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시모음


1.거


거울속에는소리가없오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오
내말을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요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으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오
나는지금거울을안가져오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오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오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2.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

 

3.가정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 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4. 거리

- 여인이 出奔한경우


백지위에한줄기철로가깔려있다.
이것은식어들어가는마음의圖解다.
나는매일虛爲를담은전보를발신한다.
명조도착이라고.
또 나는
나의일용품을매일소포로발송하였다.
나의생활은이런재해지를
닮은거리를점점낯익어갔다.

 

5. 아침


캄캄한공기를마시면폐에해롭다. 폐벽에끌음이앉는다. 빔새
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
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폐에도아
침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습관이도로와
있다. 다만내치사한책이여러장찢겼다. 초췌한결론위에아침햇
살이자세히적힌다. 영원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6.수염


(수수그밖에수염일수있는것들모두를이름)
1
눈이존재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처소는삼림인웃음이존재하
여있었다


2
홍당무


3
아메리카의유령은수족관이지만대단히유려하다
그것은음울하기도한것이다


4
계류에서―
건조한식물성이다
가을


5
일소대의군인이동서의방향으로전진하였다고하는것은
무의미한일이아니면아니된다
운동장이파열하고균열한따름이니까

6
심심원


7
조(粟)를그득넣은밀가루포대
간단한수유의월야이었다

8
언제나도둑질할것만을계획하고있었다
그렇지는아니하였다고한다면적어도구걸이기는하였다

9
소한것은밀한것의상대이며또한
평범한것은비범한것의상대이었다
나의신경은창녀보다도더욱정숙한처녀를원하고있었다

10
말(馬)―
땀(汗)―
여, 사무로써산보라하여도무방하도다
여, 하늘의푸르름에지쳤노라이같이폐쇄주의로다

 

 7.이런 시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끄집어내어놓 고보니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꼈을터인데 그이틀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 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작문 을지었다.「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 을수없소이다.내차례에 못을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 는꾸준히생각하리라.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 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8.1933. 6. 1


천평위에서 삼삽년동안이나 살아온사람 (어떤과학자) 삼십
만개나넘는 별을 다헤어놓고만 사람(역시)인간칠십 아니이
십사년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사람(나)
나는 그날 나의자서전에 자필의부고를 삽입하였다이후나
의육신은 그런고향에는있지않았다 나는 자신나의시가 차압당
하는 꼴을 목도하기는 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9.화로


방거죽에극한이와닿았다. 극한이방속을넘본다. 방안은견딘
다. 나는독서의뜻과함께힘이든다. 화로를꽉쥐고집의집중을잡
아땡기면유리창이움푹해지면서극한이흑처럼방을누른다. 참다
못하여화로는식고차갑기때문에나는적당스러운방안에서쩔쩔맨
다. 어느바다에호수가미나보다. 잘다져진방바닥에서어머니가
생기고어머니는내아픈데에서화로를떼어가지고부엌으로나가신
다. 나는겨우폭동을기억하는데내게서는억지로가지가돋는다.
두팔을벌리고유리창을가로막으면빨래방맹이가내등의더러운의
상을뚜들긴다. 극한을걸커미는어머니―기적이다. 기침약처럼
따끈따끈한화로를한아름담아가지고내체온위에올라서면독서는
겁이나서곤두박질을친다.

 

10. 이상한 가역반응


임의의반경의원(과거분사의시세)


원내의일점과원외의일점을결부한직선


두종류의존재의시간적영향성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직선은원을살해하였는가

 

현미경
그밑에있어서는인공도자연과다름없이현상되었다.
같은날의오후

물론태양이존재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처소에존재하여있었을뿐만
아니라그렇게하지아니하면아니될보조를미화하는일까지도
하지아니하고있었다.


발달하지도아니하고발전하지도아니하고
이것은분노이다.


철책밖의백대리석건축물이웅장하게서있던
진진5의각바아의나열에서
육체에대한처분을센티멘탈리즘하였다.


목적이있지아니하였더니만큼냉정하였다.

태양이땀에젖은잔등을내려쬐었을때
그림자는잔등전방에있었다.


사람은말하였다.
「저변비증환자는부자집으로식염을얻으려들어가고자희망하
고있는것이다」라고

............

 
11.절 벽(絶壁)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香氣가만개滿開한다.
나는거기묘혈을 판다.
묘혈도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속에 나는들어앉는다.
나는 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 않는다.
향기가만개만개한다.
나는잊어 버리고재차거기묘혈墓穴을판다
묘혈은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묘혈로 나는꽃을깜빡잊어 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 않는꽃이
-보이지도않는꽃이.

 

 12.위치(位置)


중요한위치에서한성격의심술이비극을연역(演繹)하고있을즈음범위에는타인이없었던가. 한주(株)-분(盆)에심은외국어의관목(灌木)이막돌아서서나가 버리려는동기요화물(貨物)의방법이와 있는의자(倚子)가주저앉아서귀먹은체할 때마침s내가구두(口讀)처럼고사이에낑기어들어섰으니 나는내책임의맵시를어떻게해보여야하나. 애화(哀話)가주석(註釋)됨을따라나는슬퍼할준비라도 하노라면나는못견뎌모자를쓰고밖으로나가 버렸는데웹사람하나가여기남아내분신(分身)제출할것을잊어 버리고있다.

 

 

13.최후


사과한알이 떨어졌다.
지구地球는 부서질그런정도로 아팠다.
최후最後이미여하如河한정신情神도
발아發芽하지아니한다.

 

 


14.오감도(烏瞰圖)


- 時弟一號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같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0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십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람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 時弟二號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도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뛰어 넘어야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 時弟三號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것을 구경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하였으면 그만이다.

- 時弟四號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0:1   26.10.1931   以上 책임의사 이상

- 時弟五號


전후좌우를제(除)하는유일의흔적(痕跡)에있어서
익은불서목불대도(翼殷不逝目不大覩)
반왜소형의신의안전(眼前) 에아전낙상(我前落傷)한고사(故事)를유(有)함
장부(臟腑)라는것은침수된축사(畜舍)와구별될수있을란가

- 時弟六號


앵무  ※  2필
             2필
        ※  앵무는포유류에속하느니라.
내가2필을아는것은내가2필을알지못하는것이니라.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2필
"이소저는신사이상의부인이냐""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나는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앵무     2필
           2필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나의체구는중추를상실하고또상당히창랑하여그랬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하였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수류처럼도망하였느니라.물론그것은아아는사람혹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 時弟七號


구원적거(久遠謫居)의지(地)의일지(一枝)·일지에피는현화(顯花)·특이한4월의화초·30륜(輪)·30륜에전후되는양측의명경(明鏡)·맹아(萌芽)와같이희희(戱戱)하는지평(地平)을향하여금시금시낙백(落魄)하는만월·청한의기(氣)가운데만신창이의만월이의형당하여혼륜(渾淪)하는·적거(謫居)의지를관류하는일봉가신(一封家信)·나는근근히차대(遮戴)하였더라·몽몽한월아(月芽)·정일을개엄하는대기권의요원·거대한곤비(困憊)가운데의일년4월의공동(空洞)·반산전도(槃散顚倒)하는성좌와성좌의천열(千裂)된사호동(死胡同)을포도하는거대한풍설·강매·혈홍으로염색된암광채임리한망해·나는탑배하는독사와같이지하에식수되어다시는기동할수없었더라·천량이올때까지

- 時弟八號

제1부시험  수술대             1
               수은도말평면경  1
               기압                2배의평균기압
               온도                개무

위선마취된정면으로부터입체와입체를위한입체가구비된전부를평면경에영상시킴.평면경에수은을현재와반대측면에도말이전함.(광선침입방지에주의하여)서서히마치를해독함.일축철필과일장백지를지급함.(시험담임인은피시험인과포옹함을절대기피할것)순차수술실로부터시험인을해방함.익일.평면경의종축을통과하여평면경을2편에절단함.수은도말2회.
ETC 아직그만족한결과를수득치못하였음.

제2부시험 직립한평면경  1
               조수             수명

야외의진공을선택함.위선마취된상지의첨단을경면에부착시킴.평면경의수은을박락함.평면경을후퇴시킴.(이때영상된상지는반드시초자를무사통과하겠다는것으로가설함)상지의종단까지.다음수은도말.(재래면에)이순간공전과자전으로부터그진공을강차시킴.완전히2개의상지를접수하기까지.익일.초자를전진시킴.연하여수은주를재래면에도말함.(상지의처분)(혹은멸형)기타.수은도말면의변경과전진후퇴의중복등.
ETC 이하불상.

진단 0:1 26.10.1931 책임의사 이상


- 時弟九號


매일같이 열풍이 불더니 드디어 내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는다. 황홀한 지문 골짜기로 내 땀내가 스며드자마자 쏘아라. 쏘으리로다. 나는 내 소화기관에 묵직한 총신을 느끼고 내 다물은 입에 매끈매끈한 총구를 느낀다. 그러더니 나는 총 쏘으드키 눈을 감으며 한방 총탄 대신에 나는 참 나의 입으로 무엇을 내어배앝었더냐.

- 時弟十號


찢어진 벽지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그것은 유계(幽界)에 낙역되는 비밀한 통화구다. 어느 날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날개 축 처어진 나비는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통화구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서드키 나비도 날라가리라. 이런 말이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게한다.

- 時弟十一號


그 사기컵은 내 해골과 흡사하다. 내가 그 컵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 내 팔에서는 난데없는 팔 하나가 접목처럼 돋히더니 그 팔에 달린 손은 그 사기컵을 번적 들어 마룻바닥에 메어부딪는다. 내 팔은 그 사기컵을 사수하고 있으니 산산이 깨어진 것은 그럼 그 사기컵과 흠사한 내 해골이다. 가지났던 팔은 배암과 같이 내 팔로 기어들기 전에 내 팔이 혹 움직였던들 홍수를 막은 백지는 찢어졌으리라. 그러나 내 팔은 여전히 그 사기컵을 사수한다.


- 時弟十二號


때묻은 빨래 조각이 한 뭉덩이 공중으로 날라 떨어진다.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 하늘 저편에 전쟁이 끈나고 평화가 왔다는 선전이다. 한 무더기 비둘기의 떼가 깃에 묻은 때를 씻는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에 방망이로 흰 비둘기의 떼를 때려 죽이는 불결한 전쟁이 시작된다. 공기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으면 흰 비둘기의 떼는 도 한번 손바닥만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 時弟十三號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것처럼 새파랗다. 이렇게 하여 읽어 버린 내 두 개 팔을 나는 촉(燭)대 세움으로 내 방안에 장식하여 놓았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겁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런 얇다란 예의를 화초분보다도 사랑스레 여긴다.

- 時弟十四號


고성 앞 풀밭이 있고 풀밭 위에 나는 내 모자를 벗어 놓았다. 성 위에서 나는 내 기억에 꽤 무거운 돌을 매어달아서는 내 힘과 거리껏 팔매질쳤다. 포물선을 역행하는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 문득 성 밑 내 모자 곁에 한 사람의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걸인은 성 밑에서 오히려 내 위에 있다. 혹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인가. 공중을 향하여 놓인 내 모자의 깊이는 절박한 하늘을 부른다. 별안간 걸인은 표표한 풍채를 허리 굽혀 한 개의 돌을 내 모자 속에 치뜨려 넣는다. 나는 벌써 기절하였다. 심장이 두개골 속으로 옮겨가는 지도가 보인다. 싸늘한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내 이마에는 싸늘한 속자국이 낙인되어 언제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 時弟十五號


1.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2.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잤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의족을 담은 군용 장화가 내 꿈의 백지를 더렵혀 놓았다.
3.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고.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온다. 거울 속의 나는 내게 미안한 뜻을 전한다. 내가 그 때문에 영이되어 떨고 있다.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거울.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등창을 가리키었다. 그 들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네게 가리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엄폐하고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다.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보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15.한個의 밤

 

여울에서는滔滔한소리를치며

沸流江이흐르고있다.

그水面에아른아른한紫色層이어린다.

 

十二峰봉우리로遮斷되어

내가서성거리는훨씬後方까지도이미黃昏이깃들어있다

으스름한大氣를누벼가듯이

地下로地下로숨어버리는河流는거무튀튀한게퍽은싸늘하구나.

 

十二峰사이로는

빨갛게물든노을이바라보이고

 

鐘이울린다.

 

不幸이여

지금江邊에黃昏의그늘

땅을길게뒤덥고도 오히려남을손不幸이여

소리날세라新房에窓帳을치듯

눈을감는者나는 보잘것없이落魄한사람.

 

이젠아주어두워들어왔구나

十二峰사이사이로

하마별이하나둘모여들기始作아닐까

나는그것을보려고하지않았을뿐

차라리 草原의어느一點을凝視한다.

 

門을닫은것처럼캄캄한色을띠운채

이제沸流江은무겁게도사려앉는것같고

내肉身도千斤

주체할道理가없다.

 

 16.명경(明鏡)

 

여기 한페-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계절에서는

얹은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접힌

들여다보아도 들여다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만적 하는 대로 수심이 평행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거절

우편으로 옮겨앉은 심장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런? 어디 觸診......

하고 손이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

 

오월이면 하루 한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하더니

나갔든길에 안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든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페-지

거울은 페-지의 그냥 표지-

 

 17.悔恨의 章

 

가장 무력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였다

세상에 한 여성조차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의 懶怠는 安心이다.

 

양팔을 자르고 나의 職務를 회피한다

이제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는 무거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 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문자들을 가둬 버렸다

도서관에서 온 소환장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젠 세상에 맞지 않는 옷이다

封墳보다도 나의 의무는 적다

나에겐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무 때문도 보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에게도 또한 보이지 않을 것이다.

 

 18.선(線)에 관한 각서(覺書) 2

 

1+3

3+1

3+1 1+3

1+3 3+1

1+3 1+3

3+1 3+1

3+1

1+3

 

線上의一點 A

線上의一點 B

線上의一點 C

 

A+B+C=A

A+B+C=B

A+B=C=C

 

二線의交點 A

三線의交點 B

數線의交點 C

 

3+1

1+3

1+3 3+1

3+1 1+3

3+1 3+1

1+3 1+3

1+3

3+1

 

(태양광선은, ?렌즈때문에수검광선이되어일점에있어서혁혁히빛나고혁혁히불탔다. 태초의요행은무엇보다도대기의층과층이이루는층으로하여금?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하니낙이된다. 기하학은?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는지, 유우크리트는사망해버린오늘유우크리트의촛점은도달에있어서인문의뇌수를마른풀같이소각하는수검작용을나열하는것에의하여최대의수거작용을재촉하는위험을재촉한다. 사람은절망하라. 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절망하라)

 

 19.선(線)에 관한 각서(覺書) 5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면사람은광선을보는가, 사람은광선을본다, 연령의진공에있어서두번결혼한다. 세번결혼하는가,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

 

미래로달아나서과거를본다, 과거로달아나서미래를보는가, 미래로달아나는것은과거로달아나는것과동일한것도아니고미래로달아나는것이과거로달아나는것이다. 확대하는우주를염려한는자여, 과거에살라, 광선보다도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사람은다시한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보다젊은나에게적어도상봉한다. 사람은세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젊은나에게적어도상봉한다. 사람은適宜하게기다리다, 그리고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피스토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무수한나는말(譚)하지아니한다.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현재를과거로하는것은不遠間이다. 자꾸만반복되는과거,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무수한과거, 현재는오직과거만을인쇄하고과거는현재와一致하는것은그것들의複數의경우에있어서도구별될수없는것이다.

聯想은處女로하라. 과거를현재로알라. 사람은옛것을새것으로아는도다, 건망이여, 영원한망각은망각을모두구한다.

 

도래할나는그때문에무의식중에사람에일치하고사람보다도빠르게나는달아난다. 새로운미래는새롭게있다. 사람은빠르게달아난다. 사람은광선을드디어선행하고미래에있어서과거를待期한다. 우선사람은하나의나를맞이하라. 사람은全等形에있어서나를죽이라.

 

사람은全等形의체조의기술을습득하라, 不然이라면사람은과거의나의파편을如何히할것인가.

 

사고의파편을반추하라. 不然이라면새로운것은불완전이다, 연상을죽이라, 하나를아는자는셋을아는것을하나를아는것의다음으로하는것을그만두어라, 하나를아는것은다음의하나의것을아는것을하는것을있게하라.

사람은한꺼번에한번을달아나라, 최대한달아나라, 사람은두번분만되기전에xx되기전에조상의조상의성운의성운의성운의태초를미래에있어서보는두려움으로하여사람은빠르게달아나는것을유보한다. 사람은달아난다. 빠르게달아나서영원에살고과거를애무하고과거로부터다시과거에산다. 童心이여, 충족될수야없는영원의동심이여.

 

 20.애야(哀夜)

-나는 한 매춘부를 생각한다

 

애절하다. 말은 목구멍에 막히고 까맣게 끄을은 홍분이 헐떡헐떡 목이 쉬어서 뒹군다. 개똥처럼.

달이 나타나기 전에 나는 그 도랑 안에 있는 엉성한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눈병이 난 모양이다. 전등불 밑에 菊科植物이 때가 끼어 있었다.

包主마누라는 기름으로 빈들거리는 床 위에 턱을 괴고 굵다란 男性的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 뒤를 밟은 놈이 없을까, 하고 나는 包主마누라에게 물어 보았다.

 

방바닥 위에 한 마리의 고양이의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발을 멈추었다. 그것은 역시 고양이였다. 눈이 오듯이 영혼이 조용하게 내려앉고, 고양이는 내 얼굴을 보자 미소를 짓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그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무서운 ??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내 어린애 똥 같은 우엉과 문어요리와 두 병의 술이 차려져 왔다.

 

괄약근--이를테면 항문 따위--여자의 입은 괄약근인 모양이다. 자꾸 더 입을 오므리고 있다. 그것을 자기의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코는 어지간히 못생겼다. 바른쪽과 왼쪽 뺨의 살집이 엄청나게 짝짝이다.

금방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이어서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 있었더니, 여자는 입술을 조용히 나의 관자놀이 쪽으로 갖고 가서 가볍게 누르면서 마치 입을 맞출 때와 같은 몸짓을 해보였다.

 

기름냄새가 코에 푸욱 맡혀 왔다. 때마침 천장 가까이 매달려 있는 전등에서 노란 국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나는 극한 속에서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말도 안 나온다. 바리캉으로 이 머리를 박박 깎아 버리고 말까.

오후 비는 멈추었다.

 

다만 세상의 여자들이 왜 모두 賣淫婦가 되지 않는지 그것만이 이상스러워 못 견디겠다. 나는 그녀들에게 얼마간의 지폐를 교부할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손이 새파랗다. 조그맣게 되어 가지고 새로운 주름살까지도 보이고 있다.

여자는 나의 손을 잡았다. 고급장갑을 줍는 것처럼-- 그리고 나한테 속삭였다. 그것은 너무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서 나에겐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벌써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일이었고 하나만 있는 일일 것이다.

내 마음 속의 불량기는 벌써 無料로 자리에 앉아 있다. 전신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나의 목구멍 속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여자의 체중을 盜取했다. 그것은 달마인형처럼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白紙는 까많게 끄슬려 있었다. 그 위를 땅의 행렬이 천근 같은 발을 끌고 지나갔다.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나고 창들의 장막은 내려졌다. 자색 광선이 요염하게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온통 황색이었다.

손가락은 가야 할 곳으로 갔다. 눈을 감은 병사는 개흙진 沼澤地로 발을 들여 놓았다. 뒤에서 뒤에서 자꾸 밀려드는 陶醉와 같은 실책.

피의 빛을 오색으로 화려하게 하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어린애와 같은 失足-- 진행해 감으로써 그것은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술은 대체 누구를 위해서 차려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기는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이 명백하지만.

여자는 흡사 치워 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술을 다 마셔 버렸다. 홍수와 같은 동작이다. 그리고 간간이 그 페스트 같은 우엉을 괄약근 사이에다 집어넣었다.

이 여자는 이 형편없는 비위생 때문에 금방 병에 걸려 벌떡 소처럼 쓰러지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여자는 화려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배가 고픈 모양이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나는 그런 혜안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면 역시 얼마나 石碑 같은 체중이겠는가.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이만 술로 여자는 취할 것 같지 않다. 또한 여자는 자주 내가 한시바삐 취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여자의 면전에서 浮沈하고 있었던 표적이 실종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는데. 마음을 튼튼히 갖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호주머니 속의 은화를 세었다. 재빠르게-- 그리고 채촉했다.

선금주문인 것이다.

여자의 얼굴은 한결 더 훤하다. 脂粉은 고귀한 직물처럼 찬란한 光芒조차 발했다. 향기 풍부하게--

 

하나 이 은화로 교부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다. 이만저만한 바보가 아니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의 두 볼은 둔부에 있는 그것처럼 깊은 한 줄씩의 주름살을 보였다. 기괴한 일이다. 여자는 도대체 이렇게 하고 웃으려고 하는 것이다.

골을 내려고 하는 것인가 위협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결국 울려고 하는 것인가. 나에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위협이다.

여자는 일어났다. 그리고 흘깃 내 쪽을 보았다. 어떻게 하려는가 했더니 선 채로 내 위로 버럭 덮쳐 왔다. 이것은 틀림없이 나를 압사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손을 허공에 내저으면서 바보 같은 비명을 울렸다. 말(馬)의 체취가 나를 독살시킬 것만 같다.

놀랐던 모양이다. 여자는 비켜났다. 그리고 지금의 것은 구애의 혹은 애정에 보답하는 표정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했다.

나는 몸에 오한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부드럽게 웃는 낯을 해 보였다. 여자는 알겠다는 것의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아-- 얼마나 무섭고 純重한 사랑의 제스처일까. 곧 여자는 나가 버렸다.

찰싹찰싹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장지문 너머에서 고양이의 신음소리가 심각하다. 아무래도 한 마리인 것 같다. 실없는 놈들이다.

 

말-- 말이다. 쌍말이다. 땀에 젖은 瘡痍투성이의 쌍말임에 틀림없다. 구멍은 없는가. 유령처럼 그 속에서 도망쳐 나가고 싶다.

하지만 여기가 정작 참아야 할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흥분해 보자.

밟혀 죽을 게 아닌가. 튼튼해 보이는 말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뼈가 있다. 뼈는 여자를 매혹할 것이다.

消毒箸를 집어서 새까만 우엉을 하나 집어 본다. 역청에 담갔던 것처럼 끈적끈적하고 달아 보인다. 입은 그것을 기다린다.

무섭게 짜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여자가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맞이할 수가 없다. 나의 얼굴 전체가 짜기 때문이다.

여자는 나에게 이유를 물었다. 나는 답변하기가 거북하지 않을 수 없다. 술이 없느냐고 말했다. 여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듯이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있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고추장이 먹고 싶다.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그러자 여자의 백치 비슷한 표정마저도 꿈같이 그리웁게 보인다.

여자는 환상 속에서 고향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말한테서는 垈土와 거름냄새가 났다.

 

 21.황(?)

 

1.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멈춰 있다.

...... 모이를 주자...... 나는 단장을 부러뜨렸다. 아문젠옹의 식사처럼 메말라 있어라 x 아하

...... 당신은 Mademoiselle Nashi 를 아시나요. 난 그 여자 때문에 유폐돼 있답니다...... 나는 숨을 죽였다.

...... 아니야 영 틀린 것 같네...... 개는 舊式스러운 권총을 입에 물고 있다 그것을 내 앞에 내민다...... 제발 부탁이니 그 여잘 죽여다오 제발 부탁이니...... 하고 쓰러져 운다.

 

어스름속을 헤치고 공복을 나르는 나의 隱袋는 무겁다......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내일과 내일과 다시 내일을 위해 난 깊은 침상에 빠졌다.

발견의 기쁨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빨리 발견의 두려움으로 하여 슬픔으로 바뀌었는가에 대하여 나는 숙고하기 위해 나는 나의 꿈마저도 나의 龕室로부터 추방했다.

우울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가고 이윽고 다람쥐 같은 봄이 와서 나를 피해갔다 나는 권총처럼 꺼멓게 여윈 몸뚱이를 깊은 衾枕속에서 일으키기란 불가능했다.

꿈은 여봐라고 나를 혹사했다. 탄알은 지옥의 마른 풀처럼 시들었다.

--건강체 인 채--

 

2.

나는 개 앞에서 팔뚝을 걷어붙여 보았다. 맥박의 몽테 크리스토처럼 뼈를 파헤치고 있었다...... 나의 墓堀

4월이 절망에게 MICROBE와 같은 희망을 플러스한데 대해, 개는 슬프게 이야기했다.

꽃이 매춘부의 거리를 이루고 있다.

...... 안심을 하고......

나는 피스톨을 꺼내보였다. 개는 백발노인처럼 웃었다......

수염을 단 채 떨어져 나간 턱.

 

개는 솜(綿)을 토했다.

벌(蜂)의 충실은 진달래를 흩뿌려 놓았다.

내 일과의 중복과 함께 개는 나에게 따랐다. 들과 같은 비가 내려도 나는 개와 만나고 싶었다...... 개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개와 나는 어느새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 죽음을 각오하느냐, 이 삶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느니라...... 이런 값 떨어지는 말까지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개의 눈은 마르는 법이 없다. 턱은 나날이 길어져 가기만 했다.

 

3.

가엾은 개는 저 미웁기 짝없는 문패 표면밖에 보지 못한다. 개는 언제나 그 문패 이면만을 바라보고는 분노와 염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했다.

...... 나는 내가 싫다...... 나는 가슴 속이 막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 어디?......

개는 고향 얘기를 하듯 말했다. 개의 얼굴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다.

...... 동양 사람도 왔었지. 나는 동양 사람을 좋아했다. 나는 동양 사람을 연구했다. 나는 동양 사람의 시체로부터 마침내 동양문자의 奧義를 발굴한 것이다......

...... 자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말하자면 내가 동양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유이지?......

...... 얘기는 좀 다르다. 자네, 그 문패에 씌어져 있는 글씨를 가르쳐 주지 않겠나?

...... 지워져서 잘 모르지만, 아마 자네의 생년월일이라도 씌어져 있었겠지.

...... 아니 그것뿐인가?......

...... 글쎄, 또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자네 고향 지명 같기도 하던데, 잘은 모르겠어......

 

내가 피우고 있는 담배 연기가, 바람과 양치류 때문에 수목과 같이 사라지면서도 좀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 아아, 죽음의 숲이 그립다...... 개는 안팎을 번갈아가며 뒤채어 보이고 있다. 오렌지빛 구름에 노스텔지어를 호소하고 있다.

 

 22.무제(無題)

 

故王의 땀...... 모시수건으로 닦았다...... 술잔을 넘친 물이 콘크리트 수채를 흐르고 있는 게 말할 수 없이 정다워 난 아침마다 그 철조망 밖을 걸었다.

야릇한 헛기침 소리가 아침 이슬을 굴리었다 그리고 순백 유니폼의 소프라노

내 산책은 어쩐 일인지 끊기기 일쑤였다 열 발짝 또는 네 발작 나중엔 한 발짝의 반 발짝......

눈을 떴을 땐 전등이 마지막 쓰게[被物]를 벗어 버리고 있는 참이었다.

땀이 꽃 속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폐문시각이 지나자 열풍이 피부를 빼앗았다.

 

기러기의 분열과 함께 떠나는 낙엽의 귀향 散兵...... 몽상하기란 유쾌한 일이다...... 祭天의 발자국 소리를 작곡하며 혼자 신이 나서 기뻐하였다 차가운 것이 뺨 한 가운데를 깎았다. 그리고 그 철조망엘 몇 바퀴나 가서 低徊하였다.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또다시 부뚜막에 생나무를 지피고 있다 눈과 귀가 토끼와 거북처럼 그 철조망을 넘어 풀숲을 헤쳐 갔다.

第一의 玄?. 녹슬은 金環. 가을을 잊어버린 양치류의 눈물. 薰?來往

아침해는 어스름에 橙汁을 띄운다.

나는 第二의 玄?에게 차가운 발바닥을 비비었다. 金環은 千秋의 恨을 들길에다 물들였다. 階□의 刻字는 안질을 앓고 있다-- 백발노인과도 같이...... 나란히 앉아 있다.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眼前에 있다 과연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眼前에 있었다 한 마리의 개가 쇠창살 안에 갇혀 있다 양치류는 선사시대의 만국기처럼 무쇠우리를 부채질하고 있다.

한가로운 아방궁 뒤뜰이다.

문패-- 나는 이 문패를 간신히 발견했다고나 할까--에 年號 같은 것이 씌어져 있다. 새한테 쪼아먹힌 문자 말고도 나는 아라비아 숫자 몇 개를 읽어낼 수 있었다.

 

 23.斷章(단장)

 

실내의 조명이 시계 소리에 망가지는 소리 두 時

친구가 뜰에 들어서려 한다 내가 말린다 十六日 밤

달빛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바람 부는 밤을 친구는 뜰 한복판에서 익사하면서 나를 위협한다.

탕 하고 내가 쏘는 一發 친구는 粉碎했다. 유리처럼(반짝이면서)

피가 圓面(뜰의)을 거멓게 물들였다. 그리고 방 안에 범람한다.

친구는 속삭인다.

--자네 정말 몸조심해야 하네--

나는 달을 그을리는 구름의 조각조각을 본다 그리고 그 저 편으로 탈환돼 간 나의 호흡을 느꼈다.

죽음은 알몸뚱이 엽서처럼 나에게 배달된다 나는 그 제한된 답신밖엔 쓰지 못한다.

양말과 양말로 감싼 발-- 여자의--은 비밀이다 나는 그 속에 말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의심한다.

헌 레코오드 같은 기억 슬픔조차 또렷하지 않다.

 

 24.각혈의 아침

 

사과는 깨끗하고 또 춥고 해서 사과를 먹으면 시려워진다.

어째서 그렇게 냉랭한지 책상 위에서 하루 종일 색깔을 변치 아니한다 차차로-- 둘이 다 시들어 간다.

 

먼 사람이 그대로 커다랗다 아니 가까운 사람이 그대로 자그마하다 아니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그 어느 누구와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어니 그들의 어느 하나도 나를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다(레일을 타면 전차는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담배 연기의 한 무더기 그 실내에서 나는 긋지 아니한 성냥을 몇 개비고 부러뜨렸다. 그 실내의 연기의 한 무더기 점화되어 나만 남기고 잘도 타나보다 잉크는 축축하다 연필로 아무렇게나 시커먼 면을 그리면 鉛粉은 종이 위에 흩어진다.

 

리코오드 고랑을 사람이 달린다 거꾸로 달리는 불행한 사람은 나 같기도 하다 멀어지는 음향소리를 바쁘게 듣고 있나보다

발을 덮는 여자 구두가 가래를 밟는다 땅에서 빈곤이 묻어온다 받아 써서 통념해야 할 암호 쓸쓸한 초롱불과 우체국 사람들이 수명을 거느리고 멀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의 뱃속에 통신이 잠겨 있다.

새장 속에서 지저귀는 새 나는 콧속 털을 잡아뽑는다

밥 소란한 정적 속에서 미래에 실린 기억이 종이처럼 뒤엎어진다

벌써 나는 내 몸을 볼 수 없다 푸른 하늘이 새장 속에 있는 것 같이

멀리서 가위가 손가락을 연신 연방 잘라 간다

검고 가느다란 무게가 내 눈구멍에 넘쳐 왔는데 나는 그림자와 서로 껴안는 나의 몸뚱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알맹이까지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는둥

피가 물들기 때문에 여윈다는 말을 듣곤 먹지 않았던 일이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종자는 이제 심어도 나지 않는고 단정케 하는 사과 겉껍질의 빨간 색 그것이다.

공기마저 얼어서 나를 못 통하게 한다 뜰을 鑄型처럼 한 장 한 장 떠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호흡에 탄환을 쏘아넣는 놈이 있다

병석에 나는 조심조심 조용히 누워 있노라니까 뜰에 바람이 불어서 무엇인가 떼굴떼굴 굴려지고 있는 그런 낌새가 보였다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어릴 적 사진에서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

 

가브리엘 天使菌(내가 가장 불세출의 그리스도라 치고)

이 살균제는 마침내 폐결핵의 혈흔이었다(고?)

 

폐속 페인트 칠한 십자가가 날이면 날마다 발돋움을 한다

폐속엔 요리사 천사가 있어서 때때로 소변을 본단 말이다

나에 대해 달력의 숫자는 차츰차츰 줄어든다

 

네온사인은 색소폰 같이 야위었다

그리고 나의 청맥은 휘파람 같이 야위었다

 

하얀 천사가 나의 폐에 가벼이 노크한다.

황혼 같은 폐속에서는 고요히 물이 끓고 있다

고무전선을 끌어다가 성베드로가 도청을 한다

그리곤 세 번이나 천사를 보고 나는 모른다고 한다

그때 닭이 홰를 친다-- 어엇 끊는 물을 엎지르면 야단 야단--

 

봄이 와서 따스한 건 지구의 아궁이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모두가 끓어오른다 아지랑이처럼

나만이 사금파리 모양 남는다

나무들조차 끓어서 푸른 거품을 자꾸 뿜어내고 있는데도

 

 25.황(?)의 記

-?은 나의 목장을 수호하는 개의 이름이다. (1931년 11월 3일 命名)

 

記 一

 

밤이 으슥하여 ?이 짖는 소리에 나는 숙면에서 깨어나 옥외 골목까지 황을 마중 나갔다. 주먹을 쥔 채 떨어진 한 개의 팔을 물고 온 것이다.

보아하니 황은 일찍이 보지 못했을 만큼 몹시 창백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주치의 R의학박사의 오른팔이었다. 그리고 그 주먹 속에선 한 개의 훈장이 나왔다.

--犧牲動物供養碑 除幕式紀念-- 그런 메달이었음을 안 나의 기억은 새삼스러운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개의 腦髓 사이에 생기는 연락신경을 그는 癌이라고 완고히 주장했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그의 창으로 뛰어난 메스의 기교로써

그 信經腱을 잘랐다. 그의 그 같은 이원론적 생명관에는 실로 철저한 데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가 얼마나 그 紀念章을 그의 가슴에 장식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장례식 중에 분실된 그의 오른팔--현재 황이 입에 물고 온--을 보면 대충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래 그가 공양비 건립기성회의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무릇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균형한 건축물들로 하여 뒤얽힌 병원 구내의 어느 한 귀퉁이에 세워진 그 공양비의 쓸쓸한 모습을 나는 언제던가 공교롭게 지나는 길에 본 것을 기억한다. 거기에 나의 목장으로부터 호송돼 가지곤 解剖舞의 이슬로 사라진 숱한 개들의 한 많은 혼백이 뿜게 하는 살기를 나는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더더구나 그의 수술실을 찾아가 예의 황의 절단을 그에게 의뢰했던 것인데--

나는 황을 꾸짖었다. 주인의 苦悶相을 생각하는 한 마리 축생의 인정보다도 차라리 이 경우 나는 사회 일반의 예절을 중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를 잃은 후에 나에게 올 자유-- 바로 현재 나를 염색하는 한 가닥의 눈물-- 나는 흥분을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나는 때를 놓칠세라 그 팔 그대로를 공양비 부근에 묻었다. 죽은 그가 죽은 동물에게 한 본의 아닌 계약을 반환한다는 형식으로......

 

記 二

 

봄은 5월 화원시장을 나는 황을 동반하여 걷고 있었다. 玩賞花草 종자를 사기 위하여......

황의 날카로운 후각은 파종후의 성적을 소상히 예언했다. 진열된 온갖 종자는 不發芽의 불량품이었다.

하나 황의 후각에 합격된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리석 모조인 종자 모형이었다.

나는 황의 후각을 믿고 이를 마당귀에 묻었다. 물론 또 하나의 불량품도 함께 시험적 태도로--

얼마 후 나는 逆倒病에 걸렸다. 나는 날마다 인쇄소의 활자 두는 곳에 나의 病軀를 이끌었다.

 

지식과 함께 나의 病집은 깊어질 뿐이었다.

하루 아침 나는 식사 정각에 그만 잘못 假睡에 빠져 들어갔다. 틈을 놓치려 들지 않는 황은 그 금속의 꽃을 물어선 나의 半開의 입에 떨어뜨렸다. 시간의 습관이 식사처럼 나에게 眼藥을 무난히 넣게 했다.

病집이 지식과 중화했다-- 세상에 교묘하기 짝이 없는 치료법-- 그 후 지식은 급기야 좌우를 겸비하게끔 되었다.

 

記 三

 

腹話術이란 결국 언어의 저장창고의 경영일 것이다.

 

한 마리의 축생은 인간 이외의 모든 뇌수일 것이다.

나는 뇌수가 擔任 지배하는 사건의 대부분을 나는 황의 위치에 저장했다-- 냉각되고 가열되도록--

나의 규칙을-- 그러므로-- 리트머스지에 썼다.

배-- 그 속-- 의 結晶을 가감할 수 있도록 소량의 리트머스액을 나는 나의 식사에 곁들일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의 배의 발언은 마침내 삼각형의 어느 정점을 정직하게 출발했다.

 

記 四

 

황의 나체는 나의 나체를 꼬옥 닮았다. 혹은 이 일은 이 일의 반대일지도 모른다.

나의 목욕시간은 황의 근무시간 속에 있다.

나는 穿衣인 채 욕실에 들어서 가까스로 욕조로 들어간다.

--벗은 옷을 한 손에 안은 채--

언제나 나는 나의 조상--육친을 위조하고픈 못된 충동에 끌렸다.

치욕의 계보를 짊어진 채 내가 해체대의 이슬로 사라진 날은 그 어느 날에 올 것인가?

 

피부는 한 장밖에 남아있지 않다.

거기에 나는 파란 잉크로 함부로 筋을 그렸다.

이 초라한 포장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해골에 대하여......

묘지에 대하여 영원한 景致에 대하여

 

달덩이 같은 얼굴에 여자는 눈을 가지고 있다.

여자의 얼굴엔 입맞춤할 데가 없다.

여자는 자기 손을 먹을 수도 있었다.

 

나의 식욕은 일차방정식 같이 간단하였다.

나는 곧잘 色彩를 삼키곤 한다.

투명한 광선 앞에서 나의 미각은 거리낌없이 表情한다.

나의 공복은 음악에 공명한다-- 예컨대 나이프를 떨군다--

 

여자는 빈 접시 한 장을 내 앞에 내놓는다--(접시가 나오기 전에 나의 미각은 이미 요리를 다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여자의 구토는 여자의 술을 뱉어낸다.

그리고 나에게 대한 체면마저 함께 뱉어내고 만다.(오오 나는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요리인의 단추는 오리온좌의 略圖다.

여자의 육감적인 부분은 죄다 빛나고 있다. 달처럼 반지처럼

그래 나는 나의 신분에 알맞게 나의 표정을 절약하고 겸손해 한다.

帽子-- 나의 모자 나의 疾床을 감시하고 있는 모자

나의 사상의 레테르 나의 사상의 흔적 너는 알 수 있을까?

나는 죽는 것일까 나는 이대로 죽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사상은 네가 내 머리 위에 있지 아니하듯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모자 나의 사상을 엄호해 주려무나!

나의 데드마스크엔 모자는 필요 없게 될 터이니까!

그림 달력의 장미가 봄을 준비하고 있다.

붉은 밤 보랏빛 바탕

별들은 흩날리고 하늘은 나의 쓰러져 객사할 광장

보이지 않는 별들의 嘲笑

다만 남아 있는 오리온좌의 뒹구는 못[釘] 같은 星員

나는 두려움 때문에 나의 얼굴을 변장하고 싶은 오직 그 생각에 나의 꺼칠한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감추어 본다.

 

정수리 언저리에서 개가 짖었다. 불성실한 지구를 두드리는 소리

나는 되도록 나의 五官을 취소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을 포기한 나는 기꺼이-- 나는 종족의 번식을 위해 이 나머지 세포를 써버리고 싶다.

바람 사나운 밤마다 나는 차차로 한 묶음의 턱수염 같이 되어 버린다.

한 줄기 길이 산을 뚫고 있다.

나는 불 꺼진 탄환처럼 그 길을 탄다.

봄이 나를 뱉어낸다. 나는 차가운 압력을 느낀다.

듣자 하니-- 아이들은 나무 밑에 모여서 겨울을 말해 버린다.

화살처럼 빠른 것을 이 길에 태우고 나도 나의 불행을 말해 버릴까 한다.

한 줄기 길에 못이 서너 개-- 땅을 파면 나긋나긋한 풀의 준비-- 봄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26. 정식(正式) 

정식·1 
해저에 가라앉는 한 개 닻처럼 소도(小刀)가 그 구간(軀幹) 속에 멸형(滅形)하여 버리더라 완전히 닳아 없어졌을 때 완전히 사망한 한 개 소도(小刀)가 위치에 유기(遺棄)되어 있더라

정식·2 
나와 그 알지 못할 험상궂은 사람과 나란히 앉아 뒤를 보고 있으면 기상(氣象)은 몰수되어 없고 선조가 느끼던 시사(時事)의 증거가 최후의 철의 성질로 두 사람의 교제를 금하고 있고 가졌던 농담의 마지막 순서를 내어 버리는 이 정돈(停頓)한 암흑 가운데의 분발은 참 비밀이다 그러나 오직 그 알지 못할 험상궂은 사람은 나의 이런 노력의 기색을 어떻게 살펴 알았는지 그 때문에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 하여도 나는 또 그 때문에 억지로 근심하여야 하고 지상 맨 끝 정리(整理)인데도 깨끗이 마음 놓기 참 어렵다

정식·3 
웃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표본 두개골에 근육이 없다

정식·4 
너는 누구냐 그러나 문 밖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외치니 나를 찾는 일심(一心)이 아니고 또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한들 나는 차마 그대로 내어버려 둘 수는 없어서 문을 열어주려 하나 문은 안으로만 고리가 걸린 것이 아니라 밖으로도 너는 모르게 잠겨 있으니 안에서만 열어주면 무엇을 하느냐 너는 누구기에 구태여 닫힌 문 앞에 탄생하였느냐

정식·5 
키가 크고 유쾌한 수목이 키 작은 자식을 낳았다 궤조(軌條)가 평편한 곳에 풍매(風媒)식물의 종자가 떨어지지만 냉담한 배척이 한결같아 관목은 초엽(草葉)으로 쇄약하고 초엽은 하향하고 그 밑에서 청사(靑蛇)는 점점 수척하여 가고 땀이 흐르고 머지 않은 곳에서 수은(水銀)이 흔들리고 숨어 흐르는 수맥(水脈)에 말뚝 박는 소리가 들렸다.

정식·6 
시계가 뻐꾸기처럼 뻐꾹거리길래 쳐다 보니 목조 뻐꾸기 하나가 와서 모으로 앉는다 그럼 저게 울었을 리도 없고 제법 울까 싶지도 못하고 그럼 아까 운 뻐꾸기는 날아갔나


27.이런 시詩 / 이상

 

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무지 어디서인가 본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危險

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 밤에 한소내기 하였으니 필시必是 그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돌

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처량凄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作文

을 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

없오이다. 내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 생각

하리다. 자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럼이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詩는 그

만찢어버리고싶더라.

 이상(1911-1937) 선『 건축무한육면각체


 

 

날개 - 단편소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로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인 듯 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 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감정은 어떤 '포우즈'. (그 '포우즈'의 원소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여왕봉과 미망인---세상의 하고 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이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 '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모함이 되오?

굿바이.

 

-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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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 모음 46편

1.고향

신동엽

하늘에
흰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2.그 가을

신동엽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
바람은 불었네
냇둑 전지(戰地)에.

알밤이 익듯
여울물 여물어
담배 연긴 들길에
떠가도.

걷고도 싶었네
청 하늘 높아가듯
가슴은 터져
들 건너 물 마을.

바람은 머리칼 날리고
추석은 보였네
호박국 전지에.

버스는 오가도
콩밭 머리,
내리는 애인은 없었네.

그날은 빛났네
휘파람 함께
수수밭 울어도
체부(遞夫) 안 오는 마을에.

노래는 떠 갔네. 깊은 들길
하늘가 사라졌네, 울픈 얼굴
하늘가 사라졌네
스무살 전지에.

3.그 사람에게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4.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신동엽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을 일일께며

5.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6.꽃 대가리

신동엽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숲 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두드리면
먼 상고까장 울린다

춤 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 타작 소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삼한ㅅ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7.너는 모르리라

신동엽

너는 모르리라
그 날 내 왜
넋나간 사람처럼 고가(古家) 앞
서 있었던가를

너는 모르리라
진달래 피면 내 영혼 속에
미치는 두 마리
짐승의 울음

너는 모르리라
산을 열 굽이 넘고도
소경처럼 너만을 구심(求心)하는
해와 동굴과 내 사랑

너는 모르리라
문명된 하늘 아래 손넣고 광화문 뒷거리 걸으며
내 왜 역사 없다
벌레 삥·····니까렸는가를

하여
넌 무덤 속 가서도 모를 것이다
너 안 보는 자리서
찬 돌 쓸어안으며
그 숱한 날 얼마나 통곡했는가

그리하여
넌 할미꽃 밑에서도 모를 것이다
그 날 왜 내
눈물먹은 네 진주에 손대지
안했는가를.
그리고 그것은 몰라야 쓴다.

8.너의 무덤에서

신동엽

온 종일
한가한 공동묘지엔
흔건히 지쳐
해가 딩굴다

함부로 갈큇발이
헤비고 간
가난한 애장 우에
계절은 땀을 흘리며
거기 나물 뜯던 언덕을
아련히 기어가는 하오(下午).

각시풀 다듬던 연한
너의 뼈마디는
지층을 적시며
오늘도 산화(酸化)하는가.....
정(貞)이.

정(貞)이
밤마다 새푸랗니
놀래였나
지표가 구겨졌다.

9.노래하고 있었다

신동엽

노래하고 있었다.
달리는 열차 속에
창가 기대앉아
지나가는 풍경
바라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물결
양털 같은 세월 위서
너는 노래하고 있었다.

죄없는 사람
가로수 밑 걸으며
또각또각 구둣소리
눈녹아 하늘로 번질 때

하늘은 바람
대지 위 고요

노래하고 있었다.
창가 기대앉아
지나가는 들녘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로수 위
구름 위
보이지 않는 영화로운
미래로의 소리로,

거대한 신은
소맷깃 뿌리며
부처님 같은 얼굴로

내 괴로움 위서
노래하고 있었다.

10.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우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1.눈 날리는 날

신동엽


지금은 어디 갔을까.

눈은 날리고
아흔 아홉 굽이 넘어
바람은 부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

그 논길을 타고
한 달을 가면, 지금도
일곱의 우는 딸들
걸레에 싸안고
대한(大寒)의 문 앞에 서서 있을
바람 소리여

하늘은 광란······
까치도 쉬어 넘던
동해 마루턱
보이는 건 눈에 묻은 나,
나와 빠알간 까치밥.

아랫도리 걷어올린
바람아,
머릿다발 이겨 붙여 산막(山幕) 뒤꼍
다숩던
얼음꽃
입술의 맛이여.

눈은 날리고
아흔 아홉 굽이 넘어
한(恨),
한은 쫓기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트렁크 끌르며
쉐탈 갈아입던 여인……

12.눈동자

신동엽


묻지 말고 이대로 보내 주옵소서
잊어버리고만 싶은 눈동자여

말곳 하면, 잘못
꿈 깨어져 버릴
깨끗한 얼굴

눈물 감추우며
제발 이대로 돌아가게
못본 척 해주소서

내 목숨 다 주고도
떠나기 싫은 눈동자여.

13.단풍아 산천

신동엽

즐거웁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뒤집혔어도
즐거웁게 가을은 돌아오고 있었지

여보세요
신령님
말씀해 주세요

산과 난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그리고 그인
나와 인연이 있을까요

흐들갑스레 단풍은 피어나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둔갑 떨었어도
단풍은 내 산천 물들여 울었지

보세요
상천(上天)계신 한울님
만날 수 있을까요
옥(玉)으로 깎을
출렁일 가슴

보세요
새 배타고
목성(木星)에나 가면
우린 이 지구사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피 터지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한반도 대관령 주막집에서
입 가리고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지

14.둥구나무

신동엽

뿌리 늘인
나는 둥구나무.

남쪽 산 북쪽 고을
빨아들여서
좌정한
힘겨운 나는 둥구나무
다리 뻗은 밑으로
흰 길이 나고
동쪽 마을 서쪽 도시
등 갈린 전지(戰地)

바위도 무쇠고
투구고 증오고
빨아들여 한 솥밥
수액만드는
나는 둥구나무

15.마려운 사람들

신동엽

마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서워 보이는 것이리

구름도 마려워서
저기 저 고개턱에 걸려 있나
고달픈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고요한 전날 밤
역사도 마려워서
내 금 그어진 가슴 위에 종종걸음 치나

구름을 쏟아라
역사의 하늘
벗겨져라

오줌을
미국 땅 살만큼의 돈만큼만
깔겨 봤으면
너도 사랑스런 얼굴이

16.미쳤던

신동엽

스카아트 밑으로
강 뚝에, 바람은
나부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내 초여름
고샹 같은 여인이여.

허리 아래로 대낮,
꽃 구렝인
눙치고,

깊은 오뇌(懊惱) 감춘
미쳤던,
미쳤던,
꽃 사발이여.

스카아트 밑으로
천재는 흰 구원 빛내며.

한낮 꿀벌 뒤집혔다.

17.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신동엽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 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18.별 밭에

신동엽

바람이 불어요
눈보라 치어요 강 건너선.

우리들의 마을
지금 한창
꽃다운 합창연습 숨 높아가고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요.
안개가 흘러요 우리의 발 밑.

양달진 마당에선
지금 한창 새날의 신화 화창히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요.

노래가 흘러요
입술이 빛나요 우리의 강기슭.

별 밭에선 지금 한창
영겁으로 문 열린 치렁 사랑이
빛나는 등불 마냥
오손도손 이야기되며 있는데요.

19.보리 밭

신동엽


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아무도 모를 무섬이었지
우리네 숨가쁜 몸짓은.

사랑하던 사람들은
기를 꽂고 달아나 버리었나,

버스 속선 검정구두 빛났고
우리 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

그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너의 눈동자엔
북부여 달빛
젖어 떨어지고,

조상쩍 사냥 다니던
태백줄기 옹달샘 물맛,
너의 입술 안에 담기어 있었지.

네 몸냥은 내 안에
보리밭과 함께
살아 움직이고,

맨 몸 채, 뙤약볕 아래
서해바다로 들어가던
넌 칡순 같은 짐승이었지.

20.봄은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21.봄의 소식(消息)

신동엽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이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레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몸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22.불바다

신동엽

줄줄이 살뼈는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는 마음밭을 이랑 이뤄 들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신주알 향기 푸른 치마폭 찬란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울창한 원생림(原生林)
전쟁이 불지르고 간 황토배기 벌판에
한가닥 바람길이 열려 가느른 꽃뱀처럼
노래가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밭으로
황진이 마당 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에
아침 저녁 비쳐들었을 아름다운 신라 가인(佳人)들.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에
고개마다 나날이 봇짐 도시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을 들어 보아라.

해가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나무뿌리 와 닿은 조상들의 주막 가에
줄줄이 태고적 투가리들이 쏟아져 오고
바다 밑에서 다시 용트림하여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이랑밭에 들꽃 피운 망울들은
일제히 돌창을 세워 하늘을 반란(反亂)한다.

23.빛나는 눈동자

신동엽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으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안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 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의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정신 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24.사랑

신동엽

진하게
진하게
모란처럼 소북함 가득 담고 오너라

참새처럼 깡똥한, 날매
가슴차게 안겨 오너라

경(憬)이여

장미처럼 매선 향기
가시로 쏘아라

화염(華艶)한 눈웃음은
다음 장(章)으로

25.사랑의 고정

신동엽

사랑의 고정(苦情)을 이해하기가
그리 쉽답니까?
말슴 마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도
겉으로 웃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이해되는 거랍니다.

천지신명이 대자연에 밝으니
나는 아무델 가나
알머리처럼 따가워라.

너의 방에선 너의 보금자리 남새가 난다.

자신(自信)이 흔들리는 지라
자꾸
역확인(逆確認)을 얻으려고

<자신 있느니라고>
강조해 보는 것이리라.

석(石)을 두고의 순수한 상모(想慕)가 아니다.
어느 누구의 것과 비교하기 위한
빌미로써의 석(石).
또는 그것에 반동적으로 대립하기 위한
방패로써의 석(石).

26.산에 언덕에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27.살덩이

신동엽

우리들의 이야기는
걸레

살아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마음은
누더기

살아있는 것은
뼈뿐이다.

오, 비본질적인 것들의
괴로움이여

뼈는
겉치레

살아 있는 것은
바람과
산뿐이다.

그렇게 많은
비단을 감았지만

너를 움직이는 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고깃덩어리 알몸

물건 없는 산
소나무 곁을
혼자서 너는 걸어가고 있고야

오, 작별한 냄새여
살덩이가
지금 저 산을
내려가고 있고야

28.삼월

신동엽

오늘은 바람이 부는데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
더러움 역겨움 건들이고
내게로 불어만 오는데

음악실 문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양주 쓰레기통 속
구두통 멘 채
콜탈칠이 걸어온다

배는 고파서 연인(戀人) 없는 봄
문 닫은 사무실 앞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면
그래도 콧등은 간지러운
코리아

제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갯벌로 갈거나, 가서
복쟁이 알이나
주워먹어 볼거나

바람은 부는데
꽃피던 역사(歷史)의 살은
흘러갔는데
폐촌(廢村)을 남기고 기름을
빨아가는 고층(高層)은 높아만 가는데

말없는 내 형제(兄弟)들은
광화문(光化門) 창밑,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公園) 벤취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를 넘어
오만은 점점 거칠어만 오는데
그 밑구멍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로 코리아는 더러워만 가는데

나만이 아닌데
쭉지 잽히고
아사(餓死)의 깊은 대사관(大使館) 앞
걸어가는 행렬(行列)은
나만이 아닌데

이젠
안심하고 디딜 한 평의 땅도
없는데
지붕마다
전략(戰略)은 번식해만 가는데

버스 정류장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늘메미 울음 같은
아사녀의 봄은
말없이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동학(東學)이여, 동학(東學)이여
금강(錦江)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 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

소백(小白)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야산(野山)으로 갈거나
그날이 오기 전, 가서
꽃창(槍)이나 깎아보며 살거나

29.새로 열리는 땅

신동엽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 못 미쳐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건지다 보면
밑둥 긴 폭포처럼
역사는 철 철 흘러가 버린다.

피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넘으면
정전지구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 거니노라면
초연 걷힌 밭 두덕 가
새벽 열려라.

30.새해 새 아침은

신동엽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하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짓는다.

31.序詩(서시)

신동엽

아담한 산들 드믓 드믓
맥을 끊지 않고 오간
서해안 들녘에 봄이 온다는 것
것은 생각만 해도, 그대로
가슴 울렁여 오는 일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또 가을
가을이 가면 겨울을 맞아 오고
겨울이 풀리면 다시 또
봄.

농삿군의 아들로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고웁게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딀 때 걷워딀 듯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 짤랑
꽃가마 타 보고
환갑 잔치엔 아들딸 큰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 살다가
조용히 묻혀가도록 내 버려나
주었던들

또, 가욋말일찌나, 그러한 세월
복 많은 歌人(가인)이 있어
(蜂蝶風月(봉접풍월)을 노래하고
장미에 찔린 애타는 연심을 읊조리며
수사학이 어떠니 표현주의가 어떠니
한단들 나 역 모르는 분수대로
그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이라도
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자탄에 맞은 사람
태백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 제비 돌아와 흙 묻어 나르면
솟아오는 슬픔이란 묘지에 가 있는
누나의 생각일까.....?

산이랑 들이랑 강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인데
머지 않아 나는 아주
죽히우러 가야만 할 사람이라는
것이라.

잘 있으라.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구름이 끼던
두번 다시 상기하기 싫은
人種(인종)의 늦장마철이여

이러한 노래 나로 하여
처음이며 마즈막이게 하라
진창을 노래하여 그 진창과 함께
멸망해 버려야 할 사람이
앞과 뒤를 헤쳐 세상에
꼭 하나뿐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두고 두고, 착한 인간의 후손들이여

이 자리에 가는 길
서낭당 돌을 던져

구데기.
그런 역사와 함께 멸망한 나의
무덤, 침 한번 더 뱉고
다시 보지 말아져라.

32.수운이 말하기를

신동엽

水雲(수운)이 말하기를
슬기로운 가슴은 노래하리라.
맨발로 삼천리 누비며
감꽃 피는 마을
원추리 피는 산 길
맨주먹 맨발로
밀알을 심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
하눌님은 콩밭과 가난
땀흘리는 사색 속에 자라리라.
바다에서 조개 따는 소녀
비 개인 오후 미도파 앞 지나는
쓰레기 줍는 소년
아프리카 매 맞으며
노동하는 검둥이 아이,
오늘의 논밭 속에 심궈진
그대들의 눈동자여, 높고 높은
하눌님이어라.

수운이 말하기를
강아지를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개에 의해
은행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은행에 의해
미움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미움에 의해 멸망하리니,
총 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그, 사랑에 의해 구원받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 와 있는 쇠붙이는
한반도의 쇠붙이가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미움은
한반도의미움이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가시줄은
한반도의 가시줄이 아니어라.

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서는
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

33.어느 해의 유언

신동엽

뭐…….
그리 대단한 거
못되더군요

꽃이 핀 길가에
잠시 머물러 서서

맑은 바람을
마셨어요

모여 온 모습들이 곱다 해도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니더군요

없어져
도리하며
살아보겠어요

맑은 바람은 얼마나 편안할까요.

34.여름 이야기

신동엽

팔월의 하늘에는
구름도 없고
바람 부는 가로수,
피난가는 내 소녀는
영어를 알고
있었지.

나뭇게 끄을며
절길 오른
바랑,
산골길 칠백리엔
이마 훔치던
원효선사.

원두막 밑에선 미국 간 아들
편질 읽으며 칠순 할아버지가
사관침 장죽에 쑥을 버무려 넣고
있었지.

패랭이 달린
황토 언덕
젯트편대가
강을 울리면
배꼽 내논 아해들은
풀뿌리 씹으며
구경을 하고.

마(馬), 진(辰) 사람네
조개무덤 쌓던
댕댕이 넌출 고을엔
수평 멀리
함성소리만
불 질려 오른다.

꽃신 놓인 토방
놋거울은 닳고,
콩밭 매는 뒷곁
황진이 숲속선
땅 즐겁게
멍석 딸기가
익고
있었다.

35.여자의 삶

신동엽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섣달 그믐
그리고 석양
눈ㅅ발은 잔잔한 바다
수평선 너머
날리는데

해안선
모래밭 따라
여인 하나 콧노래 부르며
걷고 있었지

고개는 숙이고
사각 사각, 모래밭 밟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콧노래.
조용히 날리는
옷고름.

파도소리도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고

겨울도
도시도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고

다수운 피만
흰 볼기따라
발끝으로
머리끝으로
고루고루
흐르고 있었지.

무엇을 생각하며
그녀의 귀밑머린
바람에 날리고
있었을까.

무엇을 노래하며
그녀의 두 젖무덤은
저고리 안섶에서
물결치고 있었을까.

무엇을 기원하며
그녀의 눈동잔
겨울 하늘 아래 수밀도처럼
드리워져 있었을까.

『나는 밭,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씨가 뿌려질 때를.

하늘 나르는 구름이든
여행하는 씀바귀꽃이든나려와 쉬이세요
씨를 뿌려 보세요.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좋은 씨 받아서
좋은 신성(神性) 가꿔보고 싶으니까.

좀더 가까이, 이리 좀 와 보세요
안 되겠어요, 당신 눈은 살기.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은 우둔, 당신 입은 모략,
오랜 대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전쟁을 좋아하는 종자,
또 당신은,
피가 화폐냄새로 가득 차 있군요.

안 되겠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긴 목덜미
비가 내리고 있어지, 그녀의 가는 허리 아래
비가 내리고 있었지
구렁이처럼 흐느적치던 긴 네 다리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그 깊은 정상 위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지리산 산정 꽃밭 위에도
너는 서 있었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경부선 가로수 총 메인 소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미국으로 서독으로 품팔이 떠나던
내 소녀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강강수얼래 대열에 끼여
조국을 돌던 내 소녀.
그때 네 뒷꿈치에선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

여자는
집.
집이다, 여자는.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여자는 집, 누워있는 집.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의 마음.
그 피묻은 죄까지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 신비로운 늪에서
빨래를 시켜 준다.

쇠붙이도
탄도탄도
그녀의 무릎 밑에 와선 흐물흐물
녹아나리는 물.

여자는
물.
갈대가 아니라, 물.
있을 것이 없는 자리에 자기를 적응시켜
있을 것으로 충만시켜 주는, 물

껍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은
신.

겁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의 알몸은
평화.

껍질이여
여인을 질식시키고 있는
껍질이여,
네가 하나의 사내를 사유하고 싶어 할 때
불행은 네 발 밑에 허당을 판다.
네가,
네가
자연 속 보물들을 자기 코걸이 귀걸이로 사유하려 할 때
세상의 발 밑은 구더기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흐려지면
사내들은, 전쟁을 장사하는
미치광이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맑으면
사내들은, 구도하는
성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러 낸 토양이여
넌, 여자.
석가모니를 길러 낸 우주여
넌, 여자
모든 신의 뿌리 늘임을
너그러이 기다리는 대지여
넌, 여성

마을마다
빠알간 홍시감이 익어나갈 때
붉은 벽돌담이 있는 도시
그 도시로 가는 길가에서
나는 보았지
고개마다
옥바라지 봇짐, 그 옷보자기 속에서
나는 보았지.

남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오빠의 것이었을까
누럭누럭 기운
두툼한 솜바지 두툼한 솜저고리.
못쓰게 된 꼬마들 옷조각으로 기운
다스운 속 내의.

그리고 나는 보았지
그녀가 쉬었다 일어서면서
허리띠 조르는 것을.

그리고 나는 보았지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쉐타 안섶에
꽂혀있던
한 권의 문화사개론 책.


그리고 나는 보았지
송화가루는 날리는데, 들과 산
허연 걸레쪽처럼 널리어
나무뿌리 풀뿌리 뜯으며
젊은 날을 보내던
엄마여,
누나여.

그리고 나는 보았지
진달래는 피는데
벌거벗은 산과 들
가마니 속에
솔방울 고지배기 따 이고
한 손으론 흐르는 젖 싸안으며
맨발 길 삼십리
울렁이며 뛰던
아낙네의 종아리.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함박눈은 산과 도시
여인의 호수 위 펑펑
쏟아져 오는데

고궁 담 모퉁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두 손을 깍지 싸
높은 가슴 위에 얹고
눈은 수밀도처럼 내리깐 채
들릴 듯 말 듯
콧노래 부르며

고궁 길 돌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36.영(影)

신동엽

버스에 오르면 흔들리는 재미에
하루를 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먹먹한 가슴 굳어만 갈 뿐
나타나줄 것같은
비가 내리는
어둔 저녁에도
너는 없었다.
대폿집 앞에 서면
부서지고 싶은 대가리
대가리를 흔들면서
전찻길을 건넌다.

댕그랑 땡
미친 가슴처럼
아스팔트 바닥에 쏟아지는
통쾌한 중량의 동전잎
버스에 오르면 울고 싶은 재미에
하루를 산다.
너는 말할 것이다.
돌아가라, 돌아가라고.
그러면서도
너는 내 눈을 지켜보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비는 내리는데
숙명처럼
나는 널 생각하고
고뇌의 심연에
빠져 버둥이는
내 눈을 너는
연민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떠나라,
아니면 함께 빠져주든가.
가로수에 잎이 트면
그리고 보리 이랑이
강과 마을을 물들이면
나는 떠나갈 것이다.

37.완충지대(緩衝地帶)

신동엽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運河) 이켠서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 건지다 보면
밑둥 긴 목포처럼
역사는 철철 흘러가 버린다.

피 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嶺) 넘으면
완충지대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森林) 거니노라면
초연(硝煙) 걷힌 밭두덕가
풍장 울려라.

38.이곳은

신동엽

삼백 예순 날 날개 돋친 폭탄은 대양 중가운데
쏟아졌지만, 허탕 치고 깃발은 돌아간다.
승리는 아무데고 없다.

후두둑 대지를 두드리는 여우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냇가로 몰려갔다.
그들 떠난 자리엔 펄 펄 펄 심장이 흘리워 뛰솟고.

독은 비어 있다.
다투어 배 밖으로 쏟아져 나간 콩나물 역사.
아침 햇살 속 오간 수만 화살. 날아간 물체들의
흐느낌은 정(定)한 문, 지평(地平)의 밖이었다.

그곳엔 무덤이 있다.

바닷가선 비묻은 구름 용을 싣고 찬란하게
찌들어오리니
급기야 홍수는 오고,
구렝이, 모자, 톱니 쏠린 공장 헤엄쳐 나가면

조상도 없이 옛 마을터엔 훵훵 오갈 헛바람.
쓸쓸하여도 이곳은 점령하라. 바위 그늘 밑, 맨 마음채
여문 코스모스씨 한톨. 억만년 퍼붓는 허공밭에서
턱 가래 안창엔 심그라.
사람은 비어 있다.
대지는
한가한
빈 집을 지키고 있다.

39.이리 와 보세요

신동엽

이리 와 보세요
당신 눈에 살색(殺色)이 도는군요.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엔 우둔이
당신 입엔 시의(猜疑)가
오랜 대(代)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교만한 종자야요
또, 당신은
피가 병균으로 차 있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눈이 순정과 지혜로
맑게 빛나고
너그럽고 슬기로운
토양에서 자란
맘과 몸이 착실한
사내의 씨.

그리고, 마음과 힘을 쏟아
정성껏
나의 몸에 씨를 심거줄 사내.

40.조국(祖國)

신동엽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굿한 설악(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비통(悲痛)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
강산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벽(壁)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남북평야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조국아
한번도 우리는 우리의 심장
남의 발톱에 주어본 적
없었나니
슬기로운 심장이여,
돌 속 흐르는 맑은 강물이여.
한번도 우리는 저 높은 탑 위 왕래하는
아우성 소리에 휩쓸려본 적
없었나니.

껍질은,
껍질끼리 싸우다 저희끼리
춤추며 흘러간다.

비 오는 오후
뻐스 속서 마주쳤던
서러운 눈동자여,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 흐르고 있는
맑은 강물, 조국이여.
돌 속의 하늘이여.
우리는 역사의 그늘
소리없이 뜨개질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나니.

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
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
총기로 더럽혀진 땅을 빨래질하며
샘물 같은 동방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

41.좋은 언어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 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42.진달래 산천(山川)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꾳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의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아 튀는 산 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43.초가을

신동엽

그녀는 안다
이 서러운
가을
무엇하러
또 오는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진 궤상(机上) 앞
초가을 금풍(金風)이
살며시
선보일 때,

그녀의 등허리선
풀 맥인
광목 날
앉아 있었다.

아, 어느새
이 가을은
그녀의 마음 안
들여다보았는가.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

그녀는 안다.
이 빛나는
가을
무엇하러
반도의 지붕 밑, 또
오는 것인가…….

44.풍경(風景)

신동엽

쉬고 있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쉬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화창한
도오꾜 교외 논둑길을
한국 하늘, 어제 날아간
이국 병사는
걷고.

히말라야 산록
토막가 서성거리는 초병은
흙 묻은 생고구말 벗겨 넘기면서
하루삔 땅 두고 온 눈동자를
회상코 있을 것이다.

순이가 빨아 준 와이사쓰를 입고
어제 의정부 떠난 백인 병사는
오늘 밤, 사해(死海)가의
이스라엘 선술집서,
주인집 가난한 처녀에게
팁을 주고.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

해바라기 핀,
지중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엔,
온 종일, 상륙용 보오트가
나자빠져 딩굴고.

흰 구름, 하늘
젯트 수송편대가
해협을 건느면,
빨래 널린 마을
맨발 벗은 아해들은
쏟아져 나와 구경을 하고.

동방으로 가는
부우연 수송로 가엔,
깡통 주막집이 문을 열고
대낮, 말 같은 촌색시들을
팔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
동방대륙에서
서방대륙에로
산과 사막을 뚫어
굵은 송유관은
달리고 있다.

노오란 무꽃 핀
지리산 마을.
무너진 헛간엔
할멈이 쓰러져 조을고

평야의 가슴 너머로.
고원의 하늘 바다로.
원생의 유전지대로.
모여 간 탱크 부대는
지금, 궁리하며

고비 사막,
빠알간 꽃 핀 흑인촌
해 저문 순이네 대륙
부우연 수송로 가엔,
예나 이제나
가난한 촌 아가씨들이
빨래하며,
아심 아심 살고
있을 것이다.

45.한마음

신동엽

한 마음 가엽서라
돛도
삳도 없이

오날은 어델 흘러가나뇨

온 길을 돌아갈 수 없음이여.
유리창 넘어로 보히는
만지기 영 틀린
없어진 탑이여.

한 마음
가엽서라
나약한 사람 우에서
살아가는 

가다가 슬어질
가난한 마음이여.

46.五月(오월)의 눈동자

신동엽

지금 난 너를 보고 있지 않노라.
훈풍 나부끼던 머리칼
오월의 푸라타나스 가로(街路) 저 멀리
두고 온 보리밭 어덕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바람이 기어드는 가슴
나뭇잎 피는 산등성에 서서
술익는 마당
두고 온 눈동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남해바다 멀리
한번도 나의 울 안에
춤춰본 적 없는
푸른 빛 희열에 찬 생의 향기를
그윽한 새 잎에 받들어
나는 지금 마셔 주고 있노라,
온 마음 밭으로 깊이깊이 들여마셔 주고 있는 것이노라.

지금 난 너의 눈동자를 보고 있지 않노라.
지나온 하늘
草綠庭園(초록정원)에 딩굴던
태양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학창시절의 호밀밭 전쟁이 뭉개고 간 꽃잎의 촉촉한 밤하늘을
회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훈풍에 날리던 머리칼
山頂(산정)을 돌아 오르면
온 세계의 아름다웠던
천만가지 머언 오월의 향기를
나의 피알 속에
상기 살아있는 피 한 방울 감격 속에서
이렇게 새 잎 타고 불어오는 바람 언덕에 서서
오늘도 내일도 그제도
머리다발 날리며
마셔보고만 싶었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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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 모음 41편

《1》.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2》가을비

신경림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 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 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3》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4》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닭이라고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5》그 여름

신경림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왔다

구름을 몰고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왔다
꽃과 춤을 불러오고
저주와 욕설과 원망을 불러왔다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몰고오고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다

《6》기차

신경림

꼴뚜기젓 장수도 타고 땅 장수도 탔다
곰배팔이도 대머리도 탔다
작업복도 미니스커트도 청바지도 타고
운동화도 고무신도 하이힐도 탔다
서로 먹고 사는 애기도 하고
아들 며느리에 딸 자랑 사위 자랑도 한다
지루하면 빙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끝에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투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차창 밖에 천둥 번개가 치면
이마를 맞대고 함께 걱정을 한다
한 사람이 내리고 또 한 사람이 내리고.....
잘 가라 인사하면서도 남은 사람 가운데
그들 가는 곳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냥 그렇게 차에 실려 간다
다들 같은 쪽으로 기차를 타고 간다

《7》길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8》까치소리

신경림

간밤에 얇은 싸락눈이 내렸다
전깃줄에 걸린 차고 흰 바람
교회당 지붕 위에 맑은 구름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

싸락눈을 밟고 골목을 걷는다
큰길을 건너 산동네에 오른다
습기찬 판장 소란스런 문소리
가난은 좀체 벗어지지 않고
산다는 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

몸부림 속에서 따뜻한 손들
뜰판에 팽개쳐진 이웃들을 생각한다
지금쯤 그들도 까치 소리를 들을까
소나무숲 잡목숲의 철 이른 봄바람
학교 마당 장터 골목 아직 매운 눈바람

싸락눈을 밟고 산길을 걷는다
철조망 팻말 위에 산뜻한 햇살
봄이 온다고 봄이 온다고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

《9》裸木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갛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 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10》나무

신경림

나무를 길러 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 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11》나무를 위하여

신경림

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
불어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꺽이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몬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는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산비알과 바위너설에서 목 움추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

《12》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13》날개

신경림

강에 가면 강에 산에 가면 산에
내게 붙은 것 그 성가신 것들을 팽개치고
부두에 가면 부두에 저자에 가면 저자에
내가 가진 그 너절한 것들을 버린다
가벼워진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훨훨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그러나 어쩌랴 하룻밤새 팽개친 것
버린 것이 되붙으며 내 몸은 무거워지니
이래서 나는 하늘을 나는 꿈을 버리지만
누가 알았으랴 더미로 모이고 켜로 쌓여
그것들 서섯히 크고 단단한 날개로 자라리라고
나는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강에 가면 강에서 저자에 가면 저자에서
옛날에 내가 평개친 것 버린 것
그 성가신 것 너절한 것들을 도로 주워
내 날개를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면서

《14》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신경림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
들리는 말 뜻 몰라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지나는 행인에게 두 손 벌려 구걸도 하고
동전 몇닢 떨어질 검은 손바닥

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
그 뜻을 모른들 무슨 소용이랴

《15》냇물을 보며

신경림

소녀들이 한떼 새옷을 입고 나들이를 나왔다
재넘어 바람에도 재잘대고 깡총대고
감추려 해도 부끄러운 속살 자꾸만 드러나서
벼랑을 뛰어내리기 전엔 엄살도 떨어보이는데
달음박질에 도는 바위너설에 햇살이 더 곱다
마을 앞은 게걸음으로 저자는 깨끔발로 지날 즘엔
새옷에 때도 묻고 종아리엔 얼룩도 지겠지
방죽이 가로막으면 서로 팔을 끼고
어기영차 밀어서 길을 터라 힘은 곱으로 솟고
그때쯤 몸은 더렵혀지고 갈기갈기 찢겨 있겠지만
무슨 상관이랴 지친 다리 끌고라도
저 들판만 지나면 넓고 푸른 바다인 것을
새파란하늘에 두듕실 구름만 떠 있을 것을
치마를 들추는 바람에 발걸음 크게 허공에 차리

《16》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7》눈

신경림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 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서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는다 해도

《18》늙은 소나무

신경림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19》동해바다

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하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는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20》뗏목

신경림

뗏목은 강을 건널 때나 필요하지
강을 다 건너고도
뗏목을 떠메고 가는 미친놈이 어데 있느냐고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려
명진 스님이 하던 말이다
저녁 내내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절방
문을 열어 는개로 뽀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지지 않겠다고
밤낮으로 바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떠메고
뻘뻘 땀 흘리며 있는 것은 아닐까

《21》만남

신경림

살구꽃 지고 복사꽃 피던 날
미움과 노여움 속에서 헤어지면서
이제 우리 다시 만날 일 없으리라 다짐했었지
그러나 뜨거운 여름날 느닷없는 소낙비 피해
처마 아래로 뛰어드는 이들 모두 낯이 익다
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 손에 밴 기름때 한결같고
묻지 말자 그동안 무얼 했느냐 묻지 말자
손 놓고 비 멎은 거리로 흩어지는 우리들
후즐근히 젖은 어깨에 햇살이 눈부시리
언제고 다시 만날 걸 이제서 맏는 우리들
메마른 허리에 봄바람이 싱그러우리

《22》매화를 찾아서

신경림

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
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
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
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
차 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
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
내년 봄에도 다시 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
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23》목계 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 여울 모질거든 바위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끊어 넘는 토방 뒷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24》봄날

신경림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 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이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살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25》빛

신경림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26》산에 대하여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 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 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

《27》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신경림

새벽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길고 오랜 비바람 속에서 태어나고
백날 백밤 온 세상을 뒤덮는
진눈깨비 속에서 태어난다
새벽은 어둠을 몰아내는
싸움 속에서 태어난다
비바람을 야윈 어깨로 막는
안간힘 속에서 태어나고
진눈깨비 맨가슴으로 받는
흐느낌 속에서 태어난다

새벽은 먼저 산길에 와서
굴 속에 잠든 다람쥐를 간지르고
풀잎을 덮고 누운
풀벌레들과 장난질치지만
새벽은 다시 산동네에도 와서
가진 것 날선 도끼밖에 없는
늙고 병든 나무꾼을 깨우고
들일에 지쳐 마룻바닥에 쓰러진
에미 없는 그의 딸을 어루만지지만
새벽은 이제 장거리에 와서
장사 채비에 신바람이 난
주모의 치맛자락에서 춤을 추고
해장국집에 모여 떠들어대는
장꾼들과 동무가 되기도 하지만

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어둠을 영원히 몰아내리라
굳은 다짐 속에서만 밝는다
비바람 진눈깨비 다시 못 오리라
힘껏 낀 어깨동무 속에서만 밝는다
다람쥐도 풀벌레도 산짐승도
늙고 병든 나무꾼도 장꾼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하나로 어깨동무를 하고
크고 높이 외치는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28》세월

신경림

흙 속을 헤엄치는
꿈을 꾸다가
자갈밭에 동댕이쳐지는
꿈을 꾸다가……

지하실 바닥 긁는
사슬소리를 듣다가
무덤 속 깊은 곳의
통곡소리를 듣다가……

창문에 어른대는
하얀 달을 보다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29》싹

신경림

어둠을 어둠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모른다
아픔도 없이 겨울을 보낸 사람은 모른다
작은 빛줄기만 보여도 우리들
이렇게 재재발 거리며 달려나가는 까닭을
눈이 부셔 비틀대면서도 진종일
서로 안고 간질이며 낄낄대는 까닭을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깊이 숨을 소중하고도 은밀한 상처를 꺼내어
가만히 햇빛에 내어 말리는 까닭을
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지던 까닭을

《30》쓰러지진 것들을 위하여

신경림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 십만이 모이는 유세 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 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31》압록강에서

신경림

강은 가르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을 가르지 않고
마을과 마을을 가르지 않는다.
제 몸 위에 작은 나무토막이며
쪽배를 띄워 서로 뒤섞이게 하고,
도움을 주고 시련을 주면서
다른 마음 다른 말을 가지고도
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친다.
건너 마을을 남의 나라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게
버려 두지 않는다.
한 물을 마시고 한 물 속에 뒹굴며
이웃으로 살게 한다.

강은 막지 않는다.
건너서 이웃 땅으로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
짐즛 몸을 낮추어 쉽게 건너게도 하고,
몸 위로 높이 철길이며 다리를 놓아,
꿈많은 사람의 앞길을 기려도 준다.
그래서 제가 사는 땅이 좁다는 사람은
기차를 타고 멀리 가서 꿈을 이루고,
척박한 땅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강 건너에 농막을 짓고 오가며
농사를 짓다가, 아예
농막을 초가로 바꾸고
다시 기와집으로 바꾸어,
새터전으로 눌러 앉기도 한다.

강은 뿌리치지 않는다.
전쟁과 분단으로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제 고장 사람들이
뒤늦게 찾아와 바라보는
아픔과 회한의 눈물젖은 눈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제 조상들이 쌓은 성이며 저자를
폐허로 버려 둔 채
탕아처럼 떠돌다 돌아온
메마른 그 손길을 따듯이 잡아 준다.
조상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수없이 건너가고 건너온
이 강을 잊지 말란다.

강은 열어 준다, 대륙으로
세계로 가는 길을,
분단과 전쟁이 만든 상처를
제 몸으로 말끔히 씻어 내면서.
강은 보여준다,
평화롭게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어두웠던 지난날들을
제 몸 속에 깊이 묻으면서.
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

《32》어둠 속으로

신경림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들 가고있다
꽃으로 피어 서로 시새우던 안타까움을 두고
뜨거운 햇볕에 몸을 익히던 어려움을 잊고
달빛과 이슬에 들뜨던 부끄러움을 버리고
한낱 과일로 떨어져 푸섶에 썩기 위하여
섬돌에서 우는 귀뚜라미 울음도 듣지 못하는
가을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도 보지 못하는
깊고 긴 어둠 속으로 허둥대며 가고 있다


《33》여름날

신경림

마천에서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 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34》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35》장미에게

신경림

나는 아직도 네 새빨간
꽃만을 아름답다 할 수가 없다
어쩌랴, 벌레 먹어 누렇게 바랜
잎들이 보이는데야
흐느끼는 귀뚜라미 소리에만
흘릴 수가 없다

다가올 겨울이 두려워
이웃한 나무들이
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꽃잎에 쏟아지는 달빛과
그 그림자만을
황홀하다 할 수가 없다
귀기울여 보아라
더 음산한 데서 벌어지는
더럽고 야비한 음모의 수런거림에

나는 아직도
네 복사꽃 두 뺨과
익어 터질 듯한 가슴만을
노래할 수가 없다.
어쩌랴, 아직 아물지 않은
시퍼런 상처 등뒤로 드러나는데야
애써 덮어도 곪았던 자욱
손등에 뚜렷한데야

《36》정월의 노래

신경림

눈에 덮여도
풀들은 싹트고
얼음에 깔려서도
벌레들은 숨쉰다.

바람에 날리면서
아이들은 쉬 놀고
진눈깨비에 눈 못 떠도
새들은 지저귄다

살얼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사랑하고
손을 잡으면
숨결은 뜨겁다

눈에 덮여도
먼동은 터오고
바람이 맵찰수록
숨결은 더 뜨겁다

《37》진달래

신경림


1
냇물 타고 내려온 복대기가
마당을 덮은 가겟집
씨리목 산울타리에
진달래가 섞여 피었다

키가 큰 그 집 의붓딸이
나는 좋았다
가겟방 들마루에 나앉으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달 뜨는 게 보이고

그애 제 죽은 애비 자랑에
툭하면 밤이 깊었다
후미진 골짝 돌자갈 밑에 누워
소쩍새 울음에 눈물 삼킬 그애 애비

2
나는 삼짇날 그애 꿈을 꾼다
산울타리에 섞여 피던
진달래를 본다
재봉틀에 손 찔리며
쏟아지는 잠 쫓는 그애의 딸을 본다

골목 안을 서성대는
가난한 어머니를 본다

무엇인가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이 길고 질긴 줄은

소나무 사이로
달 뜨는 걸 본다

《38》집으로 가는 길

신경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39》초원

신경림

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
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든 말똥에서
마른풀 냄새가 난다.

짙푸른 하늘 저편에서 곤히 잠들었을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40》파도

신경림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고통으로 남고 미움으로 남는다
그러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간다
바람에 몰려서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려지기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그 먼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41》파장(罷場)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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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 모음 40편

1.가을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2.나무가 말하였네

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3.내 만일

강은교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4.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 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 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5.동백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6.별

강은교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7.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8.서시

강은교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9.수평선

강은교

이제는 돌아갑시다
돌아가 깊이깊이
어둠에 얼굴을 담급시다
수만 주름살 가만가만
몸 흔드는 바닷가
철없이 나와 앉은 피안의 등불들
거품으로 거두고
큰 소리 한 번 외쳐 봅시다

부서지는 것은
파도만은 아니리
부서지면서 온전한 것

또한 바다만은
아니리

10.순례자(巡禮者)의 잠

강은교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11.숲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12.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님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에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를 말하면서
올 대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13.이유

강은교

오늘 아침 그 간판이 떠지지 않는 눈 비비며 미소하는 이유는
그래서 거기 내리는 안개가 세상을 허옇게 칠하며 일어서는 이유는
그래서 바람 한 줌이 바위들의 어깨 위에 냉큼 올라앉는 이유는
그래서 이슬 한 방울이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이유는
부지런히 산을 오르며 모든 풀잎의 뺨을 쓰다듬는 이유는
모든 풀잎의 뺨 위에서 또로로록 빗방울과 손을 잡는 이유는
조만간 황금빛 햇님이 긴 치마를 펄럭이며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14.일어서라 풀아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15.자전(自轉)

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16.풀잎

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 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17.23층의 햇빛

강은교

지금 막 심장에 도착했어
뼈 하나를 지났다구

간을 지나
콩팥을 지나

갈거야, 너의 피로

그림자가 오면 그림자를 기대게 하면서
눈물이 오면 눈물을 기대게 하면서
바람이 오면 바람을 기대게 하면서

햇빛의 금빛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새까만 그림자의 손톱들이 차가운 벽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갈거야, 너의 핏 속으로
별이 오면 별을 기대게 하면서.

18.가는 곳

강은교

달이 뜬다,
산 너머 칡 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19.가을의 書

강은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 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 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걸

보아라

20.감자

강은교

감자여

거기 검은 비닐의 홑이불을 제치고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공중을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온몸을 쭈글쭈글하게 하면서
금빛 욕망을 지구에 접속시키고 있는 너

네 눈물의 소금기가
베란다를 적시고
엘리베이터를 적시고
아파트 정문으로 흘러내린다

모든 향수와
모든 부재와
모든 유토피아

어쩔 수 없구나

일으켜 세우라
눈물이여,

거기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지구를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21.거리 시(詩)

강은교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22.고독

강은교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23.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강은교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24.그 여자 1

강은교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바람 한 점 없어도
일렁이는 주름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25.그대의 들

강은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26.꽃

강은교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27.낙동강의 바람

강은교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28.눈발

강은교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29.돌아

강은교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 가는
길모퉁이

연탄재며 밥 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 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30.등불과 바람

강은교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31.모래가 바위에게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32.무엇이라고 쓸까

강은교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33.물방울의 시

강은교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34.물에 뜨는 법

강은교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 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35.배추들에게

강은교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 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 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36.봄

강은교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37.붉은 해

강은교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38.비

강은교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39.연애

강은교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40.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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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모음


1.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을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2.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순간순간 죄는 색깔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때로 우리 머릿 속의 흔들리기도 하던 그네,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길바닥 돌 틈의 풀은 목이 마르고
풀은 草綠의 고향으로 손 흔들며 가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풀은 몹시 목이 마르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황황히,
가슴 조이며 아이들은 도시로 가고
지친 사내들은 처진 어깨로 돌아오고
지금 빛이 안드는 골방에서 창녀들은 손금을 볼지 모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물 밑 송사리떼는 말이 없고,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3.샘가에서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몸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은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럽혀질 것입니다  

4.목이 안 보이는, 목이 없는

바람의 판유리 깔아놓은 서해.
저 무대까리, 목이 안 보이는
아예 목이 없는 바다
아무것도 껴안을 수 없어
안기기만 바라는 바다
마냥 소리쳐도 말이 안 되는 바다
마냥 부대껴도 춤이 안 되는 바다 


5.바다   

부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6.서해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 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7.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 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8.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아파트 입구에 내놓은 교자상이 비에 젖고 있다
지금 빗물은 호마이카 상판 위에 고여 있지만
모서리 틈새나 못 빠진 자국 찾아 들어갔다가
햇빛 나면 습기 되어 빠져나갈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든 새댁이 관리실 앞을 지나며 경비
노인에게 인사한다 거의 눈짓에 가까운 인사, 약간
입술을 오므리고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그렇게
하는 인사,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인사
나의 웃음도 그렇게 올라타고 싶구나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에 제 날개를 포개는 잠자리 수컷처럼
이제는 동네 슈퍼로 들어가버린 여인, 생각해보라,
술은 술 노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것 

9.연애에 대하여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너어간다 손이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여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이불 위로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들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10.밥에 대하여


1
어느날 밥이 내게 말하길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 두는 일.

밥아 ,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2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애인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 쓴다 힘 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비관주의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빈대와 파렴치와 방범대원과 창녀를 만든다
밥으로 천국과 유곽과 꿈과 화장실을 만든다 피로하다
피로하다 심히 피로하다
밥으로 고통을 만든다 밥으로 시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즘에 오른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능변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11.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12.네 살엔 흔적이 없다


 누워 있는 네 눈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네 살에 손톱자국을 남긴다
거기 읽을 수 없는 글자를 써보거나,
하늘에 없는 별자리를 그려보거나
네 살엔 흔적이 없다 너는 벌써 받아
숨긴 것이다 가만히 손톱으로 네 살을
누르면서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또
몇 점 눈꽃 송이 네 눈으로 내려앉고 

13.아들에게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遲純의 감침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속에 入場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球根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天國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時代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時代의 어리석음과
또 한 時代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마라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故鄕을 버렸다 꿈엔들 네 故鄕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故鄕 대신 물이 흐르고 故鄕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性器 끝에서 왔고 칼끝을 향해 간다
性器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詩,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14.금기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 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15.음악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16.밤은 넓고 드높아 


밤은 넓고 드높아 수없이 깔린 별들
서로 싸운다 더는 싸울 수 없는 순간에
별들은 낮게 내린다 더는 내릴 수 없는
순간에 별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

이것은 돌아가는 길인가, 오는 길인가
더는 다가설 수 없는 순간에 너를 부른다
네 얼굴을 보여다오,
바늘을 입에 문 물고기처럼 

17.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18.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마라,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가로등 불빛에 떠는 희부연 길 위에,
기우는 수평선, 기우뚱거리는 하늘 위에
마라, 네가 어떻게, 왜 여기에,
대낮처럼 환한 갈치잡이 배 불빛, 불빛에
아, 내게 남은 사랑이 있다면
한밤에 네게로 몰려드는 갈치떼,
갈치떼 은빛 지느러미,
마라,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19.입술


우리가 헤어진 지 오랜 후에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잊지 않겠지요
오랜 세월 귀먹고 눈멀어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알아보겠지요
입술은 그리워하기에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닫히지 않습니다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20.앞날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 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놓을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21.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22.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찰랑이는 채석강 연안 바닷물이
쨍알쨍알 보채는 나를 달랜다
목까지, 눈까지 잠겨 작은 물결
물새떼 흉내를 내는지 물새떼
작은 물결 흉내를 내는지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마냥 발길
떨어지지 않는 나를 달래며 바다는
속이 탄다 검은 오지항아리 속
자글자글 끓는 바다는 나를 달랜다
이러면 어쩌나,낸들 어쩌나
오늘도 난 바다에게 짐만 되었다 

23.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바닷가 언덕 위 이름 모를 꽃들,
제 뺨을 잎새에 부비며 어두워진다
발 밑에 제 이름 묻고, 그림자를
묻고, 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꽃들,
눈먼 파도에 시달리다 물거품이 되는
꽃들, 마라, 눈을 떠라, 지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난 시들고 말 거야
아, 이 저녁엔 간지럼처럼 찾아오는
죽음, 베일 아닌 죽음이 따로 있을까
아, 눈시울에 떠는 한 아름의 꽃들,
폭풍 지나가면 곤소금 뒤집어쓰고
허연 뿌리 드러낼 저것들이 오늘
저녁 네게 던지는 빛은 얼마나 강한가 

24.1959년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性器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移民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먹거나
이차 대전 때 南洋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無氣力과 不感症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修飾했을 뿐 아무것도 追憶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25.물결이었어, 밀쳐낼 수 없는 물결이었어   


많이 꼬이고 꼬여 설레이면서
몸을 바꾸고
바뀐 몸 누여 두고
푸른 바람으로 내릴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지금 헤매는 거리의
지워진 발자국일까

참으로 불편한 잠을
너는 자고 싶었다
그 잠에서 깨일 땐
깃털처럼 가볍게 떠오르고 싶었다

물결이었어
밀쳐낼 수 없는 물결이었어,
네 속삭임도, 형체 없는 네 웃음도 저항이었어 

26.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거기, 名山이 大德이 이를 보이며 껄껄 웃고

너울거리는 강과, 강의 엉덩이를 핥는 바다의 넘실거리는
너울을 넘어 그가 나를 부르고,
반갑게 내가 대답하고

그가 나를 불러 낄낄거리는 名山과 大德의
뜨거운 이마를 짚게 하고,
내가 소리쳐 太平歌를 부르고

해가 지면 거기 가서 누울 수도 있으리라
나무들은 검은 둥치를 습기찬 언덕에 비비고
풀숲으로 타닥타닥 겁 많은 벌레들이 튈 때

오, 해가 지면 거기 누워 죽을 수도 있으리라
이 몸, 거친 몸, 이 어이 거친 몸  
 

27.


1
눈이 온다 더욱 뚜렷해지는 마음의 수레바퀴 자국
아이들은 찍힌 무우처럼 버려져 있고
전봇대는 크리스마스 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눈이 온다 산등성이 허름한 집들은 白旗(백기)를 날리고
한 떼의 검은 새들, 집을 찾지 못한다
마음의 수레 바퀴 자국에서 들리는 수레 바퀴 소리

이제 같은 하늘 바깥을 떠돌고
亡者(망자)들은 무덤 위로 얼굴을 든다
-치욕이여, 치욕이여 언제 너도 白旗를 날리려나

2
그 겨울 눈은 허벅지까지 쌓였다
窓(창)을 열면 아, 하고 복면한 산들이 솟아 올랐다

잊혀진 祖上(조상)들이 일렬로 걸어왔다
끊임없이 그들은 흰 피를 흘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온 몸에서 전깃줄이 울고, 얼음짱에
아가미를 부딪는 작은 물고기들이 보였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쌓였다
나무 십자가가 너무 부족했다
잘못, 시체를 밟을 때마다 나는
가슴 속에 물고기를 그렸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녹아 흘렀다
물고기 뼈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 - 하고 누가 소리 질렀다
또 한 떼의 희생자들이 희생자들 위에 쓰러졌다
사슴 뿔을 단 치욕이 썰매를 끌고 달려갔다
아 - 하고 뒷산이 대답했다 

28.여기가 어디냐고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 여기가 어디냐고?
-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29.겨울산

 
1
그 뿔과 갑주의 등허리에 흰 눈 뒤집어쓰고
산은 쓰러져 있다 아무도 달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산, 제 굶주림과 성(性)과 광기를
못 이겨 헐떡거리는 산, 홀연히 눈보라 일면
꼭대기 레이더 기지 첨탑은 경련하는
짐승의 목덜미를 더 깊이 후벼팠다

2
지금 바라보는 먼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30.병든 이후


나는 당신이 그리 먼데 계신 줄 알았지요 지금 내 살갗
에 마른버짐 피고 열병 돋으니 당신이 가까이 계신 줄 알
겠어요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당신이 조금 빨리 오셨을 뿐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어요 당신 손 잡고 멀리 가고 싶지만 한 발
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시고,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오는 당신, 우리 한몸 되면 나의 사랑 시들줄을
당신은 잘 아시니까요. 

31.그 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32.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시집< 아, 입이 없는것들 59 > 

33.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어떤 하늘이
이 열린 장미의
이 무사무념의 장미꽃 호수 속에서
비추이고 있습니까, 보십시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장미「장미의 숲」

어떻든 예쁘려면 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쏙아지가
못돼야 켕기는 것 있고, 켕기는 게 오래되면 화병도 나
고, 화병이 오래 가면 무사무념까지 간다. 여름 대낮에
큰 대(大)자로 누워 침 흘리는 들장미가 아름다울 리 없
다. 쏙아지가 없으니 켕기는 것 없고, 켕기는 것 없으니
화병도 안나고, 화병 안 나니 무사무념도 없다. 어찌든지
예쁘려면 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바짝 약오른 살모사
의 곧추 세운 모가지처럼, 한겨울 법당에서 살모사 등을
세운 깡마른 비구니처럼.
 

34.거울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35.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달에는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파블로 네루다, 「遊星」 

불 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
깊은 밤 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은 수심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
불러 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
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 자 별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애 보고 메뚜기라 한다.
기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치면,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벼랑의 붉은 꽃 꺾어 달라던
수로부인보다 내 아내 못할 것 없지만,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 

36.이별 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37.이별 2


아직 그대는 행복하다 괴로움이 그대에게 있으므로
그러나 언젠가 그가 그대를 떠나려 하면 그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불행해질 것이다
괴로움이 그에게로 옮아갈 것이므로 

38.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시집<아,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39.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검은 산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은
흘러내린다 옷만 있고 몸뚱이가 없다
마라, 나는 너의 허리를 감는다
살아 있느냐고,살아 있었느냐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눈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낮은 하늘 네 눈동자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다 마라,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검은 돌로 쌓은 장방형의
무덤에서 마지막 영생의 꿈에 붙들리는
것이다 눈먼 바람이 우리를 찢을 때까지
찢기는 그림자를 향해 절하는 것이다

시집<아,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40.발

 
이렇게 발 뻗으면 닿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늘 거기 계시니까요
한번 발 뻗어보고 다시는 안 그러리라 마음 먹습니다 당신이 놀라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발 뻗어보지않으면 당신은 또 얼마나 서운해 하실까요
하루에도 몇번씩 발 뻗어보려다 그만두곤 합니다  

41.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잎을 핏물 들게 하는가
마라, 생각해보라
비린내 나는 네 살과
단내 나는 네 숨결 속에서
내숭 떠는 초록의 눈길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초록 잎새들이
배반하는 황톳길에서
생각해보라, 마라, 어떻게
네 붉은 댕기가 처음 나타났는지
그냥 침 한번 삼키듯이,
헛기침 한번 하듯이 네겐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42.비 1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43.비 2


머리맡에 계시는 것 같아 깨어보면 바깥에 계십니다
창을 열고 내다보면 빗줄기 너머에 계십니다 지금 빗줄기
사이로 달려가면 나 없는 사이 당신은 내 방에 들어와 뽀
오얗게 한숨이나 짓다가 흐트러진 옷가지랑, 이부자리랑
가지런히 매만지다가 젖어 돌아오는 내 발소리에 귀기울
이는 건가요?

< 그 여름의 끝> 중에서. 


44.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詩가 詩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天國은 말 속에 갇힘
天國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 속에 갇힘
말이 말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2
나는 <덧없이> 지리멸렬한 行動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덧없이> 나는 <어느날>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天使가 되는
<어느날>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灰色 담벽
나는 <집요하게> 한 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 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집요하게>

내 詩에는 終止符가 없다
당대의 廢品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젠가 나는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 못 하리라

3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 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는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正當性을 밝혀냈고 反復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 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육교 위에
버섯이 자라고 버젓이 비둘기는 수박 껍데기를 핥는가
어째서 맨발로, 진흙 바닥에, 헝클어진 머리,몸빼이 차림의
젊은 여인은 통곡하는가 어째서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의 表現은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이
아닌가 어째서 詩는 貴族的인가 어째서 貴族的이 아닌가

식은 밥, 식은 밥을 깨우지 못하는 호각 소리- 

45.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46.비단길



 깊은 내륙에 먼 바다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리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47.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48.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
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
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
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
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
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
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
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灰層이 깊었다

─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 지성사, 1996 


49.편 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지성사 >

50.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音樂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하게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牧丹이 시든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소녀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나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를 부를 때,
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51.숨길 수 없는 노래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
못했기 때문이다 봄 하늘 가득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음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
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52.슬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 갑니다

이성복/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53.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괴로와하기 전에 기다리고
기다리기 어려울 때
한 번 숨을 끊고 들여다보는 물
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머리 풀듯이 괴로움 풀고
속절없이 한 세상 지나가면
이 물은 다시 흐를 것인가

형벌이여,
민물에 떠밀리는 이끼처럼
지금의 인후咽喉에 남아 있는
최초의 떨림!

시집: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 

54.편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55.편지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56.출애급出埃及


1
오늘 다 외로와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이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영화映畵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 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 속에서 한 편의 영화映畵가 되어 펼쳐지자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 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애인愛人,
나는 퀭한 지하도地下道에서 뜬눈을 새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동방박사東方博士들을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천국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욕정慾情에 떠는 늙은 자궁子宮으로 돌아가야 하고
분노忿怒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주主여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57.느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시집:'90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문학사상사 

58.기다림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59.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60.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罪)에서 지을 죄(罪)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後光), 너는 썩어 시(詩)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熔岩)처럼 가슴 속을
떠돌아 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不穩)한 도랑을 따라
예감(豫感)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61.무언가 아름다운 것


1
아침마다 꽃들은 피어났어요
밤새 옆구리가 결리거나
겨드랑이가 쑤시거나
밤새 아픈 것들은
뜬눈으로 잠 한숨 못 자고
아침엔 손를 뻗쳐
무심코 만져지는 것이
뭔가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지요

2
저녁이면 꽃들이 누워 있었어요
이마에 붉은 칠을 하고요
넘어져 다쳤는지 몰라요
어쩌면 더 먼 곳에서 다쳐
이곳까지 와서 쓰러졌는지도
엎드리면 꽃들의 울음소리 들렸어요
난 꽃들이 등물하는 줄만 알았지요 

62.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서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63.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떤 불길한 기운이 네 뇌수에
사랑의 독을 풀었니?

때로 나는 한 마리
체체파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떤 불길한 기운이 네 뇌수에
사랑의 독을 풀었니?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64.벽지가 벗겨진 벽은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틀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 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65.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


그리다'는 말이 '구부리다'는
말의 추억을 가지듯이
고개 숙인 양달개비 푸른 꽃은
어느 깨진 하늘의 사금파리일까

지금 이곳이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는 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
양달개비꽃은 푸르고,

이질 설사의 배설물 같은
흰 개망초꽃 사이,
퍼질러 앉은 오십대 여인들의
엉덩이가 유난히 커 보인다

이 세상에 당신은
계 모임 하러 왔던가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66.차라리 댓잎이라면


형은 바다에
눈 오는 거 본 적 있수?
그거 차마 못 봐요, 미쳐요

저리 넓은 바다에
빗방울 하나 앉을 데 없다니
차라리 댓잎이라면 떠돌기라도 하지

형, 백 년 뒤 미친 척하고
한번 와볼까요,
백 년 전 형은 또 어디 있었수?

백 년 전 바다에
백 년 뒤 비가 오고 있었다, 젖은
그의 눈에 내리다 마는 나는 빗줄기였다 

67.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3


아침부터 전해오는 새깃보다 가벼운 이 떨림,
나는 목구멍 눈구멍 다 열어놓고 떨림이 가시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기쁨의 시작인가, 불안인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한 마리 수줍은 짐승으로 만드는 떨림,
이윽고 나는 내 옆에서 숨죽이고 있는 짐승들을
다만 내 눈시울로 떨게 한다 멀구나 멀어,
이 떨림이 멎는 곳은 어디인가 


68.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5


물 고인 땅에 빗방울은 종기처럼 떨어진다 혼자 있음이
이리 쓰리도록 아파서 몇 번 머리를 흔들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자꾸만 피부병이 번지고 한겨울인데
뜰 앞 고목나무에선 붉은 싹이 폐병환자의 침처럼 돋아난다
어떤 아가씨는 그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견디려면 어떻든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69.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7

 
햇빛은 따스하지만 바람은 아직 쌀쌀해서 새들은 자꾸 목을 감춘다
기숙사 담벽 아래 흰 매화꽃들이 검은 가지에 소복이 앉아 미끄러질 듯하고
아까부터 벤치에 앉은 젊은 남녀는 붕어처럼 입을 맞춰댄다
아까부터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으드득 이를 갈아보지만
그건 무슨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붙어 있는
위턱과 아래턱 사이의 친화력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이다 

70.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9

 
집 나온 지 며칠 자꾸 바람이 불어 하늘 한쪽에 집들이 떠다니고,
나도 나무도 팔다리가 따로 놀고 얼굴을 더듬으면 탈일 뿐이다
어디 눈물샘이 있는지 더듬어보지만 울어본 지 오래여서 울 수가 없다
그대 집은 플라스 디탈리, 내 사랑은 바람부는 강을 건너 그대 집에 닿았는가
내게는 바람 외에 다른 살이 없다 꽉 찬 幻化여,
나는 이제 제정신이 들 것만 같다
육십년 후 이맘때 플라스 디탈리 중국집 근처를 떠돌 幻化여,
지금 내가 울면 그대도 따라 울 것인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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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모음


1.게


어기적거리는, 엉성한, 눈을 흘기는 문체로 써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순하고 착한 노인은 못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독 짖는 늙은이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육신은 느리게 늙어가고 인생은 빨리 썩어간다. 아마 죽은 뒤에는 우울했던 해골도 이빨이 빠진 채 웃으리라. 이런 말도 아직은 혀 한 조각이 뭉쳐져 있어 하는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려든 것 같은 일상적 삶을 게요리전문점 수족관의 게들도 경험한다. 그들도 몸을 팔려고 대도시로 왔다. 누가 내 몸을 사서 분해하거나 해체해도 그 왕성한 식욕을 원망하지 않겠소! 게들은, 왕게든 털게든 대게든, 늠름하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는 자세로 수족관 유리 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지금은 바퀴들이 지나간다. 구름은 흘러오고 사람들은 흘러가고. 사람 외에는 보이는 영장류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끌려나온 뒤에 게는 일종의 괴상한 광물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도 없고 보는 자도 없고 도대체 뭐가 뭔지, 과거에 참으로 게였는지, 텅빈 껍데기가 현재인지, 미래는 이제 없는 건지, 이게 그 게 찌꺼기인지, 저게 그 게의 잔해인지, 모든 게 가짜인지 헛것인지 뒤죽박죽 너절하게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래도 靈을 믿었던 게는 다리가 없어도 어기적거리고, 눈이 없어도 가야 할 길을 보며, 마침내 바다로 돌아간다고 말해야 할까.

 

2.뼈의 음악


만약 늑골들이 현이었다면, 그리고 등뼈가 활이였다면, 바람은 하나의 등뼈로 여러개의 늑골들을 긁어매며 연주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막이라는 청중으로 꽉 찬 사막에서 뼈들의 마찰음과 울림은 죽은 늑대의 뼈나 말의 뼈와 공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적막이라는 청중의 마음을 깊이 긁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뼈의 음악은 그렇다 아무런 악보도없이 뼈로 뼈를 연주해 텅 빈 뼈들을 뒤 흔든다 청중으로는 적막이 제일이고 연주자로는 바람이 적합하다


3.모자를 쓴 태양

 

칸나꽃 수만 송이를 토해내던 태양이
여기서는 돌덩어리를 굽고 있을 뿐이다
두개골이 뜨겁다
어딘가에 바삭바삭한 미라들이 있을 것이다
큰 모자를 쓰고 올 걸 그랬다
눈이 부시다
칸나!
태양에 바치는 숫처녀의 심장처럼
붉은 칸나를 본 게 지난 해 여름이었나
정말 장미와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싱싱한 심장 같은 꽃이었다
두근거리는 대지 위의 초목들과
나비들의 향기
그러나 이 물 마른 땅엔
번쩍거리며 누워있는 모래들이 있을 뿐이다
물을 벌떡벌떡 들이킨다
태양의 모자는 녹아버린 것 같다

 

4.지평선                                                    

1
어느 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사방에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지평선의 충격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득한 곳에 선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직선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커다란 선은 둥글었고
그 텅 빈 원 속에
원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텅 빈 원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사막의 태양
소리 없이 몰려와 지평선을 뭉개버리는 화산재 같은 구름들

2
지평선은 언제까지 지평선일까
가도 가도
원의 중심에 내가 있고
내가 가면 거대한 공허가 따라온다

3
여기가 무밭이었다면
사방이 무뿐인 어마어마한 무밭에서
내가 애벌레였다면
무잎을 갉아먹으며 나는 나비를 꿈꾸었을까
날마다 이 부에서 저 무로 꾸물꾸물 기어다니며
도대체 내가 무밭의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인지
눈 먼 애벌레인 나는 끝없이 펼쳐진 무밭을
그 무의 장관을 과연 상상하기나 했을까
밤이면 무꽃들 속으로 별들이 내려오고
별밭에 무꽃들이 흔들리는 어마어마한 무밭에서
내가 애벌레가 아니라
무밭의 주인이었다면  
무재벌을 꿈꾸었을까
둘러보고 사방을 둘러봐도 무 하나 없다
배추 한 포기 없다
둥근 황무지는 울타리가 없다
가없는 곳에서 가없는 곳으로 바람 분다
서늘하다
지금은 고비의 5월

 

5.거울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요귀妖鬼지 사람이랴

거울공장 노동자들은
늘 남의 거울을 만들어놓고
거울 뒤편에서 주물呪物처럼 늙는다

구리거울을 만들던 어느 먼 시절의 남자를
훤히 비추던 보름달이
곰팡이도
녹도
이끼도 없이
빌딩 모서리 스모그 위로 솟고 있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것은 눈꺼풀이 없는 눈, 눈썹이 없는 눈, 눈동자가 없는 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마가 늘 깨어 있으려고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아무튼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 눈은 우리를 무심하게 보고 있다. 그 무심은 허공과 다르지 않다. 허공은 얼마나 큰 거울인가. 안과 밖, 앞과 뒤가 없는, 맑고 고요한 거울이 허공이다. 무수히 흘러가는 것과 절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명상하기 위해 인간은 거울을 만든 것이 아닐까?

 

6.흰 개

시베리안허스키는 아니었다
그날 나는 늙은 개를 따라가고 있었다
흰 털이 더러운
그 개는
북극 늑대의 혈통 같았다
며칠 굶주렸는지
쓰레기자루 앞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다른 음식쓰레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두툼한 외투 차림에 가방을 든 사람들이
직립보행하는 대도시의 아침
스모그가 태양과 함께 중천을 향하는 소음 속에서
앙상한 몸뚱이를 네 발로 떠받친 늙은 개는
꺼칠했고
핼쑥했고
고독했다
큰길가에서 벗어나
간혹 노숙자들이 해바리기를 하는 공원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는 그 떠돌이 개를 나는 따라가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까닭은 묻어두자
아무튼 그 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해야겠다
그날 나는 천지간에 자욱한 눈보라와
아무런 발자국이 없는 설원을 보고 있었다
백야에 눈이 크게 열리는
흰 올빼미도 상상하면서

 

7.진달래꽃

 
그동안 없었던 일이다
드디어 우리 동네에도 콜걸들이 쳐들어왔다
누가 보기에도 민망한
엉덩이며 젖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광고전단지들이 골목길에 뿌려진 것이다

실낙원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아이들은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간다
한눈을 팔면
등교길 동산에는
진달래꽃이 피었다

영원한 봄이 없는 줄 알지만
싸구려 매음굴에 우글거리는 음습한 욕정들을
저 동산으로 옮겨서
진달래꽃이나 철쭉꽃으로
벌겋게 피워봤으면…… 

 

8.그림자

 
등에 펜이 꽂힌 채
글을 쓰는 것은 아닌지,
물병좌 저쪽 무변(無邊)에
물안개처럼 일어선 그림자가 구부정하게
고개 돌려 나를 굽어볼 때
등 구부리고 밤의
백지 위에
뭔가를 뿜어내던 나도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본다.
큰 밤을 초라한 어둠으로
물들이는 것은 아닌지,
앙상한 손으로
백지 위에
오늘은 이렇게 쓴다,
등에 쟁기 박힌 하늘소가
별밭을 갈아엎는다, 라고.

 

9.흔   적

 

맑은 하늘에 비행기구름 두 줄

생겨났다 이내 사라진다.

'저 흔적을 남기려고 제트비행기가 날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믄요'

'비행기구름은 오래 가지 않나 보죠?'

'그러믄요. 그림자 얹는 하늘이니까요'

잠시 하늘 보던 시인과 농부는 다시 밭일을 한다.

호미 끝에 대가리 찍힌 지렁이가

갈 생각을 않고 몸을 뒤틀고 있다.

죄 없기가 이처럼 힘들다.

콩밭의 모기들이

대낮인데 목덜미를 쏘아댄다.

敵 없기가 이렇게 힘들다.

'아무하고나 싸우면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그러믄요, 헛것과 싸워도 흔적은 남지요'

 

10.가락동 수산물 시장

상자들거대한 내장을 메꾸기 위해트럭들이 온다
밤 열시 희디흰 상자마다 시체들이다
비린내는 코를 찌른다
거대한 내장의 냄새는 이런 것일까
물고기의 썩은 내장으로 뒤덮인 하수도의 악취가이런 것일까
바다에서 트럭들이 몰려온다
장의차 같은 트럭들이썩기 전에 썩기 전에 싱싱한 시체를 팔겠다고 얼음투성이 상자들을 싣고 온다
저것은 우럭 상자저것은 오징어 상자저 톱밥 상자는게들이 잔뜩 들어 있다
어떤 도살장에도 이렇게 활발한 칼놀림은 없다밤에도 칼들이힘찬 지느러미처럼 움직인다
거대한 인간의 내장을 메꾸기 위해장어 껍질 벗기기수조에 붉은 고무통에
장어들이 국수처럼 수북하다
가죽치마를 두른 남자는 칼을 들고 장어를 한 마리씩 도마 위에 솟은 못 앞으로 데려가서 대가리를 못에 박고긴 껍질을 잡아당겨 홀딱 벗긴다
그래도 두피는 붙어 있다
벗겨진 몸은 빨개도 못에 층층이 꿰이는 대가리들은 눈을 뜬 채 검게 번들거린다
살점은 알뜰하게 도려내진다
남는 것은피 흘리는 대가리와 기다란 뼈장어의 십자가에는 오직 높이 솟은 못 하나와 대가리와 긴 뼈가 있을 뿐이다
보리새우수염이 긴 보리새우들은 꼬부랑 할아버지마냥 죽어서 좌판 위에 나란히 모로 줄을 맞춰 누워 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보리새우는 등이 굽은 채고무통 얕은 물 속에서 숨쉰다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머뭇거리는 새우의 발걸음으로 앞으로 한 발, 뒤로 두 발,혹은 제자리걸음, 지금쯤바다 밑의 보리는 누렇게 익었을까, 보리새우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쯤바다 밑의 보리들은 물결칠까,이삭이 패었을까, 멍게 멍게는 가락동이 어딘지 알기나 하는 것일까
바다 밑 단풍철에 붉게 물든 주먹처럼 주먹처럼 주먹밥처럼 멍게는 있다
멍게는 해삼보다 헐값인 존재다 존재?가락동 시장에 무슨 존재가 있단 말인가

 
11.그로테스크 : 최승호

나는 말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어느 날 나는 지상에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빙하기가 지상의 피를 다 얼려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 내장까지 다 얼어붙은 채 동사(凍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얼어죽기는커녕 눈보라가 칠 때마다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뚱뚱한 몸에 설편(雪片)들이 들러붙어 나를 더 뚱보로 만들고 있었다.

옥상 위 뚱보의 고독, 그렇다. 소름 끼치는 무서운 고독이 빙하기에 있었다. 내려다보면 거리는 텅 빈 백색 동굴처럼 고요했다. 마네킹이 뛰쳐나와 울부짖을 것만 같은 적막의 거리. 소음도 소란도 없었다. 사람 하나 없었고 개 한 마리 없었다. 죽었는데 나만 혼자 구경꾼처럼 남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마치 지구의 종말에 대한 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어느 우울한 외계인처럼, 빌딩 옥상 위에서 허구헌 날 망원경도 설안경(雪眼鏡)도 없이 얼음과 눈에 파묻힌 문명의 폐허를 지겹도록 지켜보는 것, 별로 살아남고 싶지도 않았지만 산 자의 몫은 이것이다.

시간은 얼음과 더불어 굳어버린 것일까. 옥상에서 바라볼 때 적어도 인간적인 시간은 끝장이 난 것처럼 보였다. 변화를 몰고 올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과거는 얼음으로 굳어진 현재일 뿐이었다. 흘러가는 것도 없고 흘러오는 것도 없이 모든 사물들이 굳어 머무는 세상의 한 꼭대기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종말의 현장 검증에 필요한 유일한 증인으로서 계속 이렇게 소금 기둥처럼 얼어붙은 채 결빙된 선과 면과 굳어버린 각도와 구도들을 한없이 관찰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내가 화가였다면 이 장엄한 설경(雪景)을 거의 흰 물감만으로도 캔버스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능 있는 화가였다해도 지금은 그림 그릴 심정도 아니고 붓 하나 없다. 물감도 없고 관객도 없고 뭐든지 없다.

사정이 그렇다. 나는 옥상에서 내려갈 수 없는 것이다. 어제는 진종일 눈보라가 쳤다. 이미 지워버린 세상을 완벽하게 뭉개버리겠다는 기세로 유리조각 같은 눈발들이 끝없이 날아왔다. 하늘도 땅도 없고 오직 눈보라만 보였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 왠지 불안했다. 밑이 보이지 않으니까 추락할 것 같았다. 내가 잠든 사이 빌딩이 붕괴되기를……현기증 속에서 그런 자살 같은 생각을 했다. 왜 나만 혼자 죽지도 못하고 빙하기에 불멸의 존재인 양 남아 있으란 법이 있는가. 이건 끔찍한 형벌이다. 옥상은 나의 감옥이고.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존재의 이유라는 게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옥을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감옥이 존재한다. 이상한 논리지만, 적어도 이 논리는 어처구니없이 고독하고 암담한 나의 현존보다는 덜 이상하고 덜비논리적이다. 이론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면 이상한 이론들을 많이 만들어서 불안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야 한다. 물론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존재의 이유, 그럴듯한 말이다. 똥주머니가 대가리 안에 들어 있는 문어처럼, 이유는 대가리 안에서 만들어져 문어발처럼 너희들을 움직였다. 너희들은 이제 다 얼어죽었기 때문에 존재의 이유는 나 하나만의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해도 움직일 수 없지 않은가. 소금기둥처럼 부동(不動)의 자세로 굳어 있는 나에게 사실 이유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없는 게 낫다. 생각은 그렇지만 이유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바로 이 점이 문어와 나의 차이인 듯하다. 문어는 존재의 이유를 몰라도 움직이지만 나는 움직이는 데 이유가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되도록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움직일 수도 없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다니! 나도 두족류로 태어나볼걸 그랬다. 대가리에 발이 달려 결국 가슴이 생략된 두족류 말이다.

밤이다. 보름달이 광활한 얼음도시를 비추며 떠오른다. 텅 빈 건물마다 들어찬 어둠, 이제는 최후의 그 늙은 유령도 어디서 얼어죽은 것 같다. 날마다 교회 지붕에 항아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아마 자살했을 것이다. 빙하기의 유령이야말로 빙판 위에서 오래 방황하지 말고 용단을 내려 제 목을 끊는 순간 얼굴을 집어 던져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게해야 미혹에서 깨어나는 길이 열릴 것이다. 훌륭한 충고 같다. 누구에게 충고해 본 적은 없지만 기억해 둘만한 말을 모처럼 하는 것같다. 구원이 끝난 밤, 지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옥상 위에 구원받지 못한 내가 하나 남아 있지만 바라는 것이 오직 죽음이기 때문에 이 빙하기에 구원의 문제는 끝장이 났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일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봄이 와야 나는 죽을 수가 있고 말을 멈출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2.뙤약볕 : 최승호

맑은 날엔 자갈이 내 뼈이다.
흐린 날엔 내 피가
폐수인지 녹물인지 놀인지
모르게 될 것이다.

개미들이 내 발톱마냥 걷고 있다.

어느 날 몸뚱이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눈부시다.

13.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4. 나는 숨을 쉰다 : 최승호

신기해라
나는 멎지도 않고 숨을 쉰다.
내가 곤히 잠잘때도
배를 들썩이며
숨은, 쉬지않고 숨을 쉰다.
숨구멍이 많은 잎사귀들과 늙은 지구 덩어리와
움직이는 은하수와 모든 별들과 함께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대낮이면 황소와 태양과 날아오르는 날개들과 물방울과
장수하늘소와 함께
뭉게구름과 함께
낮달과 함께
나는 숨을 쉰다.
인간의 숨소리가 작아지는 날들속에
자라나는 쇠의 소리
관청의 스피커 소리가 점점 커지는 날들속에

답답해라
나는 숨을쉰다.
튼튼한 기관지도 없다.
폐활량도 크지 않고
가슴을 열러
갈아끼울 싱싱한 허파도 없다.
산소를 실컷 마시지 못해
허공에서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물고기처럼
징역에 지친 죄수처럼
때때로 헐떡이고
연거푸 기침을 하면서
숨은 ㅡ 쉬지않고 숨을 쉰다.

그리고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죽어서도 나는 숨을 쉴것이다.

15.밤의 다리 : 최승호

그는 다리 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마치 이승도 저승도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다리 : 벅찬 고통에 지쳐 찾아온 사람들에게
행복의 얼굴로 물귀신들이 유혹하는 곳
다리 : 흰뱀 같은 수은등이 허공에 목을 늘이고
"너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속삭이면 물고기 밥이 된 시체가 떠오르는 곳

죽음에의 의지는 늘
큰형님 뻘인 삶에의 의지가 꾸짖고 달래주기 바란다
이승도 저승도 둘 다
두려움 없이 맞서고 맞이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게 철들 때까지

16.터벅터벅 걸어갔던 길 : 최승호

누런 먼지의 회오리 일으키며
대한통운 트럭이 달려오고
비키느라 뒤뚱거리며 뛰던 닭들이
하늘을 힘차게 날고 있었다

저 길든 날짐승들이 하늘 나는 법을 되찾고
뭘 잡아 먹으려고만 날개치는 새가 아니라
더러는 드넓게 높이 나는 즐거움 누리려고 날아오르듯
나 자유로운 날

하지만 나 역시 뒤뚱거리며 뛰는 불안한 날들을 살고 있었다
사육되면서 도살의 날을 향해 다가간다고
무력감으로 우울이 뚱뚱해져 간다고
중얼대면서 터벅터벅
긴 가문 날 뙤약볕 속을 걷고 있었다

문득
주황색 대한통운 트럭 위에 덜컹대며
짐짝들처럼 코뚜레 꿴 황소들처럼 실려갔던 날들의
늙은 예비군의 비애가 스쳐가고
다시 터벅거리며 산을 돌아 산길 가면 마을 가까이

먼지 쓴 꽃들이 길섶을 따라 피어 있었다
길 한복판을 비켜서
비켜서 사는 비애로 얼룩진 여린 마음씨들과도 같이
꽃들은 길섶을 따라 피어 있었다

17. 깊은 밤 : 최승호

내가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면 방안은 어둠
들여다볼 수 없고 붙잡을 데 없는 텅 빈 칠흑의 어둠
나는 텅 빈 공간을 떠내려가는 지구인이다
대한국민이다
내가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결실이 아니라
악몽을 정리하는 밤
바람 소리가 들린다
새끼줄에 엮인 무잎들이 부스럭거린다
당신 사람이요 깻망아지요
배를 깔고 엎드린 나에게 흐린 목소리가 묻는다
몇 시나 되었을까
베개 속의 왕겨들이 부스럭거린다
칠흑의 어둠 구석 야광시계의 둥근 유리알 속에서
푸른 열두 개의 숫자들이
일그러진 애벌레들 모양 귀기 서린 빛을 뿜는다
당신 사람이요 넙치요
나는 지옥이 어딘지 모르겠다 새끼줄에 엮여
북어처럼 힘 못 쓰는 인간들이
북어 대가리처럼 입을 찢어질 듯이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질러도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 인간들이
쇠망치에 얻어맞은 못대가리처럼
찌든 내 큰 골로는 모르겠다
새끼줄에 엮인 무잎들이 부스럭거린다
베개 속의 왕겨들이 부스럭거린다
왜 이렇게 밤은
영영 날이 새지 않을 것처럼
길게 계속되는 것일까

18. 무인칭의 죽음 : 최승호

나에게서 인간이란 이름이
떨어져 나간 지 이미 오래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흩어지면 여럿이고
뭉쳐져 있어 하나인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왜 날 이렇게 만들어놨어
난 널 해치지 않았는데
왜 날 이렇게 똥덩이같이
만들어놨어, 그러고도 넌 모자라
자꾸 내 몸을 휘젓고 있지
조금씩 떠밀려가는 이 느낌
이제 나는 하찮고 더럽다
흩어지는 내 조각들 보면서
끈적하게 붙어 있으려 해도
이렇게 강제로 떠밀려가는
변기의 생,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19. 몸의 신비, 혹은 사랑 : 최승호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몸은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뾰족하게 손가락들이 자라면서
빼앗던 손, 그렇지만
빼앗기면 증오로 뭉쳐지던 주먹,
꼬부라지도록 손톱을
길게 기르며
음모와 놀던 손, 매음의 악수,

천년 묵어 썩은 괴상한 우상들 앞에
복을 빌던 손,
그 더러운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몸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자연스럽게 꿰매고 있다.
금실도 금바늘도 안 보이지만
상처를 밤낮없이 튼튼하게 꿰매고 있는
이 몸의 신비,

혹은 사랑.

20. 자동판매기/최승호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21.고슴도치의 마을/최승호(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 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 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莊子를 읽으리라

 

22.세속도시의 즐거움·2 -최승호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23.멍게/최승호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게는 참 조용하다.
천둥벼락 같았다는 유마의 침묵도
저렇게 고요했을 것이다.

 

허물덩어리인 나를 흉보지 않고
내 인생에 대해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멍게는 얼마나 배려깊은 존재인가?

 

바다에서 온 지우개 같은 멍게

멍게는 나를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


소리를 내면 벌써 입안이 울림의 공간
메아리치는 텅빈 골짜기
범종 소리가 난다.

멍.

 

 24.텔레비전     최승호

하늘이라는 무한(無限)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전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네.
이번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넘어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나와
붉은 강물에 뛰어들었네
불멸을 향한 절규들,
울음 울던 말매미들이 사라지고
단풍이 높은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개울가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염치도 없이 버렸을까.
휑하니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

 

 25.고비/최승호

 

만약 내가 고비였다면 나에겐 아무 두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눈도 귀도 코도 없이 나는 늘 삼매에 빠져 있었을 것이고

의 혀가 있었다 해도 침묵했을 것이다

 

모래들이 흘러 나오는 유방

붕괴된 궁둥이에서 흩어지는 돌 조각들

 

만약 내가 고비였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죽였다고 누가 나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양들 수

천 마리 낙타 수백 마리가 내 품 안에서 죽어가도 나는 그저 무

심, 내가 고비였다면 나는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무심과 무

자비로 일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비도 아니고 돌도 아니

 

붉은 해가 훨훨 솟아오른다

마치 박제처럼 건조한 밤을 불사르듯이

사막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바늘없는 텅 빈 시계처럼 돌아가는 사막의 하루.

 

 26.입적/최승호

 

꽃이 없으면 어찌 하느님이 피어날 수 있으며

새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님이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은 나를 믿고 나무들을 믿고 물고기들을 믿는다

그렇지만 이 사막에서

하나님은 그저 입적入寂해 있을 뿐이다

거친 모래

태양에 그을은 돌들

십자가도 없다 교회도 없다 구원도 없다

예수는 아마 이런 곳에서

홀로 영혼의 고비들을 넘겼으리라

 

 27.그림자/ 최승호

 

개울에서 발을 씻는데 

잔고기들이 몰려와

발의 때를 먹으려고 덤벼든다

떠내려가던 때를 입에 물고

서로 경쟁하는 놈들도 있다

내가 잠시

더러운 거인 같다

물 아래 너펄거리는

희미한 그림자 본다

그 너덜너덜한 그림자 속에서도

잔고기들이 천연스럽게 헤엄친다

어서 딴 데로 가라고 발을 흔들어도

손으로 물을 끼얹어도 잔고기들은

물러났다가 다시 온다

 

 28.무서운 굴비/최승호 

 
 나는 왜 굴비를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석쇠 위에 구워 먹거나 찌개 끓여도
얌전히 있는
저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굴비를
 
굴비는
소금에 절여 통째로 말린 조기라 한다
혹은 건석어(乾石魚)

굴비, 나의 적(敵), 나의 반역(反逆), 나의 비굴
비굴한 삶은 통째로
굴비를 닮아간다
그물을 뒤집어 쓰고 퍼덕이다가
결국 장님에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굴비를
나는 왜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29.거울/최승호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요귀妖鬼지 사람이랴

 거울공장 노동자들은

늘 남의 거울을 만들어놓고

거울 뒤편에서 주물鑄物처럼 늙는다

 구리거울을 만들던 어느 먼 시절의 남자를

훤히 비추던 보름달이

곰팡이도

녹도

이끼도 없이

빌딩 모서리 스모그 위로 솟고 있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30.담쟁이덩굴 / 최승호

 

허공이

드높은 담이었다면

담쟁이 덩굴들은 더듬더듬 기어 올라 가다가

허공을 훌쩍 넘어 갔을 것이다

 

허공 너머에

또 무슨 알 수 없는 담이 겹겹이 치솟아 있는지 모르겠으나

넘어가고 넘어간 뒤에도 무수한 덩굴손들은

끝없이 뻗어 나가고 힘차게 뻗어나가지 않았을까

 

참으로 질긴 담쟁이 덩굴이라면

담쟁이덩굴의 근성으로

허공이 바다 밑으로 주저 앉는다 해도 기어 오르고

줄기가 토막 다 해도 거대한 낙지발처럼 꿈틀꿑틀 뻗어 나갔을 것이다

 

 31.오동나무 /최승호

 

 예로부터 저쪽 한량들이
기타나 만돌린을 가지고 놀았듯이
이쪽에서도 생활에 구멍 뻥뻥 뚫려있는 축들이
거문고나 피리를 만지며 흥성거려 놀 줄 안다
피리나 대금은 속을 통과해 나오는 바람으로 소리가 나는데
그 속이란 게 그저 뻥 뚫려있는 듯해도
천태만상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허(虛)란 실(實)의 다른 이름인 법
거문고 마디마디 울혈진 가락이 하늘과 땅 사이를 진동시킬 수 있는 이치도 알고 보면
뜯는 이의 마음이 텅 비어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텅텅 비어 있는 마음에서 저며 나와 푸르게 여울져 흘러가는 소리가 바로
뜯는 이의 혼이자 거문고의 정신인 것
잘 익은 가을날 오동나무를 베어 보라
긴 줄기를 따라 虛의 정신으로 꽉 메워진
텅 빈 구멍이 나있을 것이다
잔뜩 움켜쥠보다 손을 탁 놓아 비워버림이
자유롭다는 것을 진즉 알았는지
오동은 씨앗 시절부터 그 안에 구멍을 키워 왔을 게다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놀 줄 아는 축들만이
속이 텅 비어버려 쓸모 없는 오동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
구멍 없는 것들은
놀 줄도 놀 자유도 모른다
요새 사람들 노는 게 어디 노는 것인가

 

 32.구름들 /최승호

 

구름에 걸려서 사람들이 넘어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덧없이 죽여 놓고
구름들이 조용히 여름 대낮을 흘러간다
보라! 큰 감자 모양의 구름
어떤 구름은 상어를 닮았다

구름은 넘어지는 법이 없다
넘어진 사람들을 넘어서
구름들이 낮과 밤을 흘러가고
남대문 시장에 북적거리던 인파가
오늘은 동대문시장에서 씨끌벅적 출렁거린다

옷,옷들,옷가게의 점원들
하나의 몸뚱이를 휘감는 천들이 있고
흘러가는 구름 아래 수많은 옷들이 있다
벌거벗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구름을 걸친 채 누워 있는
알몸뚱이를 보았는가
이 세상 옷이 아니기 때문에
수의는 값이 비싸다
어느 여행객에게 수의를 입히고
먼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으나
느린 장의차에서는 벌써
구름 냄새가 피어오른다

 

 33.네모를 향하여/최승호


은행 계단 앞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땡볕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이 여름 도시에선 모두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오고 또 죽어가는지

빌딩 입구의 늙은 수위는

의무를 다하느라 침을 흘리며

눈을 뜬 채로 자면서도 빌딩을 지키고 있다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 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모를 이해하리라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지는 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34.선술집 /최승호

돈 버는 일도 禪이어서
아무리 돈을 벌어도 번 돈이 없다.

본래 영원한 가난이여,
무일푼인 노을과 저녁 어스름이 찾아와도
나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이
그 아름다운 빈털터리들의 장엄 앞에서
술을 마시노니

괴로움의 증류여,
나의 선술집인 수평선이여,
뭉게 구름같은 술꾼을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라.

 

 35.뼈의 음악/ 최승호


만약 늑골들이 현이었다면, 그리고 등뼈가 활이였다면, 바람은 하나의 등뼈로 여러개의 늑골들을 긁어매며 연주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막이라는 청중으로 꽉 찬 사막에서 뼈들의 마찰음과 울림은 죽은 늑대의 뼈나 말의 뼈와 공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적막이라는 청중의 마음을 깊이 긁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뼈의 음악은 그렇다 아무런 악보도없이 뼈로 뼈를 연주해 텅 빈 뼈들을 뒤 흔든다 청중으로는 적막이 제일이고 연주자로는 바람이 적합하다


36.발효/최승호  

 

부패해가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를
나는 발효시키려 한다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왔다
묵은 관료들은 숙변을 내게 들이부었고
나는 낮은 자로서
치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땅에서 냄새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수렁 바닥에서 멍든 얼굴이 썩고 있을 때나
흐린 물 위로 떠오를 때에도
나는 침묵했고
그 슬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한때 이미 죽었거나
독약 먹이는 세월에 쓸개가 병든 자로서
울부짖음 대신 쓴 거품을 내뿜었을 뿐이다
문제는 스스로 마음에 뚜껑을 덮고 오물을 거부할수록
오물들이 더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나는 그 뚜껑이 성긴 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물왕저수지라는 팻말이 내 마음의 한 변두리에 꽂혀 있다
나는 그 저수지를 가본 적이 없다
물왕저수지로 가는 길가의 팻말을 얼핏 보았을 뿐이다
그 저수지에
물의 법이 물왕의 도가
아직도 순환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 저수지에 왕골을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춤처럼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물과 진흙의 거대한 반죽에서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들은 쩝쩝거리고 물오리떼는 날아올라
발효하는 숨결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음을
내 마음에도 전해 주기 바란다

 

 37.쌍봉낙타 / 최승호

 

 만약 내가 야생 쌍봉낙타였다면, 그리고 수컷이었다면, 혼자 사막을 떠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 그게 그거인 사막에서 나는 방황이라는 말을 모르는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별로 씹을 것이 없이도 우물우물 되새김빌을 하면서 막막한 시간을 되씹어야 했을 것이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사막에서, 가장 높은 것은 나의 머리, 커다란 나의 두 눈은 투명하게 이글거리는 공기에 둘러싸여 텅 비어 있는 먼 곳을 날마다 바라보지 않았을까. 고개를 숙이면 돌, 모래, 마른 풀, 그리고 고개를 들면 광활한 無와 다름없는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고개를 늘어뜨리고 느릿느릿 걸어가다가 언젠가 내가 쏟아놓은 똥무더기가 바짝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갑자기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을지도 모른다. 여름철이면 털이 빠져 너덜너덜한 내 모습은 거의 걸레나 다름없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나의 암갈색 털들, 그 묵은 털들은 다 바람이 데려갈 털들이다. 해마다 털갈이를 거듭하다 보면, 그리고 고독에도 익숙해져서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린 채 우물우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많이 늙어 있다. 사막이 늙지 않는 것은 이미 죽은 땅이기 때문이다. 나의 앙상한 뼈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을 땅, 죽은 땅은 한낮이면 무척 덥다. 그 더위 속에서 오늘 나는 고개를 들고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는 늙은 쌍봉낙타를 나 역시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38.대설주위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39.뭉게구름 - 최승호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40.비둘기 벽화/최승호

 

번쩍거리던 고드름들이 사라졌다. 그 대신, 건물 벽에는, 오래 가는 것, 잘 지워지지 않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점점 길쭉하게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끈끈하게 흘러내리다 굳어버리는 카오스 같은 것. 똥의 힘은 그렇다. 무질서하게, 자연스러운 벽화를 만들어낸다. 겨울날의 비둘기들이, 벽 틈에 웅크린 하늘거지들처럼 볕을 쬐면서, 아무 뜻도 없이 배설물로 그려나간 희멀건 벽화를, 봄날의 절벽 같은 베란다에서, 나는 바라본다. 도회지의 비둘기는 鳥類가 아니라, 시궁쥐가 속한 쥐과 동물에 가깝다. 비둘기들은 이제 숲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길바닥의 찌꺼기를 주워먹다가, 발가락이 뭉개져도, 아스팔트에서 날개가 쓰레기로 변할지라도.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 최승호



수달 멧돼지 오소리 너구리 고라니 멧밭쥐 다람쥐 관박쥐 검은댕기해오라기 중대백로 쇠백로 왜가리 원앙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비오리 조롱이 새홀리기 꿩 깝작도요 멧비둘기 집비둘기 소쩍새 물총새 청딱다구리 가막딱다구리 오색딱다구리 쇠딱다구리 노랑할미새 알락할미새 직박구리 때까치 물가마귀 딱새 붉은머리오목눈이 오목눈이 쇠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박새 동고비 멧새 쑥새 노랑턱멧새 어치 까치 큰부리까마귀 자라 아무르장지뱀 도마뱀 누룩뱀 무자치 구렁이 능구렁이 유혈목이 대륙유혈목이 살모사 쇠살모사 까치살모사 산줄점팔랑나비 뿔나비 푸른부전나비 암먹부전나비 먹부전나비 부전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수노랑나비 제일줄나비 왕세줄나비 별박이세줄나비 애기세줄나비 네발나비 큰멋쟁이나비 사향제비나비 산제비나비 긴꼬리제비나비 호랑나비 꼬리명주나비 대만흰나비 큰줄흰나비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남방노랑나비 각시멧노랑나비 굴뚝나비 물결나비 노랑누에나방 넉점물결애기자나방 두줄물결자나방 포플라잎말이명나방 뜰길앞잡이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등빨간먼지벌레 노랑선두리먼지벌레 오이잎벌레 쑥잎벌레 열점박이잎벌레 풀색꽃무지 목하늘소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 장수허리노린재 깜보라노린재 얼룩대장노린재 큰광대노린재 광대노린재 참나무노린재 끝검은말매미충 늦털매미 말매미 애매미 호박벌 나나니 검은물잠자리 물잠자리 날개띠좀잠자리 깃동잠자리 밀잠자리 묵은실잠자리 명주잠자리 콩중이 벼메뚜기 왕귀뚜라미 모메뚜기 실베짱이 참밑들이 산느타리 잣버섯 노란갓벚꽃버섯 넓은솔버섯 애기낙엽버섯 흰삿갓갈때기버섯 자주졸각버섯 밀버섯 밤버섯 뽕나무버섯 그늘버섯 붉은꼭지버섯 못버섯 알광대버섯 암회색광대버섯아재비 독우산광대버섯 흰주름갓버섯 갈색먹물버섯 노랑먹물버섯 족제비눈물버섯 검은비늘버섯 비늘버섯 다색끈적버섯 젤리귀버섯 황소비단그물버섯 붉은비단그물버섯 접시껄껄이그물버섯 황금무당버섯 젖버섯아재비 새털젖버섯 잿빛젖버섯 노루궁뎅이 담자고약버섯 분홍껍질고약버섯 바늘버섯 갈색꽃구름버섯 구름버섯 옷솔버섯 아까시재목버섯 치마버섯 기와소나무비늘버섯 해면버섯 털목이 아교뿔버섯 붉은목이 먼지버섯 말불버섯 좀말불버섯 애기방귀버섯 작은주발버섯 긴대주발버섯 녹청균 콩버섯 콩꼬투리버섯 다형콩꼬투리버섯 구실사리 개부처손 물쇠뜨기 속새 산고사리삼 꿩고비 고비 황고사리 고사리 고비고사리 부싯깃고사리 청부싯깃고사리 개면마 만주우드풀 십자고사리 낚시고사리 관중 바위족제비고사리 뱀고사리 개고사리 거미고사리 일엽초 은행나무 일본잎갈나무 잣나무 소나무 측백나무 향나무 가래 말즘 실말 조릿대 실새풀 숲개밀 포아풀 갈대 용수염풀 그령 쥐꼬리새 잔디 강아지풀 금강아지풀 바랭이 주름조개풀 기장대풀 띠 큰기름새 조개풀 개솔새 솔새 옥수수 대사초 길뚝사초 산거울 그늘사초 넓은잎천남성 천남성 닭의장풀 꿩의밥 골풀 주걱비비추 큰원추리 애기원추리 산달래 산부추 참산부추 달래 털중나리 참나리 비짜루 각시둥굴레 둥글레 층층둥굴레 진화정 풀솜대 애기나리 선밀나물 청미래덩굴 청가시덩굴 마 도꼬로마 국화마 각시붓꽃 꽃창포 붓꽃 범부채 개불알꽃 병아리난초 제비난초 은대난초 타래난초 옥잠난초 홀아비꽃대 사시나무 은사시나무 이태리포플러 왕버들 분버들 버드나무 능수버들 호랑버들 키버들 가래나무 거제수나무 박달나무 개박달나무 물박달나무 오리나무 까치박달 서어나무 난티잎개암나무 개암나무 참개암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참느릅나무 비술나무 왕느릅나무 당느릅나무 시무나무 느티나무 산팽나무 검팽나무 산뽕나무 뽕나무 혹쐐기풀 모시물통이 개모시풀 꼬리겨우살이 겨우살이 쥐방울덩굴 족도리 애기수영 수영 개대황 참소리쟁이 소리쟁이 왜개싱아 이삭여뀌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 고마리 미꾸리낚시 여뀌 바보여뀌 기생여뀌 개여뀌 마디풀 취명아주 명아주 댑싸리 자리공 석류풀 쇠비름 털좀나도나물 쇠별꽃 별꽃 벼룩나물 술패랭이꽃 대나물 동자꽃 장구채 종덩굴 요강나물 자주조희풀 개버무리 큰꽃으아리 외대으아리 으아리 참으아리 할미밀망 사위질빵 동강할미꽃 할미꽃 노루귀 미나리아재비 꿩의다리 연잎꿩의다리 큰제비고깔 흰진범 진범 백부자 진돌쩌귀 노루삼 승마 촛대승마 눈빛승마 동의나물 으름 꿩의다리아재비 댕댕이덩굴 함박꽃나무 오미자 생강나무 애기똥풀 피나물 금낭화 산괴불주머니 무 갓 배추 유채 황새냉이 왜갓냉이 미나리냉이 속속이풀 꽃다지 장대나물 바위솔 세잎꿩의비름 꿩의비름 기린초 바위채송화 노루오줌 돌단풍 바위떡풀 괭이눈 물매화 말발도리 물참대 매화말발도리 고광나무 산수국 까마귀밥나무 가침박달 쉬땅나무 조팝나무 떡조팝나무 당조팝나무 꼬리조팝나무 갈기조팝나무 참조팝나무 국수나무 뱀딸기 가락지나물 양지꽃 민눈양지꽃 세잎양지꽃 물양지꽃 딱지꽃 큰뱀무 뱀무 산딸기 곰딸기 멍석딸기 복분자딸기 줄딸기 터리풀 오이풀 긴오이풀 짚신나물 찔레꽃 생열귀나무 개살구나무 귀룽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산사나무 아광나무 야광나무 아그배나무 산돌배나무 마가목 차풀 고삼 다릅나무 조록싸리 참싸리 싸리 큰도둑놈의갈고리 도둑놈의갈고리 갈퀴나물 네잎갈퀴 광릉갈퀴 노랑갈퀴 나비나물 활량나물 칡 돌콩 콩 새콩 낭아초 땅비싸리 아까시나무 벌노랑이 족제비싸리 황기 붉은토끼풀 토끼풀 전동싸리 활나물 쥐손이풀 이질풀 괭이밥 병아리풀 산초나무 소태나무 광대싸리 흰대극 회양목 개옻나무 화살나무 참회나무 버들회나무 참빗살나무 푼지나무(청다래넌출) 노박덩굴 미역줄나무 고추나무 신나무 고로쇠나무 당단풍 복자기 노랑물봉선화 물봉선 갈매나무 짝자래나무 왕머루 새머루 담쟁이덩굴 피나무(달피나무) 연밥피나무 뽕잎피나무 찰피나무 수박풀 수까치깨 개다래 쥐다래 다래 물레나물 고추나물 남산제비꽃 태백제비꽃 둥근털제비꽃 잔털제비꽃 고깔제비꽃 제비꽃 흰털제비꽃 알록제비꽃 뫼제비꽃 졸방제비꽃 콩제비꽃 노랑제비꽃 아마풀 보리수나무 부처꽃 달맞이꽃 음나무 오갈피 두릅나무 시호 참반디 사상자 개사상자 미나리 참나물 노루참나물 개발나물 바디나물 참당귀 구릿대 신감채 강활 묏미나리 큰참나물 기름나물 어수리 산딸나무 층층나무 노루발풀 꼬리진달래 진달래 산철쭉 철쭉꽃 산앵도나무 좁쌀풀 참좁쌀풀 까치수영 큰까치수영 고욤나무 감나무 노린재나무 쪽동백나무 때죽나무 물푸레나무 쇠물푸레 쥐똥나무 개회나무 자주쓴풀 구슬붕이 용담 칼잎용담 박주가리 산해박 백미꽃 애기메꽃 메꽃 새삼 실새삼 지치(지초) 꽃마리 작살나무 누리장나무 누린내풀 조개나물 황금 산골무꽃 골무꽃 참골무꽃 배초향 벌깨덩굴 개박하 꿀풀 익모초 광대수염 쉽사리 향유 꽃향유 산박하 속단 배풍등 까마중(까마종이) 독말풀 참오동 현삼 밭뚝외풀 논뚝외풀 절국대 알며느리밥풀 애기며느리밥풀 나도송이풀 송이풀 파리풀 질경이 큰꼭두서니 꼭두서니 갈퀴꼭두서니 솔나물 갈퀴덩굴 개갈퀴 딱총나무 덜꿩나무 가막살나무 백당나무 병꽃나무 인동 괴불나무 각시괴불나무 올괴불나무 돌마타리 금마타리 마타리 뚝갈 쥐오줌풀 산토끼꽃 체꽃 하늘타리 노랑하늘타리 수원잔대 자주꽃방망이 잔대 초롱꽃 더덕 도라지 금불초 바위구절초 뚱딴지 담배풀 솜나물 단풍취 돼지풀 도꼬마리 골등골나물 등골나물 벌등골나물 미역취 버드쟁이나물 가새쑥부쟁이 쑥부쟁이 갯쑥부쟁이 개미취 옹굿나물 까실쑥부쟁이 참취 눈개쑥부쟁이 개쑥부쟁이 단양쑥부쟁이 개망초 망초 머위 붉은서나물 쑥방망이 우산나물 톱풀 산구절초 구절초 제비쑥 더위지기 참쑥 산쑥 쑥 멸가치 진득찰 가막사리 삽주 지느러미엉겅퀴 큰엉겅퀴 엉겅퀴 지칭개 각시취 큰각시취 빗살서덜취 사창분취 당분취 구와취 톱분취 은분취 서덜취 분취 산비장이 뻐국채 큰수리취 국화수리취 수리취 절굿대 흰절굿대 조뱅이 쇠서나물 민들레 조밥나물 벋은씀바귀 벌씀바귀 씀바귀 왕고들빼기 이고들빼기 고들빼기

  

  「동강 유역 산림생태계 조사보고서」

  (1998. 12. 산림청 임업연구원)를 읽으면서

  내가 아무르장지뱀이나

  용수염풀,

  아니면 바보여뀌나 큰도둑놈의갈고리나 괴불나무로

  혹은 더위지기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라면 내 이름이 어떻든

  이름의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

  삶을 사랑하는 일에 삶이 바쳐졌을 것이다.

  무덤에 핀 할미꽃이거나

  내가 동굴에서 날개를 펴는

  관박쥐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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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 모음

1. 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2.12월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3.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에서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공원 뒤편 순대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4.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황지우

나, 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5.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6.겨울 산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7.길

황지우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령은 초소다

한려수도,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8.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황지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 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 꽃이 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 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 꽃이 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 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 꽃이 피었습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 피었습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冥府殿)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 피었습니다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 꽃이 피었습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 꽃이 피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꽃-이-피-었-는-지
무슨 꽃이 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못 보았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9.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生)이 마구 가렵다
어언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늘은 컴퓨터 화면처럼 푸르고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왜정 시대의 로마네스크식 관공서 건물 그림자를
가로수가 있는 보도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흔인가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11월의 나무는
아직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처럼, 추하다

그래도 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10.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욱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11.너무 오랜 기다림

황지우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12.눈 맞는 대밭에서

황지우

단식 7일째
도량 뒤편 눈 맞는 대밭에
어이없이 한동안 서 있다
창자 같은 갱도를 뚫고
난 지금 박장을 막 관통한 것이다
눈 맞는 대밭은 딴 세상이 이 세상 같다
눈덩이를 이기지 못한 댓가지 우에
다시 눈이 사각사각 쌓이고 있다
여기가 이 세상의 끝일까
몸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죽음에 아무런 판돈을 걸어놓지 않은 이런 순간에
어서 그것이 왔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후련한 죽음이

13.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 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 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14.늙어 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15.들녘에서

황지우

바람 속에
사람들이......
아이구 이 냄새,
사람들이 살았네

가까이 가보면
마을 앞 흙벽에 붙은
작은
붉은 우체통

마을과 마을 사이
들녘을 바라보면
온갖 목숨이 아깝고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야 이년아, 그런다고
소식 한 장 없냐

16.等雨量線 1

황지우

1
나는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나, 나가요, 여자가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아냐, 이 방엔 너의 숨소리가 있어야 해
남자가 한참 뒤에 중얼거린다

2
이력서를 집어넣고 돌아오는 길 위에 잠시 서서
나는, 세상이 나를 안 받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내 삶의 덩어리를
정육점 저울 같은 걸로 잴 수는 없을까
나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아이들이 마구 자라
수위가 바로 코밑에까지 올라와 있는 생활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커피 숍에 앉아,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지쳐 있을 때
바깥을 보니, 여기가 너무 비좁다

3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
물 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저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17.메아리를 위한 覺書

황지우

불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
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술 처마신 몸과 넋의 제일 가까운
울타리 밑으로 가장 머언
물 소리 들릴락말락
(우리는 어느 溪谷[계곡]에 묻힐까 들릴까)
줄넘기하는 쌍무지개
둘레에 한세상 걸려 있네

18.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황지우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무궁)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19.발작

황지우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20.붉은 우체통

황지우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21.비 그친 새벽 산에서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槍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希望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22.상실

황지우

귀밑머리 허옇도록 放心한 노교수도
시집간다고 찾아온 여제자에게
상실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가버린 낙타여
이 모래 바다 가는 길손이란!

어쩌면 이 鹿苑은
굴절되어 바람에 떠밀려 온 신기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래밭과 풀밭이 갈리는 境界에 이르러
나는 기를 쓰고 草錄으로 들어가려 하고
낙타는 두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완강히 버티고

결국,어느 華嚴 나무 그늘에서
나는 고삐를 놓아버렸지
기슭에 게으르게 뒹구는 사슴들,
계곡에 내려가지 않고도
물의 찬 혓소리 듣는 법을 알고
목마름이 없으므로
'목마름'이 없는 뜨락
멋모르고 처음 돌아오는 자에게도
돌아왔다고 푸른
큰 나무 우뢰 소리 金剛 옷을 입혀 주는구나

내가 놓아버린 고삐에 있었던 낙타여
내 칼과 한 장의 지도와 經 몇 권 든 쥐배낭
안 그래도 무거운 肉峰에 메고 어느 모랫바람 속에서
방울 소리 딸랑거리고 있느냐
새 길손 만나 왔던 길을
初行처럼 가고 있지 않은지
내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너를 잊지 못하고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지만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대를 끝끝내 끌고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그대를 내 칼로 베어버리고
그 칼을 저 鹿溪에 씻어줄 걸
씻어줄 걸

23.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쭬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24.雪景

황지우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 장의 수의(壽衣)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일러주는 눈발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부린다.

25.세상의 고요

황지우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일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26.소나무에 대한 예배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한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27.손을 씻는다

황지우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義手를 외투 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共同正犯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28.수은등 아래 벚꽃

황지우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그때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29.아직은 바깥이 있다

황지우

논에 물 넣는 모내기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 빛이 斜繕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직은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30.안부 1

황지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안부 2

안녕하신지요. 또 한 해 갑니다
일몰의 동작대교 난간에 서서
금빛 강을 널널하게 바라봅니다
서쪽으로 가는 도도한 물은
좀더 이곳에 머물렀다 가고 싶은 듯
한 자락 터키 카펫 같은
스스로 발광하는 수면을
남겨두고 가대요
그 빛, 찡그린 그대 실눈에도
對照해 보았으면, 했습니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지난번 엽서,
이제야 받았습니다
숨쉬는 것마저 힘든
그 空中國家에 제 생애도
얼마간 걸쳐놓으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 나겠지요마는
연말연시 피하여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하냥 멍하니, 있고 싶어요
머리 갸우뚱하고 물밑을 내려다보는
게으른 새처럼
의아하게 제 삶을 흘러가게 하게요

31.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32.이 문으로

황지우

이 문으로 들어가면 넓고
이 문을 나오면 좁다
이 문에는 종교성이 있다
풀잎 하나가 풀잎의
전체를 보여 준다
제자리 걸음으로
수십 킬로 먼 곳까지 다녀온다
끼니 때마다 내 밥의
1/3을 비둘기에게 던져 주고
갇혀 있음으로
내 몸이 무장무장 투명해진다
새들이 내 흉곽으로 기어들어와
날개 짓는 소리가 소란하다
내려가고 싶다
유리 같은 땅

33.이 세상의 고요

황지우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바깥으로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릴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듣지 않는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이 땅만 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버스에서 힐껏 보았을 때

빽밀러에 國道 포플라 가로수의 먼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목탄화 같은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도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거릴 때

흰 여구차가 따뜻한 봄 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무한하다

34.인사

황지우

개가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색종이 뿌리듯
가을 금남로 은행잎들이 마구 쏟아지는 걸
넋 놓고 잠시 바라보았더니
뒤에서 빵빵거린다
뒤돌아보며 은행나무를 가르키자
영업용 택시 기사도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웃는다
차라리 모르는 얼굴에는 인간의 光背가 있다

집에 도착해서도 프라이드 차창에 붙어 있는
금빛 스티커 오늘은 하느님이 색종이 뿌려 주시는
황금나무 밑을 지나온 거다

35.일 포스티노

황지우

자전거 밀고 바깥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36.재앙스런 사랑

황지우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생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37.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황지우

내가 먼저 待接받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對岸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뿐!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38.출가하는 새

황지우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라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風速을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본다

39.화광동진(和光同塵)

황지우

이태리에서 돌아온 날, 이제 보는 것을 멀리 하자!
눈알에서 모기들이 날아다닌다. 비비니까는
폼페이 비극시인(悲劇詩人)의 집에 축 늘어져 있던 검은 개가
거실에 들어와 냄새를 맡더니마는, 베란다 쪽으로 나가버린다.
TV도 재미없고 토요일에 대여섯 개씩 빌려오던 비디오도 재미없다.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건 자꾸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뜯긴 지붕으로 새어들어오는 빛띠에 떠 있는 먼지.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40.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황지우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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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모음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구붓하고: 몸이 구부정한

모래톱: 넓은 모래 벌판, 모래사장

지중지중: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 의태어

개지꽃: 나팔꽃

쇠리쇠리하야: 눈이 부셔, 눈이 시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따디기: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 무렵

누굿하니: 여유있는

살틀하든: 너무나 다정스러우며 허물없이 위해주고 보살펴 주던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엽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잠풍: 잔잔하게 부는 바람

달재: 달째, 달강어, 쑥지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진장: 진간장, 오래 묵어서 진하게 된 간장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헛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없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단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쥔을 붙이었다: 주인집에 세 들었다

딜옹배기: 아주 작은 자배기

붇덕불: 짚북더기를 태운 불

굴기도 하면서: 구르기도 하면서

나줏손: 저녁 무렵

바우섶: 바위 옆 갈매나부: 키가 2m쯤 자라는 낙엽 활엽 교목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긋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도연명''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바람벽: 집안의 안벽

때글은: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전

쉬이고: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 하고

앞대: 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개포: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떨어진 날이 있었다

 

가지취: 참취나물

금덤판: 금을 캐거나 파는 산골의 장소로 간이 식료품 등 잡품을 파는 곳

섶벌: 울타리 옆에 놓아 치는 꿀벌, 재래종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탸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 오막살이

고조곤히: 고요히, 소리없이

 

통영2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 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당: 고장

갓갓기도: 가깝기도

아개미: 아가미

호루기: 쭈꾸미와 비슷하게 생긴 해산물

황화장사: 온갖 잡살뱅이 물건을 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

오구작작: 여러 사람이 뒤섞여 떠드는 수선스런 모양

 

여우난골족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 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 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

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

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

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

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구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홍성홍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룻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굳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멕이고: 활발히 움직이고

김치가재미: 김치독 묻어두는 곳

은댕이: 언저리

예대가리밭: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산멍에: 산몽아, 전설상의 커다란 뱀, 이무기

분틀: 국수를 짜는 분틀

들쿠레한: 좀 달고 구수하고 시원한

사리워: 담겨져서

집등색이: 짚등석, 짚이나 칡덩굴로 짜서 만든 자리

댕추가루: 고춧가루

탄수: 식초

아르굳: 아랫목

고담하고: 속되지 않고 아취가 있는

 

정주성(定州城)

 

()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던 무너진 성()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주막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길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 한 잔이 뵈었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팔원(八院) 서행시초(西行詩抄)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내임: 배웅

 

흰 밤

 

옛 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고향(故鄕)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노루 / 백석

 

()골에서는 집터를 츠고 달궤를 닦고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노루/백석(白石) 함주시초(咸州詩抄) 2

 

장진(長津) 땅이 지붕넘어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등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안의 털을 너

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하다

 

):넘석하는 : 목을 길게 빼고 자꾸 넘겨다보는.

자구나무 : 자귀나무. 함수초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의 작은 교목.

기장 : 벼과의 일년초로 식용작물. 인도가 원산으로 1.2~1.5m 정도 자라며 잎이 가늘고 이삭은 가을에 익음. 열매는 당황색이며 좁쌀보다 낟알이 굵음.

막배등거리 : 거칠 게 배로 만든 덧저고리.

막베잠당둥에 : 막베로 만든 잠방이 형식의 아래 속옷.

당콩순 : 강남콩순.

다문다문 : 드문드문, 뛰엄뛰엄.

약자 : 약재료.

가랑가랑한다 ; 그렁그렁한다. 물이 거의 찰 듯한 상태

 

수라(修羅) /백석(白石)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 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수라(修羅) : 싸움을 일삼는 귀신.

싹기도 : 흥분이 가라 앉기도.

가제 : 방금, .

 

모닥불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짖도 개털억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수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한 이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의 한 종류.

* 개니빠디 : 개의 이빨.

* 너울쪽 : 널빤지쪽.

* : .

* 개터럭 : 개의 털.

* 재당 : 재종(再從). 육촌.

* 문장 : 한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 몽둥발이 :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청시(靑枾) / 백석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

쓸쓸한 길 / 백석

 

거적장사 하나 산()뒷 옆비탈을 오른다

-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 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떠러간다

이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뚜물같이 흐린 날 동풍(東風)이 설렌다

자류( ) / 백석

 

남방토(南方土) 풀 안 돋은 양지귀가 본이다

햇비 멎은 저녁의 노을 먹고 산다

태고(太古)에 나서

선인도(仙人圖)가 꿈이다

고산정토(高山淨土)에 산약(山藥) 캐다 오다

달빛은 이향(異鄕)

눈은 정기 속에 어우러진 싸움

배꾼과 새 세 마리

 

어느 때 어느 곳에 배꾼 하나 살았네,

하루는 난바다에 고기잡이 나갔더니

센 바람에 돛 꺾이고 큰 물결에 노를 앗겨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밤낮 없이 떠흘렀네.

배고프고 목마르고 비 맞아 몸은 얼고

가엾은 이 배꾼은 거의거의 죽어갔네.

그러자 난데없는 새 세 마리 날아왔네.

한 새는 고물 밀고 한 새는 이물 끌고

또 한 새는 뱃전 밀어 어느 한 섬 다달았네.

섬에 오른 이 배꾼 목숨 건져 고마우나

앉아 걱정 서서 걱정 자꾸만 걱정했네.

그러자 새 한 마리 배꾼 보고 물었네

(배꾼 아저씨 배꾼 아저씨 무슨 걱정 그리 해요?)

이 말 들은 배꾼이 대답하는 말

(돛대 없어 걱정이다 노가 없어 걱정이다.)

이때에 새 한 마리 얼른 하는 말

(그런 걱정 아예 마오 돛대 삿대 내 만들게.)

이때부터 톱새는 하루종일 톱질했네, 삐꿍삐꿍 톱질했네,

돛대감 노감을 자르노라고,

돛대 없어 노대 없어 걱정하던 이 배꾼 돛대 얻어 노대 얻어

걱정도 없으련만 그러나 웬일인지 자나 깨나 걱정이네.

그러자 새 한 마리 배꾼 보고 물었네.

(배꾼 아저씨 배꾼 아저씨 무슨 걱정 그리 해요?)

이 말 들은 배꾼이 대답하는 말

(들물 몰라 걱정이다 썰물 몰라 걱정이다.)

이때에 새 한 마리 얼른 하는 말

(그런 걱정 아에 마오 들물 썰물 내 알릴게.)

이때부터 또요새는 물때마다 외쳐댔네 또요 또요 외쳐댔네,

밀물이 또 미는 걸 알리노라고

들물 몰라 썰물 몰라 걱정하던 이 배꾼 들물 알아 썰물 알아

걱정도 없으련만 그러나 웬일인지 자나깨나 걱정이네.

그러자 새 한 마리 배꾼 보고 물었네

(배꾼 아저씨, 배꾼 아저씨 무슨 걱정 그리 해요?)

이 말 들은 배꾼이 대답하는 말

(무채 없어 걱정이다 외채 없어 걱정이다.)

이때에 새 한 마리 얼른 하는 말

(그런 걱정 아예 마오 무채 외채 내 썰을게.)

이때부터 쑥쑥새는 저녁이면 채 썰었네

쑥쑥 쑥쑥 채 썰었네, 무나물 외나물을 무치노라고

그러자 이 배꾼은 걱정 근심 하나 없이

들물 따라 썰물 따라 그물질을 나갔다네,

도요새가 알리는 소리 듣고

그러자 이 배꾼은 걱정 근심 하나 없이 돛을 달고 노를 저어

먼 바다에 배질했네 톱새가 잘라놓은 돛대와 노로

그러자 이 배꾼은 걱정 근심 하나 없이 무채나물 외채나물

저녁 찬도 맛있었네, 쑥쑥새가 썰어 무친 채나물로

 

개구리네 한솥 밥

 

옛날 어느 곳에 개구리 하나 살았네, 가난하나 마음 착한 개구리 하나 살았네

하루는 이 개구리 쌀 한 말을 얻어 오려 벌 건너 형을 찾아 길을 나섰네.

개구리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길가 보도랑에 우는 소리 들렸네.

개구리 닁큼 뛰어 도랑으로 가 보니 소시랑게 한 마리 엉엉 우네.

소시랑게 우는 것이 가엾기도 가엾어 개구리는 뿌구국 물어보았네

(소시랑게야 너 왜 우니?)

소시랑게 울다 말고 대답하였네

(발을 다쳐 아파서 운다.)

개구리는 바쁜 길 잊어버리고 소시랑게 다친 발 고쳐주었네.

개구리 또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길 아래 논두렁에 우는 소리 들렸네.

개구리 닁큼 뛰어 논두렁에 가 보니 방아다리 한 마리 엉엉 우네.

방아다리 우는 것이 가엾기도 가엾어 개구리는 뿌구국 물어보았네

(방아다리야 너 왜 우니?)

방아다리 울다 말고 대답하는 말

(길을 잃고 갈 곳 몰라 운다.)

개구리는 바쁜 길 잊어버리고 길 잃은 방아다리 길 가리켜주었네.

개구리 또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길 복판 땅구멍에 우는 소리 들렸네.

개구리 닁큼 뛰어 땅구멍에 가 보니 소똥굴이 한 마리 엉엉 우네.

소똥구리 우는 것이 가엾기도 가엾어 개구리는 뿌구국 물어보았네

(소똥굴이야 너 왜 우니?)

소똥굴이 울다 말고 대답하느 말

(구멍에 빠져 못 나와 운다.)

개구리는 바쁜 길 잊어버리고 구멍에 빠진 소똥굴이 끌어내 줬네.

개구리 또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길섶 풀숲에서 우는 소리 들렸네.

개구리 닁큼 뛰어 풀숲으로 가 보니 하늘소 한 마리 엉엉 우네.

하늘소 우는 것이 가엾기도 가엾어 개구리는 뿌구국 물어보았네

(하늘소야, 너 왜 우니?)

하늘소 울다 말고 대답하는 말

(풀대에 걸려 가지 못해 운다.)

개구리는 바쁜 길 잊어버리고 풀에 걸린 하늘소 놓아주었네.

개구리 또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길 아래 웅덩이에 우는 소리 들렸네.

개구리 닁큼 뛰어 물웅덩이 가 보니 개똥벌레 한 마리 엉엉 우네.

개똥벌레 우는 것이 가엾기도 가엾어 개구리 뿌구국 물어 보았네

(개똥벌레야 너 왜 우니?)

개똥벌레 울다 말고 대답하는 말

(물에 빠져 나오지 못해 운다.)

개구리는 바쁜 길 잊어버리고 물에 빠진 개똥벌레 건져주었네.

 

발 다친 소시랑게 고쳐주고, 길 잃은 방아다리 길 기리켜주고,

구멍에 빠진 소똥굴이 끌어내 주고, 풀에 걸린 하늘소 놓아주고,

물에 빠진 개똥벌레 건져내 주고……

 

착한 일 하노라고 길이 늦은 개구리, 형네 집에 왔을 때는 날이 저물고,

쌀 대신에 벼 한 말 얻어서 지고 형네 집을 나왔을 땐 저문 날이 어두워,

어둔 길에 무겁게 짐을 진 개구리, 디퍽디퍽 걷다가는 앞으로 쓰러지고

디퍽디퍽 걷다가는 뒤로 넘어졌네.

밤은 깊고 길을 멀고 눈앞은 캄캄하여 개구리 할 수 없이 길가에 주저앉아

어찌할까 이리저리 걱정하였네.

그러자 웬일인가, 개똥벌레 윙하니 날아오더니

가쁜 숨 허덕허덕 말 물었네

(개구리야, 개구리야 무슨 걱정 하니?)

개구리 이 말에 뿌구국 대답했네

(어두운 길 갈 수 없어 걱정한다.)

그랬더니 개똥벌레 등불 받고 앞장서, 어둡던 길 밝아졌네.

어둡던 길 밝아져 개구리 가기 좋으나

등에 진 짐 무거워 등은 달고 다리 떨렸네.

개구리 할 수 없이 길가에 주저앉아 어찌할까 이리저리 걱정하였네.

그러자 웬일인가 하늘소 씽하니 날아오더니 가쁜 숨 허덕허덕 말 물었네

(개구리야, 개구리야 무슨 걱정 하니?)

개구리 이 말에 뿌구국 대답했네

(무거운 짐 지고 못 가 걱정한다.)

그랬더니 하늘소 무거운 짐 받아 지고 개구리 뒤따랐네.

무겁던 짐 벗어놓아 개구리 가기 좋으나, 길 복판에 소똥 쌍여

넘자면 굴어나고 돌자면 길 없었네.

개구리 할 수 없이 길가에 주저앉아 어찌할까 이리저리 걱정하였네.

그러자 웬일인가 소똥굴이 휭하니 굴러오더니 가쁜 숨 허덕허덕 말 물었네

(개구리야, 개구리야 무슨걱정하니?)

개구리는 이 말에 뿌구국 대답했네

(소똥 쌓여 못 가고 걱정한다.)

그랬더니 소똥굴이 소똥 더미 다 굴리어, 막혔던 길 열리었네.

막혔던 길 열리어 개구리 잘도 왔으나,

얻어 온 벼 한 말을 방아 없이 어찌 찧나? 방아 없이 어찌 쓸나?

개구리 할 수 없이 마당가에 주저앉아 어찌할까 이리저리 걱정하였네.

그러자 웬일인가 방아다리 껑충 뛰어오더니 가쁜 숨 허덕허덕 말 물었네

(개구리야, 개구리야 무슨걱정하니?)

개구리 이 말에 뿌구국 대답했네

(방아 없어 벼 못 찧고 걱정한다.)

그랬더니 방아다리 이 다리 찌꿍 저 다리 찌꿍 벼 한 말을 다 찧었네.

방아 없이 쌀을 찧어 개구리는 기뻤으나 불을 땔 장작 없어

쓸은 쌀을 어찌하나, 무엇으로 밥을 짓나!

개구리 할 수 없이 문턱에 주저앉아 어찌할까 이리저리 걱정하였네.

그러자 웬일인가 소시랑게 비르륵 기어오더니 가쁜 숨 허덕허덕 말 물었네

(개구리야, 개구리야 무슨 걱정 하니?)

개구리 이 말에 뿌구국 대답했네

(장작 없어 밥 못 짓고 걱정한다.)

그랬더니 소시랑게 풀룩풀룩 거품 지어 흰 밥 한솥 잦히었네.

장작 없이 밥을 지은 개구리는 좋아라고 뜰악에 멍석 깔고 모두들 앉히었네.

불을 받아준 개똥벌레, 짐을 져다준 하늘소, 길을 치워준 소똥굴이,

방아 찧어준 방아다리, 밥을 지어준 소시랑게,

모두모두 둘러앉아 한 솥 밥을 먹었네.

 

집게네 네형제

 

어느 바다가

물웅덩이에

깊지도 얕지도 않은

물웅덩이에

집게 네 형제가

살고 있었네

 

막내 동생 하나를

내어놓은

집게네 세 형제

그 누구나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웠네

 

남들 같이

굳은 껍질쓰고

남들 같이

고운 껍질 쓰고

뽐내며 사는 것이

부러웠네

 

그래서

맏형은

굳고 굳은

강달소라 껍질 쓰고

강달소라 꼴을 하고

강달소라 짓을 했네

 

그래서

둘째 동생은

곱고 고운

배꼽조개 껍질 쓰고

배꼽조개 꼴을 하고

배꼽조개 짓을 했네

 

그래서

셋째 동생은

곱고도 굳은

우렁이 껍질 쓰고

우렁이 꼴을 하고

우렁이 짓을 했네

 

그러나

막내동생은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 하고

아무 짓도 아니 하고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 했네

 

그런데

어느 하루

밀물이 많이 밀어

물웅덩이 밀물에

잡겨버렸네

 

이때에 그만이야

강달소라 먹고 사는

이빨 센 오뎅이가

밀물 다라

떠들어 와

강달소라 보더니만

우두둑 우두둑

깨물었네

 

강달소라 껍질 쓰고

강달소라 꼴을 하고

강달소라 짓을 하던

맏형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런데

어느 하루

난데없는 낚시질꾼

주춤주춤 오더니

물웅더이 기웃했네

 

이때에 그만이야

망둥이 미끼하는

배꼽조개 보더니만

낚시질꾼

얼른 주워

돌에 놓고 돌로 쳐서

오지끈 오지끈

부서졌네

 

배꼽조개 껍질 쓰고

배꼽조개 꼴을 하고

배꼽조개 짓을 하던

둘째 동생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런데

어느 하루

부리 굳은 황새가

진창 묻은 발 씻으러

물웅덩이 찾아왔네

 

이때에 그만이야

황새가 좋아하는

우렁이 하나

기어가자

황새는 굳은 부리

우렁이 등에 쿡 박고

오싹 바싹

쪼박냈네

 

우렁이 껍질 쓰고

우렁이 꼴을 하고

우렁이 짓을 하던

셋째 동생 집게는

이렇게 죽고 말았네

 

그러나

막내동생

아무것도 아니 쓰고

아무 꼴도 아니 하고

아무 짓도 아니 해서

오뎅이가 떠와도

겁 안 나고

낚시질꾼 기웃해도

겁 안 나고

항새가 찾아와도

겁 안 났네

 

집게로 태어난 것

부끄러워 아니하는

막내동생 집게는

평안하게 잘살았네

 

오리

 

오리야 네가 좋은 청명(淸明) 밑께 밤은

옆에서 누가 뺨을 쳐도 모르게 어둡다누나

오리야 이때는 따디기가 되어 어둡단다

 

아무리 밤이 좋은들 오리야

해변벌에선 얼마나 너이들이 욱자지껄하며 멕이기에

해변땅에 나들이 갔든 할머니는

오리새끼들은 장뫃이나 하듯이 떠들썩하니 시끄럽기도 하드란 숭인가

 

그래도 오리야 호젓한 밤길을 가다

가까운 논배미 들에서

까알까알 하는 너이들의 즐거운 말소리가 나면

나는 내 마을 그 아는 사람들의 지껄지껄하는 말소리같이 반가웁고나

오리야 너이들의 이야기판에 나도 들어

밤을 같이 밝히고 싶고나

 

오리야 나는 네가 좋구나 네가 좋아서

벌논의 눞 옆에 쭈구렁 벼알 달린 짚검불을 널어놓고

닭이짗 올코에 새끼달은치를 묻어놓고

동둑넘에 숨어서

하로진일 너를 기다린다

 

오리야 고운 오리야 가만히 안겼거라

너를 팔어 술을 먹는 노()장에 영감은

홀아비 소의연 침을 놓는 영감인데

나는 너를 백동전 하나 주고 사오누나

 

나를 생가하든 그 무당의 딸은 내 어린 누이에게

오리야 너를 한쌍 주드니

어린 누이는 없고 저는 시집을 갔다건만

오리야 너는 한쌍이 날어가누나

 

따디기 :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 무렵.

멕이기에 :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다'는 뜻의 평북 방언. '쏘다니다'의 뜻으로도 쓰임

장뫃이 : 장날이 되어 장터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붐비는 것.

:

논배미 : 논의 한 구역으로 논과 논 사이를 구분한 것.

: 진흙탕. .

집검불 : 벼알이 엉성하게 달려 있는 벼의 여러 가닥이 어지럽게 뒤섞여 뭉쳐있는 것 또는 볕짚 찌그러기의 뭉터기.

닭이짗 올코 : 닭의 깃털을 붙여서 만든 올가미.

새끼달은치 : 새끼다랑치. 새끼줄을 엮어서 만든 끈이 달린 바구니.

동둑 : 못에 쌓는 큰 둑. 동둑. 방죽.

하로진일 : 하루종일.

소의연 : 소의 병을 침술로 낫게 해주던 사람.

 

촌에서 온 아이

 

촌에서 온 아이여

촌에서 어젯밤에 승합자동차를 타고 온 아이여

이렇게 추운데 웃동에 무슨 두룽이 같은 것을 하나 걸치고

아랫도리는 쪽 발가벗은 아이여

뽈다구에는 징기징기 앙광이를 그리고 머리칼이 놀한 아이여

너는 오늘 아침 무엇에 놀라서 우느구나

분명코 무슨 거짓되고 쓸데없는 것에 놀라서

그것이 네 맑고 참된 마음에 분해서 우는구나

이 집에 있는 다른 많은 아이들이

모도들 욕심 사납게 지게굳게 일부러 청을 돋혀서

어린아이들 치고는 너무나 큰소리로 너무나 튀겁많은 소리로 울어대는데

너만은 타고난 그 외마디 소리로 스스로웁게 삼가면서 우는구나

네 소리는 조금 썩심하니 쉬인 듯도 하다

네 소리에 내 마음은 반끗히 밝어오고

또 호끈히 더워오고 그리고 즐거워 온다

나는 너를 껴안어 올려서 네 머리를 쓰다듬고 힘껏

네 작은 손을 쥐고 흔들고 싶다

네 소리에 나는 촌 농사집의 저녁을 짓는 때

나주볕이 가득 들이운 밝은 방안에 혼자 앉어서

실 감기며 버선짝을 가지고 쓰렁쓰렁 노는 아이를 생각한다

또 여름날 낮 기운 때 어른들이 모두 벌에 나가고 텅 비인 집 토방에서

햇강아지의 쌀랑대는 성화를 받어가며 닭의 똥을 주어먹는 아이를 생각한다

촌에서 와서 오늘 아침 무엇이 분해서 우는 아이여

너는 분명히 하늘이 사랑하는 詩人이나 농사꾼이 될 것이로다

 

웃동 : 윗도리.

두룽이 : 도롱이. 재래식 우장의 한 가지. 짚이나 띠 같은 풀로 안을 엮고 겉은 줄기를 드리워 끝이 너덜너덜함.

징기징기 : 세수를 안해서 볼어 더러운 자국이 드문드문 있는 얼룩.

앙광이 : 얼굴에 검정이나 먹 따위로 함부로 칠해 놓은 것.

지게굳게 : 타일러도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튀겁 : (: 겁낼겁)

스스로웁게 : 자연스럽게.

썩심하니 : 목이 쉰 소리를 내는.

반끗히 : 살짝.

호끈히 : '후끈히'의 작은 말.

나주볕 : 저녁 햇빛.

쓰렁쓰렁 : 남이 모르게 비밀리 하는 모양. 일을 건성으로 하는 모양.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이

 

오늘은 정월(正月)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 로다

옛날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 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였만

나는 오늘 때묻은 입든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어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고향 사람의 조그마한

가업 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고 한 그릇 사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 날엔 으레히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 날은 그 어느 한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어 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든 본대로 원소(元宵)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을

외로이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아득하니 슬펐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

, 이 정월(正月)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독이 탕탕 터지고 호궁(胡弓)소리 삘삘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엔 자꾸 이 나라의 옛 시인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나 이백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려나 이것은 옛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객고 : 객지에서 당하는 고생.

억병 : 술을 매우 많이 마시는 모양

맛스러운 : 맛이 없는

반관(飯館) : 음식점.

원소 : 원소절에 먹는 떡.

느꾸어 : 느꺼워. 그 무엇에 대한 느낌이 가슴에 사무쳐서 마음에 겨운

오독독 : 화약을 재어 점화하면 터지는 소리를 자꾸 내면서 불꽃과 함께 떨어지게 만든 것.

호궁 : 중국 전통 현악기의 한가지. 모양은 바이얼린과 비슷하며, 대나무로 만들어 뱀껍질을 입혔음.

 

선 우 사 ( 膳 友 辭 )

 

낡은 나조반에 힌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힌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무슨이야기라도 다할것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긴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소리를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히여젔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하나 손아귀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않다

힌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나조반 : 나조쟁반. 갈대를 한 자쯤 잘라 묶어 기름을 붓고 붉은 종이로 둘러싸서 초처럼 불을 켜는 나조대를 밑에서 받치는 쟁반

해정한 : 맑고 깨끗한

모래톱 : 넓은 모래벌판, 모래사장

하구긴날 : 하루의 긴 시간

물닭이 : 비오리의 오리과에 속하는 물새

소리개소리 : 솔개소리. 솔개는 무서운 매의 일종.

세괏은 : 매우 기세가 당당하고 또는 억세고 날카로운.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 안으로 가면 뒤울 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당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오력 : 오금, 무릎의 구부리는 안 쪽.

디운귀신 : 지운귀신, 땅의 운수를 맡아본다는 민간의 속신.

조앙님 : 조왕님, 부엌을 맡은 신, 부엌에 있으며 모든 길흉을 판단함.

데석님 : 제석신, 무당이 받드는 가신제의 대상인 열두 신, 한 집안 사람들의 수명, 곡물, 의류, 화복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본다 함.

굴통 : 굴뚝.

굴대장군 : 굴때장군, 키가 크고 몸이 남달리 굵은 사람. 살빛이 검거나 옷이 시퍼렇게 된 사람.

얼혼이 나서 : 정신이 나가 멍해져서.

곱새녕 : 초가의 용마루나 토담 위를 덮는 짚으로, 지네 모양으로 엮은 이엉.

털능귀신 : 철륜대감. 대추나무에 있다는 귀신.

연자간 ; 연자맷간. 연자매를 차려 놓고 곡식을 찧거나 빻는 큰 매가 있는 장소.

연자당귀신 : 연자간을 맡아 다스리는 신.

회리서리 : 마음 놓고 팔과 다리를 휘젓듯이 흔들면서.

 

북방에서 _ 정현웅에게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

()를 금()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잦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

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하늘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

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흥안령(興安嶺) : 중국 동북지방의 대흥안령과 소흥안령을 아울러 일컬음. 서쪽을 북동 방향으로 달리는 연장 120Km의 대흥안령 산계와 북부에서 남동 방향으로 옮겨 흑룡강을 따라 달리는 연장 400Km의 소흥안령 산계로 나뉨.

음산 : 음지산맥 부근의 지역.

아무우르(Amur) : 흑룡강 주변의 지역.

숭가리(Sungari) : 송화강. 중국 만주에 있는 큰강.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눈강(嫩江)과 합류하여 흑룡강으로 빠짐.

장풍 : 창포. 뿌리는 한약재로 쓰임.

오로촌 : 만주의 유목민족. 매우 예절 바른 부족으로 한국인과 유사함.

멧돌 : 멧돼지.

쏠론(Solon) : 남방 퉁구스족의 일파. 아무르강의 남방에 분포함.

돌비 : 돌로된 비석

미치고 : 몹시 불고

보래구름 : 많이 흩어져 날리고 있는 작은 구름덩이

 

'호박꽃 초롱' 서시

      

한울은

울파주 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레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내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버섯을 사랑한다

모래속에 문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두툼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혀고 사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공중에 떠도는 흰 구름을 사랑한다

골짜구니로 숨어 흐르는 개울물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아늑하고 고요한 시골거리에서 쟁글쟁글 햇볕만 바래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이러한 시인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데

이러한 시인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그러나

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 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을것이다

 

울파주 : , 수수깡, 갈대, 싸리 등을 엮어 세워 놓은 울타리.

돌우래 : 말똥 벌레나 땅강아지와 비슷하나 크기는 조금 더 크다. 땅을 파고 다니며 '오르오르' 소리를 낸다. 곡식을 못 살게 굴며 특히 콩밭에 들어가서 땅을 판다.

임내내는 : 흉내내는

 

허 준 ( 許 俊 )

 

그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사하고 살틀한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것이다

쓸쓸한 나들이를 단기려 온 것이다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신이 그 긴 허리를 굽히고 뒷짐을 지고 지치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지껄하는 거리를 지날 때든가

추운 겨울밤 병들어 누운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어

말없이 무릎 우 어린 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 때든가

당신의 그 고요한 가슴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하늘이 떠오를 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여진 어깨쭉지에

당신네 나라의 따사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높은 산도 높은 꼭다기에 있는 듯한

아니면 깊은 물도 깊은 밑바닥에 있는 듯한 당신네 나라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높을 것인가

바람은 얼마나 따사하고 향기로울 것인가

그리고 이 하늘 아래 바람결 속에 퍼진

그 풍속은 인정은 그리고 그 말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 것인가

 

다만 한 사람 목이 긴 시인(詩人)은 안다

'도스또이엡흐스키''조이스'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일등

가는 소설도 쓰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어드근한 방안에 굴어 게으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 풍속을

사랑하는 어린 것에게 엿 한 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아내에겐

해진 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사람에게 수백량 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리고 또 그 말을

마람은 모든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그 멀은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사람이여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게사니처럼 떠곤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둑판을 당기는구려

 

허준 : 1910.2.27 ~ ? . 이효석, 이태준, 최명익 등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당대최고의 소설가. 조선일보 기자와 만주 신경 생활을 거쳐 북한에서 김일성 대학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 작품에는'탁류','습작실에서','속습작실에서','평대저울','잔등' 등이 있고 심리적이고 의식적인 소설가 제 1인자로 내면의 묘사를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하여 일경지를 이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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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규 시 모음 34편

1.강

곽재규

내 가슴속
건너고 싶은 강
하나 있었네
오랜 싸움과 정처 없는
사랑의 탄식들을 데불고
인도 물소처럼 첨벙첨벙
그 강 건너고 싶었네
흐르다가 세상 밖 어느 숲 모퉁이에
서러운 등불 하나 걸어두고 싶었네.

2.겨울기행

곽재규

춥고 서먹한 겨울이었다.
정미소 추녀 끝에 햇살을 쪼아대던
참새떼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나무들의 언 손이 들녘의 한기를 부비는 식전
사격장을 향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죽은 새들의 울음만 송이송이 흩어졌다
겨울 문틈으로 고드름만 간간이 떨어질 뿐
온수 한잔 어디서 마실 틈이 없었다
고향에서는 편지가 끊긴 지 오래였다
쇠죽 끓이는 가마 곁에서
산유화가 제일 좋다던 조카
공민학교 이학년에 편입한 그 녀석은
헌 시집처럼 눈물이 잦곤 했다
끝까지 시 공부를 할래 물으면
늘 부끄럽고 겸연쩍어하던 녀석
그 녀석도 이젠 다 커
읍내 박씨네 자전차포 점원이 되었다
춥고 서먹한 겨울이었다
사젹장을 향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죽은 새들의 울음만 송이송이 흩어졌다.

3.구두 한 켤레의 시

곽재규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쑬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4.권력

곽재규

옛날에는
호박꽃도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패랭이꽃이나 민들레꽃도
진짜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갑자기 장미나 백합을 들먹이며
나머지 꽃들은 뽑아
없애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워커와 방패에 기름을 먹이며
자신이 끌려갔던 닭장차와
오랫동안 증오했던
최루탄발사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 참 단맛이구나
아 참 꿀맛이구나
적어도 5년은 그렇게
입맛을 쩝쩝일 것이었습니다.

5.귀촉도
금산에서

곽재규

금산 농협 철선 타고 금진 포구 닿았습니다
대목 장꾼들 작은 갯마을로 사라진 뒤 날은 저물고
얼굴 까만 텃새 한 마리 집들의 봉창마다
저녁 햇살 한 토막 꽂았습니다 그리운 날은 멀고
보릿국 냄새에 길들여진 초저녁 별들이
사발 하나식 들고 긴 휘파람 불었습니다
면소의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 한 그릇 훌훌 마시고
여인숙 찬 방에 허리 구부리면 어디선가
낯익은 고통의 울음소리 긴 밤 새웁니다.

6.그리운 남쪽

곽재규

그곳은 어디인가
바라보면 산모퉁이
눈물처럼 진달래꽃 피어나던 곳은
우리가 매듭 굵은 손을 모아
여어이 여어이 부르면
여어이 여어이 눈물 섞인 구름으로
피맺힌 울음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은
돌아보면 날 저물어 어둠이 깊어
홀로 누워 슬픔이 되는 그리운 땅에
오늘은 누가 정 깊은
저 뜨거운 목마름을 던지는지
아느냐 젊은 시인이여
눈뜨고 훤히 보이는 백일의
이 땅의 어디에도
가을바람 불면 가을바람 소리로
봄바람 일면 푸른 봄바람 소리로
강냉이 풋고추
눈 속의 겨울 애벌레와도 같은
죽지 않는 이 땅의 서러운 힘들이
저 숨죽인 그리움의 밀물소리로
우리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음을

7.기다림

곽재규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8.깡통

곽재규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9.나무

곽재규

숲 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10.돌점 치는 여자

곽재규

그 여자와 나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만났습니다
이스크쿨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천산의 맑은 눈망울을 떨구고 있는 땅
그 여자가 돌 몇 개를 굴려
내 인생의 앞날을 읽어주었습니다
나 두 귀 쫑긋거리며
또르르 또르르 물방울처럼 굴러 나가는
내 인생의 마른 풀숲 하나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썩어 문드러질 육신
죽어 지옥을 방황한 영혼
그 여자의 점괘들이
비비새의 울음소리가 되어
저물녁 사과나무 가지에 걸렸습니다
그 날 밤 이스크쿨 호수의 수면 위에
육탈이 덜 된 한 사내의 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람도 되지 못하고
꽃도 되지 못하고
더더욱 새는 꿈꾸지 못한
한 사내의 이름이 작은 물살 되어
천산의 기슭까지 천천히 밀려 나갔습니다

11.두 사람

곽재규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꽃길을 지나갑니다.
바퀴살에 걸린
꽃 향기들이 길 위에
떨어져 반짝입니다.

나 그들을
가만히 불러 세웠습니다.
내가 아는 하늘의 길 하나
그들에게 일러 주고 싶었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불러 놓고 그들의 눈빛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그들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불러서 세워 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12.들국화

곽재규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 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13.따뜻한 편지

곽재규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들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데
버리지 못하는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14.땅 끝에 와서

곽재규

황사바람 이는 땅끝에 와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보다 먼저
한 송이 꽃을 바치고 싶었다
반편인 내가 반편인 너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히죽 웃으면서
묵묵히 쏟아지는 모래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너는 결국 아무런 말도 없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남은 북쪽 땅끝을 보여주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해안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아우성 소리 끊임없이 일어서고
엉겨 붙은 돌따개비 끝없는 주검 앞에서
사랑보다도 실존보다도 던져 오는
뜨거운 껴안음 하나를 묵도하고 싶었다
더 지껄여 무엇하리 부끄러운 반편의 봄
구두 벗고 물살에 서 있으니
두 눈에 푸르른 강물 고여 온다
언제 다시 이 바다에서 우리 참됨을 얘기하리
언제 다시 이 땅끝에서 우리 껴안아 함께 노래하리
뒹굴다가 뒹굴다가 다투어 피어나는 불빛 진달래 되리

15.또 다른 사랑

곽재규

보다 더 자유
스러워지기 위하여
꽃이 피고
보다 더 자유
스러워지기 위하여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 가득한데
또 다른 사랑 무슨 필요 있으리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하고 가을이 운다

16.마음

곽재규

나무와
나무 사이 건너는

이름도 모르는
바람 같아서

가지와
가지 사이 건너며

슬쩍 하늘의 초승달
하나만 남겨 두는
새와 같아서

나는 당신을
붙들어매는
울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한 번 떠나간
나루터의
낡은 배가 될 수 없습니다

17.묵언 1

곽재규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묵언 2
소금밭에서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18.바람소리

곽재규

새미골
이 첨지는
올 겨울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가
자꾸만 서러웁다네

댓잎 속에
깃을 친 겨울새들
살 부비며 함박눈 날리는 하늘로
촤 솟아오를 때

아랫집
길주할멈
스무 살 청상이 된
눈빛 참 맑은 가시내
쇠죽 쑤는
이 첨지 곁 다가와
아궁이에 마른 솔잎 한줌 던져주기도 하다가
혜산선 기차 타고 삼수갑산 원족가던 여학교 때 이야기도 하다가

콜록콜록 눈 속에 파묻힌 고향집들
그날의 그리움들 불빛 속에 떠올리기도 하다가
기침소리 끝나면
눈벙거지 쓴 장독대 곁에 서서
오래오래 북녘 땅 바라봅니다

내일 모레가 설날인데
눈이 펑펑 곱게도 오는데
그리운 사람들의 기척도 들리지 않고
오십 년 기다림의 바람소리만
서러운 댓잎을 스쳐갑니다.

19.바람이 좋은 저녁

곽재규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20.봄

곽재규

다시 그리움은 일어
봄바람이 새 꽃가지를 흔들 것이다
흙바람이 일어 가슴의 큰 슬픔도
꽃잎처럼 바람에 묻힐 것이다
진달래 꽃 편지 무더기 써갈긴 산언덕 너머
잊혀진 누군가의 돌무덤가에도
이슬 맺힌 들메 꽃 한 송이 피어날 것이다
웃통을 드러낸 아낙들이 강물에 머리를 감고
오월이면 머리에 꽂을 한 송이의
창포 꽃을 생각할 것이다
강물 새에 섧게 드러난 징검다리를 밟고
언젠가 돌아온다던 임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보리 꽃이 만발하고
마 가는 가시내들의 젖가슴이 부풀어
이 땅 위에 그리움의 단내가 물결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곁을 떠나가 주렴 절망이여
징검다리 선들선들 밟고 오는 봄바람 속에
오늘은 잊혀진 봄 슬픔 되살아난다
바지게 가득 떨어진 꽃잎 지고
쉬엄쉬엄 돌무덤을 넘는 봄.

21.산에 꽃피면

곽재규

산에
꽃피면

봄 산에
꽃피면

내 사랑은
내 사랑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시냇물이 흐르면
시냇물이 흐르는 대로

내 조국은
내 조국이다.

22.새

곽재규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늘 내 가슴속에
숨쉴 수 있기를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고통이 늘 내 가슴속에 빛날 수 있기를

해 저무는 날
새 한 마리
내 삶의 여울목에
뜨거운 노래 한 섬 부리고 갑니다.

23.새벽을 위하여

곽재규

잠들다 포근하여 깨어보면
당신은 늙고 해진 입술로 내 이마 위에
새벽의 젖은 꽃무늬를 새겨지지만
어머니 이 고요한 당신의 입맞춤보다 깊게
나를 껴안을 어둠의 큰 그리움을 불러 세울 수 있다면
그 새벽녘엔 아들의 깊은 잠을 깨워줘요
그 새벽녘에 기다렸던 길을 뜰 거예요
칡흑의 깊은 어둠과
돌절벽 끝 부서지는 강물소리를 거슬러
한 사람씩 누군가를 암장하던
자갈밭의 삽질소리를 거슬러
어머니 당신의 입맞춤이 내게 속삭여준
길고 긴 기다림의 새벽나라를 위해
봄과 겨울, 죽음과 사랑의 헛된 영화를 버리고
진창이거나 가시밭길이거나
눈길이거나 뜨거운 유황불길 속이라도
숨막힌 아카시아 꽃길을 가듯 걸어가겠어요
꽃 지는 날엔 어둠이 다시 들고
바람 부는 날 찾아오는 두려움이 더 깊겠지만
어머니 당신의 큰 그리움이
내 가슴에 새겨준 그 새벽녘엔
아직은 보이지 않는 그 날의 큰 새벽을 위해
삼 십 년 하루도 거른 일 없는
당신의 깊고 고요한 입맞춤을 떠나겠어요

24.서울 세노야

곽재규


오 년만의 연락에도
시 쓰는 동무들 모이지 않아
깊게 술 마신 밤
어기어차 노 저어 상도동 산 1번지
강형철네 포구로 간다
휘몰이 밤 물길 젓고 또 저어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마지막 물굽이
자주달개비 꽃 빼어 닮은 형철이 각시는
술살 보러 새로 두시 밤 물길 눈 비비며 가는데
세노야
멸치 잡아 그물 온방내 던져봐도
멸치 꼬랑지만한 금빛 시 한 줄 서울의
가을바다에 걸리지 않고
세노야
달은 떠서 산 넘어 가는데
우리 갈 길 아득하고

25.성묘

곽재규

무릎을 꿇어라
이 못난 후레자식
핏대를 세우며 삿대질을 하며
아버지는 거친 억새풀로 일어나
억새풀 아래 무릅 꿇은 잡풀보다
허름한 자식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들아 니 애비 못나 설운 마음
지천으로 패랭이꽃으로 빈 들판에 널렸는데
너 이제 한 주먹의 허름한 눈물로
불쌍한 애비 앞에 무릎 꿇었느냐
생각해라 잘살기 위해서라면
사군자에 곁들인 채색화도 잘 팔리고
미국 땅 삼류 음대 옆문으로 빠져나와
떡잎 그른 조선 호박잎들 바이올린 레슨 벌 만하고
잘살 일 하나로 죽어 가는 그 길이 가깝다면
너를 보는 애비 두 눈에 피눈물이 맺히리라
아들아, 별이 뜨는 가을밤을 너는
걸었느냐 여름의 진창 섞인 어둠 속을
헤매었느냐 눈을 감아라
겨울은 오고 홀로라도 네가 걸어야 할 길은 멀다
겨울은 오고 네가 맞을 눈송이는 아직 포근하다
돌아가거라 네 가슴에 남은 그리움이
내 가슴의 그리움과 함께 지천으로 피는 날
허름한 내 무덤 쓰러진 억새풀 위에도
뜨거운 이 세상의 송이 눈이 흩날리리라.

26.소나기

곽재규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가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않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걱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27.얼음 풀린 봄 강물
섬진 마을에서

곽재규

당신이
물안개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냥
밥 짓는 연기가 좋다고
대답했지요

당신이
산당화꽃이 곱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수선화꽃이 그립다고
딴말했지요

당신이
얼음 풀린 봄 강물
보고 싶다 말했을 때는
산그늘 쭉 돌아앉아
오리숲 밖 개똥지빠귀 울음소리나
들으라지 했지요

얼음 풀린 봄 강물
마실 나가고 싶었지마는
얼음 풀린 봄 강물
청매화향 물살 따라 푸르겠지만.

28.우이도 편지

곽재규

어무니 가을이 왔는디요
뒤란 치자꽃초롱 흔드는 바람 실할텐디요
바다에는 젖새우들 찔룩찔룩 뛰놀기 시작했구면요
낼모레면 추석인디요
그물코에 수북한 달빛 환장하게 고와서요
헛심 쪼깨 못 쓰고 고만 바다에 빠졌구만요
허리 구부러진 젖새우들 동무 삼아
여섯 물 달빛 속 개구락지헤엄 치는디
오메 이렇게 좋은 세상 있다는 거 첨 알았구만요
어무니 시방도 면소 순사 자전거 앞에 서면
고금쟁이 걸음처럼 가슴이 폴짝 뛰는가요
출장 나온 수협 아재 붙들고
아직도 공판장 벽보판에 내 사진
붙었냐고 해으름까지 우는가요
어무니 추석이 낼 모렌디요
숯막골 다랑치논 산두빛 익어 고울텐디요
호박잎 싼 뜨신 밥 한 그릇 차마 그리운디요
언젠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 일뿐으로
가막소에 가고 지명수배를 받던 세상
부끄러워 할 날 올 것이구만요
어무니 낼모레면 추석인디요
반월과 구로동 나간 동생들 다 돌아올텐디요
봉당 흙마루 걸터앉아 송편도 빚고 옛이야기 빚노라면
달빛은 하마 어무니 무릎 위에 수북수북 쌓일텐디요.

29.유산

곽재규

잡풀로 서걱거릴 너희를 버히겠다
한 놈 두 놈 새로 태어날 네놈까지
울지 마라 아버지는 백정이 아니었다
비껴서서,
바늘이 없는 길을 골라서서
아버지는 너희들이 편한 풀로
한세상 흔들리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
아버지는 백정이 아니었다 도망자였다
보안경을 쓰고 섬광과 함께
치지직 너희 질긴 뿌리를 지지겠다
한세상 서러운 잡풀로 흔들릴
피내림의 단호한 종지부를 찍겠다
그러나 믿어다오 아버지는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리운 이 땅의 풀씨만한 새벽에도 희망을 새기는
아버지의 슬픔은 종지부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너희 형제 얼굴이 아니었다
들지 않는 낫날로 모진 너희를 버히면서
아버지의 아픔은 잡풀인 아버지의
부끄러운 한세상 흔들림이었다.

30.은행나무

곽재규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워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찍힐 것이다

31.절망을 위하여

곽재규

바람은 자도 마음은 자지 않는다
철들어 사랑이며 추억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싸움은 동산 위의 뜨거운 해처럼 우리들의 속살을 태우고
마음의 배고픔이 출렁이는 강기슭에 앉아
종이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불렀다
정이 들어 이제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짓밟고 간
많고 많은 이방의 발짝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오르지 않는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
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32.참 맑은 물살

곽재규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 몸 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33.첫눈 오는 날

곽재규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34.희망을 위하여

곽재규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라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내 등뒤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포근하게 감싸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라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 세상의 슬픔을 보리라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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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시모음


게릴라



 당신은 정규군
교육받고 훈련받은
정규군.
교양에 들러붙고
학문에 들러붙는
똥파리들!
그러나 고지점령은
내가한다!
나는 비정규군
적지에 던져진 병사
총탄을 맞고 울부짖는 게릴라!

 

낙인 

 

티 브이를 켜니 서부극인 모양이다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카우보이가
밧줄 올가미를 휘휘 휘둘러
마구 뛰어달리던 야생마를 낚아채뜨린다
그런 다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뜨거운 부젓가락을
버둥대는 말엉덩이에 사정없이 눌러찍는다
양키들은 잔인하구나!
채널을 다른 방송으로 돌리자 광고가 흐르는데
말같이 튀어나온 한국 아가씨의 엉덩이에
리바이스 청바지 상표가 빨갛게 눌러찍힌다

 

당진 여자

 

어디에 갔을까 충남 당진여자
나를 범하고 나를 버린 여자
스물 세 해째 방어한 동정을 빼앗고 매독을 선사한
충남 당진여자 나는 너를 미워해야겠네
발전소 같은 정열로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그녀를 나는 미워하지 못하겠네
충남 당진여자 나의 소원은 처음 잔 여자와 결혼하는 것
평생 나의 소원은 처음 안은 여자와 평생 동안 사는 것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
처음 입술 비빈 여자와 공들여 아이를 낳고
처음 입술 비빈 여자가 내 팔뚝에 안겨 주는 첫딸 이름을
지어 주는 것 그것이 내 평생 동안의 나의 소원
그러나 너는 달아나 버렸지 나는 질 나쁜 여자예요
택시를 타고 달아나 버렸지 나를 찾지 마세요
노란 택시를 타고 사라져 버렸지 빨개진 눈으로
뒤꽁무니에 달린 택시 번호라도 외워 둘 걸 그랬다
어디에 숨었니 충남 당진여자 내가 나누어 준 타액 한 점을
작은 입술에 묻힌 채 어디에 즐거워 웃음 짓니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두 사람이 누울 자리는 필요 없다고
후후 웃던 충남 당진여자 어린 시절엔
발전소 근처 동네에 살았다고 깔깔대던 충남 당진여자
그래서일까 꿈속에 나타나는 당진 화력 발전소
화력기 속에 무섭게 타오르는 석탄처럼 까만
여자 얼굴 충남 당진여자 얼굴 그 얼굴같이
둥근 전등 아래 나는 서 있다 후회로 우뚝 섰다
사실은 내가 바랐던 것 그녀가 달아나 주길 내심으로 원했던 것
충남 당진여자 희미한 선술집 전등 아래
파리똥이 주근깨처럼 들러붙은 전등 아래 서있다
그러면 네가 버린 게 아니고 내가 버린 것인가
아니면 내심으로 서로를 버린 건가 경우는 왜 그렇고
1960년 산 우리세대의 인연은 어찌 이 모양일까
만리장성을 쌓은 충남 당진여자와의 사랑은
지저분한 한편 시가 되어 사람들의 심심거리로 떠돌고
천지간에 떠돌다가 소문은 어느 날 당진여자 솜털 보송한
귀에도 들어가서 그 당진여자 피식 웃고
다시 소문은 미래의 내 약혼녀 귀에도 들어가
그 여자 예뻤어요 어땠어요 나지막이 물어오면
사랑이여 나는 그만 아득해질 것이다 충남 당진여자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햄버거에 대한 명상

 

- 가정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오늘 내가 해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그러면서도 맛이 좋고 영양이 듬뿍 든 명상
어쩌자고 우리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자,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 주겠다. 준비물은

 

햄버거 빵 2
버터 1½큰 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½
달걀 2
빵가루 2 컵
소금 2 작은 술
후춧가루 ¼작은 술
상추 4 잎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컵

 

위의 재료들은 힘들이지 않고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믿을 만한 슈퍼에서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슈퍼에 가면
모든 것이 위생비닐 속에 안전히 담겨 있다. 슈퍼를 이용하라―

 

먼저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곱게 다진다.
이 때 잡념을 떨쳐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 명상의 첫단계는
이 명상을 행하는 이로 하여금 좀더 훌륭한 명상이 되도록
매우 주의깊게 순서가 만들어졌는데
이 첫단계에서 잡념을 떨치지 못하면 손가락이 날카로운 칼에
잘려, 명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장치되어 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볶아 식혀 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 명상에 흥미를 느낀다는 뜻이기도 한데
흥미가 없으면 명상이 행해질 리 만무하고
흥미가 없으면 세계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끝난 다음,
다진 쇠고기와 돼지고기, 빵가루, 달걀, 볶은 양파,
소금, 후춧가루를 넣어 골고루 반죽이 되도록 손으로 치댄다.
얼마나 신나는 명상인가. 잠자리에서 상대방의 그곳을 만지는 일만큼
우리의 촉각을 행복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순간은,
곧 이 순간,
음식물을 손가락으로 버무리는 때가 아니던가

 

반죽이, 충분히 끈기가 날 정도로 되면
4개로 나누어 둥글납작하게 빚어 속까지 익힌다.
이때 명상도 따라 익는데,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반죽된 고기를 올려놓고 1분이 지나면 뒤집어서 다시 1분 간을 지져
겉면만 살짝 익힌 다음 불을 약하게 하여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절대 가스레인지가 필요하다― 뚜껑을 덮고 은근한 불에서
중심까지 완전히 익힌다. 이때
당신 머리 속에는 햄버거를 만들기 위한 명상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머리의 외피가 아니라 머리 중심에, 가득히!

 

그런 다음,
반쪽 남은 양파는 고리 모양으로
오이는 엇비슷하게 썰고
상추는 깨끗이 씻어놓는데
이런 잔손질마저도
이 명상이 머리 속에서만 이루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명상도 하나의 훌륭한 노동임을 보여준다.

 

그 일이 잘 끝나면,
빵을 반으로 칼집을 넣어 벌려 버터를 바르고
상추를 깔아 마요네즈 소스를 바른다. 이때 이 바른다는 행위는
혹시라도 다시 생길지 모르는 잡념이 내부로 틈입하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므로 버터와 마요네즈를 한꺼번에 처바르는 것이 아니라
약간씩, 스며들도록 바른다.

 

그것이 끝나면,
고기를 넣고 브라운 소스를 알맞게 끼얹어 양파, 오이를 끼운다.
이렇게 해서 명상이 끝난다.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까다롭고 주의사항이 많은 명상 끝에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 만들어졌다


아파트 묘지


홀린 듯 끌린 듯이 따라갔네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또박거리는 하이힐은 베짜는 소린 듯 아늑하고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엉덩이는
항구에 멈추어 선 두 개의 뱃고물이
물결을 안고 넘실대듯 부드럽게 흔들렸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그녀의 다리에는 피곤함이나 짜증 전혀 없고
마냥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난 것도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모두 잊은 채
희고 아름다운 그녀 다리만 쫓아갔네
도시의 생지옥 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붉고 푸른 불이 날름거리는 횡단보도와
하늘로 오를 듯한 육교를 건너
나 대낮에 여우에 홀린 듯이 따라갔네
어느덧 그녀의 흰 다리는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공동묘지 같은 변두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네
나 대낮에 꼬리 감춘 여우가 사는 듯한
그녀의 어둑한 아파트 구멍으로 따라들어갔네
그 동네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그녀는 나의 호실 맞은편에 살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며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낯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장정일 -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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