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석진 시 모음 50편
《1》
가을 사랑 고백
공석진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던
어느 가을날 오후
메모가 적힌 시집 한 권
등기 우편으로 보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면
낙엽 한장씩
책갈피에 꽂아 주세요'
밤사이 바람이 불어
그대 흔들릴 것 같아
낙엽 잔뜩 모아
다시 소포로 보내 주었다
《2》
가을 숲으로 가자
공석진
숲으로 가자
상처뿐인 빈자리
아파서
많이 아파서
신음하는 숲으로 가자
바람 이는 소리에
행여 임이 오실까
하얗게 새는 밤
동 터 오는 새벽
사랑은 절망한다
하도 그리워
파리해진 낙엽
정이 땅에 떨어져
숨죽이는 숲에
입 맞춘다
입술 깨물며
조붓이 닫히는 숲
길 떠나지 못하는
슬픈 가을
숲으로 가자
《3》
가을 유감
공석진
낙엽이 지네
서러움이 밀려오네
치열했던 사랑이
갈빛으로 스러지네
그리 가려면
쉽게 오지나 말지
그리움에 치를 떨어
목놓아 울게 하나
회한悔恨만 남기고
멈추어 선 시간 앞에
가슴에 남긴 틈을
상처로 비집고 들어서나
화려한 축제가 끝난 뒤
사무치는 고독은
떨어지는 낙엽으로
이리저리 해매이고
가물가물 나락에 빠지듯
이미 중독된 그리움은
절망이 뒹구는 가을 뒷켠
커피향 가득 머금은 채
작별 인사도 없이
하얗게 잊혀진
사랑으로 가고 있네
추억으로 가고 있네
《4》
가을걷이
공석진
태양은 중천을 넘어서
가을걷이에 분주한 황금 들녘
추억을 베고 행복을 턴다
다들 흥에 겨워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이면
이 순간 만큼은 나라님이 부럽지 않네
하지만 걷어야 할 것이
어찌 알량한 곡식 뿐이랴
스쳐 지나는 옷깃도 걷어야 하거늘
골수로 사무치는 회한도
심장에 파고드는 그리움도
차가운 가슴으로 묻어야 하리
어찌 무심하게 흔들리는
코스모스 장단에 흥에만 겨워
절정의 가을을 보낼 것이냐
볏단을 태워 흔적을 지우듯
한 맺힌 응어리를 털어내어
가을을 걷으리니
무진 힘들게 하던 애증도
고독으로 빚은 술로 위로하여
들판에 눈물을 뿌리리라
《5》
가을전송
공석진
가을을 전송합니다
화려함 남겨두고
빛 바랜 옛 추억을
나들 길로 보냅니다
고독을 만끽하세요
위태로운 정이 매달린
험한 비탈 위
정처 없는 낙엽으로
이별을 강요하신다면
수신을 거절하렵니다
발신자도 없는
이름뿐인 천사
언제든 떠나려는
배낭 짊어진
당신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양지바른
논둑에 누워
아릿하게 남아있는
바람꽃 향기를
추억하렵니다
《6》
감악산 단풍
공석진
선홍의 자태로 유혹하고
황금빛 정염이 샘늪을 덮치면
일엽관음이 부럽지 않다
벅차오는 숨을 고르며
빠져드는 남정은
점입비경에 숨이 멎는다
어차피 지고 말 운명이라도
온갖 욕정, 바람에 실어
세속 만물을 탐하리
빛 고운 화장으로 단장하여
정신 혼미한 오르가슴 느끼다가
나락으로 떨어져 해탈의 다리를 건너
격렬한 정사에 상한 몸
법당 앞 석탑에 기대어 앉아
옛 절정을 더듬는 잠을 청한다
탄식하는 목탁 소리 우울하여
이승의 고갯마루를 저물도록
알몸으로 배회하다가
허름한 종루 한구석에 안장되어
합장하는 스님 눈가에 이슬 고이면
감악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7》
감악산 한우
공석진
정수리에
심장에 국부에
맥을 끊어 놓겠다는
일제의 쇠말뚝질
뜯겨진 생살
감악산 등허리
허연 뼈가
아프게 도드라지고
코청을 구멍 내
급소 다친 한우
씹어도 씹어도
바람들어 푸석푸석하다
《8》
광덕산
공석진
모여라 모다 모여라
풍후한 정 넘치는
광덕(廣德) 가슴 복판
찬바람 비운 자리
마음 맞추면
우정 쏟아진다지
외암(外巖) 초가에
분홍꽃비 내려
모여든 즈믄 아이
꽃샘 미룬 자리
눈 맞추면
사랑으로 머문다지
하냥다짐 각오하는
절박한 벗이여
노란 리본 매단
겨운 청솔가지
하나된 그리움 여럿
세파 이길 큰 힘 된다지
《9》
광덕산
공석진
모여라 모다 모여라
풍후한 정 넘치는
광덕(廣德) 가슴 복판
찬바람 비운 자리
마음 맞추면
우정 쏟아진다지
외암(外巖) 초가에
분홍꽃비 내려
모여든 즈믄 아이
꽃샘 미룬 자리
눈 맞추면
사랑으로 머문다지
하냥다짐 각오하는
절박한 벗이여
노란 리본 매단
겨운 청솔가지
하나된 그리움 여럿
세파 이길 큰 힘 된다지
《10》
나무
공석진
길가
나무 두 그루
같은 날
같은 나이로
심어졌을 텐데
한 놈은 튼실하게
한 놈은 비실하게
너 때문이다
그늘만 없었다면
원망 마라
찌는 태양
갈증이 더할수록
뿌리를 깊이 내렸을 뿐이다
깨죽대는 놈에게
일갈을 한다
게으른 자여
내 그늘에 눕지 마라
《11》
나에게 나를 묻다
공석진
그대는 누구인가
나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강을 건너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악어 소굴로
뛰어드는 누우입니다
그대여 사랑을 아는가
나만을 사랑하려
철옹성을 구축하여
다가오는 사랑에
화살을 퍼붓는 겁보입니다
그대여 길을 가는가
까마득한 숲에서
언제나 같은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헤매고 있는 바람입니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어서 가보게
그대의 가슴으로
《12》
낙엽유감
공석진
낙엽을 맞으며
이별을 한다
이별을 준비하며
낙엽을 밟는다
보지 않기 위해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개 숙인다
뒷모습 감춘다
때마침 가을비 내려
낙엽 우수수 떨어져
갈색 이별을 재촉한다
우리 이제 헤어져요
지난 여름
뜨거웠던 사랑
빛 바랜 추억
낙엽에 입 맞춘다
《13》
늙는다는 건
공석진
늙는다는 건
나를 비우는 것이다
머리를 비운 기억상실
가슴을 비운 욕망상실
뼈를 비워 아픈 바람을 맞으며
살은 점점이 분해되어
허공으로 비산飛散하는 것
늙는다는 건
살아서 몹시 그리운 사람
저승에서 만날 수 있을까
서러움보다는 설레임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나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새벽을 맞이하는 것
아, 오그라져 바스라져
폐기직전의 해골 닮은 나를
그대는 기억할 것인가
잊혀지는 나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차피 터럭 같은 인생
무거운 몸으로 신세를 지느니
물 위에 소금쟁이처럼 가벼워져도
영육이 자연스레 해체되어
완벽하게 환생할 수 있도록
내 사랑을 위하여
오래오래 살아야 할 일
《14》
늦가을의 상념
공석진
밤사이 비바람 몰아치더니
하늘이 뿌연 부유물을 걷어내고
예쁜 미소를 보냅니다
키 높은 구름이 바쁘게 흘러가고
길가 코스모스는 목 아프게
구름을 좇아갑니다
어느새 내 마음도 님에게로 향하고
그렇게 가을은 종종걸음으로
산 중턱을 넘어섭니다
호수알 눈동자
해맑은 미소
보석같은 님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워
뼈마디 삭이는 추억으로
입술 깨물며 조촘조촘
늦가을의 상념에 빠져봅니다.
《15》
다 왔어
공석진
산을 가다 보면
일행이 길을 묻곤 한다
"얼마나 더 가?"
"다 왔어"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는 길
힘들어도 갈 수 있다
포기하지 않게
가자! 가자!
희망을 다독이는 말
'다 왔어'
어렵게 어렵게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고
나중에는 허탈하지만
지칠 땐 어떤 말보다
힘이 되어 주는 말
'다 왔어'
《16》
대둔산
공석진
삼선바위 기암괴석
비경에 탄성 발하노니
보아라
숨 멎는 남도 금강이여
하늬바람 구축하는
청운에 심신 누이려니
가거라
숨통 조이는 티끌이여
선녀 몸 감은
낙수에 정맥 식히려니
쉬거라
숨 가쁘게 뻗어 오던 백두여
깎아지른 벼랑 휘가르는
석양에 울혈 버리려니
오거라
속세 상념의 소용돌이여
목하 마천대 딛고
천지 덮는 운무 걷으려니
기사회생하거라
파국 답파하는 대둔이여!
《17》
동치미
공석진
동치미는
만병을 통치하는 약이다
연탄가스로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생사의 갈림길에도
힘 겨루기로 머리 자근거려
골치 썩는 고부갈등도
한 사발 복용하기만 하면
위력적으로 퇴치한다
허구한 날 배가 고파
흙이라도 퍼먹던 시절
뒷간을 수시로 드나드는
원인 모를 생배 앓이도
뱃속 회충의 요동조차
간단히 잠재우는 약
당당히 약방 선반 위 자리잡아야 할
신비의 명약이다
《18》
등산길
공석진
나를 앞서 가는 뚱뚱한 사람은
어제 어리숙한 고객을 만났는데
잘 하면 돈 좀 되겠다며
간식으로 육포를 씹으며
자기는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살이 안찔 수가 없다고
옆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다니는 골프연습장에
눈도장 찍은 아줌마하고
술 약속을 했는데
친구 분양해서 같이 만나자고
키득키득 웃어대고
내 뒤따라오는 두 사람은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정치하는 사람들
주위 동료 친구들
대충 잡아도 열대여섯 명은
세치 혀로 때려 잡았다
나는 앞 뒤 사람들 사이에
고립되어 느릿느릿 걷는데
나 때문에 바쁜 발걸음
걸기적댄다고 발끝 채여
오도가도 못하고 중간에 끼인
나는 그저 침묵이다
《19》
마니산
공석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돌계단을 오르다
털퍼덕 주저앉아 하산을 갈등한다
중도하차는 나를 배신하는 일
민족정기를 도모하는
호국보훈 유월의 산행
좀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강렬한 빛으로 분사하여
은총으로 분배하는 왕겨빛 태양
불끈 솟는 양지의 힘
홑이불 벗기듯 산등성 안개는
바다 건너 서쪽으로 꼬리를 감추고
하늘 아래 수많은 명산을 거느리는
마니산 성지 산기슭 더욱 깊어져
가슴 벅차 얼굴 벌개지도록
세상으로 등을 떠미는
한사코 불어오는 강화도 서풍
《20》
만추
공석진
늦은 가을을 만취하노라
사랑도 취하고
미움도 취할 때
다가 올 모진 겨울도
취할 수 있으리
화려했던 단풍도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으로 구르는데
한번도 화려해본 적 없이
본색을 잃어 가는 나는
농염의 이 가을을
취하지 않고
어찌 보낼 것이냐
그리움도 외로움도
기억 저 편에
한낱 먼지로 사라질 것을
만추에 만추가 서러워
만취하노라
《21》
무더위
공석진
완벽하게
세상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다리에
잔뜩 힘주고
버텨주던 빌딩들도
한번 건들면
폭발할 것 같던
충혈된 시선들도
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가진 자들의 호들갑도
이젠
아무런 저항 없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사람들의
멍한 무기력
그 사람들 앞에
살아보려는
의지를 불사르는
걸인의 구걸
버스터미널 한쪽 구석
낡은 선풍기
탈탈탈
의미 없이 돌아가고
지쳐 널브러진
사람들의 의식에
사정없이 내리치는
소나기에 대한 꿈은
정녕
없는 것이냐
《22》
물구나무서는 산
공석진
문득 찾아와
눈물을 쏟는 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립다
나는 느끼고 싶다
날개가 되어 자유롭고 싶다
역삼각형의 꼭지점이 세상을 찌르고
거꾸로 서는 육중한 육신을
지탱하기 힘들어 연거푸 쓰러져도
온갖 세상 욕심 홀로 감당하기에는
고독하여 상심한 내가 역부족이다
난들 허구헌 날 밟히고만 싶겠는가
등을 내어주는 건 쓸쓸하여 안되겠다
가슴 내어주는 건 허전하여 안되겠다
짓밟는 고통은 밤새 욱신거린다
뒤집어 뒤집어져 비틀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장엄한 풍경소리는
무구한 세월 동안 꾹꾹 다져져
가슴 속에 응어리진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무거운 등짐이 사라지고
소멸이 되는 순간 적멸하기전
신음하는 바다에게 달려가
정녕히 애정 어린 충고를 하리니
오! 연인이여
부글부글 끓어 속 썩이지 말고
당신도 물구나무서보구려
몰염치한 세상 욕정 남김없이 쏟아내
너무 늙어 화석이 될지언정
후회없는 늦은 사랑을 나눠 봅시다
《23》
미안합니다
공석진
염치없는 나를 혼내줄 독주를 앞에 놓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건배를 제의한다.
악착같이 홀로 살아남으려
부축하여 함께 동행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무관심으로 홀로 된다는 것이 내내 서럽게도
당신을 허허심장에 방치해서 미안합니다.
'나도 외롭다, 나도 외롭다.' 강변하면서
정작 당신의 고독을 챙기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아프지 않다는 이유로
당신의 통절한 아픔을 나누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눈에 안 보이면 마음에서 멀어지는데
곁에 있어도 눈을 감고 애써 외면해서 미안합니다.
천년 만년 사랑한다 말을 해놓고
숱하게 이별을 고려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임에도
지나가는 바람쯤으로 쉽게 망각해서 미안합니다.
소중한 당신이여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심한 갈증을 축여 줄
한 대접의 물 마중을 나가지 않는 일이
하아 이다지도 후회 스러운 일인 걸
이제서야 등신같이 머쓱하게 외칩니다.
'미안합니다. !'
'미안합니다. !'
《24》
변산邊山
공석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변산에 가지 마세요
공연히 가슴만 헤집어 놓고 왔습니다
구름 뒤 숨어 얼굴 감추는
새벽녘 숫기 없는 당신을
끝끝내 대면하지도 못하고
허기진 배 채우는데 급급하여
저 또한 간단히 외면하였습니다
행여 조우할까
더욱 가라앉은 내소사를 내내 걷다가
억만년 층층이 쌓인 그리움이었을
가슴 곳곳 구멍 뚫린 채석강을
포말에 발목이 잡히도록 헤매었습니다
그래, 훗날을 기약하마
내 기어이 변산을 떠나는구나
바다에 몸 던질 절박 없는 날
흙먼지 뒤집어쓴 변산 상사화相思花
동병상련에 긴 한숨 내쉬고
연인처럼 격렬하게 포옹하고 싶었던
격포의 빈 가슴만 헤집어 놓고 왔습니다
아, 은밀하게
분홍빛 바람이 불지 않은 날에는
변산에 가지 마세요
《25》
북소리
공석진
목덜미 수줍게
훅
훅
바람을 불어
귓불마저 빨개지면
가슴 한마당
둥
둥
진군進軍의
북소리가 울린다
《26》
북한산
공석진
산은
시작부터 심통을 부렸다
세상 유혹에 곁 한번 주지 않은 내가
그리도 서운했을까
상심한 징조가 사납다
한참을 올랐더니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산은 곧 허리를 허락을 한다
눈부신 초록을 보여주고
새들의 여름맞이가 분주하다
거북바위가
정상을 오르려는 일념으로
나는 본 체 만 체
백운대만 쳐다본다
가야지, 가야지
마음을 비워야만
진정한 승자가 되는 법
끊임없이 정상에 도달해야 하는
세상사람들의 욕망을
어찌해야 하는가
사모바위 주변으로
모여든 남정네들은
떠나버린 옛 애인이
너무 그리워서
해후를 꿈꾸며
천일 기도하다가
바위로 굳어버린
사모바위의 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있는 비봉은
기세등등한 자세로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지 말고
이제 그만 내게 오라는
욕정이 집요하다
나는 이미 심한 질투로
마음 몹시 상하다가
어쩔 도리 없이
시퍼런 기세에 눌려
하산하고 말았다
기다려다오
이별이 잦은 망각의 세월 속
내 곧 다시 돌아오리니
너무 근심치 마라
너무 서러워 마라.
《27》
불암산
공석진
수락산에 사랑 구하고
불암산에서 불알 놀란다
양미간 찌푸리던
부처 닮은 불암도
먼지에 눈결 흐려져
가뜩이나 큰 눈 훔치며
슬쩍슬쩍 곁눈질로
세상 여자 힐끗거렸다
그럼 그렇지
돌부처도 별 수 있나
뒤통수 긁적이는 본능
무너질 수도 있지
빙판이 도사리고 있는
산길을 걸으며
속세는 원래 그런 거다
부처 같은 말을 읖조렸다
《28》
비우기
공석진
몸을 비우려고
물만 마시는 날이
벌써 여남은째
비워야 채워지는 걸
나이 쉰에 깨닫는다
마음을 비우기까지
또 얼마나 천겁(千劫)을
기다려야 하는지
비우는 연습을
가선지게 하면서
오늘도 물 두어 잔에
담구어 색 바랜
나를 버린다
《29》
사모바위
공석진
당신은 어떤 욕심도 움켜쥐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바람의 궤적들을
잠시 만나고 헤어질 뿐
오랜 세월
흔들리지 않으시고
그리 설운 그리움으로 앉아 계십니까
누구나 그 앞에 서면
이기적인 천성이 갑절로 불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자리를 차고 앉아
밀어내려 애쓰지만 추락하는 것은
시시때때로 춤을 추는 저급한 감성입니다
비우지 못하여 평생 짐이 되어버린
우울에 갇힌 꼽추는
지는 태양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등이 굽어
허공에 눈물을 뿌려대지만
당신은 언제나
파란 노을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30》
산은 고독하다
공석진
산은
고독하다
홀로 사랑한들
그 누가 알아주랴
잊혀져 가슴 아린
낯선 사람
마른 정情 스치어
생채기주는 사람
겸허하게
너를 용서하련다
물이 낮은 곳으로만
찾아가듯
나를 낮추어
너를 맞으리니
주저치마라
두려워마라
햇살이 눈부셔 허리굽은
길 섶 들꽃처럼
산은 기다림에
고독할 뿐이다
《31》
산이 되고 싶소
공석진
산이 되고 싶소
공허한 사람 모두
그리움 가득
채우고 가라
그러고 싶소
내 등을 타고
내 허리를 밟으며
세상 설움 모두
버리고 가라
그러고 싶소
그리하여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합쳐
산처럼 쌓여
정녕 산이 되면
미처 오지 못한
사람들 위해
꽃숲에 첩경을 놓아
비묻어오기 전
길마중 나갈 테요
《32》
석양은 붉다
공석진
가느란 바람에도
소리 없이 낙하하는
초췌한 낙엽으로
세상을 단념하는가
노화는 진화
해는 질수록
먹먹한 가슴에
뿌려진 눈물만큼 선명하다
생 가슴앓이
아물지 않은 상처로
잿빛으로 채색하듯
미련 두고 떠나진 않으리
서녘 하늘 태양은
초경(初經)의 혈흔처럼
기세 등등하게
그대로 멈춰 서있을 것이다
《33》
선자령을 오르며
공석진
'한번 가 보시오!'
덜덜 치를 떠는 계곡물이
우려(憂廬)하며 급하게 하산하였다
칼로 베이는 서걱임쯤이야
볼이 떨어져 나가듯
절단된 삶의 군더더기
한발 한발 유기시키는데
아, 천국의 문지기!
세상 풍파 동장군에 대항하다
삭풍에 입 돌아간 풍차
덩치 크다 몸 성하랴
하얗게 벗은 아랫도리가 시렸다
삽시에
하늘 정원 발을 딛고서
절정의 반전에 환호하는 내게
길목 지키고 선 선자(仙子)
'어서 와 내 등을 밟으시오!'
갈채를 보냈다
《34》
송악산
공석진
비 바람에 막히어
발 묶인 그리움
지켜보는 마라도
슬퍼 마라
한숨 지을 때
성난 바다
둔덕에 비스듬
산을 저격하였다
검푸른 파도
송악의
구멍난 가슴을 쳤고
지척에 산방이
상련의 동병을
끙끙 앓았다
《35》
시산제
공석진
눈물겨운 인내력에
데구루루
햇살은 기슭에 구르는데
세상은 인정머리 없다고
발붙일 여지도 없다고
섣부른 상상의 유회
속 좁은 생각을 속죄하려
올리는 제사에
기분이 흡족하여
혼을 다하여 산을 베푼다
《36》
시월
공석진
여름 내내 잠복해 있던
그리움을 앓는 거겠지
고열로 단풍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처럼 아픈 잎새
뚝뚝 떨어지는데
어쩔거야
나 하나쯤 잠시 자리를 비운들
사는 게 급급하여
이까짓 변화쯤
몸 사려 참지를 못하고
숨막히게 난방을 해대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낭만은
을씨년스러운 찬바람에 혼절하였다
붙잡지 마라
마침내 나는 떠나리
집요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빗발치는 아우성을
은행나무 밑 벤치에 앉혀 놓고
침묵으로 까맣게 채색하는
단호한 망각의 시월
《37》
여성봉
공석진
"어머!" 부끄럼 반 난처함 반
"이야!" 신기함 반 호기심 반
애써 욕정 웃음 뒤에 감추고
한 놈도 예외 없이 뚫어져라
한곳만 바라보는 뭇남정네들
"성가시게 왜 거기 박혀서..."
주목받지 못하여 사뭇 쓸쓸한
나무가 쓰러진다
《38》
오르지 않는 산
공석진
너무 높아서
혹은 너무 가파라서
오르지 못하는 산
인적 없는 그 산에
한 남자가 올랐답니다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도
마음 흔드는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산이 있다면
그야말로
고독하기 짝이 없는 일
우리는 누구나
험산 같이 외로운 존재라해도
일생을 문 걸어 잠근
산으로 사는 건
참으로 몹쓸 짓입니다
지금 저는
사람이 살지 않던 산에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경을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39》
오봉
공석진
뭉근하게 끓던 사랑이
느슨해진 지각을 뚫고
세상 밖으로 치솟았다
우이령 넘나드는 여인
기세 눌려 외면하려니
순정을 치한 색정이라
오명뒤집어 쓴 서운함
뜨신 눈물로 쏟아지고
봄 곁눈질하는 길목은
하루 종일 질퍽거렸다
《40》
오봉이 여성봉을 탐하다
공석진
양기와 음기 조화로다
낙엽옷을 입은 여성의 해진 올
가을 바람이 조금씩 당겨
하반신을 드러내누나
건장한 놈 다섯이
주위를 살피다가
서로 먼저 차지하려
풀어 헤친 낙엽 위를 헤집어
양지 바른 곳 자리를 펴다
나신이 눈 부셔 꼼짝 못하고
굳어 버렸다
《41》
우면산은 잠들고 싶다
공석진
지친 소는 잠들고 싶다
뚫리고 파이고 잘리어
흉하게 변한 성형의 종말
피부는 흘러내려
이기적인 안락을 덮친다
애당초 워낭소리는 경종(警鐘)이었다
아비규환 속 때늦은 후회
비 묻은 손으로 갈기는
가혹한 채찍 폭우는
최후의 방주(方舟)를 허락치 않는다
이유 없이 코뚜레 잡혀
평생을 노역에 시달려
바보처럼 상처안고 살아
생이 아프다고 신음 대신
피눈물을 뿌리는 구나
탐욕을 채우려는 오만은
잠들고 싶은 우면牛眠의 밤을
숙면을 방해하려
벌건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다
《42》
월출산 큰 바위 얼굴
공석진
하늘에서 만삭인 달 내려와
월출산 홀로 우뚝 섰고
서해에서 장대한 바위가 솟아
큰 바위 얼굴로 자리잡았다
호남 땅 영암에 기세등등
분연히 일어선 구정봉을
천황봉이 밀고 사자봉이 받쳐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킨다
대륙에 한민족 기개 떨친
광개토 대왕 기를 받았는가
풍전등화 조국을 구해낸
충무공의 얼을 계승하는가
숭고한 애국 선열의 넋이ㅁ
민족혼으로 동방의 등불 밝혀
글로벌 세상 호령하라
삼척장검을 건네 주고 있다
《43》
이별이 슬픔에게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말하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헤어짐은 절망이 아니다
차 오르는 슬픔아
차라리 날선 시선으로
울컥울컥 심장을 찌르어다오
무력한 자존심이
바닥까지 비워지면
흐뭇하게 가슴을 내어주마
속절없는 상처야
단단히 아물어라
다가올 그리움 아프지 않게
《44》
정 그리우면
공석진
애써 지우려 하지마
그저 세월에 맡기다가
보고파지면
가을 언덕에 올라가
저 여기 있어요
외쳐 보렴
혹시 아니
향기 그윽한 사랑이
꽃구름 타고 올지
그러다가
情 그리우면
情 그리우면
어느 낙엽비 우수수 내리는 날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어버리렴
《45》
죄인
공석진
나는 죄인입니다
천 번 죽어 마땅한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뚜벅
뚜벅
뚜벅
"죄인 1004번!
예수를 아느냐"
"예수를 믿습니다"
"네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석방!"
먹장구름 사이
가느란 햇살
눈물이 쏟아진다
《46》
지하철
공석진
잿빛 교도소
하루에도 수만 번
견고한 쇠문이
열리고 닫힌다
들어갈 땐
낯선 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스스로 장막을 친다
갇힌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듯
무장해제되어
손잡이에 매달렸다
쏟아지는 사람들
악어 입 오물 토해
위선의 탈을 벗기어
세상 밖으로 내몬다
남겨진 자에게
던져진 수의(囚衣)
무감각한 회개
전원 사면 복권이다
반복되는 구속과
석방의 악순환
《47》
천국으로 가는 길
공석진
천국으로 가는 기차
예매가 시작되었다네
인터넷 구입이 마감되고
암표마저 동이나
다른 교통편 알아보느라
세상은 난리북새통이네
아무리 천국이라 해도
급행으로 갈 일 무에 있나
이 몸은 추억 가득 든
배낭 들쳐 메고
운동 삼아 걸어서 하늘까지
자늑하게 가려네
비록 지연되어
마중 나온 사람
지쳐 널브러지고
하늘나라 신천지 등기부
내 땅 확보 무산되어도
무심하게 가려네
천국으로 가는 동안
꽃잎 사복사복 밟히는
쌔뜩한 무지개 길 따라
미리내 곳곳 여행하며
길 걷다 손 흔들어
구름사다리 얻어 타려네
천국으로 가는 길
사랑하는 이 동행한다면
멀면 멀수록
늦으면 늦을수록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네
《48》
코스모스
공석진
겨울
발목까지 잘리운
그리움은
더욱 깊숙이
뿌리내렸다
꽃잎
떨구려 마라
님 오실 그 날
흙먼지 뒤집어 쓴
미소로 맞을지라도
평생
한곳에서
님을 기다려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겠다
《49》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공석진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멀리 보내기 위하여
가능한 뒤로 당겨야 하고
스스로 낮춰야 하고
결국은 놓아야 하거늘
앞으로 앞으로만
위로 위로만
손에 쥐려고 애쓰는 건
늦겨울 앙상한 고목처럼
참으로 볼품없는 것
버리기도
비우기도
연습 없이는 안 되는 일
습관처럼 모두 내려놓아야
갱생하는 길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느리지만 빠른 듯
빠르지만 느린 듯
아프지 않게
자유로울 수 있게
《50》
흐린 날이 난 좋다
공석진
흐린 날이 난 좋다
옛 사랑이 생각나서 좋고
외로움이 위로 받아서 좋고
목마른 세상
폭우의 반전을 기다리는 바람이 난 좋다
분위기에 취해서 좋고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고
가뜩이나 메마른 세상
눅눅한 여유로움이 난 좋다
치열한 세상살이
여유를 갖게 해서 좋고
가난한 자 마음 한 켠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외로워하며
누군가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해 줘서
흐린 날이 난 좋다
공석진 시 모음
2020. 2. 10. 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