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관한 시모음 



가을은        /眞如 홍은자


바다같이 넓게 열린 가슴
유리알처럼 투명해진
마음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마주친 낯선 사람에게도
따스한 미소 건네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스며든 한 점 바람에도
가슴이 휑하니 비어 가고
괜스레 눈물이 그렁거려
접어 두었던 옛사랑의 기억이
단풍처럼 타오르고 그 흔들림에
가슴이 부서져 내리면 가을이고,


하얗게 잠 못 드는 밤
쓸쓸한 귀뚜라미 울음이
그리움의 송가처럼 가슴에 와 닿고
이유 없는 한숨이 새어나와
절로 읊조린 싯귀 한 구절에
가슴이 시려오면 가을이다 .


가을이라는 두 글자에
그리움을 섞어 태우면
붉은 빛 낙엽 타는 냄새가 난다
떠나갈 가을도, 돌아올 가을도
그리 오래 머물지도 못하면서
가을은, 가을 속에서 만 가을을 탄다.




가을 길목      /박인걸


이글이글 타던 햇빛도
선들바람 앞에 한 풀 꺾이고
늦바람난 고추잠자리
신바람 난 듯 하늘을 난다.


한 여름 찜통더위
풋 사과 벌겋게 익고
늦둥이 대추 열매도
오동통 살이 올랐다.


비탈 밭 옥수수
푸른 제복 빛이 바랬고
막대타고 오른 줄 콩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풀 섶에 앉은 여름
서늘바람이 길을 재촉하니
가을은 나뭇가지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가을이 오면       /손병흥


추억이 무르익어가는 갈대와 단풍들이
바야흐로 소소한 일상 속 정취 풍기는
불어오는 가을바람 스쳐가는 길가에서
외로움 달래보는 활짝 피어난 코스모스
또 하나의 풍경 담아내고 싶은 이 가을

만산홍엽 굽이쳐 내린 산야 들판 풀 바람
아련한 배경화면이 되어버린 유년의 추억들
무르익은 채로 깊어만 가는 풍성한 가을풍경
아름다운 상념 되어 물들게 하는 가을나들이

유난히 맑아서 고운 높은 채 푸른 가을 하늘처럼
날이 갈수록 아련한 기억마저도 떠올릴 겨를 없이
마냥 삶에 부대껴 앞만 보고 살아나왔던 세월 따라
숨어 우는 바람 긴 겨울이 다가오기 전 사색 즐기며
알록달록 크고 작은 외로움 추억들 멀리 날려 보고픈
오래도록 마음 허전 쓸쓸 해지는 별빛 그리운 이 계절





깊어가는 가을에2     /박준희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음에
행복합니다


그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그대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
향기로운 모습 속
고운 마음에 포오옥 빠져봅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고
함께 걷는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대
참으로
예뻐요
아름다워요
사랑스러워요


저녁노을처럼
붉게 붉게 불타는
곱디고운 그대와 함께한 이 시간
감사한 맘 가득 행복해 봅니다.




가을이 익어간다     /김민지


금오산 끝자락에 가을이 익어간다
케이블카에 올라 아래로 내려다보니
드문드문 들리는 계곡의 물소리가
가을의 운율에 맞추어 즐거이 노래한다


아직 채 푸른색이 가시지도 않은
은행잎 사이로 먼저 여문 은행들이
가을비의 무게에 눌려 떨어져
아스팔트 위에 납작 엎드렸다


산등성이 푸른 신록들은 구름이 걷어내고
울긋불긋 가을옷을 입혀줄 요량인가 보다
가을은 우리가 눈치챌 사이도 없이
슬며시 익어가고 있다




가을 향기        /정연화

낮동안 내리쬐는 햇볕이
아직은 뜨거워서
손가리개를 하지만

극성이던 더위는
어느 새 한 풀 꺾였고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속에는
가을 향기가 묻어납니다

나뭇잎의 살랑거림도
철이 든 듯 온화해졌으며
하늘의 뭉게구름도
왠지 가을스러움을 주는군요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가을 향기 그대를
맞이할 꿈에
여심은 벌써
설레이는 마음이 되어
그렇게 가을속에 서 있습니다





가을길        /정윤목


여인, 가을 따라가네
반기려듯 노래하는
까치 소리조차 없어도

철새, 하늘길 떠나가네
잘 가라고 손 흔들어
서운해 하는 이 없어도





가을손님        /장수남


코스모스 들길 손님
오셨네.
희야 가을 소식
바람 타고 모래성 너머
아빠 얼굴 보고 싶어
푸른 하늘 은빛 낯 달
가을 손님 오셨네.


해바라기 먼 산 손님
오셨네.
희야 가을 편지
푸른 바다 수평선 너머
아빠 얼굴 보고 싶어
깊은 하늘 금빛 햇살
가을 손님 오셨네.


그리운 님 찾아 먼 길
오셨네.
아빠 가을바람
들국화 향 흩날리며
희야 얼굴 보고 싶어
홍해바다 먼 파도 타고
가을 손님 오셨네.




가을이 오려 한다     /정찬열


가을이 오려 한다
그토록 기를 쓰고 울어대든
매미 소리도 목이 졸려 울고
화답하는 귀뚜라미 우는소리
희미한 노랫소리 나를 깨운다.


그토록 무덥던 날에
절기가 입추를 넘어서니
한 점 바람도 살랑거리며
새벽바람 끌려와 창문을 노크한다.


짙푸른 나뭇잎도
무덥던 한여름이 좋았다며
봄을 알린 벚나무 노란 옷을 걸치며
나른한 기지개를 켜고 서 있다.


어디선가 바람 따라
하늘을 배회하는 고추잠자리
북쪽 창을 기웃대던 아침 햇살도
서슬 바람에 등 떠밀려 서성이는 계절




가을에 더 깊숙이       /김관호


시원한 바람
서둘러 지나치려다 불쑥
던져놓은 명제


늘 웃어보자
서로 몸을 부대끼는 풀잎
열띤 논쟁


힘찬 폭포수
바쁘게 흘러가려다 언뜻
내려놓은 주제


늘 함께하자
꼬리를 무는 파문


손에 잡힐 듯한
가을 걸음에
은연중 꿈꾸는 이웃사랑……




가을의 법칙       /박종영


하늬바람이 분별없이 서늘하다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가을바람이 옷섶을 후빈다
허리 긴 국화가 피어나고
수줍어 숨어 피는 들꽃들의 웃음이
간드러지게 들려오는,
청명한 구름 속으로 소리의 물결이 높게 걸려있다
가을에 접어들면,
외로운 낙엽이 스스로 소멸하는
슬픈 가락이 거리에 놔 뒹굴고
자연의 힘으로 역류하는
나약한 나무들의 방황이 하루를 저물게 한다
어느 하늘 높은 날은 잎지는 소리에 슬프고
어느 선선한 날은 납작 엎드린
풀꽃의 웃음으로 소중한 가을,
이토록 무한한 가을에 접어들어
활개 치는 산천 경계가 무모하게 한 눈을 팔게 하는 것은
살아 남은 자의 행운이려니,
그래서 밝은 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지금의 즐거움이 크다.




가을 끝자락        /기영석


바람이 심술을 부려
곱게 물든 나뭇잎은
한 잎 두 잎 뚝뚝 떨어지고


한 생을 잘 보냈다고
길 위를 뒹굴고 무참히 밟혀도
아파하지도 울지도 않는다


길 섶의 억새란 놈은
갈대와 함께 바람 장단에
이리저리 흥에 겨워 춤을 추고


강 건너 사림봉엔
색깔 흐린 단풍으로 채색되고
강물은 가을을 띠워 보낸다




가을 나들이     /현곡 곽종철


누가 가을을 슬픈 계절이라 했나.
아름다운 들꽃이 나를 반기는데
노랗게 익어가는 벼이삭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네.


하얗게 피어오른 갈대꽃,
춤사위도 예사롭지 않네.
벌 나비가 지나간들 잡지도 않네.
강물도 바람을 만나 너울로 다가 와
쓸쓸한 내 마음을 씻어 주는구나.


강물에 떠있는 청둥오리 한 쌍,
내 젊은 시절을 그립게 하는구나.
물들어가는 산도들도 뒷전이네.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너가
가을을 즐기는데 하루해가 짧구나.




추억의 가을 길을 걸으며    /김명숙


새 옷을 갈아입은 가을 길
여러 가지 색깔들로 아름답게
채색되어 가는 가을


가을빛에 익어 가는
오곡백과를 보며 여유로운
길 따라 행복한 웃음을 지어본다.


저 맑은 가을 하늘 아래
고추잠자리 춤추며 나르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


수줍은 미소로 반겨주는
코스모스 유혹에 빠지며


더욱더 깊어 가는
가을의 향기를
마음에 담아 노래하며


그 여름의 추억이 스치고
그리움이 서린 하얀
이슬방울 풀잎에 내려


영롱하게 빛나는 숲길에
선선한 바람 불어와
가을의 향기는 더욱더
깊어져만 간다.




갈바람 빛 가을      /初月 윤갑수

파란 하늘을 닮았나.
얼비친 에메랄드 빛 금강엔
잔물결들이 사르르 바람타고
굽이굽이 진 세상을 훑는다.

헐렁한 눈빛에 밟힌 계절
허기짐을 유혹하는 욕망의
불꽃은 가슴에서 펄럭이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가을빛이 슬금슬금 물든다.

눈부신 햇살이 지나간 자리
들녘엔 허수아비만이 갈바람
타고 살랑인다.





가을 들녘       /이원문


덥다 하는 그 여름의 약속인가
뜸북새의 고향 참새 떼 날아들고
수수밭 옆 멀리 황금 물결 이룬다
봄부터 저 들녘이 있기까지
보람의 황금 들녘 가을 하늘 더 높아라
여기 저기 새 쫓는 소리 허수아비의 잠 깨운다


가을 바람에 참새 떼의 즐거운 들
아이들 나뉘어 메뚜기 따라 뛰는 들
길목 한곳 코스모스 가냘피한들대나
벼베기 끝나 바닥 들어나면 어쩌나
메아리에 실리던 작년의 궁굴통 소리
그때 처럼 그렇게 가느란히 들리겠지

 

 

낙엽 / 정호승

내 가는 길을 묻지 마세요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지 마세요

가을이 가고 또 가을이 가면

언젠가는 그대 실뿌리 곁에

살며시 살며시 누워 있겠어요

- 정호승,『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열림원, 2002)

낙엽 / 정현종

사람들 발길이 낸

길을 덮은 낙엽이여

의도한 듯이

길들을 지운 낙엽이여

길을 잘 보여주는구나

마침내 네가 길이로구나

- 정현종,『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문학과지성사, 2018)

낙엽 / 도종환

헤어지자

상처 한 줄 네 가슴 긋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자

수없이 헤어지자

네 몸에 남았던 내 몸의 흔적

고요히 되가져가자

허공에 찍었던 발자국 가져가는 새처럼

강물에 담았던 그림자 가져가는 달빛처럼

흔적 없이 헤어지자

오늘 또다시 떠나는 수천의 낙엽

낙엽

- 도종환,『흔들리며 피는 꽃』(문학동네, 1994)

낙엽 한 장 / 오봉옥

배낭에 따라붙은 낙엽 한 장

그냥 떼어버릴 일 아니다

그 나무의 전생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죽어가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

손을 내밀어보는 이유가

필시 또 있었을 것이니

- 오봉옥,『섯!』(천년의시작, 2018)

놀라워라 / 박남준

낙엽 하나 땅에 떨어졌다

어떤 나비의 애벌레에게 몸을 내주었나

삭은 뼈처럼 드러난 잎맥들 방울방울

이슬을 매달아 햇빛을 굴린다

그 모습 열반한 선승의 사리 아닌가 생각하는데

몸의 어느 구석에 생기가 남아 있었던가

가을볕에 뒤척이다 발끝부터 토르르-륵

동그랗게 말았다 번데기 같다

가지에서 떨어져 허공을 부유하다

나비를 꿈꾸었는가

놀라워라 저 낙엽

- 박남준,『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2010)

노란 잎 / 도종환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 도종환, 『사월 바다』(창비, 2016)

낙엽 밟았다는 사건 / 복효근

밟히는 순간 아득히

부서지는 낙엽들의 소리

내가 걸음을 갑자기 멈춘 것은,

오후 약속을 잊은 것은 그 소리 탓이었다

그녀는 기다리다 떠나갔고

나는 언덕에서 네 시 기차가 떠나는 소리를 듣는다

- 한 생生이 낙엽 부서지는 소리로 바뀔 수 있다니

또 발밑에선 낙엽이 부서지고

먼 곳에선 새가 난다

누군가 또 약속을 잊고

누군가 또 기차를 바꿔 타나보다

낙엽 소리에

먼 하늘 별이 돋는다

- 복효근,『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달아실출판사, 2017)

11월의 낙엽 / 최영미

가을비에 젖은 아스팔트.

돌아보면,

떨어질 잎이 하나 남아 있었나.

천둥에 떨고 번개에 갈라진 잎사귀.

심심한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되어주고

종이보다 가벼운 몸으로

더러운 뒷골목을 지키던 너.

허술한 나뭇가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의 운명에 순종했던,

상처투성이의 몸에 햇살이 닿으면

촘촘한 세월의 무늬가 드러나지만,

이대로 세차게 흔들리다

누군가의 가슴바닥에

훅, 떨어졌으면……

첫눈이 내려 무거운 눈을 매달고

허공에서 부서지기 전에,

순한 흙에 덮여 잠들었으면……

낙엽의 비문(碑文)을 읽을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최영미,『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 2009)

낙엽 / 이재무

시를 지망하는 학생이 보내온

시 한 편이 나를 울린다

세 행 짜리 짧은 시가 오늘 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한 가지에 나서 자라는 동안

만나지 못하더니 낙엽 되어 비로소

바닥에 한몸으로 포개져 있다"

그렇구나 우리 지척에 살면서도

전화로만 안부 챙기고 만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부음이 오고 경황 중에 달려가서야

만나는구나 잠시잠깐 쓸쓸히 그렇게 만나는구나

죽음만이 떨어져 멀어진 얼굴들 불러모으는구나

- 이재무,『푸른 고집』(천년의시작, 2004)

밝은 낙엽 / 황동규

그래, 젊음 뒤로 늙음이 오지 않고

밝은 낙엽들이 왔다.

샤워하고 욕조를 나오다

몸의 동체(胴體)를 일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숨 한번 크게 쉬었다. 늙음을 제대로 맞으려면

착지법(着地法)을 제대로 익혔어야?

그래, 기(氣)부터 채우자!

가을바람 기차게 부는 날

용의 등뼈 능선 사자산을 찾아 나선 길

긴 굽이 하나 돌자 얇은 반달 하나 하늘에 박혀 있고

나무들이 빨강 노랑 갈색 깃들을 날리는 마른 개울가엔

누군가 돌부처로 새기려 드는 걸 온몸으로 막은 듯

목과 허리에 깊은 상처 받은 바위 하나 서서

품으로 날아드는 색깔들을 밝은 흐름으로 만들고 있다.

어떤 나무의 분신이면 어떤가,

착지, 착지, 땅이 재촉하는데?

밝음 하나를 공중에서 낚아챈다. 바람결에 놓친다.

착지, 착지, 땅이 재촉하는데

밝은 몸 한 장

땅 어느 구석에 슬며시 내려앉지 않고

뒤집혔다 바로잡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구나.

-『창작과 비평』142호(200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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