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옥 시 모음
《1》
8월의 밤
주명옥
해쓱하게 말라가는
8월의 그림자는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흔들고 가듯
많은 언어들의 질문과
대답으로 쌓여지며
햇볕을 꺼리는 도심속
여인네의 얼굴처럼
짧은 심지를 태우고
살폿한 미소를 남기는
달도 별도 울지않는
뜨거운 정열의 밤
《2》
가슴에 묻힌 꽃
주명옥
나라에 바친
그대의 청춘이
가엾이 떠도는
외로운 혼되어
그대가 부르신
목메인 노래는
하늘아래 곱게
거름이 되어
태극기 펄럭 휘날립니다
해 뜨고 지는
이나라 강산에
일편단심 붉은
무궁화 피었습니다
《3》
가을의 노래
주명옥
새들은 석양을 몰고
울음을 토하던 골짜기엔
가을이란 이름으로
구석구석 바닥을 훑습니다
뒤늦게 옥상으로
기어오르는 호박 넝쿨
바람이 귓속말을 전합니다
삶은 이런 것이라고……
거꾸로 머리 박고
살면서도
환하게 꽃을 피워내는
줄기 하나
뭉게 구름이
아픈 세속 다 받아주느라
발길 붙들어
내가 자꾸 깊어집니다
헐렁한 시간
까실거리는 시 한 편
책상 위에서 목마른
혀의 사연 묻지도 않고
해 뜨는 동녘 하늘의
별 아래 난 그저
온유한 가을노래를 부릅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4》
겨울의 길목
주명옥
한 낮의 볕을
나무에 걸어두고
땅거미 매달린
모퉁이 돌아서면
바람이 날을 세우고
낙옆이 쓸리는 길목
고구마 속살 찢기고
몸을 달구는 날엔
옆집 할머니
파리한 잔기침 토하며
이음새로 연결된
겨울 초저녁
휘익 휘어져
왔다 가는 바람의 말
아직도 숨어있는
꼬리달린 여우의 동화
쌍다리 아래서 주워 온
서럽던 이야기
눈동자 속바람이
주름살 사이로 차갑게
흐를 때
이승의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 하나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또 내일이다
세월이 별거드냐
잠시 지나고 스치는
그림자인 것을
바람인 것을……
《5》
구월의 모퉁이
주명옥
곱게 물들이는
바람인가 했더니
잠 못 드는 이야기
치렁치렁 엮어매고
허기진 내 감정의 공간은
강요치도 않는 밤
시계 소리는
귓등으로 떨어지고
창문 틈새로 들락거리는
썩어 문드러질 바람
닳고 닳아서 허름해진
어설픈 언어로
애증의 감정을 유폐시키고
가쁜 숨소리로 타박거리는
구월의 밤은
태연하기도 하다
눈은 어디다 두고
마음은 어디다 달아둘까
내 마음도
구조조정을 해야할까 보다
《6》
꽃잎은 떨어지고
주명옥
무수한 바람을 일으키며
잊혀져 가는 아쉬움
아득히 먼 길 걸어와
열린 창으로 향기 던진 채
눈물 빛 고운 아름다움을 주고
눈앞에서 깨어지는 환상
버리기 위해서 나무는
잎들을 매달았을까
죄마져 사랑하고 싶던 봄날
잊고 산 세월
몰래 주워서 다시 멈춰버릴
봄날의 추억을 만들고
하얗게 비울수록
툭툭 터지는 시간의 기억
또 다시
그리워 접어야 할 세상이네
《7》
나의 꿈을 꾸면서
주명옥
가슴을 찢고 열어도
보이지 않던 세상이
아무런 상관도 없이
순리대로 살고 있었을즈음
이제사 모습을 드러낸다
내~~어릴때 심어 놓았던
곱고 여리던 사랑의 꿈
마음 저 구석 바람든
구멍으로만 움켜잡던
손을 놓으니
수줍은 설레임이
고개 처 들고 하늘을 본다 어찌하랴?
여전히 가슴엔 쓰고싶은
삶의 노래가 있는데
하나를 얻기위한
시간들은 아픔이었고
세월의 흐름에도
놓을 수 없었던 나의 꿈
걱정을 털어 버리고
뜨거운 숨 헐떡 거리며
가만가만 갈라졌던
가슴을 쓰다듬는 밤
세상 내부로 내려와
꿈속을 힘차게 빠져 나온다
헐렁했던 나의 가슴
눈썹위에 달려있던
한숨을 뿜어 버리고
안개 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자유로이 숨 쉬는
시간속에 이젠 봄 같은
미소를 흘리며
하얀 노래를 불러 보리라
《8》
나의 봄날에
주명옥
파란
하늘엽서에
새 한마리
음표없는 노래를 합니다
여명이 밝아오며
침묵 속의 꿈들이
하나 둘 봄볕 아래로
모여듭니다
고뇌에 허덕이던
숱한 이야기들은
스스로의 위안과
허세였다고
내 안의 수런거림
벗어버리고
시나브로 봄 향에
눈을 감아봅니다
비로서 추억은
잡을 수 없다합니다
봄비가 살포시
내리는 날엔
가슴 밭을 일구어
사랑 씨를 뿌리렵니다
바람이 살짝 지나는
오늘 같은 날에는
서녘을 넘는 노을 빛처럼
붉은 가슴도 열으렵니다
나의 봄날도
이렇게 아름답게 여물기를
바라며 피어서
지지 않을 마음의 꽃을 피우며……
《9》
내 마음
주명옥
늘 함께 하던
고독의 순간들을
곁에 앉혀놓고
어쩔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과
거부할 수 없는
생각들이 다가와
침묵 속에서
날마다 나누는
일상의 언어들과
또 그렇게
흐느적거릴 때
감정의 작동이
시작되고
창밖엔 한 줄기
바람이 자유롭다
내 안의 나도
바람이려나?
《10》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명옥
나~당신을
사랑합니다
소유도 아닙니다
욕망도 아닙니다
가슴에 두근거리는
당신이 있기에 사랑합니다
서툴게 살아온
세월을 내 팽게치고
가파른 생의 언덕에
몸 부려 놓고
어쩔 수 없는 그리움으로
생각이 머뭅니다
나~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루의 모든 일들이
빈틈없이 그대 곁으로
날 데리고 갑니다
달빛이 도란도란
여물어 가는 하늘도
가슴에 꼬옥 안기는
바람의 속살거림도
바둥바둥 애간장
녹이는 깊어가는 이밤도
나~당신을
사랑합니다
괜스런 미소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대신할 수 없는 것
주명옥
삶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이
태어남과 죽음이 그것이라 하여
내가 홀로 선 것은
이것을 깨달음이라~
그것은 세월의 무게가 아니라
세월의 기울기였답니다
까닭
어느 시인이 말했다지요
나무가 강가에 무성한 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강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나도 말할 수 있어요
밤하늘에 별들이 무성한 것은
하늘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별을 헤는 사람들의 눈
때문이라고~
보았네
소나기 지난 자리
물방울 뚝뚝 서리는
가을 하늘 한 조각
바람 속에 시들어 가는
여름을 보았네
여름 끝을 잡고 우는
매미 울음 속으로
구름 몇 장 드리운
하늘 바람은 쉴 새 없이
갈색의 향내를 훑고……
《12》
떨어진 꽃잎
주명옥
바람이
산에 걸친다
철 따라 우뚝 선 나뭇가지
잠든 산을 돌고 돌아
달빛 머무는 목련 잎
후울 털어버린 한 줌 상념
넉넉한 마을을 열고
알몸으로 들어가 보니
잎잎마다 지천으로
피는 그리움
낮은 곳으로 숨겨둔다
《13》
또 하루
주명옥
가시만 남은
바짝 마른 그림자는
오늘 일상의
바람 속에 접히고
가만히 턱 고이고
바라본 저 너머
두 눈으로 톡 하고
별을 건드려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으로 세우고
곱게 내 곁에
놓아둔 작은별 하나
그 틈을 비집고
그리움으로 눕는다
소문은 벌써
여름을 싣고 다니며
세월이 어디만큼
왔는지 속살거릴쯤
영글지도 않은
어설픈 여름이
허리를 내두르는
오만한 거리에
밤은 얼룩덜룩한
그리움의 시간으로 간다
《14》
마음 속의 노래
주명옥
내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그대 생각에 더는 외롭지 않습니다
창가에 그림자 드리우며
별이 빛나는 밤에 함께
속삭이고 싶습니다
바람이 한 숨 지을때 보고픔으로
심장 마져 두근 거립니다
조금은 부끄럽고 두려웁지만~
한 조각 내 삶의 고운 무늬들을
펼쳐 놓으며 눈 시리도록
환해지는 희망을 안고
나는 시간의 공간을 초월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기에 침묵 속에
욕망을 넘어 나의 마음 그대로를 허용 합니다
뼈와 살이 타는 불의 기름이 되어도
시간의 진실이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면서
흘러도 지나도
늙지 않을 가슴을 안고 오늘밤도
그리움을 빗 속에 풀어 내고 있습니다
《15》
몽상
주명옥
숨가쁘던 하루가
서산에 얹히고
차갑던 하늘이
바쁘게 떨어질때
훵한 가슴은
기억의 어딘가에
남아있을 노래를
너그럽게 들이지 못하고
자취도 없는 세월도
품지못한 채
낙원의 화려한 몽상에 빠져
매정한 하늘만 흘기며
겨울밤은 나뭇가지 사이로
세월을 돌리고
잠들지 못하는 난
오뇌의 떨림만 껴 앉는다
《16》
묶음
주명옥
억센 기세로
뻗어 가는 볕살과
그 등에 올라탄 뜨거움
올해의 여름엔 인정이 없다
한 곳으로만 몰리는
따가운 화살
그러나
그것은
흩어짐이 아니고
제일 강력한 결집
나를 향한 몰입이라면
여름은 가장
뜨거운 불꽃이다
비만이 넘쳐흐르는
시간끼리의 교류
햇살도
내 시간 안에
포획되었다
《17》
바다에 서서
주명옥
외로움도 병인가 봅니다
수많은 낮 그리고 밤을
셀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또 스치면서
그렇게 흔들리며 또 기다립니다
그리움이 나의 몫이라면
기다림도 나의 몫일텐데
꽉 찬 보고픔을 한데 모아
몸밖으로 쏟아 버리려 했지만
물 새 울음 한 점 흐르지
않고 파도 소리는 내 가슴까지 따라와
그만큼도 참지 못하냐구 합니다
짠내 나는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린데
아무도 모르게 달려온 시간은 하늘을 뚫고
밤은 바다 깊이 빠지면서 내 설운 빛들을
놓고 가라 합니다
《18》
바람
주명옥
다소곳이 흰 눈이
흩어질 무렵
새볔 어스름한
어둠 사이로
이름도 없는 축제의날
야위어가는 불치병처럼
빈 가지의 여백은
침묵을 두르고
즐거움과 슬픔이 교차하는
침울한 오늘
발가벗고 달려드는
바람떼 몰고
균형을 잃은
하늘 땅 그사이에
거꾸로 흩어진
한숨 조각들
긴 여로에서 돌아온
나그네의 지친 표정처럼
계절의 빛깔로 경련 하는데
놓고 가는 긴 시름
뉘 손에 꺾일 바람이려나
《19》
바람 불던 날
주명옥
건드린다
자꾸
늦가을 바람이
놀란 산은
우스스
소리를 내지르고
휘감아 어르고 다그치고는
울다
울다가
나뒹구는 낙옆
모른체 팽개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숲은
혼곤한 잠에 빠진다
새벽을 보듬고
사랑할 시간들은
아직도 너무 많은데
저 건너
주인 잃은 개 한마리는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댄다
《20》
봄
주명옥
긴 기다림
짧은 만남이지만
그래도
넌
언제나
그리움이고
늘
기다림이고
바램이었어
네 생각에
설레는 가슴도
알았거든
고운 햇살로
은은한 향기로
살랑이는 바람까지
내게
미소를 건네준
사랑이며 희망이거든
가슴에 품을만큼 널 사랑해
《21》
봄 꿈
주명옥
햇살이 하도 곱길래
뒷동산에 올랐습니다
부르는 사람은 없어도
무심코 걸었습니다
봄을 뱉은 동산은 푸르고
저만큼 아지랑이 일으켜
돌빛조차 눈 부십니다
남풍이 불어옵니다
활짝 핀 개나리
볼붉은 복사꽃
꿀벌은 왱왱거리고
나비는 훨훨 몸부림 치고
가벼운 바람이
부드러운 입술을 스칠 때
너울너울 복사꽃 떠난
하얀 나비 한 마리
님 위해 닫혔던
열정의 창문이
하마터면 활짝 열릴 뻔
하였습니다
달빛도 꺼져버린 이 밤에
아~~~
그대여 이것이 봄인가 봅니다
정녕 철없이 어수선한 봄 꿈을 꾸나봅니다
《22》
봄이오는 길
주명옥
자유가 나를 허물고
고요를 공유할 때
바람과 추위의
혼돈 속에서
무슨일이 생기려는지
하늘 가득한 구름이
급히 움직이고
눈물빛이 곱도록
미흡한 영혼들의
밤은 깊어간다
별 빛 머금은 월광이
시무룩한 이맛살에 포개져올 때
수탉은 긴 목청을 돋우어
하얀 고독을 깨뜨리고
빈 마당을 맴돌다
자지러지는 새벽
무척 간사한
인간임을 느끼며
어느 방심한 순간 나의 심장에
와 닿을지 모르는 봄은
그 틈에 막 피어나리라
돌아보면 이 겨울도
지난날 머언
그리움으로 남긴 채……
《23》
빛 바랜 여름
주명옥
무성한 숲 속에서
매미의 마지막 교감의
소리를 듣고
사랑은 기다린
매듭이지만
세월은 산등을
타고 오릅니다
상념이 어설프게
하늘바람을 타고
빛 바랜 태양을
여름의 덫 속에 가두고
노을 지난 어스름까지
난 무얼 들고 서 있었을까
남은 사랑은 가슴에
간직하면 그만인 것을
어느새
나만의 낱말들을
소담스레 주으며
희열을 만끽할 때
옛님의 잔정이
여운으로 남고
어느 시인님이 부르는
애절한 세레나데
햇살 구르는 이슬에
취해 있을 때에
세상을 표류하고 있는
몽상의 언어가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우고
저 아래엔 여름을 품은
가을노래 들려옵니다
《24》
사랑이라는 이유로
주명옥
되돌릴 수 없는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아직은 남겨진
눈물이 있기에
가끔은 흔들어 봅니다
감정이 택한 그 길이
비록 아픔의 길이라 해도
몇 번씩 왈칵 눈물 쏟는
그리움의 뜨락에
늘 동행인 사람
때때로 목구멍에 넘치는
좋아했단 말은 하지 못해도
그 사랑 영원히 나의
몫으로 남는다면
난 그 사랑을 품고 사는
행복한 여자일테니까요
《25》
새벽 강
주명옥
하늘 아래서
무리지었던 꽃들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그리움 보태던 모퉁이
산마루 능선을 타고오는
솔바람 한 웅큼 줍고
그림자로 남기던 햇살도
한 웅큼 받아내니
보라빛 사랑을 엮는
파란 오월의 하늘
때때로 모든 것이 변하고
한 시절이 왔다 떠나도
물새 한 마리 종종걸음으로
기지개 켜는 새벽 강
물안개 그윽히 강허리 맨다
《26》
생각
주명옥
동백꽃이 붉게
세상구경 바랄때
허툰꿈 수 없이 뭉개고
빛 바랜 세월 속의 얼굴
숨 가쁜 헐떡임조차
내 삶의 빛깔인가
바래고
닳아야
선명해지는 삶의 색깔들
희끄무레한 나는
한참을 더 닳아야 할
파랑 그리고 너울 사이
《27》
어느 날
주명옥
하늘 위에 해가 뜨면
하늘 위에 달이 뜨면
구름 한 자락 걷어내고
망설임 없이
물드는 가을 모퉁이
선들선들 일어나는
눈물과 웃음
젖은 가슴을 널고
짧게 걷다가 돌아보니
더위 지난
9월의 인기척에
그리움의 냄새가
팽팽히 부풀어 오른다
잠시,
멈추었던
심장을 가다듬고
또 다시, 허공을 겨냥하는
생놀이
붉게 달아오르는 두 뺨
《28》
어둠이 짙어지면
주명옥
낙조의 그늘이 짙어질 무렵
그림자 따라 바람이 일어
한 나뭇잎
시간의 계곡에서 바람소리
고요의 여운으로 지새울 때
추억의 실마리는
꽃으로 피고
어지러운 창문 밖
바람꽃이 하늘거리면
의식과
무의식의 카테고리 속에는
어제와 오늘이 있고
어둠에서 살아난 듯
발산하는 희열로
초침소리 커져가는
부엉새의 눈은
내일을 또 그 내일을
거기서 기다리고……
《29》
어떤 날의 공상
주명옥
쥐어지지 않는
껍질뿐인 생각으로
아침 햇살에 증발하는
이슬을 따라
저 아래 깊은 골에서
세포의 비밀을 캐내며
온전히 머물지 못하는
바람처럼 시간의 흔적은
심장까지 차 오르고
황홀한 자태로
뜨겁게 자리하던
이 여름의
마지막을 알려오면
퍼득이던 나만의 날개는
달짝지근한 몽상의
언어에 섞여 책상 위엔
인생의 쾌락과
무더기로 목을 늘어 뺀
불투명한 사랑
이별, 꿈, 도약의 낱말들이
어지럽게 널리고
방심하는 어느 순간
가을은 내 심장에
한 쌍의 학으로 수를 놓으며
닿을지도 모르는데
달빛도 꺼버린 어둠은
꾸벅꾸벅 품위 있게
버티다가 자꾸 돌아보는
사라짐의 진리
가끔은 밤이 낯설고
그 사이로 어둠이 짙으면
또 다시 이별 할
여명에 도착한다
《30》
언젠가는
주명옥
때로는 만남에 익숙해지고
더러는 헤어짐에 익숙해져도
가슴 속에서 몇 번의
격정을 누르고 나면
비단결처럼 고운
보드라운 연록의 세상 속
어느날
흐르고 흘러서 사라지는 것들
기억될 것 하나 없어도
모순된 현실의 아픔이 있다 하여도
애써
잡지 않으렵니다
별이지고 달이지고
일렁이는 시간마다 감회가 걸려있고
시시각각 진행되는 나의 봄도
세월과,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울다, 웃다
언젠가는
그 흔적마져 아련히 미소 지을
사랑으로 남을테니까요
빈 창에 바람이 부네요
《31》
여름 밤
주명옥
어수선한 구름이
현란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면
이름모를 풀냄새가
빈 가슴에 안기고
꾹꾹 심지를 박았던
시들었던 꿈들이 깨어나
젊었던 한 시절이
무언의 미소를 만들고
흔들어 놓았던 졸음도
달디달던 옛사랑도
배웅나온 여름밤은
술잔위로 시간을 몰고
《32》
여름 숲 속에서
주명옥
한발 한발
숲 속을 디딜때
한 점 구름은
석양을 몰고갑니다
제자리를 지키던
요동없는 나무들도
슬며시 달빛 품을
어둠 속에 자리하고
간간히 바람이 해쓱한
상흔을 덮을 때
조금도 소홀하지 않는
숲길 그 사이사이로
내 속의 무엇들이
수런거리는지
버려야 산다는걸
알아갈즈음
아쉬움 빼곡히
세월을 엽니다
내가 삼켰던
무거운 상념들
구슬픈 새소리는
빈 숲속에 떨어지고
또 다시 어쩔 수 없는
속세의 그리움으로 오고
길 따라 마음도
제각기 오고갈 때
서투르게 살아온
세월의 늪속에
어설픈 그림자는
잘도 따라옵니다
《33》
오늘은 이렇게 살자
주명옥
흔들어 거칠 것 없는
빛으로 채우고
서로 스미고 섞이면서
품어주는
오늘은 이렇게 살자
볕에 바래지 않고
바람에 시들지 않고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고
허욕과 허세 숨죽이며
햇볕이 고여있는
토양에 정착하자
봄날의 빛처럼
4월의 향기처럼
또르르 웃음소리 굴리고
동을 틔운 맨 처음
햇살 받으며
그냥 순리대로 이렇게
어차피 삶은
미완의 건축인 것을……
《34》
이 가을에도
주명옥
눈을 감아 봅니다
귀를 막아 봅니다
비릿한 가슴을 풀어헤치고
때로는 길이 멀어
쉬어도 봅니다
때로는 달콤한 환상으로
나만의 작은 집도 지어봅니다
많은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만
여전히 시간의 흐름은
저절로 감기어 옵니다
무엇을 셈하며 살았을까?
실타래 풀리듯
봄여름 지나 가을은
점점 빠르게 풀리고
있습니다
이 가을엔 또 어떤
사연이 묶이려는지
감정 앞에 이성이 무너지고……
《35》
인생 후반기
주명옥
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
빈 가슴 부등켜안고
한 생애 연극처럼
눈물짓던 상처들
얼키고 설켰던 회환에
몸부림치던 육신은
속울음 감추며 타박타박
질곡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추락하는
시간들을 끌어 모으니
촉촉이 젖어드는
그리움 한 자락
끝내 잡히지 않는
세월의 굴레에서
비집고 나오니
어느새 나의 모습도
인생 2막으로 열려있었네
삶의 인고에 갇혔던 시간들은
시나브로 외로움을 비켜가며
초록의 향연에 펼쳐진 하늘엔
구름이 자유롭고
꽃잎 흔들고 가는 바람에
가만히 눈감으니
가장 아름답던 시절
그리움의 향기가 되어
7월을 시작한 창가에
지난날은 그저
지나는 바람에 스치는
지난 옛이야기였네
《36》
인연
주명옥
늦은 감각으로 진동하는
저음의 한숨
밀폐된 방의 밀도에
밀려버린 미동의 숨결은
보고픈 사람을 두고
자꾸만 나락하는 상흔의 남김
까만 가슴은 무딘
애피로 신음하며
색깔의 조화마져 농락하는
사바의 질긴 인연
모순으로 희미해진
그리움의 의미는
살아가는 속세의 삶이
우화인것을
너덜거리는 삶의 의식이
계절을 맞고 있습니다.
《37》
참 다행입니다
주명옥
밤마다 하늘을 품고
기도 했더니
나뭇잎 툭툭 치며
살아있는 숨결을 나릅니다
참 다행입니다
고뇌에 빠져 숨죽여 울던
거친 땅을 걷다보니
하늘에서 부서지는
아름다운 사랑의 빗방울
참 다행입니다
비틀어진 꽃들이
피기를 단념하던 날
구원의 손길 촉촉히 꽃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