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 모음 41편

1.가을비 소리

서정주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2.가을에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低俗저속에 抗拒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잎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雁行안행-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菊花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白露백로는 霜降상강으로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즘어진 구름은
이제는 楊貴妃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開闢개벽은 또 한번 뒷門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3.견우의 노래

서정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가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홈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 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연 허이연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칠석이 돌아 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4.곶감 이야기

서정주

맨드래미 물드리신 무명 핫저고리에,
핫보선에, 꽃다님에, 나막신 신고
감나무집 할머니께 세배를 갔네.
곶감이 먹고싶어 세배를 갔네.
그 할머니 눈창은 고추장 빛이신데
그래도 절을 하면 곶감 한개는 주었네.
"그 할머니 눈창이 왜 그리 붉어?"
집에 와서 내 할머니한테 물어보니까
"도깨비 서방을 얻어 살어서 그래"라고
내 할머니는 내게 말해주셨네.
"도깨비 서방얻어 호강하는게 찔려서
쑥국새 솟작새같이 울고만 지낸다더니
두 눈창자가 그만 그렇게
고추장빛이 다아 되어버렸지

5.광화문(光化門)

서정주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6.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꽃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7.귀촉도(歸蜀途)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젓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임아

8.기다림

성정주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 굽이를 넘어간 뒤
인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小滿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승의 꿈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인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꺼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9.꽃

서정주

가신 이들의 헐떡이던 숨결로
곱게 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옛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오 ∼ 그 기름 묻은 머릿박 낱낱이 더위
땀 흘리고 간 옛사람들의
노랫소리는 하늘 우에 있어라

쉬여 가자 벗이여 쉬여서 가자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 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여서 가자

맞나는 샘물마닥 목을 축이며
이끼 낀 바윗돌에 턱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볼 하늘을 보자

10.꽃피는 것 기특해라

서정주

봄이 와 햇빛 속에 꽃피는 것 기특해라
꽃나무에 붉고 흰 꽃 피는 것 기특해라
눈에 삼삼 어리어 물가으로 가면은
가슴에도 수부룩히 드리우노니
봄날에 꽃피는 것 기특하여라.

11.내 永遠은

서정주

내 永遠은
물 빛
빛과 香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女先生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뿐 女先生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내려 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의 길이로라
내 永遠은.

12.노을

서정주

노들강 물은 서쪽으로 흐르고
능수 버들엔 바람이 흐르고

새로 꽃이 ? 들길에 서서
눈물 뿌리며 이별을 허는
우리 머리 우에선 구름이 흐르고

붉은 두볼도
헐덕이든 숨 ㅅ결도
사랑도 맹세도 모두 흐르고

나무 ㅅ닢 지는 가을 황혼에
홀로 봐야할 연지 ㅅ빛 노을.

13.눈물나네

서정주

눈물 나네 눈물 나네
눈물이 다 나오시네.
이 서울 하늘에
오랜만에 흰 구름 보니
눈물이 다 나오시네.

이틀의 연휴에
공장 쉬고
차 빠져나가
이 서울 하늘에도
참 오랜만에
검은 구름 걷히고
흰 구름이 떠보이니
두 눈에서
눈물이 다 나오시네.

14.늙은 사내의 詩

서정주

내 나이 80을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깍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깍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깍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은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달래자
마음달래자 마음달래자

15.대낮

서정주

따서 먹으면 자는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强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손에 받으며 나는 ?느니

밤처럼 고요한 끌른 대낮에
우리 둘이는 웬몸이 달어...

16.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17.모란 그늘의 돌

서정주

저녁 술참
모란 그늘
돗자리에 선잠 깨니
바다에 밀물
어느새 턱 아래 밀려와서
가고 말자고
그 떫은 꼬투리를 흔들고,
내가 들다가
놓아 둔 돌
들다가 무거워 놓아 둔 돌
마저 들어 올리고
가겠다고
나는 머리를 가로 젓고 있나니......

18.무등을 보며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 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위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19.무제(無題)

서정주

마리아, 내 사랑은 이젠
네 後光후광을 彩色채색하는 물감이나 될 수 밖에 없네.
어둠을 뚫고 오는 여울과 같이
그대 처음 내 앞에 이르렀을 땐,
초파일 같은 새 보리꽃밭 같은 나의 舞臺무대에
숱한 男寺黨남사당 굿도 놀기사 놀았네만,
피란 결국은 느글거리어 못견딜 노릇,
마리아.
이 춤추고, 電氣전기 울 듯하는 피는 달여서
여름날의 祭酒제주 같은 燒酒소주나 짓거나,
燒酒로도 안 되는 노릇이라면 또 그걸로 먹이나 만들어서,
자네 뒤를 마지막으로 따르는-
허이옇고도 푸르스름한 後光을 彩色하는
물감이나 될 수밖엔 없네.

20.밤이 깊으면

서정주

밤이 깊으면 淑숙아 너를 생각한다. 달래마눌같이 쬐그만 淑숙아
너의 全身전신을,
낭자언저리, 눈언저리, 코언저리, 허리언저리,
키와 머리털과 목아지의 기럭시를
유난히도 가늘든 그 목아지의 기럭시를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서러운 음성을

서러운서러운 옛날말로 우름우는 한마리의 버꾸기새.
그굳은 바윗속에, 황土황토밭우에,
고이는 우물물과 낡은時計시계ㅅ소리 時計의 바늘소리
허무러진 돌무덱이우에 어머니의時體시체우에 부어오른 네 눈망울우에
빠앍안 노을을남기우며 해는 날마닥 떳다가는 떠러지고
오직 한결 어둠만이적시우는 너의 五藏六腑오장육부. 그러헌 너의 空腹.공복

뒤안 솔밭의 솔나무가지를,
거기 감기는 누우런 새끼줄을,
엉기는 먹구름을, 먹구름먹구름속에서 내이름ㅅ字자부르는 소리를,
꽃의 이름처럼연겊어서연겊어서부르는소리를,
혹은 그러헌 너의 絶命절명을

21.벽(壁)

서정주

덧없이 바라보던 벽에 지치어
불과 시계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정지한 '나'의
'나'의 설움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 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벽아.

22.뻐꾸기는 섬을 만들고

서정주

뻐꾸기는
강을 만들고,
나루터를 만들고,

우리와 제일 가까운 것들은
나룻배에 태워서 저켠으로 보낸다.

뻐꾸기는
섬을 만들고,
이쁜 것들은
무엇이든 모두 섬을 만들고,

그 섬에단 그렇지
백일홍 꽃나무 하나 심어서
먹기와의 빈 절간을......

그러고는 그 섬들을 모조리
바닷속으로 가라앉힌다.
만 길 바닷속으로 가라앉히곤
다시 끌어올려 백일홍이나 한 번 피우고
또다시 바닷속으로 가라앉힌다.

23.석류꽃

서정주

춘향이
눈썹
넘어
광한루 넘어
다홍치마 빛으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비 개인
아침 해에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무주 남원 석류꽃을...

석류꽃은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구름 넘어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우리는 뜨내기
나무 기러기
소리도 없이
그 꽃가마
따르고 따르고 또 따르나니...

24.소곡(小曲)

서정주

뭐라 하느냐
너무 앞에서
아- 미치게
짓푸른 하눌.

나, 항상 나,
배도 안고파
발돋음 하고
돌이 되는데.

25.시월이라 상달되니

서정주

어머님이 끊여 주던 뜨시한 숭늉,
은근하고 구수하던 그 숭늉 냄새.
시월이라 상달되니 더 안 잊히네.
평양에 둔 아우 생각 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안 잊히네, 영 안 잊히네.

고추장에 햇쌀밥을 맵게 비벼 먹어도,
다모토리 쐬주로 마음 도배를 해도,
하누님께 단군님께 꿇어 업드려
미안하요 미안하요 암만 빌어도,
하늘 너무 밝으니 영 안 잊히네.

26.신부

서정주

新婦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
郞하고 첫날밤은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
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
다. 그것을 新郞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新婦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면 달아나 버렸읍니다.
그러고 나서 四十年인가 五十年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
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新婦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
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읍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제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
아 버렸읍니다.

27.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 애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려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 두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28.입맞춤

성정주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石榴석류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 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山노루떼 언덕마다 한마릿식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江물은 西天으로 흘러 나려...

땅에 긴 긴 입마춤은 오오 몸서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 우름가치
달드라.

29.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30.찬술

서정주

밤새워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
찬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잣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31.첫사랑의 詩

서정주

초등학교 3학년때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깍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국화밑에 놓아 두곤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32.추석

서정주

대추 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匕首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匕首를 다 녹슬어
시궁장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는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었다가
그 눈썹 꺼내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

33.추일미음(秋日微吟)

서정주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계는 붉은 물이 들었지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34.추천사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35.편지

서정주

내 어릴 때의 친구 淳實이.
생각히는가
아침 山골에 새로 나와 밀리는 밀물살 같던
우리들의 어린 날,
거기에 매어 띄웠던 그네(추韆)의 그리움을?

그리고 淳實이.
시방도 당신은 가지고 있을 테지?
연약하나마 길 가득턴 그 때 그 우리의 사랑을.

그 뒤,
가냘픈 날개의 나비처럼 헤매 다닌 나는
산나무에도 더러 앉았지만,
많이는 죽은 나무와 진펄에 날아 앉아서 지내왔다.

淳實이.
이제는 주름살도 꽤 많이 가졌을 淳實이.
그 잠자리같이 잘 비치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시방은 어느 모래 沙場에 앉아 그 소슬한 翡翠의 별빛을 펴는가.

죽은 나무에도 산 나무에도 거의 다 앉아 왔거든
난들에도 구렁에도 거의 다 앉아 왔거든
이젠 자네와 내 주름살만큼이나 많은 그 골진 사랑의 떼들을 데리고
우리 어린날같이 다시 만나세.
갓트인 蓮봉우리에 낮 미린내도 실었던
우리들의 어린날같이 다시 만나세.

36.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37.피는 꽃

서정주

사발에 냉수도
부셔 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
아주 엷은 구름하고도 이별 해 버려요.
햇볕에 새 붉은 꽃 피어 나지만
이것은 그저 한낱 당신 눈의 그늘일 뿐,
두 번짼가 세 번 째로 접히는 그늘일뿐,
당신 눈의 작디 작은 그늘일 뿐이어니......

38.가벼히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더래도
가벼히 한눈 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어 놓고 가려한다.

39.학(鶴)

서정주

天年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鶴이 나른다.

天年을 보던 눈이
天年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한번 天涯에 맞부딪노나

山덩어리 같아야 할 忿怒가
草木도 울려야할 서름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넘어
누이의 綏틀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

울음은 海溢
아니면 크나큰 齊祀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쭉지에 묻을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땐들 골라 못추랴.

긴 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속을
저, 우름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 다하지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나른다.

40.화사(花蛇)

성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41. 질마재의 노래

서정주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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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시 모음

1.가을날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

예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드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2.내 가슴에 장미를

노천명

더불어 누구와 얘기할 것인가
거리에서 나는 사슴모양 어색하다

나더러 어떻게 노래를 하라느냐
시인은 카나리아가 아니다

제멋대로 내버려두어다오
노래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이냐

밤이면 우는 나는 두견!
내 가슴속에도 들장미를 피워다오

3.당신을 위해

노천명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4.별을 쳐다보며

노천명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5.새해 맞이

노천명

구름장을 찢고 화살처럼 퍼지는
새 날빛의 눈부심이여

'설'상을 차리는 다경(多慶)한 집 뜰 안에도---
나무판자에 불을 지르고 둘러앉은
걸인들의 남루 위에도
자비로운 빛이여

새해 늬는
숱한 기막힌 역사를 삼켰고
위대한 역사를 복중(腹中)에 뱄다

이제
우리 늬게
푸른 희망을 건다
아름다운 꿈을 건다

6.성탄

노천명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는 새벽
어두운 밤을 헤치는 성탄의 노랫소리
집집이 불빛 찬란히 흐르고
사람들 메마름 가슴에 즐거움 깃들였나니
형제여 메리 크리스마스!

인류 구속(救贖)하러 오시는 왕의 왕
베들레헴 가난한 집 마구간으로
겸손히 오신 날
당신의 고초스러운 생---
가시관에 쓴 잔이 약속된 날이어니

땅 위의 영광을 당신에게 돌리나이다
가슴속 헤치며 드는 저 성당 종소리
탕자도 도둑도 당신의 죄 많은 아들들이
성당이 첨탑을 우러러보며 십자를 긋습니다

오는 이 나라 겨레들은
또 하나의 이스라엘 백성

저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소서
주여 외로운 이들에게 강복(降福)하소서
당신의 축복은 우리에게 있어야겠나이다

7.언덕

노천명

창으로 하늘이 들어온다
눈만 뜨면 내다보는 언덕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없다.
오늘도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안 뵌다.

방 안 풍경이 보기 싫어
온 종일 언덕을 바라본다.
사람이 지나가면 눈이 다 밝아진다.

전봇대모양 우뚝 선 사람이 둘
혹시 나 아는 이 아닐까

가슴이 답답하면 언덕을 본다.
눈물이 나면 언덕을 본다.
이방인 같아 쓸쓸하면 언덕을 본다.
언니랑 조카가 보고프면 언덕을 본다.

8.유월의 언덕

노천명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 하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9.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한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기 지나가 버리는 마음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삶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10.저녁별

노천명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하나 나하나 별두울 나두울
논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지 오래
고향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11.푸른 오월

노천명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그에 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미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 할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 메선 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 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 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라도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 나의 태양이여

12.구름같이

노천명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13.길

노천명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가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을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14.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노천명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으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15.묘지

노천명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16.비연송(悲戀頌)

노천명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못엔 오늘도 탑그림자 안 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그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17.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18.사월의 노래

노천명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 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 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19.임 오시던 날

노천명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20.장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21.장미

노천명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 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22.전승의 날

노천명

거리거리에 일장깃발이 물결을 친다
아세아민족의 큰 잔칫날
오늘 싱가폴을 떨어뜨린 이 감격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남양 형제들에게 꽃다발을 보내자
비둘기를 날리자

눈이 커서 슬픈 형제들이여
代代로 너희가 섬겨온 상전 영미는
오늘로 깨끗이 세기적 추방을 당하였나니

고무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나오너라
종려나무 잎사귀를 쓰고 나오너라
오래간만에 가슴을 열고 웃어 보지 않으려나

그 처참하던 대포소리 이제 끝나고 공중엔
일장표의 비행기 은빛으로 빛나는 아침
남양의 섬들아 만세 불러 평화를 받아라

23.봄비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24.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25.女心


새벽하늘에 긴 강물처럼 종소리 흐르면
으레 기도로 스스로를 잊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한번의 눈짓, 한번의 손짓, 한번의 몸짓에도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며
하루를 반성할 줄 아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즐거울 땐 꽃처럼 활짝 웃음으로 보낼 줄 알며
슬플 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주어진 길에 순종할 줄 알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
드릴줄 아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26.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냐,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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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 모음 24편

1. 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2.구성동(九城洞)

정지용

골작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에
누뤼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 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3.그의 반

정지용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문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 식물,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 길 위
나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4.다시 海峽

정지용

正午 가까운 海峽은
白黑痕跡이 的歷한 圓周!

마스트 끝에 붉은旗가 하늘 보다 곱다.
甘藍 포기 포기 솟아 오르듯 茂盛한 물이랑이여!

班馬같이 海狗 같이 어여쁜 섬들이 달려오건만
一一히 만저주지 않고 지나가다.

海峽이 물거울 쓰러지듯 휘뚝 하였다.
海峽은 업지러지지 않었다.

地球우로 기여가는것이
이다지도 호수운 것이냐!

외지곳 지날제 汽笛은 무서워서 운다.
당나귀처럼 悽凉하구나.

海峽의 七月해ㅅ살은
달빛 보담 시원타.

火筒옆 사닥다리에 나란히
濟州島사투리 하는이와 아주 친했다.

수물 한살 적 첫 航路에
戀愛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

5.말

정지용

말아, 다락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6.바람

정지용

바람.
바람.
바람.

늬는 내 귀가 좋으냐?
늬는 내 코가 좋으냐?
늬는 내 손이 좋으냐?

내사 왼통 빨개졌네.

내사 아무치도 않다.

호호 칩어라 구보로!

7.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8.비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서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¹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9.산 너머 저쪽

정지용

산 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우 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 너머 저쪽 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 치는 소리만
서로맞어 쩌르렁!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10.산에서 온 새

정지용

새삼나무 싹이 튼 담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모자 쓰고.

눈에 아름 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이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11.새빨간 기관차

정지용

으으릿 느으릿 한눈파는 겨를에
사랑이 수이 알어질가도 싶구나.
어린아이야,달려가자.
두뺨에 피여오른 어여쁜 불이
일즉 꺼져 버리면 어찌 하자니?
줄 달음질 쳐 가자.
바람은 휘잉. 휘잉.
만틀 자락에 몸이 떠오를 듯.
눈보라는 풀. 풀.
붕어새끼 꾀여내는 모이 같다.
어린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새빨간 기관차처럼 달려가자!

12.석류

정지용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 가는 화로에 숯불,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 겨울 지난 석류열매를 쪼기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녀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 해 시월 상ㅅ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조름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13.슬픈 인상화

정지용


수박냄새 품어 오는
첫여름 저녁때.....

먼 해안 쪽
길옆 나무에 늘어 슨
전등.전등.

헤엄쳐 나온듯이 깜박어리고 빛나노나.

침울하게 울려 오는
축향의 기적 소리... 기적소리...

이국정조로 퍼득이는
세관의 깃 발.깃 발.

세멘트 깐 인도측으로 사폿사폿옮기는
하이얀 양장의 점경!

그는 흘러가는 실심한 풍경이여니..

부질없이랑쥬 껍질 씨비는 시름....

아아, 에시리. 황
그대는 상해로가는구료....

14.옥류동玉流洞

정지용

골에 하늘이
따로 트이고,

瀑布 소리 하잔히
봄우뢰를 울다.

날가지 겹겹히
모란꽃닙 포기이는듯.

자위 돌아 사폿 질ㅅ듯
위태로히 솟은 봉오리들.

골이 속 속 접히어 들어
이내(晴嵐)가 새포롬 서그러거리는 숫도림.

꽃가루 묻힌양 날러올라
나래 떠는 해.

보라빛 해ㅅ살이
幅지어 빗겨 걸치이매,

기슭에 藥草들의
소란한 呼吸 !

들새도 날러들지 않고
神秘가 한끗 저자 선 한낮.

물도 젖여지지 않어
흰돌 우에 따로 구르고,

닥어 스미는 향기에
길초마다 옷깃이 매워라.

귀또리도
흠식 한양

옴짓
아니 ?다.

15.유리창

정지용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 새처럼 날러갔구나 !

2
내어다 보니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앞 잣나무가 자꼬 커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유리를 입으로 쫏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小증기선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누뤼알
아,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뺌은 차라리 연정스레히
유리에 부빈다. 차디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머언 꽃 !
도회에는 고운 화재가 오른다.

16.저녁햇살

정지용

불 피어오르듯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

수저븐 듯 놓인 유리컵
바쟉바쟉 씹는 대로 배고프리.

네 눈은 고만스런 혹 단초
네 입술은 서운한 가을철 수박 한점.

빨어도 빨어도 배고프리.

술집 창문에 붉은 저녁 햇살
연연하게 탄다, 아아 배고파라

17.조약돌

정지용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앓는 피에로의 설움과 첫길에
고달픈 청제비의 푸념겨운 지줄댐과,
꾀집어 아즉 붉어 오르는피에 맺혀,
비 날리는 이국 거리를 탄식하며 헤매노나.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48.춘설

정지용

문 열자 선뚝! 뚝 둣 둣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워라.

옹송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19.風浪夢 1

정지용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끝없는 우름 바다를 안으올때
葡萄빛 밤이 밀려 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물건너 외딴 섬, 銀灰色 巨人이
바람 사나운 날, 덮쳐 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窓밖에는 참새떼 눈초리 무거웁고
窓안에는 시름겨워 턱을 고일때,
銀고리 같은 새벽달
붓그럼성 스런 낯가림을 벗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외로운 조름, 風浪에 어리울때
앞 浦口에는 궂은비 자욱히 둘리고
行船배 북이 웁니다, 북이 웁니다.

20.피리

정지용

자네는 인어를 잡아
아씨를 삼을 수 있나?

달이 이리 창백한 밤엔
따뜻한 바다속에 여행도 하려니.

자네는 유리 같은 유령이 되여
뼈만 앙사하게 보일 수 있나?

달이 이리 창백한 밤엔
풍선을 잡어타고
花粉 날리는 하늘로 둥 둥 떠오르기도 하려니.

아모도 없는 나무 그늘 속에서
피리와 단둘이 이야기 하노니.

21.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22.호면

정지용

손바닥 울리는 소리
곱드랗게 건너간다

그 뒤로 흰게우가 미끄러져 간다

23.호수

정지용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24.紅椿(홍춘)

정지용


椿나무 꽃 피뱉은 듯 붉게 타고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간다.

어린아이들 제춤에 뜻없는 노래를 부르고
솜병아리 양지쪽에 모이를 가리고 있다.

아지랑이 조름조는 마을길에 고달펴
아름 아름 알어질 일도 몰라서
여윈 볼만 만지고 돌아 오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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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시 모음 35편
 
1. 가을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화 꼴 짜기를 지나 마른나무
가지 위에 다른 까마귀 같이

2. 견고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 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슬한 자양
에 스며 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3.꿈을 생각하며

김현승

목적은 한꺼번에 오려면 오지만
꿈은 조금씩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목적은 산마루 위 바위와 같지만
꿈은 산마루 위의 구름과 같아
어디론가 날아가 빈 하늘이 되기도 한다.

목적이 연을 날리면
가지에도 걸리기 쉽만
꿈은 가지에 앉았다가도 더 높은 하늘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목적엔 아름다운 담장을 두르지만
꿈의 세계엔 감옥이 없다.

이것은 뚜렷하고 저것은 아득하지만
목적의 산마루 어디엔가 다 오르면
이것은 가로막고 저것은 너를 부른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 ㅡ 끝 없어
둥글고 둥글기만 하다.

4.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눈물을 지어 주시다.

5. 새해 인사

김현승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굴러라.

건너 뛰듯
건너 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굴러라 발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6.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 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7. 일요일의 미학

김현승

노동은 휴식을 위하여
싸움은 자유를 위하여 있었듯이,
그렇게 일요일은 우리에게 온다.
아침 빵은 따뜻한 국을 위하여
구워졌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즐겁듯이,
일요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집에 온다.
오월은 푸른 수풀 속에
빨간 들장미를 떨어뜨리고 갔듯이.

나는 넥타이를 조금 왼쪽으로 비스듬히 매면서,
나는 音符에다 부협화음을 간혹 섞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 상사에게도 미안치 않은
늦잠을 조을면서,
나는 사는 것에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이레만에 편히 쉬던 신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남이던 내가,
채찍을 들고 명령하고
날카로운 호르라기를 불고
까다로운 일직선을 긋는 남이던 내가,
오늘은 아침부터 내가 되어 나를 갖는다.

내가 남이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요일을 가진 내 나라--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나는 언제나 아름다워 한다.

8. 지각

김현승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9. 희망이라는 것

김현승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상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거리의 노을을 벗기지만 않으면….

희망.
그것은 너의 보석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으면….

희망.
희망은 스스로 네가 될 수도 있다.
다함 없는 너의 사랑이
흙 속에 묻혀,
눈물 어린 눈으로 너의 꿈을
먼 나라의 별과 같이 우리가 바라볼 때…

희망.
그것은 너다.
너의 생명이 닿는 곳에 가없이 놓인
내일의 가교(架橋)를 끝없이 걸어가는,
별과 바람에도 그것은 꽃잎처럼 불리는
네 마음의 머나먼 모습이다.

10. 가을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11. 겨우살이

김현승

마른 열매와 같이 단단한 나날,
주름이 고요한 겨울의 가지들,
내 머리 위에 포근한 눈이라도 내릴
회색의 갈앉는 빛깔,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몇 번이고 뒤적거린
낡은 사전의 단어와 같은……
츄잉 껌처럼 질근질근 씹는
스스로의 그 맛,
그리고 인색한 사람의 저울눈과 같은 정확,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낡은 의자에 등을 대는
아늑함.
문틈으로 새어드는 치운 바람,
질긴 근육의 창호지,
책을 덮고 문지르는 마른 손등,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뜰 안에 남은
마지막 잎새처럼 달려 있는
나의 신앙,
그러나 구약을 읽으면
그나마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12. 겨울 까마귀

김현승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 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워질 수도 있는,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십이월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에 뿌리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울고 있는 소리로,
까아욱∼
깍∼ 

13. 겨울 나그네

김현승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너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 길을 떠나리라.

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장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

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

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 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해의 낙엽들같이
낯설고 친절한 처음 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

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解凍)의 기적 소리 기적처럼 울려와
땅 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14. 고독

김현승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15. 고독의 끝

김현승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도 알게 된다.

신은 무한히 넘치어
내 작은 눈에는 들일 수 없고,
나는 너무 잘아서
신의 눈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잠깐 들렀다가,

내게 숨막혀
바람도 따르지 않는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내가 할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 버린다.

16. 다형(茶兄)

김현승

빈들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

마른 잎과 같은
형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를
두고 두고
나만이 호올로 마신다.


17.동체시대(胴體時代)

김현승

우리는 짧아졌다.
우리는 통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배와 배꼽 아래께서
한여름의 생선처럼
토막 나버렸다.

배는 먹고 또 씨앗을 보존하면서
우리는 마른 통나무로
쌓여 가고 있다.

넝쿨 장미가 그 가슴에서 순 돋아
아름다운 어깨 위로 저 구름에까지
자라가기는 틀렸다.
깊이 생각할 뿌리는 말라,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에게도
남아도는 유희가 없다.

우리는 지금
도끼 옆에 놓여 있다
통나무가 부르는
가장 친근한 이미지는
도끼다.
손바닥에 침 뱉는
든든한 도끼다.

18. 떠남

김현승

떠남 너의 뒷모양은 언제나 쓸쓸하더라.
너는 젊음을 미워하고 사랑을 시기한다.
너는 어머니와 아들같이 친한 사이를 간섭하기를 유달리 좋아하더라.

사람들은 너를 위하여 산을 헐어 길을 닦고
물 위에 배를 띄운다.
너는 왜 아득한 모래 위에 혼자 앉아
로렐라이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느냐.

나는 너를 잘 안다.
너는 나의 검은 머리털의 힘을 빼앗고
네가 사랑하는 보석은 진주나 낙엽보다 눈물이다.
네게 만일 세월의 친절이 없었던들

이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떠남 너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더라.
네 앞에 자연은 빛을 잃고 기적은 사라지며
원수도 뉘우친다.

마음의 집

김현승

네 마음은
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다.
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

나의 피를 뿌리고
살을 찢던
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늑한 품속에선
어린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
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도 같이.

내 작은 손바닥처럼
내 조그만 마음은
이 세상 모든 榮光을 가리울 수도 있고,
누룩을 넣은 빵과 같이
아, 때로는 향기롭게 스스로 부풀기도 한다!

東洋의 智慧로 말하면
가장 큰 것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은 그 가없음을
내 그릇에 알맞게 줄여 넣은 듯,
바래움의 입김을 불면 한없이 커진다.
그러나 나의 지혜는 또한
風船처럼 터지지 않을 때까지만 그것을…

네 마음은
네 안에 있으나
나는 내 마음 안에 살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제 가시와 살보다
제 뿌리 안에 더 풍성하게 피어나듯…

20. 마지막 지상에서

김현승

산 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지평선을 넘어갔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21. 만추의 시

김현승

먼저 웃고
먼저 울던
시인이여
끝까지 웃고
끝내 울고 갈
시인이여

한 세대에 하나밖에 없는
언어를 잃은 시인이여

역사의 애인인 그대여
그대 영혼에게
까마귀와 더불어 울게 하라.
마지막 빈 가지에 호올로 남아
울게 하라
울게 하라
길고 ∼ 또 깊이 ∼ 

22. 무등차(茶)

김현승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23. 보석

김현승

사랑은 마음의
보석은 눈의
술.

어느 것은 타오르는 불꽃과 밤의 숨소리가
그 절정에서 눈을 감고.

어느 것은 영혼의 의미마저 온전히 빼어 버린
깨끗한 입술

그것은 탄소(炭素)빛 탄식들이 쌓이고 또 쌓이어
오랜 기억의 바닥에 단단한 무늬를 짓고.

그것은 그 차거운 결정(結晶) 속에
변함 없이 빛나는 애련한 이마아쥬.

그리하여 탄환보다도 맹렬한 사모침으로
그것은 원만한 가슴 한복판에서 터진다.

나는 이것들을 더욱 아름답고 더욱 단단한
하나의 취(醉)함으로 만들기 위하여,
불붙는 태양을 향하여 어느 날
이것들을 던졌다.

그러나 이 눈의 눈동자, 입을 여는 혀의 첫마디,
이 적과 같이 완강한 빛의 맹세는
더 무너질 것이 없어,
날마다 날마다 그 빛의 뜨거운 품안에서
더욱 더 새롭게 타는 것이다.

24. 절대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는.

25. 창

김현승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십이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26. 파도

김현승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27.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28. 행복의 얼굴

김현승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29. 희망

김현승

희망,
어두운 땅 속에 묻히면
황금이 되어
불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깜깜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너의 희망,
아득한 바다에 뜨면
수평선의 기적이 되어
먼 나라를 저어 가고,

너의 희망,
나에게 가까이 오면
나의 사랑으로 맞아
뜨거운 입술이 된다.

빵 없는 땅에서도 배고프지 않은,
물 없는 바다에서도
목마르지 않은
우리의 희망!

온 세상에 불이 꺼져 캄캄할 때에도,
내가 찾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 끝으로
희망에서 불을 붙여 온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때에도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
우릴 빼앗을 수 없는 우리의 희망!

우리에게 한 번 주어 버린 것을
오오, 우리의 신(神)도 뉘우치고 있을
너와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30. 감사

김현승

감사는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寶石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納辯의 詩로...... .

31. 길

김현승

나의 길은
발을 여이고
배로 기어간다
五月의 가시밭을.

너의 길은
빵을 잃고,
마른 혀로 입맞춘다
七月의 황톳길을.

그대의 길은
사랑을 잃고,
꿈으로만 떠오른다
十月의 푸른 하늘을.

우리의 길은
머리를 잃고,
가는 꼬리를 휘저으며 간다
山河에 머흘한 구름 속으로.

32. 내일

김현승

나는 이렇게 내일을 맞으련다.
모든 것을 실패에게 주고,
비방은 원수에게,
사랑은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에게......

나의 잔에는
천년의 어제보다 명일(明日)의 하루를
넘치게 하라.

내일은 언제나 내게는 축제의 날,
꽃이 없으면 웃음을 들고 가더래도.......

내일,
오랜 역사보다도
내일만이 진정 우리가 피고 가는
풍성한 흙이 아니냐?

33.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34. 바다의 육체(肉體)

김현승

푸른 잉크로 시를 쓰듯
백사장의 깃은 물결에 젖었다.

여기서는 바람은 나푸킨처럼 목에 걸었다.
여기서는 발이 손보다 희고
게는 옆으로 걸었다.

멀리 이는 파도-- 바다의 쟈스민은 피었다 지고,

흑조빛 밤이 덮이면
천막이 열린 편으로
유성들은 시민과 같이 자주 지나갔다.
별들은 하나하나 천년의 모래 앞에 씻기운
천리 밖의 보석들......

바다에 와서야
바다는 물의 육체만이 아님을 알았다.

뭍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파도에서 배운 춤을 일깨우고,
내 꿈의 수평선을 머얼리 그어 둘 테다!

나는 이윽고 푸른 바다에 젖는 손수건이 되어
뭍으로 돌아왔다.

35. 오월의 그늘

김현승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
밝음에 너는 옷을 입혔구나
우리도 일일이 형상을 들어
때로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 밝음, 이 빛은
채울 대로 가득히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그늘―너에게서……

내 아버지의 집
풍성한 대지의 원탁마다
그늘,
오월의 새 술들 가득 부어라!

이팝나무―네 이름 아래
나의 고단한 꿈을 한때나마 쉬어 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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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옥 시 모음 70편

 

《1》

괜찮아 그대만 있으면 

 

서명옥

 

잔잔한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지만 

그대 마음은 흔들림이 없고 

 

시선 머무는 곳에 

예쁜 장갑 하나 그대 시린 

손에 끼워 주고 싶다

 

자주 볼 수 없어 

그리운 마음뿐이지만 

외로움도 기다림도 

괜찮아 그대만 있으면……

 

《2》

그 날처럼 

 

서명옥

 

꼭 비 온다는

약속은 없지만

내 가슴엔 비가 내린다

 

이유 없이

사람이 그리운 날

어느 간이역 기다림은 꽃이 되고

 

어두운 창가

별빛만 가득한데

못내 아쉬운 짧은 여운

《3》

그 사람 

 

서명옥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 사람은 내 맘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바람 같은 사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보고파지면 익숙해진 

그 길을 따라 먼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스러운 눈빛 

머리 쓰다듬어 주는 손길 속에 

그 사람만 생각하는 내가 돼버렸습니다

 

어찌하나요 눈감아도 

눈을 떠도 떠오르는 그 사람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내 맘 그대는 알까요 

☆★☆★☆★☆★☆★☆★☆★☆★☆★☆★☆★☆★

《4》

그대 생각 

 

서명옥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는 

가슴속 묻어둔 사랑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그냥 좋아요 

 

혹여 기다림에 지쳐 

내가 먼저 부르거든 살짝이 왔다가 

가실 때는 그대 마음만 두고 가세요

 

잠시라도 그대 흔적 

지워질까 포근히 내 몸을 

감싸면 되살아나는 불꽃 연정 

 

하얗게 밤을 지새워도 

난 괜찮아요 어둠은 걷히고 그대를 

만날 수 있는 내일이 있으니까요

☆★☆★☆★☆★☆★☆★☆★☆★☆★☆★☆★☆★

《5》

그대가 있는 아침 

 

서명옥 

 

작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봄비 오는 소리

 

나무 아래 

놓인 의자 그리움이 

앉아 있네 

 

이때쯤이면 

기다려지는 

다정한 목소리 

 

즐거운 하루를 

알려주는 참 좋은 기분

그대가 있는 아침

☆★☆★☆★☆★☆★☆★☆★☆★☆★☆★☆★☆★

《6》

그대는 기분 좋은 사람

 

서명옥

 

화사한

봄꽃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요

 

수놓을 만큼

하늘은 파랗고

산새들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면

어느새 그리움은

가까이 다가오는데

 

토라져도 즐겁고

즐거워서 행복한 그대는

기분 좋은 사람입니다

☆★☆★☆★☆★☆★☆★☆★☆★☆★☆★☆★☆★

《7》

그래도 될까요 

 

서명옥

 

옅은 분홍빛

커튼을 젖히면

창문 틈새 부는 바람

봄을 알리는 소리

 

꿈결 귓전에

들리는 음성 나도 몰래

눈을 떠보면 언제인지

좋은 아침이라는 문자

 

오랜 인연이었다고는 하나

보고 있어도 더 보고 싶은 사람

애틋한 기억만 되살아나는데

 

오늘 밤에도

그대 마음속으로

살포시 들어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

《8》

그런 날도 있더라 

 

서명옥

 

내게 주어진 

하루가 훌쩍 지나가고 

 

지친 몸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은 날 

 

소박한 저녁 밥상에 

지난 얘기 나누며 

같이 웃어 줄 수 있는 사람 

 

늦은 밤 

작은 벤치에 앉아

 

밤새도록 함께 

있고 싶은

그런 날도 있더라 

☆★☆★☆★☆★☆★☆★☆★☆★☆★☆★☆★☆★

《9》

그런 날이 있습니다 

 

서명옥

 

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홀로 있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짓누르는

무거운 어깨

훌훌 던져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다만 가을이 

슬프지 않은 것은

함께 가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

《10》

그렇게 사는 거야

 

서명옥

 

보고 싶을 때

허물없이 찾아가

눈빛만 봐도 맘이 통하는 사람

 

비싼 커피 아니면 어때

음식점 후식 커피 마시며

세상 얘기 다 들어주는 사람

 

인생사는 게 별거 있겠어

서로 위해 주며 사는 거지

 

아프면 위로해 주고

힘들면 토닥여 주고 서로 보듬어 

주며 그렇게 사는 거야

☆★☆★☆★☆★☆★☆★☆★☆★☆★☆★☆★☆★

《11》

그리운 사람 하나 

 

서명옥

 

왜 그런지 오늘밤에는

잠이 올 것 같지 않네

창밖에 하얀 눈이 올 것 같아서

 

이런 날 가끔 내 맘속에 

찾아와 주는 손님 같은

그대는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작은 탁자 위에

그리운 사람 하나

웃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면 듣고 싶은

임의 목소리 날 울리게 하네 

☆★☆★☆★☆★☆★☆★☆★☆★☆★☆★☆★☆★

《12》

그리움은 바람을 타고 

 

서명옥

 

창문 밖 풍경이

따사로워 그리움이 

짙어지는 날 

 

꽃이 피는 봄날은 

오고 흘러가는 구름 보면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내 마음 한 자락 

그대 뜨락에 기웃거리면 

그리움은 바람을 타고 

 

두근거리는 

이내 맘 그대 넓은 

가슴으로 잠재워 주소서

☆★☆★☆★☆★☆★☆★☆★☆★☆★☆★☆★☆★

《13》

기다림의 꽃 

 

서명옥

 

멀거나 가깝거나

약속된 만남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꽃 송이 헤아리며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기다림의 꽃

 

재촉하는 마음

얼마를 더 견뎌야

너를 볼 수 있을까 

☆★☆★☆★☆★☆★☆★☆★☆★☆★☆★☆★☆★

《14》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

 

서명옥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더라도

다정한 눈빛 고운 사람이 되고 싶다

 

혹여 화나는 일이

슬픈 일이 있더라도

속내 감추며 웃는 사람이 되고 싶고

 

기쁠 때 함께이기보다는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

 

허름한 찻집이라도

분위기 띄워 주며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그저 에쁘게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

☆★☆★☆★☆★☆★☆★☆★☆★☆★☆★☆★☆★

《15》

길 위의 인생 

 

서명옥

 

기약 없이 만났다가

싫어지면 떠나는 그런 슬픈

인연이 아니었음 좋겠습니다 

 

가끔 허한 빈자리 

채움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주는 

그런 사이였음 좋겠습니다

 

살다가 살다가

더러 힘든 날이 오면

아낌없는 용기와 힘을 주는

든든한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후회 없이

살며 사랑하며 길 떠나는 인생 

마지막까지 두 손 놓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16》

꽃잎 연서 

 

서명옥 

 

아름다운 

꽃도 때로는 빗물에 

젖어 보고 싶겠지 

 

누가 봐 주지 

않아도 가끔은 바람에 

흔들려도 보고 

 

펼쳐지는 

꽃잎에 고운 사연 적어 

내 마음 띄워 보내면 

 

달콤한 속살거림

이것이 행복이라 말하리

보내는 이에게 

☆★☆★☆★☆★☆★☆★☆★☆★☆★☆★☆★☆★

《17》

날마다 좋은 그대

 

서명옥

 

이슬 먹고 자란

한 송이 꽃 그댈 위해

피었답니다

 

그 꽃망울 터트리기

위해 숱한 밤을 지새웠고

쓰다만 편지지엔 하얀 그리움 가득

 

부르면 올 것만 같고

다가서면 안길 것 같은

날마다 좋은 그대 

☆★☆★☆★☆★☆★☆★☆★☆★☆★☆★☆★☆★

《18》

내 마음 가져가세요

 

서명옥

 

들 뜬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날

열린 창문으로 향긋한

바람 불어오면

 

작은 탁자 위에

사진 하나 참 좋은 인연

그리움 키우며 지샌 밤이

몇 날이던가

 

아직도 못다 한 말

가슴속 깊이 남았는데

부탁해요 기회는 지금

내 마음 가져가세요

☆★☆★☆★☆★☆★☆★☆★☆★☆★☆★☆★☆★

《19》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서명옥

 

하루의 여정길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 사는 사람이 있지요

 

부재중 전화도

볼 틈도 없이 긴 하루가

끝나면 어느새 어둠이 찾아오고

 

늘 그렇듯이

애틋한 그리움이 몰려오는 시간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꾹꾹 숫자를 누르면

다정한 목소리에 심쿵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 

☆★☆★☆★☆★☆★☆★☆★☆★☆★☆★☆★☆★

《20》

내 마음의 뜨락에서 

 

서명옥

 

한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겨울 이별을 앞두고

먼지 쌓인 수첩 속

빛바랜 사진 꺼내 놓고

 

울컹대는 마음

잔작에 잘해줄 걸

작은 후회가 밀려드는 밤

 

내 마음의 뜨락에선

너를 향한 마음이

편지를 쓰게 만든다

☆★☆★☆★☆★☆★☆★☆★☆★☆★☆★☆★☆★

《21》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서명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단점이 있어도 보고도 

못 본척 해야만 합니다 

 

단점을 들추다 보면 

애틋한 마음이 잠깐은 

사라지기 때문이겠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작은 허물조차도 

참아주는 속 깊은 사람 

 

가끔 미안해지는 마음 

더 잘해주고 싶어 손 내밀면 

살며시 다가와 손잡아 주는 

그대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

《22》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서명옥

 

바쁜 틈을 타

언제라도 안부 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꼭 할말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보고 싶다고

다정히 말 건네면

웃어 주는 사람입니다

 

맑은 날보다

햇빛 찡그린 날

빗방울 떨어지면

 

조그마한 찻집에서

얘기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 그립습니다

☆★☆★☆★☆★☆★☆★☆★☆★☆★☆★☆★☆★

《23》

너에게 가는 길 

 

서명옥

 

자주 볼 수 없어도

매일 주고받는 말 한마디

애틋한 정이 쌓이고

 

그저 느낀 대로

진실한 마음 건네고 나면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가끔 그리우면 

하늘 한 번 쳐다봤지만

봄빛이 아름다워 너에게 가는 길

 

차창 밖 봄의 미소가

나를 설레게 한다

☆★☆★☆★☆★☆★☆★☆★☆★☆★☆★☆★☆★

《24》

너에게 보내는 편지

 

서명옥 

 

외로움으로 잠 못 이룰 때

너를 만나 빈 가슴 채울 수 있었다

 

쓸곳이 없어 공간 못 채운 편지지

너로 인해 밤새 칸을 빼곡히 쓸 수 있었고

 

무심히 내다 본 밤하늘에 별빛도

지금은 네 생각으로 하나 둘 세면서

네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지붕 위에 능소화 꽃 

너와 나를 위해 웃어주던 날

이토록 행복함은 네가 있기 때문 

 

널 기억하고

문득 생각날 때 한 통의 전화로

외로운 맘 달래봤으면 

☆★☆★☆★☆★☆★☆★☆★☆★☆★☆★☆★☆★

《25》

네가 보고 싶던 날 

 

서명옥

 

보고 싶었다고

속깊은 얘기 나눴어도

돌아서면 쓸쓸한 날이 있지

 

차 한잔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도 신나지 않는 건

네가 곁에 없기 때문일까

 

아무런 생각 없이 

네가 머무는 하늘 바라보면

가슴은 먹먹해지고

 

스치는 자동차

불빛 따라 다가서는

네 모습이 그립다

☆★☆★☆★☆★☆★☆★☆★☆★☆★☆★☆★☆★

《26》

눈송이 같은 그대

 

서명옥

 

야윈 나뭇가지 위

밤새 하얀 눈꽃이 피었네요

 

그러길 몇 번

아마도 임 그리워 피는

꽃 같아 나도 몰래 서성입니다

 

달콤한 말 한마디

외로움 눈녹듯 사라지고

 

같은 하늘 아래

나만의 뜨락에 사는

눈송이 같은 그대

당신 겨울은 따뜻한가요

☆★☆★☆★☆★☆★☆★☆★☆★☆★☆★☆★☆★

《27》

눈을 감으면 

 

서명옥

 

긴 하루의 여정길 

곱게 문을 닫고 

지친 몸 하늘에 뉘면 

 

귓가에 들리는 

다정한 별의 속삭임 

노곤함이 사라진다 

 

눈을 감으면 

어느 틈에 왔다 갔는지 

머리맡에 놓인 그리움 연서 

 

보고 또 보아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 

너를 향한 이 마음

어찌하면 좋을까 

☆★☆★☆★☆★☆★☆★☆★☆★☆★☆★☆★☆★

《28》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

 

서명옥 

 

아무런 목적 없는 

만남일지라도 

찰나의 기대감은 있다 

 

오늘은 내가 뜻하는 

하루를 만들어줄까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 생각뿐

 

타고난 성격은 고칠 순 

없지만 그녀에게만은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

☆★☆★☆★☆★☆★☆★☆★☆★☆★☆★☆★☆★

《29》

당신과 함께 하는 봄 

 

서명옥 

 

아침 햇살 

맑은 공기 마시며 

차 한 잔에 당신을 그려봅니다 

 

그냥 할 말 없어도 

목소리 듣고 싶어 버튼을

누르면 다정한 목소리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좋은데 

지금 봄이 오는 소리 들리나요

 

못 견디게 그리워

불러보는 한 사람

당신도 내가 그립지는 않나요 

☆★☆★☆★☆★☆★☆★☆★☆★☆★☆★☆★☆★

《30》

당신이 있어 참 좋다

 

서명옥

 

힘들 때

당신의 말 한마디가

내겐 힘이 되고

 

달콤한 말로 

잘해주기 보다는

진실한 마음이 더 좋다

 

언제나 나만을

생각하고 함께 마음 나누는

당신이 있어 참 좋다

☆★☆★☆★☆★☆★☆★☆★☆★☆★☆★☆★☆★

《31》

따뜻한 동행 

 

서명옥

 

당신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당신의 작은 어깨 위에

기대고 싶은

날도 있습니다

 

가끔 위로받고 싶은 날

포개진 마음 따뜻한

동행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늘 함께할

사람 있어 별 하나 없는 밤도

외롭지 않습니다

☆★☆★☆★☆★☆★☆★☆★☆★☆★☆★☆★☆★

《32》

먼 훗날에 우리는 

 

서명옥

 

꼭 할 말이 있어서도 아닌

묻고 싶은 말도 없는데

그냥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날은 눈이 좋다고

비가 오는 날은 보고 싶다고

언제든지 목소리 들려주고 싶은 사람

 

가끔 무심한 듯 소식 없으면

서운해지고 아픈 데는 없는지

걱정되는 사람

 

이렇게 가슴속 연정

품고 사는 우리는 먼 훗날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

《33》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서명옥

 

처음엔 

안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자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몇 날 며칠 

아무도 모르게 

분홍빛 연서 써놓고 

 

밤하늘 별빛 보며 

뒤척이던 밤

 

어느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있어 

그저 행복해 하는 나입니다 

☆★☆★☆★☆★☆★☆★☆★☆★☆★☆★☆★☆★

《34》

바람 편에 띄우는 연서

 

서명옥

 

힘들게 쌓아논 

모래 탑 바람에 무너질까

너를 품고 산 세월

 

가끔 힘들면

하늘 한번보고

구름 속을 헤매어도

 

네가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세월 가도

놓지 못할 인연

지울 수 없는 너이기에

 

하나도 남김없이

내 모든 걸 주고 싶은 맘

바람 편에 실려보낸다

☆★☆★☆★☆★☆★☆★☆★☆★☆★☆★☆★☆★

《35》

별이 된 그대 

 

서명옥

 

어쩌다 오는

그리움이라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을 터인데

 

온종일 내 가슴속에

사는 그대는 내 생각도 

하시는지 묻고 싶어요

 

해는 기울어

석양에 노을이 지면

찻잔 속에 어리는 얼굴

 

별이 된 그대

꿈이어도 좋아요

이 밤 함께할 수 있다면

☆★☆★☆★☆★☆★☆★☆★☆★☆★☆★☆★☆★

《36》

봄날의 수채화 

 

서명옥

 

너에게 가는 동안

난 천사가 되어 마음 기부하는 

착한 사람이 된다

 

하찮은 풀꽃도

길가에 작은 돌멩이도

예쁘고 소중해 보인다

 

내게 오는 봄내음도

오늘따라 향기롭다

 

그런날이 매일 있었으면

이런 행복이 자주 생겼으면

 

네가 좋아하는 

향기 품은 연서 가슴에 안고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

《37》

봄바람 불면 

 

서명옥

 

하던 일 멈추고

잠시 그대 생각에 잠기면

자꾸만 멍해지는 기분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길을 걸어보지만

허무한 마음뿐

 

애틋한 기다림은

어제 오늘이 아니건만

 

행여나 그대 오실까

서쪽 하늘 바라보면

알싸한 이 가슴엔

봄바람만 불어오네 

☆★☆★☆★☆★☆★☆★☆★☆★☆★☆★☆★☆★

《38》

봄비 닮은 그대 

 

서명옥 

 

좁다란 길목

작은 탁자 위에

새겨진 이름 하나

 

누가 볼까

애틋한 마음 흐르는

빗물에 내 사연 띄우고

 

고운 인연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할 봄비 닮은 그대

☆★☆★☆★☆★☆★☆★☆★☆★☆★☆★☆★☆★

《39》

사는 동안

 

서명옥 

 

뜨락에 빨간 장미

한 잎 따다 작은 꽃병에 

꽂아 놓고 

 

밤이 오길 기다려 

향기 품은 연서 

누군가에게 보내면

 

생각만 해도 

벅차오르는 뿌듯함 

너무나 소중해

 

생이 다 하는 날까지 

누구도 걷지 않은 길 

힘차게 달린다 언제나 널 위해 

☆★☆★☆★☆★☆★☆★☆★☆★☆★☆★☆★☆★

《40》

사람이 좋아지는 이유

 

서명옥 

 

스치는 인연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듯

 

잘 지내느나고

아프진 않냐고 가끔

안부 전해주는 사람이 좋다

 

그냥 해 보고 싶은 거

가보고 싶은데 가는 거

행복이란 게 별거 아니더라

 

차 한잔에 인생 쓴맛도

배우며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나는 좋더라 

☆★☆★☆★☆★☆★☆★☆★☆★☆★☆★☆★☆★

《41》

사랑의 수채화 

 

서명옥

 

잊는다고

잊혀질 이름이라면

가슴속에 넣고 살진

않았을 겁니다

 

지운다고 지워질

그리움이라면

매일 수첩 속에 간직하진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먼 하늘 바라보며

추억에 젖어보곤 하는데

 

그대 있는 곳에도

비는 내릴까요

빗방울 하나에 그대를 위한

사랑의 수채화 그리고 싶어요

☆★☆★☆★☆★☆★☆★☆★☆★☆★☆★☆★☆★

《42》

세월이 흘러도 늘 좋은 사람

 

서명옥 

 

보여지는 마음보다

보이지 않는 속마음이 고운

사람이 있습니다

 

다정한 얼굴로 누구에게나

살갑게 대하는 그 사람에게선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요

 

하루가 훌쩍 지나

어두운 밤이 찾아와도

외롭지 않는 건 말없이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당신은

늘 좋은 사람입니다

☆★☆★☆★☆★☆★☆★☆★☆★☆★☆★☆★☆★

《43》

소중한 약속 

 

서명옥 

 

보이지 않을 때 

그리워하는 사람보다는 

눈앞에 있을 때 소중한 사람이 되자 

 

하룻밤 지나면 

잊혀지는 사람이기 보다는 

늘 가슴속에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

 

원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바라는 것 없이 주는 마음이면 좋겠다

 

살다가 힘든 날이 오면 

투정 부리기보다는 토닥여주며 

묵묵하게 우리 이렇게 살자 

☆★☆★☆★☆★☆★☆★☆★☆★☆★☆★☆★☆★

《44》

아직도 널 

 

서명옥

 

긴 긴 여름 날 

뜻밖의 더위도 

네가 있기에 더운 줄 몰랐다 

 

소리 없이 

익어가는 하얀 밤도 

너만 생각하며 웃을 수 있었고 

 

추운 겨울 

창문 틈새로 부는 

시린 바람도 견딜 수 있는 건

너와의 언약 때문이리라 

 

아침 햇살 

눈부시게 밝아오면 

언제나 널 부르는 소리 

가시질 않는 긴 여운 

☆★☆★☆★☆★☆★☆★☆★☆★☆★☆★☆★☆★

《45》

아직은 꽃이고 싶다 

 

서명옥

 

길섶에 피어있는

들꽃도 향기가 있듯이

나 자신을 가꿀 줄 아는

고운 여인이 되고 싶다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인생살이

즐거운 날만 있으랴만은

 

그래도 사는 날까지

웃음 주고 기쁨 받는 

사랑스런 여자가 되고 싶다

 

오늘같이 좋은 날

만남 뒤에 긴 여운

내일이면 지워질지라도

언제나 그대만의 꽃이 되고 싶다 - 

☆★☆★☆★☆★☆★☆★☆★☆★☆★☆★☆★☆★

《46》

알고 있나요 

 

서명옥

 

새벽 빗소리 잠 깬 아침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그대라는 걸 

 

함께 함이 행복이라 

뒤돌아서면 휑한 빈자리

그 날 밤은 잠 못 이룬다는 거 

 

덩그러니 놓여있는 

숲 속 작은 의자 

홀로 앉고 싶지 않아 

 

이름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 줄 것 같은 예감 

 

그렇게 기다리는 마음 

그댄 알고 있나요

☆★☆★☆★☆★☆★☆★☆★☆★☆★☆★☆★☆★

《47》

어쩌면 좋을까 

 

서명옥

 

그렇게도 기다렸던

하얀 눈은 오건만 그날처럼

마음 같이할 그대는 먼 곳에 있고

 

나뭇가지 흔드는

매서운 바람은 가슴속을

후비고 지나가는데

 

어쩌면 좋을까

가로등 불빛 아래

그대 그리워 나도 몰래

별만 헤는 밤 

☆★☆★☆★☆★☆★☆★☆★☆★☆★☆★☆★☆★

《48》

언제나 그대는 

 

서명옥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만 보아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말없이

애써 숨기려 해도

내 마음을 알아버린 사람입니다

 

피곤함 풀어주는

다정한 목소리 따스한 웃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 겨울이 온다 해도

언제나 그대는 변하지 않는

내 인생의 꽃입니다

☆★☆★☆★☆★☆★☆★☆★☆★☆★☆★☆★☆★

《49》

우리가 만난 날에는

 

서명옥

 

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무수히 많은 기다림 속에서 

우리가 만난 날에는 

그저 기쁨을 주는 시간이 되자 

 

그리움에 슬픔의 

눈물을 흘렸을지라도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자 

 

만나면 헤어짐이 싫고 

또다시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오랜 시간 흘러도 변함 없는 

하얀 정 꽃피우는 우리가 되자

☆★☆★☆★☆★☆★☆★☆★☆★☆★☆★☆★☆★

《50》

이런 날도 있더라 

 

서명옥

 

저만치 와 있는 봄 

겨울 이별은 아직 먼 듯 

꽃바람 부는 날 

 

함께 하는 

사람 있어 하루가 즐겁고 

마음 머무는 곳 

 

그리움이 먼저 

달려와 차 한잔 마시고 싶은 

이런 날도 있더라

☆★☆★☆★☆★☆★☆★☆★☆★☆★☆★☆★☆★

《51》

이런 오늘이 좋다 

 

서명옥

 

새 소리가 

아침잠을 깨우고 

 

열린 창문가엔 

향긋한 바람이 분다 

 

한 잔의 커피가 

내 입술을 적시면 

 

온다네 불어온다네 

봄바람에 그대 향기가. 답글 | 신고 

☆★☆★☆★☆★☆★☆★☆★☆★☆★☆★☆★☆★

《52》

이런 우리가 되자 

 

서명옥 

 

어느 바람이 몰고 온 

향기인지 향수 같은 비누 냄새 

코끝을 자극한다 

 

차츰차츰 익어가는 

빨간 사과 풋풋함은 없어도 

단맛 나는 것처럼 

 

그대와 나

점 점 닮아가는 모습

긍정의 힘은 하나 되어

 

함께 가는 길

더러는 힘이 들어도 

감싸주고 배려하는 

이런 우리가 되자 

☆★☆★☆★☆★☆★☆★☆★☆★☆★☆★☆★☆★

《53》

인생의 소중한 벗이 있다면

 

서명옥

 

날마다 기억하지

않아도 늘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가 잘 통해

긴 이야기 나누면서

정이 든 사람이지요

 

만나지 않아도

그 마음 알 수 있고

부르지 않아도

내 곁에 머무는 사람

 

이렇게 좋은 벗 하나가

내 인생에 최고의 선물입니다

☆★☆★☆★☆★☆★☆★☆★☆★☆★☆★☆★☆★

《54》

장미 한 송이 

 

서명옥 

 

꽃비 내리는 날 작고 아담한 

어느 간이역에 가 보셨나요 

 

그곳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 

하나같이 표정이 밝아요 

아마도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겠죠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다 

하여도 사랑이라면 애달픈 그리움 

 

만약에 그대가 먼저 

부른다면 언제든지 달려갈게요 

 

혹여 고백이라도 

하신다면 잠깐만요 제가 먼저 

장미 한 송이 드릴게요 

☆★☆★☆★☆★☆★☆★☆★☆★☆★☆★☆★☆★

《55》

진실한 사랑은 

 

서명옥 

 

어울림 속에서 

둘이 또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건 

사랑하는 거래요

 

건네는 말 한마디 

꾹꾹 눌러 담은 애틋함과 

걱정이 담겨있는 것은 그만큼 

생각하는 마음이 큰 것이래요 

 

가끔 힘이 들 때 

위로의 말보다 가만히 

기다려 주는 게 진실한 사랑인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만남은 기다림을 

배우게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대가 내게 준 선물인 것을……

☆★☆★☆★☆★☆★☆★☆★☆★☆★☆★☆★☆★

《56》

집 하나 짓고 싶다

 

서명옥

 

우연히 길을 걷다

멋진 풍경을 만나면

마음 한 자락 내려 놓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벗 하나 만나

삶의 이야기 나누고 싶다

 

아침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다정스레

눈빛 마주하고

 

저녁이면 해지는

노을 바라보며 사랑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에 집 하나 짓고 싶다

☆★☆★☆★☆★☆★☆★☆★☆★☆★☆★☆★☆★

《57》

참 좋다 오늘 

 

서명옥

 

부드러운 바람

따스한 햇살과 구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아카시아 꽃향기

뜨락에 장미 모두 다

사랑스런 오월의 향기

 

조금 부족해도

나눔의 시간 소중히 담고

돌아오는 길엔

 

너도 웃고 나도 웃고

덩달아 하늘도 웃었던

오늘이 참 좋다

☆★☆★☆★☆★☆★☆★☆★☆★☆★☆★☆★☆★

《58》

추억을 걷다 

 

서명옥

 

작은 노트 하나

책장을 넘기면 빼곡히

담겨진 그날의 사연들

 

그리움은 무채색이라

마음에 담아두지만

추억은 꺼내볼 수 있어

또다시 그 길을 걷는다

 

긴 시간을 두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야

하는 우리는 

 

언제쯤 그리움

접어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

《59》

편해서 좋은 사람 

 

서명옥

 

맑은 하늘에

물감으로 수채화 그림

그리고 싶은 날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그리운 사람

얼굴을 그린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편해서 좋은 사람

 

가끔 힘들어할 때

속마음 감추고 등 뒤에서

꼭 안아주고 싶은데

그대는 안녕하신가요 

☆★☆★☆★☆★☆★☆★☆★☆★☆★☆★☆★☆★

《60》

평생 만나고 싶은 사람 

 

서명옥

 

삶의 한 모퉁이에서

외롭거나 힘들 때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햇살 좋은 창가에

마주 앉아 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편지로 대화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성격은 다르지만

맘이 통하고 생각이 깊어

내 맘을 헤아려주는 참 좋은 인연

 

인생의 길목에서

평생 만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

《61》

풍경 같은 하루 

 

서명옥

 

밤하늘별을 세다

하얀 밤 꼬박 세우고 

눈부신 아침을 맞는다

 

눈빛만 보아도

가슴 떨리던 그때 그날들

그런 날이 몇 날이었던가

 

뜨락에 핀 아카시아

꽃향기 머리에 이고

발길 따라 걷는 길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정 지을까

콧노래 절로 나는

풍경 같은 하루 

☆★☆★☆★☆★☆★☆★☆★☆★☆★☆★☆★☆★

《62》

하늘빛 그리움 

 

서명옥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은 

뭉클해지고 

 

늘 등뒤에서 

말없이 지켜주며 

더 없는 마음 베푸는 사람 

 

마주하지 않아도 

두고두고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예감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는 사람이기에 

수많은 날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하늘빛 그리움

☆★☆★☆★☆★☆★☆★☆★☆★☆★☆★☆★☆★

《63》

한사람 

 

서명옥

 

늦가을 찬 서리 내리고

뜨락 자작나무엔 

가슴 시린 바람이 분다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표현도 없이

그렇게 가을은 여운만 남길 테지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하얀 백지에 내 마음 담아

고운 빛 연서 그대에게 보내고

 

나만 알고 싶고

나만 부르고 싶은 그 이름

오직 한 사람 

☆★☆★☆★☆★☆★☆★☆★☆★☆★☆★☆★☆★

《64》

한층 깊어진 삶 

 

서명옥 

 

바쁜 일상 속 고단함을 

화려한 조명과 함께 내 몸을 

맡기고 현란하게 춤을 추고 싶다 

 

나이 듦에 주위 시선 

의식하게 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를 위해 살고 싶다 

 

한층 깊어진 삶 

가끔 흔들리며 사는 것도 

일상에서 조금 비껴가는 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추운 겨울 내 삶의 

봄날을 위해 오늘도 하루의 

길 위에서 행복을 찾아간다 

☆★☆★☆★☆★☆★☆★☆★☆★☆★☆★☆★☆★

《65》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서명옥

 

찬바람 가르며

낙엽이 뒹구는 가을 길을

당신과 함께 걸으면

 

마음 안에 스며드는 행복

그것은 나만의 기쁨

 

늦은 밤 내 목소리

듣고 싶다며 잘 자라는 인사는

애틋한 당신 마음이 스며있고

 

오래된 고목 나무처럼

묵묵히 내 곁을 

지켜봐 주는 당신이 좋아서

 

내 마음 살짝 숨겨놓고

숨박꼭질도 해보지만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

《66》

항상 그 자리에 

 

서명옥

 

우리가 사는 세상 

녹녹치 않지만 

꿈이 있다면 살만한 거지 

 

물질로 인정받는 세상 

조금 못 가진들 어떠리 

마음 편한게 제일인 거지 

 

초심으로 돌아가

욕심 다 내려놓고 

마음 비우니 살만한 세상 

 

멈추지 않는 세월 

붙잡진 못해도

나는 항상 그 자리에 

☆★☆★☆★☆★☆★☆★☆★☆★☆★☆★☆★☆★

《67》

휴식 같은 그대 

 

서명옥

 

하루의 시작과

저물어 가는 여정길도

그대만 생각하면 기분 좋아지고

 

이른 아침 반가운

첫 인사로 내 마음 들뜨게 하는

비타민 같은 사람

 

속내를 털어놔도

편안하게 들어주고

말없이 챙겨주는 고마운 사람

 

단 하루도 잊은 적 없고

어딜가도 따라다니는

휴식 같은 그대가 있어

 

준비없이 가을은 와도

결코 외롭진 않을 이 순간

내일의 희망을 걸어봅니다 

☆★☆★☆★☆★☆★☆★☆★☆★☆★☆★☆★☆★

《68》

겨울 창가에서 

 

서명옥

 

눈은 오질 않고

창문 틈새로 부는 바람

따뜻함이 그리운 계절

 

세파에 동요되지 않고

살아온 삶 겨울이 춥다 한들 

마음마저 추울까

 

열심히 살아온 인생길

내게 사랑을 듬뿍 주어야지

그리고 꿋꿋하게 걸어야겠다

☆★☆★☆★☆★☆★☆★☆★☆★☆★☆★☆★☆★

《69》

뜨락에 머무는 가을

 

서명옥

 

하얀 달빛이

창문가로 비추면

환한 웃음 짓는 얼굴 하나

 

잡으면 멀어질 것 같고

멀어지면 다가와 내 마음속에

머무는 사람

 

흐린 날이건 

맑은 날이건

늘 똑같은 기다림이건만

 

어제와 다른 오늘

뜨락에 머무는 가을

아쉽게도 짧은 시간 긴 여운

☆★☆★☆★☆★☆★☆★☆★☆★☆★☆★☆★☆★

《70》

부치지 않은 편지 

 

서명옥

 

항상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

거침없이 살아온 내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오래된 바위틈

이끼 위에 새겨진 이름 하나

멀리서 바라만 봐도 좋은데

 

송두리째 흔들던

구멍 난 가슴 갈바람에

씻겨질까 두려워

 

형광등 불빛 아래

조곤조곤 써 내려간

부치지 않은 편지 어떻게 전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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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를 보내고

 

이정하 

 

너를 보내고, 

나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찻잔은 아직도 따스했으나 

슬픔과 절망의 입자만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리석었던 내 삶의 편린들이여, 

 

언제나 나는 뒤늦게 사랑을 느꼈고 

언제나 나는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그대가 걸어갔던 길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툭 내 눈앞을 가로막는 것은 

눈물이었다. 

 

한 줄기 눈물이었다. 

 

가슴은 차가운데 눈물은 왜이리 뜨거운가. 

 

찻잔은 식은 지 이미 오래였지만

내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내 슬픔, 

내 그리움은 이제부터 데워지리라. 

 

그대는 가고, 

나는 갈 수 없는 그 길을 

나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할까 

안개가 피어올랐다. 

 

기어이 그대를 따라가고야 말 

내 슬픈 영혼의 입자들이. 

☆★☆★☆★☆★☆★☆★☆★☆★☆★☆★☆★☆★

《2》

작은 기도

 

이정하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게 하소서 

그리움으로 가슴 아프다면 

그 아픔마저 행복하다 생각하게 하소서 

그리워할 누가 없는 사람은 

아플 가슴마저도 없나니

 

아파도 나만 아파하게 하소서 

둘이 느끼는 것보다 몇 배 도하더라도 

부디 나 한 사람만 아파하게 하소서 

간구하노니 

이별하고 아파하는 이 모든 것

그냥 한번 해보는 연습이게 하소서 

다시 만나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다시는 헤어져 있지 않게 하기 위한 

그런 연습이게 하소서 

☆★☆★☆★☆★☆★☆★☆★☆★☆★☆★☆★☆★

《3》

가까운 거리

 

이정하

 

그녀의 머리냄새를 맡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라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댄 이런 나를 타이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함께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여전히 난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왜 우린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해야 하는지.

왜 서로보다 하고 있는 일이 먼저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을 위해 지금은 참자는 말,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

《4》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이정하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가는 만큼 

그대가 멀어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내가 다가가면 

그대는 영영 

떠나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떠나간 뒤, 

그 상처와 그리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더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한 순간 가까웁다 

영영 그대를 떠나게 하는 것보다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오래도록 그대를 

바라보고 싶는 마음이 더 앞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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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늠할 수 없는 거리

 

이정하

 

가까운 것 같아도

사실,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이겠습니까.

 

그대와 나 사이,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겠습니까.

 

가늠할 수 없는 그 거리,

 

그대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오늘은 아픔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그리운 것,

갖고픈 것을 멀리 두어야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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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이정하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울지 마

내 시월의 창들아

그 슬픈 눈으로

곱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지 마

너의 흔들리는 그 눈빛으로

세상의 모든 빛을 끌 수 있다면

네 투명한 마음속에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너에게 악수를 건네리

 

슬퍼하지마

내 시월의 창들아

이렇게 넓은 세상 속에서

또 낙엽은 지고

연인들은 쓸쓸히 헤어지고

저만치서

이별과 절망의 발자국을 뚜벅뚜벅 울리며

겨울은 걸어오고 있는데...

이제 우리, 두꺼운 외투를 하나씩 준비하자 

그대와 나의 오랜 이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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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간격

 

이정하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엄청난 것도아니면서

늘 그것은 일정하게 뻗어 있어

나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서로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 물도

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남을

 

그대와 나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나중에는 한 몸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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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이정하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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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대 긴 그림자

 

이정하 

 

잊을게요

그대가 말했지만

그게 아닌 눈빛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애써 기다려 

우리 가슴이 식을 수 있다면

애초에 그댈 

만나지도 않았었겠지요

 

사랑했어요

그대가 말했지만

아무 대답 못 하고 

난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처럼 

서로 다가 갈 수가 없는 것인지

깊어질수록 

왜 가혹한 형벌이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애닯다

내 가는 길 

묵묵히 돌아서는 내 뒷모습은 

그대에게 어떤 상처로 남을까

그대를 떠나오면서 

난 보았습니다

내가 떠난 빈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쓸쓸히 

무너지는 그대 긴 그림자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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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이정하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또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만

어김없이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그런 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해 봅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 준 모든 것들,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는지요.

언젠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 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내 그리움들을 모조리 쏟아 부어 놓고, 펑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서입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 없는 당신이여.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김없이

돌려주어야 나는 비로소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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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정하

 

눈을 뜨면 문득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

불도 켜지 않는 구석진 방에는

혼자 상심을 삭이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정작 그런 날 함께 있고 싶은 그대였지만

그대를 지우다 지우다 끝내 고개 떨구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지금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내 한 몸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는데도

하루종일 그대 생각에 잠겨

단 한 발짝도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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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를 만났습니다.

 

이정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반갑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방금 만나고 돌아오더라도 

며칠을 못 본 것 같이 허전한 

그를 만났습니다.

 

 

내가 아프고 괴로울 때면

가만히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를 만났습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어디 먼 곳에 가더라도 

한 통의 엽서를 보내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그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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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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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다린다는 것 

 

이정하

 

귀향하는 열차를 기다립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또한

곁에 있건 없건 그 대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뜻.

일의 결과를 기다리고,

해가 뜨고 지길 기다리고,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

끝내는 죽음마저 기다리는,

그리하여 기다리는 그 순간이 모여

우리 삶이 되질 않았던가.

그 중에서도 내 가장 소중한 기다림, 그대여.

내 인생의 역에 기차가 거짓말처럼 들어와 서고,

그대가 손을 흔들며 플랫폼으로 내려설

그 눈부신 시간을 기다리네.

기다리고 또 기다리네.

그대여, 어서 오기를.

그래서 먼 여행 끝의 피곤함을

모두 내게 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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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다림의 나무

 

이정하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가는 그대는 바람이었네.

 

세월은 덧없이 흘러 

그대 얼굴이 잊히어 갈 때쯤

그대 떠나간 자리에 나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그대를 기다리리.

 

눈이 내리면 늘 빈약한 가슴으로 다가오는 그대.

잊혀진 추억들이 눈발 속에 흩날려도

아직은 황량한 그곳에 홀로 서서

잠 못 들던 숱한 밤의 노래를 부르리라.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서글펐던 지난날의 노래를 부르리라.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갔던 그대는 바람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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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길의 노래 

 

이정하

 

너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때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것도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것보다 

묵묵히 너의 뒷모습이 되어 주는 것도 

너를 향한 더 큰 사랑인줄을 알겠다.

 

너로 인해 너를 알게 됨으로 

내 가슴에 슬픔이 고이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네가 있어 오늘 하루도 넉넉하였음을.. 

 

네 생각마저 접으면 

어김없이 서쪽하늘을 붉게 수놓은 저녁해.

자신은 지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주는 

 

그 숭고한 헌신을 보며, 

내 사랑 또한 고운 빛깔로 마알갛게 번지는 

저녁 해가 되고 싶었다. 

 

마지막 가는 너의 뒷모습까지 

감싸줄 수 있는 서쪽 하늘, 

그 배경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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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꽃 잎

 

이정하

 

그대를 영원히 간직하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어쩌면 그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쓸데없는 집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 마음마저 버려야

비로소 그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음을..

 

사랑은 그대를 내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것임을..

 

오늘 아침 맑게 피어나는 채송화 꽃잎을 보고

나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꽃잎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햇살을 받치고 떠 있는 자줏빛 모양새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씨앞을 잉태하는, 

 

그리하여 씨앗이 영글면 훌훌 자신을 털어 버리는

그 헌신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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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끝끝내 

 

이정하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 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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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이정하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나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어떤 날은

꿈 속에서도 불안했다. 

 

며칠 못 보아도 불안했고

자주 만나도 불안했고

함께 있어도 

마음이 안 놓였던 것은 

그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가면 갈수록 벌어지는 

'현실'이란 틈새.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그 작은 틈새가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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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이정하

 

슬픈 사랑아 

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내 가진 것은 빈손뿐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대 하나 가진 것만 못한데 

슬픈 사랑아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해지는 

이 그리움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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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가 웃잖아요 

 

이정하

 

그대가 지금 뒷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기에 

나는 괜찮을 수 있지요. 

 

그대가 마시다가 남겨 둔 차 한 잔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듯이 

그대 또한 떠나 봤자 

마음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을 수 있지요. 

 

가세요 그대, 내가 웃잖아요. 

너무 늦지 않게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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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가 할 수 없는 한가지 

 

이정하

 

세상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을 꼽으라면 

그건 바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대는 나보고 사랑하지 말라 하시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대에게 더 목매단다는 것을 

 

물은 물고기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수 있지만 

물고기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당신 대수롭지 않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그 차이가 

내 슬픔의 시작인 것을 

 

그러니 그대는 그저 모른척 해 주십시오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한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내겐 곧 

숨쉬며 살아가는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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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눈 오는 날 

 

이정하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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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눈물겨운 너에게 

 

이정하 

 

나는 이제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다 그 사랑이 다해 버리기보다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이 다해 버리기보다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해 

오래도록 그대를 내 안에 두고 싶습니다 

아껴가며 읽는 책, 아껴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그대를 끄집어내기로 했습니다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인 그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지워지지만 

그대 이름만을 내 가슴속에 

오래 오래 영원히 남아 있길 

간절히 원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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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정하 

 

창가사이로 촉촉한 얼굴을 내비치는 햇살같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이마에 입맞춤하는 

이른 아침같은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모카 향기 가득한 커피 잔에 

살포시 녹아 가는 설탕같이 부드러운 미소로 하루시작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분히 흩어지는 벗꽃들 사이로 

내 귓가를 간지럽히며 스쳐가는 봄바람같이 

마음 가득 설레이는 자취로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마른 포도밭에 떨어지는 봄비 같은 간절함으로 

내 기도 속에 떨구어지는 눈물 속에 숨겨진 사랑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영원히 사랑으로 남을.. 

어제와 오늘.. 아니 내가 알 수 없는 내일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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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돌아가는 길

 

이정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아니라

그대를 돌아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갈수록 그대와 멀어지는 길.

차마 발걸음 떨어지지 않는 그 길을

나는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그대에게 가는 길을 모르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수천 번도 더 갔던 길이라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었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만치 멀리 서 있는 당신

당신은 아시는지요?

그대에게 가지 못해 슬픈 게 아니라

그대에게 갈 수 없어 슬펐다는 것을.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빈 몸뚱어리로

그저 발만 내딛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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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동행 

 

이정하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혼자였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기대도 싶은 때 그의 어깨는 비어 있지 않았다

잡아줄 손이 절실히 필요할 땐

그는 저만치서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산다는 것은 결국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 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혼자서 걸어 가야하는 것이다

들어선 길 이상 멈출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다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내 삶에 절실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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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무소유

 

이정하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마라

그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에 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을 했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 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사랑은 그처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다.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우리는 상처를 입는다.

나무들을 보라

그들도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지 않은가 

함께 서 있으나 너무 가깝게 서 있지 않는 것.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그늘을 입히지 않는 것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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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부끄러운 사랑 

 

이정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 듯싶은데 

난 그때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고 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나에게는 머언 나라의 종소리처럼 느껴집니다 

한때는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야기할 수 없는 

 

당신들의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때 

분식집 구석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런 여자였지요. 

공무원도 해보고 사무실에도 있어 보았지만 

그 돈으로는 동생들 학비조차 되지 않더라고 

밤마다 흠뻑 술에 젖는 

그런 여자 였지요. 

 

그녀를 만나고서부터 

내겐 막니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막니가 생겨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그녀에게서 느꼈을 때 

그녀는 이미 먼 길 떠난 뒤였지요. 

 

사랑이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부끄럽습니다. 

숲속 길을 둘이 걷고 

조용한 찻집 한 귀퉁이에 마주 앉아 

귀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믿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주어도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아직 난 잘 모르고 있으므로 

내게 아픈 막니를 두고 떠나간 그 여자처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댈 수 있게 

한쪽 어깨를 비워 둘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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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부르면 눈물날 것 같은 그대

 

이정하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부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대의 이름이 있습니다

 

별이 구름에 가렸다고 해서 

반짝이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대가 내곁에 없다고해서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랑엔 

늘 맑은 날만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구름이 끼여 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만약 구름이 없다면 

어디서 축복의 비가 내리겠습니까 

어디서 내 마음과 그대의 마음을 

이어주는 무지개가 뜨겠습니까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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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비 오는 날의 일기 

 

이정하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요

하루종일 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어린 날 내마음은

어느 후미진 찾집의 의자를 닮지요.

비로소 그대를 떠나

나를 사랑할 수 있지요.

 

안녕 그대여,

난 지금 그대에게

이별을 고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요.

당신을 만난 그 날 비가 내렸고,

당신과 헤어진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으니

 

안녕, 그대여.

비만 오면,

소나기라도 뿌리는 이런 밤이면

그 축축한 냄새로

내 기억은 한없이 흐려집니다.

그럴수록 난 당신이 그리웁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안녕 그대여,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요.

비가 오면 왠지

그대가 꼭 나를 불러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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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 

 

이정하 

 

미리 아파하지 마라.

미리 아파한다고 해서

정작 그 순간이 덜 아픈 것은 아니다

 

그대 떠난다고 해서

내내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만 있지 마라.

퍼낼수록 더욱 고여드는 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현관문을 나서 가까운 교회라도 찾자.

그대, 혹은 나를 위해 두 손 모으는 그 순간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미리 아파하지 마라.

그립다고 해서

멍하니 서 있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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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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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랑이라는 이름의 길

 

이정하

 

세상엔 수도 없이 많은 길이 있으나 

늘 더듬거리며 가야하는 길이 있습니다. 

 

눈부시고 괴로워서 눈을 감고 가야 하는 길, 

그 길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행로입니다. 

 

그 길을 우리는 그대와 함께 가길 원하나 

어느 순간 눈을 떠보면 나 혼자 힘없이 

걸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그대가 먼저 

걸어가는 적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의 길은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형벌의 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햇빛 따사로운 아늑한 길이 저 너머 펼쳐져 있는데 

어찌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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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사랑이란 이름의 종이배 

 

이정하

 

1

때때로 난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또한 알고 싶었다.

당신은 당신의 아픔을 자꾸 감추지만

난 그 아픔마저 나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2

그러나 언제나 사랑은

내 하고 싶은 대로하게끔

가만히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내 손을 벗어난 종이배처럼

그저 물결에 휩쓸릴 뿐이었다.

내 원하는 곳으로 가주지 않는 사랑

잔잔하고 평탄한길이 있는데도

굳이 험하고 물살 센 곳으로 흐르는 종이배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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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사랑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정하 

 

 

살다 보면

사랑하면서도 끝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둘이 함께 도망을 가십시오.

몸은 남겨 두고 마음만 함께.

현실의 벽이 높더라도,

그것을 인식했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이지만 어찌합니까.

현실을 외면한 사랑은 두 사람이 다치기 십상인데.

나만 아플 테니 그대는 이 자리를 피하십시오.

먼저 가 있으면 언젠가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혹시 못 가게 되더라도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고, 

또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니.

☆★☆★☆★☆★☆★☆★☆★☆★☆★☆★☆★☆★

《37》

 

삶의 향기

 

이정하 

 

당신의 삶이 단조롭고 건조한 이유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될 때가 있습니다. 

 

또는 아주 가슴아픈 일로 인해 

가슴이 시려오는 때도 있으며, 

주변의 따뜻한 인정으로 인해 가슴이 훈훈해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기쁘고, 살아 있기 때문에 

절망스럽기도 하며, 

살아 있기 때문에 

햇살이 비치는 나뭇잎의 섬세한 잎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삶이 단조롭고 건조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내가 살아 있음을 느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는 얼마나 살 만한 것인지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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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로 사랑한다는 것 

 

이정하

 

당신은 아는가,

그를 위하여 기도할 각오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시작이라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이 컴컴한 어둠 속에 내가 그냥 있겠다는 것은

내 너를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정녕 아는가,

그리하여 사랑은 자기 것을 온전히 줌으로써

비워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완성된다는 것을.

☆★☆★☆★☆★☆★☆★☆★☆★☆★☆★☆★☆★

《39》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가슴앓이 

 

이정하 

 

나로 인하여

그대가 아프다면

서슴없이 그대를 떠나겠습니다.

 

사랑이 서로에게

아픔만 주는 것이라면

언제라도 사랑으로 떠나겠습니다. 

 

우리 사랑은

어쩌면 당신 방에 있는

창문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문은 문이로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하염없이 바라만 보아야 하는

창문 같은 것, 

 

그대여,

이제 그만 커튼을 내리세요.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 나를

너무 야속하다 생각지 마세요. 

 

떠남이 있어야 

돌아옴도 있는 것

난 단지 그때를 위해

준비하는 것뿐이랍니다.

☆★☆★☆★☆★☆★☆★☆★☆★☆★☆★☆★☆★

《40》

 

 

 

세상의 수많은 사람중의 한 사람 

 

이 정 하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었거든 

사랑했다 말하지 말고 

떠날 일입니다. 

떠난 다음에는 고개를 돌리지 말고 

쓸쓸히 걷는 모습 또한 

보여 주지도 말 일입니다 

서로 가는 길이 틀릴지라도 

이 땅 위에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나는 

그대에게 상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의 삶에 힘겨운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 진정 나를 떠났거든 

내가 있었다는 기억마저 

잊어 버릴 일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우리, 

인연이 끊기지 않아 어쩌다 길 모퉁이에서 

마주치면 세상의 수 많은 사람중의 한 삶이 

거니 가볍게 생각할 일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의 앞날을 

기꺼이 축복할 수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될 일입니다. 

이별했다고 해서 서로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남아 있지 말일입니다

☆★☆★☆★☆★☆★☆★☆★☆★☆★☆★☆★☆★

《41》

스스로 빛나는 별 

 

이정하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린 그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 

나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습니다. 

저 수많은 별들이 각기 제 나름의 이름을 가지고 

제 나름의 모습으로 빛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제 나름의 이름으로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가 빛납니다. 

누가 호명해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빛나는 별. 

그 별처럼 우리의 이름도, 

우리의 삶도 스스로 반짝거렸으면 좋겠습니다.

☆★☆★☆★☆★☆★☆★☆★☆★☆★☆★☆★☆★

《42》

슬픔의 무게

 

이정하

 

구름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만한 힘이 없을 때

비가 내린다.

 

슬픔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만한 힘이 없을 때

눈물이 흐른다.

 

밤새워 울어본 사람은 알리라.

세상의 어떤 슬픔이든 간에

슬픔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눈물로 덜어내지 않으면

제 몸 하나도 추스릴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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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어디까지가 그리움인지

 

이정하

 

걷는다는 것이 우리의 사랑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대가 그리우면 난 집밖을 나섭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난 그대 생각을 안고 새벽길을 걷습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부터가 이별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따뜻함이 

절실할 때입니다. 

 

새벽길을 걷다보면 사랑한다는 말조차 

아무런 쓸모 없습니다. 

 

더도 말고 적게도 말고 그저 걷는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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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어디에도 없는 그대 

 

이정하

 

그대라는 두 글자엔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그대라고 부르기만 해도 

금새 내 눈이 젖어오는 건 

아마도 우리 사랑이 

기쁨이 아닌 슬픔인 탓이겠지요 

 

지금 내 곁에 없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리운 그대여

 

이렇게 깊은 밤이면 

더욱더 보고 싶어지는 그대여

 

그대는 아십니까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내내 당신에게 

흘러가고 있는 강이 되었다는 것을 

쉬임 없이 당신을 향해서 흐르고 있는 

사랑의 강이 되었다는 것을

 

그 강의 끝간 데에 아마 노을은 지리라

새가 날고 바람은 불리라

 

오늘밤쯤 

그대의 강가에 닿을 수 있을는지

막상 달려가 보면 망망대해인 그대

어디에도 없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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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이별 노래 

 

이정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46》

저녁 길을 걸으며 

 

이정하

 

해질 무렵, 오늘도 나는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그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니, 또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없기도 합니다.

아픈 우리 사랑도 길가의 코스모스처럼

한 송이의 꽃을 피워 올릴 수만 있다면

내 온 힘을 다 바쳐 곱게 가꿔 나가겠지만

그것이 또 내 가장 절실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무작정 거리에 나서

그대에게 이르는 수천 수만 갈래의 길을 

더듬어 보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여름, 무던히 내리쬐던 햇볕도 마다 않고

온 몸으로 받아 내던 잎새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 꽃잎들도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언젠가

떨어지고 말리라는 것을 제 자신이 먼저 알고 있겠지만,

그때까지 아낌없이 제 한 몸을

불태우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떨어진 꽃잎 거름이 되어 내년에 더더욱 활짝

필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 

생각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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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이정하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샆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데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다.

 

그대여 이제 그만 아파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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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창문과 달빛 

 

이정하

 

그대는 

높은 담장 안 

창문입니다. 

 

거대한 벽 앞에 

발 부르트던 

나는 

 

부르지 않아도 

그대 곁에 다가가는 

달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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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한 사람을 사랑했네 

 

이정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

《50》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이정하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것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51》

흔들리며 사랑하며 

 

이정하

 

이젠 목마른 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하자.

찾고 헤매고 또 헤매이고

언제나 빈손인 이 젊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자.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한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사랑,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길이 있었다. 늘 혼자서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쓸쓸했다.

길이 있었다. 늘 흔들리며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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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 모음 77편

☆★☆★☆★☆★☆★☆★☆★☆★☆★☆★☆★☆★

가시나무 

 

천양희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勞役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일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

견디다 

 

천양희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년에 단 한 번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 꽃과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디다 스물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

교감 

 

천양희

 

사랑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사랑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환멸은 길고 매혹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요. 

 

희망 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희망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현실은 길고 환상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렇게 말했었지요.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그 여자의 극極 

 

천양희

 

늙지 않는 희망이 

추근대는 추억이 

썩지 않는 사랑이 

겨우 그 여자를 옹호한다 옹색한 옹호 

 

늙을 줄 모르는 아픔이 

한정없는 한숨이 

썩을 줄 모르는 슬픔이 

겨우 그 여자를 변호한다 궁색한 변호 

 

희망이 추억이 사랑이 

그 여자의 환상의 極이다 

아픔이 한숨이 슬픔이 

그 여자의 환括?極이다

☆★☆★☆★☆★☆★☆★☆★☆★☆★☆★☆★☆★

그것 

 

천양희

 

그것은 쓰고 싶은 연장 

그것은 무엇이든 덥석 잡는다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다 

그것은 잡을 때 힘이 세고 놓을 때 힘이 없다 

 

그것은 굴리고 싶은 바퀴 

그것은 무엇이든 밟고 지나간다 

한번 밟으면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밟을 때 힘이 세고 지나갈 때 힘이 없다 

 

한 시절을 주무르고 누르던 사람들의 

전기를 읽다 나는 보았다 

 

그들의 손과 발은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는 한통속인가 

☆★☆★☆★☆★☆★☆★☆★☆★☆★☆★☆★☆★

그믐달

 

천양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산(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

그에게 묻는다 

 

천양희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삽십 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속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산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

끈 

 

천양희

 

수평선이 되고 싶다 

 

한 평의 바다도 

못 가진 채 

수초처럼 걸려 

흔들리는 당신에게 

 

허전하게 편하거나 

편하게 허전한 

수평선 하나 주고 싶어 

 

우리가 껴안은 

수많은 해안선 

 

세상의 끈이 이렇게 길었구나. 

☆★☆★☆★☆★☆★☆★☆★☆★☆★☆★☆★☆★

나무의 힘

 

천양희

 

산이 불탄 끝에 어두워진다 

재의 바람이 낮게 

산을 쓸며 지나간다 

바람맞을 나무는 이제 없다 

품속같은 숲 사라지고 

새소리 어느덧 사라지고 

구불텅한 언덕 사라지고 

죽음보다 더 슬픈 시간이 갔다 

까맣게 속 탄 나무들 가지들 

남은 무엇이 있어서 

무어라 무어라 말할듯도 하다 

가지 한자락에도 

산은 저토록 그리움으로 

속이 탔다는 것인가 

어린 꽃잎 하나 

불쑥 내밀고 있다 

苦生도 저렇게 눈부시다니!

☆★☆★☆★☆★☆★☆★☆★☆★☆★☆★☆★☆★

나의 거울 

 

천양희

 

자신을 잘 모를 때 

자신을 과신할 때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어려운 일을 견뎌야 할 때 

힘든 일을 인내해야 할 때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옥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잘못된 일 때문에 후회할 때 

실패한 일 때문에 좌절할 때 

희망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고 

절망보다 더 나은 교사는 없다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

너는 나다 

 

천양희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십만번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 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 

☆★☆★☆★☆★☆★☆★☆★☆★☆★☆★☆★☆★

너무 많은 입 

 

천양희

 

재잘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댄다 입들이 많고 입들이 너무 많다 

 

이(李) 시인은 

마흔 살이 되자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 이라 쓰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좋담 

쉰 살이 되어도 나의 입은 

문득 사라지지 않고 

목쉰 나팔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좋담? 

 

다릅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다른 소리를 낸다 잎들이 다르고 잎들이 너무 다르다 

☆★☆★☆★☆★☆★☆★☆★☆★☆★☆★☆★☆★

너에게 부침 

 

천양희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이 어제 같아 변한 게 없다 

날씨는 흐리고 안개 속이다 

독감을 앓고 나도 정신이 안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삶이 몸살 같다, 항상 

내가 세상에게 앙탈을 해본다 

병 주고 약 주고 하지 말라고 

이제 좀 안녕해지자고 

우린 서로 

기를 쓰며 기막히게 살았다 

벼랑 끝에 매달리기 

하루 이틀 사흘 

세상 헤엄치기 

일년 이년 삼년 

 

생각만으로도 점점 붉어지는 눈시울 

저녁의 길은 

제자리를 잃고 헤매네 

무엇을 말이라 할 수 있으리 

걸어가면 어디에 처음 같은 우리가 있을까 

돌아가면서 나 묻고 있네 

꿈도 짐도 내려놓고 

하루는 텅텅 빈 채 일찍 저물어 

상한 몸을 가두네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은 이 눈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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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쓴다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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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을 적다

 

천양희

 

노을이 저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 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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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했을까요? 

 

천양희

 

누가 말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여린 잎 속의 푸른 벌레와 생각난 듯이 날리는 눈발과 

훌쩍거리며 내리는 비가 

얼마나 기막힌 눈(目)이라는 것을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읽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런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자연일 때 

편하고 편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뒤꼍의 대나무숲 바람소리와 소리없이 피는 꽃잎과 

추위에 잠깬 부엉이 소리가 

얼마나 기막힌 소리인가를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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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천양희

 

눈을 보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새 눈이 녹아 눈물이 되었네요. 

눈물은 왜 눈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고이기만 할까요. 

고여서 자꾸 넘치기만 할까요. 

 

눈을 맞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덧 눈이 쌓여 눈길이 되었네요. 

눈길은 왜 눈물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쌓이기만 할까요. 

쌓여서 자꾸 높아지기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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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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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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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천양희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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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경계 

 

천양희

 

햇살이 수면에 어룽거린다 

물방울 모였다 물거품 되고 

물떼새들 갈대 숲에서 낄룩거린다 

가슴 검은 물떼새! 

그 이름만으로 눈시울 붉어져 물 속에 물구나무 선 

나무들 물결 속에 제 속을 허문다 

허물어야 할 것은 내 속의 강둑들 모래톱들 경계 없는 강이 

나는 좋다 흐르다 멈춘 강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깊은 물소리 듣지 않는다면 누가 

강물을 밀어 해안까지 가겠는가 

강은 수심 깊어 물소리 숨기고 

물고기들 잘 때에도 뜬눈으로 잔다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 드는 사람들 

생(生)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그래서 우리가 물길 하나 가졌던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생각하듯 물살 내려갈 때 

나도 몇 굽이 내려갔다 

물소리 한꺼번에 져 내렸다 

마음이 오래 강변에 서 있다 

세찬 물결이 어깨를 툭 친다 나아가라고 

내려가나 나아가는 물줄기들 

시퍼런 것들의 저 서늘한 기운 

오늘은 내가 붙잡고 가겠다 

강 끝까지 해안까지 더 더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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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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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벽

 

침묵의 소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곧고 단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나무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가지가 되지 못하고

자꾸 나누어지는 걸까.

말로는 함께 살자면서 살기는 따로따로다.

사람의 에고(ego)가 은행 열매보다 더

단단한 것일까.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사람사이의 벽을 만든다.

벽이 있는 한, 한가지로 함께 잘 살기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나무도 가을 나무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더 춥다고 한다.

사람사이의 벽도 너무 높고 두터우면 그곳은

늘 그늘이지고 추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벽은 저 혼자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탁 튼다면 마음이 만든 벽쯤이야

허물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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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 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 이 

몸 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 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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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진 

 

천양희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어봐야지 

제 속의 비명을 꺼내 소리쳐봐야지 

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봐야지 

바람에 몸을 길들여봐야지 

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봐야지 

눈알 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봐야지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 

어느 날 문득 절필해봐야지 

죽어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 

사람 때문에 마음바닥이 쩍쩍 갈라져봐야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봐야지 

마침내 갈 데가 없어봐야지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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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포 

 

천양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 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리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욱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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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무늬고동 

 

천양희

 

잔물결 속에 고동이 굴러다닌다 

들어 보니 

속이 텅 비었다 

그 속에 집게가 들어가 살고 있다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고 있다 

그걸 오래 들여다본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나는 살아서도 구른다 

구르면서도 산다 

 

구를 때마다 

몸 속의 어둠이 터져 나온다 

그때마다 

텅 빈 몸이 텉텅거린다 

잔물결이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듯이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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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천양희

 

바람 부는 날 

바람을 맞으며 아이가 물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 부는 날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보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무가 무서운가 봐, 나무가 잠을 안 자. 

바람 부는 날 

시든 나뭇잎을 보다 아이가 또 물었습니다. 

나무가 아픈거야? 

 

어린것들이 눈부시게 일어나는 아침 

숲은 가슴을 열어 새끼들을 안습니다. 

얘야, 감기들라 넘어질라. 

왼 종일 가슴이 조마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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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맞다 

 

천양희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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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편지 

 

천양희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 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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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천양희

 

철물점 지나다 

버려진 바퀴를 본다 

구르지 않는 바퀴를 보면 

명퇴당한 아비들 같아 

덜커덕, 숨이 멎는다 

한때 신나게 굴러갔을 저 바퀴 

바퀴는 굴러갈 때 바퀴인 것이다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다 

소년은 아직 바퀴의 속력을 모를 것이다 

차들이 바퀴를 굴리며 달려간다 

속력은 모두 바퀴 때문이란 걸 모를 것이다 

구르는 바퀴는 물러서지 않는다 

달릴 수 있을 때 달리는 것 

그것이 바퀴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퀴가 되어 

세상을 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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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 

 

천양희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바람 속에서 쉰다네 

날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만 쉰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지상으로 내려갈 수 없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지상으로 내려가면 죽는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나도 바람 속에서 쉬고 싶다네 

발 없는 새처럼 쉬었으면 한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서 쉬는 새 

바람같이 소리치고 있다네 

내 발 어디에 있지? 

 

하늘을 나는 새는 자취가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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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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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되다 

 

천양희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모든 문 다 열어놓는다고 

그가 말했을 때 꿈꿀 수 있다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나에게만 중요한 게 무슨 의미냐고 

내가 말했을 때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쓴다고 

그가 말했다 

생각의 끝은 늘 단애라고 

그가 말했을 때 꽃은 나무의 상부에 피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 무늬가 없는 돌은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나이테 없는 나무는 없다고 

그가 말했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편안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내가 말했다 

더이상 할말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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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

 

천양희

 

 

내집 주소를 기억하지마. 

나를 기억하지도 마. 

주소 불명 

수취인 불명 

나는 지금 

행방불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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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천양희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

사람의 일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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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게 길을 묻다 

 

천양희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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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생각(生覺)한다는 건 

생(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생(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생(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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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의 눈 

 

천양희

 

허공에서 소리치며 

눈이 내려온다 

가로수들이 그걸 받으려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미 썩은 잎들은 따뜻해 

추억의 길들 오래 적막하다 

서른이 되면 

길모퉁이 어디서나 

가로등이 반짝, 켜지리라 믿었다 

나는 이제 

다른 길 예감할 수 없다 

길바닥 하나 덮겠다고 

눈발은 종일 몸 바꿔 뒤척인다 

그러나 눈송이들이여 

백색 정토! 설국(雪國)이나 설궁(雪宮) 

그건 늘 우리의 함정이었다 

한번 내린 눈은 

때가 되면 세상이 곧 

물든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사람의 길 사이로 눈발이 빠져나간다 

눈발이 눈의 발이 하늘로 들려 있다 

눈은 녹고 그래서 눈에 눈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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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천양희

 

세상을 뜻대로 읽고 싶어 

가출을 출가로 

불성을 성불로 

유수를 수유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거꾸로 읽고 싶어 

정부를 부정으로 

선생을 생선으로 

교육을 육교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마음대로 읽고 싶어 

가능을 능가로 

입산금지를 지금 산에 들어감으로 바꿔 읽어보다가 

 

세상을 세상대로 읽고 싶어 

不二를 이불로 

불행을 行不로 

유일을 일류로 착각하다가 

 

삶은 삶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나는 나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각자를 자각으로 쓰고 말았네 

실상을 상실로 쓰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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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천양희

 

소리 하나로 산을 휘어잡은 새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바람보다 먼저 산을 

깨우고 계곡 아래 물살도 산정으로 당긴다 당기듯이 

소리친다 소리치며 산그림자 가볍게 

놓아버린다 숲속이 숲의 속이 오래 

울린다 저토록 산이 속으로 울다니! 속으로 우는 

것들은 울음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울어라 

새여,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소리 하나로 

산을 울릴 때 너는 소리꾼인 것이다 소리의 

꾼인 것이다 시 하나로 세상을 휘어잡은 시인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몸보다 먼저 혼을 

깨우고 한순간을 영원으로 밀어올린다 밀어올리듯이 

소리친다 세상 속이 세상의 속이 오래 

울린다 저토록 세상이 속으로 울다니!속으로 

우는 것들은 소리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울어라 

시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시여 시 하나로 

세상 울릴 때 너는 소리꾼인 것이다 소리의 

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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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천양희

 

세상에는 베이는 일이 너무 많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 

사람도 잘못 잡으면 마음을 벤다. 

세상에 참 많이 베어본 

사람은 안다. 

손을 베이면 

손이 아니다. 

베인 건 마음이다. 

마음이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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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천양희

 

그가 넘어야 할 고개 

그건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지요 

한 고개 넘어 또 한 고개 

웬 고개가 그렇게도 많은지요 

우이령 넘고 우듬재 넘었는데 

또 한 고개가 남았다고 했지요 

박달재 넘고 추풍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가 남았다고 했지요 

웬 고개가 그렇게도 높은지요 

새재 넘고 고모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아홉 고개 열 고개 넘었는데 

웬 고개가 그렇게도 험한지요 

인재 넘고 한계령 넘었는데 

이제 다 넘었으려니 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무등재 넘고 불이령 넘었는데 

보릿고개 하나 더 남았다고 했지요 

보릿고개가 고비라고 했지요 

그건 그가 넘어야 할 

스무 고개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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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 

 

천양희

 

시작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 

참 생생生生하지요. 

첫눈이 첫발자국이 첫만남이 

또 얼마나 푸릇푸릇합니까. 

저 보리밭 저 청솔밭 

참 청청하지요. 

첫해 첫날이 

또 얼마나 새록새록합니까. 

 

끝이라는 말 마지막이라는 말 

참 멸멸滅滅하지요. 

노을이 낙엽이 작별이 

또 얼마나 뉘엿뉘엿합니까. 

저 서산 저 저녁강 

참 냉랭하지요. 

가는 해 가는 날이 

또 얼마나 얼룩얼룩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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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게 묻는다면 

 

천양희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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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풀 

 

천양희

 

썩은 흙에서 풀이 돋고 

썩은 풀이 반딧불을 키운다 

썩은 것이 저렇게 살다니 

썩은 풀의 소신공양! 

썩고 썩은 풀이여, 마음은 

너무 빨리 거름이 되는구나 

나는 아직 

속 썩은 인간으로 냄새를 풍긴다 

풀밭은 또 저만치서 

썩은 풀을 피운다 

 

나에게 썩은 것이 있다면 

썩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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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루 

 

천양희

 

건설중인 빌딩 꼭대기에 

둥지를 튼 송골매 두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몇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더니 

우리는 언제 저렇게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궁금해지더니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놀랐느니 

아파트 공사장에 

까치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멜버른이 아닌 우리나라 서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느니 

이것이 사랑하며 얻는 길이거니 

득도의 길이거니 

아름다움과 자비는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는 것 

 

나,오늘 무우전(無憂殿)에 들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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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돌아보다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혼자 울어본 적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 있는가 

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본 적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얼굴을 묻어본 적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인생은 추억을 통해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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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 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 농사 풍성하던 그 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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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천양희

 

강변역이 강변에 있지 않고 

학여울역에 여울이 없다니요? 

물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고 물새라니요? 

섬개개비는 산새이면서 섬에서 살다니요? 

송사리는 웅덩이에서 일생을 마치고 

무소새는 평생 제집이 없다니요? 

질경이는 뿌리로 견디고 

가마우지는 절벽에서 견디다니요? 

푸른 소나무도 낙엽지고 

더러운 늪에서도 꽃이 피다니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니요?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니요? 

 

사자별자리, 오늘밤 

하늘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회신 바랍니다 이만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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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 

 

천양희

 

가마우지새는 벼랑에서만 살고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삽니다. 

유리새는 고여 있는 물은 먹지 않고 

무소새는 둥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고소공포증도 폐쇄공포증도 없습니다. 

공중이 저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놓아두시지요. 

외길이 나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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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섬

 

천양희

 

어려운 일은 외짝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실존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아직 밟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해야 할 또다른 절망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까지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딴 섬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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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천양희

 

희망이 필요하다고 얻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외면한다고 오지 않는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묶는다고 튼튼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깍는다고 깍이는 건 아니었습니다. 

마음 한줌 쥐었다 놓는 날이면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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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

 

천양희

 

열매를 보면서 꽃을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어둠을 생각합니다.

꽃은 열매를 위해 피었다 지고

어둠은 빛을 위해 어둡습니다.

별을 보면서 하늘을 생각하고

나무를 보면서 산을 생각합니다.

하늘은 별을 위해 별자리를 만들고

산은 나무를 위해 숲을 만듭니다.

 

자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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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는 것 

 

천양희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한 꽃대에 3000송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벌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560만송이의 꽃을 찾아다니고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도 있고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운명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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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천양희

 

웃는 아침을 위하여 

나팔 꽃이 피면 안되나 

나팔꽃은 아침을 위하여 

웃으면 안되나 

아침이 나팔꽃을 위하여 

있으면 안되나 

 

아침에게는 나팔꽃도 희망이고 

나팔꽃에게는 아침도 

희망이니까 

 

우리가 만났다 헤어지는 날에도 

너를 위하여 

내가 웃으면 안되나 

나를 위하여 

너가 웃으면 안되나 

 

나에게는 너가 희망이고 

너에게는 내가 

희망이니까 

 

보아라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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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봄의 시 

 

천양희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을 안개를 길어 올린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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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천양희

 

 

조롱 속에 거울 하나 넣어 놓았더니

거울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살았다는 문조(文鳥)

 

 

사막 속에 오아시스 놓여 있었더니

물에 비친 모랫길을 제 길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걸었다는 낙타

 

그게 혹

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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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땅 언덕 위에

 

천양희

 

시로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시로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시로서

집을 짓고 시로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시가 햇빛이 되고 불빛이 되고

시가 고향이 되고 나라가 되고

시로서 따뜻하고 시로서

사람들이 행복한 곳

정든 땅 언덕위에 

시 같은 피, 시같은 땀

씨 뿌릴 수 있을까

시같은 인생 시같은 일생

거둘 수 있을까

정든 땅 언덕위에

시의 세상

시의 나라

시의 집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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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다 

 

천양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 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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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 !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바위들이 몰래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직업 

 

천양희

 

내 생의 업 중에 큰 업이 

시업(詩業)이지 하다가도 

시가 밥 먹여주냐,고 

시답잖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밥도 안 되는 그걸로도 

업이 될까 싶다가도 

누가 나더러 

그 시 참 좋데요, 할 때마다 

나 혼자 감동 먹어 

시로써 배부른 나에게는 

말도 안 되지 싶다가도 

또 누가 나더러 

시만 써서 어떻게 사냐고 할 때마다 

이태백 같은 사람은 

술만 마시고도 시선(詩仙)이 되었는데 싶다가도 

평생 시로써 업을 삼더라도 

시선은커녕 시인도 못 되지 싶다가도 

그런데 왜 하필 

시업이 내 생업일까 싶다가도 

생업이 실업이 안 되었으면 하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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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다는 것 

 

천양희

 

세상의 행동 중에 참는 게 제일이라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참기로 했지요 

날마다 참으면서 일만 하고 살았지요 

참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살 길은 갈수록 구불텅거리고 

살림은 출렁대며 흔들렸지요 

누가 고해(苦海)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파문은 나에게까지 번졌지요 

그때 나는 절벽에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 새들을 생각했지요 

발밑에 밟히고 바람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일 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참으면서 사는 일이었지요 

그때서야 힘든 것이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힘들게 산다는 것은 힘쓰고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참고 살수록 삶은 더 구비쳤지요 

오늘도 나는 인파 속에서 자맥질하지요 

힘껏 살고 싶어 힘내고 싶어 

☆★☆★☆★☆★☆★☆★☆★☆★☆★☆★☆★☆★

첫 꽃 

 

천양희

 

사막만년청풀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사막에서 몇 십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연꽃 씨앗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늪에서 몇 천 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사람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어디에서 몇 년이나 견뎌야 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꽃은 세상이 궁금해서 

첫 꽃을 피운다 

☆★☆★☆★☆★☆★☆★☆★☆★☆★☆★☆★☆★

청사포에서 

 

천양희

 

청사포 앞 바다엘 간다. 

부산 아지매 사투리가 생선처럼 튀는 아침 

바다의 자리는 생생하게 빛난다 

투명한 물 속 

저 환한 화엄계! 

수평선이 세상을 수평으로 세운다 

허공에 넘실대는 갈매기소리 공허하다 

높은 것만이 이상은 아니라고 

흐르는 물이 말하네 

수족관에서도 꼬리치는 물고기들 

바다로부터 잊혀지고 

나는 내 희미한 정신의 

시퍼런 파도소리를 듣는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한다 

나는 덮치는 저 소리. 미친 듯이 

나를 살게 하느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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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봉 

 

천양희

 

높은 산에 오를 준비를 할 때마다 장비를 챙기면서 

운다고 고백한 산사람이 있었다 

14번이나 최고봉에 오른 그가 

무서워서 운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서운 비밀을 안 것처럼 나도 무서웠다 

산 오를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서 싼 짐을 

풀지만 금방 울면서 다시 짐을 싼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도 울면서 짐을 싼 적이 있다 

그에게 산이란 가야 할 곳이므로 

울면서도 떠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할 길이 있는 것이다 

 

능선에 서서 

산봉우리 오래 올려다보았다 

그곳이 너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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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천양희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볏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꽃은 만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사람은 나이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

친구

 

천양희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 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

하나밖에 없다 

 

천양희

 

나무는 잘라도 나무로 있고 

물은 잘라도 잘리지 않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물은 거슬러 오르지 않습니다. 

길은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하늘은 넓은 공터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시 오겠습니까. 

밀물 썰물이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인생은 하나밖에 없고 

나 또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

하늘을 볼 때마다 

 

천양희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삼십 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록이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 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주목나무는 고목이 되어도 썩지 않는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반드시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

하루 

 

천양희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 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 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

하루살이 

 

천양희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다가 죽습니다. 

하루가 하루살이의 일생입니다. 

하루의 하루살이가 되기 위해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딥니다. 

그동안 스무 번도 더 넘게 허물벗기를 합니다. 

천 일동안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다 하루살이가 되면 

하루를 살다 죽어버립니다. 

하루를 살기 위해 천 일을 견디는 하루살이. 

그것은 하루살이의 운명입니다. 

☆★☆★☆★☆★☆★☆★☆★☆★☆★☆★☆★☆★

한 아이 

 

천양희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것들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

한 자리 

 

천양희

 

바람 불다 비가 와 햇빛이 솔밭 가지로 

지나가버려 

나무 뒤에 나무처럼 서서 새들은 어디 갔나 

네 이름 묻고 싶구나 바람 불 때마다 천지에 나를 놓 

을? 

나를 놓을 어디? 

 

바람 부니 꽃이 꽃자리 살펴보던 때가 

그냥 지나가버려 

바위 위에 바위처럼 앉아 

꽃들은 다 어디 갔나 네 이름 받고 싶구나 

바람 불 때마다 천지에 내 마음 뿌릴? 

마음 뿌릴 어디? 

 

바람이여, 나는 너무 늦게 

흔들린다 나도 가끔 

세상 빠져나가고 싶은 바람이다 

바람을 꽃처럼 피우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산 자로서 

조용히 접혀 있다 

☆★☆★☆★☆★☆★☆★☆★☆★☆★☆★☆★☆★

한계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 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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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시인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란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유쾌한 사랑을 위하여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가을 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사람의 가을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첼로처럼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매캐한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 싶다

기껏해야 줄 몇 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 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나무 학교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푸른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나무를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우울한 날은 

 

우울한 날은

우울하게 죽은 자의 무덤에 간다.

구름내와 눈물내가 어둡게 나는

우울의 이마를 짚으러 간다.

권력의 톱으로도 썰지 못하고

시간의 날카로운 이빨로도 못 쓰러뜨린

이 세상의 우울이란 우울

모두 거머쥐고 죽은 자의 무덤

그 곁에 망각처럼 누우러 간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지척이어서

꿈으로 닿는 길도 지척이어서

손씻고 손씻고

아아 나는 가벼워져. 

 

☆불의 사랑 

 

어디에서 이토록 뜨거운 생명을 만나랴

참혹한 추락이 예비되었지만

불이 있어

지상은 늘 아름다웠다.

감히 수천의 날개를 파닥이며

별을 떨어뜨리며

저 무상을 향해 무릎을 펴는

불이여, 네 이름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과 초월을 꿈꾸랴

네 심장으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파멸과 맞서는 사랑을

우리가 감히 떠올릴 수 있으랴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목숨의 노래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시집 ; 어린 사랑에게

 

☆초여름 숲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물을 만드는 여자 

 

딸아,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채탄 노래 

 

마음을 파들어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일 모래 저녁답쯤에는 지평선이 보일까.

 

그리움이 끝난 그곳에는

타버린 나무들이

무더기 무더기 쓰러져 있을까.

얼마나 까아만

화산재가 쌓여 있을까.

 

슬픔의 벼랑마다 누가 서 있어서

밤마다 이토록 시를 쓰게 하는 것일까.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는 이도 많건만

 

내 마음은 얼마나 깊어

그대 하나 묻기에도

한 생애가 걸리는 것일까.

끝 모를 모래 바람 부는 것일까.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축구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을까

침묵과 비명만이

극치의 힘이 되는

운동장에 가득히 쓴 눈부신 시 한 편

90분 동안

이 지상에는 오직 발이라는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있음을 보았다

 

☆바다 앞에서 

 

문득, 미열처럼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서

 

서해바다

그 서럽고 아픈 일몰을 보았네.

 

한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은 스러지고

주소도 모른 채

떠날 채비를 하듯

조용히 옷을 벗는 해안선을 보았네.

 

아, 자연

당신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소슬히 잊는 일뿐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눈과 파도와

비늘 같은 욕망을

잊는 일뿐이었네.

 

잊는다는 일 하나만

보석으로 닦고 있다

떠나는 날

몸과 함께 땅에 묻는 일이었네. 

 

☆새 아리랑 

 

님은 언제나 떠나고 없고

님은 언제나 오지 않으니

사방엔 텅 빈 바람

텅 빈 항아리뿐

비어서 더욱 뜨거운 이 몸을

누가 알랴

 

그 위에 소금 뿌려

한세월 곰삭은

이 노래를 누가 알랴

 

기를 쓰고 피어나는 이 땅의 풀들

저 눈 밝은 것들은 알랴

 

떠나는 발자국이 님인 것을

돌아오지 않는 것이 님인 것을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것이

우리 님인 것을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 님을 기다리며

밭고랑처럼 길고 긴 생애를 사느니

 

세상에는 없는

고무신 같은

된장국 같은

백자 항아리 같은

기막힌 이 사랑을 누가 알랴

 

냉수 한 사발의 사랑이

폭풍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너무 울어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이 살갗이

지진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님과 나 사이에는

꽃이라고 할까

새라고 할까

청산처럼 숨쉬는

아름다운 생명이 있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온몸으로 흔들리는 노래를 부르며

이 땅에는 사시사철 기다림이 피어나느니

 

곁에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안을 수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결혼한 것은 님이 아니리

 

멀리 있는 것

그래서 두 눈이 아리도록 그리운 것만

우리 님이리

아리랑이리

 

홀로 푸른 하늘 바라보면서

푸른 하늘 굽이굽이 새겨둔 설움

바라만 보아도 말갛게 차오르는 눈물

 

질경이 같은

엉겅퀴 같은

뙤약볕 같은

어지럽고 슬픈 살냄새

허리 구부리고 울던 흰옷들의

쓰라린 사랑이여

 

천굽이로 살아나는

아리랑이여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네루다 풍으로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

이 나이에 무슨 사랑?

이 나이에 아직도 사랑?

하지만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사랑이 아무것도 못 보는구나

겁도 없이 나를 물어뜯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 손가락에 불붙여

사랑의 눈과 코를 더듬는다

사랑을 갈비처럼 뜯어먹는다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 

 

☆먼 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정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2004. 2 

 

☆시(詩)가 나무에게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 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들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2004. 5 

 

☆지는 꽃을 위하여 

 

잘 가거라, 이 가을날

우리에게 더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

가을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

쓸쓸한 사랑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른 봄 파릇한 새 옷

하루하루 황금옷으로 만들었다가

그조차도 훌훌 벗어버리고

초목들도 해탈을 하는

이 숭고한 가을날

잘 가거라, 나 떠나고

빈들에 선 너는

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

 

2004. 3 

 

☆나무가 바람에게 

 

어느 나무가

바람에게 하는 말은

똑같은가 봐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바람불면 몸을 흔들다가

봄이면 똑같이 초록이 되고

가을이면 조용히 단풍드나봐

 

☆겨울 사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비의 사랑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의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을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

 

시집: 어린 사랑에게

 

☆대못 

 

떠나올 때

눈먼 어머니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왔어요.

 

비바람 그치지 않는

정든 골목에서

여름에도 추워하는 내 친구들은

벙어리인 채

손만 흔들었어요.

 

한 줄 꿈도 없이

목메이는 기도도 없이

 

길이 너무 많아

길이 없는

이 나라는 내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냥 뛰어요

눈멀고 입다문 그 모습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안고서 

 

시집 ; 어린 사랑에게

 

☆땅에서 나온 사랑 

 

아들아, 너를 어이 땅에 묻으리

꽝꽝한 땅에다 네 맑은 눈을

아침 햇살 빛나던 은구슬 치아를

벌써 책장 넘기던 의젓한 일곱 살

아까운 내 보배를 어이 묻으리

하늘이 가라앉고

땅 위의 모든 온기가 사라졌도다

이 목숨 끊어지는 날까지

다시는 입을 일 없는 아비의 비단 도포

언 땅에 깔고

올올이 애통한 어미의 속저고리 벗어

너를 싸노니

너 죽인 병도 여기까진 따라오지 못하리

어미 아비 검은 숯이 되어

천 길 절벽 굴러 떨어질 때

해와 달도 함께 꺼져버렸으니

시간이 어디 있어

내 아들을 범접할까

 

* 경기도 양주 윤씨 분묘에서 비단으로 싼 350년 전의 어린이 미라가

발견되었다. 

 

☆콧수염 달린 남자가 

 

콧수염 달린 남자가

키스를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

구두솔처럼 날카로운 수염이

입술을 뚫고 들어와

갑자기 내 인생을 쓱쓱 문질러준다면

놀랄 일이야

보수주의와 위선으로 무성한

은사시나무를 뿌리째 흔들며

바람 부는 날

그의 눈이 수말의 눈처럼 껌벅거리다가

내 어깨에다 뜨거운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린다면

그의 겨드랑이에서 풍겨나는

쉰내가 나의 삶의 코를 틀어막는다면

그렇게 화해에 이르고 말까

언젠가 무주구천동에서 보았던

열녀비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버릴까

 

☆축복의 노래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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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진 시 모음 50편

《1》
가을 사랑 고백

공석진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던
어느 가을날 오후
메모가 적힌 시집 한 권
등기 우편으로 보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면
낙엽 한장씩
책갈피에 꽂아 주세요'

밤사이 바람이 불어
그대 흔들릴 것 같아
낙엽 잔뜩 모아
다시 소포로 보내 주었다

《2》
가을 숲으로 가자

공석진


숲으로 가자
상처뿐인 빈자리
아파서
많이 아파서
신음하는 숲으로 가자

바람 이는 소리에
행여 임이 오실까
하얗게 새는 밤
동 터 오는 새벽
사랑은 절망한다

하도 그리워
파리해진 낙엽
정이 땅에 떨어져
숨죽이는 숲에
입 맞춘다

입술 깨물며
조붓이 닫히는 숲
길 떠나지 못하는
슬픈 가을
숲으로 가자  

《3》
가을 유감

공석진

낙엽이 지네
서러움이 밀려오네
치열했던 사랑이
갈빛으로 스러지네

그리 가려면
쉽게 오지나 말지
그리움에 치를 떨어
목놓아 울게 하나

회한悔恨만 남기고
멈추어 선 시간 앞에
가슴에 남긴 틈을
상처로 비집고 들어서나

화려한 축제가 끝난 뒤
사무치는 고독은
떨어지는 낙엽으로
이리저리 해매이고

가물가물 나락에 빠지듯
이미 중독된 그리움은
절망이 뒹구는 가을 뒷켠
커피향 가득 머금은 채

작별 인사도 없이
하얗게 잊혀진
사랑으로 가고 있네
추억으로 가고 있네 

《4》
가을걷이

공석진

태양은 중천을 넘어서
가을걷이에 분주한 황금 들녘
추억을 베고 행복을 턴다

다들 흥에 겨워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이면
이 순간 만큼은 나라님이 부럽지 않네

하지만 걷어야 할 것이
어찌 알량한 곡식 뿐이랴
스쳐 지나는 옷깃도 걷어야 하거늘

골수로 사무치는 회한도
심장에 파고드는 그리움도
차가운 가슴으로 묻어야 하리

어찌 무심하게 흔들리는
코스모스 장단에 흥에만 겨워
절정의 가을을 보낼 것이냐

볏단을 태워 흔적을 지우듯
한 맺힌 응어리를 털어내어
가을을 걷으리니

무진 힘들게 하던 애증도
고독으로 빚은 술로 위로하여
들판에 눈물을 뿌리리라  

《5》
가을전송

공석진

가을을 전송합니다
화려함 남겨두고
빛 바랜 옛 추억을
나들 길로 보냅니다
고독을 만끽하세요
위태로운 정이 매달린
험한 비탈 위
정처 없는 낙엽으로
이별을 강요하신다면
수신을 거절하렵니다
발신자도 없는
이름뿐인 천사
언제든 떠나려는
배낭 짊어진
당신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양지바른
논둑에 누워
아릿하게 남아있는
바람꽃 향기를
추억하렵니다  

《6》
감악산 단풍

공석진

선홍의 자태로 유혹하고
황금빛 정염이 샘늪을 덮치면
일엽관음이 부럽지 않다

벅차오는 숨을 고르며
빠져드는 남정은
점입비경에 숨이 멎는다

어차피 지고 말 운명이라도
온갖 욕정, 바람에 실어
세속 만물을 탐하리

빛 고운 화장으로 단장하여
정신 혼미한 오르가슴 느끼다가
나락으로 떨어져 해탈의 다리를 건너

격렬한 정사에 상한 몸
법당 앞 석탑에 기대어 앉아
옛 절정을 더듬는 잠을 청한다

탄식하는 목탁 소리 우울하여
이승의 고갯마루를 저물도록
알몸으로 배회하다가

허름한 종루 한구석에 안장되어
합장하는 스님 눈가에 이슬 고이면
감악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7》
감악산 한우

공석진

정수리에
심장에 국부에
맥을 끊어 놓겠다는
일제의 쇠말뚝질

뜯겨진 생살
감악산 등허리
허연 뼈가
아프게 도드라지고

코청을 구멍 내
급소 다친 한우
씹어도 씹어도
바람들어 푸석푸석하다 

《8》
광덕산

공석진

모여라 모다 모여라
풍후한 정 넘치는
광덕(廣德) 가슴 복판
찬바람 비운 자리
마음 맞추면
우정 쏟아진다지

외암(外巖) 초가에
분홍꽃비 내려
모여든 즈믄 아이
꽃샘 미룬 자리
눈 맞추면
사랑으로 머문다지

하냥다짐 각오하는
절박한 벗이여
노란 리본 매단
겨운 청솔가지
하나된 그리움 여럿
세파 이길 큰 힘 된다지 

《9》
광덕산

공석진

모여라 모다 모여라
풍후한 정 넘치는
광덕(廣德) 가슴 복판
찬바람 비운 자리
마음 맞추면
우정 쏟아진다지

외암(外巖) 초가에
분홍꽃비 내려
모여든 즈믄 아이
꽃샘 미룬 자리
눈 맞추면
사랑으로 머문다지

하냥다짐 각오하는
절박한 벗이여
노란 리본 매단
겨운 청솔가지
하나된 그리움 여럿
세파 이길 큰 힘 된다지

《10》
나무

공석진

길가
나무 두 그루

같은 날
같은 나이로
심어졌을 텐데

한 놈은 튼실하게
한 놈은 비실하게

너 때문이다
그늘만 없었다면

원망 마라
찌는 태양
갈증이 더할수록
뿌리를 깊이 내렸을 뿐이다

깨죽대는 놈에게
일갈을 한다

게으른 자여
내 그늘에 눕지 마라  

《11》
나에게 나를 묻다

공석진

그대는 누구인가
나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강을 건너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악어 소굴로
뛰어드는 누우입니다

그대여 사랑을 아는가
나만을 사랑하려
철옹성을 구축하여
다가오는 사랑에
화살을 퍼붓는 겁보입니다

그대여 길을 가는가
까마득한 숲에서
언제나 같은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헤매고 있는 바람입니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어서 가보게
그대의 가슴으로  

《12》
낙엽유감

공석진

낙엽을 맞으며
이별을 한다
이별을 준비하며
낙엽을 밟는다

보지 않기 위해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개 숙인다
뒷모습 감춘다

때마침 가을비 내려
낙엽 우수수 떨어져
갈색 이별을 재촉한다
우리 이제 헤어져요

지난 여름
뜨거웠던 사랑
빛 바랜 추억
낙엽에 입 맞춘다 

《13》
늙는다는 건

공석진

늙는다는 건
나를 비우는 것이다

머리를 비운 기억상실
가슴을 비운 욕망상실
뼈를 비워 아픈 바람을 맞으며
살은 점점이 분해되어
허공으로 비산飛散하는 것

늙는다는 건
살아서 몹시 그리운 사람
저승에서 만날 수 있을까
서러움보다는 설레임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나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새벽을 맞이하는 것

아, 오그라져 바스라져
폐기직전의 해골 닮은 나를
그대는 기억할 것인가
잊혀지는 나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차피 터럭 같은 인생
무거운 몸으로 신세를 지느니
물 위에 소금쟁이처럼 가벼워져도
영육이 자연스레 해체되어
완벽하게 환생할 수 있도록
내 사랑을 위하여
오래오래 살아야 할 일

《14》
늦가을의 상념

공석진

밤사이 비바람 몰아치더니
하늘이 뿌연 부유물을 걷어내고
예쁜 미소를 보냅니다

키 높은 구름이 바쁘게 흘러가고
길가 코스모스는 목 아프게
구름을 좇아갑니다

어느새 내 마음도 님에게로 향하고
그렇게 가을은 종종걸음으로
산 중턱을 넘어섭니다

호수알 눈동자
해맑은 미소
보석같은 님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워

뼈마디 삭이는 추억으로
입술 깨물며 조촘조촘
늦가을의 상념에 빠져봅니다. 

《15》
다 왔어

공석진

산을 가다 보면
일행이 길을 묻곤 한다
"얼마나 더 가?"
"다 왔어"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는 길
힘들어도 갈 수 있다
포기하지 않게
가자! 가자!
희망을 다독이는 말
'다 왔어'

어렵게 어렵게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고
나중에는 허탈하지만
지칠 땐 어떤 말보다
힘이 되어 주는 말
'다 왔어'

《16》
대둔산

공석진

삼선바위 기암괴석
비경에 탄성 발하노니
보아라
숨 멎는 남도 금강이여

하늬바람 구축하는
청운에 심신 누이려니
가거라
숨통 조이는 티끌이여

선녀 몸 감은
낙수에 정맥 식히려니
쉬거라
숨 가쁘게 뻗어 오던 백두여

깎아지른 벼랑 휘가르는
석양에 울혈 버리려니
오거라
속세 상념의 소용돌이여

목하 마천대 딛고
천지 덮는 운무 걷으려니
기사회생하거라
파국 답파하는 대둔이여! 

《17》
동치미

공석진

동치미는
만병을 통치하는 약이다

연탄가스로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생사의 갈림길에도

힘 겨루기로 머리 자근거려
골치 썩는 고부갈등도

한 사발 복용하기만 하면
위력적으로 퇴치한다

허구한 날 배가 고파
흙이라도 퍼먹던 시절

뒷간을 수시로 드나드는
원인 모를 생배 앓이도

뱃속 회충의 요동조차
간단히 잠재우는 약

당당히 약방 선반 위 자리잡아야 할
신비의 명약이다  

《18》

등산길

공석진

나를 앞서 가는 뚱뚱한 사람은
어제 어리숙한 고객을 만났는데
잘 하면 돈 좀 되겠다며
간식으로 육포를 씹으며
자기는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살이 안찔 수가 없다고

옆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다니는 골프연습장에
눈도장 찍은 아줌마하고
술 약속을 했는데
친구 분양해서 같이 만나자고
키득키득 웃어대고

내 뒤따라오는 두 사람은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정치하는 사람들
주위 동료 친구들
대충 잡아도 열대여섯 명은
세치 혀로 때려 잡았다

나는 앞 뒤 사람들 사이에
고립되어 느릿느릿 걷는데
나 때문에 바쁜 발걸음
걸기적댄다고 발끝 채여
오도가도 못하고 중간에 끼인
나는 그저 침묵이다 

《19》
마니산

공석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돌계단을 오르다
털퍼덕 주저앉아 하산을 갈등한다
중도하차는 나를 배신하는 일

민족정기를 도모하는
호국보훈 유월의 산행
좀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강렬한 빛으로 분사하여
은총으로 분배하는 왕겨빛 태양
불끈 솟는 양지의 힘
홑이불 벗기듯 산등성 안개는
바다 건너 서쪽으로 꼬리를 감추고

하늘 아래 수많은 명산을 거느리는
마니산 성지 산기슭 더욱 깊어져
가슴 벅차 얼굴 벌개지도록
세상으로 등을 떠미는
한사코 불어오는 강화도 서풍  

《20》
만추

공석진

늦은 가을을 만취하노라
사랑도 취하고
미움도 취할 때
다가 올 모진 겨울도
취할 수 있으리
화려했던 단풍도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으로 구르는데
한번도 화려해본 적 없이
본색을 잃어 가는 나는
농염의 이 가을을
취하지 않고
어찌 보낼 것이냐
그리움도 외로움도
기억 저 편에
한낱 먼지로 사라질 것을
만추에 만추가 서러워
만취하노라 

《21》
무더위

공석진

완벽하게
세상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다리에
잔뜩 힘주고
버텨주던 빌딩들도

한번 건들면
폭발할 것 같던
충혈된 시선들도

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가진 자들의 호들갑도

이젠
아무런 저항 없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사람들의
멍한 무기력

그 사람들 앞에
살아보려는
의지를 불사르는
걸인의 구걸

버스터미널 한쪽 구석
낡은 선풍기
탈탈탈
의미 없이 돌아가고

지쳐 널브러진
사람들의 의식에
사정없이 내리치는

소나기에 대한 꿈은
정녕
없는 것이냐  

《22》
물구나무서는 산

공석진

문득 찾아와
눈물을 쏟는 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립다
나는 느끼고 싶다
날개가 되어 자유롭고 싶다

역삼각형의 꼭지점이 세상을 찌르고
거꾸로 서는 육중한 육신을
지탱하기 힘들어 연거푸 쓰러져도
온갖 세상 욕심 홀로 감당하기에는
고독하여 상심한 내가 역부족이다

난들 허구헌 날 밟히고만 싶겠는가
등을 내어주는 건 쓸쓸하여 안되겠다
가슴 내어주는 건 허전하여 안되겠다
짓밟는 고통은 밤새 욱신거린다

뒤집어 뒤집어져 비틀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장엄한 풍경소리는
무구한 세월 동안 꾹꾹 다져져
가슴 속에 응어리진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무거운 등짐이 사라지고
소멸이 되는 순간 적멸하기전
신음하는 바다에게 달려가
정녕히 애정 어린 충고를 하리니

오! 연인이여
부글부글 끓어 속 썩이지 말고
당신도 물구나무서보구려
몰염치한 세상 욕정 남김없이 쏟아내
너무 늙어 화석이 될지언정
후회없는 늦은 사랑을 나눠 봅시다 

《23》
미안합니다

공석진

염치없는 나를 혼내줄 독주를 앞에 놓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건배를 제의한다.
악착같이 홀로 살아남으려
부축하여 함께 동행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무관심으로 홀로 된다는 것이 내내 서럽게도
당신을 허허심장에 방치해서 미안합니다.
'나도 외롭다, 나도 외롭다.' 강변하면서
정작 당신의 고독을 챙기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아프지 않다는 이유로
당신의 통절한 아픔을 나누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눈에 안 보이면 마음에서 멀어지는데
곁에 있어도 눈을 감고 애써 외면해서 미안합니다.
천년 만년 사랑한다 말을 해놓고
숱하게 이별을 고려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임에도
지나가는 바람쯤으로 쉽게 망각해서 미안합니다.

소중한 당신이여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심한 갈증을 축여 줄
한 대접의 물 마중을 나가지 않는 일이
하아 이다지도 후회 스러운 일인 걸
이제서야 등신같이 머쓱하게 외칩니다.
'미안합니다. !'
'미안합니다. !' 


《24》
변산邊山

공석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변산에 가지 마세요
공연히 가슴만 헤집어 놓고 왔습니다
구름 뒤 숨어 얼굴 감추는
새벽녘 숫기 없는 당신을
끝끝내 대면하지도 못하고
허기진 배 채우는데 급급하여
저 또한 간단히 외면하였습니다
행여 조우할까
더욱 가라앉은 내소사를 내내 걷다가
억만년 층층이 쌓인 그리움이었을
가슴 곳곳 구멍 뚫린 채석강을
포말에 발목이 잡히도록 헤매었습니다
그래, 훗날을 기약하마
내 기어이 변산을 떠나는구나
바다에 몸 던질 절박 없는 날
흙먼지 뒤집어쓴 변산 상사화相思花
동병상련에 긴 한숨 내쉬고
연인처럼 격렬하게 포옹하고 싶었던
격포의 빈 가슴만 헤집어 놓고 왔습니다
아, 은밀하게
분홍빛 바람이 불지 않은 날에는
변산에 가지 마세요 

《25》
북소리

공석진

목덜미 수줍게


바람을 불어
귓불마저 빨개지면

가슴 한마당


진군進軍의
북소리가 울린다

《26》
북한산

공석진

산은
시작부터 심통을 부렸다
세상 유혹에 곁 한번 주지 않은 내가
그리도 서운했을까
상심한 징조가 사납다

한참을 올랐더니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산은 곧 허리를 허락을 한다
눈부신 초록을 보여주고
새들의 여름맞이가 분주하다

거북바위가
정상을 오르려는 일념으로
나는 본 체 만 체
백운대만 쳐다본다
가야지, 가야지

마음을 비워야만
진정한 승자가 되는 법
끊임없이 정상에 도달해야 하는
세상사람들의 욕망을
어찌해야 하는가

사모바위 주변으로
모여든 남정네들은
떠나버린 옛 애인이
너무 그리워서
해후를 꿈꾸며

천일 기도하다가
바위로 굳어버린
사모바위의 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있는 비봉은
기세등등한 자세로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지 말고
이제 그만 내게 오라는
욕정이 집요하다

나는 이미 심한 질투로
마음 몹시 상하다가
어쩔 도리 없이
시퍼런 기세에 눌려
하산하고 말았다

기다려다오
이별이 잦은 망각의 세월 속
내 곧 다시 돌아오리니
너무 근심치 마라
너무 서러워 마라.  

《27》
불암산

공석진

수락산에 사랑 구하고
불암산에서 불알 놀란다
양미간 찌푸리던
부처 닮은 불암도
먼지에 눈결 흐려져
가뜩이나 큰 눈 훔치며
슬쩍슬쩍 곁눈질로
세상 여자 힐끗거렸다

그럼 그렇지
돌부처도 별 수 있나
뒤통수 긁적이는 본능
무너질 수도 있지
빙판이 도사리고 있는
산길을 걸으며
속세는 원래 그런 거다
부처 같은 말을 읖조렸다 

《28》
비우기

공석진

몸을 비우려고
물만 마시는 날이
벌써 여남은째
비워야 채워지는 걸
나이 쉰에 깨닫는다

마음을 비우기까지
또 얼마나 천겁(千劫)을
기다려야 하는지

비우는 연습을
가선지게 하면서
오늘도 물 두어 잔에
담구어 색 바랜
나를 버린다 

《29》
사모바위

공석진

당신은 어떤 욕심도 움켜쥐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바람의 궤적들을
잠시 만나고 헤어질 뿐
오랜 세월
흔들리지 않으시고
그리 설운 그리움으로 앉아 계십니까

누구나 그 앞에 서면
이기적인 천성이 갑절로 불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자리를 차고 앉아
밀어내려 애쓰지만 추락하는 것은
시시때때로 춤을 추는 저급한 감성입니다

비우지 못하여 평생 짐이 되어버린
우울에 갇힌 꼽추는
지는 태양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등이 굽어
허공에 눈물을 뿌려대지만
당신은 언제나
파란 노을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30》
산은 고독하다

공석진

산은
고독하다

홀로 사랑한들
그 누가 알아주랴

잊혀져 가슴 아린
낯선 사람

마른 정情 스치어
생채기주는 사람

겸허하게
너를 용서하련다

물이 낮은 곳으로만
찾아가듯

나를 낮추어
너를 맞으리니

주저치마라
두려워마라

햇살이 눈부셔 허리굽은
길 섶 들꽃처럼

산은 기다림에
고독할 뿐이다 

《31》
산이 되고 싶소

공석진

산이 되고 싶소
공허한 사람 모두
그리움 가득
채우고 가라
그러고 싶소

내 등을 타고
내 허리를 밟으며
세상 설움 모두
버리고 가라
그러고 싶소

그리하여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합쳐
산처럼 쌓여
정녕 산이 되면

미처 오지 못한
사람들 위해
꽃숲에 첩경을 놓아
비묻어오기 전
길마중 나갈 테요 

《32》
석양은 붉다

공석진

가느란 바람에도
소리 없이 낙하하는
초췌한 낙엽으로
세상을 단념하는가

노화는 진화
해는 질수록
먹먹한 가슴에
뿌려진 눈물만큼 선명하다

생 가슴앓이
아물지 않은 상처로
잿빛으로 채색하듯
미련 두고 떠나진 않으리

서녘 하늘 태양은
초경(初經)의 혈흔처럼
기세 등등하게
그대로 멈춰 서있을 것이다  

《33》
선자령을 오르며

공석진

'한번 가 보시오!'
덜덜 치를 떠는 계곡물이
우려(憂廬)하며 급하게 하산하였다

칼로 베이는 서걱임쯤이야
볼이 떨어져 나가듯
절단된 삶의 군더더기
한발 한발 유기시키는데

아, 천국의 문지기!
세상 풍파 동장군에 대항하다
삭풍에 입 돌아간 풍차
덩치 크다 몸 성하랴
하얗게 벗은 아랫도리가 시렸다

삽시에
하늘 정원 발을 딛고서
절정의 반전에 환호하는 내게
길목 지키고 선 선자(仙子)
'어서 와 내 등을 밟으시오!'
갈채를 보냈다 

《34》
송악산

공석진

비 바람에 막히어
발 묶인 그리움

지켜보는 마라도
슬퍼 마라
한숨 지을 때

성난 바다
둔덕에 비스듬
산을 저격하였다

검푸른 파도
송악의
구멍난 가슴을 쳤고

지척에 산방이
상련의 동병을
끙끙 앓았다 

《35》
시산제

공석진

눈물겨운 인내력에
데구루루
햇살은 기슭에 구르는데

세상은 인정머리 없다고
발붙일 여지도 없다고
섣부른 상상의 유회

속 좁은 생각을 속죄하려
올리는 제사에
기분이 흡족하여
혼을 다하여 산을 베푼다 

《36》
시월

공석진

여름 내내 잠복해 있던
그리움을 앓는 거겠지
고열로 단풍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처럼 아픈 잎새
뚝뚝 떨어지는데
어쩔거야
나 하나쯤 잠시 자리를 비운들

사는 게 급급하여
이까짓 변화쯤
몸 사려 참지를 못하고
숨막히게 난방을 해대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낭만은
을씨년스러운 찬바람에 혼절하였다

붙잡지 마라
마침내 나는 떠나리
집요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빗발치는 아우성을
은행나무 밑 벤치에 앉혀 놓고
침묵으로 까맣게 채색하는
단호한 망각의 시월  

《37》
여성봉

공석진

"어머!" 부끄럼 반 난처함 반
"이야!" 신기함 반 호기심 반
애써 욕정 웃음 뒤에 감추고
한 놈도 예외 없이 뚫어져라
한곳만 바라보는 뭇남정네들
"성가시게 왜 거기 박혀서..."
주목받지 못하여 사뭇 쓸쓸한
나무가 쓰러진다 


《38》
오르지 않는 산

공석진

너무 높아서
혹은 너무 가파라서
오르지 못하는 산
인적 없는 그 산에
한 남자가 올랐답니다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도
마음 흔드는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산이 있다면
그야말로
고독하기 짝이 없는 일

우리는 누구나
험산 같이 외로운 존재라해도
일생을 문 걸어 잠근
산으로 사는 건
참으로 몹쓸 짓입니다

지금 저는
사람이 살지 않던 산에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경을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39》
오봉

공석진

뭉근하게 끓던 사랑이
느슨해진 지각을 뚫고
세상 밖으로 치솟았다

우이령 넘나드는 여인
기세 눌려 외면하려니
순정을 치한 색정이라
오명뒤집어 쓴 서운함
뜨신 눈물로 쏟아지고

봄 곁눈질하는 길목은
하루 종일 질퍽거렸다 

《40》
오봉이 여성봉을 탐하다

공석진

양기와 음기 조화로다
낙엽옷을 입은 여성의 해진 올
가을 바람이 조금씩 당겨
하반신을 드러내누나
건장한 놈 다섯이
주위를 살피다가
서로 먼저 차지하려
풀어 헤친 낙엽 위를 헤집어
양지 바른 곳 자리를 펴다
나신이 눈 부셔 꼼짝 못하고
굳어 버렸다 

《41》
우면산은 잠들고 싶다

공석진

지친 소는 잠들고 싶다
뚫리고 파이고 잘리어
흉하게 변한 성형의 종말
피부는 흘러내려
이기적인 안락을 덮친다

애당초 워낭소리는 경종(警鐘)이었다
아비규환 속 때늦은 후회
비 묻은 손으로 갈기는
가혹한 채찍 폭우는
최후의 방주(方舟)를 허락치 않는다

이유 없이 코뚜레 잡혀
평생을 노역에 시달려
바보처럼 상처안고 살아
생이 아프다고 신음 대신
피눈물을 뿌리는 구나

탐욕을 채우려는 오만은
잠들고 싶은 우면牛眠의 밤을
숙면을 방해하려
벌건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다 

《42》
월출산 큰 바위 얼굴

공석진

하늘에서 만삭인 달 내려와
월출산 홀로 우뚝 섰고
서해에서 장대한 바위가 솟아
큰 바위 얼굴로 자리잡았다

호남 땅 영암에 기세등등
분연히 일어선 구정봉을
천황봉이 밀고 사자봉이 받쳐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킨다

대륙에 한민족 기개 떨친
광개토 대왕 기를 받았는가
풍전등화 조국을 구해낸
충무공의 얼을 계승하는가

숭고한 애국 선열의 넋이ㅁ
민족혼으로 동방의 등불 밝혀
글로벌 세상 호령하라
삼척장검을 건네 주고 있다 

《43》
이별이 슬픔에게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말하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헤어짐은 절망이 아니다

차 오르는 슬픔아
차라리 날선 시선으로
울컥울컥 심장을 찌르어다오

무력한 자존심이
바닥까지 비워지면
흐뭇하게 가슴을 내어주마

속절없는 상처야
단단히 아물어라
다가올 그리움 아프지 않게 

《44》
정 그리우면

공석진

애써 지우려 하지마
그저 세월에 맡기다가
보고파지면

가을 언덕에 올라가
저 여기 있어요
외쳐 보렴

혹시 아니
향기 그윽한 사랑이
꽃구름 타고 올지

그러다가
情 그리우면
情 그리우면

어느 낙엽비 우수수 내리는 날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어버리렴 

《45》
죄인

공석진

나는 죄인입니다
천 번 죽어 마땅한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뚜벅
뚜벅
뚜벅

"죄인 1004번!
예수를 아느냐"
"예수를 믿습니다"

"네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석방!"

먹장구름 사이
가느란 햇살
눈물이 쏟아진다  

《46》
지하철

공석진

잿빛 교도소
하루에도 수만 번
견고한 쇠문이
열리고 닫힌다

들어갈 땐
낯선 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스스로 장막을 친다

갇힌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듯
무장해제되어
손잡이에 매달렸다

쏟아지는 사람들
악어 입 오물 토해
위선의 탈을 벗기어
세상 밖으로 내몬다

남겨진 자에게
던져진 수의(囚衣)
무감각한 회개
전원 사면 복권이다

반복되는 구속과
석방의 악순환  

《47》
천국으로 가는 길

공석진

천국으로 가는 기차
예매가 시작되었다네
인터넷 구입이 마감되고
암표마저 동이나
다른 교통편 알아보느라
세상은 난리북새통이네

아무리 천국이라 해도
급행으로 갈 일 무에 있나
이 몸은 추억 가득 든
배낭 들쳐 메고
운동 삼아 걸어서 하늘까지
자늑하게 가려네

비록 지연되어
마중 나온 사람
지쳐 널브러지고
하늘나라 신천지 등기부
내 땅 확보 무산되어도
무심하게 가려네

천국으로 가는 동안
꽃잎 사복사복 밟히는
쌔뜩한 무지개 길 따라
미리내 곳곳 여행하며
길 걷다 손 흔들어
구름사다리 얻어 타려네

천국으로 가는 길
사랑하는 이 동행한다면
멀면 멀수록
늦으면 늦을수록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네  

《48》
코스모스

공석진

겨울
발목까지 잘리운
그리움은
더욱 깊숙이
뿌리내렸다

꽃잎
떨구려 마라
님 오실 그 날
흙먼지 뒤집어 쓴
미소로 맞을지라도

평생
한곳에서
님을 기다려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겠다  

《49》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공석진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멀리 보내기 위하여
가능한 뒤로 당겨야 하고
스스로 낮춰야 하고
결국은 놓아야 하거늘

앞으로 앞으로만
위로 위로만
손에 쥐려고 애쓰는 건
늦겨울 앙상한 고목처럼
참으로 볼품없는 것

버리기도
비우기도
연습 없이는 안 되는 일
습관처럼 모두 내려놓아야
갱생하는 길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느리지만 빠른 듯
빠르지만 느린 듯
아프지 않게
자유로울 수 있게  

《50》
흐린 날이 난 좋다

공석진

흐린 날이 난 좋다

옛 사랑이 생각나서 좋고
외로움이 위로 받아서 좋고
목마른 세상
폭우의 반전을 기다리는 바람이 난 좋다

분위기에 취해서 좋고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고
가뜩이나 메마른 세상
눅눅한 여유로움이 난 좋다

치열한 세상살이
여유를 갖게 해서 좋고
가난한 자 마음 한 켠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외로워하며
누군가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해 줘서

흐린 날이 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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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철 시 모음 30편

《1》
가을 끝

      나해철

자정 넘어 든 잠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문에 나무 그림자가 서렸다
가을은 너무 깊어 이미 겨울인데
저 나무를 비추고 서 있는 등불은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갑자기 어려 저서 철없이 하는 말을 듣고
옆에 누운 사람이 하는 말
그럼 나가서 그 등불이나 껴안아주구려
핀잔을 준다
그래 정말 막막한 이 밤 등불의 친구나 될까보다
괜스레 마음은 길 위에 있다 

《2》
겨울 버스

  나해철

코끝이 어는 승강장에 서면
너처럼 오고 또 너처럼 오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가족을 모아 고향을 일구고 싶은 아버지의 꿈과
산 바위 위에서나 소리쳐 부르는 스무 살 동생의 터질 듯
한 가슴과
끝끝내 기다림의 불쏘시개만 넣고 마는 새벽마다의 시
뱃속까지 시원하고 다디단 바람의 어느 봄
일렁이며 터져 남이나 북 개울과 마을을 환히 밝힐
그 날의 빛들을 생각한다.
길이 멀고 끝이 없으면 그만큼 더디 오고
기다리는 사람이 몇 안될수록 애터지게 오지 않는
너는 그러나 온다.
황혼 그리고 어둠이 들어 모두들 쓰러져 눕기 전
언제나 눈부신 소리로 먼저 온다.
얼어붙은 손끝과 가슴 하늘과 산 그림자가 깨어나며
달려가 맞이하는 기다림의 끝. 평화와 따뜻한 것.
버스에 오르면 풀밭처럼 잡목림처럼 안기고 섞이어
살의 온기로 데우고 서로 녹여
살붙이로 하나가 되는 사람들.
희망은 너처럼 오지 않고 또 너처럼 온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쁨과 눈물겨움
감사와 복된 춤 노래와 빛이 터지는
그날의 이 땅 위에 서듯
흙도 피도 얼어붙는 칼바람 속에서 버스에 오르면
기어코 너처럼 오고야 마는 우리들의 희망에 대해서 생
각한다.
몸은 덥혀지고
누군가를 데우면서.  

《3》
그건 아야해

    나해철

풀을 꺾는 내 아이에게
풀은 아프다고 알려줬다.
아이는 꺾인 것을 보면
언제나 아야해
그건 아야해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
바보와 같은 이 행성.
이쪽과 저쪽에서 끊임없이
버려지는
귀한 그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
자식과 아내, 그 행복,
불도저에 밀리는 가족과
족속, 그들의 평화와 기도.
이대로 간다면
사랑과 따뜻함을 다 익히기도 전에
증오와 파괴의 추문은
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고
너는 지극한 슬픔,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울 것이다.
아이야 너는 오늘도
꽃을 꺾는 한 어른에게
아야해, 그건 아야해
작은 풀밭의 나라를 떠나며
풀꽃들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 안녕 

《4》
그리운 이에게

    나해철

사랑한다고 말할 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박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 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세상의 덤불가시에 살갗을 찔리면서라도
내 잊지 못한다는 한 마디 들려줄 걸.
혹여, 되돌아오는 등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고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 걸...
그리운 사람에게. 

《5》
까치

      나해철

감나무 가지 위의 까치 세 마리
어둠의 빗장을 끄르고 있네

돌쩌귀 미끌리며 문 열리는 소리

살아 있으므로 느끼는 것은
오직 한가지
문 밖에 황홀히 빛나는
자유

반가워 나아가니
문 밖은 아직 어둡고
까치들만 앞서 날아가 또 다른 문을 열고 있네. 

《6》
나무숲에서

    나해철

나무는 언제라도 무리져 직립한 채 있다.
베인 가슴으로 이 시대 영혼이 이렇듯 숲에 들면
그 자리 그대로 곧추선 나무들 때문에
우리는 다시 고귀한 무엇이 된다.
살 속에 흐르는 가락은 절로 넘치는데
거리와 작은 방 광장에서
그립고 눈물겨운 것들을 위하여 노래하지 못하고
달팽이처럼 살기로 하거나
밤 깊도록 불밝히고 섰자면
바보와 천한 것들로 쓰러져
이 끝과 저 끝에서 씻기우거나 아파하다가
산에 들면 다시 지상의 고운 한 생명으로
구부러진 영혼의 곱추를 세운다.
이 흙 위에 새와 꽃바람
사람과 사람이
깨끗이 어울려 살날이 오리라
기다림과 바램으로
자주 울고 무너지는 사람들.
그늘과 양지의 나무들
숲의 꿈을 꾸면 무성하여 숲이 되고
밀림은 밀림이 되고
산맥이 되리라 기원하면 곧추서서 그리 되는
희망의 땅과 숲에 들자
새벽바람의 숨쉼으로
맑은 하늘의 이마로 푸르름으로
다시 서자. 

《7》
남몰래 흘리는 눈물

      나해철

꽃 그늘 졌다
지금 꽃 그늘 아래서
어룽어룽 그늘진 꽃 무데기를 본다
송이마다 꽃들은
조금씩 다르게 어딘가를 바라보며
무한히 고요히
햇빛 밖에 그늘 밖에
있다
누가 소리하나
남몰래 남몰래라고
목이 타서
꽃들은
세상 너머나 바라보는 듯
그날밖에 햇빛 밖에
가만히 있는데  

《8》
내 마음의 가을

        나해철

붉은 단풍잎처럼 얇아서
디뎌 밟으면
바스러질 무엇이 거기 있다
그때쯤이면
꼭 무엇이던가 디뎌 밟으며
떠나는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을
견디어낸다는 것일까
견디어낼수록
그렇게 되어가는 것일까
요즈음 몇 일에
십 년이 늙었다
고개를 숙이면
단풍 든 이파리가 아주 말라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9》
내 마음의 겨울

      나해철

입김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낸다
사라진다
건너가보지 못하고
소멸이다
그와 같다
내 마음 

《10》
내 마음의 첼로

      나해철

텅 빈 것만이 아름답게 울린다
내 마음은 첼로
다 비워져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누군가
아름다운 노래라고도 하겠지만
첼로는 흐느낀다
막막한 허공에 걸린 몇 줄기
별빛같이
못 잊을 기억 몇 개
가는 현이 되어
텅 빈 것을 오래도록 흔들며 운다
다 비워져
내 마음은 첼로
소슬한 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 운다 

《11》
넥타이

      나해철

그렇게 말고 이렇게
매듭을 묶을 수도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니
그 후로 그렇게 말고
이렇게도 인생을
묶으며 살아왔다
아니 늘 이렇게만
살았다
이렇게 묶을 때마다
네가 준 내 인생 때문에
사무쳐 목이 메인다  

《12》


      나해철

눈이 허리까지 내려 쌓인 날
태어났다 했었지
골짜기 깊은 곳에서
붉은 동백처럼 피어났겠구나
그래 네 사랑은
눈에 갇힌 동백과 같았다
붉어서 아프고
흰 눈 속이어서 아팠다
하얗게 바랜
내 가슴의 흰 눈밭에
너는 붉게 피어서
동백같이 아팠다  

《13》


  나해철

너를 만나려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달아 너의 몸 아래 내 몸 눕히려면
어두워야만 한다
황홀한 네 빛이
내 영혼에 가득하기까지는 밤이 와야 한다
햇빛에서는 아름다운 네 모습 볼 수 없어
그러므로 밤뿐인 사랑
어둠뿐인 사랑이다
달아 이지러져서 내 심장 멎게 하다가
터질 듯 차올라 내 가슴
달뜨게 하는 달아
너를 만나려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밤뿐인 사랑
어둠뿐인 사랑이다  

《14》
담쟁이

  나해철
 
살았을 뿐이다
살아내야 할 시간을
견디며
빈자리에
푸른 잎을 토해냈을 뿐이다
다만
절체절명
사는 일을 위하여
살아냈을 뿐이다
오늘 너는
흰 절벽을 푸르게 덮었다고 하는구나!
시간들이
직벽으로 서 있었는가?
절벽에서 살아왔는가?
절체절명
이 시간
살이 터지며 또 푸른 것
하나 토하자꾸나 

《15》
동해일기·3

      나해철

바다에 서면
이제는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난다
부서진 유리창처럼
상처의 숲을 이룬 가슴이
구석구석 따뜻해지면 평화로워진다 

《16》
두엄자리

      나해철

두엄은 썩어서 금비가 되는데
지푸라기, 돼지똥, 닭똥 그리고 오줌이
섞여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료가 되는데
벼가 먹고 보리가 마셔서
살이 통통 오르는 영양식이 되는데
헛헛한 내 가슴은
썩어도 어디 붙일 데 없다
가슴을 두엄자리에 내려
독새풀, 엉겅퀴, 억새, 물풀들과 포개져서
다 탄 재와 똥오줌에 달구어져
질 좋은 퇴비가 되면 좋겠는데
땅 위에 떠서 흔들리는 저 가벼운
내 가슴
누구를 만나 껴안아도
안기는 건 저같이 무게도 없는
빈 뼈의 집  

《17》


    나해철

한겨울 마른 나뭇가지 끝에도
주먹만큼 별들은 매달려
외로워
외로워 말라고
파랗게 빛나는데
아직은 심장에 따뜻한 피 흐르는
내 가슴과 어깨 위에
어찌 별들이 맺혀 빛나지 않겠는가
사람들아 나를 볼 때도
겨울 나무를 만날 때도
큰 눈에 어린 눈물보다 더 큰
별이 거기 먼저 글썽이고 있음을 보라
☆★☆★☆★☆★☆★☆★☆★☆★☆★☆★☆★☆★
《18》
봄날과 시

      나해철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
《19》


      나해철

불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따스하게 찬 것들을 덥히고
온전히 재가 되는 것을 보면
역사의 꽃밭마다 몸을 던져
죽어서도 온기로 남아 있는 그대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불 주위의 새벽에
침묵으로 앉았다. 우리는 덥혀졌으며
추운 거리와,
거리의 방패, 구둣발을 잊었다.
가장자리와 가운데 어디서나 불은 타오르고
하늘의 흐린 별까지 닿아 올랐다.
눈시울에 몇 장의 낙엽처럼 떠오르는
지난 새벽과 정오, 황혼의
이 땅, 절망과 증오, 답답함과 비애에 대해서
오래 말들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불과
불의 순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생은 귀하고
이 흙 위의 우리들 삶에
눈물겨운 것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았다.
불 속에 한줌의 슬픔을,
누구는 한움큼 마른 뼈를 넣고 또 던지며
우리는 기다렸다.
새벽 불의 완성을,
우리들 기도의 간절한 끝을.
☆★☆★☆★☆★☆★☆★☆★☆★☆★☆★☆★☆★
《20》


    나해철

비오는 날을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
《21》
비 오는 날은

    나해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
《22》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나해철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때로는 나란히 선 키 큰 나무가 되어
때로는 바위 그늘의 들꽃이 되어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온 산과 들이 비워진다 해도
여윈 얼굴 마주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 그루 키 큰 나무의
하늘쪽 끝머리마다
벌써 포근한 봄빛은 내려앉고
바위 그늘 속 어깨 기댄 들꽃의
땅 깊은 무릎 아래서
벌써 따뜻한 물은 흘러라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세월은 무정타고 말하여져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 향기 속에 있으니
여윈 얼굴로도 바라보며
빛나게 웃어라
☆★☆★☆★☆★☆★☆★☆★☆★☆★☆★☆★☆★
《23》
세탁기

      나해철

한 세상 잘 놀다 간다는 말은
나, 게으르게 살았다는 말
나, 죄가 크다는 말
나, 한 세상 잘 놀고 있다
양심은 팬티와 같은 것
가끔 벗어서 세탁기에 빤다
말려서 다시 입는다

한 세상 슬픔을 잊고 웃다 간다는 말은
나, 독하게 살았다는 말
나, 한을 주었다는 말
나, 한 세상 늘 웃고 있다
의무는 런닝셔츠와 같은 것

나의 세탁기에서는
땟물과 함께
눈자위 붉은 그리움이
배수구를 통해 흘러나간다
☆★☆★☆★☆★☆★☆★☆★☆★☆★☆★☆★☆★
《24》
쓸쓸한 그것

      나해철

나뭇잎을 물들이다 떨어지게 하는 것
세월을 밀어 한 시대를 저물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시집도 편지도 태워서 재가 되게 하는 것
살도 뼈도 누우면 흙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
《25》
오래 되었네

      나해철

오래 되었네
꽃 곁에 선 지

오래 되었네
물가에 앉은 지

오래 되었네
산길 걸어 큰 집 간 지

오래 되었네
여럿이서 공놀이 한 지

오래 되었네
사랑해 사랑해 속삭여 본 지

오래 되었네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낸 지

오래 되었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다정하게 불러 본 지

오래 되었네
산 밑 집에서 들을 바라보며 잠든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있어 본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고요히
앉아 있어 본 지
☆★☆★☆★☆★☆★☆★☆★☆★☆★☆★☆★☆★
《26》
웃음소리

      나해철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던 것들을
찢어 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
《27》
웃음소리

      나해철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던 것들을
찢어 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
《28》


    나해철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빛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벽지에 남은 어린 아들의 희미한
그림이 보인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린다
베란다를 지나는 바람과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들린다
지친 몸일 때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그들이 안 들리던 그들이
눈도 귀도 어루만지며
곁에 와 함께 눕는다
☆★☆★☆★☆★☆★☆★☆★☆★☆★☆★☆★☆★
《29》
화해를 위하여

      나해철

새벽이면 이슬에 새들은 부리를 닦고
풀잎들도 정결해진다
외로운 그대
이 땅 어디나 펼쳐진 부드러운 산자락과
푸르른 들판을 보라
곳곳에 희고 허리 굽은 억새로 노동하며 모여 있는
우리를 보아라
그대의 꿈은 이방의 것
그대의 쇠는 모질다
그대는 빛 속에 우리는 뒷전에 있으나
지금 우리는 새벽에 있고
그대는 차라리 어둠에 있다
새벽은 모두가 새로와지는 것
호젓한 능성이 이 땅 한줌 흙으로 태어난 형제여
아교와 같은 어둠을 벗고
이제 돌아오라
헹구어진 얼굴로
잠방이인 채로 황토 묻은 발걸음으로
새벽에 선 우리들 싱그런 가슴으로 오라.
☆★☆★☆★☆★☆★☆★☆★☆★☆★☆★☆★☆★
《30》
후회

    나해철

해준 것 없구나
사랑이여
반지도 팔찌도
옷도 구두고
집도 자동차도
해주지 못했구나
그대 목마를 때
한 종지 물만 건네주었구나
그대 눈시울 젖을 때
입술만 대어 닦아주었구나
속절없는
사랑이라는 말만
사랑이라는 말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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