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무덤
아내여 내가 죽거던
흙으로 덮지는 말아 달라
언덕 위 풀잎에 뉘여
붉게 타는 저녁놀이나 내려
이불처럼 나를 덮어다오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보게 하라
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
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
흙으로 묻을 가치가 없어
피 묻은 놀이나 한 장 내려
덮어 두었노라고
살아서 좋아하던 풀잎과 함께 누워
죽어서도 별이나 바라보라고
바람 속에서
산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바다로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나무에게 가는 길이
별에게 가는 길이
나에게 가는 길이다.
나의 길에 바람이 분다.
바람은 늘 산에 있고
바람은 늘 바다에 가득하고
바람은 나무 끝에 먼저 와
그 곳에 서 있다.
나의 길은 바람 속에 있다.
잎새 끝에는 언제나
새벽 별이 차갑게 떨고
바람은 길에서 나를 울렸다.
별의 아픔
내가 지금 아픈 것은
어느 별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밤늦게 괴로운 것은
지상의 어느 풀잎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토록 외로운 것은
이 땅의 누가 또 고독으로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의 외로운 별과 나무와
이 땅의 가난한 시인과 고독한 한 사람이
이 밤에 보이지 않은 끈으로나
서로 통화하여 앓고 지새는
병으로 아름다운 시간이여.
빈산이 젖고 있다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너무나 무거운 허공
산과 신이 눈뜨는 밤
핏물처럼 젖물처럼
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
별의 무리
죽음의 눈동자보다 골짜기 깊나
한 강물이 내려눕고
흔들리는 등잔 뒤에
빈 산이 젖고 있다.
큰 노래
큰 산이 큰 영혼을 가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별을 보며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나무에게
내 귀를 네게 묻는다.
듣는 사람아
하늘을 듣는 사람아
그대 시인이여.
너의 가슴에서 플룻을 듣는다.
내 안으로 깨어오는
또 한 사람이 들린다.
진실한 언어의 발소리
나무야
이 저문 땅의 빈자여
함께 걸어가다오.
네 안의 아름다운 자가
별이 이고 춤추는 자가
나를 걸어가는 동안
나는 너의 세계를 가고 있다.
나무야
함께 걷는 시간에
나는 문득
너의 뒤에서
알 수 없는 강물을 건너고 있다.
문답법을 버리다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 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여름비
대낮에 등때기를 후려치는 죽비소리
후두둑
문밖에 달려가는 여름 빗줄기
고요하다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물 곁에 있다는 것
우리가 눈을 뜬다는 것은
귀가 깨어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것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새벽 들판의 풀잎처럼
언덕 위 나무처럼
별 아래 함께 서 있는 것
봄밤
나귀의 귀 속에 우물이 있네
우물 안에 배꽃이 눈을 뜨네
마음에 숨은
당신 찾아가는 길
나이 먹어도 나 아직 젊어라
백담사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돋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
티베트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도
그의 영혼은 길가에 핀 풀꽃처럼 눈부시다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나비는 푸른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처럼 맑은
얼굴로
아침 정원을 산책하며
작은 날개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한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달 피리는 혼자 숲나무 위를 걸어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새처럼 가난하고
나비처럼 신성할 것
잎 떨어진 나무에 귀를 대는 조각달처럼
사랑으로 침묵할 것
그렇게 서로를 들을 것
구도(求道)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줄어들면서
그는 차츰 자신을 줄여갔다
꽃이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침묵으로 몸을 줄였다
하나의 빈 그릇으로
세상을 흘러갔다
빈 등잔에는
하늘의 기름만 고였다
하늘에 달이 가듯
세상에 선연히 떠서
그는 홀로 걸어갔다
도반(道伴)
벽에 걸어 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 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초암(草庵)에서 - 山詩40
사람이 오래 가지 않은 암자가
풀잎 속에 쓰러지듯 앉아 있다
누구를 향해선지 밖으로 난 작은 길 하나
스님은 달빛 길을 쓸지 않는다
경계가 없는 경내
잎사귀들은 제 살을 먹여 벌레를 기르고
저녁이 와도 산은 스스로
문을 닫지 않는다
단지 산 안에 산의 파도가
흐린 안개 속에 잔다
벌레
꽃에는 고요한 부분이 있다
그곳에 벌레가 앉아 있다
쇠별꽃 - 山詩26
흙길을 가다가 본다
발자국이 남아 있다
발자국
들여다보니 놀랍구나
사라진 얼굴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찾았다 잃어버린 사람
쇠별꽃 내음
강물
새학기 교실에
지난해의 아이들이 가고
지난해만한 아이들이 새로 들어왔다
떠들고 웃고 반짝인다
이 반짝임은
지난해 그랬고 그 지난해도 그랬고
그 전 해 그리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이 교실은 해마다
요만한 이이들이 앉았다 간다. 웃고 떠들고 침묵하고
흘러간다
교실은 아이들이 흐르는 강이다
나는 강의 한 굽이에 서서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山詩 5
당신을 껴안고 누운 밤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돌 하나 품어도
사리가 되었습니다
산길
산길은 산이 가는 길이다
나의 몸은 내가 가는 길
모자 쓰고 저기 구름 앞세우고
산이 나설 때 그 모습 뒤에서
길은 우뢰를 감추고 낙엽을 떨군다
산의 가슴속으로 絃처럼 놓여서
바람이 걸어가도 소리가 난다
새가 날아도 자취를 숨긴다
그것은 또 소 뿔에도 걸리지 않는
달이 가는 길
바람에 씻지 않은 발은 들여놓지 않는다
귀와 눈이 허공에 뜨여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눈 오는 저녁을 간직한다
산이 나에게 걸어올 때
산길은 내 안에 있다
새
새는 산 속을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미시령 노을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반달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눈이 온 다음 날 비치는 햇살
눈이 온 다음 날 솔잎에 빛나는 햇살
산협에 내려와 두근거리는 하늘
가지의 속삭이을 비추는 조용한 물빛
거울 속에 담긴 한르을 차고 날아가는 새
새소리 새소리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소리
물소리 물소리 사이로 젖는 향기
나무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새 - 山詩14
새는 산 속을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겨울 산 - 山詩13
겨울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홀연 놀란다
나무는 오간 데 없는데
나 혼자 나무 향기를 맡는다
반달 ― 山詩19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가을 편지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소포
가을날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 아래
노란 들국화 몇 송이
한지에 정성들여 싸서
비밀히 당신에게 보내드립니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그 향기며 꽃을 하늘이 피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띄우고
차가운 새벽 입술 위에 여린 이슬의
자취없이 마른 시간들이 쌓이어
산빛이 그의 가슴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는 정작의 이유는
당신만이 이 향기를
간직하기 가장 알맞은 까닭입니다
한지같이 맑은 당신 영혼만이
꽃을 감싸고 눈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추워지고 세상의 꽃이 다 지면
당신 찾아가겠습니다
다리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흔적
꽃이 문을 열어주기 기다렸으나
끝까지 거절당하고
새로 반달이 산봉에 오르자
벌레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반만 먹고 그 부분에 눕다
달이 지고
서릿밤 하늘이 깊었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을 때
산이 혼자 그림자를 내려
꼬부리고 잠든 그의 등을 덮어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친 바람 한점 없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레는 사라지고
그 자리 눈물 같은
이슬 두어 방울만 남아 있다
흔들림에 닿아
가지에 잎 덜어지고 나서
빈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리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입동
잎이 떨어지면 그 사람이 올까
첫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올까
십일월 아침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물 핑 돌아 하늘을 쳐다본다
수척한 얼굴로 떠돌며
이 겨울에도 또 오지 않을 사람
나무 안의 절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달을 먹은 소
저무는 들판에
소가
풀을 베어먹는다
풀잎 끝
초승달을 베어먹는다
물가에서 소는
놀란다
그가 먹은 달이
물 속 그의 뿔에 걸려 있다
어둠 속에
뿔로 달을 받치고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제 모습 보고
더 놀란다
복사꽃
봄날 길 없이 온 너는
갈 곳 없어 더 화안하다
몸 찾은 곳이
달 뜨는 쪽 아니다
저 깊은 가지
허공에 피어 허공을 물들이는
너 목숨 저물면
거기 그냥 사그러져라
잠들 때 꽃은 가장 상기되는 시간
향기도 슬픔도 너의 것 아니다
무심히 내게 던진 그늘에
그분 피가 붉게 섞여 있다
숨은 산 - 山詩33
땅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들다가
그 밑에 작게
고인 물 속
산이 숨어있는 모습
보았다
낙엽 속에
숨은 산
잎사귀 하나가
우주 전체를
가렸구나
이성선(1941~2001)
강원도 고성 출생
고려대 농학과 및 교육대학원 졸업 (1967)
문화비평에 시 시인의 병풍 외 4편으로 등단 (1982)
2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90)
6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1994)
1회 시와 시학상 수상 (1996)
시집,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1985)
하늘문을 두드리며 (1987)
별이 비치는 지붕 (1987)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2000)
산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