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시 모음

1.봄 /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2.봄 / 김광섭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인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람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갓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3.봄 / 김용택


바람 없는 날
저문 산머리에서 산그늘 속을 날아오는
꽃잎을 보았네
최고 고운 몸짓으로
물에 닿으며
물 깊이 눈감는 사랑을 보았네

아아, 나는 인자 눈감고도 가는
환한 물이네

4.봄 / 오탁번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5.봄눈 /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6.봄비 /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에
밤새껏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줄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7.봄비 /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8.봄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되어 짙어 오겠지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 지저귀고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속
수줍은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이 비 그치면
님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은 내 마음
땅에서 또 아지랭이 되어 타오르 겠지

9.봄비 1 -추억의 봄비. / 강해산


저기 비가 오네요.
기나긴 외로움 속에서
지쳐버린 마음에
아련한 추억을 적셔 주네요.

한동안 잊었던 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이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처럼
귓전에 맴돌아가고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빗물 되어 흘러내리네요.

겨우내 추위에 굳어버린
추억에서 사라진 내가
세상에는 없는 당신을 잊을까봐
해마다 사월이 오면
당신은 봄비 되어
내 마음 속에 내리네요.

10.봄비 오던 날 / 최옥


혼잣말을 합니다
그대가 나를 조금만 자유롭게
하기를 그렇게 하기를...
가두었던 말(言)들을
빗물속에 흘려 보냅니다

구름처럼
먼 데 둘 수밖에 없는 사랑
수평선처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대

한때 당신을 향했던
불같은 몸살도
이제는 편안해진 그리움이길

재울 것은 재우고
깨울 것은 깨우며
봄비속에 연신 혼잣말을 합니다
가두었던 말(言)들을 풀어줍니다

11.봄은 간다 / 김 억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이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비낀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12.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3.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가 뛰놀아라.

14.다시금 봄날에 / 김남조


가랑잎 나의 영혼아

만국(晩菊) 한 송이
물오리처럼 목이 시린 조락의 뜰에
너 함께나도 볼이 젖는다

그 전날
그 푸른 산바람
해설픈 초원에 떠놀던
여른여른 눈여린 고운 불수레 하며
멀리 메아리져서 돌아들 오던
그리운 노래 그리운 이름

펴며 겹치며 드높이 손짓하는
송이 송이 탐스런 떼구름들
네가 그들을
얼마나 가슴 바쳐 사랑했음인가를
내가 안다

지금은 땅에 떨어져
매운 돌부리에 찢기우는 너여
가랑비 보슬보슬 내림과 같고
소물소물 살눈썹이 웃음과 같은
네 달가운 모든것
오직

그들 호사스런 계절의
풍요한 아름다움 앞에 바친 푸른 찬가
헌신이던걸 내가 안다

그러나 지금은 가야지
지금은 눈감고 고이 가야지
지열이 돌아오는 어느 봄날에
다시금 어린아이처럼
손 흔들며 깨어나리라

찬서리 소리도 없이 내리는 뜰에
핏줄기 얼음 어는
가랑잎 내 헐벗은 영혼아

15.봄 편지 / 이효녕


얼었던 땅위에 아지랑이
눈 속에 잠자던 하얀 꿈을 부르니
문을 열면 앞산이 달려와
내 가슴 어느 듯 흔든다

부드러운 사랑만큼 순한 미풍
눈을 뜨고 눈을 감고
내게 걸머진 삶의 무게
남쪽 향해 허리 굽힌다

잃어버린 길을 찾아와 기웃거리며
기도로 머물어
다시 햇볕을 소유한 하늘 몇 평
봄날은 그대 가슴에 가까이 있다

16.초봄의 귀밑머리 / 김지향


방금 머리 내민 봄
햇빛을 만져본다
빛꼬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풀밭에 뒹군다

햇빛의 발이 콩.콩,콩,
자죽을 찍는 풀잎마다
연두빛 얼굴이 된다

봄의 빛은 발이 간지럽다

[손으로 움켜잡으면
몸이 가루되어 먼지처럼 날리지만]
햇빛이 빗금을 그은 곳마다
아지랑이가 죽어버린다
아지랑이 뒤에 머리를 숨긴
풀이 쏘옥. 쏙 혀를 내민다

보들한 바람에
파란 혀를 날름대는 풀
초봄의 귀밑머리가 내 뺨에서
파르랗게 나팔댄다.

17.해마다 봄이되면 / 조병화


해마다 봄이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18.봄날,사랑의 기도 / 안도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제대로 맞지 못했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사랑해요,라는 말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보다도 작은 것도 좋다고,
많은 것보다도 적은 것도 좋다고,
높은 것보다도 낮은 것도 좋다고,
빠른 것보다도 느린 것도 좋다고,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소서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 오르게 하소서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19.이 봄의 축제 / 김종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풀잎은 일어서고
꽃들은 하늘에다 오색 종이를 날린다
일어선 풀잎 하나만 보아도
눈물나는 이 봄에
황사는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일어서라일어서라일어서라고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 하찮은 들꽃들마저 일어서서
하늘에다 오색 등불을 매단다
嚴冬에 엎드려 숨죽이던 것들아
척박한 황지에 뿌리내린 쑥맥들아
누가 오늘의 이 축제를 숨어서 구경하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나도 풀잎으로 일어서서
황사 흩날리는 하늘에다 새를 날린다
아아, 이름을 짓지 않은 한 마리의 새를!

20.봄꽃이 필 때 / 홍수희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 일입니다

자연도
삶도 순환하는 것

이 봄,
마른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듯이

돌아다보면
내 눈물에 이미
봄꽃은 피어나고
있었던 것을

어이 그리
투정만 부렸는지요
시샘만 부렸는지요

네가 오면 오는 그대로
네가 가면 가는 그대로
웃고 말 걸 그랬습니다

21.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결움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22.청매화, 봄빛 / 이은봉


청매화 푸르른 꽃잎들, 밭두둑마다 푸시시 웃으며 뛰놀고 있다
킁킁킁, 꽃향기 벌떼처럼 코끝 싸하게 쏘아대는 마을......,
강언덕 저쪽 산비탈에선 일찍 핀 꽃잎들, 아랫도리를 꼬으며 이울고 있다
잠시 밭두둑에 서서, 옷매무새 고치며 슬픔 견디고 있는 여인......,
살며시 꺼내든 손거울 속으로, 또 하루치의 봄빛, 멈칫멈칫 스며들고 있다.

23.봄이 올 때까지 / 양선희


엄마,나 좀 밟아주세요.
더 깊은 땅내가 필요해요.
곧 내가 동사하겠어요.
이제 봄이래요.
진짜 봄이 오면
내 몸의 일부가 피리가 되는
내 몸 어딘가에 새 둥지를 품는
들쥐도 새끼 치는
꿈을 이룰 거예요.
진짜 봄이 올 때까지
제발 엄마,나 좀 꼭꼭 밟아주세요.

24.꿈같이 오실 봄 / 오광수


그대!
꿈으로 오시렵니까?

백마가 끄는 노란 마차 타고
파란 하늘 저편에서
나풀 나풀 날아오듯 오시렵니까?

아지랑이 춤사위에
모두가 한껏 흥이 나면
이산 저 산 진달래꽃
발그스레한 볼 쓰다듬으며
그렇게 오시렵니까?

아!
지금 어렴풋이 들리는 저 분주함은
그대가 오실 저 길이
땅이 열리고
바람의 색깔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서 오세요.
하얀 계절의 순백함을 배워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메마름을 버리고
촉촉이 젖은 가슴으로
그대를 맞이합니다.

그대!
오늘밤 꿈같이 오시렵니까?

25.봄이 오는 소리 / 남낙현


얼음장 밑에서 졸졸졸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두꺼운 땅껍질을 뚫고 나오는
아주 작은 힘,,,
어떠한 힘으로도 막지 못한다.

작은 새싹 하나
우주를 뚫고
세상 구경을 나오려고 기지개를 켠다.

벌써 양지바른 언덕에
뾰족 나온 푸른 싹들
새생명의 탄생 알린다.

26.봄 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27.봄볕 속의 길 / 조태일


구겨진 마음들을
어서 어서 펴서
아른아른한 아지랑이
부드럽게 춤추며
봄볕 속의 길로 나서자.

착하고 격렬했던 뜻들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너와 나의 길
가릴 것 없이
우리들의 길로 한데 합쳐서

손에 손에 자식들을 이끌어
한형제로
앞서가며 뒤서가며
마음을 활짝 열어
깨어나는 생명들의 소리를 듣자.

파고다공원에 내리는 봄볕도
수유리 4.19 기념탑에 내리는 봄볕도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나니,
춤을 추나니.

28.이른 봄 저녁 무렵 / 정희성


이른봄 저녁 무렵
새로 나온 이시영 시집을 읽으며
그 행간에 자리잡은
적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다가
문득 놀라 창문 열고 내다보니
언제 지었을까
아직 새 잎 돋지 않은 가문비나무 우듬지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까치 둥우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빛 고요
옳거니!
세상의 소란이 나를 눈감게 하고
저 고요가 나를 눈뜨게 하느니

29.지상의 봄 / 강인한


별이 아름다운 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이 지상에서

보도 블록 깨어진 틈새로
어린 쑥잎이 돋아나고
언덕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허물어진 집터에
밤이 내리면
집 없이 떠도는 자의 슬픔이
이슬로 빛나는 거기

고층 건물의 음흉한 꿈을 안고
거대한 굴삭기 한 대
짐승처럼 잠들어 있어도

별이 아름다운 건
아직 피어야 할 꽃이 있기 때문이다.

30.때때로 봄은 / 문정희


때때로 봄은
으스스한 오한을 이끌고
얇은 외투 깃을 세우고 온다.

무지한 희망 때문에
유치한 소문들을
사방에다 울긋불긋 터트려 놓고
풀잎마다 초록 화살을 쏘아 놓는다.

때때로 봄은
인생도 모르는 젊은 남자가
연애를 하자고 조를 때처럼 안쓰러운 데가 있다.

31.봄을 기다리며 / 양현근


스물스물 쓸쓸한 감성이
담벼락 한 귀퉁이
남루한 전단지에 갇혀있습니다
스물스물 젖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길을 거두어도
오래 잊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눅눅한 빛깔입니다
울어 버리든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불러보아도
따뜻한 웃음은 조립될 수 없습니다
허술한 마음의 이음새마다
푸른 별들은 초저녁부터 못을 박아대고
오늘 밤은
먼 곳에서 불쑥 달려올지도 모를
그리운 날들을 위하여
잎넓은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밝은 꽃등 하나
그렇게 밤새 밝혀두렵니다
세상은 그렇게 이유없이 밝아올 겁니다.


32.봄이 오고 있다 /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3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눈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좀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34.무제치늪의 봄 / 정일근


마음을 얻어야 손이 순응하는 법이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위해 봄은 오고
바라볼 줄 아는 손을 위해 꽃은 핀다
물이 만든 물의 나라 무제치(舞祭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물이니
물은 다투지 않고 평등하게 스며들고
겸허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꽃을 기다려 삼월 봄이 오고
봄을 기다려 사월 꽃이 피는
그 착한 물들이 빚어내는 빛나는 봄
오랜 마음의 친구가 내미는 손처럼
그 따뜻한 손 꽉 잡아보고 싶은
무제치늪의 봄

35.새봄.3 / 김지하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 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36.봄 기도 / 시. 강우식


하찮은 풀잎이라도 새싹들은
지뢰 밟듯 조심스럽다
담장 포도나무들은
차 스푼보다 작은 송이 송이 속에
좁쌀알만한 꿈들을 달고
바람 속에, 햇볕 속에 녹아 있고
사과나무는 하얗게 꽃 피어
벌들의 날개 짓에도 얼굴 붉혀라.

꿈 속에 꿈꾸던 내 사람아
이제는 혼수의, 인사불성의 긴 잠에서
죽이는 꽃들의 빛깔로, 향기로, 하늘거림으로
아픈 데서부터 깨어나
한 치 밖에 있는 봄 구경을 제발 좀 하여라.
단 하루만이라도 봄빛으로 눈 떠 보아라.
하늘빛이 시리도록 맑고 흰 눈동자를......
펑, 펑, 펑 꽃 터지듯 떠 보아라

37.봄날은 간다 / 시. 이승훈


낯선 도시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당신과 함께 봄날은 간다 달이 뜬
새벽 네시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
으며 봄날은 간다 맥주를 마시며 봄
날은 간다 서울은 머얼다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달이 뜬 거
리로 간다 술에 취한 봄날은 간다
안개도 가고 왕십리도 가고 노래방
도 간다 서울은 머얼다 당신은 가깝
다 내 목에 두른 마후라도 간다 기
차는 가지 않는다 나도 가지 않는다
봄날은 가고 당신도 가지 않는다 연
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
이 울던 봄날은 간다 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 글쟁이, 대학교수, 만성
떠돌이, 봄날은 간다 머리를 염색한
우울한 이론가, 봄날은 간다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더라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38.봄의 메시지 / 유자효


설레고 싶다
달뜨고 싶다
신경을 올올이 곤두세우고 싶다
이국의 나무 냄새 같은 것
이방의 언어 같은 것
바다의 바람을 돛폭 가득히 안은
범선의 출항 같은 것
낯선 것은 언제나 신선하고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영혼은 때를 벗는다
모험을 도전하는 젊음에 의해
역사는 절망을 이겨 왔었고
세계는 생명의 자양을 얻었다
서투르고 싶다
어리고 싶다
순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때
금강석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싶다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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