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시 모음 5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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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를 보내고
이정하
너를 보내고,
나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찻잔은 아직도 따스했으나
슬픔과 절망의 입자만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리석었던 내 삶의 편린들이여,
언제나 나는 뒤늦게 사랑을 느꼈고
언제나 나는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그대가 걸어갔던 길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툭 내 눈앞을 가로막는 것은
눈물이었다.
한 줄기 눈물이었다.
가슴은 차가운데 눈물은 왜이리 뜨거운가.
찻잔은 식은 지 이미 오래였지만
내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내 슬픔,
내 그리움은 이제부터 데워지리라.
그대는 가고,
나는 갈 수 없는 그 길을
나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할까
안개가 피어올랐다.
기어이 그대를 따라가고야 말
내 슬픈 영혼의 입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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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은 기도
이정하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게 하소서
그리움으로 가슴 아프다면
그 아픔마저 행복하다 생각하게 하소서
그리워할 누가 없는 사람은
아플 가슴마저도 없나니
아파도 나만 아파하게 하소서
둘이 느끼는 것보다 몇 배 도하더라도
부디 나 한 사람만 아파하게 하소서
간구하노니
이별하고 아파하는 이 모든 것
그냥 한번 해보는 연습이게 하소서
다시 만나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다시는 헤어져 있지 않게 하기 위한
그런 연습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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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까운 거리
이정하
그녀의 머리냄새를 맡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라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댄 이런 나를 타이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함께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여전히 난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왜 우린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해야 하는지.
왜 서로보다 하고 있는 일이 먼저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을 위해 지금은 참자는 말,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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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이정하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가는 만큼
그대가 멀어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내가 다가가면
그대는 영영
떠나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떠나간 뒤,
그 상처와 그리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더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한 순간 가까웁다
영영 그대를 떠나게 하는 것보다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오래도록 그대를
바라보고 싶는 마음이 더 앞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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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늠할 수 없는 거리
이정하
가까운 것 같아도
사실,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이겠습니까.
그대와 나 사이,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겠습니까.
가늠할 수 없는 그 거리,
그대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오늘은 아픔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그리운 것,
갖고픈 것을 멀리 두어야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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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이정하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울지 마
내 시월의 창들아
그 슬픈 눈으로
곱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지 마
너의 흔들리는 그 눈빛으로
세상의 모든 빛을 끌 수 있다면
네 투명한 마음속에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너에게 악수를 건네리
슬퍼하지마
내 시월의 창들아
이렇게 넓은 세상 속에서
또 낙엽은 지고
연인들은 쓸쓸히 헤어지고
저만치서
이별과 절망의 발자국을 뚜벅뚜벅 울리며
겨울은 걸어오고 있는데...
이제 우리, 두꺼운 외투를 하나씩 준비하자
그대와 나의 오랜 이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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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간격
이정하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엄청난 것도아니면서
늘 그것은 일정하게 뻗어 있어
나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서로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 물도
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남을
그대와 나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나중에는 한 몸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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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이정하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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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대 긴 그림자
이정하
잊을게요
그대가 말했지만
그게 아닌 눈빛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애써 기다려
우리 가슴이 식을 수 있다면
애초에 그댈
만나지도 않았었겠지요
사랑했어요
그대가 말했지만
아무 대답 못 하고
난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처럼
서로 다가 갈 수가 없는 것인지
깊어질수록
왜 가혹한 형벌이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애닯다
내 가는 길
묵묵히 돌아서는 내 뒷모습은
그대에게 어떤 상처로 남을까
그대를 떠나오면서
난 보았습니다
내가 떠난 빈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쓸쓸히
무너지는 그대 긴 그림자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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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이정하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또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만
어김없이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그런 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해 봅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 준 모든 것들,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는지요.
언젠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 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내 그리움들을 모조리 쏟아 부어 놓고, 펑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서입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 없는 당신이여.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김없이
돌려주어야 나는 비로소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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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정하
눈을 뜨면 문득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
불도 켜지 않는 구석진 방에는
혼자 상심을 삭이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정작 그런 날 함께 있고 싶은 그대였지만
그대를 지우다 지우다 끝내 고개 떨구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지금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내 한 몸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는데도
하루종일 그대 생각에 잠겨
단 한 발짝도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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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를 만났습니다.
이정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반갑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방금 만나고 돌아오더라도
며칠을 못 본 것 같이 허전한
그를 만났습니다.
내가 아프고 괴로울 때면
가만히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를 만났습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어디 먼 곳에 가더라도
한 통의 엽서를 보내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그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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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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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다린다는 것
이정하
귀향하는 열차를 기다립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또한
곁에 있건 없건 그 대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뜻.
일의 결과를 기다리고,
해가 뜨고 지길 기다리고,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
끝내는 죽음마저 기다리는,
그리하여 기다리는 그 순간이 모여
우리 삶이 되질 않았던가.
그 중에서도 내 가장 소중한 기다림, 그대여.
내 인생의 역에 기차가 거짓말처럼 들어와 서고,
그대가 손을 흔들며 플랫폼으로 내려설
그 눈부신 시간을 기다리네.
기다리고 또 기다리네.
그대여, 어서 오기를.
그래서 먼 여행 끝의 피곤함을
모두 내게 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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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다림의 나무
이정하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가는 그대는 바람이었네.
세월은 덧없이 흘러
그대 얼굴이 잊히어 갈 때쯤
그대 떠나간 자리에 나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그대를 기다리리.
눈이 내리면 늘 빈약한 가슴으로 다가오는 그대.
잊혀진 추억들이 눈발 속에 흩날려도
아직은 황량한 그곳에 홀로 서서
잠 못 들던 숱한 밤의 노래를 부르리라.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서글펐던 지난날의 노래를 부르리라.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갔던 그대는 바람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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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길의 노래
이정하
너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때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것도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것보다
묵묵히 너의 뒷모습이 되어 주는 것도
너를 향한 더 큰 사랑인줄을 알겠다.
너로 인해 너를 알게 됨으로
내 가슴에 슬픔이 고이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네가 있어 오늘 하루도 넉넉하였음을..
네 생각마저 접으면
어김없이 서쪽하늘을 붉게 수놓은 저녁해.
자신은 지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주는
그 숭고한 헌신을 보며,
내 사랑 또한 고운 빛깔로 마알갛게 번지는
저녁 해가 되고 싶었다.
마지막 가는 너의 뒷모습까지
감싸줄 수 있는 서쪽 하늘,
그 배경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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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꽃 잎
이정하
그대를 영원히 간직하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어쩌면 그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쓸데없는 집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 마음마저 버려야
비로소 그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음을..
사랑은 그대를 내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것임을..
오늘 아침 맑게 피어나는 채송화 꽃잎을 보고
나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꽃잎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햇살을 받치고 떠 있는 자줏빛 모양새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씨앞을 잉태하는,
그리하여 씨앗이 영글면 훌훌 자신을 털어 버리는
그 헌신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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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끝끝내
이정하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 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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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이정하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나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어떤 날은
꿈 속에서도 불안했다.
며칠 못 보아도 불안했고
자주 만나도 불안했고
함께 있어도
마음이 안 놓였던 것은
그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가면 갈수록 벌어지는
'현실'이란 틈새.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그 작은 틈새가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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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이정하
슬픈 사랑아
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내 가진 것은 빈손뿐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대 하나 가진 것만 못한데
슬픈 사랑아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해지는
이 그리움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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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가 웃잖아요
이정하
그대가 지금 뒷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기에
나는 괜찮을 수 있지요.
그대가 마시다가 남겨 둔 차 한 잔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듯이
그대 또한 떠나 봤자
마음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을 수 있지요.
가세요 그대, 내가 웃잖아요.
너무 늦지 않게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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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가 할 수 없는 한가지
이정하
세상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을 꼽으라면
그건 바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대는 나보고 사랑하지 말라 하시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대에게 더 목매단다는 것을
물은 물고기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수 있지만
물고기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당신 대수롭지 않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그 차이가
내 슬픔의 시작인 것을
그러니 그대는 그저 모른척 해 주십시오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한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내겐 곧
숨쉬며 살아가는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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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눈 오는 날
이정하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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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눈물겨운 너에게
이정하
나는 이제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다 그 사랑이 다해 버리기보다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이 다해 버리기보다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해
오래도록 그대를 내 안에 두고 싶습니다
아껴가며 읽는 책, 아껴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그대를 끄집어내기로 했습니다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인 그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지워지지만
그대 이름만을 내 가슴속에
오래 오래 영원히 남아 있길
간절히 원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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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정하
창가사이로 촉촉한 얼굴을 내비치는 햇살같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이마에 입맞춤하는
이른 아침같은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모카 향기 가득한 커피 잔에
살포시 녹아 가는 설탕같이 부드러운 미소로 하루시작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분히 흩어지는 벗꽃들 사이로
내 귓가를 간지럽히며 스쳐가는 봄바람같이
마음 가득 설레이는 자취로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마른 포도밭에 떨어지는 봄비 같은 간절함으로
내 기도 속에 떨구어지는 눈물 속에 숨겨진 사랑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영원히 사랑으로 남을..
어제와 오늘.. 아니 내가 알 수 없는 내일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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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돌아가는 길
이정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아니라
그대를 돌아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갈수록 그대와 멀어지는 길.
차마 발걸음 떨어지지 않는 그 길을
나는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그대에게 가는 길을 모르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수천 번도 더 갔던 길이라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었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만치 멀리 서 있는 당신
당신은 아시는지요?
그대에게 가지 못해 슬픈 게 아니라
그대에게 갈 수 없어 슬펐다는 것을.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빈 몸뚱어리로
그저 발만 내딛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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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동행
이정하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혼자였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기대도 싶은 때 그의 어깨는 비어 있지 않았다
잡아줄 손이 절실히 필요할 땐
그는 저만치서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산다는 것은 결국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 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혼자서 걸어 가야하는 것이다
들어선 길 이상 멈출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다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내 삶에 절실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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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무소유
이정하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마라
그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에 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을 했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 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사랑은 그처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다.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우리는 상처를 입는다.
나무들을 보라
그들도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지 않은가
함께 서 있으나 너무 가깝게 서 있지 않는 것.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그늘을 입히지 않는 것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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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부끄러운 사랑
이정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 듯싶은데
난 그때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고 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나에게는 머언 나라의 종소리처럼 느껴집니다
한때는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야기할 수 없는
당신들의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때
분식집 구석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런 여자였지요.
공무원도 해보고 사무실에도 있어 보았지만
그 돈으로는 동생들 학비조차 되지 않더라고
밤마다 흠뻑 술에 젖는
그런 여자 였지요.
그녀를 만나고서부터
내겐 막니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막니가 생겨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그녀에게서 느꼈을 때
그녀는 이미 먼 길 떠난 뒤였지요.
사랑이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부끄럽습니다.
숲속 길을 둘이 걷고
조용한 찻집 한 귀퉁이에 마주 앉아
귀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믿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주어도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아직 난 잘 모르고 있으므로
내게 아픈 막니를 두고 떠나간 그 여자처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댈 수 있게
한쪽 어깨를 비워 둘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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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부르면 눈물날 것 같은 그대
이정하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부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대의 이름이 있습니다
별이 구름에 가렸다고 해서
반짝이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대가 내곁에 없다고해서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랑엔
늘 맑은 날만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구름이 끼여 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만약 구름이 없다면
어디서 축복의 비가 내리겠습니까
어디서 내 마음과 그대의 마음을
이어주는 무지개가 뜨겠습니까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
《31》
비 오는 날의 일기
이정하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요
하루종일 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어린 날 내마음은
어느 후미진 찾집의 의자를 닮지요.
비로소 그대를 떠나
나를 사랑할 수 있지요.
안녕 그대여,
난 지금 그대에게
이별을 고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요.
당신을 만난 그 날 비가 내렸고,
당신과 헤어진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으니
안녕, 그대여.
비만 오면,
소나기라도 뿌리는 이런 밤이면
그 축축한 냄새로
내 기억은 한없이 흐려집니다.
그럴수록 난 당신이 그리웁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안녕 그대여,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요.
비가 오면 왠지
그대가 꼭 나를 불러줄 것 같아요.
☆★☆★☆★☆★☆★☆★☆★☆★☆★☆★☆★☆★
《32》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
이정하
미리 아파하지 마라.
미리 아파한다고 해서
정작 그 순간이 덜 아픈 것은 아니다
그대 떠난다고 해서
내내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만 있지 마라.
퍼낼수록 더욱 고여드는 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현관문을 나서 가까운 교회라도 찾자.
그대, 혹은 나를 위해 두 손 모으는 그 순간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미리 아파하지 마라.
그립다고 해서
멍하니 서 있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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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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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랑이라는 이름의 길
이정하
세상엔 수도 없이 많은 길이 있으나
늘 더듬거리며 가야하는 길이 있습니다.
눈부시고 괴로워서 눈을 감고 가야 하는 길,
그 길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행로입니다.
그 길을 우리는 그대와 함께 가길 원하나
어느 순간 눈을 떠보면 나 혼자 힘없이
걸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그대가 먼저
걸어가는 적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의 길은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형벌의 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햇빛 따사로운 아늑한 길이 저 너머 펼쳐져 있는데
어찌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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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사랑이란 이름의 종이배
이정하
1
때때로 난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또한 알고 싶었다.
당신은 당신의 아픔을 자꾸 감추지만
난 그 아픔마저 나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2
그러나 언제나 사랑은
내 하고 싶은 대로하게끔
가만히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내 손을 벗어난 종이배처럼
그저 물결에 휩쓸릴 뿐이었다.
내 원하는 곳으로 가주지 않는 사랑
잔잔하고 평탄한길이 있는데도
굳이 험하고 물살 센 곳으로 흐르는 종이배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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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사랑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정하
살다 보면
사랑하면서도 끝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둘이 함께 도망을 가십시오.
몸은 남겨 두고 마음만 함께.
현실의 벽이 높더라도,
그것을 인식했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이지만 어찌합니까.
현실을 외면한 사랑은 두 사람이 다치기 십상인데.
나만 아플 테니 그대는 이 자리를 피하십시오.
먼저 가 있으면 언젠가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혹시 못 가게 되더라도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고,
또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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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삶의 향기
이정하
당신의 삶이 단조롭고 건조한 이유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될 때가 있습니다.
또는 아주 가슴아픈 일로 인해
가슴이 시려오는 때도 있으며,
주변의 따뜻한 인정으로 인해 가슴이 훈훈해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기쁘고, 살아 있기 때문에
절망스럽기도 하며,
살아 있기 때문에
햇살이 비치는 나뭇잎의 섬세한 잎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삶이 단조롭고 건조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내가 살아 있음을 느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는 얼마나 살 만한 것인지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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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로 사랑한다는 것
이정하
당신은 아는가,
그를 위하여 기도할 각오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시작이라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이 컴컴한 어둠 속에 내가 그냥 있겠다는 것은
내 너를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정녕 아는가,
그리하여 사랑은 자기 것을 온전히 줌으로써
비워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완성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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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가슴앓이
이정하
나로 인하여
그대가 아프다면
서슴없이 그대를 떠나겠습니다.
사랑이 서로에게
아픔만 주는 것이라면
언제라도 사랑으로 떠나겠습니다.
우리 사랑은
어쩌면 당신 방에 있는
창문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문은 문이로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하염없이 바라만 보아야 하는
창문 같은 것,
그대여,
이제 그만 커튼을 내리세요.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 나를
너무 야속하다 생각지 마세요.
떠남이 있어야
돌아옴도 있는 것
난 단지 그때를 위해
준비하는 것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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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세상의 수많은 사람중의 한 사람
이 정 하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었거든
사랑했다 말하지 말고
떠날 일입니다.
떠난 다음에는 고개를 돌리지 말고
쓸쓸히 걷는 모습 또한
보여 주지도 말 일입니다
서로 가는 길이 틀릴지라도
이 땅 위에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나는
그대에게 상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의 삶에 힘겨운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 진정 나를 떠났거든
내가 있었다는 기억마저
잊어 버릴 일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우리,
인연이 끊기지 않아 어쩌다 길 모퉁이에서
마주치면 세상의 수 많은 사람중의 한 삶이
거니 가볍게 생각할 일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의 앞날을
기꺼이 축복할 수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될 일입니다.
이별했다고 해서 서로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남아 있지 말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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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스스로 빛나는 별
이정하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린 그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
나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습니다.
저 수많은 별들이 각기 제 나름의 이름을 가지고
제 나름의 모습으로 빛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제 나름의 이름으로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가 빛납니다.
누가 호명해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빛나는 별.
그 별처럼 우리의 이름도,
우리의 삶도 스스로 반짝거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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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슬픔의 무게
이정하
구름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만한 힘이 없을 때
비가 내린다.
슬픔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만한 힘이 없을 때
눈물이 흐른다.
밤새워 울어본 사람은 알리라.
세상의 어떤 슬픔이든 간에
슬픔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눈물로 덜어내지 않으면
제 몸 하나도 추스릴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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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어디까지가 그리움인지
이정하
걷는다는 것이 우리의 사랑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대가 그리우면 난 집밖을 나섭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난 그대 생각을 안고 새벽길을 걷습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부터가 이별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따뜻함이
절실할 때입니다.
새벽길을 걷다보면 사랑한다는 말조차
아무런 쓸모 없습니다.
더도 말고 적게도 말고 그저 걷는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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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어디에도 없는 그대
이정하
그대라는 두 글자엔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그대라고 부르기만 해도
금새 내 눈이 젖어오는 건
아마도 우리 사랑이
기쁨이 아닌 슬픔인 탓이겠지요
지금 내 곁에 없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리운 그대여
이렇게 깊은 밤이면
더욱더 보고 싶어지는 그대여
그대는 아십니까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내내 당신에게
흘러가고 있는 강이 되었다는 것을
쉬임 없이 당신을 향해서 흐르고 있는
사랑의 강이 되었다는 것을
그 강의 끝간 데에 아마 노을은 지리라
새가 날고 바람은 불리라
오늘밤쯤
그대의 강가에 닿을 수 있을는지
막상 달려가 보면 망망대해인 그대
어디에도 없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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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이별 노래
이정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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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저녁 길을 걸으며
이정하
해질 무렵, 오늘도 나는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그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니, 또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없기도 합니다.
아픈 우리 사랑도 길가의 코스모스처럼
한 송이의 꽃을 피워 올릴 수만 있다면
내 온 힘을 다 바쳐 곱게 가꿔 나가겠지만
그것이 또 내 가장 절실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무작정 거리에 나서
그대에게 이르는 수천 수만 갈래의 길을
더듬어 보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여름, 무던히 내리쬐던 햇볕도 마다 않고
온 몸으로 받아 내던 잎새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 꽃잎들도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언젠가
떨어지고 말리라는 것을 제 자신이 먼저 알고 있겠지만,
그때까지 아낌없이 제 한 몸을
불태우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떨어진 꽃잎 거름이 되어 내년에 더더욱 활짝
필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
생각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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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이정하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샆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데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다.
그대여 이제 그만 아파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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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창문과 달빛
이정하
그대는
높은 담장 안
창문입니다.
거대한 벽 앞에
발 부르트던
나는
부르지 않아도
그대 곁에 다가가는
달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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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한 사람을 사랑했네
이정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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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이정하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것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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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흔들리며 사랑하며
이정하
이젠 목마른 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하자.
찾고 헤매고 또 헤매이고
언제나 빈손인 이 젊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자.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한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사랑,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길이 있었다. 늘 혼자서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쓸쓸했다.
길이 있었다. 늘 흔들리며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눈물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