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님 시모음 22편

1.너와 나는

조병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해야 한다

떼어버린 카렌다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 이였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아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2.후조

조병화

후조기에 애착일랑 금물이었고
그러기에 감상의 속성을 벌써 잊었에라
가장 태양을 사랑하고 원망함이 후조였거늘

후조는 유달리 어려서부터
날개와 눈알을 사랑하길 알았에라

높이 날음이 자랑이 아니에라
멀리 날음이 소망이 아니에라
날아야 할 날에 날아야 함이에라

달도 별도 온갖 꽃송이도
나를 위함이 아니에라

날이 오면 날아야 할 후조이기에
마음의 구속일랑 금물이었고
고독을 날려버린 기류에 살라 함이 에라

3.이렇게 될 줄 알면서

조병화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이 깔린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겉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했습니다

인생이 겉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이렇게 될 줄 알면서

4.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5.벗

조병화


벗은 존재의 숙소이다
그 등불이다
그 휴식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먼 내일에의 여행
그 저린 뜨거운 눈물이다
그 손짓이다
오늘 이 아타미 해변
태양의 화석처럼
우리들 모여
어제를 이야기하며 오늘을 나눈다
그리고, 또
내일 뜬다

6.사랑 혹은 그리움

조병화

너와 나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로 좁힌 거리에 있어도
그 수천억 배 되는 거리 밖에
떨어져 있는 생각

그리하여 그 떨어져 있는 거리 밖에서
사랑, 혹은 그리워하는 정을 타고난 죄로
나날을, 스스로의 우리 안에서, 허공에
생명을 한 잎, 한 잎 날리고 있는 거다

가까울수록 짙은
외로운 안개
무욕한 고독

아, 너와 나의 거리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의 거리이지만
그 수천억 배의 거리 밖에 떨어져 있구나.
 
7.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을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데 있고
흘러가는 한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 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 한다

8.사랑의 계절

조병화

해마다 꽃피는 계절이면
산에 들에 하늘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와 같이 집을 짓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어라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 아물아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매달려

한동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구름 끝에
그 누구와 같이 둥지를 치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둥, 둥, 떠가고 싶은 마음

아, 해마다 꽃돋는 나날이면
내 마음에 돋는 너의 봉오리.

9.황홀한 모순

조병화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훗날 슬픔을 주는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 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리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10.의자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디 메쯤에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디 메쯤에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11.고독하다는 것은

조병화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12.기다림은 아련히

조병화

이제,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인생의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다림은 먼 소식처럼 아련해지며

맑게 보다 맑게
가볍게 보다 가볍게
엷게 보다 엷게
부담 없이 보다 부담 없이
스쳐 가는 바람처럼 가물가물하여라

긴 생애가 기다리는 세월
기다리면서 기다리던 것을 보내며
기다리던 것을 보내면 다시 기다리며
다시 기다리던 것을 다시 보내면
다시 또다시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어라, 하면서
이 인생의 겨울 저녁 노을
노을이 차가워라

기다릴 것도 없이 기다려지는 거
기다려져도 아련한 이 기다림
노을진 겨울이거늘

아, 사랑아

인생이 이러한 것이어라.
기다림이 이러한 것이어라

13.나 돌아간 흔적

조병화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아시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 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나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아 세상 수 만리 나 찾아 왔습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 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러
나 찾아 왔습니다

14.내 마음에 사는 너

조병화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리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15.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른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그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덧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16.사랑

조병화

기다린다는 건
차라리 죽음보다 더 참혹한 거

매일 매시 매초, 내 마음은
너의 문턱까지 갔다간
항상 쓸쓸히 되돌아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이 기다리는 고통은
아직 네가 있기 때문이다

비굴을 넘어서

17.사랑의 노숙

조병화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쁜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생존의 기억이다

18.산책

조병화

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
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
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누워 있고 싶은 남국의 꽃밭
마냥 세워 푸르기만한 꽃밭
내 마음은 솔개미처럼 양명산 중턱
따스한 하늘에 걸려 날개질 치며
만나다 헤어질 그 사람들이 또 그리워들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영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 앉아 있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19.소라

조병화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20.자유

조병화

공중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공중을 날며 스스로의 모이를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그렇게 공중을 높이 날면서도
지상에 보일까 말까 숨어 있는 모이까지
찾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아, 그렇게
스스로의 모이를 찾아다니면서
먹어서 되는 모이와
먹어서는 안 되는 모이를 알아차리는
민감한 지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지상을 날아다니면서
내릴 자리와 내려서는 안 될 자리,
머물 곳과 머물러서는 안 될 곳,
있을 때와 있어서는 안 될 때를
가려서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가볍게 먹는 새만이
높이 멀리 자유를 날으리.

21.초상

조병화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22.하나의 꿈인 듯이

조병화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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