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연님 시 모음

 

오직 하나의 기억으로 / 원태연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많은 괴로움이 자리하겠지만

그 괴로움이

나를 미치게 만들지라도

미치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하나의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추억은

떠나지 않은 그리움으로

그 마음에 뿌리깊게 심어져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공약 / 원태연


헤어짐이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떠나버린 님의 마음을

그 전처럼 돌려주겠다고

가슴아픈 이별을 했더라도

하룻밤 아파하다

거짓말처럼 잊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이런 공약을 한다면

이별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몰표를 얻을 수 있을텐데...

정치니 장난이니

투표 안 하고 만다던 나부터도

당장 그 사람 찍어줄텐데...

 

길들여지기 / 원태연

 

무언가에 길들여져 있다면

좀처럼 고쳐지기 어렵겠지만

그만큼의 노력을 한다면

가능한 것이나

누군가에게 길들여져 있다면

좀처럼 고쳐지기도 어렵겠지만

사랑한 만큼의 눈물을 흘린 뒤

가능하다 하여도

그땐 이미 그리움에 길들여져 있을 것이다.

 

이유 / 원태연

 

이별한 순간부터

눈물이 많아지는 사람은

못다 한 사랑의 안타까움 때문이요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그만큼의 남은 미련 때문이요

많은 친구를 만나려 하는 사람은

정 줄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혼자만 있으려 하고

가슴이 아픈 지조차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이별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밤이면 슬퍼지는 이유는

그대 밤이면 날 그리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고

나 술 마시면 미어지는 이유는

그대 술 마시다 흘리고 있을 눈물이 아파보여서이고

나 음악을 들으면 눈물 나는 이유는

그대 음악 속의 주인공으로 날 만들어 듣고 있기 때문이고

나 이런 모든 생각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떨쳐버리고 나면 무너질

나를 위해서입니다.

 

이루어지기 싫은 사랑 / 원태연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예쁘게 생긴 여인

태어나서 단 한번의 양치질도 안 하고서

과감히 내 입에 키스를 하는 여인

매력적인 궁둥이를 흔들며 유혹하듯 쏘다니다가도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보는 여인

조금만 기분을 맞추어 주면

발라당 뒤집어져 가슴을 드러내는 여인

TV 개그 프로보다 더 재미있는 여인

만나자고 전화할 필요도

없는 돈에 커피값 걱정하며 약속할 필요도 없는

아주아주 날 편하게 해주는 여인

아침마다 내 침대로 기어올라와 단잠을 깨우는

그때마다 뒤통수를 내리치는데도

조금도 섭섭치 않은 눈길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안겨오는 여인

그녀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도 없지만

이루어지기도 싫은 까닭에

내 양말을 물어뜯거나 연습장을 찢어 놓으면

그녀의 촌스러운 이름을 외치며

식탁밑으로 숨는 그녀를 한대 쥐어박는다.

갑쑨아!”

 

기다림 / 원태연


가장 고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전화를 걸지요

고된 날에는

망설임도 힘이 들어 쉬고 있을테니까요

 

가장 우울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편지를 쓰지요

우울한 날의 그리움은

기쁜 날의 그리움보다

더욱 짙게 묻어날테니까요

 

고된 일을 하고

우울한 영화를 보는 날이면

눈물보다 더 슬픈 보고픔을 달래며

그대의 회답을 기다리지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 원태연

 

티격태격 싸울 일도 없어졌습니다.

짜증을 낼 필요도 없고

만나야 될 의무감도

전화해야 하는데 하는 부담도

이 밖에도 답답함을 느끼게 하던

여러가지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만나볼 겁니다.

전에는 늦게 들어올 때

엄마보다 더 눈치가 보였는데

이제는 괜찮습니다.

참 편해진 것 같습니다.

근데... 이상한 건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아무 할일이 없어진 그 시간에

자꾸만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이제는...

혼자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 원태연

 

심심한 저녁시간이면

특별한 용건 없이 전화 걸어

몇 시간이고 애기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소개팅 같은 거 할 때면

좀 찔리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 마음 들게 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참 많은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인기스타보다 더 보기 힘든 사람이 생긴 것과

아파도

열이 많이 나도

나 아파 하고 기댈 곳과

열 재줄 손이 없어졌고

생일이나 의미가 있는 날

선물을 고를 일도 기대할 일도 없어진 것이

또 그렇습니다.

토요일 오후나 공휴일 아침이면

당연히 만나고 있어야 하는데

친구를 만나고 있거나

TV를 보고 있으면

이제는 우리가 아니란 걸 실감하게 됩니다.

어떤 이름이 부르고 싶어지거나

어떤 얼굴이 보고 싶어지면

그때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듯한데 / 원태연


그리 먼 얘기도 아닌 듯한데

당신 이름 석자 불러보면

낯설게 들립니다

그렇게 많이 불러왔던 이름인데...

 

그리 먼 얘기도 아닌 듯한데

당신 고운 얼굴 떠올리면

썰렁할 정도로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많이 보아왔던 얼굴인데...

 

그리 먼 얘기도 아닌 듯한데

이제는 잊고 살 때가 되었나 봅니다

외로움이 넘칠 때마다 원해 왔던 일인데

힘들여 잊으려 했던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파옵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해 왔던 일인데...

 

복구공사 / 원태연


추억공사중

사랑통행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현재 미련구간 복구공사로 인해

사랑통행이 금지되오니

다른 사랑을 이용하시거나

부득이한 분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구가 끝난다 해도

예전 같은 통행은 어려울 것 같으니

이 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유비무환 / 원태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너무 자주 보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무심히 지나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너무 많이 가지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그 마음 가져가려 할 때

큰 상처 없이 돌려줄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그 아름다운 기억이

한 방울 눈물로 기억되지 않도록

 

때로는 우리가 / 원태연


때로는 그대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으면 합니다.

모자랄 것 없는 그대 곁에서

너무도 작아 보이는 나이기에

함부로 내 사람이 되길 원할 수 없었고

너무도 멀리 있는 느낌이 들었기에

한 걸음 다가가려 할 때

두 걸음 망설여야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그대와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사랑의 시간이 지나간 후

친구도 어려운 이성보다는

가끔은 힌들겠지만

그대의 사랑얘기 들어가며

영원히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담없는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수진 인연이었으면 합니다.

서로가 잘되는 꼴을 못보고

헐뜯고 싸워가며

재수없는 날이나 한번 마주치는 인연이었으면

생살 찢어지는 그리움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미안해요 하느님 / 원태연

 

나 선한 일을 많이 하여

하느님의 신뢰를 받아

그 능력을 조금이라도 부여받는다면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외로운 이들에게 참다운 벗을

거짓인생 사는 이들에게 진실을

투기와 욕심이 가득한 이들에겐

사랑을 선물하리라

그러나

현실로 내게 그 힘이 주어진다면

모든 일을 뒤로하고

네가 나만을 생각하게 만들리라

그런 후 신의 노여움을 사

걷지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될지라도

[가 나만을 생각하며

영원히 머물러만 준다면

웃으며 그렇게 하리라

 

가지 말라 하셔도 / 원태연


가라 하시면

가야 하지요

마음 밖으로 멀리멀리

아주 가라 하시면

돌아보지 말고

가야 하지요

 

가지 말라 하셔도

가야 하지요

연민만으로 사랑하기엔

구속이 너무 심한 걸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까지

남아 있을 자신도 없는 걸

 

가라 하셔도 가슴 아픈데

가지 말라 하시면

못내 눈물 보이고 말지요

사랑하고 계셨구나 알 수 있지요

그 한마디로도

오랜 세월 그리워해도 될

이유가 되지요

 

술버릇 / 원태연


술 마시면 어김없이

그대를 생각합니다

한잔 한잔 보태갈수록

더 진하게 떠오릅니다.

술 취하면 어김없이

그대에게 전화를 겁니다.

일곱 자리 누르는데

칠십 번도 더 주저하다

그런 내가 초라해 보여

그냥 내려놓습니다.

술이 깨면 어김없이

어제일을 후회합니다.

쓰린 속 냉수로 씻어내며

그저 한편에 자리했던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그 날을 떠올려 봅니다.

 

부 기도문 / 원태연

 

가진 건 돈뿐이신 우리 아버지시여

숨기고 계신 땅을 계속 불리사

투기에 임하시옵고

친구가 외제차를 수입함과 같이

제게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쓰다 지칠 돈을 주시옵고

제가 애인에게 다른 애인을

안 걸리듯 아버지도 어머니 눈치 좀 보시옵고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신경쓰지 마시옵고

다만 법에서만 구하시옵소서

땅과 빽과 쾌락이

아버지와 제게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름다운 당신 / 원태연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잘생긴 턱선과

시원한 이마를 가진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터무니없는 많은 기억으로 상처 주시고

그 터무니없이 많은 기억으로

치료를 해주시는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 이름 떠올리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지만

그 이름 떠들어댈 자격이 없는 몸이라

눈물을 머금고

그 사람 이름을

아름다운 당신이라고만 합니다.

 

평생을 두고 기억나는 사람 / 원태연


평생을 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 알고부터

그것이라고 바래야 했다.

어쩌면

당연한 권리라 생각하며

슬프디 슬픈 사랑으로 기억 속에 남아

그 가슴 촉촉이 적시울 수 있게 되기를

이룰 수 없게 된 사랑을 대신해 바래야 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그 눈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기를

참으로 부질없음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믿으며

진작부터 그런 바람으로

평생을 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애원이라도 하며 바랬어야 했다.

 

이별 / 원태연


그 사람 마음이 진정이라면

그 사람 생각대로 될 수 있게 도우소서

내 힘으로 하려했던 모든 기도 거두시고

이제는 그 사람을 도우소서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그래서 잊어버렸던 옛얼굴 기억해낼 수 있도록

찢어버렸어야 했을 사랑의 편지

이렇게 고이 간직하는 죄쯤으로 알고

나는 살아갈 테니

그 사람 마음이 진정이라면

그 사람의 생각대로 될 수 있게

그 사람을 도우소서

 

둘이 될 수 없어 / 원태연


둘에서 하나를 빼면

하나일 텐데

너를 뺀 나는

하나일 수 없고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이어야 하는데

너를 더한 나는

둘이 될 순 없잖아

언제나 하나여야 하는데

너를 보낸 후

내 자리를 찾지 못해

내 존재를 의식 못해

시리게 느껴지던

한마디 되새기면

그대로 하나일 수 없어

시간을 돌려달라

기도하고 있어

 

둘에서 하날 빼면 하나일 순 있어도

너를 뺀 나는

하나일 수 없는 거야

 

서글픈 바람 / 원태연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삐그덕 문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 잔의 차를 시켜 놓고

막연히 앞잔을 쳐다본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 속 깊이 인사말을 준비하고

그 말을 반복한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서는 발길

초라한 망설임으로

추억만이 남아 있는

그 찻집의 문을 돌아다본다.

 

대가리가 단단한건지 / 원태연


아리랑은 없어도

가라오케는 언제나 만원이다

건빠이는 외쳐대도

지화자를 외치는 이는 없다

로바다 야끼가

포장마차보다 많아진다

사찌꼬는 따라불러도

우리의 소원을 부르면 어색하다

우리 스스로

다시 한번 식민지가 되려고

구슬땀을 흘려 가며

아주 광적으로 노력들을 하고 있다

 

대가리가 단단한건지 / 원태연


참 대단한 민족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더 이상의 더러운 짓은

할 수 없을 정도의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러 놓고

쫓겨 도망간 민족

도망가면서까지

더러운 짓을 하나라도 더 하고 가야겠다는

굳은 신념하에 떠나간 민족

얼마나 위대합니까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더 대단한 민족이 있습니다

그렇게 당하고서도

옛일 떠올리면 뭐하냐

잊고 다시 한번 밟혀 보자

하는 식으로 두 팔도 모자라

사지를 벌려 그 민족을 받아들이는

대단한 민족이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민족의 자손이

지금 이 낙서를 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이런 날 만나게 해 주십시요 / 원태연


이런 날 우연이 필요합니다

그 애가 많이 힘들어하는 날

만나게 하시어

그 고통 덜어줄 수 있게

이미 내게는 그런 힘이 없을지라도

날 보고 당황하는 순간만이라도

그 고통 내 것이 되게 해 주십시요.

 

이런 날 우연이 필요합니다.

내게 기쁨이 넘치는 날

만나게 하시어

그 기쁨 다는 줄 수 없을지라도

밝게 웃는 표정 보여 줘

잠시라도 내 기쁨

그 애의 것이 되게 해 주십시요.

 

그러고도 혹시 우연이 남는다면

무척이나 그리운 날

둘 중 하나는 걷고 하나는 차에 타게 하시어

스쳐 지나가듯

잠시라도 마주치게 해 주십시요.

 

누군가 다시 만나야 한다면 / 원태연

 

다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여전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당연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그리워 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또 너를

다시 누군가와 이별해야 한다면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 한다면

두번 죽어도 너와는..

 

사랑의 크기 / 원태연


사랑해요

할 때는 모릅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랑했어요

할 때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내려 앉은 다음에야

사랑

그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과소비 / 원태연

 

시원한 음료수

아니 차가운 맥주

타고 다닐 자동차

아니 외제 스포츠카

부드럽고 긴 머리

아니 얼굴에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

먹고 살 만한 은행 잔고

아니 쓰다 쓰다 남을 통장

혼자 살 만한 아파트

아니 2층 짜리 빌라

인정받을 만한 지식

아니 그들을 사용할 능력

그 다음

이 모두를 함께 누릴

사랑하는 여자

아니,

 

그냥 좋은 것 / 원태연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사람

어느 순간 식상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끌리는 부분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그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 그 부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그저 좋은 것입니다

 

말 잘 듣는 아이 / 원태연


내가 두고가라 한 건

추억 조금이었는데

느닷없이 찾아 올 썰렁함이 싫어

다른 이름을 마음속에 새겨놓을까 봐

추억 조금 남겨 놓으라 한 건데

말 잘 듣는 그 아이는

남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두고가

아직까지 멀리까지

혼자인걸 못 느끼게 하네

 

내가 가지고 가라한 건

사랑 조금이었는데

다음 세상으로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라도 생각나는 얼굴이고 싶은 욕심에

사랑 조금 가져가라 한건데

말 잘 듣는 그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마저 남겨놓지 않아

사랑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네

 

내가 간직하라고 한 건

슬픈 기억 조금이었는데

언젠가 잊혀지게 될

우리 얘기가 눈에 밟혀

가슴 조금 상한다해도

우리가 책임져야 할 얘기이기에

슬픈 기억 조금 간직하라 한건데

말 잘 듣는 그 아이는

없던 일까지 만들어 간직하려 하려는지

보고만 있기에도 눈물이 필요한 표정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네

 

정말 싫어질 때 / 원태연


정말 싫어지면

말이 없습니다

표정이 없습니다

꼴도 보기가 싫다 하지 않습니다

인상을 찌뿌리지도 않습니다

때리지도 않습니다

투정도 없습니다

정말 싫어질 때는

표정도, 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말없이

떠나달란 뜻입니다

 

누가 무엇이 / 원태연


돈 좋고 그짓 좋아

씹놀리는 년들도

버젓이 고개들고 식자에 들어가는데

그분들은

희생뿐인 우리 할머니들은

이제껏 고개 못들고

썩어버린 가슴

담배로 달래게 하는가

 

나라 팔아먹지 못해 발 구르고

민족의 자존심을 도매로 넘겨버린

쌍놈의 것들도

애국자라 목청 찢어지게 소리치며

눈 시퍼렇게 뜨고 배 두드리며 살아가는데

누가 무엇이

죄는 그분들이 다 지신 듯

큰 기침 한번 어렵게 만들었나

 

억울해 저승도 못 가시는

그 원귀들을 어찌 감당하려

누가 무엇이

오늘까지 오게 했는가

 

눈물에...얼굴을 묻는다 / 원태연


너의 목소리, 눈빛, 나를 만져주던 손길,머릿결

부르던 순간부터 각인 되어버린 이름,

어쩌면 재앙과도 같았던 사랑

우리는 서로의 사랑에 그렇게 중독되어 갔다

니가 조금만 더 천천히 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그 때

너의 눈물에 손끝조차

가져가 볼 수가 없던 그 때

단 한번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이유로

살점을 떼어내듯 서로를 떼어 내었던 그 때

나는 사람들이 싫었고 사람들의 생각이 싫었고

사람들의 모습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사랑도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인가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그렇게 서로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뿐인 사랑을 지켜내지 못했었다

마지막임을 알고 만나야 했던 그날,

얼굴을, 목소리를, 상처를, 다시 한번 각인 시켰던 그날

너를 보내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싶었던 기도를

하얀 눈이 까맣게 덮어 버렸던 그날,

이제 나는 무엇을 참아내야 하는가

이런 모습으로 이런 성격으로 이런 환경으로 태어나

그렇지가 않은 너를 만난 죄

니가 나를 사랑하게 만든 죄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 그것뿐이었던 죄

그렇다면 이모든 나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도 살아있음에 미련이 없음이

나를 더욱더 가볍게 만들어 준다

의미를 남겨두고 싶어 올려다본 하늘에

눈물에 얼굴을 묻던 너의 모습이 아련하게 스쳐간다

내가 태어나던 날의 하늘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 . .

 

예감한 이별 - 원태연


이별을 예감하는 일이란

피멍든 가슴에

비수가 꽃히는 아픔보다

통증이 심한 것

눈앞에 두고도

싸늘히 이별을 느낄 때가

이별 후의 시간보다

더 힘들 수도 있는 것

 

착한 헤어짐 - 원태연


떠나갈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을 위해

모진 척 싸늘하게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나 간 사람을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아니라고

죽어도 아니라고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

억지로 삼켜가며

헤어지는 자리에서는

슬프도록 평번하게

 

이런 젠장 - 원태연


생각이 날 때마다

술을 마셨더니

이제는

술만 마시면

생각이 나네

 

요즘 우리는 - 원태연


이별하려고

사랑을 하고 있다

 

우울해지는 이유 - 원태연


잊으려는 고통보다

잊혀지는 슬픔이

더 크기 때문에

 

자랑 - 원태연


우리 아버지를

좀 알려 주고 싶은데

착하게 살아오셨다고

정직하게 살아오셨다고

존경받으실 만하다고

이런 걸 좀 나타내고 싶은데

미약한 필력으로

행여 욕되게 할지 몰라

그저 존경한다고

엄마를 좀 고생시킨 것만 빼고는

모두가

자랑스럽다고

 

사용설명서 - 원태연


씹어 삼키면 안 됩니다

목구멍이 크게 아프지 않을

적당한 크기로 얼려

꿀꺽 한번에 삼켜야 합니다

목구멍부터

찌릿한 찬 기운이 밀려올 테지만

참고 또 참으며

먼저 삼켰던 얼음들이

다 녹아버리기 전에

부지런히 삼켜 채워넣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감기에 걸리거나

복통으로 받는 고통이

훨씬 덜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어느 정도 얼음들이 쌓여

가슴을 다 얼렸다 생각이 들 때

준비했던 손망치를 사용합니다

한 번에

정확히.


아침 - 원태연


막 뽑아낸 커피를 마신다

막 떠오르는 그리움

눈물이 나온다

.

 

상처 - 원태연


먹지도 않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있는 것 같다

그것도

.

 

익사 - 원태연


자살이라뇨

저는 그럴 용기 낼

주제도 못되는 걸요

그저

생각이 좀 넘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뿐이예요.

 

거울 - 원태연


보여준다

그리고 덧붙여

그는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하다

그만두었다고 한다.

 

절망에 관한 독백 - 원태연


인간들은

다람쥐에게

쳇바퀴 하나를 만들어주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오늘과 같은 내일을

대신 살아주길 바란다.

 

만취 - 원태연


한 잔이 모여서

두 잔이 된다지요

한 잔이 모여서

한 병이 된다지요

한 잔이 모여서

세 병이 된다지요

고마운 한 잔이

어서어서 모이면

어김없이 버거운 오늘이

후딱,

가버린다지요.

 

원죄 1 - 원태연


조금 더

노력해야 해

노력의

노력을 다해

조금은 더

노력하고 살아야 해

보다 화려한 장례를 위해

피똥 흘리며

노력에

노력을 다해야 해.

 

원죄 2 - 원태연


마음을 추스리지 못해

혼자 엄청나게 괴로워할 때가 있다

그냥 한 번

숨이나 쉬어보지 말자 하고

가만히 있어 보면

이게 아니구나 싶어서

한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고민에 빠진다

이제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

새로운 문제거리들로

골머리를 앓느라

지나간 생각들은

어디로들 가버렸는지 알 수도 없지만

그것이 해결은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그만큼 익숙해

자신의 고민은 매우 특별하다고

버둥대지만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눈에겐

유치한 흥미거리

나의 고민은

내가 만든건지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이 만든건지

에 대한 고민으로

또 하루만큼의 나를 괴롭힌다.

 

타살 - 원태연


절제를 배우지 못해

나를 또 죽이네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절충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난 그만

절제를 배우지 못해

다시 한 번

나를 죽이네.

 

자유 - 원태연


그래야만 하는 것도 없고

그래서는 안되는 것도 없다

중요한 건

결정이다

정해진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낚시터 - 원태연


걸린다

또 걸린다

미끼인 줄 알면서,

두 눈이 달렸기에

정확히도 알면서도

걸린다

또 걸린다

꾸물꾸물 유혹하는

구수한 희망에

걸린다

또 걸린다.

 

- 원태연


어디서 왔냐고 한다

어디를 찾느냐고 한다

처음으로 가는 길을 묻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인색한 눈으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놈 보듯

어디서 왔냐고 한다

어디를 찾느냐고 한다.

 

어쩌죠 - 원태연


까맣게 잊었더니

하얗게 떠오르는 건.

 

집단 - 원태연


가끔씩

굉장히 유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정체 - 원태연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나

그렇다면 너는 바람이었을까?

 

사랑한다는 것은 - 원태연


이렇게 속으로는 조용히 울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게 하는 일

 

별 땅 - 원 태 연


마음둘 곳을 찾아 헤매인다

 

체중계 - 원태연


숫자로써의 나

그나마 변함없는 모습

 

컴퓨터 - 원태연


나 너만 있으면 됐는데

왜그렇게넌 필요한게 많았을까 ..

나 너만 있으면 됐는데

왜그렇게넌 필요한게 많았을까

- 그녀와 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통증 - 원태연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이렇게 쓴가보죠

당신없이 지내고 있는 내 모든 시간들

 

어느 날 - 원태연


정말 보고 싶었어 그래서 다

너로 보였어 커피잔도

가로수도 하늘도 바람도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는 사람들도

다 너처럼 보였어

그래서 순간 순간 마음이 뛰고

가슴이 울리고 그랬어

가슴이 울릴 때마다

너를 진짜 만나서 보고 싶었어

라고 얘기하고 싶었어

 

향기- 원태연


이상해

정말 이상해

이건 진짜 이상해

니가 없어도 니가 느껴져

이상해

정말 이상해

 

연어 - 원태연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잖아

떠나도 또

떠나도 다시

떠 나 도

 

순간 순간 - 원태연


떠나고 싶어

하지만 한 번도 떠난 적은 없어

이상하지 떠나고 싶어지면 짐을 싸야 하는데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찾고 있으니까

이것저것

묶였고 묶어버린 끈들 때문에

떠나고 싶단 생각도 금방 접어버려

그때마다 난 떠나고 싶어

 

그냥 좋은 것 - 원태연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사람

어느 순간 식상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끌리는 부분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그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 그 부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그저 좋은 것입니다.

 

해결 원태연


뭘 해보고 싶어도

돈이 안 댐빈다고

그럼 시비걸어

댐빌 때까지

 

영어 2 재수강하며 - 원태연


미국 애들은

생각도 영어로 하겠지

얼마나 좋을까

씨팔

 

벤취 - 원태연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한 사람은 혼자였다

두 사람이 앉아 있다

두 사람은 혼자였다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세 사람은 혼자였다

네 사람이 앉아 있다

네 사람도 혼자였다

 

빠삐용 - 원태연


보지 좀 마

바쁘잖아

버스도 기다리고

신문도 봐야 하고

은행도 다녀와야 하는데

괜찮으니까 보지 좀 마

신경쓰지 좀 마

숨막히잖아

전기세도 내야 하고

카드값도 막아야 하고

애 성적도 신경써야 하는데

안 섭섭하니까 신경 좀 꺼 줘

생긴대로 살게

위로 받기도 싫고

칭찬도 충고도 싫어

제발이지

몰랐었다 생각해

아예 죽었다 생각하든지

어디가서 죽어버렸다 생각하고

내버려 좀 둬

누가 어디있냐 물으면

죽었다고 해 줘

 

사랑해 - 원태연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을 년

미친 개한테 주둥아리 물릴 년

달리는 차바퀴에서 튕겨나온

돌에 맞아 죽을 년

발바닥을 바늘로

죽을 때까지 찔러도 시원찮을 년

아무리 심한 욕을 하고

죽일 년 살릴 년 해 보아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

 

그리움 - 원태연


손톱

머리카락

아니면

도마뱀 꼬리와 같은 것

 

- 원태연


어쩌면

못 이루었을 때

이루어지는

 

연체 - 원태연


당신은

지정된 기간 내에

미련을 정리하지 못했으므로

현재 지니고계신 아픔에

10%가 가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2차 정리 기간 내에도

미련 구좌 정리를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담보로 잡혀있는 앞으로의 사랑을

부득이

차압할 수 밖에 없사오니

부디 정해진 기간 내에

정리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타살 - 원태연


저녘 나절

자기가 보낸 하루에 찌들어

절망하는 친구에게

술을 사주었다

그 친구가

아침에 찾아왔으면

눈뜨자마자

책임져야 할 하루에 눌려

버둥대고 있었다면

가지고 있던 쥐약을

나누어 마셨을 것이다

 

가정통신문 - 원태연


안녕하십니까 예비투사 여러분

팔 년 동안 살아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시작될 이 코스는

초급투사 국민학 과정입니다

짝꿍과 적이 되어 싸우는 과정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는

지난 팔 년 동안 교육받으신

우월감과 이기심,부모 직업,

집 형수 등이 되겠습니다

여러분 선배 기수 때까지 이 과정 중

순수함과 꿈 두 과목이 존재하였으나

이 과목으로 인하여 현실 부적격 낙오자가

속출하는 관계로 훌륭하신 문교부 관계자

여러분의 배려로 개편,대학 입학후,

필요에 따라 자유수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년 동안 초급투사 국민학 과정을 통과하시면

무기선택의 폭이 넓어져

영어,수학,컴퓨터 등 다양한 무기를

지닐 수 있게 되겠습니다

이제 곧 부모님이 배정해 주신

무적투사,대학과정 조교들에게

무기사용 방법을 배울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이 무기사용법의 문외한 짝궁들은

무시하고 짓밟아도 무방합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체면과

자신들의 값어치,안락한 미래를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투쟁하시기를 당부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중급투사 중고등과정에서

현실낙오 판정을 받아 피지배계층에 속하는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길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난치병 - 원태연


가을은

기상대보다

내게 먼저 들른다

꾸역 꾸역

어김도 없다

오나보다

또 기어오나 보다

내 가을은

약도 없다

 

시인의 자격 - 원태연


누가 부여하는데요

체계적인 과정이 있나요

그건 또 누가 정해놨는데요

알다가도,

난 시인 자격미달이란 걸

그들보다 잘 알다가도

웃겨요

가끔 웃겨요

 

시간 없다고 - 원태연


내가 빌려 줄게

내 시간

니가 다 써

 

정말 싫어질때 - 원태연


정말 싫어지면

말이 없습니다

표정이 없습니다

꼴도 보기가 싫다 하지 않습니다

인상을 찌뿌리지도 않습니다

때리지도 않습니다

정말 싫어질 때는

표정도,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말없이

떠나달란 뜻입니다

 

사랑해요 - 원태연


문득

가슴이 따뜻해질 때가 있다

입김 나오는 겨울 새벽

두터운 겨울 잠바를 입고 있지 않아도

가슴만은

따뜻하게 데워질 때가 있다.

그 이름을 불러보면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렇게 문득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일기 - 원태연


자다가도 일어나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얼핏 눈이 떠졌을 때 생각이 나

부시시 눈 비비며 전화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터무니없는 투정으로 잠을 깨워놔도

목소리 가다듬고

다시 나를 재워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워낙에 욕심이 많은 것일까 생각도 들지만

그런 욕심마저 채워주려 노력사는 사람이 생겨준다면

그 사람이 채워주기 전에

욕심 따위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양치를 하다가도

차가 막힐 때도

커피를 사러 가다가도 생각이 나는 사람

그런 사람 있다면

그런 사람이 나를 원해 준다면

자다가도 일어나 반겨줄 것 같습니다.

 

이혼 - 원태연


부럽다

나도

싫어서 헤어져 보고 싶다

한 번 살아라도 보고 싶다

 

살상 무기 - 원태연


청산가리, , 농약, 중성자 탄, 피아노 줄, ,

마이크 타이슨 주먹, , AIDS, 마약……,

당 신 의 뒷 모 습.

 

하나만 넘치도록 - 원태연


오직 하나의 이름만을

생각하게 하여 주십시오.

햇님만을 사모하여

꽃피는 해바라기처럼

달님만을 사모하여

꽃피는 달맞이꽃처럼

피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새벽 종소리에 긴긴 여운

빈 가슴 속에

넘치도록 채워주십시오.

하나만 넘치도록...

 

이별역 - 원태연


이번 정차할 역은

이별 이별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잊으신 미련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내리십시오.

계속해서

사랑역으로 가실 분도

이번 역에서

기다림행 열차로 갈아타십시오.

추억행 열차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당분간 운행하지 않습니다.

 

이러고 산다 - 원태연


화장실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밥숟가락 들면서 설거지할 때까지

아니다

눈 뜨는 순간부터 눈 감을 때까지

없던 일까지 만들어 상상하며

미친놈 소리 들어가면서도

희죽희죽 웃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원태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짜증을 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을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을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보고 싶어

넌 누구니?

 

동전이 되기를 - 원태연


우리 보잘 것 없지만

동전이 되기를 기도하자

너는 앞면

나는 뒷면

한 면이라도 없어지면 버려지는

동전이 되기를 기도하자

마주볼 수는 없어도

항상 같이 하는

확인할 수는 없어도

영원히 함께 하는

동전이 되기를 기도하자

 

알아 - 원태연


,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하여금 - 원태연


너로 하여금

나는

바보가 되어간다

나로 하여금

너는

반복되는 필름이 되어간다

 

미련 1 - 원태연


사랑이 떠나버린 사람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무너지게 하는 것은

길에서 닮은 사람을 보는 것보다

우연히 듣게 된 그 사람 소식보다

아직 간직하고 있는 사진보다

한 밤에 걸려온

그냥 끊는 전화일 것입니다

 

미련 2 - 원태연


돌아서야 할 때를 알고

돌아서는 사람은

슬피 울지만

돌아서야 할 때를 알면서도

못 돌아서는 사람은

울지도 못한다

 

기다림 - 원태연


가장 고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전화를 걸지요

고된 날에는

망설임도 힘이 들어 쉬고 있을테니까요

가장 우울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편지를 쓰지요

우울한 날의 그리움은

기쁜 날의 그리움보다

더욱 짙게 묻어날테니까요

고된 일을 하고

우울한 영화를 보는 날이면

눈물보다 더 슬픈 보고픔을 달래며

그대의 회답을 기다리지요

 

다 잊고 사는데도 - 원태연


다 잊고 산다

그러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가슴이 저려올 때가 있다

그 무언가

잊은 줄 알고 있던 기억을

간간이 건드리면

멍하니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그 무엇이 너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못다한 내 사랑이라고는 한다.

 

상사병 - 원태연


처음에는 이쁘게 시작되는 병

조금 심해지면

약간씩 짜증나는 병

거기에 더 발전하면

합병증까지 유발시키는 병

완전히 중증이 되면

속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병

그러나

안 걸리는 것보다

걸려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는 병

세월이

약이 되는 병

 

알려줘 - 원태연


네 사람만 건너뛰면

아는 사람이고

세 시간만 걸어 다니면

아는 사람을 만나고

두 시간만 얘기하면

아는 사람이 되는

어지간히 좁은 세상에 살면서

한 시간도 마주할 수 없는

너와 나는

아는 사람이니

모르는 사람이니?

 

취미 - 원태연


니가 내 취미였나 봐

너 하나 잃어 버리니까

모든 일에 흥미가 없다

뭐 하나 재미난 일이 없어

 

정의 - 원태연

알고 있는 이는

알고만 있으려 하고

믿으려 하는 이는

믿으려 하는 것에 만족하고

행하는 이는

가난해야 하는

이 시대의 정의는

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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