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 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가을 / 김현승(1913-1975) 호 茶兄 .광주.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시선집> 관동출판사.1974년
가을 / 릴케(1875-1926)
나뭇잎이 떨어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듯
저기 아득한 곳에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마다 무거운 대지다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내는 어느 한 분이 있다
가을 /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가을 / 문인수
여러 번 붉게 큰물 지고 나서
어느 날은 차디차게 발목에 감기는
가을
하늘에다가는 달게 감홍시 하나 남겨 놓듯이
누군가는 또 한나절 땅에다가는
그러나 그랬달 것도 없이
어느 날은 넌지시 징검다리 놓이는
가을 / 백남석 작사. 현제명 작곡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같구나
추운 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가을 /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긋이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별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부치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가을 / 양주동(1903-1977) 호는 无涯 개성출생. 와세대 영문과졸.
가 없는 빈들에 사람을 보내고
말없이 돌아서 한숨 지우는
젊으나 젊은 아낙네와 같이
가을은 애처러이 돌아옵니다
애타는 가슴을 풀 곳이 없어
옛뜰의 나무들 더위잡고서
차디찬 달 아래 목놓아 울 때에
나뭇잎은 누런 옷 입고 조상합니다
드높은 하늘에 구름은 개어
간 님의 해맑은 눈자위 같으나
수확이 끝난 거칠은 들에는
옛님의 자취 아득도 합니다
머나먼 생각에 꿈 못 이루는
밤은 깊어서 밤은 깊어서
창 밑에 귀뚜라미 섧이 웁니다
가을의 아낙네여, 외로운 이여 ...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1932년
가을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가을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거
가을은 구름 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가을 / 조병화(1921- ) 경기도 안성.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 뜻대로 가을은 이루어져갑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가을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실로 많은 것들이 끝을 지어갑니다
대지에선 동식물들이 그 번식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그 열매들이 남아갑니다
하늘에선 태양과 구름이 그 가뭄과 홍수를 거둬 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다시, 빈 천지가 마련되어 갑니다
사람에선 사랑과 미움이 그 스스로의 맺음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고독한 혼자들이 남아갑니다
그 열매들을 당신 뜻대로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가득찬 빈 천지에 새 봄을 마련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고독한 혼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맑게 닦아내 주십시오
흐린 점 하나 없이 맑게 닦아 내 주십시오
당신의 입김으로
티 하나 없이 맑게 닦아 내 주십시오
도시에선 되도록이면 담가로
돌아다니겠습니다
전원에선 물가로 둑으로 산록山麓으로
되도록이면 잡목림, 잡초 속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밤에는 별에서 쉬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새로운 별을 찾아
좀 떨어진 곳에서 쉬겠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든 거 다, 당신 뜻대로 살펴 제자리 가려두고
지닌 거 하나 없이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수고는
봄으로 해 주십시오
눈을 다시 돌려 드릴 때
수고의 말씀
봄에 받겠습니다
<내일 어느 자리에서> 춘조사. 1965년
가을 / 토마스 흄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ㅡ
밖으로 나왔더니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은 건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가장자리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Thomas Hulme(1883-1917) 영국
가을걷이 / 문인수
달구지
타고 갈 때
나락단 거두러 갈 때
막바리 그득 싣고 돌아올 때
첨벙첨벙 물로 건너는
건너다가 슬며시 물 마시는
소
기다렸다가 또 한 칸
한 칸
징검다리 건너는
물잠자리
뒤에 뒤에
아버지
가을날 /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여기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때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누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여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가을날 / 릴케(1875-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날 / 서거정(1420-1488)
띳집은 대숲 길로 이어져 있고
가을 햇살 맑고 곱게 빛나네
열매가 익어서 가지는 늘어지고
마지막 남은 덩굴에는 오이도 드무네
여전히 벌은 날개짓 그치지 않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졸고 있네
참으로 몸과 마음 고요하구나
물러나 살자던 꿈 이루어졌네
가을날 / 손동연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ㅡ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주고 있었다
가을 넥타이 / 김현승
볕은
耳順하고
이삭들
바람이 익는다
아침 저녁
살갗에 묻는
요즈막의 향깃한 차거움 ...
四十은 아직도 溫血動物인데
오늘은
먼 하늘빛
넥타이 매어 볼까
가을 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가을 달 / 장옥관(1955 - ) 구미
납작 마당에 엎디어 불볕을 견딘 채송화
꽃따지 키 낮은 꽃들
떠밀리고 떠밀려 어스름 속 수제비국을
받아들면 거기,
국물 속에 떠오르는 또 하나 감자알
감자는 자주 목이 메이지. 단칸 셋방 옹기종기 모여앉은 식구들
누군가의 발길질에 끓던 국솥이 뒤집어지고, 생각의 어둠이
대문 안으로 밀려들고, 아이들은 소리치며 골목으로 내달아친다
국은 기름때의 세월은 진 냄비처럼 마당에 굴러 떨어져 이윽고 여름이 지나는 것이다
늙은 어머니는 화단의 봉숭아를 뜯어 달아나려는 열 손가락을
칭칭 붙들어매고, 식은 국물 속 죽은 귀뚜라미를 남몰래 건져 내고,
마루까지 몰려온 어둠을 천천히 쓸어 내린다
.....
아이들이 벗은 무르팍
딱딱한 피딱지를 떼어내면 묵은 상처 속
봉숭아 손톱같은 달은 다시 차오르고
가을 맑은 날 / 나태주
햇빛 맑고 바람 고와서
마음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벼 벤 그루터기 새로 돋아나는
움벼를 보며
들머리밭 김장배추 청무 이파리
길을 따라서
가다가 가다가
단풍의 골짜기
겨우겨우 찾아낸
감나무골
사람들 버리고 떠난 집
담장 너머 꽃을 피운 달리아
더러는 맨드라미
마음아, 너무 오래 떠돌지 말고
날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려문
가을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 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가을밤 / 이 기철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 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만지며
내가 까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 땐 머리 위에 일찍 뜬 별이 돋고 먼 산 오리나무 숲 속에선
비둘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실어 나르느라 발톱이 찢겨진 소, 거친 풀, 센 여물에도
좋아라 다가서던
어둠 속에서 툭툭 땅을 차고 일어서서 센 혓바닥으로
송아지를 핥을 때마다 혀의 힘에 못 이겨 비틀거리던
송아지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일하는 소를, 일하다가 발톱이 찢겨진 소를 사랑한다
이미 단풍나무 끝에 가볍고 파아란 집을 매달고 겨울잠에 들어간
가을 벌레를 나는 사랑한다
그 집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따뜻한가
수염을 곧추세우고 햇빛을 즐기며 풀숲을 누비던
여치와 버마제비들
섬돌의 이른 잠을 깨우며 서릿밤을 울던
귀뚜라미를 나는 사랑한다
생각하면 나는 화려한 것의 반대켠에서 고요하고 적막한 것에 길들여져 왔다
쑥갓꽃 패랭이꽃 손톱꽃 앉은뱅이꽃,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밤의 나뭇잎 지는 소리
밤나무 뿌리를 적시며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세상이 가장 조그마해지고 따뜻해지는 가을밤을
불켜지 않아도 마음이 화안한 가을밤을 나는 사랑한다
이 기철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을 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을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 입니다
가을 새벽 / 권태응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어서 밤이 새라고, 닭들 꼬기오
고요한 새벽 하늘
울 리는 소리 ...
먼 길 손님 타라고, 기차 삐익삑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부지런한 타작꾼 기계 타알탈
가을아침 / 황동규
오래 살던 곳에서 떨어져내려
낮은 곳에 모여 추억 속에 머리 박고 살던 이파리들이
오늘 아침 銀옷들을 입고
저처럼 정신없이 빛나는구나
말라가는 신경의 참응ㄹ 수 없는 바스락거림 잠재우고
시간이 증발한 눈으로 시간석을 내다보자
방금 黃菊의 聲帶에서 굴러 나오는 목소리
저 황금 고리들, 태어나며 곧 사라지는
저 삶의 입술들!
가을 아침에 / 소월
아득한 퍼스레한 하늘 아래서
회색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섶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싸여 오는 모든 기억은
피 흘린 상처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 속이 가비얍던 날
그리운 그 한 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에 / 기형도
잎 진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 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물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가을에 /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에 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ㅡ이마와 가스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ㅡ 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은 또 한번 뒷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가을에 /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을에는 /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픔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은 눈眼의 계절 /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로 순수한 언어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 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가을의 기도 / 김현승(1913-197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 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1963년
가을의 노래 / Pierre Charles Baudelaire
1
이윽고 우리는 가라앉을 것이다. 차디찬 어두움 속으로
너무나도 짧은 우리의 여름날, 그 강렬한 밝음이여 안녕히!
불길스러운 충격을 전하며 안마당 돌 블록 위에
던져지고 있는 모닥불 타는 소리를 나는 벌써 듣는다
이윽고 겨울 그것이 내 존재에 돌아오리니, 분노와 증오와
전율과 공포와 강제된 쓰라린 노고
그리고 북극의 지축에 걸린 태양과 같이
나의 심장은 이제 언 붉은 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던져지며 떨어지는 장작더미 하나하나를 나는 떨면서 듣노니
세워진 단두대의 울음조차 이렇듯 둔탁하지 않다
나의 정신은 성문을 파괴하는 무거운 쇠망치를 얻어맞고
허물어지는 성탑과도 같아라
이 단조로운 충격에 내 몸은 흔들리어
어디선가 관에다 서둘러 못질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를 위하여? ㅡ 어제는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가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어디엔가 문밖에 나서기를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2
나는 사랑한다, 네 길다란 눈, 그 초록빛 띤 빛을
상냥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여, 이제 내게는 모든 것이 흥미없다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사랑도 침실도 또 난로도
해변에 빛나는 태양보다 낫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상냥스러운 사람이여! 역시 나를 사랑해 주오
비록 내가 은혜를 모르는 자요, 심술쟁이라도 내 어머니가 되어다오
연인이면서 누이동생이기도 한 사람이여, 비록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하더라도
석양의 상냥스러움, 빛나는 가을의 상냥스러움이 되어다오
얼마 남지 않은 노력! 무덤이 기다리고 있나니, 탐욕스러운 무덤이다!
아아! 당신의 무릎에 이마를 기댄 채 나로 하여금
한껏 잠기게 해다오 백열의 여름을 그리워하며
만추의 날 그 상냥스러운 황색 광선 속에서!
Pierre Charles Baudelaire(1821-1867) 프랑스 파리
가을의 시 - / 연화리 시편26 곽재구
오후 내내
나룻배를 타고
강기슭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당신이 너무 좋아하는 칡꽃 송이들이
푸른 강기슭을 따라 한없이 피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젖은 꿈처럼 수면 위에 잠기고
수면 위에 내려온 칡꽃들이
수심 한가운데서
부끄러운 옷을 벗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가고
지천으로 흩날리는 꽃향기 속에서
내 작은 나룻배는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 1999년
가을의 시 /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汽笛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가을의 시 / 장석주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잖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며
이루어지는 멸망과 죽음들이
왜 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시와 사상>2008년 가을호
가을의 유혹 /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르친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무른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이며
적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 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낙엽 모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로 나는 사람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 다시 오는 것이다
가을의 향기 / 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
산 위에 마른 풀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가을이 가는구나 / 김용택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빛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 산에 기댄
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가을이 아름다운 건 / 이해인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 여름 헤매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 익어갈 때
몇 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
뒹구는 낙엽이여
아,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리의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다은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라
가을 저녁 / 김현승
긴 돌담 밑에
땅거미 지는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로 그리는 무거운 가을 저녁
짙은 크레파스의 가을 저녁
기적은 서울의 가장자리에서
멀리 기러기같이 울고
겹친 공휴일을 반기며
먼 곳 고향들을 찾아 가는
오랜 풍속의 가을 저녁
사는 것은 곧 즐거움인 가을 저녁
눈들은 보름달을 보듯 맑아 가고
말들은 꽃잎보다 무거운 열매를 다는
호올로 포키트에 손을 넣고 걸어가도
외로움조차 속내의처럼 따뜻해 오는
가을 저녁
술에 절반
무등차에 절반
취하여 달을 안고
돌아가는 가을 저녁 ㅡ
흔들리는 뻐스 안에서
그러나 가을은 여름보다 무겁다!
시간의 잎새들이 떨어지는
내 어깨의 제목 위에선 ....
가을저녁에 / 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다는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거가 버리는가보다
가을 지붕 / 권태응
사다리를 타고서 한층 두층
언니 따라 지붕에 올라갑니다
박덩이 뒹굴대는 한옆에다
빨강 고추 흰 박고지 널어 놓아요
집집마다 지붕에도 울긋불긋
여기저기 그림같이 아름다워요
내려갈 줄 모르고 나는 자꾸만
멀리 멀리 사방 경치 바라봅니다
가을볕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 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내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가을편지 / ???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 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워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가을하늘1 / 정완영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제비들이 날아갑니다
가을 하늘 푸른 건반을 두드리며 날아갑니다
하늘엔 음악이 흐르고, 흰 구름이 흘러갑니다
가을 하늘2 / 정완영
요즘 하늘빛은 하루 한 길씩 높아가요
저러다 넘칠 것 같아요 무너질 것 같아요
구름도 따라가다가 지쳐 눕고 말아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낙엽이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남겨진 가을 / 이재무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이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늦가을 / 김사인
그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앉아
그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시집<가만히 좋아하는> 창비.2006년
늦가을 / 이덕무(1741-1793)
작은 서재에 찾아온 가을날이 너무도 맑아
손으로 갈포 두건 바로잡고 물소리를 듣네
책상에 시편 있고 울타리엔 국화 피었으니
사람들은 이 그윽한 멋을 도연명 같다 말하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 유득공.이서구와 함께 <건연집>이라는 시집을 냈다
서자로 태어나다
늦가을의 산책 / 헤세
가을비가 회색 숲에 흩뿌리고
아침바람에 골짜기는 추워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툭툭 떨어져
입을 벌리고 촉촉히 젖어 갈색을 띄고 웃는다
내 인생에도 가을이 찾아와
바람은 찢어져 나간 나뭇잎을 딩굴게 하고
가지마다 흔들어 댄다. 열매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사랑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미움이엇다
바람은 나의 앙상한 가지를 쥐어 뜯는다
나는 바람을 비웃고 폭풍을 견디어 본다
나에게 있어서 열매란 무엇인가?
목표란 무엇이란 말인가!
피어나려 했었고, 그것이 나의 목표다
그런데 나는 시들어 가고
시드는 것이 목표이며 그 외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는 목표는 순간적인 것이다
신은 내 안에 살고 내 안에서 죽고
내 가슴 속에서 괴로워 한다 이것이 내 목표로 충분하다
제대로 가는 길이든 헤매는 길이든 만발한 꽃이든 열매이든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이름에 불과하다
아침 바람에 골짜기가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
힘있게 환하게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들국화 / 노천명
들녘 비탈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틈에서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칠은 들녘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아름 고히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 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거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잎 두잎 병들어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도
들녘의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칠은 들녘 정든 흙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이 이제
시들고 마른 너를 다시 안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 주러 나왔다
들국화여!
저기 너의 푸른 천정이 있다
여기 너의 포근한 갈꽃 방석이 있다
들국화 / 천상병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순간이...
晩秋 / 이 용악
노오란 은행잎 하나
호리호리 돌아 호수에 떨어져
소리 없이 湖面을 미끄러진다
또 하나 ㅡ
조이삭을 줍던 시름은
요즈음 낙엽 모으기에 더욱더
해마알개졌고
하늘
하늘을 쳐다보는 늙은이 뇌리에는
얼어죽은 친지 그 그리운 모습이
또렷하게 피어오른다고
길다란 담뱃대의 뽕잎 연기를
하소에 돌린다
돌개바람이 멀지 않아
어린 것들이
털 고운 토끼 껍질을 벗겨
귀걸개를 준비할 때
기름진 밭고랑을 가져 못 본
부락민 사이엔
지난해처럼 또 또 그 전해처럼
소름 끼친 대화가 오도도오 떤다
이 용악
봉선화 / 김형준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김형준 시. 홍난파 작곡. 1920년 발표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 / 임태주
가을해가 풀썩 떨어집니다
꽃살 무늬 방문이 해 그림자에 갇힙니다
몇 줄 편지를 쓰다 지우고 여자는
돌아앉아 다시 뜨게질을 합니다
담장 기와 위에 핀 바위솔꽃이
설핏설핏 여자의 눈을 밟고 지나갑니다
뒤란의 머위잎 몇 장을 오래 앉아 뜯습니다
희미한 초생달이 돋습니다
봉숭아 꽃물이 남아있는 손톱끝에서
詩는 사랑하는 일보다 더 외로운 일이라는데...
억새를 흔들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여자는 잔별들 사이로 등을 꽂습니다
가지런히 빗질을 하고
일생의 거울 속에서 여자는
그림자로 남아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씁니다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지웁니다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억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조용한 일 / 김 사인
이도 저도 마땅히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추일서정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러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 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래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0년 7월 인문평론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 채호기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넌다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숫대가 있고
누렁빛 들판에는 풍성한 예감이 있다
먼 데 산이 선명하다
형은 펌프 옆에서 양말을 빨고
하, 참 이 가을엔
햇빛이 뼛속까지 보이는구나
향수 / 박세영(1902 - ) 호 白河. 함북 출생.
아 - 그립구나 내 고향,
익은 들이 물결치는 가을
누르런 들과 새파란 하늘을 볼 땐
생각키느니 내 고향
산골짜기엔 약수
마을 앞엔 푸른 강
강엔 배 띄우고 고기 잡던 옛시절
내 고향은 이리도 아름다워라
산 없는 이곳에서
물 흐린 이 땅에서
흘러 다니는 나그네 몸이 외롭구나
지금은 추석달, 끝없는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저 달
북만北滿의 들개 짖는 소리에 마음만 소란쿠나
고향의 하늘을 날으는 새, 땅에 기는 짐승들도
지금은 따스한 제 집에서 단꿈을 꾸련만
팔려 간 노예와 같이
풍겨난 새와 같이 이 몸은 서럽구나
고추를 널어 새빨간 지붕
파란 박은 實貨같이 넝쿨에 달리고
방아 소리 쿵쿵 울릴 때
이 가을, 이 추석을 맞는 이
아 - 고향에 몇이나 되노
가라는 이 없건만 아니 나오면 왜 못살며
들은 익어 누르른데 배를 곯리지 않으면 왜 못살더란 말인가?
사랑하는 연인과 결별하듯이
내 고향 떠난 지도 이미 십년
그야 이 내 몸뿐이랴
마을의 처녀들도 눈물지고 떠나들 갔으며
마을의 장정들도 고향을 원망하고 달아났다
그리운 고향은 야속도 하구나
수수이삭에 걸린 추석달
잠든 호숫가에 거니는 기러기
지금은 그 멀리 들릴거라 다듬이 소리
아 - 그립고나 이 내 고향!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년
홀로 남기 / 프로스트
예전에 어디에서 들은 적 있었던가?
바람이 이토록 사납게 바뀌는 것을
닫히지 않으려는 문 열린 채 쥐어잡고
저 언덕 너머 해안의 물거품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바람은 도대체 무어라 여길까?
여름이 지나고 오늘 하루도 지나 이제
어둔 구름이 서쪽 하늘에 모인다
저기 쳐진 현관 마루
회오리바람에 요란하게 올라온 나뭇잎들이
내 무릎을 부딪히려다가 스쳐갔다
그 소리 속의 불길한 무엇이
내게 비밀을 밝히라고 알려준다
내가 집에 혼자 있다는 소문이
밖에서 나돌았나 보다
내 일생 동안 외로웠다는 소문이
이제 내게 남은 것은 神밖에 없다는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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