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향림 시 모음 20편
1.가을편지
노향림
안녕하세요? 가을입니다.
발끝까지 풀려버려
허한
빛으로 흩날리고 있군요.
발 밑에
흔적처럼 남은
물이나 쓸쓸함.
기댈 곳 없는 나는 재채기를 쏟아냅니다.
그동안 기대던 가난한 식구와
낡은 가구와 해골 같은 한편의 시를 버리고
등언저리를 모두 비어놓았습니다.
아무 한 일 없이, 누구도 만난 일 없이
가을과 나는 한 몸이어서
다 해진 하늘, 마른 햇볕을 자꾸 쏟아냅니다.
스물스물 빠져나가던 가을은
다시 무엇이 되어 나와 함께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지
어디 들판에 흩어져 있는지
선천성 약질인 폐를 부풀리는 나무 곁에
함께 누워있는지
두리번댑니다.
두리번대도 온통 가을뿐이예요.
씌어질 때 씌어지더라도
씌어지지 않는 단 한 줄의
우리 고통, 안녕!
2.가족
노향림
나는 서투르다.
은행나무 분재를 들여놓아도
곧 낙엽 져 떨어진다.
허리 잘린 그 몸에 아기 손처럼 돋아
하늘을 받들던 잎들이 진다.
그 뒤에 하릴없이,
죄송하다는 듯이 물이나 잔뜩 끼얹어 줄뿐이다.
흙 속에 가늘게 뻗은 뿌리들이 제 몫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3.강변마을
노향림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3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짓보다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거야,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느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레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 중이다.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마음의
블랙홀에 켜놓았다.
나트륨등이 반짝 켜진다.
4.그리운 서귀포1
노향림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맑은 갯벌엔 눈감은 게 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 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 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5.깊은 우물
노향림
그대 가슴에는
두레박줄을 아무리 풀어내려도
닿을 수 없는 미세한 슬픔이
시커먼 이무기처럼 묵어서 사는
밑바닥이 있다.
그 슬픔의 바닥에 들어간 적이 있다.
안 보이는 하늘이 후두둑 빗방울로 떨어지며
덫에 걸린 듯 퍼덕였다.
출렁이는 물 위로
누군가 시간의 등짝으로 떠서 맴돌다
느닷없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소루쟁이 풀들이 대낮에도 괭이들을 들쳐메고
둘러선 내 마음엔
바닥 없는 푸른 우물이 오래 묵어서 숨어 있다
6.꿈
노향림
바다가 앞에 와 있었다
뻘 밭 사이에 처박고 있는
그의 얼굴이 늘 보고 싶었다
신음소리가 귀신이 되어 나오던
집 한 채.
철사토막 같은 손으로
바다소나무들은
양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사람냄새가 그리웠다
긴 복도 끝
육조 다다미房에 복막염으로
나는 누워 있었다
사금파리, 야생초, 생고무 냄새
바람 사이의 흐리한 호얏불,
오래 문 닫힌 대장간에 쌓여 있는
靜寂들이 보고 싶었다
아, 손과 발을 달고 날아다니는
아이들 소리들이 보고 싶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몸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미끈거리는
소금기만이 마음에 가득히
묻어났다
바다는 늘 앞에 와 있었다
7.들길
노향림
잡초 무성한 들판을 걷는다
기억을 잃은 시아버지의
한 달분의 약 처방전 받으러 가는 길
로도핀 아라셉트 치매약 성분의
알약을 삼킨 탓일까
서로 다른 몸짓으로 쑥부쟁이 개쑥
냉이 땅버들도
멍한 낯빛을 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입 속에
가득 넣고 굴린다
흩어지는 햇살이 멀리 양평 쪽 강물 위에
은화銀貨처럼 쏟아져 구른다
그 속을 거꾸로 처박힌 얕으막한 산들이
팔짱을 끼고 비껴서 있다
하반신에 풀이 돋는 바위도 보인다
치유할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면
산풀도 나즈막하게 얼굴이 뜨는 것일까
버드나무가 발바닥 적시며 몸 가렵다고
바람 속에서 박박 긁는 소리
발소리 죽이고 아치형 철제 대문이 슬몃 열린
병원 안마당에 들어선다. 아무도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두 잊은
끝모를 시간만이 고여 있다
8.마루
노향림
마른 걸레로 거실을 닦으며
얇게 묻은 권태와 시간을
박박 문질러 닦으며
미국산 수입 자작나무를 깐
세 평의 근심 걱정을 닦으며
지구 저쪽의 한밤중 누워 잠든
조카딸의 잠도 소리 없이 닦아 준다.
다 해진 내 영혼의 뒤켠을
소리 없이 닦아 주는 이는
누구일까.
그런 걸레 하나쯤
갖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9.새들은 길을 트며 날아간다
노향림
기르던 한 쌍의 새가 날아간 빈 새장엔
피 배인 햇살이 툭툭 떨어져 나뒹글고
뾰족한 부리로 낟알만큼씩 쪼아댄 시간들이
모이통과 함께 한구석에 넘어져 있다
까마득히 날아간 새들이 숨쉬었던 흔적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허공을 뚫고
누구도 넘보지 않을 더 먼 곳
바람만 재빨리 누웠다 일어서는 곳
모든 새들은 온몸으로 길을 트며 날아간다
좁쌀만 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지상은
언제나 원근법의 깊은 아름다움이 파인
3D SF 화면처럼 반짝인다
어느 곳은 연둣빛
어느 곳은 바다 빛
어는 곳은 눈물 빛
10.어느 거장의 죽음
노향림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로 날아들고
연미복 입은 그의 죽지 속에 편안히 안긴다.
새의 부리는 길고 날카롭다.
건반 위에서 무시로 떨리는 손
쾅쾅 마하 광속으로 튀는 빛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땐
어느덧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없다.
불빛 모두 꺼진 뒤에도 音階에 감전된
수형자처럼 그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날이 새도록 앉아 있다
11.엉또폭포
노향림
엉또폭포를 보신 적 있나요?
제주 서귀포시 올레길 7-1코스
엉뚱한, 폭포라는데요.
제주 사투리 엉과 도의 합성어 엉또는
참으로 엉뚱하게도 숨고 싶으면
작은 바위틈이나 굴속에 숨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몸 야위며 있다가
내려가고 싶으면 불쑥 뛰쳐나가
언제든 뛰어 내린다는군요.
자신을 스스로 적막 속에 가둔 자유인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어요.
햇볕 쨍쨍한 날이 계속되면
제 속이 불 속의 명부전처럼 활활 타올라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간밤 몰래 폭우 몇 줄기 기운차게 내리면
폭포가 되어 내 여기 나와 있어요,
천지를 뒤흔드는 폭포소리를
사람들은 갑작스레 듣게 되지요.
콸콸콸콸 쏴아쏴아 콸콸콸콸
12.여름이 가다
노향림
만날 사람도 없이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불쾌하다.
닫힌 얼음집 앞에 빚더미처럼
여름이 엎질러져 있다.
문안에서 누가 톱질을 하는지
새벽에서 밤까지
슬픔들이 토막으로 잘려 나오는 소리.
질이 연한 내 마음이 아프다.
쭈쭈바를 입에 문 아이가
기웃거리다 지나가는 쪽
속이 편안한지, 덜컹거리며 가야 할 길 버리고
시동 걸린 화물트럭이 빈 채로 대기중이다.
큰길 옆 버즘나무 그늘 밑
사람들이 얼굴을 펴면 뜨내기 꽃들의 얼굴에도
햇볕이 환하게 빛났다.
몰래 내다 버린 화분 속에
관절을 앓는 남천이, 은침을 박고 있는
어깨와
겨드랑이에
여름이 환하게 지는 중이다.
13.위로
노향림
내릴 손님이 없어 폐쇄 된
시골 간이역에서
낭자하게 피 흘리는 선홍빛 셀비어 꽃
문득 철길을 따라 걷는 가을이
맨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며
선연한 피들을
닦아주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14.정동진역
노향림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
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
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
파도 소리로 펄럭이면
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
15.제라늄
노향림
어여쁜 이름 제라늄
제철이 지나 잎 다 떨군 마른 가지 끝에 매달려
붉은 혀를 빼물고 간신히 피어 있네요.
생이란 매달려 피어 있는 것이라고
천 길 낭떠러지에서도 피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철 지난 가지 끝의
생각들에게 말을 걸어요.
창틀 없는 창가로 주춤주춤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아 막막하게 뜬 하늘 오래 바라보아요.
저 광대무변한 이천 몇억 개의 별자리를
하나하나 세고 있나요?
환하게 피었다 지는 저 별빛에도
속삭이는 몸짓과 뜨건 피가 함께 흐른다고
마음에 불을 지피는 제라늄
그 주위를 맴돌면서 작디작은 얼룩이
그대의 흐린 눈빛에 어른거려요.
가지 끝에서 툭 꽃잎 떨어지는 소리 환해요.
등 돌려 누운 어둠들이 이 지상을 뒹굴며
가만가만 혀로 핥는 소리
제라늄 제라늄
16.종이학
노향림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엔 신혼 부부가 세들어 삽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결혼식 다음날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는 매일 종이학을 날립니다
한두 마리 날아 오르다가 수십 마리가 우리집 베란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중 몇 마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학을 무엇이 날려주는 지 모른채
나도 마주 손 흔들어 줍니다
어느덧 그녀의 하늘에서 나는 흔들립니다
종이학이 날아올 때마다 덜컹대는 창문,
새로 돋는 아이비 덩굴손도 흔들립니다
허물린 담장 위엔 이승의 보이지 않는
새파란 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매캐한 하늘 속 홀로 있어도
그리움 깊으면 흔들린다는 사실이
황홍해져 또 다시 흔들립니다
불현듯 그대에게 날려보낸 학 한 마리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17.차마고도
노향림
목이 말라야 닿을 수 있는 길
차마 갈 수 없어도
참아 갈 수 있는 길
그런 하늘 길
생각하며 연필화의
흐릿한 연필 끝을
따라가본 것뿐인데
등 뒤가 까마득한 茶馬古道,
茶 대신 소금 한 줌 얻으려고
연필화 끝의 희미한
멀고 먼 나라
비단길 너머
그 너머
18.추억이 마려운 얼굴
노향림
고속도로 휴계소 간이식당에서
찐 감자 몇봉지를 사들고
그는
추억이 마려운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하늘은 눈을 찌를 듯 높고
타고 온 트럭은 등 돌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잠시 벗어 걸어두고
마구잡이로
시간은 그렇게
사람들의 뒷덜미를 끌고
들어갔다
나옵니다
하릴없이 등 돌려 남겨두고 온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찌르레기새처럼 박혀 있고
깡마른 얼굴로
노을이 중얼거립니다.
여기서 늙음까지는 몇리?
19.편지
노향림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멍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20.황조롱이 생존법에 관한 관찰
노향림
강변아파트의 비좁은 환기구 앞에서 비는
황조롱이네 집을 가려주고 내린다.
생존을 향한 새들의 이동에 한여름에도
주인은 환풍기를 틀지 않는다.
몇 날이고 비는 내려서 먹이를 찾지 못한
어미 새는 장마 속에서 버티다가
허공에 한번 치솟았다가 수직강하 하는 것이
생존법이라고 어렵사리 나는 법을
새끼들에게 가르친다.
퍼붓는 빗속에 어미는 허공을 날개 끝에 매달아놓고
앞발을 모으고 고수부지에 사뿐히 내려앉아 보여준다.
배추흰나비와 호랑나비의 찢긴 날개를 찾는 법
이파리에 붙어 떨고 있는 애벌레를 보면
잽싸게 발톱으로 낚아서 솟구치는 법
몇 차례 새끼들은 물어다 준 먹이를 물었다.
황조롱이는 다시 날개를 펴 수직강하 한다.
비가 내리는 어둡고 습한 풀숲에는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와 잔영이 남아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절체절명의
생존법이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