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모음

 


박재삼 시 모음 27편

1. 12월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2. 천년의 바람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3.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박재삼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4. 나는 아직도

박재삼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 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5. 나무 그늘

박재삼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 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6. 나뭇잎만도 못한 짝사랑

박재삼

네 집은 십리 너머
그렇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건만
혼자만 끙끙
그리울 때가 더 많았다네.

말 못하는 저 무성한
잎새들을 보면
항시 햇빛에 살랑살랑
몸채 빛나며 흔들리고 있건만.
말을 할 줄 아는 心中에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으니
大明天地에
이 캄캄한 구석을
내보이기가 민망하던
아, 서러운 그때여.

7. 낙과소리를 들으며

박재삼

짧은 가을 석양에는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다른 때에 비하여
어찌 그리 쓸쓸한가

아침이나 한낮에는
다 익으면
햇빛과 바람과 수분을
아름답게 겉으로 내뿜으며
하늘 속에 있는 전수명을 다하고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마지막을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때는 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게 적막강산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주위가 해지기 얼마 전에는
그럴 수 없이 몸에 스미는
아, 짜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울고 싶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 멸망의 몸짓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아직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벌써 오십 고개를 몇 해 넘겼네.

8. 라일락꽃을 보면서

박재삼

우리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을 같이한 것이
이 이상 고마울 것이 없고
미구(未久)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로 잠시
한자리 머무는 것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세상 일은 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은 것이네.

9. 無言으로 오는 봄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10. 무제(無題)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千)날 만(萬)날 가야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11. 바람의 내력

박재삼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12. 밤바다에서

박재삼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天下에 많은 할말이, 天下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13. 사람이 사는 길 밑에

박재삼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 다 그런 일이라!


14. 사랑의 노래

박재삼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15. 사랑하는 사람

박재삼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16. 슬픔을 탈바꿈하는

박재삼

아무리 서러워도
불타는 저녁놀에만 미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밤의 적막 속에
그것은 깨끗이 묻어버리고
다음날에는
비록 새 슬픔일지라도
우선은 아름다운
해돋이를 맞이하는 심사로
요컨대 슬픔을 탈바꿈하는
너그러운 지혜가 없이는
강물이 오래 흐르고
산이 한자리 버티고 섰는
그 까닭 근처에는
한치도 못 가리로다.

17. 신록(新綠)

박재삼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18. 新綠을 보며

박재삼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
생선을 낚아 회를 쳐 먹었던 것,
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의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
이런 것이 一時에 수런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대들어 오누나.

또한 이를 달래 창자 밑에서 일어나는 微風
가볍고 연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누나.

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19. 아름다운 사람

박재삼

바람이 부는 날은
별들이 갈대로 쓸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머리카락을 날리는
아름다운 사람아.

달이 높이 뜬 날은
별들은 손을 호호 불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을 보며 고개 숙인
아름다운 사람아.

20.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21. 일월 속에서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 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마가 한결 빛나고

강물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편일률로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22. 천년의 바람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23. 첫사랑 그 사람은

박재삼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24. 추억(追憶)에서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漁物)전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25. 햇빛의 선물

박재삼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26. 혹서일기

박재삼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27. 흥부 부부상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닿는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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