땅에서, 이제는
바다처럼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
맑은 눈으로 이 땅을 지켜야지

2.소망의 시2

스쳐 지나는 단 한 순간도
나의 것이 아니고
내 만나는 어떤 사람도
나는 알지 못한다.

나뭇잎이 흔들릴 때라야
바람이 분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햇빛조차
나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살아 있음이
어떤 죽음의 일부이듯이
죽음 또한 살아 있음의 연속인가,
어디서 시작된지도
어떻게 끝날지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생명을 끈질기게,
지켜보아 왔다.

누군가,
우리 영혼을 거두어 갈 때
구름 낮은 데 버려질지라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도 안타깝지 않은
오늘의 하늘, 나는
이 하늘을 사랑하며 살아야지.

3.소망의 시3

가끔은 슬픈 얼굴이라도
좋다, 맑은 하늘 아래라면.
어쩌다가 눈물이 굴러 떨어질지라도
가슴의 따스함만으로도
전해질 수 있다, 진실은

늘 웃음을 보이며
웃음보다 더 큰 슬픔이
내 속에 자랄지라도
<웃음>만을 보이며 그대를 대하자.

하늘도 나의 것이 아니고
강물조차 저 혼자 흘러가고 있지만
나는 나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내 삶의 전부를
한 개점으로 나타내야지

지나가는 바람에도 손잡을 수 있는
영혼의 진실을 지니고
이제는 그대를 맞을
준비를 하자.

4.사랑을 그리는 마음으로

푸른 소나무에 혼을 심는다
햇살 따스한 눈밭 위에
집을 지으면
반짝이는 눈빛에 바람이
등밀려 가고 있다

아직도 자라는 키 작은 낭만
사실주의 노래들이 휘감는 화폭에
짚단더미 뒤
숨겨둔 여인 훔쳐보며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서 있다

사랑을 그리는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
붓끝이 머무는 터벅머리 들판에
그림자 등지고 돌아서는 나무
손잡으며 눈밭 위를 걷는다

5.이다 혹은 아니다의 틈에서

'이것은 꽃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와 '아니다' 사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와 '아니다' 사이
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시가 있다
새로운 날개를 뻗어 날아간다 아니다
그 자리에서 아래로 추락한다 사이에
시가 있다

모든 정지한 것은 죽은 것이다, 아니다
말의 혼란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찾기는
너무 힘들다 아니다 존재의 본질은
처음부터 이다와 아니다인지 모른다

6.아침의 기도

빛 속을 걸었다
영혼의 울림만 종소리처럼 번져 나갈
그 날을 맞으면
시간의 축은 사라지리라 그래, 이제 더욱 가까워졌어.
약속의 그날을 기다리면서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었지.
자꾸만 나타나는 징후들이 두려워지는
나는 그들과 함께 흙이 되어 누워있을 나 자신을 본다

자신을 태운 불길로
주변의 생명을 밝히는 나무
새들의 순수와 사랑의 손길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어.

신이여 나는 두렵습니다.
나무에서 막 떨어진 낙엽처럼 길거리를 뒹굴며
어디에선가 한줌 부식토가 되어 풀뿌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신이여,
내 흩어지는 영혼을 잡아주소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기름의 등잔으로
그날을 맞이하는
초라함을 가려 주소서. 먼저 손 내밀지 못했던
자존심과 망설이던 주저함을 진작
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소서

해 떠오르는 아침이
오늘 다르게 느껴지는 건
약속의 그날이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다시 새로운 하늘이 열리어
기쁨과 슬픔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을
나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7.눈물을 아시나요

눈물을 아시나요
차가운 눈빛으로
사치스런 외로움으로
애써 외면하려 했던 리듬들이
나를 흔들고 있어요
기와지붕 미끄러진 바람이
생의 남은 조각들을
머리 속에 어질러 놓으면
느껴지던 그 꽃잎의 붉은 빛 눈물,
입안으로 웅얼거리며 따라하던
사슴 무리의 울음소리
찾아보려 고개를 돌려도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대여
눈물을 아시나요
얼룩이 다시 꽃으로 피는.

밀려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노래 부르기밖에 없어라.

8.두려움

잔가지를 자르고 있다
어린 나무를 키우며, 농부는
세상의 어려움을 견디게 하기 위해
우선의 아픔을 참게 하려는 것일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그대에게 빠져
아름답고 좋은 향기만 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사라졌을 때
내 속의 나무는 두려움에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그대의 미운 표정을 찾는다
그 미운 손가락마저 용납되어지면
화려한 눈빛 속으로 들어간다

잘려진 나뭇가지가 찬바람에
파르를 떨고 있다. 그래도
모질게 놀리는 농부의 손

9.시를 생각하며

꽃잎 떨어지는
시간 속에 귀 열어 세웠다

출발을 위한 시를 생각하다 돌아온 저녁 쉽게
타협하지 못해 떠돌던,
잠들지 못하던 긴 방황의 날들,
산기슭으로 오르던 시간도 '우우' 구두 속으로
밀려들어 떨어지는 꽃잎 몇 개와 땀내의
아궁이에서 지펴진다

무채색으로 그려보던 미래
구름으로 흐르다 내가 세워 둔 꽃밭의
구두에 이르러 붉게 물든다

밤새 새를 그리다 잠든 아이의
설레고 두려웠던 완성의 순간
내일이면 꽃잎은 구두에 축축이 들어찬다

늦출 수 없었던 긴장 느슨하게 끈을
풀어 바람에 널었다 자라나는
발톱 놓였던 자리에 떨어진 꽃잎, 빨강 물감으로
그려지고 나는 출발의 아침 시를 생각하며

잠들기 전 낡은 구두를 정원에 세운다

10.가끔 절망하면 황홀하다

가끔 절망하면 황홀하다
나에게서 떠난 먼 여행,
나무들이 구름을 흔들고
햇살은 반갑지 않은 것들로
그물을 짠다

어둠의 먼저 묻어나는 세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
참새들은 끊임없이 허수아비를 만들고
배신은 어디에서나 이루어진다
반짝이는 눈의 여우가 아닌
본질의 나,
용서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하늘은 밝음을 향해 선 자의 것이라고
분노하며
다시 허물어지는 그 어디,
체념을 배우며 지나는
설명되어지지 않는 황홀을 느낀다

11.눈오는 날엔

눈 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으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 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나>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나>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그도 나를 아쉬워할 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으며 살아야 하고
분노하여야 할 곳에서는
눈물로 흥분하여야겠지만
나조차 용서할 수 없는 알량한
양면성이 더욱 비참해진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조차
허상일 수 있고
눈물로 녹아 없어질 수 있는
진실일 수 있다.

누구나 쓰고 있는 자신의 탈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 갈 즈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뿐이다.
하늘 가득 흩어지는 얼굴.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용기와
웃으며 이길 수 있는 가슴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눈오는 날엔.
헤어짐도 만남처럼 가상이라면
내 속의 그 누구라도 불러보고 싶다.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눈이 그치면,
눈이 그치면 만나보리라.

12.의미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 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 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13.느낌

사랑한다는 건
스스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그 상처가 문드러져 목숨과 바꿀지라도
우리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건
가슴 무너지는 소리 듣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이미 막아버린 자신의 성 허물어지고
진실의 눈물로 말하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대 내부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나의 고집, 즐겨 고개 숙이는 것을
익히는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하염없이 작아질지라도
즐거울 수 있음으로, 우리는 이미
사랑을 느끼고 있다

14.수채화로 그린 절망 1

내가 묻기도 전에 해는 서산에 진다.
시간의 질문들이 줄지어 따라간다.
결국 그대는 흑백사진의 한 장면으로
기억의 한쪽 면을 차지할 것이다.

영혼을 학대하기 위해 육신을
팽개쳐 버린 모습으로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그대의 고통을 읽기에 앞서
가슴아리는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내 짊어져야 할 그 짐들을
그대에게만 맡겨두고, 나는
잘도 잠을 잤구나. 그대 지친 몸으로
잠 이루지 못해 뒤척일 때도
나는 어줍잖은 낱말이나 맞추며,
싸구려 추억에 잠겨 잔을 들었구나.
내 앞에서 말없이 흐르는 그 흔적들과
함께 추락하며
여기쯤에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억겁 윤회로 인해 나 여기 서 있다면
앞 생의 어떤 인연의 끈으로 나는 그대에게
이만큼의 고통을 안겨 주었나.
시간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고
이미 예약된 다음 생을 느끼면서도
구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나를 본다

15.수채화로 그린 절망 2

이제 강가에는 아무도 없고
아직 그대의 절망은 끝나지 않아
나의 가장 아픈 곳에 남아 있다.

어쩌면 바람으로 흩어지고 싶어도
흙의 일을 흙으로 돌리는 일과
하늘에 노을 그리는 일이 남았다는 핑계로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지친 그대를 힘들게 한다.

강가에 선 나무들은
철새의 약속을 믿지 않지만
흐르는 강물을 보며 기다린다.
기다릴 수밖에 다른 일은 없다고
어린 나무들을 돌아보며
타이르고 있다.

16.수채화로 그린 절망 3

우리는 전생에 어떤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았나.
말로도 남의 가슴에 상처주지 않고
미소로 그들을 도우며
그들의 고통으로 밤을 새웠다면,

다른 누가 우리의 다정함에
시기하는 말을 하늘에다 했는가.
그로 인해 이 생을 받았다면
자랑하지 말아야 했어.
내 삶이 남과 다름을 말하지 말아야 했다.

이번 생에 이 고통 다 지나면
이젠 윤회의 테두리 벗어나
바람으로 흩어지고 싶다.
이 욕심 다시 씨앗이 된다면
다음 생엔 아주 조그만 절망으로
마무리지으며 살고 싶다.

17.수채화로 그린 절망 4

자신을 잊기 위해 애쓰던
차가운 바람의 날들
말못하고 돌아서던 순간이 있었다.
가슴속 수많은 단어들이
서로 먼저 나오려고 부딪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초라하지 말라고
하늘의 푸른 절망이
먼저 손을 내민다.
내 가진 건 그대의 맑은 웃음,
고통스런 변명은
건너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히 말했다.
아니 충분히 비참했다.
이제는 시간이 낯설 게 느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 절망의 끝이 보인다

18.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은
기다린다는 말인 줄 알았다.
가장 절망적일 때 떠오른 얼굴
그 기다림으로 하여
살아갈 용기를 얻었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마음은 늘 그대 곁에 있는데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살았다.

그대도 세월을 살아가는 한 방황자인걸
내 슬픔 속에서 알았다.
스스로 와 부딪치는 삶의 무게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한 줄도 모른 채
나는 그대를 무지개로 그려두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떠나갈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19.노을 스러지는 그 뒤로

산 뒤로 노을이
아직 해가 남았다고 말할 때
나무들은 점점 검은 눈으로 살아나고
허무한 바람소리 백야처럼
능선만 선명하게
하늘과 다른, 땅을 표시한다.

고통 속에서만 꽃은 피어난다.
사랑 또한 고통으로 해방될 수 있음을
무수히 자신을 찢으며 깨달아 가는 것이다.
노을 쓰러지는 그 뒤로
바람마저 저지나가 버리는 내 마음의 간이역에는
아직도 기다리는 엽서 사연들이
오래된 낙엽으로 밟히고
먼저 잠든 자의 표정에서
내 슬픈 방황 먼 흐름의 물길을 찾는다.

창에 비치는 풍경이 눈앞에서 맴돌고
긴 흔들림에 영혼이 지쳐
내 속의 장미 시들어 가시만 남는다.
귀가를 서두르며 나는
스러지는 노을, 그 뒤로 따라가고 있다

20.그대를 사랑하는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빛나는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따스한 가슴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지와 잎, 뿌리까지 모아서
살아있는 나무라는 말이 생깁니다.
그대 뒤에 서 있는 우울한 그림자, 쓸쓸한
고통까지 모두 보았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전부로 와 닿았습니다.
나는 그대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그대가 완벽하게 베풀기만 했다면
나는 그대를 좋은 친구로 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대는 나에게
즐겨 할 수 있는 부분을 남겨 두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무엇이 될 수 있겠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21.화석

별빛 차가운 얼굴을 하고
내 의식의 낡은 창에
나보다 가난한 의미를 심는다.
가로등을 켜듯, 확실한 생이 아님을
빈 손 마디마디 시리게 깨달으며
다시 어쩔 수도 없이
홀로 거기서 타오른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내 양심의 낡은 창가에서
더욱 초라한 모습으로 서성이는
이처럼 헛된 짓을 나는
밤마다 거울을 깨듯 놀라고 있다.

손에 만져지는 아픔이
슬픔으로 창에 비치면
아직 부끄러운 표정으로
흩어진 언어에 불을 지르고
쓰러진 내 그림자와 함께
검고 자그마한 화석이 된다.

22.절망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되어진
나의 아픔이라면
이 정도의 외로움쯤이야
하늘을 보면서도 지울 수 있다.
또 얼마나 지난 후에
이보다 더한 고통이 온대도
나에게 나의 황혼을 가질 고독이 있다면
투명한 겨울단풍으로 자신을
지워갈 수만 있다면
내, 알지 못할 변화의 순간들을
부러워 않을 수 있다.

밤하늘 윤동주의 별을 보며
그의 바람을 맞으며, 나는
오늘의 이 아픔을
그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
헤어짐도 만남처럼 반가운 것이라면
한갓, 인간의 우울쯤이야
흔적 없이 지워질 수 있으리라

하루 하루가 아픈 오늘의 하늘,
어쩌면
하염없이 울어 버릴 수도 있으련만
무엇에 걸고 살아야 할지
아픔은 아픔으로 끝나주질 않는다. 

23.소망의 시.1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햇살같이 가벼운 몸으로
맑은 하늘을 거닐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 언제 어디서나
흔적 없이 사라 질 수 있는
바람의 뒷모습이고 싶다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그리고 살고 싶다
길 위에 떠 있는 하늘 어디엔가
그리고 얼굴이 숨어 있다
깃털처럼 가볍게 만나는
신의 모습이
인간의 소리들로 지쳐 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앞세우고
알타이 산맥을 넘어
약속의 땅에 동굴을 파던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사랑의 땅
눈물의 땅에서는 이제는
바다처럼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
맑은 눈으로 이 땅을 지켜야지

24.그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으로
소유하려는 것조차
나의 욕심이라고 깨닫고
시인하며
가슴을 털며 돌아서면
사랑은 조건이 없는, 아니
진정한 사랑의 조건은
진실
그 하나만으로 족한 것
가면의 사랑으로 우리는
자기마저 속이려는 숱한
가여운 영원을 본다
사랑 없는 삶은
죽음보다 무의미한 것이기에
우선은
내 마음의 진실을 찾아
아픈 추억들 뒤지고 있다.

25.눈 물

아직도 가슴에 거짓을
숨기고 있습니다.
늘상 진실을 생각하는 척하며
바로 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나만은 그 거짓을 알고 있습니다.

나조차 싫어지는 나의 얼굴
아니 어쩌면
싫어하는 척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내 속에 잇는 인간적,
인간적이라는 말로써
인간적이지 못한 것까지 용납하려는
알량한 <나>가 보입니다.

자신도 속이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들키는 바보가
꽃을, 나무를,
하늘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나를 보며 웃습니다.
비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기에
더욱 아픕니다.

언제쯤이면 나도
가슴 다 보여 주며 웃을 수 있을지요

눈물나는 것이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26.겨울 해변가에서

소리치고 있다.
바다는 그 겨울의 바람으로
소리지르고 있었다.
부서진 찻집의 흩어진 음악만큼
바람으로 불리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했다.
아니, 물보라로 날리길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겨울의 바다
오히려 나의 기억 한장을 지우고 있다
파도처럼 소리지르며 떠나고 있다.

내가 바닷물로 일렁이면
물거품이 생명으로 일어나
나를 가두어두던 나의 창살에서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 바닷가에서 나의 모든 소리는
바위처럼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옆의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그 겨울의 바람이
나의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았다.

소리쳐 달리는 하얀 물살 꽃엔
갈매기도 몸을 피하고
바위조차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무너진 그 겨울의 기억을 아파하며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내 속의 시간
오히려 파도가 되어 소리치는데
바다엔 낯선 얼굴만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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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시 모음

1.반지

이해인

약속의 사슬로
나를 묶는다

조금씩 신음하며
닳아 가는 너

난초 같은 나의 세월
몰래 넘겨보며

가늘게 한숨쉬는
사랑의 무게

말없이 인사 건네며
시간을 감는다
나의 반려는

잠든 넋을 깨우는
약속의 사슬

2.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이해인

손 시린 나목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에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워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3.꽃 멀 미

이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4.아름다운 순간들

이해인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 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 흔들며, 때로는 텅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5.아무래도 나는

이해인

누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듯 나 자신만을 챙겼음을
다시 알았을 때 나는 참 외롭다.
많은 이유로 아프고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곁을
몸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켜가는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참 부끄럽다.

6.부를 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이해인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는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플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 해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된다...

7.황홀한 고백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8.바다새

이해인

이 땅의 어느 곳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수 없어
바다로 온 거야

너무 많은 것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예까지 온 거야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온 거야

아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이 작은 가슴의 불길

물 위에 앉아
조용히 식히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미역처럼 싱싱한 슬픔
파도에 씻으며 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9.살아 있는 날은

이해인

마른 향내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아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연필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10.해바라기 연가

이해인

내 생애가 한 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실로
당신의 비단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은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여..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11.고독을 위한 의자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 내가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12.가을 편지

이해인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나뭇잎들
춤추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보듯이

13.꽃밭에 서면

이해인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 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잘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

꽃들의 죄 없는 웃음소리
붉게 타오르는
꽃밭에 서면

14.제비꽃 연가

이해인

나를 받아 주십시오

헤프지 않은 나의 웃음
아껴 둔 나의 향기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웃을 수 있고
감추어진 향기도
향기인 것을 압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내 작은 가슴속엔
하늘이 출렁일 수 있고
내가 앉은 이 세상은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담담한 세월을
뜨겁게 안고 사는 나는
가장 작은 꽃이지만
가장 큰 기쁨을 키워 드리는
사랑 꽃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삶을
온통 봄빛으로 채우기 위해
어둠 밑으로 뿌리내린 나
비 오는 날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작은 시인이 되겠습니다.

나를 받아 주십시오

15.풀꽃의 노래

이해인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 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16.다시 바다에서

이해인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환희의 눈물 속에
내가 만났던 바다

짜디짠 소금물로
나의 부패를 막고
내가 잠든 밤에도
파도로 밀려와
작고 좁은 내 영혼의 그릇을
어머니로 채워주던 바다

침묵으로 출렁이는
그 속 깊은 말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기도를
오늘도 다시 듣네

낮게 누워서도
높은 하늘 가득 담아
하늘의 편지를 읽어주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내게 영원을 약속하는
푸른 사제 푸른 시인을
나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네

17.별을 보며

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일 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 제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18.가을 노래

이해인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면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19.어머니의 섬

이해인

늘 잔걱정이 많아
아직도 뭍에서만 서성이는 나를
섬으로 불러주십시오, 어머니

세월과 함께 깊어 가는
내 그리움의 바다에
가장 오랜 섬으로 떠있는 어머니

서른세 살 꿈속에
달과 선녀를 보시고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당신의 그 쓸쓸한 기침소리는
천리 밖에 있어도
가까이 들립니다.

헤어져 사는 동안
쏟아놓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바람과 파도가 대신해 주는
어머니의 섬에선
외로움도 눈부십니다.
안으로 흘린 인내의 눈물이 모여
바위가 된 어머니의 섬
하늘이 잘 보이는 어머니의 섬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배우며
높이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

20.단추를 달듯

이해인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고 있는
나의 손등 위에
배시시 웃고 있는 고운 햇살

오늘이라는 새옷 위에
나는 어떤 모양의 단추를 달까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새 옷을 갈아입어도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듯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지

탄탄한 실을 바늘에 꿰어
하나의 단추를 달듯
제자리를 찾으며 살아야겠네

보는 이 없어도
함부로 살아 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을 확인하며
단추를 다는 이 시간

그리 낯설던 행복이
가까이 웃고 있네

21.눈 물

이해인

새로 돋아난
내 사랑의 풀숲에
맺히는 눈물

나를 속일 수 없는

한 다발의
정직한 꽃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처럼
간절한 빛깔로
기쁠 때 슬플 때 피네

사무치도록 아파 와도
유순히 녹아 내리는
흰 꽃의 향기

눈물은 그대로
기도가 되네
뼛속으로 흐르는
음악이 되네

22.코스모스

이해인

바람이
가을을 데리고 온
작은 언덕길엔
코스모스
코스모스
분홍 빛 하얀 빛
웃음의 물결
가느다란 몸매에 하늘을 담고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소녀들

푸른 줄기마다
가을의 꿈 적시며
해맑게 웃는다

코스모스
코스모스
바람이 분다

23.우산이 되어

이해인

우산도 받지 않은
쓸쓸한 사랑이
문 밖에 울고 있다

누구의 설움이
비되어 오나
피해도 젖어오는
무수한 빗방울

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
비 오는 날은 젖은 사랑

수많은 나의 너와
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 거리를
한없이 쏘다니리

우산을 펴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24.사랑
이해인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남이란 단어가 맴돌곤 합니다.
어처구니없이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하겠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면
고독이 말없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워진다는 것을.

25.아침의 향기

이해인

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고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유하게 녹아서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평화의 노래이기를...

26.친구에게

이해인

부를 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존재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 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 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는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 된다.

너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
참을성 많고 한결같은 우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본다.
늘 기도해 주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나도 너에게 끝까지
성실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해
힘든 때도 있었지만
화해와 용서를 거듭하며
오랜 세월 함께 견뎌 온 우리의 우정을
감사하고 자축하며
오늘은 한 잔의 차를 나누자
우리를 벗이라 불러 주신 주님께
정답게 손잡고 함께 갈 때까지

우리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가꾸어 가자.
아름답고 튼튼한 사랑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춤추며 지나가게 하자.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좋은 벗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행복한 이웃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벗이 되자.
이름을 부르면 어느새 내 안에서
푸른 가을 하늘로 열리는
그리운 친구야...

27.가을 편지

이해인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안에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 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 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 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 오는 가을 기슭엔
수 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습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 없이 소리 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누구나 한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날을 고마와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습니다


28.고독에게     


 나의 삶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먼데서도 팽팽하게
나를 잡아당겨 주겠다구요

얼음처럼 차갑지만
순결해서 좋은 그대 

오랜 사귀다 보니
꽤 친해졌지만
아직은
함부로 대할 순 없는 그대 

내가 어느새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게
그 맑고 투명한 눈및으로
나를 지켜주겠다구요

고맙다는 말을
이제야 전하게돼
정말 미안해요


29..고독에게2


 당신은


나를 바로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가장 가까운 벗들이
나의 약점을 미워하며
나를 비켜갈 때 

노여워하거나
울지 않도록
나를 손잡아준 당신 

쓰라린 소금을 삼키듯
절망을 삼킬 수 있어야
하얗게 승화될 수 있음을
진정 겸손해야만
삶이 빛날 수 있음을
조심스레 일러준 당신
오른을 당신에게
감사의 들꽃 한 묶음
꼭 바치렵니다 

제 곁을 떠나지 말아주세요
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는
아름다운 얼음 공주님...


 30.꿈을 위한 변명    


 아직 살아 있기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꾸지 말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꿈이 많은 사람음
정신이 산만하고
삶이 맑지 못한 때문이라고
단정 짓지 마세요 

나는 매일
꿈을 꿉니다
슬퍼도 기뻐도
아름다운 꿈
꿈은 그대로 삶이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내일의 이야기도
꿈길에 그려질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꿈이 없는 삶
삶이 없는 꿈은
얼마나 지루할까요 

죽으면 꿈이 멎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1.나비의 연가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향해 날으는
한 마리 순한 나비인 것을 

가볍게 춤추는 나에게도
슬픔의 노락 가루가
남몰래 묻어 잇음을 알았습니다

눈멀 듯 부신 햇살에
차라리 날개를 접고 싶은
황홀한 은총으로 살아온 나날 

빛나는 하늘이 훨뤌 날으는
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가난한 마음임을 가르치는
풀잎들의 합창 

수없는 들꽃에게 웃음을 가르치며
나는 조용히 타버릴 당신의 나비입니다.

부디 꿈꾸며 살게 해 주십시오
버려진 꽃들을잊지 않게 하십시오 

들릴 듯 말 듯한 나의 숨결은
당신께 바쳐지는
無言의 기도 

당신을 향한 맨 처음의 사랑
不忘의 나비 입니다, 나는


 32.나를 위로하는 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나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33.너에게 띄우는 글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34.내 혼()에 불을 놓아  


 언제쯤 당신 아에 꽃으로 피겠습니까.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노을빛 바람이여. 봉오리로 맺혀 있던
갑갑한 이 아픔이 소리없이 터지도록 그 타는 눈길과
숨결을 주십시오. 기다림에 초조한 애 비 밀스런 가슴을
열어놓고 싶습니다. 나의 가느다란 꽃슬이 가느다란
슬픔을 이해하는 은총의 바람이여, 당신 앞에 ''라고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는 언제나 떨리는 3월입니다.
고요히 내 혼에 불을 놓아 꽃으로 피워 내는 뜨거운 바람이여.


35.벗에게1  


 내 잘못을 참회하고 나서
처음으로 맑고 투명해진
나의 눈물 한 방울
너에게 선물로 주어도 될까

때로는 눈물도
선물이 된다는 걸
너를 사랑하며 알았어 

눈물도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임을
네가 가르쳐주었어

나와의 첫 만남을
울면서 감격하던 너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내 마음
이해하면서도 힘들었지?

나를 기다려주어 고맙고
나를 용서해주어 고맙고 

그래서 지금은 내가 울고 있잖아


 36.벗에게


내가 누구인지
벗이여
오늘은 그대에게 묻고 싶다
잠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서 바라보는
낯선 얼굴의 나 

밤길을 걷다
나를 따라붙는
나보다 큰
나의 검은 그림자가
두렵고 낯설었다

이젠 내가 나와 친해질 나이도 되었는데
갈수록 나에게서 멀어지는 슬픔 

나를 찾지 못한 부끄러움에
오늘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내게 

벗이여
무슨 말이라도 해다오


 37.벗에게3   


내가 죽더라도
너는 죽지 않으면 좋겠다
꼭 죽어야 한다면
내가 먼저 죽으면 좋겠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으면 좋겠다 

이 또한
터무니 없는 욕심이라고
너는 담담히 말을 할까

우정보다 더 길고 깊은
하나의 눈부신 강이 있다면
그 강에 너를 세우겠다 

사랑보다 더 높고 푸른
하나의 신령한 산이 있다면
그 산에 너를 세우겠다 

내게 처음으로
하늘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내 목숨보다
귀한 벗이여


38.보고 싶다는 말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비오는 날의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날의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한
너의 목소리 

들들 때마다
노래가 되는 말
평생을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나에게도
푸른 파도 밀려오고
내 마음에도 다시
새가 날고......  

 

39. 나를 키우는 말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40.슬픈 날의 편지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주십시오
이유 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이 터무니없음을 용서하십시오


 41.성 금요일의 기도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 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 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꽂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때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42.민 들 레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람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43.민들레의 영토(領土)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太初)부터 나의 영토(領土)
좁은 길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져다보는
인정(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은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름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44.빈 꽃병의 말 2    


 꽃들을 다 보낸 뒤
그늘진 한 모퉁이 에서
말을 잃었다

꽃과 더불어 화려했던
어제의 기억을 가라앉히며
기도의 진주 한 알
입에 물고 섰다
하얀 맨발로 섰다

아무도 오지 않는 텅 빈 가슴에
고독으로 불을 켜는
나의 의지

 누구에세도 문 닫는 일 없이
기다림에 눈 뜨고 산다  

희망의 잎새 하나
끝내 피워 물고 싶다


 45.바람이 내게 준 말     


 넌 왜
내가 떠난 후에야
인사를 하는 거니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왜 제때엔 못하고
한 발 늦게야 포현을 하는 거니?

오늘도
이끼 낀 돌층계에 앉아
생각에 잠긴 너를
나는 보았단다

봉숭아 꽃나무에
물을 주는 너를
내가 잘 익혀놓은
동백 열매를 만지작 거리며
기뻐하는 너를
지켜보았단다

언제라도
시를 쓰고 싶을 땐
나를 부르렴

어느 계절에나
나는 네게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단다
나의 걸음은
네게로 달려가는
내 마음보다도 빠르단다

사랑하고 싶을땐
나를 부르렴

나는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으면서
심부름 잘하는
지혜를 지녔단다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젊을을 지녔단다


 45.비 밀 


 겹겹이 싸매 둔 장미의 비밀은
장미 너만이 알고
속으로 피흘리는 나의 아픔은
나만이 안다 

살아서도 죽어 가는
이 세상 비인 자리 

이웃과 악수하며 웃음 날리다
뽀얀 외롬 하나
구름으로 뜨는 걸
누가 알까 

꽃밭에 불밝힌 장미의 향기보다
더 환히 뜨겁고
미쁜 목숨 하나

별로 뜨는 사랑
누가 알까


 47.살아 있는 날은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깍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깍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48.시의 집  


 나무 안에 수액이 흐르듯
내 가슴 안에는
늘 시가 흘러요 

빛까로 냄새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그냥 흐르게 놔두지요 

여행길에 나를 따라오는 달처럼
내가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따라오는.....

슬픔때도
힘이 되어주는 시가 흘러
고마운 삶이지요


49.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50..우정일기 1

1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굴뚝이 하나 있지. 너를 향한 그리움이 하
얀 연기로 피어오르다 노래가 되는 너의 집이기도 한 나의 집. 이 하
얀 집으로 너는 오늘도 들어오렴, 친구야.

2
전에는 크게, 굵게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한꺼번에 많은 것을 이야
기하더니 지금은 작게, 가늘게 내리는 이슬비처럼 조용히 내게 오는
.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는 쉬임없이 나를 적셔준다

3
소금을 안은 바다처럼 내 안엔 늘 짜디짠 그리움이 가득하단다.
친구야. 미역처럼 싱싱한 기쁨들이 너를 위해 자라고 있단다. 파도
에 씻긴 조약돌을 닮은 나의 하얀 기도가 빛나고 있단다.

4
네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구나. 네 대신
아파줄 수 없어 안타까운 내 마음이 나의 몸까지도 아프게 하는 거
너는 알고 있니? 어서 일어나 네 밝은 얼굴을 다시 보여주렴. 내게
기쁨을 주는 너의 새 같은 목소리도 들려주렴.

5
내가 너를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너도 보고 싶니, 내가? 내가 너
를 좋아하는 것처럼 너도 좋아하니, 나를? 알면서도 언제나 다시 묻
는 말. 우리가 수없이 주고받는 어리지만 따뜻한 말. 어리석지만 정
다운 말.

6
약속도 안했는데 똑같은 날 편지를 썼고, 똑같은 시간에 전화를
맞걸어서 통화가 안되던 일, 생각나니? 서로를 자꾸 생각하다보면
마음도 쌍둥이가 되나보지?

7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네가 다 훔쳐가서 나는 편지에도 더 이상 쓸
말이 없다'며 너는 종종 아름다운 불평을 했지? 오랜만에 네게 편지
를 쓰려고 고운 편지지를 꺼내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슨 말을
쓸거니?' 어느새 먼저 와서 활짝 웃는 너의 얼굴. 몰래 너를 기쁘게
해주려던 내 마음이 너무 빨리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구나

8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 돼. 알았지?' 같은 나이에도 늘 엄마처럼
챙겨주는 너의 말. '보고 싶어 혼났는데... 너 혹시 내 꿈 꾸지 않았
?' 하며 조용히 속삭이는 너의 말. 너의 모든 말들이 내게는 늘 아
름다운 노래가 되는구나, 친구야.

9
나를 보고 미소하는 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아도, 네가 보내준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봐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질 않는구나.
와 나의 추억이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을 발한다 해도 오늘의
내겐 오늘의 네 소식이 가장 궁금하고 소중할 뿐이구나, 친구야.

10
비오는 날 듣는 뻐꾹새 소리가 더욱 새롭게 반가운 것처럼 내가
몹시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네가 내게 들려준 위로의 말은 오랜 세월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단다

11
아무도 모르게 숲에 숨어 있어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나를 안아주는 햇빛처럼 너는 늘 조용히 온다

12
네가 평소에 무심히 흘려놓은 말들도 내겐 다 아름답고 소중하
. 우리집 솔숲의 솔방울을 줍듯이 나는 네 말을 주워다 기도의 바
구니에 넣어둔다

13
매일 산 위에 올라 참는 법을 배운다. 몹시 그리운 마음, 궁금한
마음, 즉시 내보이지 않고 절제할 수 있음도 너를 위한 또 다른 사랑
의 표현임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다. 매일 산 위에 올라 바다를 보
며 참는 힘을 키운다. 늘 보이지 않게 나를 키워주는 고마운 친구야.

 51.우정일기 2  

 14
내 얕은 마음을 깊게 해주고, 내 좁은 마음을 넓게 해주는 너.
속에 가면 한그루 나무로 걸어오고, 바닷가에 가면 한점 섬으로 떠
서 내게로 살아오는 너. 늘 말이 없어도 말을 건네오는 내 오래된 친
구야, 멀리 있어도 그립고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친구야.

15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천사의 몫을 하는 게 아니겠어?
으로 성실하게 남을 돌보고, 자기를 잊어버리고, 그래서 몸과 마음
이 늘 사랑 때문에 가벼운 사람은 날개가 없어도 천사가 아닐까?
늘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

16
친구야, 이렇게 스산한 날에도 내가 춥지 않은 것은 나를 생각해
주는 네 마음이 불빛처럼 따스하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야. 꼼짝을
못하고 누워서 앓을 때에도 내가 슬프지 않은 것은 알기만 하면 먼
데서도 금방 달려올 것 같은 너의 그 마음을 내가 읽을 수 있기 때문
이야. 약해질 때마다 나를 든든하게 하고, 먼데서도 가까이 손잡아
주는 나의 친구야, 숨어 있다가도 어디선지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반딧불 같은 친구야.

17
방에 들어서면 동그란 향기로 나를 휘감는 너의 향기. 네가 언젠
가 건네준 탱자 한알에 가득 들어 있는 가을을 펼쳐놓고 나는 너의
웃음소릴 듣는다. 너와 함께 있고 싶은 나의 마음이 노란 탱자처럼
익어간다.

18
친구야, 너와 함께 별을 바라볼 때 내 마음에 쏟아져 내리던 그 별
빛으로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너와 함께 갓 피어난 들꽃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을 가득 채우던 그 꽃의 향기로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

19
네가 만들어준 한 자루의 꽃초에 나의 기쁨을 태운다. 초 안에 들
어 있는 과꽃은 얼마나 아름답고 아프게 보이는지. 하얀 초에 얼비
치는 꽃들의 아픔 앞에 죽음도 은총임을 새삼 알겠다. 펄럭이는 꽃
불 새로 펄럭이는 너의 얼굴. 네가 밝혀준 기쁨의 꽃심지를 돋우어
나는 다시 이웃을 밝히겠다.

20
너는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면 어쩌나?' 미리 근심하며 눈물 글썽
인다. 한동안 소식이 뜸할 뿐인데 '나를 잊은 것은 아닌가?' 미리 근
심하며 괴로워한다. 이러한 나를 너는 바보라고 부른다.

21
'축하한다. 친구야!' 네가 보내준 생일카드 속에서 한묶음의 꽃들
이 튀어나와 네 고운 마음처럼 내게 와 안기는구나.
나를 낳아주신 엄마가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오늘.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너를 만날 수도 없었겠지? 먼데서 나를 보고 싶
어하는 네 마음이 숨차게 달려온 듯 카드는 조금 얼굴이 상했구나.
그 카드에 나는 입을 맞춘다.

22
친구야, 너는 눈물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니? 너무 기쁠 때에
, 너무 슬플 때에도 왜 똑같이 눈물이 날까? 보이지 않게 숨어 있
다가 호수처럼 고여오기도 하고,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눈물.
차가운 나를 따스하게 만들고, 경직된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고마운
눈물. 눈물은 묘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내 안에도 많은 눈물
이 숨어 있음을 오늘은 다시 알게 되어 기쁘단다

23
아무리 서로 좋은 사람과 사람끼리라도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함께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것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를 늘 쓸쓸하
게 하는 것 중의 하나란다. 너무 어린 생각일까

24
나는 따로 집을 짓지 않아도 된다. 내 앞에서 네가 있는 장소는 곧
나의 집인 것이기에, 친구야.
나는 따로 시계를 보지 않는다. 네가 내 앞에 있는 그 시간이 곧
살아 있는 시간이기에, 친구야.
오늘도 기도 안에 나를 키워주는 영원한 친구야

 

52. 어 머 니   

 

 당신의 이름에선
색색의 웃음 칠한
시골집 안마다의
분꽃 향기가 난다 

안으로주름진 한숨의 세월에도
바다가 넘실대는
남빛 치마폭 사랑 

남루한 옷을 겇친
나의 오늘이
그 안에 누워 있다 

기워 주신 꽃골무 속에
소복히 담겨 있는
幼年의 추억

당신의 가리마같이
한 갈래로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나의 연두 갑사 저고리에
끝동을 다는
다사로운 손길

 까만 씨알 품은
어머니의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53.  왜 그럴까, 우리는  


 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하고
기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
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괴롭게 누워 잇는 이들에게도
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 

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
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
분면 내 모습도
들어 잇는 걸
나는 말고 있지 

정말 오 그럴까
왜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54. 어느 꽃에게     


 넌 왜 나만 보면
기침을 하니?
꼭 한마디 하고 싶어하니

속으로 아픈 만큼
고운 빛깔을 내고남 모르게 아픈 만큼
사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오늘도 나에게 말하려구

밤낮의 아픔들이 모여 꽃나무를 키우듯
크고 작은 아픔들이 모여
더욱 향기로운 삶을 이루는 거라고
또 그 말 하려구?


55. 어느 말 한 마디가    


어느 날 내가 네게 주고 싶던
속 깊은 말 한 마디가
비로소 하나의 소리로 날아갔을 제
그 말은 불쌍하게도
부러진 날개를 달고 되돌아왔다
네 가슴 속에 뿌리를 내려야 했을
나의 말 한 마디는
돌부리에 채이며 곤두박질치며
피 묻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상처받은 그 말을 하얀 붕대로 싸매 주어도
이제는 미아처럼 갈 곳이 없구나
버림받은 고아처럼 보채는 그를
달랠 길이 없구나
쫓기는 시간에 취해 가려진 귀를
조금 더 열어 주었다면
네 얼어붙은 가슴을
조금 더 따뜻하게 열어 주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겠니
말 한 마디에 이내 금이 가는 우정이란
얼마나 슬픈 것이겠니
지금은 너를 원망해도 시원찮은 마음으로
또 무슨 말을 하겠니
네게 실연당한 나의 말이
언젠가 다시 부활하여 너를 찾을 때까지
나는 당분간 입을 다물어야겠구나
네가 나를 받아들일 그 날을 기다려야겠구나  


 56.장미를 생각하며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내어 울면

나의 나눔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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