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향 시 모음 55편 

《1》
가슴에 담은 사랑

박소향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사랑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것 가진 것 없어도
마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줄이요.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넓어
채워도 채워도 목이 마르고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고
받고 또 받아도 모자랍디다.

사랑은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소복소복 모아놓고
간직만 하고 있으면 좋은 줄이요.

쌓아놓고 보니
모아놓고 보니

병이 듭디다.
상처가 납디다.

달아 날까봐
없어 질까봐
꼭꼭 숨겨 놓았더니

시들어 갑디다.
힘이 없어 조금씩 죽어갑디다.

때로는 바람처럼 떠나도 보고
때로는 물처럼 흘러도 가고
자유롭게 자유롭게 놀려야 한답디다.

가슴을 비우듯 보내주고
모아둔 만큼 내어 주고

쌓아둔 만큼 내어 주고
죽을 만큼 아파도 안 봐야 한답디다.

아플 만큼 아파야 무엇인지 안단 걸
수 없이 이별 연습을 하고 나서야
알 수 있겠습디다.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디다.


《2》
가을 단상

박소향

나는 너에게
목화 꽃처럼 피어나는
뭉개 구름이면 좋겠다

순백의 향기로
가슴 가득 떠다니는 솜털 같은 기다림과
잊지 않을 사랑 하나
혼자 못할 이별의 아픔이면 좋겠다

먼지 나는 길 위에
나뭇잎만 벗이 되는 쓸쓸한 하늘
눈 속에 멈춰지는 시인의 넋처럼
이니스프리의 호도위로 떠도는 빛

비애로 젖은 물 위에
가슴을 씻어 내리며
나는 또 운다

누군가의 몫으로 거기 남은
목마른 사랑의 빚

슬픔의 껍데기를 계절의 옷처럼 갈아입고
한맺힌 노래를 그리움처럼 부르다가
나는 또 끝내
목메이게 아파할지 모른다

마음 속을 물들이는
가을 숲의 영혼
하늘 밑을 수놓는 낙엽의 수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빛 고운 이 가을
나는 너에게
언제라도 잊지 않을
긴 그리움이면 좋겠다  

《3》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박소향

가을은 어디를 보나 한 장의 아름다운 엽서다.

한 계절 물오른 열매들이
화사한 볼륨을 저리 자랑하는 것도

일찍이 봄부터 돌락 해온
햇볕과의 굳은 약속 때문은 아닐까.

떠나야 할 제 시간을 알기에
작별의 치장 저리 황홀히 하는지 모른다.

목메인 상처도.
알 수 없는 슬픔도
다 거기 내려놓고
가을 빛 만큼 물들 수 있다면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다면

이 가을
난 한 장의 낙엽이어도 좋다.

《4》
고독으로부터

박소향

가슴을 닫은 자의 모든 정열은
다 시시하다

그 순간 네게
고독은 영원히 부재다

세월에 둘러싸여
더 이상 뜨겁지 않은 것들은
문을 닫아라

문틈 사이로 스며들지 모르는
고독을 위하여  

《5》
구월이 오면

박소향

여름날의 조각들이 잘게 부서지는
등굽은 길에 비가 그치면
멧새 앉았다 간 소슬한 자리마다
들국이 피고
바람에 갇혀 우는 갈대 숲도
바보 같은 그리움이 된다는 걸
당신은 안다

홀로 뜨는 정염의 달이
조용히 우는 물결을 포옹할 때
까마득한 정신은 불륜의 섬이 되고
뜨겁게 달아오른 꿈 마져도
죄가 되는 가을
가을이 온다는 걸
나는 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
제 가슴에 하나씩 사랑의 씨를 심는
구월이 문을 열면
차가운 바람의 살을 지나
새하얀 종아리로 언어의 강을 건너던
당신의 가슴이 더 그리우리란 걸
사람들은 안다 

《6》
그대 곁에 있을 동안

박소향

언제까지 나만 바라보리란
바보 같은 믿음에도
힘이 되는 그대

어디선가 꼭 한번
만나야만 하는 물처럼
땅을 짚고 흐르다가
나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며 그리워할
그대에게 흐르는 시간들은
환한 신방에 걸린 노을같이
얼마나 또 그렇게 아름다운지

이유 없이 떠난 길도
겁없이 부유하고
곁에 무심히 흘려놓은 말들도
소중하게 가슴으로
한올 한올 엮어두지

그대 잠시만 침묵해도
먼지처럼 풀풀 눈물이 날리고 

《7》
그대 뒤로 남긴 시

박소향

그대 잠깐 스쳐 가는 바람처럼
설레며 지나는 계절풍이었습니까
이내 가슴이 비어 돌처럼 구르다가
어느 강가에서 이름 없이 잊혀질까
또 그리 하셨습니까

살아감이 힘이 들어
미련은 없다 하지만
이승만큼 더 좋은 곳이라도 찾을까 싶어
쓰디쓴 바람 그 뒤에 멈춘 채
저를 남기신 것입니까

진정 사랑하는 가슴이었다면
헤어지지 말아야지요
그래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쓸쓸한 저녁이 되어도
그대 앞에 저를 두어야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라고
소리내어 한 번
젖은 웃음 남기고 가는
억지스런 그리움이려 했습니까

모르셨습니까
그대 그림자 뒤에서
지나온 발자욱마다
산책하듯 지나치는 거리마다
우리가 주시했던 모든 눈길마다
나는 시가 되고
눈물이 되고 있는 것을…… 

《8》
그대 마지막 그리움이 되라

박소향

어쩌다 한번 슬픈 사랑으로
조각조각 떨어지는 추락의 꿈 하나

비 뿌리는 구름처럼
머리위로 쏟아지려니

한번은 오고야 말 시간들이
혼의 불씨로 남아
그 기다림을 배우라 하네

가슴이야 늘 물처럼 젖어있지만

스치듯 지나가는 사랑 하나가
갈바람 소리에 섞여 떠나가는 걸

아직 눈물은 남아 이름뿐인 그대지만
내 마지막 그리움으로 가슴을 털며 울어주리

고뇌의 시간들이 떠나갈 시간
사반의 십자가 처럼 나는 또 남고

비 뿌리는 길 끝 이쯤에서 그대 오늘도
내 마지막 그리움이 되리 

《9》
그대 지금 견딜 수 없다면

박소향

지금
흔들릴 수 있는 시간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
지금
흔들리는 한 그림자를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

흔들려 본 사람들은 안다
하얗게 언 구름을 들추면
출렁이는 황혼이 커피향처럼 번진다는 것을

그대 지금 견딜 수 없다면
흔들려라 

《10》
그대가 나에게 와서

박소향

가만히 손을 내밀면
내게 했던 그대의 말
먼 가지 끝에
동그랗게 걸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처음이 되게 하던
그대 사랑의 말들

처음 꽃이 되고
처음 별이 되어
잠도 오지 않던 설레임의 밤
먼 곳으로 강이 흘렀다.

꽃씨가 꿈을 꾸는 들길에서
봄이 찬란해지고
눈부신 비가 오롯이
그리움을 자꾸 모으던 시간

병이 날 것 같은 입맞춤
들꽃 지는 언덕에
오래도록 빛이 비췄다.
그대가 나에게 와서

《11》
그대가 있음으로 혼자일 때 아름답다

박소향

혼자 보는 하늘은 깊고 푸르지만
쓸쓸하다
홀로 느끼는 바람은
꽃향기처럼 가슴을 물들이지만
둘이서 느낄 수 없는 투명한 고독이 있다

잠시 머물다 가버린 나그네의 체취처럼
내 마음의 골방에 깊은숨을 남기고 간
그대라는 단 하나의 특별한 이름

혼자 떨어져 있으므로 혼자는
무색의 삶 속에서 채색된 물가으로 날개 짓을 하는
한 마리 새가 될 수 있음이다

더 가질 수 없으므로 혼자는
외로운 아름다움 일 수 있다
더 소유할 수 없으므로 혼자는
침묵에 기댈 수 있는 투명한 눈물일 수 있다

다 채울 수 없는 부족함으로 혼자 남았을 때
둘이 아님으로 느낄 수 있는 목마름의 꽃이
마음의 빈터에 피어남은

그대 거기 있지만
확실히 혼자 이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이리라  

《12》
그대만 한 그리움은 없습니다

박소향

하늘이 열리는 동녁 끝으로
안개가 가득
해 오름을 받치고 선 아침

보헤미안 음악 같은
커피향을 피워놓고
가슴에 얹힌
그대 숨소리를 쓸어 내린다

겨울의 입김이
흔들리는 숨결 한줌 떨구고
어설피 지나가는 창가
수북수북 그리운 그리움에 갇힌다

무채색의 소낙비가
철못든 인연 모두 날리는데
불어난 그리움 추스릴수 없어
하얗게 칠해버린 피안의 세월이여

차가운 외등이
홀로 불을 켜는 또 밤이오면
그대 향한
아름다운 분노가 시작된다

가까워서 더 그리운 사람
그대 때문에……

《13》
그대에게

박소향

살아있는 것이
내게 힘이 되는 그대
하지만 때로
반쯤 나는 죽은 듯이 산다.

반쯤 눈 가리고
반쯤 귀 막고
반쯤 입 닫고
감각을 잊은 듯이 그렇게

붉게 익어 터져야 할 계절에
넋 놓고 매달린 풋과일처럼
무던히도 철 못 드는 마음

내 마음 빈곳에 그대를 담지만
문득문득
한없이 열리는 나를 닫아주곤 한다.

눈 다 뜨면 모습 보이지 않을까
귀 다 열면 목소리 듣지 못할까
말 다 하면 그 맘 혹 닫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반쯤만 열어놓은 창안으로 그댈 맞는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도 숨 쉴 수 있도록

《14》
그대에게 띄움

박소향

누군가를 울렁이게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불행한 거라고
보리 섶의 연기처럼 피우다 만 편지 한 장
백지에 써 보았는가.
겨울비보다 더 외로운 새벽 기차소리가
차가운 명암을 달고 모질게 지나가는
낯선 방의 창가에
우수수우수수 녹슨 설레임이 쌓이고
나는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은 아침에
잃어버린 자아를 추스리며
아직도 몸 사리고 있는 사랑을 믿는가
남은 그 백지에 써 보았는가
그리고
그간 갖지 못했다고 말했던 모든 것은
내 안에 이미 있었단 걸 몰랐다 라고
추신으로 남기며 울어 보았는가 

《15》
그리움으로

박소향

산꼭대기
구름 한 조각 걸리어 쉬는데
무엇이길래
설운 바람 지나는 자리마다
배어나는 진한 눈물

여기까지 살아도 남은 것 없어
소리 없이 터트리는
회한의 외침인가

벼랑 끝
해 넘어 가기 전 바위 그림자에
어제도 없었을 눈물 꽃 하나 뿌려 놓고
내려가라 떠미는 바람에 밀려
가마귀 쫒기는 좁다란 산길을
설움에 지쳐서 떠밀려 가네

무엇이길래
조마조마 망설이며 볼 수 없는 그것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이렇게
서럽도록 부대끼고 있는가

흐르다가 없어질 맘이라면
산꼭대기 먹구름처럼
애처롭게 어정거리지나 말 것을

산 공기 저녁놀에
어스름 별빛
마음으로 너를 접는데

그리움의 벽이 다 허물어지고 나면
그때나 이 산길을 내려갈거나
그립다 가다보면
다 떠밀려 와 있으려나  

《16》
기다림

박소향

기다린다는 것은
신열 끝에 묻어 오는
끓어오르는 숨막힘을 스스로 익히는 것이다

기다림에 본질은 없다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목마른 형벌 하나 더 메고 가는 것이다

하나의 껍질을 뚫고
돌아서 나온 흔적을 보는 것이다

밤과 낮을 잊고
새벽을 잊는 것이다

손가락 끝에서
규칙적으로 나를 살리는
혈맥의 느낌을 잊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잠들지 못한 영혼이
수줍게 자위하며 벌거벗고 앓다가
황홀하게 숨질 수도 있는
아름다운 병인 것이다 

《17》
기억의 편린 그 간이역에서

박소향

누군가의 고독한 편린들이
눈감고 잠시 쉬었다가 가는 곳,
그 평온한 절망 속에
내가 기대고 있슴은
사랑보다 더 절박한 시간들은
이미 떠나고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숨막히는 사랑이
마음을 열고 잠시 앉았다 가는 곳,
그 치열한 그리움에
내가 또 기대고 있슴은
더 사랑한 기억으로
오늘 거기 머물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한 기억
내가 사랑한 기억
우리가 사랑한 모든 기억들이
흙 내음을 풍기며
사라지는 그 때에도
나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잠시 잠간
우리들의 간이역이었던
쓸쓸함의 기억 그 자리에 

《18》
길에서 길을 잃다

박소향

아아, 어쩌다가
길을 잃었다

일상의 수중에 없던
여분의 생각만큼
무수히 갈라져 보이는
무의식의 길들

차갑게 꼬리치며 흩어지는
저 길들이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저녁 눈발처럼
순간
너무나 가벼웁다

길을 잃고 헤맨 게
아니었다

불투명한 생의 속박에서
무뎌진 감각의 문을 닫듯
눈앞에서 환히 보이는
마음의 길을 잃은 거였다

짙은 화장의 두께만큼
새카맣게 가라앉은
세월의 무게가
제 연륜을 못 이겨
저리도 흐트러진
길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아, 어쩌다가
정신 놓고 사라지는
막막한 길 위에서
오래도록 홀로 선
내 흔들림
흔들림  

《19》
꽃밥

박소향

바람 한 술과 봄비 한 술
노을 한 줌과 이슬 한 줌

외로운 별 한 줌 그리고
해오름녘 안개 한 줌

무지개 빛
천기누설을 품고 피는 꽃

꽃들이 꽃밥을 먹는다.

꽃들이 지은 밥을 먹으면

바람과 노을이 깃들어 향기가 나고
소망의 별이 빛나 외롭지 않을 것이다.

고마운 목숨 하나 새벽마다 피어
살아가는 순간순간 행복할 것이다.

아름답고 착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꽃
꽃들의 그 비밀한 사랑을 말로 할 수 있을까

꽃에게서 받는 꽃밥 한 술은
작은 축복의 배부름일 것이다.

《20》
너에게서 쉬고 싶다

박소향

모래알이 바다의 깊이를 세는 동안
기억의 창살 너머
노을 진 청춘이 발갛게 솟아 오른다

먼데 바람 사이로
생명의 춤사위 비릿한데
아직 오지 않은 답장처럼
차례차례 무너지는 하얀 올가즘

목선이 망가진 가슴을 열어
길고 긴 밀담을 시작하는 영시
산다는 건 기다림이라고
가끔씩 들려오는 물살의 말은
아무도 들을 수 없어 참 다행이었다

짧은 눈물로 선을 긋던 그 깊이에서
돌아오지 않는 오늘은 모두 끝났으니
아직도 복받친 설움에 우는 바다여
늦게 찾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에게서 쉬고 싶다

《21》
눈 내리는 저편

박소향

해가 저물어요.
어머니 캄캄한 자아가 온몸으로 비껴가고
허전히 발목을 쥐는 빈 물결만
곤고하던 내 그리움을 끌어안아요.

당신의 커다란 사랑이
흰 눈발처럼 품에 와 안기고
세상을 떠돌던 영원의 한때가
언제부터인지 거기 쉬고 있어요

바람이 부는 그 어딘 가로
슬픔은 향해가고
안달하던 영혼이 혼자 남아
죽도록 그리워만 하고 있어요.

아, 이별이 없는 곳 눈물이 없는 곳
맨 처음 당신을 안고 비상하던 첫 비행의 날에
가슴이 무너져 내릴 오늘을
운명처럼 예감했어요

멀리 떠나와도 그리움은 늘 그 자리이고
결국은 다시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하루
이틀
사흘
당신을 만나 행복하던 그때

《22》
눈물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박소향

당신의 이름을 몰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도 잊고
슬픔도 잊고
기도도 잊은 저녁

그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기를
가만히 울음을 그치고 기다리는 시간
이상기류처럼 내 안에 흐르는
건조한 아집의 흔적

사랑했던 날들은 꿈결 같은데
변명과 오해들이 계절의 끝자락에 매달려
환절기 열병으로 앓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인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것
내 안에서 숨을 쉬는
당신을 향한 하얀 비상

눈물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더딘 시간 속에 침묵하는 기다림은
이유가 없습니다

마른 풀꽃처럼 사위는 식어진 눈물
이별이 두려워 떨고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잊혀지는 시간이 두려워질 뿐입니다  

《23》
당신과 함께라면 영원이길

박소향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립니다
언제부터인지 한밤이면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마음이
외로운 잠에 섞여 꿈인 듯 생시인 듯
고르지 않은 체온 곁으로 나란히 눕곤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하나의 일상
그 빈곤한 연가가 되어버린 멍청한 시간들에
군데군데 흠집 난 가슴을 열어 보이며
조금은 부끄러운 줄도 알아야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내가 보여준 그 한 페이지는
전부일 수도 아님 일부일 수도 있음을
속속들이 내보이지 않고도 말해야했습니다

내 기도를 들어 주는
당신의 가슴이 아플 것 같습니다
아픈 가슴에 기대어 숨을 쉬는 나의 기도는
오늘도 눈물바다입니다

부드러운 시간에 길들여지지 못한 묵상은
그래서 또 길을 잃습니다
살갗에 와 닿는 당신의 목소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나의 가슴을 비늘처럼 벗겨냅니다

암담하고 뜨거운 이 궁지에서
내가 부를 이름은 오직 당신뿐이기에
물기 없는 손끝에서
전화선처럼 매달리는 당신의 옷자락을
나는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편견과 오해 같은 삶의 편린들이
배고픈 사막처럼 나를 울릴 때
슬프게 바라보는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세요

삭막한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내기 위하여
황량한 고독 속에서 더 충만하기 위하여
내가 찾는 유일한 회복은 당신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
슬픈 출발을 날마다 하고 있는 동안은요 

《24》
당신께 행복을 팝니다

박소향

마음을 아름답게 열면
하얀빛이 비춰요
눈이 부셔 뜰 수가 없는
그 빛은 눈을 감아도 보이지요

가슴을 아름답게 열면
사랑 빛이 비춰요
마음이 부셔 기쁠 수밖에 없는
그 빛은 어디서든 빛나지요

눈을 아름답게 열면
빛이 보이죠
사랑이 보이죠

그래서 나는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가슴을 열어요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게
당신에게 행복은
내가 팔 수 있게요 

《25》
독도 그 영원의 노래

박소향

광풍노도에 떠밀려 억겁의 세월
흔들리지 않는 뿌리 바다 깊이 내리고
홀로 여한 섬이 되었나니
저 멀리 동해 한 쪽에서
푸른 조국의 뼈대 하나가
지친 우리를 지켜주는구나

수많은 역사의 침노 앞에서도
뜨거운 육지 말없이 바라보며
바닷길 지나던 열사들
영혼의 안식처도 되어 주는구나.

절망과 희망이 지나온 세월 속에 뒤엉켜
기도의 발자국마다 응어리를 풀어내고
마침내
흰 옷자락 핏물 들여 일구어낸 오늘
그대는 열렬히 눈감은 옛 선조들의
눈물 동상이려니

덧없는 욕심 바닷물만큼 출렁여도
내 것이 아니어든
끝까지 가질 수 없음을 알게 하고
억지로 잃은 것은 언제든
제 주인을 찾으리란 걸 알게 하는 힘
독도여

이 민족의 변치 않는 사랑 있으니
동쪽 끝에 우뚝 선 오천년의 절개로
저물지 않는 희망 노래 영원하여라  

《26》
돌아보면 언제나 거기에

박소향

비 그치고
계절도 그쳐 가는 강가에
햇살이 휘돌아간다

조약돌이 마악 줄어드는 저녁 시간에
초록에 섞인 바람 지난 기억을 모우고
빠듯한 나의 가슴속에도
차가운 계절을 집어넣고 있다

돌아보면 거기
언제나 서 있을 것 같은 당신

당신의 물 그림자에 저녁별이 뜨면
낯선 이름 하나 붙이고 돌아서던
캄캄한 그 길 위에 밤이 깊고 있겠다

또로록 또로록 풀벌레 낮게 울어
잠들지 않는 새벽 물소리
하얀 사랑 지금도
만들고 있겠다  

《27》
망각의 강 하나 흐르게 하고싶다

박소향

마지막 분신마저
훨훨 떠나 보내는 홀씨처럼

벗어야 할 허물
다 털어 내도 좋은

망각의 강 하나
흐르게 하고 싶다

언젠가
날 떠날 너를 위해

언젠가
네가 떠날 날 위해

망각의 강 하나
가슴에 흐르게 하고 싶다  

《28》
무정

박소향

그리하여 지금은 이별도 뜨겁지 않은 시대
흰 달이 종일 주름을 펴는 동안
절실한 것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가을도 목놓아 울지 않는다
한소끔 우러난 하늘이 도화살처럼 번져
젖은 연기가 불감증 마냥 피어오르면
까닭 없이 몸만 뜨거웠던 여자
허름한 저 풍경에
발갛게 불이라도 지르면 가벼워질까
한 때 치유를 꿈꾸며
상처에서 떨어져 나간 얼룩은
내 몸의 한 시한부 였거나
바람의 혀끝에서 한 됫박 재가 되고 싶은
몇 토막 불씨였을 것이다
산 일 번지 고사목이 죽음을 애쓰는 동안
풍화된 세월도 수척해져 너그러워졌는가
지금은 사랑도 뜨겁지 않은 시대
절실한 것은 모두 떠나고 없는 부식의 시대
무능해진 가슴마다 죄의 부유물이 들끓어
어떤 것은 넘치게 빠져 있고
어떤 것은 불행히도 주어지지 않는
물이 차면 떠오르는 거품의 섬 같은
아무도 목쉬게 울지 않는 

《29》
무죄와 유죄

박소향

마음은
훔쳐도 무죄

사랑은
맘껏 가져도 무죄

그러나
둘 다 잃는 것은 유죄 

《30》
물처럼 흐르다가

박소향

물처럼 흐르다가 만나자
지나간 세월 뒤에 나는 남고
기억은 또 남아
우리 떠나도 마음 지켜주네

서쪽 하늘 노을이 다 할 때
그 때 헤어짐도
붉은 해 따라 어제로 넘기우리니
지나간 것은 생각지 말자

없어지고 사라지는 날들 속에
우리 또 남으리니……

비 젖어 크는 나무처럼
가지도 주고
열매도 주고
더 이상 줄 것이 없을 때

마음 편한 행복을
서로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니
아직
줄 것이 남아 있는 동안은
행복해 하자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물이 되어 흐르자  

《31》
바다의 소야곡

박소향

너 없이도 늘 푸른
바다로 간다
상처가 나면 어떠랴
고독마저 보이지 않는 그 바다에
푸르게 묻히고 싶다

바람에 잠긴 노을은
꿈을 꾸는데
허옇게 바닥을 드러내놓고
달려드는
저 파도를 어쩔 것인가

을씨년스런 시간 속에 묻혀
묵은 껍질을 벗지 못한 나는
꿈이라도 꾸어야지
가슴을 비운 물거품처럼
지치기라도 해야지

어딘가에서
상처를 내고 숨어버린
사랑했던 날들이여

바람이 빠져나간 머리카락 사이로
실신한 바다가 보일 때까지
침묵에 시달리게 하라
혼돈의 밤 물결 위에 가라앉은
너를 그만 잊게하라 

《32》

바람 부는 날의 어느 것 하나

박소향

굴곡진 시간 사이로 바람이 샌다
평범한 것 중
지극히 평범한 것 중에 들지 못했던
그 시간 사이로 바람의 때가 묻어난다

어디쯤에서 버렸는지
어디쯤에서 잃어 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아 한 쪽
비어있는 한 구석이 오늘따라
이리도 시리다

눈물로 커 가는 나이테
하얗게 늘어난 머리카락 수만큼
가슴의 껍질도 두꺼워 지고
사랑도 때로 구멍이 뚫려
숭숭 바람이 새더라

그래도
죽어라 사랑한다는 그 말에
푹죽 처럼 터지는 설레임 있어
가을 한 철 고이 익은 열망
꽃씨처럼 거둔다  

《33》
바람 부는 봄날에는

박소향


흐득 익어간 봄날이
저린 걸음으로 창밖을 기웃거린다

아무도 모르게 옷속으로 파고드는
파란 바람

지나가는 사람들도
봄꽃 닮은 가슴으로 하얗게 물들고

조금씩 부족한 목마름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나도

바람부는 이 봄날
남몰래 피고지는 들꽃인지 모른다  

《34》
백서

박소향

그리움의 조각들이
비처럼 내리는 날

고독을 불러모아
나를 채우고 싶지는 않다.

너 없는 빈 자리
안개처럼 스미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고 싶지는 않다.

실컷 울다가
실컷 지치다가
그리우면 그 때 갈 것이다.

꽃처럼 흩날리는 이별의 향기
깨끗하게 지워질 너의 그림자

침묵 속에 깃드는
어둠과 빛의 아, 슬픈 사랑 

《35》
봄비 내리면

박소향

봄비
자주자주 내리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억의 줄기들이
꽃을 타고
내릴텐데
어쩌나요.
꽃은
피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피라 할 수도 없는
심술굳은

그리움을요  

《36》
봄은 여전히 나를 찾아와

박소향

봄은 여전히 나를 찾아와
낯익은 기억으로 부풀어오르다가
솜털에 날린 바람 한 자락
옆자리에 툭 떨궈놓고 간다

나부(裸婦)의 살결처럼 물오른 산야에
가지의 입김 푸르게 살아나면
태초의 첫날처럼
얄미운 꽃잎 환히 피어나겠다

봄은 그렇게 나를 찾아와
괜시리 없는 눈물 만들어 주고
이름 모를 풀꽃 하나
허전히 눈물샘에 깃들이게 한다

아 그 봄날 나도
사랑 꽃씨 한 알 네 가슴에 묻어
나 없는 한 동안도
여전히 봄이오면 피어나게 해야겠다

《37》
사는 일이 쓸쓸할 때

박소향

사람 없이 혼자로도
행복하고 싶을 때
오후가 밀려드는 강가에 가 보라

거기 무수한 혈흔의 그리움이 숨어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지나가는 쓸쓸한 행복
조금 보일지도 모른다

사랑없이 혼자로도
충만하고 싶을 때
빛살 한 가득 화려한 저녁 바다로 가보라

거기 끊을 수 없는 절망까지 노을에 타는
눈부신 허무가 표안나게 쏟아져
씁씁한 소망 하나 수줍음도 없이
내가 던진 무수한 말에 물들어 갈 것이다

이제는
가슴 다 닳아버린 너처럼
미칠 듯 갑갑한 열정이 발갛게 터져
벌어진 틈새로 사랑은 졸고

어느 날 문득
사람 없이
사랑 없이
행복할 수 있는 걸 익히게 되는
사는 일이 쓸쓸하게 될 때

나는
농익은 나이가 들고
이별을 하고
바보가 될 것이다 

《38》
사랑한 후에

박소향

절망의 순간을 알기 전
어느 계절인지 알 수 없는 꽃잎들이
사랑의 기억으로 하얗게 부풀어올라
허전한 미련들로 눈물겹게 일어서는 그 날을
당신의 사랑처럼 기다려야 했다

흩어지는 구름이 추억처럼 쏟아내는
노을의 마지막 불빛 자화상위로
그리움을 피워 올리는 그대 영혼이
쓸쓸한 입맞춤의 숨결처럼 그리웠다

아, 나는 언제고 그대 품이고 싶어라
부드러운 사연으로
가슴 벅찬 그리움을 발자국처럼 남기는
나 언제고 그대 품안이고 싶어라

빗발치는 마음의 문을 닫을 시간이면
창을 열고 찾아 드는 별들의 노래처럼
사랑이 꿈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39》
사랑한다면

박소향

살면서
한번쯤
마음껏 사랑하여라

그리고
한번쯤
마음껏 절망하여라

그것으로
인생이
한번쯤
흔들릴 수 있도록…… 

《40》
사랑할 수 있는 시간

박소향

사랑할 수 있어
아름다운 시간들 속에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날 문득
벅찬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사랑을
열병처럼 앓다가

감당키 어려운 아픔을 안다는 것
그것도 행복한 일이다.

따스한 바람 안고
봄 햇살에 꽃피듯
간절히 마음으로

기쁨의 날들을 기다리는 것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영원하지 않을 영원을 영원처럼 믿고
사랑을 위해 하루를 산다는 것
그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41》
새해 소망의 기도

박소향

새해가 되면
가슴 가득 소망을 품게 하소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땀 흘려 정진하게 하소서
결과에 상관 없이
내가 노력한만큼 감사하게 하시고
베푼 것 보다는 받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을 갖게 하소서
높은 곳 보다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하시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다스릴줄 아는

지혜를 갖게 하소서
절망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올지라도
원망하며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겸손한 가슴을 갖게 하시고
먼저 화해를 청하는 용서의 손도 갖게 하소서
사람이 사랑으로, 세상이 사랑으로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과 허물이 덮혀지는
그 사랑을 내가 먼저 실천하고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축복은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먼저 당도한다는
믿음으로 늘 준비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42》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박소향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어딘 줄 아세요?
거기는 가슴에서 머리까지랍니다

가슴에서 머리까지 가는데
평생을 걸리는 사람도 있고
머리까지 가 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 합니다

손으로 재보면 두 뼘밖에 안 되는데
평생을 걸려서야 가 볼 수 있는
그렇게 먼 거리랍니다

가슴은 뜨겁고
가슴은 너그럽고
가슴은 사랑하는데
머리는 냉정하고
머리는 이기적이고
머리는 계산을 한답니다

두 뼘도 안 되는
짧은 거리의 가슴과 머리.
어쩌면 저도 지금
도달하지 못하고
가고 있는 중인지도요

가슴에서 머리까지
가장 먼 거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거리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43》
水程 노을

박소향

갈라진 대지의 살 냄새가 허공에 날리면
빛위 틈새로 꽂히는 혈의 황혼
목 울을 타고 흘러내린 열정의 숨 끝에
가시지 않은 목마름처럼 그가 늘 숨어 있다

서서히 쓰러져 가는 노을의 얼굴만큼
하루를 달구던 가슴 한 쪽에 기대
붉은 취기가 되고 싶은 나는
너를 조금씩 닮아가나 보다

네가 없는 거리만큼 쓸쓸한 계절이
또 있을까
바람마저 앉지 않는 마른 가지에
조용히 눕는 수정水程 노을

손가락 마디마디 실핏줄을 건드리며
결코 빈 허공일 수 없는 네 등줄기에
빈곤한 시어 숨길 수밖에 없는 나는
수줍은 저녁별이라도 되어야지

뜨겁게 타다만 정염의 혀끝에
순수의 눈물로 비틀대며 부서지는
초라한 이름이라도 되어야지

살얼음진 언덕에 눈부신 발아를 꿈꾸는
씨앗의 그 환한 희망의 노래처럼
이제 맘껏 너를 흔들며
감추었던 나신裸身을 벗어야겠다 

《44》
슬픈 바다의 향기

박소향

한때 그 시간의 바다는 슬펐다
빗줄기마저 씻어내지 못한
때묻은 가슴 한 쪽에 허전한 속 내음을 흘리며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시장기
텅 빈 내장의 절규하는 소요가 슬프고
손가락에 끼워져 떠날 듯 말 듯 망설이는
의미 있는 허무가 슬프다

이렇게
무작정 버려져도 아무 할 말 없고
목숨보다 귀하게 다림질하던 그리움 한쪽
어디론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도
할 말이 없다

나를 슬프게 하는 바다
슬픈 바다의 향기가 시간 속에 멈추어 있다
순간으로
또한, 영원으로

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산다는 건
왜 그런지도 모른 척 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참으로 고독한 일이다  

《45》
시월의 열정

박소향

그렇게 터질 것을
그리 터지고 나야 개운할 것을
결국 상처자국을 남기고야 마는
시월의 붉은 열정은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에
충분히 멋진 낙화洛花였으리
상처 없이 누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저 낙엽의 몸짓이 빈 말이 아니라면
노을빛 강가에 조용히 날아오르는
나는 한 마리 은빛 새이리

《46》
아름다운 사람

박소향

궂이 빛나려 애쓰지 않아도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눈부신 사람이 있습니다

검은 옷을 입어도 하얘 보이고
아무리 감추려 해도 고와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추운 날에는 따뜻해 보이고
바람부는 날에는 넓은 창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 쓸쓸한 날
문득 풍성하게 넘치는 사랑으로 든든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은 얼고 마르지 않는 눈물
그 너머로 눈꽃송이처럼
눈부신 그리움이 되어 넘실되는 사람

오이처럼 싱그럽고
초코렛처럼 달콤하여 얼어버린 마음 녹이러
가고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더 미안해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더 사랑하는 사람
언제라도 슬픔을 내려놓고
기대어도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거칠은 얼굴도 고옵게 봐주는 사람
빗나간 마음도 어여삐 보아주는 사람
한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고 챙겨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보다
옷차림보다
마음을 먼저 보아주는 사람

가진 것 보다 없는 것 보다
못 가진 것과 부족한 것을
더 먼저 이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용기와 위로와 힘과 사랑을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과 말을 가진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47》
여름비

박소향

가마귀 날아간 칠월칠석 들길에
여름비 내리고
먼 산 안개에 젖어
마을로 가까워오면

촌로의 모자처럼 낮게 걸린 저녁이
출출한 툇마루에 걸터앉아
젖은 연기처럼 번진다

능소화 담장 위로
몇 조각
그리움 저무는 소리
곰방대 물고 앉은 할아버지 목소리

길 건너 옥수수 밭에는
아직도 쏴아쏴아 여름비 소리 

《48》
월셋방 세레나데

박소향

하 세월이 흘리고 간 시간의 뒤안길에서
분주히 하루의 시름을 뜯어내는 사람들
요란한 상층권은 세상에게 떠맡기고
한 귀로 흘려버린 신문지 속 헛된 세상
땅거미지는 지붕 끝에서
여전히 침묵하는 이끼 낀 가난
찿아올 저녁을 기다리는 무수한 고생이여

사는 일은 그렇게 사랑하는 것만큼 힘이 들어
가슴에 묻어둔 꿈 월력처럼 말아두고
검푸른 전차칸에 소음처럼 태워가는
파도 같은 인생 노래
어둠의 마지막 시간이 내려놓는 최후의 전당

대문도 없는 벽에
아기처럼 보채는 흰 비니루가
창 틈에서 밤새 꽃샘추위로 펄럭이는데
얼굴 숙인 낮은 방이 절망만은 아닌 것은
그래도 해바라기처럼 웃을 수 있는
신앙 같은 사랑 때문이리라

아, 뻐근한 가슴 한 쪽으로
가만 가만 파고드는 슬픔섞인 용기여
헝클어진 상처 곁에
소리 없는 사나이의 위로여
긴 한숨 속에 그물처럼 걸려 식어버린
그들의 달빛 같은 세레나데  

《49》
유리遊離 눈물

박소향

무채색 혈흔이 낭자하게 떨어지다
산산이 깨어져 닿은 그 것에
살이 베인다

바닥까지 차오른 빗물을 끌어안고
숱하게 흔들리며 떠내려가던 밤
손끝에 걸리는 모든 것이
다 아팠다

작별의 날과 악수하던
끝 날 어느 시간처럼
쓰러질 듯한 어둠의 빈혈과
차가운 비悲의 유전流轉이
날마다 문을 여는 곳

서걱이며 방랑하는 억새꽃과 같이
울음투성이 허무에 가슴을 내어 주고
가끔씩 찾아오는 은빛 소망 하나
그 곳에 둔다

눈물의 자리에 견고히 존재하는
어떤 슬픔까지도
모든 사랑의 영지(靈地)임을...

유려(流麗)한 부산물에
조각조각 헤어진 나도
오늘
흐트러진 한 여자의 유서가 되고 있음이다

유리(遊離)눈물에 베어버린 살점을
님에게 건네며
가슴 어느 기슭 쯤에
내 숨의 자취를 남기듯이  

《50》
유토피아

박소향

불치의 영혼을 앓는
금지된 기도의 시작
조난 당한 꿈속에서조차 무너져 내리는
길 잃은 약속들
그 고통의 흐느낌 뒤에 오는 이탈의 바다 위에
고혹의 섬처럼 표류하는 마지막 열정

사랑을 맨 입에
그리움을 단숨에
허기진 영혼 속에 팽팽히 집어넣고
흘린 기다림을
다 못 채운 사랑을
밤새도록 발라먹고 있다

영원히 배부르지 않을 유토피아 식탁에서  

《51》
이별은 처음처럼 사랑은 마지막처럼

박소향

길 위에 서면 나는 묻는다.

길이 끝나면
그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작이 있을까
희망이 있을까
아니면 마지막
작별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그 곳까지
마음은 먼저 가는데
길 끝에 서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희망도
늪도……
흔들리는 안개의 계절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혼자 부르는
황홀한 노래의 몸 짓 뿐이라는 것.

희망과 꿈이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교차하는 그 곳에서
홀로 남은 사랑을 볼 수 있다는 것.

사랑을 준비하라고
내게 말한 너는
그곳에 늘 없었다.

길 끝에 서면
무엇인가 늘 아쉬웠던
그 날..

이별은 시작되고
그 시간……
사랑은 마지막이 된다. 

《52》
이별하는 일

박소향

비 오지 않아도
바람 불지 않아도
항상 있는 빛으로 피어 나는 꽃들처럼
계절이 오면 때가 되었음을 아는 일이다

너는 바람으로 거기 남았는가
멈출수 없는 숨결로
절규하며 부대끼는
물거품으로 남았는가

사랑하는 일이 힘들때
그렇게 한번 흔들려 볼 일이다
한번은 오고야 말 폭풍같은 날들을
기다릴 일이다

빈 등허리로 숨죽이며 혼자 우는 일
무디어진 소망이 앞에 있고
비로소 혼자임을 깨닫는 일이다  

《53》
처음의 사랑처럼

박소향

눈이 부셔
뜰 수가 없어
하얗게 거품을 날리며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미친 사랑의 노래

목숨을 걸고라도
부서지고 싶은
처음의 사랑처럼
절망의 희열을 앓는다

풀리지 않는 매듭 사이에서
푸르게 날고 있는
마른 영혼의 춤사위는
황홀한 꿈의 흔적인가

멈추지 않는 그리움에
너를 숨기고
폭풍같은 허무의 잔에
시를 따른다

사랑을 알았던
그 시간을 위하여
너를 알았던
목쉰 눈물의
눈부신 꿈을 위하여  

《54》
흐르는 강물처럼

박소향


꿈꾸는 조약돌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잊혀진 우리들의 노래를 아십니까

거북처럼 달려 오던 봄이
소슬바람 이고 앉아
꽃 그늘 아래 퍼지는데
수척한 물살이 퍼 올리는 밤 노래는
누가 밝고 가는 시린 가슴입니까

당신이 남겨 놓으신 꿈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궂이
잊으라 하시면
대체 슬퍼하는 내 그리움은
누구의 몫입니까

당신을 곁에 놓고도
눈뜨고 지키는 강 너머 불 빛
먼 물가에 김이 오를 때
새벽은 이내 꽃처럼 피어나고
한줄기 푸른 연기가 햇살에 따사롭습니다

아, 당신을 떠날 수 없는 나는
유리창에 부딪치는 차가운 입맞춤 같습니다
해 이른 봄 날
이름 모를 꿈 하나 강 물결에 떨궈 놓고
딸랑딸랑 바람소리에 섞여
당신의 사랑을 안고 나는 다시 걷습니다 

《55》
흐린 날의 기억

박소향

비가 내리는 동안
호수는 늦게까지 열려있었다

물 속에 잠긴 이른 저녁 길을
걷고 있는 동안도
구름 속의 하늘은 푸르러 있었다

살구나무 울타리에 걸려
한참이나 서성대던 장미빛 황혼으로
차가운 비의 유혹을 비집고 들어와 가슴에 고인
이 그리움은
절망이겠지

우리 헤어지던 흐린 날 이후
사소한 일상 속에 따라 다니던
그리운 얼굴 하나
툭!
젖은 비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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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옥 시 모음

 

《1》

8월의 밤

 

주명옥

 

해쓱하게 말라가는

8월의 그림자는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흔들고 가듯

 

많은 언어들의 질문과

대답으로 쌓여지며

햇볕을 꺼리는 도심속

여인네의 얼굴처럼

 

짧은 심지를 태우고

살폿한 미소를 남기는

달도 별도 울지않는

뜨거운 정열의 밤 

 

《2》

가슴에 묻힌 꽃

 

주명옥

 

나라에 바친

그대의 청춘이

 

가엾이 떠도는

외로운 혼되어

 

그대가 부르신

목메인 노래는

 

하늘아래 곱게

거름이 되어

 

태극기 펄럭 휘날립니다

 

해 뜨고 지는

이나라 강산에

 

일편단심 붉은

무궁화 피었습니다 

 

《3》

가을의 노래

 

주명옥

 

새들은 석양을 몰고

울음을 토하던 골짜기엔

가을이란 이름으로

구석구석 바닥을 훑습니다

 

뒤늦게 옥상으로

기어오르는 호박 넝쿨

바람이 귓속말을 전합니다

삶은 이런 것이라고……

 

거꾸로 머리 박고 

살면서도

환하게 꽃을 피워내는

줄기 하나

 

뭉게 구름이

아픈 세속 다 받아주느라

발길 붙들어

내가 자꾸 깊어집니다

 

헐렁한 시간

까실거리는 시 한 편

책상 위에서 목마른

혀의 사연 묻지도 않고

 

해 뜨는 동녘 하늘의

별 아래 난 그저

온유한 가을노래를 부릅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4》

겨울의 길목

 

주명옥

 

한 낮의 볕을

나무에 걸어두고

땅거미 매달린

모퉁이 돌아서면

 

바람이 날을 세우고

낙옆이 쓸리는 길목

 

고구마 속살 찢기고

몸을 달구는 날엔

옆집 할머니

파리한 잔기침 토하며

 

이음새로 연결된

겨울 초저녁

휘익 휘어져 

왔다 가는 바람의 말

 

아직도 숨어있는

꼬리달린 여우의 동화

쌍다리 아래서 주워 온

서럽던 이야기

 

눈동자 속바람이

주름살 사이로 차갑게

흐를 때

 

이승의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 하나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또 내일이다

 

세월이 별거드냐

잠시 지나고 스치는

그림자인 것을

바람인 것을……

 

《5》

구월의 모퉁이

 

주명옥

 

곱게 물들이는

바람인가 했더니

잠 못 드는 이야기

치렁치렁 엮어매고

 

허기진 내 감정의 공간은

강요치도 않는 밤

시계 소리는

귓등으로 떨어지고

 

창문 틈새로 들락거리는

썩어 문드러질 바람

닳고 닳아서 허름해진

어설픈 언어로

 

애증의 감정을 유폐시키고

가쁜 숨소리로 타박거리는

구월의 밤은

태연하기도 하다

 

눈은 어디다 두고

마음은 어디다 달아둘까

내 마음도

구조조정을 해야할까 보다 

 

《6》

꽃잎은 떨어지고

 

주명옥

 

무수한 바람을 일으키며

잊혀져 가는 아쉬움

 

아득히 먼 길 걸어와

열린 창으로 향기 던진 채

 

눈물 빛 고운 아름다움을 주고

눈앞에서 깨어지는 환상

 

버리기 위해서 나무는

잎들을 매달았을까

 

죄마져 사랑하고 싶던 봄날

잊고 산 세월 

몰래 주워서 다시 멈춰버릴

 

봄날의 추억을 만들고

하얗게 비울수록

 

툭툭 터지는 시간의 기억

또 다시 

그리워 접어야 할 세상이네

 

《7》

나의 꿈을 꾸면서

 

주명옥

 

가슴을 찢고 열어도

보이지 않던 세상이

아무런 상관도 없이

순리대로 살고 있었을즈음

 

이제사 모습을 드러낸다

내~~어릴때 심어 놓았던

곱고 여리던 사랑의 꿈

마음 저 구석 바람든

구멍으로만 움켜잡던

손을 놓으니

 

수줍은 설레임이

고개 처 들고 하늘을 본다 어찌하랴?

여전히 가슴엔 쓰고싶은

삶의 노래가 있는데

 

하나를 얻기위한 

시간들은 아픔이었고

세월의 흐름에도

놓을 수 없었던 나의 꿈

 

걱정을 털어 버리고

뜨거운 숨 헐떡 거리며

가만가만 갈라졌던

가슴을 쓰다듬는 밤

 

세상 내부로 내려와

꿈속을 힘차게 빠져 나온다

헐렁했던 나의 가슴

눈썹위에 달려있던

한숨을 뿜어 버리고

 

안개 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자유로이 숨 쉬는

시간속에 이젠 봄 같은

미소를 흘리며

하얀 노래를 불러 보리라

 

《8》

나의 봄날에

 

주명옥

 

파란 

하늘엽서에

새 한마리

음표없는 노래를 합니다

 

여명이 밝아오며

침묵 속의 꿈들이

하나 둘 봄볕 아래로

모여듭니다

 

고뇌에 허덕이던

숱한 이야기들은

스스로의 위안과

허세였다고

 

내 안의 수런거림

벗어버리고

시나브로 봄 향에

눈을 감아봅니다

 

비로서 추억은

잡을 수 없다합니다

 

봄비가 살포시

내리는 날엔

가슴 밭을 일구어

사랑 씨를 뿌리렵니다

 

바람이 살짝 지나는

오늘 같은 날에는

서녘을 넘는 노을 빛처럼

붉은 가슴도 열으렵니다

 

나의 봄날도

이렇게 아름답게 여물기를

바라며 피어서

지지 않을 마음의 꽃을 피우며……

 

《9》

내 마음

 

주명옥

 

늘 함께 하던

고독의 순간들을

곁에 앉혀놓고

 

어쩔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과

거부할 수 없는

생각들이 다가와

 

침묵 속에서

날마다 나누는

일상의 언어들과

 

또 그렇게

흐느적거릴 때

감정의 작동이

시작되고

 

창밖엔 한 줄기

바람이 자유롭다

내 안의 나도

바람이려나? 

 

《10》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명옥

 

나~당신을

사랑합니다

 

소유도 아닙니다

욕망도 아닙니다

 

가슴에 두근거리는

당신이 있기에 사랑합니다

 

서툴게 살아온 

세월을 내 팽게치고

 

가파른 생의 언덕에

몸 부려 놓고

 

어쩔 수 없는 그리움으로

생각이 머뭅니다

 

나~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루의 모든 일들이

빈틈없이 그대 곁으로

날 데리고 갑니다

 

달빛이 도란도란

여물어 가는 하늘도

 

가슴에 꼬옥 안기는

바람의 속살거림도

 

바둥바둥 애간장 

녹이는 깊어가는 이밤도

 

나~당신을

사랑합니다

 

괜스런 미소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대신할 수 없는 것

 

주명옥

 

삶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이

태어남과 죽음이 그것이라 하여

내가 홀로 선 것은

이것을 깨달음이라~

그것은 세월의 무게가 아니라

세월의 기울기였답니다

 

까닭

 

어느 시인이 말했다지요

나무가 강가에 무성한 것은

물 때문이 아니라

강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나도 말할 수 있어요

밤하늘에 별들이 무성한 것은

하늘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별을 헤는 사람들의 눈

때문이라고~

 

 

보았네

 

소나기 지난 자리

물방울 뚝뚝 서리는

가을 하늘 한 조각

바람 속에 시들어 가는

여름을 보았네

 

여름 끝을 잡고 우는

매미 울음 속으로

구름 몇 장 드리운

하늘 바람은 쉴 새 없이

갈색의 향내를 훑고……

 

《12》

떨어진 꽃잎

 

주명옥

 

바람이

산에 걸친다

 

철 따라 우뚝 선 나뭇가지

잠든 산을 돌고 돌아

달빛 머무는 목련 잎

후울 털어버린 한 줌 상념

 

넉넉한 마을을 열고

알몸으로 들어가 보니

잎잎마다 지천으로

피는 그리움

 

낮은 곳으로 숨겨둔다

 

《13》

또 하루

 

주명옥

 

가시만 남은

바짝 마른 그림자는

 

오늘 일상의

바람 속에 접히고

 

가만히 턱 고이고

바라본 저 너머

 

두 눈으로 톡 하고

별을 건드려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으로 세우고

 

곱게 내 곁에

놓아둔 작은별 하나

 

그 틈을 비집고

그리움으로 눕는다

 

소문은 벌써

여름을 싣고 다니며

 

세월이 어디만큼

왔는지 속살거릴쯤

 

영글지도 않은

어설픈 여름이

 

허리를 내두르는

오만한 거리에

 

밤은 얼룩덜룩한

그리움의 시간으로 간다 

 

《14》

마음 속의 노래 

 

주명옥 

 

내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그대 생각에 더는 외롭지 않습니다

 

창가에 그림자 드리우며

별이 빛나는 밤에 함께

속삭이고 싶습니다

 

바람이 한 숨 지을때 보고픔으로

심장 마져 두근 거립니다

조금은 부끄럽고 두려웁지만~

 

한 조각 내 삶의 고운 무늬들을

펼쳐 놓으며 눈 시리도록

환해지는 희망을 안고

 

나는 시간의 공간을 초월해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기에 침묵 속에

욕망을 넘어 나의 마음 그대로를 허용 합니다

 

뼈와 살이 타는 불의 기름이 되어도

시간의 진실이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면서

 

흘러도 지나도

늙지 않을 가슴을 안고 오늘밤도

그리움을 빗 속에 풀어 내고 있습니다

 

《15》

몽상

 

주명옥

 

숨가쁘던 하루가

서산에 얹히고

차갑던 하늘이

바쁘게 떨어질때

 

훵한 가슴은

기억의 어딘가에

남아있을 노래를

너그럽게 들이지 못하고

 

자취도 없는 세월도

품지못한 채

낙원의 화려한 몽상에 빠져

매정한 하늘만 흘기며

 

겨울밤은 나뭇가지 사이로

세월을 돌리고

잠들지 못하는 난

오뇌의 떨림만 껴 앉는다

 

《16》

묶음

 

주명옥

 

억센 기세로

뻗어 가는 볕살과

그 등에 올라탄 뜨거움

올해의 여름엔 인정이 없다

 

한 곳으로만 몰리는

따가운 화살

그러나

그것은

흩어짐이 아니고

 

제일 강력한 결집

나를 향한 몰입이라면

여름은 가장

뜨거운 불꽃이다

 

비만이 넘쳐흐르는

시간끼리의 교류

햇살도 

내 시간 안에

포획되었다

 

《17》

바다에 서서

 

주명옥

 

외로움도 병인가 봅니다

수많은 낮 그리고 밤을

셀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또 스치면서

그렇게 흔들리며 또 기다립니다

 

그리움이 나의 몫이라면

기다림도 나의 몫일텐데

꽉 찬 보고픔을 한데 모아

몸밖으로 쏟아 버리려 했지만

 

물 새 울음 한 점 흐르지

않고 파도 소리는 내 가슴까지 따라와

그만큼도 참지 못하냐구 합니다

 

짠내 나는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린데

아무도 모르게 달려온 시간은 하늘을 뚫고

밤은 바다 깊이 빠지면서 내 설운 빛들을

놓고 가라 합니다

 

《18》

바람

 

주명옥

 

다소곳이 흰 눈이

흩어질 무렵

새볔 어스름한

어둠 사이로

 

이름도 없는 축제의날

야위어가는 불치병처럼

빈 가지의 여백은

침묵을 두르고

 

즐거움과 슬픔이 교차하는

침울한 오늘

발가벗고 달려드는

바람떼 몰고

 

균형을 잃은 

하늘 땅 그사이에

거꾸로 흩어진

한숨 조각들

 

긴 여로에서 돌아온

나그네의 지친 표정처럼

계절의 빛깔로 경련 하는데

놓고 가는 긴 시름

 

뉘 손에 꺾일 바람이려나 

 

《19》

바람 불던 날

 

주명옥

 

건드린다

자꾸

늦가을 바람이

 

놀란 산은

우스스

소리를 내지르고

휘감아 어르고 다그치고는

 

울다

울다가

 

나뒹구는 낙옆

모른체 팽개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숲은 

혼곤한 잠에 빠진다

 

새벽을 보듬고

사랑할 시간들은 

아직도 너무 많은데

 

저 건너

주인 잃은 개 한마리는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댄다 

 

 

《20》

 

주명옥

 

긴 기다림

짧은 만남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리움이고

 

기다림이고

바램이었어 

 

네 생각에 

설레는 가슴도 

알았거든 

 

고운 햇살로

은은한 향기로 

살랑이는 바람까지 

 

내게

미소를 건네준 

사랑이며 희망이거든 

 

가슴에 품을만큼 널 사랑해 

 

 

《21》

봄 꿈

 

주명옥

 

햇살이 하도 곱길래

뒷동산에 올랐습니다

부르는 사람은 없어도

무심코 걸었습니다

 

봄을 뱉은 동산은 푸르고

저만큼 아지랑이 일으켜

돌빛조차 눈 부십니다

남풍이 불어옵니다

 

활짝 핀 개나리

볼붉은 복사꽃

꿀벌은 왱왱거리고

나비는 훨훨 몸부림 치고

 

가벼운 바람이

부드러운 입술을 스칠 때

너울너울 복사꽃 떠난

하얀 나비 한 마리

 

님 위해 닫혔던

열정의 창문이

하마터면 활짝 열릴 뻔

하였습니다

 

달빛도 꺼져버린 이 밤에

아~~~

그대여 이것이 봄인가 봅니다

정녕 철없이 어수선한 봄 꿈을 꾸나봅니다

 

《22》

봄이오는 길

 

주명옥

 

자유가 나를 허물고

고요를 공유할 때

바람과 추위의

혼돈 속에서

 

무슨일이 생기려는지

하늘 가득한 구름이

급히 움직이고

눈물빛이 곱도록

 

미흡한 영혼들의

밤은 깊어간다

별 빛 머금은 월광이

시무룩한 이맛살에 포개져올 때

 

수탉은 긴 목청을 돋우어

하얀 고독을 깨뜨리고

빈 마당을 맴돌다

자지러지는 새벽

 

무척 간사한

인간임을 느끼며

어느 방심한 순간 나의 심장에

와 닿을지 모르는 봄은

 

그 틈에 막 피어나리라

돌아보면 이 겨울도

지난날 머언

그리움으로 남긴 채……

 

《23》

빛 바랜 여름

 

주명옥

 

무성한 숲 속에서

매미의 마지막 교감의

소리를 듣고

 

사랑은 기다린

매듭이지만

세월은 산등을

타고 오릅니다

 

상념이 어설프게

하늘바람을 타고

빛 바랜 태양을

여름의 덫 속에 가두고

 

노을 지난 어스름까지

난 무얼 들고 서 있었을까

남은 사랑은 가슴에

간직하면 그만인 것을

 

어느새

나만의 낱말들을

소담스레 주으며

희열을 만끽할 때

 

옛님의 잔정이 

여운으로 남고

어느 시인님이 부르는

애절한 세레나데

 

햇살 구르는 이슬에

취해 있을 때에

세상을 표류하고 있는

몽상의 언어가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우고 

저 아래엔 여름을 품은

가을노래 들려옵니다 

 

《24》

사랑이라는 이유로

 

주명옥

 

되돌릴 수 없는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아직은 남겨진 

눈물이 있기에

가끔은 흔들어 봅니다

 

감정이 택한 그 길이

비록 아픔의 길이라 해도

 

몇 번씩 왈칵 눈물 쏟는

그리움의 뜨락에

늘 동행인 사람

 

때때로 목구멍에 넘치는

좋아했단 말은 하지 못해도

 

그 사랑 영원히 나의

몫으로 남는다면

 

난 그 사랑을 품고 사는

행복한 여자일테니까요

 

《25》

새벽 강

 

주명옥

 

하늘 아래서

무리지었던 꽃들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그리움 보태던 모퉁이

 

산마루 능선을 타고오는

솔바람 한 웅큼 줍고

그림자로 남기던 햇살도

한 웅큼 받아내니

 

보라빛 사랑을 엮는

파란 오월의 하늘

때때로 모든 것이 변하고

한 시절이 왔다 떠나도

 

물새 한 마리 종종걸음으로

기지개 켜는 새벽 강

물안개 그윽히 강허리 맨다

 

《26》

생각

 

주명옥

 

동백꽃이 붉게

세상구경 바랄때

 

허툰꿈 수 없이 뭉개고

빛 바랜 세월 속의 얼굴

 

숨 가쁜 헐떡임조차

내 삶의 빛깔인가

 

바래고

닳아야

선명해지는 삶의 색깔들

 

희끄무레한 나는

한참을 더 닳아야 할

 

파랑 그리고 너울 사이

 

《27》

어느 날

 

주명옥

 

하늘 위에 해가 뜨면

하늘 위에 달이 뜨면

구름 한 자락 걷어내고

망설임 없이 

물드는 가을 모퉁이

 

선들선들 일어나는

눈물과 웃음

젖은 가슴을 널고

짧게 걷다가 돌아보니

 

더위 지난

9월의 인기척에

그리움의 냄새가

팽팽히 부풀어 오른다

 

잠시,

멈추었던 

심장을 가다듬고

또 다시, 허공을 겨냥하는

생놀이

 

붉게 달아오르는 두 뺨

 

《28》

어둠이 짙어지면

 

주명옥

 

낙조의 그늘이 짙어질 무렵

그림자 따라 바람이 일어

 

한 나뭇잎

 

시간의 계곡에서 바람소리

고요의 여운으로 지새울 때

 

추억의 실마리는

꽃으로 피고

 

어지러운 창문 밖

바람꽃이 하늘거리면

 

의식과

무의식의 카테고리 속에는

 

어제와 오늘이 있고

 

어둠에서 살아난 듯

발산하는 희열로

 

초침소리 커져가는

부엉새의 눈은

 

내일을 또 그 내일을

거기서 기다리고…… 

 

《29》

어떤 날의 공상

 

주명옥

 

쥐어지지 않는

껍질뿐인 생각으로

아침 햇살에 증발하는

이슬을 따라

 

저 아래 깊은 골에서

세포의 비밀을 캐내며

온전히 머물지 못하는

바람처럼 시간의 흔적은

심장까지 차 오르고

 

황홀한 자태로

뜨겁게 자리하던

이 여름의 

마지막을 알려오면

 

퍼득이던 나만의 날개는

달짝지근한 몽상의

언어에 섞여 책상 위엔

인생의 쾌락과

 

무더기로 목을 늘어 뺀

불투명한 사랑

이별, 꿈, 도약의 낱말들이

어지럽게 널리고

 

방심하는 어느 순간

가을은 내 심장에

한 쌍의 학으로 수를 놓으며

닿을지도 모르는데

 

달빛도 꺼버린 어둠은

꾸벅꾸벅 품위 있게

버티다가 자꾸 돌아보는

사라짐의 진리

 

가끔은 밤이 낯설고

그 사이로 어둠이 짙으면

또 다시 이별 할

여명에 도착한다

 

《30》

언젠가는

 

주명옥

 

때로는 만남에 익숙해지고

더러는 헤어짐에 익숙해져도

가슴 속에서 몇 번의

격정을 누르고 나면

 

비단결처럼 고운

보드라운 연록의 세상 속

 

어느날

흐르고 흘러서 사라지는 것들

기억될 것 하나 없어도

모순된 현실의 아픔이 있다 하여도

 

애써

잡지 않으렵니다

 

별이지고 달이지고

일렁이는 시간마다 감회가 걸려있고

시시각각 진행되는 나의 봄도

세월과,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울다, 웃다 

언젠가는

그 흔적마져 아련히 미소 지을

사랑으로 남을테니까요

 

빈 창에 바람이 부네요

 

《31》

여름 밤

 

주명옥

 

어수선한 구름이

현란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면

 

이름모를 풀냄새가

빈 가슴에 안기고

 

꾹꾹 심지를 박았던

시들었던 꿈들이 깨어나

 

젊었던 한 시절이

무언의 미소를 만들고

 

흔들어 놓았던 졸음도

달디달던 옛사랑도

 

배웅나온 여름밤은

술잔위로 시간을 몰고

 

《32》

여름 숲 속에서

 

주명옥

 

한발 한발

숲 속을 디딜때

한 점 구름은

석양을 몰고갑니다

 

제자리를 지키던

요동없는 나무들도

슬며시 달빛 품을

어둠 속에 자리하고

 

간간히 바람이 해쓱한

상흔을 덮을 때

조금도 소홀하지 않는

숲길 그 사이사이로

 

내 속의 무엇들이

수런거리는지

버려야 산다는걸

알아갈즈음

 

아쉬움 빼곡히

세월을 엽니다

내가 삼켰던

무거운 상념들

 

구슬픈 새소리는

빈 숲속에 떨어지고

또 다시 어쩔 수 없는

속세의 그리움으로 오고

 

길 따라 마음도

제각기 오고갈 때

서투르게 살아온

세월의 늪속에

 

어설픈 그림자는

잘도 따라옵니다 

 

《33》

오늘은 이렇게 살자

 

주명옥

 

흔들어 거칠 것 없는

빛으로 채우고

 

서로 스미고 섞이면서

품어주는

 

오늘은 이렇게 살자

 

볕에 바래지 않고

바람에 시들지 않고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고

 

허욕과 허세 숨죽이며

햇볕이 고여있는

토양에 정착하자

 

봄날의 빛처럼

4월의 향기처럼 

또르르 웃음소리 굴리고

 

동을 틔운 맨 처음

햇살 받으며

그냥 순리대로 이렇게

 

어차피 삶은

미완의 건축인 것을……

 

《34》

이 가을에도

 

주명옥

 

눈을 감아 봅니다

귀를 막아 봅니다

비릿한 가슴을 풀어헤치고

 

때로는 길이 멀어

쉬어도 봅니다

때로는 달콤한 환상으로

나만의 작은 집도 지어봅니다

 

많은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만

여전히 시간의 흐름은

저절로 감기어 옵니다

 

무엇을 셈하며 살았을까?

 

실타래 풀리듯

봄여름 지나 가을은

점점 빠르게 풀리고

있습니다

 

이 가을엔 또 어떤

사연이 묶이려는지 

감정 앞에 이성이 무너지고……

 

《35》

인생 후반기

 

주명옥

 

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

빈 가슴 부등켜안고

 

한 생애 연극처럼

눈물짓던 상처들

 

얼키고 설켰던 회환에

몸부림치던 육신은

 

속울음 감추며 타박타박

질곡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추락하는

시간들을 끌어 모으니

 

촉촉이 젖어드는

그리움 한 자락

 

끝내 잡히지 않는

세월의 굴레에서

비집고 나오니

 

어느새 나의 모습도

인생 2막으로 열려있었네

 

삶의 인고에 갇혔던 시간들은

시나브로 외로움을 비켜가며

 

초록의 향연에 펼쳐진 하늘엔

구름이 자유롭고

 

꽃잎 흔들고 가는 바람에

가만히 눈감으니

 

가장 아름답던 시절

그리움의 향기가 되어

 

7월을 시작한 창가에

지난날은 그저

 

지나는 바람에 스치는

지난 옛이야기였네 

 

《36》

인연

 

주명옥

 

늦은 감각으로 진동하는

저음의 한숨

 

밀폐된 방의 밀도에

밀려버린 미동의 숨결은

 

보고픈 사람을 두고

자꾸만 나락하는 상흔의 남김

 

까만 가슴은 무딘

애피로 신음하며

 

색깔의 조화마져 농락하는

사바의 질긴 인연

 

모순으로 희미해진

그리움의 의미는

 

살아가는 속세의 삶이

우화인것을

 

너덜거리는 삶의 의식이

계절을 맞고 있습니다. 

 

《37》

참 다행입니다

 

주명옥

 

밤마다 하늘을 품고

기도 했더니

나뭇잎 툭툭 치며

살아있는 숨결을 나릅니다

 

참 다행입니다

 

고뇌에 빠져 숨죽여 울던

거친 땅을 걷다보니

하늘에서 부서지는

아름다운 사랑의 빗방울

 

참 다행입니다

 

비틀어진 꽃들이

피기를 단념하던 날

구원의 손길 촉촉히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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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민복 시 모음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삭월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긍정적인 밥 / 함민복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 함민복

여보시오누구시유 
, 저예요 
누구시유, 누구시유 
아들, 막내아들 
잘 안 들려유
저라구요, 민보기 
, 잘 안 들려유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당최 안 들려서 
어머니 
,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 죄송합니다. 안 들려서 털컥.
어머니 저예요 
전화 끊지 마세요 

.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예, 저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어머니. ,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안어들머려니서 털컥.
달포 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네 
어머니가 자동응답기처럼 전화를 받았네 
전화를 받으시며 
쇠귀에 경을 읽어주시네 
내 슬픔이 맑게 깨어나네

질긴 그림자 함민복

태양이 어서 일터로 나가라고
넥타이를 매주듯 그림자를 매주었다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그림자와 같은
색칠을 했다
농부도 들판에서 그림자를 파내고 있다
달이 뒤에서 앞에서 자신의 포즈까지 바꾸며
뒷모습만 나오는 흑백 그림자를 찍어주었다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그림자와 다른 색을 지웠다
올빼미가 제 그림자가 되어줄 들쥐를 내리 쪼았다

감 나 무 / 함민복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잘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옥탑방 / 함민복

눈이 내렸다 
건물의 옥상을 쓸었다 
아파트 벼랑에 몸 던진 어느 실직 가장이 떠올랐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서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떨어져 죽기도 하며 
입지적으로 벼랑을 일으켜 세운 
몇몇 사람들이 희망이 되기도 하는 
이 도시의 건물들은 지붕이 없다 
사각단면으로 잘려나간 것 같은 
머리가 없는 
벼랑으로 완성된 
옥상에서 
招魂하듯 
흔들리는 언 빨래소리 
덜그럭 덜그럭 
들리는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전구를 갈며 / 함민복 

잠시 빛을 뽑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둠을 돌려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는 더 밝게 못 박히고 
십자가는 삼십 촉만큼 더 확실히 벽에 못 박힌다 
시계는 더 잘 보이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의자는 그대로 선 채 앉아 있으며 
침대는 더 분명하게 누워 있다 
방안의 그림자는 더 색득해지고 
창 밖 어둠은 삼십 촉만큼 뒤로 물러선다 
도대체 삼십 촉만큼의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내 마음으로 스며 마음이 어두워져 
풍경이 밝아져 보이는가 
내 마음의 어둠도 삼십 촉 소멸되어 마음이 밝아져 
풍경도 밝아져 보이는가 
어둠이 빛에 쫓겨 어둠의 진영으로 도망쳤다면 
빛이 어둠을 옮겨주는 발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벽에 못 박혀 있는 깡마른 예수여
연꽃에 앉아 법당에 앉아 있을 뚱뚱한 부처여 
죽음을 돌려 삶을 밝힐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잠시 다섯 손가락으로 빛을 돌려 어둠을 켜고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봄꽃 / 함민복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 함민복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자본주의의 약속 / 함민복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퍼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트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시티--

물고기 / 함민복 

부드러운 물 
딱딱한 뼈 
어찌 
옆으로 누운 나무를 
몸속에 키우느냐 
뼈나무가 네 모양이었구나 
비늘 잎새 참 가지런하다 
물살에 흔들리는 
네 몸 전체가 
물 속 
또 하나의 잎새구나
 
초승달 / 함민복

배고픈 소가
쓰윽
혓바닥을 휘어
서걱서걱
옥수수 대궁을 씹어 먹을 듯


김포평야 / 함민복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잊었는가 바벨탑 
보라 한 건물을 쌓아 올린 언어의 벽돌 
만리장성, 파리 크라상, 던킨 도너츠 
차이코프스키, 노바다야끼...... 
기와불사 하듯 세계 도처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이진법 언어로 이룩된 
컴퓨터 데스크탑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 
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 
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 
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김포평야 물 괸 논에 아파트 그림자 빼곡하다 
 
'부부' /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함민복

망둥이를 낚으려고 
노을 첨벙거리다가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서도 개는 내 수상함을 간파하고 
나를 겁주며 짖는다 
내가 여기 더 오래 살았어 
네가 더 수상해 
나는 최선을 다해 개를 무시하다 
시끄러워 
걸음 멈추고 개와 눈싸움을 한다 
사십여 년 산 눈빛으로 
초저녁 어둠도 못 뚫고 
똥개 하나 제압 못 하니 
짖어라 
나도 내가 수상타 
서녘 하늘에 
낚시바늘 같은 달 떠 있고 

풀뀅기에 낀 망둥이 댓 마리 
푸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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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성 시 모음

 

겨울나무에게 묻다... /유미성 시

 

가슴 시리도록

새하얀 눈 위에 찍힌

낯선 사람의 첫 발자국

나무야 너는 보았니?

그 발자국의 주인을...

나 몰래 밤사이에 다녀간

낯선 사람의 모습을...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

함께 첫눈을 맞기로

지난날 약속했던 그 사람을...

나무야 너는 보았니?

나 몰래 다녀간 발자국의 주인을

그 사람의 두 볼에 흐르던

그리움의 눈물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이기에... 유미성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이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느 가을날 낙엽 수북하던 거리에서..

내 손을 잡고 행복해하던 당신이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느 비오던 날 내 마음 아프게해..

쏟아지는 눈물과 비로..

내 모습 초라하게 만들었던 당신이지만..

그 모습 지켜보며 함께 울었던 당신이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꾸만 세상살이에 지쳐 포기 하려는 나에게..

못난 사람이라고 모질게 내몰아쳐..

날 일으켜 세우던 당신이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에 모래알보다 많은 사람..

그중에 당신보다 예쁘고 착한 사람..

없지 않겠지만은..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기에..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 당신이기에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사랑 / 유미성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애절한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더 간절한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숨어있던

그대만을 위해 쓰여질

그 어떤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대만을 위한

아주 특별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난 오늘도 여전히 그대에게

사랑한다는 말 밖에는

다른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 밖에는

그 어떤 그리움의 말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언제나 그대에게 쓰는

편지의 시작은

사랑하는... 보고싶은...

하지만 그 마음 너무나도

따뜻한 그대이기에

그대를 위해 쓰여진 내 평범한 언어들은

대 마음속에서는 별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가 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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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연님 시 모음

 

오직 하나의 기억으로 / 원태연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많은 괴로움이 자리하겠지만

그 괴로움이

나를 미치게 만들지라도

미치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하나의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추억은

떠나지 않은 그리움으로

그 마음에 뿌리깊게 심어져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공약 / 원태연


헤어짐이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떠나버린 님의 마음을

그 전처럼 돌려주겠다고

가슴아픈 이별을 했더라도

하룻밤 아파하다

거짓말처럼 잊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이런 공약을 한다면

이별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몰표를 얻을 수 있을텐데...

정치니 장난이니

투표 안 하고 만다던 나부터도

당장 그 사람 찍어줄텐데...

 

길들여지기 / 원태연

 

무언가에 길들여져 있다면

좀처럼 고쳐지기 어렵겠지만

그만큼의 노력을 한다면

가능한 것이나

누군가에게 길들여져 있다면

좀처럼 고쳐지기도 어렵겠지만

사랑한 만큼의 눈물을 흘린 뒤

가능하다 하여도

그땐 이미 그리움에 길들여져 있을 것이다.

 

이유 / 원태연

 

이별한 순간부터

눈물이 많아지는 사람은

못다 한 사랑의 안타까움 때문이요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그만큼의 남은 미련 때문이요

많은 친구를 만나려 하는 사람은

정 줄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혼자만 있으려 하고

가슴이 아픈 지조차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이별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밤이면 슬퍼지는 이유는

그대 밤이면 날 그리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고

나 술 마시면 미어지는 이유는

그대 술 마시다 흘리고 있을 눈물이 아파보여서이고

나 음악을 들으면 눈물 나는 이유는

그대 음악 속의 주인공으로 날 만들어 듣고 있기 때문이고

나 이런 모든 생각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떨쳐버리고 나면 무너질

나를 위해서입니다.

 

이루어지기 싫은 사랑 / 원태연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예쁘게 생긴 여인

태어나서 단 한번의 양치질도 안 하고서

과감히 내 입에 키스를 하는 여인

매력적인 궁둥이를 흔들며 유혹하듯 쏘다니다가도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보는 여인

조금만 기분을 맞추어 주면

발라당 뒤집어져 가슴을 드러내는 여인

TV 개그 프로보다 더 재미있는 여인

만나자고 전화할 필요도

없는 돈에 커피값 걱정하며 약속할 필요도 없는

아주아주 날 편하게 해주는 여인

아침마다 내 침대로 기어올라와 단잠을 깨우는

그때마다 뒤통수를 내리치는데도

조금도 섭섭치 않은 눈길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안겨오는 여인

그녀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도 없지만

이루어지기도 싫은 까닭에

내 양말을 물어뜯거나 연습장을 찢어 놓으면

그녀의 촌스러운 이름을 외치며

식탁밑으로 숨는 그녀를 한대 쥐어박는다.

갑쑨아!”

 

기다림 / 원태연


가장 고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전화를 걸지요

고된 날에는

망설임도 힘이 들어 쉬고 있을테니까요

 

가장 우울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편지를 쓰지요

우울한 날의 그리움은

기쁜 날의 그리움보다

더욱 짙게 묻어날테니까요

 

고된 일을 하고

우울한 영화를 보는 날이면

눈물보다 더 슬픈 보고픔을 달래며

그대의 회답을 기다리지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 원태연

 

티격태격 싸울 일도 없어졌습니다.

짜증을 낼 필요도 없고

만나야 될 의무감도

전화해야 하는데 하는 부담도

이 밖에도 답답함을 느끼게 하던

여러가지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만나볼 겁니다.

전에는 늦게 들어올 때

엄마보다 더 눈치가 보였는데

이제는 괜찮습니다.

참 편해진 것 같습니다.

근데... 이상한 건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아무 할일이 없어진 그 시간에

자꾸만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이제는...

혼자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 원태연

 

심심한 저녁시간이면

특별한 용건 없이 전화 걸어

몇 시간이고 애기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소개팅 같은 거 할 때면

좀 찔리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 마음 들게 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참 많은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인기스타보다 더 보기 힘든 사람이 생긴 것과

아파도

열이 많이 나도

나 아파 하고 기댈 곳과

열 재줄 손이 없어졌고

생일이나 의미가 있는 날

선물을 고를 일도 기대할 일도 없어진 것이

또 그렇습니다.

토요일 오후나 공휴일 아침이면

당연히 만나고 있어야 하는데

친구를 만나고 있거나

TV를 보고 있으면

이제는 우리가 아니란 걸 실감하게 됩니다.

어떤 이름이 부르고 싶어지거나

어떤 얼굴이 보고 싶어지면

그때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듯한데 / 원태연


그리 먼 얘기도 아닌 듯한데

당신 이름 석자 불러보면

낯설게 들립니다

그렇게 많이 불러왔던 이름인데...

 

그리 먼 얘기도 아닌 듯한데

당신 고운 얼굴 떠올리면

썰렁할 정도로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많이 보아왔던 얼굴인데...

 

그리 먼 얘기도 아닌 듯한데

이제는 잊고 살 때가 되었나 봅니다

외로움이 넘칠 때마다 원해 왔던 일인데

힘들여 잊으려 했던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파옵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해 왔던 일인데...

 

복구공사 / 원태연


추억공사중

사랑통행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현재 미련구간 복구공사로 인해

사랑통행이 금지되오니

다른 사랑을 이용하시거나

부득이한 분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구가 끝난다 해도

예전 같은 통행은 어려울 것 같으니

이 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유비무환 / 원태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너무 자주 보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무심히 지나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너무 많이 가지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그 마음 가져가려 할 때

큰 상처 없이 돌려줄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마세요

사랑이 끝난 후

그 아름다운 기억이

한 방울 눈물로 기억되지 않도록

 

때로는 우리가 / 원태연


때로는 그대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으면 합니다.

모자랄 것 없는 그대 곁에서

너무도 작아 보이는 나이기에

함부로 내 사람이 되길 원할 수 없었고

너무도 멀리 있는 느낌이 들었기에

한 걸음 다가가려 할 때

두 걸음 망설여야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그대와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사랑의 시간이 지나간 후

친구도 어려운 이성보다는

가끔은 힌들겠지만

그대의 사랑얘기 들어가며

영원히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담없는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수진 인연이었으면 합니다.

서로가 잘되는 꼴을 못보고

헐뜯고 싸워가며

재수없는 날이나 한번 마주치는 인연이었으면

생살 찢어지는 그리움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미안해요 하느님 / 원태연

 

나 선한 일을 많이 하여

하느님의 신뢰를 받아

그 능력을 조금이라도 부여받는다면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외로운 이들에게 참다운 벗을

거짓인생 사는 이들에게 진실을

투기와 욕심이 가득한 이들에겐

사랑을 선물하리라

그러나

현실로 내게 그 힘이 주어진다면

모든 일을 뒤로하고

네가 나만을 생각하게 만들리라

그런 후 신의 노여움을 사

걷지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될지라도

[가 나만을 생각하며

영원히 머물러만 준다면

웃으며 그렇게 하리라

 

가지 말라 하셔도 / 원태연


가라 하시면

가야 하지요

마음 밖으로 멀리멀리

아주 가라 하시면

돌아보지 말고

가야 하지요

 

가지 말라 하셔도

가야 하지요

연민만으로 사랑하기엔

구속이 너무 심한 걸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까지

남아 있을 자신도 없는 걸

 

가라 하셔도 가슴 아픈데

가지 말라 하시면

못내 눈물 보이고 말지요

사랑하고 계셨구나 알 수 있지요

그 한마디로도

오랜 세월 그리워해도 될

이유가 되지요

 

술버릇 / 원태연


술 마시면 어김없이

그대를 생각합니다

한잔 한잔 보태갈수록

더 진하게 떠오릅니다.

술 취하면 어김없이

그대에게 전화를 겁니다.

일곱 자리 누르는데

칠십 번도 더 주저하다

그런 내가 초라해 보여

그냥 내려놓습니다.

술이 깨면 어김없이

어제일을 후회합니다.

쓰린 속 냉수로 씻어내며

그저 한편에 자리했던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그 날을 떠올려 봅니다.

 

부 기도문 / 원태연

 

가진 건 돈뿐이신 우리 아버지시여

숨기고 계신 땅을 계속 불리사

투기에 임하시옵고

친구가 외제차를 수입함과 같이

제게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쓰다 지칠 돈을 주시옵고

제가 애인에게 다른 애인을

안 걸리듯 아버지도 어머니 눈치 좀 보시옵고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신경쓰지 마시옵고

다만 법에서만 구하시옵소서

땅과 빽과 쾌락이

아버지와 제게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름다운 당신 / 원태연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잘생긴 턱선과

시원한 이마를 가진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터무니없는 많은 기억으로 상처 주시고

그 터무니없이 많은 기억으로

치료를 해주시는

그 사람 이름을

당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 이름 떠올리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지만

그 이름 떠들어댈 자격이 없는 몸이라

눈물을 머금고

그 사람 이름을

아름다운 당신이라고만 합니다.

 

평생을 두고 기억나는 사람 / 원태연


평생을 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 알고부터

그것이라고 바래야 했다.

어쩌면

당연한 권리라 생각하며

슬프디 슬픈 사랑으로 기억 속에 남아

그 가슴 촉촉이 적시울 수 있게 되기를

이룰 수 없게 된 사랑을 대신해 바래야 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그 눈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기를

참으로 부질없음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믿으며

진작부터 그런 바람으로

평생을 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애원이라도 하며 바랬어야 했다.

 

이별 / 원태연


그 사람 마음이 진정이라면

그 사람 생각대로 될 수 있게 도우소서

내 힘으로 하려했던 모든 기도 거두시고

이제는 그 사람을 도우소서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그래서 잊어버렸던 옛얼굴 기억해낼 수 있도록

찢어버렸어야 했을 사랑의 편지

이렇게 고이 간직하는 죄쯤으로 알고

나는 살아갈 테니

그 사람 마음이 진정이라면

그 사람의 생각대로 될 수 있게

그 사람을 도우소서

 

둘이 될 수 없어 / 원태연


둘에서 하나를 빼면

하나일 텐데

너를 뺀 나는

하나일 수 없고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이어야 하는데

너를 더한 나는

둘이 될 순 없잖아

언제나 하나여야 하는데

너를 보낸 후

내 자리를 찾지 못해

내 존재를 의식 못해

시리게 느껴지던

한마디 되새기면

그대로 하나일 수 없어

시간을 돌려달라

기도하고 있어

 

둘에서 하날 빼면 하나일 순 있어도

너를 뺀 나는

하나일 수 없는 거야

 

서글픈 바람 / 원태연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삐그덕 문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 잔의 차를 시켜 놓고

막연히 앞잔을 쳐다본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 속 깊이 인사말을 준비하고

그 말을 반복한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서는 발길

초라한 망설임으로

추억만이 남아 있는

그 찻집의 문을 돌아다본다.

 

대가리가 단단한건지 / 원태연


아리랑은 없어도

가라오케는 언제나 만원이다

건빠이는 외쳐대도

지화자를 외치는 이는 없다

로바다 야끼가

포장마차보다 많아진다

사찌꼬는 따라불러도

우리의 소원을 부르면 어색하다

우리 스스로

다시 한번 식민지가 되려고

구슬땀을 흘려 가며

아주 광적으로 노력들을 하고 있다

 

대가리가 단단한건지 / 원태연


참 대단한 민족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더 이상의 더러운 짓은

할 수 없을 정도의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러 놓고

쫓겨 도망간 민족

도망가면서까지

더러운 짓을 하나라도 더 하고 가야겠다는

굳은 신념하에 떠나간 민족

얼마나 위대합니까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더 대단한 민족이 있습니다

그렇게 당하고서도

옛일 떠올리면 뭐하냐

잊고 다시 한번 밟혀 보자

하는 식으로 두 팔도 모자라

사지를 벌려 그 민족을 받아들이는

대단한 민족이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민족의 자손이

지금 이 낙서를 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이런 날 만나게 해 주십시요 / 원태연


이런 날 우연이 필요합니다

그 애가 많이 힘들어하는 날

만나게 하시어

그 고통 덜어줄 수 있게

이미 내게는 그런 힘이 없을지라도

날 보고 당황하는 순간만이라도

그 고통 내 것이 되게 해 주십시요.

 

이런 날 우연이 필요합니다.

내게 기쁨이 넘치는 날

만나게 하시어

그 기쁨 다는 줄 수 없을지라도

밝게 웃는 표정 보여 줘

잠시라도 내 기쁨

그 애의 것이 되게 해 주십시요.

 

그러고도 혹시 우연이 남는다면

무척이나 그리운 날

둘 중 하나는 걷고 하나는 차에 타게 하시어

스쳐 지나가듯

잠시라도 마주치게 해 주십시요.

 

누군가 다시 만나야 한다면 / 원태연

 

다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여전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당연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그리워 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또 너를

다시 누군가와 이별해야 한다면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 한다면

두번 죽어도 너와는..

 

사랑의 크기 / 원태연


사랑해요

할 때는 모릅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랑했어요

할 때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내려 앉은 다음에야

사랑

그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과소비 / 원태연

 

시원한 음료수

아니 차가운 맥주

타고 다닐 자동차

아니 외제 스포츠카

부드럽고 긴 머리

아니 얼굴에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

먹고 살 만한 은행 잔고

아니 쓰다 쓰다 남을 통장

혼자 살 만한 아파트

아니 2층 짜리 빌라

인정받을 만한 지식

아니 그들을 사용할 능력

그 다음

이 모두를 함께 누릴

사랑하는 여자

아니,

 

그냥 좋은 것 / 원태연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사람

어느 순간 식상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끌리는 부분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그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 그 부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그저 좋은 것입니다

 

말 잘 듣는 아이 / 원태연


내가 두고가라 한 건

추억 조금이었는데

느닷없이 찾아 올 썰렁함이 싫어

다른 이름을 마음속에 새겨놓을까 봐

추억 조금 남겨 놓으라 한 건데

말 잘 듣는 그 아이는

남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두고가

아직까지 멀리까지

혼자인걸 못 느끼게 하네

 

내가 가지고 가라한 건

사랑 조금이었는데

다음 세상으로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라도 생각나는 얼굴이고 싶은 욕심에

사랑 조금 가져가라 한건데

말 잘 듣는 그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줄 사랑마저 남겨놓지 않아

사랑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네

 

내가 간직하라고 한 건

슬픈 기억 조금이었는데

언젠가 잊혀지게 될

우리 얘기가 눈에 밟혀

가슴 조금 상한다해도

우리가 책임져야 할 얘기이기에

슬픈 기억 조금 간직하라 한건데

말 잘 듣는 그 아이는

없던 일까지 만들어 간직하려 하려는지

보고만 있기에도 눈물이 필요한 표정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네

 

정말 싫어질 때 / 원태연


정말 싫어지면

말이 없습니다

표정이 없습니다

꼴도 보기가 싫다 하지 않습니다

인상을 찌뿌리지도 않습니다

때리지도 않습니다

투정도 없습니다

정말 싫어질 때는

표정도, 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말없이

떠나달란 뜻입니다

 

누가 무엇이 / 원태연


돈 좋고 그짓 좋아

씹놀리는 년들도

버젓이 고개들고 식자에 들어가는데

그분들은

희생뿐인 우리 할머니들은

이제껏 고개 못들고

썩어버린 가슴

담배로 달래게 하는가

 

나라 팔아먹지 못해 발 구르고

민족의 자존심을 도매로 넘겨버린

쌍놈의 것들도

애국자라 목청 찢어지게 소리치며

눈 시퍼렇게 뜨고 배 두드리며 살아가는데

누가 무엇이

죄는 그분들이 다 지신 듯

큰 기침 한번 어렵게 만들었나

 

억울해 저승도 못 가시는

그 원귀들을 어찌 감당하려

누가 무엇이

오늘까지 오게 했는가

 

눈물에...얼굴을 묻는다 / 원태연


너의 목소리, 눈빛, 나를 만져주던 손길,머릿결

부르던 순간부터 각인 되어버린 이름,

어쩌면 재앙과도 같았던 사랑

우리는 서로의 사랑에 그렇게 중독되어 갔다

니가 조금만 더 천천히 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그 때

너의 눈물에 손끝조차

가져가 볼 수가 없던 그 때

단 한번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이유로

살점을 떼어내듯 서로를 떼어 내었던 그 때

나는 사람들이 싫었고 사람들의 생각이 싫었고

사람들의 모습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사랑도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인가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그렇게 서로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뿐인 사랑을 지켜내지 못했었다

마지막임을 알고 만나야 했던 그날,

얼굴을, 목소리를, 상처를, 다시 한번 각인 시켰던 그날

너를 보내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싶었던 기도를

하얀 눈이 까맣게 덮어 버렸던 그날,

이제 나는 무엇을 참아내야 하는가

이런 모습으로 이런 성격으로 이런 환경으로 태어나

그렇지가 않은 너를 만난 죄

니가 나를 사랑하게 만든 죄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 그것뿐이었던 죄

그렇다면 이모든 나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도 살아있음에 미련이 없음이

나를 더욱더 가볍게 만들어 준다

의미를 남겨두고 싶어 올려다본 하늘에

눈물에 얼굴을 묻던 너의 모습이 아련하게 스쳐간다

내가 태어나던 날의 하늘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 . .

 

예감한 이별 - 원태연


이별을 예감하는 일이란

피멍든 가슴에

비수가 꽃히는 아픔보다

통증이 심한 것

눈앞에 두고도

싸늘히 이별을 느낄 때가

이별 후의 시간보다

더 힘들 수도 있는 것

 

착한 헤어짐 - 원태연


떠나갈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을 위해

모진 척 싸늘하게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나 간 사람을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아니라고

죽어도 아니라고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

억지로 삼켜가며

헤어지는 자리에서는

슬프도록 평번하게

 

이런 젠장 - 원태연


생각이 날 때마다

술을 마셨더니

이제는

술만 마시면

생각이 나네

 

요즘 우리는 - 원태연


이별하려고

사랑을 하고 있다

 

우울해지는 이유 - 원태연


잊으려는 고통보다

잊혀지는 슬픔이

더 크기 때문에

 

자랑 - 원태연


우리 아버지를

좀 알려 주고 싶은데

착하게 살아오셨다고

정직하게 살아오셨다고

존경받으실 만하다고

이런 걸 좀 나타내고 싶은데

미약한 필력으로

행여 욕되게 할지 몰라

그저 존경한다고

엄마를 좀 고생시킨 것만 빼고는

모두가

자랑스럽다고

 

사용설명서 - 원태연


씹어 삼키면 안 됩니다

목구멍이 크게 아프지 않을

적당한 크기로 얼려

꿀꺽 한번에 삼켜야 합니다

목구멍부터

찌릿한 찬 기운이 밀려올 테지만

참고 또 참으며

먼저 삼켰던 얼음들이

다 녹아버리기 전에

부지런히 삼켜 채워넣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감기에 걸리거나

복통으로 받는 고통이

훨씬 덜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어느 정도 얼음들이 쌓여

가슴을 다 얼렸다 생각이 들 때

준비했던 손망치를 사용합니다

한 번에

정확히.


아침 - 원태연


막 뽑아낸 커피를 마신다

막 떠오르는 그리움

눈물이 나온다

.

 

상처 - 원태연


먹지도 않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있는 것 같다

그것도

.

 

익사 - 원태연


자살이라뇨

저는 그럴 용기 낼

주제도 못되는 걸요

그저

생각이 좀 넘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뿐이예요.

 

거울 - 원태연


보여준다

그리고 덧붙여

그는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하다

그만두었다고 한다.

 

절망에 관한 독백 - 원태연


인간들은

다람쥐에게

쳇바퀴 하나를 만들어주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오늘과 같은 내일을

대신 살아주길 바란다.

 

만취 - 원태연


한 잔이 모여서

두 잔이 된다지요

한 잔이 모여서

한 병이 된다지요

한 잔이 모여서

세 병이 된다지요

고마운 한 잔이

어서어서 모이면

어김없이 버거운 오늘이

후딱,

가버린다지요.

 

원죄 1 - 원태연


조금 더

노력해야 해

노력의

노력을 다해

조금은 더

노력하고 살아야 해

보다 화려한 장례를 위해

피똥 흘리며

노력에

노력을 다해야 해.

 

원죄 2 - 원태연


마음을 추스리지 못해

혼자 엄청나게 괴로워할 때가 있다

그냥 한 번

숨이나 쉬어보지 말자 하고

가만히 있어 보면

이게 아니구나 싶어서

한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고민에 빠진다

이제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

새로운 문제거리들로

골머리를 앓느라

지나간 생각들은

어디로들 가버렸는지 알 수도 없지만

그것이 해결은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그만큼 익숙해

자신의 고민은 매우 특별하다고

버둥대지만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눈에겐

유치한 흥미거리

나의 고민은

내가 만든건지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이 만든건지

에 대한 고민으로

또 하루만큼의 나를 괴롭힌다.

 

타살 - 원태연


절제를 배우지 못해

나를 또 죽이네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절충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난 그만

절제를 배우지 못해

다시 한 번

나를 죽이네.

 

자유 - 원태연


그래야만 하는 것도 없고

그래서는 안되는 것도 없다

중요한 건

결정이다

정해진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낚시터 - 원태연


걸린다

또 걸린다

미끼인 줄 알면서,

두 눈이 달렸기에

정확히도 알면서도

걸린다

또 걸린다

꾸물꾸물 유혹하는

구수한 희망에

걸린다

또 걸린다.

 

- 원태연


어디서 왔냐고 한다

어디를 찾느냐고 한다

처음으로 가는 길을 묻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인색한 눈으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놈 보듯

어디서 왔냐고 한다

어디를 찾느냐고 한다.

 

어쩌죠 - 원태연


까맣게 잊었더니

하얗게 떠오르는 건.

 

집단 - 원태연


가끔씩

굉장히 유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정체 - 원태연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나

그렇다면 너는 바람이었을까?

 

사랑한다는 것은 - 원태연


이렇게 속으로는 조용히 울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게 하는 일

 

별 땅 - 원 태 연


마음둘 곳을 찾아 헤매인다

 

체중계 - 원태연


숫자로써의 나

그나마 변함없는 모습

 

컴퓨터 - 원태연


나 너만 있으면 됐는데

왜그렇게넌 필요한게 많았을까 ..

나 너만 있으면 됐는데

왜그렇게넌 필요한게 많았을까

- 그녀와 나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통증 - 원태연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이렇게 쓴가보죠

당신없이 지내고 있는 내 모든 시간들

 

어느 날 - 원태연


정말 보고 싶었어 그래서 다

너로 보였어 커피잔도

가로수도 하늘도 바람도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는 사람들도

다 너처럼 보였어

그래서 순간 순간 마음이 뛰고

가슴이 울리고 그랬어

가슴이 울릴 때마다

너를 진짜 만나서 보고 싶었어

라고 얘기하고 싶었어

 

향기- 원태연


이상해

정말 이상해

이건 진짜 이상해

니가 없어도 니가 느껴져

이상해

정말 이상해

 

연어 - 원태연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잖아

떠나도 또

떠나도 다시

떠 나 도

 

순간 순간 - 원태연


떠나고 싶어

하지만 한 번도 떠난 적은 없어

이상하지 떠나고 싶어지면 짐을 싸야 하는데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먼저 찾고 있으니까

이것저것

묶였고 묶어버린 끈들 때문에

떠나고 싶단 생각도 금방 접어버려

그때마다 난 떠나고 싶어

 

그냥 좋은 것 - 원태연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사람

어느 순간 식상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끌리는 부분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그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 그 부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그저 좋은 것입니다.

 

해결 원태연


뭘 해보고 싶어도

돈이 안 댐빈다고

그럼 시비걸어

댐빌 때까지

 

영어 2 재수강하며 - 원태연


미국 애들은

생각도 영어로 하겠지

얼마나 좋을까

씨팔

 

벤취 - 원태연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한 사람은 혼자였다

두 사람이 앉아 있다

두 사람은 혼자였다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세 사람은 혼자였다

네 사람이 앉아 있다

네 사람도 혼자였다

 

빠삐용 - 원태연


보지 좀 마

바쁘잖아

버스도 기다리고

신문도 봐야 하고

은행도 다녀와야 하는데

괜찮으니까 보지 좀 마

신경쓰지 좀 마

숨막히잖아

전기세도 내야 하고

카드값도 막아야 하고

애 성적도 신경써야 하는데

안 섭섭하니까 신경 좀 꺼 줘

생긴대로 살게

위로 받기도 싫고

칭찬도 충고도 싫어

제발이지

몰랐었다 생각해

아예 죽었다 생각하든지

어디가서 죽어버렸다 생각하고

내버려 좀 둬

누가 어디있냐 물으면

죽었다고 해 줘

 

사랑해 - 원태연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을 년

미친 개한테 주둥아리 물릴 년

달리는 차바퀴에서 튕겨나온

돌에 맞아 죽을 년

발바닥을 바늘로

죽을 때까지 찔러도 시원찮을 년

아무리 심한 욕을 하고

죽일 년 살릴 년 해 보아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

 

그리움 - 원태연


손톱

머리카락

아니면

도마뱀 꼬리와 같은 것

 

- 원태연


어쩌면

못 이루었을 때

이루어지는

 

연체 - 원태연


당신은

지정된 기간 내에

미련을 정리하지 못했으므로

현재 지니고계신 아픔에

10%가 가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2차 정리 기간 내에도

미련 구좌 정리를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담보로 잡혀있는 앞으로의 사랑을

부득이

차압할 수 밖에 없사오니

부디 정해진 기간 내에

정리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타살 - 원태연


저녘 나절

자기가 보낸 하루에 찌들어

절망하는 친구에게

술을 사주었다

그 친구가

아침에 찾아왔으면

눈뜨자마자

책임져야 할 하루에 눌려

버둥대고 있었다면

가지고 있던 쥐약을

나누어 마셨을 것이다

 

가정통신문 - 원태연


안녕하십니까 예비투사 여러분

팔 년 동안 살아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시작될 이 코스는

초급투사 국민학 과정입니다

짝꿍과 적이 되어 싸우는 과정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는

지난 팔 년 동안 교육받으신

우월감과 이기심,부모 직업,

집 형수 등이 되겠습니다

여러분 선배 기수 때까지 이 과정 중

순수함과 꿈 두 과목이 존재하였으나

이 과목으로 인하여 현실 부적격 낙오자가

속출하는 관계로 훌륭하신 문교부 관계자

여러분의 배려로 개편,대학 입학후,

필요에 따라 자유수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년 동안 초급투사 국민학 과정을 통과하시면

무기선택의 폭이 넓어져

영어,수학,컴퓨터 등 다양한 무기를

지닐 수 있게 되겠습니다

이제 곧 부모님이 배정해 주신

무적투사,대학과정 조교들에게

무기사용 방법을 배울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이 무기사용법의 문외한 짝궁들은

무시하고 짓밟아도 무방합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체면과

자신들의 값어치,안락한 미래를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투쟁하시기를 당부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중급투사 중고등과정에서

현실낙오 판정을 받아 피지배계층에 속하는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길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난치병 - 원태연


가을은

기상대보다

내게 먼저 들른다

꾸역 꾸역

어김도 없다

오나보다

또 기어오나 보다

내 가을은

약도 없다

 

시인의 자격 - 원태연


누가 부여하는데요

체계적인 과정이 있나요

그건 또 누가 정해놨는데요

알다가도,

난 시인 자격미달이란 걸

그들보다 잘 알다가도

웃겨요

가끔 웃겨요

 

시간 없다고 - 원태연


내가 빌려 줄게

내 시간

니가 다 써

 

정말 싫어질때 - 원태연


정말 싫어지면

말이 없습니다

표정이 없습니다

꼴도 보기가 싫다 하지 않습니다

인상을 찌뿌리지도 않습니다

때리지도 않습니다

정말 싫어질 때는

표정도,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말없이

떠나달란 뜻입니다

 

사랑해요 - 원태연


문득

가슴이 따뜻해질 때가 있다

입김 나오는 겨울 새벽

두터운 겨울 잠바를 입고 있지 않아도

가슴만은

따뜻하게 데워질 때가 있다.

그 이름을 불러보면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렇게 문득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일기 - 원태연


자다가도 일어나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얼핏 눈이 떠졌을 때 생각이 나

부시시 눈 비비며 전화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터무니없는 투정으로 잠을 깨워놔도

목소리 가다듬고

다시 나를 재워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워낙에 욕심이 많은 것일까 생각도 들지만

그런 욕심마저 채워주려 노력사는 사람이 생겨준다면

그 사람이 채워주기 전에

욕심 따위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양치를 하다가도

차가 막힐 때도

커피를 사러 가다가도 생각이 나는 사람

그런 사람 있다면

그런 사람이 나를 원해 준다면

자다가도 일어나 반겨줄 것 같습니다.

 

이혼 - 원태연


부럽다

나도

싫어서 헤어져 보고 싶다

한 번 살아라도 보고 싶다

 

살상 무기 - 원태연


청산가리, , 농약, 중성자 탄, 피아노 줄, ,

마이크 타이슨 주먹, , AIDS, 마약……,

당 신 의 뒷 모 습.

 

하나만 넘치도록 - 원태연


오직 하나의 이름만을

생각하게 하여 주십시오.

햇님만을 사모하여

꽃피는 해바라기처럼

달님만을 사모하여

꽃피는 달맞이꽃처럼

피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새벽 종소리에 긴긴 여운

빈 가슴 속에

넘치도록 채워주십시오.

하나만 넘치도록...

 

이별역 - 원태연


이번 정차할 역은

이별 이별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잊으신 미련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내리십시오.

계속해서

사랑역으로 가실 분도

이번 역에서

기다림행 열차로 갈아타십시오.

추억행 열차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당분간 운행하지 않습니다.

 

이러고 산다 - 원태연


화장실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밥숟가락 들면서 설거지할 때까지

아니다

눈 뜨는 순간부터 눈 감을 때까지

없던 일까지 만들어 상상하며

미친놈 소리 들어가면서도

희죽희죽 웃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원태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짜증을 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을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을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보고 싶어

넌 누구니?

 

동전이 되기를 - 원태연


우리 보잘 것 없지만

동전이 되기를 기도하자

너는 앞면

나는 뒷면

한 면이라도 없어지면 버려지는

동전이 되기를 기도하자

마주볼 수는 없어도

항상 같이 하는

확인할 수는 없어도

영원히 함께 하는

동전이 되기를 기도하자

 

알아 - 원태연


,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하여금 - 원태연


너로 하여금

나는

바보가 되어간다

나로 하여금

너는

반복되는 필름이 되어간다

 

미련 1 - 원태연


사랑이 떠나버린 사람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무너지게 하는 것은

길에서 닮은 사람을 보는 것보다

우연히 듣게 된 그 사람 소식보다

아직 간직하고 있는 사진보다

한 밤에 걸려온

그냥 끊는 전화일 것입니다

 

미련 2 - 원태연


돌아서야 할 때를 알고

돌아서는 사람은

슬피 울지만

돌아서야 할 때를 알면서도

못 돌아서는 사람은

울지도 못한다

 

기다림 - 원태연


가장 고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전화를 걸지요

고된 날에는

망설임도 힘이 들어 쉬고 있을테니까요

가장 우울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편지를 쓰지요

우울한 날의 그리움은

기쁜 날의 그리움보다

더욱 짙게 묻어날테니까요

고된 일을 하고

우울한 영화를 보는 날이면

눈물보다 더 슬픈 보고픔을 달래며

그대의 회답을 기다리지요

 

다 잊고 사는데도 - 원태연


다 잊고 산다

그러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가슴이 저려올 때가 있다

그 무언가

잊은 줄 알고 있던 기억을

간간이 건드리면

멍하니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그 무엇이 너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못다한 내 사랑이라고는 한다.

 

상사병 - 원태연


처음에는 이쁘게 시작되는 병

조금 심해지면

약간씩 짜증나는 병

거기에 더 발전하면

합병증까지 유발시키는 병

완전히 중증이 되면

속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병

그러나

안 걸리는 것보다

걸려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는 병

세월이

약이 되는 병

 

알려줘 - 원태연


네 사람만 건너뛰면

아는 사람이고

세 시간만 걸어 다니면

아는 사람을 만나고

두 시간만 얘기하면

아는 사람이 되는

어지간히 좁은 세상에 살면서

한 시간도 마주할 수 없는

너와 나는

아는 사람이니

모르는 사람이니?

 

취미 - 원태연


니가 내 취미였나 봐

너 하나 잃어 버리니까

모든 일에 흥미가 없다

뭐 하나 재미난 일이 없어

 

정의 - 원태연

알고 있는 이는

알고만 있으려 하고

믿으려 하는 이는

믿으려 하는 것에 만족하고

행하는 이는

가난해야 하는

이 시대의 정의는

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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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광수 시인의 짧은 시 모음 =

 

 

◆ 산에서 본 꽃

 

 

산에 오르다

꽃 한 송이를 보았네

나를 보고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산에서 내려오다

다시 그 꽃을 보았네

하늘을 보고 피어있는 누님 닮은 꽃

 

 

◆ 봄볕

 

 

꽃가루 날림에 방문을 닫았더니

환한데도 더 환하게 한 줄 빛이 들어오네

앉거라 권하지도 않았지만은

동그마니 자리 잡음이 너무 익숙해

손가락으로 살짝 밀쳐내 보니

눈웃음 따뜻하게 손등을 쓰다듬네!

 

 

◆ 가을햇살

 

 

등 뒤에서 살짝 안는 이 누구 신가요?

설레는 마음에 뒤돌아보니

산모퉁이 돌아온 가을 햇살이

아슴아슴 남아있는 그 사람 되어

단풍 조막손 내밀며 걷자 합니다

 

 

◆ 홍시(紅枾) 두 알

 

 

하얀 쟁반에 담아 내온 홍시 두 알.

무슨 수줍음이 저리도 짙고 짙어서

보는 나로 하여금 이리도 미안케 하는지

 

가슴을 열면서 가만히 속살을 보이는데

마음이 얼마만큼 곱고 고우면 저리될까?

권함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 낙엽 한 장

 

 

나릿물 떠내려온 잎 하나 눈에 띄어

살가운 마음으로 살며시 건졌더니

멀리 본 늦가을 산이 손안에서 고와라.

 

 

◆ 홍류폭포

 

 

수정 눈망울 살금 돌 틈에다 감추고

잠깐 햇살에 또르르 한줌물 손에담고

언제였나 오색 무지개가 꿈인듯하여

바람도 피하는 간월산 늙은 억새사이로

가을 지나간 하얀 계곡을 내려다봅니다.

 

 

◆ 가을에는

 

 

가을에는 나이 듬이 곱고도 서러워

초저녁 햇살을 등 뒤에 숨기고

갈대 사이로 돌아보는

지나온 먼 길

놓아야 하는 아쉬운 가슴

그 빈자리마다

추하지 않게 점을 찍으며

나만 아는 단풍으로 꽃을 피운다

 

 

◆ 비 오는 밤

 

 

기다린 님의 발걸음 소리런가

멀리도 아닌 곳에서 이리 오시는데

밖은 더 캄캄하여

모습 모이지 않고

불나간 방에 켜둔 촛불 하나만

살랑살랑 고개를 내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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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모 시 모음 55

가을 편지 ㅡ양광모ㅡ

 

9월과 11월 사이에

당신이 있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천진한 웃음 지으며 종일토록 거니는

흰 구름 속에

아직은 녹색이 창창한 나뭇잎 사이

저 홀로 먼저 얼굴 붉어진

단풍잎 속에

이윽고 인적 끊긴 공원 벤치 위

맑은 눈물처럼 떨어져 내리는

마른 낙엽 속에

잘 찾아오시라 새벽 창가에 밝혀 놓은

작은 촛불의 파르르 떨리는

불꽃 그림자 속에

아침이면 어느 순간에나 문득 찾아와

터질 듯 가슴 한껏 부풀려 놓으며

사ㄹ랑 사ㄹ랑 거리는 바람의 속삭임 속에

9월과 11월 사이에

언제나 가을 같은 당신이 있네

언제나 당신 같은 가을이 있네

신이시여,

이 여인의 숨결 멈출 때까지

10월에 살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ㅡ양광모ㅡ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태양은 당신의 미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은 당신의 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노래는 당신의 콧노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붉은

노을은 당신의 빰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풋풋한

과일은 당신의 입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사슴은 당신의 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나무는 당신의 어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들녘은 당신의 가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바람은 당신의 손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은 당신의 발걸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약속은 당신과의 만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리는 당신의 숨소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보석은

당신의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입니다

 

가장 위대한 시간 ㅡ양광모ㅡ

 

꽃은 언제 피어나는가

태양은 언제 떠오르는가

바람은 언제 불어오는가

다시!

사랑은 언제 찾아오는가

희망은 언제 솟아나는가

용기는 언제 생겨나는가

또 다시!

 

겨울 편지 ㅡ양광모ㅡ

 

부탁이 있다

첫눈처럼 찾아와 다오

그리움으로 몆 번이고 하늘 바라볼 때

문득 내 가슴에 살포시 내려 앉아다오

부탁이 있다

첫눈처럼은 오지 말아 다오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찾아온 듯 아닌 듯 애태우지는 말아다오

부탁이 있다

첫눈처럼도 아닌 척 찾아와 다오

내 일찌기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 눈으로

무섭게 무섭게 폭설로 쏟아져 다오

부탁이 있다

첫눈처럼이 아니라도 찾아와 다오

봄날에야 내리는 마지막 눈발처럼이라도

한 번은 약속이었다는 듯이 내 가슴에 다녀가 다오

 

결국엔 만날 사람 ㅡ양광모ㅡ

 

내 가슴에

한 번은 만날 사람 있어요

 

내 가슴에

결국엔 만날 사람 있어요

 

그를 만나

영원보다 길게

태양보다 뜨겁게

운명보다 더 운명적으로

사랑 나눠야 할 사람 있어요

 

만약 그가 끝끝내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다 해도

내 가슴에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 있어요

 

겨울이 길다고 어찌 봄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 있겠어요

 

내 가슴에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사람 있어요

 

굿나잇 슬픔이여 / 양광모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다르지

 

굿바이 내 사랑!

굿모닝 내 사랑!

이 다르듯

 

나이를 먹었나봐 자꾸만

안녕 슬픔이여!

인사를 하네

 

하하, 별 일이야 있으려고

굿나잇 슬픔이여!

 

권주가 / 양광모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인생이란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에 술이 없다면

사랑은 또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우리 살아가는 동안

세 잔쯤은 흠뻑 마셔야 하리

 

사랑이여 내게 오라!

사랑이여 영원하라!

사랑이여 행복하라!

 

그대 가슴에 별이 있는가 / 양광모

 

그는 가슴에 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가슴에 별이 없어

슬픈 사람이다

 

우연히 바라본 밤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질 때

 

자신도 모르게 두 손 가지런히

모아지지 않는다면

 

그는 어두운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별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어두운 밤하늘을 홀로 떨어지는

별똥별 같은 사람이다

 

가을이 와도 밤하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아

 

그대,

가슴에 별이 있는가

 

그리운 어머니 / 양광모

 

서러운 날엔

서쪽 바다로 가네

 

노을이 있고

개펄이 있고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

 

해질 무렵에야

노을 빛 얼굴로 돌아오시던

어머니, 이제 막 개펄에서

잡은 꼬막을 넣어 보글보글

된장찌개 맛있게 끓여 주실 테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어

어머니가 차려주신 저녁 밥상에 다가앉다가

왠지 그만 목이 꽉 메이겠지만

 

서러운 날엔

서쪽 바다로 가네

 

아직 내가 걸어가야 할 길 멀지만

그리운 어머니 서쪽 바다 일출 되어

내 발길 비춰주는 곳으로

 

꽃으로 지고 싶어라 / 양광모

 

바람 한 점에

꽃잎 수십 점

 

꽃잎 한 점에

시름 수십 점 흩어지네

 

꽃으로 피어나지 못했어도

꽃으로 지고 싶은 봄날에는

 

왜 사냐 건 웃지요

왜 웃냐 건 또 웃지요

 

꽃을 모아 시를 쓰네 / 양광모

 

나는 예쁜 꽃들을 모아

시를 쓰네

 

장미는 주어

 

백합은 목적어

목련은 형용사

 

철쭉은 부사

국화는 동사

 

코스모스는 토씨

 

그러면 그 시는 꽃시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언약을 위해 바쳐지려니

 

그 시를 건네는 사람의 손에

향기를 남기고

그 시를 받는 사람의 가슴에

꽃잎을 남기고

그 시를 주고받는 사람의 생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으리

 

당신은 이것을 시적 비유라

생각할 테지만

나는 이것을 인생에 대한 지침이라

말하고 싶네

 

꽃을 모아 시를 쓰듯이

맑은 마음을 모아

고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꽃잎이 모여 꽃이 됩니다 / 양광모

 

꽃잎이 모여 꽃이 됩니다

나무가 모여 숲이 됩니다

햇살이 모여 노을이 됩니다

냇물이 모여 바다가 됩니다

미소가 모여 웃음이 됩니다

기쁨이 모여 행복이 됩니다

두 손이 모여 기도가 됩니다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됩니다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이 됩니다

작은 것이 모여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꿈속 그대 / 양광모

 

그대가 나비일런가

나비가 그대일런가

고운 날개 몸에 걸치니

꿈길 백리 꽃길 천리 열리네

향그런 바람 타고 날아오를 제

온 세상 꽃 수줍어 고개 숙이니

그대여 날개짓 조심하시오

내 가슴 속 태풍 불어온다네

 

나는 참 떨리는 사랑을 / 양광모

 

그대를 만난 후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커다란 바윗돌 쿵쿵

떨어지는 소리

누군가 첨벙첨벙

물위를 걸어오는 소리

문득, 문득, 들려오기에

이것이 사랑인가, 이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참 떨리는 사랑을 하고 있구나

생각할 때에 그대는 다시 더욱 커다란 바위가 되어

 

나의 그리움은 밤보다 깊어 / 양광모

 

그대를 사랑하기엔

하루가 짧고

 

그대를 사랑하기엔

일생이 짧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

새벽 밝아 오니

 

그대를 향한 그리움

밤보다 깊다.

 

내 사랑 지지 않는다 / 양광모

 

꽃이 져도

나는 지지 않는다

 

낙엽이 져도

나는 지지 않는다

 

사랑이 져도

나는 지지 않는다

 

사랑에 져도

나는 지지 않는다

 

그 사람 지지 않는 한

내 사랑 지지 않는다

 

내 사랑은 가끔 목놓아 운다 / 양광모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너를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내 사랑은 가끔 목놓아 운다

내 사랑은 늘 목메어 운다

 

사랑아,

사랑을 위해 사랑을 떠나온 사랑아

 

꽃이라도 잎을 위해서는 져야만 하는 것

내 슬픈 목련 같은 사랑,

오늘도 흰 눈물 뚝뚝 떨어진다

 

내 안에 머무는 그대 / 양광모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아침이 밝아왔는데

당신을 만난 후로는

사랑이 밝아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어둠이 밀려왔는데

당신을 만난 후로는

사랑이 밀려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 안에 머무는 그대

당신을 만난 후로는

사랑 안에 내가 머뭅니다

 

내 안에 부는 바람 / 양광모

 

어떤 이는 팔 할이라도 말하고

어떤 이는 살아야겠다 말하고

어떤 이는 스치운다 말하지만

내 안에 부는 바람은 이리 말하네

날아올라라 저 하늘 끝까지

뛰어들어라 저 태양 속으로

잠들지 않는 내 안에 바람은

늘 그리 뜨겁게 속삭이네

 

내 일생쯤 너에게 / 양광모

 

사무치다는

말 좋으다

 

사랑에

사무쳐

 

그리움에

사무쳐

 

뼛속 깊이

사무쳐

 

심장 깊이

사무쳐

 

내 일생쯤 너에게

사무쳐 살아보고 싶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 양광모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안에 존재하는 영혼의 불꽃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나를 운명짓기 때문에

 

너를 처음 만나던 날 / 양광모

 

내가 살아온

모든 봄날의

모든 꽃잎

 

내가 살아온

모든 여름날의

모든 빗방울

 

내가 살아온

모든 가을날의

모든 낙엽

 

내가 살아온

모든 겨울날의

모든 눈송이

 

너를 처음 만나던 날

일제히 쏟아져 내렸네

물론, 꿈만 같았지

 

너의 꽃말 / 양광모

 

진달래는 불타는 사랑

벚꽃은 흩날리는 이별

목련은 순결한 그리움

작은 꽃 한 송이,

너는 나의 운명

 

진달래처럼 사랑하다

벚꽃처럼 이별해도

목련처럼 그리워할

너의 꽃말은,

나의 운명

 

눈물 흘려도 돼 / 양광모

 

비 좀 맞으면 어때

햇볕에 옷 말리면 되지

 

길가다 넘어지면 좀 어때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되지

 

사랑했던 사람 떠나면 좀 어때

가슴 좀 아프면 되지

 

살아가는 게 슬프면 좀 어때

눈물 좀 흘리면 되지

 

눈물 좀 흘리면 어때

어차피 울며 태어났잖아

 

기쁠 때는 좀 활짝 웃어

슬플 때는 좀 실컷 울어

 

누가 뭐라 하면 좀 어때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이잖아

 

다시 일어서는 삶 / 양광모

 

잠시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눈물이여 이별이여 죽음이여

 

다시 돌아와 줄 수 있겠니

기쁨이여 사랑이여 영광이여

 

다시 손 내밀어 줄 수 있겠니

순수여 자유여 정열이여

 

다시 말해 줄 수 있겠니

희망이여 용기여 신념이여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나의 품으로 돌려줄 수 있겠니

그대, 스스로 일어서야 할 나의 영혼이여

 

달은 빛나건만 / 양광모

 

달이 밝으니

별이 빛을 잃고

 

사랑이 깊으니

마음이 갈 곳을 잃네

 

만월은 손가락 끝에 있건만

내 님은 어느 하늘 천 리 밖에 있는가

 

당신도 그런가요 / 양광모

 

비가 오는 날이면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하늘이 흐린 날이면

그대가 너무 그리워요

 

비도 오지 않고

눈도 내리지 않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햇살 눈부시게 밝은 날이면

그대가 너무 너무 그리워요

 

어디선가

나를 그리워할

그대여, 당신도 그런가요?

 

동백에게 죄를 묻다 / 양광모

 

동백꽃 피었다 질 제

선운사에 발길 닿았네

바람은 천 년

부처님 미소는 일만 년

나그네, 찻잔 들었다 놓아도

영겁의 시간 흐르건만

동백꽃, 불타던 가슴아

봄 한 철이 어인 덧없음이냐

사랑이 수이 짐이

네 탓이라 말하리

 

마음 꽃 / 양광모

 

꽃다운 얼굴은

한 철에 불과하나

 

꽃다운 마음은

일생을 지지 않네

 

장미꽃 백 송이는

일주일이면 시들지만

 

마음꽃 한 송이는

백 년의 향기를 내뿜네

 

멈추지 마라 / 양광모

 

비가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고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른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이 막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인생이란 작은 배

그대, 가야할 곳이 있다면

태풍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

 

목련꽃 피거든 / 양광모

 

순백의 웨딩드레스

곱게 차려 입은 봄의 신부

 

한 잎 한 잎 옷을 벗어

백의의 침대 만드네

 

뉘라서 저 장미 꽂보다 붉은

사랑 뿌리칠 수 있을까

 

오늘도 목련꽃 아래 서성이며

베르테르는 로테를 기다리네

 

사랑이여! 사랑이여!

목련꽃 피거든 모두 다 이루어지거라

 

무료 / 양광모

 

따뜻한 햇볕 무료

시원한 바람 무료

 

아침 일출 무료

저녁 노을 무료

 

붉은 장미 무료

흰눈 무료

 

어머니 사랑 무료

아이들 웃음 무료

 

무얼 더 바래

욕심 없는 삶 무료

 

바람 부는 봄날에는 / 양광모

 

벚꽃나무 아래

꽃비 흩날리니

술잔마다 꽃잎 떠있네

 

가난이 무슨 걱정이랴

오늘은 꽃잎 깔고

내일은 꽃잎 덮으리

 

바람 부는 봄날에는

동백꽃 닮은 여인을

만나고 싶어라

 

/ 양광모

 

어둠이 아니라 빛을 봄

어제가 아니라 내일을 봄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봄

내가 아니라 우리를 봄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날에도

나의 눈에는 언제나 봄

 

비 오는 날의 기도 / 양광모

 

비에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때로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사랑과 용서는

폭우처럼 쏟아지게 하시고

미움과 분노는

소나기처럼 지나가게 하소서

 

천둥과 번개 소리가 아니라

영혼과 양심의 소리에 떨게 하시고

메마르고 가문 곳에도 주저 없이 내려

그 땅에 꽃과 열매를 풍요로이 맺게 하소서

 

언제나 생명을 피워내는

봄비처럼 살게 하시고

누구에게나 기쁨을 가져다주는

단비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 이 세상 떠나는 날

하늘 높이 무지개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사랑아 내 부르거든 / 양광모

 

사랑아,

내 부르거든

너 바람같이 달려 오거라

 

천 리 길

가시덤불

산과 바다

뛰어 넘어

 

사랑아,

내 찾거든

너 벼락같이 날아 오거라

 

천당 길

지옥 길

여름과 겨울

뛰어 넘어

 

사랑아,

내 목놓아 울거든

너 벼르던 운명처럼 다가 오거라

 

사랑을 위한 기도 / 양광모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나를 사랑한 사람보다 많게 하소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깊이 그를 사랑하게 하시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그를 사랑하게 하소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뜨겁게 그를 사랑하게 하시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순결하게 그를 사랑하게 하소서

 

어느 날 불현듯 나를 미워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그를 사랑하게 하시고

어느 날 불현듯 나를 잊어버리더라도

변함 없이 그를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사랑 받으며 산 날보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산 날이 더 많게 하소서

 

그것이 자신의 영혼과 삶을

참사랑 하는 하나뿐인 길임을

사랑 속에서, 오직 사랑의 힘으로 깨닫게 하소서

 

슬픔이 강물처럼 흐를 때 / 양광모

 

슬픔이 강물처럼 흐를 때

차라리 나는 깊은 강이 되리

 

슬픔이 파도처럼 밀여올 때

차라리 나는 넓은 바다가 되리

 

슬픔이 절벽처럼 찔러올 때

차라리 나는 높은 산이 되리

 

그러며 끄떡없지

그러면 아무 일 없지

 

슬픔이 아무리 큰들

내 생보다야 더 크겠나

 

입술 지그시 깨물고

꿀꺽 목넘겨 그 슬픔 삼키리

 

그러면 끄떡없지

그러면 아무 일 없지

 

아내 / 양광모

 

장미꽃보다

아름답던 그 여인

 

코스모스로

동백으로

목련으로

피고 지더니

 

이제는 내 가슴속

무궁화 꽃 되었네

 

애인을 구합니다 / 양광모

 

애인을 구합니다

까다롭거나 사람을 많이 가리는

성격은 아니므로

그저,

 

예쁘고

상냥하고

날씬하고

세련되고

섹시하고

지적이고

유머가 넘치고

미소가 아름답고

문학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멋지게 추고

음식을 맛있게 만들고

보석보다는 꽃을 더 좋아하고

신보다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안주보다는 술을 더 잘 먹으며

무슨 말을 하던지 깔깔깔 잘 웃어주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하늘처럼 생각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찾는다고 말하면

따뜻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 지으며

꼭 찾아봐 주겠노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줄 그런 여자를 구합니다

 

설마,

욕심이 과한 건 아니겠지요?

 

일주일쯤 함께 술을 마시며

지구에서 10억 광년쯤 떨어진 B612 행성에

작은 살림방 하나 마련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의논을 주고받을까 하노니

 

언약 / 양광모

 

사랑이란

천국으로 가는 계단

 

이따끔 미끄러져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나의 눈물은

당신의 미소보다 눈부시고

 

나의 상처는

당신의 사랑보다 찬란하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도

 

이것이

마지막 정열은 아니리니

 

오직 한 가지 맹세하는 것은

사랑이여, 지옥불 앞에서도 뒤돌아서지 말자

 

우리 더불어 / 양광모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자*

 

냇물이 냇물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강이 되자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마을이 되자

 

내가 당신에게 말합니다

우리 더불어 사랑이 되자

 

우산 / 양광모

 

삶이란

우산이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이 더 이상

펼쳐지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운명 같은 사랑 그리운 날엔 / 양광모

 

운명 같은 사랑 그리운 날엔

뿌리마저 뽑아들고 동쪽바다 성끝마을

슬도(瑟島)로 가자

 

눈 기둥처럼 흰 등대

우뚝 서 있고

흐린 날이면 비가

맑은 날이면 파도가

슬픈 사랑의 노래, 365일 비파(琵琶)

연주하는 곳

 

이따금 섬 뒤편으로 날아드는

갈매기 두 마리,

우산 속에 몸 가리고 날개 부비면

등대의 심장에도 붉은 피 돌아

먼바다 돌고래 떼 가슴께 까지 불러들이는 곳

 

결국에야 갈매기 떠나고 나면

또 한 사연 현무암 바위에

작은 구멍 되어 새겨지고

바람 부는 날이면 수 만개의 구멍

일제히 잔울음 터뜨리는 곳

 

운명 같은 사랑 그리운 날엔

슬도 바위에 앉아

흰 새 되어 기다려 보라

 

가을 아침처럼 다가와

꺼지지 않는 불빛

가슴속 등대에 밝혀놓는 사람 있으니

그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조명빨 / 양광모

 

골목길 어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유난히 반들거리는

담쟁이 푸른 잎사귀의

머쓱한 표정

 

흉내내며, 나는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백열전등 같은 아내의 얼굴 위로

무언의 빚, 무언의 빚

세례를 쏟아붓나니

 

네 덕분이었구나

내 삶은 조명빨이었다

 

/ 양광모

 

짝이 있다는 건 좋은 일

숟가락이건

젓가락이건

신발이건

친구건

연인이건

새건

꽃이건

은행나무건

바퀴벌레건

슬픔이건

술잔이건

짝이 있다는 건 기쁜 일

그것은 이 서운하기 짝이 없는 우주에서 혼자는 아니라는 뜻일려니

오늘은 그대와. 그대의 짝을 위해

짝 짝 짝

 

춘일서정 / 양광모

 

봄밤

꽃피는 소리에

잠을 깨고

 

봄비

꽃 지는 소리에

꽃잎을 헤아리네

 

욕심도 아서라 슬픔도 아서라

봄볕 꽃 그늘에도 꽃 피어난다

 

하루종일 비 / 양광모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꼭 저리하겠지

 

이른 새벽 첫차를 타고

서둘러 찾아오더니

 

늦은 밤 막차를 타고

아쉬워 아쉬워 돌아가네

 

그리도 보고

싶었던 겔까

 

하루종일 당신에게

묻고 싶었네

 

하루쯤 / 양광모

 

1년에 하루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저 웃기만 해도 좋을 일이다

 

1년에 하루쯤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그저 따뜻한 말만 건네도 좋을 일이다

 

그래도 364,

마음껏 아파하며 슬퍼할 수 있고

마음껏 투덜거리며 화낼 수 있으니

 

1년에 하루쯤은

모든 상처와 눈물 잊어버리고

그저 감사만으로 살아도 좋을 일이다

 

언제나 그 하루를

내일이나 모레가 아닌 오늘로 만들며

365일 중 하루쯤, 하며 살아도 좋을 일이다

 

한번은 처럼 살아야 한다 / 양광모

 

누구라도

한 때는 시인이였나니

오늘 살아가는 일 아득하여도

그대 꽃의 노래 다시 부르라

 

누구라도

일평생 시인으로 살순 없지만

한 번은 처럼 살아야 한다.

한 번은 인양 살아야 한다

 

그대 불의 노래 다시 부르라

그대 얼음의 노래 다시 부르라

 

함께 눈물이 되는 이여 / 양광모

 

낮은 곳에선

모두 하나가 된다

 

빗방울이 빗물이 되듯

강물이 바다가 되듯

 

나의 마음자리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와

함께 눈물이 되는 이여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우리 함께 샘물 같은 사랑이 되자

 

행복의 길 / 양광모

 

당신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잘 산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더욱 잘 산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그때 찾아옵니다

당신이 자신의 행복보다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 때

 

사랑의 기쁨이 바로 그러하듯이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 양광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

따뜻한 것이 그립습니다

따뜻한 커피

따뜻한 창가

따뜻한 국물

따뜻한 사람이 그립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조금이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워하는 일일게다

어려서는 어른이 그립고

나이드니 젊은 날이 그립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어 그립고

만나면 혼자 있고 싶어 그립다

돈도 그립고

사람도 그립고

어머니도 그립고

네가 그립고

또 내가 그립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어떤 사람은 따뜻했고

어떤 사람은 차가웠다.

어떤 사람은 만나기 싫었고

어떤 사람은 헤어지기 싫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웠고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자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사람이 그리워해야 사람이다

 

6월 장미에게 묻는다 / 양광모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붉은 열망과

푸른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6월 장미에게 묻는다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겠니

 

누군가를 다시

그리워할 수 있겠니

 

누군가의 가시에 콕 찔려

다시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겠니

 

3월 예찬 / 양광모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 곧 끝난다는 것 알지?

언제까지나 겨울이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 알지?

3월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기지개를 켜며 말하네

아직 꽃 피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활짝 피어나리라는 것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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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소 시 모음 30

 

1

5월을 드립니다

ㅡ김민소ㅡ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하늘을 보며 웃을 일 보다

땅을 보며 울 일이 많다 하여도

마음이란 밭에 꽃씨를 뿌려야 해요

그리고 정성이란 물을 주어요

 

삭풍을 홀로 이겨낸

숲 속의 제비꽃과 자작나무

바위섬의 등대와 조가비

저 강가의 가로등

그리고 빈 의자

 

그들의 사랑을

5월과 함께 드립니다

당신을 위해 빛을 뿜어내는

삶의 눈물겨운 조연들,

당신이 지켜주세요

 

2

그대 만한 선물은 없습니다

ㅡ김민소ㅡ

 

자작나무가 빼곡한 하얀 숲이

영화 속의 풍경 같다 해도

그대의 해맑은 모습만 하겠습니까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레식이

영혼을 적신다 해도

그대의 풋풋한 음성만 하겠습니까

 

저녁놀과 아침해가

찬연한 빗살로 야윈 몸을 휘감는다 해도

그대의 따뜻한 품속만 하겠습니까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 감동은

내 삶을 끝없이 타오르게 하는 이 전율은

그대가 만들어 주는 걸요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대 만한 선물은 없습니다

 

3

꽃보다 아름다운 사랑

ㅡ김민소ㅡ

 

사람들은

꽃이 아름답다 말하지요

하지만 나는 사랑이라 할래요

 

 

꽃은 충분한 조건이 필요하지만

사랑은 그대와 나의 진실,

그 하나만으로 감동이 되잖아요

 

사람들은

꽃이 아름답다 말하지요

하지만 나는 사랑이라 말할래요

 

꽃은 시간 뒤에 존재를 잃지만

사랑은 그대와 나의 믿음,

그 하나만으로 영원을 말하잖아요

 

사람들은

꽃이 아름답다 말하지요

하지만 나는 사랑이라 말할래요

 

그대와 내가 마주보는 한

그대와 내가 함께 걷는 한

온 누리에 향기가 물씬하잖아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랑

마음과 마음이 녹아 흐르는

영혼이 그려나가는 약속이에요

 

4

내가 생각하는 너는

ㅡ김민소ㅡ

 

내가 생각하는 너는

봄날 살랑거리는 꽃잎이기 보다

여름날 땡볕을 막아주는 숲이었음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너는

여름날 몰아치는 장대비이기 보다

가을을 영글게 하는 단비였음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너는

가을 날 떨어지는 낙엽이기 보다

겨울을 지탱케 하는 햇살 이였음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너는

겨울을 울게 만드는 살얼음이기 보다

봄날 꽃씨를 퍼뜨리는 훈풍이었음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너는

, 여름, 가을, 겨울

행복이란 제목의 퍼즐이 되는

그런 사람이 너였음 정말 좋겠다.

 

5

내가 진정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ㅡ김민소ㅡ

 

내가 진정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신도시 평수 넓은 아파트나 빌라나

패션잡지나 TV에서 볼 수 있는 옷이 아니라

지붕위로 쪽창이 두어 개 있는 오래된 통나무집과

치자열매로 물들인 옷이면 족해요

 

종달새와 함께 정갈한 조반을 준비하고

아름드리 갈참나무 빽빽한 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구르몽의 시 구절과 낙엽을 버무리고

겨울이면, 눈밭에 하얀 발자국이 남아있는

도심에서 벗어난 작은 마을이어요

 

빈 텃밭을 싼에 빌려

상추와 오이, 감자와 고구마를 튼실하게 키워

가끔씩 찾아오는 우체부와 이웃들에게

한 무더기씩 손에 들려줄 때

박꽃 닮은 미소를 보는 것이어요

 

내가 진정 그대에게 바라보는 것은

달콤한 사랑의 맹세가 아니라

신문지에 둘둘 말아 내민 쑥부쟁이 한 다발과

바리톤 움색의 노래를 들으며

그대의 팔 베개에에 꿈을 꾸는 것이어요

 

6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ㅡ김민소ㅡ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갈라진 대지가 샘을 파는 일이다

저 땅 속 깊이 숨어있는 순수의 물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가득 펴 담아 뿌려 주는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늘이 청록비를 몰고 오는 말이다

새털구름을 모았다가 이내 먹구름 모아서

그것을 지상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일이다

 

땅속의 물과

하늘의 물이 그렇게 만나서

빈약한 가슴을 적셔가며 서로가 녹아드는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땅이 되었다가

그대가 하늘이 되었다가

천지가 육신과 정신을 오가는 일이다

 

7

당신은 꽃처럼

ㅡ김민소ㅡ

 

아름다운 것들에

깊이 감동할 줄 알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알고

 

아픈 사람

슬픈 사람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울 줄도 알고

 

그렇게 순하게 아름답게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당신도 꽃처럼

아름답게 흔들려보세요.

 

8

당신은 내 생의 마지막 연인입니다

ㅡ김민소 ㅡ

 

강물이 아름다운 것은

도도히 제 자리를 흐르기 때문이고

청산이 눈부신 것은

언제나 푸른빛을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 나는……

켜켜이 스며든 상흔 속에 자연을 등지고

운명의 덫에 허우적거린 시간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계절이 시작되어도

철지난 억새풀로 가득한 가슴

어둠이 줄달음치는 새벽녘에도

혼미한 정신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소리 없이 다가온 당신 때문에

하루는 눈부신 선물이 되었고

자연이 들려주는 모든 소리는

나를 언제나 프리마돈나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사랑했던 나의 연인이여!

사랑이란 온전한 이름으로

온누리에 퍼트릴 수 없는 운명이지만

당신과 내 영혼속에 침잠된 씨앗은

천상의 꽃으로 피어나

불멸의 사랑을 노래할것입니다

 

살아있음은 언제나 소멸하는 것

함께 못하는 인연을 힘들어하기엔

너무나 찰나 같은 생입니다

 

삶의 모퉁이 한 부분에서 이렇게 만나

당신의 체온에 기쁨을 잉태하고

당신의 눈빛 속에 깨어난다는 것은

사랑 그대로의 이름으로 영원한 것입니다

 

하늘이 문을 닫을 때는

별빛으로 다가와 속삭이고

새벽이 빛을 부를 때는

풀벌레 소리로 벅차게 하는 당신은

내 생의 마지막 연인입니다.

 

9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ㅡ김민소ㅡ

 

마지막 버스를 놓쳐버렸습니다

어쩌면 집에 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삶의 시간도 잃어버릴 거라고

 

제동장치가 파열돼버린 생각은

이미 통제구역을 벗어나 버리고

이국 땅 해거름을 헤매고 있습니다

 

간간이 들리는 발자국 소리마다

폭풍이 지나간 풀잎의 상처마다

빛살머리 풀어헤친 가로등 풀빛마다

 

타인이었다가, 그대가 되었다가

절망이었다가, 희망이 되었다가

삶의 절반을 도려낸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10

당신이 봄이십니다

ㅡ김민소ㅡ

 

꽃처럼 예쁘다는 말

별처럼 눈부시다는 말새처럼

비상한다는 그 말들이

당신 앞에선 무기력한 걸 아시나요.

 

향기가 진하기로서야

어둠 속에서 빛나기로서야

창공을 높이 날기로서야

당신의 마음만큼 하겠습니까

 

한 번도 멈춘 적이 없고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고

천지의 높낮이를 잴 수 없이

밀려드는 사랑의 파고를 말입니다.

 

산수유, 종다리, 시냇물이

봄을 달콤하게 알리기로서야

당신의 향기만큼 하겠습니까

 

복사꽃보다 고혹한 당신인데

물푸레나무보다 푸른 당신인데

새벽 별보다 부지런한 당신인데

 

어머니! 아시나요

이 봄이 당신을 닮은 것을요

당신이 봄이십니다.

 

11

당신이 아닐까요

ㅡ김민소ㅡ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노을이 내리는 거리를 걷다보면

뒷모습이 풍경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로등이 없는 어두눈 골목길

고독이란 놈에 취해 휘청거릴 때면

등불이 되어 집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봄날이면 유채 꽃이 되고

여름날이면 소나기가 되었다가

가을날이면 단풍 빛이 되고

겨울날 눈꽃으로 피는

 

일년을 한결같이

캔버스에 내리는 시처럼

희망나무를 가슴에 자라게 하는

그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아닐까요.

 

12

미안해하지 말아요

ㅡ김민소ㅡ

 

제비꽃이 봄을 알리고

장마예보가 여름을 알리듯

사랑은 그대가 존재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청잣빛 높은 하늘이 가을을 알리고

거리의 나목이 겨울을 알리듯

그대는 삶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대여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미안해 하지 말아요

사랑은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그대를 생각하면

나는 갈참나무 숲이 되었어요

내 안에 이기적인 생각을 여과시키니

종다리, 휘파람새가 모여들어

둥지를 틀고 있네요

 

13

사람이 선물입니다

ㅡ김민소ㅡ

 

하늘이 빛나는 것은 은하수 때문이고

들판이 빛나는 것은 원시림 때문이고

세상이 빛나는 것은 사람 때문입니다.

 

아픔이 소중한 것은

기쁨과 함께 하기 때문이고

실패가 소중한 것은

성장과 함께 하기 때문이고

세상이 소중한 것은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고

세상은 나누는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고

사람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해줍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가슴 따뜻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사람이 선물입니다.

 

14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

ㅡ김민소ㅡ

 

사랑이 아름답다고 했나요

아니지요

그대의 투명한 마음 때문이지요

 

원목보다 순백한 마음으로

사랑을 하려는 당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이 눈부시다고 했나요

아니지요

그대의 깨끗한 눈빛 때문이지요

 

새벽이슬 닮은 눈빛으로

사랑을 말하는

당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이 행복이라고 했나요

아니지요

그대의 애틋한 고백 때문이지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사랑을 울리는

당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은

스스로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사랑이 오직

그 이름으로 눈부신 것은

 

영혼을 적시는

그대의 눈물 때문이지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오직 사랑을 위하여 애쓰는 당신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이래요

 

15

사랑보다 아름다운 이름

ㅡ김민소ㅡ

 

사랑이 아름답다고 했나요?

 

아니지요,

그대의 투명한 마음 때문이지요

 

원목보다 순백한 마음으로

사랑을 하려는

당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이 눈부시다고 했나요?

 

아니지요,

그대의 깨끗한 눈빛 때문이지요

 

새벽이슬 닮은 눈빛으로

사랑을 말하는

당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이 행복이라고 했나요?

 

아니지요,

그대의 애틋한 고백 때문이지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사랑을 울리는

당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은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잖아요

 

사랑이 오직

그 이름으로 눈부신 것은

 

영혼을 적시는

그대의 눈물 때문이지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오직,

사랑을 위하여 애쓰는 당신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16

사랑은 보여줄 수 없기에 아름답습니다

ㅡ김민소ㅡ

 

눈을 뜨면 볼 수 있는 것들은

눈을 감으면 볼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이란,

눈을 뜨면 보이지 않다가도

눈을 감으면 더욱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

 

자연을 신비로 물들게 하는 쪽빛 하늘도

대지에 풋풋함을 새겨 주는 나무들도

볼 수 있을 때 가슴 벅찬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보여주려 애쓰면 애쓸수록

단청같은 은은한 향은 어느새 독해지고

순백했던 모습은 짙푸른 이끼로 탈색되지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자연은 폐허로 남겠지만

사랑이란 숨어 있을 수록 더욱 간절하게 합니다.

 

자연이란 성질은 볼 수 있을 때 눈부시다면

사랑이란 성질은 느끼고 있을 때 빛이 나듯

사랑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혁명 같은 것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란

마음과 마음이 녹아 흐를 때 비로소

하나란 이름이 되는 눈물 같은 결실입니다.

 

17

사랑은 정답 없음

ㅡ김민소ㅡ

 

누구는 사랑을 돛단배 노니는

하얀 바다라 말하고

 

누구는 사랑을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이라 말하고

 

누구는 사랑을 눈부신 햇살 같은

언제나 맑음이라 하고

 

누구는 사랑을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 미로라 하고

 

누구는 사랑을 아이의 마음처럼

철부지가 되는 거라 하고

 

누구는 사랑을 노승의 깊은 철학처럼

자신을 비우는 거라 하지만

 

그러나……

사랑은

사랑은

정답 없음……

 

18

사랑을 담아내는 편지처럼

ㅡ김민소ㅡ

 

나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을 담아내는 편지처럼 살리라.

 

폭포수같은 서린 그리움에

쉬이 얼룩져버리는

백색의 편지가 아니라

오염될 수록

싱그런 연두빛 이었으면 좋겠다.

 

나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을 담아내는 편지처럼 살리라.

 

가슴에 커져버린 암울한 상처에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이별의 편지가 아니라

상흔 속에서도 뿜어내는

시작의 편지였으면 좋겠다.

 

미움은

온유함으로 지워버리고

 

집착은 넉넉함으로 포용하면서

한 장에는 사랑이란

순결한 이름을 새기고

 

또 한 장에는

삶이란 소중한 이름을 써 넣으면서

풀 향보다 은은한 내음으로

내 삶을 채웠으면 좋겠다.

 

19

사랑을 위하여

ㅡ김민소ㅡ

 

어느 날

내게 온 당신이

들꽃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기에

꽃다지, 괭이밥, 별꽃,

봄맞이, 솜방망이, 얘기 똥풀, 앵초 등등

식물도감을 찾아가며 머리 속에 담으려고 했어요

어느 날은, 신록을 보면서

"세상이 초록빛이었으면 좋겠다" 하기에

휴일이면, 수목원을 찾아

호랑가시나무, 사철나무, 꽝꽝나무, 회양목과

노닥거리다 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네요

사랑을 위하여

내 살과 내 피와 내 영혼 속에

이식하고싶었어요

저 들꽃을

저 늘푸른나무를

 

20

사랑을 전송 중입니다

ㅡ김민소ㅡ

 

당신은 아시나요

짧은 문자 하나에도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요

 

당신이 봄 비였다고 쓸까

자작나무 숲길을 닳았다고 할까

꽃씨 같은 그대라고 쓸까

 

그리움을 몬닥몬닥 잘라내며

밤새 눈시울을 붉히며 썼던 메일을

보관함으로 이동 시켜 놓고

 

사랑을 전송 중입니다

눈에 보이는 기쁨보다

영혼에 스며드는 행복을 위해

긴 시간을 아파했습니다

 

당신은 스팸 메일을

깨끗하게 삭제해 주십시오

 

21

사랑이 나를 다시 찾는다면

ㅡ김민소ㅡ

 

사랑이 나를 다시 찾는다면

땅거미 지는 낙조의 하늘이기 보다

하루를 여는 새벽의 하늘이었음 좋겠다.

 

해질녘 어스름 서성거리는 그리움이기 보다

한 점 빛으로 태어나 꿈을 그리는 사랑이고 싶다.

 

사랑이 나를 다시 찾는다면

천둥과 번개를 몰고 오는 여름날 장대비이기 보다

소리없이 스며들어 사계절 촉촉한 단비였음 좋겠다.

 

타오르는 열정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서글픔 보다

조금씩 주어도 멈추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이고 싶다.

 

사랑이 나를 다시 찾는다면

어루만져야 제 빛을 내는 화분으로 남기 보다

손길을 주지 않아도 퍼뜨리는 야생화였음 좋겠다.

 

사랑도 사람의 기술인지라

샛바람 한 조각에도 폐점을 부를 수 있는 것

 

사랑이 나를 다시 찾는다면

몸과 마음이 하나로 묶어져야 한다는

네 안에서 웃고 상심하는 어리석은 집착 보다

내가 적셔준 사랑이 너의 행복이 되었다면

내가 심어준 사랑이 너의 꿈 밭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이별 또한 아름다운 사랑이고 싶다.

 

22

사랑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ㅡ김민소ㅡ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새벽닭이 울면

태양보다 일찍 일어났다는 것과

어둠이 침잠한 시간이면

바람과 별과 시()와 함께 잠을 잘 수 있었다는 것

 

옥상에서 졸고 있는 화분과 빨래들

공원의 식당버스와 낡은 파라솔,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빨고 있는 노인조차

잔잔한 감동으로다가 온다는 것

 

백만 송이 장미보다 더

가슴을 뭉쿨 하게 하는 선물이

바로 너라는 것

 

23

사랑이라는 선물을 바칩니다

ㅡ김민소ㅡ

 

내가 비라면

그대의 지친 마음을 적셔주고

내가 햇살이라면

그대의 창에 보석같은 빛을 줄텐데

나는 언제나 미약하여

사랑이라는 선물을 바칩니다.

 

내가 꽃이라면

그대의 차가운 마음에 향기를 주고

내가 나무라면

그대의 고단한 육신을 쉬게 할텐데

나는 언제나 미약하여

사랑이라는 선물을 바칩니다.

 

내가 주는 선물은 형태가 없어

시간이 늘 뺏어가고

내가 주는 선물은 향기가 없어

기억의 저편에 물러나 있겠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받고자 속박하는 것보다는

아낌없이 사랑했던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

살아가는 동안

ㅡ김민소ㅡ

 

흔들린다 해도

마구 흔들린다 해도

꺾어지지 않는 억새였음 좋겠어

 

흙탕물이 전신을 덮어도

마당 예쁜 집에 살지 못해도

지상에 태어난 것으로 감사한

 

뜨거웠다 해도

미치도록 뜨거웠다 해도

집착하지 않는 촛불 같았음 좋겠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온기를 주었기에

살아있던 순간이 행복한

 

못내 머물고 싶어도

고혹한 저 석양처럼

가야 할 때 당당하게 갔으면 좋겠어

 

25

선물 같은 당신

ㅡ김민소ㅡ

 

미안해 하지 말아요

늘 부족하다 하지 말아요

 

당신의 존재로 꿈을 빚는 나는

마음의 보석 상자를 간직했는데요

 

힘들어 하지 말아요

늘 안타까와 하지 말아요

 

당신의 마음 하나로 깨어나는 나는

또 하나의 선물로 채우는 걸요

 

빛을 삼켜먹은 어둠이

어제를 유린했던 시간이었지만

 

다시 그려나가는 내 안의 아름다움은

당신이란 이름의 선물 때문인걸요

 

한 세상

키 작은 잎새가 된다해도

바람이 할퀴고 간 들녘으로 남는다 해도

당신이 함께 하는 하루는 눈부신 선물인걸요

 

사랑이라는 선물은

손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 하나 되어버릴 때

사랑은 안개처럼 스며듭니다.

 

사랑이라는 선물은

손으로 풀어보는 것이 아니며

마음으로 바라보면 스스로 풀리는 선물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서로를 향해 당기고 있다면

그 사랑은 향기가 진동합니다

 

사랑이라는 선물은

한없이 퍼 주고 나눠주어도

깊은 산골 샘물처럼 마르지 않습니다

 

2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ㅡ김민소ㅡ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과 나누는 속삭임이라 말할래요

 

길섶에 흐트러진 풀잎조차

배시시 웃음 짓고

살갗을 스치는 바람에도 향이 묻어나

마음은 노래하는 방울새가 되었거든요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을 향한 내 그림이라 말할래요

 

버리고 또 버려도

다시 샘솟는 열정에

가슴은 쫓빛 하늘로 채색되고

뇌리에는 유성들로 가득 차 버렸네요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을 위해 써 내려간

나의 고백이라 말할래요

 

보고 싶어

수 없이 토닥거린 가슴에도

행여 그대 마음 흐려질까 봐

천상으로 띄우는 시가 되었으니까요

 

27

아름다운 동행

ㅡ김민소ㅡ

 

마주보는 눈빛을 녹여

지치고 헐벗은 영혼에

온기를 적셔주는 사랑입니다

 

마음과 마음을 버무려서

비 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도

꽃망울을 터트리는 사랑입니다

 

꿈은 노을 속에 묻혀지고

삶은 어두운 뒷골목을 말하지만

존재로 등불이 되고 있는 사랑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에 하나가 되고

희망보다 절망에 하나가 되는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아승의 끝자락에 서서도

생명을 잉태하는 고귀한 사랑

 

그 순백의 길을 흡수하는

참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28

아름다운 약속

ㅡ김민소ㅡ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온 종일 웃어야지

누구에게든 따뜻한 말로 건네야지

몇번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의 약속을 하나, 둘 흘리더니

인색한 모습과 냉랭한 말로 상처만 남겼네요

 

웃음보따리 하나 풀지 못하고

그 흔한 "사랑해요"라는 말도 못하고

주섬 주섬 챙겨 나가는 귀가 길

발걸음이 천근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네요

 

노을이 서둘러 비껴갈 때

선채로 빛살을 뿜어대는 가로등

저 불빛조차도 제 몸을 사리지 않고 있는데

오만과 이기로 하루를 잃어버렸으니

 

내일은 쓴 소리에도 웃음으로 화답해야지

내일은 "사랑해요"라고 내가 먼저 건네야지

내 핸드백에 사랑을 가득 담고 돌아와야지

 

29

지금 그대를 만나러갑니다

ㅡ김민소ㅡ

 

눈발이 휘파람새처럼 속살거리는 해거름 녘

후미진 골목길 가로등불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고

머무는 시선마다 오선지를 그려놓은 작곡가가 된바람이

서린 그리움조차 높은음자리표로 만들 때면

그대를 만나러 갑니다

 

키 작은 나무에 앉아 윙크를 해대던 눈꽃들은

오가는 연인들의 하루를 선물로 만들고

어느 집 담벼락에 버려진 나무풍금의 건반 속으로 들어가

러브스토리의 사운드처럼 오감을 깨울 때면

 

연극은 끝 난지 오래건만

눈물이 응고되어 만든 마음의 유리성

그 안에서 빈 술병소리를 내며 달그락거려야 했던

슬픈 자화상(自畵像)이 한 편의 푸른 시()가 되는 날

지금, 그대를 만나러 갑시다

 

30

지금 말하세요

ㅡ김민소ㅡ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가 보고 싶다며 그래서

미칠 것 같다면 지금 말하세요.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를 원한다면 그래서 터질 것

같다면 지금 말하세요.

기다림이 항상 미덕일수는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말 할 때는 지났습니다.

오늘이 이 세상에 한번뿐인 삶입니다.

정녕 사랑한다면 지금 말하세요.

 

혹여 상처받을 일이 두려우시나요.

똑 같이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시나요.

사랑하는 일에 계산은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상대도 생각하고 있다면

이제 사랑은 꽃망울을 터트릴 터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상대가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이제 사랑의 텃밭을 다시 꾸며야 할 터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래서

하얀 밤이 계속된다면

지금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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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시모음

 

봄날 /김재진

달빛 가난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남은 시간

사랑의 이유

민들레

비 맞는 나무

마음의 빈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이 그리울 때

오늘밤 물소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월

친구에게

비상

푸른 넝쿨

국화 앞에서

넉넉한 마음

장미꽃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찔레

가득한 여백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12

길 위에 흔들리다

다 버리고 가라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3.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너를 만나고 싶다

그림자 놀이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봄날 /김재진

 

문 앞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네.

봄빛은 환하고 슬픔은 옅네.

귀 기울여 들어보면 어디쯤

당신이 살금살금 발끝을 들고

걸어오며 흥얼대는 콧노래 들리네.

이맘때면 눈감아도 잠들 수 없네.

꽃 지는 소리 들려 잠들 수 없네.

가진 것 다 버리고 싶어 혼자 나온 마음이

처마 끝에 매달려 살랑거리고

그 마음에 매이기 싫은 또 하나의 마음이

당신 생각 하다가 짙어져 가네

 

달빛 가난 / 김재진

 

지붕 위에도 담 위에도

널어놓고 거둬들이지 않은 멍석 위의

빨간 고추 위로도

달빛이 쏟아져 흥건하지만

아무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부지, 달님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나요?'

'잠이 안 와서 그런거지.'

'잠도 안 자고 그럼 우린 어디로 가요?'

묻지 말고 그냥 발길 따라만 가면 된다.'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도 무섭지 않았던 건

아버진의 눌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부지 그림자가 내 그림자보다 더 커요.'

'근심이 크면 그림자도 큰 법이지.'

그날 밤 아버지가 지고 오던 궁핍과 달리

마을을 빠져나오며 나는

조금도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 김재진

 

둥근 우주같이 파꽃이 피고

살구나무 열매가 머리 위에 매달릴 때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는

걸을 수 있는 동안 행복하다.

구두 아래 길들이 노래하며 밟히고

햇볕에 돌들이 빵처럼 구워질 때

새처럼 앉아 있는 후박꽃 바라보며

코끝을 만지는 향기는 비어 있기에 향기롭다.

배드민턴 치듯 가벼워지고 있는 산들의 저 연둣빛

기다릴 사람 없어도 나무는 늘 문 밖에 서 있다.

길들을 사색하는 마음속의 작은 창문

창이 있기에 집들은 다 반짝거릴 수 있다.

아무것도 찌르지 못할 가시 하나 내보이며

찔레가 어느새 울타리를 넘어가고

울타리 밖은 곧 여름

마음의 경계 울타리 넘듯 넘어가며

걷고 있는 두 다리는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남은 시간 / 김재진

 

내 생의 남은 시간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라.

그러고도 더 남는 것 있다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앉아 있고만 싶어라.

앉아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적막한 호수처럼 깊어지고 싶어라.

부질없는 이름과 실없는 다툼

상처준 이 있으면 용서받고 싶어라.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할 시간 허용된다면

아낌없이 주기만 하리라.

주고서 행여 돌려받지 못해도

준 것에 만족하며 침묵하리라

 

사랑의 이유 / 김재진

 

당신이 꼭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장점보다

결점이 두드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결점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어쩌다 보니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힘들던 마음 역시

내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민들레 /김재진

 

날아가는 홀씨는

민들레의 우주다.

꽃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별이 있다.

꽃은 다 우주다.

걸릴 데 없이 만행하는

꽃씨는 불성이다.

천지간에 만개해 있는 식물의 불성

꽃이 피어도 사람들은 꽃 핀 줄을 모른다.

날아가는 꽃을 봐도

별빛인 줄 모른다.

 

비 맞는 나무 /김재진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비 맞는 나무는 비맞는 나무다.

온종일 줄줄 흘러내리는

천상의 눈물을 온 몸으로 감수하는

비 맞는 나무는 인내하는 나무다.

모든 것 다 용서하신 어머니같이

비 맞는 나무는 다 받아들이는 나무다.

온통 빗속을 뚫고 다녀도

날개에 물방울 하나 안 묻히는 바람처럼

젖어도 나무는 젖지 않는다.

세속의 번뇌 온몸으로 씻어내려

묵묵히 경행하는 수행자처럼

맨발로 젖은 땅 디디고 서 있는

비 맞는 나무는 비 안 맞는 나무다.

 

/김재진

 

발부터 촉촉이 젖으며 오는 비는

누군가를 기다리다 돌아서는 비

온몸을 적시며 화내는 비는

기다림을 배우지 못한 성미 급한 비

차는 끊기고 길 어두운데

그대 만나지 못해 고개 숙인 저 비는

비인지 비애인지

우산도 못 펴들고 부슬부슬 내리네.

 

마음의 빈집 /김재진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붙들어 놓겠습니다.

못 박아 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못 박아 놓겠습니다.

그대 보내고 잊었던 세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을

묶어놓을 데 없어

드러누울 집 한 채 없이

빈 몸으로 삽니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김재진

 

당신이 내 안에 못 하나 박고 간 뒤

오랫동안 그 못 뺄 수 없었습니다

덧나는 상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당신이 남겨놓지 않았기에

말없는 못 하나도 소중해서입니다.

 

사람이 그리울 때 /김재진

 

빈 가방 하나 메고 길 나섰지요.

새도록 내린 비가 나 모르는 새

하늘을 거울처럼 닦아 놓았어요.

얼굴이 비칠까 봐 자꾸 하늘만 쳐다봤지요.

비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알고 보면 다 제 생각만 하고 사니까요.

꼭꼭 숨어 한 세월 잊어버렸죠.

문득 사람이 그립데요.

그럴 땐 길 나서야 해요.

먼길 나서며 모든 것 싹 잊어버려야 해요.

그리움은 아픔이니까.

아픔은 또 병든 시간이니까.

나이가 들면 어떤 아픔도 두려워지기 마련이죠.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성가시거나 두려울 뿐이지요.

그리워지는 건 그럼 뭔가요?

약해진다는 증거일까요?

나이가 든다는 게 그러나 좋은 것도 있어요.

웬만한 건 다 용서해버리죠.

용서가 아니라 회피라고 해도 좋아요.

그럴 땐 길 떠나고 싶어요.

밤에 내린 비가 길 밖으로 나를 자꾸 떠미니까요.

 

/김재진

 

나는 나를 만드네

별이 기다림을 만들듯

긴 기다림에 지진 사람들이

새로운 만남 앞에 머뭇거리듯

나를 끌고 다니던 숱한 아픔들이

나를 만드네

고통을 자르고 돋아나는 또다른 고통의 싹

버릴 수 없는 상처들이 나를 만드네

별은 투명한 고해

상처로 얼룩진 시간을 비추는

차가운 거울

살갗에 닿는 새벽공기가 두려워

얼굴을 감싼 내가 걸어가네

뒤에서 바라보는 또다른 나

푸른 수증기가 어른거리고

얼어붙은 길을 마찰하는 바퀴들이 요란스레

시간에 다친 사람들을 쓰러뜨리네

 

오늘밤 물소리는 /김재진

 

오늘밤 물소리는 나를 떠밀어

하염없이 씻기게 한다

누워서 짐짓 생각해 보는

짧은 그리움

길고 지겨운 기다림 밖으로

녹슨 시간의 모습들이 째깍거리며

지나간다.

욕실의 수증기처럼 막연한 통증

아픈 곳을 찾기 위해 숨을 죽이는

오늘밤 빗소리는 나를 떠밀어

멍들고 비어 있는 육체 밖으로

떠나게 한다.

참담한 식욕의 시간이 지나가고

비로소 꽃 피는 절망

삶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남루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울고 있는지

오늘밤 물소리는 나를 떠밀어

문밖에서 서 있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김재진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을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예요, 여기예요, 손짓한 적 있습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어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지

사랑은 기다린 만큼 더디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세월 /김재진

 

살아가다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나 살자.

먼길을 걸어 가 닿을 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

먼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 끝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나 살자.

 

친구에게 /김재진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 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 내게 온다면

가만히 네 손 당겨 내 앞에 두고

네가 짓는 미소로 위로하리라.

 

비상 /김재진

 

잠들지 마라 내 영혼아.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연 농아처럼

하염없는 길을 걸어 비로소 빛에 닿는

생래의 저 맹인처럼

살아 있는 것은 저마다의 빛깔로

부시시 부시시 눈부실 때 있다.

우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이 인생.

덫에 치어 버둥거리기만 하는

짐승의 몸부림을 나는 이제

삶이라 부르지 않겠다.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숨막힘,

사방으로 포위된 무관심 속으로 내가 간다.

단순히

우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넘어진 것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그렇듯

넘어짐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일으켜 세우는 자 없어도 때가 되면

넘어진 자들은 스스로 일어나는 법,

잠들지 마라 내 영혼아.

바닥에 닿은 이마 들어 지평선 위로

어젯밤 날개를 다쳤던 한 마리 새가

힘겹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아라.

 

푸른 넝쿨 /김재진

 

창을 타고 올라가는 푸른 넝쿨을 바라본 적이 있다.

투명한 햇살에 속 내비치는 넝쿨의 이파리들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앉았던 적 있다.

달리던 삶에서 갑자기 내려

같이 가던 사람들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서 있을 때

멀리 하나씩 길들이 떠오르고

먼지를 피워 올리며 사라지는 버스가 남겨놓은

남루한 얼굴들 사이로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 들린다.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넝쿨의 저 연두,

또는 초록의 이파리들도 사실은

빛이 만들어낸 허구일뿐.

사랑 또한 그런 것이다.

저녁이 오면 내 마음은 습관처럼

헛된 약속을 위해 서두르지만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란 없다.

오랫동안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 그것과 다르지 않다.

눈감고 올려다보는 창 위로 이윽고

푸른 넝쿨은 사라진다.

한때 내 마음을 휘감고 올라가던 연두,

도박같은 것, 아니면 비루한 호구나

순간을 휘감는 질투 같은 욕망

더러는 바람소리 나는 새벽의 산책 또한 그런 것이리.

아름다움 또한 다르지 않다.

짐짓 허리 펴고 앉아 이마를 드는 저 산의 입정.

한 마리 산새가 깨워놓는 침묵에 무너지는

거짓말 같은,

.

막다른 골목의 투항처럼 나는 슬리퍼 사이로 맨발

드러낸 채

삶의 한때를 흔들어 놓던 질문들에 매달린다.

 

국화 앞에서 /김재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 살아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넉넉한 마음 /김재진

 

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도는

편안한 곡선 하나 가지고 싶다.

뽀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닳고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멩이처럼 둥글고 싶다.

지나온 길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

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

날타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

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어린 왕자 /김재진

 

, 내가 만약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온종일 내 마음이 시계를 보거나

기다리는 조급함에 내 손이

걸려오는 전화마다 달려나간다면

방심한 마음 내비치며 너는

한 번쯤 나로부터 비켜 있어도 좋다.

쳐다보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고정된 풍경이란 방관해도 좋다.

, 내가 만약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너에게 붙박혀 있는 나의 시선이

어느덧 싫지 않은 일상이 되어

외로우면 한 번씩 돌아다봐도 좋다.

너 또한 만약에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밀밭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여우처럼

지나가는 내 발소리에 길들어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 지어도 좋다.

 

장미꽃 /김재진

 

양이 뜯지 못하도록

가시를 내밀고 있는 꽃,

감기에 걸릴까 봐

유리덮개로 바람을 막아줘야 하는

예쁜 내 장미꽃,

별을 쳐다보며 나는 별 속에

네가 피어 있을 것이란 상상으로 행복해진다.

눈감으면 느낄 것 같은

네 향기 떠올리며 따뜻해진다.

네 마음이 보내는 환한 빛,

별 같이 많은 사람 가운데

, 나는

네가 걷고 있을 것이란 생각 하나로

세상의 험한 길들 사랑할 수 있다.

다만 사랑 받기 위해 우린 사랑하지만

그 사랑 깊어지면

어딘가에 누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할 수 있다.

 

다시 별 헤는 밤 /김재진

 

가령 네가 나를 사랑한다 쳐보자.

너 기다릴 걸 생각하며 내 굼뜬 발길이

머무르지 않고 너를 향해 달려간다 쳐보자.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맑은 밤 은하수처럼 눈부시게 살아나고

별 하나에 네 이름을,

그리고 또 별 하나에 문득

잊었던 얼굴들 한꺼번에 떠오른다 쳐보자.

어머니,

내 살아왔던 만큼의 힘 다해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가령 어머니만큼의 사랑으로

그렇게 내가 너를 껴안을 수 있다 쳐보자.

시냇물, , 동그라미, 고드름, 첫눈 오는 날의

작은 발자국,

가만가만 그 발자국 위를 밟아보는

목 긴 구두 하나,

그렁그렁 눈물 머금고 있는 연못 속의 별들

가을하늘, 소나기, 채송화, 맨드라미,

어머니, 나는 아무래도

살아갈 시간보다 사랑할 것들이 더 많은가 봅니다.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김재진

 

문이 닫히고 차가 떠나고

먼지 속에 남겨진채 지나온 길 생각하며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얼마나 더 가야 험한 세상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건너갈 수 있을까

아득한 대지 위로 풀들이 돋고

산 아래 먼길이 꿈길인듯 떠오를때

텅 비어 홀가분한 주머니에 손 찌른채

얼마나 더 걸어야 산 하나를 넘을까

이름만 불러도 눈시울 젖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얼마나 더 가야 네 따뜻한

가슴에 가 안길까

마음이 마음을 만져 웃음을 짓게하는

눈길이 눈길을 만져 화사하게 하는

얼마나 더 가야 그런 세상

만날수가 있을까.....

 

찔레 /김재진

 

거짓말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너를 훔친다.

푸른 달빛아 꽃 피는 봄날의 진한 한숨아

쪼그리고 앉아 밤새우는 황톳길아

내 사랑, 가시마다 찔렸다.

 

가득한 여백 /김재진

 

만약에 네가 누구에게 버림받는다면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으리라.

쏟아지는 빗줄기에 머리카락 적시며

만약에 네가 울고 있다면

눈물 멎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리라.

설령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때아닌 장미를 고른다 해도

주머니에 손 넣은 채 웃기만 하리라.

가시에 손가락 찔린 네 예쁜 눈이

찡그리며 바라보는 그 짦은 순간을 다만

안타까운 추억으로 간직하리라.

만약에 내가 너로부터 버림받는 순간 온다면

쓸쓸한 눈빛으로 돌아서리라.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 긴 시간을

너의 후회가 와 채울 수 있도록

가득한 여백으로 비워두리라.

 

오지 않는 사람 / 김재진

저만치 오는 사람을 보고 당신인줄 알았습니다.

뒤집을 수 없는 결과를 낳은 우연이

필연이라 불리듯

당신은 내게 뒤집을 수 없는 필연입니다.

당신,

어디 가 있어도 내가 찾아내고 말던 당신,

당신 기다리는 마음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당신 웃는 모습 떠오르는 순간 내 마음

대번에 따뜻해집니다.

불 꺼져도 당신은 내게 환한 대낮입니다.

만지면 김 서리는 찻잔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르는 날의 미숙한 사랑,

삶은 그러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랑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오래된 흙담 내려앉듯

삶 앞에 사랑은 무릎 꿇었습니다.

멀리서 다가오던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디 가도 나는 이제 당신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죄 없는 세월만 강처럼 흘러

당신은 내 맘속에

잔물결 하나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시간이 간 뒤에야 알았습니다.

뒤집을 수 없는 결과도 뒤집힐 수 있다는

시시한 사실 하나를 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모든 만남이 이별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당신과 헤어진 뒤에야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사람 /김재진

 

설령 네가 오지 않는다 해도

기다림 하나로 만족할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묵묵히 쳐다보며

마음속에 넣더둔 네 웃는 얼굴

거울처러 한 번씩 비춰볼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던 저무는 해를

눈 속에 가득히 담아둘 수 있다.

세상에 와서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

알고 보면 다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동안 따뜻했던 내 마음을

너에게 주고 싶다.

내 마음 가져간 네 마음을

눈 녹듯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다.

삶에 지친 네 시린 손 잡아주고 싶다.

쉬고 싶을 때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기다림으로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다.

 

단념하듯 날 저물고 /김재진

 

눈 내린다.

일제히 하얀 점으로 변하는

눈동자 속의 십이월,

길 위로 나서기 위해

목이 긴 구두를 꺼내 신는다.

여름의 끝에 헤어진 친구를

눈발 속에서 찾다.

그대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일에

정말 나는 길들어 있을까.

사막에 눈 내리면

검은 머리카락이 반쯤 젖는다.

타클라마칸이나 라자스탄쯤의 십이월,

때로는

지쳐서 주저 앉아 있는,

내 청춘의 사막 쯤에 숨겨놓은 십이월,

가끔은 그대 침묵 앞에

온몸을 사르르 숯으로 빛나고 싶을 때 있다.

 

길 위에 흔들리다 /김재진

 

도처에 죽음이 입간판처럼 깔려 있다.

길의 끝에

도착하지 않은 이별을 기다리는 사람들 서성거리고

멈추어 서서 보면 이 길,

어디로 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끝난 것이다. 예행연습도 없이

몇 번의 삽질,

삼베 옷자락이나 적셔놓고

그렇게 시시하게 끝나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 강물에다 눈물 하나 보태고

죽음은 그렇게

정거장마다 서 있는 사람들을 일별하며 가는 것이다.

계획된 의식도 없이 흙은

자신의 일부가 될 육신을 받아들이고

몇 번의 삽질을 허락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길,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죽은 이의 주민등록번호를 외며 가는 길,

여기서 비롯된 것인가 우리 삶의 본적?

보다 빨리 사망증명서를 떼기 위해 나는

구청까지 가기로 한다.

죽은 이의 증명을 위해

길 위에 흔들리다.

 

다 버리고 가라 /김재진

 

설령 당신이

백송이 수선화를 선물 받는다 해도

그 누구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가질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

이룰 수 있는 많은 것들 쌓여 있다 해도

어느 것도 당신이 포기하지 못해 괴롭다면 무슨 소용인가.

뜻대로 되는 것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사랑해야 할 것들과 사랑해서는 안 될 것들 사이에 끼어

당신의 마음이

한치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어질 때

채울 수 없을 뿐 당신의 삶은 텅 비어 있다.

설령 당신의 하루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보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에 의해 가득 찬다 해도

누구에게도 당신의 따뜻한 마음 낼 수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인가.

어느 날 당신이 가까운 이로부터 상처 나거나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워질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

전쟁같이 하루가 힘겹고 외로울 때

다 버리고 한 번쯤 자신으로 돌아가라.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김재진

 

너를 위해 다시 한 번 살아볼 수 있다면

지키지 못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

한 톨의 씨앗 속에 나무가 숨어 있듯

절망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을 보여주리.

다시 한 번 너를 위해 살아볼 수 있다면

물방울 같은 네 손톱에 물들기 위해

해마다 봉숭아를 내 가슴에 심으리.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널 기다리며 서성대던 영화관 앞을

만날 사람 없더라도 서 있어보리.

영화가 끝나면 밀려나오는 사람들 속에

네 얼굴 찾아보며 가슴 두근거리리.

한 번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한 방울의 눈물도 너를 위해 흘리리.

때로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모든것 다 바쳐 너를 사랑하리.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김재진

 

하늘에 뿌려놓은 새의 발자국,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사람 있어

안개꽃 다발을 흔든다.

지겹도록 떨어지는 링거 한 방울.

병실엔 침묵이

바깥엔 채 이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침녘에 꺼내놓는 시리고 찬 이름 하나.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편지의 모서리가

주머니 밖으로 하얗게 손가락 내밀고 있다.

시린 입김 올리며

쓸쓸한 날엔 철길을 걷는다.

연기 흩어진 하늘을 떼지어 날아가는 새떼,

강을 건너가는 햇빛의 발이

꽁꽁 얼어 애처롭다.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가갸거겨,소리내며 흩어지는

무수한 저 글자들도 사연이 있을까.

 

추락하는 이름 위에 앉아본다.

내가 사랑에 실패하는 건 다만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를 만나고 싶다 / 김재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둔 금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성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그림자 놀이 / 김재진

 

불안을 꺼내 화분에 심습니다.

다들 잠든 밤에 혼자 앉아

화분을 살핍니다.

꽃들도 다 자고 있습니다.

유리창을 통해 보는 밤하늘은

적막할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수첩을 뒤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밤마다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화할 데가 없으면서도

그렇게 번번이 수첩을 뒤지는 건

희망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내 마음은 혹시나 하는 희망에

속고 싶어 안달입니다.

희망을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은 것입니다.

심어놓은 불안이 잘 크는지

화분을 파 봅니다.

나와 나의 그림자

어느 것이 환영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 김재진

 

내가 있기에 그대가 있습니다.

나 또한 그대가 있기에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허공이 있기에 그 자리에 있습니다.

숲에 가서 숲을 보면

떨리는 물푸레나무 가지 하나도

그대가 있기에 거기 있습니다.

오솔길 따라 걷는 순간

그대 얼굴 사라지고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덩달아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길은 끊기고

숲을 물들이던 노을이

사라진 마음 불러 물들입니다.

그대에게 물든 나를 나는 끝내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얹혀 있는 그대를 어디에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업고 가야 하는 그대의 무게

시린 눈빛에 매여 나는

그대가 있기에 거기 있습니다.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 김재진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드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시집 /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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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시모음

가족의 힘

ㅡ류근ㅡ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등켜 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 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 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 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 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시인들

ㅡ류근ㅡ

이상하지

시깨나 쓴다는 시인들 얼굴을 보면

눈매들이 조금씩 찌그러져 있다

잔칫날 울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심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 악물고 버티는 여자처럼

얼굴의 능선이 조금씩 비틀려 있다

아직도 일렬횡대가 아니고선 절대로 사진 찍히는 법 없는

시인들과 어울려 어쩌다 술을 마시면

독립군과 빨치산과 선생과 정치꾼이

실업자가 슬픔이 과거가 영수증이

탁자 하나를 마주한 채 끄덕이고 있는 것 같아

천장에 매달린 전구알조차 비현실적으로 흔들리고

빨리 어떻게든 사막으로 돌아가

뼈를 말려야 할 것 같다 이게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다

울어야 할 것 같다

 

반가사유

ㅡ류근ㅡ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겠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 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향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너무 아픈 사랑

ㅡ류근ㅡ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 없는 것

다만 사랑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벌레처럼 울다

ㅡ류근ㅡ

벌레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

우는 것으로 생애를 다 살아버리는 벌레들은

몸 안의 모든 강들을 데려다 운다

그 강물 다 마르고 나면 비로소

썩어도 썩을 것 없는 바람과 몸을 바꾼다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풍금을 만나면 노래처럼 울고

꽃나무를 만나면 봄날처럼 울고

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

죽음까지 흘러가 우는 것이다

울어서 생애의 모든 강물을 비우는 것이다

벌레처럼 울자 벌레처럼

울어서 마침내 화석이 되는 슬픔으로

물에 잠긴 한세상을 다 건너자

더듬이 하나로 등불을 달고

어두워지는 강가에 선 내 등뼈에 흰 날개 돋는다

 

법칙

ㅡ류근ㅡ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허공에 흩어진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구름에 매달린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빗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허공에 흩어진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잎사귀에 매달린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물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인다

사는것도 죽는것도

한 몸

우주 안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

 

영화로운 나날

ㅡ류근ㅡ

 

가끔은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갈 곳 없는 아침이었다

혼자서 객석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더러는 중년의 남녀가 코를 골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갈 곳은 생각나지 않아서

혼자 순댓국집 같은 데 앉아 낮술 마시는 일은

스스로를 시무룩하게 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날은 길었다 다행히 밤이 와 주기도 하였으나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덜 괴로울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든 내가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은 공연했다

심야 상영관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저녁 시간이 느리게 가는 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식민지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엔 우리가 모르는 암표도 많을 것이다

입을 헹굴 때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도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지나갔다는 것 때문에 퍽 안심이 되었다

심야 상영관에서 나오면 문을 닫은 꽃집 앞에서

그날 팔리지 않은 꽃들을 확인했다 나 또한

팔리지 않으나 너무 많이 상영돼 버린 영화였다

 

상처적 체질

ㅡ류근ㅡ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 저 찬란한 채찍

 

그리운 우체국

ㅡ류근ㅡ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ㅡ류근ㅡ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버림받은 한 시대의 종교가 보이고

안 보이는 어둠 밖의 세월은 여전히 안 보인다

왼쪽 눈이 본 것을 오른쪽 눈으로 범해 버리는

붕어들처럼 안 보이는 세월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운 은둔에 좀먹고

고통을 고통이라 발음하게 될까 봐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여 경건한 고통은 어느

노여운 채찍 아래서든 굳은 희망을 낳는 법

우리 너무 빠르게 그런 복음들을 잊고 살았다

이미 흘러가 버린 간이역에서

휴지와 생리대를 버리는 여인들처럼

거짓 사랑과 성급한 갈망으로 한 시절 병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버림받는 곳은 우리들의

욕망에서일 뿐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고통으로 능히 한 생애의 기쁨을 삼는다는 것을

이발소 주인은 저녁마다

이 빠진 빗을 버리는 일로 새날을 준비하고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폭설

ㅡ류근ㅡ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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