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 시모음

 

시 쓰는 남자  /  박소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대로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듸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이명(耳鳴)  /  박소란

 

그의 귓속에 작은 집 한 채 짓고 싶었네

꽃 피고 잎 돋아 무성한 한때

몇 마리 이름 없는 새들 약속처럼 날아와

알을 품고 기르듯

우묵한 둥지 하나 틀고 싶었네

긴 한숨이 그의 몸을 들고 날 때마다 더욱 아득해지던

어느 기슭, 꿈꾸듯 홀로 누워

검게 충혈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이내 바스러져 내릴 듯한 마음의 지푸라기들

그를 지탱해온 시간의 여린 어깨들

가만가만 토닥여주고 싶었네

그의 바깥을 맴돌던 노래 죄다 불러들여 놀아도 좋을

다정한 집 한 채

나는 그 속 헛것처럼 앉아 오래오래

알을 품고 싶었네

빛을 문 새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일어나

축포처럼 환한 울음 터뜨릴 때

나도 따라 울고 싶었네

언젠가 닿지 못한 말, 그 한마디

오랜 잠을 떨치고 와 마침내 훨훨 날아오를 때까지

끝없는 환열로 먹먹히 차오를 때까지

오래오래 울고 싶었네

 

주소  박소란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배가 고파요  /  박소란

 

삼양동 시절 내내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

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어느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을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

그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대책 없이 나는 살이 오를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요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노래는 아무것도  /  박소란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채 실려간다

한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다음에  /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다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시시한 시  /  박소란

 

결국 이런 시를 쓰게 될 줄 알았지

오오 이토록 시시한, 으로 시작되는 시

채 첫 연을 읽기도 전에 당신은

당신의 예민한 손가락은 책장을 덮어버릴지도 몰라

이를테면 이런 것 도무지 시적이지 않은 것

아침마다 당신이 사는 동네를 지나는 만원 버스

나는 늘 그 꽁무니나 죽어라 쫓는 거지

맨 끝 좌석엔 당신을 닮은 누군가 팔짱을 끼고 앉아

졸음이 잔뜩 묻은 뒤통수나 하릴없이 흔들고

그 지극히 사소한 모양으로 내 심장은 뛰지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할 때까지 그리고 문득 야근할 때까지

놓칠 게 뻔한 버스를 저만치 앞에 두고

온종일 나는 시시하지 너무 시시해 가끔은 눈물이 나

느닷없이 밀려오는 허기처럼 허기보다 먼저 구겨진 가방 속 빵봉지처럼

안 된 일이지만 내 평생이 이 따위 한낱 관용구로 채워지리라는 사실

무미한 혼잣말이나 읊조리며 종점을 향하리라는 사실 뻔하디 뻔한

일들만이 나를 놀라게 하겠지 그래 일찍이 나는 알았지

이런 시나 쓰게 될 줄, 오오 이토록 시시한, 으로 끝나는 시

끝나지 않는 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 시가 대체 어느 누굴 흔들어 깨울 수 있다는 건지 그래서 당신은

흔들렸다는 건지 어쩌다 잠시 잠깐

노선에도 없는 여기 변두리에 정차한 당신은 왜

 

정전(停電)  /  박소란

 

옆방 102, 그 아무개를 알게 된 건

어느 이슥한 밤의 일

해독할 길 없는 어둠과 어둠 사이

아득한 적요로 우거진 공중(空中) 불현듯

콘크리트 벽 저편으로부터 내솟는

한 줄기 거센 오줌발,

이는 분명

산 자, 살아 펄떡이는 자의 소리

기원을 잃어버린 어느 짐승의 긴한 울음 소리

어쩌면 그는

오랜 맨눈으로 뒤척이다 깨어 속수무책

이 밤의 맹기를 견디는 자임을

길을 헤매던 낮 속에 피 흘리고 상처 입은 자임을

그래, 어쩌면 그 또한

황야의 낯선 동굴을 홀로 찾아들 듯

이역의 단칸방에 불을 놓고 허성한 밥상을 차렸으리

그 위 한 그릇 식은 밥이 남몰래 꾸역꾸역 몸살을 앓았으리

벌거벗은 한 줄기 굉음은 방 안 가득

뭉클한 미명을 드리우고

굳게 걸어 잠근 이부자리 한 켠 제풀에 어려 흥건한데

이제 나는

쇠한 짐승의 마지막 발톱을 세워 똑 똑

그 벽에 노크를 하니

거기 있습니까

웅크려 흐느끼던 집들 반짝 고개 들어

도시의 하늘을 올려다 볼 때 총총히 여문 귀를 가져다 댈 때 거기,

거기 잘 있습니까

 

오래된 식탁   박소란

 

어떤 나무의 시체일까

우리는

지금 여기 앉아 밥을 먹는다

그만 먹어 그러다 체하겠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무서워

무서워서

밥을 먹는다

지긋지긋해 이까짓 먹는 얘기 먹고사는 얘기

사귀자 우리, 별안간 고백을 하면

체하겠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무서워서

너는 덥석 손을 잡겠지 다른 한 손에 숟가락을 꼭 쥔 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개라면, 겁에 질려 맹렬히 짖어대는 창밖 저것이

사랑이라면

참 재밌다

우리는

지금 여기 앉아 웃는다 앙상한 꼬리를 흔들며

그만 웃어 그러다 울겠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어디선가 자꾸만 썩는 냄새가 나

어떤 나무의 시체일까,

우리는

지금 여기 앉아 밥을 먹는다

식탁은 깨끗하고 아직 식탁 위 그릇은 허연 김을 피워 올리고

우리는 밥을 먹는다 죽기 전에 어서

울면서 먹는다

달아나는 저 개를 붙잡을 수 없다

 

아아, /  박소란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등  박소란

 

등이다

앓는 이의 등이다

등을 문지른다

흰 수건을 차게 적셔 열증의 등을 가만가만

문지르다 보면

뜨거운 살가죽으로 문이 하나 날 것 같고

그 작다란 문이 열리기를

나는 오래 기다려 온 것만 같고

문 저편

알 수 없는 곳으로 간다면

갈 수 있다면

천장이 낮고 구들이 망그러진 한 칸 방에 들 텐데

늦도록 남루를 밝히는 그곳 어진 불을, 이제 그만

나는 끌 텐데

엎드려 잠이 든 건지

등은 그러나

이렇다 할 기척도 없이

두꺼운 침묵의 벽을 쌓아올리고

열은 가시지 않는다

젖은 뺨을 살며시 가져다 대면

시름없이 고개를 떨구듯 다만 노크를 하듯

- -

누구 없나요? 타는 허공을 재차 두드리면

등이다

사랑하는 이의 등이다

등을 문지른다, 가만가만

아무도 아프지 않은 곳이다

 

울음의 방  박소란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 아주 사소한 흐느낌조차

울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 그때는 스무 살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제출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 되어

조금씩 꼬깃해져가는 표정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고서 가까스로

열어젖힌 싸구려 자취방은 더없이 고요해

너무 낮고 너무 어두워 울음은

다름 아닌 여기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타들어갈 때마다 기꺼이 방문을 열어 준

나의 울음, 엄마가 죽던 밤에도

사랑이 더운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그 방에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아릿한 곰팡내가 명치를 꾹꾹 누르는 방

울음의 방으로 내가 숨어들수록 울음은 아프고

어찌 된 영문인지

울음은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는 물기처럼 어느새 울음은

여기에 살 수 없음을 알았다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갔음을

어디로 갔나 울음은

울음의 빈자리를 오래오래 뒤척이던 나는

후미진 골목 끝

자취방은 헐리고 추진 스무 살도 멀리 달아났으니

어디로,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 나의 울음은

 

돌멩이를 사랑한다는 것  박소란

 

누구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집 앞 과일트럭이 떨이 사과를 한소쿠리 퍼주었다

어둑해진 골목을 더듬거리며 빠져나가는 트럭의 꽁무니를 오래 바라보았다

낡은 코트를 양팔로 안아드는 세탁소를

부은 발등을 들여다보며 아파요? 근심하는 엑스레이를

나는 사랑했다 절뚝이며 걷다 무심코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

너는 참 처연한 눈매를 가졌구나 생각했다 어제는

지친 얼굴로 돌아와 말없이 이불을 끌어다 덮는 감기마저

사랑하게 되었음을

내일이 온다면

영혼이 떠난 육신처럼 가벼워진 이불을

상할 대로 상해 맛을 체념한 반찬을 어루만지기로 한다

실연에 취한 친구는 자주 울곤 했는데

사랑은 아픈 거라고 때때로

그 아픔의 눈물이 삶의 마른 화분을 적시기도 한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어째서 나는 이토록 아프지 않은 건지

견딜 만하다, 덤덤히 말한다는 것

견딜 만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텅 빈 곳으로의 귀가를 재촉한다는 것

이 또한 사랑이 아닐까 궁지에 몰린 사랑,

그게 아니라면

도리가 없다는 것 더이상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우연히 날아온 무엇에라도 맞아 철철 피 흘리지 않을 도리가

 

()  /  박소란

 

누군가의 벗은 몸을 마주할 때면 멍에 가장 먼저 닿는다

등이나 허벅지의 구석진 곳에서 저도 모르게 치러지는 장례,

그 선연한 현장이 나를 이끈다

같이 밤을 보낸 이가 차려낸 아침상에도 한무더기의 시신은 떠오른다

애도를 기다리느라 잔뜩 핏발 선 고등어의 눈이나 찢긴 살갗으로 비어져 나온 시금치의 부패한 내장 같은 것 양식인 척 과묵을 지키는 것

애써 태연한 얼굴로 한점 두점 질겅이다 보면 잘못 쓴 무덤처럼 스멀스멀 입 안에 붉은 물이 차오른다

길을 나서면 숨진 비둘기가 나를 반긴다 찢긴 날개를 움켜쥔 채 바짝 짓눌린 새, 새였던 그 무언가 난해한 자세로 안부를 건넨다

그럭저럭 지낸다고 나는 대꾸한다 상복을 입은 바람이

흠칫 곡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다본다

차들이 마구 달려들고 난데없이 공사장 벽돌이 코앞에 떨어져

자주 걸음을 떨곤 하지만 나는 잘 지낸다고

석연치 않다는 듯 곁을 살피는 죽음을 외면하고 돌아온 다음날이면

멍은 내게로 관을 옮긴다

멍든 자리를 잠시 쓰다듬었을 뿐인데 어느새 속이 거멓게 타버린 날계란,

산 채로 화장당한 그것을 나는 또 잠자코 먹는다

 

감상  /  박 소 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알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킬 때

마침내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제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벽   /   박소란

 

슬퍼 모로 누웠을 때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

하나의 벽이 있었다

언제부터

벽은 거기에 있었나

벽에 기대어 생각했다

벽의 아름다운 탄생에 대해

벽은 온화하고 벽은 진중하니까 벽은 꼭 벽이니까

슬픔을 멈추고 나는 잠시 축배를 들었다

그때

벽에서 새어 나온 비밀스러운 속삭임

, 아침이 오고 있어

빛이 스며드는 베란다를 훔쳐보다 얄브스름한 커튼을 매만지다

그래 내일은 커튼을 바꾸자

조금 더 두껍고 견고한 것으로

벽 쪽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불길한 꿈이 찾아들었다

벽이 무너져 엉엉 우는 꿈

누가

벽을 부수었나 대체 누가

놀라 눈을 떴을 때

아침이 왔다 벽은

색색의 이지러진 얼굴을 감추며 어디론가 황급히 달아나버리고

누가, 그 누가

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왔다

 

초여름  /  박소란    〈나의 시를 말한다〉


몇 주 전 당신이 삶아두고 간 고구마를 오늘에서야

냉장고 구석에서 발견하고는

망설이다 먹는다 남김없이 먹고 병이 좀 나기로

무슨 일 때문인지 당신은 잔뜩 화가 났는데 어스레한

뒷모습으로 있다 끝내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갔는데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는다

장롱 옆 선풍기를 끌어다 단 바람을 조금 쐬고 눈을 감는다 어쩐지

슬픈 꿈이 밀려들 것 같아

지난 계절의 추위를 벗지 못해 아직도 스웨터를 꺼내 드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무래도 우스운 사람이다 나는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는다 시금달금한 맛이 혀끝에 닿을 때마다

고구마는 얼마나 소박한 음식인가

곱씹게 된다 세상의 쉬어빠진 것들을 가만히, 그리게 된다

이것을 다 먹고 나면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여기 그늘진 방에도 이제 막 여름이 오려 한다고

 

나프탈렌 / 박소란

 

조금씩 멀어지는 일 옷장에서

신발장에서 불안이 눅눅히 번진 이 방에서 도시에서

끝내 무용한 얼굴로

지상의 외딴 그늘에 숨어

두꺼운 한 권 책을 읽는 일

어떤 사소한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는 책을

우연처럼 찢겨 나간 페이지에 이르러 잠시 웃음을 머금는 일

울음이 다 닳도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안녕을 연습하는 일

더듬더듬 뜻 모를 문장들을 앓다 보면

자꾸 벌레에 물리고 벌레는 나를 사랑해,

사랑해 말하면

모두들 슬그머니 달아나

끝내 무용한 얼굴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

내가 만든 이별의 냄새를 내가 맡는 일 잠시

쓰디쓴 웃음을 머금는 일

 

무가당통밀빵을 샀다 / 박소란

 

가방에 한 덩이 빵을 짊어지고 온종일 거리를 쏘다녔지 지퍼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묘하게 살고 싶어지는 냄새 그러고 보니 빵집 여주인은 건강에 좋다는 무가당통밀빵을 먹어 봐요 권했었네 주름투성이 건포도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하고 순간 나는 잠시 행복할 뻔했지 온기를 들이마신 밀가루처럼 노릇노릇해져 살뜰한 살림을 흉내 내기도 했네 식탁에 빵을 올려둔 채 잠자리에 드는 것 아침에 일어나 저 빵을 먹어야지 하면서 내일에 대한 지극한 맹세랄까 하면서 이런 게 사는 맛일 테지 이스트를 쏟아부은 구름이 꿈속 가득 피어나 궂은 나날을 견뎌 볼 요량으로 뭉게뭉게 부푼 빵을 뜯어먹고 최선으로 살이 찔 요량으로 언젠가 빵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빵집이 없는 동네를 나는 살 수 없겠지 정다운 목숨들이 가지런히 놓인 그 집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먼 곳으로 먼 곳으로 가는 나를 빈 가방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뒤도 돌아보지 않는 무심을 어쩌면 주린 듯 몹시도 집어삼키곤 했지만

 

/ 박소란-

 

당신,

버스로 신촌을 지나다 보았어요 이승의 저녁을 하얗게 밝힌

연세장례식장 그 바로 곁에 스타벅스가 생겼더군요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장례식장 입구엔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야윈 등을 웅크린 채 벌벌 흐느끼고요

향탁 위 이내 사그라질 듯 위독한 연기처럼

노천의 낯익은 어둠이 그녀의 어깨를 살그머니 쓸고 있네요

언젠가 홀로 빈소를 지키며 꾸역꾸역 말아넘긴 탕국이

목구멍 깊숙이 염습한 울음이

이제 와 문득 가슴팍에 걸려 미어지려 할 때

제발 아무나 다가와 탁탁 등이라도 좀 두드려주면 싶을 때

당신, 내 속에 봉안해 둔

오랜 영정을 열고 수천수만 겹의 빛으로 몸 일으켜

달큰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카페라떼나 마끼아또를 내민다면

그래준다면 나는

두 손으로 경건히 그 잔을 받아들고 싶어요 당신의 전부를

품 안 가득 진설하듯 온 숨을 다해 들이켜고 싶어요

두 번 다시 당신과 내가 한 테이블에 마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조차

Chic하게 음미할 수 있을 때까지 당신,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살아 남겨진 자의 일이란 고작

이 뿐, 의 빈 잔을 앞에 두고 더디 더디 시간을 버텨내는 뿐

 

아현동 블루스 / 박소란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불현듯

쇼윈도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나는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거짓말처럼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 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 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그러면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아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 벌

쇼윈도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

 

미자 / 박소란-

 

밤의 불광천을 거닐다 본다 허허로운 눈길 위

미자야 사랑한다 죽도록, 누군가 휘갈겨 쓴 선득한 고백

비틀대는 발자국은 사랑 쪽으로 유난히 난분분하고 열병처럼

정처없이 한데를 서성이던 저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미자,

적멸을 드리운 세상의 모든 상처 곁에 격렬히 나부끼던 이름

미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떠나갔을까

부패한 추억의 냄새가 개천을 따라 스멀거리며 일어선다

겨우내 그칠 줄 모르고 허우적대던 절름발이 가랑눈과

그 불구의 몸을 깊숙이 끌어안아 애무하던 스무살의 뒷골목

여린 담벼락마다 퉤보란 듯이 흘레붙고 싶었던

지천한 허방 속 야생의 짐승처럼 똬리를 틀고

아귀 같은 새끼들을 싸지르고 싶었던

내 불온했던 첫사랑, 미자는

아직 그 어둔 길 끝에 살고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어쩌면 미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사랑이란 이름의 무수한 날들은 하나같이 사랑 밖에 객사했듯이

눈의 계절이 저물면 저 아픈 고백 또한 다만 질척이는 농담이 되고 말 일

미자는 지금 여기에 없고 사랑하는

미자는 나를 모르고 기어이 내 것이 아니고

 

개를 찾는 사람 / 박소란

 

누구에게나 개는 있습니다

어떤 개는 별안간 사라집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개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개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라진 개를 잊지 못합니다 잊지 못해 병이 들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개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을 버리고,

고작 사람을

개의 보드라운 털과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 같은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는 차츰 개를 닮아갑니다

개처럼 곤히 웅크리거나 또 금세 몸을 일으켜 컹컹 짖곤 합니다

컹컹 울곤 합니다 그 모습을 알아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개는 어디에 있나요 잃어버린 개를 찾는 사람은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을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칠흑의 혀를 빼문

골목을 서성이다 맥없이 주저앉곤 합니다

다시 네 발로 터덜터덜 돌아와 눕곤 합니다

영원을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개로 인해

신은 존재합니다

당신은 왜 개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신이시여 개의 얼굴로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은 사람 곁으로 앙상한 뼈다귀를

입에 문 사나이가 다가와 넌지시 속삭입니다

개는 돌아올 것입니다 개를 찾는 사람에게로

어느 날 문득 예의 희고 기다란 꼬리를 흔들며, 안녕

보이지 않는 개가 한 사람을 유유히 끌고 갑니다

어떤 사람은 별안간 사라집니다

 

정다운 사람처럼 / 박소란

 

화를 내는 것 굳게 팔짱을 끼고 성마른 등을 보이는 것

이제 막 하나의 심장을 받아 소용돌이치는 사람처럼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미안, 하면 눈물이 돈다 처음부터 미안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단지 미안만을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내민 손을 붙드는 것

비 갠 오후 성당 돌담길은 더없이 평온해

세상 마지막 인사인 듯

물기 번진 잎사귀를 매달고 걷는 것

바람이 살랑이고 슬며시 웃음이 고이고 잠시 잠깐 기도를 떠올리는 것

토라졌다 때마침 화를 푼 사람처럼

하늘의 표정은 맑고 사랑에 빠질 듯 자꾸만 찰랑거리고 모든 게 그만 괜찮아

괜찮아, 하면 눈물이 돈다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 이토록 정다운 사람처럼

 

울지 않는 입술 / 박소란

 

입술을 주웠다

반짝이는 입술이었다

언젠가

참 슬픈 노래로군요, 말했을 때 그 노래가 흘리고 간 것은 아닐까

넌지시 두고 간 것은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 아무도 모르게 숨겨 둔 입술

취해 돌아온 날이면

젖은 손으로 입술을 꺼내어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컴컴한 귀를 두고 입술 앞에 무릎 꿇기도 했다

노래하지 않는 입술, 나를 위해

울지 않는 입술

입술에 내 시든 입술을 잠시 포개어 보고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 붉고 서늘한 것을

돌려주어야지 슬픔의 노래에게로 가져다주어야지

내 것이 아닌 입술

여느 때와 같이

침묵의 안간힘으로, 나는

견딜 수 있다

 

p / 박소란

 

빵은 상해가요

중병에 걸린 아가씨처럼 창백한 얼굴로

하염없이 공중을 바라봐요

아가씨는 아직 젊고 아름답죠

고칠 수 없는 병을 두어 더 아름다운 아가씨

그녀는 인간의 병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날은 뜨겁고

병을 앓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거라 생각해요

어차피 빵이니까, 남겨진 빵이니까

그녀는 먼 곳을 떠올려요 보다 천진난만하게

부풀어 오르는 꿈,

미지의 검푸른 빛이

몸 곳곳에 감돌기 시작하면

조용히 그 커다란 눈을 감는 아가씨

부음은 전해지지 않아요

종일 굶주린 누군가

불도 켜지 않은 식탁에 앉아 한 입 빵을 베어 물고,

그러고 나면 조금 아플지도 모르죠

남몰래 아가씨를 사모한 옆 동네 순한 총각처럼

 

모틸 /(박소란)

 

도시의 북쪽 시내버스 정점

간판 한 군데를 대중없이 떨구고 선 저 여관은

외로운 미래를 가졌구나 다리를 절뚝이는 어린 전상병처럼

어둠이 빽빽이 매설된 밤이면 거리를 헤매던 가난한 연인들

간신히 아주 간신히 숨어 사랑을 나눌 테지만

그 사랑은 오래지 않아 고단한 잠 속에 포박될 테지만

가난해서 낙척한 연인이여

꿈에서도 총성은 사그라지는 법이 없지

함부로 난사 당한 채 신음할 뿐 새벽녘

위태한 잠자리에 누워 서로의 시린 등을 맞대어 볼 때

언제 벌써 당도한 오늘을 체념하는 별들의 수척한 얼굴을 건너볼 때

그때는 연인이여 훌쩍 방을 나서면 좋겠네

아무런 목적 없이 첫차를 잡아타 이슥한 골목골목을 헤맨다 해도

오래지 않아 부은 눈을 감추고 혼자서 종점으로 되돌아온다 j해도

나쁠 것 없지 사랑은 그렇게 전사하고 마는 것

서툴게 쌓아올린 붉은 봉분 앞에 서러운 주먹을 움켜쥐곤 하는 것

 

나의 고양이가 되어 주렴 / 박소란

 

검정 비닐봉지 하나 담장 너머로 펄렁

날아갈 때 텅 빈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로

자꾸만 저기로 향하려 할 때

정처 없이 헤매는 마음아

이리 온,

한 번쯤 나의 고양이가 되어 주렴

뜻 모를 젖은 손이 가슴을 두드리는 새벽

슬픔을 입에 문 젖내기처럼 골목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주지 않을래?

집집마다의 비극을 모조리 깨워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

꼬리가 잘린 채 버려진 것들의 잔치를

그러니 이리 온,

나의 고양이야

사나운 발자국이 겁주듯 찾아든 아침

우연히 바닥에 뭉개진 비닐봉지를 맞닥뜨린 행인이 아악!

비명을 지를 때, 정말이지 비닐봉지가

밤사이 웅크려 죽은 한 마리 고양이로 보일 때

아무렇지 않은 척 피를 닦고 일어나 다시

저기로 잠잠히 멀어져 갈

나의 마음아,

제발 이리 온

 

맴맴 / 박소란

 

그 여름의 숲에서 당신은 물었지

낯선 초록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게 물었지

왜 우는가

왜 너는 울어야만 하는가

짐짓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초록 속으로 초록 속으로 쉼 없이 걸어들어가고

당신은 물었지

세상 가장 근심 어린 얼굴로

왜 우는가

무엇이 너를 울게 하는가

나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신발도 가방도 놓고

초록을 한 송이 꺾어 슬며시 주머니 속에 넣었지

오래오래 그것을 길러 볼 요량으로

언젠가 한번은 당신을 초대할 요량으로

당신은 물었지

왜 우는가

왜 우는가

나는 그만 길을 잃고 싶었네, 무성한 초록 속에

당신을 오롯이 남겨 두고

슬픈 일은 모두 사라져

시간이여,

이제 달려간대도 나를 싣고 저 멀리 가버린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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