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시인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란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유쾌한 사랑을 위하여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가을 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사람의 가을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첼로처럼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매캐한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 싶다

기껏해야 줄 몇 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 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나무 학교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푸른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나무를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우울한 날은 

 

우울한 날은

우울하게 죽은 자의 무덤에 간다.

구름내와 눈물내가 어둡게 나는

우울의 이마를 짚으러 간다.

권력의 톱으로도 썰지 못하고

시간의 날카로운 이빨로도 못 쓰러뜨린

이 세상의 우울이란 우울

모두 거머쥐고 죽은 자의 무덤

그 곁에 망각처럼 누우러 간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지척이어서

꿈으로 닿는 길도 지척이어서

손씻고 손씻고

아아 나는 가벼워져. 

 

☆불의 사랑 

 

어디에서 이토록 뜨거운 생명을 만나랴

참혹한 추락이 예비되었지만

불이 있어

지상은 늘 아름다웠다.

감히 수천의 날개를 파닥이며

별을 떨어뜨리며

저 무상을 향해 무릎을 펴는

불이여, 네 이름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과 초월을 꿈꾸랴

네 심장으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파멸과 맞서는 사랑을

우리가 감히 떠올릴 수 있으랴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목숨의 노래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시집 ; 어린 사랑에게

 

☆초여름 숲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물을 만드는 여자 

 

딸아,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채탄 노래 

 

마음을 파들어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일 모래 저녁답쯤에는 지평선이 보일까.

 

그리움이 끝난 그곳에는

타버린 나무들이

무더기 무더기 쓰러져 있을까.

얼마나 까아만

화산재가 쌓여 있을까.

 

슬픔의 벼랑마다 누가 서 있어서

밤마다 이토록 시를 쓰게 하는 것일까.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는 이도 많건만

 

내 마음은 얼마나 깊어

그대 하나 묻기에도

한 생애가 걸리는 것일까.

끝 모를 모래 바람 부는 것일까.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축구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을까

침묵과 비명만이

극치의 힘이 되는

운동장에 가득히 쓴 눈부신 시 한 편

90분 동안

이 지상에는 오직 발이라는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있음을 보았다

 

☆바다 앞에서 

 

문득, 미열처럼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서

 

서해바다

그 서럽고 아픈 일몰을 보았네.

 

한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은 스러지고

주소도 모른 채

떠날 채비를 하듯

조용히 옷을 벗는 해안선을 보았네.

 

아, 자연

당신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소슬히 잊는 일뿐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눈과 파도와

비늘 같은 욕망을

잊는 일뿐이었네.

 

잊는다는 일 하나만

보석으로 닦고 있다

떠나는 날

몸과 함께 땅에 묻는 일이었네. 

 

☆새 아리랑 

 

님은 언제나 떠나고 없고

님은 언제나 오지 않으니

사방엔 텅 빈 바람

텅 빈 항아리뿐

비어서 더욱 뜨거운 이 몸을

누가 알랴

 

그 위에 소금 뿌려

한세월 곰삭은

이 노래를 누가 알랴

 

기를 쓰고 피어나는 이 땅의 풀들

저 눈 밝은 것들은 알랴

 

떠나는 발자국이 님인 것을

돌아오지 않는 것이 님인 것을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것이

우리 님인 것을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 님을 기다리며

밭고랑처럼 길고 긴 생애를 사느니

 

세상에는 없는

고무신 같은

된장국 같은

백자 항아리 같은

기막힌 이 사랑을 누가 알랴

 

냉수 한 사발의 사랑이

폭풍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너무 울어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이 살갗이

지진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님과 나 사이에는

꽃이라고 할까

새라고 할까

청산처럼 숨쉬는

아름다운 생명이 있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온몸으로 흔들리는 노래를 부르며

이 땅에는 사시사철 기다림이 피어나느니

 

곁에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안을 수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결혼한 것은 님이 아니리

 

멀리 있는 것

그래서 두 눈이 아리도록 그리운 것만

우리 님이리

아리랑이리

 

홀로 푸른 하늘 바라보면서

푸른 하늘 굽이굽이 새겨둔 설움

바라만 보아도 말갛게 차오르는 눈물

 

질경이 같은

엉겅퀴 같은

뙤약볕 같은

어지럽고 슬픈 살냄새

허리 구부리고 울던 흰옷들의

쓰라린 사랑이여

 

천굽이로 살아나는

아리랑이여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네루다 풍으로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

이 나이에 무슨 사랑?

이 나이에 아직도 사랑?

하지만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사랑이 아무것도 못 보는구나

겁도 없이 나를 물어뜯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 손가락에 불붙여

사랑의 눈과 코를 더듬는다

사랑을 갈비처럼 뜯어먹는다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 

 

☆먼 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정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2004. 2 

 

☆시(詩)가 나무에게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 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들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2004. 5 

 

☆지는 꽃을 위하여 

 

잘 가거라, 이 가을날

우리에게 더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

가을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

쓸쓸한 사랑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른 봄 파릇한 새 옷

하루하루 황금옷으로 만들었다가

그조차도 훌훌 벗어버리고

초목들도 해탈을 하는

이 숭고한 가을날

잘 가거라, 나 떠나고

빈들에 선 너는

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

 

2004. 3 

 

☆나무가 바람에게 

 

어느 나무가

바람에게 하는 말은

똑같은가 봐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바람불면 몸을 흔들다가

봄이면 똑같이 초록이 되고

가을이면 조용히 단풍드나봐

 

☆겨울 사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비의 사랑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의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을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

 

시집: 어린 사랑에게

 

☆대못 

 

떠나올 때

눈먼 어머니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왔어요.

 

비바람 그치지 않는

정든 골목에서

여름에도 추워하는 내 친구들은

벙어리인 채

손만 흔들었어요.

 

한 줄 꿈도 없이

목메이는 기도도 없이

 

길이 너무 많아

길이 없는

이 나라는 내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냥 뛰어요

눈멀고 입다문 그 모습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안고서 

 

시집 ; 어린 사랑에게

 

☆땅에서 나온 사랑 

 

아들아, 너를 어이 땅에 묻으리

꽝꽝한 땅에다 네 맑은 눈을

아침 햇살 빛나던 은구슬 치아를

벌써 책장 넘기던 의젓한 일곱 살

아까운 내 보배를 어이 묻으리

하늘이 가라앉고

땅 위의 모든 온기가 사라졌도다

이 목숨 끊어지는 날까지

다시는 입을 일 없는 아비의 비단 도포

언 땅에 깔고

올올이 애통한 어미의 속저고리 벗어

너를 싸노니

너 죽인 병도 여기까진 따라오지 못하리

어미 아비 검은 숯이 되어

천 길 절벽 굴러 떨어질 때

해와 달도 함께 꺼져버렸으니

시간이 어디 있어

내 아들을 범접할까

 

* 경기도 양주 윤씨 분묘에서 비단으로 싼 350년 전의 어린이 미라가

발견되었다. 

 

☆콧수염 달린 남자가 

 

콧수염 달린 남자가

키스를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

구두솔처럼 날카로운 수염이

입술을 뚫고 들어와

갑자기 내 인생을 쓱쓱 문질러준다면

놀랄 일이야

보수주의와 위선으로 무성한

은사시나무를 뿌리째 흔들며

바람 부는 날

그의 눈이 수말의 눈처럼 껌벅거리다가

내 어깨에다 뜨거운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린다면

그의 겨드랑이에서 풍겨나는

쉰내가 나의 삶의 코를 틀어막는다면

그렇게 화해에 이르고 말까

언젠가 무주구천동에서 보았던

열녀비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버릴까

 

☆축복의 노래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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