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 시모음

 

시 쓰는 남자  /  박소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대로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듸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이명(耳鳴)  /  박소란

 

그의 귓속에 작은 집 한 채 짓고 싶었네

꽃 피고 잎 돋아 무성한 한때

몇 마리 이름 없는 새들 약속처럼 날아와

알을 품고 기르듯

우묵한 둥지 하나 틀고 싶었네

긴 한숨이 그의 몸을 들고 날 때마다 더욱 아득해지던

어느 기슭, 꿈꾸듯 홀로 누워

검게 충혈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이내 바스러져 내릴 듯한 마음의 지푸라기들

그를 지탱해온 시간의 여린 어깨들

가만가만 토닥여주고 싶었네

그의 바깥을 맴돌던 노래 죄다 불러들여 놀아도 좋을

다정한 집 한 채

나는 그 속 헛것처럼 앉아 오래오래

알을 품고 싶었네

빛을 문 새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일어나

축포처럼 환한 울음 터뜨릴 때

나도 따라 울고 싶었네

언젠가 닿지 못한 말, 그 한마디

오랜 잠을 떨치고 와 마침내 훨훨 날아오를 때까지

끝없는 환열로 먹먹히 차오를 때까지

오래오래 울고 싶었네

 

주소  박소란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배가 고파요  /  박소란

 

삼양동 시절 내내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

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어느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을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

그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대책 없이 나는 살이 오를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요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노래는 아무것도  /  박소란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채 실려간다

한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다음에  /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다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시시한 시  /  박소란

 

결국 이런 시를 쓰게 될 줄 알았지

오오 이토록 시시한, 으로 시작되는 시

채 첫 연을 읽기도 전에 당신은

당신의 예민한 손가락은 책장을 덮어버릴지도 몰라

이를테면 이런 것 도무지 시적이지 않은 것

아침마다 당신이 사는 동네를 지나는 만원 버스

나는 늘 그 꽁무니나 죽어라 쫓는 거지

맨 끝 좌석엔 당신을 닮은 누군가 팔짱을 끼고 앉아

졸음이 잔뜩 묻은 뒤통수나 하릴없이 흔들고

그 지극히 사소한 모양으로 내 심장은 뛰지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할 때까지 그리고 문득 야근할 때까지

놓칠 게 뻔한 버스를 저만치 앞에 두고

온종일 나는 시시하지 너무 시시해 가끔은 눈물이 나

느닷없이 밀려오는 허기처럼 허기보다 먼저 구겨진 가방 속 빵봉지처럼

안 된 일이지만 내 평생이 이 따위 한낱 관용구로 채워지리라는 사실

무미한 혼잣말이나 읊조리며 종점을 향하리라는 사실 뻔하디 뻔한

일들만이 나를 놀라게 하겠지 그래 일찍이 나는 알았지

이런 시나 쓰게 될 줄, 오오 이토록 시시한, 으로 끝나는 시

끝나지 않는 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 시가 대체 어느 누굴 흔들어 깨울 수 있다는 건지 그래서 당신은

흔들렸다는 건지 어쩌다 잠시 잠깐

노선에도 없는 여기 변두리에 정차한 당신은 왜

 

정전(停電)  /  박소란

 

옆방 102, 그 아무개를 알게 된 건

어느 이슥한 밤의 일

해독할 길 없는 어둠과 어둠 사이

아득한 적요로 우거진 공중(空中) 불현듯

콘크리트 벽 저편으로부터 내솟는

한 줄기 거센 오줌발,

이는 분명

산 자, 살아 펄떡이는 자의 소리

기원을 잃어버린 어느 짐승의 긴한 울음 소리

어쩌면 그는

오랜 맨눈으로 뒤척이다 깨어 속수무책

이 밤의 맹기를 견디는 자임을

길을 헤매던 낮 속에 피 흘리고 상처 입은 자임을

그래, 어쩌면 그 또한

황야의 낯선 동굴을 홀로 찾아들 듯

이역의 단칸방에 불을 놓고 허성한 밥상을 차렸으리

그 위 한 그릇 식은 밥이 남몰래 꾸역꾸역 몸살을 앓았으리

벌거벗은 한 줄기 굉음은 방 안 가득

뭉클한 미명을 드리우고

굳게 걸어 잠근 이부자리 한 켠 제풀에 어려 흥건한데

이제 나는

쇠한 짐승의 마지막 발톱을 세워 똑 똑

그 벽에 노크를 하니

거기 있습니까

웅크려 흐느끼던 집들 반짝 고개 들어

도시의 하늘을 올려다 볼 때 총총히 여문 귀를 가져다 댈 때 거기,

거기 잘 있습니까

 

오래된 식탁   박소란

 

어떤 나무의 시체일까

우리는

지금 여기 앉아 밥을 먹는다

그만 먹어 그러다 체하겠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무서워

무서워서

밥을 먹는다

지긋지긋해 이까짓 먹는 얘기 먹고사는 얘기

사귀자 우리, 별안간 고백을 하면

체하겠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무서워서

너는 덥석 손을 잡겠지 다른 한 손에 숟가락을 꼭 쥔 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개라면, 겁에 질려 맹렬히 짖어대는 창밖 저것이

사랑이라면

참 재밌다

우리는

지금 여기 앉아 웃는다 앙상한 꼬리를 흔들며

그만 웃어 그러다 울겠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어디선가 자꾸만 썩는 냄새가 나

어떤 나무의 시체일까,

우리는

지금 여기 앉아 밥을 먹는다

식탁은 깨끗하고 아직 식탁 위 그릇은 허연 김을 피워 올리고

우리는 밥을 먹는다 죽기 전에 어서

울면서 먹는다

달아나는 저 개를 붙잡을 수 없다

 

아아, /  박소란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등  박소란

 

등이다

앓는 이의 등이다

등을 문지른다

흰 수건을 차게 적셔 열증의 등을 가만가만

문지르다 보면

뜨거운 살가죽으로 문이 하나 날 것 같고

그 작다란 문이 열리기를

나는 오래 기다려 온 것만 같고

문 저편

알 수 없는 곳으로 간다면

갈 수 있다면

천장이 낮고 구들이 망그러진 한 칸 방에 들 텐데

늦도록 남루를 밝히는 그곳 어진 불을, 이제 그만

나는 끌 텐데

엎드려 잠이 든 건지

등은 그러나

이렇다 할 기척도 없이

두꺼운 침묵의 벽을 쌓아올리고

열은 가시지 않는다

젖은 뺨을 살며시 가져다 대면

시름없이 고개를 떨구듯 다만 노크를 하듯

- -

누구 없나요? 타는 허공을 재차 두드리면

등이다

사랑하는 이의 등이다

등을 문지른다, 가만가만

아무도 아프지 않은 곳이다

 

울음의 방  박소란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 아주 사소한 흐느낌조차

울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 그때는 스무 살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제출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 되어

조금씩 꼬깃해져가는 표정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고서 가까스로

열어젖힌 싸구려 자취방은 더없이 고요해

너무 낮고 너무 어두워 울음은

다름 아닌 여기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타들어갈 때마다 기꺼이 방문을 열어 준

나의 울음, 엄마가 죽던 밤에도

사랑이 더운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그 방에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아릿한 곰팡내가 명치를 꾹꾹 누르는 방

울음의 방으로 내가 숨어들수록 울음은 아프고

어찌 된 영문인지

울음은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는 물기처럼 어느새 울음은

여기에 살 수 없음을 알았다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갔음을

어디로 갔나 울음은

울음의 빈자리를 오래오래 뒤척이던 나는

후미진 골목 끝

자취방은 헐리고 추진 스무 살도 멀리 달아났으니

어디로,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 나의 울음은

 

돌멩이를 사랑한다는 것  박소란

 

누구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집 앞 과일트럭이 떨이 사과를 한소쿠리 퍼주었다

어둑해진 골목을 더듬거리며 빠져나가는 트럭의 꽁무니를 오래 바라보았다

낡은 코트를 양팔로 안아드는 세탁소를

부은 발등을 들여다보며 아파요? 근심하는 엑스레이를

나는 사랑했다 절뚝이며 걷다 무심코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

너는 참 처연한 눈매를 가졌구나 생각했다 어제는

지친 얼굴로 돌아와 말없이 이불을 끌어다 덮는 감기마저

사랑하게 되었음을

내일이 온다면

영혼이 떠난 육신처럼 가벼워진 이불을

상할 대로 상해 맛을 체념한 반찬을 어루만지기로 한다

실연에 취한 친구는 자주 울곤 했는데

사랑은 아픈 거라고 때때로

그 아픔의 눈물이 삶의 마른 화분을 적시기도 한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어째서 나는 이토록 아프지 않은 건지

견딜 만하다, 덤덤히 말한다는 것

견딜 만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텅 빈 곳으로의 귀가를 재촉한다는 것

이 또한 사랑이 아닐까 궁지에 몰린 사랑,

그게 아니라면

도리가 없다는 것 더이상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우연히 날아온 무엇에라도 맞아 철철 피 흘리지 않을 도리가

 

()  /  박소란

 

누군가의 벗은 몸을 마주할 때면 멍에 가장 먼저 닿는다

등이나 허벅지의 구석진 곳에서 저도 모르게 치러지는 장례,

그 선연한 현장이 나를 이끈다

같이 밤을 보낸 이가 차려낸 아침상에도 한무더기의 시신은 떠오른다

애도를 기다리느라 잔뜩 핏발 선 고등어의 눈이나 찢긴 살갗으로 비어져 나온 시금치의 부패한 내장 같은 것 양식인 척 과묵을 지키는 것

애써 태연한 얼굴로 한점 두점 질겅이다 보면 잘못 쓴 무덤처럼 스멀스멀 입 안에 붉은 물이 차오른다

길을 나서면 숨진 비둘기가 나를 반긴다 찢긴 날개를 움켜쥔 채 바짝 짓눌린 새, 새였던 그 무언가 난해한 자세로 안부를 건넨다

그럭저럭 지낸다고 나는 대꾸한다 상복을 입은 바람이

흠칫 곡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다본다

차들이 마구 달려들고 난데없이 공사장 벽돌이 코앞에 떨어져

자주 걸음을 떨곤 하지만 나는 잘 지낸다고

석연치 않다는 듯 곁을 살피는 죽음을 외면하고 돌아온 다음날이면

멍은 내게로 관을 옮긴다

멍든 자리를 잠시 쓰다듬었을 뿐인데 어느새 속이 거멓게 타버린 날계란,

산 채로 화장당한 그것을 나는 또 잠자코 먹는다

 

감상  /  박 소 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알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킬 때

마침내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제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벽   /   박소란

 

슬퍼 모로 누웠을 때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

하나의 벽이 있었다

언제부터

벽은 거기에 있었나

벽에 기대어 생각했다

벽의 아름다운 탄생에 대해

벽은 온화하고 벽은 진중하니까 벽은 꼭 벽이니까

슬픔을 멈추고 나는 잠시 축배를 들었다

그때

벽에서 새어 나온 비밀스러운 속삭임

, 아침이 오고 있어

빛이 스며드는 베란다를 훔쳐보다 얄브스름한 커튼을 매만지다

그래 내일은 커튼을 바꾸자

조금 더 두껍고 견고한 것으로

벽 쪽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불길한 꿈이 찾아들었다

벽이 무너져 엉엉 우는 꿈

누가

벽을 부수었나 대체 누가

놀라 눈을 떴을 때

아침이 왔다 벽은

색색의 이지러진 얼굴을 감추며 어디론가 황급히 달아나버리고

누가, 그 누가

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왔다

 

초여름  /  박소란    〈나의 시를 말한다〉


몇 주 전 당신이 삶아두고 간 고구마를 오늘에서야

냉장고 구석에서 발견하고는

망설이다 먹는다 남김없이 먹고 병이 좀 나기로

무슨 일 때문인지 당신은 잔뜩 화가 났는데 어스레한

뒷모습으로 있다 끝내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갔는데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는다

장롱 옆 선풍기를 끌어다 단 바람을 조금 쐬고 눈을 감는다 어쩐지

슬픈 꿈이 밀려들 것 같아

지난 계절의 추위를 벗지 못해 아직도 스웨터를 꺼내 드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무래도 우스운 사람이다 나는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는다 시금달금한 맛이 혀끝에 닿을 때마다

고구마는 얼마나 소박한 음식인가

곱씹게 된다 세상의 쉬어빠진 것들을 가만히, 그리게 된다

이것을 다 먹고 나면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여기 그늘진 방에도 이제 막 여름이 오려 한다고

 

나프탈렌 / 박소란

 

조금씩 멀어지는 일 옷장에서

신발장에서 불안이 눅눅히 번진 이 방에서 도시에서

끝내 무용한 얼굴로

지상의 외딴 그늘에 숨어

두꺼운 한 권 책을 읽는 일

어떤 사소한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는 책을

우연처럼 찢겨 나간 페이지에 이르러 잠시 웃음을 머금는 일

울음이 다 닳도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안녕을 연습하는 일

더듬더듬 뜻 모를 문장들을 앓다 보면

자꾸 벌레에 물리고 벌레는 나를 사랑해,

사랑해 말하면

모두들 슬그머니 달아나

끝내 무용한 얼굴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

내가 만든 이별의 냄새를 내가 맡는 일 잠시

쓰디쓴 웃음을 머금는 일

 

무가당통밀빵을 샀다 / 박소란

 

가방에 한 덩이 빵을 짊어지고 온종일 거리를 쏘다녔지 지퍼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묘하게 살고 싶어지는 냄새 그러고 보니 빵집 여주인은 건강에 좋다는 무가당통밀빵을 먹어 봐요 권했었네 주름투성이 건포도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하고 순간 나는 잠시 행복할 뻔했지 온기를 들이마신 밀가루처럼 노릇노릇해져 살뜰한 살림을 흉내 내기도 했네 식탁에 빵을 올려둔 채 잠자리에 드는 것 아침에 일어나 저 빵을 먹어야지 하면서 내일에 대한 지극한 맹세랄까 하면서 이런 게 사는 맛일 테지 이스트를 쏟아부은 구름이 꿈속 가득 피어나 궂은 나날을 견뎌 볼 요량으로 뭉게뭉게 부푼 빵을 뜯어먹고 최선으로 살이 찔 요량으로 언젠가 빵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빵집이 없는 동네를 나는 살 수 없겠지 정다운 목숨들이 가지런히 놓인 그 집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먼 곳으로 먼 곳으로 가는 나를 빈 가방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뒤도 돌아보지 않는 무심을 어쩌면 주린 듯 몹시도 집어삼키곤 했지만

 

/ 박소란-

 

당신,

버스로 신촌을 지나다 보았어요 이승의 저녁을 하얗게 밝힌

연세장례식장 그 바로 곁에 스타벅스가 생겼더군요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장례식장 입구엔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야윈 등을 웅크린 채 벌벌 흐느끼고요

향탁 위 이내 사그라질 듯 위독한 연기처럼

노천의 낯익은 어둠이 그녀의 어깨를 살그머니 쓸고 있네요

언젠가 홀로 빈소를 지키며 꾸역꾸역 말아넘긴 탕국이

목구멍 깊숙이 염습한 울음이

이제 와 문득 가슴팍에 걸려 미어지려 할 때

제발 아무나 다가와 탁탁 등이라도 좀 두드려주면 싶을 때

당신, 내 속에 봉안해 둔

오랜 영정을 열고 수천수만 겹의 빛으로 몸 일으켜

달큰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카페라떼나 마끼아또를 내민다면

그래준다면 나는

두 손으로 경건히 그 잔을 받아들고 싶어요 당신의 전부를

품 안 가득 진설하듯 온 숨을 다해 들이켜고 싶어요

두 번 다시 당신과 내가 한 테이블에 마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조차

Chic하게 음미할 수 있을 때까지 당신,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살아 남겨진 자의 일이란 고작

이 뿐, 의 빈 잔을 앞에 두고 더디 더디 시간을 버텨내는 뿐

 

아현동 블루스 / 박소란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불현듯

쇼윈도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나는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거짓말처럼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 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 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그러면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아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 벌

쇼윈도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

 

미자 / 박소란-

 

밤의 불광천을 거닐다 본다 허허로운 눈길 위

미자야 사랑한다 죽도록, 누군가 휘갈겨 쓴 선득한 고백

비틀대는 발자국은 사랑 쪽으로 유난히 난분분하고 열병처럼

정처없이 한데를 서성이던 저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미자,

적멸을 드리운 세상의 모든 상처 곁에 격렬히 나부끼던 이름

미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떠나갔을까

부패한 추억의 냄새가 개천을 따라 스멀거리며 일어선다

겨우내 그칠 줄 모르고 허우적대던 절름발이 가랑눈과

그 불구의 몸을 깊숙이 끌어안아 애무하던 스무살의 뒷골목

여린 담벼락마다 퉤보란 듯이 흘레붙고 싶었던

지천한 허방 속 야생의 짐승처럼 똬리를 틀고

아귀 같은 새끼들을 싸지르고 싶었던

내 불온했던 첫사랑, 미자는

아직 그 어둔 길 끝에 살고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어쩌면 미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사랑이란 이름의 무수한 날들은 하나같이 사랑 밖에 객사했듯이

눈의 계절이 저물면 저 아픈 고백 또한 다만 질척이는 농담이 되고 말 일

미자는 지금 여기에 없고 사랑하는

미자는 나를 모르고 기어이 내 것이 아니고

 

개를 찾는 사람 / 박소란

 

누구에게나 개는 있습니다

어떤 개는 별안간 사라집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개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개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라진 개를 잊지 못합니다 잊지 못해 병이 들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개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을 버리고,

고작 사람을

개의 보드라운 털과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 같은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는 차츰 개를 닮아갑니다

개처럼 곤히 웅크리거나 또 금세 몸을 일으켜 컹컹 짖곤 합니다

컹컹 울곤 합니다 그 모습을 알아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개는 어디에 있나요 잃어버린 개를 찾는 사람은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을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칠흑의 혀를 빼문

골목을 서성이다 맥없이 주저앉곤 합니다

다시 네 발로 터덜터덜 돌아와 눕곤 합니다

영원을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개로 인해

신은 존재합니다

당신은 왜 개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신이시여 개의 얼굴로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은 사람 곁으로 앙상한 뼈다귀를

입에 문 사나이가 다가와 넌지시 속삭입니다

개는 돌아올 것입니다 개를 찾는 사람에게로

어느 날 문득 예의 희고 기다란 꼬리를 흔들며, 안녕

보이지 않는 개가 한 사람을 유유히 끌고 갑니다

어떤 사람은 별안간 사라집니다

 

정다운 사람처럼 / 박소란

 

화를 내는 것 굳게 팔짱을 끼고 성마른 등을 보이는 것

이제 막 하나의 심장을 받아 소용돌이치는 사람처럼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미안, 하면 눈물이 돈다 처음부터 미안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단지 미안만을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내민 손을 붙드는 것

비 갠 오후 성당 돌담길은 더없이 평온해

세상 마지막 인사인 듯

물기 번진 잎사귀를 매달고 걷는 것

바람이 살랑이고 슬며시 웃음이 고이고 잠시 잠깐 기도를 떠올리는 것

토라졌다 때마침 화를 푼 사람처럼

하늘의 표정은 맑고 사랑에 빠질 듯 자꾸만 찰랑거리고 모든 게 그만 괜찮아

괜찮아, 하면 눈물이 돈다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 이토록 정다운 사람처럼

 

울지 않는 입술 / 박소란

 

입술을 주웠다

반짝이는 입술이었다

언젠가

참 슬픈 노래로군요, 말했을 때 그 노래가 흘리고 간 것은 아닐까

넌지시 두고 간 것은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 아무도 모르게 숨겨 둔 입술

취해 돌아온 날이면

젖은 손으로 입술을 꺼내어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컴컴한 귀를 두고 입술 앞에 무릎 꿇기도 했다

노래하지 않는 입술, 나를 위해

울지 않는 입술

입술에 내 시든 입술을 잠시 포개어 보고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 붉고 서늘한 것을

돌려주어야지 슬픔의 노래에게로 가져다주어야지

내 것이 아닌 입술

여느 때와 같이

침묵의 안간힘으로, 나는

견딜 수 있다

 

p / 박소란

 

빵은 상해가요

중병에 걸린 아가씨처럼 창백한 얼굴로

하염없이 공중을 바라봐요

아가씨는 아직 젊고 아름답죠

고칠 수 없는 병을 두어 더 아름다운 아가씨

그녀는 인간의 병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날은 뜨겁고

병을 앓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거라 생각해요

어차피 빵이니까, 남겨진 빵이니까

그녀는 먼 곳을 떠올려요 보다 천진난만하게

부풀어 오르는 꿈,

미지의 검푸른 빛이

몸 곳곳에 감돌기 시작하면

조용히 그 커다란 눈을 감는 아가씨

부음은 전해지지 않아요

종일 굶주린 누군가

불도 켜지 않은 식탁에 앉아 한 입 빵을 베어 물고,

그러고 나면 조금 아플지도 모르죠

남몰래 아가씨를 사모한 옆 동네 순한 총각처럼

 

모틸 /(박소란)

 

도시의 북쪽 시내버스 정점

간판 한 군데를 대중없이 떨구고 선 저 여관은

외로운 미래를 가졌구나 다리를 절뚝이는 어린 전상병처럼

어둠이 빽빽이 매설된 밤이면 거리를 헤매던 가난한 연인들

간신히 아주 간신히 숨어 사랑을 나눌 테지만

그 사랑은 오래지 않아 고단한 잠 속에 포박될 테지만

가난해서 낙척한 연인이여

꿈에서도 총성은 사그라지는 법이 없지

함부로 난사 당한 채 신음할 뿐 새벽녘

위태한 잠자리에 누워 서로의 시린 등을 맞대어 볼 때

언제 벌써 당도한 오늘을 체념하는 별들의 수척한 얼굴을 건너볼 때

그때는 연인이여 훌쩍 방을 나서면 좋겠네

아무런 목적 없이 첫차를 잡아타 이슥한 골목골목을 헤맨다 해도

오래지 않아 부은 눈을 감추고 혼자서 종점으로 되돌아온다 j해도

나쁠 것 없지 사랑은 그렇게 전사하고 마는 것

서툴게 쌓아올린 붉은 봉분 앞에 서러운 주먹을 움켜쥐곤 하는 것

 

나의 고양이가 되어 주렴 / 박소란

 

검정 비닐봉지 하나 담장 너머로 펄렁

날아갈 때 텅 빈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로

자꾸만 저기로 향하려 할 때

정처 없이 헤매는 마음아

이리 온,

한 번쯤 나의 고양이가 되어 주렴

뜻 모를 젖은 손이 가슴을 두드리는 새벽

슬픔을 입에 문 젖내기처럼 골목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주지 않을래?

집집마다의 비극을 모조리 깨워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

꼬리가 잘린 채 버려진 것들의 잔치를

그러니 이리 온,

나의 고양이야

사나운 발자국이 겁주듯 찾아든 아침

우연히 바닥에 뭉개진 비닐봉지를 맞닥뜨린 행인이 아악!

비명을 지를 때, 정말이지 비닐봉지가

밤사이 웅크려 죽은 한 마리 고양이로 보일 때

아무렇지 않은 척 피를 닦고 일어나 다시

저기로 잠잠히 멀어져 갈

나의 마음아,

제발 이리 온

 

맴맴 / 박소란

 

그 여름의 숲에서 당신은 물었지

낯선 초록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게 물었지

왜 우는가

왜 너는 울어야만 하는가

짐짓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초록 속으로 초록 속으로 쉼 없이 걸어들어가고

당신은 물었지

세상 가장 근심 어린 얼굴로

왜 우는가

무엇이 너를 울게 하는가

나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신발도 가방도 놓고

초록을 한 송이 꺾어 슬며시 주머니 속에 넣었지

오래오래 그것을 길러 볼 요량으로

언젠가 한번은 당신을 초대할 요량으로

당신은 물었지

왜 우는가

왜 우는가

나는 그만 길을 잃고 싶었네, 무성한 초록 속에

당신을 오롯이 남겨 두고

슬픈 일은 모두 사라져

시간이여,

이제 달려간대도 나를 싣고 저 멀리 가버린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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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 시 모음

 

노을 무덤

 

아내여 내가 죽거던
흙으로 덮지는 말아 달라
언덕 위 풀잎에 뉘여
붉게 타는 저녁놀이나 내려
이불처럼 나를 덮어다오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보게 하라
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
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
흙으로 묻을 가치가 없어
피 묻은 놀이나 한 장 내려
덮어 두었노라고
살아서 좋아하던 풀잎과 함께 누워
죽어서도 별이나 바라보라고

 

바람 속에서 
                
산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바다로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나무에게 가는 길이
별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나의 길에 바람이 분다.
바람은 늘 산에 있고
바람은 늘 바다에 가득하고
바람은 나무 끝에 먼저 와
그 곳에 서 있다.

나의 길은 바람 속에 있다.
잎새 끝에는 언제나
새벽 별이 차갑게 떨고
바람은 길에서 나를 울렸다.
  

별의 아픔

      
내가 지금 아픈 것은
어느 별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밤늦게 괴로운 것은
지상의 어느 풀잎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토록 외로운 것은
이 땅의 누가 또 고독으로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의 외로운 별과 나무와
이 땅의 가난한 시인과 고독한 한 사람이

이 밤에 보이지 않은 끈으로나
서로 통화하여 앓고 지새는

병으로 아름다운 시간이여.

 

빈산이 젖고 있다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너무나 무거운 허공

산과 신이 눈뜨는 밤

핏물처럼 젖물처럼

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

별의 무리

죽음의 눈동자보다 골짜기 깊나

한 강물이 내려눕고

흔들리는 등잔 뒤에

빈 산이 젖고 있다.

 

큰 노래
 
큰 산이 큰 영혼을 가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별을 보며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나무에게

 

내 귀를 네게 묻는다.
듣는 사람아
하늘을 듣는 사람아
그대 시인이여.
너의 가슴에서 플룻을 듣는다.
내 안으로 깨어오는
또 한 사람이 들린다.
진실한 언어의 발소리
나무야
이 저문 땅의 빈자여
함께 걸어가다오.
네 안의 아름다운 자가
별이 이고 춤추는 자가
나를 걸어가는 동안
나는 너의 세계를 가고 있다.
나무야
함께 걷는 시간에
나는 문득
너의 뒤에서
알 수 없는 강물을 건너고 있다.

 

 

문답법을 버리다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 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여름비  

 

대낮에 등때기를 후려치는 죽비소리
후두둑

문밖에 달려가는 여름 빗줄기 

고요하다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물 곁에 있다는 것
우리가 눈을 뜬다는 것은
귀가 깨어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것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새벽 들판의 풀잎처럼
언덕 위 나무처럼
별 아래 함께 서 있는 것

 

봄밤

 

나귀의 귀 속에 우물이 있네
우물 안에 배꽃이 눈을 뜨네
마음에 숨은
당신 찾아가는 길
나이 먹어도 나 아직 젊어라

 

백담사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티베트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도

그의 영혼은 길가에 핀 풀꽃처럼 눈부시다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나비는 푸른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처럼 맑은

얼굴로

아침 정원을 산책하며

작은 날개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한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달 피리는 혼자 숲나무 위를 걸어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새처럼 가난하고

나비처럼 신성할 것

잎 떨어진 나무에 귀를 대는 조각달처럼

사랑으로 침묵할 것

그렇게 서로를 들을 것

 

구도(求道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그는 차츰 자신을 줄여갔다
꽃이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였다
하나의 빈 그릇으로

세상을 흘러갔다

빈 등잔에는
하늘의 기름만 고였다
하늘에 달이 가듯
세상에 선연히 떠서
그는 홀로 걸어갔다

 

도반(道伴

 

벽에 걸어 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 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초암(草庵)에서 - 山詩40

 

사람이 오래 가지 않은 암자가
풀잎 속에 쓰러지듯 앉아 있다
누구를 향해선지 밖으로 난 작은 길 하나
스님은 달빛 길을 쓸지 않는다
경계가 없는 경내
잎사귀들은 제 살을 먹여 벌레를 기르고
저녁이 와도 산은 스스로
문을 닫지 않는다
단지 산 안에 산의 파도가
흐린 안개 속에 잔다

벌레  

꽃에는 고요한 부분이 있다

그곳에 벌레가 앉아 있다

 

쇠별꽃 - 山詩26 

 

흙길을 가다가 본다
발자국이 남아 있다

발자국

들여다보니 놀랍구나
사라진 얼굴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찾았다 잃어버린 사람
쇠별꽃 내음

 

강물

 

새학기 교실에
지난해의 아이들이 가고
지난해만한 아이들이 새로 들어왔다
떠들고 웃고 반짝인다
이 반짝임은
지난해 그랬고 그 지난해도 그랬고
그 전 해 그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이 교실은 해마다
요만한 이이들이 앉았다 간다. 웃고 떠들고 침묵하고
흘러간다
교실은 아이들이 흐르는 강이다
나는 강의 한 굽이에 서서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山詩 5

 

당신을 껴안고 누운 밤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돌 하나 품어도
사리가 되었습니다

 

산길


산길은 산이 가는 길이다
나의 몸은 내가 가는 길
모자 쓰고 저기 구름 앞세우고
산이 나설 때 그 모습 뒤에서
길은 우뢰를 감추고 낙엽을 떨군다
산의 가슴속으로 처럼 놓여서
바람이 걸어가도 소리가 난다
새가 날아도 자취를 숨긴다
그것은 또 소 뿔에도 걸리지 않는
달이 가는 길
바람에 씻지 않은 발은 들여놓지 않는다
귀와 눈이 허공에 뜨여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눈 오는 저녁을 간직한다
산이 나에게 걸어올 때

산길은 내 안에 있다

 

 

새는 산 속을 날며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미시령 노을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반달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눈이 온 다음 날 비치는 햇살 

 

눈이 온 다음 날 솔잎에 빛나는 햇살
산협에 내려와 두근거리는 하늘
가지의 속삭이을 비추는 조용한 물빛
거울 속에 담긴 한르을 차고 날아가는 새
새소리 새소리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소리
물소리 물소리 사이로 젖는 향기

 

나무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 山詩14

 

새는 산 속을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겨울 산 - 山詩13

 

겨울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홀연 놀란다
나무는 오간 데 없는데
나 혼자 나무 향기를 맡는다

 

반달   山詩19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가을 편지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소포


가을날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 아래

노란 들국화 몇 송이
한지에 정성들여 싸서
비밀히 당신에게 보내드립니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그 향기며 꽃을 하늘이 피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띄우고
차가운 새벽 입술 위에 여린 이슬의
자취없이 마른 시간들이 쌓이어
산빛이 그의 가슴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는 정작의 이유는
당신만이 이 향기를
간직하기 가장 알맞은 까닭입니다
한지같이 맑은 당신 영혼만이

꽃을 감싸고 눈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추워지고 세상의 꽃이 다 지면
당신 찾아가겠습니다

 

다리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흔적

 

꽃이 문을 열어주기 기다렸으나
끝까지 거절당하고
새로 반달이 산봉에 오르자
벌레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반만 먹고 그 부분에 눕다
달이 지고
서릿밤 하늘이 깊었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을 때
산이 혼자 그림자를 내려
꼬부리고 잠든 그의 등을 덮어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친 바람 한점 없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레는 사라지고
그 자리 눈물 같은
이슬 두어 방울만 남아 있다

 

흔들림에 닿아

 

가지에 잎 덜어지고 나서
빈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리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입동

 

잎이 떨어지면 그 사람이 올까

첫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올까

십일월 아침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물 핑 돌아 하늘을 쳐다본다

수척한 얼굴로 떠돌며

이 겨울에도 또 오지 않을 사람

 

나무 안의 절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달을 먹은 소

 

저무는 들판에
소가
풀을 베어먹는다
풀잎 끝
초승달을 베어먹는다
물가에서 소는
놀란다
그가 먹은 달이
물 속 그의 뿔에 걸려 있다
어둠 속에
뿔로 달을 받치고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제 모습 보고
더 놀란다   

 

복사꽃


봄날  없이  너는
  없어  화안하다
 찾은 곳이
 뜨는  아니다

 깊은 가지
허공에 피어 허공을 물들이는
 목숨 저물면
거기 그냥 사그러져라

잠들  꽃은 가장 상기되는 시간
향기도 슬픔도 너의  아니다

무심히 내게 던진 그늘에

그분 피가 붉게 섞여 있다 

 

숨은 산 - 山詩33

 

땅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들다가

그 밑에 작게
고인 물 속
산이 숨어있는 모습
보았다
낙엽 속에
숨은 산
잎사귀 하나가
우주 전체를
가렸구나  

 

이성선(1941~2001)

 

강원도 고성 출생  
고려대 농학과 및 교육대학원 졸업 (1967)
문화비평에 시 시인의 병풍 외 4편으로 등단 (1982)

2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90)
6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1994)
1회 시와 시학상 수상 (1996)
시집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1985)   
하늘문을 두드리며 (1987)   
별이 비치는 지붕 (1987)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2000)   
산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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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유 /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최영미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속초에서     / 최영미                - 문단데뷔작-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살이 있었다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 드 문드문 건져올린 기억

으로 가까운 모래밭을 두어번 공격하다보면 어느새 날 저물어, 소문대로 갈

매기는 철 없이 어깨춤을 추었다. 지루한 飛行 끝에 젖은 자리가 마를 만하

면 다시 일어나 하얀 거품 쏟으며 그는 떠났다. 기다릴 듯 그 밑에 몸져누운

이마여 - 자고 나면 한 부대씩 구름 몰려오고 귀밑털에 걸린 마지막 파도

소리는 꼭 폭탄 터지는 듯 크게 울렸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살이 있었다


 더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데 비가 내리고, 어디 누우 나 비 오는 밤이면 커

튼처럼 끌리는 비린내, 비릿한 한웅큼조차 쫓아내지 못한 세월을 차례로 무

너뜨리며 밤이 깊어가고 처벅처벅 해안선 따라 낯익은 이름들이 빠진다.

랫줄에 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치욕, 아무리 곱씹어도 이제는 고스란히

떠오르지도 못하는 세월인데, 산 오징어의 단추 같은 눈으로 횟집 수족관

을 보면 아, 어느새 환하게 불켜고 꼬리 흔들며 달려 드는 죽음이여 -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

 

꿈의 페달을 밟고  / 최영미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행복론   /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내 속의 가을 / 최영미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옆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 최영미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옛날의 불꽃  / 최영미                                          

 

잠시 훔쳐온 불꽃이었지만 

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 

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었다


고맙다

네가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 최영미                             

너의 인생에도

한번쯤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바람에 갈대숲이 누울 때처럼

먹구름에 달무리질 때처럼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

너의 몸 골목골목

너의 뼈 굽이굽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미치도록 그리웠던 사랑  / 최영미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 최영미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밟는다는 건

웃고 떠들고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 남자를 보낸다는 건

뚜 뚜 사랑이 유산되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는 건

편지지의 갈피가 해질 때까지 줄을 맞춰가며

그렇게 또 한 시절을 접는다는 건

비 개인 하늘에 물감 번지듯 피어나는 구름을 보며

한때의 소나기를 잊는다는 건

낯익은 골목과 길모퉁이, 등 너머로 덮쳐오는 그림자를 지운다는 건

한 세계를 버리고 또 한 세계에 몸을 맡기기 전에 초조해진다는 건

논리를 넘어 시를 넘어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뭉갠다는 건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최영미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 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황혼  /  최영미

이마를 태우는 건

여름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만이 아니다

황혼빛에 눈이 멀 수도 있다


닮은 꼴  /  최영미


월드컵 골 모음 비디오를 보고 나는 알았다.


같은 골은 하나도 없다.


비슷하지만 다른 인생을 다루는 진짜 작가라면


같은 문장을 두 번 쓰지 않는다.

다시 선운사에서   /  최영미

옛사랑을 묻은 곳에 새 사랑을 묻으러 왔네

동백은 없고 노래방과 여관들이 나를 맞네

나이트클럽과 식당 사이를 소독차가 누비고

안개처럼 번지는 하얀 가스......

산의 윤곽이 흐려진다

神이 있던 자리에 커피자판기 들어서고

쩔렁거리는 동전소리가 새 울음과 섞인다

콘크리트 바닥에 으깨진,버찌의 검은 피를 밟고 나는 걸었네

산사(山寺)의 주름진 기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돼지들에게   /  최영미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 를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난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 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머니가 털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주를 줘.”

“내게도 진구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 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못생긴 진주였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진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와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러 가지를 꺾었다.

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인 없는 꽃밭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

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티는 계속되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때로 싸우고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자 않았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늘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번만 달라고......


<먼저, 그것이>  / 최영미

고개 숙이며 온다
아스팔트를 데웠다 식히는 힘으로
장롱문이 소리없이 닫히는 힘으로
초조한 이마 위 송송한 구슬땀 몇개로
사랑은 온다

첫번째 사과의 서러운 이빨자욱으로
초생달 둘레를 둥들게 베어내며
뚱뚱한 초 하나로 밤이 완성될 때

보채는 아이의 투정처럼
식은 차 한잔의 위로처럼
피곤을 넘어 반성을 넘어
어쩌면 사랑은 온다

망설이는 마음 한복판으로
어제의 사랑을 지우며
더듬거리며 오늘, 사랑이 내게로 온다
주저하는 나보다 먼저, 그것이 내게로 온다



<위험한 여름>/최영미

시라는 걸 쓰기 시작한 뒤 처음 맞는 8월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술 마신 다음날 반쯤 시체가 된 몸은
꾸역꾸역 밖으로 나가고만 싶어 창문을 열면, 매미소리와
함께 마지막 여름이 가고 놀이터 아이들은 키 큰
잠자리채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무성한 벌레울음과 그 뒤에 오는 짧은 침묵 사이로
어제의 시가 유산되고, 간밤의 묵은 취기도 마저 빠져
나가고 맴맴, 맴돌기만 하던 생각도 가고 그대와 함께
여름이 간다

아직 배반할 시간은 충분한데......그리 높지고
푸르지도 않은 하늘 아래 구름은 또 비계 낀 듯
잔뜩 엉겨붙어 뭉게뭉게 떨어지지 않고 다만, 거짓말처럼
천천히 서로 겹쳐졌다 풀어지며 경게를 만들었다 허무는
힘으로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고 다만, 한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뭉개며 제각기 비비다 울며 여름이 간다



<목욕>  /  최영미

한때 너를 위해
또 너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씻고 닦고 문지르던 몸
이제 거울처럼 단단하게 늙어가는 구나
투명하게 두꺼워져
세탁하지 않아도 제 힘으로 빛나는 추억에 밀려
떨어져 앉은 쭈그렁 가슴아ㅡ
살 떨리게 화장하던 열망은 어디가고
까칠한 껍질만 벗겨지는 구나
헤프게 기억을 빗질하는 저녁
삶아먹어도 좋을 질긴 시간이여





<슬픈 까페의 노래>  /  최영미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하다
언젠가 한번 마신 듯하다
이 까페 이 자리 이 불빛 아래
가만있자 저 눈웃침치는 마담
살짝 보조개도 낯익구나

어느 놈하고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아프지 않고도 아픈 척
가렵지 않고도 가려운 척
밤 새워 날 세워 핥고 할퀴던
아직 피가 뜨거운 때인가

있는 과거 없는 과거 들쑤시어
있는 놈 없는 년 모다 모아
도마 위에 씹고 또 씹었었지
호호탕탕 훌훌쩝쩝
마시고 두드리고 불러제겼지
그러다 한두 번 눈빛이 엉켰겠지
어쩌면......
부끄럽다 두렵다 이 까페 이 자리는
내 姦飮의 목격자



<인생> /최영미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나의 대학>  /  최영미

이제 어쩌면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떠난 뒤에 더 무성해진 초원에 대해
아니면, 끝날 줄 모르는 계단에 대해
우리 시야를 간단히 유린하던 새떼들에 대해

청유형 어미로 끝나는 동사들, 머뭇거리며 섞이던
목소리에 대해
여름이 끝날 때마다 짧아지는 머리칼, 예정된
사라짐에 대해
혼자만이 아는 배신, 한밤중 스탠드 주위에 엉기던
피냄새에 대해

그대,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나란히 접은 책상다리들에 대해
벽 없이 기대앉은 등, 세상을 혼자 떠받친 듯 무거운
어깨 위에 내리던 어둠에 대해
가능한 모든 대립항들, 시력을 해치던 최초의 이편과
저편에 대해

그대, 내가 배반했을지도 모를 이름이여

첫번째 긴 고백에 대해
너무 쉽게 무거웠다 가벼워지던 저마다 키워온
비밀에 대해
눈 오는 날 뜨거운 커피에 적신 크래커처럼 쉽게
부서지던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느날 오후에 대해
아, 그러나, 끝끝내 , 누구의 무엇도 아니었던
스물살에 대해

그대, 내가 잊었을지고 모를 이름이여
그렁그렁, 십년 만에 울리던 전화벨에 대해
그 아침, 새싹들의 눈부신 초연함에 대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요
행여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줄, 아직 한 사람쯤
있는지요



<24시간 편의점>  /  최영미

       1
언제든지 들러다오, 편리한 때
발길 닿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시동 끄고 아무데나 멈추면 돼

거기 내가 있을게
꽃가마 없어도 연지 찍고 곤지 찍고
밤새워 불 밝히며
기다리고 있을게

       2
오늘은 어쩐지
불을 켠 채 잠들고 싶다

해거름 술이 올라
내 안의, 내 밖의
살아 있는 것은 내게 맞선다

아침이면 한없이 착해질
욕망도 당당히 자기를 주장하고
철 지난 달력이 넘겨달라 아우성
읽어달라 애원하는 저 거룩한 이름의 시집들
간절한 눈빛 외면한 채
단호히 더듬거리며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다시 올린다

       3
언제든지 들러다오, 편리한 때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아무데나 멈추면 돼
노동의 검은 기름 찌든 때 깨끗이 샤워하고
죽은 듯이 아름답게 진열대 누운
저 물건들처럼 24시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을게, 너의 손길을
여기는 너의 왕국
그저 건드리기만 하면 돼
눈길 가는 대로 그저 한번, 건드리기만 하면 돼

       4
오늘은 어쩐지
너를 기다리며 자고 싶다
철 지난 달력도
거룩한 이름의 시집도
뱃속의 덜떨어진 욕망도 한꺼번에 날 배반하는
가슴에 불을 켜고 자는 밤




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Personal computer  /최영미 

 

 새로운 시간을 입력하세요

그는 점잖게 말한다

 

노련한 공화국 처럼

품안의 계집처럼

그는 부드럽게 명령한다

준비가 됐으면 아무키나 누르세요

그는 관대하기까지 하다

 

연습을 계속할까요 아니면

메뉴로 돌아 갈까요?

그는 물어볼 줄도 안다

잘못되었거나 없습니다

 

그는 항상 빠져나갈 키를 갖고 있다

능란한 외교관 처럼 모든 걸 알고 있고

아무것도 모른다

 

이 파일엔 접근 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그는 정중히 거절한다

 

그렇게 그는 길들인다

자기 앞에 무릎 꿇은, 오른손 왼손

빨간 매니큐어 14K 다이아 살찐 손

기름때 꾀죄죄 핏발 선 소온,

솔솔 꺽어 길들인다

 

민감한 그는 가끔 바이러스에 걸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쿠데타를 꿈꾼다

 

돌아가십시오!화면의 초기상태로

그대가 비롯된 곳, 그대의 뿌리,그대의 고향으로

낚시터로 강단으로 공장으로

모오두 돌아가십시오

 

이 기록을 삭제해도 될까요?

친절하게도 그는 유감스런 과거를 지워준다

깨끗이, 없었던듯 지워준다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그대에게

 

어쨌든 그는 매우 인간적이다

필요할 때 늘 곁에서 깜빡거리는

친구보다도 낫다

애인보다도 낫다

말은 없어도 알아서 챙겨주는

그 앞에서 한없이 착해지고픈

이게 사랑이라면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

      

 

사랑의 시차 / 최영미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 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面壁)한 두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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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모음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

)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

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

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

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

,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

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

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그 입 속에 악착 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소리의 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이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를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가수는 입을 다무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 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 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 보면 축축한 등 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소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 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 같은 가늘은 울음 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 위로 들이친다.

 

 


그 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 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늙은 사람

 

그는 쉽게 들켜 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 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 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물 속의 사막

 

밤 세 시, 길 밖에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 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나는 천천히 발음해 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 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 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숲으로 된 성벽

 

저녁 노을이 지면

()들의 상점(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

 

어느 골동품 상인(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식목제 (植木祭)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 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안 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겁탈당하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어느 푸른 저녁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행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 던진다

그의 마음 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는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래된 서적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이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위험한 가계(家系) 1969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 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 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 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 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세,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장미빛 인생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그는 건장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 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 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 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 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 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 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 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에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집시의 시집

 

  1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를 그냥 일꾼이라 불렀다.

 

  2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신()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어떤 아이는 실제로 그가 토마토를 가지고 둥근 금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어른들도 몰랐다. 우리는 그가 트럭의 고장 고등어의 고장 아니, 포도의 고장에서 왔을 거라고 서로 심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 때마다 그는 농장의 검은 목책에 기대 앉아 이상한 노래들을 불렀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아버지인 햇빛

숲에서 날 찾으려거든 장화를 벗어 주어요

나는 나무들의 가신(家臣), 짐승들의 다정한 맏형

 

그의 말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우리의 튼튼한 발을 칭찬했다. 어른들은 참된 즐거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세상을 자물통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은 신기한 폭탄, 꿈꾸는 부족(部族)에겐 발견의 도화선. 우리는 그를 믿었다. 어느 날은 비에 젖은 빵, 어떤 날은 작은 홍당무를 먹으며 그는 부드럽게 노래불렀다. 우리는 그때마다 놀라움에 떨며 그를 읽었다.

 

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한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사냥해온 별

모든 사물들의 도장(圖章)

모든 정신들의 장식

랄라라, 기쁨들이여!

과오(過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

 

추수가 끝나고 여름 옷차림 그대로 그는 읍내 쪽으로 흘러 갔다. 어른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병정놀이들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코밑에 수염이 돋기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그 사내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오랜 뒤에 누군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이미 그의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들었다. 상급반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혈통과 교육에 대해 배웠다. 오래지 않아

 

  3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저녁마다 연필을 깎다가 잠드는 버릇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했다.

 


 

추억에 대한 경멸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 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 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 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포도밭 묘지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 약시(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 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 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는 수 없이 내 지친 발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 보면 버릇처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공중(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기척 없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 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 돌려 캄캄한 눈을 감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간 포도밭, 참담했던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 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空中). 기억하느냐, 그 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從者),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듯이 믿음은 부재(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 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 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종자(從者),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흔해빠진 독서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 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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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고
당신은 멀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움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물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민들레꽃


까닭 없이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 얼마나 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 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 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에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풀잎단장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 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석문(石門)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
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
.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
(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
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
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승 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기다림


고운 임 먼 곳에 계시기
내 마음 애련하오나


먼 곳에나마 그리운 이 있어
내 마음 밝아라.


설은 세상에 눈물 많음을
어일 자랑삼으리.


먼 훗날 그때까지 임 오실 때까지
말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임 오시는 길녘에 피고져라.


높거신 임의 모습 뵈올 양이면
이내 시든다 설을리야......


어두운 밤하늘에
고운 별아.

 

 


女人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완화삼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움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 마을에 저녁 노을이여
이밤 자면 저 마을의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하여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빛을 찾아가는 길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 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목어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만리길


눈부신 하늘아래
노을이 진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人生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亡靈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제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꿈 이야기


()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고풍 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
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
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
),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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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 모음 20

1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 하리라

 

2

갈대

ㅡ천상병ㅡ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3

갈매기

ㅡ천상병ㅡ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이 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4

강물

ㅡ천상병ㅡ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5

구름

ㅡ천상병ㅡ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 꽃

뭇 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 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 수놓네.

 

6

ㅡ천상병ㅡ

 

가도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가도 無人之境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7

나는 행복합니다

ㅡ천상병ㅡ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

텔레비젼의 희극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랑병()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8

나의 가난은

ㅡ천상병ㅡ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9

난 어린애가 좋다

ㅡ천상병ㅡ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10

날개

ㅡ천상병ㅡ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안 다셨는지 모르겠다.

내같이 가난한 놈은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뿐인데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 성취다.

하나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11

ㅡ천상병ㅡ

 

고요한데 잎사귀가 날아와서

네 가슴에 떨어져간다.

 

떨어진 자리는 오목하게 파인

 

그 순간 앗 할 사이도 없이

네 목숨을 내보내게 한

상처 바로 옆이다.

 

거기서 잎사귀는

지금 일심으로

네 목숨을 들여다보며 너를 본다.

 

자꾸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오는데

꼼짝 않고 상처를 지키는 잎사귀

 

그 잎사귀는 눈이다 눈이다.

맑은 하늘의 눈 우리들의 눈 분노의

너를 부르는 어머님의 눈물어린 눈이다.

 

12

들국화

ㅡ천상병ㅡ

 

신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13

막걸리

ㅡ천상병ㅡ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 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14

바람에도 길이 있다

ㅡ천상병ㅡ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15

봄을 위하여

ㅡ천상병ㅡ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회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16

약속

ㅡ천상병ㅡ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을 가도 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17

어두운 밤에

ㅡ천상병ㅡ

 

수만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 ,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18

오월의 신록

ㅡ천상병ㅡ

 

오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 두 살 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19

푸른 것만이 아니다

ㅡ천상병ㅡ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은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34월 그리고 5월의 실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는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20

한가지 소원(所願)

ㅡ천상병ㅡ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들어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 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컷 살았나 싶다.

별다를 불만은 없지만,

 

똥 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 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행 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편 지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나 무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광화문 근처의 행복

 

광화문에,
옛 이승만 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
기어코 나의 단골인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그리고 천 원짜리 두 개를 주는데---
나는 그 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
포켓에서 이천원을 끄집어 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
"귀찮아! 귀찮아!"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단골집은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자유당 때 휴간(休刊)당하기도 했던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크레이지 배가본드"

 

1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담배를 빤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물을 마신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 꽁초 토막......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기 쁨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킬킬 웃어 제낀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생색이 나고 활기가 나고

하늘마저 다정한 누님같다.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나의 가난함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넋이 있느냐 라는 것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거나 같다.
산을 보면서 산이 없다고 하겠느냐?
나의 넋이여!
마음껏 발동해 다오.
내 몸의 모든 움직임은,
바로 내 넋의 가면이다.
비 오는 날 내가 다소 우울해지면,
그것은 즉 넋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내 넋을 전세계로 해방하여
내 넋을 넓직하게 발동케 하고 싶다

 

 


마음 마을

 

내 마음의 마을을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른다.
내가 천씨요 구천(九千)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비록 동네지만
경상남도보다 더 넓고
서울특별시도 될 만하고
또 아주 조그만 동네밖에 안 될 때도 있다.

뉴욕의 마천루(摩天樓)같은
고층건물이 있는가 하면
초가지붕도 있고
태고시대(太古時代)의 동굴도 있다.

이 마을 하늘에는
사시장철 새가 날아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흰구름이 왕창 덮인다.

이 마을 법률은
양심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 재판소밖에는 없다.

여러가지로 지적하려면
만자(萬字)도 모자란다
복잡하고 복잡한 이 마음 마을이여

 

 

 

저 새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내내 움직일 줄 모른다.

상처가 매우 깊은 모양이다.

아시지의 성()프란시스코는

새들에게 은총 설교를 했다지만

저 새는 그저 아프기만 한 모양이다.

수백 년 전 그날

그 벌판의 일몰(日沒)과 백야(白夜)

오늘 이 땅 위에 눈을 내리게 하는데

눈이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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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바 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솔밭에 와서


솔밭에는 솔바람 여울이 울고
솔바람 여울 위에 가치떼 설레고
가치 설레는 위에 하늘만 푸르고
내사 외로워 생각이고 무에고

 

 


행 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생명의 서 일장(一章)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바람에게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노 송


아득한 기억의 연령을 넘어서 여기
짐승같이 땅을 뚫고 융융히 자랐나니
이미 몸둥이는 용의 비늘을 입고
소소히 허공을 향하여 여울을 부르며
세기의 계절 위에 오히려 정정히 푸르러
전전 반축하는 고독한 지표의 일변에
치어든 이 불사의 원념을 알라.

 

 


수선화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향 수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여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여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져 있나니


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日月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광야에 와서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저녁놀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깃 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항가새꽃


어느 그린 이 있어 이같이 호젓이 살 수 있느니 항가새꽃
여기도 좋으이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내 여기도 좋으이
하세월 가도 하늘 건너는 먼 솔바람 소리도 내려오지 않는 빈 골짜기
어느 적 생긴 오솔길 있어도 옛같이 인기척 멀어
멧새 와서 인사 없이 빠알간 지뤼씨 쪼다 가고
옆엣 덤불에 숨어 풀벌레 두고두고 시름없이 울다 말 뿐
스며오듯 산그늘 기어내리면 아득히 외론 대로 밤이 눈감고 오고
그 외롬 벗겨지면 다시 무한 겨운 하루가 있는 곳
그대 그린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여기도 즐거웁거니
아아 날에 날마다 다소곳이 늘어만 가는
항가새꽃 항가새꽃

 

 



어느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 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별 하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나누어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 밖에 없는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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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시 모음

  수선/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가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읹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 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우리가 어는 별에서’/ 정호성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이별노래 /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가을 꽃 / 정호성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이제는 지는 꽃도 아름답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것이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말자 꽃이여 

‘★구두 닦는 소년’ / 정호성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짖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닦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닦는다

이 세상 별볓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묵숨 위에 내려앉은 먼지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매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발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맹인 부부 가수’/ 정호성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 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강변 역에서 /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 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 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새벽 편지 /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끝끝내 / 정호승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니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가


 ★가을 /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그는 /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움녕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 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결혼에 대하여 /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 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폭포 앞에서 / 정호승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감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리기다 소나무 / 정호승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 정호승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소록도에서 온 편지 / 정호승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개동백나무에 개동백이 피고
바다 위로 보르말이 떠오르는 밤
손 없는 손으로 동백꽃잎마다 주워
한 잎 두 잎 바다에 띄우나니 받으시라
팔 없는 팔로 허리를 두르고
발 없는 발로 함께 걷던 바닷가를
동백꽃잎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시라

★꽃 지는 저녁 /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등신불 / 정호승

강물도 없이 강이 흐르네
하늘도 없이 눈이 내리네
사랑도 없이 나는 살았네
모래를 삶아 밥을 해먹고
모래를 짜서 물을 마셨네
잘 가게
뒤돌아보지 말게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네
눈이 오는 날
가끔 들르게
바람도 무덤이 없고
꽃들도 무덤이 없네

★사랑 /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정동진 /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희망은 아름답다 / 정호승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희망을 낳지 않는데
나그네여, 그 날 밤 총소리에 쫓기기며 길을 잃고
죽음의 산길 타던 나그네여
바다가 있어야만 산은 아름답고
별이 빛나야만 창은 아름답다
희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창은 들의 꽃
바람 부는 대로 피었다 사라지는 한 순례자


★겨울 강에서 /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 강 강 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바닷가에 대하여 /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눈부처 / 정호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저무는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인생의 눈부처 되리
내 죽을 때 망초 꽃 되어
그대 맑은 눈동자 눈부처 되리..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 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얼씨구나 부등켜 안고 웃어 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가난한 사람에게 / 정호승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밖에 걸어 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을 꽃 /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 꽃이여


★사랑 / 정호승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 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너에게 /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까닭 / 정호승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봄눈 /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정호승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 내린다.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 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 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안개꽃 / 정호승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 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 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내 마음속의 마음이 / 정호승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내 목을 베어 가십시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베어낸 내 목을
평생토록 베개로 삼아주십시오
그래도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시 칼로 베개를 내려쳐주십시오.
눈 내리는 그믐날 밤
기차역 부근에서
내 마음속의 마음이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 정호승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


★반지의 의미  /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폭포 앞에서

정호승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 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미안하다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 길을 걸어갈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슬픔으로 가는 길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감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강변 역에서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 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 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
새벽 편지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
끝끝내

정호승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
그는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움녕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 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리기다 소나무

정호승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정호승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
소록도에서 온 편지

정호승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개동백나무에 개동백이 피고
바다 위로 보르말이 떠오르는 밤
손 없는 손으로 동백꽃잎마다 주워
한 잎 두 잎 바다에 띄우나니 받으시라
팔 없는 팔로 허리를 두르고
발 없는 발로 함께 걷던 바닷가를
동백꽃잎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시라
★★★★★★★★★★★★★★★★★★★★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국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 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
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
등신불

정호승

강물도 없이 강이 흐르네
하늘도 없이 눈이 내리네
사랑도 없이 나는 살았네

모래를 삶아 밥을 해먹고
모래를 짜서 물을 마셨네

잘 가게
뒤돌아보지 말게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네

눈이 오는 날
가끔 들르게

바람도 무덤이 없고
꽃들도 무덤이 없네
★★★★★★★★★★★★★★★★★★★★
사랑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정호승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
정동진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
희망은 아름답다

정호승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희망을 낳지 않는데
나그네여, 그 날 밤 총소리에 쫓기기며 길을 잃고
죽음의 산길 타던 나그네여
바다가 있어야만 산은 아름답고
별이 빛나야만 창은 아름답다
희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창은 들의 꽃
바람 부는 대로 피었다 사라지는 한 순례자
★★★★★★★★★★★★★★★★★★★★
겨울 강에서

정호승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 강 강 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
바닷가에 대하여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
눈부처

정호승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저무는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인생의 눈부처 되리
내 죽을 때 망초 꽃 되어
그대 맑은 눈동자 눈부처 되리..
★★★★★★★★★★★★★★★★★★★★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 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얼씨구나 부등켜 안고 웃어 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
가난한 사람에게

정호승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밖에 걸어 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가을 꽃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 꽃이여
★★★★★★★★★★★★★★★★★★★★
사랑

정호승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 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
이별노래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너에게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
까닭

정호승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
봄눈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니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운가
★★★★★★★★★★★★★★★★★★★★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정호승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 내린다.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 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 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가을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
안개꽃

정호승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 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 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
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
내 마음속의 마음이

정호승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내 목을 베어 가십시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베어낸 내 목을
평생토록 베개로 삼아주십시오
그래도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시 칼로 베개를 내려쳐주십시오.
눈 내리는 그믐날 밤
기차역 부근에서
내 마음속의 마음이 말했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호승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
★★★★★★★★★★★★★★★★★★★★
반지의 의미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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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소한 날 눈이 옵니다

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

눈이 옵니다

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풍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창문 조금 열고

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

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겨울나무 가지 끝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일이

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

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

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댈 것입니다


 

산길에서


 

나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깊은 산 외딴 길섶에

한 송이 이름 없는 작은 꽃으로 피어나리라

혹여, 그대가 한 번쯤

하찮은 실수로

바람처럼 내 곁을 머뭇거리다 지나칠 때

고갤 꺾고 꽃잎 한 장 바람결에 날려 보리라

 

 

 

먼길



한 사날-

진달래꽃 길을 따라 혼자 걸어서

그대 사는 먼 곳 외딴 그 오두막 찾아가 보고 싶네

폭설처럼 꽃 지는 저녁

길 위에 엎어져 영영 잠들어도 좋겠네

꽃신 한 켤레

허리춤에 달랑 차고

 

 

보이지 않는 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별 하나가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내 모든 삶은

그 별에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깊은 밤 홀로이 앉아

하늘을 보면

반짝이는 별 무리 사이로

숨은 별 하나가 방긋 눈을 뜹니다

 

 

저 하늘 아래에는



저 하늘 아래에는 운동모자 꾹 눌러쓰고

코스모스 꽃길

말없이 걸어가는 소년과


하얀 팔 내놓고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강남역에서 내린 여자



누구였을까 그 여자 강남역에서 내린 여자

내 팔에 기대

달빛처럼 잠들다

화들짝 놀라 내려버린 여자


누구였을까 그 여자 어디선가 한 번은 꼭

본 듯도 한 옆모습

혹은 뒷모습

내 팔을 주고도 얼굴을 못 본 여자


스물아홉 낯선 길목에서 찬비 맞으며

해오라기처럼 목을 빼고 기다리던 여자는 아녔을까

꼭꼭 숨어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던

바보 멍청이 같은 여자


어디로 갔을까 그 여자,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

여수로 갔을까 흑산도로 갔을까

삼천포로 갔을까

강남역에서 내린 빨간 가방을 든 그 여자



내 안의 여자



우체국 측백나무 사이로

바라보던

오렌지색 원피스가 곱던

그녀


까마득한 시간 흘렀어도

그 집 앞 지날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지


그 날 읍내로만 따라왔더라면

그녀는 지금

곁에 있을 텐데


항상 내 안에 있지



그 겨울의 끝



겨울의 끝에서 눈이 옵니다

지난겨울은 참 행복했습니다

연사흘째

어지럽게 봄눈 날리고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서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해보고

당신을 보냅니다

당신만큼 날

슬프게 해 준 사람 없습니다

당신만큼 날

행복하게 해 준 사람 없습니다

봄눈 내리는 길목에 서서

멀어져가는 당신 뒷모습

바라보다

한 움큼 눈을 뭉쳐 하늘에 던집니다



명희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을 순 없을까

캄캄한 어둠만이 밀려오던 종점 근처

홍합 국물 따뜻하게 뎁혀지던 포장마차

오늘같이 눈 내리는 밤이 오면

세상 어딘가에 토끼처럼 잠들어 있을 눈매 곱던 널

찾아내어

빠알간 숯불에 알맞게 잘 구워진

꼼장어 소라 안주 삼아

독한 소주 한잔 빈속에 털어 넣고

널과 함께 걷고 싶어

그때 우린 참 많이 젊어 있었지

강냉이 빵이 먹고 싶다던 너, 이 밤

어디에 박혀 있니?



강 건너 그대



하늘빛이 흐려서 손 한 번 헐겁게

잡아 보지 못했네

그리워 말 못하고 살아온 지

오랜 지금

강 건너 갈밭머리

반백의 머리칼 날리며 쓸쓸히 웃고 섰는 여인아,

그대 향한 그리움 오늘도

겨울 강둑에

빈 해바라깃대처럼 서 있을 뿐이네



지귀의 노래*



그대의 눈길 한 번만 스쳐도 단숨에

타오를 목숨입니다

하늘에 별처럼 높고 빛나는 그대

감히 사모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모르는 바 아니오나

어이합니까,

생각사록 뜨거워지는 가슴

별똥별 풀꽃처럼 뿌려 쌓는 길섶에서

그대 향기 나는 발소리 기다리다

잠든 가슴 위에

귀하신 팔찌를 벗어 놓으시고 홀연

밤안개 헤치며 사라지신 그대

깊고 넓은 마음 헤아릴 듯합니다

마지막 뼈와 살을 우리어 바치는 불의 마음,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서라벌 산천을 불꽃으로 뒤덮을 때

그대 푸르고 푸른 치맛자락으로

황홀하게도 불타버린 미천한 몸뚱어리를

살뜰히 살뜰히 거두어 주십시오

   

  *지귀는 선덕여왕에 대한 사모의 정이 너무 깊어

    끝내는 불귀신이 되었다는 신라의 사내임



너를 기다리며



너를 기다리기

백 년이

걸린다


너를 잊기까지

죽어서 또

백 년이 걸린다


나는 산정에 선

한 그루

나무,


하늘이 푸르다



아름다운 이름 하나



하늘에 작은 별 하나

빛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꽃들이 피어나

밤하늘 밝혔을까


강가에 꽃 한 송이

피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별들이 반짝이며

강물 위에 빛났을까


하늘과 땅 사이에

아름다운

이름 하나,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사무쳐야

내 가슴에 꽃등 하나, 환히 밝을까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이번 여름엔 사랑을 하고 싶다

야한 티 하나 사 입고

낯선 여자와

낯선 거리에서

낯설지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낯선 거리에서 묻고 싶다



그때 그 자리 · 1



줄무늬 스웨터

빨간 치마


고갤 꺾고

마른 잔디 풀만 쥐어뜯던 네

작은 어깨가

조금씩

들썩여서


하고팠던 말

가득해도

말 한마디 못해보고

돌아온

그때 그 자리,


인제는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너 없는

그 자리에

다시 찾아가 앉아본다



첫사랑 그 여자



남몰래

가슴 깊이 묻고 살아도

꿈속에서 불쑥 뛰쳐나와 들킬 것 같아

불안하다


한 세상 살며

가슴 좀 실컷 아파보라고

꿈길마다 찾아와

눈웃음치다


한 발짝

다가가면

살래살래 달아나버리는



그 밤



젖가슴 봉긋이 드러나던

열다섯 그녀는


풀 목걸이 걸고 배시시 웃을 때

볼우물

깊게 파이곤 했다


그 드맑은 우물 속에 퐁당,

청개구리처럼

뛰어들고 싶던 밤이 있었다


초아흐레 연한 달빛이

삼박삼박-

갈잎에 베어져 드러눕던 밤이었다



추운 날



달걀같이 갸름한

달걀빛 얼굴


눈 말간 소녀가 앉았던 자리에

남겨 놓고 간


몇 온스의 온기에

감염-


아차!

정거장을

지나치고 말았네



겨울 밤



오늘처럼 숫눈발 푹푹 쏟아붓는 밤이었을 것이다


사립 밖엔

하얀 눈 함뿍 쓰고 가을떡 돌리는 소녀가 있었다


더운 김 모락모락 오르는 방금 쪄낸

붉은 수수떡,


나풀거리는 석유등 불빛에

살짜기 드러난 그녀의 뺨도 한껏 상기되는 밤이었다



해바라기 사랑



해를 맞듯

당신 만납니다


해를 보내듯

당신 보냅니다


오늘도 난

해바라기


지는 해

바라보다

꽃잎 하나 떨굽니다


당신

뜰 앞에

 


충남 예산 출생. 1993년 《시와시학 》으로 등단

시집 『아버지는 힘이 세다』『감꽃 피는 마을』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비 내리는 소래포구에서』

『루루를 위한 세레나데』가 있음. 시와시학상 동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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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 모음 38


1.가을 편지 /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2.가을을 보내며 / 고정희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한 잔에서 목 축이지 못하는 오늘은
우리들 겸허한 허리를 구부려
서로의 잔에 그리움을 붓자
서로의 잔이 넘치게 하자

 


3.강가에서 / 고정희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쪽 둑 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 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 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여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4.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 고정희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새벽에 당신 사는 집으로 갑니다.
깨끗한 바람에 옷깃을 부풀리며
고개를 수그러뜨리고 말없이 걷는 동안
나는 생각합니다.
어제 부친 편지는 잘 도착되었을까
첫 줄에서 끝 줄까지 불편함은 없었을까
아직도 문은 열어두지 않았을까
아예 열쇠 수리공을 부를까
아니야, 그건 일종의 폭력이야
새벽에 어울리는 단정한 말들만이
내가 그에게 매달리는 희망인가?
신은 그 희망으로 목걸이를 약속하셨지
눈물로 혼을 씻는 자에게만 주시는 목걸이
아침이슬이 몸에 오싹하도록 걷고 또 걸어
나는 당신 집 앞에 발걸음을 멈춥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문은 굳게 닫겨 있습니다.
삼백여든아홉 번째 부자를 누르지만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품속에 간직한 초설 같은 편지 한장
문틈에 꽂아놓고 하늘을 봅니다.

5.겨울 사랑 / 고정희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 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6.관계 /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 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7.그대 생각 / 고정희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가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8.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 고정희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 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 앞에 드넓다

9.꿈꾸는 가을노래 / 고정희

들녘에 고개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10.날개 / 고정희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 기운에 구워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 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성신 술잔 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 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 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 보고
덜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인두 질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선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 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11.남남북녀 사랑노래 / 고정희

우리는 꿈꾸네 한사랑 꿈꾸네
둘이 살다 하나 되는 큰세상 꿈꾸네
기쁨이면 나누고
고통이면 맞들어
우리는 꿈꾸네 한살림 꿈꾸네
우리는 길을 가네 한겨레 길을 가네
둘이 가다 하나되는 한민족 길을 가네
힘든 길은 의지하고
험한 길은 쉬엄쉬엄
우리는 길을 가네 통일의 길을 가네


12.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 고정희

고요하여라
너를 내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 버스 속에서도
추운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이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속에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둘 트인 것 이 보이고.

13.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14.노여운 사랑 / 고정희

가을바람과 옷깃을 스친 뒤 세상이 지루하여
낮술을 마셨습니다
쨍그렁 소리가 나는 빈 술잔에 칸나꽃대 같은
노여움을 따라 부으며 꿈에 본 수미산도 잠기게 하고 날개
달린 낮 달도 띄워 당신 생각 단풍으로 아롱지도록 술잔을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15.들국 / 고정희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친구가
경기도 들녘에서 꺾어온
들국 한아름을 꽂아놓고
불현듯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그것은 시골에 그냥 핀 들국이 아니라
고향을 다녀올 때 본
어머니의 망연한 눈빛 같기도 하고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수유리에서 해남쯤으로 떠도는
못다 핀 망령들의 이름 같기도 하고
좀더 길게 음미하노라면
서른아홉 살의 목숨을 거두고
두 마리, 빈곤을 상징하는 노새에 끌려
아틀랜타 시가지를 빠져나가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를 따르던 흑인영가 같기도 하고

16.따뜻한 동행 / 고정희

해거름녘 쓸쓸한 사람들과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봄 눈 파릇파릇한 숲길을 지나
아득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이십도의 따뜻하고 해맑은 강물과
이십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이
서로 겹쳐 흐르며 온누리 껴안으며
삼라의 뜻을 돌아 내게로 왔네
사흘 낮 사흘 밤 잔잔한 강물 속에
어여쁜 숭어떼 미끄럽게 춤추고
부드러운 물미역과 수초 사이에서
적막한 날들의 수문이 열렸네
늦게 뜬 별 둘이 살속에 박혔네
달빛이 내려와 이불로 덮혔네
저물 무렵 머나먼 고향으로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외로운 사람들의 낮과 밤 지나
기나긴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사십도의 따뜻하고 드맑은 강물 위에
열 두 대의 가야금소리 깃들고
사십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 위에
스물 네 대의 바라춤이 실렸네
그 위에 우주의 동행이 겹쳤네.

17.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18.묵상 / 고정희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19.베틀 노래 / 고정희

내 땀의 한 방울도 날줄에 스며
그대 영혼 감싸기에 따뜻하거라
고즈너기 풀어감은 고통의 실꾸리
한평생 오가는 만남의 잉아
우리님 생각과 실실이 짜여
새벽바람 막아줄 실비단이거라
기다리마 기다리마 기다리마
하루에도 열두 번 끊기는 실이여
무작정 풀리기엔 무서운 맘이거든
단번에 끝내기엔 아쉬운 밤이거든
허천들린 사랑가
평생 동안 불러주마
기다리다 흘린 눈물 모조리 스며
그대 아픔 덮어주는 비단길이거라

20.봄비 /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21.사랑 법 첫째 /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22.사십대 /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23.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다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24.시의 숲에서 세상을 읽다 / 고정희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25.시인 / 고정희

그대 눈썹 밑에 흐르는
미시시피 물안개에 사흘을 넋잃다
그것을 가지면 밥이 되고
갖지 않으면 돌이 된다

26.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
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
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오는 날은 비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27.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고정희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28.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 고정희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줄을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선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기다림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오 년 묵은 상처도 뽑아넣고
칠 년간 미련이며
구 년된 슬픔도 다져넣고
참나무숯불에 괄게괄게 달이니,
아 사랑의 길눈 밝아지고 있는지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스무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습니다.


29.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30.연가 戀歌 / 고정희

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
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
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
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
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뎁히고
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
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
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
내 안에 서걱이는 한 무더기 공허
한 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
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
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
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
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
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
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
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
물그르매 번쩍이는 너

31.전보 / 고정희

그대 이름 목젖에 아프게 걸린 날은
물 한잔에도 어질머리 실리고
술 한잔에도 토악질했다
먼 산 향하여, 으악으악
밤 깊도록 토악질했다

32.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33.천둥벌거숭이의 노래 1 / 고정희

지도에도 없는 숲길을 갑니다
태양이 호수에서 금발을 흔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바하의 악보를 오솔길에 깔았더니
무반주 첼로의 서늘한 그림자가
지구의 머리칼에 고요히 걸립니다
내가 당도할 문은 아직 멀었습니다
숲에 별 뜨고
바람 부는 밤
모든 언어에 빗장을 지른 뒤
찔레꽃 향기가 심장을 가릅니다
어둠뿐인 하늘에 당신을 그립니다
오늘밤은 이것으로 따뜻합니다

34.파도타기 / 고정희

둥근 젖무덤에 보름달 떠올라 하룻밤 사무치자 하룻밤 사무치자
팔 벌린 그 밤에 동쪽 샘이 깊은 물에 보름달 주저앉은 그 밤에
느닷없는 부드러움이 두 가슴을 옥죄이던 그 밤에
깊고 푸른 밤이 불을 켜던 그 밤에
사십도의 강물이 범람하던 그 밤에
불꽃춤 찬란하던 그 밤에
서해안의 파도소리 하얗게 부서지던 그 밤에
물미역 아름답게 흔들리던 그 밤에
별들이 내려와 드러눕던 그 밤에
새벽 달빛 호호탕탕 넘어 가던 그 밤에
아아 아홉가지 봉황깃털 창궁에 자욱한 그 밤에
그대와 나 수미산 꼭대기에 떠올라 우주와 교신하던 그 밤에

 
35.편지 / 고정희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 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36.포옹 / 고정희

사랑하는 사람이여 세모난 사람이나 네모난 사람이나
둥근 사람이나 제각기의 영혼 속에 촛불 하나씩 타오르는
이유 올리브 꽃잎으로 뚝뚝 지는 밤입니다

37.하늘에 쓰네 / 고정희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38.호박 / 고정희

호박이 익었다
우리나라 땅에서만 자라온
토종호박들이
불볕 더위 아래 이리 딩굴 저리 딩굴
누릿누릿 호박이 익었다
조선땅 어디서나 흙에 심기만 하면
토담이고 울타리고 쑥쑥 뻗어올라
못생긴 꽃타래를 피워내고
하대받는 풋호박을 주렁주렁 달아
놀고먹는 건달들이 쿡쿡 찔러보는
토종호박
흉년 들면 서민들의 밥이 되고
난세에는 마적떼들의 죽밥이 되는
조선 토종호박이 익었다
호박은 호박인 탓으로, 그러나
손톱에 할퀸 데는 할퀸 자죽을 내고
도리깨질 당한 데는 당한 자죽을 내고
군화발에 밟힌 데는 밟힌 자죽을 내고
철사줄에 묶인 데는 묶인 자죽을 그대로
지난 아픔 그대로
또렷이 익어버린 조선호박,
삼천리의 밥인 호박
케이농장에서 호박이 익었다
노릿노릿 뭉실뭉실
호박이 익었다
엿 해먹기 좋은 호박이 익었다
에잇, 엿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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