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향 시 모음 55편 

《1》
가슴에 담은 사랑

박소향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사랑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것 가진 것 없어도
마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줄이요.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넓어
채워도 채워도 목이 마르고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고
받고 또 받아도 모자랍디다.

사랑은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소복소복 모아놓고
간직만 하고 있으면 좋은 줄이요.

쌓아놓고 보니
모아놓고 보니

병이 듭디다.
상처가 납디다.

달아 날까봐
없어 질까봐
꼭꼭 숨겨 놓았더니

시들어 갑디다.
힘이 없어 조금씩 죽어갑디다.

때로는 바람처럼 떠나도 보고
때로는 물처럼 흘러도 가고
자유롭게 자유롭게 놀려야 한답디다.

가슴을 비우듯 보내주고
모아둔 만큼 내어 주고

쌓아둔 만큼 내어 주고
죽을 만큼 아파도 안 봐야 한답디다.

아플 만큼 아파야 무엇인지 안단 걸
수 없이 이별 연습을 하고 나서야
알 수 있겠습디다.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디다.


《2》
가을 단상

박소향

나는 너에게
목화 꽃처럼 피어나는
뭉개 구름이면 좋겠다

순백의 향기로
가슴 가득 떠다니는 솜털 같은 기다림과
잊지 않을 사랑 하나
혼자 못할 이별의 아픔이면 좋겠다

먼지 나는 길 위에
나뭇잎만 벗이 되는 쓸쓸한 하늘
눈 속에 멈춰지는 시인의 넋처럼
이니스프리의 호도위로 떠도는 빛

비애로 젖은 물 위에
가슴을 씻어 내리며
나는 또 운다

누군가의 몫으로 거기 남은
목마른 사랑의 빚

슬픔의 껍데기를 계절의 옷처럼 갈아입고
한맺힌 노래를 그리움처럼 부르다가
나는 또 끝내
목메이게 아파할지 모른다

마음 속을 물들이는
가을 숲의 영혼
하늘 밑을 수놓는 낙엽의 수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빛 고운 이 가을
나는 너에게
언제라도 잊지 않을
긴 그리움이면 좋겠다  

《3》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박소향

가을은 어디를 보나 한 장의 아름다운 엽서다.

한 계절 물오른 열매들이
화사한 볼륨을 저리 자랑하는 것도

일찍이 봄부터 돌락 해온
햇볕과의 굳은 약속 때문은 아닐까.

떠나야 할 제 시간을 알기에
작별의 치장 저리 황홀히 하는지 모른다.

목메인 상처도.
알 수 없는 슬픔도
다 거기 내려놓고
가을 빛 만큼 물들 수 있다면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다면

이 가을
난 한 장의 낙엽이어도 좋다.

《4》
고독으로부터

박소향

가슴을 닫은 자의 모든 정열은
다 시시하다

그 순간 네게
고독은 영원히 부재다

세월에 둘러싸여
더 이상 뜨겁지 않은 것들은
문을 닫아라

문틈 사이로 스며들지 모르는
고독을 위하여  

《5》
구월이 오면

박소향

여름날의 조각들이 잘게 부서지는
등굽은 길에 비가 그치면
멧새 앉았다 간 소슬한 자리마다
들국이 피고
바람에 갇혀 우는 갈대 숲도
바보 같은 그리움이 된다는 걸
당신은 안다

홀로 뜨는 정염의 달이
조용히 우는 물결을 포옹할 때
까마득한 정신은 불륜의 섬이 되고
뜨겁게 달아오른 꿈 마져도
죄가 되는 가을
가을이 온다는 걸
나는 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
제 가슴에 하나씩 사랑의 씨를 심는
구월이 문을 열면
차가운 바람의 살을 지나
새하얀 종아리로 언어의 강을 건너던
당신의 가슴이 더 그리우리란 걸
사람들은 안다 

《6》
그대 곁에 있을 동안

박소향

언제까지 나만 바라보리란
바보 같은 믿음에도
힘이 되는 그대

어디선가 꼭 한번
만나야만 하는 물처럼
땅을 짚고 흐르다가
나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며 그리워할
그대에게 흐르는 시간들은
환한 신방에 걸린 노을같이
얼마나 또 그렇게 아름다운지

이유 없이 떠난 길도
겁없이 부유하고
곁에 무심히 흘려놓은 말들도
소중하게 가슴으로
한올 한올 엮어두지

그대 잠시만 침묵해도
먼지처럼 풀풀 눈물이 날리고 

《7》
그대 뒤로 남긴 시

박소향

그대 잠깐 스쳐 가는 바람처럼
설레며 지나는 계절풍이었습니까
이내 가슴이 비어 돌처럼 구르다가
어느 강가에서 이름 없이 잊혀질까
또 그리 하셨습니까

살아감이 힘이 들어
미련은 없다 하지만
이승만큼 더 좋은 곳이라도 찾을까 싶어
쓰디쓴 바람 그 뒤에 멈춘 채
저를 남기신 것입니까

진정 사랑하는 가슴이었다면
헤어지지 말아야지요
그래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쓸쓸한 저녁이 되어도
그대 앞에 저를 두어야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라고
소리내어 한 번
젖은 웃음 남기고 가는
억지스런 그리움이려 했습니까

모르셨습니까
그대 그림자 뒤에서
지나온 발자욱마다
산책하듯 지나치는 거리마다
우리가 주시했던 모든 눈길마다
나는 시가 되고
눈물이 되고 있는 것을…… 

《8》
그대 마지막 그리움이 되라

박소향

어쩌다 한번 슬픈 사랑으로
조각조각 떨어지는 추락의 꿈 하나

비 뿌리는 구름처럼
머리위로 쏟아지려니

한번은 오고야 말 시간들이
혼의 불씨로 남아
그 기다림을 배우라 하네

가슴이야 늘 물처럼 젖어있지만

스치듯 지나가는 사랑 하나가
갈바람 소리에 섞여 떠나가는 걸

아직 눈물은 남아 이름뿐인 그대지만
내 마지막 그리움으로 가슴을 털며 울어주리

고뇌의 시간들이 떠나갈 시간
사반의 십자가 처럼 나는 또 남고

비 뿌리는 길 끝 이쯤에서 그대 오늘도
내 마지막 그리움이 되리 

《9》
그대 지금 견딜 수 없다면

박소향

지금
흔들릴 수 있는 시간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
지금
흔들리는 한 그림자를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

흔들려 본 사람들은 안다
하얗게 언 구름을 들추면
출렁이는 황혼이 커피향처럼 번진다는 것을

그대 지금 견딜 수 없다면
흔들려라 

《10》
그대가 나에게 와서

박소향

가만히 손을 내밀면
내게 했던 그대의 말
먼 가지 끝에
동그랗게 걸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처음이 되게 하던
그대 사랑의 말들

처음 꽃이 되고
처음 별이 되어
잠도 오지 않던 설레임의 밤
먼 곳으로 강이 흘렀다.

꽃씨가 꿈을 꾸는 들길에서
봄이 찬란해지고
눈부신 비가 오롯이
그리움을 자꾸 모으던 시간

병이 날 것 같은 입맞춤
들꽃 지는 언덕에
오래도록 빛이 비췄다.
그대가 나에게 와서

《11》
그대가 있음으로 혼자일 때 아름답다

박소향

혼자 보는 하늘은 깊고 푸르지만
쓸쓸하다
홀로 느끼는 바람은
꽃향기처럼 가슴을 물들이지만
둘이서 느낄 수 없는 투명한 고독이 있다

잠시 머물다 가버린 나그네의 체취처럼
내 마음의 골방에 깊은숨을 남기고 간
그대라는 단 하나의 특별한 이름

혼자 떨어져 있으므로 혼자는
무색의 삶 속에서 채색된 물가으로 날개 짓을 하는
한 마리 새가 될 수 있음이다

더 가질 수 없으므로 혼자는
외로운 아름다움 일 수 있다
더 소유할 수 없으므로 혼자는
침묵에 기댈 수 있는 투명한 눈물일 수 있다

다 채울 수 없는 부족함으로 혼자 남았을 때
둘이 아님으로 느낄 수 있는 목마름의 꽃이
마음의 빈터에 피어남은

그대 거기 있지만
확실히 혼자 이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이리라  

《12》
그대만 한 그리움은 없습니다

박소향

하늘이 열리는 동녁 끝으로
안개가 가득
해 오름을 받치고 선 아침

보헤미안 음악 같은
커피향을 피워놓고
가슴에 얹힌
그대 숨소리를 쓸어 내린다

겨울의 입김이
흔들리는 숨결 한줌 떨구고
어설피 지나가는 창가
수북수북 그리운 그리움에 갇힌다

무채색의 소낙비가
철못든 인연 모두 날리는데
불어난 그리움 추스릴수 없어
하얗게 칠해버린 피안의 세월이여

차가운 외등이
홀로 불을 켜는 또 밤이오면
그대 향한
아름다운 분노가 시작된다

가까워서 더 그리운 사람
그대 때문에……

《13》
그대에게

박소향

살아있는 것이
내게 힘이 되는 그대
하지만 때로
반쯤 나는 죽은 듯이 산다.

반쯤 눈 가리고
반쯤 귀 막고
반쯤 입 닫고
감각을 잊은 듯이 그렇게

붉게 익어 터져야 할 계절에
넋 놓고 매달린 풋과일처럼
무던히도 철 못 드는 마음

내 마음 빈곳에 그대를 담지만
문득문득
한없이 열리는 나를 닫아주곤 한다.

눈 다 뜨면 모습 보이지 않을까
귀 다 열면 목소리 듣지 못할까
말 다 하면 그 맘 혹 닫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반쯤만 열어놓은 창안으로 그댈 맞는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도 숨 쉴 수 있도록

《14》
그대에게 띄움

박소향

누군가를 울렁이게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불행한 거라고
보리 섶의 연기처럼 피우다 만 편지 한 장
백지에 써 보았는가.
겨울비보다 더 외로운 새벽 기차소리가
차가운 명암을 달고 모질게 지나가는
낯선 방의 창가에
우수수우수수 녹슨 설레임이 쌓이고
나는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은 아침에
잃어버린 자아를 추스리며
아직도 몸 사리고 있는 사랑을 믿는가
남은 그 백지에 써 보았는가
그리고
그간 갖지 못했다고 말했던 모든 것은
내 안에 이미 있었단 걸 몰랐다 라고
추신으로 남기며 울어 보았는가 

《15》
그리움으로

박소향

산꼭대기
구름 한 조각 걸리어 쉬는데
무엇이길래
설운 바람 지나는 자리마다
배어나는 진한 눈물

여기까지 살아도 남은 것 없어
소리 없이 터트리는
회한의 외침인가

벼랑 끝
해 넘어 가기 전 바위 그림자에
어제도 없었을 눈물 꽃 하나 뿌려 놓고
내려가라 떠미는 바람에 밀려
가마귀 쫒기는 좁다란 산길을
설움에 지쳐서 떠밀려 가네

무엇이길래
조마조마 망설이며 볼 수 없는 그것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이렇게
서럽도록 부대끼고 있는가

흐르다가 없어질 맘이라면
산꼭대기 먹구름처럼
애처롭게 어정거리지나 말 것을

산 공기 저녁놀에
어스름 별빛
마음으로 너를 접는데

그리움의 벽이 다 허물어지고 나면
그때나 이 산길을 내려갈거나
그립다 가다보면
다 떠밀려 와 있으려나  

《16》
기다림

박소향

기다린다는 것은
신열 끝에 묻어 오는
끓어오르는 숨막힘을 스스로 익히는 것이다

기다림에 본질은 없다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목마른 형벌 하나 더 메고 가는 것이다

하나의 껍질을 뚫고
돌아서 나온 흔적을 보는 것이다

밤과 낮을 잊고
새벽을 잊는 것이다

손가락 끝에서
규칙적으로 나를 살리는
혈맥의 느낌을 잊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잠들지 못한 영혼이
수줍게 자위하며 벌거벗고 앓다가
황홀하게 숨질 수도 있는
아름다운 병인 것이다 

《17》
기억의 편린 그 간이역에서

박소향

누군가의 고독한 편린들이
눈감고 잠시 쉬었다가 가는 곳,
그 평온한 절망 속에
내가 기대고 있슴은
사랑보다 더 절박한 시간들은
이미 떠나고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숨막히는 사랑이
마음을 열고 잠시 앉았다 가는 곳,
그 치열한 그리움에
내가 또 기대고 있슴은
더 사랑한 기억으로
오늘 거기 머물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한 기억
내가 사랑한 기억
우리가 사랑한 모든 기억들이
흙 내음을 풍기며
사라지는 그 때에도
나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잠시 잠간
우리들의 간이역이었던
쓸쓸함의 기억 그 자리에 

《18》
길에서 길을 잃다

박소향

아아, 어쩌다가
길을 잃었다

일상의 수중에 없던
여분의 생각만큼
무수히 갈라져 보이는
무의식의 길들

차갑게 꼬리치며 흩어지는
저 길들이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저녁 눈발처럼
순간
너무나 가벼웁다

길을 잃고 헤맨 게
아니었다

불투명한 생의 속박에서
무뎌진 감각의 문을 닫듯
눈앞에서 환히 보이는
마음의 길을 잃은 거였다

짙은 화장의 두께만큼
새카맣게 가라앉은
세월의 무게가
제 연륜을 못 이겨
저리도 흐트러진
길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아, 어쩌다가
정신 놓고 사라지는
막막한 길 위에서
오래도록 홀로 선
내 흔들림
흔들림  

《19》
꽃밥

박소향

바람 한 술과 봄비 한 술
노을 한 줌과 이슬 한 줌

외로운 별 한 줌 그리고
해오름녘 안개 한 줌

무지개 빛
천기누설을 품고 피는 꽃

꽃들이 꽃밥을 먹는다.

꽃들이 지은 밥을 먹으면

바람과 노을이 깃들어 향기가 나고
소망의 별이 빛나 외롭지 않을 것이다.

고마운 목숨 하나 새벽마다 피어
살아가는 순간순간 행복할 것이다.

아름답고 착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꽃
꽃들의 그 비밀한 사랑을 말로 할 수 있을까

꽃에게서 받는 꽃밥 한 술은
작은 축복의 배부름일 것이다.

《20》
너에게서 쉬고 싶다

박소향

모래알이 바다의 깊이를 세는 동안
기억의 창살 너머
노을 진 청춘이 발갛게 솟아 오른다

먼데 바람 사이로
생명의 춤사위 비릿한데
아직 오지 않은 답장처럼
차례차례 무너지는 하얀 올가즘

목선이 망가진 가슴을 열어
길고 긴 밀담을 시작하는 영시
산다는 건 기다림이라고
가끔씩 들려오는 물살의 말은
아무도 들을 수 없어 참 다행이었다

짧은 눈물로 선을 긋던 그 깊이에서
돌아오지 않는 오늘은 모두 끝났으니
아직도 복받친 설움에 우는 바다여
늦게 찾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에게서 쉬고 싶다

《21》
눈 내리는 저편

박소향

해가 저물어요.
어머니 캄캄한 자아가 온몸으로 비껴가고
허전히 발목을 쥐는 빈 물결만
곤고하던 내 그리움을 끌어안아요.

당신의 커다란 사랑이
흰 눈발처럼 품에 와 안기고
세상을 떠돌던 영원의 한때가
언제부터인지 거기 쉬고 있어요

바람이 부는 그 어딘 가로
슬픔은 향해가고
안달하던 영혼이 혼자 남아
죽도록 그리워만 하고 있어요.

아, 이별이 없는 곳 눈물이 없는 곳
맨 처음 당신을 안고 비상하던 첫 비행의 날에
가슴이 무너져 내릴 오늘을
운명처럼 예감했어요

멀리 떠나와도 그리움은 늘 그 자리이고
결국은 다시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하루
이틀
사흘
당신을 만나 행복하던 그때

《22》
눈물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박소향

당신의 이름을 몰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도 잊고
슬픔도 잊고
기도도 잊은 저녁

그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기를
가만히 울음을 그치고 기다리는 시간
이상기류처럼 내 안에 흐르는
건조한 아집의 흔적

사랑했던 날들은 꿈결 같은데
변명과 오해들이 계절의 끝자락에 매달려
환절기 열병으로 앓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인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것
내 안에서 숨을 쉬는
당신을 향한 하얀 비상

눈물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더딘 시간 속에 침묵하는 기다림은
이유가 없습니다

마른 풀꽃처럼 사위는 식어진 눈물
이별이 두려워 떨고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잊혀지는 시간이 두려워질 뿐입니다  

《23》
당신과 함께라면 영원이길

박소향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립니다
언제부터인지 한밤이면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마음이
외로운 잠에 섞여 꿈인 듯 생시인 듯
고르지 않은 체온 곁으로 나란히 눕곤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하나의 일상
그 빈곤한 연가가 되어버린 멍청한 시간들에
군데군데 흠집 난 가슴을 열어 보이며
조금은 부끄러운 줄도 알아야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내가 보여준 그 한 페이지는
전부일 수도 아님 일부일 수도 있음을
속속들이 내보이지 않고도 말해야했습니다

내 기도를 들어 주는
당신의 가슴이 아플 것 같습니다
아픈 가슴에 기대어 숨을 쉬는 나의 기도는
오늘도 눈물바다입니다

부드러운 시간에 길들여지지 못한 묵상은
그래서 또 길을 잃습니다
살갗에 와 닿는 당신의 목소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나의 가슴을 비늘처럼 벗겨냅니다

암담하고 뜨거운 이 궁지에서
내가 부를 이름은 오직 당신뿐이기에
물기 없는 손끝에서
전화선처럼 매달리는 당신의 옷자락을
나는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편견과 오해 같은 삶의 편린들이
배고픈 사막처럼 나를 울릴 때
슬프게 바라보는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세요

삭막한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내기 위하여
황량한 고독 속에서 더 충만하기 위하여
내가 찾는 유일한 회복은 당신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
슬픈 출발을 날마다 하고 있는 동안은요 

《24》
당신께 행복을 팝니다

박소향

마음을 아름답게 열면
하얀빛이 비춰요
눈이 부셔 뜰 수가 없는
그 빛은 눈을 감아도 보이지요

가슴을 아름답게 열면
사랑 빛이 비춰요
마음이 부셔 기쁠 수밖에 없는
그 빛은 어디서든 빛나지요

눈을 아름답게 열면
빛이 보이죠
사랑이 보이죠

그래서 나는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가슴을 열어요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게
당신에게 행복은
내가 팔 수 있게요 

《25》
독도 그 영원의 노래

박소향

광풍노도에 떠밀려 억겁의 세월
흔들리지 않는 뿌리 바다 깊이 내리고
홀로 여한 섬이 되었나니
저 멀리 동해 한 쪽에서
푸른 조국의 뼈대 하나가
지친 우리를 지켜주는구나

수많은 역사의 침노 앞에서도
뜨거운 육지 말없이 바라보며
바닷길 지나던 열사들
영혼의 안식처도 되어 주는구나.

절망과 희망이 지나온 세월 속에 뒤엉켜
기도의 발자국마다 응어리를 풀어내고
마침내
흰 옷자락 핏물 들여 일구어낸 오늘
그대는 열렬히 눈감은 옛 선조들의
눈물 동상이려니

덧없는 욕심 바닷물만큼 출렁여도
내 것이 아니어든
끝까지 가질 수 없음을 알게 하고
억지로 잃은 것은 언제든
제 주인을 찾으리란 걸 알게 하는 힘
독도여

이 민족의 변치 않는 사랑 있으니
동쪽 끝에 우뚝 선 오천년의 절개로
저물지 않는 희망 노래 영원하여라  

《26》
돌아보면 언제나 거기에

박소향

비 그치고
계절도 그쳐 가는 강가에
햇살이 휘돌아간다

조약돌이 마악 줄어드는 저녁 시간에
초록에 섞인 바람 지난 기억을 모우고
빠듯한 나의 가슴속에도
차가운 계절을 집어넣고 있다

돌아보면 거기
언제나 서 있을 것 같은 당신

당신의 물 그림자에 저녁별이 뜨면
낯선 이름 하나 붙이고 돌아서던
캄캄한 그 길 위에 밤이 깊고 있겠다

또로록 또로록 풀벌레 낮게 울어
잠들지 않는 새벽 물소리
하얀 사랑 지금도
만들고 있겠다  

《27》
망각의 강 하나 흐르게 하고싶다

박소향

마지막 분신마저
훨훨 떠나 보내는 홀씨처럼

벗어야 할 허물
다 털어 내도 좋은

망각의 강 하나
흐르게 하고 싶다

언젠가
날 떠날 너를 위해

언젠가
네가 떠날 날 위해

망각의 강 하나
가슴에 흐르게 하고 싶다  

《28》
무정

박소향

그리하여 지금은 이별도 뜨겁지 않은 시대
흰 달이 종일 주름을 펴는 동안
절실한 것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가을도 목놓아 울지 않는다
한소끔 우러난 하늘이 도화살처럼 번져
젖은 연기가 불감증 마냥 피어오르면
까닭 없이 몸만 뜨거웠던 여자
허름한 저 풍경에
발갛게 불이라도 지르면 가벼워질까
한 때 치유를 꿈꾸며
상처에서 떨어져 나간 얼룩은
내 몸의 한 시한부 였거나
바람의 혀끝에서 한 됫박 재가 되고 싶은
몇 토막 불씨였을 것이다
산 일 번지 고사목이 죽음을 애쓰는 동안
풍화된 세월도 수척해져 너그러워졌는가
지금은 사랑도 뜨겁지 않은 시대
절실한 것은 모두 떠나고 없는 부식의 시대
무능해진 가슴마다 죄의 부유물이 들끓어
어떤 것은 넘치게 빠져 있고
어떤 것은 불행히도 주어지지 않는
물이 차면 떠오르는 거품의 섬 같은
아무도 목쉬게 울지 않는 

《29》
무죄와 유죄

박소향

마음은
훔쳐도 무죄

사랑은
맘껏 가져도 무죄

그러나
둘 다 잃는 것은 유죄 

《30》
물처럼 흐르다가

박소향

물처럼 흐르다가 만나자
지나간 세월 뒤에 나는 남고
기억은 또 남아
우리 떠나도 마음 지켜주네

서쪽 하늘 노을이 다 할 때
그 때 헤어짐도
붉은 해 따라 어제로 넘기우리니
지나간 것은 생각지 말자

없어지고 사라지는 날들 속에
우리 또 남으리니……

비 젖어 크는 나무처럼
가지도 주고
열매도 주고
더 이상 줄 것이 없을 때

마음 편한 행복을
서로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니
아직
줄 것이 남아 있는 동안은
행복해 하자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물이 되어 흐르자  

《31》
바다의 소야곡

박소향

너 없이도 늘 푸른
바다로 간다
상처가 나면 어떠랴
고독마저 보이지 않는 그 바다에
푸르게 묻히고 싶다

바람에 잠긴 노을은
꿈을 꾸는데
허옇게 바닥을 드러내놓고
달려드는
저 파도를 어쩔 것인가

을씨년스런 시간 속에 묻혀
묵은 껍질을 벗지 못한 나는
꿈이라도 꾸어야지
가슴을 비운 물거품처럼
지치기라도 해야지

어딘가에서
상처를 내고 숨어버린
사랑했던 날들이여

바람이 빠져나간 머리카락 사이로
실신한 바다가 보일 때까지
침묵에 시달리게 하라
혼돈의 밤 물결 위에 가라앉은
너를 그만 잊게하라 

《32》

바람 부는 날의 어느 것 하나

박소향

굴곡진 시간 사이로 바람이 샌다
평범한 것 중
지극히 평범한 것 중에 들지 못했던
그 시간 사이로 바람의 때가 묻어난다

어디쯤에서 버렸는지
어디쯤에서 잃어 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아 한 쪽
비어있는 한 구석이 오늘따라
이리도 시리다

눈물로 커 가는 나이테
하얗게 늘어난 머리카락 수만큼
가슴의 껍질도 두꺼워 지고
사랑도 때로 구멍이 뚫려
숭숭 바람이 새더라

그래도
죽어라 사랑한다는 그 말에
푹죽 처럼 터지는 설레임 있어
가을 한 철 고이 익은 열망
꽃씨처럼 거둔다  

《33》
바람 부는 봄날에는

박소향


흐득 익어간 봄날이
저린 걸음으로 창밖을 기웃거린다

아무도 모르게 옷속으로 파고드는
파란 바람

지나가는 사람들도
봄꽃 닮은 가슴으로 하얗게 물들고

조금씩 부족한 목마름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나도

바람부는 이 봄날
남몰래 피고지는 들꽃인지 모른다  

《34》
백서

박소향

그리움의 조각들이
비처럼 내리는 날

고독을 불러모아
나를 채우고 싶지는 않다.

너 없는 빈 자리
안개처럼 스미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고 싶지는 않다.

실컷 울다가
실컷 지치다가
그리우면 그 때 갈 것이다.

꽃처럼 흩날리는 이별의 향기
깨끗하게 지워질 너의 그림자

침묵 속에 깃드는
어둠과 빛의 아, 슬픈 사랑 

《35》
봄비 내리면

박소향

봄비
자주자주 내리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억의 줄기들이
꽃을 타고
내릴텐데
어쩌나요.
꽃은
피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피라 할 수도 없는
심술굳은

그리움을요  

《36》
봄은 여전히 나를 찾아와

박소향

봄은 여전히 나를 찾아와
낯익은 기억으로 부풀어오르다가
솜털에 날린 바람 한 자락
옆자리에 툭 떨궈놓고 간다

나부(裸婦)의 살결처럼 물오른 산야에
가지의 입김 푸르게 살아나면
태초의 첫날처럼
얄미운 꽃잎 환히 피어나겠다

봄은 그렇게 나를 찾아와
괜시리 없는 눈물 만들어 주고
이름 모를 풀꽃 하나
허전히 눈물샘에 깃들이게 한다

아 그 봄날 나도
사랑 꽃씨 한 알 네 가슴에 묻어
나 없는 한 동안도
여전히 봄이오면 피어나게 해야겠다

《37》
사는 일이 쓸쓸할 때

박소향

사람 없이 혼자로도
행복하고 싶을 때
오후가 밀려드는 강가에 가 보라

거기 무수한 혈흔의 그리움이 숨어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지나가는 쓸쓸한 행복
조금 보일지도 모른다

사랑없이 혼자로도
충만하고 싶을 때
빛살 한 가득 화려한 저녁 바다로 가보라

거기 끊을 수 없는 절망까지 노을에 타는
눈부신 허무가 표안나게 쏟아져
씁씁한 소망 하나 수줍음도 없이
내가 던진 무수한 말에 물들어 갈 것이다

이제는
가슴 다 닳아버린 너처럼
미칠 듯 갑갑한 열정이 발갛게 터져
벌어진 틈새로 사랑은 졸고

어느 날 문득
사람 없이
사랑 없이
행복할 수 있는 걸 익히게 되는
사는 일이 쓸쓸하게 될 때

나는
농익은 나이가 들고
이별을 하고
바보가 될 것이다 

《38》
사랑한 후에

박소향

절망의 순간을 알기 전
어느 계절인지 알 수 없는 꽃잎들이
사랑의 기억으로 하얗게 부풀어올라
허전한 미련들로 눈물겹게 일어서는 그 날을
당신의 사랑처럼 기다려야 했다

흩어지는 구름이 추억처럼 쏟아내는
노을의 마지막 불빛 자화상위로
그리움을 피워 올리는 그대 영혼이
쓸쓸한 입맞춤의 숨결처럼 그리웠다

아, 나는 언제고 그대 품이고 싶어라
부드러운 사연으로
가슴 벅찬 그리움을 발자국처럼 남기는
나 언제고 그대 품안이고 싶어라

빗발치는 마음의 문을 닫을 시간이면
창을 열고 찾아 드는 별들의 노래처럼
사랑이 꿈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39》
사랑한다면

박소향

살면서
한번쯤
마음껏 사랑하여라

그리고
한번쯤
마음껏 절망하여라

그것으로
인생이
한번쯤
흔들릴 수 있도록…… 

《40》
사랑할 수 있는 시간

박소향

사랑할 수 있어
아름다운 시간들 속에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날 문득
벅찬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사랑을
열병처럼 앓다가

감당키 어려운 아픔을 안다는 것
그것도 행복한 일이다.

따스한 바람 안고
봄 햇살에 꽃피듯
간절히 마음으로

기쁨의 날들을 기다리는 것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영원하지 않을 영원을 영원처럼 믿고
사랑을 위해 하루를 산다는 것
그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41》
새해 소망의 기도

박소향

새해가 되면
가슴 가득 소망을 품게 하소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땀 흘려 정진하게 하소서
결과에 상관 없이
내가 노력한만큼 감사하게 하시고
베푼 것 보다는 받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을 갖게 하소서
높은 곳 보다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하시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다스릴줄 아는

지혜를 갖게 하소서
절망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올지라도
원망하며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겸손한 가슴을 갖게 하시고
먼저 화해를 청하는 용서의 손도 갖게 하소서
사람이 사랑으로, 세상이 사랑으로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과 허물이 덮혀지는
그 사랑을 내가 먼저 실천하고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축복은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먼저 당도한다는
믿음으로 늘 준비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42》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박소향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어딘 줄 아세요?
거기는 가슴에서 머리까지랍니다

가슴에서 머리까지 가는데
평생을 걸리는 사람도 있고
머리까지 가 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 합니다

손으로 재보면 두 뼘밖에 안 되는데
평생을 걸려서야 가 볼 수 있는
그렇게 먼 거리랍니다

가슴은 뜨겁고
가슴은 너그럽고
가슴은 사랑하는데
머리는 냉정하고
머리는 이기적이고
머리는 계산을 한답니다

두 뼘도 안 되는
짧은 거리의 가슴과 머리.
어쩌면 저도 지금
도달하지 못하고
가고 있는 중인지도요

가슴에서 머리까지
가장 먼 거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거리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43》
水程 노을

박소향

갈라진 대지의 살 냄새가 허공에 날리면
빛위 틈새로 꽂히는 혈의 황혼
목 울을 타고 흘러내린 열정의 숨 끝에
가시지 않은 목마름처럼 그가 늘 숨어 있다

서서히 쓰러져 가는 노을의 얼굴만큼
하루를 달구던 가슴 한 쪽에 기대
붉은 취기가 되고 싶은 나는
너를 조금씩 닮아가나 보다

네가 없는 거리만큼 쓸쓸한 계절이
또 있을까
바람마저 앉지 않는 마른 가지에
조용히 눕는 수정水程 노을

손가락 마디마디 실핏줄을 건드리며
결코 빈 허공일 수 없는 네 등줄기에
빈곤한 시어 숨길 수밖에 없는 나는
수줍은 저녁별이라도 되어야지

뜨겁게 타다만 정염의 혀끝에
순수의 눈물로 비틀대며 부서지는
초라한 이름이라도 되어야지

살얼음진 언덕에 눈부신 발아를 꿈꾸는
씨앗의 그 환한 희망의 노래처럼
이제 맘껏 너를 흔들며
감추었던 나신裸身을 벗어야겠다 

《44》
슬픈 바다의 향기

박소향

한때 그 시간의 바다는 슬펐다
빗줄기마저 씻어내지 못한
때묻은 가슴 한 쪽에 허전한 속 내음을 흘리며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시장기
텅 빈 내장의 절규하는 소요가 슬프고
손가락에 끼워져 떠날 듯 말 듯 망설이는
의미 있는 허무가 슬프다

이렇게
무작정 버려져도 아무 할 말 없고
목숨보다 귀하게 다림질하던 그리움 한쪽
어디론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도
할 말이 없다

나를 슬프게 하는 바다
슬픈 바다의 향기가 시간 속에 멈추어 있다
순간으로
또한, 영원으로

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산다는 건
왜 그런지도 모른 척 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참으로 고독한 일이다  

《45》
시월의 열정

박소향

그렇게 터질 것을
그리 터지고 나야 개운할 것을
결국 상처자국을 남기고야 마는
시월의 붉은 열정은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에
충분히 멋진 낙화洛花였으리
상처 없이 누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저 낙엽의 몸짓이 빈 말이 아니라면
노을빛 강가에 조용히 날아오르는
나는 한 마리 은빛 새이리

《46》
아름다운 사람

박소향

궂이 빛나려 애쓰지 않아도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눈부신 사람이 있습니다

검은 옷을 입어도 하얘 보이고
아무리 감추려 해도 고와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추운 날에는 따뜻해 보이고
바람부는 날에는 넓은 창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 쓸쓸한 날
문득 풍성하게 넘치는 사랑으로 든든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은 얼고 마르지 않는 눈물
그 너머로 눈꽃송이처럼
눈부신 그리움이 되어 넘실되는 사람

오이처럼 싱그럽고
초코렛처럼 달콤하여 얼어버린 마음 녹이러
가고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더 미안해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더 사랑하는 사람
언제라도 슬픔을 내려놓고
기대어도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거칠은 얼굴도 고옵게 봐주는 사람
빗나간 마음도 어여삐 보아주는 사람
한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고 챙겨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보다
옷차림보다
마음을 먼저 보아주는 사람

가진 것 보다 없는 것 보다
못 가진 것과 부족한 것을
더 먼저 이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용기와 위로와 힘과 사랑을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과 말을 가진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47》
여름비

박소향

가마귀 날아간 칠월칠석 들길에
여름비 내리고
먼 산 안개에 젖어
마을로 가까워오면

촌로의 모자처럼 낮게 걸린 저녁이
출출한 툇마루에 걸터앉아
젖은 연기처럼 번진다

능소화 담장 위로
몇 조각
그리움 저무는 소리
곰방대 물고 앉은 할아버지 목소리

길 건너 옥수수 밭에는
아직도 쏴아쏴아 여름비 소리 

《48》
월셋방 세레나데

박소향

하 세월이 흘리고 간 시간의 뒤안길에서
분주히 하루의 시름을 뜯어내는 사람들
요란한 상층권은 세상에게 떠맡기고
한 귀로 흘려버린 신문지 속 헛된 세상
땅거미지는 지붕 끝에서
여전히 침묵하는 이끼 낀 가난
찿아올 저녁을 기다리는 무수한 고생이여

사는 일은 그렇게 사랑하는 것만큼 힘이 들어
가슴에 묻어둔 꿈 월력처럼 말아두고
검푸른 전차칸에 소음처럼 태워가는
파도 같은 인생 노래
어둠의 마지막 시간이 내려놓는 최후의 전당

대문도 없는 벽에
아기처럼 보채는 흰 비니루가
창 틈에서 밤새 꽃샘추위로 펄럭이는데
얼굴 숙인 낮은 방이 절망만은 아닌 것은
그래도 해바라기처럼 웃을 수 있는
신앙 같은 사랑 때문이리라

아, 뻐근한 가슴 한 쪽으로
가만 가만 파고드는 슬픔섞인 용기여
헝클어진 상처 곁에
소리 없는 사나이의 위로여
긴 한숨 속에 그물처럼 걸려 식어버린
그들의 달빛 같은 세레나데  

《49》
유리遊離 눈물

박소향

무채색 혈흔이 낭자하게 떨어지다
산산이 깨어져 닿은 그 것에
살이 베인다

바닥까지 차오른 빗물을 끌어안고
숱하게 흔들리며 떠내려가던 밤
손끝에 걸리는 모든 것이
다 아팠다

작별의 날과 악수하던
끝 날 어느 시간처럼
쓰러질 듯한 어둠의 빈혈과
차가운 비悲의 유전流轉이
날마다 문을 여는 곳

서걱이며 방랑하는 억새꽃과 같이
울음투성이 허무에 가슴을 내어 주고
가끔씩 찾아오는 은빛 소망 하나
그 곳에 둔다

눈물의 자리에 견고히 존재하는
어떤 슬픔까지도
모든 사랑의 영지(靈地)임을...

유려(流麗)한 부산물에
조각조각 헤어진 나도
오늘
흐트러진 한 여자의 유서가 되고 있음이다

유리(遊離)눈물에 베어버린 살점을
님에게 건네며
가슴 어느 기슭 쯤에
내 숨의 자취를 남기듯이  

《50》
유토피아

박소향

불치의 영혼을 앓는
금지된 기도의 시작
조난 당한 꿈속에서조차 무너져 내리는
길 잃은 약속들
그 고통의 흐느낌 뒤에 오는 이탈의 바다 위에
고혹의 섬처럼 표류하는 마지막 열정

사랑을 맨 입에
그리움을 단숨에
허기진 영혼 속에 팽팽히 집어넣고
흘린 기다림을
다 못 채운 사랑을
밤새도록 발라먹고 있다

영원히 배부르지 않을 유토피아 식탁에서  

《51》
이별은 처음처럼 사랑은 마지막처럼

박소향

길 위에 서면 나는 묻는다.

길이 끝나면
그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작이 있을까
희망이 있을까
아니면 마지막
작별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그 곳까지
마음은 먼저 가는데
길 끝에 서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희망도
늪도……
흔들리는 안개의 계절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혼자 부르는
황홀한 노래의 몸 짓 뿐이라는 것.

희망과 꿈이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교차하는 그 곳에서
홀로 남은 사랑을 볼 수 있다는 것.

사랑을 준비하라고
내게 말한 너는
그곳에 늘 없었다.

길 끝에 서면
무엇인가 늘 아쉬웠던
그 날..

이별은 시작되고
그 시간……
사랑은 마지막이 된다. 

《52》
이별하는 일

박소향

비 오지 않아도
바람 불지 않아도
항상 있는 빛으로 피어 나는 꽃들처럼
계절이 오면 때가 되었음을 아는 일이다

너는 바람으로 거기 남았는가
멈출수 없는 숨결로
절규하며 부대끼는
물거품으로 남았는가

사랑하는 일이 힘들때
그렇게 한번 흔들려 볼 일이다
한번은 오고야 말 폭풍같은 날들을
기다릴 일이다

빈 등허리로 숨죽이며 혼자 우는 일
무디어진 소망이 앞에 있고
비로소 혼자임을 깨닫는 일이다  

《53》
처음의 사랑처럼

박소향

눈이 부셔
뜰 수가 없어
하얗게 거품을 날리며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미친 사랑의 노래

목숨을 걸고라도
부서지고 싶은
처음의 사랑처럼
절망의 희열을 앓는다

풀리지 않는 매듭 사이에서
푸르게 날고 있는
마른 영혼의 춤사위는
황홀한 꿈의 흔적인가

멈추지 않는 그리움에
너를 숨기고
폭풍같은 허무의 잔에
시를 따른다

사랑을 알았던
그 시간을 위하여
너를 알았던
목쉰 눈물의
눈부신 꿈을 위하여  

《54》
흐르는 강물처럼

박소향


꿈꾸는 조약돌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잊혀진 우리들의 노래를 아십니까

거북처럼 달려 오던 봄이
소슬바람 이고 앉아
꽃 그늘 아래 퍼지는데
수척한 물살이 퍼 올리는 밤 노래는
누가 밝고 가는 시린 가슴입니까

당신이 남겨 놓으신 꿈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궂이
잊으라 하시면
대체 슬퍼하는 내 그리움은
누구의 몫입니까

당신을 곁에 놓고도
눈뜨고 지키는 강 너머 불 빛
먼 물가에 김이 오를 때
새벽은 이내 꽃처럼 피어나고
한줄기 푸른 연기가 햇살에 따사롭습니다

아, 당신을 떠날 수 없는 나는
유리창에 부딪치는 차가운 입맞춤 같습니다
해 이른 봄 날
이름 모를 꿈 하나 강 물결에 떨궈 놓고
딸랑딸랑 바람소리에 섞여
당신의 사랑을 안고 나는 다시 걷습니다 

《55》
흐린 날의 기억

박소향

비가 내리는 동안
호수는 늦게까지 열려있었다

물 속에 잠긴 이른 저녁 길을
걷고 있는 동안도
구름 속의 하늘은 푸르러 있었다

살구나무 울타리에 걸려
한참이나 서성대던 장미빛 황혼으로
차가운 비의 유혹을 비집고 들어와 가슴에 고인
이 그리움은
절망이겠지

우리 헤어지던 흐린 날 이후
사소한 일상 속에 따라 다니던
그리운 얼굴 하나
툭!
젖은 비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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