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 모음 20편
《1》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 하리라
《2》
★갈대
ㅡ천상병ㅡ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3》
★갈매기
ㅡ천상병ㅡ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이 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4》
★강물
ㅡ천상병ㅡ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5》
★구름
ㅡ천상병ㅡ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 꽃
뭇 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 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 수놓네.
《6》
★길
ㅡ천상병ㅡ
가도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가도 無人之境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7》
★나는 행복합니다
ㅡ천상병ㅡ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
텔레비젼의 희극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랑병(炳)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8》
★나의 가난은
ㅡ천상병ㅡ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9》
★난 어린애가 좋다
ㅡ천상병ㅡ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10》
★날개
ㅡ천상병ㅡ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안 다셨는지 모르겠다.
내같이 가난한 놈은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뿐인데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 성취다.
하나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11》
★눈
ㅡ천상병ㅡ
고요한데 잎사귀가 날아와서
네 가슴에 떨어져간다.
떨어진 자리는 오목하게 파인
그 순간 앗 할 사이도 없이
네 목숨을 내보내게 한
상처 바로 옆이다.
거기서 잎사귀는
지금 일심으로
네 목숨을 들여다보며 너를 본다.
자꾸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오는데
꼼짝 않고 상처를 지키는 잎사귀
그 잎사귀는 눈이다 눈이다.
맑은 하늘의 눈 우리들의 눈 분노의
너를 부르는 어머님의 눈물어린 눈이다.
《12》
★들국화
ㅡ천상병ㅡ
신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13》
★막걸리
ㅡ천상병ㅡ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 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14》
★바람에도 길이 있다
ㅡ천상병ㅡ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15》
★봄을 위하여
ㅡ천상병ㅡ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회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16》
★약속
ㅡ천상병ㅡ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을 가도 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17》
★어두운 밤에
ㅡ천상병ㅡ
수만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18》
★오월의 신록
ㅡ천상병ㅡ
오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 두 살 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19》
★푸른 것만이 아니다
ㅡ천상병ㅡ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은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3월 4월 그리고 5월의 실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는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20》
★한가지 소원(所願)
ㅡ천상병ㅡ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들어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 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컷 살았나 싶다.
별다를 불만은 없지만,
똥 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 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행 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편 지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새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나 무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광화문 근처의 행복
광화문에,
옛 이승만 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
기어코 나의 단골인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그리고 천 원짜리 두 개를 주는데---
나는 그 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포켓에서 이천원을 끄집어 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
"귀찮아! 귀찮아!"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단골집은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자유당 때 휴간(休刊)당하기도 했던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크레이지 배가본드"
1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담배를 빤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물을 마신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 꽁초 토막......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기 쁨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킬킬 웃어 제낀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생색이 나고 활기가 나고
하늘마저 다정한 누님같다.
길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나의 가난함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넋
넋이 있느냐 라는 것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거나 같다.
산을 보면서 산이 없다고 하겠느냐?
나의 넋이여!
마음껏 발동해 다오.
내 몸의 모든 움직임은,
바로 내 넋의 가면이다.
비 오는 날 내가 다소 우울해지면,
그것은 즉 넋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내 넋을 전세계로 해방하여
내 넋을 넓직하게 발동케 하고 싶다
마음 마을
내 마음의 마을을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른다.
내가 천씨요 구천(九千)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비록 동네지만
경상남도보다 더 넓고
서울특별시도 될 만하고
또 아주 조그만 동네밖에 안 될 때도 있다.
뉴욕의 마천루(摩天樓)같은
고층건물이 있는가 하면
초가지붕도 있고
태고시대(太古時代)의 동굴도 있다.
이 마을 하늘에는
사시장철 새가 날아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흰구름이 왕창 덮인다.
이 마을 법률은
양심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 재판소밖에는 없다.
여러가지로 지적하려면
만자(萬字)도 모자란다
복잡하고 복잡한 이 마음 마을이여
새
저 새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내내 움직일 줄 모른다.
상처가 매우 깊은 모양이다.
아시지의 성(聖)프란시스코는
새들에게 은총 설교를 했다지만
저 새는 그저 아프기만 한 모양이다.
수백 년 전 그날
그 벌판의 일몰(日沒)과 백야(白夜)는
오늘 이 땅 위에 눈을 내리게 하는데
눈이 내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