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희시모음 70편

《1》2월 편지

홍수희

어딘가 허술하고
어딘가 늘 모자랍니다

하루나 이틀
꽉 채워지지 않은
날수만 가지고도
2월은 초라합니다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1년 중에
가장 초라한 2월을
당신이 밟고 오신다니요

어쩌면 나를
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날들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더라도

사랑의 싹이 돋아날
여분의 땅을 내 가슴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2》2월에 쓴 시

홍수희

지금쯤 어딘가엔 눈이 내리고
지금쯤 어딘가엔 동백꽃 피고
지금쯤 어딘가엔 매화가 피어

지금쯤 어딘가에 슬픈 사람은
햇살이 적당히 데워질 때를 기다려
눈물 한 점 외로운 벤치 위에 남겨두고서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겠다
다시 어디론가 길을 뜨고 있겠다

《3》4월

홍수희

화선지 위에 어둠을 그린다
그만 문(門)은 닫히고 만다
아무리 많은 색깔을 늘어놓아도
그릴 수 없는 내 속의 캄캄한 어둠
어둠은 또다른 어둠을 부르고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느닷없는 돌개바람의 미친 자기 분신,
당신은 나에게는 지나친 백야(白夜)!
부활의 4월은 내게 부활을 주지 않고
내 영혼의 무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단단하고 거대한 바윗덩이는
끝끝내 움직여 흔들릴 줄 모른다
어찌하여 바위는 구르지 않는가
시지프가 굴리고 굴리던 바위, 어찌하여
4월의 부활은 내 영혼의 부활을
흔들어 깨울 줄을 모르는가
마침내는 나만이 홀로이 책임져야 할
나의 원죄(原罪)를 묵상하는 밤,
나의 어둠은 비로소 시작된다
피투성이 부활은 어렴풋 기지개 켠다.

《4》9월

홍수희

소국(小菊)을 안고 집으로 오네
꽃잎마다 숨어 있는 가을,
샛노란 그 입술에 얼굴 묻으면
담쟁이덩굴 옆에 서 계시던 하느님
그분의 옷자락도 보일 듯 하네

《5》11월의 시

홍수희

텅텅 비워
윙윙 우리라
다시는
빈 하늘만
가슴에
채워 넣으리

《6》가을 고해

홍수희

이 가을 나는 몹시 아프다
사랑도 되지 않고 미움도 되지 않는다

그대를 온전히 사랑한 적이 없고
그대를 제대로 미워한 적도 없다

늘 어정쩡한 거리에 서서
곁눈질만 하였다
나의 삶,

차라리 이 가을
그대를 절실히 미워하다가
차라리 이 가을
그대의 발을
내 눈물로 씻기고 싶다

저 지는 낙엽처럼
나도 나에게
이별하여 죽어지고 싶다

《7》가을로 가는 편지

홍수희

완행 열차처럼
가을은 천천히 지날 일이다

엄지와 검지사이의 여유도 없이
지나쳐버린 계절속에는

잃어버린 표정과 잃어버린
순수가 버려져 있다

슬프면 울기 기쁘면 웃기
사람이 그리우면 그리워하기

풀벌레가 앉았던 화단가
돌멩이에도

이 가을에는
멈추어 웃음짓는 간이역이길

틈새가 있어야 정이 흐르고
틈새가 있어야 사랑이 머물 수 있다

《8》겨울 숲 아시나요

홍수희

잎 지고 새 떠나간 겨울 숲에는
외로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남아 윙윙 부는
바람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인기척에 놀라 툭,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삭정이만 사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어 꽃씨가 산답니다
파릇파릇 새순이 산답니다

부끄럽게 웃고 있는
꽃 무리도 숨어살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도 숨어살지요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초조해 하지는 말아요

희망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겨울 숲에는 두근두근
설레는 봄날이 숨어살아요

《9》그네가 있는 풍경

홍수희


흔들거리지 않는 그네는
쓸쓸하다

외롭고 고단한
우리 가는 이 길에
누군가 등 좀 밀어줬다고
허공에서 그대
잠시 즐거웠단 들

너무 탓할 일도
아닌 것이다
너무 나무랄 일도
아닌 것이다

허공에서
뒤척여 보지 않고서야
어찌 낮은 데의 평화를
알 수 있으랴

바람 속에 퍼덕퍼덕
휘둘려 보지 않고서야
어찌 한 길을 가는
잔잔한 행복을
알 수 있으랴

움직이지 않는
그네를 보면 나는 오늘도
뜨거운 손으로 높이
높이 올려주고만 싶다

《10》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

홍수희

슬픔을 뒤집어 보니
거기 기쁨이 있더군요

기쁨을 뒤집어 보니
거기 아픔이 있더군요

다시 아픔을 뒤집어 보니
거기 감사가 있더군요

이렇듯,
삶이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생각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리 보이기도 하지요

희망마저
잔인해 보일 때,

그래도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11》그렇게 2월은 간다

홍수희

외로움을 아는 사람은
2월을 안다

떨쳐버려야 할 그리움을 끝내 붙잡고
미적미적 서성대던 사람은
2월을 안다

어느 날 정작 돌아다보니
자리 없이 떠돌던 기억의 응어리들,
시절을 놓친 미련이었네

필요한 것은 추억의 가지치기,
떠날 것은 스스로 떠나게 하고
오는 것은 조용한 기쁨으로 맞이하여라

계절은
가고 또 오는 것
사랑은 구속이 아니었네

2월은
흐르는 물살 위에 가로 놓여진
조촐한 징검다리였을 뿐

다만 소리 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여,
그렇게 2월은 간다

《12》기도

홍수희

이를테면
이렇게 하여 주소서

당신의 꽃밭에 꽃이 피면
내 마음 그 찬란한 꽃잎이 아닌
꽃대궁을 받쳐든 말없는 그늘이게 하소서

당신의 뜨락에 새가 울면
내 마음 소리 높여 지저귀는 노래가 아닌
그 음계(音階)를 받쳐든 잔잔히 술렁이는 가지이게 하소서

어두움이 깊어갈수록 빛깔이 짙어지는 별빛처럼
실눈을 뜰수록 거울을 닮아가는 둥근 보름달처럼

고개를 숙이고야 숙인 만큼 더욱 붉어지는 노을처럼
내가 작아지는 만큼 점점 커져 오르는 그리움처럼

사랑은 비로소 가진 것을 한없이 내어줄수록
더욱더 차 오르는 요술 항아리

사랑은 마침내 고독의 겨울을 사르고서야
눈부시게 도착하는 하느님의 봄빛 연서(戀書)

그러하오니 주여,
이를테면 이렇게 하여 주소서

가장 초라한 손을 내가 먼저 따뜻이 잡게 하시고
가장 누추한 가슴을 내가 먼저 설레며 방문하게 하시어

이 세상 가장 슬픈 귓가에
먼저 가 닿는 나 은은한 종소리가 되게 하시고

이 세상 가장 음습한 골짜기에
먼저 가 닿는 나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13》기도하세요

홍수희

마음이 슬프고 괴로울 때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세요
나보다 더 슬픈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마음의 상처가 짓누를 때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세요
나보다 더 아픈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사는 것이
문득 외로워질 때에
꿈꾸는 일조차 힘겨울 때에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세요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눈물로 지새는 이를 위하여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는 너와 나를 연결해주는
신비로운 끈, 누군가의
온기가 느껴지네요

마음에 한없이 찬비 내릴 때
두 손을 모아 기도하세요
내 영혼 슬픔은 희미해지고
기쁨이 나를 채울 거예요

《14》꽃 편지

홍수희

꽃 피더니 꽃이 집니다
산에도 마을에도 꽃이 집니다
강가에도 철길에도 꽃이 집니다
그리운 내 맘에도 꽃이 집니다

사람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다고
보지 않으면 잊혀지다가
불현듯 또 그렇게 생각나다가
잊어지다가 쓸쓸히 지워지다가
다시 또 잠 못 드는 날 있겠거니
꽃 진 자리에 꽃 피겠거니
보고픈 정 어찌 다 지워지겠는지요

지는 꽃 내 마음에 거두지 않고
오셨던 그대로 놓아둡니다

《15》꽃비

홍수희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그대여
마음에 그 사랑을 들이기 위해
낡고 정든 것은
하나 둘 내치시기를

사랑은 잃어 가는 것이다

보라,
꽃잎도 버릴 때에
눈이 부시다

《16》꽃이 피기도 전에

홍수희

당신이 내 안에서 피고지기를
벌써 몇 번인지 몇만 번인지

나의 첫사랑,
그러나 나는 이제 당신을 위해
봄이 오기도 전에 꽃씨를 심고
꽃이 피기도 전에
그 향기에 취할 수도 있어요

당신이 내게 죽음이라면
또한 당신이 내게는 생명이란 걸
당신이 내게 아픔이라면
또한 당신이 내게는 기쁨이란 걸
당신이 내게 끝없는 미로迷路라면
또한 당신은 반듯한 목적지란 걸

이제 나는 알듯도 해요

당신이 내 안에 피고지기를
이후로도 거듭 반복되겠지만
이제 그것으로 당황하지 않아요

꽃이 피기도 전에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할 수도 있어요

《17》낙엽 한 잎

홍수희

나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가봅니다
낙엽 한 잎 떨어질 때마다
여윈 가지 부르르 전율합니다
때가 되면 버려야 할 무수한 것들
비단 나무에게만 있겠는지요
아직 내 안에 팔랑이며 소란스러운
마음가지 끝 빛 바랜 잎새들이 있습니다
저 오래된 집착과 애증과 연민을 두고
이제는 안녕, 이라고 말해볼까요
물론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18》낙엽이 나에게 건네 준 말

홍수희

어느 날
차창에 낙엽 한 잎
노란 몸짓으로 날아오더니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건네주는 말
생각해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 뭐겠니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네
어느 익숙한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녕이라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아니면……
머뭇거리는 나에게
낙엽이 가만히 속삭이는 말
생각해봐,
내가 무엇을 해주고 싶어도
받아 줄 사람이 거기 없을 때
가슴 저미는 일이야
두 손에 가득 선물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는
그 일인 거야
바람만 불어왔다 불어가 버리는
혼자 남은 괴로움이야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주어진 기회를 붙잡으렴

《19》내 마음에 흰 눈이 내릴 때

홍수희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내 마음에 흰 눈이 내립니다

눈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등을 대고 서로의 가슴을 읽다
입술을 앙다물고 돌아서는 쓸쓸한 저녁
흰 눈이 내립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
어찌 늘 기쁨은 아닌 줄은 알면서도
보란 듯이
또 보란 듯이 흰 눈만
서늘한 내 가슴에 하득하득 흩어지며 내립니다

《20》내 마음을 주고싶은 사람

홍수희

부드러운 음성을 가진
당신에게는
애정 가득 담긴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여유로움 간직한
당신에게는
포근함 가득 담은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에게는
끝이라도 아깝지 않을
내 모든 것 다 담은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오직 한 사람
당신에게만
내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21》내 안에 있는 행복

홍수희

새처럼
수줍은 그것은
소매를 붙잡으면
이내 날아가고 맙니다

첫눈처럼
보드라운 그것은
움켜쥐면 사르르 녹고
맙니다

그러나
바위처럼
단단한 그것은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행복,
찾으면 찾아지지 않고
놓아줄 때 비로소
보여집니다

《22》내 잔이 넘치나이다

홍수희

때로는 당신의 사랑이
나를 힘들게 하시었네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당신이 불어주던 휘파람 소리

그 길이 아니면 아니 된다고
나를 인도하시었네

어찌 편한 길은 그대로 두고
비탈진 그 길로 인도하시었네

사랑의 언덕은 높고도 험해
십자가 없이는 오르지 못하리 당신이 두 팔 벌려 서 계신 그곳

그곳에 나 다다를 때까지 임이여, 휘파람을 불어 주소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내가 지금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홍수희

내가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당신의 부재가 서러워서가 아닙니다
만질 수 없는 당신이 야속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침묵이 너무 섬세한 까닭입니다

내가 지금 돌아서서 우는 까닭은
당신의 등이 서러워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말씀이 모질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냉정함이 모다 나를 위한 배려인 까닭입니다

세상이 나를 두고 저만치 멀어 보여도
고독이 함박눈처럼 창틀을 하얗게 뒤덮어도
내 마음이 이렇게 풍요로운 까닭은
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계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잎 떨어진 스산한 뜨락,
왼 종일 내 영혼 서성이며 설레이느니
내 마음이 이렇게 붉어지는 까닭은
님이여, 당신만이 나를 태울 불꽃인 까닭입니다

내가 지금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당신의 침묵이 너무 섬세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등이 너무 뜨거운 까닭입니다

《24》내일은 비

홍수희

슬픔도
적당할 때 눈물이 난다

태풍의 눈 속인가
너무나 고요한 내 마음이여

그대와 나 사이
이다지도 깊은 심연을 두고

하루는 너무 조용히
왔다가는 내게서 멀어져간다

그리고 내일은 비,

《25》눈꽃

홍수희

나 그렇게 되었으면,

네 마음이 외로울 때에
겨울 창문을 열면
잎 떨어진 가지 위에 피어난
하얀 눈꽃이 되었으면

나 그렇게 되었으면,

네 가는 길 고달프고 힘겨울 때에
내가 앞서 잠시 반짝이다가
구태여 그 자리 주저앉지 않고
햇빛에 사르르 녹아도 좋은

나 그렇게 되었으면,

그대 가다가 넘어질 때에
넘어진 바로 당신의 무릎 앞으로
우연인 듯 내려앉은 눈부신 미소

나 그렇게 되었으면,

당신이 눈물로 봄을 기다릴 적에
나 먼저 겨울 동산에 녹아
하롱하롱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로

......
아, 나 눈꽃이 되었으면

《26》눈빛

홍수희

당신의 눈빛이
내 마음에 꽂히자마자
퍽, 소리가 났습니다
내 안의 것들이 한꺼번에
풀썩 주저앉는
소리였어요
어떻게 알았지요?
당신은 이미
내 마음을
찬찬히 읽고 있었습니다
감추고 싶었는데
다 들켜버리고 말았어요

《27》능소화 꽃잎에 울다

홍수희


한 발짝만
단 한 발짝만 물러나면
내가 보일텐데요
내 슬픔이 보일텐데요
내 분노의 정체도 보일텐데요
내가 내게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이리도 어려워요
돌아가는 세상이야기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이리도 어려워요
한때는 그리도 쉬워 보이던 것
내 웃음소리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밤낮 이글거리는 머릿속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저 헝클어져 치열한 파도의 소용돌이
잠잠해질 것 같은 데도요
빗줄기 속 불면의 밤들은 아랑곳없이
아스팔트는 뜨겁게 침묵하는데
주홍빛 능소화만 흐드러지게 피었어요
그래서 그런데 눈물만 나요

《28》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홍수희

 사랑으로 아파 본
사람은 안다

사랑은
포기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바램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지우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그 기대가
저 혼자 자라
내 마음의 순수를
갉아먹기 전에

결점이 많은
그대로의 당신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울고 웃는
그대로의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이 어느 날
기대도 없이 등뒤에
감춰둔 꽃다발처럼

놀라운 선물을
고백하도록 사랑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29》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홍수희 

그대의 한숨이 들릴 만큼의
거리에만 서 있을게요

그대의 눈빛이 보일 만큼의
거리에만 서 있을게요

다시는 아프지 않게
너무 가까이 서 있지 않을게요

다시는 아프지 않게
너무 멀리에 서 있지도 않을게요

언제나 이웃해 있는
비오는 날의 두 그루 은행처럼

온몸이 젖어도 외로웁지 않게요
어깨 한 번 으쓱하며 웃고 말게요

《30》마음의 간격

홍수희

전화 몇 번 하지 않았다고
내가 그대를 잊은 건 아니다
너의 이름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이 그대를
영영 떠난 것은 아닌 것처럼
그리운 그대여 부디,
세상의 수치로
우리들의 사랑을 논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그대와 내 마음의 간격
어느 비 오거나 눈 내리는 날에
홀로 뜨거운 찻잔을 마주 한 날에
그 누구도 아닌 네가 떠오른다면
이미 너는 내 곁에 있는 것
우리의 사랑도 거기 있는 것
이 세상 그 무엇도
너와 나 사이
다정한 마음은 어찌하지 못할 테니

《31》머나먼 동행

홍수희

오늘은 나뭇가지 끝에 바람이 매서워요
그 매서움 끝으로 시퍼렇게 날을 세운 슬픔이
가슴께를 콕콕 쑤시고 지나가요

별보다 멀리 사는 그대여,
그대가 거기서 아프면 내가 여기서 아프고
내가 여기서 흐뭇하면 그대가 거기서 흐뭇해요

카시오페이아자리보다도 페가수스자리보다도
머나먼 곳에 사는 그대여, 아프지 마오

《32》바위섬

홍수희

울고 싶다고
다 울겠는가
반쯤은 눈물을 감추어두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
사는 것이
바다 위의 바위섬처럼
종종 외롭고도
그렇게 지친 일이지만
가끔은
네 어깨와 내 어깨를
가만히 대어보자
둘이다가도 하나가 되는
슬픔은 또한 따스하다
울고 싶다고
혼자 울겠는가
반쯤은 눈물을 감추어두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

《33》벚꽃 지는 날

홍수희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니었구나
지천으로 피어 있던 너의 이름도
안아주고 싶었던 너의 슬픔도
눈꽃 같던 눈꽃 같던 너의 참회도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권태로 다가오느니

하늘은 저 하늘에 있는 게 아니었구나
내 마음에 또 다른 우주(宇宙)가 있어
그 곳에 비 내리고 바람이 불면
그 곳에 천둥 울고 벼락이 치면
그리움에 커 가던 나무 한 그루
산산이 부서지어 숯이 되느니

뜨락에 피던 꽃도 꽃이 아니었구나
눈물도 눈물이 아니었구나

《34》별 바라보기

홍수희

너를 보면 알 것 같다
왜 질퍽이는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가물가물 저기 희망이 보이는 건지
새벽은 왜 침침한 어둠의 끝자락을 붙들고서만
조심조심 피어나는지
희망은 절망의 오래된 친구
너를 잡으려하면 슬픔을 먼저 사귀어야 하네

《35》별이 지기 전에

홍수희


사람 속으로 들어갈수록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낯익은 얼굴들이 오히려
낯선 얼굴일 때가 있습니다

밖으로 나갔던 내 마음이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여

문밖에서 오랫동안
쓸쓸하게 서성거리는 날은

키만 멀쑥이 커버린 가로등도
골목에 부끄럽게 숨어버리고

내가 사는 마을에 어둠이 와도
불 밝혀줄 점등인이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일이
나를 잊는 일보다 더 어려워

풀잎처럼 파르르 흔들거리는 날에
별빛 하나 추억처럼 깜박이는데

벗이여, 저 별이 지기 전에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36》봄은 온다

홍수희


봄은 온다
서러워 마라
겨울은
봄을 위하여 있는 것

잿빛으로 젖어있던
야윈 나뭇가지 사이로
수줍게 피어나는
따순 햇살을 보아

봄은 우리들
마음 안에 있는 것
불러주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야

사랑은 저절로
자라지 않는 것
인내하며 가꾸어야
꽃이 되는 것이야

차디차게 얼어버린
가슴이라면
찾아보아 남몰래
움트며 설레는 봄을

키워보아 그
조그맣고 조그만 싹을

《37》봄을 기다리는 그대에게

홍수희

 그대 마음에
봄이 온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자주
벗어버리고 싶었던

사랑의 무게,

어깨를 짓누르던
네 삶의 무게

인내하는 마음에
봄이여, 오시리니

네 영혼에
눈부신 봄이 온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38》봄이 오신다기에

홍수희

창을 열고
먼발치에서
내려다봅니다

오늘도 당신은
잰걸음으로 바쁘게
오가시더니

문득 멈추어 서선
이쪽 창을 물끄러미
올려다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의 시선이
나에게 머무는
시간이라는 것은

당신이
어느 한적한 일요일,
화분에 꽃씨를 심던
시간보다도
훨씬 짧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은 왜 이리
가슴이 설레일까요

저만치
봄이 오신다기에
내 마음 한없이
너그러워져

밤을 새워 벼린
질투의 날이
부드럽게
익어버렸나 봐요

《39》부치지 못한 편지

홍수희

오늘도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나의 하루
지치고 고달펐거늘
그대 생각에 조금은 행복했노라
보지 않아도 내 마음 거기 있노라
꽃은 지고 다시 피나니
이제 기척 한 번 주시기를
나 여기 있다
한 말씀 하여주시기를
때로는 투정 섞어 적어보지만
끝내 부치지 못하는 편지
내 마음 이미 그 곳에 있어
계절의 오고 감이 그저 섧거늘
행여 연약하다 책망하실 까
쓰고서도 부치지 못하는 편지
행여 가벼웁다 눈 흘기실 까
목메여도 부치지 못하는 편지
내 마음 한 켠엔 수북히 쌓여만 가는
그대가 읽어야 할 편지가 있네

《40》사랑의 상처

홍수희

세상 모든 것이 지난다 해도
지나가지 못하고 남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상처는 헛되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너만은 영원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대 마음을 다한
사랑이었다면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상처는 다시
사랑을 남기고

비록 되돌아오지 않는
관심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다시 어디선가
생명을 틔워 내리니

사랑의 상처는 헛됨이 없어
아름다운 끝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41》산다는 것이

홍수희

맨발바닥에 닿는 싸늘한 감촉,
바닥인 줄 알았는데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의 바닥에
그 바닥의 바닥의 바닥에
맨발바닥 닿았는데도
거기도 바닥이 아니었다.

바닥의 심연,
그 심연의 바닥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를 찾을 수 없겠다.

바닥의 심연,
그 심연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가 아니겠다.

산다는 것이
내 영혼의 바닥을 향해
삼가며 삼가며 거듭 삼가며
순례하는 길이란 것을

바닥의 바닥에
바닥의 바닥의 바닥에 이르고서야
더듬어 만져지는 것이다.

《42》새해 아침

홍수희

처음은 그대로 눈이 부셔라
어린 한 해가 태어나는 아침에
찬물로 얼굴을 말갛게 씻고
머리는 단정히 빗어
새벽 미사를 드리러 가는 시간
비누 냄새만 천지 가득하구나
거울 앞에 서면 어차피 낡은 후회는 가고
새날 365일만 어리디 어린 눈빛으로
가슴속을 헤집으며 파고드나니
나를 위해 살던 날은 이제 보내주잔다
우리 서로 너를 위해 살 일만 남겨두잔다

《43》새해 아침에

홍수희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주고서 받을 셈은 잊게 하시고
더 주지 못한 아쉬움만
갖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받고 싶은 한 마디는 잊게 하시고
주어야 할 한 마디만 내내
기억하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창가에는 불빛 하나 걸어두게 하시고
문 두드리는 소리 행여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현란한 겉치레의 행적(行蹟)보다는
관심의 작은 몸짓 하나가
부디 기적의 시작임을 알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격식이나 체면에는 덤덤하게 하시고
진실로 서야 할 자리를 분별하는
견고한 지혜를 허락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일상(日常)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오늘이 곧 영원으로 이어진 길 위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소서.

새해에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사랑만이 삶의 이유가 되게 하시고
오직 사랑만이 내게는 하루의
목적이 되게 하소서.........

《44》섬진강 편지

홍수희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섬진강에 와서 울었다
땡볕 아래
꽃길도 지쳐 지쳐
흐느적 휘청일 때에
단숨에 달려와 바라보는
애잔한 섬진강의 잔물결이여
사랑이
어찌 저절로 되겠는가
상처마저 축복의 붕대로
감싸주어야 하리
다시는 추억도 않으리라
다짐해 놓고
오래 오래 너를 위해
기도하리라
섬진강에 와서
나는 울었다 

《45》송년의 노래

홍수희

 늘
먼저 떠나는 너는
알지 못하리

한 자리에
묵묵히 서서
보내야만 하는 이의
고독한 가슴을

바람에 잉잉대는
전신주처럼
흰 겨울을 온몸에
휘감고 서서

금방이라도
싸락눈이 내릴 것 같은
차가운 하늘일랑
온통 머리에 이고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고 섰는
송년의 밤이여,

시작은 언제나
비장(悲壯)하여라!

《46》슬픔이 지나가네

홍수희

꽃이 피면
지어야 할 때를
꽃이 알듯이

바람이 불면
잦아들 때를
바람이 스스로 알고 있듯이

우리들 사랑도
머무를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알고 있다면

희망이여,
무에 슬픔이고
좌절이고 있겠습니까

있으라 하면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물러나 있으라 하면
물러나 있을 그 자리에

제 자리를
흐뭇이 지키겠으니
조금의 여유인들
부리겠으니

당신은
언제나 내 것,
슬픔은
저만치 지나갑니다  

《47》십자가 아래서

홍수희

고독과 고통을 음미하라!
아주 천천히

그리하여 그곳에서
마침내 단맛이 나게 하라!

그때 비로소,
고독은 기도가 되고
고통은 은총이 되리라!

《48》십자가의 길

홍수희

내가 나를
업고 가는 길입니다
내가 나를
참아주며 걸어가는 길입니다
끊임없이
내가 나를 실망시킬 때에
나에게는 내가
가장 큰 절망이 될 때에
내가 나를 사랑함이
미워하는 것보다 어려울 때에
괜찮다
토닥이며 가는 길입니다
위로하며
화해하며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밖에 서 있지 않고
십자가는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휘청이며 넘어지며
깨닫는 그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내가 나를 만나는 길입니다 

《49》아름다운 선물

홍수희

내 삶에 그대가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자주 만나진 비록 못하여도
못 견디게 외로웁거나
때로 기쁨으로 가슴 벅찰 때
전화를 걸면
언제나 거기 있어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운 사람.

한숨을 지으면
한숨을 짓는 대로
웃음을 웃으면
웃음을 웃는 대로
물어보지 않고도
느끼는 사람
보지 않고서도
나눌 수 있는 사람.

삶이란 그렇게 울고 웃으며
함께 걷는 것이라고
나란히 말할 수 있는
그대는
나에게 소중한 선물...

그대가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50》아름다운 발자국

홍수희

세상
수많은 발자국 속에
흔들리는 발자국 보입니다

때로는 왼쪽으로
때로는 오른쪽으로
때로는 멈추어 서서
방향을 고뇌한 흔적

한참을 선 자리만
지켜보다가 다시 시작한
발자국도 보입니다
삶의 무게에 휘둘려
넘어졌다 일어선
발자국도 보입니다

세상
수많은 발자국 속에
유독 흔들리는
발자국 정겹습니다

세상
직선 위의 발자국 속에
가끔은 뒤돌아본
발자국 아름답습니다

흔들리며 뒤척이며
걸어가는 길, 사랑으로
가는 바로 그 길입니다

《51》아름다운 선택

홍수희

 숨 고르는 길목마다

오던 길도
갈래지어 펼쳐집니다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달콤한 것보다는
오히려 메마른 것을

넘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부족한 것을

평탄한 길보다는
굽고 후미진 길을

아름다운 이여,

이것이 당신께 닿는
외길입니까

《52》아무도 가지 않은 길

홍수희

생각해보니 벗이여,
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너는 지금 걷고 있구나
그대와 같은 생각으로 마음으로
그대와 같은 아픔으로 갈증으로
하물며 그대와 똑같은 형편으로
인생을 걷는 이 결코 없으니
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너는 걷고 있는 게 틀림없구나
그러니 조금은 자부심을 느껴도
괜찮지 않겠나 벗이여,
삶의 무게에 휘청대다가
잠시 주저앉아 먼 산을 바라본대도
눈물짓지 말자 벗이여,
자수刺繡의 어설픈 뒷면을 보고
미리 절망하지는 말자 벗이여,
지금 우리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아무도 대신 그려줄 수 없는
고유한 화폭을 수놓는 중이니

《53》야생화

홍수희

너에겐 그늘이 있었네
눈가 푸르스름한
이미 예고된 그늘이 네게 있었네

깊고 후미진 산 속,
가시 많은 덤불 비집고 나와
함초롬히 이슬 머금고 피어 있는 너

죽음이 없이는 부활 없느니,
온전히 다시 죽기 위하여
낮게 아주 낮게 엎드려 피어 있는 너

단 하루를 산다 하여도
온몸으로 다시 살기 꿈꾸는 너는
은총의 길이 만큼 그늘을 드리운 너는

이 세상 가장 어두운 산 속,
비바람 온통 가슴에 안아
고통을 관통한 화사한 부활이 되고픈 너는

너에겐 그늘이 있었네
눈가 푸르스름한
별빛 흩어지는 그늘이 네게 있었네

《54》오늘은 비

홍수희

하루종일 어두웠다
한낮에도 나는 내 안에 불을 켜지 못했다
어두운 내가 어두운 내 안에서 나와
어두운 하루종일 어둠을 만지작거렸을 뿐이다
역시 어두운 저녁 어두운 여덟 시
여전히 어두운 TV화면이 입을 열었다
마침내 하늘이 단비를 뿌렸습니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졌던 서울에서는
궂은 비가 이어진 가운데
초속 20m가 넘는 돌풍이 불기도 했습니다
특히 강풍특보가 내려진 해안지방에는
최고 초속 30미터가 넘는 돌풍도 불었습니다
비바람에 암흑현상까지 나타나
차량들은 한낮에도 전조등을 밝혀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하늘이 단비를 뿌렸습니다
그제야 환하니 내 안에 불이 들어온다
가뭄으로 쩌억쩍 갈라지던 내 마음의 풍경에도
단비 내리려 하루 종일 어두웠구나
오늘 뒤집힌 우산 아깝지 않구나
세상 버릴 게 아무 것도 없구나
그랬구나 참말 그랬구나

《55》외로움이 말을 건넬 때

홍수희

외로움은
외로움을 알아본다
저를 닮은
얼굴을 알아본다
너의 외로움이
내 안의 외로움에게
끈질기게 말을
건네는 이유가 그것
어깨 위에 바람을 싣고
쓸쓸히 돌아서던
뒷모습이여,
내 안의 외로움이
너의 외로움을 불러 세워
따뜻이 손 잡아주고 싶지만
세상에는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 할
만남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도
있는 것이다
내 안의 외로움이
저를 닮은 외로움에게
눈 시리게 손을 흔든다

《56》우리라는 말은

홍수희

얼마나 다정한가
´우리´라는 말
그보다 따뜻한 말
나는 알지 못하네

눈이 맑은 그대
얼굴 바라볼 때에
외로웁지 않겠네
우리 함께 한다면

너와 내가 혼자
서 있을 때엔
빙산처럼 차가웠던
잿빛 슬픔도

´우리´라는 말 앞에선
봄눈 속의 아지랑이
없던 용기 불쑥
솟아오르네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라는 말
그보다 사랑스런
몸짓 알지 못하네

아무렴 험한 세상
거센 비바람에도
두려울 것 없겠네
우리 함께 간다면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 그 말이
너와 내가 노래하며
다정히 손잡을 때에

눈부시게 웃으며
피어난다네
불꽃보다 뜨거워라
´우리´라는 말

《57》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홍수희 

잊어줄 것은 잊어주자
나무도 한 해를 고개 숙여 감사하며
품었던 아픔 품었던 오해
훌훌 벗어 가볍게 서지 않느냐

한 발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보이지 않느냐
상처 입기 쉬운 우리 마음도
저마다 제 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싸리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비워버린 가슴으로 다시 만나자
바람 씽씽 부는 겨울벌판에 서서
뜨거운 손을 붙잡고 울자

우리 다시 그리운 이름이 되자
한때는 나를 슬프게 했던 사람이여
사람이여,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58》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홍수희

 잊어줄 것은 잊어주자
나무도 한 해를 고개 숙여 감사하며
품었던 아픔 품었던 오해
훌훌 벗어 가볍게 서지 않느냐

한 발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보이지 않느냐
상처 입기 쉬운 우리 마음도
저마다 제 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싸리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비워버린 가슴으로 다시 만나자
바람 씽씽 부는 겨울벌판에 서서
뜨거운 손을 붙잡고 울자

우리 다시 그리운 이름이 되자
한때는 나를 슬프게 했던 사람이여
사람이여,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59》이월 편지

홍수희

어딘가 허술하고
어딘가 늘 모자랍니다

하루나 이틀
꽉 채워지지 않은
날수만 가지고도
이월은 초라합니다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일년 중에
가장 초라한 2월을
당신이 밟고 오신다니요

어쩌면 나를 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날들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더라도

사랑의 싹이 돋아날
여분의 땅을 내 가슴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60》인연

홍수희

아무렴
잘 있겠지 하면서도
자꾸 맘이 켕긴다
한마디
소식 없이 지내면서도
행여 외롭지는 않을까
시선은 자꾸
너의 마음 밭을 서성거린다
물론 네게는
나보다 가까운 사람
곁에 있지만
이래도 저래도
생각 키우는 건
네가 너무 여린 가슴을
지녔기 때문,
부디 행복하여라
언제나
봄날처럼 환히 웃기를
나는 이 쪽
반대편 별 끝에 서서
너를 위해
불 하나 태운다

《61》입추(立秋)

홍수희

너는 또 어드메 깊은 골짝에서
보이지 않는 손 그토록 숨기었다가
자꾸만 흔들며 다가오는가

온 여름을 거부 하여도
그저 느즈막한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가슴 속
차거운 눈물로 찾아오는 이

지나오면 회한은 그 어디에서나
비릿한 흰 앙금으로
슬프게만 맺혀져 오는 것인가

어찌하란 말이냐,
내 좁은 혼(魂) 속엔 다 담지 못할
이다지도 서글픈 그리움이여

움켜쥐기엔 너무 멀어진 기억
나 그대 이토록 아프게 놓아
보다 큰 자유를 불러 보거늘

거부할 길 없는 너는,
어이하여 또 다시 희디흰 두 손
나를 붙잡아 흔들고야
흔들고야 마는 것이냐

《62》장마

홍수희

내리는 저 비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고통 없이는 당신을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압니다
버틸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가슴에 궂은 비 내리는 날은
함께 그 궂은 비에 젖어주는 일,
내 마음에 흐르는 냇물 하나 두었더니
궂은 비 그리로 흘러 바다로 갑니다

《63》진달래

홍수희

그땐 참,
내 마음이 저리
붉었습니다

당신이 지나치며
투욱,
떨어뜨린 불씨 하나가

내 영혼 가파른
벼랑 위로
잘도 활활 타들어
올랐습니다

타들어
오신 길 마저 닿을 듯

아슬한 그리움
문득 철렁이는 아픔
되어도

다시는 그 후
지나치며

투욱,
불씨 하나 떨어뜨려 주지
않으셔도

그땐 참,
이별도 사랑이라 저리
붉었습니다

그땐 참,
눈물도 꽃잎이라 저리
붉었습니다

《64》친구

홍수희

오랜 침묵을 건너고도
항상 그 자리에 있네

친구라는 이름 앞엔
도무지 세월이 흐르지 않아
세월이 부끄러워
제 얼굴을 붉히고 숨어 버리지

나이를 먹고도
제 나이 먹은 줄을 모른다네

항상 조잘댈 준비가 되어 있지
체면도 위선도 필요가 없어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웃을 수 있지
애정이 있으되 묶어 놓을 이유가 없네
사랑하되 질투할 이유도 없네

다만 바라거니
어디에서건 너의 삶에 충실하기를
마음 허전할 때에
벗이 있음을 기억하기를
신은 우리에게 고귀한 선물을 주셨네
우정의 나뭇가지에 깃든
날갯짓 아름다운 새를 주셨네

《65》코스모스가 있는 풍경

홍수희

길이 너를 위하여 있는 것인지
네가 길을 위하여 있는 것인지

하릴없이 기다리다
후여후여 부질없는 허수아비 춤이나
배워 버린 너,

칠 벗겨진 붉은 자전거 하나
휘영청 휘어진 네 허리께에서
곤한 휴식을 취하는 시간

아무도 너의 눈짓을 기억하는 이 없고
버스 정류장 땅거미 쓸쓸히 밀려오는데

부드러운 달빛
마침내 네 창백한 꽃잎에
와서 묻으면,

금세 너는 눈물이 되어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 같은

《66》하고 싶은 말

홍수희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산다
너에게 짧은 안부 묻고 싶어
전화했더니
지금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짧은 안부 묻고 싶은
너에게서 전화 받은 날
나도 지금은 바쁘다고 했다
지나고 보면
왜 그리 바쁜 날이 많았는지
정작 나의 마음이 보이지 않도록
왼손에게는 늘
오른손이 바쁘다고 했다
오른손에게는 늘
왼손이 바쁘다고만 했다
정작 나의 마음이 보이지 않거나
너의 마음이 보이지 않기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산다
스스로 그렇게 바쁘다, 바쁘다,
되도록 이면
마음이 보이지 않기를

《67》행복한 결핍

홍수희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 하나 내게 있으니
때로는 가슴 아린
그리움이 따습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주고 싶은 마음 다 못 주었으니
아직도 내게는
촛불 켜는 밤들이 남아있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올해도 꽃을 피우지 못한
난초가 곁에 있으니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기 때문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내 안에 찾지 못한 길이 있으니
인생은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기 때문
모자라면 모자란 만큼
내 안에 무엇이 또 자라난다

그러고 보니 행복이다

《68》호수

홍수희

먼 길이었네
네게 가는 길
너를 찾아
길을 나설 때마다

늘 낯선 그 길이어서
가는 길
고달프고 외로웠지만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리움도 내게는
병인 까닭에

열 펄펄 끓는 이마로
너를 찾았네
찾으면
네가 거기 있었네

내 눈 속을
네가 들여다보네
네 눈 속을
내가 들여다보네

거기에서
죽지 않는 사랑을 보네
먼 길이었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69》희망과 절망사이

홍수희

살다보면 그런 날 있지 않겠나

다시는 희망이라는 달콤한 입발림에
속고 싶지 않은 날
제딴에는 철저히 속았다 싶어
절망이여 너와 벗하여
휘청이고 싶은 날
찌그러진 깡통처럼 온전히 으깨지고
망가지고 싶은 날
그런 때 뒤를 돌아보게나
희망조차 나에게는 절망이었다는
야릇한 그거,
희망이라 이름 붙인 그것이 바로 안으로는
절망이었다는 아! 아!
아릿한 그거,
이제 이름을 바꿔보게나
나에게는 절망이 이제 희망이라네
희망이 바로 다정한 절망이라네

《70》희망하는 기쁨

홍수희

침묵하는
겨울 산에
새 해가 떠오르는 건

차디찬
바다 위에
새 해가 떠오르는 건

하필이면
더 이상은 꽃이 피지 않을 때
흰 눈 나풀거리는 동토凍土에

이글이글
새 해가 떠오르는 건

가장 어두운 좌절 깊숙이
희망을 심으라는 것

지금 선 그 자리에서
숨어있는 평화를 찾으라는 것

희망하는 기쁨,
새해 첫날이 주는 선물입니다 



'시인들의 시모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안진 시 모음   (0) 2020.03.20
노향림 시 모음   (0) 2020.03.20
조병화 시 모음   (0) 2020.03.20
신달자 시 모음   (0) 2020.03.20
서정윤 시 모음   (0) 2020.03.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