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시모음

 

★밀물  /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은는이가  /  정끝별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소금 인간   / 정끝별

​돌도 쌓이면 길이 되듯 모래도 다져지면 집이 되었다

발을 떼면 허공도 날개였다

사람도 찾아들면 소금이 되었고 돌이 되었다
울지 않으려는 이빨은 단단하다

태양에 무두질된 낙타 등에 얼굴을 묻고

까무룩 잠에 들면 밤하늘이 하얗게 길을 냈다

소금길이 은하수처럼 흘렀다 품었다

내보낸 길마다 칠할의 물이 빠져 나갔다

눈썹 뼈 밑이 비었다
모래 반 별 반, 저걸 매몰당한 슬픔이라 해야할까?

낙타도 사람도 한때 머물렀으나

바람의 부력을 견디지 못한것들의 백발이 생생하다
한철의 눈물도 고이면 썩기 마련,

한 번 깨진 과욕은 바닥이 마를 때까지 흘러나오기 마련,

내가 머문 이 한철을 누군가는 더 오래 머물 것이다

머문만큼 늙을 것이다
알몸으로 태어나 맨몸으로 소금산에 든 자여,

마지막 시야를 잃은 고요여, 머리를 깨뜨려라.

모래로 흩어지리니,
세상 절반을 품었던 두 팔, 없다.

가죽 신발 속 절여진 발, 흔적도 없다

★사랑의 병법   / 정끝별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하나로 꿰는 이치를 일관(一貫)이라 한다
한 점 두려움 없이 열매처럼 나를 주고 너를 받는 기미가 일격이고

흙 없이 뿌리 없듯 뿌리 없이 가지 잎새 없고

너 없이 나 없는 그 수미가 일관이라면
너를 관(觀)하여 나를 통(通)하는 한가락이 일격이고
나를 관(觀)하여 너를 통(通)하는 한마음이 일관이다
일격이 일관을 꽃피울 때
단숨이 솟고 바람이 부푼다
무인이 그렇고 애인이 그렇다
일생을 건 일순의 급소
너를 통과하는 외마디를 들은 것도 같다
단숨에 내리친 단 한 번의 사랑
나를 읽어버린 첫 포옹이 지나간 것도 같다
바람을 베낀 긴 침묵을 읽은 것도 같다
굳이 시의 병법이라 말하지 않겠다

★기나긴 그믐   / 정끝별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돌아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첫닭이 울 때까지 아침빛에 스러질 때까지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다시 차오를 때까지

★둥지새   / 정끝별

발 없는 새를 본 적 있니?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에 쉰다지 
낳자마자 날아서 딱 한번 떨어지는데 
바로 죽을 때라지 
먹이를 찾아 뻘밭을 쑤셔대본 적 없는 
주둥이 없는 새도 있다더군 
죽기 직전 배고픔을 보았다지 

하지만 몰라, 그게 아니었을지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날기만 했을지도 
뻘밭을 헤치기 너무 힘들어 굶기만 했을지도 

낳자마자 뻘밭을 쑤셔대는 둥지새 
날개가 있다는 걸 죽을 때야 안다지 
세상의, 발과 주둥이만 있는 새들 
날개 썩는 곳이 아마 多情의 둥지일지도 
못 본 것 많은데 나, 죽기 전 뭐가 보일까 

★사 랑   /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이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 정끝별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 

★현 위의 인생   / 정끝별

세 끼 밥벌이 고단할 때면 이봐 
수시로 늘어나는 현 조율이나 하자구 
우린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차피 한 악기에 정박한 두 현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줘 
세상과 화음할 수 없을 때 우리 
마주앉아 내공에 힘쓰자구 
내공이 깊을수록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지 
모든 현들은 
어미집 같은 한없는 구멍 속에서 
제 소리를 일군다지 
그 구멍 속에서 마음놓고 운다지 

★강진 편지   / 정끝별

버석이던 갈대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에 춘백(春栢)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꽃 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 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내 영혼에 일렁이던 햇살도 한통속들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 비껴 서있던 당신 겨드랑이와 내 겨드랑이가

이제야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그토록 망설임이었거늘 가슴에 서로를 묻는일이야

만장(輓章)처럼 당신쪽으로 누운 풀자국에

내내 가난할 것입니다

모란 냄새 선명한 하마 흔하디흔한 세상

봄밤으로 나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얼굴을 파묻다  / 정끝별

흐르는 것들에서는 묵은 쌀겨 냄새가 난다 
갓 담근 술항아리에서 포도알을 훔쳐 먹고 
얼굴을 파묻던 한마당의 쌀더미는 따뜻했다 
누렇게 좀먹던 스무 살 페루의 하늘도 
쏟아질 듯 무겁기만 하던 원산도 별밭도 
비어 있던 대성리 철둑길도 그늘 무성해 
소나기 퍼붓고 세상은 선뜻 변했다 
쌀벌레들은 다시 쌀더미에 향기로운 집을 짓고 
푸른 들판에 누워 한 백년쯤 자고 싶어, 
지친 男子는 잎도 지기 전 창백한 女子를 떠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서늘한 질투도 
이만큼 지나쳐서야 눈치채는 것인데 
이 늦은 저녁 쌀을 씻으며 
치댈수록 부예지는 쌀뜨물에 얼굴을 묻고 
다행이다, 쌀벌레 껍질처럼 
어제가 낙낙히 뜰 수 있다는 것은 
부박했던 노래가 떠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은 
촤르르 촤르르 말갛게 씻겨진 마음이 
잘 익은 밥 냄새를 피워올릴 수 있다는 것은 

★춘수(春瘦)  / 정끝별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입동  / 정끝별 

이리 홧홧한 감잎들 
이리 분분히 소심한 은행잎들 
이리 낮게 탄식하는 늙은 후박잎들 

불꽃처럼 바스라지는 
요 잎들 모아 
서리 든 마음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몸속부터 꼬숩겠지요 

★상강  / 정끝별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갈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엄으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추억의 다림질   / 정끝별

장롱 맨 아랫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콜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날개를 적시는 빗물과 같아, 

안주머니까지 뒤집어 솔질을 하면 
여기저기 실밥처럼 풀어지는 
여름, 그대는 앞주름 건너에 
겨울, 그대는 뒷주름 너머에 

기억할수록 날세워 빛나는 것들 
기억할수록 몸서리쳐 접히는 것들 
오랜 서랍을 뒤져 
얼룩진 미련마저 다리자면 

추억이여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리면 다릴수록 익숙히 접혀지는 
은폐된 사랑이여 

★블루 블루스  / 정끝별

땅 속 저 깊은 흙구덩이에서도 
검게 그을린 씨앗으로 남아 
여덟 개의 꽃잎을 만들어냈다는 
이천 년 만에 핀 젖빛 목련 

여래나 금륜왕이 올 때까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히말라야 산록의 우담화 
삼천 년 만에 피는 꽃 

얼음 토탄이 되어서도 
살아남았다는 기적의 씨앗 
푸른 등꽃을 닮은 알래스카 루핀 
일만 년 만에 핀 꽃 

그러나 
흙 속에서 얼음 속에서 
싹도 피워보지 못한 채 죽어간 
세상 모든 씨들 
마음 속에서 죽어간 
하 많은 기다림의 씨들 

★천생연분  / 정끝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오래된 장마  / 정끝별

새파란 마음에 
구멍이 뚫린다는 것 
잠기고 뒤집힌다는 것 
눈물 바다가 된다는 것 
둥둥 
뿌리 뽑힌다는 것 
사태지고 두절된다는 것 
물벼락 고기들이 창궐한다는 것 
어린 낙과들이 
바닥을 친다는 것 
때로 사랑에 가까워진다는 것 
울면, 쏟아질까? 

★물을 뜨는 손  / 정끝별

물만 보면 
담가 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다 새어나가는 것이라고 
무심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 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 정끝별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 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정끝별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 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 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 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가지에 걸린 공  / 정끝별

창공의 공터에 
동그랗게 입을 다물고 있는 
가출한 동안童顔 

누가 데려다 놓았을까 
백년 묵은 은행나무 가지 꼭대기에 
수은등과 나란히 걸려 있었어 

대낮의 아이들이 뻥이야 맘껏 차버린 
놀라워라 고 뻥 한번 따라 올라봤으면! 
차고 던지고 굴리고 튕기고 날리던 
공터의 찬 발들이 쏜살처럼 쏘아 올렸을 
오래된 뱃속의 허공 

그러나 너무 세게 차지는 마라 
공마다 가늠할 수 있는 속도와 높이는 다른 법 
가지 사이사이가 모두 삼천포다 

가지를 벗어날 수 없는 둥근 허기가 
안에서부터 제 거죽 몸을 먹어치우는 사이 
초겨울 까지 날아와 날카로운 부리로 
가지에 걸린 공을 가늠하고 간다 
제 집으로 들앉을 셈인가 

★어떤 자리  / 정끝별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 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 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났다 
신음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속 좋은 떡갈나무  / 정끝별

속 빈 떨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미라보는 어디 있는가  / 정끝별

미라보 
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 
옥탑방 벽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 
당신이었다가 
퐁네프의 연인들이 달리는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 
파리젠느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였다가 
벗은 다리를 감춰주던 침대시트였다가 
영등포동에 있는 웨딩타운이었다가 
당신 사는 상계동이나 대전의 아파트였다가 
엔티크한 삼인용 소파였다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보낸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미라보 
하면 세면대에서 놓쳐버린 은반지였다가 
간곡히 비어 있는 꽃병 속 그늘이었다 
꼭꼭 숨어사는 누군가의 ID였다가 
마른하늘에 살풋 걸리는 무지개였다가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미라보, 미라보는 얼마나 격렬한가 
이 얼마나 멸렬한가 

★공전(空轉)  / 정끝별

별들로 하여금 지구를 돌게 하는 
지구로 하여금 태양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문득, 별을 떨어지게 하는 
저 중력의 포만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나로 하여금 당신 곁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기어코, 나를 밀어내게 하는 
저 사랑의 포만 
허기가 궤도를 돌게 한다 

★그만 파라, 뱀 나온다  / 정끝별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 속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속을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 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 때나 속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미끼들에 속아 파고 또 파면 
속의 피를 보기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사납고 
제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모질다 

★바람을 기다리는 일  / 정끝별

찔레와 포플러와 길과 물과 함께 있던 
늘어진 버드나무 밑에 함께 기대앉던 
자운영과 골풀을 쓰러뜨리며 함께 눕던 
우포 물 언저리 빗방울로 맺히던 

물위에 초록 기둥을 세우고 
좀개구리밥꽃처럼 작은 방을 들이고 
소금쟁이 지나는 길목에 덜컥 꽃을 피우고 
개구리마저 튀어 오르는 물밑으로 열매를 맺고 

큰물이 흔쾌히 거두어갈 때까지 
빗방울이 화석이 될 때까지 
늪이 물이 될 때까지 
발목을 쥐고 있는 
물에 뜬 사랑 

눈이 머는 일 
마음이 먼저 먹히는 일 
먹먹한 물이 되는 일 
저 갯버들 가지에 치마를 걸어놓고 
오지 않는 바람을 기다리는 일 
고여 있으되 오래 썩지 않는 일 
여기 중독된 불멸 

★늦도록 꽃  / 정끝별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희 망  / 정끝별

구멍에 빠져 본 사람은 
구멍을 제 몸 속에 넣고 다닌다 
두 눈을 움푹 파헤치고 

구멍을 등에 지고 가는 
은빛 눈썹의 낙타야 
지친 너에게 구멍은 오아시스였니? 
배 한가운데 구멍을 안고 가는 
베두인의 여자야 
허기진 너에게 구멍은 집이었니? 

구멍에 빠질 때마다 
한 삽씩 네 눈에서 퍼냈던 
꽃 핀 모래가 
신기루 
그 허방이었니? 

★두 문 두 집  / 정끝별

네게 닿고 싶어 
서로를 보듬고 설 수 있는 짚단이 되고 싶어 
까칠한 배꼽 감출 수 있는 울타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선 문이 있어야, 
나그네처럼 
사막을 헤매던 모래집이 말했어 
그만 자고 싶어 
탯자리를 향해 행렬 짓는 
늙은 코끼리처럼 남아프리카 케냐 어디쯤 
페루의 새처럼 남아메리카 어디쯤 
하지만 우선 이 문을 버려야, 
진흙뻘처럼 
기다림에 지친 붙박이집이 말했어 

★날아라! 원더우먼  / 정끝별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외칠 때마다 
군살 없는 근육질 허리에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아 정글 속의 로맨스 
베트맨―, 슈퍼맨 맨― 외치면 
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무쇠 팔 무쇠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세일러문 요술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뒷심  / 정끝별

모든 그림자는 빛의 뒤편으로 무너진다는데 
모든 풀은 바람 뒤로 밀리고 바람 뒤로 눕는다는데 
모든 줄다리기는 뒤편을 향해 당겨진다는데 
모든 말은 침묵 뒤편으로 고인다는데 
모든 사람들은 뒤가 실해야 당당히 설 수 있다는데 
모든 사랑은 기다림 뒤편에서 완성된다는데 
모든 그림자에게 뒤는 내려앉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풀에게 뒤는 맞서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줄다리기에서 뒤는 버티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말에게 뒤는 숨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뒤는 돌아보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랑에게 뒤는 젖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앞에 대항하는 바로 그 심心 

★한 집 눈물  / 정끝별

집에 빠진 나 한 집 
생에 그늘이 될 만한 집 한 채는 있어야 해요 
집은 나 한 집 하기 나름인걸요 
도장에 미장 새시하고 조명 갈고 
버디칼 걸고 유리창까지 닦는다 
환해진 집에 황홀한 나 한 집 

집이 기침을 하면 나 한 집 약 먹는다 
집이 오줌누고 싶어하니 나 한 집 똥눈다 
집이 술잔을 들면 나 한 집 담배를 피워 문다 
집이 바지를 벗자 나 한 집 단추를 푼다 
집이 심심해하니 나 한 집 아이 낳아 준다 

집은 날로 의기양양 나 한 집 업신여기고 
나 한 집 더럽히고 나 한 집 깔아뭉개더니 
너 나가 너 나가 다 나가 나 한 집 내차네 
집을 ?i아다니느라 빚더미로 오른 나 한 집 
나 한 집 옹골차게 등쳐먹은 잔인한 집 
집에 내?i긴 가엾은 나 한 집씨 

★봄마늘  / 정끝별

욕설같이 불쑥 주먹같이 
흰마늘쪽이 꿈틀, 
매운 눈 비비며 
폭음처럼 질주하는 
숨가쁜 휘발성 
시퍼렇게 물오른 
상추 고추 사이 봄마늘 마늘고추장 
마늘 향기 하얀 남도 마늘꽃 
오 싱싱한 봄밤 
꽃이 아니어도 풀이 아니어도 
하르르 피워내는 
저 화냥기 좀 봐 
쉿! 쉿! 
당차게 뿜어대는 저 독기 좀 봐 
봄바다를 게릴라처럼 
상추 고추 사이 봄마늘 마늘고추장 
마늘향기 하얀 남도 마늘씨 

★졸참나무 숲에 살았네  / 정끝별

비가 내리었네 
온종일 오리처럼 앉아 숲 보네 
그렇게 허름했던 사랑의 이파리 
허물어진 졸참 가지에 
넘어지며 나는 가고 있네 
내 나이를 모르고 둥근 하늘 아래 
잎이 피네 짐처럼 피네 
잎이 지네 나도 흙먼지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무도 
꽃이 피리라 기약치 않으리 
숲 기슭에 오리처럼 앉아 있네 
비가 많이 내리네 

★한 주먹  / 정끝별

발레니나가 되겠다던 
화가가 되겠다던 
일곱 살배기 딸이 한 판 붙고 온 날 
한 주먹이 되겠다네 
세 놈을 한 방에 쓰러뜨린 수 있는 한 주먹 
여자애라고 얕잡아보지 않을 한 주먹 
한 주먹 키우겠다며 밤마다 

나도 한 주먹 있었으면 좋겠네 
한갓 시인이 되겠다는 
한낱 풍경 감식가나 되겠다는 
나를 갈고리에 걸고 내 마음을 파먹는 
떠들썩한 빈말들 한 방에 날려버릴 한 주먹 
한 주먹 키우겠다며 밤마다 

한, 주먹, 쥐었다 
한, 주먹, 폈다 

★밥 심  / 정끝별

돌고 돌다 
설설 
기고 기다 
급기야 
바닥에 박히는 
부동심법 

저 찰진 
호구의 
힘 

좆, 팽이 

★봄의 화단에서  / 정끝별

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바람에 휘청, 
넘어진 피와 멍이 너의 꽃이고 잎이었구나 
저 계단에서 
잠시 붙잡고 선 난간이 너의 뿌리였구나 

★주름을 엿보다  / 정끝별

뼈와 뼈 사이에 살이 있다 
벌어지고 구부러진 틈으로 
검은 송사리 떼가 일구어놓은 물결이 
살과 살을 잇는다 
배를 묶어두는 밧줄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허공을 이어놓고 
풀어내고 가두는 인연을 당길 때마다 
흔들림을 정지시키며 
배들을 튕겨주는 힘줄 
송사리 떼가 들락이며 제 길을 넓힐 때마다 
살과 살은 부드럽게 접혀지고 
뼛속까지 출렁이는 
이 오래된 계단을 따라 
연하디연한 무릎 주름이 걸어들어간다 

가만 보면 
겹겹이 뜬 노곤한 봄날,누군가의 
눈물 맺힌 밧줄이 풀리고 있다 

★사과 껍질을 보며  / 정끝별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싸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살갗의 땀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돌처럼 견고했던 식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탁 모퉁이에서 
사과 껍질이 몸을 뒤틀고 있다 
살을 놓아버린 곳에서 생은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붉은 사과 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쥔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 

껍질 한끝을 집어 든다 
더듬을수록 독한 단내를 풍기는 
철렁, 누가 끊었을까 저 긴 기억의 주름 
까맣게 시간이 슬고 있다 

★춘장대 동백숲  / 정끝별 

오백 년 동안 축축 늘어진 동백나무 가지가 
바닥에 철렁 내려놓으며 들여놓은 동백나무 방들 

미처 널어 말리지 못한 채 몇 철이나 쌓인 
낙엽에 진 꽃에 어룽 햇살을 금침으로 깔아놓고 

시간 없어 나 한 번 밖에 못했다며 
젊은 아줌마를 앞세워 동백그늘을 나오는 아저씨라든가 
그 나이에 한 번 허면 됐다며 
추임새 좋게 동백 그늘에 드는 늙은 아줌마라든가 

동백의 몸통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 
동백의 팔다리는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 

봄이 길다는 춘장대 옆 마량리 화력발전소 뒤 
그렇게 한 오백 년 동안 
춘정의 봄군불을 때다 그만 벌겋게 데기도 하는 

오백 년 된 동백숲의 온 몸 동력 
내연(內燃)의 한 천년은 들고나겠네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 정끝별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박깜박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통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봉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옹관甕棺.1  / 정끝별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에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근 길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 찬 항아리다 

★또 하나의 나무  / 정끝별

오십년째 이름없이 살던 참나무 한 그루 
오늘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 되셨다 
임학계 거목 김장수 씨 화장 유골이 
살아 아끼시던 이 참나무 아래 묻혔으니 
나무와 함께 살다 나무 곁으로 가셨으니 
첫 겨울 개똥지빠귀 한 마리 놀러와 
옹이에 앉아 휘파람 불어주고 있으니 
참,나무 되어 장수하시겠다 

손가락이 흰 자작의 딸이 아니었기에 
어깨 처진 고배에 고배를 자작하였으니 
언어를 호미 삼아 죽정밭 한 평쯤 자작하였으니 
별똥을 쏟아내는 개똥벌레처럼 
뼛속까지 하얗게 질린 채 자작거렸으니 
나도 죽어 자작 나무 되어 
별을 먹은 나무 되고 싶다 

불힘 좋은 몸들, 
나무들의 향기가 낯익다 

★소금호수  / 정끝별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이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아 
맨발이었다 
벗어놓는 신발이 웃는다 

★요요  / 정끝별

당신이 나를 지루해할까 봐 
내가 먼저 멀리 당신을 던져봅니다 
달아날 수 있도록 풀어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포기합니다 
포기의 복수 
포기의 쾌락 
그리고 포기의 보상 
당신은 늘 첫 떨림으로 달려옵니다 
던졌다 당기고 
풀렸다 되감기고 
사라졌다 되돌아오는 
천 갈래 던져진 그물 길 
오요, 오요, 오 요요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는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명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세상의 등뼈  /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게임의 법칙  / 정끝별

그래? 내 입과 두 눈에 
네 손가락들을 깊숙이 박아봐! 
그래? 날 던져봐! 
잘 굴러갈 거야 
네 빗장뼈를 타고 코불쏘뿔처럼 달려가 
네 심장의 핀들을 모조리 
으스러뜨려 놓을 거야 
그래 너! 
지금은 날 요리조리 애무하고 있지만 
그래 나? 
아직은 아직은 터질 듯 도사리고 있지만 
그래 너? 
언젠가 날 내던지고 말걸, 그 순간 
그래 나! 
네 검은 허파속을 돌진해 
뚝 끊긴 지평선 너머까지 돌진할 거야 
온옴으로 끝장내줄 거야 
어때? 
의심에 질린 맞수들의 
스트-라이크 사랑 

★와락  / 정끝별

반 평도 채 못 되는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 번을 내리치던 이 생生의 벼락 
헐거워지는 네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 자락 

★허공의 나무  / 정끝별
-박수근 풍(風)으로 

그 나무에 꽃 없다 
피우지 못하고 꺾어버렸다 
가슴에 더 할 말 없다고 
사랑에게 뻗어가는 어깨 잘라버렸다 
마음 다 펼칠 수 없다고 
사랑에게 달려가는 발 묻어버렸다 
문자 밖에서야 쓰여지게 될 것이라고 
터져 나오는 꽃들 삼켜버렸다 
그 나무에 숨 없다 
뿌리처럼 비틀린 
빈 목숨만이 붙어 
옆얼굴이 울고 있다 
 
★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시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 앉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 앉아 한 번 더 마주 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 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 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 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 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 평생과 
단 한 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 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네와 설렁탕집에 

★까마득한 날에  / 정끝별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밥 하면 순간 숨이 뚝 끊기는 
밥들의 일촉즉발 
밥들의 묵묵부답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 

★삼매三昧  / 정끝별

직박구리가 목련꽃에 머리를 쑥 박고 
이 뭐꼬! 꽁지를 한껏 치켜세운 채 
검은 직박구리가 흰 목련꽃잎을 
용맹정진 긴 부리로 촉 촉 
장좌불와長座不臥! 가지에 힘껏 발톱을 박고 
금세 한 목련 다 지고 
목련 가지 끝 잎눈 하나가 
하늘 경經 한 장을 바짝 끌어당기자 
푸른 두 귀가 쫑긋, 
벌어진 봄의 잎이란 무릇 
세 그루 건너 
배꼽마당처럼 허벅진 배꽃더미는 
직박구리 봄의 무아無我다 

★산사춘  / 정끝별

갈 수 없는 것 맞지? 
봄바람에 사태 졌던 
흰 꽃잎 
발목 삔 잎들만 남았으니 
꽃 핀 길 
걸어 잠근 가시만 남았으니 
취할 수 없는 거 맞지? 
바람에 길이 막혔으니 
영혼의 뿌리까지 다 내주어 버렸으니 
다시 그 꽃, 
피울 수 없는 거 맞지? 
이른 노을에 물들어 
붉게 맺히는 인연의 
시린 열매

★강그라 가르추  /  정끝별

한 밤을 가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밤을 맨발로 달려가자 모든 죄를 싣고
검은 야크의 눈에 서른 개의 달을 싣고

강그라 가르추를 가자 가다 갇히면
덧창문 안으로 강된장을 끓이며 몇 날 며칠
오랜 슬픔에 씨앗만 해진 두 입술로
뭉쳐진 밥알을 나누며 숨죽이며 가자

얼음 냄새 밴 발꿈치를 어루만지며
몇 날 며칠을 가자 버리고 도망 온 것들이
가랑가랑 뜨물처럼 갈앉는 꿈에서야
눈보라에 튼 붉은 뺨을 씻으며

처마 밑 고드름 녹는 소리에
겨울 순무의 푸른 귀가 돋는 곳으로
가자 도망 온 것들이 그리워지는 곳으로
가까스로 도망 온 도망갈 곳으로 가자

강그라지듯 가자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너라는 천산산맥 나라는 만년설산을 넘어
가도 가도 강그라 가르추를 다시 넘어

★통속  /  정끝별

서두르다를 서투르다로 읽었다

잘못 읽는 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화두를 화투로, 가늠을 가름으로, 돌입을 몰입으로,

비박을 피박으로 읽어도 문맥이 통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네살배기 딸도 그랬다

번번이 두부와 부두의 사이에서,

시치미와 시금치 사이에서 망설이다

엄마 부두 부쳐준다더니 왜 시금치를 떼는 거야

그래도 통했다
중심이 없는 나는 마흔이 넘어서도 좌회전과 우회전을,

가로와 세로를, 성골과 진골을, 콩쥐외 팥쥐를, 덤과 더머를, 델마와 루이스를 헷갈려 한다

짝패들은 죄다 한통속이다
칠순을 넘긴 엄마는 디지털을 돼지털이라고 하고

코스닥이 뭐예요?라고 묻는 광고에 사람들이 왜 웃는지 모르신다

웃는 육남매를 향해 그래 봐야 니들이 이 통속에서 나왔다 어쩔래 하시며 늘어진 배를 두드리곤 한다
칠순에 돌아가셨던 외할머니는 이모를 엄니라 부르고

밥상을 물리자마자 밥을 안 준다고 서럽게 우셨다

한밤중에 밭을 매러 가시고 몸통에서 나온 똥을 이 통 저 통에 숨기곤 하셨다
오독이 문맥에 이르러 정독과 통한다 통독이리라

★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막고 품다  /  정끝별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오리엔트 금장손목시계  / 정끝별

11시 39분 28초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지 오래인 아버지가
큰오빠 부축에 기별 없이 들이닥치셨는데
자고 갈란다, 막내딸 출가 십오년에 처음 일이었는데
숟가락 하나 더 놓은 저녁상을 달게 물리시고는
사진 한 장 찍어둬라, 양품에 손녀딸 안으셨는데
백세주 한병에 겨우신 듯 잠자리에 드셨는데
해소 천식에 밤새 누우셨다 앉으셨다
보타진 뒷목줄기를 어둠에 꺾어 묻고 하셨는데
무량타 한 장 더 찍어둬라, 아침을 드시고는
손녀딸 인사에 자욱이 말씀 잇지 못하셨는데

아버지가 11시 39분 28초를 풀어놓고 가셨다
막내오빠가 첫월급 기념으로 사드렸던
이제는 아침이 되어도 해가 뜨지 않는
오래된 오리엔트의 시계(視界)
하루 두번 11시 39분 28초를 밥먹듯 돌았던
오매불망 오리엔트의 금도금
그냥 둬라, 방향 잃고 두루 두절된
아버지의 고장난 유산
한밤이면 들이닥치는 천식의 유전
사진 속 아버지는 11시 39분 28초중이시다

★걷는다  /  정끝별

이급 시각장애 아버지 이온엽(48) 씨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 이기독(20) 군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걷는다
넘어질 때면 무거운 머리부터 넘어지곤 하는 아들을
너펄너펄 걷게 하는 건
등뒤에서 아버지가 붙잡고 있는 끈이다
새벽 우유배달하는 아버지는 새벽이라서 어둡고
지하방에 누워 있는 아들을 씻기고 먹이는 아버지는
지하라서 어둡지만
담벼락 밑 낮은 패랭이는 알고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끈에 묶여 걷는 까닭
아들이 툭툭 패랭이꽃을 더욱 멍들게 하는 까닭
아버지 신발 뒤축이 담벼락 쪽으로 닳아가는 까닭
걷는 게 온통 업(業)이고
걷는 게 기독(基督)이라는 걸
뱃속을 나와서도 끊지 못하는
질긴 탯줄이라는 걸
업이 기독을 앞세우고 걷는다
넘어진 꽃이 눈먼 뿌리를 뒤세우고 걷는다

★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남자  /  정끝별

남자의 직업은 배우였어 한때 잘나갔던 연기파 배우였지 그러던 어느날 남자가 희박해지기 시작했어 처음에 카메라맨은 렌즈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했어 렌즈를 닦고 닦았지만 남자는 점점 흐릿해져갔어 그제서야 카메라맨은 그 남자가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 "자네는 요즘, 촛점을 잃어가고 있어" 감독도 자기 눈을 의심했어 하지만 금세 사태를 파악했어 "이보게, 자넨 휴식이 필요해, 자네가 선명해질 수 있는지 지켜보자구" 애인도 자꾸만 혼잣말을 시작했어 "어쩌나 당신, 텅텅 비었네" 더욱 희미해진 남자는 집으로 퇴각했어 집에서도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어 아내는 짜증스럽게 투정했어 "인기척 좀 하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이들도 놀라서 외쳤어 "아빠, 온통 바랬잖아!"
누구와도 대화해본 적 없던 남자
제 목소리를 내본 적 없던 남자
한번도 제 안을 들여다본 적 없던 남자
이 가엾은 영화 속 주인공이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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