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시 모음 35편

《1》
첫눈   /강은교

첫눈이 내린다
흙에 닿으면 흙으로
눈물로 닿으면 눈물로
내리는 족족 녹으며
자꾸 내린다

웬 슬픔들 여기엔 이리도 많은지
동구 밖 넓은 길 훠이훠이 떠돌다가
더는 몸 비빌 곳 없어
찾아오신 넋들

구름 위에서 구름이 부서진다
바람 앞에서 바람이 부서진다

《2》
첫눈 오는 날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3》
첫눈 온 날이면  / 권경업

첫눈이 오고
해맑은 순이의 눈처럼
아침이 밝아
뽀득뽀득 뽀드득
사박 뽀드득
수줍음으로 내딛는 백두대간의 첫 발자국
파르르 가슴 떨리는
열여덟 순이가
처음 밟아 보는
그리움의 소리

4. 첫눈  /  김경미

마침내 그대편지가 오고 천천히 밖으로 나선다
하늘이 낮고 흐리고 어둑하니 자꾸 뒤돌아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 대로 다했고 무엇을 못했을까
뱀의 머리 위를 지나듯 살라 했건만

낙엽 밟듯 살아왔을까
선한 눈빛이 가장 깊은 것인 줄 이제야 알겠거니
너무 많이 화를 내거나 울어왔던가
생각할수록 시간이여 미안하다 미안하다는데

창 밖으로 문득 첫눈 쏟아지네
희디흰 형광가루들 순간 점등되는 지상
낮고 흐린 하늘이 떨어지면서 저리 환한 눈송이
되는 이치를 아무래도 그대와 걸으며 생각하노라면

첫눈 밟듯 살다보면
삶은 거저 내준 게 처음부터
너무 많았다고 따뜻한 눈물 글썽여지리라

《5》
첫눈  / 김남주

첫눈이 내리는 날은
빈들에
첫눈이 내리는 날은
캄캄한 밤도 하얘지고
밤길을 걷는 내 어두운 마음도 하얘지고
눈처럼 하얘지고
소리 없이 내려 금세
고봉으로 쌓인 눈앞에서
눈의 순결 앞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시리도록 내 뼛속이
소름이 끼치도록 내 등골이

《6》
첫눈  / 김수목

깨어진 얼음덩이가
풍덩거리는 저수지 위를
얼음조각만 밟고

통통 뛰어 건너편 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고라니를 보았다

순간처럼,
빠르게 물수제비를 뜨듯,
가볍게 몸을 날려
저수지를 건넜던 것이다

저렇듯 가벼운 몸짓으로
내 마음속에 첫눈이 내린다

하늘의 공기방울을 밟으며
내 마음을 통통 가로질러 온다

《7》
첫눈  /김윤희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인 지 석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은 없지만
첫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만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8》
첫눈 생각  / 김재진

입김만으로도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기다리는 눈은 안 오고 손가락만 시린 밤
네 가슴속으로 내려가
너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나는
더 깊은 곳 어디라도 내려갈 수 있다.
종소리에 놀란 네가 잠에서 깨고
잠옷바람으로 언뜻 창 밖을 내다볼 때
첫눈 되어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색하며 기뻐하는 너를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쌓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
햇빛에 녹지 않는 응달이 되어
오래도록 네 눈길 끌었으면 좋겠다.

《9》
첫눈  / 문병란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사내들은 모두 예수가 되고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여자들은 모두 천사가 된다
여보게 우리도 이런 밤
소주 몇 잔 비우고 조금 취해
모닥불 가에 언 손 부비며
쓸쓸한 추억하나 만들어볼까
만원짜리 한 장에 꿈을 달래고
포실거리는 눈발에 맞춰
여보게 우리도 첫눈 밤 같은
사랑 하나 만들까
그립다
첫눈이 내리면 먼데 마을 하나 둘 등불 꺼지고
지금쯤 그리운 사람은
혼자서 외로이 잠이 드는데
창가에 기대어 먼데
여인의 발자국 소리 엿들어 볼까
이런 밤 우리도 고요히
손 모아 촛불 하나 지킬까

《10》
귀로 듣는 눈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 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11》
눈 내린 날의 첫 줄  / 문인수

비쩍 마른 검둥개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네 발바닥,
뜨고 닿는 동작이 순서대로 다닥다닥 바쁘다.

꽃 자국나는 바닥과 병 뚜껑 따는 것
같은 허공이 지금
일직선으로 길게 달라붙는 중이다.

브라더미싱.
어머니 재봉틀 소리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저 개, 방향을 꺾어 이번엔 또
가로로 자를 댄 듯
내 눈썹 위를 오래 긋는다.

지평선에도 박음질 자국이 만져질까,
나는 자꾸
멀쩡한 데를 공연히 스스로

봉하는 것 아니냐. 하긴,
상처 아닌 행로가 어디 있을까.

날지 못하는 흰 날개, 양쪽 경치는
그저 차디차다. 어딜 가나
벗어재낄 수 없는 틈바구니,

이것이 길이다. 나는 무심코
저 개를 한참 밀고 있구나.

이쪽저쪽 끌어다 붙여 마음이 모처럼
광활한 아침이다.
무수히 꿰맨 흉터,
여기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
개 한 마리가 첫 줄 타자처럼 새까맣게 지나간다.

《12》
첫눈 속의 그리운 님  /박윤자

첫눈의 반가움은
설레인 마음 달래주듯 소리 없이
다가와 앙상한 나뭇가지엔
첫눈으로 꽃 피우고
엄연히 높은 산 첫 눈으로
가득 안고 자연 열등의식을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네
님 계신 높은 산등선
높은 곳을 향해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첫눈 내린 이 순간
얼마나 고요하고 적막할까?
밤이 으슥한 이 시간
첫 눈 속에 님 향기가 여여하게
퍼져 온다.
소리 없이 님 모습 첫눈 속에
비춰질 때 밝은 미소로 님 모습
살며시 포용하네
무언의 침묵 속에 강하게
용솟음 치듯 첫눈은 마음의
심금을 울리고
첫눈은 소리 없이
소복소복 쌓여만 가네

《13》
첫눈  /박인걸

첫눈을 맞으며
마냥 좋아 날뛰던
그 시절 추억도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로
황혼이 내려앉아
찬바람에 뼈가 시린
수척한 나그네는
눈이 와도 감격이 없다.
가로등 언저리에
벌떼처럼 나는
순백의 눈발을 볼 때
그녀를 떠올리며
가슴 설레던
심장의 고동소리 대신
이제는 눈길을 걸으며
숨이 찰 뿐이다.

《14》
첫눈 내리는 날  /박재성

기다림이 있어서인가
바람 없는 골목에
눈부심으로 내리는 눈

손부끄러워
입 벌리고 맞았던 시절
한 송이 두 송이
긴 눈썹 위에 쌓이면
붉은 볼 위에서 망울지던 날

눈의 요정처럼
팔 벌려 하늘을 품고는
네게 열어둔 가슴 안으로
날아들던 열셋 순정

눈에 젖은 날개가 마르기 전에
가슴을 닫고 품었어야 할
첫사랑인데

순수함만큼이나 서툴렀던
풋사랑으로
날개 마르고 남은 물방울만
가슴에 남기고 날아갔지
또 눈 내리는 날에

눈을 들어서
내리는 눈 반기다
가슴에 남은 물방울이
눈으로 흐를 것 같은
하얀 날

《15》
첫눈  / 서정윤

보고싶은 마음보다 먼저
먼저 눈발이 날린다.

낙엽 모이던 금호강변 어디
지금쯤 그대는
내 속에 앉는다.

키 큰 미루나무 빈 가지에
올해 깬 까치가
자꾸만 설레이고
맨발로 달려오는 소식들
내 마음
먼저 반갑다.

그리운 마음 그 어디서
눈발 날려 부른다.

《16》
첫눈  /송선애

깻단 위에 눈이 내렸다
깨알같은 말이 쏟아졌다
첫눈 오는 날
약속이 유효하다고
새가 발자국을 남겼다
기억을 털어 낸 들판
전율의 틈으로
깨꽃 같은 소식이 다녀갔다

《17》
첫눈  / 송해월

고인 눈물까지도 모조리 퍼낼 듯한 바람
눈치 없이도 불어대더니 눈이 내리시네

문간 옆 꽃단풍 채 지지도 않아 저 홀로 붉은데
지상(地上)에 속속 당도하는 저 흰 버선발의
고요한 방문(訪問)

정결하고 아름다워라

오늘은 나도, 내 사는 일에만 바빠
아무런 기미(機微)도 눈치 챌 수 없었네.

《18》
첫눈 오는 날  /  양전형

초등학교 운동장
여자아이 여럿
발을 동동거리며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내고 있다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하얀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 다닌다

세상이 하얘지도록
아이들이 집에 갈 생각이 없으니
나비들도 멈추지 못한다

그만하면
나비가 없어질 만도 한데
쉬지 않고 나오는 아이들의 하얀 입김
너희들은 참,
나비가 많은 아이들이로구나

《19》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오광수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온 세상이 우리 둘만의 세계가 되어

나의 소중한 고백이
하얀 입김에 예쁘게 싸여

분홍빛 너의 가슴에선
감동의 물결이 되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맑은 두 손 속에
소망하던 그날의

모습으로 내 모습이 자리하면
우리들의 약속은 소복소복 쌓이는 사랑일 거야

《20》
첫눈 오던 날  / 용혜원

첫눈 오던 날 새벽에
가장 먼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것처럼
그대에게 처음 사랑이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날들이
그대와 살아가며
사랑을 나눌 날들이기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늘 간절한 마음으로
그대를 위하여
두 손을 모읍니다

그대를 축복하여 주시기를
늘 아쉬운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그대에게 은총이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21》
첫눈  /  이문구

오늘 온 눈은
첫눈
반가운 함박눈

마당에 두 줄
표주박 무늬
친구 부르러 나간
아기 발자국

우물가에 흐트러진
은행잎 무늬
뜨물 마시고 들어간
오리 발자국

《22》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  /  이문조

첫눈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
처음만큼 설레는 것도 없다

눈 내리는 고요한 이 밤
첫눈 올 때 우리 만나자는
희미한 옛날의 약속 떠올리고

첫사랑의 그녀를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보고

첫 키스의 달콤하고 황홀한 솜사탕을
다시 핥아 본다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는 그 약속
아직도 유효한지
달려가고만 싶은 소년의 마음
설레는 첫사랑의 추억.

《23》
첫눈 내리는 날  /  이재봉

낙원동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밥알 같은 흰 눈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흰 눈 같은 밥알이 허기 속으로 사라진다.
아가, 배고프자. 사르르 추억의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고봉밥 한 상 가득 내오신다.

《24》
첫눈  /  이점숙

동짓달 초겨울 하얀 눈이 내린다
파도가 부서지는 해운대 바닷가
우뚝 솟아오른 빌딩 사이로
노란 은행잎 융단을 깔고
하얀 바람 타고 눈이 내린다

강원도 산골에 눈이 내렸나!
군인 간 아들 첫 휴가 소식 올까
긴 밤 마음 졸여 기다렸더니
첫 눈이 내린다 천리 먼 길을
한 달음 달려서 가슴으로 내린다

어이 알았을까! 어이 알았을까!
자식 그리는 어미의 마음
한겨울 서리 보다 더 시린 걸

귀한 손님처럼 달콤한 연인처럼
설레임 한껏 안고 눈이 내린다
그리운 마음에 별빛이 부서지고
촉촉이 젖은 사랑 가슴 에인다.

《25》
첫눈  /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26》
첫눈   /  이해인

함박눈 내리는 오늘
눈길을 걸어
나의 첫사랑이신 당신께
첫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언 손 비비며
가끔은 미끄러지며
힘들어도
기쁘게 가겠습니다

하늘만 보아도
배고프지 않은
당신의 눈사람으로
눈을 맞으며 가겠습니다

《27》
첫눈 맞으며   /  임문석

시린 기온이 번진 하늘은 뿌옇다
흰나비 무리지어 날듯 하염없자
마음속엔 하트인 양 분홍빛으로 설렌다

유년시절의 맥박 고스란히 뛰놀고
향수의 세월 희미하게 살아나
여 짓 잊고 있었던 추억 재현해 주는구려!

나는 벙거지 帽(모)에 누빈 무명바지
넌 귀 가리개에 검정 치마저고리
신은 흑 고무신 코빼기만 서로 달랐었지,

우린 무릎 차는 눈길을 마냥 걸었다.
무심한 눈보라를 한껏 맞으며 도
추위조차 모른 채 다닌 동심의 등하굣길

《28》
첫눈  /  장석주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이루어졌거든
뒤뜰 오동나무에 목매고 죽어버려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첫눈이 온다 그대
첫사랑이 실패했거든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눈길을
맨발로 걸어가라
맨발로
그대를 버린 애인의 집까지 가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끝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첫눈이 온다 그대
쓰던 편지마저 다 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들에 나가라

온몸 얼어 저 첫눈이 빈 들에서
그대가 버린 사랑의 이름으로
울어 보아라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한
그대의 순결한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라

《29》
첫눈  /  정연정

첫눈이 오면
봉숭아물들인 사람
소원 빌고

수능시험 본
언니 오빠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첫눈이 오면
첫사랑 만나서
데이트하고
봉숭아물들인 사람
수능시험보고
기분이 상쾌해진 오빠 언니
첫사랑 만난 사람
모두 축하해요.

《30》
눈 내리는 날  /  정진규

눈 내리는 날, 거기가 어디였지?
밖에서 그에게 전화를 거네
이 한마디만으로도
우리들의 대화는 통하네

길이 열리네 나는 알면서도
다시 묻네 거기가 어디였지?

내 털실 목도리를 뜨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만 코가 빠졌다고 다시
풀어야겠다고 그는 말하고

나는 너무 아름답고 깊어서
다시 감탄사를 쓰고 싶었다고 그래서였다고
그걸로 털실 코를 다시 꿰어보라고 말하네

눈 내리는 날, 운악산 조공마을 외길,
시오리 숲길 거길 지금 가보자고
지금 떠나자고 나는 다시 말하네

들키고 싶지 않은 길,
누가 먼저 발자국을 내면
어쩌겠느냐고 나는 말하네
그는 또 코가 빠졌다고

다시 풀어야겠다고 말하고
나는 당신을 위해 사둔 속옷과 향수를
오늘 드리겠다고 그
걸로 코를 다시 꿰어보라고 말하네
눈 내리는 날, 거기가 어디였지?
밖에서 그에게 전화를

《31》

첫눈  /  정호승

첫눈이 내렸다
퇴근길에 도시락 가방을 들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렸다
눈송이들은 저마다 기차가 되어 남쪽으로 떠나가고
나는 아무데도 떠날 데가 없어 나의 기차에서 내려 길을 걸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커피 전문점에 들러 커피를 들고 담배를 피웠으나 배가 고팠다
삶 전문점에 들러 生生라면을 사먹고 전화를 걸었으나 배가 고팠다
삶의 형식에는 기어이 참여하지 않아야 옳았던 것일까
나는 아직 그 누구의 발 한번 씻어주지 못하고
세상을 기댈 어깨 한번 되어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워
삶 전문점 창가에 앉아 눈 내리는 거리를 바라본다
청포 장사하던 어머니가 치맛단을 끌고 황급히 지나간다
누가 죽은 춘란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선다
멀리 첫눈을 뒤집어쓰고 바다에 빠지는 나의 기차가 보인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미움이 끝난 뒤에도 다시 나를 미워한 것은 잘못이었다
눈은 그쳤다가 눈물 버섯처럼 또 내리고
나는 또다시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린다

《32》
첫눈 오는 날  /  정호승

남한테 비굴하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첫눈이 내릴 때
첫눈한테는 무릎을 꿇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첫눈 오는 날
길 잃어 쓰러진 강아지를 품에 안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33》
첫눈  /  주응규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아득한 곳에서 하얗게 새하얗게
소녀가 부르는 것 같아
추억 속을 걷고 있네요

언젠가 그 언젠가
나를 위해 철없이 흘리던
소녀의 애달픈 눈물이
눈송이로 흩날리네요

못 잊어 못 잊어서
가슴 깊이 담아 두어야 했던
사랑의 밀어가
눈꽃을 피우네요

옛날 그 옛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메마른 앙가슴에
꽃 물을 들이네요.

《34》
누군가에 첫눈  /  주일례

첫눈이 오면 창문을 엽니다.
그대가 어디선가 올 것 같습니다.
첫눈처럼 올 것 같고
첫눈처럼 갈 것 같은,
그대가 바라보고 서 있는 곳이 나라고 믿고 싶습니다.
아니, 나여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리움이 말을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기억에 남아 있는 애기들을 꺼내고
오랫동안 창가에 앉아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은 사람
따뜻한 풍경이 되고
첫눈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격하고 아름다운 일인가요.
그리고 보면 세상에는 헛된 인연은 없습니다.
결코 만나지 말아야될 인연도 없습니다.
단지 극복하지 못한 인연만 존재할 뿐이지요,
그래서 슬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통스런 사람들도 너무도 많습니다.
그 시간도 지나가지요.
마음이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합니다.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그냥 스쳐간 사람은 빨리 잊습니다.
허나 마음에 단단한 아픔 하나로 박혀 있는 사람은 다르지요.
시시때때로 생각이 나고 보고 싶어 미치지요.
그러다 또 잊어질 사람입니다.
까마득히 잊었다가 어느 날 문득
첫눈처럼 설레게 올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 겨울에 뜨겁게 산 흔적 하나 생각하지요.
첫눈이 그렇습니다.
지금 내 앞에 우는 당신이 그렇습니다.

《35》
첫눈  /  홍해리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부는지
그 소리가락 따라
앞 뒷산이 무너지고
푸른빛 하늘까지 흔들면서
처음으로 처녀를 처리하고 있느니
캄캄한 목소리에 눌린 자들아
민주주의 같은 처녀의 하얀 눈물
그 설레이는 꽃이파리들이 모여
뼛속까지 하얀 꽃이 피었다
울음소리도 다 잠든
제일 곱고 고운 꽃밭 한가운데
텅 비어 있는 자리의 사내들아
가슴속 헐고 병든 마음 다 버리고
눈뜨고 눈먼 자들아
눈썹 위에 풀풀풀 내리는 꽃비 속에
젖빛 하늘 한 자락을 차게 안아라
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
살아 생전의 모든 죄란 죄
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
머릿결 곱게 날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
사랑이여 사랑이여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
온 세상을 무너뜨려서
거대한 빛
그 無地한 손으로
언뜻
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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