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소한 날 눈이 옵니다
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
눈이 옵니다
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풍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창문 조금 열고
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
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겨울나무 가지 끝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일이
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
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
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댈 것입니다
산길에서
나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깊은 산 외딴 길섶에
한 송이 이름 없는 작은 꽃으로 피어나리라
혹여, 그대가 한 번쯤
하찮은 실수로
바람처럼 내 곁을 머뭇거리다 지나칠 때
고갤 꺾고 꽃잎 한 장 바람결에 날려 보리라
먼길
한 사날-
진달래꽃 길을 따라 혼자 걸어서
그대 사는 먼 곳 외딴 그 오두막 찾아가 보고 싶네
폭설처럼 꽃 지는 저녁
길 위에 엎어져 영영 잠들어도 좋겠네
꽃신 한 켤레
허리춤에 달랑 차고
보이지 않는 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별 하나가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내 모든 삶은
그 별에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깊은 밤 홀로이 앉아
하늘을 보면
반짝이는 별 무리 사이로
숨은 별 하나가 방긋 눈을 뜹니다
저 하늘 아래에는
저 하늘 아래에는 운동모자 꾹 눌러쓰고
코스모스 꽃길
말없이 걸어가는 소년과
하얀 팔 내놓고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강남역에서 내린 여자
누구였을까 그 여자 강남역에서 내린 여자
내 팔에 기대
달빛처럼 잠들다
화들짝 놀라 내려버린 여자
누구였을까 그 여자 어디선가 한 번은 꼭
본 듯도 한 옆모습
혹은 뒷모습
내 팔을 주고도 얼굴을 못 본 여자
스물아홉 낯선 길목에서 찬비 맞으며
해오라기처럼 목을 빼고 기다리던 여자는 아녔을까
꼭꼭 숨어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던
바보 멍청이 같은 여자
어디로 갔을까 그 여자,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
여수로 갔을까 흑산도로 갔을까
삼천포로 갔을까
강남역에서 내린 빨간 가방을 든 그 여자
내 안의 여자
우체국 측백나무 사이로
바라보던
오렌지색 원피스가 곱던
그녀
까마득한 시간 흘렀어도
그 집 앞 지날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지
그 날 읍내로만 따라왔더라면
그녀는 지금
곁에 있을 텐데
항상 내 안에 있지
그 겨울의 끝
겨울의 끝에서 눈이 옵니다
지난겨울은 참 행복했습니다
연사흘째
어지럽게 봄눈 날리고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에서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해보고
당신을 보냅니다
당신만큼 날
슬프게 해 준 사람 없습니다
당신만큼 날
행복하게 해 준 사람 없습니다
봄눈 내리는 길목에 서서
멀어져가는 당신 뒷모습
바라보다
한 움큼 눈을 뭉쳐 하늘에 던집니다
명희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을 순 없을까
캄캄한 어둠만이 밀려오던 종점 근처
홍합 국물 따뜻하게 뎁혀지던 포장마차
오늘같이 눈 내리는 밤이 오면
세상 어딘가에 토끼처럼 잠들어 있을 눈매 곱던 널
찾아내어
빠알간 숯불에 알맞게 잘 구워진
꼼장어 소라 안주 삼아
독한 소주 한잔 빈속에 털어 넣고
널과 함께 걷고 싶어
그때 우린 참 많이 젊어 있었지
강냉이 빵이 먹고 싶다던 너, 이 밤
어디에 박혀 있니?
강 건너 그대
하늘빛이 흐려서 손 한 번 헐겁게
잡아 보지 못했네
그리워 말 못하고 살아온 지
오랜 지금
강 건너 갈밭머리
반백의 머리칼 날리며 쓸쓸히 웃고 섰는 여인아,
그대 향한 그리움 오늘도
겨울 강둑에
빈 해바라깃대처럼 서 있을 뿐이네
지귀의 노래*
그대의 눈길 한 번만 스쳐도 단숨에
타오를 목숨입니다
하늘에 별처럼 높고 빛나는 그대
감히 사모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모르는 바 아니오나
어이합니까,
생각사록 뜨거워지는 가슴
별똥별 풀꽃처럼 뿌려 쌓는 길섶에서
그대 향기 나는 발소리 기다리다
잠든 가슴 위에
귀하신 팔찌를 벗어 놓으시고 홀연
밤안개 헤치며 사라지신 그대
깊고 넓은 마음 헤아릴 듯합니다
마지막 뼈와 살을 우리어 바치는 불의 마음,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서라벌 산천을 불꽃으로 뒤덮을 때
그대 푸르고 푸른 치맛자락으로
황홀하게도 불타버린 미천한 몸뚱어리를
살뜰히 살뜰히 거두어 주십시오
*지귀는 선덕여왕에 대한 사모의 정이 너무 깊어
끝내는 불귀신이 되었다는 신라의 사내임
너를 기다리며
너를 기다리기
백 년이
걸린다
너를 잊기까지
죽어서 또
백 년이 걸린다
나는 산정에 선
한 그루
나무,
하늘이 푸르다
아름다운 이름 하나
하늘에 작은 별 하나
빛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꽃들이 피어나
밤하늘 밝혔을까
강가에 꽃 한 송이
피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별들이 반짝이며
강물 위에 빛났을까
하늘과 땅 사이에
아름다운
이름 하나,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사무쳐야
내 가슴에 꽃등 하나, 환히 밝을까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이번 여름엔 사랑을 하고 싶다
야한 티 하나 사 입고
낯선 여자와
낯선 거리에서
낯설지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장미는 왜 붉게 피는지
낯선 거리에서 묻고 싶다
그때 그 자리 · 1
줄무늬 스웨터
빨간 치마
고갤 꺾고
마른 잔디 풀만 쥐어뜯던 네
작은 어깨가
조금씩
들썩여서
하고팠던 말
가득해도
말 한마디 못해보고
돌아온
그때 그 자리,
인제는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너 없는
그 자리에
다시 찾아가 앉아본다
첫사랑 그 여자
남몰래
가슴 깊이 묻고 살아도
꿈속에서 불쑥 뛰쳐나와 들킬 것 같아
불안하다
한 세상 살며
가슴 좀 실컷 아파보라고
꿈길마다 찾아와
눈웃음치다
한 발짝
다가가면
살래살래 달아나버리는
그 밤
젖가슴 봉긋이 드러나던
열다섯 그녀는
풀 목걸이 걸고 배시시 웃을 때
볼우물
깊게 파이곤 했다
그 드맑은 우물 속에 퐁당,
청개구리처럼
뛰어들고 싶던 밤이 있었다
초아흐레 연한 달빛이
삼박삼박-
갈잎에 베어져 드러눕던 밤이었다
추운 날
달걀같이 갸름한
달걀빛 얼굴
눈 말간 소녀가 앉았던 자리에
남겨 놓고 간
몇 온스의 온기에
감염-
아차!
정거장을
지나치고 말았네
겨울 밤
오늘처럼 숫눈발 푹푹 쏟아붓는 밤이었을 것이다
사립 밖엔
하얀 눈 함뿍 쓰고 가을떡 돌리는 소녀가 있었다
더운 김 모락모락 오르는 방금 쪄낸
붉은 수수떡,
나풀거리는 석유등 불빛에
살짜기 드러난 그녀의 뺨도 한껏 상기되는 밤이었다
해바라기 사랑
해를 맞듯
당신 만납니다
해를 보내듯
당신 보냅니다
오늘도 난
해바라기
지는 해
바라보다
꽃잎 하나 떨굽니다
당신
뜰 앞에
※ 충남 예산 출생. 1993년 《시와시학 》으로 등단
시집 『아버지는 힘이 세다』『감꽃 피는 마을』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비 내리는 소래포구에서』
『루루를 위한 세레나데』가 있음. 시와시학상 동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